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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파리]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 법안 합의에 엇갈리는 외국계 스트리밍 기업

프랑스영화의 배급 및 유통 과정의 순서와 기일을 규제하는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1982년 당시 극장 영화의 성역을 침범하기 시작한 비디오 시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문화부 장관 자크 랑이 시행한 법안이다. 그간 이 법안은 인터넷, 유료 채널, VOD 서비스의 등장으로 수차례 개정되었지만 프랑스는 장편영화의 경우 극장 개봉 후 36개월이 지나야 스트리밍 서비스를 허용한다는 비교적 엄격한 기준을 유지해왔다. 이 법안의 만기일을 15일 남짓 남긴 지난 1월24일, 문화부 장관 로즐린 바슐로는 영화, 텔레비전, 스트리밍 산업 대표들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를 체결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프랑스 방송 <카날플뤼스>는 개봉 6개월 후부터 장편영화를 방영할 수 있고, 넷플릭스는 15개월 후, 디즈니+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는 17개월 후, 여타 프랑스 텔레비전 채널은 22개월 이후부터 방영할 수 있다. 대신에 외국계 스트리밍 기업은 프랑스에서 달성한 매출의 20~25%를 프랑스영화나 시리즈물 제작에 투자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로즐린 바슐로 장관은 이 새로운 법안이 ‘극장의 특수성’, ‘영화의 다양성’을 보호하면서 “다양한 매체로부터 제작 투자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며 자찬했지만 이 체결의 맹점을 간과해선 안된다라는 게 언론의 공통된 입장이다. 체결 당시 외국계 스트리밍사로 유일하게 참여한 넷플릭스는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배급 유통 과정) 현대화의 중요한 첫걸음”이라며 다분히 모범생적인 발언을 했지만 사인도 직접 하지 않고 새로운 법안을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된 디즈니사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가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청각 생태계를 제공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프랑스 작품에 투자를 더 늘린 상황에서는 더더욱 실망스럽다.” 시리즈물이 주 종목인 넷플릭스에 반해 장편영화를 주메뉴로 방영하는 디즈니+나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가 이런 조건에서는 자사 작품의 프랑스 극장 상영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2023년 1월부터 프랑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할 워너사나 그 뒤를 따를 파라마운트사를 고려한다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 크로놀로지’는 2월10일부터 적용되고 있다.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기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글이 올라갔을 때엔 이미 제20대 대선 결과가 나와 있겠지만, 뒤늦게라도 이야기해보자면 이번 대선은 환경 정책과 관련해 중요한 기점이다. 기후 위기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5년은 ‘다음 기회에’를 외치기엔 너무 긴 시간이기 때문이다(어차피 지구에는 ‘다음 기회’ 같은 것도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후의 마지노선은 평균 온도 1.5도 상승인데, 그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겨우 7년 정도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환경 재난을 겪으며 기후 정치가 화두에 오른 이유가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도 그랬… 어야 하지만, 어쩐지 대선을 앞두고 기후 위기 대응을 엄중한 과제로 여기는 사람들은 (후보 본인들을 포함해)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유세 연설에서도, 텔레비전 토론에서도 기후 이슈는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환경을 보존해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재난의 현실이다. 곽재식 작가가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기후 위기는 “내일의 종말이 아닌 오늘의 반지하 침수”다. 당장 농사지을 작물이 변하는 문제고, 전력 공급망이 열팽창으로 변형되는 문제고, 살던 집이 물에 잠기는 문제고, 빙하에 묻혀 있던 바이러스가 노출되는 문제고, 화재와 홍수와 가뭄과 태풍이 늘어나는 문제다. 그리고 이것 모두는 정치의 문제다. 재난을 겪은 시민은 어디로 어떻게 대피시킬 것인가? 어떤 돈으로 어떻게 지원해줄 것인가?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찾아온다면 어떤 전략으로 외교를 할 것인가? 코로나19처럼 또 다른 팬데믹이 찾아온다면 어떤 방역 정책을 펼칠 것인가? 무엇보다 그러한 재난이 늘어나는 정도를 최대한 제어하기 위해 정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기후 위기 해결에 있어 기업과 국가 단위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노력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결국 기업의 생산 구조를 바꾸고 여러 국가가 연대해야 한다. 다른 국가를 설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기술 개발을 지원할 수 있는, 기후에 악영향을 주는 기업의 정책을 바꾸도록 유도할 수 있는 정부가 필요하다. 당장의 그러한 정책이 5년 뒤, 10년 뒤, 20년 뒤 우리의 삶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발등은 이미 불타고 있다. 이번 대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은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누가 선출될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알 수 없지만, 누가 선출되든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민생’은 악화되기만 할 것이다. 이 글이 정말 ‘디스토피아로부터’ 보내는 글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리코리쉬 피자' '더 배트맨', 미국영화에 새겨진 70년대의 흔적에 관하여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살에 죽는다. 그들은 21살에, 어쩌면 더 어린 나이에 정서적으로 죽는다.” - 존 카사베츠, [The Films of John Cassavetes: Pragmatism, Modernism, and the Movies] 1. <리코리쉬 피자>, ‘홈 무비’의 소실 1970년생인 폴 토마스 앤더슨은 <리코리쉬 피자>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1973년의 산 페르난도 밸리로 되돌아간다. 그의 아홉 번째 장편영화는 10대 소년과 스물다섯 살의 성인 여성이 커플로 결합하는 70년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년기의 흔적에 관한 개인적 기록이 반영된 배경일 테고,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균질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고 60년대를 관통하던 정치적 이상이 사라진 뒤의 시기다. 텔레비전에서는 전쟁을 알리는 뉴스와 소비상품을 광고하는 문구가 동시에 송출되고, 포르노그래피와 약물이 주류 문화에 침범하던 때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다시 한번 선택한 70년대 할리우드 변방의 작은 도시(산 페르난도 밸리는 그의 초기작들의 배경이다)는 좌절된 유토피아를 표상한다. 그곳은 할리우드의 미국적 꿈이 조각난 파편으로 버려져 있다. <리코리쉬 피자>가 지극히 불안정한 물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화장실 변기가 폭발해 물줄기가 솟구치는 모습이다. 견고하고 단단한 물체의 폭발과 역류하는 물은 화면을 난폭하게 변형시키는 영화의 무질서한 운동을 예고한다. <리코리쉬 피자>에 나오는 건축적 공간과 사물들은 소비상품이 약속하는 안정적인 내구성과 영구적인 시간을 갖추지 않는다. 언제 부서지고 파괴될지 모르는 잠정적인 시간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화장실은 이유 없이 폭발한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카메라가 야외로 나간 다음 장면에서 공원 잔디를 적시는 스프링클러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물의 불안정성과 자유로운 결합이 <리코리쉬 피자>의 연인들을 움직이게 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영화의 한 사례라 말하지만, 여기엔 이야기를 파열시키는 폭발과 구멍이 여전히 스크린에 드리워져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청소년 박람회 현장에 들이닥친 경찰이 갑작스럽게 개리를 체포한다. 그들은 총기를 소지한 16살 백인 남성의 살해 혐의를 고지하는데, 정작 경찰서에서 개리는 용의자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허무하게 끝나는 에피소드다. 실없는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에는 다른 흥미로운 측면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성공하고, 사업가로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 그와 비슷한 나이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소년은 총기 살인사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년대의 산 페르난도 밸리는 두 사건이 같이 벌어지는 곳이다. 소년과 성인 여성의 로맨스가 펼쳐지는 이 영화의 배경은 소년의 살인사건과 성인 여성의 포르노그래피가(알라나와 미팅을 하는 배우 에이전시는 그녀에게 가슴 노출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만들어질 수도 있는 세계다. 이 영화에서 주의 깊게 반복되는 거울의 이미지는 벌어진 것과 벌어지지 않은 것이 한몸을 이루는 두 세계의 이중적 가능성을 표시한다. 커플의 격렬한 감정적 충동은 영화에 언급되는 살인과 마약, 베트남전의 상흔과 더불어 발생한 결과다. 우리는 그들만큼 정신이상적인 행동을 보이고, 그들은 우리만큼 충동적이다. 서사를 잠시 진동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라지는 이런 미세한 파열은 세계의 감춰진 긴장을 영화에 덧붙인다. 이 작은 충돌에서 영화 속 인물들에게 불가피한 균열이 적힌다. 게리와 알라나는 연인처럼 동행하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고 질투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처럼, 이 영화는 하나의 인물과 공간에 안정적으로 머무르는 대신 계속해서 다른 사물과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인물이 개리와 알라나의 시선에 스쳐 지나가고 화면에 돌아오지 않은 채 사라져버린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를 찾는 개리와 알라나는 함께 머물렀던 장소들을 찾아가는데, 그곳에서 그들과 마주쳤던 인물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대표적인 장면인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처럼 도시를 점유하는 서로 다른 유형의 인물들을 하나로 묶는 픽션적 장치는 여기에 없다. <리코리쉬 피자>는 경계를 넘어선 공통의 매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리코리쉬 피자>가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영화의 장소들이다. 구체적으로 어느 공간을 집어서 특별한 영화의 장소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가 만들어지거나 상영되거나 영화 자체를 지시하는 통속적인 장소들이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배제되어 있다. 개리가 아역배우로 활동하고, 영화 문화와 비즈니스의 단면들이 끊임없이 나오는 데도 영화와 그 형상이 머무는 장소를 직접 비추는 것만큼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개리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가 나오는 텔레비전 쇼이고, 잭 홀든의 출연작이 아니라 그가 술에 취해 영화의 한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는 순간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도구(필름카메라와 마이크)들은 왝스의 선거용 홍보 영상을 찍는 장비로 실질적인 기능이 바뀌어 있다. <리코리쉬 피자>는 20세기의 자취를 돌아보면서 영화 문화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되짚기보다는 텔레비전 쇼와 프로파간다 뉴스를, 인접 매체와 경합하고 장소를 내어주던 영화의 변형된 역사를 비춘다. 개리가 포르노 영화를 선전하는 신문 기사를 들여다보는 동안, 알라나는 석유 파동을 보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다. 기름값이 폭등해 LA의 거리에 늘어선 자동차들이 멈춰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장 보드리야르가 관찰한 대로 사막과 사막을 잇는 미국의 도시에서 문화를 일으키는 두 요소가 자동차와 영화라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미국의 두 가지 문화적 질료가 총체적인 위기와 중단에 이르는 최초의 순간에 도착한다. 앤더슨이 보여주는 세계는 영화의 장소가 지워지고 자동차 시동이 꺼져버린 곳이다. 비유적인 뜻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는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시대가 스크린에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자동차를 멈추게 한 석유 파동이 벌어진 1973년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적하는 것처럼) 존 포드가 사망한 해이자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 영화인 <우린 집에 돌아갈 수 없어>가 공개된 연도이다. 시력을 잃은 한쪽 눈에 안대를 끼고, 나머지 한쪽 눈으로 허구적 공동체의 역량을 관객의 삶에 기입하던 작가들의 시간이 끝났다. 도시의 인간 공동체를 관통하던 영화의 시대가 끝났다. 소비상품과 정치의 이해관계가 앞서는 팻 버니의 사업장과 왝스의 선거사무소는 도덕적 인간 공동체를 구획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제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작은 행동으로부터 어떤 의미를 발견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를 종합할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없다. 레이의 영화 제목처럼 그들은 이전과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연료가 떨어진 채 LA의 밤거리를 거꾸로 주행하는 알라나와 개리의 대형 트럭은 귀환할 수 없어진 시대의 한 표식이다. 개리와 알라나는 이름이 비어 있는 자들이다. 소속될 수 있는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알라나는 개리를 당대의 위대한 스타들인 ‘로버트 굴렛’과 ‘딘 마틴’의 이름으로 부르고, 잭 홀든과의 오디션을 끝내고 나서 “그레이스 켈리”처럼 보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한다(그러나 정작 알라나가 본명을 말하려고 하자 홀든은 그녀를 땅에 처박고 질주한다). 그들은 원래의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스크린에 등장하는 스타의 이름을 대입한다. 하지만 반복건대, <리코리쉬 피자>에는 영화의 장소가 손실되어 있다. 그들은 스크린에 출연하는 대신 거울과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것들에 붙잡힌다. 개리는 쇼윈도를 통해 바라본 물침대에 매혹되고, 팻 버니 가게에 구경 온 여자친구를 유리창으로 보고 시선을 빼앗긴다. 알라나를 처음 마주할 때도 화면에는 현실의 얼굴과 더불어 나타난 거울 속의 얼굴이 보인다. 영화가 없는 세계에서 그들이 꿈꿀 수 있는 이미지의 변형은 거울과 유리창의 표면에 시선을 던지는 것뿐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 유년기의 ‘홈 무비’이다(실제로 알라나 하임의 가족이 모두 출연하고 그들의 집 내부 공간이 장면으로 다뤄진다). 이제는 아벨 페라라 같은 소수의 언더그라운드만이 고수하는 홈 무비의 속성을 산업과 시스템의 영역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척 대담한 일이다. 이야기가 불균질하다거나 인물들의 거듭되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영화의 홈 무비적 성질을 고려한다면 부자연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홈 무비의 형식과 리듬을 따라 어린 시절의 친밀한 장소들을 비추고 그 장소를 오가는 작은 공동체를 관측한다. 이는 차츰 영화가 진행되면서 소멸하기 직전의 기록으로 변모한다. 시간은 멈춰버린 것처럼 조금도 흘러가지 않으며, 눈앞에 나타났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이 영화의 불균질한 서사는 영화에 나오는 모든 장소와 인물에 변형을 일으킨다. 세계는 미세한 단위로 쪼개지고 군중을 묶는 공동의 표식은 부재한다. 그러니 정확히 고쳐 말하면, <리코리쉬 피자>는 집에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의 곧 붕괴할 ‘(노) 홈 무비’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1970년대의 유토피아적 매혹이면서, 그 시대의 끝이다. 신원을 모르는 상대에게 걸려온 전화벨 소리가 전하는 궁금증과 흥분을 담아낼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군중들을 무작위로 배치하는 영화의 장소 또한 사라지고 있다. 개리와 알라나는 마침내 도시의 밤거리에서 재회하고 끌어안는다. <리코리쉬 피자>는 갑작스러운 재회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데, 스탠리 카벨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위기에 놓인 커플의 재결합을 추구하는 할리우드 재혼 코미디에 속한다. 거리를 달려오는 두 사람의 발걸음으로 재회하는 마지막 순간은 돌이킬 수 없이 멀어져 버린 것들을, 더 이상 마주치지 않는 것들을 다시 결합하는 매혹적인 영화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옹하는 두 사람의 배경으로 자리 잡은 영화관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영화가 머무는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영화의 주변부를 맴도는 연인들의 행복한 시간을 끝내는 역설적 의미의 ‘엔딩’이기도 하다. 2. <더 배트맨>, 패닉 흥분과 도취가 지나간 자리에 파괴된 잔해가 남겨진다. 배트맨 시리즈의 새로운 책임자인 맷 리브스는 다시 만들어진 <더 배트맨>이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를 적극적으로 참조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 로만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가 주로 언급되는데, 시대를 관통하는 정신적 공허와 편집증적 증상이 뒤섞여 분출되는 폭력의 세계를 그린 필름누아르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개인의 병리적 증상이 국가의 환부이자 시대의 얼룩으로 치환되는 남성서사의 거대한 삼위일체를 이루던(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던) 마지막 시기의 영화들. 리브스는 개인과 국가 간의 밀접한 접속이 끊어진 시대에 여전히 국가의 붕괴를 꿈꾸는 시대착오적 기획을 <더 배트맨>의 고담시에 투영한다. 영화 속에서 리들러는 말한다. 토마스 웨인이 약속한 재개발 기금은 거짓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자본가의 공약과 정치 언어는 실천되지 않았고, 눈먼 기금은 정치인들과 결탁한 도시의 지하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그는 도시 기획의 원죄를 자본의 상속자인 브루스 웨인에게 덧씌운다. 리들러의 계획을 가속하는 것은 브루스 웨인과의 계급차다. 그들은 같은 장소에서 희망의 언어를 듣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살아남아 주목받은 것은 버림받고 자라난 수많은 고아들이 아니라 단 한 명의 브루스 웨인이다. 리들러는 공동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도시 공간을 범죄적 폐허로 전환하려 한다. 리브스의 <더 배트맨>이 주의 깊게 묘사하는 부분은 도시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조직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기관처럼 작동하는 면모다. 도시 공간의 규칙을 실행하는 감춰진 논리가 기계적으로 유통되는 범죄의 절차를 통해 긴 시간에 걸쳐 드러난다. 실마리를 아는 자들은 진실이 밝혀지면 그들을 지탱하는 도시 전체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며 입을 닫는다. 이 과정에서 ‘날개 달린 쥐’를 찾는 탐정의 추론은 ‘펭귄’에서 ‘박쥐’로 종래에는 ‘매’로 그 정체를 옮겨 간다. 불확실한 판단과 추론의 혼동이 배트맨의 시야에 비친 고담시의 표상에 새겨진다. 마찬가지로 배트맨과 리들러는 망원경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벽에 영사되는 영상을 마주하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러한 시각의 등치성이 최종적으로 불러오는 것은 그들이 머무는 공동의 지반을 무너뜨리는 자기파괴적 집단행동이다. 그래서 배트맨이 자처하는 탐정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그는 리들러가 꾸며놓은 퍼즐에 접근하면서, 서로 다른 트라우마의 기원이 되는 아버지(들)의 흔적에 가까이 다가선다. 도시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적하면서 탐정과 가해자를 결부 짓는 공통된 과거와 연결되는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아버지의 행적에 고통받고, ‘캣우먼’ 셀리나는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아버지 세대의 거짓말을 발견하는 허구적 서사에서 비참한 삶의 의미를 찾은 리들러의 편집증은 도시를 수몰시키려는 과대망상으로 번진다. 원인 없는 도시의 밑바닥에서 분노와 증오의 행위만이 연쇄적으로 나타난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트맨은 희망을 말하지만, 개인의 역량으로 통제할 수 없는 파괴에의 열망과 그 원인을 해소하지 못하는 공동체적 무기력이 또한 감지된다. 리브스는 이름 없는 자들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 도시 공동체의 뒤늦은 반응을, 70년대 미국영화가 발산한 시대적 불안과 과잉된 행동을 뒤늦게 가져온 영화의 형식과 연결한다. 다층적인 의미에서 <더 배트맨>은 후발주자의 영화다. LA와 뉴욕.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는 망상적 연인들과 오랜 증오 끝에 서로를 마주하는 영웅과 악당. 아버지가 부재한 소년은 덧없이 사라져가는 유년기의 충동에 사로잡히고, 박쥐 복장을 두른 남자는 죽은 아버지가 남긴 유년기의 고통에 접근한다. 두 편의 영화는 상반된 장르와 분위기로 차이를 드러내지만, 적지 않은 요소들을 공유하면서 비대칭적으로 접합해 있다. 1970년대의 병리적인 충동을 빌려오는 두 영화에서 미국은 꿈과 미래를 약속하는 신화 속의 아메리카가 아니다. 그곳은 연료가 고갈되어버린 차들이 방치되고, 거짓으로 파산한 도시의 잔해로 부서져 있다. 모든 것이 소진된 지대에 70년대적 미치광이들의 기획이 접속하는 <리코리쉬 피자>와 <더 배트맨>은 유사한 열망을 분출하는 서로 다른 비전이다. 아버지의 압력에서 벗어나 유년기적 열망을 찾으려는 충동은 아름다운 스크루볼 코미디로 한번, 어둡고 경직된 블록버스터 탐정 서사로 다시 한번 반복된다. 서두에 인용한 문장에 덧붙여 존 카사베츠는 이 나라의 사람들이 21살을 넘도록 돕는 것에 영화의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제공하는 감성적이고 지적인 로드맵이다. 그렇다면 연료 없는 자동차를 주행하는 운전자와 도시 전체를 보지 못하는 눈먼 탐정에게 필요한 지도는 어디에 있을까. 극장의 어둠 속에서,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고 되돌아왔다. 불균질한 질서와 비전이 허용되던 마지막 시기인 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의 흔적은 오늘날의 미국영화에 주어진 육중한 족쇄를 푸는 단서일까? 아니면 동시대 영화가 직면한 또 다른 막다른 길일까? ​

관객이 극장에 가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 - 관객 4인 대담

극장영화의 위기를 논하고 비상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혹은 영화계 내 단체들이 몇번의 테이블을 마련했고, 정부와 극장 차원에서 가시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관객의 목소리는 늘 빠져 있었다. 도화선을 지핀 것은 최근 CJ CGV의 영화 티켓 가격 인상 소식이었다. 이제 CGV에서 2D영화를 보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1만5천원(주말 기준)이 됐다. 영화계가 코로나19 직격타를 맞은 지 3년차에 접어든 지금, <씨네21>은 영화 제작자와 투자배급사, 극장이 겪는 고민만큼 관객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리라 판단했다. 대학 영화동아리 회장과 영화과 학생, 독립예술영화관 서포터스와 멀티플렉스 극장 VVIP 회원 등 대표성을 지닌 4인의 관객을 초청해 코로나19 이후 극장영화의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이들의 대화는 기업과 영화 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을 중심으로 논의됐던 포스트 코로나 영화산업 담론에 반드시 탑승해야 할 핵심적인 재료가 될 것이다. 김태현 | 2020년 서울대학교 영화공동체 ‘씨네꼼’에서 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학교에 다니면서 웹기획 개발을 하고 있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가리지 않고 보는데, 한창 많이 볼 때는 한해에 100~200편씩 봤다. 지금은 2주에 한편 정도 보는 것 같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패러렐 마더스>다. 김한슬 |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18학번. 영화는 공부할 때 주로 보는데, 아무래도 프랑수아 트뤼포처럼 옛날 고전영화를 많이 접하게 된다. 평소에는 생각을 덜 할 수 있는 가벼운 작품을 선호한다. 코로나19 이후에는 극장을 거의 가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다. 박세훈 | CGV VVIP 회원. 일부러 영화관 할인이 되는 카드를 두장이나 쓰고 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꾸준히 극장을 찾아 영화를 챙겨본다. 가장 최근에는 <모비우스>를 봤는데, 일부러 굿즈를 주는 4DX관 상영 회차로 감상했다. 마블 영화를 포함해 ‘돈값’ 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장혜령 |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서포터스 ‘아트나이너’로 활동하며 소식지에 실리는 영화 리뷰와 기사를 썼다. 원래 극장에서 영화를 일주일에 2~3편씩 봤던 영화광이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1~2편 정도만 본다. 대신 OTT로 한국·미국·영국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 가장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는 <모비우스>다. 코로나19 일일 확진자 수가 여전히 20만명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식당과 카페, 술집, 놀이공원에 간다. 백신 접종률이 86%를 돌파하고(2차 접종 기준) 일상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면서 점차 회복세에 접어든 업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극장은 침체기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장혜령 극장은 환기가 되지 않고 어둡다. 코로나19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취식이 금지됐지만 팬데믹 초기에는 마스크를 벗고 폐쇄된 곳에서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팝콘 먹는 즐거움도 사라졌는데 여전히 극장에 가기 위해서는 왕복 시간도 든다. 그에 반해 OTT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졌다. 넷플릭스 프리미엄 구독료 1만7천원과 주말 CGV 티켓값 1만5천원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렇게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는 습관에 길들여졌다. 제작사들이 영화에 투자를 덜하면서 영화의 질도 많이 낮아졌고, 볼만한 개봉작이 없으니 극장에는 재개봉, 재재개봉하는 영화가 많아졌다. 극장 체험을 강조하는 작품이 아니고서야 극장에 안 가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마케팅을 해야 하는데 극장 상황이 어렵다며 요금을 두번이나 올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닌 것 같다. 김태현 소비자 입장에서 극장이라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장소를 대여해주고 먹을 것을 파는 곳이다. 그런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요즘엔 너무 많이 생겼다.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대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요구가 더 커지는데, 사실 극장이 소통의 공간은 아니다. 그럴 바에야 사람들과 얼굴 마주보며 수다 떨 수 있는 곳을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혼영’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혼자 영화를 보는 게 일반적이지 않아서다. 그런데 요즘엔 여러 명이 함께 영화 보러 가기가 주저되는 상황이다 보니 극장 문화 자체가 많이 쇠퇴한 게 아닐까. 이런 점에서 현재 극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선택지는 모텔이라고 생각한다. 모텔 대실료가 극장 2인 티켓값보다 더 저렴하고,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떠들면서 무언가를 볼 수 있다. 요즘엔 넷플릭스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 숙박업소가 없다. 김한슬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직전 한국영화 관객수가 역대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영화관에 관객이 오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코로나19 영향이 가장 컸다. 아직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이 굉장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영화는 이제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드는 학생 입장에서 어떤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를 원하는지, 코로나19 이후 영화는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만난 관객은 극장에서 겪는 공동의 경험이 극장에 가는 이유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팝콘 먹는 소리가 거슬린다고 하지만 그것도 관람의 일부다. 웃긴 포인트에서 다 같이 웃는 경험이 코로나19 이후 어려워졌다. 그래서 코로나19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결된다면 극장영화가 다시 부활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 동시에 코로나19 이후 가속화된 비대면 문화로의 흐름을 고려해야 한다. OTT의 편리함과 즐거움을 느낀 관객이 다시 극장을 찾게 하려면 단순한 영화 감상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극장이 제공해야 한다. 박세훈 친구들과 어울려서 대화할 때 예전에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 봤어?”라고 했다면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 봤어?”라고 한다. OTT의 화제작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보다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는 것이 사회생활에도 이롭다. (웃음) “집에서 ‘치맥’ 먹으면서 TV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불편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답답하게 마스크 끼고 앉아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코로나19 초기에 많이 했다. 실제로 볼만한 영화가 많이 개봉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극장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역대 스파이더맨들이 등장하는 신은 집에서 혼자 봤다면 그냥 무릎을 치고 말았겠지만 극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반응하니 “나만 소름 돋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감탄사를 동시에 내뱉는 경험은 극장에서밖에 할 수 없다. <듄>의 성공이 의미하는 것 예전에는 완성도가 높지 않아도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들이 있었다. 팬데믹 상황에서는 <모가디슈>만큼 만들어도 361만, 역대 스파이더맨이 총출동해도(<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755만 관객이 상한선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극장을 가게 만드는 것은 어떤 영화인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영화들은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인가. 김한슬 시청각적으로 고심해서 만든 영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적인 서사가 중요시되는 이야기는 유튜브에도 OTT에도 넘친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짧은 영상들을 단편영화로 볼 수도 있고, 기존 방송국들도 유튜브 영상을 만들고 있다. 미디어간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관이 차별화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사운드 전공자들이 하는 걱정을 많이 접한다. 돌비 애트모스 기술, 공간감이 느껴지는 음향 디자인을 고려해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OTT로 가면 이게 하나의 트랙이 된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도 아쉬운데 관객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거대한 이미지와 사운드가 주는 감각적인 차이와 몰입감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는 차이다. 박세훈 우리 집 TV는 아이맥스 비율과 돌비 사운드를 구현하지 못하고, 이웃이 신경 쓰여서 볼륨을 높일 수도 없다. 소파도 4DX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집에서 하지 못하는 경험을 영화관에서 할 수 있을 때 극장을 찾는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찍어서 1.43:1 비율이 나오는 장면이 존재하면 아이맥스관을 찾고, 최근에는 <모비우스>와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재개봉을 4DX관에서, <더 배트맨>을 코엑스 돌비시네마관에서 봤다. 티켓값이 조금 비싸더라도 집에서 경험할 수 없는 요소를 하나라도 갖추고 있는 영화라면 극장을 계속 찾을 것 같다. 장혜령 앞으로 어떤 영화는 외면당하게 될 것인가를 고민해봤을 때, 오히려 서사가 중요해질 것 같다. 요즘 개연성이 없거나 결말이 흐지부지하게 용두사미로 끝나는 시나리오가 너무 많은데, 이렇게 가면 더이상 시장에서 먹히지 않을 것 같다. 요즘은 CGV 에그지수가 실시간으로 뜨니까 포장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안 좋은 입소문이 빨리 돈다. 그리고 여러 이슈로 개봉하지 못했던 영화들이 창고 대방출처럼 공개될 때 유행이 지나서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영화 <이웃사촌>을 봤을 때 그랬다. 천만 영화 감독이 연출하고 정우라는 배우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억지 설정과 억지 신파를 강요하는 서사라서 불편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트렌드를 읽지 못한 영화였다. 원작이 중국 소설인데 한국에서는 중국을 이슈로 하는 것이 별로 먹히지 않고, 북한 배경으로 각색했지만 이 역시 한국에서는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에로라고도 역사소설이라고도 할 수 없고, 금지된 사랑이나 북한 사상에 대해서도 포인트 없이 퀼트 보자기처럼 만든 영화였다. 2차 시장으로 직행할 것 같은 영화가 개봉하는 것을 보면 1만5천원을 주고 보느니 OTT에 풀리면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영화들이 점점 길어진다. 3시간 가까이 되는 <더 배트맨>을 보기 위해서는 작정하고 시간을 비우고 체력까지 준비가 되어야 한다. 점점 영화는 대중이 아니라 소수 시네필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역이 되어가는 것 같다. 대중과 더 멀어지지 않으려면 대기업이 만든 <영웅>과 같은 대작이 개봉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오늘 심심한데 영화나 볼까?” 하는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김태현 코로나19 시국에 흥행한 영화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은 <듄>이었다. 예고편을 보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금 개봉하는 걸까? 사람들이 보기는 할까?”라고 생각했다. 개봉하자마자 봤을 때도 중간에 졸았고 흥행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듄>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듄>이 제공하는 감각의 스펙터클은 OTT가 제공할 수 없다. 숏폼이 유행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긴 서사를 가진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러닝타임이 길더라도 제대로 된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서사를 가진 영화들이 경쟁력을 가질 것 같다. CGV 영화 티켓값 인상 소식이 떴을 때 관객의 거부감이 상당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면 배달팁까지 포함해 1인당 2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하는 시대에, 왜 관객은 영화에 1만5천원을 지불하는 것은 가혹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김한슬 대체물이 너무 많다. 무료로 볼 수 있는 영화도, 영화라고 느낄 수 있는 콘텐츠들도 많다. 넷플릭스 스탠더드 기준으로 한달에 1만3500원이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영화관에 한번 가는 데 비슷한 비용을 써야 한다면 그만큼의 가치를 극장이 계속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티켓값 인상을 위해 소비자들에게 책임을 나눈 것이다. 유튜브에서도 무료로 웰메이드 영상물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소비자들이 거기에 응할 필요가 없다. 유튜브에서 만들어지는 숏폼, 숏필름이 많이 있는데 굳이 그 이상의 비용을 주면서 단발적인 소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기회 비용이 너무 달라진 거다. 배달음식에 배달팁까지 지불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배달팁은 내가 직접 받는 편의를 위해 내는 비용이라면 극장 비용은 내게 그만큼의 편의를 주지는 않으니까. 장혜령 극장은 중장년층 관객이 지갑을 열어야 수익이 많이 나는 곳인데, 코로나19에 취약한 연령대다 보니 극장에 오는 것을 많이 꺼린다. 취식을 금지하고 좌석 거리두기를 해서 정작 청정구역이 된 극장을 찾지 않는 이유는 생계와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팬데믹 상황에도 사람들은 먹고 씻고 자는 것을 중요시한다. 때문에 식당에는 가지만 영화는 문화생활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포기하는 선택지가 된다. 한국 극장 티켓값이 다른 나라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팬데믹에 두번이나 가격을 인상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극장에서 큰 수익을 올렸던 대기업이 이렇게 가격을 올리는 것은 횡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한다. 뮤지컬은 10만원 넘는 티켓을 구입해야 볼 수 있지만 영화는 부담없이 볼 수 있는 대중문화였다고 생각해서 더더욱 그렇다. 김한슬 예전에 영화계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반기지 않았던 걸로 안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영화 제작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수익 분배를 정당하게 했는가에 대해 부정적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티켓값까지 인상하니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 외국에 비해 티켓값이 싸다고 하더라도 극장은 이미 많은 것을 취하고 있다. <옥자> 개봉 때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상영 거부를 하며 극장을 강력하게 지키려고 했던 만큼 지금 극장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제대로 마련했어야 했다. 지난 2년간 마케팅이라든지 다양한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나온 대책이 티켓값 인상이라면 이는 너무 1차원적인 방법이다. 박세훈 친구들이 “너는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냐?”라고 물었을 때 “가장 가성비가 좋은 문화생활”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연극을 보려면 2만원, 뮤지컬을 보려면 10만원 정도가 드는데 영화는 만원만 내면 2시간 동안 꽤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주말에 영화를 보려면 1만5천원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내 머릿속에서 아직도 조조영화는 6천원, 일반 영화는 만원인데 말이다. 이제는 한달 동안 영화를 안 보고 참으면 가장 저렴한 뮤지컬 좌석 티켓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쿠팡플레이는 4천원대에 구독할 수 있다. 위로는 뮤지컬, 아래로는 OTT와 가격을 비교하다 보면 영화가 더이상 가성비가 좋은 문화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학과에 다니고 있는 김한슬씨의 얘기를 듣고 싶다. 요즘 영화과 학생들이 영화감독이 아닌 OTT쪽 회사 취업을 알아본다든지 시리즈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어떤가. 장편영화 입봉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서 생기는 현상 같다. 김한슬 주야장천 시나리오를 쓰고 줄 서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다. 연출로 나가기 전에 스탭으로 일할 수 있는 곳도 많기 때문에 경험을 쌓는 경우도 많다. 연출뿐만 아니라 촬영, 녹음 같은 기술 파트에서도 감독이 되려면 거의 20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럼에도 자기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젊은 감독들도 있다. 또래 중에도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다 보니 다른 분야에서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것 같다. 김태현 주변에 영화하는 분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는 명문대생들의 무덤이다.” 이른바 고시낭인처럼 영화낭인이 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신랄하게 얘기하자면 그나마 잘 풀리면 대학원에서 학위받고 강사라도 할 수 있는데 딱 그 정도다. 영화감독으로 입봉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영상산업 전체로 보면 오히려 기회가 굉장히 많다. 그러니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로 가려고 하는 것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선정작을 발표하면서 문석 프로그래머가 “소재라는 측면에서 보다 다양해졌고 장르적인 시도 또한 많았던 것 같지만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선정의 변을 밝혔다. OTT 등 플랫폼의 확대와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를 그 배경으로 들었는데, 관객 입장에서도 저예산 독립예술영화의 질적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고 느끼나. 장혜령 지금 개봉하는 작품들을 보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아진 건 맞다. 그리고 미국·유럽 영화보다 한국영화가 더 그렇다. <벌새>와 <남매의 여름밤>처럼 좋은 독립영화가 잘 나오지 않는다. 좋은 인력들이 다른 분야로 빠져나간 이유가 크지 않을까. 그럼에도 주변에는 아직 독립·예술영화를 보는 친구들이 많고 영화제는 계속 매진이라 수요층이 아예 사라질 것이라는 걱정은 들지 않지만, 업계가 어려운 만큼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 김태현 지금 능력 있는 사람들은 영화판이 아니라 웹소설, 웹툰, 웹드라마, 뮤직비디오쪽으로 가고 있다. 사람들은 돈과 관심이 쏠리는 곳에 가고 싶어 하고, 영화가 더이상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된 것이다. 김한슬 저예산 독립영화의 질적 수준이 낮아졌다기보다는 수용자들의 수준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 영화제에 출품되는 작품 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관객이 실망감을 느낀다면 그건 보는 이들의 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영상물에 특화된 MZ 세대는 시청각적인 안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관객은 이미 많은 자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단편·독립영화에 새로움이 없다고 느끼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독립영화계의 질적 수준이 올라가고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어내길 바란다면 그만큼의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독립영화는 그 안에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시네마테크는 잘 유지될 것 같다. 한 차원 더 깊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파생된 것이 시네마테크다. 관객의 질적 수준이 높아지면 시네마테크 역시 유지될 수 있다. 지금 대중문화는 MZ 세대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가격 인상 정책은 MZ 세대를 제외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미 많이 어긋나버렸다. 새로운 영화문법을 고민해야 할 때 '보수적’이라는 키워드로부터 질문을 이어가고 싶다. 타 분야에 비해 영화는 주요 직책을 맡거나 실제 현업에서 뛰는 플레이어들의 연령대가 높다. 관객 입장에서 영화가 상대적으로 올드한 매체로 느껴지나. 영화가 올드 미디어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신인들은 웹소설이나 웹툰 업계로 흡수되고 있는 것일까. 김한슬 올드함을 많이 느끼고 있다. (웃음) 오히려 영화 공부를 하면서 보는 옛날 영화들이 굉장히 새롭다. 지금 대중이 보는 상업영화에는 그만큼 새로운 시도가 있을까? 영화적인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플레이어들의 연령대가 높아서 영화가 올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제작자들이 나태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영화인과 관계자들의 에세이를 모은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 영화의 미래를 상상하는 62인의 생각들>이란 책을 낸 적이 있다. 그때 주진숙 영화연구가가 쓴 글이 생각난다. 관객은 영화가 주는 기존 문법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는데 지금 우리는 새로운 문법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장영화의 새로운 문법의 도약 없이는 극장이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게 관객이 생각하는 올드함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감독도 얼마든지 참신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단순히 나이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영화가 만든 문법이 모든 매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지금 새로운 영화문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장혜령 소위 거장이라고 하는 감독들도 자기 개발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상도 많이 받고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엄지 들고 인정해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모든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자기 개발을 해야 한다. 타성에 젖어 자신이 권위자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영화를 올드한 매체로 만드는 것 같다. 가령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마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한 발언에도 답답함을 느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장점과 요즘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게임을 결합한 <레디 플레이어 원>을 만들고, 조지 밀러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요소를 가미한 리메이크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만든 것처럼 기존 플레이어들의 변화가 필요하다. 젊은 친구들과도 컬래버레이션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김태현 영화는 올드한 매체로 느껴지고, 올드한 포맷이기 때문에 올드한 사람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어쩔TV’라는 유행어의 유래를 듣고 충격받았다. 어린 친구들에게는 텔레비전이 굉장히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무언가라서 ‘어쩔TV’라는 말을 하게 됐다고 하더라. 그래도 영화보다는 TV가 트렌디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TV가 구식으로 취급받는다면 영화는 더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극장은 점점 더 프리미엄화된 공간으로 바뀌게 될까. 아이맥스나 4DX와 같은 특별관 상영이라든지 굿즈를 주는 회차가 아니라면 극장에 갈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까. 박세훈 최근에 CGV연남에 갔다가 굿즈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CGV용산을 다시 찾았다. 굳이 교통비를 더 쓰고 수고로움을 감수해서 포스터를 받았다. 1인당 1만4천원의 가격을 지불하기로 결심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최대한 누리고 싶어서다. 4DX관에 가도 프라임 존에 앉지 못하면 100% 누리지 못한 것 같은, 아깝다는 마음이 든다. 예전에는 특별관을 잘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엔 일반관보다 특별관을 더 많이 간다. 결국 ‘돈값’을 하는, 굿즈를 주거나 익스트림한 경험을 줄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 된다. 차라리 요금을 일괄적으로 올리는 것보다는 관을 다양화하고 가격도 차등을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일반관은 좀더 저렴하게, 특별관은 거의 2만원 가까이 되는 비용으로 책정된다고 해도 개인적으로는 기꺼이 후자를 찾을 수 있다. 특별관도 먼 곳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좀더 다양한 극장에 배치됐으면 좋겠다. 사실 주차별로 다른 굿즈를 모으면서도 내가 굿즈 중심 마케팅에 기꺼이 빨려들어가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역으로 말하면 다른 방식의 마케팅으로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을 텐데 다양한 아이디어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굿즈 마케팅 아니면 선착순 무료 티켓 말고는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김한슬 다양성이 제일 중요하지만, 가장 좋은 건 기본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결국 기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 때 프리미엄관의 장점도 눈에 보일 수 있지 않나 싶다. 영화 굿즈를 모으는 관객의 심리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가 본 영화가 휘발되어 잊어버리기보다는 기억하고 향수할 수 있는 순간으로 남길 바라는 게 아닐까. 좋은 영화가 있다면 포스터, 배지, 포토티켓을 갖고 싶은 거다. 관객에게 향수가 그만큼 중요하다면 기본적인 영화관의 형태가 사라져서는 안된다. 기존의 아트하우스관을 유지하면서 영화의 가장 기본을 잊지 말고 고수해야 다양한 프리미엄관과 가격 정책도 소비자에게 유효할 수 있다. 투자는 관객수 외 지표에 의해서도 고려되어야 희망적인 이야기도 비관적인 전망도 모두 나온 것 같은데 앞으로 영화계, 특히 극장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각자 생각도 정리됐을 것 같다. 장혜령 지난 3년 동안 가장 직격탄을 맞은 업계 중 하나가 극장이었다. 봉준호 감독님 같은 분이 빨리 차기작을 선보여야 사람들이 극장에 올 것 같다. (웃음) 혹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이 개봉해야 사람들이 극장을 찾지 않을까. 기대작들이 개봉을 미루면서 관객의 실망이 누적됐고 점점 더 극장에 가지 않게 됐다. 그사이 OTT에서는 재미있는 콘텐츠들이 많이 나와서 OTT로 영상을 보는 것이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 정도는 천만 영화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젠 관객수로 평가할 게 아니라 스트리밍 지수를 따지는 등 흥행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투자는 관객수가 아닌 다른 지표에 의해서도 재고되어야 한다. 김태현 일단 영화의 위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극장의 위기일 뿐이다. 영화는 변화하는 생태계에서 더 많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고, 다만 그 과정에서 극장 중심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도태될 것이다. 독립영화가 어떻게 관객과 만날 것인지 그 기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좀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세이브 아워 시네마’(#SaveOurCinema) 캠페인을 벌였지만 문제의 본질엔 가지도 못했다.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소비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극장 그리고 독립영화 상영관이 다시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좀더 필요하다. 김한슬 오늘날 모두가 일상의 회복을 소원하고 있듯이, 그 누구보다 극장의 회복을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관객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친구와 함께, 연인과 함께,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고 느낄 수 있던 극장의 경험을 기다리고 있는 관객에게 극장이 다시금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더 다양한 영화와 공간의 경험을 극장이 제공할 수 있기를 함께 고민하고 기대하며 응원하겠다. 박세훈 OTT 덕분에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영화를 많이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극장에서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승리호>가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때 보지 않았다가 CGV에서 특별 상영을 했을 때 관람했다. 그때 “극장에서 보니까 괜찮은데?”라고 생각하며 봤다. 아마 이 작품을 스마트폰으로 봤다면 서사가 별로라 재미가 없었을 텐데, 그래픽이 좋다보니 극장 관람이 훨씬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어줬다. 분명 극장과 OTT가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영화들이 있고 영화 경험을 확장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메기>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 작품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작품도 몇편 찾아봤다. 마블 영화와 특별관 상영을 좋아하지만 한편으로 내게는 <메기> 같은 영화를 원하는 자아도 있다. 이런 다양성을 보장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본의 논리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장이라면. 대기업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결국 정부 차원의 정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도 독립예술영화를 만나는 그런 영화적 경험들을 계속 하고 싶다.

[베를린] 80살 맞은 독일의 페미니스트 1세대 감독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지난 2월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이 80살을 맞이했다. 독일 언론은 뉴 저먼 시네마의 대표 주자이자 페미니스트 1세대 감독인 폰 트로타 감독의 삶과 작품을 앞다투어 조명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 폰 트로타 감독의 삶과 작품을 그린 90분짜리 다큐멘터리영화를 제작해 텔레비전 방송으로 내보냈다. 다큐멘터리는 폰 트로타 감독이 2019년 제69회 독일 영화상 공로상을 수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영화 인생은 독일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81년 제3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독일 자매>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다. <독일 자매>는 70년대 적군파 요원이었다가 체포되어 구금 생활을 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한 구드룬 엔슬린과 여동생 크리스틴을 모델로 만든 영화다. 청소년기에 학교교육에서 나치 독일의 실상을 접하고 심리적 충격을 받은 자매는 각각 적군파 요원과 독일 첫 페미니스트 잡지 <엠마> 기자로 사회변혁의 길을 택한다. 테러리스트 언니 역을 연기했던 바르바라 수코바와 폰 트로타 감독의 인연은 이때 시작되어 평생 이어진다. 폰 트로타 감독의 <로자 룩셈부르크>(1986)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열연한 바르바라 수코바는 1987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에 이른다. 수코바는 폰 트로타 감독의 굵직한 여성 일대기 영화에 출연해 중세 수도원에서 약초 연구로 이름을 남긴 수녀의 일대기를 그린 <위대한 계시>(2009)에서 힐데가르트로,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철학자를 다룬 <한나 아렌트>(2012)에서도 철학자 한나로 분했다.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사랑은 파리에서 시작됐다. 미혼모였던 모친과 베를린에서 살았던 폰 트로타는 1950년대 말 파리로 가서 누벨바그 영화에 경도된 젊은 철학도들과 어울리며 책과 영화를 접했다. 당시 그녀는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을 보고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후 뮌헨으로 가서 독문학과 불문학을 공부하다가 배우 학교에 들어간다. 폰 트로타 감독이 독일영화계에 발을 들인 것은 배우를 하면서다. 라이너 파스빈더,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과 1971년에 결혼해 91년에 이혼했다. 1975년에는 슐뢴도르프 감독과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만들며 함께 시나리오도 쓰고 감독도 했다. 당시 보수적인 독일 사회에서 여성감독으로 우뚝 서기란 투쟁 없이 불가능했다. 남편이었던 슐뢴도르프 감독도 폰 트로타가 자신의 조력자로만 남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직접 감독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여성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영화들은 독일 언론이나 평론계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폰 트로타 감독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폰 트로타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할까? 그녀는 <쥐트도이체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어둡고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면을 찾는다. 사람들이 나를 밖에서 보면 용감한 투사로 보이겠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면 상처받기 쉽고 의심을 품는 부분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런 비슷한 면을 찾는 게 흥미로웠다.”

21세기 한국의 시네필과 영화관의 (비)장소성

극장영화란 무엇인가. 극장영화는 어디로 가는가. 혹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지난주(<씨네21> 1351호) 김호영 교수가 영화관이라는 공간의 역사를, 정찬철 교수가 뉴미디어의 등장에 따라 극장이 어떻게 자기 변신을 해왔는지를 탐색하는 글을 실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이선주 교수가 ‘21세기 한국의 시네필과 영화관의 (비)장소성’에 대한 심도 깊은 사유의 글을 보내왔다. 대중잡지 독자들에게 쉽지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꾸준히 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영화 주간지로서 <씨네21>의 존재 이유 중 하나라고 믿는다. 답이 아닌 가능성으로, 우리의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프롤로그: 영화관에 들어가며 최근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하며 재개관한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매혹적인 트레일러 영상을 상영하는 영화관이다. 영상은 <러시아 방주>로 시작하여 <연연풍진>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현기증> <벌집의 정령> <스트롬볼리> 등 각기 다른 세계를 향한 창과 문, 외화면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모호한 시선을 몽타주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곧 어떤 낯선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을 갖게 된다. 극장의 불이 꺼지고 영화의 세계로 이끄는 영상과 음악(사일런트 파트너의 'Big Screen'이라는 최면적인 선율)의 안내를 통해 관객은 곧 상영될 본 영화의 충만한 관람을 위한 지각의 준비운동을 마친다. “ 실물보다 큰”(Bigger than Life): 시네마테크의 시네필 “메신느 거리의 상영실에서 이 젊은 세대들은 과거의 영화들을 탐욕스럽게 받아들였다.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독일 표현주의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실험영화 등등. … 여기에서 그들은 하워드 혹스나 존 포드 같은 감독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시네마테크는 그들로 하여금 장르를 인식하도록 했고 그것을 사랑하도록 했다. … 랑글루아의 프로그램에 꾸준히 오는 관객은 마이어브리지와 마레의 시대 이후의 이미지의 역사에 깊이 침잠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리처드 라우드, <영화 열정> 중) 영화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시네필리아’(cinephilia)는 제의적 행위로서의 영화 관람이나 실물보다 큰 스크린과 이미지, 극장의 어둠, 빛의 프로젝션에 대한 매혹, 즉 필름 자체와 일회적 상영의 경험을 중요한 구성요소로 강조한다. 20세기의 영화를 사랑했던 철학자 및 비평가들은 영화의 존재론과 관객의 매혹을 다루면서 영화(film) 미학 ‘너머’의 시네마(cinema)라는 장치와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의 물리적 경험이 낳는 복잡 미묘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롤랑 바르트는 에세이 <영화관을 나오면서>에서 도시의 익명성을 보장하는 자유로움의 장소로서 영화관이 갖는 장소성에 주목했다. 그는 영화관의 어둠이 주는 낯섦과 은밀함을 현대적인 ‘장소의 에로티시즘’으로 비유하면서 친숙한 공간(집)에서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조건과 영화관의 매혹을 비교한다. 바르트는 영화 자체보다도 상영장소(salle)에 더 집중하면서 영화관의 매혹을 설명하지만, 글의 서두나 마지막 부분에서도 밝히듯 그는 또한 영화관을 ‘나오는’ 정황과 영화 속 상상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거리두기’의 사유를 드러낸다. 이 글에서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바르트가 이 글을 쓴 1975년 무렵은 68혁명 이후 서구 시네필리아의 역사에서 영화에 대한 매혹(enchantment)보다는 거리두기에 의한 ‘생산적 각성’(productive disenchantment)의 중요성이 제기되며 영화연구와 이론의 제도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즉 이전까지 시네필리아를 지탱했던 영화의 매혹에서 벗어나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 등의 방법론을 활용하여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작용과 문화적 영향력을 비판적으로 설명하고자 한 욕망이 현대 영화이론과 영화학을 정립했던 것이다.<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로 말하자면 급진적인 ‘적색 시대’, 거대 이론의 시기인 1970년대를 지나 프랑스 시네필들에게 시네필의 경험과 관객의 존재론이 다시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한 책은 바로 1980년에 출간된 장 루이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다. 셰페르는 특정 이론이나 비평적 시각으로 감독이나 작품을 다루지 않으면서도 영화 이미지의 경험과 정동에 주목하면서, 영화적 어둠을 선사하는 영화관이라는 공간과 밤의 경험,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의 존재조건과 시각의 원초적 경험들을 내밀하게 고찰한다. 셰페르는 자신을 영화관에 자주 다니는, 별다른 ‘특성이 없는’ 평범한 남자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의 사유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영화 관객 모델을 넘어 영화적 경험을 통해 세계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이차적 몽타주’를 수행한다. 따라서 그의 시네필 여정에는 정전화나 영화적 지식에 대한 욕망 대신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억과 경험들이 수반된다. 그것은 영화관의 어둠과 빛의 먼지, 안개처럼 물리적 장소에 실재하며 우리의 지각과 기억에 관여하지만 주변적이거나 알 수 없는 대상으로 남게 되는 경험적 요소들을 포함한다. 즉 언어로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영화를 본다’는 체험의 의미, “세계와 빛, 경험과 이미지와 기억, 시간과 신체를 둘러싸고 영화적 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남긴 혼신의 기록”인 셈이다. 이러한 시네필적 실천들은 모두 영화 보기를 콘텐츠로서의 영화 보기(watch a film)만이 아닌 물리적 장소로서 ‘영화관에 가는’(go to the cinema) 행위,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뿐 아니라 영화 관람 전후 상황의 맥락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영화 관람 실천을 포괄한다. 그런데 1960~70년대 이들이 상정한 영화 관람성은 모두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조건이 전제된 상황에서의 영화 경험들이다. 이렇듯 20세기에 만들어진 거의 모든 영화들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을 행위자로 하는 시네필의 역사는 프랑스나 서구의 영화 문화 안에서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1960~70년대 파리-뉴욕-런던 등을 횡단하며 비판적 실천력을 갖춘 이상적인 주체적 관객으로서 상정된 서구 시네필리아 현상과 비교해볼 때, 한국영화에서 ‘대안적 영화 문화’를 논할 수 있는 시네필의 물리적 조건(영화의 집으로서의 ‘극장’과 셀룰로이드 ‘필름’)이 갖춰진 것은 언제쯤일까? Back to 1995~2005: 한국 시네필의 압축적 형성과 영화의 집으로서의 ‘극장’ “1964년부터 한양대에서, 1967년부터 동국대에서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을 무려 5년간 보지 못했다가, 지난해 KBS TV를 통하여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나 <인톨러런스>를 보지 않았으면서도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유럽의 영화는 주목할 만한 문제성을 제시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영화작가가 베르이망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산딸기> <제7의 봉인> <침묵> <처녀의 샘> 등 화제작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상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겠습니다만, 그러한 기회를 늘 잃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신봉승, <영상적 사고>(1972) 중) 1950~60년대 프랑스에서 영화가 대안적 문화 실천이 될 수 있었던 조건은 비평 노선으로서의 작가 정책 외에도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영화 저널리즘, 영화의 집인 시네마테크, 그리고 영화 사랑을 실천한 시네필 등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영화 잡지 <영화예술>이 ‘좋은 영화 보기’ 관객 운동을 모토로 대학이나 대도시 영화 팬을 중심으로 ‘시네클럽’ 운동을 펼치며 상영회와 심포지엄을 주도했고, 1970~80년대 문화원 세대와 서울영화집단의 이론과 실천, 1980년대 시네마테크를 표방한 비디오테크 활동 등 소비 위주 산업으로서의 영화에 대항하는 다양한 시네필리아적 현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인용한 글에서도 볼 수 있듯, 한국에서는 시네필리아의 중요한 물리적 조건인 ‘대안적인 프로그램을 상영하는’ 극장이 1990년대까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시네필 문화의 진지로 알려졌던 <키노>(1995~2003)도 시네필을 위한 정전(canon)을 제시하긴 했지만 극장이라는 판테온을 절대시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비극장의 대안적 영화 관람을 소개했다. 1990년대까지 한국 시네필 문화의 중요한 기반은 엄밀히 말하면 ‘비디오테크’ 상영 문화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 활동했던 비디오 상영 기반의 영화 단체들은 서울의 ‘영화공간 1895’, ‘OFIA’, ‘문화학교 서울’, ‘시네포럼’ 등과 부산의 ‘1/24’, 광주의 ‘좋은 친구들’, 대구의 ‘영화언덕’ 등 다양했다. 창간호부터 <키노>의 지면 중에는 ‘시네마테크’ 코너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문화학교 서울’을 포함한 전국 비디오테크들의 프로그램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문화원 상영 소식, 독립영화협의회의 월간 프로그램 등이 기자들의 추천사와 함께 실리곤 했다. ‘영화공간 1895’를 주도한 이광모가 이끈 고전예술영화를 수입해 상영하는 동숭시네마텍 같은 예술영화전용관이 1995년에 출범했고, <천국보다 낯선>을 시작으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을 소개하며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나 고전 예술영화를 매달 1편씩 개봉했다. 한국의 시네필들이 글로만 접하거나 상상 속의 시네마테크에서만 볼 수 있던 장 뤽 고다르와 잉마르 베리만, 알랭 레네의 필름영화를 극장에서 만나게 된 시기는 영화 탄생 100주년 즈음인 1990년대 중반이었다. 동숭시네마텍은 이름이 표방하는 바처럼 새로운 영상 문화 운동의 주체를 추구하면서 그때까지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서구의 공공성을 띤 시네마테크를 지향하며 탄생했지만, 다양한 대안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시네마테크가 아니라 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따라서 미개봉된 영화나 수입 금지작, 정전들에 대한 갈증은 이러한 전용관과 여전히 공존했던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되는 열화된 영상으로 대리 충족되곤 했다. (독립영화의 역사를 포함한) 한국 시네필 문화에서 이러한 비디오필리아의 활동들이 의미 있었던 것은 단지 셀룰로이드와 극장이 결핍된 물적 조건 속에서도 시네마테크의 정신을 실현하고 이상화된 관객으로서의 시네필리아를 체현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작가주의 모델을 넘어 영화의 매혹과 각성 사이의 생산적 긴장을 통해 ‘비판적 시네필리아’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비디오테크는 제도와 자본, 물적 토대의 부재로 인해 현대적 시네필리아의 중요한 요건인 ‘진정성’의 존재론적 구성요소들이 결여되어 있었다. 따라서 2000년대 초반 극장을 기반으로 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전국적으로 출범하고, 서울을 기준으로 한다면 서울아트시네마와 서울시네마테크가 비로소 극장에서 ‘필름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을 선보였던 시절이 한국에서는 대안적인 극장(시네마테크)의 시네필 영화 문화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일 것이다. 문화학교 서울의 루이스 부뉴엘, 에릭 로메르, 스즈키 세이준 회고전이 성공적으로 개최됐고, 서울시네마테크는 개관 프로그램으로 오슨 웰스 회고전을 열었으니,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1)에서 책으로 배운 오슨 웰스의 정전들을 필름 시네마테크에 ‘확인’하러 온 시네필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 시기 서울시네마테크에서 발행한 <필름컬처>는 <키노>와는 차별화된 노선으로 미국영화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며 세르주 다네나 조너선 로젠봄, 태그 갤러거 등의 비평을 소개함으로써 시네필 문화를 다채롭게 했다. 주간지 <씨네21>과 월간지 <키노>, 계간지 <필름컬처>가 각기 다른 노선으로 시네필 문화를 선도하며 영화가 비평을, 비평이 다시 영화를 이끌었다(이후 영화 잡지들의 춘추전국시대는 2003년 <키노> 폐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리고 <씨네21>만 생존한다). 그런데 2000년대 초 비디오테크에서 시네마테크(극장)로의 전환은 한국에서 현대적 시네필이 제도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서구의 시네필과는 다른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음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비록 유럽 예술영화, 할리우드 고전영화와 같은 정전화 및 이 과정에서 다른 영화들(다큐멘터리, 아방가르드, 아티스트 필름 앤드 비디오 등)의 배제라는 현실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지만, 이러한 매체와 장소의 전환은 한국에서의 시네필의 의미가 정전화된 감독들의 목록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화’ 및 ‘영화 보기’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을 수반했음을 시사한다. 더구나 이러한 이동이 서구에서는 ‘영화의 죽음’이 논의되던 시기, VHS에서 DVD로의 이행기, 아날로그 시대와는 다른 시각적, 매체적 쾌락을 전달하는 디지털 시대로의 이행과 맞물려 압축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 시네필의 형성 과정과 극장이라는 장소의 문제는 더욱 세심한 맥락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진정성의 조건을 갖춘 시네마테크의 필름 매체로의 전환과 극장으로의 장소의 전환이 반드시 관객의 역량을 이끌거나 더 생산적인 시네필 활동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필름 시네마테크로 전환된 이후 영화 관람 환경은 향상되었으나, 19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수행했던 영화 교육 프로그램이나 문화활동들(토론, 출판 및 강연 등)의 열기는 오히려 줄어들면서 시네필들의 활동은 감소했다. 대안적 영화 문화란 극장의 하드웨어적 퀄리티나 서비스라는 말과 결코 등치될 수 없는 복잡한 국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극장 노스탤지어가 없는 ‘새로운 시네필리아’ 2015년 서울아트시네마 이전을 계기로 열린 김홍준, 정성일, 허문영의 좌담회(‘1995~2015 변모하는 영화의 풍경’)에서 정성일은 동시대 시네필의 지도를 “시네마테크 시네필, 시네큐브(아트하우스) 시네필, 영화제 시네필, 아이맥스 시네필”로 잠정 분류한다. 이는 모두 영화관이라는 장소를 기반에 둘 때 성립하는 시네필의 개념이다. 그런데 <씨네21>이 ‘밀레니얼 세대 시네필’(1252호)로 명명한 젊은 세대의 시네필 가운데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없거나 자유로운 경우가 많다. 21세기 서두에 급변하는 영화 환경과 뉴미디어 시대의 시네필리아에 대한 두개의 영향력 있는 앤솔러지인 <영화의 변이: 세계 시네필리아의 변모하는 얼굴>(Movie Mutations: The Changing Face of World Cinephlia, 2003)과 <시네필리아: 영화, 사랑, 기억>(Cinephilia: Movies, Love and Memory, 2005)이 출간된다. 이후 2000년대 후반 영화학 분야의 중요 학술저널인 <시네마 저널> 및 <프레임워크>가 시네필리아의 역사 및 디지털 시대의 시네필 문화를 질문하는 특집호 또는 특별 도시에를 간행했고, 2015년 <디지털 시대의 영화비평>(Film Criticism in the Digital Age), 2020년 <근심하는 시네필리아>(Anxious Cinephilia)가 출간되는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영화 환경에 따른 21세기 시네필리아의 정체성과 영화와 비평의 플랫폼 변화를 고찰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는 신성화된 공간의 단일성, 그리고 그 순간의 유일성과 함께 공간 속에서 대상을 소유하는 방식으로 동일시되어 있었던 전통적인 시네필을 시네필리아 1세대로 규정한다. 반면 그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을 수용하고, 팬-컬트 커뮤니티를 찾아내고 경험을 공유하면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비전통적인 형식으로 실천하는 2세대 시네필리아를 명명하고 그들의 비아카데믹한 활동을 주목한다. 엘새서는 시네필리아 2세대에게는 찰나의 영화적 경험이 아닌, 찰나의 자기 경험에 대한 ‘수집가’와 ‘아키비스트’로서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지위가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시네필리아의 영화 소비 실천을 세개의 시대로 구분하면서 마지막 3단계에 해당하는 1980년에서 2010년대를 ‘경험의 재지역화’라고 명명하며 ‘아마추어 문화의 신성화’ 현상을 주목한 로렌 줄리에와 장 마크 레베라토의 연구로도 계승된다. <영화의 변이>의 공동 편집자인 비평가 조너선 로젠봄과 에이드리언 마틴이 지적하듯, 현대 시네필의 상황은 시네필리아에 대한 기존 논의들에서 주요 논점이 되어온 ‘극장 가기’ VS ‘집에서 보기’간의 대립을 부적절하게 만들어왔다. 기리시 샴부는 2019년 <필름 쿼터리>에 올드 시네필리아와 구별되는 새로운 시네필리아의 매니페스토(“For a New Cinephilia”)를 발표했다. 전통적인 영화관과 표준적인 극영화를 넘어선 여러 형태의 무빙 이미지 체험, 영화 관람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 정체성의 정치학에 기반한 액티비즘적 활동과 비아카데미적 실천들, 정전화된 미학과 위계적 리스트를 벗어난 즐거움과 가치평가의 개방성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이 선언은 시네필리아의 사랑과 즐거움의 담론을 소수의 특권에서 다수로 확장시키면서 오늘날 영화 문화의 포괄적인 이슈들을 다룬다. 이는 <기생충>의 글로벌한 파라(para) 텍스트 비평과 밈의 사례처럼 아마추어 문화나 팬 문화의 역량을 강조하며 과거의 영화 사랑뿐 아니라 오디오비주얼 비평 등 새로운 세대의 영화적 모험까지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오늘날의 시네필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영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유희의 실천으로부터 기인하는 이슈들을 탐구한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새로운 세대의 시네필리아를 출현시키고 (‘비디오필리아’, ‘텔레필리아’, ‘모바일 시네필리아’ 등) 시네필리아 개념의 새로운 층들을 덧붙여나간다. 엘새서가 진단하듯, 뉴미디어 시대의 시네필리아는 우리의 미디어 기억의 무한정한 아카이브를 잠재적으로 욕망할 만하고 가치 있는 클립들, 엑스트라와 보너스들로 리마스터링, 재구성, 재설정(re-mastering, re-framing, re-purposing)하면서 기억의 위기에 맞서 영화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포스트모던 영화 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포스트-시네마 시대 시네필의 분화와 재배치: 스크린을 접으며 한국 시네필의 역사에서 관객이 시네마테크에서 고전영화를 필름으로 관람하기 시작하고, N차 관람을 포함한 극장 경험이 시네필의 미덕으로 여겨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전 시대의 비디오테크 문화나 문화원 상영, 대학 공동체 상영을 통한 관람 방식은 시네필의 실천이 아닌 것이 되는가? 포스트-시네마 시대에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경험은 가장 이상적인 영화적 경험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유일한 영화가 아닌 복수의 플랫폼의 영화들, 다양한 무빙 이미지, 다른 스크린과 생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장소일 때 더욱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극장 중심의 영화산업의 위기는 그러한 다양성의 영화 역사 속의 한 국면일 수 있고, 영화라는 매체나 관객의 영화적 경험의 위기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의 지속과 변화를 탐구한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관객의 지각뿐 아니라 성찰성과 사회적 실천까지 포함하는 영화적 ‘경험’에 주목하며 ‘재배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시네마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것은 ‘필름-영사기-극장’ 복합체로 된 물리적 측면의 영속성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경험 형식의 생존 여부라고 말한다. 재배치는 영화의 구성요소가 극장을 벗어나 다른 장소 또는 이질적인 인터페이스에 자리 잡을 때 영화적 경험이 부분적으로 보존되는 동시에, 고유한 새로운 경험과 행위들이 부가되는 이중적 작용이다. 따라서 영화적인 것의 재배치는 과거의 기억이나 습관보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시네마가 다른 디스포지티프와 환경으로 지속적으로 재배치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분위기를 띠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불완전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 포스트-시네마 시대의 영화의 운명인 것이다. 카세티의 말처럼 “시네마는 여전히 발견되어야 할 대상”이고, 오늘날의 시네필은 로젠봄이 이야기하듯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누구의 영화인가’, 그리고 ‘영화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JeonjuIFF #7호 [추천작] 에실 보그트 감독, '이노센트'

<이노센트> The Innocents 에실 보그트/노르웨이/2021년/117분/불면의 밤 어떤 세계는 누군가에게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 <이노센트>가 비추는 아이들의 세계가 그렇다. 어른은 알 수 없는 아이들만의 세계. 날카롭고 스산하며 도처에 위협이 도사린 세계로 이다와 안나가 발을 들인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한 이다와 자폐증이 있는 언니 안나는 외톨이처럼 보이는 소년 벤과 피부병을 앓는 소녀 아이샤를 만나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서로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공유하면서다. 아이들은 텔레파시를 통해 멀리 떨어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가 하면, 염력을 써서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곧 아이들의 관계에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고양이를 죽이던 벤의 폭력성이 자신을 해코지한 이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방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점차 강력해지는 벤의 능력 앞에서 도움을 청할 대상도 없이 아이들은 고립된다. 아이들 사이의 긴박한 도주극은 연쇄살인마나 괴생명체 없이도 스릴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다. 같은 땅 위에 존재하지만 어른에게는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는 질식할 듯 폐쇄적이고, 닫힌 공간에서 악과 맞서 싸워야만 하는 아이들의 입장은 관객의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영화의 주된 무대인 노르웨이의 푸른 숲과 평화로운 주택가는 두려움이 만연한 아이들의 세계와 대비되며 긴장감을 배가한다. 그 무엇보다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는 순수와 잔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아이들의 면면이다. 에실 보그트 감독의 아이들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매개자가 되어, 초능력이라는 흥미로운 상상력과 죽음에 가까운 악몽을 함께 직조한다. 미완성의 존재들이 인도하는 서늘한 판타지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잊어버린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런던] '탑건: 매버릭' 72번째 '로열 필름 퍼포먼스' 작품으로 선정

<탑건: 매버릭>이 영국 내 공식 개봉일인 5월25일보다 약 일주일 앞선 5월19일 런던 레스터 스퀘어의 오데온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영국 정부는 지난 2월23일 ‘리빙 위드 코로나19’ 정책을 발표하고, 4월1일을 기점으로 코로나19와 관련한 모든 제약 사항을 해제했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영화와 TV 자선단체’(The Film and TV Charity)는 지난 4월7일, 72번째 ‘로얄 필름 퍼포먼스’ 작품으로 <탑건: 매버릭>을 선정했음을 알리며, 2019년 12월4일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을 마지막으로 2년 반 동안 중단됐던 자선 모금 행사의 귀환을 공식 발표했다. 이번 행사의 참가 티켓은 4월19일 공식 판매를 시작했는데, 시작 당일 모두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탑건: 매버릭>의 프로듀서인 제리 브룩하이머는 “영국 영화산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놀라운 자선단체와 뜻을 같이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전했다. 영국 왕실이 후원자로 있는 ‘로열 필름 퍼포먼스’는 1946년 레스터 스퀘어의 엠파이어 극장에서 마이클 파월 감독의 <천국으로 가는 계단> 상영으로 시작됐다. 이후 76년이 지난 현재까지 총 71편이 대중과 만나며, 영화와 텔레비전 산업 종사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필수 기금 모집에 기여했다. 이 상영회에 소개된 작품들로는 <나는 결백하다> <미지와의 조우> <인도로 가는 길> <타이타닉> <007 스펙터> 등이 있으며, 여기에는 조지 6세를 비롯해 엘리자베스 여왕, 마거릿 공주 등이 참여한 바 있다. 이 단체는 코로나19 팬데믹중에는 1만여명이 넘는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 정신적, 재정적 지원을 했으며, 최근에는 직장 내 따돌림 상담 서비스도 개설했다. 영화와 TV 자선단체의 CEO 알렉스 펌프레이는 “로열 필름 퍼포먼스는 영화 및 TV 산업에 종사하는 똑똑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돕는 데 좀더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탑건: 매버릭>의 영국 프리미어 상영이 이 기회를 더욱 확장하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곽재식의 오늘은 SF] '환상특급'의 시대

‘환상특급’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 공중파 텔레비전에서는 외화라는 이름으로 외국 텔레비전 시리즈를 무척 많이 방영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한국 TV 프로그램 못지않게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화제가 되는 외국 TV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6백만불의 사나이>나 <맥가이버>는 지금도 한국 TV 프로그램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을 정도다. 누군가 괴력을 발휘하는 장면에서 <6백만불의 사나이> 효과음이 나오는 장면이나, 무엇인가를 멋지게 만드는 장면에서 <맥가이버> 주제곡이 배경에 흘러나오는 연출은 여전히 가끔씩 볼 수 있다. <환상특급>은 그 정도로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강렬한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사람들이 적었다고 할 수도 없다. 원래는 미국에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 중에 이 있었는데, 그것이 1980년대에 다시 부활해서 새로운 에피소드들이 방영되었고, 그 새 에피소드들이 한국에 건너오면서 <환상특급>이라는 번역 제목을 얻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한국에서는 보통 단막극이라고 부르던 앤솔러지 구성으로 되어 있어서, 전체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별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짤막하게 선보이는 형태였다. 주로 SF, 판타지, 공포 단편을 다루는 이야기가 많았고, 에피소드 하나만 맡으면 되기 때문에 신인 배우, 무명 배우들이 주연을 맡는 일도 꽤 있었다.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유명 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언뜻언뜻 볼 수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다. 사실 1960년대에 나온 원판 역시 한국에서 방영된 적이 있다. 1975년 후반 무렵부터 MBC를 통해 ‘제6지대’라는 제목으로 더빙판이 방송된 것이다. 그런데 이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드물다. 나는 ‘제6지대’라는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다. 그에 비해, 1980년대판인 <환상특급>은 1986년부터 일요일 저녁 시간대에 KBS를 통해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제6지대>와 달리 <환상특급>에 나온 절묘한 이야기의 놀라운 감성이나, 충격적인 결말을 보고 감탄한 기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도 여러 번이다. 유명한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면, 모든 것이 이상적인 미래 사회가 배경인데,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만한 인재는 그 좋은 세상을 불안한 쪽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아이가 시험을 너무 잘 보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정부로부터 제거되는 처분을 받는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입시 위주의 사회에서 더 강렬하게 다가올 만한 이야기였는지, 이 이야기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나는 1980년대에 세계적으로 잠시 SF의 부흥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와 <스타워즈> 시리즈의 속편들과 같은 할리우드 SF영화들이 어마어마한 흥행을 한 블록버스터로 줄줄이 개봉되었고, 그와 동시에 <건담> 시리즈 같은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이 전세계의 TV 방송국에서 자주 방영되던 시대다. 1950년대 SF물 유행을 냉전 시기 사회 분위기와 연관 짓는 분석이 흔한 걸 생각해보면, 1980년대 레이건 집권기 미국의 강경 정책에 의한 신냉전 분위기가 SF 유행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SF 부흥기의 분위기를 타고, SF 소재가 풍부한 1980년대판 <환상특급>이 인기를 끌었다고도 풀이해볼 수 있을 듯싶다. 물론 그외에도, 충격적인 결말의 힘과 여운을 잘 살릴 수 있도록 3분, 8분 만에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아주 짧은 에피소드를 과감하게 편성했다든지, 컬러 텔레비전과 새 시대의 특수효과를 멋지게 사용한 에피소드들이 있었다는 점도 <환상특급>이 인기를 얻은 이유였을 것이다. <환상특급>의 인기는 이 시리즈 하나의 인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어메이징 스토리>라는 비슷한 시리즈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비슷한 TV시리즈 <기묘한 이야기>가 탄생한 데에도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유행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쳐서, 1990년대 초중반에는 <환상여행> <테마게임>같이 기이한 이야기를 다룬 단막극 시리즈들이 긴 시간 인기를 끌며 제작되었고, 심지어 방송사별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코미디언이나 가수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슨무슨 극장” “무슨무슨 드라마” 등의 제목으로 짧고 강렬한 이야기들을 꾸며서 보여주는 내용이 몇년간 쏟아졌다. 세월이 흘러 OTT나 유튜브와 같은 새로운 매체가 등장한 2020년대가 된 요즘, 다시 새 매체에 걸맞은 강렬하고 짧은 단막극 시리즈를 부활시켜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넷플릭스를 통해 <블랙 미러>가 화제가 된 이후에, “한국판 <블랙 미러>를 만들어보겠다”는 제작사 관계자도 나는 최근에 여럿 만나 보았다. 심지어 미국의 OTT에서는 아예 <환상특급>을 새로운 시즌으로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는데 아직까지는 딱히 큰 반응은 없는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일까? 신인 배우, 신인 작가, 신인 연출자들이 과감한 시도를 실험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던 1980년대판 <환상특급>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트위터 스페이스] 다혜리의 작업실: 2022 젊은작가상 대상 '초파리 돌보기' 임슬아 작가와의 대화

※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기능입니다. ‘다혜리의 작업실’은 다양한 분야에서 글을 쓰는 작가들을 초대해 그들의 작품 세계와 글쓰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듣는 코너입니다. 스페이스는 실시간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시 듣기가 가능합니다. 이다혜 @d_alicante ‘다혜리의 작업실’ 일곱 번째 게스트는 단편소설 <초파리 돌보기>로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임솔아 작가님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이원영’입니다. 노년에 접어든 원영은 건강한 초파리를 골라 번식시키는 실험실 아르바이트를 좋은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여러 동식물 중 초파리를 돌보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이유가 있을까요? 임솔아 @limsolah2772 초파리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사람들이 안 좋아하잖아요. 초파리를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게 초파리의 특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다혜 @d_alicante <초파리 돌보기>는 어떻게 쓰시게 됐나요? 임솔아 @limsolah2772 언젠가 엄마와 통화를 하다 해피엔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엄마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쓰면 안되냐고 얘기하시더라고요. 그때 저도 모르게 알겠다는 답이 튀어나왔지만 전화를 끊을 때까지만 해도 이걸 소설로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동료 작가분이 “소설 한편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며 그렇게 한번 써보라고 하셨어요. 과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 괜찮을지만 고민했는데 그제야 소설이 아닌 내가, 어머니가 괜찮을지 생각하게 됐고, 이 소설을 쓰게 되었어요. 이다혜 @d_alicante 소설을 쓴 후에는 고민의 결론이 났나요? 임솔아 @limsolah2772 사실 고민이 끝나지는 않았어요. (웃음) 그래서 결말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거예요. 제가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못 내렸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이전에는 행복한 결말이 진실을 가리는 용도로 많이 사용된다고 여겨서 그런 감정만으로 뒤덮지 않는 결말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몇년 전부터 내가 더 괜찮은 방향, 더 좋은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 안 하는 건 아닐까 싶었어요. 지금도 양쪽 생각을 다 하고 있습니다. 이다혜 @d_alicante 이 작품을 어머니께서 읽으셨는지, 결말에 만족하셨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임솔아 @limsolah2772 어머니가 읽으셨고요, 결말에 대한 얘기는 안 하셨어요. 다만 주문이 많아서 미안했다는 말씀을 하셨고요. 젊은작가상을 받고 나서 텔레비전에 제가 잠깐 나왔다는데, 그걸 무척 기뻐하셨어요. 이다혜 @d_alicante 혹시 이번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다른 소설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감상을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임솔아 @limsolah2772 유난히 자주 떠올리는 작품이 있어요. 김혜진 작가의 <미애>입니다. 강아지와 산책할 때 남의 아파트 단지를 걷곤 하는데, 화단에 꽃이 피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소설 속 미애가 봤던 황량한 아파트 단지가 떠오릅니다. 이다혜 @d_alicante 작가님이 반복하신 표현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어요. <초파리 돌보기> 작가노트에 “너무 열심히 하면 무서워져”라고 쓰셨는데, 시집 <겟패킹>에 수록된 시 <리기다소나무>에도 “열심히 하지 마요/ 너무 열심히 하면 무서워요”라는 대목이 있어요. 이런 인상적인 말들을 열심히 메모하는 스타일인가요? 임솔아 @limsolah2772 알아보는 분이 계실 줄 몰랐어요. 너무 반갑네요! 그 말이 저한테 인상적이어서 두번 쓰게 된 것 같아요. 소설과 시 메모는 다른 곳에 합니다. 시는, 손바닥만 한 메모장에 문장 전체를 써요. 그중 버릴 건 지우고 남는 걸 가져가는 방식으로 컴퓨터에 옮기며 시를 쓰고요. 소설은, 화이트보드나 포스트잇에 키워드만 적어둬요. ‘실험실’, ‘초파리’, ‘해피엔드’ 이런 식으로요. 혼자서 가만히 벽에 붙은 키워드들을 보다보면 소설의 얼개가 떠오르거든요.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으로 써요. 이다혜 @d_alicante 메모하는 단계에서부터 시와 소설이 구분된다고 하셨는데, 완전히 엄격하게 지켜지는 건 아닐 것 같기도 해요. 어떠신가요? 임솔아 @limsolah2772 예전에는 같은 얘기를 시로도 쓰고 소설로도 썼어요. 책으로 묶을 때만 중복되지 않게끔 하고, 다 썼어요. (웃음) 요즘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인데, 저도 모르게 구분이 되는 것 같아요. 키워드가 떠오르면 ‘소설이구나!’, 문장이 떠오르면 ‘시구나!’ 합니다. 이다혜 @d_alicante 다음에 만나게 될 작가님 책은 시집일까요, 소설집일까요? 임솔아 @limsolah2772 지금 장편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장편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계간 <문학동네>에서 여름호부터 연재됩니다. 남선우의 책갈피 <초파리 돌보기>에는 반가운 지명과 장소가 여럿 등장합니다. 소설을 쓸 때 직접 가본 곳을 떠올리며 쓰시나요, 가보지 않았더라도 조사해가며 쓰시나요? 소설에 나오는 과기원 앞 벚꽃길에도 가본 적 없습니다. 그래도 상상하며 쓰는 것 같아요. <초파리 돌보기>의 지유는 “내 소설 속 인물들 직업이 다 비슷비슷하잖아. 특별한 직업을 쓰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작가님도 비슷하게 생각 중이신가요? ‘특별한 직업’이란 무엇인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소설에는 문화예술계 종사자나 아르바이트 등의 비정규직이 주로 나옵니다. 제가 생각하는 조금 특별한 직업은 아르바이트가 아닌 전문 직종 혹은 회사원이에요. 임솔아에게 ‘해피엔딩’이란? 아직도 여전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