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김혜리 기자의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스포일러 인터뷰

박찬욱 감독이 몇편의 사랑영화를 만들어왔나 헤아려보고 흠칫했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는 대놓고 러브 스토리였고 조금 비밀스러운 데야 있지만 <스토커> <올드보이>도 여기 묶을 수 있다. 6부작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작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 관객이 박찬욱식 멜로드라마를, 혹은 그 변태성을 전에 없이 화제로 삼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건 이번 영화의 연인이 그나마 보편적으로 감정이입하기 용이한 인물들이라서일 수도 있다(동시대 인간이고, 헤테로섹슈얼이고, 근친이나 적이 아니다). 혹은 마침내 연애가 영화의 중심 사건이자 플롯이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다. 욕망의 문답은 취조와 심문의 언어를 빌려오고 정의, 진실, 예의 같은 다른 범주의 인간 행위가 끌려들어온다. 송서래(탕웨이)와 장해준(박해일)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기품이 있는 남자와 여자다. 깨끗하지만 친절을 모르는 남편에게 모욕당하며 살던 서래는 경찰서 사체 검안실에서 해준을 처음 만난다. “중국인이라 한국말이 서툽니다.” “한국말, 저보다 잘하시는데요.” 어색하게 시작된 둘의 대화는 예상을 뛰어넘어 지속되고 어떤 강보다 험하게 굽이치며 끝내 바다까지 흘러간다. 품위 있는 두 인간의 사랑은 그러나 그들의 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해준은 과거부터 쌓아올린 현재를, 서래는 미래를 위협받는다. 우스꽝스러움과 애절함이 산 정상에서 만나고 죄와 영광이 가장 깊은 바다 밑에 한데 묻힌다. <헤어질 결심>은 수석과 분재를 확대한 듯한 모양의 바위와 나무가 있는 해안에 마지막으로 도착한다. 자연의 축소판인 수석과 분재를 다시 실물 크기 바위와 나무로 옮겨놓은 것 같은 그 이미지는 현실과 관념, 구상과 추상 사이 박찬욱 영화가 서 있는 자리의 표식 같기도 하다.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처럼 파도 속으로 걸어들어갈지 썰물이 남기고 간 폐선의 잔해처럼 살아갈지 짐작할 수 없는 남자는 영겁의 시간에 갇힌 것처럼 보이고 서래의 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이번에도 박찬욱의 연인들은 세상 끝에 당도하지만 서로를 보지 못함으로써 사랑은 영원해진다. 2023년 오스카 레이스에 <헤어질 결심>이 가을부터 합류할 경우 차기작 <동조자> 제작 스케줄과 조정이 될까? 그런 아무도 시키지 않은 걱정을 하며 박찬욱 감독을 만나러 갔다. 그는 연출적 선택에 대해 “아껴뒀다가 썼다”라는 표현을 종종 썼다. 영화언어의 한 음절 한 음절을 귀중히 다루고, 무난한 숏은 곧 실패로 여겨 파기하며, 불가피한 조건을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격상시켜 결과에 통합하는 그의 연출 태도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굳건해지고 있었다. - <헤어질 결심>은 투자자 이름을 나열하는 한국영화 특유의 크레딧이 오프닝에 생략돼 있고 곧장 총성으로 시작합니다. = 그런 한국영화도 종종 있지 않았어요? 영화를 총성으로 시작한 것은 사건 현장, 심지어 액션을 상상하도록 오도하려는 뜻도 있었어요. - 저는 사건 현장의 소리인가 싶어 몇발이 발사됐는지 속으로 셌어요. = (웃음) 허무하라고 한 거예요. 해준(박해일)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인물인데 틀린 선입견도 만들고 싶었어요. 관객은 사격장 신이 나오면 표적을 얼마나 잘 맞혔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데 그것도 안 보여줬죠. - 그렇게 허를 살살 찔러가며 시작한 영화는 러닝타임 90분 즈음까지 부산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이후 50여분은 이포에서 전개됩니다. 두건의 살인 -뒷부분에는 철성(서현우)의 어머니 사건도 숨겨져 있지만-, 두곳의 경찰서, 두명의 경사 파트너. 이처럼 가운데가 접히는 형식은 <아가씨>도 그랬지만 <아가씨>는 원작의 구조가 이미 있었잖아요. <헤어질 결심>의 2부 구성은 어느 단계에서 결정됐나요? = 초창기 트리트먼트를 쓸 때, 서래(탕웨이)가 중국 사람스럽게 예를 들면 당시(唐詩) 같은 옛날 문장 형식의 말을 좀 하면 좋겠다고 정서경 작가와 이야기했어요. 그 결과물의 예가 “죽은 남편이 산 노인 돌보는 일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대사죠. 그런데 어느 날 정서경 작가가 <산해경>을 가지고 왔어요. - <산해경>은, 특별한 서사는 없고 어디로 가면 무슨 산이 있고 어떤 신기한 짐승이 있다고 나열하는 식의 책인데요. = 어쨌든 산과 바다에 관한 책이고 산과 바다는 우주죠. 공교롭게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바다에서 끝나니까 제목만으로도 영화에 부합하는 것 같았어요. 각본에는 완성된 영화에서보다 <산해경>이 중요하게 언급되죠. 서래의 외조부 계봉석이 취미 삼아 필사했고 본인이 덧붙이기도 했다는 대사도 있었어요. 그리고 서래는 물려받은 계봉석 판본 <산해경>을 공부 겸 한국어로 번역하며 필사한 거죠. 그러다가 영화를 두 챕터로 아예 나눠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로 산과 바다라고 표기한 타이틀 카드가 각장 서두에 나오는 편집본이 오랫동안 있었어요. 형식적으로 단정하고 괜찮았는데 러닝타임이 길다는 걱정이 나오면서 내가 관객이라면 보통 영화 한편 끝날 즈음 갑자기 ‘바다’라는 소제목이 뜨면 여태 본 만큼 또 봐야 하나 싶어 공포스러울 거 같았어요. 실상 ‘바다’는 절대 ‘산’만큼 길지 않은데, 그러면 난 정말 억울한 거죠. 그래서 뺐어요. (좌중 웃음) - 극중 부산은 우리가 아는 부산이지만 이포는 가공의 도시입니다. 호미산도 경남 의령의 호미산이 아닌 듯합니다. 이포를 만든 것은 영화가 이 도시에 필요로 하는 속성 -원전, 안개, 조수간만- 을 한꺼번에 가진 실존 도시가 없어서였나요? = 그렇죠. 호미산은 이포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 부산과 이포 챕터 사이의 시간적 갭이 13개월인데, 이건 어떻게 계산해 나온 시간인가요? = 1년보다 짧으면 서래가 큰 변화를 겪기에는 좀 밭은 것 같았고 마음의 정리도 될 만한 긴 시간은 곤란할 것 같았어요. 원래는 두 번째 남편 임호신(박용우)을 만나는 경위에 관한 신이 각본에 있었어요. 서래가 돌보는 화요일 할머니가 결국 돌아가시고, 상갓집에서 어떤 유족보다 섧게 우는 서래를 아들이 눈여겨봤다가 접근한다는 설정이었어요. - 그 장면이 있었다면 임호신이 조금 더 입체적이었겠네요. = 아쉬워요. 그걸 찍기로 한 시점엔 이미 이대로 가면 굉장히 긴 영화가 되겠다는 압박이 있어서 찍지 않았어요. - 그렇다면 이포 부분의 서래가 본연의 모습에 가깝다고 보면 될까요? = 어느 서래가 진짜냐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도수(유승목)와 살다보니 해소하지 못한 욕망이 많아서 값비싼 물건도 사고 싶고 그럴 마음이 생겼을 수 있는 거고. 사랑의 심문 - 스릴러의 틀로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에는 영화적으로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 긴장이 깨지지 않는다는 점이죠. 나는 사랑영화를 볼 때 대개 좀 지루해졌어요. 밀당도 있고 다툼도 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은 변치 않고 헤어지거나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해도 그들의 사랑은 당연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긴장이 떨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관계에 의심이 개입하면 좀더 드라마틱해지는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만나 연애해도 의심할 수 있지만 용의자와 형사로 만났을 때의 의심과는 비교할 수 없겠죠. - <친절한 금자씨>부터 함께한 정서경 작가와 작업하면서 <헤어질 결심>에서만 겪은 일이 있다면요? = 배우를 정해놓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죠. 박해일은 실제로 캐스팅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이런 사람을 상상해보자. 예를 들면 박해일 같은”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마다 박해일에게 받는 인상은 다르겠으나 내가 사적으로 만나보고 받은 인상은 담백한 사람, 친절한 사람, 점잖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연애의 목적>에서 너무 강한 인상을 줬는지 다른 사람들은 의외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꼿꼿해요”라고 해준이 서래를 묘사하는 말이 내가 박해일에게 받는 느낌이기도 해요. 긴장하지 않으면서 꼿꼿한 사람이라고 해준이 서래를 묘사하는 건 자기 이야기예요. 덧붙여 박해일에 대한 내 인상을 굳힌 작품은 <덕혜옹주>였어요. 캐릭터가 군인이라는 면도 작용했겠지만 실존 인물을 그린 작품에서 가공의 캐릭터를 연기할 때 자칫 허황돼 보일 수도 있는데 박해일이 하니 의젓하고 기품이 있었어요. - 왜 이번 작품은 배우부터 정했어야 했나요? 사랑 이야기라서? = 박해일은 작가에게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해 참고했던 이름인데 실제로 이뤄졌으니 행운이었고요. 남자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 소설에서 영감을 얻어 애초부터 직업과 성격이 잡혀 있었는데, 여자는 용의자라는 점 외에는 백지 상태였어요. 그런데 정서경 작가가 갑자기 중국 사람으로 하자고 해서 왜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탕웨이를 캐스팅할 수 있지 않냐는 거예요. 나 역시 탕웨이를 좋아했고 오래전부터 탕웨이를 캐스팅할 수 있는 영화를 우리가 좀 만들어야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해온 터였죠. (한국영화에) 굴러들어온 복인데 마땅한 기획이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헤어질 결심>의 여주인공은 무엇이건 만들어갈 수 있으니 기회였죠. - VIP 시사회에서 탕 배우가 아이맥스 상영관에 꽉 찬 관객을 가리키며 “산처럼 보인다”고 하더군요. 극중 대사를 인용하는 인사였는데 평소에 말을 밀도 있게 하는 사람 같았어요. <헤어질 결심>은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라는 대사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부터 해준의 사랑이 시작됐다고 봐야 할까요? = 배우들도 그걸 꼭 물어요. 그래서 여러 가설을 주고받았는데 내 경우는 심문 과정에서 서서히 시작됐다고 생각했어요. - 처음 시신을 보러 온 서래와의 대화 중 이례적으로 사이가 길게 뜨고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하는 순간 같기도 하고. = 난 그 장면 찍을 때 “아이고, 대사를 까먹었구나.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걸, 쯧쯧” 하며 컷을 부르려고 했는데(좌중 폭소) 배우의 의도였어요. 물론 사이를 떼라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길게 할 줄은 몰랐지. 그래도 만나자마자 너무 반한 사람처럼 보이면 곤란할 것 같아 일단 보류했는데 현장 편집으로 보니 침묵의 순간이 너무 재밌어서 결국 사용했어요. 그 밖에 사랑의 시작이 될 만한 순간이 몇몇 있어요. 시신 상태를 어떻게 확인하겠냐는 질문에 서래가 처음에는 ‘말씀’으로 듣겠다고 해서 실망했다가 사진으로 선택을 바꾸니까 반기는 표정으로 변한다든가. 동족이라고 느끼는 거죠. - 계단참에서 해준이 수완(고경표)에게 부검에 대해 서래에게 설명해주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묘하게 찍혀 있어요. 대화인지 독백인지 알 수 없도록 해준과 수완을 나눠 찍었는데 해준이 계단 모퉁이를 돌아 위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 이제 그는 수완과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신호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 그냥 두 사람이 분리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로는 둘이 대치하는 국면으로 전개되죠. - 초밥 먹은 상을 치울 때 10년 산 부부처럼 손발이 척척 맞는 대목도 그렇습니다. = 그러고 나서 해준이 따라오라며 먼저 방을 나가고 서래는 다시 안 돌아올지 몰라 가방과 코트를 챙겨 드는데 밖에서 해준이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다시 올 거예요!”라고 소리쳐요. 그러면 서래가 별일이네 하는 표정을 지으며 코트를 내려놓죠. 그게 탕웨이의 아이디어였어요. 서래가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다”라고 말은 했지만 내 생각엔 사랑을 깨달았다는 의미지 사랑은 그전부터 싹텄죠. 사건이 종결돼 유품까지 돌려받았으면 더이상 이 남자를 속일 이유도 없는데 계속 밥도 먹고 절도 가고 홍산오(박정민) 사건이 해결된 날 찾아와 재워준다고도 하고. - 재워준다고 방문한 날은 기도수 사건의 증거를 인멸하려는 목적도 있었지 않나요. = (시큰둥하게) 어쨌든 종결됐다고 하는데, 굳이 뭐 그렇게까지. - 사건이 끝나서 기쁘냐고 물어보는 것도 불필요한 질문이잖아요. = 그 대화를 좋아해요. 탕웨이도 대놓고 말하는 품이 탕웨이 같고 박해일도 왜 묻냐고 했다가 잠시 후 인정하는 것이 박해일 같아요. - 이야기의 반환점인 서래의 아파트에서의 이별 장면에서 카메라 움직임이 주의를 끕니다. 카메라의 위치가 높아 인물들이 깊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가 해준이 떠난 다음 서래가 다시 떠오릅니다. = 서래가 자리에 앉으며 프레임 아래로 나갔다가 카메라가 틸트 다운하며 다시 들어오죠. 인물을 놓쳤다가 다시 찾아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고 그 장면의 시공이 좀 다르게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서래의 집은 계속 등장한 장소지만 그 순간을 위해 천장이 많이 보이는 앵글을 아껴뒀다가 내리누르는 느낌으로 썼어요. 어쩌면 SF - 형사가 용의자를 감시한다는 설정에서는 서래가 일방적 욕망의 대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장치 중 하나가 해준과 서래가 동족이라는 가설인 것 같아요. = 사회적 조건이 매우 이질적인 두 사람이지만 살면서 중요시하는 면이 통한 거죠. 감시당한다는 상황은 불쾌한 것인데 지금 믿음직한 남자가 잠을 안 자고 지켜주는 기분이 든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정말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죠. 형사를 속여야 하는 용의자의 자리에서 벗어난 심리 상태인 거지. 뭐, 이미 초밥의 맛을 볼 때부터 호감을…. (좌중 웃음) 작은 실수가 있었는데 시마스시라는 초밥집이 실제로 있다는 걸 모르고 상호를 지었어요. - 사실 엿보기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같은 예술영화부터 1980년대 할리우드 에로틱 스릴러까지 무수히 쓰인 장치라, 어떻게 진부하지 않게 찍을 것인가가 중대한 과제였을 법합니다. 엿보는 쪽이 대상이 있는 공간으로 텔레포트한 것처럼 연출하셨는데 이 방식으로 무엇을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 호기심이죠. 첫 순간이동의 계기가 서래의 얼굴이 커튼에 가려졌을 때예요. 얼굴을 더 잘 보려고 망원경을 든 해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안 보일 때 오히려 상상의 클로즈업이 작동하는 거죠. - 그런데 2부에서 서래가 해준을 훔쳐볼 때에는 순간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작동 방식은 해준의 고유한 것이구나 짐작했습니다. = 서로 다른 방식을 택하는 거죠. 편집 중 없어진 장면 중에는 서래가 돌봄 노동을 얼마나 프로페셔널하게 수행하는지에 관한 해준의 감탄도 있었어요. - 탕웨이 배우를 캐스팅한다는 목표가 먼저고 서래를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설정한 것이 나중이라는 사실이 의외입니다. 외국어로 대화한다는 문제가 영화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모티브라서요. = 예를 들어 탕웨이와 영화를 찍고 싶어서 중국 사람으로 캐릭터를 설정했다면,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주연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어떻게 서툰 언어로 연애 스토리를 끌고 갈 것인가, 즉 약점을 어떻게 에둘러 갈지를 중심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조건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서 마치 각본이 먼저 정해지고 배우를 구한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되길 바랐어요. <복수는 나의 것>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신하균이 연기한 류가 말을 못하는 것은, 당시에 하도 캐스팅이 어려워 홍콩 배우를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 기본적으로 사랑에는 언제나 암호의 요소가 있으니까 외국어의 모호함이 잘 어울리는 면이 있지만, <헤어질 결심>에서는 외국어 사용자는 네이티브보다 말의 사전적 정의를 정확히 안다는 사실도 중요해 보입니다. 무엇보다 해준은 서래의 정확한 화법을 좋아하는 남자고, 두 남편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자이거나 한국어를 지저분하게 쓰는 사람들입니다. = 서래와 해준이 동족인 이유 중 하나죠. 관객이 막 웃어줄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만 “한국말을 못 알아듣더라”라는 대사를 내심 좋아해요. - <아가씨>에서는 남에게 들은 말을 자기 말처럼 제3자에게 반복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번역 앱이 쓰였습니다. 여기에는 언어의 거리와 시간적 거리가 동시에 게재됩니다. 통역에 걸리는 시간도 있고 과거에 녹음된 걸 현재 듣는 시차도 있죠. 덕분에 해준과 서래의 연애뿐 아니라 보편적으로도 모종의 ‘이격’(離隔)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 예컨대 한국어를 못하지 않는 서래가 굳이 통역 앱을 써서 중국어로 말할 때에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일 테니 해준은 궁금함이 더 간절해지고 그 갈망을 관객이 공유하게 됩니다. 한편 서래는 한국어로는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워 답답했던 감정을 발산하고요. 그러고는 앱이 내 말을 잘 전달하나 유심히 듣죠. 내가 외국 가서 인터뷰할 때 통역이 정확히 전하고 있나 듣고 있는 것처럼. (웃음) - 그러고 보니 앞서 2부의 서래가 본래 서래에 가까울 거라고 짐작한 데에는 통역 앱의 음성이 1부에서는 남성, 2부에서는 여성이었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 2부의 호미산 장면에서만 여성 목소리가 나오죠. 실존하는 통역 앱보다 기능이 훨씬 우수해서 일종의 SF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웃음), 여성 음성을 선택할 수 있는 모드가 13개월 후에 개발된 거죠. (웃음) 여자 목소리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호미산의 대화를 위해 아껴뒀어요. 죽은 자와 눈 맞추기 - <산해경>은 1부의 서래 집 벽지에서 보듯 시각적 모티브도 된 것 같습니다. 한편 해준의 부산 집은 온통 M. C. 에셔의 큐브 같은 격자무늬투성이고 이포의 정안(이정현) 집에는 기하학적 추상화들이 걸려 있던데요. = 해준의 벽지는 고야드 가방의 패턴처럼 보일까봐 걱정도 했는데 그냥 반듯하고 규칙적이고 정리벽이 있는 사람이 좋아할 법한 느낌을 살렸어요. 네모에 갇힌 고지식한 느낌과 루틴의 반복을 표현했죠. 서래 집의 벽지도 반복 무늬긴 하지만 변화의 기운이 있죠. 정안 집의 그림은 말레비치 계열 그림의 변형일 거예요. - 1부에는 기도수 추락사 사건 외에, 알고 보면 치정 범죄(crime of passion)인 서브 사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홍산오 사건의 속성과 비중에 대해서 고민하셨을 것 같아요. 각본에서 기능으로 보면 장해준 형사가 일하는 매너를 보여주는 예시이고 시간적으로는 사랑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했을 텐데요. =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쓴 마르틴 베크 시리즈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여기 보면 강력반 형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메인 사건과 서브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는 기법이 등장해요. 두 사건이 관련이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끝에 가서 만나기도 하고 여러 용도가 있어요. 홍산오 사건은 돈을 둘러싼 젊은이들의 사건같이 보이다가 나중에 가서 본질이 드러나죠. 그리고 서래가 이 사건의 해결에 영감을 주는데 수사관도 아니면서 힌트를 주려면 인간 본성 내지 사랑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겠죠. 해준이 옥상에서 산오와 대치해 설득할 때 갑자기 “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말이야”라며 죽은 기도수가 살아 있는 양 이야기하잖아요. 정말 용의자를 설득하려고 트릭을 쓰는 건지 정말 과몰입해 자기 이야기를 흘리는 건지 구별되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 두 차례의 추격전이 모두 옥상 같은 공간에서 마무리됩니다. 앞의 추격전은 서래가, 뒤의 추격전은 산오의 애인(정하담)이 바라보고 있죠. 비금봉과 호미산까지 포함하면 해준은 항상 높은 곳으로 힘들게 올라가서 진실과 마주치는 편입니다. = 그러게. <현기증>이 연상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지금 드네요. 이지구를 추격하는 첫 추격전에서는 계단이 길고 높아서 젊은 수완이 못 쫓아오는 상황을 만들려고 했고 높은 곳에 올라가는 공포를 다루고 있는 영화니 어울린다고 봤습니다. 홍산오를 추격하는 신도 눈 뜨고 추락한 시체와 서로 마주 보는 기도수 때 상황을 반복할 필요가 있어서 두번 다 옥상이 배경이 됐습니다. - 후반에 가면 시신의 자세로 해준이 눈을 뜨고 누워 있는 숏도 나오는데요. = 해준도 결국은 그 남자들처럼 살해되거나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관객이 계속 갖고 가길 원했어요. 해준은 서래가 결혼했던 두 남자에 대해 형사의 입장을 넘어서 관심을 갖기 때문에 약간의 동일시가 이뤄져요. 기도수가 즐겼던 위스키의 맛을 알고 싶어서 똑같은 걸 사서 맛보고 휴대용 플라스크도 사서 다니죠.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을 만난 이후 손가락 관절을 꺾는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기도 합니다. - 기도수와 임호신은 둘 다 비싼 시계를 차고 있던데요. = 임호신의 롤렉스는 기도수의 것을 물려받은 거예요. 서래도 웃기는 사람이지. 전남편의 시계를 깨진 유리만 갈아서 선물했어요. - 서래 집에 있던 대만산 위스키가 회식 자리에 등장해서 해준이 들고 온 건가, 환상인가 했어요. = 편집됐는데 부하 형사 미지가 해준의 신용카드를 받아 사오는 장면이 있었어요. - 기도수가 출입국 관리국에서 일하다 압수한 술일까 상상도 해봤습니다. = 기도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요. 오디오, 음반, 암벽등반 그리고 위스키가 그것이죠. - 영화에 등장하는 오디오 마니아나 고전음악광은 변태인 경우가 많아요.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에도 그런 인물이 나왔죠. 그런데 기도수는 비싼 오디오로 음악을 들을 때는 미닫이문으로 아내가 있는 공간을 차단해요. 조금 무리해서 해석하면 기도수가 아내 서래를 대하는 태도는 식민지를 대하는 점령국의 그것 같았습니다. 소유물로 취급하고 훈장도 주고 학대하고. 말러 교향곡 5번을 사용하셨는데 말러가 자아가 비대한 인물이 사랑할 만한 음악이라서인가요? = (웃음) 맞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말러 애호가들이 듣고 화를 내면 어쩐담? 나라면 킥킥 웃겠지만. 다들 ‘말러 애호가들이 그런 면이 있지. 나는 아니지만’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박쥐>에서 시어머니(김해숙)가 남인수, 이난영의 노래를 좋아하는데 태주(김옥빈)는 극혐하거든요. 그런 식으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악을 비호감 캐릭터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쓰면서 변태적 즐거움을 느끼나봐요. 발음보다 중요한 억양 - 탕웨이 배우는 대부분 출연작에서 연애 내러티브를 만드는 동시에 로맨스 속에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마이클 만의 액션 스릴러 <블랙 해트>조차 탕웨이의 얼굴에 감정의 대부분을 걸고 있어요. 덧붙여, 두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하는 작품에서 중국어 대사를 할 때 굉장한 카리스마와 품위를 발한다는 인상을 받아왔습니다. = 누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쓸 때는 취약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을 좀 활용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모국어를 말할 때 생기는 자신감으로 인해 관계가 역전될 듯한 아슬아슬함이 발생하죠. 중국어로 말하는 통역 앱 사용 장면을 몇번이나 만든 이유도 그런 탕웨이의 위엄을 관객이 느끼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 한국어 대사를 감독님이 직접 녹음해주셨다고 탕웨이 배우가 인터뷰했는데 대안은 없었나요? (웃음) = 원래는 여성 연극배우가 한국어 대사를 내 디렉션으로 녹음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나더러 해달라고 탕탕(탕웨이의 현장 닉네임)이 부탁하더라고요. 나는 배우도 아니고 남자인데. - 원래 연기 시범은 안 하시는 걸로 알아요. = 대사는 억양이 중요해서 정확히 알고 싶었는지…. 나 역시 발음은 알아듣기만 하는 수준이면 되지만 억양은 정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딜 강조하고 말끝을 올릴지 말지는 의미의 이해 여부를 결정짓는 것이니 억양만큼은 어느 한국인보다 더 정확해야 했어요. 어눌한 발음과 정확한 억양이 결합할 때 생기는 재미가 있죠. - 시사회에서 어떤 한국영화보다 대사가 잘 들려서 놀랐습니다. 특별히 녹음과 믹싱에서 신경 쓴 부분이 있나요? = 현장 동시녹음도 완벽을 추구했지만 끝없이 테이크를 갈 수는 없으니 소리의 길이와 입모양만 정확하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후시녹음에서 처절한 노력을 했어요. 창도 없는 밀폐된 녹음 부스는 30, 40분만 서 있어도 멀미가 나는데 탕웨이가 어떤 대사는 수십번 이상을 반복하고 나는 형사처럼 유리창 밖에서 지켜보며 서로 기계가 되어갈 때까지 녹음했어요. 그렇게 후시녹음을 마치고도 대사를 숙지하고 있는 우리 귀에 들어온다고 처음 보는 관객에게도 그럴까 염려돼 블루캡(녹음실) 직원 중 우리 영화를 담당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테스트를 했고 그래도 귀 밝은 사운드 전문가들 아닌가 싶어 스탭들의 비영화인 친인척을 초대해 다시 체크했죠. 마지막에는 베이징 녹음 스튜디오를 빌려 생중계하면서까지 보완했어요. - 여연수 경사(김신영)는 왜 동료들 사이에 따돌림을 받나요? = 칸에서 영화를 본 한국 기자들이 성 정체성을 질문했어요. 소수자라서 왕따냐고. 뜻밖이었어요. 부산에서 우울증에 걸려서 전근 온 거냐고 해준에게 묻는 모습에서 보듯, 궁금하면 바로 물어보고 사회적 스킬이 별로 없는 인물이라 사람들이 멀리한다고 생각했어요. - 대칭을 이루는 고경표 배우의 수완이 (코미디언 출신) 김신영 배우의 연수보다 더 장르적인 캐릭터라는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김신영씨 소속사 대표님은 처음 제안을 듣고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웃음) 철성의 취조 장면에서 욕한 것도 애드리브였다고 들었습니다. = 우정 없는 우정출연인 줄 알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웃음) 원래 욕은 각본에도 있었지만 김신영씨가 연배 있는 경상도 분들이나 아는 “돌 빨았나?” 같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독창적인 표현을 조사해왔어요. 작업 과정은 다른 배우와 똑같았어요. 연극 10년쯤 하던 배우를 발견해 캐스팅한 기분이었어요. 봉준호 감독이 송새벽 배우를 <마더>에 데려온 것처럼. 스마트한 클래식 멜로드라마 - 산보다 바다를 선호하는 서래와 해준은 극중에 인용된 공자의 정의에 의하면 인자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감상(感傷)을 덜어내려는 선택이었을까요? =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긴다기보다 적어도 인자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정도일 겁니다. 서래는 필요하다면 무자비한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을 테고 해준은 ‘인자’에 대한 기준이 높아서 나 정도로는 어질다고 보기 어렵다는 쪽이 아닐까요. - <헤어질 결심>의 부제를 ‘스마트폰 시대의 사랑’으로 지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번역 앱, 운동 앱, 추적 앱 그리고 아이폰의 문자 입력 중 말줄임표까지 서사에서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단편 <일장춘몽>이 있었지만 <헤어질 결심> 역시 일종의 애플 영화가 아닌가 싶기까지 했어요. = 서래와 해준이 같은 종족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똑같이 소나타를 몰고 폰도 같은 회사 것을 썼어요. 갤럭시였어도 무관한데 애플쪽에서 협찬을 했어요. - 가정용 전화가 보급됐을 때, 그리고 핸드폰을 누구나 사용하게 됐을 때도 스크루볼 코미디나 스릴러의 각본 쓰는 방식이 영향을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인데 <헤어질 결심>처럼 스마트폰의 기능을 결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쓴 영화는 처음 본 것 같습니다. = 옛날 영화나 소설을 21세기 배경의 영화로 각색할 때 어려운 점이죠. 그냥 원작의 시대를 가져오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에는 우리도 앱이 너무 많이 나오지 않나, 줄여야 하나 고민했는데 관객 입장에서 쉬운 해결책이 있는데 왜 어렵게 돌아가나 의문이 들 것 같았어요. 억지스럽게 플롯을 전개하느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고 기왕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어요. 예를 들어 문자를 보낼 때 보는 것은 폰 액정이지만 마음으로는 문자를 받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거죠. 그러니 시점숏의 주인은 핸드폰이 아니라 서래인 겁니다. - 그외에도 사물 시점의 숏이 많습니다. 손목시계의 무브먼트 시점도 있고 죽은 자의 안구 속 시점도 있고요. 사물의 시점이 영화에 더해지며 생기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 처음엔 해준이 살인 현장에서 눈 뜨고 죽은 사람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새겨진 범인을 꼭 잡아주겠다고 약속하는 심정으로 피해자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그러다가 다양한 경우로 확장됐어요. - 해준의 별명을 ‘폰 모으는 남자’로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웃음) 세어보니 월요일 할머니의 폰, 호신의 대포폰, 철성의 폰, 서래가 차에 두고 간 폰까지 모조리 해준의 손에 들어와요. = 스마트폰 활용을 회피하기를 포기하고 나니까 자꾸 빠져들더라고요? 이왕 그렇게 된 거 몰아주기로 했어요. (좌중 폭소) - 스마트폰을 적극 사용하지만 동시에 매우 고전적인 멜로드라마 장면들이 있습니다. 자동차 뒷자리에 해준과 서래가 나란히 앉은 장면은 교향악까지 합세해 데이비드 린의 <밀회>를 연상시키고, 절에서 데이트하는 시퀀스는 꼭 한국이나 일본의 옛날 영화 속 장면 같아요. 박해일 배우가 신성일처럼 보이고요.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도 그렇고. = 해준이 나름 데이트를 위해 차려입은 거예요. (웃음) <헤어질 결심>의 영감이 된 정훈희의 <안개>가 김수용 감독의 <안개> 주제가이기도 해서 과거 한국영화에 대한 존경심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무리 한국에서 오래 살았대도 서래는 외국인이니 해준이 관광객을 안내하듯이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사찰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해준의 성격이 절을 선호할 것도 같고 박해일의 <나랏말싸미> 영화도 떠올랐고요. 촬영지는 순천 송광사입니다. - <올드보이>의 대표색이 보라라면 <헤어질 결심>은 청록인 것 같습니다. =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는 색이고 바다와 산의 색이기도 해요. 바다는 빛에 따라 파랑으로도 녹색으로도 보이고, 산도 보는 거리에 따라 그렇죠. 사실 서래가 입는 청록색 원피스도 파랑 한벌, 녹색 한벌을 만들었어요. - 그리고 관객한테 당신들 눈이 문제라고 덮어씌우려고요? (웃음) = 안개가 이 영화의 중요한 기후 현상인데 그 속에서 뭔가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보고 싶었어요. 서래는 이렇게 보면 살인자고 저렇게 보면 피해자니까요. - 서래의 가발에 대해서는 편집 전에도 설명이 없었나요? = 가발을 설명하는 ‘대사’는 없었고 그저 벗는 동작이 보이고, 여러 가발이 거치대에 씌워져 있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면 관객이 2부의 서래는 자주 변신하는 존재구나, 충분히 짐작하리라 생각했어요. 어시장에서 해준 부부를 만날 때 서래는 가발은 아니어도 웨이브를 많이 넣고 브리지까지 한 머리를 하고 있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중국에서 엄마를 돌볼 당시의 헤어스타일을 호미산 갈 때 재현했다는 사실입니다. - 호미산에서 서래가 머리에 쓰는 랜턴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정념이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인데 우스꽝스러운 소품을 선택했어요. 프레임 내부에서 조명 구실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서래가 이 조명으로 인해 얼굴 없는 존재로 화합니다. = 일단 다른 광원이 없고 눈이 내려 달도 없는 산인데 그 장면을 컴컴하게 찍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헤드랜턴을 쓴 현실적 이유였어요. 빛의 방향도 바꾸기 용이하죠. 랜턴을 쓰면 상대방 얼굴에는 강렬한 빛이 떨어지고 빛을 쏘는 쪽은 역광 때문에 얼굴이 흐릿해져요.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서래의 얼굴이 랜턴의 빛으로 인해 완전히 사라진 풀숏입니다. 리허설하다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좋았는데 막상 슛 들어가니 잘되지 않아 배우가 어색하지 않은 한도에서 길게 찍었어요. 서래가 무슨 외눈박이 거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외경스럽고 공포스러운 이상한 이미지입니다. - 극중 드라마가 두편 있고 모두 새로 찍었습니다. 하나는 무녀가 나오는 시대극이고 다른 한편은 <적색경보>라는 한류 드라마입니다. 후자는 그럴 법한 설정인데 전자는 어떤 스토리가 있나요? = 전자는 <태백산맥>의 소화라는 어린 무당의 러브 스토리를 떠올리면서 만들었어요. 극중 드라마의 제목도 그래서 <흰 꽃>입니다. - 영화를 보면서 끝까지 맞추지 못했던 조각들이 있습니다. 먼저, 마지막 서래의 해변 신에 나오는 장대는 어떤 용도인가요? = 어디까지 언제 물이 잠기는지 예전에 답사 와서 구덩이를 파야 할 장소를 표시해둔 겁니다. - 호신의 죽음을 회상하는 플래시백에서 서래가 현장을 치우는 도중 호신이 눈을 뜨는 숏이 있어요. 서래가 절명시킨 건가요? = 이미 죽은 상태의 경련 같은 겁니다. 듣고 보니 그런 오해를 낳을 수 있겠군요. - 이포 바닷가의 목격자 중 한명이 심하게 기침을 하는데 요양 온 환자라는 설정인가요? = 그냥 감기 걸렸거나 그때 사레가 들렸거나… 뭔가 관객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었어요. 마침내 미결되다 - ‘마침내’라는 부사가 영화에서 여러 차례 되새겨집니다. 영문 자막은 어떤 단어로 번역됐나요? = 달시 파켓과 함께 고민한 결과 ‘at last’로 했어요. ‘오로지’도 두번 쓰고 ‘도무지’ 같은 단어도 생각해봤지만 운명적인 느낌을 주고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마침내’를 썼어요. - 영화에서 ‘마침내’는 ‘그러다가 결국’이라는 뜻으로 처음 쓰이고 서래가 잠결에 우는 장면에서 ‘이제야’처럼 쓰이다가 결말에 이르러 ‘기어이’의 뜻을 품게 됩니다. 마지막 시퀀스는 ‘마침내’가 쌓여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그림 속으로 표표히 건너가버리는 동양 설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바위와 나무가 어우러진 해안 풍경도 어찌 보면 수석이나 산수화를 실물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라 <산해경>의 삽도를 실물화하면 이럴까 싶기도 하고요. = 서래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산해경>의 글만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림까지 베껴 그렸는데 제일 잘 그려진, 펼친 페이지 하나만 영화에 보여준 것이 아쉬워요. 마지막 장소는 해가 져야 하니 서해안에서 찍어야 했지만 1부에 나오는 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바위 또한 있어야 해서 동해안에서도 헌팅을 많이 했어요. 산 모양 바위가 있는 해안은, 사람들이 세트 아니냐고 해서 억울한데 동해 삼척의 부남해변입니다. 생김새 덕분인지 무당이 세운 신당도 있고 계단도 있었어요. 해준이 파도를 맞으며 멀어지는 해지는 바다는 서해의 학암포입니다. 서래와 해준이 주차하는 부감 롱숏은 마검포고, 해준이 서래를 찾아 헤맬 때 부는 누런 바람도 실제로 불었던 모래바람입니다. - 마지막 해변 시퀀스 처음에 나오는 해안도로 직부감 롱숏은 극히 회화적이라 그 순간부터 영화가 추상적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해안도로 부감숏이 두번 나오는데 해준이 해안에 도착할 때 나오는 두 번째 부감숏의 오른편을 보면 파도의 포말이 모래사장에 남기는 궤적이 서래의 옆모습 윤곽이에요. 만든 우리끼리만 아는 표시죠. - <헤어질 결심>의 결말을 그저 사실적으로, 서래의 끝은 자살로, 해준의 끝은 서래를 찾아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서래의 퇴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내가 정해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서래가 숨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이유도 같습니다. 하지만 해준의 경우는 서래를 찾아 먼바다로 나아가 죽는다고 보는 관객이 없기 바라요. 서래는 어디까지나 자기가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라고 작별인사를 하잖아요. 서래가 살았건 죽었건 해준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건 분명하고, 시체조차 못 찾은 해준은 서래가 살아 있다고 믿고 죽는 날까지 찾아 헤매거나 제 발로 나타나기를 기다리겠지요.

‘오징어 게임’ 비영어권 최초로 에미상 작품상·남우주연상 후보 올라

[한겨레] 박해수·오영수·정호연도 조연상 후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한국 드라마 최초로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에미상의 드라마 부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성기훈’으로 출연한 이정재도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에미상을 주관하는 미 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ATAS)는 13일 오전 0시30분(한국 시각) <엔비시>(NBC) 생중계를 통해 제74회 에미상 후보를 발표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로 후보로 지명됐다. <오징어 게임>은 <석세션> <기묘한 이야기> <베터 콜 사울> <유포리아> <오자크> <세브란스> <옐로우재킷> 등 나머지 7개 작품과 경쟁한다.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이정재는 <오자크>의 제이슨 베이트먼, <석세션>의 브라이언 콕스 등과 겨룬다. <오징어 게임>에서 ‘조상우’역을 맡은 박해수와 ‘오일남’을 맡은 오영수는 드라마 부문 남우조연상 후보로 서로 경쟁하게 됐고, ‘강새벽’을 연기한 정호연은 드라마 부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은 오는 9월12일 열린다. 한겨레 황준범 기자

'외계+인' 유니버스는 이렇게 창조됐다

이안의 레드 / 무륵의 블루 조상경 의상감독은 이안(김태리) 의상의 모티브를 해인사의 요선철릭 유물에서 가져왔다. “메인 컬러를 레드로 잡고 이안이 남사당패에서 자란 전사라는 점을 고려해 깃 부분에 조각보 방식으로 수를 놓았다. 저고리는 아랫부분이 치마처럼 주름이 퍼지는 액주름포를 활용했는데, 액주름포는 옆선에만 주름이 들어가서 서 있을 때와 움직일 때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무륵(류준열)의 의상은 훨씬 얇고 가벼운 인상이다. “모시, 옥사, 명주 등의 천연색 천을 사용했고 홑겹으로 만들어진 옷을 여러 벌 입어 걸을 때 자락이 더 퍼지게끔 디자인했다. 오방색을 그대로 쓰기보다 간색(두개의 오방색을 섞어 만든 색.-편집자)을 배색해 비색, 청록색, 취람색 등을 만들어 사용했다.”(조상경 의상감독) 정체를 숨긴 가드의 코트, 자장 법사의 가면 가드(김우빈)는 그레이 톤의 잘 재단된 코트를 입고 등장한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미니멀하게 가는 것이 컨셉이었다. 오랜 시간 지구에 잘 머무르고 있다는 점, 또 이안을 돌보는 보호자로서의 면모를 고려해 그레이 톤의 코듀로이, 니트 등 온기 있는 소재를 골랐다. 썬더가 가드로 변신했을 땐 더 발랄한 분위기의 점프 슈트, 선글라스, 70년대 스타일의 빈티지 양복, 핑크색 의상 등을 가져왔다.”(조상경 의상감독) 빌런인 자장 법사(김의성)는 가사(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승려의 법의.-편집자)를 이용해 겹겹이 감춰져 있는 신비로움을 표현하고 자수로 질감을 드러내려 했다. “색감은 붉은색을 중심으로 두고 노랑과 파랑을 섞어 토색과 자황색을 활용했다. 모든 원단을 수작업으로 염색했는데 작업 시간이 오래 걸려 촬영 전날까지 손을 봤다.”(조상경 의상감독) 자장 법사가 쓴 가면은 광대가 부각된 채 입은 웃고 있는 전통적인 탈 형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외계인의 얼굴을 염두에 두고 도안을 완성했다. 색채감은 최종 결과물에서 조금 바뀌었는데 초창기에는 무지갯빛이 도는 느낌이었다가 이후 좀더 어두운 흑색으로 색을 눌러주었다.”(류성희 미술감독) <외계+인>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소품들 고려와 현대를 잇는 신검 “외계인들이 고려의 문명에도 스며들었다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해 두 이질적인 존재들의 연결성을 신검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가운데 보석을 기점으로 신검의 위쪽엔 외계 물질 같은 푸른빛의 액체 금속을 위치시키고, 아래쪽은 다뉴세문경(청동기 시대에 제작된 거울. 보물 2034호.-편집자)의 패턴에서 모티브를 얻어 디자인했다.”(류성희 미술감독) <외계+인>의 정체성을 압축한 무륵의 부채 “부채는 무륵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아이템이자 <전우치>와 이어지는 최동훈 감독님의 인장과 다름없어 특별히 신경 썼다. 살을 펼치는 순간 숨겨져 있던 또 다른 3차원 공간이 펼쳐진다. 부채에 그려진 고양이는 민속화의 그림체를 살리고 칼, 방망이와 같은 무기는 부채의 어느 방향에 얹힐 것인지 감독님과 조율해나갔다.”(류성희 미술감독) 유물에서 영감받은 삼각산 신선들의 무기 “흑설과 청운의 도술 무기 중 거울은 다뉴세문경에서 영감을 얻었다. 유물의 패턴이 외계의 것처럼 기이하단 점에서 착안해 거울 뒷면에 패턴을 꼼꼼히 그려넣었다.”(류성희 미술감독) 외계 문명을 창조하다 “<외계+인>의 내용이나 배우의 감정선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시각적 효과가 명확하고 과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요청이 있었다.” (제갈승 VFX 슈퍼바이저) 회화 작품, 조각, 조형물 등 최동훈 감독이 전한 레퍼런스를 토대로 제갈승 VFX 슈퍼바이저는 우주선과 외계인 디자인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외계인은 자세히 보면 피부색이 각기 다르게 설정됐다. 또한 월등히 진화된 종족으로 “눈을 제2의 뇌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시각 기관은 상대적으로 커진”(류성희 미술감독) 반면, 텔레파시로 소통하기 때문에 “코와 입과 같은 신체 기관들은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제갈승 VFX 슈퍼바이저)는 특징이 있다. 우주선의 경우 ‘이게 정말 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엔진과 같은 기계 요소들을 배제시키며 심플하게 작업했다. 로봇으로 변한 가드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캐릭터의 성격을 고려해 얼굴의 디테일을 최소화했고, 반대로 썬더는 어린 이안과의 감정 교류가 많기 때문에 눈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제갈승 VFX 슈퍼바이저의 설명이다. 안상수 타이포 디자이너의 작업으로 완성된 <외계+인> 고유의 외계 문자는 가드가 탈옥했던 외계 죄수를 관리하는 공간의 벽면, 영화 포스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비로운 공간 밀본, 압도적인 크기의 도심 세트 자장 법사가 상주하는 밀본은 비밀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아낸다. “메인 빌런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에 소담스러운 절처럼 느껴지지 않길 바랐다. 밀본 자체가 외계인 나름대로 인간의 종교를 해석해 만들어낸 위장의 공간이라는 점도 의식했다. 그런 맥락에서 가장 공들인 것이 100개의 팔을 가진 불상이다. 한국 불교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외계인의 주요 정체성이 촉수라는 사실에 기반해 디자인했다.” (류성희 미술감독) <외계+인>의 공간 중 가장 크고, 비용이 가장 많이 투입된 것은 도심 세트다. “전체 길이 200m, 가로폭 100m에 이르는 왕복 4차로에 서울 시내 어딘가의 건물들을 옮겨왔다. 엄청난 크기와 빠른 속도의 외계인들이 휩쓸고 지나가려면 꽤 방대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디자인부터 시공까지 약 7개월이 걸렸고, 건물 2~3층 높이까지는 실제로 짓고 그 이상은 CG로 합성했다. 그 밖에도 가로수와 조경, 전신주, 신호등까지 설치한 다음 서너번의 변환을 통해 여러 개의 도로와 블록이 늘어선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이하준 미술감독) 고려와 현대의 차이를 극대화한 촬영 김태경 촬영감독이 주목한 것은 고려와 현대의 차이점이었다. “고려 시대에서는 캐릭터들이 무협 기반의 액션을 펼치기 때문에 쇼 브러더스 영화와 같은 작품들의 촬영 스타일을 참고했다. 반면 현대에선 인물들이 외계인, 로봇과 초현실적인 액션 대결을 펼치기 때문에 카메라 워킹이 훨씬 계산적이고, 빠르고, 템포감이 있어야 했다. 톤 면에서도 고려 시대는 따뜻한 붉은 톤, 현대 분량은 창백한 톤을 많이 써서 차이를 두려 했다.” <외계+인>은 김태경 촬영감독에게 “기술적으로 가장 고난도의 SF영화”였다. “실사 배경에 3D 캐릭터를 얹는 작업이 많지 않았나. 프리비주얼도 만들고 스탭들이 외계인의 키를 가늠할 수 있는 막대를 머리에 끼고 현장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외계인의 움직임과 우주선의 크기 같은 것들은 주로 상상에 의존해야 했다.” 인간의 것을 넘어서는 외계인과 촉수의 빠른 속도를 담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는 무륵을 쫓기 위해 와이어캠까지 동원됐다. 절권도처럼 간결하게, 춤처럼 유연하게 절제된 이안의 액션은 절권도와 택견을 참고한 결과다. “김태리 배우의 에너지가 워낙 강해서 이안의 동작을 화려하게 갈 필요가 없었다. 간결하게 선은 살리되 파워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컨셉을 정리했다. 총기 액션은 이안이 총을 전술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는 상황을 고려한 결과물이다.”(류성철 무술감독) 도사인 무륵은 이안에 비해 훨씬 움직임이 날렵하고 잔동작도 많다. 유상섭, 류성철 두 무술감독은 “무륵은 무거울수록 재미없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1990년대 홍콩 무협영화의 와이어 액션과 태극권과 같은 무술에서 손동작을 많이 참고했다”고 입을 모은다. 가드의 액션은 브레이크 댄스, 팝핀과 같은 비보이 댄스가 레퍼런스가 됐다. “가드가 손에서 레이저를 뿜는 움직임, 썬더가 가드로 분했을 때의 발랄하고 가벼운 느낌들을 댄서의 춤에서 많이 가져왔다.”(류성철 무술감독)

[파리] 프랑수아 오종, <페터 폰 칸트>로 파스빈더를 스크린에 부활시키다

분노, 금기, 저항, 동성애…. 일년에 4~5편, 많게는 9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무서운 속도로 창작했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37살에 요절하기까지 파스빈더의 놀라운 창작력과 재능은 그를 뉴 저먼 시네마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남게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신성모독, 동성애, 근친상간 등 금기와 욕망의 문지방을 아슬아슬 오가며 매년 한편꼴로 장편영화를 발표하는 프랑스 감독 프랑수아 오종. 그는 “학생 때부터 파스빈더는 나에게 영화의 큰형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할 만큼 파스빈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시트콤>(1998)과 <크리미널 러버>(1999)로 데뷔식을 마친 신예 오종이 당시 평단과 관객의 탄탄한 신뢰를 얻게 된 계기는 바로 파스빈더의 희곡을 각색한 <워터 드랍스 온 버닝 락>(2000) 덕분이었다. 약간은 넓적한 얼굴, 기름진 듯 이마에 딱 들러붙은 머리, 멋대로 자란 수염 사이로 삐죽 삐져나온 반쯤 타버린 담배, 그리고 슬픈 듯 광기어린 눈빛을 채 가리지 못하고 투영시키는 네모난 선글라스. 오종의 신작 <페터 폰 칸트>(2022)는 파스빈더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원작은 파스빈더의 희곡을 영화화한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1972)로, 성공한 부르주아 레즈비언 디자이너가 패션모델을 꿈꾸는 한 젊은 여성과 격렬하게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오종은 원작 속 성과 직업을 바꾸어 페트라를 성공한 영화감독 페터로 탈바꿈시킨다. 페터(드니 메노셰)는 파스빈더의 분신으로, 여배우 시도니(이자벨 아자니)의 소개로 만난 청년 아미르(카릴 벤 가르비아)와 사랑에 빠져 그가 배우가 되도록 물심양면 돕지만 일방적이기만 한 페터의 사랑은 그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연극적 무대, 격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는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 등 오종이 재창조한 파스빈더의 희극은 “예측 불가능한 프랑스 감독의 새로운 성공작”(일간지 <레 제코>), “파스빈더의 세계로 다시 빠져들게 하는 잔혹하고 섬뜩한 사이코 드라마”(문화 주간지 <텔레라마>), “질투에 관한 파스빈더식 멜로드라마, 감독의 삶과 작품 전반을 다루는 환상적 전기영화”(영화 평론지 <레 피쉬에 뒤 시네마>)라는 평을 받으며 7월6일 개봉 첫주 동안 4만5천명의 시네필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

‘복원의 재구성: 이창동 전작 4K 리마스터링 포럼’에 가다

7월1일부터 8월25일까지 진행되는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기획전은 한국영상자료원(이하 영상자료원)의 주요 사업인 영상 복원 사업의 결과물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자리다. 올해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기획전에선 4K 리마스터링된 이창동 감독의 장편 6편과 단편 <심장소리>를 상영하는 섹션이 마련됐다. 기획전의 일환으로 지난 7월23일,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1관에서 ‘복원의 재구성: 이창동 전작 4K 리마스터링 포럼’이 열렸다. 전석 매진된 이날 행사에는 수많은 관객이 참여해 <심장소리>를 관람하고 포럼을 경청했다. 영화 상영 전 모습을 드러낸 이창동 감독은 감사 인사와 함께 <심장소리>의 제작 과정을 전하고, “원본 복원 작업은 영화산업 전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며 모두 발언을 마쳤다. <심장소리>가 상영된 뒤 김홍준 영상자료원 원장이 모더레이터를 맡고 박홍열 촬영감독, 조해원 영상자료원 영상복원팀장, 신정민 영상복원 전문가가 패널로 참여한 포럼이 시작됐다. 포럼은 2시간가량 진행됐으며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를 디지털화하는 복원 과정의 현황 그리고 디지털 촬영 시대에 발생하는 원본 아카이빙 문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됐다. ■ 4K 디지털 리마스터링과 필름 복원의 중요성 조해원 필름 디지털 리마스터링은 화면과 음질 개선을 포함해 아날로그 형식으로 마스터된 것을 디지털 포맷으로 전환하는, 새로 마스터링을 하는 단계다. 35mm 필름의 해상도를 정확히 수치화할 순 없지만 대략 4K 해상도와 근접한 해상도를 내기 때문에 4K로 리마스터링하는 게 가장 좋다. 영상자료원의 필름 디지털화 과정은 필름 스캔, 필름 디지털화, 필름 복원의 세 단계를 거친다. 먼저 필름 스캔은 아날로그 자료를 디지털로 변환하는 단계로 여기서 가장 많은 작업을 거친다. 필름 디지털화는 스캔 파일을 활용해 색 보정, 음향 복원을 진행한 후 다른 디지털 파일로 마스터링하는 작업이다. 영상자료원에서는 필름 디지털화를 리마스터링 개념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필름 복원은 필름 디지털화 작업에서 추가 공정을 더해 원본과 동일한 상태로 복원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김홍준 1990년대 한국영화 현장에서는 1.85:1 화면을 찍을 때 렌즈에 마스킹하고 와이드스크린을 만들어냈다. 이때 렌즈에 잡티가 있을 수도 있고 카메라가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필름에 기록돼 있으니 원본일 것이다. 초창기에는 디지털에 대한 맹신 때문에 티 하나 없는 화면을 잘된 복원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복원은 상대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이다. 적절한 선에서 원본의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조해원 필름 복원에는 아카이브 철학적인 부분이 포함돼 있다. 원본을 무작정 깨끗하게만 만든다고 해서 복원이 잘됐다고 볼 순 없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 상황에 맞춰서 만들어내는 게 필름 아카이브 차원에서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가령 화면 가장자리의 머리카락같이 지금의 시선으로 봤을 때 지울 수도 있는 것들을 복원 공정에서는 남긴다. 즉 필름 디지털화, 리마스터링은 화면과 음질을 개선해서 더 좋은 해상도로 만드는 작업이라면 필름 복원은 원본에 대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보면 된다. 국내에서 필름 보수를 시작으로 필름 복원의 단계까지 할 수 있는 국가기관은 영상자료원이 유일하다. 이는 필름을 보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신정민 리마스터링 분야 세계 1위인 볼로냐 복원 서머스쿨에 26일간 다녀온 적이 있다. 해외의 경우 복원을 할 때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복원은 촬영 당시 스탭들의 열정, 당시의 상영 플랫폼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어야 한다. ■ 시대별 작업 공정과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 문제 조해원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필름으로 촬영해 필름으로 상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 35mm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촬영 원본)을 현상한 후 스틴벡을 통해 16mm 필름으로 편집했다. 최종적으로 색 보정 전 단계에서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 커팅을 하고, 그 과정에서 순서를 정리하고 해당 필름으로 상영용 필름을 복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보존될 수 있었다. DI(Digital Intermediate, 색 보정 포함한 교정 작업) 도입 전 단계에도 키-코드 텔레시네가 있어 편집 시 당연히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존할 수 있었다. 필름으로 찍어 디지털로 상영하는 시점부터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의 문제가 생겼다. 2001년 <화산고>를 시작으로 DI가 도입됐는데,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디지털로 스캔해 그 위에 작업과 편집을 거친 후 최종 DI 공정에서 DCP(Digital Cinema Package, 극장 상영용 파일)를 만들어 디지털 상영관에 배급했다. DI 시 DSM(Digital Source Master, 색 보정이나 CG 등이 포함된 디지털 원본 마스터)은 필름에 또 새롭게 리코딩했다. 이때 리코딩은 상영 표준에 맞춘 2K DSM 소스로 진행됐기 때문에 촬영 원본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심지어 DSM 공정은 필름에 디지털 자료를 넣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때 해상도는 더 작아질 수밖에 없다. 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2005년부터 2011년까지의 영화 시네온 파일(필름 리코딩용 파일)은 224편이다. 이들은 리코딩 필름과 2K DSM인데, 다시 말해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없다는 뜻이다. 향후 2K 리마스터링을 진행할 수는 있어도 4K 해상도에 준하는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이 없기 때문에 시네온 파일을 스캔 후 4K 업스케일링을 통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이창동 감독의 <밀양>과 <시>는 2K DSM을 4K로 업스케일링하는 과정을 겪었다. 디지털 촬영 후 디지털 상영 단계로 넘어오면서 4K, 6K, 8K 고해상도로 촬영이 가능해졌다. DSM을 만들고 DCDM(Digital Cinema Distribution Master, 자막 등 부가 데이터 포함)과 DCP를 상영관으로 보내는데 3254개의 전국 스크린 중 4K 영사를 할 수 있는 상영관은 228개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해상도 촬영과 별개로 실제 극장에서 보는 것은 2K DCP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상영관이 2K 영사기이기 때문에 4K를 구현할 환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박홍열 한국영화가 전성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필름 사용량이 정말 많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디지털 기술과 디지털 영사기가 등장했다. 이때의 필름 현상소들은 필름 프린팅이 주 수입원이다 보니 고객 유치를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저가의 DI 산업을 편집에 도입했다. 그렇게 30만자 이상의 원본 필름들을 직접 편집하면서 이를 보존하지 않고 죄다 디지털화해버렸고, 그 과정에서 원본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필름은 디지털보다 훨씬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 4K가 10비트니까 2의 10제곱인 1024만큼의 색 심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필름은 더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는 셈이다. 하지만 디지털에 대한 맹신으로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날린 것이다.필름을 DCP로 만드는 과정은 복사의 과정이다. 한국영화가 부흥하고 극장이 많아지면서 필름 프린팅 양도 많아졌는데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계속 복사하면 원본이 망가지다 보니 당시엔 훼손을 막으려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디지털 리코딩하고, 그것을 계속 복사 또 복사하며 프린트를 떴다. 지금 영상자료원이 <반칙왕>의 릴리스 프린트로 리마스터링 작업을 진행 중이다. 실상 릴리스 프린트는 오리지널 네거티브가 아니라 연거푸 복사된, 원본의 정보량이 손실된 필름이다. 김홍준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지털이 도입되기 전 35mm 필름은 굉장히 비싸고 제작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35mm 필름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동일한 필름으로 복사했던 할리우드와 달리 당시 한국은 35mm 필름을 16mm 필름으로 축소하여 복사, 편집했다. 촬영한 필름이 5만자 정도라면 1만 5천자에서 2만자 정도가 오케이 컷이었고, 나머지 엔지 필름은 보존하지 않고 그냥 버렸다. 당시 한국영화의 취약한 산업 구조, 오랫동안 쌓아온 관행 등의 이유로 오케이 컷만 오리지널 네거티브로 남겨두고 나머지는 원본이 아니라 생각했다. 할리우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엔지 필름도 아직 보관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많은 필름을 보존할 공간이 없기도 했다. 충무로 영화인들이 돈이 많아서 100평짜리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아니고. (좌중 웃음) ■ 오리지널 네거티브 수집의 중요성과 제도 개선의 필요성 조해원 영상자료원은 90년대 중반부터 DCP 의무 납본제를 시행 중이다. DCP가 2K이기 때문에 향후 4K 이상의 리마스터링을 위해서는 촬영 원본 수집이 더욱 중요하다. 다행히 <버닝>은 4K로 촬영했기 때문에 4K DCP를 만들어 보존하고 있다. 몇년 전부터 수집팀을 통해 오리지널 네거티브 손실의 문제를 확인했고, 이 문제가 지속되면 필름 시대에 DI 공정이 들어오며 고해상도의 원본을 잃어버렸던 과정의 반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올해부터 의무 납본을 DCP로 받되 색 정보가 들어가지 않는 오리지널 네거티브도 매입해 수집하고 있다. 박홍열 <기생충> 등의 최근 영화들은 전부 6K로 찍고 있음에도 최종 DCP는 무조건 2K다. 2K DCP를 자료원과 제작사들이 보관하는 게 안타까웠다. 영상자료원이 복원 사업에 중점을 두며 DI 없는 원본을 수집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디지털로 촬영하는 영화 용량은 100~150테라다. 필름 촬영 때처럼 공간을 차지할 여력을 생각할 필요가 없음에도 관습이 남아 있다 보니 원본 데이터는 지금도 어떤 제작사도 관리하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공개된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의 원본 데이터를 넷플릭스에서 전부 보유하고 있어 놀랐다. 오리지널 네거티브를 보존하는 것은 산업적인 측면은 물론 역사적, 인류학적 맥락 안에서도 중요하다. 그리고 오리지널 네거티브의 보존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전환된다면 제작사들도, 지금 독립영화를 찍고 있는 사람들도 원본을 보관하고 싶을 것이다. 이건 영상자료원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그런 목소리를 높여준다면 정부가 예산을 배정할 것이고 아카이빙의 중요성도 재고하지 않을까. 김홍준 파주에 복원센터가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이 예산을 쌓고 인원을 확충한다면 제3의 복원센터, 제4의 복원센터도 만들고 전국에 4K 시네마테크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꾼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나라에서 극장 상영을 목적으로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영화로 등급 신청을 하는 것만이 DCP 의무 납본 대상이다. 즉 OTT 제작, 배급물인 <승리호>나 <오징어 게임> 등은 우리가 수집할 의무도, 그들이 제출할 의무도 없어 공중에 떠 있다. OTT의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고사하고 DCP조차 수집이 안되는 상황이라 이 점도 여론의 상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LIST] 이목원 미술감독의 리스트

'LIST’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취향과 영감의 원천 5가지를 물어 소개하는 지면입니다. 이름하여 그들이 요즘 빠져 있는 것들의 목록. 아이폰 나의 앨범 “그런 곳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고 누군가 말할 때 “여기 있어” 하고 보여주기 위해 매일 찍기 시작한 일상 공간들의 사진. 세상 모든 이들의 때론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인 컬러 시도와 완벽하게 캐릭터를 녹여내는 세팅은 나의 미술 작업에 가장 큰 영감이자 레퍼런스. 세상의 모든 유튜브 콘텐츠들 제임스 웹 딥 필드, 키스 뉴스테드의 ‘오토마타’ 시리즈, 오래된 영상 자료의 리마스터링 채널까지. 얕더라도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나에게 최적의 공부 장소. 토마스와 친구들 아이를 통해 알게 된 <토마스와 친구들>.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곡 제목을 알게 되었다. 기차 친구들을 구분하는 방법이 색상이 아니라 얼굴의 미세한 차이라는 것도 아이에게서 배웠다. 1984년부터 2022년까지 세상에 태어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보편적인 디자인이라니…. 게다가 이 기차의 디자이너 중에는 퀸의 전신인 밴드 스마일(Smile)의 팀 스태플이 있다. 기타 수집 브라질리언 보드의 59년 히스토릭 레스폴, 더블바운딩된 62년 텔레케스터, 1931년 OM-28 어센틱. 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조형적이고 아름다운가. 마빈 게이 술을 꽤 마시고 마빈 게이의 음악을 들으면 감정은 증폭되고 세상은 각성된다.

[곽재식의 오늘은 SF] 정치적인 V

1980년대 초에 나온 미국 텔레비전 시리즈 는 외계인의 대규모 지구 방문을 다룬 이야기다. 나는 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초반의 외계인 등장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도입부터가 아주 멋졌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전세계 각 지역에 외계인의 우주선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가운데, 우주선은 그냥 가만히 멈춘 채로 기다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TV 앞에 모여들어 세계 각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지켜본다. 말하자면 뜸을 들인 것이다. 이 뜸들이는 대목의 연출은 대단히 근사했다. 일단 외계인 우주선의 모습부터가 훌륭하다. 우주선이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비행접시 형태의 모양이기에 구구한 설명 없이도 쉽게 외계인 우주선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그냥 옛날 장난감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하나만 예를 들면 일단 에 등장하는 비행접시는 굉장히 크다. 단순히 외계인 탐사대 몇 사람이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라는 느낌이 아니다. 비행접시 하나가 도시 상공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다. 그 덕택에 거대한 물체를 공중에 띄울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는 무시무시한 적이라는 느낌을 과시할 수 있다. 동시에 갑자기 대낮의 도시에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이, 엄청난 천재지변 느낌의 재난인 듯한 심상을 살릴 수도 있었다. 이런 연출의 전통은 1950년대 SF 황금기의 명작으로 꼽는 소설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외계인 우주선의 느낌을 화면으로 생생하게 표현한 것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얀 빛깔의 거대한 덩어리가 별다른 치장 없이 대낮 도심 상공에 떠 있는 모습이 불가해함을 나타내는, 그러한 미술적 충격을 주는 현대미술과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거창하고 진지한 외계인 우주선이 등장하는 장면의 연출을 이야기할 때 <미지와의 조우>는 2등으로 뽑으면 서러운 영화일 것이다. 나는 밤에 나타나 온갖 소리와 요란한 색색깔의 불빛으로 현란한 쇼를 벌이는 <미지와의 조우> 이상으로, 대낮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조용히 나타나 그냥 멀거니 가만히 있는 가 멋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비행접시에서 막상 외계인이 내려와 모습을 드러내면, 곧 굉장히 맥빠지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나와버린다. 엄청나게 분위기를 잡고 진지한 척하면서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그냥 미국 중년 아저씨처럼 생겼으며 나아가 지구인들에게 뜻을 전하기 위해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해 말하기 때문이다. 태양계 너머 머나먼 우주 끝에서 수십억년 동안 지구와 아무 상관없이 탄생한 외계 생물이 하필 사람처럼 두발로 걷고 두손을 앞뒤로 움직이며 걷는 것부터가 대단히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데, 그 생물이 입을 움직여 소리내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기이한 일이다. 하다못해 지구의 벌도 춤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개미도 냄새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외계인이 말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게다가 그 입으로 영어를 그렇게까지 유창하게 말하다니?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그냥 이어 붙였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까닭은,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야 할리우드에서 배우에게 외계인 역할을 쉽게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8개 달린 해파리 모양의 외계인이 춤으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면, 아무리 뛰어난 배우에게도 연기를 시키기 힘드니까. 그렇거나 말거나 의 그다음 내용을 보면 이런 점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렬한 시작 장면에 이어 붙이는 이야기에서 외계인이라는 소재로 보여줄 수 있는 다채로운 과학적 상상력 이상의 이야기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에는 적과 싸우는 이야기 속에서 작가와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은 정치, 사상에 관한 주제가 있었다. 의 외계인들은 독재 정부를 상징한다.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당시의 공산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으로도 비칠 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냉전, 즉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과 경쟁이 극심했던 1950년대 전후의 SF물에서는 외계인 침공 이야기를 다루는 유행이 이미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 시절의 외계인 침공 이야기들은 핵무기가 대량 배치된 시대에 강력한 기술을 가진 상대와 전쟁을 벌이다가 인류가 모두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영된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다 데탕트 시대와 베트남전 종전을 지나며 냉전은 잠시 소강기를 맞는다. 이후 1980년대 들어 다시 미소간 대립이 심해지면서, 소위 신냉전 시대가 찾아왔는데 이때가 마침 가 제작된 시기다. 에서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에게 발달된 기술을 전해주어 지구인 모두가 잘 살게 해줄 거라고 선전한다. 그러면서 하나둘 지구인을 포섭해나간다. 그렇지만 사실 외계인들에게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데, 결국 자신들이 지구인을 지배하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지금 어떤 사상가들은 부자들의 돈을 몰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 솔깃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넘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세상이 그런 식으로 변하고 나면, 그 후로는 사회의 모든 일들을 처음 그 사상을 퍼뜨린 사상가들과 그 동료 몇몇이 장악하는 세상이 될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말고 저항하자는 게 의 이야기다. 마침 공산주의와의 긴장이 높아지던 시대에 어울리도록, 이 TV시리즈에는 악당 외계인들은 항상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져 있었다. SF는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가다 보면 잘못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미래 이야기를 자주 늘어놓곤 한다. 이런 이야기는 “내 주장에 한표를 주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정치인의 주장과 구조가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노골적인 정치, 사상을 내세우는 SF도 자주 나오는 편이다. 가끔 신문 사설에 “얼마 후의 한국 모습”이라며 미래의 한국이 망한 모습을 쓰는 기자들이 있는 것만 봐도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SF를 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런 중에서도 가끔 멋진 것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세상 알 수 없는 것이 에서 가장 인기 있고 화제를 모았던 등장인물은 하필 악역인 외계인 과학 담당 책임자, 다이애나였다.

[김겨울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머리 쓰는 여자들

발단은 출장이었다. 집에서 역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하고 역에서 다시 세 시간 동안 고속열차를 타야 하는, 왕복으로 여덟 시간이 드는 강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긴 이동 시간 동안 하염없이 한 가지 일만 할 수는 없고, 책을 한참 읽다가, 굳어가는 목을 느끼며 몸을 요상한 모양으로 비틀어 기지개를 폈다가, 태블릿 컴퓨터와 키보드를 꺼내 도각도각 일을 보다가, 시끄럽게 떠드는 옆자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말도 했다가, 집에서 챙겨온 커피도 쭉쭉 마셨다가, 최후에는 유튜브를 봤다. 유튜브 알고리즘님, 오늘 저에게 무엇을 점지해줄 것인가요. 이번에 선택된 건 머리를 쓰는 온갖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클립들이었는데, 이건 아마도 <놀라운 토요일>을 즐겨 보는 나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 같다. 엄청난 추리로 가사를 잡아내는 출연진의 활약을 보는 것으로 시작해 방탈출 같은 퍼즐을 푸는 영상들을 거쳐 남자 연예인들이 각종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쇼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것은 마지막 쇼에는 여자 연예인들이 간헐적으로만 출연하며, 기본적으로 머리 좋은 남자들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라, 저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여자들이 하는 것도 있으면 재미있겠다. 시청자의 호기심으로 떠오른 생각을 막 쓰다보니 유튜버의 본능에도 반짝반짝 불이 들어왔다. 재미있는 거 만들고 싶다! 소셜 미디어에 생각나는 대로 간단하게 아이디어를 냈는데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은 반응이 돌아왔다. 대체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예능 프로그램으로 보고 싶다는 반응이었고, 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걸 그들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몸을 쓰는 여자들, 사람들을 웃기는 여자들이 있다면 머리를 써서 근사하게 문제를 푸는 여자들도 볼 때가 되었지. 그러고보니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머리 쓰는 여자들을 언제 봤던가? 전문가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에도 여성 출연자의 비율은 턱없이 낮았고, 평론가가 나와 이것저것을 평가하는 프로그램에서도, 지식을 가진 사람이 나와 패널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에서도 그래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지식을 가진 똑똑한 여성은 충분히 많다. 이 풍부한 인재풀을 이제는 활용할 때가 된 것 같다. 이 아이디어가 실현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세상에 씨앗처럼 뿌려둔 아이디어는 스멀스멀 자라나서 결국 누군가에 의해 구현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시청자로서 너무 보고 싶은걸! 여러분도 그렇다면, 두 손을 모아 멀리멀리 소리쳐보자. 우리가 이런 것을 보고 싶어 한다고. 여기에 시청자가 있다고. 그곳에 사람이 모인다는 점이 보장된다면 당연히 만들어질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속보] 이정재, 에미상 남우주연상…아시아 배우 최초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배우 이정재가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한국 배우는 물론 아시아 배우가 에미상 주연상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는 12일(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 마이크로소프트 극장에서 제74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을 열고 이정재를 드라마 시리즈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오징어 게임>에서 사채업자들에 쫓기다 456억원이 걸린 죽음의 게임에 참가한 주인공 성기훈을 연기한 이정재는 제러미 스트롱·브라이언 콕스(<석세션>), 애덤 스콧(<세브란스: 단절>), 제이슨 베이트먼(<오자크>), 밥 오든커크(<베터 콜 사울>)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앞서 이정재는 미국배우조합상, 스피릿어워즈, 크리틱스초이스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이정재는 미국 방송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에미상까지 받음으로써 명실상부 최고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이날 시상식에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드라마 시리즈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은 물론 비영어권 드라마 최초다.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오영수와 박해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정호연은 아쉽게도 트로피를 안지는 못했다. 남우조연상은 <석세션>의 매슈 맥퍼디언, 여우조연상은 <오자크>의 줄리아 가너에게 돌아갔다. <오징어 게임>은 이날 시상식보다 한 주 앞선 지난 4일(현지시각) 열린 크리에이티브 아츠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여우게스트상(이유미)을 비롯해 시각효과상·스턴트퍼포먼스상·프로덕션디자인상까지 4개의 트로피를 안은 바 있다. 여기에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추가하면서 <오징어 게임>이 차지한 트로피는 모두 6개가 됐다. 한겨레 서정민 기자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①] 장뤽 고다르 감독 사망 관련 프랑스 현지 반응

2022년 9월13일 누벨바그의 거장 장뤽 고다르가 60년이 넘은 커리어와 120편이 넘는 작품을 뒤로하고 91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각 분야의 유명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SNS에 연이어 올리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심경을 올린 이 중 한명이다. “(고다르는) 프랑스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나 거장이 되었다. (…) 우리는 천재의 시선, 국보를 잃었다”라고 썼고, 현 프랑스 문화부 장관 리마 압둘 마락은 트위터에 “‘인생에서 가장 큰 포부가 뭐죠?’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그런 다음 죽는 거죠’”라는 <네 멋대로 해라>(1960)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고다르는 대담하고, 자유롭고, 불경스러운 세상을 추구하며 영화의 모든 규칙을 불태워버렸다”라고 썼다. 전 문화부 장관이자 현 아랍 세계 연구소 소장인 자크 랑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다르, 어두운 상영관의 영원한 지배자”라고 쓰며 고인을 향한 각별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함께했던 영화인들이 보내는 작별 인사 그의 작품 중 평단과 관객에게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경멸>(1963)의 주인공 브리지트 바르도는 자신의 트위터에 고다르와 함께 카프리 촬영 당시 찍은 사진을 공유하면서, “그는 <네 멋대로 해라>로 위대한 스타 감독의 대열에 합류했다”라고 덧붙이며 경의를 표했다. 고다르가 발표한 70여 번째 작품 <누벨바그>(1990)의 주연배우 알랭 들롱은 에 “영화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아름다운 기억을 남겨준 장뤽에게 감사를 표한다. 내 필모그래피에 ‘누벨바그’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라고 심경을 남겼다. 배우 상드린 키베를랭은 자신의 트위터에 브리지트 바르도가 올린 사진을 퍼다 게시하며, “시네마는 그림과 같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준다”라는 고인의 말을 인용했고, 이자벨 위페르는 일간 신문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결국 그의 천재성, 섬세함, 시적 감수성이 모든 일을 쉽게 만들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누구도 고다르처럼 얼굴을 찍지 않는다”라며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80), <열정>(1982) 촬영 당시 그와의 작업을 상기했다. 질 자콥 전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에 “고다르, 그는 영화의 피카소다. (…) 이제 세계 영화는 고아가 되었다”라며 다소 극단적인 심경을 밝혔다. 이에 고인과 끈끈한 애증(?)의 관계를 맺어온 칸영화제는 “그가 없었더라면 영화제는 현재와 같은 얼굴이 아니었을 거다. 고다르는 1962년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에 출연한 이후, 그의 작품 21편이 칸에서 상영되었다. 그는 (칸영화제 취소를 유발시킨) 1968년 5월 항쟁의 주모자였고, 2014년 <언어와의 작별>로 심사위원상을 받은 수상자이며, 2018년 칸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사한 특별 황금종려상의 수혜자였다”고 전했다. 또 <알파빌>(1965)에 금곰상을, <네 멋대로 해라>에 은곰상을 수여했던 베를린국제영화제는 “그는 영화 역사상 영향력 있고 혁신적인 누벨바그 감독 중 한명이다. 그는 60년대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뒤로도 끊임없이 쇄신을 이어갔다”며 공식 인터뷰를 진행했고, 베니스국제영화제는 공식 트위터에 고다르를 “영화 역사상 중요한 감독 중 한명, 그리고 영화제의 중요한 주인공 중 한명”으로 명하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반면 유대계 프랑스 배우 제라르 다르몽은 공영방송 채널 <프랑스5>의 토크쇼 <세 아 부>에 출연해 “나는 고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품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그는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의미로서의 유대인, 특히 이스라엘에 사는 유대인들에 대해서”라며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미디어와 극장가의 추모 물결 각종 신문, 텔레비전 채널과 라디오 방송, 극장에서도 예정된 기사와 프로그램을 전면 취소하면서 추모의 물결을 이어갔다. 일간 신문 <피가로> <르몽드> <르파리지앵> <리베라시옹>은 각각 ‘누벨바그 거장의 죽음’, ‘고다르, 혁명의 인생’, ‘고다르, 프랑스영화의 파괴자’, ‘고다르, 영화의 역사’라는 묵직한 제목의 기사를 앞다투어 실었고, 프랑스 민영 방송사 카날플뤼스는 <경멸>, <미치광이 피에로>, <알파빌>, <여자는 여자다>(1961) 같은 고다르의 첫 번째 전성기 때 작품뿐 아니라, 프랑스 국민 가수이자 배우인 조니 알리데가 출연한 <탐정>(1985),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출연한 <오 슬프도다>(1993), 1988년에 시작해 1998년까지 장장 10년에 걸쳐 지속된 프로젝트 <영화의 역사>, 그리고 고인의 삶을 회고하는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칸 1968, 칸의 혁명>(2018), <(평론가) 알랭 베르갈라가 본 장뤽 고다르>(2019), <고다르의 에이비시디>(2022) 등을 방영했다. 예술문화 채널 <아르테>는 <네 멋대로 해라>, <경멸>, <카르멘이라는 이름>(1983), <이미지 북>(2018)을, <프랑스5>는 <네 멋대로 해라>와 누벨바그의 두 주인공 고다르와 트뤼포의 애증 관계를 다룬 클레르 두구에 감독의 다큐멘터리 <고다르-트뤼포: 이별 시나리오>를 방영했다. 또 극장에서는 고인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다큐멘터리 <씨 유 프라이데이, 로빈슨>(2022)을 다음날 바로 개봉했다. 이란 감독 미트라 파라하니 감독의 작품으로, 고다르와 올해 98살 이란 출신 작가이자 감독인 에브라힘 골레스탄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를 담아낸 다큐멘터리다. 노년의 두 감독은 29주 동안 금요일마다 영화, 예술, 삶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영상 편지로 자유롭게 나눈다. 이 작품은 10월 <아르테>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2010년 에릭 로메르 감독, 2019년 아녜스 바르다 감독, 2021년 배우 장폴 벨몽도에 이어 누벨바그의 주역이 또 한명 사라졌다.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9월13일 <리베라시옹>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주 화요일에 죽은 사람은 고다르가 아니라 우리다”라며, 그의 죽음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 다시 눈을 뜨고, 다시 새로운 영화를 열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고다르, 편히 잠들지 않아줘서 고마워”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