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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사랑은 선택, 그리고 신념,<참을 수 없는 사랑>

<참을 수 없는 사랑>을 본 아가씨, 연애사를 추억하다 용기있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고 했던가. 스물여섯살 이후로 결혼을 통한 인생역전을 지치지 않고 꿈꿔왔던 나에게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기없음으로 인해서 좌절한 아픈 사연이 있다. 내 인생의 주접 레퍼토리가 대체로 그렇듯 이번 사단도 친구이자 동료인 모양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취재를 다녀온 그녀는 눈알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야기를 꺼냈다. “드디어 완벽한 너의 짝을 찾았어.” 사연인즉 그가 만난 한 취재원이 수백억대의 재산가인 독신남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이도 많은데다 건강이 안 좋다는 통상적인 이상형 조건뿐 아니라, 가족과 절연하다시피해서 사후 재산분쟁이 일어날 확률이 지극히 희박하다, 성격이 너무 괴팍해서 주변에 다른 여자가 꼬일 가능성도 거의 없다 등등 플러스 옵션 정보를 친구는 선물처럼 내놓았다. 일이 성사되면 지분을 몇 대 몇으로 나누자는 둥 우리는 건설적인 대화를 한참 동안 나누었다. 그러나 친구의 집요한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인생역전의 기회를 놓고야 말았다. 치명적으로 나에게는 용기가, 로맨스를 포기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은 로맨스에 관한 영화이자, 용기에 관한 영화이고, 또한 신념에 관한 영화이며, 선택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사랑의 쟁취에 필요한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영화인 것이다. 풀어 말하자면 순서는 이렇다. 먼저 선택을 해야 한다. 냉정이냐, 열정이냐, 이성이냐, 감성이냐 하는 어떤 신념, 어떤 가치관을. 뭐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영화에서 마릴린은 냉혹한 이성주의자다. “굉장히 돈 많고, 아무 여자한테나 껄떡대고 만날 바람 피우다가 들키는 호색한”으로 자신의 이상형을 선택한 그녀는 한번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을 ‘용기’있게 밀어붙인다. 그것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위장결혼을 위한 위장결혼극까지 꾸며가면서 말이다. 선택은 정반대에서 하지만 신념과 용기와 추진력에서는 마일즈도 마릴린에 못지않은 인물이다. 마릴린이 ‘냉정’이라면 마일즈는 ‘열정’덩어리다. 결혼서약서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마릴린에게 노골적으로 껄떡대는 건 애교 수준이다. 마릴린의 유혹에 풍덩 빠진 그가 셔츠자락도 정리하지 못한 채 가정변호사협회(?) 세미나에 가서 “사랑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좋은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라. 그러나 압권은 바로 그 다음 장면. 모든 게 마릴린의 사기였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감동적인 연설로 인해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살인청부업자에게 마릴린을 죽이라고 전화한다. 그랬다가는 마릴린이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게 된 사실을 알자 또 미친 듯이 달려가서 살인을 막고자 한다. 이 모든 것이 마일즈로서는 진심어린 열정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정말 사랑했다가, 정말 증오했다가, 다시 정말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는 엄청난 열정의 소유자가 아닌가. ‘냉정과 열정 사이’는 바로 마릴린과 마일즈 두 사람의 사이를 묘사하기에 적당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성향은 정반대이지만 신념과 용기만은 자웅을 겨루는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역시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비자발적 독신의 괴로움을 표할 때마다- 이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관계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지도 오래 됐지만-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은 세상에 없어.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먼저 정하는 게 필요해. ” 마릴린(냉정)이거나 마일즈(열정)이거나, 로맨스이거나, 현실이거나 이런 걸 먼저 선택하고 그 신념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연애질을 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로맨스가 필요한 시점에 항상 현실을 들이대고, 현실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 시점에 대책없는 로맨스에 허우적거리는 삽질을 10년 가까이 성실한 태도로 반복해왔다. 반성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뒤돌아보거나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잘생기고, 지적이고, 유머감각 있고, 돈 많은 조지 클루니 같은 사람을… 흠….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

‘대장금 신드롬’ 이영애 인터뷰

드라마 복귀 3년 만에 안방 시청률 평정, "인기 들뜨지 않게 가다듬고 가라앉혀야" "레디...투 쓰리 포...큐!...또 비행기 소리야...스톱!" "오늘 비행기 소리 때문에 30여분간을 헤매고 있어요." 평균 시청률 45%대를 유지하며 5주째 인기순위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MBC 특별기획 드라마 <대장금>(大長今)의 촬영이 진행중인 경기도 의정부 MBC 문화동산 야외세트장에서 이병훈 PD가 어깨를 어쓱거리며 허탈해 한다. 그 앞에는 `대장금 신드롬'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장금' 이영애(32)씨가 연분홍 저고리와 쑥색 치마를 차려 입고 촬영 훼방꾼인 비행기 소리를 원망하는 듯 한상궁 양미경씨 옆에 다소곳이 서 가끔 먼 하늘로 눈길을 보낸다. 촬영이 진행중인 야외세트장 한옥 정원에는 따사로운 11월중순의 늦가을 햇살이 며칠째 짓궂은 비를 뿌리던 구름을 물리치고 화사하게 내려앉아 카메라 렌즈를 마주하고 있는 장금이의 치마 저고리에 윤기를 보탠다. 한때 브르주아 커리어우먼이 누리는 행복의 극치를 과시해 온 그 `CF 여왕'은 지금 거품이 가득한 최고급 욕조에 누워 홀짝이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비린내 나는 해물과 마늘을 집어든 수라간 나인으로 신분을 낮췄다. 아침에 눈떠 웅진코웨이 정수기 물을 마시고 엘지카드로 쇼핑하고 헬스클럽에 들러 러닝머신에서 달리기 한 뒤 저녁파티에 참석하고 귀가후 인터넷망으로 영어공부하던 광고 속의 그는 <대장금>에서 천민으로 신분이 급전직하했음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3년여 휴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브라운관에 컴백하자마자 안방인기를 독차지한 이영애씨와 인터뷰는 제작진이 세트장 상공에 비행기가 뜨면 아예 대사없는 장면을 먼저 찍는 아이디어까지 동원해 예정된 촬영분량을 다 채우고 난 뒤에야 어렵게 이뤄졌다. 한옥 세트장 마루에 걸터앉아 진행된 인터뷰는 예상대로 심층적인 문답을 주고 받기에 턱없이 시간이 모자라 아쉬움을 남겼다. 늦가을 찬기운 속에 연일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촬영이 이어지는 강행군이 계속되고 있어 `시간을 좀 더 내달라'고 부탁하기 어려웠다. 90년대 초 화장품 모델로 데뷔, `산소같은 여자'로 이미지를 굳힌 이래 웬만한 빅모델의 등장에도 좀체 흔들리지 않고 `CF 퀸'의 아성을 든든하게 구축했으나 드라마에서는 그리 성가를 떨치지 못했던 그다. 지난 2000년 충무로 흥행기록을 경신하며 승승장구한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JSA >에서도 주연 송강호의 그늘에 가려 여우주연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선지 2000년 SBS 드라마 `불꽃' 이후 3년만에 `산소같은' 단아한 외모의 천민으로 다시 안방에 모습을 드러낸 이영애씨가 시청률 경쟁을 평정하는 모습은 한상궁 양미경씨의 표현대로 `열매를 맺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대장금>은 <허준> <상도>의 연출자인 이병훈 PD의 대하사극으로 조선 중종시대 궁중요리사로 입궐했다가 관비로 전락하는 우여곡절끝에 어의(御醫) 자리에 오른 천민 여성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대장금>의 인기를 미리 예상했나요. ▲처음부터 시청자들의 반응이 이 정도로 좋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이제 겨우 3분의 1 정도 진행됐으니 시작단계에 불과하거든요. 지금 반응이 너무 좋아 당분간 좀 추스르고 나서 다시 시작해야 되겠다는 마음뿐이에요. 요즘 심경은 어때요. ▲풍선처럼 하늘 위로 올라갈까봐 이를 추스를 필요가 있다고 봐요. 출연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물론 좋긴 하죠. 그러나 연기자 입장에서는 좀 가다듬고 들뜨지 않도록 가라 앉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드라마의 전개가 온통 `장금'이 중심으로 진행돼 부담스럽겠어요. ▲정말 큰 부담이에요. 그렇지만 한상궁 역의 양미경 선배님을 비롯해 주변 분들이 너무 열심히 해줘서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연기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앞으로 출연진 모두와 호흡을 맞춰가면서 연기를 해 나갈 겁니다. 인기 비결을 뭐라고 보세요. ▲대충 짐작하시겠지만 드라마의 소재가 워낙 다양해 기존 드라마의 격을 깬 것 아닐까요. 그리고 출연진 모두 조화가 잘 되는 것 같아요. `장금'이 배역이 막힘이 없어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당초 장금의 인물설정은 `허준' 처럼 완벽한 성인이 아니라 좀 어설프고 모자라긴 하지만 자기 일에 매진하는 그런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 목표를 성취하는 인물이죠. 그래서 저도 너무 완벽한 모습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어린 장금이는 너무 똑똑하던데 성인이 된 장금이는 왜 푼수같으냐고 얘기들 하시는데 그런 점에서 긍정적으로 봐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고 미리 설정해 놓은 것은 없고 대본에 나오는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작정입니다. 외국에서도 <대장금>을 취재하러 온다면서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멜로나 트렌디 드라마가 주류를 이뤘는데 다행히 이번에 우리나라의 문화적 코드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시너지 효과도 기대됩니다. 집에서 <대장금>을 시청해 보고 느낀 소감은. ▲연기하는 연기자 입장을 떠나서 시청자의 한사람으로 봐도 <대장금>이 너무 좋아요. 제 스스로 장금을 너무 좋아하는 `애장금'(愛長今)이라고나 할까요.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세요.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캐릭터를 구축해 시청자들께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 휴식을 거친 뒤 다시 시작하는 처지에서 보면 아주 큰 행운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번 드라마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모든 분들이 좋아 하시는 것 같아요. 평소 모두가 둘러앉아 화기애애하게 시청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에 출연해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 바람을 이룬 것 같아요. 브라운관과 스크린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적성에 맞다고 보세요. ▲둘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는 영화대로 좋고, 드라마는 많은 분들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고 봐요. 그동안 연기생활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고 느끼세요.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면 아무래도 맡은 캐릭터를 많이 따라가거든요. 이번에 드라마 `대장금'에 출연하면서 성격이 많이 밝아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드라마 촬영 없을 때는 주로 뭐 하세요. ▲요즘은 쉴때가 거의 없어요. 쉴때는 촬영에 지쳐 피곤하니 잠을 많이 자요. 물론 드라마 대본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요. 체력관리도 해야 하니까 많이 먹기도 해요. 그동안 각종 CF에 소개된 `이영애의 하루'와 실제 이영애씨의 하루는 어느정도 간극이 있나요. ▲전혀 다르죠. CF에 나오는 삶과 똑같다면 말이나 되겠어요. 옆에 앉아 있던 양미경씨는 이영애씨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영애는 보석이에요" "너무 이쁘고 맑고 투명하고 따뜻해요" "향기가 난다고 할까요"라고 추켜세웠다. 질문과 대답이 여기까지 이어지고 난 뒤 인터뷰는 다음 촬영일정 때문에 더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리 준비해간 몇가지 질문에 대해서는 이영애씨의 답변을 듣지 못했다. 행여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가 입을 굳게 다물고 선한 눈망울만 굴리더라도 이런 질문을 꼭 던져볼 작정이다. "얼굴에 손댄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외모 중 가장 자신있는 곳과 제일 자신없는 곳은 어디예요?", "그 나이면 결혼적령기를 넘겼다고 주위의 성화가 대단할 법도 한데요. 결혼은 언제쯤 할 계획이에요? 어떤 배필을 만나고 싶으세요?", "`CF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돈은 얼마나 벌었어요?"

<올드보이>의 최민식, “죽어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올드 보이’ 열연 최민식 〈올드 보이〉의 극중 초반 오대수가 술 취해 파출소에서 ‘깽판’을 치는 장면에서 그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면서 살자고 내 이름이 오대수인데 수습이 안 된다”고 자조 어린 농담을 한다. 술 좋아하고 떠들기 좋아하던 평범한 샐러리맨 오대수는 오늘 하루가 아니라 15년을 수습하지 못하는 극단의 상황에서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로 변해간다. 배우 최민식(41)은 ‘소시민’과 ‘괴물’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두 시간 동안 유유히 헤엄쳐 나간다. 거기에는 대책 없고 주책없는 ‘이강재’(파이란)와 광기 번득이는 ‘장승업’(취화선), 쭈뼛거리고 흔들리는 ‘서민기’(해피엔드)와 싸늘하고 가차없는 ‘박무영’(쉬리)이 함께 숨쉰다. 이처럼 〈올드 보이〉에서 최민식은 자신의 보여온 연기의 지류들을 하나의 정점으로 끌어모았다. 그의 연기를 묘사하는 데 ‘신기’라는 표현조차 진부해져 버리는 최씨에게 뭐가 도전일까 싶지만 최씨는 오대수가 “새로운 연기 스타일의 도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했던 역들은 어딘가는 존재할 법한 현실의 인물들이었지만 오대수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인물이다. ‘했다, 한다’로 끝나는 문어체적인 대사들도 관성적인 리얼리즘 연기로는 소화할 수 없는 것이었고.” 〈파이란〉을 찍기 전, 어느날부터 머리를 안 감고 부스스해지면서 늘어진 운동복 바람으로 건들거리며 다니더니 ‘강재’가 되어 촬영 현장에 나타나더라는 식의 준비가 애초에 불가능했던 오대수 역에 최씨는 이전과 다른 방식, ‘몰입’이 아닌 ‘거리 두기’라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전까지 배역에 다가가는 과정이 나 자신을 들볶고 괴롭히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관찰하면서 정리해나가고 몰입하기보다는 객관화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질척거리고 무대책이 대책이었던 인간 오대수는 이런 과정을 통해 “통나무처럼 건조하고 툭 치면 껍데기가 뚝뚝 떨어져나갈 것 같은 인물”로 서서히 변신해나갔다. 영화를 찍기 전 박찬욱 감독은 최씨에게 오대수를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찰스 브론슨 같은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복수를 꿈꾼다는 면에서 오대수는 분명 영웅적인 어떤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씨가 만들어낸 오대수는 ‘나약한 영웅’이다. 망치를 들고 일당백으로 싸우기도 하지만 정작 싸워야 할 적과는 상관없는 ‘헛발질’에 불과하고, 단호한 걸음으로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엘리베이터의 비밀번호를 몰라서 헤매다가 ‘뻘쭘’해진다. “나에게 비춰진 오대수는 영웅다운 면모는 찾아볼 수 없는 불쌍한 한 인간일 뿐이다. 그가 괴물로 변해가는 것조차 극단적인 궁지에 몰렸을 때 평범한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사실 우진 등 다른 등장인물도 나에게는 불쌍하고 측은한 사람들로 보인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인간, 정말 나쁜 놈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나.” 이처럼 ‘연민’은 최씨가 극중 배역을 만날 때 갖게 되는 가장 큰 감정이다. 서로 다른 인물임에도 오대수나 서민기나 이강재에게서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흘러나오는 건 ‘출구 없는 삶들’에 대한 최씨의 연민이 이들에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배우라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연기한 배역들에서 최민식의 인상과 최민식의 인성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사람에 대한 연민이 내가 세상을 보는 필터이고 또 내 연기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피해갈 수 없는 것 같다.” 최씨는 배우가 아닌 인간 최민식을 이야기하면서 ‘하자투성이’,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한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단순한 겸양으로만 들리지 않는 이 말이 세상에 대해 그가 느끼는 측은함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모두의 찬탄과 상찬 한가운데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내가 보잘것없는 놈 같다”는 느낌은 그래서 최민식 개인에게는 행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간단치 않은 배우 최민식을 만나는 관객에게는 축복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새 DVD]<바람난 가족S.E><고양이의 보은><살인의 추억>

<바람난 가족 S.E > 감독 임상수/출연 문소리, 황정민, 윤여정, 봉태규/화면비율 2.35:1/오디오 돌비 디지털 5.1 두장으로 만들어진 확장판 패키지. 기존 DVD의 프로덕션 노트를 업그레이드시킨 어드밴스드 프로덕션 노트에서 영화 제작단계부터 DVD 제작을 위한 스탭들의 특별 인터뷰, 메이킹 편집, 촬영 등을 담는 등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임상수 감독과 김우형 촬영감독, 영화평론가 황진미씨가 거침없이 털어놓는 ‘바람’과 ‘외도’에 대한 코멘터리. 문소리, 황정민, 봉태규, 백정림 등 배우들이 이야기하는 섹스 장면의 뒷이야기도 유쾌하다. 또 영화 촬영전과 촬영현장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엮은 ‘이미지북‘을 수록해 제작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명필름 <고양이의 보은> 감독 모리타 히로유키/애니메이션/화면비율 16:9/오디오 돌비 디지털 5.1 미야자키 하야오의 걸작들을 탄생시킨 일본의 대표적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가 2001년 내놓은 애니메이션. 고양이 왕국에 들어간 17살 소녀의 특별하고 따뜻한 체험을 담은 판타지로 지난 여름 국내 개봉됐다. 두장의 디스크로 두번째 장에는 다각도에서 은 그림 콘티와 니혼텔레비전에서 제작한 ‘고양이의 보은 탄생이야기’, 캐릭터와 시놉시스, 스탭 소개와 사진 모음 등을 담았다. 대원C&A홀딩스 <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출연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박뢰하/화면비율 1.85:1/오디오 dts-ES 6.1 & 돌비디지털 5.1 아직도 풀리지 않은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실화를 영화화해 비평과 흥행에서 큰 성과를 얻은 작품.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김상경 등 주연 배우들이 직접 작품을 해설하고, 김형구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이 제작과정을 설명한다. 실제 일어난 범죄사건을 바탕으로 한 만큼, 사건과, 현장, 자백, 진술, 현장보존 등 실제사건의 자료화면을 포함해 수사와 관련된 흥미미진진한 코멘터리를 들을 수 있다. 세심하게 찍은 메이킹 필름도 볼 거리. CJ엔터테인먼트

`거시기` 이문식의 산전수전 스토리 [1]

한때 이문식(37)은 ‘김밥족’을 경멸했다.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요, 차량으로 이동하며 김밥으로 끼니를 때워요, 징징대는 스타들을 대할 때마다 그는 “부귀영화를 얼마나 보겠다고 저러느냐”며 혀를 찼다. 그런데 요즘엔 그 말이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꼬들꼬들한 밥에, 뜨듯한 국물을 대한 지 그 또한 오래됐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2002)에서 ‘강동서 강력반 강 형사’를 몰라보고 “자신의 직업은 양아치”라고 깝치다가 강철중에게 죽어라 엊어맞는 산수 역으로 얼굴을 알린 지 1년. 이후 올해 개봉한 출연작만 <역전에 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나비> <오! 브라더스> <황산벌> 등 5편이다. <다모>와 <죽도록 사랑해> 등 드라마 2편도 겸한데다, 뒤이어 <범죄의 재구성>과 <어깨동무> 촬영차 전국을 누비는 탓에 좋든 싫든 그도 ‘김밥족’의 일원이 됐다. 잡혀 있던 영화 촬영일정이 며칠 밀린 탓에 잠시 짬을 낼 수 있었던 이문식을 만나 갈채받는 광대가 되기까지의 산전수전 스토리를 들었다. “이거 협찬받은 거예요. 압구정동에 있는 헤어숍에서. 근데 사람들은 변두리 미장원에서 한 줄 안다니까….” 배배 꼬인 머리를 들이대며 이문식(36)이 항변한다. 한데, 기분 나쁜 내색은 아니다. 바로 그 ‘촌스러움’이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안겨준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폼잡고 사진 찍을 때도 있죠. 근데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건 다 코믹한 거예요. 폼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잡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이 잡으니까 그런가?” “살림 많이 폈다”는 그이지만, 정작 차림새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어여, 내기 장기나 한판 두자”며 옆구리 쑤시는 동네 형님 분위기 또한 여전하다. 어찌보면 남파간첩 뒤통수 때렸다가 낭패 보는 4인조 강도의 일원(<간첩 리철진>)이나, 머리보다 몸이 앞서 나설 때마다 핀잔 듣는 조폭(<라이터를 켜라>)이나, 앙숙 쫒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양아치(<나비>)나, 농사짓다 전장에 끌려와서 흥분하고 칭얼대는 거시기(<황산벌>)나, 그동안 맡아온 어리숙한 캐릭터들이, 외려 그를 닮았다. 향료보다 청국장에, 샐러드보다 겉절이에 가까운 그를 말이다. 그러고보니 장진 감독도 언젠가 말한 적 있다. 이문식의 ‘시골스러움’을 언급하기 전에 그가 빚어낸 캐릭터의 ‘자연스러움’에 주목하라고. 하긴, 그의 연기에는 계산이 없다. “제 연기의 출발은 무식함이거든요. 느낀 대로 말하고, 본 대로 행해요”라는 그의 연기론은 서른여섯해를 살아오면서 몸에 밴 기질과 무관치 않다. 웃음의 보조개 속에 단단히 비애를 쑤셔넣는 재주를 그의 삶의 굴곡에서 찾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제 그의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그재그’ 인생길이 어떻게 연기라는 이정표를 만나 배우를 업으로 삼게 됐는지를 따라가보자. 산전수전 1 | 돈 벌려고 연극영화과 노크 “어렸을 때는 데모하는 대학생들 보면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했고, 학교 다닐 때도 뒤에서 노는 애들 보면 한심하다고 여겼어요. 재수생만 하더라도 모두 다 담배 피우는 불량 학생들로 알았다니까요.” 그에게 끼를 주체하지 못해 안달났던 유년은 없었다. 심지어 흔한 가출 한번 안 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3남매를 키웠고,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이문식은 “하루빨리 출세해서 돈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고작해야 평일에는 김영애가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보고, 주말이면 이불 속에서 명화극장을 감상했던 정도가 유일한 일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첩첩산중이던 고향을 떠나 전주로 유학을 떠난 다음엔 그것마저 반납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한 것도 “학비를 덜어보자”는 심산에서였다. “제복에 대한 환상도 작용했다”는 그는 이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험 전날, 친구와 함께 서울에 올라와 육사가 있던 태릉의 한 여인숙에 숙소를 잡았던 그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 때문에 날밤을 지새운 끝에” 체력테스트에서 그만 탈락하고 만다. 이후 해양대학교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11대 종손을 험한 뱃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친지들의 만류에 결국 그는 항공대학교 항공경영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활주로를 보며 등교하는 날은 오래지 않았다. 학과 공부 대신 공인회계사 준비를 하고 있던 그에게 한 친구가 “연극영화과에 가면 탤런트가 될 수 있다”고 꼬드긴 것. “세상 아는 만큼 보인다고. 그때는 어렸죠. 탤런트가 당시 선망의 직업이었는데, 연기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거 하면 돈 벌겠다 싶었거든요.” 재수를 결심한 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87학번이 됐지만, “돈 많고 잘생긴” 친구들을 보면서 금세 기가 꺾였다. “탤런트 시험도 두번인가 봤는데 떨어졌죠.” 사설학원을 다녀볼까 하다 방세보다 비싼 수강료에 놀라 포기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행동하는 게 절박했던 시절이잖아요. 전공이 연극이었지만 시위나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개인적인 삶은 어떻게 펼쳐야 하는가에 대한 불안이 없진 않았지만 접어놨던 시기죠.” 취직 준비나 차근차근 하자며 영어책 들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던 무렵, 그는 과 선배들로부터 방학 때 공연 준비나 함께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황석영의 <돼지꿈>이었는데, 그에게 주어진 대사는 단 세 마디. 쌀쌀한 가을에 러닝셔츠만 입고 떨다 누가 부르면 ‘예’라고 답하는 게 전부라 어떤 감흥도 못 느꼈다는 그는 이후 김지하의 <밥> 공연에 참여하면서 무대의 재미를 맛본다. 전라도 사투리로 너스레를 떠는데 “순간 관객이 웃는 소리를 듣자 새로운 세상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 모 아니면 도 ' 군대 갔다와서 복학하려고 학교를 갔는데 그때 문식이를 처음 봤다. 학생회 조직이 약해서 세를 좀 확장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 물어보니 이문식이 대중적 지지도도 있고 적임자라고 했다. 김지하의 <밥>을 공연하고 있는 문식이를 봤는데, ‘모 아니면 도’라고 봤다. 진득한 것 같지 않아 뵈서 괜히 집적대는 건 아닌가 고민도 됐다. 어쨌든 연극 보고나서 밥을 정말로 공평하게 나눠먹는 세상을 알려주겠다고 꼬셨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문식이는 과 학생회장이 됐고, 그뒤 몇년 동안 사근동에서 같이 자취를 했다. 주인집에서 잔치한다고 갈비를 재어놨는데 문식이가 술먹고 와서는 주인집 개한테 그걸 다 먹이는 바람에 월셋방에서 쫒겨난 사건은 잊을 수 없다. 제 것 챙기기보다 남 주는 걸 워낙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해프닝을 벌였다. 인정받기 전까지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스타일의 소유자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광수(청년필름 대표) 산전수전 2 | 무대와 유치장 사이에서 하지만 그는 이내 학생운동에 빠져든다. “혼자 한 것도 아니니 쓰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그를 아는 이들은 대본보다는 화염병을 즐겨들었고, 무대보다는 거리에 나설 때가 많았다고 입을 모은다. 과 학생회장을 맡은 이후에도 후배들을 챙기기보다 앞서 싸우는 바람에 인근 관할경찰서인 성동서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시위 도중 전경이 되던진 화염병에 맞아 다리에 화상을 입고 이식수술을 한 다음에도 퇴원하자마자 곧장 임수경 3차 공판장에 난입해 법정소란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한달 가까이 유치장 신세를 졌을 정도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무대로 그를 다시 이끌어준 이는 같은 과 최형인 교수다. 유오성, 권해효, 설경구와 함께 애제자로 꼽았던 이문식에게 최 교수는 수시로 면회를 와서는 “니가 이러는 거 다 알겠다. 그런데 연극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창과 30주년 기념공연인 <사천의 선인>의 물장수 역을 그에게 맡겼다. “날씨도 추운데 직접 오셔서 남동생 옷가지까지 챙겨서 넣어주시는 걸 보고선 고맙기도 하고 서럽기도 해서 더러 울기도 했다”는 그는 공연하다 다른 건수로 덜컥 잡히면 어떡하나 싶어 항상 최 교수의 차를 얻어 타고 대학로에 연습을 다녔다. 연습이 끝난 뒤에는 최 교수의 오피스텔로 숨어들었고. “신생 극단이니 누가 알아주나요. 대학로에 입성하면서 설움도 많았죠. (설)경구 형이랑 공연 10분 전까지 호객 행위하다가 급히 옷갈아 입은 적이 부지기수예요. 한번은 겨울이었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밖에서 선전하다 들어온 경구 형이 사진기자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에 들어섰는데 손이 꽁꽁 얼어서 셔터가 안 눌러지는 해프닝도 있었어요.” “드럽고 치사한”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대학졸업과 함께 최형인 교수가 중심이 된 한양레퍼토리 창단에 나선다. 롱코트 맞춰 입고 손님 끄는 일까지 했던 시절이지만, 그는 “과장된 대사가 대부분이었던 당시 풍토에서 리얼한 연기를 선보이는 연극 집단”이라는 점에서 구성원 모두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관객 호응도 대단했다. 당시 세미소극장은 대부분의 극단이 작품을 올렸지만 본전을 건진 작품은 많지 않았다. 저주받은 이 무대에서 한양레퍼토리는 창립작 <심바새메>를 비롯해서 이후 승승장구했다. <춘풍의 처> <한 여름밤의 꿈> 등에서 주로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도맡던 그는 문득 또 다른 활력소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5년쯤 지나자, 극단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열정의 크기보단 다툼의 횟수가 많아졌다. “배역 때문에도 갈등이 생기고….” 극단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이 남을 때면 물탱크 청소, 세무사 보조 등의 아르바이트로 부족한 생활비를 벌충해야 했던 그였던지라 프리 선언이 절실한 때이기도 했다. “안국동에서 국수 배달한 적이 있는데. 퍼지기 전에 날라야 하잖아요. 그런데다 거기는 밥도 안 주는 곳이었고. 배는 고프지, 한여름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지.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더라”는 그는 장진 감독의 <매직타임>을 시작으로 홀로 서기를 시작한다.

스크린 속 연인들 어려진다

관객 연령층 낮아진 것이 큰 이유 양가 할아버지의 정혼으로 결혼하는 남자 대학생과 16살 여고생, 반항아 남고생과 평범한 여고생의 연애담, 어설픈 '여고딩'과 '싸가지'없는 남자 대학생의 로맨틱 코미디, '캡짱'과 '얼짱' 라이벌 관계의 두 남고생과 이들이 좋아하는 여고생의 로맨틱 드라마... 스크린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 주인공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 <내 사랑 싸가지>(사진), <그 놈은 멋있었다>, < …ing>, <어린 신부>, <늑대의 유혹>, <말죽거리 잔혹사>, <내 사랑 일진녀>, <여고생 시집가기>, <슈즈>, <돌려차기> 등 제작이 진행중이거나 크랭크인을 앞둔 영화들이 갖는 공통점은 주인공 중 한 명 이상은 고등학생이라는 사실. 이들 영화는 마냥 교훈적인 내용에 교실의 에피소드를 다루던 <얄개시대> 스타일의 학원물과 다르며 본격적인 로맨틱 코미디라는 데서 '세븐틴' 류의 청춘물과도 거리가 있다. '홍수'라고 표현할 만큼 많은 작품이 제작되고 있다는 점도 예전과 다른 양상. 이달 중 촬영을 시작하는 <어린 신부>(제작 컬쳐캡 미디어)의 여주인공 보은(문근영)은 열여섯 살 여고생. 양가 할아버지들의 젊은 시절 약속 때문에 바람둥이 대학생 상민(김래원)과 결혼해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임은경이 캐스팅된 <여고생 시집가기>(제작 더존필름)의 여주인공도 16살이 조금 안된 여고생. 주인공 '평강'은 16살이 되면 온달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운명이다. 28일 개봉을 앞둔 < …ing>(제작 드림맥스)의 여주인공인 여고생 민아는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지만 이상형과 전혀 딴판인 남자 친구 영재를 만난다. 송승헌과 정다빈이 출연하는 <그놈은 멋있었다>(제작 BM/LT픽쳐스)에서 두 사람이 맡은 역도 '킹카' 남고생과 '어리버리' 여고생이며 최근 촬영을 마친 <내 사랑 싸가지>(제작 포이보스, 제이웰엔터테인먼트)의 두 주인공 김재원과 하지원도 각각 '싸가지 없는' 대학생과 평범한 '여고딩'으로 출연한다. 유하 감독의 신작 <말죽거리 잔혹사>(제작 싸이더스)의 경우는 배경이 1970년대 후반이지만 주인공(권상우, 이정진, 한가인)은 모두 고등학생이다. 이밖에 <내 사랑 일진녀>(제작 미디어 황제)에는 고등학교 2학년을 유급한 '일진녀' 여고생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연령대가 낮아지면서 몇몇 영화는 캐스팅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한 영화 관계자는 "주연급 연기자 중 고등학생과 대학생 역할을 할 만한 경우가 한정돼 있는 상황이라서 캐스팅에 애를 먹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속 인물의 연령대가 낮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관객의 연령층이 낮아졌기 때문. <그놈은…>의 제작사 LT픽쳐스의 김세희 기획팀장은 "극장을 찾는 중고교 관객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을 마케팅 타켓으로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학생 관객들을 기본 타켓으로 삼아 성인 관객까지 흡수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또 다른 이유는 최근 불어닥친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 붐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인터넷 소설들이 중고등학생 등의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 이들 영화 중 <…싸가지>와 <…일진녀>(이상 이햇님), <늑대의…>, <그놈은…>(이상 귀여니) 등이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한편, 이렇게 '젊은 혹은 어린'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쏟아지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는 않다. 미혼모가 되고 싶어하는 발칙한 여고생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 <슈즈>을 준비중인 청년필름 기획실의 문현정 팀장은 "비슷한 연령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만큼 다른 영화와 차별화할 만한 개성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애니비전] 운좋은 노력가,애니작가 김병갑

1997년은 한국 만화·애니메이션계에 새 바람이 분 해였다. 이 해에만 국제행사가 5개나 열렸다. “만화·애니메이션이 21세기 문화콘텐츠 시대의 핵심이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그해 가을 동아LG페스티벌이 처음으로 개최됐다. 김병갑(30) 감독은 그 대회에서 자신의 첫 작품으로 대상과 캐릭터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2D로 만든 13분42초짜리 작품 <꿈꾸는 종이인형의 살인>이라는 작품이었다. 소녀를 사랑하게 된 한 로봇의 이야기를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했다. “운이 좋았죠.”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그 대회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사람이 국내 메이저 제작사 중 하나인 애이콤의 넬슨 신 회장이었다. 김 감독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신 회장은 그를 바로 스카우트했다. 자신의 첫 창작품이자 야심작인 <왕후 심청>의 캐릭터디자인과 콘티, 설정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애이콤 기획실에서 3년 넘게 근무하며 그는 극장용 대작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체득했다. 신참 독립감독으로서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운이 좋았죠.” 회사 일을 하면서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듯 짬을 내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1998)는 그해 2회 동아LG대회에서 그에게 캐릭터상을 안겨주었다. 이듬해 내놓은 (1999) 역시 그해 대한민국 영상미술대전에서 애니메이션 부문 대상을 안았다. 공주대 만화애니메이션과 2기로 입학했지만 도중에 학교를 나온 그였다. 뭔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씨네21>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 CF회사에서 일하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을 거듭하며 만든 <꿈꾸는 종이인형의 살인>은 그의 삶에서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된 셈이다. “장편애니메이션을 꼭 만들고 싶었어요. 그 꿈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네미의 숲> 2000년 <바리공주> 기획에 잠시 참여했다가 아쉽게도 꿈을 접고 이제 다시 <아치와 씨팍>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아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중간에 투자문제로 ‘다시 낙마하는 게 아닌가’ 하며 불안해하기도 했지만 이제 다시 궤도에 올랐다고 말한다. “단편과 장편은 호흡이 다르죠. 장편과 단편을 두루 만들어봤다는 점이 제게는 가장 큰 밑천인 것 같아요.” 그러는 와중에도 자기 작품에 대한 의욕은 휴화산처럼 조용히 숨쉬고 있다. 지금은 잠시 미뤄놨지만 곧 다시 손을 보겠다는 <네미의 숲>이 그것이다. 낮에는 인간이 살고 밤에는 신들이 산다는 유럽 신화의 장소를 차용했다. 사이보그를 만드는 노인들이 숲속에 사는 인간과 벌이는 이야기는 끝모를 미로를 연상시킨다. 잠깐 선보인 스토리보드상의 이미지는 형광물질을 품고 있는 어두운 밤하늘의 느낌을 주었다. “분위기는 엽기적으로 보이지만 따뜻한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아마 OVA로 나오게 될 겁니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이렇게 현장에서 땀흘리는 사람들에 의해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도 눈보라가 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화려한 레토릭보다 땀에 젖은 운동화가 더 필요한 때 아닌가.정형모/ <중앙일보> 기자 hyung@joongang.co.kr

표현주의적 화풍,입체적 연출,<프리다>

■ Story 따뜻한 햇살이 감싸고 도는 멕시코의 한 마을, 사춘기 소녀 프리다는 리비도와 이념이 폭발하는 디에고 리베라의 작업 현장을 부러운 듯 훔쳐본다. 그 무렵 그는 버스와 전차가 부딪히는 첫 대형사고로 온몸이 부서지며 첫사랑마저 잃는다. 몇년 뒤, 두손만 간신히 움직여가며 그린 그림을 들고 리베라를 찾아간다. 리베라는 그녀의 그림뿐 아니라 거침이 없는 그녀에게도 강한 매혹을 느낀다. ■ Review 영화 <프리다>는 프리다 칼로의 예술세계로 접근하는 통로를 과감하게도 단 두 가지로 압축해놓았다. 연인 리베라로부터 거듭해 받게 되는 정신적 상처와 자신의 육신을 사정없이 공격해 극도의 고통과 장애로 몰아넣곤 하는 육체적 상처다. 혁명에의 의지만큼이나 원초적 본능으로 들끓는 리베라가 마침내 프리다의 누이까지 탐하는 현장을 목격한 프리다는 당연히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곧바로 캔버스로 분출된다, 는 식이다. 두 상황이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그 그림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달리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또 프리다는 자신의 초상을 그리면서 신체를 공격적으로 분해하고 헤집어놓는다. 그 자화상들은 사고로 산산조각난 몸이 가져다주는 프리다의 고통스런 현실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옮겨간 결과다(척추의 자리에 쇠기둥을 박아넣은 자화상에선 하얀 눈물이 흐르는데 작품으로 승화된 그의 모습은 그 순간에 스크린에 비친 현실의 프리다와 아주 닮았다). 이건 프리다를 해석하는 데 오류는 아닐지언정 굉장히 편의적인 방법처럼 보인다. 프리다의 화폭에 뿌려지는 도전적 이미지의 원천을, 그 아우라를 무척 좁혀놓기 때문이다. 방대한 고전을 마구 잘라 산뜻한 문고판으로, 단출한 개론서로 만든 것과 같은. 사회주의적 기풍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념적 발언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외면하고 사적인 정서가 강한 그림만을 골라 대거 스크린에 등장시킨 것도 비슷한 효과를 낸다. 단, 작가의 피폐한 내면과 그의 예술세계가 단절적이었던 에드 해리스 주연의 <폴록>에 비하면 이건 상대적으로 굉장한 장점이다. 어쨌든 영화 <프리다>는 매혹적이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 뿌리박은 상징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프리다 칼로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영화의 연출기법으로 끌어들인 듯한 장면들은 특히나 매력적이다. 프리다에게 평생의 족쇄가 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직전의 불길한 전조로 시작해 사고의 순간, 사지를 헤매면서 겪는 의식과 무의식의 고통, 병원에 누워 눈을 뜨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대표적이다. 미국 록펠러 재단의 벽화에 레닌의 초상을 넣는 바람에 모욕을 당하는 리베라의 좌충우돌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선 킹콩의 모습에 빗대는 장면은 재밌으면서도 리베라가 겪은 여정을 효과적으로 전해준다. 이 기행문에는 콜라주 기법도 동원된다. 여성감독 줄리 테이머의 장르를 뛰어넘는 입체적 연출 솜씨가 돋보이는 대목들이다(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라이온 킹>으로 토니상 연출상을 받았고 지금은 오페라 을 준비 중이다). 프리다가 스탈린의 총구를 피해 자신의 집을 망명처로 택한 트로츠키와 사랑을 나눈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듯 그와 리베라의 연애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리베라는 섹스를 “형식적인 악수보다도 무의미한 행위”라고 치부하면서 정조라는 연애 규칙을 일관되게 무시해나간다. 프리다는 마치 리베라에 대한 보복처럼 양성애자로 맞서는 형세를 유지한다.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작품들처럼 현실과 맞서고 조롱하고 상처받지만, 긴 세월을 보내고도 결국 살아남는다. 그 절절하면서도 풍부한 열정을 샐마 헤이엑과 앨프리드 몰리나, 두 배우가 멋지게 보여준다. :: 프리다 칼로의 예술세계 새로운 사유가 화폭에서 폭발하다 프리다 칼로는 우리 미술계에선 거의 신인과 다름없다. 그녀는 갑자기, 느닷없이 왜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는가?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곁에 머물 수 있는가? 그녀의 작업이 세인의 관심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여성적 시각을 회복하는 사회에서 늘 똑같은 방식으로 그래왔다. 70년대 미국의 미술계에서 페미니즘 논의가 하나의 문화비평적 시각을 견지할 때 그랬고, 우리 문화계에서 9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여성주의 시각이 자리를 차지할 때부터 그녀의 작품들은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이미 그녀가 살았던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멕시코로부터 발송된 서신처럼, 영향을 끼치고 열정에 들뜨게 만들었으며 진보적 예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져다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먼저 시도되었던 멕시코 사회주의 혁명이 그 혁명적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때, 멕시코 미술계는 새로운 기운으로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부둥켜안았는데, 남성적 힘이 튕겨져나갈 듯한 멕시코 르네상스기의 회화들 사이에서 프리다의 여성주의적 시각이 열어주는 사회적 관찰과 성찰의 내용들은 실로 혁명적인 예술의 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자칫 개인적인 관심사만을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녀의 작품에서는 인간조건으로서 평등과 상호간의 관심이 가지는 다양한 비대칭적 관계 그리고 멕시코에 보내는 무한 애정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풍을 구사하는 데에는 그녀가 가지는 사회주의자로서 균형잡힌 성찰적 태도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자국(멕시코)의 현실을 직시하고 탈유럽화된 개인적 미의식(동시대 유럽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만나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에 의해 완성되어간다. 그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그녀의 삶과 작품에 보내는 애정은 뜨겁다. 프리다가 탈근대적 체계 안에서 완성시킨 작품과 지독한 여성주의적 사유와 세계관이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자 하는 지금의 현실적 요구와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이런 아방가르드적 기질과 시대를 건너뛰는 혜안이 디에고 리베라라는 거대한 남성 화가를 만나고, 지도하고, 사랑하며 리베라답게 살도록 허락했을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기술적 완성도에 치중하거나 새로운 쟁점에 기대어 작업하는 미술 중심적 사고가 대사회적으로 가지는 한계를 반성할 줄 알았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그녀를 리베라와 같이 때로 다르게 독자적인 예술가로서 스스로 존재하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이섭/ 전시기획자

미국인이 갖는 프랑스에 대한 열등감,<프렌치 아메리칸>

■ Story 이사벨(케이트 허드슨)은 둘째아이를 임신한 언니 록산(나오미 왓츠)을 돌보려고 파리에 도착하지만 정작 록산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만삭으로 이혼소송을 해야 할 판. 게다가 친정에서 가져온 그림이 고가의 걸작임이 밝혀지면서 재산분할을 두고 프랑스-미국의 양가가 팽팽하게 대립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파리에 적응해가는 이사벨은 이는 아랑곳없이 유명인사이자 유부남인 록산의 시삼촌과 연애행각을 벌인다. ■ Review <전망 좋은 방>을 만든 영화계의 명콤비,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의 장기는 시대극 혹은 소설 각색하기다. 일견 영국풍 ‘유산영화’ 제작자 이미지가 강한 이들에게 현대극, 그것도 로맨틱코미디라니 의아한 궁금증이 일지도 모른다. 물론, 머천트-아이보리라는 브랜드 파워를 실감했던 사람들에 한해서. 하지만 다행히(?) 일단 이 영화도 베스트셀러였던 다이앤 존슨의 소설 의 각색판이고 또 물론 로맨틱코미디도 아니다. 아마도 착시현상은 원제를 <프렌치 아메리칸>으로 번역하여 <프렌치 키스>의 이미지를 상기시키려는 홍보 전략 때문이거나 우아한 헬레나 본햄 카터가 아닌 귀여운 케이트 허드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그러고보면 파리를 배경으로, 불운한 ‘니콜 키드먼’인 나오미 왓츠, 그리고 대배우 글렌 클로스까지 가세한 라인업, 이혼하는 언니의 시댁 어른과 바람난 여동생 스토리라니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긴 하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보다 훨씬 느슨하고, 관객에게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의 키워드는 연기자들의 앙상블이라기보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파리에 대한 미국인의 오랜 매혹과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후 30년 만에 처음 촬영했다는 에펠탑은 물론, 18세기 귀족 거주지역인 제7구(區, arrondissement)의 고풍스런 파리도 록산의 시댁장면을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 일대도 이사벨과 밀애를 즐기는 에드가의 집이 있다는 핑계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다 파키스탄, 터키 이민자들의 거리인 벨빌까지 나오면 그 의도는 더 명백해진다. 시대의 공기까지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데 특기가 있는 머천트-아이보리 사단의 심미적 안목은 물론 파리의 관광 포인트를 도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파리 유명 레스토랑의 화려한 음식 디스플레이, 스카프 매는 법, 인사법, 심지어 프랑스식 최음제 레시피까지 늘어놓으며 파리의 분위기-문화를 화면 안으로 가져오려 한다. 가히 종합 문화보고서, 영화로 쓰는 ‘론리 플래닛-파리’랄 수밖에. 그리고 미국인이 어떻고 프랑스인은 어떻다라는 식의 스테레오 타입과 문화적 차이에 대한 농담들을 차곡차곡 쌓아놓는 것이다. 영화의 코미디적 요소도 바로 이러한 양국의 문화적 격차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그 코미디의 핵심엔 언제나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는 ‘이상한 프랑스의 앨리스’ 케이트 허드슨이 좌충우돌하는 과정이 있다. 그녀가 양국의 매너가 얽히는 정글 사이로 1만8천달러짜리 빨간 켈리백을 들고 탐험하는 동안, 이혼의 위기로 자살까지 기도하는 언니의 이야기가 주변으로 밀리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애초부터 영화는 양국간의 문화전쟁을 한 가족의 이혼 송사를 통해 대리시키는, 교양과 예절의 <황산벌>이었으므로. 그러나 이 문화적 어드벤처에 우리가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일차적 문제는 교양과 매너에 대한 이들의 의식구조가 있을 리 만무한 우리에게 이 코미디가 머리로는 이해가 갈지언정 심금을 ‘웃기지’ 못한다는 데 있겠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을 사심없이 즐기기에는 이라크전을 정점으로 ‘프렌치 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불러야 할 만큼 악화된 작금의 미국-프랑스 관계가 워낙 민감한 탓이다. 시간이라는 수직좌표의 드라마를 지역과 문화라는 수평좌표로 옮겨 적은 뒤 똑같은 수법과 세팅을 쓰면 현대극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던 게 틀림없는 제임스 아이보리는 이런 민감함도 그가 <하워즈 엔드>나 <남아있는 나날>에서 한 것처럼 모든 것을 개인과 시대의 충돌로 그려내고 개인의 손을 들어주면 비껴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인들에게 좀처럼 개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문화 갈등이 개인(미국인 자매)과 상황의 충돌로 도식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라투르의 그림을 두고 두 가문이 세우는 대립각도 악습으로 핍박받는 개인(미국 자매)과 상황(프랑스 시댁)의 갈등으로 보는 게으른 이해에 도달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미국 중심주의는 머천트-아이보리 사단의 결과물로서는 뜻밖이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프랑스에 대해서 미국인이 갖는 매혹과 열등감 양쪽에 소구하는 이상한 (그렇기 때문에 탁월한) 미국적 드라마가 된다. <프렌치 아메리칸>이 아니라 <‘프리덤’ 아메리칸>임을 강조하는. :: 라투르의 그림 <성 우르술라와 일만천 처녀들>이거 진품 맞아요? 나오미 왓츠가 “매너의 코미디”라고 지칭할 만큼 패션이나 관습과 같은 문화적인 소재들이 이야기의 얼개까지 좌우하는 이 영화에서 주연이 파리라면 조연은 다양한 소품들이다. 따라서 현대판 코스튬드라마라고 불러야 좋을 만큼 소품들에 들인 공이 각별한 편인데 그중에는 이사벨과 에드가의 관계를 상징하는 ‘켈리백’도 있지만 고가의 진품으로 판명돼 양가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라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 <성 우르술라와 일만천 처녀들>을 빼놓을 수 없다. 라투르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화가로서 영화에 나온 이 그림처럼 촛불에 비친 특이한 표정의 성인(聖人)들을 주로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라투르는 ‘성 우르술라’를 그린 적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 영화에 나온 그림은 물론 라투르의 스타일을 모사해 그린 모작(模作)이다. 정말 이 그림이 알려지지 않은 라투르의 진본이라면 영화에서처럼 시세가 고작(!) 400만달러 정도에 그치지도, 루브르박물관이 놓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정설이라고. 그림 속 성(聖) 우르술라는 여학생들과 교사들의 수호성인이며 5세기 브르타뉴 왕조의 기독교인 공주였다. 이교도인 잉글랜드의 청혼이 있자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 승낙했다고 전해진다. 상대국의 개종을 포함한 그 조건엔 각각 1천명의 숫처녀 시녀를 거느린 열명의 귀부인과 함께 결혼 전까지 3년 동안 여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뜻밖에 잉글랜드는 그 모든 조건을 승낙했지만 불행히도 공주의 행렬은 훈족을 만나 몰살되고 만다. 영화 속 숨은 ‘걸작’의 소재는 바로 이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