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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1970년대, 고다르와 혁명의 영화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콜라를 마시던 여자가 커피를 주문하는 남성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남자의 앞에 커피 잔이 놓이자, 카메라는 크레마가 떠 있는 잔의 윗부분을 하이 앵글로 비춘다. 영화의 시선이 완전히 컵의 윗부분으로 옮아간 뒤, 내레이션 목소리가 읊조린다. “한없는 심연이 객관적 사실로부터 주관적 인식을 분리시킨다.” 이후 남자가 스푼으로 잔을 휘저으면, 작은 물결이 일어난다. 목소리는 이어진다. “의사소통이 실패할 때마다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여자는 낙담한다. 그렇게 설탕은 녹고, 커피는 소비된다. 이 세계를 둘러싼 소비의 괴물들, 이 영화의 이미지는 어쩌면 물질적인 세계 그 자체를 겨냥한 듯 보인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되던 1967년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장뤽 고다르와 평론가 장 나르보니의 대담을 실었다. 기사는 고다르가 도시에서의 삶을 매춘과 다를 바 없다고 평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영화 기획 당시에 고다르는 숫자로 표시되는 앙케트 조사 방식의 기사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어느 주간지에 실린 ‘파리 외곽 주택 단지의 삶’을 다룬 기사를 통해 그는 처음 영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어떤 수준에서든, 어떤 계층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여성은 자신을 매춘하거나 매춘의 법을 연상시키는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고다르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신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은 일상의 4분의 3을 자본주의에 저당 잡혀 생활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보수를 받는다는 측면에서, 은행원이나 우체국 직원, 영화감독도 다를 바가 없었다. “현대사회에서의 매춘은 정상적인 상태이다”라고 고다르는 결론지었다. 다소 황폐한 비유처럼 들리지만, 1960년대 후반의 프랑스는 68운동이 터지기 직전의, 민감한 기류가 지배하고 있었다. 겉으로 단단해 보이는 다양한 사실들이, 곧 무너질 수도 있다고 당대의 예술가들은 직감했다. 격변과 재분배의 에너지가 프티부르주아 사이를 관통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이를 매우 구조적인 측면에서 바라봤던 것 같다. 객관적인 숏들을 나열하며 그는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고발했다. 책과 잡지, 포스터, 휘발유 펌프, 맥주 레버, 심지어 슈퍼마켓에서 구매한 생활용품들이 차례로 등장해 신도시의 형상을 그린다. 그 사이에 세차 장면이 끼어든다. 자세히 보면 앞선 커피 잔 장면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장면은 몽타주되어 있다. 세차장 전체의 광경이 잡히고, 하이 앵글로 자동차가 드러난 뒤, 숟가락을 대신해 세차 기계가 차를 어루만진다. 이후 자동차 보닛이 클로즈업된다. 하지만 명백하게 객관적인 숏들 사이로, 파편화된 짧은 숏 하나가 침입하며 모든 세계관은 흔들린다. 마치 커피 잔에 담긴 거품처럼, 철판 뚜껑의 그림자가 움직인다. 열정적 혁명의 순간처럼, 이미지의 반란이 시작된다. 이 영화의 구조적인 창작 방식은 이후 고다르 정치영화 전반에 반영된다. 비견컨대 누벨바그 시기의 ‘시의 영화’ 같은 분위기는 이후 그의 영화에서 찾을 수 없다. 그는 더 근원적인 영역으로 이동해 ‘정치’라는 키워드를 내세우기 시작한다. <중국 여인>이 대표적이다. 고다르는 더이상 일상을 조망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자본주의를 탐구하면서 그는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객관적 원칙의 적용을 논의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의 물리적인 장치를 사용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색채 사용이다. 붉고 푸르고 노란 세 가지 색깔이 상수가 되어서, 영화의 중심에 놓인다. 그리고 그 위로 밀도 높은 대사들이 추가된다. 공산주의와 미국의 정치 상황, 사회주의에 대한 단어들이 전투적으로 등장한다. 만일 누군가 이 영화가 급진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순전히 정치적 대사 탓일 것이다. 색채와 이론의 나열,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고다르는 자신이 추앙하던 유토피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주관적인 이미지들을 등장시킨다. <중국 여인>에서 주관성의 영역은 팝아트적인 콜라주 화면이 맡고 있다. 어쩌면 장난기 넘치는 내면의 발로일 수 있지만, 계속해서 고다르는 자신이 생각한 느낌을 표현한다. 이처럼 객관성과 주관성의 두 가지 원리가 부딪히면서, 영화의 세 번째 교차 지점이 나타난다. <중국 여인>에서 정반합의 장소는 기차 내부가 된다. 양립하던 모든 요소들이 이곳에서 모순을 일으킨다. 안 비아젬스키가 연기하는 여대생 캐릭터는 철학자 프랑시스 장송을 만나서 꽤 긴 토론을 펼친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탐색하던 이데올로기의 결말은 마침내 제삼자의 입을 통해 정리된다. 아무리 이상적인 의견이라도, 테러리즘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그녀는 수긍한다. 그리고 마침내 네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 이 부분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고다르의 정치영화는 결론을 포함하지 않는다. 객관적이고 주관적으로 고려된 전반적 인식의 틈 사이에서, 관객은 모순된 상황을 스스로 논의해야 한다. 일련의 실험 이후, 고다르가 자신의 명시적인 변화를 표시한 것은 1969년에 이르러서다. 장피에르 고랭과 함께 고다르는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한다. 그룹의 명칭은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영화의 창작법에서 빌린 것으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비견되는 베르토프의 자기 반영적인 사고방식이 그들의 출발점이었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영화감독들과 달리 고다르와 고랭은 ‘집단창작’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룹의 색채가 브레히트적인 것으로 변한다. 연출자의 이름은 익명이 되었고, 그룹의 명칭이 전면에 등장했다. 당시 고다르는 스스로를 작가(auteur)가 아니라 활동가(militant)라 칭했다. 전문적인 혁명가가 되어서, 더 많은 활동가들이 나타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것이 집단의 목표였다. 이 과정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그들은 기존 정치영화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특히 정치적 소재를 택해 습관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전문 연출가들을 비난했다. 심지어 몇몇 감독들에게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견학한다’며 혹평하기도 했다. 비견컨대 자신들의 영화는 이미 지나간 투쟁이나 승리한 파업의 광경을 제공하지 않는다면서, 기존의 영화 제작 방식과 선을 그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장비와 비용으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고 표시할 수 있는지를 알리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분배보다 생산에 더 집중했다. 그런 면에서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활동은 발터 베냐민의 ‘생산자로서의 저자’ 개념과 맞닿아 있었다. 전투적인 방식으로 가장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그의 생각과 작업 방식을 그들은 지지했다. 여러 차례 자신들의 행적을 이론화할 것이라 말했지만,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활동이 마무리될 때까지 자신들의 책자를 발간하지 못했다. 그룹 해체 이후에 고랭은 “우리는 일정 수의 이론적인 텍스트를 작성해야만 했다”라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집단의 슬로건은 명문화되었다. 영화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칠판’에 문장을 적었고, 가사가 붙은 ‘노래’를 합창했다. 가끔 슬로건이 수정될 때도 있었다. 당연한 과정이었다. 지가 베르토프 그룹은 (레닌의 에세이와 동일한 제목인)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집중해서,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답했고, 때로 실수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자아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대다수 관객이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영화들을 접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인다. 당시 고다르는 보여주기 위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물론 우연한 걸작도 탄생하지 않았다. ‘사악한 의사소통의 천재’라는 별명을 안고서, 그는 전투적이고도 의도적으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다. 은밀하게, 악의적이면서 아이러니하게, 진심을 다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과는 있었다. 당대 정립한 창작의 원칙이 향후 그의 영화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영화의 역사(들)>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이 조금씩 감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가 베르토프 그룹의 해체 즈음에, 고다르는 <만사형통>의 작업을 시작한다. 아직 집단창작 활동이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그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심지어 영화에는 이브 몽탕과 제인 폰다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기용되었다. <만사형통>의 시작부에서 고다르는 ‘그의 가장 상업적인 작품’라고 불리는 <경멸>의 상황을 인용한다. 주인공은 프랑스 영화감독과 미국인 저널리스트 부부로, 이들은 노조가 장악한 파업 현장에 잠입한다. 처음에 남자주인공은 상업적인 프로덕션 작업에 수긍하지 못하는 ‘좌파 영화감독’으로 설정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변화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파업을 목격하며, 생존을 위해 기꺼이 스타킹 광고를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 아내의 변화도 흥미롭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전부 말로 바꾸어 표현하는 인물이었지만, 본 것을 전부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불화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화와 연결해서 이해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고다르는 트래블링숏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영화를 본 관객 다수가 기억하는 두 가지 카메라의 움직임이 있다. 하나는 벌통처럼 분리된 공장 내부를 탐색하는 가로와 세로의 트래킹숏이고,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이어진 슈퍼마켓의 계산대 사이를 오가는 수평의 트래킹숏이다. 둘은 상반되면서도 비슷하다. 전혀 다른 사람들을 비추지만, 동일한 ‘과정의 형상’을 포착한다. 영화 제작을 포함해 모든 사회적 생산 과정이 구조적으로는 동일한 형태임을, 고다르의 카메라는 말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미장센은 정치적 비전을 포함한다. 어떠한 도발적인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설득의 언어가 이 과정에서 전해진다. 여전히 고다르에게 트래블링은 모럴의 문제임을 작품은 다시금 일깨운다. 1973년 고다르는 안느 마리 미비유와 함께 파리에서 그르노블로 터전을 옮겨 ‘소니마주’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과 유럽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협동조합 형태의 비디오 프로덕션 설립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의 전체주의적인 점령에 맞서서, 예술가들은 발빠르게 변화를 시도했다. 사회적인 혁명이기도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사명이기도 했다. 고다르는 이후 비디오 작업을 통해 설치미술에 발을 들였고, 당시에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텔레비전은 망각을 제조하는 반면 영화는 기억을 제조한다.” 그의 비디오 작업은 영화관에서 상영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충분히 전투적인 자세로, 고다르는 시스템을 벗어나는 비디오에 대한 폭로를 진행했다. 그는 경제적인 목표로 움직이는 산업 전체를 겨냥했다. 이미지가 생성하는 시간의 의미, 영화가 새겨놓은 기억의 아카이빙을 고다르는 비디오 작업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생각해보면 필름에서 시작된 고다르의 여정은 숏과 내러티브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정치영화로의 투쟁, 비디오 작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장치’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몽타주와 재생 속도, 이미지의 대립과 화해가 향후 그의 주된 관심사로 떠오른다. 고다르의 관심사는 이미 시네마를 벗어났다. 숏으로서의 의미 단위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이미 그의 작업은 숏보다 ‘이미지’라는 단위를 언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수준이 된다. 시의 순수함, 어쩌면 이 표현은 고다르가 그토록 열렬하게 추종한 이미지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더이상 낭만적이지 않았지만, 이미지의 순수함을 포괄하고 있었다. 고다르는 비디오를 통해 이미지를 촬영했고, 연결했고, 인식했고, 어느 순간에 멈추었으며, 댓글을 추가했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또 다른 것을 생각해냈다. 1983년 12월, 주간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영화가 당신과 함께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삼단논법으로 답한다. 첫째,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다. 둘째, 그것은 나에게 삶의 목적을 제공한다. 셋째, 나는 어렸을 때 영화가 영원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내가 영원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고다르는 죽는 날까지 비디오 스크롤을 멈추지 않았고, 시시포스가 그러하듯 빛의 본질을 향해 다가갔다. 시네마는 영원한 진리라고, 우리 내면에 살아 있는 고다르를 바라보며 되뇌게 된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②] 고다르와 죽음, 그리고 1990년대

장뤽 고다르의 죽음은 녹화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도덕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공상이지만, 그가 조력 자살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마지막 무대의 시각적 형식이었다. 스스로 최후를 선택하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의료진과 가족들이 지켜보는 현장에 과연 카메라는 입회하고 있었을까? 종종 그 자신을 픽션의 등장인물로 삼아왔고, 거주하는 집 내부와 아틀리에, 근처의 호수를 영화적 무대로 끌어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던 영상 작가라면, 모든 기록을 말살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살조차 분명 촬영되었을 것이며 “그것을 촬영한 아카이브 영상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영화감독이라면, 그리고 조력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개인의 죽음에 덧대진 합법과 위법의 범위를 캐묻는 인간이라면(이는 <필름 소셜리즘>에서 제시한 대로 ‘법이 올바르지 못할 때, 정의가 법에 우선한다’는 저항의 언어에 기초한다) 삶의 마지막에 하나의 이미지를 남기는 ‘연출’을 시도했을지 모른다는 불순한 생각을 품게 된다. 만약 그 현장이 촬영되었다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공개될지도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변적 공상이 환기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그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는 아프지 않았다. 단지 소진되었을 뿐이다. 그는 삶을 끝내기로 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중요했다”라는 공식적인 문자를 통해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접속할 뿐이다. 이미지의 부재와 문자의 잔존. 다른 이라면 특별히 여기지 않았을 이 부고의 조건이 고다르에게는 남다른 문제로 남겨진다. 고다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결정과 선택이 우리에겐 지극히 논쟁적인 ‘고다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저명한 주장은 이 순간에 다시 도발적으로 솟아오른다. 동시에 정반대의 공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시점의 인간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은 고다르에겐 결코 어울리지 않는 범용한 유서의 형식일 뿐이라 반박하는 것이다. 죽기 직전에 작성된 유언은 고다르에게 적합하지 않다. 세르주 다네가 말한 대로 고다르는 “얼마 전의 과거와 가까운 미래 사이에 붙들려 있는” 시간의 패러독스에 노출된 자이고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과 아직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위치한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영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용도로 기획된 (이하 <고다르의 자화상>)의 도입부에서 특유의 낮은 목소리로 “대개 죽음이 찾아오고 애도에 잠기지만, 나는 먼저 애도에 잠기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했다고 읊조리고 있었다(‘12월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로도 알려진 이 영화에서 고다르는 100년 전 뤼미에르의 영화가 상영된 12월과 자신이 태어난 12월을 겹쳐둔다). 이 말에 따르면 고다르는 찾아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을 과거에 두고, 과거에 작성된 애도를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에 던지는 눈먼 송신인이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릴케를 인용해 말한 것처럼, 고다르에게 있어 인간은 무엇보다 시간 앞에 두눈이 멀어버린 존재다. 눈먼 자화상 누군가에겐 갑작스럽게, 누군가에겐 비로소 도착한 고다르의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섣불리 애도의 문장을 들먹일 순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언젠가 고다르는 시인만이 작가의 부고를 제대로 추도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보르헤스의 지도처럼 그의 방법과 경력을 요약하다 보면 영화의 역사 전체에 개입하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고다르에게 던져진,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제기한 죽음이라는 사건과 남겨진 이미지의 조건을 간신히 가늠해볼 뿐이다. <고다르의 자화상>에서 이야기하듯 고다르는 죽음을 마주하지 전에 일찌감치 애도에 잠겼고, 우리는 현실에 도래한 죽음을 목격하지 못한 채 그의 최후를 받아들였다. 이런 비대칭의 상태는 <포에버 모차르트>에서 하녀 자밀라가 꺼내는 알쏭달쏭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한번은 차에 치여 넘어진 적이 있어요. 저는 도로에 떨어졌고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죠. 하지만 죽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죽음은 없어요. 거기엔 단지 제가 있을 뿐이죠. 곧 죽게 될 제가요.” 그 자리에 죽음 일반은 없지만, 곧 죽음에 이르게 될 한 사람이 있다. 이를 다시 고다르에 대입한다면, 찾아오지 않는 죽음을 기다리며 애도에 붙들린 삶을 유지하는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20세기 영화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현실의 잔혹한 역사를 겹쳐두는 장대한 결산인 <영화의 역사(들)>의 작업을 착수한 1988년 이래로 고다르의 영화에는 죽음과 소멸, 영화의 불가능성이라는 근본적인 위기가 함께하고 있다. 필름의 유실과 마모, 두 차례의 세계대전, 텔레비전의 등장은 영화 이미지의 위상과 물질성을 일그러뜨렸다. 고다르는 20세기의 끝자락을 통과하면서 이 시기를 영화예술이 역사와 산업의 이중적 위기에 처한 시대로 간주한다. 역사의 의무를 다하고 군중을 통합하는 매체로서의 영화는 이제 성립하지 않는다. 영화는 타락한 매체가 되었다. 1980년 알프레도 히치콕이 사망했을 때 고다르는 “그의 죽음은 영화의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의 이행을 표시한다”라고 말했다. 8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동안 고다르는 촬영이 지연되거나 제작과정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로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창작자들을 픽션에 옮기면서 그들의 반대편에 파괴된 역사의 기록을 새겨둔다. 그에겐 영화와 세계의 패러독스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를 “19세기의 열망이 실현된 20세기의 사물”이라 정의하는 고다르는 박물관과 서재에서 지켜본 19세기의 유산을 훔치는 말과 이미지의 도굴꾼이면서 20세기에 벌어진 전쟁과 학살의 현장(아우슈비츠와 베를린 장벽, 알제리 독립전쟁,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 팔레스타인)을 찾는 역사의 탐사자다. 그의 이중적인 역량은 두 세기에 걸쳐 있는 영화의 ‘뒤늦은’ 운명을 자각하게 한다. 고다르는 과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너무 늦게 보았고,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미 벌어진 뒤에 그 현장을 찾았다. 그러므로 영화(예술)와 현실을 감싸는 이중의 책무가 그의 영화에는 드리워져 있다. 그는 어둠 속의 극장을 밝히는 영화의 가시적인 빛을 응시하면서, 현실의 조건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장소를 되돌아본다. 파괴된 베를린 장벽(<신 독일영년>), 사라예보의 잔해(<포에버 모차르트>), 팔레스타인의 평화로운 풍경(<아워 뮤직>)에는 영화가 참혹한 현실을 제시간에 기록하지 못했으며 그 무거운 현실의 조각들을 다시 합당한 픽션으로 조직하지 않았다는 자각이 새겨져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한 장면은 노트에 적힌 메모를 보여준다. 고다르의 목소리가 그 메모를 읽는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영화의 역사(들)>을 포함한 90년대 고다르의 영화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오는 문장이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는 테니스를 치고 있는 고다르를 비춘다. 상대방의 리시브가 너무 빠르게 돌아오자 다급하게 팔을 뻗지만 받아치지 못한다. 어설픈 슬랩스틱을 보여준 고다르는 떨어진 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지나갔군.” 이처럼 영화의 시간은 노트에 적힌 문자처럼 사라지지 않은 과거에 붙잡혀 있지만, 되돌아온 테니스공처럼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영화는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짓눌리면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현재를 통과하고 있다. 그 중간에 공을 놓쳐 허둥거리는 고다르의 신체가 있다. 그의 슬랩스틱은 영화의 운명이다. 카메라와 피사체는 언제나 타이밍을 놓치고 어긋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화 하지만 영화는 이와 같은 패러독스를 통합하는 한 가지 역량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투사와 상영의 기능이다. 영화는 피사체를 바라보지 못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투사하고 상영할 수 있다. <고다르의 자화상>에는 맹인 여성 편집자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영화의 초반부에 드니 디드로의 <맹인에 관한 서한>에 두손을 얹으며 손과 눈의 관계를 낭독하던 것과 비슷하게 고다르는 디드로의 문답을 다시 인용한다. “당신은 그것을 어디에서 보고 있죠?” “내 머릿속에서요. 당신과 같이.” 고다르는 편집자에게 편집 중인 영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우리의 오랜 습관일 뿐이다. 그는 편집자에게 영화를 들려준다. 그녀는 필름을 손으로 만지면서 영화를 듣는다. 여기서 영화는 시각적 체험이 아닌 귀에 들리는 소리와 손에 접촉하는 질감으로 펼쳐진다. 편집자는 고다르가 들려준 영화를 두고 “만들지 못한 영화”라고 말한다. 고다르는 그 말에 “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라고 답한다. 만들어지지 않은, 누구도 목격한 적 없는 무명의 영화가 맹인 편집자의 손과 귀를 타고 스크린에 전해진다. 우리는 한번도 나타난 적 없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담은 필름이 편집기에 감겨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될 뿐이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역설이 벌어진다. 상영은 영상의 규범적 체계에서 누락된 표상을 불러들이는 행위지만, 그 절차는 시각을 차단당한 눈먼 편집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영화가 비로소 상영되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화다. 고다르는 자본과 합법적 절차가 승인하는 과정에서 말소돼버린 영화의 가능성을 재생한다. 일차적으로 이는 필름 속에 묻힌 영화를 되비추고 불가능한 조건 속에서 되살아나게 하는 실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장면에서 고다르는 추방된 영상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오히려 눈먼 자의 시각을 빌려 보이지 않는 영화의 권리를 주장한다. 맹인 편집자의 목소리를 타고 카메라는 실내 공간에서 벗어나 바깥의 풍경으로 향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눈이 뒤덮인 겨울의 고독한 풍경이 사라지고 녹색의 풀밭 위로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지나가는 봄의 풍경을 도착했음을 보여준다. 시각장애인 여성 클레르 바르톨리는 고다르의 <누벨바그>에 관한 글에서 “눈이 외부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내가 깨달은 것은 시력을 잃으면서부터이다. 귀는 오히려 우리를 내면의 세계로 데려간다”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눈이 보이지 않는 편집자의 목소리가 안내한 자연의 공간에는 가시적인 풍경과 비가시적인 내면이 뒤얽혀 있다. 영화 제작의 중대한 목표를 “움직이는 숏에서 시작해 정지된 숏으로 이행하는 것”이라 말한 바 있는 고다르의 한 가지 결론이 이 숏에 있다. 그가 포착한 범용한 풍경 숏은 내부 공간의 어둠에서 자연의 빛으로, 감금된 실내에서 광활한 바깥으로, 비디오모니터로 상영되던 영화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영화의 가능성으로 향하는 자화상의 궤적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의 표면은 둘의 기억을 매개한다. 고다르는 정지된 풍경 위에 복잡하게 매개된 몽타주의 작용을 상상한다. 자화상은 무수한 파편들로 부서지지만 고다르가 브레히트를 인용해 말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오직 파편들만이 진정성의 흔적을 전달”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80년대 이후의 고다르 영화들에서 이미지의 충돌은 융합을 향하고 있으며 영화로부터 현실을 돌려주려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흔적이 제거된 무심한 자연의 공간으로 이행한다. 90년대의 고다르에게 자연은 현실에서 훼손된 영화가 향하는 유토피아적 투사의 장소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의 자연에 진입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하나의 문화, 국가, 개인에게 한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역사와 집단과 영화가 뒤섞이며 충돌하는 복수화된 세계의 단면이기 때문이다. 고다르는 역사적 상흔을 간직한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스크린에 되돌아오는 것은 인간의 흔적을 초과하는 거대한 상상의 세계다. 그 상상의 단면에서 고다르는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을 평등하게 결합한다. <고다르의 자화상>은 빈 벽에서 시작한다. 벽에 비치는 그림자의 실루엣과 신원을 알 수 없는 소년의 초상사진을 같은 화면에 보여주는 첫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화면이 열리면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서서히 빛이 들어오지만, 그림자의 정체와 초상화의 소년이 누구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고다르는 이 구도를 두고 화가가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자기를 그리는 모습과 같다고 말한다).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화된 사진 속 소년이 유년기의 고다르이고, 마치 마부제 박사처럼 실루엣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림자 역시 노년의 고다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이 영화의 주된 피사체인 고다르는 비어 있는 벽 위에서 모호하고 분열적인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모호해지는 것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관객은 고다르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유년기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고다르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눈먼 존재로 스크린 앞에 선다. 부채의 기록 <고다르의 자화상>의 마지막 장면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세계에 사랑이 존재할 수 있도록, 사랑함으로써 나를 희생해야 한다.” 21세기 들어 또 다시 사라예보를 방문하는 <아워 뮤직>에서 고다르는 이미지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며 ‘보는 것’과 ‘상상하는 것’의 차이를 언급한다.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야 하지만, 상상하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한다고 말한다. 객석을 비추는 부드러운 트래블링의 끝에 강연을 듣는 청중 가운데 유일하게 눈을 감고 있는 팔레스타인 학생 올가의 모습이 나온다. 강의가 끝나고 그녀는 극장에서 폭탄으로 자살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무대인 ‘천국’에 진입해 눈을 감고 상상을 이어간다. 그녀는 천국으로 설정된 자연의 공간 속에서 다시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영화는 그렇게 도래할 영화를 기다린다.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를 느슨하게 빌려온 <누벨바그>에서 고다르는 작은 배를 타고 강으로 향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두 차례 반복한다. 한 번은 살인의 위협이, 다른 한 번은 구제의 손짓이 그 작은 무대에서 벌어진다. 고다르가 선택한 강물은 픽션의 장면을 연출하는 배경이면서 무르나우의 기억을 반사하는 표면이다. 고다르는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에서 뒤늦게 보았던 무르나우의 영화에 한 가지 이미지를 되갚는다. 수십 년 전에 보았던 연인들의 기록을 변주해 스크린에 드리우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화는 시차를 두고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를 건네는 장치다. 고다르에게 있어 영화는 죽음과 부활을 오가며 나타나고 사라지는 형상들의 결합으로 성립한다. <경멸>에서 프리츠 랑을 불러들인 것처럼, <비브르 사 비>에서 칼 드레이어를 대면하던 것처럼, <미치광이 삐에로>에서 새무얼 풀러에게 질문하던 것처럼,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에 진 부채를 스크린 위에 갚음으로써 영화사의 마지막 증언자로 남는다. 그림자로서의 노년의 ‘고다르’와 사진적 이미지로서의 유년기의 ‘고다르’가 여전히 <고다르의 자화상>의 첫 장면에 남아 있지만, 현실의 고다르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지 없이 문자로 전달된 고다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다시 한번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③]고다르의 21세기 작업, ‘그리고’의 방법론을 연장하기

고다르의 21세기 작업은 20세기 후반부터 이미지와 몽타주의 본성과 관련하여 규정하고 심화한 ‘그리고’(ET)의 방법론을 연장했다. 이미지의 연쇄를 만드는 것은 정확히는 이미지들 ‘사이’에 있어야 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고 구성해야 함을 뜻한다. 고다르가 안느 마리 미비유와 함께 제작한 1970년대 작품에 대한 세르주 다네와 질 들뢰즈의 논평이 이를 입증한다. 다네는 <여기와 저기>(1976)에 대해 “고다르는 감독의 진정한 장소가 ‘그리고’(ET)에 있음을 말한다”라고 썼다. 들뢰즈는 대안적 TV프로그램 <6x2, 커뮤니케이션의 위와 아래>(1976)에 대한 인터뷰에서 다네의 견해와 다음과 같이 공명한다. “‘그리고’(ET)는 하나도 다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항상 사이(entre), 두 사물의 사이다.” 이를 입증하듯 21세기의 고다르는 형식과 기술의 차원에서는 필름과 디지털 사이에서, 그리고 역사와 제도의 차원에서는 시네마와 박물관 사이에서 움직였다. 고다르의 디지털 유세프 이샤그푸르와의 대담집 <영화의 고고학>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1988~98)에서의 “비디오는 시네마의 아바타 중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비디오 편집은 이질적인 원천의 이미지를 필름 편집보다 손쉽게 모으고 연결하고 중첩할 수 있으며 “그리기 행위”에 비유할 수 있는 색채와 형태 변형의 도구를 제공한다. <사랑의 찬가>(2001)에서 고다르는 현재와 과거를 왕복하며 예술의 운명을 성찰하는 에드가를 자신의 반영으로 제시한다. 35mm 필름으로 촬영된 고화질의 흑백 세계는 포화된 색채의 디지털 비디오로 촬영된 과거의 세계와 다층적으로 접속한다.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이 지적하듯 이와 같은 두 세계의 접속은 필름에서 디지털 비디오의 시간으로 이행하는 영화의 상황을 반영한다. <필름 소셜리즘>(2010)에서 이와 같은 이행에 대한 성찰은 영화적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응시로 변주된다. 유럽과 지중해의 주요 도시를 운항하는 유람선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감시 카메라, 휴대폰 카메라가 동원되었고 온라인 비디오 이미지 또한 삽입되었다. 이 여러 촬영 장치와 포맷은 제국주의(하이파), 스페인 내전(바르셀로나), 2차 세계대전(나폴리)과 같은 20세기의 위기에 대한 기억 및 당대 유럽의 정치·경제적 위기와 대조적으로 목적 없는 여흥에 도취된 유람선 내부의 파국적인 경관을 열화되고 범속한 형태로 담아낸다. 고다르는 <언어와의 작별>(2014)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디지털 3D영화 제작에 나선 이유로 3D가 “정해진 규칙이 없는 포맷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기술사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독자에겐 다소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입체경은 19세기에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보다 먼저 발명되었고, 뤼미에르 형제를 포함하여 20세기 전반부에 입체영화를 실험한 다양한 기술자가 있었으며, 텔레비전이라는 당대의 뉴 미디어에 대한 반응으로 1950년대에 할리우드가 새로운 시각적 경험의 견인차로 홍보했던 3D영화의 짧은 유행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체영화의 계보를 고다르가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고다르에게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2009) 이후 디지털 3D를 영화산업의 ‘뉴 노멀’로 홍보하기에 바빴던 할리우드 거물의 예언적 설교, 그리고 이들이 상찬했던 몰입적인 스펙터클의 증폭 가능성을 실현하는 3D 포맷이라는 가정이 흥미롭지 않았을 뿐이다. 산업적 권력과 이것이 제공하는 환상의 차원을 넘어선 3차원 영화의 가능성을 위한 게임의 규칙은 고다르에게 여전히 창안의 대상이었다. 고다르는 옴니버스영화 <3X3D>(2013)에 포함된 <세개의 재난>과 <언어와의 작별>에서 3D를 세개의 주사위 던지기에 비유한다. 주사위를 던지는 아이의 태도와 장인의 태도를 견지하며 고다르는 입체영화의 디스포지티프와 그 미적 효과를 실험했다. 캐논 HD 카메라와 고프로(GoPro), 루믹스(Lumix) 등의 저가 카메라를 망라하는 다양한 포맷의 촬영 장비를 장착할 수 있는 나무 고정 장치를 제작 활용했다. <필름 소셜리즘>에서도 협력했던 촬영기사 파브리스 아라그노에 따르면 <언어와의 작별>에 적용된 3D 촬영 시스템은 할리우드의 입체영화 제작에서 통상 적용되는 양안 시차 거리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 실험은 현실을 몰입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거나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현실에 맞게 이미지를 복제하는 표준적인 3D영화 제작의 프로토콜을 위반하거나 무시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신 이는 공간의 왜곡 및 유령 효과(3D 촬영에서 두 카메라의 각도를 크게 벌림으로써 두눈이 종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두 이미지를 제시할 때 발생하는 형상의 중첩 효과)를 통해 관객의 응시를 동요시키는 효과를 지향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고다르 자신이 셀룰로이드와 비디오를 넘나들며 전복하고 창안했던 영화언어의 지평, 그리고 그 지평 아래 전개되어온 2차원 영화의 역사를 탐구하고 재구성하는 기획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양가적 태도는 고다르가 인터뷰에서 ‘아듀’(Adieu)에 대해 환기했던 이중적 의미와 공명한다. ‘아듀’는 일반적으로 ‘작별’(goodbye)로 번역되지만 고다르 자신이 거주하는 스위스 칸톤(자치주)에서는 ‘안녕’(hello)이라는 뜻으로도 통용된다. 즉 <언어와의 작별>은 몇몇 평자들이 생각하듯 20세기 영화와의 작별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디지털 3D 기술은 고다르가 스스로 실천했던 20세기 영화의 연장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대니얼 모건은 이 작품에서 3D영화를 이루는 두 이미지(왼눈과 오른눈에 호응하는)가 다양한 방식으로 분리되거나 중첩되는 방식을 “눈 사이의 몽타주”라고 말했고, 니코 바움백은 영화 초반 두 남녀가 연속적 카메라 운동 속에서 분리되다가 중첩되는 장면을 지적하며 이를 “예이젠시테인과 바쟁의 결연“으로 명명했다. 이와 같이 2차원 영화의 언어가 디지털 3차원의 세계 속에서 갱신되는 방식은 2차원 영화의 역사적 차원, 그리고 2차원 영화가 재현하는 인간과 세계의 차원으로도 연장된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TV스크린으로 재생되거나 직접 인용되는 과거 영화의 단편은 3차원으로 매개될 때 할리우드영화에서 관객이 기대하는 돌출 효과 대신 2차원 영화에서 기원하는 심도 효과로 제시된다. 또한 고다르는 이 영화에서 변주되는 남녀(즉 두 이미지라고도 할 수 있는)의 세계 ‘사이’에 사물과 자연, 동물(고다르의 애완견 록시)이라는 제3항을 삽입하고, 이들을 친밀하고 낯선 방식으로 바라보기 위해, 또는 (록시의 시점으로 보이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이들의 탈인간적 응시를 체현하기 위해 왜곡과 불균형 효과를 적용했다. <이미지 북>(2018)에서 고다르는 <영화의 역사(들)>에서 아날로그 비디오로 실험했던 몽타주의 가능성, 즉 이질적인 역사적, 문화적, 예술적 원천을 가진 이미지와 사운드의 본래 맥락과 역량을 분리시키고 이들을 다수의 역사적 담화와 철학적 단상을 위해 결합하고 교환시키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디지털 비디오로 연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고다르의 디지털 비디오 편집은 이미지들의 다양한 군집을 구성하는 것 이상의 효과로 나아간다. 인용된 영화와 온라인 비디오 클립의 열화와 해상도 붕괴, 이미지와 사운드의 갑작스러운 일시 정지 및 감속, 무지 화면을 통한 이미지의 불연속, 이미지와 사운드의 분리 및 자유로운 믹싱은 <필름 소셜리즘>에서 본 것보다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점에서 평론가 에이미 토빈이 이 작품에서의 고다르가 1960년대 북미 아방가르드 영화에 가까워졌다고 말한 것은 적절하다. 이는 <이미지 북>의 한 챕터 제목이기도 한 ‘중앙 지역’(La Région centrale)이 마이클 스노우의 전설적인 1971년 영화를 가리킨다는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관습적인 지각을 넘어선 지각의 영역을 개방하는 디지털 편집 및 시각효과의 활용은 ‘배우지 않은 눈’(untutoured eye)의 가능성을 탐구했던 스탠 브라카주를, 발견된 영화 푸티지와 사진을 대상으로 20세기에 고안했던 영화적 기법을 디지털 도구로 업데이트하는 고다르의 접근은 켄 제이콥스의 디지털 비디오 작품을 연상시킨다. 이 점은 고다르가 <이미지 북>에서 다빈치의 <세례 요한>(1513)을 포함하여 영화, 회화, 만화를 포괄하며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손의 이미지로도 입증된다. 몽타주가 사유의 작용이고 그리피스나 예이젠시테인이 영화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하면서도 손의 작업을 요구한다는 점, 이는 고다르가 매체들을 경유하며 실천했던 바다. <이미지 북>의 보도자료에서도 고다르는 이 점을 단언한다. “심지어 디지털 편집도 손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손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다섯 손가락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고다르의 뮤지올로지 고다르와 예술의 관계는 누벨바그 시기의 작품부터 분명히 드러났다. <미치광이 피에로>(1965)에 인용된 입체파 회화와 팝아트 일러스트는 고다르의 과감하고 강렬한 색채 활용과 콜라주 미학의 원천을 지시했고, 이보다 전 <국외자들>(1964)에는 주인공 트리오가 경비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루브르박물관 복도를 질주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이 둘의 몽타주를 통해 초기 고다르가 박물관 및 예술작품을 대하는 양가적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앙투안 드 베크가 말하듯 한편으로 고다르는 예술작품을 영화에 삽입함으로써 그 작품을 둘러싼 아우라를 재건하고자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박물관을 위대한 유산의 보존과 교육을 수행하는 보수적인 제도라고 여겼다. 물론 <영화의 역사(들)>가 입증하듯 고다르의 박물관 이념을 이와 같은 양가적 태도로 환원할 수만은 없다. 영화가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영화의 역사, 영화가 구성하거나 외면했던(홀로코스트) 20세기의 역사, 그리고 영화와 미술사 및 지성사와의 교차로 구성되는 역사라는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박물관은 고다르에게 <영화의 역사(들)>의 모델이 되었다. 이 모델은 페르낭 브로델과 같은 역사학자, 엘리 포르와 같은 미술사가, 시네마테크의 이상적 모습으로 영화박물관을 생각했던 앙리 랑글루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 예술작품의 사진 복제 및 이미지와 텍스트의 병치로 이루어진 ‘상상적 박물관’(musée imaginaire)을 제안했던 앙드레 말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영화의 고고학>과 <오래된 장소>(2000)의 내레이션에서 알 수 있듯 상이한 시간과 맥락에 놓인 자료들을 ‘성좌’(constellation)로 구성하는 발터 베냐민의 몽타주 개념은 이와 같은 영향을 종합하는 중요한 방법론이 되었고, 비디오는 이를 실행하는 충돌과 혼합의 도구가 되었다. <영화의 고고학>에서 고다르가 단언하듯 “우리는 모두 박물관에서 태어났”고 그곳이 어쨌든 “우리의 고국”이라면, <영화의 역사(들)>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박물관을 비디오의 전자적 흐름 속에 건축한 결과였다. 2006년 퐁피두센터에서 개최된 <유토피아로의 여행(들): 장뤽 고다르1946-2006, 잃어버린 정리를 찾아서>(Voyage(s) en utopie, JeanꠓLuc Godard, 1946-2006: à la recherche d’un théorème perdu, 이하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는 <영화의 역사(들)>가 구축한 시청각적 박물관을 미술관의 제도적 공간에 구현하고자 했던 전시였다. 큐레이터 도미니크 파이니와의 협력으로 고다르가 2000년대 초반부터 기획했던 전시의 제목은 (Collage(s) de France, archéologie du cinéma, d'après JLG, 이하 <콜라주(들)>전)이었다. 그 특유의 언어유희로 제목에서 기법으로서의 ‘콜라주’와 ‘콜레주 드 프랑스’를 동시에 환기시키는 이 전시의 기획안은 ‘신화’(영화의 알레고리), ‘카메라’(은유), ‘현실’(꿈), ‘인류’(이미지) 등의 제목이 붙은 9개 방으로 구성된다. 고다르는 이 전시가 <영화의 역사(들)>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단편은 물론 여러 회화와 텍스트, 조각의 인용과 다양한 구조물을 수반하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 18개의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퐁피두센터는 고다르의 기획안이 지나치게 방대하고 많은 예산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고다르는 그로 말미암아 타협적으로 실현된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에 만족하지 않았다. 고다르와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퐁피두센터와의 중재에 분투했던 파이니는 전시 몇달 전 해고되었고, 고다르는 기자회견과 언론 전시 공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콜라주(들)>전의 9개의 방과 달리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의 전시 공간은 3개의 방으로 구분되었다. ‘그저께(과거완료)’라는 제목의 방에는 앙리 마티스와 니콜라 드 스탈의 그림이 걸리고 <시민 케인>(1941)에서 ‘출입금지’ 안내문이 붙은 재너두 저택 장면을 보여주는 스크린이 설치되었으며 고다르와 미비유가 공동 제작한 중단편영화들이 아이팟을 통해 반복 재생되었다. 영화사에 대한 고다르의 회고적 응시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어제(과거)’ 방에는 알렉산드르 도브첸코의 <병기고>(1928), 프리츠 랑의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1), 니컬러스 레이의 <쟈니 기타>(1954)를 비롯한 20세기 영화 작품 14편의 발췌본이 정치적 모더니즘 시기 고다르를 대표하는 <주말>(1967),<동풍>(1969) 및 고다르의 자전적 에세이 영화 (1995)과 더불어 여러 평면 디스플레이에 전개되었다. 고다르의 동시대 미디어 문화 비판을 무대화한 ‘오늘(현재)’에는 할리우드 스펙터클 영화의 제국주의적 폭력을 대표하는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2001)이 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와이드 스크린 LCD TV를 장식한 가운데 일련의 포르노영화 이미지가 반복 재생되는 LCD TV를 갖춘 주방과 TF1, 유로스포츠의 실시간 방송을 무음 재생하는 두대의 LCD TV가 설비된 거실이 마련되었다. 영화의 단편들 이외에도 여러 오브제와 설치물, 텍스트의 인용구들이 전시장 곳곳에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게 배치되었다. ‘그저께(과거완료)’ 방에는 칠이 완료되지 않은 페인트 자국과 목재 및 강판이 있었다. 모형 기차가 이 방과 ‘어제(과거)’ 방 사이를 왕복하고, 인용된 영화 단편을 보여주는 두대의 TV수상기를 열대식물이 둘러쌌다. 즉 이 전시를 구성하는 재료 중 상당 부분이 발견된 오브제, 조각적인 구성물, 혼합 설치작품을 닮은 구조물이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방치되거나 공사 중인 장소, 또는 폐허를 연상시켰다.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콜라주(들)>전에서 영화의 장치를 미술관에 복원하려는 고다르의 구상, 즉 인용된 영화들을 반복 재생하는 키오스크를 넘어 영화를 기술적-문화적-제도적으로 구성하는 빛과 어둠, 영사의 결합체를 설치의 형태로 구현하고자 했던 기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전선으로 어지럽게 연결된 다수의 소형 모니터와 이동용 재생장치가 화이트 큐브의 벽면과 빈 공간에 포진되었고, 미술관 방문자의 관람성은 영화관에서의 집중 및 몰입보다는 혼란과 방향 상실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고다르 연구자와 비평가들은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들)>를 포함하여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변주했던 인용과 몽타주의 논리가 전시 구성물의 배치로 연장되는 방식을 읽어내거나, <경멸>(1963) 및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1986) 등 고다르의 여러 영화에서 다루어졌고 그의 여러 미완성 기획들로도 뒷받침되는 실패의 모티프가 전시 공간의 미완성 및 폐허의 모습으로 반영되었다고 주장했다. <유토피아로의 여행(들)>전은 1990년대 이후 영화와 동시대 미술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이라는 경향을 점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벤트로 남아 있다. 제니 샤마레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이 전시를 고다르의 필름 및 비디오 작업이 미술관 설치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연장된 것으로 평가하거나 ‘큐레이터로서의 고다르’라는 창조적인 행위자를 인증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은 전시 기획 및 준비 단계에서 다양한 행위자들(고다르, 파이니, 퐁피두센터 등의)간의 긴장과 갈등을 간과한 것이다. 즉 이 전시의 위태로운 준비 과정 및 공개 이후의 스캔들은 미술관과 영화가 오랫동안 각자의 방식대로 기능해온 두개의 제도이며 이들간에는 매끄러운 교섭을 넘어선 틈새와 마찰이 존재할 수 있다는 토마스 엘새서의 견해를 확인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 고다르는 필름 시기 작품의 주제와 기법을 미술관의 설치작품으로 연장시킨 하룬 파로키, 샹탈 아커만, 아녜스 바르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미술관과 영화관 사이에서 작업했다. 그 결과 관객은 이 전시(그리고 지금까지도 북미와 유럽에서 전시되고 있는 <콜라주(들)>전의 모형)에서 영화와 예술작품, 예술작품과 레디메이드, 이미지와 텍스트를 ‘그리고’를 포함한 두개의 항과 마주하고, 이들간의 간극과 가능한 접속은 물론 내재적인 불화마저도 사유하도록 안내된다. 소진되지 않은 것 아날로그 미디어와 디지털의 사이에서, 시네마와 박물관의 사이에서 자신의 영화적 세계와 영화언어를 확장시키고 그 과정에서 불일치와 틈새, 불연속과 불안정마저도 그 확장의 결과로 제시했던 고다르의 21세기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자 예고되고도 도래할 미래처럼 끝났다. 그의 죽음을 1970년대부터 그가 반복해서 설파한 ‘영화의 죽음’과 연관하여 말하기보다는, 그가 말년에 전해준 말을 인용하는 것이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사유하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 케랄라국제영화제가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면서 2021년 3월 가진 온라인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영화의 경험과 산업적 생태계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상황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는 질의자의 말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영화계에 있었을 때는 제작자와 제작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이제는 배급이 중요한 것이다. 배급과 배급자들이 영화의 제작과 제작자들을 집어삼켰다.” 이 말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새로운 엔터테인먼트로 상찬하는 리드 헤이스팅스나 이를 영화 형식 및 경험의 ‘게임 체인저’로 단언하는 산업 관계자들에 대한 비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포스트-시네마 조건 속에서 영화 형식과 경험의 경계를 점검하고 다시 그리는 작업은 영화적 유산에 대한 역사적 탐색,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단절보다는 갱신을 목표로 수행되는 제작의 다양성을 살펴보고 평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지인들에 따르면 고다르는 단지 ‘소진된’(épuisé) 것이라고 했지만, 영화의 변모하는 존재론에 대한 성찰은 소진되지 않았다

[비평] ‘탑’, 영화의 건축술과 배우의 변신술

영화의 시작점에 우리는 ‘탑’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화면을 채운 모습을 보게 된다. ㅌ, ㅏ, ㅂ이 결합한 글자는 마치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글자 ‘탑’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3층 정도 높이의 건축물과 닮았다. 이것은 같은 발음을 가진 영문자(TOP)로 풀어 적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논문 ‘영화의 원리와 표의문자’(1929)에서 한자어의 축약성에 특히 주목한다. 그는 이미지를 추상화한 상형문자, 두개의 문자를 결합해 다른 의미로 나아가는 표의문자에서 숏과 숏을 결합해 제삼의 지대에 다가가는 영화 몽타주 개념의 실체를 본다. 홍상수의 영화를 표의문자에 빗대면 그 문자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부딪치기보다는 비슷한 이미지를 부딪쳐 미궁을 짓는 편에 속한다. 감독의 영화 사상 최초의 한 글자 영화인 <탑>은 이러한 경향의 정점에 있다. 한층에 하나씩 영화는 화면 바깥에서 음악이 개입하는 순간을 기점으로 총 4개의 장으로 이뤄져 있다. 내용에 따라 각각의 이름을 붙이자면 도착, 재회, 거주, 떠남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4개의 장은 4개의 악장처럼 연속과 변주의 관계에 놓인다. 동일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장이 거듭될수록 캐릭터와 상황은 변한다. 기본적으로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따르지만, 이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 역시 존재한다. 4개로 분절된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건축물과 닮았다. 옥탑과 지하를 각각 반층으로 칠 때, 건물은 대략 4개의 층으로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장이 거듭되면서 중심 장소는 한층씩 위로 올라간다. 1장의 대화 장면은 지하와 1층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외부로 통하는 두개의 출입문이 위치한 1층은 바깥에서 언뜻 보기에는 레스토랑처럼 보이지만, 2장과는 달리 대화에서 이에 관한 언급은 없다. 1층 내부가 드러나는 장면은 병수(권해효)와 정수(박미소)가 김 선생(이혜영)과 함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유일하다. 이들은 다시 김 선생의 작업실인 지하로 자리를 옮겨 와인을 곁들인 대화 자리를 이어간다. 2층은 선희(송선미)의 원테이블 레스토랑으로 2장의 중심 장소다. 1장에서 외국에서 온 커플이 살던 곳으로 소개된 3층은 3장에서 선희와 병수가 함께 사는 공간이 된다. 4층에 해당하는 옥탑은 미술 작가의 작업실과 옥상이 이어진 공간이다. 4장에서 병수와 지영(조윤희)은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첫장에서 영화는 세 사람이 계단을 오르면서 한층씩 구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층계를 오르는 모습이 현실적인 방식으로 찍힌 데 반해, 이들이 층계를 내려오는 장면은 대부분 생략되었다. 정수는 언제 옥상에서 1층으로 내려온 것일까. 옥상에서 병수와 김 선생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던 카메라는 불현듯 혼자 떨어져 옥상 난간에 기댄 채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수의 뒷모습을 비춘다. 이때 정수에게 무섭지 않냐며 말을 거는 병수의 목소리가 외화면에서 끼어드는데 정수에게는 마치 그의 소리가 가닿지 않는 듯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옥상 시퀀스는 1층 건물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는 쥴(신석호)을 보여주는 숏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담배를 빌리는 목소리가 끼어드는데, 방금 전까지 옥상에 있던 정수다. 정수는 마치 옥상에서 1층으로 단숨에 점프한 것 같다. 1장에서의 이동을 하강의 점프라 한다면, 2장에는 상승의 점프가 등장한다. 선희의 레스토랑에서 선희와 병수, 그리고 김 선생이 함께 와인을 곁들여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김 선생이 비틀거리면서 지하로 내려간다. 이 숏은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숏이다. 테이블에 남은 선희와 병수는 영화를 사이에 둔 공감대를 바탕으로 호감 어린 대화를 주고받는다. 대화 시퀀스는 의외의 숏으로 마무리된다. 카메라는 건물 바깥에서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창문을 가린 흰 커튼 뒤에서 창문과 연결된 작고 좁은 발코니로 병수가 나온다. 세팅된 카메라와 인물의 등장은 어쩐지 연극적이다. 그 뒤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칠 때, 그 사람은 방금까지 병수와 대화를 나누었던 선희일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 모습을 보인 사람은 김 선생이다. 김 선생은 1장에 등장했던 기타를 손에 쥔 채 오늘은 꼭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앞선 장면에서 취한 듯 비틀거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모습이 등장한 이후다. 이것은 상승의 점프이자 선희와 김 선생, 두 인물간의 점프이기도 하다. 3장에서 점프는 공간에서 시간의 층위로 나아간다. 병수와 식사를 마친 선희는 병수의 반대에도 친구 준희를 만나겠다며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다.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이번에도 선희가 아니라 김 선생이다. 병수는 선희에게 문자를 보내지만, 선희가 휴대폰을 두고 나갔기 때문에 알림은 바로 뒤에서 울린다. 이것은 어쩐지 선희가 영영 실종되었거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전조처럼 느껴진다. 병수는 침대에 몸을 던져 웅크린다. 이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선희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병수의 음성이 들리면 이것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런데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통상적인 보이스 오버가 아니라 녹음된 음성을 재생한 것에 가깝다. 눈을 슬며시 뜬 채로 누워 있는 병수는 마치 이 소리를 관객과 함께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꾸는 꿈이 아니다. 녹음된 사운드는 인물이 극 안에서 영화나 텔레비전을 볼 때 들릴 법한 사운드와 유사하다. 병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치 영화를 보듯 바라본다. 이것은 소망 혹은 기억의 발현일 수도 있고 아직 재현되지 않은 이후 시간을 혼재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 화면과 매끈하게 결합해 별다른 주의를 끌지 않기 마련인 보이스 오버는 질감의 변형을 통해 다른 쓰임을 찾는 듯 보인다. 현장 재생형 보이스 오버는 영화의 현장성 혹은 영화의 연극화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추후에 입혀지며 현장의 배우는 목소리가 개입한다는 사실을 미리 안다고 해도, 그것의 실체나 효과는 편집이 끝난 이후에 체감하게 된다. 녹음된 목소리의 현장 재생의 목적은 배우가 목소리를 함께 듣고 있음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병수가 선희에게 보내는 문자를 소리내어 읽을 때, 그가 지금 관객을 의식하고 있음을 표시한다. <탑>은 프레임 바깥으로 처리되는 것들을 프레임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영화 형식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자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불가능에 가까운 동시적인 소통이라는 측면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거의 연극에 가까운 것이 되어간다. 흰 커튼, 검은 그림자 4장은 공간에 관한 통상적 감각을 교란한다. 병수와 지영이 옥상에 설치된 테이블 위에서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담긴 롱테이크숏 이후 카메라는 방 내부에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려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반투명 유리 뒤로 보인다. 문이 열리지 않자 그는 내부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김 선생은 “안에 사람 있는 거 다 알아요. 왜 없는 척해요?”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주는 느낌은 기이하다. 프레임 안에는 김 선생 외에는 아무도 없고, 주변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김 선생의 요청은 오직 카메라, 혹은 카메라 뒤에 위치할 관객을 향한 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를 사이에 둔 인물과의 대면은 전작의 유사한 장면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강변호텔> <소설가의 영화> 등 홍상수의 영화에서 창문을 사이에 둔 소통과 단절의 형상이 종종 등장했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등장인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 뿐, 관객을 직접 소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 <탑>에서 문 안쪽의 누군가를 소환하는 김 선생의 실루엣은 대면의 감각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이 장면의 의미는 다음 상황으로 인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소환 대상이 된 실제 인물인 병수가 뒤늦게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이 때문에 이전에 관객이 느낀 대면의 감각은 빠르게 퇴색된다. 동시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든다. 병수의 출현은 관객의 착각을 깨고 다시 영화의 리얼리티를 회복하는 움직임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병수의 몸짓은 도리어 더 큰 허구의 맥락을 껴안는다. 방금까지 병수는 옥상에서 지영과 함께 있었다. 뒤늦게 김 선생이 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동했다면 그가 이동하는 소리가 필연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두 상황 사이에 단절이 있다는 추론도 통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다시 옥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영은 앞선 상황을 듣고 있던 것처럼 건물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기다리고 있다. 김 선생의 방문 이후 병수는 다시 옥상의 지영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손에는 김 선생이 건넨 우편물이 들려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병수는 바로 문을 열지 않고 대기하고 있다가 문을 열었다. 김 선생의 말처럼 그가 일부러 없는 척하려고 기척을 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적인 인과관계를 꿰맞출 수 있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병수가 카메라의 시야에 일부러 비켜나 있다가 나중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다.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병수의 동작은 약속된 움직임이며,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임을 인식하게 한다. 배우를 배우라고 인식하는 일은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하거나 캐릭터의 정체성을 교란하는 것일 수 있다. 반면 여기에서 배우를 인식하는 일은 병수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병수라는 캐릭터를 새삼스럽게 허구나 가짜로 인식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프레임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순간의 병수를 연기자-캐릭터라고 말한다면, 그 존재는 관객이 온전한 배우 혹은 온전한 캐릭터 중 한쪽을 선택해 인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인물들이 나누던 대화에서 등장한 안과 바깥, 진짜와 가짜에 관한 이야기를 적용해보자. 정수는 감독이자 아버지인 병수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은 모를 거라고 말한다. 이에 김 선생은 바깥에서의 병수가 진짜 병수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안과 밖은 집의 안과 밖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생략된 말을 ‘프레임’으로 바꾸어보자. 그렇다면 프레임의 안보다 바깥이 더 진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것은 통념을 뒤집는 말이 아니라 통념을 반복하는 말이 된다. 대부분은 ‘프레임’이 의미하는 카메라 안쪽에서보다 카메라 바깥의 모습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화에서 프레임 바깥이란 엄밀히 말해 존재할 수 없다. 프레임 바깥을 보여주는 이상 영화는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 가령 영화는 종종 카메라 밖의 현장 스탭을 노출하면서 프레임 바깥을 보여주지만, 이것의 실제 효과나 기능은 대개 모호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기 반영성이라는 무의미한 말만을 반복하게 만들 뿐 그 자체로 보이는 것 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영화의 틀을 깨지 않고 프레임의 밖을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이스 오버 같은 사운드를 통해 외부를 자극하거나, 프레임 안에서 밖으로 시차를 둔 이동을 새기는 방법 정도가 가능하다. 이를 통해 단절된 것이 연결되고, 연결된 것은 잠깐의 시차를 통한 간격이 생성된다. <소설가의 영화>는 홈비디오 혹은 푸티지에 가까운 영상을 영화의 형식 안에 포함하면서 프레임 바깥을 자극했다. <탑>은 건물의 구조 속에서 프레임의 안과 밖을 교란할 움직임을 발견한다. 연속하는 불연속 초반을 제외하고는 드러나지 않는 계단은 가장 낮은 층부터 가장 높은 층까지 연속해서 이어진 사물이지만, 영화가 계단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란 불가능하다. 가능한 방식은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팔로숏으로 찍거나 카메라가 한명의 캐릭터가 되어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숏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인물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대부분 고정된 채 찍는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카메라는 계단을 마주 보는 곳에 미리 세팅돼 있다. 카메라는 지하와 2층으로 연결된 1층 계단을 마주하고 놓여 있다. 닫힌 문을 열고 인물들이 한명씩 모습을 나타내고 잠시 계단에 머문 뒤 층계를 오르며 사라진다. 카메라 세팅과 인물의 등장 사이에는 간격이 존재하며 인물을 놓치고 다시 찾는 순간이 필수적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카메라는 인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인물들이 먼저 장소에 도착해야 옳다. 연속성을 위해 다음 층에서는 미리 도착한 인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다음 숏에서 카메라는 먼저 도착해 있고 인물들은 나중에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머문 뒤, 다시 다른 층계에서 소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다음 층계에 도착하기까지 몇번의 회전을 거쳐야 하는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사라진 몸을 다시 찾기까지의 시간의 간격은 실제의 움직임보다 깊은 우물처럼 체감된다. 이같은 방식으로 연속된 동작을 단절된 것으로 체감하게 하는 동시에 연속성이 요구되지 않는 순간을 연결한다. 클로징 시퀀스에서 병수는 지영과의 계획이 틀어지면서 건물 앞에서 홀로 담배를 피운다. 이때 1장에 등장했던 병수의 자동차가 화면을 가로지르며 등장한다. 운전석에서 내린 쥴은 손님의 주차 문제로 잠시 자동차를 옮긴 뒤 다시 가져다놓았다고 말한다. 그 장소에 놓였던 유일한 다른 차는 3장에서 선희의 자동차였으므로, 펼쳐진 시간이 인물의 대사를 통해 다시 축약되는 셈이다. 자동차는 일종의 프레임 속 프레임처럼 건물 바깥에 다른 바깥이자 다른 내부를 만든다. 병수는 자동차에 잠시 타서 시동을 켰다가 다시 끄고는 차에서 내린다. 그러자 시간과 함께 인물이 회귀한 것처럼 1장 이후에 사라졌던 정수가 와인을 사기 위해 사라진 언덕을 다시 거슬러 올라오면서 1장에서 끊어진 동작을 마주 잇는다. 이러한 방식의 시간의 혼재는 오늘날 블록버스터영화에서 기본 개념처럼 탑재된 멀티버스의 가장 미니멀한 적용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반면 영화에서 느껴지는 연극성은 멀티버스라는 용어 이전에 존재했을 기원에 대한 생각으로 이끈다. 이를테면 관객의 자리가 고정된 연극에서는 하나의 장소 안에 소품과 의상과 인물의 변화에 의해 수많은 장소와 시간이 혼재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한 인물이 분장을 바꾸며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고, 반대로 서로 다른 인물들이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한다. 그로 인한 모든 혼란을 관객은 즐겁게 받아들인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관객과 배우 혹은 제작진 사이에 즉흥적으로 맺어지는 약속과 같은 것이었다. <탑>에서 카메라가 놓인 곳에 배우가 나타나 연기를 하는 방식이 자극하는 연극성은 어쩌면 관객과 새로운 약속을 맺기 위한 다중의 신호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지금 관객에게 무언가에 대한 용인과 참여를 갈구하고 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관객을 필요로 하는 영화는 희귀하다.

[비평] ‘알파빌’, 고통의 도시(들)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1960)부터 장뤽 고다르는 뛰어난 형식주의자였다. 실험적 편집, 다이얼로그 도중의 갑작스러운 컷, 풀 프레이밍된 그림, 배우의 목소리를 덮는 음악.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클래식 영화의 규칙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고다르는 세계와 동시대 사람들(철학자이건 학생이건 노동자이건)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고, 필름누아르나 SF 같은 장르에 예술영화를 접목한 팝 시네아스트의 선두 주자이기도 했다. 1965년 고다르는 전체주의, 컴퓨터의 절대권력, 인간의 상품화 같은 현대의 모든 공포가 집약된 미래도시 ‘알파빌’을 발명한다. 사립 탐정 레미 코숑이 주인공인 <알파빌>(1965)은 프리츠 랑과 <메트로폴리스>(1927), 그리고 필름누아르에 대한 감독의 애정을 가늠케 하는 작품이다. 고다르에게 알파빌은 미래도시라기보다 시멘트 건물로 뒤덮여가던 60년대 당시의 파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알파빌>은 공상과학영화라기보다 당대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로 봐야 한다. 1967년 그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 다시 한번 이러한 파리의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 1991년, 베를린장벽 붕괴 후 고다르는 <알파빌>의 주인공 레미 코숑을 <신독일 영년>으로 다시 호출한다. 그리고 유령의 거리를 헤매는 레미 코숑의 쓸쓸하고 향수에 젖은 산책이 시작된다. 구소련은 사라졌지만 과연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 우리가 사는 현시대의 이야기이기도 한 세편의 영화 <알파빌>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신독일 영년>을 통해 고다르는 우리에게 전체주의, 진보라는 기적, 인간을 소외시키는 소비사회, 그리고 역사적 범죄에 대한 망각에 맞서 싸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경고한다. 사랑과 시가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얼어붙고, 우리는 감정 없는 기계로 전락한다고. 레미 코숑 1965년 사립 탐정 레미 코숑은 나타샤 본 브라운과 함께 고통의 도시 알파빌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1991년, 만신창이의 그는 홀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독일로 되돌아온다. <알파빌>에서 <신독일 영년>까지, 26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알파빌>은 1965년 <미치광이 피에로>보다 몇달 앞서 프랑스 극장에서 개봉한다. 페르디낭(장폴 벨몽도)이 “나는 보았다. 무엇을? 영원”이라고 랭보의 시구를 읊조리며 목숨을 끊기 전 레미 코숑(에디 콘스탄틴)은 은하계의 또 다른 영원을 건너 알파빌에 도착한다.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 사립 탐정은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누아르의 주인공처럼 보이스 오버로 읊조린다. 레미 코숑은 원래 영국 작가 피터 체이니가 고안한, 1930년대 인기 연작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다. 프랑스에서는 베르나르 보데리 감독의 <포이즌 아이비>(1952)에서부터 미국계 배우 에디 콘스탄틴이 레미 코숑 역을 꾸준히 도맡는다. 슈퍼컴퓨터 알파 60을 발명하고, 인공두뇌학으로 인간의 감정을 사라지게 만들어 세상을 지배하려는 독재자 브라운 교수를 체포하기 위해 고다르는 레미 코숑을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알파빌로 보낸다. 비인간적 도시 고다르는 미래도시를 만들기 위해 폐쇄된 파리의 오르세역을 지옥 같은 관청으로 변신시켰던 오슨 웰스의 <소송>(1962)에서 영감을 받는다. 60년대 파리는 산업화로 급격하게 변모하는 중이었고 고다르는 비즈니스 타워와 빌딩 숲 등 미래 지향적 건축물, 라디오 방송국의 길고 새하얀 복도와 녹음실을 카메라에 담는다. 알파빌은 유리로 만든 엘리베이터가 있는 로비, 하얗고 차가운 호텔 객실, 반대파를 숙청하는 수영장 등 비인격적 공간이 뒤얽혀 있는 미로다. 파리를 에워싼 고속도로는 우주공간으로 변형된다. 이 비인격화된 공간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1962)의 라스트 신을 떠올리게 한다. 연인들은 사라지고, 이들이 관계 맺었던 텅 빈 공간에는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기사를 읽는 불안한 행인 몇몇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알파빌>은 새 사회가 건설되고 있는 현장과 한 세계가 사라지는 풍경을 함께 보여준다. 다름 아닌 누벨바그의 주 배경이 되었던 서민적 파리의 소멸이다. <알파빌>은 잘 ‘들어보면’ 미세한 전자음이 사운드트랙을 관통한다. 1965년 주민들을 원격 조종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 신호는 오늘날의 휴대폰 벨 소리를 연상시킨다. <알파빌>에서 예견된 광기는 이제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레미 코숑을 연기한 배우 에디 콘스탄틴의 울퉁불퉁한 얼굴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담긴 고대 동상의 그것과 닮았다. 레인코트에 모자를 눌러쓴 그는 단순한 스파이가 아닌 시네마의 시적 캐릭터다. 나타샤 본 브라운 역의 아나 카리나는 누아르영화의 팜므파탈이면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알파 60의 명령을 따르는 안드로이드와 같은 존재다. 그의 목에는 강제 수용자의 일련번호를 연상시키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감정과 분리된 육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도구이다. 성적 차원으로 환원된 여자들은 알파 60의 프로그램에 따라 남자들의 편의를 위해 매춘을 한다. 그들의 일은 가정부의 노동과 같은 개념이다. 고다르가 제안하는 치유책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옛 인류의 감정을 담고 있는 시(poe′sie)다. 시를 통해 나타샤는 알파 60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난다. “사랑, 그게 뭐지?”라는 질문에 레미 코숑과 나타샤는 폴 엘뤼아르의 시 <고통의 도시>(Capitale de la douleur)의 한 구절을 함께 낭송한다. “너의 목소리, 너의 눈, 너의 손, 너의 입술, 우리의 침묵, 우리의 말(…) 우리 둘을 위한 단 하나의 미소.”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유희와 독재의 한가운데에서 다시 사랑이 탄생하는 장면이다. 알파 60은 머지않아 파괴될 거고, 연인은 은하의 밤 속으로 도주할 것이다.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1948)나 조셉 H. 루이스의 <건 크레이지>(1950)와 같은 필름누아르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시(poe′sie)는 대형 스튜디오의 규칙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B급영화의 정신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예산영화가 지닌 자유야말로 바로 누벨바그에 영감을 준 원천이기 때문이다. 파리 영년 <알파빌>은 공상과학 장르를 빌려 60년대의 재난을 이야기했다. 1967년 고다르는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 파리 외곽의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며 가끔 매춘을 하는 주부 줄리엣 잔슨(마리나 블라디)의 초상을 그리며 현실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도시화와 비인간화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여기에서 사람의 정신을 혼란시키는 건 컴퓨터가 아니라 거짓 욕망을 부추기는 소비사회다.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집세를 내면 텔레비전을 못 사. 텔레비전을 사버리면 차 살 돈이 없어. 세탁기를 사면 휴가를 못 가. 그러니까 어쨌든,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모든 게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사람들은 타워에 갇혀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카페에서 “난 남쪽 고속도로 옆의 큰 건물에 살아”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알파빌>에서 묘사된 미래도시를 떠올린다. 매춘은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산물인데, 그건 줄리엣이 소비사회가 권장하는 물건을 소유하기 위해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파빌>의 안드로이드-매춘부만큼이나 소비사회에 종속된 존재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무한한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고다르는 커피잔 속의 거품을 은하계의 폭풍처럼 찍으며 “과학의 전격적인 발전은 사람들의 미래를 성큼 앞당긴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되고, 먼 은하가 바로 문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속삭인다. 미래도 현실처럼 불안하다면 어떻게 꿈을 꿔야 할까? 이 세계화가 지구에서 멈추지 않고 우주와 태양계까지 뻗어나간다면 어떻게 별을 보면서 꿈을 꿀 수 있을까? 고다르는 일론 머스크의 우주여행 민영화, 가상 세계의 지배자를 꿈꾸는 마크 저커버그의 헤게모니를 진작에 예견했다. 오늘날 세계의 최고 권력자들은 60년대 알파빌의 독재자보다 더 탐욕스럽고 냉정하다. 살아남기 위해 이제는 도망이 아닌 투쟁을 준비할 때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은 1968년 5월 항쟁 직전에 개봉했다. 고다르는 항쟁에 가담하면서 상업영화에 등을 돌린다. 이후 10여년 동안 그는 대형 제작사와 영화산업, 그리고 스타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영화를 만들며 반순응적 영화 제작 방식을 구축한다. 고다르 역시 알파 60을 파괴할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유럽의 멜랑콜리 <신독일 영년>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오는 늙고 침울한 주인공은 고다르일까 아니면 레미 코숑일까? 에디 콘스탄틴은 30년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다시 한번 냉전 시대의 마지막 스파이 레미 코숑을 연기한다. 그는 어쩌면 누벨바그의 마지막 투사였던 고다르일지도 모른다. 레미 코숑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줄 모르고 서쪽으로 넘어가려 애쓴다. 이 여행은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다. 주인공은 더이상 무서운 침묵의 은하가 아닌 ‘노 맨스 랜드’를 횡단한다. 겨울의 독일은 괴테, 토마스 만, 로자 룩셈부르크, 무르나우 또는 프리츠 랑의 유령을 마주치는 림보의 영역이 된다. 이 유령들은 책 속에 살고 있다. 레미 코숑은 블레즈 파스칼의 문장을 변형해 “이 방대한 책들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몰아넣는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나 <마지막 웃음>(1924)으로 시네마테크에 영원히 살고 있다. 코트에 모자를 눌러쓰고 독일을 횡단하는 레미 코숑은 사뮈엘 베케트의 <영화>(1965)에 나오는 버스터 키턴을 연상시킨다. 어딘가 엉뚱하고, 고독하며, 현대사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그가 지나가는 목초지나 호수, 숲의 풍경은 타이어 더미를 쌓아둔 쓰레기장 같은 것만 없다면 과거 독일 낭만주의의 흔적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는 풍차가 아닌 건설 현장의 크레인을 공격하러 떠나는 돈키호테와도 마주친다. 역사와 진보의 거침없는 행보 속에서 이제는 조롱거리가 된 지난한 투쟁을 이어가는 고다르와 레미 코숑은 돈키호테의 후예이기도 하다. 알파빌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베를린이다. 도시는 여전히 어둡고, 그림자로 가득하다. 겨우 서쪽으로 넘어간 레미 코숑은 다시 함정에 빠진다. 알파빌의 호텔 방을 연상시키는 장소에 다시 갇혀버리고 만다. 나타샤 본 브라운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알파 60으로 원격 조종되는 로봇을 닮은 가정부가 방문할 뿐이다.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침구를 정리하는 청소부가 단언한다. 나치 강제 수용소 입구에 쓰여 있는 바로 그 침울한 문구, ‘아르바이트 마흐트 프라이’(Arbeit macht frei). 호텔 방마다 성경책이 비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레미 코숑은 “개자식들!”이라고 외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이다. 레미 코숑은 이렇게 여느 사설 탐정과 다름없이 세상이 송두리째 부패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쟁은 선의 승리로 종결될 수 있고, 베를린장벽은 무너질 수 있고, 구소련은 붕괴될 수 있지만 역사적 악몽은 끝이 없다. 승자와 개자식이 더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전체주의의 알레고리 알파 60은 여전히 군림한다.

[비평] 아오야마 신지 감독론: 아오야마 신지, 혹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의 곤경

아오야마 신지의 장편 데뷔작 <헬프리스>의 도입부는 하늘에 떠오른 카메라의 공중 촬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하늘 위에서 심하게 흔들리며 현기증이 일 듯한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기타큐슈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이 매혹적인 장면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여는 근사한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이 <구름 위에 살다>라는 또 다른 하늘의 영화를 끝으로 이르게 종결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이라면 아오야마의 영화에 침범하는 구름과 하늘에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관측되는 대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서 집 안에 누워 있던 겐지(아사노 타다노부)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 뒤에 이어붙는 컷은 그의 시선으로 보이는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어느 공장의 외경을 비추는 무인의 삽입 쇼트다. 시선의 물리적 연결을 고려한다면 프레임에 하늘을 가득 담아낸 장면이 나올 법하지만, 공장 주변의 수직적 건축물을 담아낸 쇼트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특권적인 밀도를 갖는 공장의 무인 쇼트는 광활한 하늘과 구름의 자리를 대체해 손쉽게 화면을 내어주지 않는 존재감을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유레카>에서 사와이(야쿠쇼 코지)가 이혼한 아내를 만나 대화하던 도중 카메라가 왼쪽으로 이동해 창밖의 하늘을 보여줄 때도, <도쿄 공원>에서 코지(미우라 하루마)가 미행 중인 여자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하늘과 구름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사태만큼은 철저히 회피된다. 그들이 바라본 하늘에는 어김없이 도심의 고층 건물과 탑이 관측되고 있어, 완벽하게 하늘로만 이루어진 화면이 구성되는 것을 끝내 방해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아무런 장해물 없이 온전히 하늘과 대면하는 순간을 상상하기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드넓은 하늘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치명적인 매혹이자 백색 스크린을 바라보는 데서 성립하는 영화 체험의 필연적 조건을 상기시키는 형상이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는 프레임에 하늘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마다 일본에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의 수직선을 불러들인다. 그는 화면 내부에 현실을 환기하는 범용한 선들을 틈입시켜 무정형의 하늘 자체가 카메라에 포착되는 것을 강박적으로 저지한다. 서부극의 하늘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하늘을 비추는 데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춘 무대는 물론 서부극일 것이다. 신화적 구조를 배면에 두고 황무지를 배회하는 웨스턴의 풍경 상단에는 장대한 하늘과 평온한 구름이 언제나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서부극의 하늘이 전하는 아름다운 감촉을 아오야마 신지가 의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잘 알려졌다시피, 아오야마는 웨스턴의 법칙이 영화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말하는 작가다.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마을에 도착한 서부극의 주인공은 외부의 적을 방어하고 공동체를 수호한 뒤 그곳을 떠난다. 서부극을 향한 동경과 무의식은 그의 영화를 관류하는 강력한 기제다. 하지만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서부극의 형상을 구축하는 작업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범용한 도심 공간 속에서 서부극의 거대한 풍경에 접근할 수 있는가, 일본을 무대로 삼은 영화가 서부의 신화적 공간을 이루는 황무지와 암석을 묘사할 수 있는가, 라는 불가피한 질문을 불러온다. 아오야마의 영화는 사건 이후의 영화다. <헬프리스>는 출소한 야쿠자 야스오가 고향에 돌아오는 플랫폼 장면에서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이니스프리로 돌아오는 첫 장면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묘사한다. 하지만 돌아온 자에게 안식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야스오가 찾는 조직 두목은 일찌감치 죽어버렸고, 그는 두목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채로 두목의 죽음을 주장하는 동료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한다. 마침내 두목이 죽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잘린 팔과 마약을 남기고 자살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사건으로 처리해야 할 두목의 죽음은 이미 해소되어버렸다. 웨스턴이 쇠락해버린 영화사의 시간에 연출자로 불시착한 아오야마 신지처럼, 야스오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자다. 존 포드의 인물이 고독하지만 분명한 몸짓으로 원거리의 하늘을 바라보며 돌멩이를 던진다면, 아오야마의 인물들에게 하늘 위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명확한 행위를 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애매한 몸짓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차가운 피>의 형사 사가는 터널에서 도주하는 범인이 쏜 총탄에 맞아 총을 도난당하고, <헬프리스>에서 오른쪽 팔이 잘린 야스오는 손에서 굴러떨어진 술병을 줍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슌스케는 시체의 지문을 지우는 데 사용한 라이터를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긋난 시간과 분실된 표상의 교차로 이루어진 무대에서 머뭇거린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인물의 손에 쥐어진 사물은 그 손의 주인이 갖는 정체를 규정한다. 로베르 브레송에 빗대어 말한다면, 어느 남자가 소매치기라는 것을 알기 위해선 그의 손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봐야 한다. 영화적 논리로는 소매치기라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동작에서 소매치기라는 정체성이 각인되는 것이다. 서부극에서라면 주인공은 손에 든 권총으로 적을 해결해야 한다.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의 목숨과 공동체의 운명이 위험하다. 웨스턴의 법칙은 행동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부극적 인물의 손은 빠르게 사물을 들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서부극의 손은 순식간에 판단하고 해결한다. 영화는 그 짧은 손짓에서 개인과 국가와 공동체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의미를 획득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반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시간을 도입한다. <헬프리스>의 서사에는 행동하는 인물인 야스오가 있지만, 다른 축에 행동하지 않는 겐지가 있다. 아오야마의 영화가 전하는 특별함은 행위를 규정하는 사물로부터 인물의 손을 분리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이 손에서 빠져나가고, 심지어 인물의 잘린 팔이 드러날 때, 영화의 표상은 그들을 규정하는 체계를 상실한다. 총을 들고 범인을 쫓는 사가는 형사다. 그러나 총을 분실하고 한쪽 폐에 손상을 입은 사가는 형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버스를 운전하는 사와이는 운전기사다. 그러나 끔찍한 버스 납치 사건을 겪고 살아난 사와이는 운전기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인물은 능동적으로 사건에 개입한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노출된다. 그들이 영화적 무대에 도착하기 전에 일찌감치 누군가 죽어 있거나 살인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에 남겨지는 것은 범용한 의미와 맥락으로 규정할 수 없는 타인의 면모다. 그들이 화면에 돌아오면서 영화는 표상 불가능한 것에 접근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헬프리스>의 야스오는 조직원과 경찰의 말로 전달되는 두목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차가운 피>에서 형사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영화의 화면은 이제 서부극적 손짓의 선명한 의미를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러하다. 카메라는 규정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오야마 신지는 서부극의 구조를 빌려오지만, 서부극적 영웅이 따르는 규칙에 포획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시선을 건넨다. 그는 웨스턴이 붕괴한 자리에서 서부의 흔적을 주시하는 관찰자다. 서부극의 인물이라면 손을 꺼내 행동하고, 지평선으로 멀어지며,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아오야마의 인물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손을 잃었거나, 화면 내부의 중력에 붙잡혀 있다. 그들은 서부극이라는 기원적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는 얼룩을 간직한다. 그들의 시선이 하늘이라는 추상적 원경을 향할 때마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을 가리키는 구조물이 침입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아오야마의 인물은 그토록 간단하게 신화적 배경과 결합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크기의 버스를 몰고 세상의 바깥으로 이동을 멈추지 않는 <유레카>의 작은 공동체만이 좌표를 알 수 없는 경유지에서 거대한 암석을 발견할 뿐이다. 하지만 그 희박한 순간에서조차 영화는 하늘이 화면을 차지하기 전에 장소를 이동해버린다. 태양과 원 서부극에 근접하려는 강박적 한계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담아내는 하늘에는 또 다른 곤경이 주어져 있다. 일본에서 하늘을 비추는 것은 태양이라는 원의 모양을 목격하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오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구체 또는 원은 떠오르는 태양(일장기)으로 시작하는 안정된 눈이자 권력의 상징이며 오늘날 후지 TV 및 기타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상표로 부끄럽게 재현되고 있다.” 하늘에 떠오른 구체 또는 원은 국가권력의 상징이자 민족을 통합하는 표상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다. 아오야마는 그 표상을 두고 ‘부끄러운 재현’이라는 표현을 쓴다. 일본의 현실을 찍을 수밖에 없는 그의 영화는 부끄러움, 수치, 고통을 포함하는 추한 경험과 더불어 공존한다. 아오야마의 영화를 전후의 영화이자 사건 이후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통렬하게 다가오는 표현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덧대어진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을 외면할 수 없다. 아오야마는 오시마 나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 국기의 태양 부분을 검게 물들이거나(<소년>) “검은 태양이 떠오르네”라는 가사를 노래할 만큼(<일본춘가고>) 국가의 표상에 단호하게 파산 선고를 내리는 작가가 아니다. 혹은 아오야마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에 일본이라는 국가는 그런 공격을 받아낼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단지 웨스턴과 미국영화를 동경하면서도 일본이라는 낡은 태양 아래서 영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철저하게 실행할 뿐이다. 그것은 동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지역의 로케이션 촬영에 의존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일본영화’를 만드는 연출자의 조건에 대한 자각이다. 후지이 진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오야마의 독창적인 관점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서 비롯된다. <호숫가 살인사건>의 시체를 은닉하는 부모들이 말하듯이 아오야마가 이끌리는 인물은 스스로 자신들의 추함을 시인하고 떠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구체의 형상은 무정형의 하늘이 아니라 추한 기억을 품은 지면에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공중에 떠오른 비눗방울은 금세 터져 지상에 있는 자들을 적신다. <헬프리스>와 <차가운 피>에 나오는 터널의 형태, <호숫가 살인사건>의 시신을 빠트리는 거대한 호수, <도쿄 공원>에서 손가락을 들어 도쿄의 지도 위로 그리는 소용돌이 모양이 아오야마가 가리키는 지상의 구체 또는 원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원형은 <유레카>의 사와이가 나오키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공터를 도는 장면에서 그려진다. 아오야마는 탈것이 나오는 장면을 많이 찍었지만, 이 순간에 사와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터널을 가로지르거나, 거대한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과 더불어 지평선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다섯 명을 살해한 나오키를 태우고 아무도 없는 공터를 돌면서 하나의 원을 그릴 뿐이다. 그것은 도입부의 버스 납치 사건에서 공터로 나온 사와이와 버스 테러범 주변을 돌던 카메라 움직임과 정확히 조응한다는 측면에서 잊을 수 없는 움직임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상실의 순간을 비추던 움직임은 큰 원을 돌아 폭력을 저지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구제의 몸짓으로 되돌아온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원운동은 마찬가지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살인자인 나오키를 포용하는 동작으로, 기묘한 유사성을 안고 반복된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의 외침에서 제목을 빌려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도 한 인물 주변으로 원운동을 하는 카메라워크가 나온다. 자살 충동 바이러스가 만연해 있는 근미래에 병에 걸린 소녀는 어느 마을로 찾아온다. 그곳에 사는 무명 음악가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구름과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눈을 가린 소녀의 귀에 소리가 닿는다면 기적 같은 회복이 발생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희미한 가능성을 향해 카메라는 눈을 가린 소녀의 주변에서 원을 그린다. 이때 화면의 배경인 서부극풍의 신화적 지형은 영화의 불투명한 믿음이 투영된 무대가 된다. <유레카>에서 사와이는 나오키에게 “꼭 죽지 말고 살아라.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라고 당부했지만, 영화는 그 말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단지 아오야마는 카메라 앞에 놓인 하늘과 지면, 그 사이를 잇는 지평선에 인물의 몸짓과 소리가 남겨지는 것을 비춘다. 원으로 회전하는 움직임의 여백에서 그들의 몸짓과 소리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세계의 파국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우회하고 변형되기를 반복하는 구체의 형상은 태양 아래 놓인 세계의 현실적 기록을 넘어선 잠재적 세계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패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미래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아오야마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를 예감케 한다. 그 미래의 가능성이란 반복건대, 지상에서 형성되는 구체와 원형의 표상적 기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규정되지 않는 표상 앞에 선 영화의 저항이란 이러하다. 터널을 통과하기 <헬프리스>의 후반부에 겐지는 장애가 있는 야스오의 여동생 유리를 태우고 터널을 통과한다. 터널은 어둠으로 막힌 벽이 아니라 마치 비어 있는 공간처럼 바깥으로 열린 투명한 통과지점이 된다. 시선은 끝까지 열려 있고, 어둠을 통과하면 세계의 빛이 나타난다. 아오야마는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이 새겨져 있던 시기를 터널의 어둠 속에서 통과해나간다. 이 장면을 조명하는 어둠과 빛의 짧은 교차에서 기나긴 흑백의 시간을 마치고 색채를 회복하는 <유레카>의 여정이 암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터널의 어둠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도쿄 공원>에서 의뢰를 받고 어느 여인의 사진을 찍는 코지는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이복형제 누나를 똑바로 바라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하면서도 정작 타인을 바라본 적 없는 코지는 현실과 이미지의 경계에서 회전하는 소용돌이에 갇혀 있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실패하고 타인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데 붙들린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는 무력한 결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오야마 신지는 ‘~을 할 수 없다’는 수동적 자각과 그런데도, 혹은 그러므로 ‘~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지적 개입을 오가며 일상적 공간과 서부극적 무대를 끝없이 배회해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미지의 터널을 통과하고 하늘을 바라보기 위한 위치를 조정하는 <구름 위에 살다>의 계단과 고층아파트는 새로운 질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질문의 답을 개진하기 전에 아오야마 신지는 대답을 멈췄다. 하지만 중단되어버린 터널의 여정을 되짚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가늠해보는 희망의 진술이다.

K콘텐츠, 국제 에미상에서도 통했다

지난 9월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 이어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50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도 한국 콘텐츠가 활약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공로상을 받고, KBS2 드라마 <연모>가 한국 드라마 최초로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수상한 것. 세계 3대 방송상으로 꼽히는 국제 에미상은 미국을 제외한 나라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공로상은 방송산업 부문에서 전세계적으로 크게 기여한 이에게 수여된다. 미국 국제TV예술과학아카데미(IATAS)는 이미경 부회장을 “25년 이상 한류를 이끌어온 선봉장으로, 한국 문화와 미디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 부회장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고 2020년부터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이사회 부의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더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이어나가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은빈 주연의 <연모>는 브라질의 <누스 템푸스 두 임페라도르>, 스페인의 <도스 비다스>, 중국의 <유 아 마이 히어로>를 제치고 영미권 외 드라마를 통칭하는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수상했다.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로 버려졌던 아이가 남장한 왕세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으로, 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TV쇼 부문 글로벌 톱10(4위)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이날 시상식에선 Apple TV+ 오리지널 시리즈 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선균, 시상자로 나선 배우 송중기, 배우 임시완 등도 쾌거의 순간을 함께했다.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9월13일 누벨바그의 거장 장뤽 고다르가 91세로 별세했다. ‘영화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현대영화는 고다르와 함께 문을 열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20세기의 영화도 문을 닫았다. 그런만큼 그동안 고다르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동안 몇 차례의 기획전이 열렸다. 올해 고다르를 기리는 마지막 인사로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이 2022년의 끝자락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문화협동조합 ‘씨네포크’에서 준비한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은 오는 12월7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롯데시네마 광복점, 대구 롯데시네마 동성로점, 서울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차례로 상영될 예정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비롯해 1960년대 누벨바그 시기의 걸작들과 1970년대 정치적 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를 추구한 1980년대 작품들, 고다르의 필생의 역작 <영화의 역사>까지 총 13편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에 앞서 12월 1일 오후 4시에는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34 북카페 파오에서 미디어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임재철 이모션픽쳐스 대표, 김이석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연구소장, 정진아 씨네포크 프로그래머가 참석하여 이번 특별전의 취지와 의미를 소개했다. 임재철 이모션팍쳐스 대표는 이번 특별전이 비단 고다르를 기리는 것을 넘어 한국영화문화 전반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전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고다르의 작품이 리얼타임으로 상시 상영되고 있어서 따로 추모 기획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네멋대로 해라> 이후 고다르에 대한 단절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만남의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뜻을 모았다.” 정진아 씨네포크 프로그래머 역시 “그동안 회고전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이번 특별전은 영화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협동조합 차원에서 자발적인 힘이 모여 만들어진 자리하는 점이 각별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은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다르의 대표작을 소개하여 고다르가 걸어온 궤적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하고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다. 김이석 동의대 교수는 “고다르의 죽음은 무게가 남다르다. 예정보다는 늦었지만 고다르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다시 본다는 것, 그리고 이 기회를 나눈다는 건 시네필로서 일종의 책무처럼 다가온다”며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고다르 영화는 시각적으로 풍성하고 의외로 유머도 풍부하다. 극장에서 고전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며 젊은 시네필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안녕, 고다르. 그렇게 고다르는 떠나보내는 작별인사 ‘안녕’은 이제 고다르를 새롭게 만나는 반가운 인사 ‘안녕’으로 이어질 준비를 마쳤다. 상영작 소개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1960) 출연 | 진 세버그, 장 폴 벨몽도 | 90min |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0년 베스트10 (3위) 현대영화의 출발을 알린 고다르의 기념비적 장편 데뷔작. 이후 고다르 작품의 주인공으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된 장 폴 벨몽도와 <슬픔이여 안녕>(1958)으로 데뷔한 진 세버그가 주연을 맡았다. 1960년 공개되자마자 참신한 스타일(전설적인 점프 컷의 사용)과 대담한 촬영(자연광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은 거친 흑백 영상)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기관총부대> Les Carabiniers (1963) 출연 | 마리노 마세, 알베르토 주로스 | 75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3년 베스트10 (8위) 벤자민 조폴로의 원작 희곡을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구술한 후 장 그뤼오가 각본으로 만들었다. 테마는 전쟁 그 자체지만 고다르답게 전쟁영화를 연출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하나의 우의로서 영화를 파악하고 있다. 시대와 장소 등 부대적인 상황을 철저히 배제하고 게릴라적으로 전쟁을 묘사한 점에서 고다르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경멸> Le Mépris (1963) 출연 | 브리짓 바르도, 잭 팰런스, 미셸 피콜리 | 103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3년 베스트10 (1위) 이탈리아의 현대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고다르가 대담한 각색을 시도했다. 고다르는 나폴리의 카프리섬에 세워져 있는 옥상 계단이 인상적인 빌라 말라파르테를 무대로 삼았다. 프랑스 작가 폴과 아내 카미유, 부부의 애증이 엇갈리고 증폭되면서 그것이 바로 영화의 성립 과정 자체가 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걸작이다. <국외자들> Bande à part (1964) 출연 | 안나 카리나, 클라드 브라소, 다니엘 지라드 | 95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4년 베스트10 (1위) 고다르 자신은 실패작이라고 시인했지만 열광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작품이다. 어두운 피카레스크 소설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당돌하게 시작되는 댄스 장면이나 비스트로에서 세 사람이 갑자기 1분간 침묵하기로 하면 배경음마저 들리지 않게 되는 시퀀스 혹은 세 사람이 루브르 박물관을 초특급으로 달려가 관람하는 시퀀스 등 우스꽝스럽지만 고다르적인 매혹적인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 <알파빌> Alphaville (1965) 출연 | 에디 콘스탄틴, 안나 카리나, 아킴 타미로프 | 99min |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5년 베스트10 (5위) SF와 필름 누아르 장르가 뒤섞인 독특한 작품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선보인다. 초현실주의 작가 폴 엘뤼아르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 늦은 밤, 기자 이반이 미래 도시 알파빌에 도착한다. 사실 그의 정체는 미국인 사립탐정 레미로 알파빌에 침투한 비밀 요원이다. 알파빌을 창조한 폰 브라운 교수를 암살하고 그가 만든 인공 지능 컴퓨터를 파괴하려 한다.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출연 | 장 폴 벨몽도, 안나 카리나, 레이몽 드보 | 110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5년 베스트10 (1위) 라이오넬 화이트의 범죄 소설을 바탕으로, 고다르가 이야기의 틀만 빌려 자유롭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넘쳐흐르는 햇빛과 자유롭고 느긋한 영상의 매혹은 누벨바그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라스트 신에서 장 폴 벨몽도와 안나 카리나의 목소리로 언급되는 랭보의 시 한 구절과 함께, 고다르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누벨바그의 대표작이다. <남성, 여성> Masculin Féminin (1966) 출연 | 장 피에르 레오, 샹탈 고야, 마를렌 조베르 | 105min | 베를린영화제 3개 부문 수상(장 피에르 레오 남우주연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6년 베스트10 (4위) 1960년대 중반, 모든 것이 격동의 신호를 보내던 시대 속에서 파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사상과 행동을 15개의 에피소드로 그려낸다. 시네마 베리테, 즉 다큐멘터리 터치의 영상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묘사되며,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폴과 마들렌의 청춘상은 ‘혼돈의 60년대’를 잘 전해준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1967) 출연 | 마리나 블라디, 아니 뒤페레, 로제 몽소레 | 87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7년 베스트10 (9위) 1966년 여름, 파리 외곽의 공단 주택에 사는 유부녀 줄리엣은 남편을 속이며 매춘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의 행위를 통해 소비사회의 현재를 바라보는 동시에 배우로서의 마리나 블라디, 혹은 파리라는 도시와 하나된 그녀의 초상을 포착한다. 고다르의 초기작 중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작품으로 개인과 사회라는 두 요소가 밀접하게 얽혀간다. <만사형통> Tout va bien (1972) 출연 | 이브 몽탕, 제인 폰다, 비토리오 카프리올리 | 95min | 베를린영화제 포럼 오브 뉴시네마 부문 수상 1968년 이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영화 제작을 거부한 고다르가 장 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고, 영화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던 시기의 작품. 전직 영화감독과 그 연인인 미국 저널리스트가 정육공장 파업 현장에 취재하러 갔다가 봉쇄 중인 공장 내에서 신체적이고 사상적인 다양한 체험을 하며 서로의 생활과 관계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Sauve qui peut (la vie) (1980) 출연 | 이자벨 위페르, 나탈리 베이, 자크 뒤트롱 | 87min | 198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고다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다. 고다르가 정치적인 비디오 작업을 하던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극 영화로 돌아와 만든 작품으로, 스스로 ‘두 번째 데뷔작’으로 칭했다. 텔레비전 제작자인 폴은 편집 일을 하는 드니즈와 연인 사이다. 성과 없는 일에 지친 드니즈는 폴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세 인물의 일상을 통해 사랑과 섹스, 인생과 영화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탐정> Détective (1985) 출연 | 클라드 브라쇠르, 나탈리 베이, 조니 할리데이 | 90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85년 베스트10 (2위) 파리의 특급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 형사 뇌브는 에밀과 프랑수아 부부, 복싱 프로모터 짐 사이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스타들의 카리스마와 위대한 고전 스릴러들에 대한 기억 위에 세워진 영화는 고다르의 로맨틱한 비관주의와 유머로 유지된다. 존 카사베츠,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드거 G. 울머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영화라는 사소한 비즈니스의 흥망성쇠> Grandeur et décadence d'un petit commerce de cinéma (1986) 출연 | 장 피에르 레오, 마리 발레라, 장 피에르 모키 | 90min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소설 영화화. 오랜만에 새 작품을 준비 중인 영화감독 가스파르는 오디션을 진행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편 제작자 장은 투자자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배우가 꿈인 아내 유리디스의 소원을 들어주려다 살해당한다. 예술에서 진실과 기만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고다르 특유의 스타일과 이미지 실험으로 풀어낸다. <영화의 역사> Histoire(s) du cinema (1998) 출연 | 장 뤽 고다르, 알랭 퀴니, 줄리 델피 | 269min 고다르가 1989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0년이 지난 후에야 완성한 프로젝트. 269분에 이르는 작품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은 두 편(A, B)으로 나뉘어져 총 8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00년에 이르는 영화의 역사(들)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20세기 예술에 대한 고다르식 성찰과 비평이다. 고다르의 후기 영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뽑힌다.

[비평] ‘메모리아’, ‘카메라-눈’ 이후 ‘사운드-눈’에 관한 단상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는 놀라운 장면이 담겨 있다. 놀라움은 단지 감탄의 표현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자극에 의한 원초적 반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이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공포영화에 맞먹는 서늘함을 지닌다. 다만 유령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여느 공포영화의 문법과 갈라진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거나, 혹은 생전 그대로의 목소리로 나타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유령과 어울려 대화하고 시선을 맞추며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나아가 인물이 복제된 듯 분화하는 순간도 있다. 외출을 준비하던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유령이 방금 자신이 있었던 곳에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함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섬뜩하고 놀라운 동시에 그가 출몰한 곳이 텔레비전 앞이기에, 매체에 영혼을 빼앗긴 존재의 클리셰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유령을 마주한 통은 유령에게 자리를 내어준 채, 쫓겨나는 모양새로 서둘러 퇴장한다. 유령의 표현과 이를 대하는 반응에 녹아든 은근한 유머는 놀라움의 대상을 친밀함의 대상으로 잠재시킨다. 위라세타쿤의 전작에서 놀라움이 이미지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메모리아>에서 놀라움은 단발의 소리에 압축된다. 아직 어두운 가운데 커튼이 드리운 창문과 그 앞에 잠든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러던 중 어딘가에서 둔탁하고 커다란 단발성 굉음이 들린다. 그때까지 실루엣만 보였던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몸을 일으킨다. 여느 영화라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탐문했겠지만, <메모리아>는 정체를 드러내기를 유예한다. 소리의 원인이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소리의 반응체처럼 보이는 인물이 즉시 소리의 정체를 찾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제시카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피는 대신 그저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는 제시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제시카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상으로 다시 등장할 때까지 제시카의 움직임과는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패닝한다. 이는 잠과 깨어남 사이의 혼곤한 상태를 표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유예의 동선을 보여준다.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방금 일어난 현상에 집중해보면 이 시퀀스는 어떤 소리가 정지된 이미지를 깨웠음을 보여준다. 곧 사운드가 이미지를 깨운다. 사운드가 이미지에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설정은 이미지에 비해 덜 중시되어온 사운드를 전면화하며, 그와 동시에 비가시적인 대상인 사운드를 가시화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사운드는 흡사 바람의 작용이 그렇듯 스스로 움직이는 대신 무언가를 움직이게 만든다. 소리에 영향을 받는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다음 숏에서 한밤중 주차된 차들이 동시에 경고음을 작동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차량 경고음은 사람이나 사물에 의한 접촉이 발생했을 때 작동되지만, 여기에서 원인 제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에 이어져 소리가 단순히 제시카의 내면에 울리는 폐쇄적인 소리가 아니라 편재한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란한 자동차 경고등의 움직임 사이로 조그맣고 빨간 빛이 포착된다. 그 빛은 소리가 울릴 때 나타났다가 소리의 중단과 함께 사라진다.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미약한 그 빛은 의도적으로 삽입된 어떤 장치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포착된 현상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를 자극하는 영화에서 발견된 두개의 빛은 사소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작은 신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두개의 나란한 작은 빛은 <엉클 분미>에서 정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던 존재가 빛내던 빨갛고 둥근 두눈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분명한 존재의 형상은 아니지만, 두개의 점만으로 존재를 떠올리는 일은 위라세타쿤의 영화라면 용인될 만한 상상이다. 실제로는 영화에 접속하려고 애쓰는 성실한 관객이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잡게 되는 연약한 지푸라기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주의! 녹음 중 관객을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인 두개의 붉은 점이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가정할 때, 그 시선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 시선의 모양은 <엉클 분미> 속 유령의 시선과 유사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영화 속 장면은 <열대병>의 시선이다. <열대병>의 오프닝 크레딧이 제시되는 사이, 그 오른편에는 배우(반롭 롬노이)가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담긴다. 이 시퀀스는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난폭하게 교차하는 시퀀스 다음 등장했기에 더욱 각별하다. 시선의 대상에서 소외된, 혹은 소외되어야만 하는 카메라가 비로소 시선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마치 카메라가 눈길을 주고받는 은밀한 대상인 것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 보며 흘깃거리기를 반복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 뒤의 감독을 가리키거나 그 너머의 관객을 바라본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 반(半)존재 혹은 중간 존재를 예고하는 대상으로 카메라를 보여준다. 반면 <메모리아>의 붉은 점은 중간 존재보다 더 모호하고, 비인칭적이다. 붉은 점을 녹음 중이거나 촬영 중임을 표시하는 신호라고 이해해본다면, 두개의 빨간 눈은 카메라나 붐마이크를 대체한 영화 제작 현장의 표식이다. <메모리아>에서 녹음실은 영화 제작 현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장소인데, 영화는 녹음이 이뤄지는 부스 안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믹싱이 이뤄지는 바깥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그곳은 출입이 통제된 곳이 아니라 원한다면 열린 문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이러한 설정은 위라세타쿤이 견지해온 영화 만들기 방식을 암시한다. 감독의 초기작인 <정오의 낯선 물체>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영화 만들기의 기원에 관한 느슨한 반영일 수 있다. 모호한 붉은빛은 그 자체로 사운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운드적 시선처럼 보인다. 소리의 정체나 본질을 찾는 대신, 소리의 부피와 질감을 묘사해야 하는 제시카의 상황은 사운드의 미묘함과 포착의 난감함을 드러낸다.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이 소리를 들려주면 제시카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묘사하고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다. 이러한 작업은 영화를 위한 사운드를 찾는 과정과 일치한다.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 역시 영화 <메모리아>의 음향효과의 일부임을 염두에 둘 때, 영화 제작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는 작업처럼도 보인다. 이때 관객은 제시카와 함께 소리를 체험한 바 있기 때문에 소리를 기억하는 일에 관한 자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했던 소리는 방금 들린 믹싱된 음향과 얼마나 유사한가. 그 소리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목적은 단지 사운드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는 비슷한 소리를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소리를 뒤섞는 데로 나아간다. 이는 관객에게 필요한 사운드 이후의 시간을 암시한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묘사한 소리를 찾아주는 데서 나아가 그 소리를 혼합해 만든 미지의 음악을 제시카에게 들려준다. 이 음악은 에르난의 휴대전화와 블루투스로 연결된 헤드셋으로 제시카에게만 송출되기 때문에 화면 바깥의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제시카에게 들리는 모든 소리를 관객이 듣는다는 가정은 위태롭게 된다. 이는 제시카만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이 담긴 레스토랑 시퀀스와 대조된다. 두 장면을 번갈아 생각할 때, 관객은 제시카에게 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현장음을 듣는다는 가정 모두 애매해진다. 그렇다면 소리의 진원지는 화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화면 바깥, 관객과 가까운 어딘가일 수 있다. 제시카가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잠든 기억의 소리를 듣는 안테나임이 드러나는 후반부를 염두에 둔다면 터무니없는 가정만은 아니다. 제시카가 듣는 굉음은 내부의 소리가 아니라 외부의 소리다. 다만 그 소리는 제시카에게만 들린다. 사운드의 짧은 존재론 인식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할 때, 있음과 없음의 상태는 빛과 연관된다. 빛을 받았을 때는 보이는 것이 빛을 받지 않았을 때는 시야에서 감춰진다. 비존재는 눈에 잠시 보이지 않을 뿐 늘 존재하는 상태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상태를 소리의 차원에서 풀이해보면 이미지의 차원에서 가능한 영속을 사운드의 차원에 적용하기 어려움을 알게 된다. 사운드의 지속을 상상하기보다 난감한 건, 지속을 재현하는 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듣는 이에게 고문이 된다. 사운드의 존재 양식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밤벌레 소리로 풀이된다. 밤벌레 소리는 시야가 제한될 때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리의 차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밤벌레는 소리의 지속이 아닌 중단의 순간에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엉클 분미>에서 전기채로 벌레를 잡는 장면에서 ‘타다닥’ 하고 울리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내는 단발의 비명과도 같다. 소리와 함께 존재감이 드러나는 동시에 대상은 사라진다. 이는 음성 존재가 지닌 가혹한 운명을 요약한다. 사운드는 존재하는 동시에 곧 사라져야 한다. <메모리아>에서 소리는 소음의 상태(단발의 굉음)이거나 음악의 상태(에르난의 제시카만을 위한 음악, 합주실의 음악)로 거칠게 분류된다. 영속하는 존재를 나타내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요소는 낮과 밤이라는 자연현상과 조명의 켜고 끔이라는 외부 작용에 의해서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생리현상에 의한 잠이라는 현상이 존재를 켜고 끄는 중요한 매개 변수가 된다. 특히 잠(혹은 잠에 준하는 행위)은 영속하는 사운드를 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 각별하다. 잠은 위라세타쿤이 작품을 통해 애정을 드러내온 행위인데, <메모리아>는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시작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영화는 소리에 의해 깨어난 제시카의 여정을 통해 사운드가 영속할 수 있는 다른 차원과 조건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억하려는 존재의 의지 혹은 기억하는 상태이다. 제시카가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에르난을 만나는 장면 이후 제시카의 모든 행위는 소리를 기억하기 위한 여정과 행위로 번역된다. 그중 제시카가 오래된 유골의 두뇌 부위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왜 눈이나 입의 구멍이 아닌 두뇌의 구멍인가. 사운드로 촉발된 영화를 상상할 때 중요한 지점은 받아들이는 반응체, 즉 두뇌이다. 악귀를 보내기 위한 풍습으로 새겨진 구멍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잠재된 이야기에 관한 상상을 촉발하듯 사운드는 부재로 인해 기억에 저장된다. 사운드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일은 곧 관객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아이’ 이론을 주창하고 이를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녹여내며 카메라를 든 촬영자로서의 정체성과 카메라가 새롭게 연 시각적 가능성을 예찬했을 때, 카메라가 지닌 하나의 눈은 그에 대응할 또 다른 눈을 줄곧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는 사운드나 관객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사운드적 인식이 곧 관객을 중심에 둔 영화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시간성과 허구 사운드와 이미지의 자리를 이리저리 바꿔보면서 기존의 인식을 재고하게 한 영화는 영화의 현장성 혹은 실시간성에 관한 의문을 숙제처럼 남겨둔다. 롱테이크가 지닌 실시간성은 영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다. 롱테이크는 진실을 보존하는 기법이었지만, 이음매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게 이어 붙여 하나의 숏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인 원 컨티뉴어스 숏이 그렇듯 기술을 통해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롱테이크는 사실성을 담보하는 기법보다 허구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진실의 기법으로서의 롱테이크는 완전히 폐기되진 않았다. 대신 질문이 남았다. 무엇을, 왜 롱테이크로 보여줄 것인가. 혹은 롱테이크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위라세타쿤은 믿을 수 없는 두개의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하나는 눈을 뜬 채 잠든 사람의 얼굴을 그가 깨어날 때까지 보여준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만난 사운드 엔지니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혹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미지적 분신의 차원 대신, 이름과 호명의 차원에서의 분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혹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유령이나 신처럼 존재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에르난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눈을 뜬 채 순식간에 잠이 들고, 카메라는 눈뜬 채 잠든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 얼굴은 숨도 쉬지 않고 미동도 없기 때문에 죽었거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 숏은 한 사람이 눈을 뜨고 정지해 있기에는 너무도 오래 지속되기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이 피어오른다. 물론 그 시간은 신기한 장면을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된 관객이 자신을 들여다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이와 비슷한 감정은 숲에 가려져 보호색을 띤 비행 물체가 막 이륙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순간에도 겪게 된다. 그래픽 이미지임이 분명한 비행체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 기체를 내뿜었을 때 울리던 육중한 소리는 제시카와 관객이 오랫동안 찾아온 이명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발견의 기쁨이나 정체를 알고 난 뒤의 허탈감보다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게 된다. 비행물체가 실제의 풍경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도넛 모양의 기체 잔여물이 천천히 옅어지며 파장이 잦아들 때, 그 지속은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는 카운트다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낯선 비행체라는 도달점은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사람들이 이어 들려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가 결국 외계인의 이야기에 도달했음을 기억하게 한다. 이야기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과장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총체로서 외계를 상상하는 것일 테다. 이야기가 나아가고 이미지가 따라잡으며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서, 허구가 실제를 비웃는 조작의 시대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쯤은 간단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이미지로 현혹하는 시대에 저항하는 방식은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새기는 것이 아닐까. 영화 속 비행체가 터무니없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가 지닌 과오나 실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용인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발굴하고 실험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뒤라스×고다르 대화>

대담 기사 읽기를 즐긴다. <씨네21>에도 다양한 기획의 대담 기사가 실리는데 보통의 인터뷰와 대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의 점으로 대화가 모이지 않고 목적 없이 넘실대는 말의 틈새에서 저마다의 진의를 파악하는 재미? <뒤라스X고다르 대화>는 장뤽 고다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작품 세계를 구축한 후 성사된 만남에서의 대화를 글로 엮어낸 것이다. 1997년, 1980년, 그리고 1987년 세번에 걸쳐 진행된 뒤라스와 고다르의 대화는 서로의 작품 세계를 염탐하듯 시작한다. 뒤라스와 고다르 모두 연출자이기에 각자의 최신작에 대한 소회로 문을 연 대화는 점차 물감이 강물에 퍼지듯 마구잡이로 확대된다.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견해 차이를 거쳐 영화와 텔레비전, 당시 활동 중이던 다른 예술가들의 근작에 대한 소회, 문화와 대중에 대한 견해, 영화 이미지 재현의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등 대화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튄다. 가식적인 존중과 배려보다는 대담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예술성이 이 대화의 백미인데, 아래의 문장이 뒤라스-고다르의 대담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어 옮긴다. “콜레트 펠루스는 <오세아니크> 프로그램 녹화 중에, 그들이 미소 또는 침묵 속에서 ‘말하지 않음’으로 서로 연결되거나, 수줍음 혹은 오만함, 망설임 혹은 열광을 가로질러 그 뒷면에서 대화하는 걸 보았다. 그들은 더이상 ‘일자’와 ‘타자’가 아니라, 사라지다시피 했으며, ‘그들의 만남’만 남았다고 회상했다.”(106쪽) 뒤라스의 소설을 읽지 않고, 고다르의 영화를 본 적 없는 독자에게도 둘의 대화가 흥미롭게 읽힐까? 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글로 이뤄져 있음에도 종종 영상을 떠올리게 하고 이미지를 찾아보게 만든다. 길고 긴 주석이 이해를 돕지만 대화를 엿듣다 보면 언급된 작품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로써 이 대화는 한층 풍성해지고 독자는 객석이 아니라 무대 위 둘 사이에 앉게 된다. 텍스트의 표면을 넘어 당대의 환경과 두 예술가의 작품 등의 맥락을 잡는다면 진의에 가까워진다. 견고한 세계를 가진 두 예술가가 서로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며 오해하고 충돌하며 교차점을 찾는 대담의 묘미. 그래, 대담이란 이렇게 재미난 것이었다. 18~19쪽 고다르: 우리는 조금은 적대적인 형제와도 같군요, 제 잘못일 수도 있지만. 저는 글쓰기를 증오하거든요.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오는 순간을요. 글쓰기는 늘 그렇습니다⋯. 당신의 경우, 만일 글이 없다면, 글이라 불러야 할지 텍스트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뒤라스: 나는 쓰여진 것이라 부르지, 텍스트 또는 쓰여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