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스스로 즐기며 영화찍기,<스튜어디스>

■ Story 방송사 막내 작가인 마샤오창(이찬삼)의 소원은 일본인 여자를 정복(?)하는 것! 친구 조지와 헌팅을 목적으로 바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취미다. 어느 날 바에서 만난 미녀 스튜어디스를 유혹하는 데 성공, 동거에 들어가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홍콩 뒷골목의 유명한 조직 보스다. 그 즈음 앞집에 이사 온 일본인 여인은 자신을 스튜어디스라 소개하고 이상한 눈빛을 흘려댄다. ■ Review 영화의 첫 장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에게 쫓기는 주인공의 모습이 핸드헬드 카메라에 불안스레 담긴다. 결국 넘어지고야 마는 주인공, 그의 위로 번쩍 치켜든 여인의 손에는 날카롭게 깎인 모형 비행기가 들려 있다. 모형 비행기를 든 손과 넘어진 주인공의 눈이 바쁘게 교차편집되다가 결국, 주인공은 잠에서 깨어난다. 늘 같은 악몽에 시달린다는 주인공의 시름에 찬 고백이 내레이션으로 깔리고, 아마 여기까지가 이 영화를 가장 진지한 자세로 대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그 다음부터는 적당히 몸의 근육을 이완시킨 채 이야기에 귀와 눈을 맡기는 것이 좋을 듯. 이야기의 구조는 간단하다. 방송사 막내 작가이자 철없는 청년 마샤오창은 어느 날 술집에서 미녀 스튜어디스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한 건달이라, 바람을 피웠다가는 꼼짝없이 거시기가 거시기 될 판국. 그런 그를 묘하게 자극하는 앞집의 여인이 있으니, 언제나 빨간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을 스튜어디스라 소개하는 그녀는 다름 아닌 일/본/인. 샤오창은 일본 여자와 자는 것이 조국의 한을 푸는 길이라 생각하는 괴상한 애국자다. 감시망을 뚫고 그녀와 합방한 그날 이후, 여자친구가 몰래 사라지고, 눈앞에서는 연쇄살인극이 펼쳐진다. 마지막 장면, 끈질기게 그를 뒤쫓는 빨간 옷의 ‘미저리’ 여인. 아, 결국 이것도 꿈인가. 여기저기 기존의 홍콩영화를 비틀고 짜깁기한 흔적이 있지만, 감독 스스로 즐거워하며 찍은 영화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샘 륭을 타란티노와 비교말길). 빨간 옷 여인에게 어두운 과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여전히 살인의 동기나 목적의식은 어둠 저편에 놓여 있다. 주로 B급 실험영화를 만들어온 샘 륭은 진가상 감독의 <성룡의 썬더볼트>로 현장에 진출한 케이스. 2001년에는 <문제 없습니다2>(No Problem2), <광란의 밤>(Maniac Night) 등으로 감독 데뷔를 했으며, 직접 각본을 쓴 <스튜어디스>는 부천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다. 어리버리한 주인공 역은 우리에게 <메이드 인 홍콩>으로 잘 알려진 이찬삼이 맡았다. 심지현 simssisi@dreamx.net

교훈적인 귀여운 소동,<빅 팻 라이어>

14살 제이슨(프랭키 무니즈)은 남을 속이는 게 작문 숙제보다 더 쉬운 천부적인 거짓말쟁이. 작문 숙제를 피하기 위해 한 거짓말이 결국 들통이 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작문 숙제에 나선다. 그런데 어렵게 완성한 작문 숙제가 그만 비열한 할리우드 제작자의 손에 들어가버린다. 숙제를 했다는 아들을 믿지 않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제작자를 찾아나선 제이슨은 서서히 신뢰와 진실에 대해 눈떠간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거짓말은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받게 된다’ . <빅 팻 라이어>의 교훈은 간단하다. 간단한 교훈을 전하기 위해 벌이는 소동도 귀여운 편이다(유니버설 스튜디오를 통째로 전세내기 위해 들인 제작비를 생각하면 귀엽다는 말이 쑥 들어가지만). 영화의 제목인 는 극중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학생 꼬마의 작문 숙제다. 조금 더 첨언하자면, 천부적인 거짓말 실력을 자랑하는 14살 제이슨의 학기말 작문 숙제 제목이다.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결국 거짓말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진실의 힘에 눈떠간다는 내용을 담은 작문은 제출되기 직전, 우연히 할리우드 제작자 마티 울프의 손에 들어간다. 자칫 계절 학기와 바꿔야 할지도 모를 숙제가 엉뚱한 사람 손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어느 날 찾아든 극장 화면에는 의 예고편이 뜬다. 숙제를 했다는 부모님의 인정만이 필요한 제이슨의 바람은 닳고 닳은 할리우드 제작자에 의해 간단히 좌절되고, 양치기 소년과 양치기 어른의 대결이 막을 올린다. 처음, 제이슨의 손에서 완성된 작문은 일종의 참회록이었다. 30분 만에 급하게 쓰여진 참회록이 진심을 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일긴 하지만, 거짓말의 폐해에 대해 제이슨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위기의 순간을 모면하려고 쉽게 거짓말이라는 도구를 써먹던 14살 소년이 얻은 거짓말의 대가란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신뢰를 완전히 잃는 것. 더이상 자신을 믿지 못하는 부모님도 그렇거니와 자신보다 더한 사기꾼, 마티를 만나면서 제이슨은 얼핏 자신의 미래를 엿본 것 같은 커다란 두려움을 느낀다. 이제 그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데 앞장선다.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할리우드 제작자의 대사 중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문서로 남겨야 한다”는 부분이나 영화의 각본을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자주 등장해 곤란하다고 암시하는 대목에서는 뒷골목의 저열한 생리가 살아 숨쉬는 영화계를 할리우드 스스로가 참회하는 대목 같아 흥미롭다. 실제 18살인 프랭키 무니즈가 14살 제이슨을 연기했으며,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를 통해 재능을 인정받은 숀 레비 감독이 깔끔한 연출 솜씨를 자랑한다.

<바람난 가족> 선댄스 영화제 초청

영화 <바람난 가족>(감독 임상수/ 제작 명필름)이 2004년 1월15일부터 25일까지 미국 유타주 파크 시티에서 열리는 선댄스 영화제 '월드 시네마' 부문에 초청되었다. <바람난 가족>은 1996년과 1997년 잇달아 초청된 박철수 감독의 와 <학생부군신위>, 2000년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1년 김기덕 감독의 <섬>에 이어 선댄스에 초청된 다섯번째 한국 장편 영화가 되었다. 미국 영화 중심의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 시네마' 부문은 미국 배급을 노리는 세계 각국 대표 영화들의 각축장으로, 플랑드르 국제 영화제 '감독상', 베르겐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스톡홀름 영화제 '여우 주연상'과 '촬영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해외 영화제에서 호조를 보이고 있는 <바람난 가족>은 이번 선댄스 영화제 초청으로 미국 배급에 청신호가 켜졌다. 선댄스 영화제는 1985년 미국의 감독 겸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자신이 연기한 배역의 이름을 따와 만든 영화제로 헐리우드의 상업주의에 반발, 독립영화 제작에 활기를 불어 넣고자 시작되었다. 선댄스 영화제 주요 부문은 미국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경쟁부문, 헐리우드 주류 영화들이 상영되는 '프리미어' 부문, 실험적 영화 중심의 '미드나잇' 부문과 '월드 시네마' 부문이 있으며 비경쟁부문인 '월드 시네마' 부문에는 관객들의 투표에 의해 '관객상' 이 주어진다. 인터넷 컨텐츠팀(cine21@news.hani.co.kr)

<효자동 이발사> 촬영현장 [1]

기술본위, 친절본위! 청와대 옆 이발관으로 오세요 스페인 세빌랴 거리를 활보하던 입심 좋은 피가로가 아니다. 굵은 시가를 입에 문 채 무심하게 머리를 자르던 ‘거기 없던 그 남자’도 아니다. 헝클어진 곱슬머리에 호기심 가득한 눈, 그는 바로 대한민국 효자동의 우직한 이발사 성한모다. 그러나 만두가게 왕씨가 아니라 청와대 대통령의 가르마를 2:8로 나누게 되면서 반듯하게 살아오던 이 남자의 인생 역시 반대편으로 쏠리게 되었다. <살인의 추억>을 끝낸 송강호와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가 주연하고, 배급사로 알려졌던 청어람이 첫 번째로 제작에 뛰어든 <효자동 이발사>는 억눌린 시대의 공기와 한 가족의 비극을 건강한 코미디 속에 녹여낸 깔끔한 한편의 우화다. 지난 11월16일, <씨네21> 앞으로는 시골의 한 이발관으로부터 ‘이발 우대권’이 날아왔다. 차를 타고 3시간 뒤, 작은 화분이 놓인 소박한 이발관 문을 빠끔히 열었을 때, “의사하고 한 끗발밖에 차이 안 나는“ 흰가운을 입은 송강호가 쌍가위를 치켜든 채 “어…어… 어서 옵쇼!”를 외쳤다. 전북 부안의 공장지대 올해 들어 유난히 추웠다는 그날, 전북 부안의 한 공장지대에 지어진 <효자동 이발사>의 오픈세트 안은 유난히 따뜻했다. 마치 혹독하고 추웠던 60, 70년대, 아버지와 아들이 살던 낡은 이발관 안만은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듯이. 지난 9월에 크랭크인한 <효자동 이발사>는 순제작비 34억5천만원 중 12억원을 이 효자동 거리세트에 쏟아부었다. 5천평의 부지에는 “기술본위, 친절본위, 孝子리발관. 主 성한모”라는 당당한 간판 아래 서 있는 ‘리발소’를 시작으로 60m가 넘는 개천을 따라 20동의 가게와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어설픈 가족사진이 진열된 ‘종로사장’ 옆 신발가게 천장엔 고무신이 달랑거리고, 불량기 가득한 오렌지색 냉차 리어카 뒤로는 넝마주이의 커다란 나무바구니가 따른다. 일성 기름집 옆 효자쌀집 앞에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라고 쓰여진 나무 말을 타려는 아이들이 승강이를 벌이고,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 같은 낡은 계몽포스터 위로는 <감격시대>가 아코디언 연주로 흐른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인 기억의 리마인더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해도 <효자동 이발사>는 아련한 그 시절의 향수에 기대는 영화는 아니다. 3·15 부정선거가 일어난 60년부터 조용필의 <단발머리>가 유행하던 1980년까지 20년간의 한국 근대사를 아우르는 <효자동 이발사>는 4·19 데모대의 대열 속에서 아들을 낳고, ‘중고생 삭발령’ 때문에 돈을 벌고, ‘라이방’ 선글라스를 즐겨쓰던 대통령의 머리를 깎게 된 한 이발사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사를 담고 있다. 그렇게 <포레스트 검프>가 미국사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며 한 남자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를 구축했듯, <효자동 이발사>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의 씨줄 위에 한 가정의 역사를 날줄로 얹어 직조한다. B도로, 어설픈 수다와 삼삼한 로맨스 인왕산 기슭 동쪽으로는 경복궁, 서쪽은 옥인동, 남쪽은 창성동, 북쪽은 궁정동과 접해 있는 효자동. 이 효자동을 그대로 복원한 오픈세트는 크게 광화문 4거리에서 청와대로 향하는 A도로와 효자동을 관통하는 B도로로 이루어져 있다. 아스팔트를 깔아 만든 길이 130m, 넓이 12m에 달하는 4차선 A도로는 3·15 부정선거, 4·19 혁명, 5·16 군사 구테타 등 격동의 한국사가 검붉은 피로 새겨진다. 그러나 바로 옆 B도로의 온도는 다르다. 소시민들의 일상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도로에는 어설픈 수다와 삼삼한 로맨스가 동력인 따뜻한 거리다. “다방문화 이전에 서민들의 만남의 장소”였던 만두집은 성한모(송강호)가 면도사로 일하던 순진한 민자(문소리)와 데이트를 나누었던 공간이자, 임신한 민자에게 “사사오입! 즉, 뱃속의 애가 다섯달을 넘으면 낳아야지!“ 하며 말도 안 되는 장광설을 늘어놓던 공간이기도 하다. 사주집 옆의 송학작명소는 한모의 아들에게 “가난하지만 오래 산다”는 낙안(樂安)이란 이름을 지어준 곳이다. 그러나 “멸공, 반공” 같은 표어가 걸려 있던 동사무서의 대문이 “근면, 자조 ,협동”으로 바뀌어가면서 이 B도로에도 서서히 어둠이 깔린다. ‘대통령 각하’에 충성하고 세상에 감사하며 살아가던 한모의 아들이 어처구니없는 국가음모에 휘말려 고문을 받고 몸이 망가지자 평범한 아버지는 분노한다. 그러나 세상에 맞서기엔 그의 존재는 한없이 작기만 하다. 한모는 아들이 “낙안이 아버지는 깍쇠”라는 놀림을 받고 의기소침해하자, “의사하고 이발사는 한 끗발 차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날 낙안이의 꿈속엔 의사와 간호사 복장을 한 부모들이 나와 수술을 집도하듯 면도를 한다. 그러나 너무 진지한 문소리의 연기에 송강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NG를 내고 말았다. <효자동 이발사>는 탄탄한 연극계 출신의 조연들 덕에 무게중심을 잡는다. 쌀가게 최씨로 등장하는 ‘연극계의 큰형님’ 윤주상(송강호의 오른쪽)과 장진 감독의 영화로 낯익은 만두가게 왕씨 역의 정규수(송강호의 왼쪽). 연극계 큰형님 납시오 송강호, 문소리라는 든든한 주연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효자동 이발사>는 연극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탄탄한 조연들 덕에 탄력이 붙는 영화다. 정권 친화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쌀가게 최씨는 ‘연극계의 큰형님’ 윤주상이, “왕만두, 고로께, 음료 일절”을 내세우는 만두가게 왕씨는 장진 감독의 영화로 낯익은 정규수가, 경호실장 장혁수로는 <파이란>에서 최민식을 괴롭히던 보스 용식으로 등장했던 손병호가 등장한다. 이외에도 <올드보이>에서 사립감금소 소장으로 등장해 능글맞은 연기를 보여준 오달수가 한모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연탄가게 안씨로 등장해 극을 아슬아슬하게 만들고, <달마야 놀자>의 침묵스님 류승수는 “월남 가서 베트공하고 싸울 때 총알 날아오면 트위스트로 피할 거라”던 ‘까불이’이발보조 진기로 등장해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로 한모의 아들인 ‘사사오입 낙안’이다. <선생 김봉두>에서 눈물샘을 쏟아내게 만든 소석이로, <살인의 추억> 초반에 송강호가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 약올리던 동네 꼬마로 등장했던 이재응은 어른배우들이 “천재”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내년이면 중학교 1학년이 될 ‘장성한 총각’이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을 간직한 이 소년은 “아버지(송강호)나, 어머니(문소리)가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앞으로 부족한 걸 옆에서 잘 배워나가겠다”는 의젓한 인사를 잊지 않는다. 차분한 모범생 같은 감독 때문인지, 유난히 조용한 촬영현장. 가끔 터지는 딱다구리 같은 송강호의 웃음소리만이 정적을 가를 뿐이다. 현재 40% 이상 촬영을 마친 <효자동 이발사>는 한달 뒤인 12월 말 크랭크업할 예정이다.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선 손님은 이제 겨우 면도만 마쳤을 뿐이다. 머리모양이 어떨지는 꽃피는 봄이 되어야 알게 될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 <하류인생> [1] - 촬영현장 ①

임권택, 혼탁한 시대로 되돌아가다 영화 촬영장을 엿보는 건 신기한 일이다. 몇초짜리 한 장면을 얻어내기 위해 수 시간, 수십 시간 아니 며칠 동안 노력하는 감독과 스탭, 그리고 배우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스크린 이면에 자리한 뜨거운 진실을 알게 되는 듯해 흐뭇해진다. 일반적인 영화현장이 그럴진대 시대의 거장이 지휘하는 촬영장은 어떻겠는가. 그건 분명 살아 움직이는 영화사의 주요한 순간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99번째 작품 <하류인생>을 만들고 있는 임권택 감독의 촬영장을, 그것도 3일 동안이나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은 과분한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말 한마디, 손동작 하나, 갸우뚱거리는 고갯짓 하나에도 영화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담고 있었던 거장과의 황홀한 만남. 11월16일 서울시 중구 저동 중부경찰서 앞 “그는 아무리 잊고 싶어해도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 한국적 시간이라는 영토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타임머신으로서의 영화를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임권택의 영화는 더도 덜도 아닌 영겁회귀다.”(정성일,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현문서가 펴냄) 12쪽) 임권택 감독에게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이다. 그 자신이 이 주름많은 세월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4.19 당시, 이기붕 집 앞에서 집기를 마구 들어내는 현장에 있었으나 '빨치산의 아들' 이라는 피해의식 때문에 차마 동참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일요일의 도심은 을씨년스럽다. 11월16일 <하류인생>을 촬영하는 서울의 뒷골목도 마찬가지였다. 급작스레 수은주가 영상 2도로 떨어진 탓에 도심의 속살은 더욱 쌀쌀하게 보였다. 평소 같으면 발걸음이 뜸했을 이곳이 북적거린 건 이날의 촬영 때문이었다. 오전 9시쯤인데 촬영장 입구에는 벌써 150여명의 보조출연자가 웅성거리며 입에서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울 영상위원회의 협조로 길을 완전히 통제한 이곳에서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은 새벽 5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배경이 4월이다 보니 은행나무의 노란 이파리를 하나하나 뜯어내는 일이며, 촬영 예정지에 신도들이 불법주차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일, 포스터 부착 등을 마쳐야 예정대로 촬영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의 촬영분은 주인공인 태웅(조승우)이 건달 패거리의 상관 상필(김학준), 부하 춘식과 함께 전직 국회의원의 빚을 받으러 가는 도중 4·19 시위대와 맞닥뜨리는 장면. 이 과정에서 태웅은 시위에 참가한 서울대학생 승문을 만나게 된다. 그는 훗날 태웅과 결혼하게 되는 혜옥(김민선)의 동생. 아무 생각없이 거리에 나왔다가 시위대를 향해 욕을 뱉는 춘식이와 시비가 붙어 길바닥에서 뒹굴게 된다. 사실, 4·19라는 사건은 이들 건달에게 하등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 임 감독에 따르면 이들은 “세상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하류인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하찮은 인생들의 발걸음을 4·19 시위대와 맞닥뜨리게 한 이유는 뭘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이태원 태흥영화 사장이 힌트를 준다. “그때는 건달 아니라 사회의 하층민들도 저런 놈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면 배알 꼴려했다고. 나는 배가 고파서 하루하루를 허덕이는데, 돈이 없어 대학을 못 갔는데 잘난 놈들이 저러고 있으니 그럴 것 아니냐고.” 4·19 장면은 건달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이 아무리 하류인생일지라도 결코 역사의 격랑을 피해 지나칠 수 없다는, 일종의 운명을 예감케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오전 촬영은 좁은 골목길 안에서만 진행됐다. 사람들이 경찰에 쫓겨들어오는 장면을 찍는데, 얼핏 보기에 별다른 미술효과를 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앵글 안 풍경은 영락없는 60년대다. 김승호, 허장강이 나오는 <저 언덕을 넘어서> 포스터나 표어 같은 소품도 큰 역할을 하지만, 무엇보다 도심의 뒷골목 자체가 묘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이다. 좁은 골목과 계단, 낡은 벽, 그리고 그림자 등이 당대로 돌아가게 한다. 사실, <하류인생>은 9월7일 크랭크인 이후 그동안 광화문, 삼청동 등 서울 도심의 뒷골목에서 상당 부분을 촬영해왔다. “다른 이들은 옛 서울 모습을 찍기 위해 지방 소도시에 가는 모양인데, 그런 곳일수록 더 찍을 데가 없어요. 부산에만 그런 풍경이 좀 남아 있죠. 결국 서울 도심의 뒷골목에서 찍어야 한다는 거요.” 일찍부터 서울에서 찍을 계획을 세웠던 임권택 감독은 연출부와 함께 서울 도심 곳곳을 돌며 철저하게 헌팅을 했던 것이다. 오후가 되자, 이날의 하이라이트인 4·19 시위장면 촬영이 시작된다. 시위대가 길가에 늘어서서 구호를 외치고 있으면, 낚싯대에 매달린 특수화약이 펑펑 소리를 내며 최루탄처럼 터진다. 거리에 퍼지는 하얀 분말과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보조 연기자들의 모습이 너무 실감나 마치 ‘가투’ 현장에 나온 양 착각이 들 정도다. 일부는 스티로폼으로 만든 돌을 던진다. 바람이 조금 부는 날이라 스티로폼 안에 진짜 돌을 집어넣었더니 그 또한 실감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큰 촬영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임 감독은 평온한 모습이다. 정일성 감독, 김영빈 감독, 조감독 등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모니터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혹시 그는 잠시 도도한 세월의 흐름을 되새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일제시대에 태어나 10대 시절 해방공간의 피비린내를 살았고, ‘빨치산의 아들’이란 ‘주홍글씨’를 새긴 채 4·19, 5·16, 유신, 광주항쟁 등 세월의 비극을 넘어왔던 그 자신의 삶이 이 ‘복원’된 공간과 시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었을까. 임 감독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11월17일 경기도 부천시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안 <하류인생> 오픈세트 “항상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아주 피가 끓습니다… 말씀은 황송하오나 도승지 민 어른 댁 ‘노안도’는 제 십년 전 그림이옵고, 그걸 어찌 다시 그릴 수 있겠습니까. 환쟁이한테 반복은 곧 죽음이옵니다.”(<취화선> 중 장승업의 대사) 조승우가 골목을 누비며 격투를 벌이는 롱테이크신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호쾌한 액션장면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60년대 내 액션영화와 비교해보려 했던 <장군의 아들>처럼, 이번에도 <장군의 아들> 이후 내 액션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싶다"는 임감독의 포부는 이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왼쪽 사진). 혜옥이 태웅을 찾아다니는 장면도 똑같이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앞선 장면이 좀더 사실감 있고 다이내믹한 액션을 담으려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태웅에게 끌리는 혜옥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촬영장면을 보던 임감독은 여경보 스테디캠 기사에게 "이게 너무 부드러워서 안 아파" 라고 말했다.(오른쪽 사진)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안에 차려진 <하류인생> 오픈세트에 들어서니 정말 시간을 거슬러온 듯 어안이 벙벙해진다. 1600여평의 대지 위에 건설된 이 세트는 60년대의 명동 골목을 꼼꼼히 재현하고 있었다. <취화선> 오픈세트를 만들었던 주병도 미술감독의 정교한 솜씨는 단지 그 시대의 공간을 재현한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체취까지 맡게 해준다. “화려하면서도 슬프게 만들어달라”는 임권택 감독의 주문을 받은 그는 밤에는 화려하지만 낮에는 쓸쓸한 느낌이 배어나도록 세트를 꾸몄다. 이날의 배경은 전날에서 2년을 거슬러온 1958년. 이 영화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시점이기도 하다. 촬영분은 태웅이 혈혈단신으로 동대문파에 맞서 싸우다 얻어맞는 장면이었다. 임 감독은 골목으로 도망치던 태웅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상대 무리와 격투를 벌이는 모습을, 스테디캠을 이용해 한컷 안에 담으려 했다. 이동거리로는 150m 정도 되며, 시간으로 따지면 40초가 넘는 장면을, 그것도 실감나는 액션을 하는 가운데 딱 한 호흡으로 찍어내겠다니. 스탭들은 이 장면을 이날 밤 안에 끝낼 거라고 생각지 않는 눈치다. 하긴, 임 감독조차 “이게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찍힐지 잘 모르겠단 말이요”라며 초조한 모습을 보이니. 임권택 감독은 오디션을 통해 116명의 신인배우를 선발했다. 극단 학전 소속 배우들을 비롯해 연극배우들이 대다수지만, 연기학원 등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예비 연기자들도 여럿 발굴됐다. <지하철 1호선>등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했던 김학준(흰 양복 차림의 연기자)은 주요 배역 중 하나인 김학준 역을 맡았는데, 잠깐이나마 이런 배우들의 얼굴 하나하나에 포커스를 캊춰주려 애쓰기도 했다. 저녁 9시 무렵 리허설이 시작됐다. 임 감독이 나서 이곳저곳을 신경 쓴다. 무술팀의 호흡이 맞지 않자 목소리가 갑자기 격앙되기도 한다. 유난히 씩씩한 목소리의 무술감독은 임 감독의 주문에 따라 새로운 합을 짜서 보여줬고, 임 감독은 자신의 의견을 붙였다. 리허설 결과에 따라 그는 배우들의 동선, 액션의 모양새를 조금씩 바꿔갔다. 30여명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조절하던 임 감독이 마침내 “하이, 슛”을 외친다. 첫 테이크는 배우들 사이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고, 두 번째 테이크에선 무술연기자의 “핫!” 하는 기합을 “컷!”으로 착각한 조승우가 잠시 연기를 멈추는 바람에 NG가 났다. 모두 지친 탓에 잠시 쉰 뒤 세 번째 테이크가 이어졌다. 40여초의 촬영이 끝난 뒤 모든 스탭이 잘됐다는 표정을 짓는데, 임 감독이 고개를 젓는다. “여기서 가슴을 정확하게 쳐야 돼요, 여기서도 잘 안 맞았어. 좀 시원시원하게…”라며 주문한다. 결국 네 번째 테이크에서 임 감독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케이”를 외친다. 긴장하며 임 감독의 입을 보던 스탭들이 일제히 우렁찬 박수를 친다. 이때가 밤 11시30분이 조금 넘었을 무렵. 모두들 시계를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짓는다.

미리보는 겨울영화 68편 올가이드 [6] - 1월 ③

드라이브 Drive <먼데이> <총알주자> <포스트맨 블루스> 등 쾌속질주, 기상천외의 영화를 만든 사부의 연출작. 이상하게 생긴 인물들이 평법하지 않은 상황으로 뒤얽혀가는 사부식 릴레이영화. 평범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 자신의 차에 올라타 앞차를 추격하라고 협박하는 강도들에 끌려 어느 어설픈 추격전에 동참하게 된다. 요컨대 죽도록 달리거나, 달리다가 죽거나. 레이디스 앤 젠틀맨 And Now… Ladies and Gentlemen <남과 여>로 66년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영화. 지난해 칸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다.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린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가 모로코의 해변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변장에 능한 영국 출신의 천재 보석 도둑과 바람난 애인에게 버림받은 재즈가수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나누고 사랑을 키워간다. 요컨대 부분기억상실증을 치료받아 사랑을 완성하라. 열두명의 웬수들 Cheaper by the Dozen 요즘 세상에 열두 남매를 키우는 가정은 매우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 베이커씨네 아이들은 열두명. 독립을 열망하는 맏딸 이하 남매들은 취미도 제각각, 불만도 제각각이지만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한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인 엄마가 신간 홍보차 길을 떠나자마자 혼자서 집을 떠맡은 베이커씨 눈앞에는 북새통이 벌어진다. 요컨대 스티브 마틴의 ‘나홀로 집에’. 비욘드 보더스 Beyond Borders 사라 조던은 난민돕기에 열심이지만 냉혈한인 남편은 아내의 사회적 관심과 열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선 파티에 참석한 사라는 재난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이건 달려가 생명을 구하는 의사 닉 캘러한을 만난다. 사라와 닉은 처음에는 신념을, 다음에는 사랑을 나누게 된다. <프리스트>의 라이너스 로치가 냉정한 남편으로 분한다. 요컨대 제3세계의 곤경을 배경으로 삼은 선하고 잘생긴 남녀의 로맨스 프리키 프라이데이 Freaky Friday 제목의 뉘앙스와 달리, 귀여운 코미디 소품. 마음 맞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엄마와 딸이 있다. 뮤지션을 지망하는 딸을 지지하지 않는 엄마, 새아버지 후보가 영 마뜩지 않은 딸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크게 다투고 만다. 그러나 다음날, 예기치 않은 사건이 벌어진다. 엄마와 딸의 몸이 서로 바뀐 것이다. 서로의 몸을 빌려 생활하는 동안 이들은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지만, 엄마의 결혼식까지는 몸을 되돌려야만 한다. 요컨대 엄마와 딸의 몸이 바뀌었다. 모녀간에 벌어진 ‘스위치’. 타임라인 Timeline 이제 그가 신작을 내놓으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1999년작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미국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중세기 복장의 남자가 중상을 입은 채로 발견된다. 결국 숨을 거둔 그의 몸을 검진한 의료진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의 장기가 절반이 나뉘어 어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타임머신의 문제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대체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리쎌 웨폰> 시리즈와 <컨스피러시> 등 액션과 스릴러에 일가견이 있는 리처드 도너가 연출을 맡았다. 요컨대 마이클 클라이튼의 타임머신을 타다. 사무라이 Samourais 21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한 형사와 악마의 대결. 경찰에 잡힌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는 500년 전 태어난 악마다. 그는 자신을 체포한 형사의 딸의 몸을 통해 부활하겠다면서 죽고, 형사와 그 딸의 연인은 이를 막고자 악마와 대치한다. <스위밍 풀>의 제작자 마크 미소니에와 올리비에 델보스크가 홍콩과 일본 스탭들을 모아 제작했다. 요컨대 불로장생 악마의 주문, 일본의 500년을 가로지르다. 소울 어쌔신 Soul Assassin 한 남자가 자신의 약혼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도한다. 금융계에서 전도유망한 미래를 가졌던 그는 이 일로 크게 좌절하고 복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한다. 그는 여자친구가 살해된 이유를 추적하던 중 여자친구에게 자신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영혼 암살자’라는 제목은,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이 연인의 죽음으로 피폐해졌다는 의미. 요컨대 한 남자의 영혼을 망가뜨리고 복수심에 불타게 한 놈은 누구인가. 판타스틱 플래닛 La Planete Sauvage 에니메이션으로는 드물게 칸 황금종려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특별상을 수상한 르네 라루의 1982년작. 팽창된 과학문명으로 인해 인류가 황폐해진다면, 새로운 문명은 어떻게 재건설될 것인가를 묻는다. ‘휴머노이드’의 삶을 다루는 기이하고, 또 기이한 에니메이션. 요컨대 에니메이션으로 점치는 휴머니즘. 블러디 말로리 Bloody Mallory 결혼을 앞두고 행복하게 하루하루 보내던 말로리. 결혼식 날, 폭력적으로 돌변한 남편이 그를 공격하자 맞대응을 벌이던 말로리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을 죽인다. 이제 그는 악마와 뱀파이어 무리에 대항하는 여전사가 되어, 세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지옥의 문’이 열리지 못하도록 지키는 일에 나선다. 요컨대 <레지던트 이블> + <블레이드> 타임 마스터 Les Maitres de Temps 피엘은 아버지와 함께 단 둘이 퍼디드 별에서 살아간다. 우주 호박벌에게 공격을 받은 아버지는 죽음을 직감하고 아들 피엘을 계란형 연락장치와 함께 외계의 숲으로 피신시킨다. 르네 라루가 1982년에 만든 판타지애니메이션. 판타페스티벌 최우수 어린이영화상 수상작. 요컨대 소년 우주 모험기에 관한 에니메이션. 1월 영화제 1995년부터 예술영화 수입과 배급의 고집을 지켜온 영화사 백두대간이 창립 10주년을 기념하며 자축의 의미로 영화제를 연다. 그간 백두대간이 수입해 선보였던 작품들 중에서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10편의 영화를 엄선해 "20세기 최고의 감독! 최고의 걸작 베스트10"이라는 타이틀로 매달 한두편의 작품을 상영하기로 한 것이다. 그 첫째 달인 1월에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과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를 상영한다. 이미 비디오로 출시돼 있는 작품들이지만, 영화사에 회자되는 걸작들인 만큼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는 감회도 새로울 것이다. 1월16일부터 20일까지는 하이퍼텍 나다에서 이탈리아무성영화제가 열린다. 이름하여 ’열정과 도발.’ 네오 리얼리즘의 고향 이탈리아의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한 스타 여배우들의 대표작을 선별해서 상영하는 행사다. 1910년대와 20년대에 활약한 피나 멜리켈리, 이탈리아 알미란테 만치니, 린다 보렐리, 마리아 자코비니 등의 출연작 15편을 만나볼 수 있다.

미리보는 겨울영화 68편 올가이드 [5] - 1월 ②

브라더 베어 Brother Bear 인간에게 곰은, 곰에게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1만년 전의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지역에 살고 있는 키나이는 부락의 무당 타나나에게 토템을 내려받는 의식을 받는다. 그러나 큰형 시트카에게는 리더십의 독수리, 작은 형에게는 지혜의 늑대를 준 것에 비하여 자신은 사랑의 곰을 받자 삐쳐버린다. 어느 날 곰 사냥에 나섰다가 위험에 처한 키나이는 시트카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키나이는 그 곰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그 순간 하늘에서 빛이 내려오며 곰으로 변하고 만다. <브라더 베어>는 키나이가 곰으로 변한 뒤 ’사랑’을 깨닫는 이야기다. 곰을 단지 포악한 맹수라고만 생각하며 공격했지만, 사실은 그들 역시 인간과 다름없는 생명인 것이다. <브라더 베어>는 ’인간 중심’의 오만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과 관용을 깨우쳐야 한다고 말한다. <라이온 킹> 이후 오랜만에 나온 동물애니메이션 <브라더 베어>는 곰이 활동하는 숲의 풍경이나 빙하의 모습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요컨대 타자를, 동물을 이해하고 사랑하자. 페이첵 Paycheck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의 원작자 필립 K. 딕의 단편소설을 오우삼이 영화로 옮겼다. 주인공은 천재 공학자 마이클 제닝스(벤 애플렉).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그는 최근 2년간 기억이 지워진 것을 발견한다. 영문을 추적하던 제닝스는 자신이 9천만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2년간 어떤 비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돈은 어디에 있는가? 돈의 행방을 찾아나서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알 수 없는 물건이 담겨 있는 봉투 하나다. 그는 동료이자 연인인 레이첼(우마 서먼)의 도움을 받아 과거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유일한 단서는 봉투 안에 들어 있는 19개의 물건들. 그러나 제닝스가 기억에 가까이 갈수록 위험은 커져간다. 경찰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페이첵>에 등장하는 로봇의 목소리연기를 맡은 폴 지아매티의 최근 인터뷰에 따르면 <페이첵>은 "오우삼의 홍콩영화들보다 <페이스 오프>에 가까운 작품"이며 필립 K. 딕의 작품답게 기억에 대한 아이러니가 다뤄진다고. ‘무비이즈 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의 한 필자는 "오우삼 영화는 언제나 스토리텔링이 문제였다"며 "<페이첵>은 원작자가 필립 K. 딕인 만큼 기대해볼 만하다"고 썼는데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요컨대 필립 K.딕과 오우삼의 만남. 지옥갑자원 Battlefield Baseball 누가 이곳을 꿈의 구장이라고 했나? 가타로 만의 1997년작 만화를 각색한 영화 <지옥갑자원>에서 모든 고교야구팀이 선망하는 고시엔 구장은 도살장이나 다름없다. 무법 갑자원의 최강은 각종 호러영화 캐릭터들의 친목 모임처럼 생긴 잔인무도한 게도 고교팀. 여기에 도전하는 후줄근한 세이도 고교에는 별 희망이 없어 보이지만, 야구 천재 쥬베이가 전학 오면서 서광이 비친다. 그러나 쥬베이는 캐치볼을 하고 놀던 아버지가 자신의 마구 탓에 운명한 뒤 야구와 절연하기로 맹세한 몸. 게도 팀과 일전을 벌인 뒤 글러브에 붙은 채 나뒹구는 친구들의 사지를 보고서야 쥬베이는 마운드에 선다. ‘갑자원’이라는 글자가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타이틀부터 ‘쥬베이 야구’라는 주인공 이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비장함과 엄청난 난센스가 한치의 양보없이 접전을 벌인다. 요컨대 활동사진이 아닌 활동만화를 구경하고 싶다면…. 내사랑 싸가지 올 한해 충무로의 새로운 아이디어 보물창고로 떠올랐던 인터넷 소설에 뿌리를 둔 영화. 강단있고 발랄한 여고생 3학년 강하영(하지원)은 연하의 남자친구에게 실연당한 날, 우울한 마음으로 길을 지나다 외제차에 흠집을 내고 만다. 차주인 안형준(김재원)은 강하영을 붙들고 수리비 300만원을 내놓으라 한다. 그런 돈 없다고 버티는 하영에게 형준이 내놓은 ‘싸가지’없는 대안은, 하루에 3만원어치씩 100일간 노비활동을 하라는 것. 그러나 실제 수리비가 3만원짜리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하영은 두눈 밝혀 복수를 준비한다. <내사랑 싸가지>는 동명의 원작소설에서 캐릭터만 따온 영화다. 두 주인공의 관계나 각 에피소드들은 원작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 신동엽 감독의 설명. 이번 작품으로 충무로에 데뷔하는 신동엽 감독은 <동감>의 원작 시나리오를 썼다. 요컨대 발랄 여고생과 싸가지 대학생, 인터넷 방식으로 사랑전선 돌입하다. 안녕! 유에프오 버스운전사와 시각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 구파발행 154번 막차버스 기사 상현은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일하는 남자다. 이 버스의 주고객 경우는 시각장애인이지만 신체적 장애에 아랑곳없이 씩씩하게 사는 여자. 버스를 매개로 이뤄진 두 남녀의 만남이 사랑으로 굳어지기까지를 코믹한 대사와 코끝 찡한 순애보를 모두 안겨주겠다는 것이 제작진의 포부다. 장애인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이 영화는 냉정한 현실감각보다 따뜻한 가슴을 먼저 내밀고 있다. 순진하고 즐거운 청년 상현은 ‘박상현과 뛰뛰빵빵’이라는 알 수 없는 교통방송을 만들어 DJ로도 활동하고, 시각장애를 가진 경우는 UFO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품행제로>의 작가 이해영, 이해준과 <인디언썸머>를 쓴 김지혜 세 사람이 공동작업했다. 요컨대 아픔있는 사람이나 외로운 사람, UFO 보고 사랑도 하면 행복할 수 있어요. 라스트 사무라이 Last Samurai 옷자락을 펄럭이며 장검을 휘두르는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인물은 제다이가 아니라 사무라이다. <와호장룡>과 <글래디에이터>의 소구력을 결합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라스트 사무라이>의 무대는 1870년대 후반 메이지 시대의 일본. 남북전쟁에서 전공을 세운 군인 네이단 앨그린은 일본 천왕의 군대를 개량하고 훈련시키는 소임을 받아 일본에 파견된다. 앨그린의 임무 뒤에는 봉건체제를 척결하고 서구화를 추진하려는 천왕의 포석이 숨어 있다. 그러나, 사무라이와의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앨그린은 사무라이의 수장 가츠모토로부터 무사도를 배우고 그 정신에 경도된다. 톰 크루즈를 <파 앤드 어웨이> 이후 11년 만에 시대극에 다시 끌어들인 감독은 <글로리> <커리지 언더 파이어>처럼 극적 갈등이 액션보다 우세한 전쟁영화를 만들어온 에드워드 즈윅 감독. 대학 시절부터 일본 문화에 심취했다는 즈윅은 10년이 걸려 이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일본, 뉴질랜드, LA에 세트를 건설했고 <글래디에이터>의 존 로건이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요컨대 할리우드의 일본 문화 탐닉, ‘사무라이 톰 크루즈’까지 이르다. 취한 말들의 시간 A Time for Drunken Horses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이 낳은 피폐함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쿠르드족 고아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 힘겹게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을 넘나들며 삶을 꾸리는 다섯 남매가 주인공이다. 동생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누나는 이라크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하지만 병든 동생은 말 한필과 바뀌어 다시 이란으로 내쳐진다. 많은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리라>에서 조연출을 맡기도 했던 이란의 젊은 영화작가 바흐만 고바디가 연출한 영화. 이란의 현실을 좀더 근접해 보기 위해 노력하는 진지한 시선이 들어 있다. 2000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출품하여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다. 요컨대 키아로스타미가 “멀리서 보는 마을에 얼마나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지는지 아는가?”라고 했단다. 스패니시 아파트먼트 L’Auberge Espagnole 프랑스 청년 자비에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다. 교환학생으로 바르셀로나에 간 자비에는 국적이 다른 일곱명의 학생들과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고, 새로운 사랑과 삶의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스패니시 아파트먼트>는 감독이 다섯명의 외국인 룸메이트와 동거하던 여동생을 보고 힌트를 얻은 영화. 배우들은 실제로 일곱개 나라에서 모인 젊은이들이다. 요컨대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아파트에서 배웠다. 런어웨이 Runaway Jury 존 그리샴의 소설 <사라진 배심원>이 원작인 영화. 무기회사와 한 젊은 여자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다. 무기회사쪽 변호사 피치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배심원들을 협박하거나 매수하려고 한다. 그는 성공한 줄 알았지만, 배심원 중 한명은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키스 더 걸> <돈 세이 워드>의 게리 플레더가 연출을 맡아 스릴러의 성격이 강해졌다. 요컨대 한순간도 방심하지 말 것. 재판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미리보는 겨울영화 68편 올가이드 [4] - 1월 ①

고독이 몸부림칠 때 몸부림치는 고독이 아니라 고독을 털어내기 위한 몸부림을 그리는 따뜻한 희극. 반농반어 촌락인 경남 남해의 물건리는 오랜 친구, 오랜 앙숙이 모여사는 마을이다. 유황오리, 황소개구리를 거쳐 타조농장을 경영하는 배중달과 노총각 동생 중범, 조숙한 손녀와 친구처럼 사는 필국, 건망증 심한 천생연분 찬경 내외, 중달과 매일 싸우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조진봉이 물건리가 자랑하는 ‘물건’들. 오늘도 예외없이 진봉과 중달이 드잡이를 벌이고 이웃들이 뜯어 말리느라 들썩이는 마을 한가운데로 선녀처럼 고운 한 부인이 당도한다. 모종의 사연을 안고 서울에서 내려 온 송인주 여사는 이내 마을에 연분홍 바람을 일으킨다. 한편 결혼에 뜻이 없는 중범은 형 중달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등장하는 꿈에 가위눌리게 하고 그를 짝사랑하는 횟집 여인 순아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내용 확인!!!!) 박영규, 진희경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니어 축에 끼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주현, 김무생,선우용녀, 송재호, 이주실, 양택조 등 그간 스크린에서 진면목을 펼칠 합당한 자리를 누리지 못했던 노련한 연기자들 앞에 멍석을 깔아놓았다. 공력 10단의 베테랑 배우들의 잼 세션 같은 앙상블 연기와 호흡을 맞춘 연극계 출신 늦깎이 신인 이수인 감독은 “말할 수 없는 공허감과 폭소를 동시에 주는,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같은 영화”를 예고했다. 요컨대 불혹과 이순의 미덕을 거부하는 철없는 어르신들의 성장드라마. 모나리자 스마일 Mona Lisa Smile 1953년. 전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은 아직 자유를 말할 수 없었다. 온몸을 옥죄는 코르셋처럼 그들에게 강제된 길은 ‘현모양처’로 살아가는 것뿐. 보수적인 여학교 웨슬리대학에 젊은 미술사 교수가 부임해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그림 속의 여자 모나리자는 왜 웃고 있었을까?" 툭하면 삼천포로 빠지고, 무엇이든 스스로 생각해낸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이상한 교수 캐서린. 그는 보수적인 학교 행정에 반발하며, 학생들에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길을 찾아가라고 격려한다. 얼핏 <모나리자 스마일>의 스토리라인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연상시키지만, 제작진은 그런 단순한 비유를 거부한다. 이는 소녀들의 성장 이야기일 뿐 아니라 여성 운동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 배우들의 진용 또한 이 영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변혁을 꿈꾸는 젊은 여교수 줄리아 로버츠의 미술사 수업에 모여든 학생들은 <스파이더 맨>의 커스틴 던스트, <세이브 더 래스트 댄스>의 줄리아 스타일즈, <세크리터리>의 매기 질렌홀로, 각자 개성과 역량이 한치도 빠지지 않는 젊은 유망주들이다. 마이클 뉴웰 감독은(<네번의 결혼식와 한번의 장례식>) 당시 시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방대한 리서치 작업을 거쳤고, 배우들은 볼룸댄스와 예절교육을 받고, 코르셋을 입느라 진땀을 뺐다는 후문이다. 요컨대 50년대 여성판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그 이상. 피터 팬 Peter Pan 월트 디즈니의 <피터 팬>은 ’명랑’ 애니메이션이었고, 스필버그의 <후크>는 ’네버랜드로 돌아가지 못한 피터 팬’이라는 가정으로 지어낸 후일담 또는 외전격의 영화였다. 모두가 알고 있는 동화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영화. P. J. 호건의 <피터 팬>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 원작동화를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낸 최초의 영화. 따라서 <피터 팬>에는 몇 가지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띈다. 전적으로 웬디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사실. 보수적인 아버지로부터 이제 어른이 돼야 한다는 설교를 듣던 밤, 웬디는 어린애로 사는 것과 어른으로 사는 것의 장단점을 투영한 인물, 피터 팬과 후크를 만나고 그들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제이슨 아이삭을 아버지와 후크에 1인2역으로 캐스팅한 사실 또한 원작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남성(또는 아버지)에 대한 웬디의 공포와 동경을 반영하는 설정. <뮤리엘의 웨딩>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등 여성의 성장을 테마로 한 로맨틱코미디 연출에 일가견이 있는 P. J. 호건다운 선택으로 보인다. 피터 팬을 연기하는 최초의 어린 소년 제레미 섬프터, 제작진이 "찬란한 발견"이라 자신하는 웬디 역의 레이첼 허드 우드, 어벙한 아버지와 섹시한 후크의 1인2역 제이슨 아이삭의 연기 앙상블이 관건. 네버랜드, 해적선, 지하요새 등의 세트 미술과 팅커벨과 악어 등의 CGI 캐릭터도 빠뜨릴 수 없는 볼거리로 예고된다. 요컨대 나이를 먹어야 하는 소녀 웬디에 관한 성장동화.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은 세운상가만이 자신을 키운 인큐베이터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나, 인생의 1할은 학교에서 배웠네”라고 말하려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침묵과 시기와 질투와 경멸을 그리고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을 수컷들의 공간인 학교에서 배웠다는 감독의 고백이다. 이를 위해 유하 감독은 1978년 말죽거리로 거슬러오른다. 땅값이 오를 것이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을 간다. 선생들은 몽둥이 찜질에, 학생들은 세 싸움에 정신없는 아수라장이다. 이곳에서 현수는 학교 짱인 우식(이정진)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이소룡의 열혈팬임을 확인한 두 청춘은 더없는 친구 사이가 된다. 그러던 중, 하교길 버스를 같이 탄 현수와 우식은 올리비아 핫세와 꼭 닮은 여고생 은주(한가인)를 만나게 되고 동시에,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은주는 남자다운 우식에게 끌리고, 현수는 그런 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 무렵, 우식은 선도부장과 짱의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이지만 지게 되자 학교를 떠난다. 한편, 우식이 떠난 뒤 선도부장 무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현수는 급기야 은주마저 우식을 선택하자 평소 연습해온 쌍절곤을 품고서 학교 옥상으로 향한다. 그는 과연 누구를 쓰러뜨리고, 무엇을 취하려 하는가. 요컨대 아직도 청춘의 열병을 떼지 못한 이소룡 키즈에 관한 진단서. 태극기 휘날리며 반공영화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영화의 제목은 실상 페이크다. 영화는 외려, 태극기 휘날리며 선 이들의 군홧발 아래 찢겨 널브러진 육신들의 절규에 주목한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전쟁을 저주한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강제규 감독은 두 형제를 희생자로 지목한다. 그리고선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 끈끈했던 형제애가 허리 잘린 한반도처럼 두 동강 나는 과정을 뒤쫒는다. 진태(장동건)와 진석(원빈)이 그들이다. 집안의 희망인 동생 진석이 징집되자, 진태는 이를 막기 위해 기차에 오르지만 그마저도 낙동강 방어선에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이때부터 진석의 유일한 목표는 진태를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뿐이다. 대대장으로부터 공훈을 세우면 동생을 제대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진석은 전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한편, 동생 진석은 점점 전쟁광이 되어가는 진태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고 갈등은 급기야 폭발 직전에까지 도달한다. 극중 등장하는 두밀령 전투, 평양시가전 등 5개 주요 전투장면의 재현은 그 자체로도 볼거리지만, 두 형제의 엇갈리는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해 기대를 모은다. 순제작비만 146억원을 들인 이 초대형 전쟁영화는 촬영에 홍경표, 무술에 정두홍, 특수효과에 정도안, 프로덕션디자인에 신보경 등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스탭들이 참여했다는 점에서도 현 충무로의 테크닉 수준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요컨대 두 형제, 생사의 전장에 서다. 자토이치 座頭市 영화 <자토이치>는 동명만화가 원작이다. <새끼 달린 이리>와 함께 60년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이 사무라이만화는 사실 오랫동안 신타로 가추라는 배우 겸 감독 겸 제작자의 것이었다. 신타로 가추는 1962년 제작된 <자토이치 모노가타루> 이후 스물네편의 <자토이치>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았고 그중 7편의 제작을 겸했으며 두편은 직접 연출했던 인물이다. <자토이치>의 연출 주연을 겸한 기타노 다케시도 “<자토이치> 시리즈는 거의 신타로 가추의 개인소유물과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는 막부시대 사무라이의 머리색을 노랗게 물들이는 자유분방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연출과 주연을 겸한 기타노 다케시는 과거 <자토이치> 시리즈들과 사무라이영화들이 가진 틀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사극을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정교하고 사실적인 액션과 쉼없이 진행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나 <자토이치>의 독특한 매력은 다케시 특유의 유머와 영화 맨 마지막 부분의 탭댄스 군무장면에 있다. 모든 사건의 종결 뒤 타악기 리듬에 맞춰 등장인물들이 함께 탭댄스를 추는 이 장면은, 영화에 고여 있던 핏물을 다 흘려보내고 거부할 수 없는 카타르시스만 관객에게 남긴다. 요컨대 일본 무사 자토이치, 다케시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