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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비평] 아오야마 신지 감독론: 아오야마 신지, 혹은 하늘을 바라보는 영화의 곤경

아오야마 신지의 장편 데뷔작 <헬프리스>의 도입부는 하늘에 떠오른 카메라의 공중 촬영으로 시작한다. 카메라는 하늘 위에서 심하게 흔들리며 현기증이 일 듯한 위태로운 움직임으로 기타큐슈의 풍경을 내려다본다. 이 매혹적인 장면은 단순히 한 편의 영화를 여는 근사한 시작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에서 시작된 작가의 여정이 <구름 위에 살다>라는 또 다른 하늘의 영화를 끝으로 이르게 종결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이라면 아오야마의 영화에 침범하는 구름과 하늘에 시선을 뺏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늘은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주의 깊게 관측되는 대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서 집 안에 누워 있던 겐지(아사노 타다노부)가 창밖을 바라보는 장면 뒤에 이어붙는 컷은 그의 시선으로 보이는 텅 빈 하늘이 아니라 어느 공장의 외경을 비추는 무인의 삽입 쇼트다. 시선의 물리적 연결을 고려한다면 프레임에 하늘을 가득 담아낸 장면이 나올 법하지만, 공장 주변의 수직적 건축물을 담아낸 쇼트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헬프리스>의 초반부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특권적인 밀도를 갖는 공장의 무인 쇼트는 광활한 하늘과 구름의 자리를 대체해 손쉽게 화면을 내어주지 않는 존재감을 의미심장하게 드러낸다. <유레카>에서 사와이(야쿠쇼 코지)가 이혼한 아내를 만나 대화하던 도중 카메라가 왼쪽으로 이동해 창밖의 하늘을 보여줄 때도, <도쿄 공원>에서 코지(미우라 하루마)가 미행 중인 여자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하늘과 구름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사태만큼은 철저히 회피된다. 그들이 바라본 하늘에는 어김없이 도심의 고층 건물과 탑이 관측되고 있어, 완벽하게 하늘로만 이루어진 화면이 구성되는 것을 끝내 방해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아무런 장해물 없이 온전히 하늘과 대면하는 순간을 상상하기란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드넓은 하늘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제공할 수 있는 치명적인 매혹이자 백색 스크린을 바라보는 데서 성립하는 영화 체험의 필연적 조건을 상기시키는 형상이다. 그러나 아오야마 신지는 프레임에 하늘이 가득 채워지는 순간마다 일본에 지어진 현대적 건축물의 수직선을 불러들인다. 그는 화면 내부에 현실을 환기하는 범용한 선들을 틈입시켜 무정형의 하늘 자체가 카메라에 포착되는 것을 강박적으로 저지한다. 서부극의 하늘 거대한 표면으로서의 하늘을 비추는 데 있어 최적의 조건을 갖춘 무대는 물론 서부극일 것이다. 신화적 구조를 배면에 두고 황무지를 배회하는 웨스턴의 풍경 상단에는 장대한 하늘과 평온한 구름이 언제나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서부극의 하늘이 전하는 아름다운 감촉을 아오야마 신지가 의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잘 알려졌다시피, 아오야마는 웨스턴의 법칙이 영화를 지배하는 원리라고 말하는 작가다.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마을에 도착한 서부극의 주인공은 외부의 적을 방어하고 공동체를 수호한 뒤 그곳을 떠난다. 서부극을 향한 동경과 무의식은 그의 영화를 관류하는 강력한 기제다. 하지만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서부극의 형상을 구축하는 작업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범용한 도심 공간 속에서 서부극의 거대한 풍경에 접근할 수 있는가, 일본을 무대로 삼은 영화가 서부의 신화적 공간을 이루는 황무지와 암석을 묘사할 수 있는가, 라는 불가피한 질문을 불러온다. 아오야마의 영화는 사건 이후의 영화다. <헬프리스>는 출소한 야쿠자 야스오가 고향에 돌아오는 플랫폼 장면에서 <말 없는 사나이>의 존 웨인이 이니스프리로 돌아오는 첫 장면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 묘사한다. 하지만 돌아온 자에게 안식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야스오가 찾는 조직 두목은 일찌감치 죽어버렸고, 그는 두목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 채로 두목의 죽음을 주장하는 동료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한다. 마침내 두목이 죽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잘린 팔과 마약을 남기고 자살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사건으로 처리해야 할 두목의 죽음은 이미 해소되어버렸다. 웨스턴이 쇠락해버린 영화사의 시간에 연출자로 불시착한 아오야마 신지처럼, 야스오는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자다. 존 포드의 인물이 고독하지만 분명한 몸짓으로 원거리의 하늘을 바라보며 돌멩이를 던진다면, 아오야마의 인물들에게 하늘 위의 구름을 올려다보며 명확한 행위를 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애매한 몸짓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놓치고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차가운 피>의 형사 사가는 터널에서 도주하는 범인이 쏜 총탄에 맞아 총을 도난당하고, <헬프리스>에서 오른쪽 팔이 잘린 야스오는 손에서 굴러떨어진 술병을 줍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슌스케는 시체의 지문을 지우는 데 사용한 라이터를 잃어버린다. 그들은 어긋난 시간과 분실된 표상의 교차로 이루어진 무대에서 머뭇거린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인물의 손에 쥐어진 사물은 그 손의 주인이 갖는 정체를 규정한다. 로베르 브레송에 빗대어 말한다면, 어느 남자가 소매치기라는 것을 알기 위해선 그의 손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봐야 한다. 영화적 논리로는 소매치기라서 물건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물건을 훔치는 동작에서 소매치기라는 정체성이 각인되는 것이다. 서부극에서라면 주인공은 손에 든 권총으로 적을 해결해야 한다. 순식간에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주인공의 목숨과 공동체의 운명이 위험하다. 웨스턴의 법칙은 행동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부극적 인물의 손은 빠르게 사물을 들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서부극의 손은 순식간에 판단하고 해결한다. 영화는 그 짧은 손짓에서 개인과 국가와 공동체를 가로지르는 선명한 의미를 획득한다. 아오야마 신지는 반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시간을 도입한다. <헬프리스>의 서사에는 행동하는 인물인 야스오가 있지만, 다른 축에 행동하지 않는 겐지가 있다. 아오야마의 영화가 전하는 특별함은 행위를 규정하는 사물로부터 인물의 손을 분리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사물이 손에서 빠져나가고, 심지어 인물의 잘린 팔이 드러날 때, 영화의 표상은 그들을 규정하는 체계를 상실한다. 총을 들고 범인을 쫓는 사가는 형사다. 그러나 총을 분실하고 한쪽 폐에 손상을 입은 사가는 형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버스를 운전하는 사와이는 운전기사다. 그러나 끔찍한 버스 납치 사건을 겪고 살아난 사와이는 운전기사가 아닌 무엇이 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인물은 능동적으로 사건에 개입한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노출된다. 그들이 영화적 무대에 도착하기 전에 일찌감치 누군가 죽어 있거나 살인이 벌어진다. 그러므로 카메라 렌즈에 남겨지는 것은 범용한 의미와 맥락으로 규정할 수 없는 타인의 면모다. 그들이 화면에 돌아오면서 영화는 표상 불가능한 것에 접근하는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헬프리스>의 야스오는 조직원과 경찰의 말로 전달되는 두목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차가운 피>에서 형사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영화의 화면은 이제 서부극적 손짓의 선명한 의미를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이러하다. 카메라는 규정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아오야마 신지는 서부극의 구조를 빌려오지만, 서부극적 영웅이 따르는 규칙에 포획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시선을 건넨다. 그는 웨스턴이 붕괴한 자리에서 서부의 흔적을 주시하는 관찰자다. 서부극의 인물이라면 손을 꺼내 행동하고, 지평선으로 멀어지며, 하늘을 바라볼 것이다. 아오야마의 인물들은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손을 잃었거나, 화면 내부의 중력에 붙잡혀 있다. 그들은 서부극이라는 기원적 이미지에 도달할 수 없는 얼룩을 간직한다. 그들의 시선이 하늘이라는 추상적 원경을 향할 때마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을 가리키는 구조물이 침입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아오야마의 인물은 그토록 간단하게 신화적 배경과 결합할 수 없다. 터무니없는 크기의 버스를 몰고 세상의 바깥으로 이동을 멈추지 않는 <유레카>의 작은 공동체만이 좌표를 알 수 없는 경유지에서 거대한 암석을 발견할 뿐이다. 하지만 그 희박한 순간에서조차 영화는 하늘이 화면을 차지하기 전에 장소를 이동해버린다. 태양과 원 서부극에 근접하려는 강박적 한계뿐만 아니라 아오야마가 담아내는 하늘에는 또 다른 곤경이 주어져 있다. 일본에서 하늘을 비추는 것은 태양이라는 원의 모양을 목격하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오야마는 이렇게 말한다. “구체 또는 원은 떠오르는 태양(일장기)으로 시작하는 안정된 눈이자 권력의 상징이며 오늘날 후지 TV 및 기타 텔레비전 네트워크의 상표로 부끄럽게 재현되고 있다.” 하늘에 떠오른 구체 또는 원은 국가권력의 상징이자 민족을 통합하는 표상이며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다. 아오야마는 그 표상을 두고 ‘부끄러운 재현’이라는 표현을 쓴다. 일본의 현실을 찍을 수밖에 없는 그의 영화는 부끄러움, 수치, 고통을 포함하는 추한 경험과 더불어 공존한다. 아오야마의 영화를 전후의 영화이자 사건 이후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통렬하게 다가오는 표현이다. 그는 과거로부터 덧대어진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을 외면할 수 없다. 아오야마는 오시마 나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 국기의 태양 부분을 검게 물들이거나(<소년>) “검은 태양이 떠오르네”라는 가사를 노래할 만큼(<일본춘가고>) 국가의 표상에 단호하게 파산 선고를 내리는 작가가 아니다. 혹은 아오야마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에 일본이라는 국가는 그런 공격을 받아낼 만큼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다. 아오야마는 단지 웨스턴과 미국영화를 동경하면서도 일본이라는 낡은 태양 아래서 영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철저하게 실행할 뿐이다. 그것은 동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 지역의 로케이션 촬영에 의존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일본영화’를 만드는 연출자의 조건에 대한 자각이다. 후지이 진시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오야마의 독창적인 관점은 “천황제나 국가권력이라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이 자신의 육체를 흐르는 피의 문제로 여긴 점”에서 비롯된다. <호숫가 살인사건>의 시체를 은닉하는 부모들이 말하듯이 아오야마가 이끌리는 인물은 스스로 자신들의 추함을 시인하고 떠안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구체의 형상은 무정형의 하늘이 아니라 추한 기억을 품은 지면에 있다. <새드 배케이션>에서 공중에 떠오른 비눗방울은 금세 터져 지상에 있는 자들을 적신다. <헬프리스>와 <차가운 피>에 나오는 터널의 형태, <호숫가 살인사건>의 시신을 빠트리는 거대한 호수, <도쿄 공원>에서 손가락을 들어 도쿄의 지도 위로 그리는 소용돌이 모양이 아오야마가 가리키는 지상의 구체 또는 원이다. 무엇보다 특별한 원형은 <유레카>의 사와이가 나오키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공터를 도는 장면에서 그려진다. 아오야마는 탈것이 나오는 장면을 많이 찍었지만, 이 순간에 사와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터널을 가로지르거나, 거대한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과 더불어 지평선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다섯 명을 살해한 나오키를 태우고 아무도 없는 공터를 돌면서 하나의 원을 그릴 뿐이다. 그것은 도입부의 버스 납치 사건에서 공터로 나온 사와이와 버스 테러범 주변을 돌던 카메라 움직임과 정확히 조응한다는 측면에서 잊을 수 없는 움직임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상실의 순간을 비추던 움직임은 큰 원을 돌아 폭력을 저지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구제의 몸짓으로 되돌아온다.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가져오는 원운동은 마찬가지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살인자인 나오키를 포용하는 동작으로, 기묘한 유사성을 안고 반복된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의 외침에서 제목을 빌려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에도 한 인물 주변으로 원운동을 하는 카메라워크가 나온다. 자살 충동 바이러스가 만연해 있는 근미래에 병에 걸린 소녀는 어느 마을로 찾아온다. 그곳에 사는 무명 음악가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구름과 지평선이 보이는 초원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눈을 가린 소녀의 귀에 소리가 닿는다면 기적 같은 회복이 발생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희미한 가능성을 향해 카메라는 눈을 가린 소녀의 주변에서 원을 그린다. 이때 화면의 배경인 서부극풍의 신화적 지형은 영화의 불투명한 믿음이 투영된 무대가 된다. <유레카>에서 사와이는 나오키에게 “꼭 죽지 말고 살아라.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라고 당부했지만, 영화는 그 말의 근거를 찾지 못했다. 단지 아오야마는 카메라 앞에 놓인 하늘과 지면, 그 사이를 잇는 지평선에 인물의 몸짓과 소리가 남겨지는 것을 비춘다. 원으로 회전하는 움직임의 여백에서 그들의 몸짓과 소리는 나타나고 사라진다. 세계의 파국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우회하고 변형되기를 반복하는 구체의 형상은 태양 아래 놓인 세계의 현실적 기록을 넘어선 잠재적 세계의 가능성을 환기한다. “패배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 미래에 이길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아오야마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를 예감케 한다. 그 미래의 가능성이란 반복건대, 지상에서 형성되는 구체와 원형의 표상적 기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규정되지 않는 표상 앞에 선 영화의 저항이란 이러하다. 터널을 통과하기 <헬프리스>의 후반부에 겐지는 장애가 있는 야스오의 여동생 유리를 태우고 터널을 통과한다. 터널은 어둠으로 막힌 벽이 아니라 마치 비어 있는 공간처럼 바깥으로 열린 투명한 통과지점이 된다. 시선은 끝까지 열려 있고, 어둠을 통과하면 세계의 빛이 나타난다. 아오야마는 일본의 ‘부끄러운 재현’이 새겨져 있던 시기를 터널의 어둠 속에서 통과해나간다. 이 장면을 조명하는 어둠과 빛의 짧은 교차에서 기나긴 흑백의 시간을 마치고 색채를 회복하는 <유레카>의 여정이 암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터널의 어둠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도쿄 공원>에서 의뢰를 받고 어느 여인의 사진을 찍는 코지는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이복형제 누나를 똑바로 바라본 적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지를 끝없이 생산하면서도 정작 타인을 바라본 적 없는 코지는 현실과 이미지의 경계에서 회전하는 소용돌이에 갇혀 있다.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에 실패하고 타인을 이미지로 포착하는 데 붙들린 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지에서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는 무력한 결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오야마 신지는 ‘~을 할 수 없다’는 수동적 자각과 그런데도, 혹은 그러므로 ‘~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지적 개입을 오가며 일상적 공간과 서부극적 무대를 끝없이 배회해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미지의 터널을 통과하고 하늘을 바라보기 위한 위치를 조정하는 <구름 위에 살다>의 계단과 고층아파트는 새로운 질문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질문의 답을 개진하기 전에 아오야마 신지는 대답을 멈췄다. 하지만 중단되어버린 터널의 여정을 되짚는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가늠해보는 희망의 진술이다.

K콘텐츠, 국제 에미상에서도 통했다

지난 9월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 이어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50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도 한국 콘텐츠가 활약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공로상을 받고, KBS2 드라마 <연모>가 한국 드라마 최초로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수상한 것. 세계 3대 방송상으로 꼽히는 국제 에미상은 미국을 제외한 나라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며, 공로상은 방송산업 부문에서 전세계적으로 크게 기여한 이에게 수여된다. 미국 국제TV예술과학아카데미(IATAS)는 이미경 부회장을 “25년 이상 한류를 이끌어온 선봉장으로, 한국 문화와 미디어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 부회장은 한국영화 최초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한 <기생충>,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 남우주연상 수상작 <브로커>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고 2020년부터 아카데미 영화 박물관 이사회 부의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전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더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그들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을 이어나가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은빈 주연의 <연모>는 브라질의 <누스 템푸스 두 임페라도르>, 스페인의 <도스 비다스>, 중국의 <유 아 마이 히어로>를 제치고 영미권 외 드라마를 통칭하는 텔레노벨라 부문에서 수상했다. 쌍둥이로 태어나 여아라는 이유로 버려졌던 아이가 남장한 왕세자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으로, 사극 최초로 넷플릭스 TV쇼 부문 글로벌 톱10(4위)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이날 시상식에선 Apple TV+ 오리지널 시리즈 으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이선균, 시상자로 나선 배우 송중기, 배우 임시완 등도 쾌거의 순간을 함께했다.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 9월13일 누벨바그의 거장 장뤽 고다르가 91세로 별세했다. ‘영화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현대영화는 고다르와 함께 문을 열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20세기의 영화도 문을 닫았다. 그런만큼 그동안 고다르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동안 몇 차례의 기획전이 열렸다. 올해 고다르를 기리는 마지막 인사로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이 2022년의 끝자락에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문화협동조합 ‘씨네포크’에서 준비한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은 오는 12월7일부터 20일까지 부산 롯데시네마 광복점, 대구 롯데시네마 동성로점, 서울 롯데시네마 홍대입구점에서 차례로 상영될 예정이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고다르의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를 비롯해 1960년대 누벨바그 시기의 걸작들과 1970년대 정치적 시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를 추구한 1980년대 작품들, 고다르의 필생의 역작 <영화의 역사>까지 총 13편의 작품이 소개된다. 이에 앞서 12월 1일 오후 4시에는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34 북카페 파오에서 미디어 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간담회에는 임재철 이모션픽쳐스 대표, 김이석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연구소장, 정진아 씨네포크 프로그래머가 참석하여 이번 특별전의 취지와 의미를 소개했다. 임재철 이모션팍쳐스 대표는 이번 특별전이 비단 고다르를 기리는 것을 넘어 한국영화문화 전반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견해를 전했다. “프랑스와 일본에서는 고다르의 작품이 리얼타임으로 상시 상영되고 있어서 따로 추모 기획이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네멋대로 해라> 이후 고다르에 대한 단절이 있었기에 최소한의 만남의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뜻을 모았다.” 정진아 씨네포크 프로그래머 역시 “그동안 회고전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이번 특별전은 영화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협동조합 차원에서 자발적인 힘이 모여 만들어진 자리하는 점이 각별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번 <아듀 고다르: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은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고다르의 대표작을 소개하여 고다르가 걸어온 궤적을 일목요연하게 확인하고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다. 김이석 동의대 교수는 “고다르의 죽음은 무게가 남다르다. 예정보다는 늦었지만 고다르의 작품을 스크린으로 다시 본다는 것, 그리고 이 기회를 나눈다는 건 시네필로서 일종의 책무처럼 다가온다”며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고다르 영화는 시각적으로 풍성하고 의외로 유머도 풍부하다. 극장에서 고전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며 젊은 시네필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안녕, 고다르. 그렇게 고다르는 떠나보내는 작별인사 ‘안녕’은 이제 고다르를 새롭게 만나는 반가운 인사 ‘안녕’으로 이어질 준비를 마쳤다. 상영작 소개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1960) 출연 | 진 세버그, 장 폴 벨몽도 | 90min |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0년 베스트10 (3위) 현대영화의 출발을 알린 고다르의 기념비적 장편 데뷔작. 이후 고다르 작품의 주인공으로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된 장 폴 벨몽도와 <슬픔이여 안녕>(1958)으로 데뷔한 진 세버그가 주연을 맡았다. 1960년 공개되자마자 참신한 스타일(전설적인 점프 컷의 사용)과 대담한 촬영(자연광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은 거친 흑백 영상)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기관총부대> Les Carabiniers (1963) 출연 | 마리노 마세, 알베르토 주로스 | 75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3년 베스트10 (8위) 벤자민 조폴로의 원작 희곡을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구술한 후 장 그뤼오가 각본으로 만들었다. 테마는 전쟁 그 자체지만 고다르답게 전쟁영화를 연출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대한 하나의 우의로서 영화를 파악하고 있다. 시대와 장소 등 부대적인 상황을 철저히 배제하고 게릴라적으로 전쟁을 묘사한 점에서 고다르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경멸> Le Mépris (1963) 출연 | 브리짓 바르도, 잭 팰런스, 미셸 피콜리 | 103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3년 베스트10 (1위) 이탈리아의 현대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고다르가 대담한 각색을 시도했다. 고다르는 나폴리의 카프리섬에 세워져 있는 옥상 계단이 인상적인 빌라 말라파르테를 무대로 삼았다. 프랑스 작가 폴과 아내 카미유, 부부의 애증이 엇갈리고 증폭되면서 그것이 바로 영화의 성립 과정 자체가 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걸작이다. <국외자들> Bande à part (1964) 출연 | 안나 카리나, 클라드 브라소, 다니엘 지라드 | 95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4년 베스트10 (1위) 고다르 자신은 실패작이라고 시인했지만 열광적인 팬들의 지지를 받는 작품이다. 어두운 피카레스크 소설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당돌하게 시작되는 댄스 장면이나 비스트로에서 세 사람이 갑자기 1분간 침묵하기로 하면 배경음마저 들리지 않게 되는 시퀀스 혹은 세 사람이 루브르 박물관을 초특급으로 달려가 관람하는 시퀀스 등 우스꽝스럽지만 고다르적인 매혹적인 장면을 많이 담고 있다. <알파빌> Alphaville (1965) 출연 | 에디 콘스탄틴, 안나 카리나, 아킴 타미로프 | 99min |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5년 베스트10 (5위) SF와 필름 누아르 장르가 뒤섞인 독특한 작품으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선보인다. 초현실주의 작가 폴 엘뤼아르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 늦은 밤, 기자 이반이 미래 도시 알파빌에 도착한다. 사실 그의 정체는 미국인 사립탐정 레미로 알파빌에 침투한 비밀 요원이다. 알파빌을 창조한 폰 브라운 교수를 암살하고 그가 만든 인공 지능 컴퓨터를 파괴하려 한다.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출연 | 장 폴 벨몽도, 안나 카리나, 레이몽 드보 | 110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5년 베스트10 (1위) 라이오넬 화이트의 범죄 소설을 바탕으로, 고다르가 이야기의 틀만 빌려 자유롭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넘쳐흐르는 햇빛과 자유롭고 느긋한 영상의 매혹은 누벨바그의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라스트 신에서 장 폴 벨몽도와 안나 카리나의 목소리로 언급되는 랭보의 시 한 구절과 함께, 고다르의 이름을 불멸로 만든 누벨바그의 대표작이다. <남성, 여성> Masculin Féminin (1966) 출연 | 장 피에르 레오, 샹탈 고야, 마를렌 조베르 | 105min | 베를린영화제 3개 부문 수상(장 피에르 레오 남우주연상), <카이에 뒤 시네마> 1966년 베스트10 (4위) 1960년대 중반, 모든 것이 격동의 신호를 보내던 시대 속에서 파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 사상과 행동을 15개의 에피소드로 그려낸다. 시네마 베리테, 즉 다큐멘터리 터치의 영상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묘사되며,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폴과 마들렌의 청춘상은 ‘혼돈의 60년대’를 잘 전해준다.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 Deux ou Trois Choses que je sais d'elle (1967) 출연 | 마리나 블라디, 아니 뒤페레, 로제 몽소레 | 87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67년 베스트10 (9위) 1966년 여름, 파리 외곽의 공단 주택에 사는 유부녀 줄리엣은 남편을 속이며 매춘을 계속하고 있다. 그녀의 행위를 통해 소비사회의 현재를 바라보는 동시에 배우로서의 마리나 블라디, 혹은 파리라는 도시와 하나된 그녀의 초상을 포착한다. 고다르의 초기작 중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작품으로 개인과 사회라는 두 요소가 밀접하게 얽혀간다. <만사형통> Tout va bien (1972) 출연 | 이브 몽탕, 제인 폰다, 비토리오 카프리올리 | 95min | 베를린영화제 포럼 오브 뉴시네마 부문 수상 1968년 이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영화 제작을 거부한 고다르가 장 피에르 고랭과 함께 지가 베르토프 그룹을 결성하고, 영화를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던 시기의 작품. 전직 영화감독과 그 연인인 미국 저널리스트가 정육공장 파업 현장에 취재하러 갔다가 봉쇄 중인 공장 내에서 신체적이고 사상적인 다양한 체험을 하며 서로의 생활과 관계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Sauve qui peut (la vie) (1980) 출연 | 이자벨 위페르, 나탈리 베이, 자크 뒤트롱 | 87min | 198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 고다르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언한다. 고다르가 정치적인 비디오 작업을 하던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극 영화로 돌아와 만든 작품으로, 스스로 ‘두 번째 데뷔작’으로 칭했다. 텔레비전 제작자인 폴은 편집 일을 하는 드니즈와 연인 사이다. 성과 없는 일에 지친 드니즈는 폴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세 인물의 일상을 통해 사랑과 섹스, 인생과 영화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탐정> Détective (1985) 출연 | 클라드 브라쇠르, 나탈리 베이, 조니 할리데이 | 90min | <카이에 뒤 시네마> 1985년 베스트10 (2위) 파리의 특급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 형사 뇌브는 에밀과 프랑수아 부부, 복싱 프로모터 짐 사이에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스타들의 카리스마와 위대한 고전 스릴러들에 대한 기억 위에 세워진 영화는 고다르의 로맨틱한 비관주의와 유머로 유지된다. 존 카사베츠, 클린트 이스트우드, 에드거 G. 울머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영화라는 사소한 비즈니스의 흥망성쇠> Grandeur et décadence d'un petit commerce de cinéma (1986) 출연 | 장 피에르 레오, 마리 발레라, 장 피에르 모키 | 90min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의 소설 영화화. 오랜만에 새 작품을 준비 중인 영화감독 가스파르는 오디션을 진행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편 제작자 장은 투자자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배우가 꿈인 아내 유리디스의 소원을 들어주려다 살해당한다. 예술에서 진실과 기만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고다르 특유의 스타일과 이미지 실험으로 풀어낸다. <영화의 역사> Histoire(s) du cinema (1998) 출연 | 장 뤽 고다르, 알랭 퀴니, 줄리 델피 | 269min 고다르가 1989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0년이 지난 후에야 완성한 프로젝트. 269분에 이르는 작품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며, 각 장은 두 편(A, B)으로 나뉘어져 총 8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이 방대한 프로젝트는 100년에 이르는 영화의 역사(들)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20세기 예술에 대한 고다르식 성찰과 비평이다. 고다르의 후기 영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뽑힌다.

[비평] ‘메모리아’, ‘카메라-눈’ 이후 ‘사운드-눈’에 관한 단상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는 놀라운 장면이 담겨 있다. 놀라움은 단지 감탄의 표현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자극에 의한 원초적 반응을 가리키는 말이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이 사람들 사이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공포영화에 맞먹는 서늘함을 지닌다. 다만 유령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인해 여느 공포영화의 문법과 갈라진다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엉클 분미>에서 유령은 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거나, 혹은 생전 그대로의 목소리로 나타나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유령과 어울려 대화하고 시선을 맞추며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나아가 인물이 복제된 듯 분화하는 순간도 있다. 외출을 준비하던 통(사크다 카에부아디)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유령이 방금 자신이 있었던 곳에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함을 목격한다. 이 장면은 섬뜩하고 놀라운 동시에 그가 출몰한 곳이 텔레비전 앞이기에, 매체에 영혼을 빼앗긴 존재의 클리셰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유령을 마주한 통은 유령에게 자리를 내어준 채, 쫓겨나는 모양새로 서둘러 퇴장한다. 유령의 표현과 이를 대하는 반응에 녹아든 은근한 유머는 놀라움의 대상을 친밀함의 대상으로 잠재시킨다. 위라세타쿤의 전작에서 놀라움이 이미지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메모리아>에서 놀라움은 단발의 소리에 압축된다. 아직 어두운 가운데 커튼이 드리운 창문과 그 앞에 잠든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인다. 그러던 중 어딘가에서 둔탁하고 커다란 단발성 굉음이 들린다. 그때까지 실루엣만 보였던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몸을 일으킨다. 여느 영화라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탐문했겠지만, <메모리아>는 정체를 드러내기를 유예한다. 소리의 원인이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는 근거로서의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소리의 반응체처럼 보이는 인물이 즉시 소리의 정체를 찾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제시카는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피는 대신 그저 천천히 움직인다. 카메라는 제시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제시카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상으로 다시 등장할 때까지 제시카의 움직임과는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패닝한다. 이는 잠과 깨어남 사이의 혼곤한 상태를 표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유예의 동선을 보여준다.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방금 일어난 현상에 집중해보면 이 시퀀스는 어떤 소리가 정지된 이미지를 깨웠음을 보여준다. 곧 사운드가 이미지를 깨운다. 사운드가 이미지에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설정은 이미지에 비해 덜 중시되어온 사운드를 전면화하며, 그와 동시에 비가시적인 대상인 사운드를 가시화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사운드는 흡사 바람의 작용이 그렇듯 스스로 움직이는 대신 무언가를 움직이게 만든다. 소리에 영향을 받는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다. 다음 숏에서 한밤중 주차된 차들이 동시에 경고음을 작동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차량 경고음은 사람이나 사물에 의한 접촉이 발생했을 때 작동되지만, 여기에서 원인 제공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은 앞선 장면에 이어져 소리가 단순히 제시카의 내면에 울리는 폐쇄적인 소리가 아니라 편재한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란한 자동차 경고등의 움직임 사이로 조그맣고 빨간 빛이 포착된다. 그 빛은 소리가 울릴 때 나타났다가 소리의 중단과 함께 사라진다.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미약한 그 빛은 의도적으로 삽입된 어떤 장치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포착된 현상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지의 존재를 자극하는 영화에서 발견된 두개의 빛은 사소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작은 신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두개의 나란한 작은 빛은 <엉클 분미>에서 정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던 존재가 빛내던 빨갛고 둥근 두눈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분명한 존재의 형상은 아니지만, 두개의 점만으로 존재를 떠올리는 일은 위라세타쿤의 영화라면 용인될 만한 상상이다. 실제로는 영화에 접속하려고 애쓰는 성실한 관객이 실패를 예견하면서도 잡게 되는 연약한 지푸라기에 불과할 테지만 말이다. 주의! 녹음 중 관객을 마주 보는 위치에 놓인 두개의 붉은 점이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가정할 때, 그 시선은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숏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 시선의 모양은 <엉클 분미> 속 유령의 시선과 유사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영화 속 장면은 <열대병>의 시선이다. <열대병>의 오프닝 크레딧이 제시되는 사이, 그 오른편에는 배우(반롭 롬노이)가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는 장면이 롱테이크로 담긴다. 이 시퀀스는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난폭하게 교차하는 시퀀스 다음 등장했기에 더욱 각별하다. 시선의 대상에서 소외된, 혹은 소외되어야만 하는 카메라가 비로소 시선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마치 카메라가 눈길을 주고받는 은밀한 대상인 것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피했다가 다시 마주 보며 흘깃거리기를 반복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 뒤의 감독을 가리키거나 그 너머의 관객을 바라본다. 혹은 영화에 등장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 반(半)존재 혹은 중간 존재를 예고하는 대상으로 카메라를 보여준다. 반면 <메모리아>의 붉은 점은 중간 존재보다 더 모호하고, 비인칭적이다. 붉은 점을 녹음 중이거나 촬영 중임을 표시하는 신호라고 이해해본다면, 두개의 빨간 눈은 카메라나 붐마이크를 대체한 영화 제작 현장의 표식이다. <메모리아>에서 녹음실은 영화 제작 현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장소인데, 영화는 녹음이 이뤄지는 부스 안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믹싱이 이뤄지는 바깥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게다가 그곳은 출입이 통제된 곳이 아니라 원한다면 열린 문으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다. 이러한 설정은 위라세타쿤이 견지해온 영화 만들기 방식을 암시한다. 감독의 초기작인 <정오의 낯선 물체>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들며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영화 만들기의 기원에 관한 느슨한 반영일 수 있다. 모호한 붉은빛은 그 자체로 사운드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운드적 시선처럼 보인다. 소리의 정체나 본질을 찾는 대신, 소리의 부피와 질감을 묘사해야 하는 제시카의 상황은 사운드의 미묘함과 포착의 난감함을 드러낸다.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이 소리를 들려주면 제시카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묘사하고 차이를 설명하는 과정이 몇 차례 반복된다. 이러한 작업은 영화를 위한 사운드를 찾는 과정과 일치한다. 제시카가 들었던 소리 역시 영화 <메모리아>의 음향효과의 일부임을 염두에 둘 때, 영화 제작 과정을 역으로 보여주는 작업처럼도 보인다. 이때 관객은 제시카와 함께 소리를 체험한 바 있기 때문에 소리를 기억하는 일에 관한 자기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했던 소리는 방금 들린 믹싱된 음향과 얼마나 유사한가. 그 소리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의 목적은 단지 사운드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기 위함이 아니다. 영화는 비슷한 소리를 탐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소리를 뒤섞는 데로 나아간다. 이는 관객에게 필요한 사운드 이후의 시간을 암시한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묘사한 소리를 찾아주는 데서 나아가 그 소리를 혼합해 만든 미지의 음악을 제시카에게 들려준다. 이 음악은 에르난의 휴대전화와 블루투스로 연결된 헤드셋으로 제시카에게만 송출되기 때문에 화면 바깥의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제시카에게 들리는 모든 소리를 관객이 듣는다는 가정은 위태롭게 된다. 이는 제시카만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이 담긴 레스토랑 시퀀스와 대조된다. 두 장면을 번갈아 생각할 때, 관객은 제시카에게 들리는 소리를 듣거나 현장음을 듣는다는 가정 모두 애매해진다. 그렇다면 소리의 진원지는 화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화면 바깥, 관객과 가까운 어딘가일 수 있다. 제시카가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잠든 기억의 소리를 듣는 안테나임이 드러나는 후반부를 염두에 둔다면 터무니없는 가정만은 아니다. 제시카가 듣는 굉음은 내부의 소리가 아니라 외부의 소리다. 다만 그 소리는 제시카에게만 들린다. 사운드의 짧은 존재론 인식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할 때, 있음과 없음의 상태는 빛과 연관된다. 빛을 받았을 때는 보이는 것이 빛을 받지 않았을 때는 시야에서 감춰진다. 비존재는 눈에 잠시 보이지 않을 뿐 늘 존재하는 상태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존재의 상태를 소리의 차원에서 풀이해보면 이미지의 차원에서 가능한 영속을 사운드의 차원에 적용하기 어려움을 알게 된다. 사운드의 지속을 상상하기보다 난감한 건, 지속을 재현하는 일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듣는 이에게 고문이 된다. 사운드의 존재 양식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밤벌레 소리로 풀이된다. 밤벌레 소리는 시야가 제한될 때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소리의 차원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밤벌레는 소리의 지속이 아닌 중단의 순간에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엉클 분미>에서 전기채로 벌레를 잡는 장면에서 ‘타다닥’ 하고 울리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내는 단발의 비명과도 같다. 소리와 함께 존재감이 드러나는 동시에 대상은 사라진다. 이는 음성 존재가 지닌 가혹한 운명을 요약한다. 사운드는 존재하는 동시에 곧 사라져야 한다. <메모리아>에서 소리는 소음의 상태(단발의 굉음)이거나 음악의 상태(에르난의 제시카만을 위한 음악, 합주실의 음악)로 거칠게 분류된다. 영속하는 존재를 나타내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요소는 낮과 밤이라는 자연현상과 조명의 켜고 끔이라는 외부 작용에 의해서다. 여기에 더해 인간의 생리현상에 의한 잠이라는 현상이 존재를 켜고 끄는 중요한 매개 변수가 된다. 특히 잠(혹은 잠에 준하는 행위)은 영속하는 사운드를 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더 각별하다. 잠은 위라세타쿤이 작품을 통해 애정을 드러내온 행위인데, <메모리아>는 잠에서 깨는 장면으로 시작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영화는 소리에 의해 깨어난 제시카의 여정을 통해 사운드가 영속할 수 있는 다른 차원과 조건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억하려는 존재의 의지 혹은 기억하는 상태이다. 제시카가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에르난을 만나는 장면 이후 제시카의 모든 행위는 소리를 기억하기 위한 여정과 행위로 번역된다. 그중 제시카가 오래된 유골의 두뇌 부위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장면은 상징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왜 눈이나 입의 구멍이 아닌 두뇌의 구멍인가. 사운드로 촉발된 영화를 상상할 때 중요한 지점은 받아들이는 반응체, 즉 두뇌이다. 악귀를 보내기 위한 풍습으로 새겨진 구멍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잠재된 이야기에 관한 상상을 촉발하듯 사운드는 부재로 인해 기억에 저장된다. 사운드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일은 곧 관객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생각하는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가 ‘키노 아이’ 이론을 주창하고 이를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 녹여내며 카메라를 든 촬영자로서의 정체성과 카메라가 새롭게 연 시각적 가능성을 예찬했을 때, 카메라가 지닌 하나의 눈은 그에 대응할 또 다른 눈을 줄곧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는 사운드나 관객에 관해 언급한 최초의 기록은 아닐지라도 사운드적 인식이 곧 관객을 중심에 둔 영화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실시간성과 허구 사운드와 이미지의 자리를 이리저리 바꿔보면서 기존의 인식을 재고하게 한 영화는 영화의 현장성 혹은 실시간성에 관한 의문을 숙제처럼 남겨둔다. 롱테이크가 지닌 실시간성은 영화 기술의 발전과 함께 다른 의미로 변질되었다. 롱테이크는 진실을 보존하는 기법이었지만, 이음매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게 이어 붙여 하나의 숏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법인 원 컨티뉴어스 숏이 그렇듯 기술을 통해 롱테이크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롱테이크는 사실성을 담보하는 기법보다 허구의 기법에 가깝다. 그러나 진실의 기법으로서의 롱테이크는 완전히 폐기되진 않았다. 대신 질문이 남았다. 무엇을, 왜 롱테이크로 보여줄 것인가. 혹은 롱테이크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위라세타쿤은 믿을 수 없는 두개의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하나는 눈을 뜬 채 잠든 사람의 얼굴을 그가 깨어날 때까지 보여준다. 에르난은 제시카가 만난 사운드 엔지니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이다. 혹은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이미지적 분신의 차원 대신, 이름과 호명의 차원에서의 분신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혹은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유령이나 신처럼 존재를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다. 에르난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눈을 뜬 채 순식간에 잠이 들고, 카메라는 눈뜬 채 잠든 얼굴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 얼굴은 숨도 쉬지 않고 미동도 없기 때문에 죽었거나 정지한 것처럼 보인다. 그 숏은 한 사람이 눈을 뜨고 정지해 있기에는 너무도 오래 지속되기에 놀라움과 함께 의심이 피어오른다. 물론 그 시간은 신기한 장면을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된 관객이 자신을 들여다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이와 비슷한 감정은 숲에 가려져 보호색을 띤 비행 물체가 막 이륙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순간에도 겪게 된다. 그래픽 이미지임이 분명한 비행체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 기체를 내뿜었을 때 울리던 육중한 소리는 제시카와 관객이 오랫동안 찾아온 이명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발견의 기쁨이나 정체를 알고 난 뒤의 허탈감보다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게 된다. 비행물체가 실제의 풍경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도넛 모양의 기체 잔여물이 천천히 옅어지며 파장이 잦아들 때, 그 지속은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는 카운트다운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낯선 비행체라는 도달점은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사람들이 이어 들려준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이야기가 결국 외계인의 이야기에 도달했음을 기억하게 한다. 이야기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과장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총체로서 외계를 상상하는 것일 테다. 이야기가 나아가고 이미지가 따라잡으며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서, 허구가 실제를 비웃는 조작의 시대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일쯤은 간단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럴듯한 이미지로 현혹하는 시대에 저항하는 방식은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새기는 것이 아닐까. 영화 속 비행체가 터무니없게 느껴진다고 해도 그것이 영화가 지닌 과오나 실수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용인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럴듯하지 않은 이미지를 발굴하고 실험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씨네21 추천도서 - <뒤라스×고다르 대화>

대담 기사 읽기를 즐긴다. <씨네21>에도 다양한 기획의 대담 기사가 실리는데 보통의 인터뷰와 대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의 점으로 대화가 모이지 않고 목적 없이 넘실대는 말의 틈새에서 저마다의 진의를 파악하는 재미? <뒤라스X고다르 대화>는 장뤽 고다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작품 세계를 구축한 후 성사된 만남에서의 대화를 글로 엮어낸 것이다. 1997년, 1980년, 그리고 1987년 세번에 걸쳐 진행된 뒤라스와 고다르의 대화는 서로의 작품 세계를 염탐하듯 시작한다. 뒤라스와 고다르 모두 연출자이기에 각자의 최신작에 대한 소회로 문을 연 대화는 점차 물감이 강물에 퍼지듯 마구잡이로 확대된다. 이미지와 텍스트에 대한 견해 차이를 거쳐 영화와 텔레비전, 당시 활동 중이던 다른 예술가들의 근작에 대한 소회, 문화와 대중에 대한 견해, 영화 이미지 재현의 방식,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등 대화는 파편처럼 이리저리 튄다. 가식적인 존중과 배려보다는 대담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예술성이 이 대화의 백미인데, 아래의 문장이 뒤라스-고다르의 대담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어 옮긴다. “콜레트 펠루스는 <오세아니크> 프로그램 녹화 중에, 그들이 미소 또는 침묵 속에서 ‘말하지 않음’으로 서로 연결되거나, 수줍음 혹은 오만함, 망설임 혹은 열광을 가로질러 그 뒷면에서 대화하는 걸 보았다. 그들은 더이상 ‘일자’와 ‘타자’가 아니라, 사라지다시피 했으며, ‘그들의 만남’만 남았다고 회상했다.”(106쪽) 뒤라스의 소설을 읽지 않고, 고다르의 영화를 본 적 없는 독자에게도 둘의 대화가 흥미롭게 읽힐까? 물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글로 이뤄져 있음에도 종종 영상을 떠올리게 하고 이미지를 찾아보게 만든다. 길고 긴 주석이 이해를 돕지만 대화를 엿듣다 보면 언급된 작품들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로써 이 대화는 한층 풍성해지고 독자는 객석이 아니라 무대 위 둘 사이에 앉게 된다. 텍스트의 표면을 넘어 당대의 환경과 두 예술가의 작품 등의 맥락을 잡는다면 진의에 가까워진다. 견고한 세계를 가진 두 예술가가 서로의 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며 오해하고 충돌하며 교차점을 찾는 대담의 묘미. 그래, 대담이란 이렇게 재미난 것이었다. 18~19쪽 고다르: 우리는 조금은 적대적인 형제와도 같군요, 제 잘못일 수도 있지만. 저는 글쓰기를 증오하거든요.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오는 순간을요. 글쓰기는 늘 그렇습니다⋯. 당신의 경우, 만일 글이 없다면, 글이라 불러야 할지 텍스트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뒤라스: 나는 쓰여진 것이라 부르지, 텍스트 또는 쓰여진 것.

[기획] 네 가지 키워드로 보는 2023 시리즈 신작 경향

1.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사극 열풍 2023년은 다양한 채널에서 사극 시리즈 방영을 준비 중이다. 먼저 하반기 방영 예정인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1010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완승을 거둔 1019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tvN에서 2월 초 방영 예정인 <청춘월담>은 박형식, 전소니, 표예진 주연으로 미스터리한 저주에 걸린 왕세자와 어쩌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천재 소녀의 로맨스를 그려낸다.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을 집필한 윤이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시의 신루>는 집현전을 배경으로 천체를 좋아하는 왕세자와 미래를 보는 해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외에 이동욱, 김소연 주연의 tvN <구미호뎐1938>, 남궁민, 안은진 주연의 MBC <연인> 등 다양한 사극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김지하 MBC 드라마 프로듀서는 “정통 사극의 틀을 벗어난 퓨전 사극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전통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가치를 조화시키는 게 중요한데 MBC <옷소매 붉은 끝동>도 실존 인물을 두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조했고 tvN <슈룹>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중전을 새롭게 보여줬다”며 추세에 관해 설명했다. 동시에 사극은 글로벌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지하 프로듀서는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를 넘어 사극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 KBS <연모>도 제50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 국내 최초로 텔레노벨라 부문을 수상했다. 전세계적 호응에 따라 사극 제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며 올해 한층 더 커진 사극 장르의 활기를 설명했다. 이어 “한국사에 굴곡이 많아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고, 과거의 제한된 환경이 감정을 더 고조시킨다”며 인기 요인을 짚어냈다. 2. 시리즈물의 복귀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속편을 제작한 시리즈물이 돌아온다. 2021년 은밀한 사적 복수 대행 서비스를 다루었던 SBS <모범택시>가 이제훈, 김의성, 표예진, 장혁진, 배유람 등 주역 그대로 시즌2를 공개한다. 이어 시즌1, 2 모두 두터운 팬층을 만들었던 SBS <낭만닥터 김사부>도 시즌3로 돌아온다. 시즌2 종영 이후 2년 만에 한석규, 안효섭, 이성경이 전편의 재미와 감동을 그대로 이어갈 예정이다. <낭만닥터 김사부> 제작을 진행하는 홍성창 스튜디오S 제작국장은 “한국에서 시즌3까지 온 드라마는 <낭만닥터 김사부>가 유일하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배우들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진실되게 받아들이고 강은경 작가를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며 “시리즈는 이미 시청자의 공감과 이해를 얻은 상태에서 가치관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3 제작의 의의를 전했다. 이외에도 tvN <경이로운 소문> 시즌2와 넷플릭스 시즌2도 2년 만에 시청자를 찾을 예정이다. 3. 웹툰, 웹소설과 함께하는 IP 전성시대 지난해에 이어 웹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양한 드라마·시리즈가 이어진다. 글 매미, 그림 희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마스크걸>은 고현정, 염혜란, 나나의 출연 소식을 알리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김모미(고현정, 나나)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방송 BJ로 활동하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웹소설의 영상화를 증폭시킨 <재벌집 막내아들>이 고공행진으로 막을 내린 후 2023년에도 그 열기를 이어간다. 먼저 웹소설 IP 기반의 사극 <꽃선비 열애사>는 하숙집 객주 이화원의 주인 윤단오(신예은)와 비밀스러운 하숙생 꽃선비 3인방의 예측 불가 로맨스를 선보인다. <꽃선비 열애사>를 제작하는 김희열 팬엔터 부사장은 “원천 IP 의존도가 높은 지금 웹툰보다 전개 속도가 빠른 웹소설에 대한 주목도가 커지고 있다. 짧은 글을 통해 독자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장르 성격상 서사 구조가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다만 글로 모든 것을 묘사해야 해서 캐릭터 설명이 구체적이고 풍부하다”며 IP로서 웹소설이 가진 장점과 특징을 설명했다. 웹툰 원작의 드라마화도 여전히 뜨겁다.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된 <국민사형투표>는 1억3천만 조회수를 기록 중인 작품으로 박해진, 박성웅, 임지연의 출연을 확정하며 드라마화 소식을 알렸다. 김희열 부사장은 “웹툰 IP 선정에 있어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공감성과 전개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시청자가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 주요 핵심이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여지가 있는지도 눈여겨봐야 한다”라며 <국민사형투표>를 드라마로 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티빙 <방과 후 전쟁활동>, 넷플릭스 <살인자ㅇ난감> 등이 공개를 앞두고 있다. 4. 편성 변화 드라마·시리즈 산업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도 있다. 먼저 KBS는 올해 잠정적으로 수목극 편성에 휴지기를 갖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따라 1월2일 공개한 정용화, 차태현 주연의 <두뇌공조>도 월화극으로 편성을 바꿨다. 수목극이 방송가의 황금시간대인 만큼 KBS의 파격적 결정에 자연스레 이목이 쏠리고 있다. 현재 수목극 시간대에는 지난 2021년에 종영한 <연모>가 방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지난해 수목극 시청률 부진이 꼽힌다.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와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은 시청률 1~2% 사이를 전전했고, <징크스의 연인>은 3~4%에 머물렀다. 이에 대해 강규원 KBS 편성팀장은 “외부적으로 파격적인 결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KBS 내부에서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내용이다. 외부 콘텐츠 제작사와 비교하면 투자 대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공영방송사라는 정체성도 콘텐츠 확장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다양한 스토리 소재나 구성, 연출과 언어 표현 등을 OTT 시장만큼 자유롭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당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방송가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MBC 드라마기획팀의 한 관계자는 “편성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새 시리즈를 급하게 방영하는 것보다 제작 중인 작품을 질적으로 보완하거나 더 나은 콘텐츠를 발굴해 방영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보인다. 레거시 미디어에도 기존의 편성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며 대안의 의미를 설명했다.

[비평] ‘희망의 요소’, 더이상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닫힌 문 사이로 소리가 들린다. 내연남과 통화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소심한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요소>의 주된 무대인 부부의 집에서 소리는 프레임의 견고한 경계를 넘어 들린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남편은 아내와 대화하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집 안에 진동하는 하수구 냄새를 맡지도 못하지만, 실내에 울리는 소리만큼은 분명하게 듣는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화면에 침입하지 않는다면, <희망의 요소>의 영화적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채로,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고 주변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남자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듣는다. 첫 장면은 선언적이다. 4:3 비율의 비좁은 화면 위로 아내의 상처난 발과 발을 붙잡는 남편의 손이 나타난다. 어떤 설명도 없이 누군가의 손과 발이 과감하게 스크린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개입하는 것은 프레임 바깥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부부의 목소리가 화면 위로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인 얼굴과 결합하지 않는 목소리는 실내 공간을 부유하듯이 전해진다. 목소리는 건조해진 부부의 관계를 드러내고, 화면을 지탱하던 시각적 구도에 긴장을 부여한다. 소리는 그 자체로 인물들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의 문제이자 바깥의 사건이며, 프레임에 형성되는 외화면과의 갈등이다. 단 두 사람의 스탭으로 만들어진 열악한 제작조건의 한계를 고스란히 영화의 태도로 삼으려는 듯 영화를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겨두는 첫 장면에서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목소리다. 그것은 프레임을 초과하고, 고정된 구도를 침범한다. 결혼의 풍경 <희망의 요소>의 연출자이자 프로듀서를 제외한 모든 역할을 도맡은 이원영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택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한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단편소설을 쓰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으로 일한다. 아내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으며,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이 단순한 서사는 영화의 표면에 아무런 치장도 덧대지 않은 맨몸을 적시한다. 특별한 이야기의 변화에 기대지 않는 부부의 감정적 위기는 영화의 근본적인 질문을 부른다. 상대방을 바라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다가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또 다른 근본적 질문과 함께한다. 두 사람의 시선과 행위와 반응을 조직하는 숏을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서도 부부는 같은 화면에 공존하지 않고 각자의 장면에 머물러 있다. 분리된 장면 속에서 남편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아내의 말투와 표정, 탄식과 한숨을 주시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나를 경멸하는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을 그는 주의 깊게 바라볼 것이다. 장뤽 고다르는 “남자가 여자를 천천히 바라보는 순간은 그녀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떠난다고 통보하고, 싫어한다고 이야기할 때”라고 말했다. <경멸>에서 시나리오작가 폴(미셸 피콜리)이 아내 카미유(브리짓 바르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물어보자 카미유는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실제 부부였지만, 위태로운 관계의 위기를 겪고 있던 아나 카리나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비브르 사 비>에서 고다르는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얼굴에 드러나는 신호를 예민하게 해석한다. 그녀의 표정은 관계의 지나온 시간을 가리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프레임을 조직하고 인물들의 시선을 빌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탐색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에서 부부의 위기는 그러므로 장면의 세부에 담긴 신체의 민감한 반응을 주시하는 필연적인 전제다. 이것은 결혼 생활의 위기를 다루는 단순한 서사가 <희망의 요소>의 단점이라고 말하는 몇몇 평자들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니라 신발을 갈아 신고, 음식을 만들고, 글을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의 이해를 절실하게 바라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숏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위기에 노출된 권태로운 부부라는 설정은 서사를 견인하거나 일상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 신체적 영화를 성립시키기 위한 가장 작은 단위의 여건이다. <희망의 요소>는 하나의 신체적 증상이다. 상대의 행동에 반응하고 예상치 못한 충동에 사로잡히는 몸을 비추는 증상의 영화다. 그 신체가 머무는 부부의 집에는 고정된 프레임이 현실의 지각을 절단해서 제시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남편과 아내의 숏/리버스 숏이 이질적인 단면으로 잘려져 나타날 때, 일상적 공간이 파편화된 화면의 부정교합으로 변형되는 불안이 드리워 있다. 식탁에 앉은 아내와 소파에 있는 남편이 나누는 대화 장면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시선으로 교차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을 파편적으로 나누는 장면의 운용은 신체와 목소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요구한다. 목소리는 분명 서로에게 가닿고 있지만, 두 사람이 머무는 장면들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것처럼 어색함을 드러내며 이미지와 사운드에 대한 근본적인 조정을 제기하는 것이다. 좁은 화면비에 반복되는 행동들로 장면을 쌓아나가는 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일그러뜨려 다르게 바라보는 시도가 된다. 목소리의 유혹 남편은 다니는 직장이 없고, 가족은 그를 빼놓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는 간접적인 정보로만 주어진다. 아내와 불화하는 그에겐 삶을 지속하는 안정적인 형식이 없다. 꿈속에서 그는 단편소설이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지만, 마음 편히 기뻐하는 대신 베란다로 나가서 자기 뺨을 때린다. 그의 제한된 지각 안에서 세계는 불안정하게 흩어지고 있다. 비좁은 화면을 침범하는 소리는 그런 남편의 시야 바깥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암시한다. 텔레비전 소리와 아파트 단지에서 투신하는 사람의 비명이, 내연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의 신음과 절망한 남편에게 건네지는 시각장애인 연주자의 하모니카 소리가 그 안으로 접혀 들어온다. 소리는 그의 신체를 반응케 하고, 그의 반응은 숏의 윤곽을 결정한다. 아내의 외도를 ‘엿들은’ 남편은 집을 나서기 직전에 침실 문 앞에서 철봉운동을 한다. 그 자체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행동이지만, 정말 의문스러운 것은 그 장면이 놓여 있는 위치다. 절망감에 휩싸여 집을 떠나기 전에 왜 이런 운동을 하는 걸까. 심리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지 않는 행동은 논리적인 해석보다 몸짓의 연상으로 생각을 이끈다. 남편이 철봉운동을 할 때, 카메라는 떠오르고 바닥에 닿기를 반복하는 남편의 발을 포착한다. 이 모습은 이전에 남편이 마주한 아파트 단지의 추락사와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꿈속에서 베란다로 걸어나가던 남편의 감춰진 열망이자 창문 바깥에서 비명으로 들려오던 누군가의 추락을 떠올리는 충동과 연결되어 있다. 베란다에 나가고 단단하게 고정된 틀에 목을 거는 남편은 꿈을 꾸고, 운동을 하는 것이지만 같은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는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해 남편이 없는 집에 돌아와, 안정된 지지대를 잃어버린 듯 휘청이는 아내의 동작은 그에 조응하는 하나의 반응으로 작용한다. 아내는 남편이 남겨둔 단편소설을 읽고 화장실에서 구토한다. 소설을 읽고 구토하는 것은 표준적인 리액션을 넘어서는 반응이다. 구토하는 아내의 옆에는 남편이 사둔 화분이 놓여 있다. 그것은 아내가 내연남과 외도를 벌이던 순간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 모습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물이기도 하다. 아내가 건넨 돈은 남편이 구매한 화분으로, 이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남편을 환기하는 기호로 옆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지금 아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부부의 이야기를 중단한다. 이 장면들은 표면적으로 남편이 집을 떠나고 아내가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한 가지 결말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남편이 자살을 선택하고 아내가 그 시체를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부부의 파국적인 가능성을 배면에 품고 있다. 유토피아에 도착하기까지 그 자리에서 <희망의 요소>는 1년 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이야기 전개나 인물의 심리와는 상관없는 비약의 지점이다. 과감하게 시간을 넘어서는 선택이 두 사람을, 혹은 영화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것은 인물들의 결단에만 기댄 결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감정적 선택도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일관된 맥락에도 기대지 않는 태도를 갖춤으로써 이 영화는 제목에 적시된 ‘희망의 요소’를 발견하고자 한다. 부부는 단지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던 공간에서, 그들을 둘러싸던 환경적 규정에서 벗어난다.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글을 쓰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육체노동자로 변하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이 아니라 낯선 장소에 도착한 여행자가 된다. 서울을 떠나 속초에서 재회한 부부가 아무런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에 도착하는 여정은 그러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토로 영화의 지각을 안내하는 경로가 된다. 하지만 1년 뒤의 세계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기쁨으로만 이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절망을 극복한 화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에게 한 가지 제스처가 필요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술에 취한 부부가 노래방에 앉아 남편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연출자의 계획대로라면 이 장면에서 남편이 부르는 노래는 2절까지 쭉 이어졌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입을 맞추는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화면에 흐르던 목소리는 중단된다. 연출자는 배우가 선택한 우연적인 충동을 수용해 원래 계획을 버리고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포옹으로 장면을 지속한다. 입맞춤과 포옹이라는 사랑의 몸짓은 이 순간 장면의 형식을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몸짓이 된다. 아내는 노래를 부르는 남편에게 입을 맞춘다. 이 제스처는 두 사람의 불안을 촉발하고, 1년 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서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잠시라도 위기는 없을 것이다. 1년 만에 재회한 부부가 횟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도, 횟집 바깥에 놓인 카메라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장면들에서 술에 취한 부부(를 연기한 배우)는 1년 전과 1년 뒤의 시간, 계획된 행동과 충동적인 몸짓, 목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미묘하게 진동한다. 영화와 입맞춤 목소리가 지워지고 두 사람의 몸이 맞닿는 지점, 사랑과 의심, 따뜻한 환대와 기각되지 않은 불안이 뒤섞인 그 자리에서 부부의 관계는 새롭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사의 논리가 제공하는 결말도, 인물들의 심리적인 선택에서 비롯되는 상태도 아니다. 첫 장면을 구성하고 있던 두 신체의 접촉과 목소리가, 두 신체의 접촉과 침묵이라는 형태로 대응을 이루며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입맞춤과 같은 돌연한 신체적 행위가 된다. 목소리를 발명한 유성영화는 역설적으로 언제든 그 소리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감각을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희망의 요소>의 무대에서도 소리만큼은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리우며 부부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지우는 영화의 한 장면은 소리의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무성적 이미지가 된다. 부부는 그들의 미약한 몸짓으로 잠시나마 발화를 중단하는 침묵의 순간을 발견한다. 비록 그 몸짓은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두 사람의 시간에 누락된 한 가지 모습을 되돌려준다. 입맞춤과 포옹은 그렇게 두 부부가 나누는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소리를 중단하는 연인의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는 혼자 남겨졌을 때만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는 동질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운용하는 파편화된 숏의 연쇄에서 그들의 동질성은 발견될 수 없었다. 같은 순간에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영화는 노래가 멈추고 침묵이 이어지는 순간을 수용한다. 이 영화가 1년 뒤 부부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면, 그 포옹이 지속되는 순간에 문득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에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부부는 노면전차를 타고 도시로 향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부부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한다. 연인의 위기는 무성영화와 모던시네마의 한 기점을 증언하는 형식이면서 또한 현대 영화가 직면한 주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에서 사이가 멀어진 커플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서 도시에서 헤어진 연인은 정글에서 다시 깨어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아내는 3년 만에 되돌아온 죽은 남편과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파국에 이르기 직전의 연인을, 머물던 집을 벗어나 다른 도시와 구역으로 향하는 커플을 찍는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 영화의 믿음을 새롭게 갱신하는 시도임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오래 지속되거나 영구적으로 정박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희망의 요소>에서 아내는 남편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희망의 요소’가 무엇인지 끝내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부부가 찾은 희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내의 일터에 누군가 찾아온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화면 바깥에 있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카메라는 장면을 멈추고 영화를 끝내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기획] 풍경과 실존의 몽타주: ‘화이트 노이즈’ 소설과 영화 나란히 보기

돈 드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물이다. 영화는 3부로 나뉜 소설의 구성을 동일하게 취하고 있으며, 굵직한 사건과 장면 묘사뿐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 상당 부분을 원작으로부터 가져왔다. 그러나 높은 모사율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은 여전히 소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드릴로의 소설은 영화로 옮기기에 까다로운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크게 두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다. 백색소음처럼 무의미한 정보와 소비주의 시스템이 현실을 대체해버린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과, 그 풍경 너머에 잠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실존적 고민. 전자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현상을 분석하는 문화 비평의 자리를 요한다면, 후자는 인물을 향한 심리적 공감과 이입이라는 드라마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이 직면한 문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풍경과 실존을, 비평과 드라마를 몽타주할 수 있을까?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가 소설과 극명한 노선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오프닝 장면이다. 소설은 개강을 맞아 기숙사를 방문한 스테이션왜건의 행렬을 지켜보는 잭(애덤 드라이버)의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영화는 소설의 3부에 언급되는 머레이(돈 치들)의 자동차 충돌 세미나를 먼저 보여준다. 머레이는 미국의 B급영화에 등장하는 충돌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거기서 폭력이 아닌 “미국식 낙관주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자동차 충돌은 항상 이전보다 향상된 영화의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충돌의 현장은 진보라는 전통적 가치와 믿음을 재확인하는 축제의 장인 셈이다. 자칫 폭력의 스펙터클을 즐기자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어딘가 찝찝한 머레이의 말은 영상이 보여주고 있는 폭력이 언제든 테크놀로지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가상임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현실을 가상화하는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암시하고 있는 대로 영화 <화이트 노이즈>가 그리는 80년대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핑센터, 재난 시뮬레이션과 같이 가상화된 현실이 실제를 압도하고 있다. 한편 머레이의 강연은 이후 영화에서 펼쳐지는 일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유해 물질을 실은 화물 기차가 트럭과 충돌해 죽음처럼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 광경은 앞서 머레이가 보여준 충돌 장면들과 겹쳐 보인다. 사람들은 이 인재(人災)를 가상과 합성된 재난으로 받아들인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을 시뮬레이션을 위한 모델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나 재난의 스펙터클 앞에서 들뜬 잭의 아이들의 흥분 상태를 보자. <화이트 노이즈>의 오프닝은 영화를 매개로 재난을 가상화하면서 희망을 날조하는 시대의 풍경을 예비한다.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잭은 자신의 방에서 수상한 사람의 실루엣을 본다. 잭 앞에 의미심장하게 나타나는 묘령의 인물은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물론 영화의 끝에 가면 이 남자가 바벳(그레타 거윅)이 먹는 알약의 음모에 얽힌 ‘미스터 그레이’였음이 드러나지만, 그전까지 영화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를 유보하면서 섬뜩한 미스터리로 남긴다. 남자는 잭이 가진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공포가 형상화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 이후 잭은 유독 물질에 노출되었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밀착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 이전부터 잭에게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따라다녔다. 대학에서 히틀러 학과의 학과장을 맡고 있는 잭을 두고 소설 속 머레이는 “어떤 사람들은 삶보다 더 크죠. 히틀러는 죽음보다 더 크고요. 그(히틀러)가 선생님(잭)을 보호하리라고 생각하셨겠죠”라고 말한다. 머레이는 백색소음처럼 잭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의 공포를 보았고, 잭이 자신의 공포를 히틀러의 존재로 위장하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히틀러와 잭을 겹쳐놓으려 한다. 잭이 강연하는 장면에서 히틀러의 얼굴을 상영하는 영사기의 빛은 정확하게 잭의 얼굴 윤곽 위로 떨어진다. 소설에 없는 영화만의 표현 양식이다. <화이트 노이즈> 전체를 가족의 이야기로 좁히자면 바벳이 복용하는 약의 정체를 잭이 추궁하고 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여정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약물전달체계인 다일라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약이다. 바벳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극심했기에 임상실험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주요 책임자였던 그레이와 성적 거래를 통해 다일라를 얻는다. 진상을 알게 된 잭은 그레이를 살해할 계획을 갖고 모텔을 찾아간다. 소설에서는 사건과 수습을 모두 잭 혼자서 감내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레이가 잭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잭의 뒤편에서 갑자기 바벳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함께 위기를 수습하고 나란히 피를 흘리면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한다. 영화가 개인의 실존보다 가족 드라마에 무게를 실은 선택의 결과물이다. 한편 <화이트 노이즈>의 소설과 영화 모두 마지막 종착지는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은 전의식적 쾌락에 둘러싸여 상처받은 자본주의의 영혼을 회복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슈퍼마켓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예고 없이 진열대가 바뀐 것이다. 사람들은 낯선 진열대 앞에서 방향과 위치 감각을 상실한 채 물건들 사이를 헤맨다. 한편 영화는 소설처럼 신자유주의의 징후를 암시하는 대신 슈퍼마켓의 한가운데로 돌아가 죽음을 잊을 것을 종용하는 허무주의적 엔딩으로 도달한다. 정해진 안무를 반복하며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과장된 몸짓 속에서 극대화된 가상성에는 실존의 주름이란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이 쓰인 80년대 레이건 집권 시기와 작금의 포스트 팬데믹 시기는 급격히 보수화된 사회와 각종 음모론으로 진통을 겪는다는 점에서 꽤나 닮아 있다. 그러나 시대정신이 전파되는 매체의 종류와 성질에서 비가역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80년대와 작금의 미국을 겹치는 바움백의 몽타주는 희미한 백색소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고 봅시다 잭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파나소닉”(panasonic)이라고 읊조리는 바벳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교롭게도 이때 보이는 것은 파나소닉의 로고가 박힌 전자시계다. 일본 전자회사의 이름이자 초국가적 상표인 파나소닉은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여기서는 ‘공포(panic)의 소리’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단어에 의미심장한 순간을 부여하는 것은 <화이트 노이즈> 전체의 미학과도 공명한다.

[인터뷰] 정희진 편집장이 말하는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가 시작된 배경

- 2022년 연말에 텀블벅에서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론칭 프로젝트가 올라왔을 때 놀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정희진’과 ‘팟캐스트’는 생소한 연결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공개된 ‘편집장의 인사’에서 팟캐스트를 라디오라고 칭하시더군요. (웃음) = 전 아직도 앱이 뭔지 잘 모르고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 제안이 왔을 때 팥빵이라고 검색해봤어요. 뭐, 덕분에 팥빵 칼로리를 알게 되었지요. 매체라는 것이 잡지, 라디오, 팟캐스트, 텔레비전 같은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확장시키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죠. 매체가 너무나 많아지면 다들 자아가 비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발전주의, 자본주의를 저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속에 뛰어들어 협상에 참여할 수는 있겠죠. <정희진의 공부>에서는 지구가 이미 파산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으리란 심정으로 공부할 겁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도 김어준씨 독자보다는 김혜리 선생님의 독자가 많은 게 세상에 좋은 거겠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거 쓰셔도 됩니다. (웃음) - 지난 25년간 신문, 방송 인터뷰도 대부분 거절하고 오직 글쓰기와 오프라인 강의 위주로 활동하셨는데 팟빵은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 지난 몇년 동안 한국 사회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소진되고 환멸에 시달렸어요. 극도의 절망,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필요한 시기에 팟빵에 발목이 잡힌 거지요. 긍정적인 의미의 앵커링(anchoring)이라고 할까. 거기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렇게 기본급이 보장되는 일을 하면 그 덕에 연구와 논문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 이제는 강의를 너무 많이 하면 지쳐요. - 벌써부터 <정희진의 공부>가 보탬이 되어 선생님이 원하는 글쓰기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작업하길 바라는 응원의 댓글들이 보입니다. = 저는 원래 강단에 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어요. 첫째, 우리나라 대학교에 취직을 하면 글을 못 써요. 잡무가 너무 많으니까. 둘째, 시간강사를 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했지요. 생계는 중요하니까. 내가 바라본 한국 대학 사회는 지금 지식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예요. 그리고 학교가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대학 내외부에는 인문학자가 너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고통도 봤어요.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글쓰기가 자기소개서인데 그걸 쓰지 못해서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보다 못해 자기소개서 쓰는 수업을 열었어요. 명색이 대학 강의인데 강의명을 ‘자기소개서 쓰기’로 지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붙여봤죠. 자기 재현의 윤리. (웃음) 저는 이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은 완전히 사라진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스스로 단 한번도 연구자, 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프로필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건 만드는 분들이 정리해주신 거고. 전 그저 어떤 연구를 지향하는 사람이지요. 그외 어떤 정체성도 없어요. 유일하게 있다면 당비만 내는 녹색당 당원? ㅇㅇ동 주민? - <정희진의 공부>는 총 5개의 코너로 전체 5~6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꾸리셨더군요. 가장 먼저 어떤 코너부터 생각하셨어요? = ‘한 장면의 인생’이죠. 모든 영화는 인문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앎의 쾌락과 약간의 통증’은 원래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제목이었는데 나중에 바꿨습니다. 카피 뽑는 일엔 능숙해요. 신문 칼럼 보낼 때도 소제목까지 전부 다 써서 보냅니다. 편집자는 노동을 덜해서 좋고 나는 가장 정확한 제목으로 칼럼이 전달되니까 좋고. 한참 일을 많이 할 때는 일주일에 <한겨레>에 한편, <경향신문>에 한편, 두 신문에 글을 같이 썼어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피해자들이 하는 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를 정권 교체기에 정치 보복이 반복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머니볼>의 1루수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공이 나한테 올 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핍니다. 오직 대사 한줄로 영화 밖의 새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 전 그게 좋아요. 누구에게나 인상 깊은 대사 하나쯤은 있지요.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이미 그 영화의 내용을 다 아는데 또 굳이 거기에만 끼워 맞출 필요는 없지 않나요? 대사 하나, 표정 하나, 어떤 순간 하나가 함유하고 있는 굉장한 구조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고 싶죠. 전형적인 고기능성 우울증인 저는 그저 살아갈 뿐, 1초도 인생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머니볼>의 많은 대사 중에서도 거기 꽂힌 거죠.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멀쩡한 얼굴을 한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많은 거지요. 다음에 한번은 <나의 해방일지>를 다루려고 해요. ‘추앙’을 도대체 어떻게 번역하겠어요? ‘worship’이라고 하기엔 추앙은 너무나 복잡한 말이지요. 사랑도 존경도 존중도 아닌, 추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10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나온 대로, “나를 써야만 비로소 획득되는 맥락” 혹은 “벼랑 끝에 서서 바라보는 부분적 관점으로의 읽기”가 선생님의 영화 비평이 갖는 독창성의 핵심이군요! = 제가 가르치는 게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이에요. 우리 몸이 모두 개별적이고 각자가 처한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떤 접점에서 만나는 거지요. 소통을 마치 ‘힐링’처럼 강조하는 사람은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조심해야 해요. 몸의 개별성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그 불가능성부터 사유해야죠.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느낀 무력감과 열패감에 관한 글도 기억납니다. 그 영화에 관해선 다들 아름다움에 대해 쓰기 바빴는데요. = 동성애 영화는 대부분 클래스 문제를 빼놓고 말하죠. 그러면 발전할 수가 없어요.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난하고 그들 내부에서도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그런 것들은 전부 소거되어 있고…. 무엇보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웃음) 학자인데 영화 속에 공부하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잖아요.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걸 마주할 때의 감정을 쓴 거예요. 같은 사안에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가가 그 사람의 정치학을 보여줍니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은 허상이고, 감정이야말로 정치의 최종심급이기 때문이지요. -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 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글쓰기를 실천하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타자)이 되는 삶” 혹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희진의 공부> 2월호 토크 콘서트 ‘사도 바울과 인문학’) 것은 과연 동시에 가능한가요? =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나를 변형(transform)한다는 의미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죠. 제가 ‘혼합’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물 ‘수(水)’ 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은, 한번 섞이면 절대 돌이킬 수가 없지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로만 머물지 않고 자꾸 나를 비우고 상대방에 빙의하자는 겁니다.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거지요. 혼합 중 제일은 말을 섞는 것이라 생각하고요. 우리가 말을 제대로 섞고 난 뒤의 친밀감, 그로 인한 변화는 굉장하지요. *이어지는 기사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비평] ‘애프터썬’, 형식이라는 강박관념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프터썬>이 형편없는 영화는 아닐 테지만 동시대 예술영화의 고착된 문제를 드러내는 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많은 장면에서 표준화된 예술영화가 의존하는 진부한 전략이 대안적 형식이라는 미명하에 돌출되어 있다. 적잖은 평론에서 그것을 탁월한 영화적 효과로 받아들이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애프터썬>이 전하는 내용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신 이 영화가 구사하는 형식적 전략과 효과가 과연 흔쾌히 호평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되묻고 싶다. 돌출된 미적 전략 <애프터썬>에는 두 차례 반복해서 제시되는 상황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뒤 중반부에서 다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캠코더를 든 소피가 아버지 캘럼에게 장난스럽게 질문을 건네는 순간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이 순간은 소피가 촬영하는 캠코더 화면으로 묘사되지만, 뒤에서는 탁자를 향해 고정된 앵글에 텔레비전에 비친 소피와 캘럼의 반영된 이미지로 변형돼서 나타난다. 첫 장면에 쓰이고 다시 한번 반복될 만큼 주의 깊게 강조되는 이 장면의 구도는 <애프터썬>이 구축한 미적 전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다수의 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캠코더, 느닷없이 던져지고 나서 뒤늦게 밝혀지는 상황의 의미, 텔레비전에 반영된 이미지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이런 효과에 그 자체로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애프터썬>은 많은 장면에서 지적인 인식을 유도하기 위한 구도와 배치가 언제나 인물들이 직면한 상황에 앞선다. 이 장면의 생김새는 언뜻 심오한 연출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고전적 데쿠파주를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을 드러낼 뿐이며 화면 내에서 충분히 활용되었어야 할 인물의 시선과 동작을 무시한 결과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소수의 관객과 비평가들이 알아보도록 노골적으로 조율된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장면에 설계된 장치를 인지하고 해독하는 절차다. 이 순간,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숏의 활동을 억제하고 의미를 설계하려는 감독의 흔적이 스크린 위로 불필요하게 묻어나온다. 이처럼 장면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들이 숏의 표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지워지는 것은 샬롯 웰스가 수행했어야 하는 ‘연출’이라는 문제다. <애프터썬>이 기록장치를 매개로 아버지와 딸이 공유한 기억을 돌아보는 영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캠코더와 꺼진 TV에 비친 인물의 형체와 플래시백이라는 전제가 동원되는 것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면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 완료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체적인 숏의 세부로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가 마련하는 연출의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실천되고 있는가? <애프터썬>이 취한 미적 형식에는 바로 그 구체적인 연출의 방법이 희미하다. 속되게 말한다면 <애프터썬>은 장면을 구상하는 개념적 도식이 큰 비중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 비해, 연출자가 어떻게 연기를 지도하고 동선을 짜고 배우들의 시선과 동작을 조정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영화다. <애프터썬>에서 장면의 쓸모와 의미는 특정 위치에 사물이 놓이고 인물이 자리 잡을 때 일찌감치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화에서의 연출이라기보다 낡은 사진적 배치에 가까울 것이다. 샬롯 웰스는 캠코더 화면의 물질성, 주체와 시점이 모호한 플래시백, 반영된(reflection) 이미지라는 숏의 미적 디자인에 의존하면서 화면 내부를 밀도 있게 운용해야 하는 연출의 업무를 방치한다. 연출자의 역할이 현장에서 연기를 지휘하고 장면의 길이를 조절하는 업무에 있다는 고전적 문제의식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잠>과 <키스>, 또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처럼 장면의 긴 지속 시간을 받아들여 개념적으로 설계된 형식과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을 결합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연출자가 촬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탁월한 ‘연출’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명제를 급진적으로 증명해낸다(워홀은 종종 자신의 촬영 현장을 벗어났으며,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를 찍는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프터썬>이 의존하는 숏의 개념적 전략은 설정된 장면의 목적에 가닿는 것도, 예기치 않은 우연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렴풋하게 뭉뚱그려진 미적 조합으로 완결된 의미를 방사할 뿐이다. 두 차례 반복되는 소피와 캘럼의 대화 장면에 연출자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 장면을 포함해 <애프터썬>의 많은 장면에서 ‘연출’을 발견하지 못했다. 숏이 겨냥하는 바는 결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불확실한 면모가 개입할 여지는 현저히 적다. 대신 심미적 프레이밍을 위해 인물의 움직임을 철저히 억제하고, 장면에 담기는 정보나 변화에 비해 숏의 지속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관성적인 호흡이 주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 감각은 언제나 보편적 수준의 일반화로 휘발된다. 무균실로서의 시공간 잘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애프터썬>에서 적극적으로 환기되는 정서 가운데 하나는 유년기의 성적 긴장감이다. 소피는 화장실 열쇠 구멍 사이로 전날 있었던 성행위에 대해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영장에서 밀접하게 서로를 만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밤중에 게이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낯선 성적 체험이 소피의 시야에 침입하는 순간들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긴장을 충전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피는 우연히 마주친 또래 남자아이 마이클과 밤의 수영장에서 키스하기에 이른다. 도발적인 독해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소피의 시선에 포착되는 성적 긴장이 소피와 캘럼이 함께 있는 장면에도 침범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손을 붙잡는 장면의 질감에 근친상간적 긴장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프터썬>의 기록엔 레즈비언 커플로 부모의 입장에 선 소피가 실현되지 않은 유년기의 불온한 에로스를 되돌아보는 시선이 결부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문제적인 면모는 편재하는 성적 긴장이 아니라 그것을 미심쩍은 방식으로 억제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무균적 시공간을 내세우는 것이다. 소피와 캘럼이 머무는 호텔과 그 주변은 문자 그대로 청결하게 세공된 무대다. 이곳에선 소피와 조금이라도 관련 맺지 않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카메라에 보이지도, 마이크에 채집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공사 중인 호텔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소피와 캘럼의 근처를 맴돌아야 한다. 두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 기억을 빌려 펼쳐지는 시공간이라는 절대적 전제로 모든 현상을 회피할 순 없다. <애프터썬>이 소피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낯선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세계다. 더 나아가 영화는 소피가 다른 사람과 만나며 겪는 (성적 긴장과 결부된) 불안과 위협마저도 철저히 차단한다. 이를테면, 캘럼과 다투고 나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소피가 마이클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마이클은 함께 있는 남자아이 무리를 가리키며 소피에게 “우리랑 놀래?”라고 제안한다. 혼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여자아이와 그에게 접근하는 여러 남자아이들의 모습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촉발하게 한다. 더군다나 소피는 지금 캘럼과 떨어져 있다. 그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진 듯한 위태로움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수영장에서 키스하는 소피와 마이클 단 두 사람의 모습이다. 이 경험은 불안하지도, 특별한 인상으로 남지도 않는다. 유년의 소피는 아무런 굴곡 없이 31살의 레즈비언 소피가 될 것이다. 이곳은 일탈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듯 불길한 예감은 회피되고 소피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캘럼에게로 돌아간다. 성적인 유혹과 불안정한 일탈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버지가 느끼는 위태로운 감정에(만) 정확히 접속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설정한 서사적 기획이므로 다른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샬롯 웰스는 타인의 불순한 흔적이 지워진 도착적인 무대를 그려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공된 영화적 무대의 기능이 노출된다. 주관적 기억에서 출발해 보고 들은 적 없는 순간까지도 플래시백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애프터썬>의 기록은, 개인이 간직한 기억의 부피를 초과해 타인에게 접속하고 비로소 아버지라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비추는 공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오직 소피와 캘럼, 두 사람의 감각으로만 수렴되는 영화적 지각의 수축성이다. 그들 바깥에는 위협적인 기억도, 세상의 잡스러운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프터썬>이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인식을 넓히려는 시도라면, 현실의 공간을 주변화하면서 세공된 무대 바깥의 얼굴과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형식은 기만적이다. 웰스가 세운 미적 전략은 여기서 다시 한번 심미적으로 자족하는 장치일 뿐, ‘연출’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 더 나아가 영화가 시도하는 ‘연출’을 훼손하는 독립적인 장치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해버린다. 장면의 미적 전략이 영화 내에 잠재하며 서로 다른 숏들과 일관된, 또는 의도적으로 불화하는 구성을 이루는 대신 그 자체로 영화를 규정하는 실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조정하는 감독의 터치는 작품 속 세계를 부자연스럽게 왜곡하는 덧칠이 된다. 나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장면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장면들이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거듭해서 받았다. 자율적 활동이 억제된 숏은 빈곤한 개념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 전신 마비에 걸린 영화 존 부어먼은 언젠가 장 뤽 고다르가 전해준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다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들려면 젊고 무식해야 한다. 우리만큼 많이 알면 영화 만들기는 불가능해진다.’ 고다르의 말은 연출자가 모든 문제를 예견할 수 있으면 결국 전신 마비만 일으킬 뿐이라는 뜻이었다.” 존 부어먼과 샬롯 웰스는 일견 어떤 접점도 없는 연출자 유형처럼 보이지만, <애프터썬>을 보고 나오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것은 부어먼이 언급한 영화의 전신 마비라는 비유적 상태였다. <애프터썬>의 정적인 장면들은 시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해결해야 할 특수한 주제나 역학을 구현하는 데서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연출의 방기에서 오는 무성의한 화면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샬롯 웰스라는 이 젊은 감독은 그럴듯한 외형으로 치장된, 그러나 지나치게 유식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유식함이란 동시대 예술영화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형으로 옹호받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심술궂게 말하자면, <애프터썬>은 주류영화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툴게 감추면서 가장된 저항의 형식을 취해 보는 이들을 지적으로 호객하는 예술영화의 욕망을 드러낸다.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짐짓 대안적인 형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구는 이중의 열망이 이 영화의 설계도에는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다(과거였다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으는 영화들에서 쉽게 보이는 욕망과 감수성이라 치부할 만한 이런 경향은, 이제는 칸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로카르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무사히 환대받을 것이다). 영화의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탈해 다른 형식을 제안하던 지난 세기의 시도를 통속적으로 ‘예술영화’라 불렀다면, 오늘날 그 명칭은 부지런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호평받는 영화적 표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패턴화된 규범으로 의미를 옮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영화’라는 표현의 쓰임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이 유통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애프터썬>은 동시대적 예술영화의 양식에 철저하리만큼 충실한 작업이다. 이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에겐 깊은 오명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