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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기획] 네 가지 키워드로 보는 2023 시리즈 신작 경향

1.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사극 열풍 2023년은 다양한 채널에서 사극 시리즈 방영을 준비 중이다. 먼저 하반기 방영 예정인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한 1010년부터 귀주대첩으로 완승을 거둔 1019년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tvN에서 2월 초 방영 예정인 <청춘월담>은 박형식, 전소니, 표예진 주연으로 미스터리한 저주에 걸린 왕세자와 어쩌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천재 소녀의 로맨스를 그려낸다. 웹소설 <구르미 그린 달빛>을 집필한 윤이수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시의 신루>는 집현전을 배경으로 천체를 좋아하는 왕세자와 미래를 보는 해루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외에 이동욱, 김소연 주연의 tvN <구미호뎐1938>, 남궁민, 안은진 주연의 MBC <연인> 등 다양한 사극이 이어질 예정이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김지하 MBC 드라마 프로듀서는 “정통 사극의 틀을 벗어난 퓨전 사극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전통적 아름다움과 현대적 가치를 조화시키는 게 중요한데 MBC <옷소매 붉은 끝동>도 실존 인물을 두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강조했고 tvN <슈룹>에서도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중전을 새롭게 보여줬다”며 추세에 관해 설명했다. 동시에 사극은 글로벌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 김지하 프로듀서는 “세계 시장에서 K콘텐츠를 넘어 사극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 KBS <연모>도 제50회 국제 에미상 시상식에서 국내 최초로 텔레노벨라 부문을 수상했다. 전세계적 호응에 따라 사극 제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며 올해 한층 더 커진 사극 장르의 활기를 설명했다. 이어 “한국사에 굴곡이 많아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고, 과거의 제한된 환경이 감정을 더 고조시킨다”며 인기 요인을 짚어냈다. 2. 시리즈물의 복귀 전작의 흥행에 힘입어 속편을 제작한 시리즈물이 돌아온다. 2021년 은밀한 사적 복수 대행 서비스를 다루었던 SBS <모범택시>가 이제훈, 김의성, 표예진, 장혁진, 배유람 등 주역 그대로 시즌2를 공개한다. 이어 시즌1, 2 모두 두터운 팬층을 만들었던 SBS <낭만닥터 김사부>도 시즌3로 돌아온다. 시즌2 종영 이후 2년 만에 한석규, 안효섭, 이성경이 전편의 재미와 감동을 그대로 이어갈 예정이다. <낭만닥터 김사부> 제작을 진행하는 홍성창 스튜디오S 제작국장은 “한국에서 시즌3까지 온 드라마는 <낭만닥터 김사부>가 유일하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배우들이 드라마의 세계관을 진실되게 받아들이고 강은경 작가를 향한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며 “시리즈는 이미 시청자의 공감과 이해를 얻은 상태에서 가치관을 확장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3 제작의 의의를 전했다. 이외에도 tvN <경이로운 소문> 시즌2와 넷플릭스 시즌2도 2년 만에 시청자를 찾을 예정이다. 3. 웹툰, 웹소설과 함께하는 IP 전성시대 지난해에 이어 웹툰,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다양한 드라마·시리즈가 이어진다. 글 매미, 그림 희세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마스크걸>은 고현정, 염혜란, 나나의 출연 소식을 알리며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외모 콤플렉스가 심한 김모미(고현정, 나나)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방송 BJ로 활동하다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웹소설의 영상화를 증폭시킨 <재벌집 막내아들>이 고공행진으로 막을 내린 후 2023년에도 그 열기를 이어간다. 먼저 웹소설 IP 기반의 사극 <꽃선비 열애사>는 하숙집 객주 이화원의 주인 윤단오(신예은)와 비밀스러운 하숙생 꽃선비 3인방의 예측 불가 로맨스를 선보인다. <꽃선비 열애사>를 제작하는 김희열 팬엔터 부사장은 “원천 IP 의존도가 높은 지금 웹툰보다 전개 속도가 빠른 웹소설에 대한 주목도가 커지고 있다. 짧은 글을 통해 독자들을 이해시켜야 하는 장르 성격상 서사 구조가 단순하고 직관적이다. 다만 글로 모든 것을 묘사해야 해서 캐릭터 설명이 구체적이고 풍부하다”며 IP로서 웹소설이 가진 장점과 특징을 설명했다. 웹툰 원작의 드라마화도 여전히 뜨겁다.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된 <국민사형투표>는 1억3천만 조회수를 기록 중인 작품으로 박해진, 박성웅, 임지연의 출연을 확정하며 드라마화 소식을 알렸다. 김희열 부사장은 “웹툰 IP 선정에 있어 절대적 기준은 없지만 공감성과 전개성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시청자가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이 주요 핵심이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여지가 있는지도 눈여겨봐야 한다”라며 <국민사형투표>를 드라마로 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티빙 <방과 후 전쟁활동>, 넷플릭스 <살인자ㅇ난감> 등이 공개를 앞두고 있다. 4. 편성 변화 드라마·시리즈 산업에 나타나는 새로운 경향도 있다. 먼저 KBS는 올해 잠정적으로 수목극 편성에 휴지기를 갖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에 따라 1월2일 공개한 정용화, 차태현 주연의 <두뇌공조>도 월화극으로 편성을 바꿨다. 수목극이 방송가의 황금시간대인 만큼 KBS의 파격적 결정에 자연스레 이목이 쏠리고 있다. 현재 수목극 시간대에는 지난 2021년에 종영한 <연모>가 방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요인으로는 지난해 수목극 시청률 부진이 꼽힌다. <너에게 가는 속도 493km>와 <당신이 소원을 말하면>은 시청률 1~2% 사이를 전전했고, <징크스의 연인>은 3~4%에 머물렀다. 이에 대해 강규원 KBS 편성팀장은 “외부적으로 파격적인 결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KBS 내부에서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내용이다. 외부 콘텐츠 제작사와 비교하면 투자 대비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결정의 배경을 설명했다. 공영방송사라는 정체성도 콘텐츠 확장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 다양한 스토리 소재나 구성, 연출과 언어 표현 등을 OTT 시장만큼 자유롭게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당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방송가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MBC 드라마기획팀의 한 관계자는 “편성 공백을 채우기 위해 새 시리즈를 급하게 방영하는 것보다 제작 중인 작품을 질적으로 보완하거나 더 나은 콘텐츠를 발굴해 방영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보인다. 레거시 미디어에도 기존의 편성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며 대안의 의미를 설명했다.

[비평] ‘희망의 요소’, 더이상 목소리를 들을 수 없어

닫힌 문 사이로 소리가 들린다. 내연남과 통화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소심한 남편은 아내의 외도를 외면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요소>의 주된 무대인 부부의 집에서 소리는 프레임의 견고한 경계를 넘어 들린다.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남편은 아내와 대화하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집 안에 진동하는 하수구 냄새를 맡지도 못하지만, 실내에 울리는 소리만큼은 분명하게 듣는다.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가 화면에 침입하지 않는다면, <희망의 요소>의 영화적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 안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채로, 상대를 바라보지도 않고 주변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남자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듣는다. 첫 장면은 선언적이다. 4:3 비율의 비좁은 화면 위로 아내의 상처난 발과 발을 붙잡는 남편의 손이 나타난다. 어떤 설명도 없이 누군가의 손과 발이 과감하게 스크린에 떠오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개입하는 것은 프레임 바깥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부부의 목소리가 화면 위로 들려온다. 소리의 근원인 얼굴과 결합하지 않는 목소리는 실내 공간을 부유하듯이 전해진다. 목소리는 건조해진 부부의 관계를 드러내고, 화면을 지탱하던 시각적 구도에 긴장을 부여한다. 소리는 그 자체로 인물들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하나의 문제이자 바깥의 사건이며, 프레임에 형성되는 외화면과의 갈등이다. 단 두 사람의 스탭으로 만들어진 열악한 제작조건의 한계를 고스란히 영화의 태도로 삼으려는 듯 영화를 움직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남겨두는 첫 장면에서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목소리다. 그것은 프레임을 초과하고, 고정된 구도를 침범한다. 결혼의 풍경 <희망의 요소>의 연출자이자 프로듀서를 제외한 모든 역할을 도맡은 이원영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택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한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며 단편소설을 쓰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으로 일한다. 아내에게는 다른 남자가 있으며, 남편과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이 단순한 서사는 영화의 표면에 아무런 치장도 덧대지 않은 맨몸을 적시한다. 특별한 이야기의 변화에 기대지 않는 부부의 감정적 위기는 영화의 근본적인 질문을 부른다. 상대방을 바라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다가갈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또 다른 근본적 질문과 함께한다. 두 사람의 시선과 행위와 반응을 조직하는 숏을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나눌 것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서도 부부는 같은 화면에 공존하지 않고 각자의 장면에 머물러 있다. 분리된 장면 속에서 남편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아내의 말투와 표정, 탄식과 한숨을 주시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면서, 나를 경멸하는 상대방이 보이는 반응을 그는 주의 깊게 바라볼 것이다. 장뤽 고다르는 “남자가 여자를 천천히 바라보는 순간은 그녀를 사랑할 때가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떠난다고 통보하고, 싫어한다고 이야기할 때”라고 말했다. <경멸>에서 시나리오작가 폴(미셸 피콜리)이 아내 카미유(브리짓 바르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고 물어보자 카미유는 “그래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실제 부부였지만, 위태로운 관계의 위기를 겪고 있던 아나 카리나를 주인공으로 선택한 <비브르 사 비>에서 고다르는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본다. 두 사람의 관계가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얼굴에 드러나는 신호를 예민하게 해석한다. 그녀의 표정은 관계의 지나온 시간을 가리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프레임을 조직하고 인물들의 시선을 빌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탐색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에서 부부의 위기는 그러므로 장면의 세부에 담긴 신체의 민감한 반응을 주시하는 필연적인 전제다. 이것은 결혼 생활의 위기를 다루는 단순한 서사가 <희망의 요소>의 단점이라고 말하는 몇몇 평자들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이야기에 의존하는 영화가 아니라 신발을 갈아 신고, 음식을 만들고, 글을 쓰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의 이해를 절실하게 바라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숏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위기에 노출된 권태로운 부부라는 설정은 서사를 견인하거나 일상적인 공감을 일으키는 요소가 아니라 신체적 영화를 성립시키기 위한 가장 작은 단위의 여건이다. <희망의 요소>는 하나의 신체적 증상이다. 상대의 행동에 반응하고 예상치 못한 충동에 사로잡히는 몸을 비추는 증상의 영화다. 그 신체가 머무는 부부의 집에는 고정된 프레임이 현실의 지각을 절단해서 제시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이 감돈다. 남편과 아내의 숏/리버스 숏이 이질적인 단면으로 잘려져 나타날 때, 일상적 공간이 파편화된 화면의 부정교합으로 변형되는 불안이 드리워 있다. 식탁에 앉은 아내와 소파에 있는 남편이 나누는 대화 장면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두 사람의 엇갈리는 시선으로 교차한다. 이 영화에서 공간을 파편적으로 나누는 장면의 운용은 신체와 목소리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도록 요구한다. 목소리는 분명 서로에게 가닿고 있지만, 두 사람이 머무는 장면들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 것처럼 어색함을 드러내며 이미지와 사운드에 대한 근본적인 조정을 제기하는 것이다. 좁은 화면비에 반복되는 행동들로 장면을 쌓아나가는 이 영화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를 조정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일그러뜨려 다르게 바라보는 시도가 된다. 목소리의 유혹 남편은 다니는 직장이 없고, 가족은 그를 빼놓고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는 간접적인 정보로만 주어진다. 아내와 불화하는 그에겐 삶을 지속하는 안정적인 형식이 없다. 꿈속에서 그는 단편소설이 신춘문예 수상작으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지만, 마음 편히 기뻐하는 대신 베란다로 나가서 자기 뺨을 때린다. 그의 제한된 지각 안에서 세계는 불안정하게 흩어지고 있다. 비좁은 화면을 침범하는 소리는 그런 남편의 시야 바깥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암시한다. 텔레비전 소리와 아파트 단지에서 투신하는 사람의 비명이, 내연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의 신음과 절망한 남편에게 건네지는 시각장애인 연주자의 하모니카 소리가 그 안으로 접혀 들어온다. 소리는 그의 신체를 반응케 하고, 그의 반응은 숏의 윤곽을 결정한다. 아내의 외도를 ‘엿들은’ 남편은 집을 나서기 직전에 침실 문 앞에서 철봉운동을 한다. 그 자체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행동이지만, 정말 의문스러운 것은 그 장면이 놓여 있는 위치다. 절망감에 휩싸여 집을 떠나기 전에 왜 이런 운동을 하는 걸까. 심리적인 인과관계에 근거하지 않는 행동은 논리적인 해석보다 몸짓의 연상으로 생각을 이끈다. 남편이 철봉운동을 할 때, 카메라는 떠오르고 바닥에 닿기를 반복하는 남편의 발을 포착한다. 이 모습은 이전에 남편이 마주한 아파트 단지의 추락사와 유사성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꿈속에서 베란다로 걸어나가던 남편의 감춰진 열망이자 창문 바깥에서 비명으로 들려오던 누군가의 추락을 떠올리는 충동과 연결되어 있다. 베란다에 나가고 단단하게 고정된 틀에 목을 거는 남편은 꿈을 꾸고, 운동을 하는 것이지만 같은 몸짓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있는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술에 취해 남편이 없는 집에 돌아와, 안정된 지지대를 잃어버린 듯 휘청이는 아내의 동작은 그에 조응하는 하나의 반응으로 작용한다. 아내는 남편이 남겨둔 단편소설을 읽고 화장실에서 구토한다. 소설을 읽고 구토하는 것은 표준적인 리액션을 넘어서는 반응이다. 구토하는 아내의 옆에는 남편이 사둔 화분이 놓여 있다. 그것은 아내가 내연남과 외도를 벌이던 순간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 모습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물이기도 하다. 아내가 건넨 돈은 남편이 구매한 화분으로, 이제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남편을 환기하는 기호로 옆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지금 아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남편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부부의 이야기를 중단한다. 이 장면들은 표면적으로 남편이 집을 떠나고 아내가 그의 부재를 확인하는 한 가지 결말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남편이 자살을 선택하고 아내가 그 시체를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부부의 파국적인 가능성을 배면에 품고 있다. 유토피아에 도착하기까지 그 자리에서 <희망의 요소>는 1년 후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이야기 전개나 인물의 심리와는 상관없는 비약의 지점이다. 과감하게 시간을 넘어서는 선택이 두 사람을, 혹은 영화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것은 인물들의 결단에만 기댄 결과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감정적 선택도 아니다. 반대로 그 어떤 일관된 맥락에도 기대지 않는 태도를 갖춤으로써 이 영화는 제목에 적시된 ‘희망의 요소’를 발견하고자 한다. 부부는 단지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던 공간에서, 그들을 둘러싸던 환경적 규정에서 벗어난다. 남편은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글을 쓰는 전업주부가 아니라 육체노동자로 변하고, 아내는 학교 교직원이 아니라 낯선 장소에 도착한 여행자가 된다. 서울을 떠나 속초에서 재회한 부부가 아무런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바다에 도착하는 여정은 그러므로 아직 밝혀지지 않는 영토로 영화의 지각을 안내하는 경로가 된다. 하지만 1년 뒤의 세계는 무조건적인 환대와 기쁨으로만 이루어진 유토피아가 아니다. 절망을 극복한 화해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에게 한 가지 제스처가 필요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한 장면, 술에 취한 부부가 노래방에 앉아 남편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그래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연출자의 계획대로라면 이 장면에서 남편이 부르는 노래는 2절까지 쭉 이어졌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입을 맞추는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화면에 흐르던 목소리는 중단된다. 연출자는 배우가 선택한 우연적인 충동을 수용해 원래 계획을 버리고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두 사람의 포옹으로 장면을 지속한다. 입맞춤과 포옹이라는 사랑의 몸짓은 이 순간 장면의 형식을 결정하는 하나의 결정적인 몸짓이 된다. 아내는 노래를 부르는 남편에게 입을 맞춘다. 이 제스처는 두 사람의 불안을 촉발하고, 1년 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장치로서의 목소리를 차단한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잠시라도 위기는 없을 것이다. 1년 만에 재회한 부부가 횟집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도, 횟집 바깥에 놓인 카메라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장면들에서 술에 취한 부부(를 연기한 배우)는 1년 전과 1년 뒤의 시간, 계획된 행동과 충동적인 몸짓, 목소리와 침묵 사이에서 미묘하게 진동한다. 영화와 입맞춤 목소리가 지워지고 두 사람의 몸이 맞닿는 지점, 사랑과 의심, 따뜻한 환대와 기각되지 않은 불안이 뒤섞인 그 자리에서 부부의 관계는 새롭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사의 논리가 제공하는 결말도, 인물들의 심리적인 선택에서 비롯되는 상태도 아니다. 첫 장면을 구성하고 있던 두 신체의 접촉과 목소리가, 두 신체의 접촉과 침묵이라는 형태로 대응을 이루며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장면이 지속되는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입맞춤과 같은 돌연한 신체적 행위가 된다. 목소리를 발명한 유성영화는 역설적으로 언제든 그 소리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감각을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희망의 요소>의 무대에서도 소리만큼은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리우며 부부의 위기를 심화한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지우는 영화의 한 장면은 소리의 질서에 저항하는 하나의 무성적 이미지가 된다. 부부는 그들의 미약한 몸짓으로 잠시나마 발화를 중단하는 침묵의 순간을 발견한다. 비록 그 몸짓은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두 사람의 시간에 누락된 한 가지 모습을 되돌려준다. 입맞춤과 포옹은 그렇게 두 부부가 나누는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소리를 중단하는 연인의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는 혼자 남겨졌을 때만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는 동질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영화가 운용하는 파편화된 숏의 연쇄에서 그들의 동질성은 발견될 수 없었다. 같은 순간에 눈물을 흘리고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영화는 노래가 멈추고 침묵이 이어지는 순간을 수용한다. 이 영화가 1년 뒤 부부의 모습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면, 그 포옹이 지속되는 순간에 문득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에서 죽음의 위기를 벗어난 부부는 노면전차를 타고 도시로 향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부부는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나폴리로 향한다. 연인의 위기는 무성영화와 모던시네마의 한 기점을 증언하는 형식이면서 또한 현대 영화가 직면한 주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에서 사이가 멀어진 커플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에서 도시에서 헤어진 연인은 정글에서 다시 깨어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해안가로의 여행>에서 아내는 3년 만에 되돌아온 죽은 남편과 시골 마을로 여행을 떠난다. 파국에 이르기 직전의 연인을, 머물던 집을 벗어나 다른 도시와 구역으로 향하는 커플을 찍는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 영화의 믿음을 새롭게 갱신하는 시도임을 우리는 명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란 오래 지속되거나 영구적으로 정박할 수 있는 유형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희망의 요소>에서 아내는 남편의 단편소설에서 발견한 ‘희망의 요소’가 무엇인지 끝내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부부가 찾은 희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다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내의 일터에 누군가 찾아온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화면 바깥에 있으므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카메라는 장면을 멈추고 영화를 끝내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기획] 풍경과 실존의 몽타주: ‘화이트 노이즈’ 소설과 영화 나란히 보기

돈 드릴로가 쓴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물이다. 영화는 3부로 나뉜 소설의 구성을 동일하게 취하고 있으며, 굵직한 사건과 장면 묘사뿐 아니라 인물들의 대사 상당 부분을 원작으로부터 가져왔다. 그러나 높은 모사율에도 불구하고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은 여전히 소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드릴로의 소설은 영화로 옮기기에 까다로운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은 크게 두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다. 백색소음처럼 무의미한 정보와 소비주의 시스템이 현실을 대체해버린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과, 그 풍경 너머에 잠재되어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실존적 고민. 전자가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둔 채 현상을 분석하는 문화 비평의 자리를 요한다면, 후자는 인물을 향한 심리적 공감과 이입이라는 드라마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화이트 노이즈>의 각색이 직면한 문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는 풍경과 실존을, 비평과 드라마를 몽타주할 수 있을까? 노아 바움백의 <화이트 노이즈>가 소설과 극명한 노선 차이를 보이는 것은 오프닝 장면이다. 소설은 개강을 맞아 기숙사를 방문한 스테이션왜건의 행렬을 지켜보는 잭(애덤 드라이버)의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영화는 소설의 3부에 언급되는 머레이(돈 치들)의 자동차 충돌 세미나를 먼저 보여준다. 머레이는 미국의 B급영화에 등장하는 충돌 장면들을 보여주면서 거기서 폭력이 아닌 “미국식 낙관주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자동차 충돌은 항상 이전보다 향상된 영화의 기술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그러므로 이 충돌의 현장은 진보라는 전통적 가치와 믿음을 재확인하는 축제의 장인 셈이다. 자칫 폭력의 스펙터클을 즐기자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기에 어딘가 찝찝한 머레이의 말은 영상이 보여주고 있는 폭력이 언제든 테크놀로지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가상임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현실을 가상화하는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암시하고 있는 대로 영화 <화이트 노이즈>가 그리는 80년대 미국 중소 도시의 풍경은 라디오와 텔레비전, 쇼핑센터, 재난 시뮬레이션과 같이 가상화된 현실이 실제를 압도하고 있다. 한편 머레이의 강연은 이후 영화에서 펼쳐지는 일에 대한 예고이기도 하다. 유해 물질을 실은 화물 기차가 트럭과 충돌해 죽음처럼 시꺼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 광경은 앞서 머레이가 보여준 충돌 장면들과 겹쳐 보인다. 사람들은 이 인재(人災)를 가상과 합성된 재난으로 받아들인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을 시뮬레이션을 위한 모델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나 재난의 스펙터클 앞에서 들뜬 잭의 아이들의 흥분 상태를 보자. <화이트 노이즈>의 오프닝은 영화를 매개로 재난을 가상화하면서 희망을 날조하는 시대의 풍경을 예비한다. 어느 날 새벽, 잠에서 깬 잭은 자신의 방에서 수상한 사람의 실루엣을 본다. 잭 앞에 의미심장하게 나타나는 묘령의 인물은 소설에 없는 설정이다. 물론 영화의 끝에 가면 이 남자가 바벳(그레타 거윅)이 먹는 알약의 음모에 얽힌 ‘미스터 그레이’였음이 드러나지만, 그전까지 영화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기를 유보하면서 섬뜩한 미스터리로 남긴다. 남자는 잭이 가진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공포가 형상화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독가스 유출 사건 이후 잭은 유독 물질에 노출되었다는 선고를 받고 죽음과 밀착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사고 이전부터 잭에게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따라다녔다. 대학에서 히틀러 학과의 학과장을 맡고 있는 잭을 두고 소설 속 머레이는 “어떤 사람들은 삶보다 더 크죠. 히틀러는 죽음보다 더 크고요. 그(히틀러)가 선생님(잭)을 보호하리라고 생각하셨겠죠”라고 말한다. 머레이는 백색소음처럼 잭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던 죽음의 공포를 보았고, 잭이 자신의 공포를 히틀러의 존재로 위장하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히틀러와 잭을 겹쳐놓으려 한다. 잭이 강연하는 장면에서 히틀러의 얼굴을 상영하는 영사기의 빛은 정확하게 잭의 얼굴 윤곽 위로 떨어진다. 소설에 없는 영화만의 표현 양식이다. <화이트 노이즈> 전체를 가족의 이야기로 좁히자면 바벳이 복용하는 약의 정체를 잭이 추궁하고 그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여정으로 거칠게 요약될 수 있다.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약물전달체계인 다일라는 죽음의 공포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약이다. 바벳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남들보다 극심했기에 임상실험 대상으로 선발되었고, 주요 책임자였던 그레이와 성적 거래를 통해 다일라를 얻는다. 진상을 알게 된 잭은 그레이를 살해할 계획을 갖고 모텔을 찾아간다. 소설에서는 사건과 수습을 모두 잭 혼자서 감내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그레이가 잭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잭의 뒤편에서 갑자기 바벳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함께 위기를 수습하고 나란히 피를 흘리면서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한다. 영화가 개인의 실존보다 가족 드라마에 무게를 실은 선택의 결과물이다. 한편 <화이트 노이즈>의 소설과 영화 모두 마지막 종착지는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은 전의식적 쾌락에 둘러싸여 상처받은 자본주의의 영혼을 회복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슈퍼마켓은 미묘하게 달라져 있다. 예고 없이 진열대가 바뀐 것이다. 사람들은 낯선 진열대 앞에서 방향과 위치 감각을 상실한 채 물건들 사이를 헤맨다. 한편 영화는 소설처럼 신자유주의의 징후를 암시하는 대신 슈퍼마켓의 한가운데로 돌아가 죽음을 잊을 것을 종용하는 허무주의적 엔딩으로 도달한다. 정해진 안무를 반복하며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과장된 몸짓 속에서 극대화된 가상성에는 실존의 주름이란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이 쓰인 80년대 레이건 집권 시기와 작금의 포스트 팬데믹 시기는 급격히 보수화된 사회와 각종 음모론으로 진통을 겪는다는 점에서 꽤나 닮아 있다. 그러나 시대정신이 전파되는 매체의 종류와 성질에서 비가역적인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80년대와 작금의 미국을 겹치는 바움백의 몽타주는 희미한 백색소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고 봅시다 잭은 꿈에서 깨어나면서 “파나소닉”(panasonic)이라고 읊조리는 바벳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교롭게도 이때 보이는 것은 파나소닉의 로고가 박힌 전자시계다. 일본 전자회사의 이름이자 초국가적 상표인 파나소닉은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여기서는 ‘공포(panic)의 소리’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단어에 의미심장한 순간을 부여하는 것은 <화이트 노이즈> 전체의 미학과도 공명한다.

[인터뷰] 정희진 편집장이 말하는 '정희진의 공부' 팟캐스트가 시작된 배경

- 2022년 연말에 텀블벅에서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론칭 프로젝트가 올라왔을 때 놀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정희진’과 ‘팟캐스트’는 생소한 연결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 공개된 ‘편집장의 인사’에서 팟캐스트를 라디오라고 칭하시더군요. (웃음) = 전 아직도 앱이 뭔지 잘 모르고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 제안이 왔을 때 팥빵이라고 검색해봤어요. 뭐, 덕분에 팥빵 칼로리를 알게 되었지요. 매체라는 것이 잡지, 라디오, 팟캐스트, 텔레비전 같은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확장시키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죠. 매체가 너무나 많아지면 다들 자아가 비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이 발전주의, 자본주의를 저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 속에 뛰어들어 협상에 참여할 수는 있겠죠. <정희진의 공부>에서는 지구가 이미 파산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으리란 심정으로 공부할 겁니다. 그러니까 기왕이면 팟빵 오디오 매거진에서도 김어준씨 독자보다는 김혜리 선생님의 독자가 많은 게 세상에 좋은 거겠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이거 쓰셔도 됩니다. (웃음) - 지난 25년간 신문, 방송 인터뷰도 대부분 거절하고 오직 글쓰기와 오프라인 강의 위주로 활동하셨는데 팟빵은 선생님을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 지난 몇년 동안 한국 사회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소진되고 환멸에 시달렸어요. 극도의 절망,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이 필요한 시기에 팟빵에 발목이 잡힌 거지요. 긍정적인 의미의 앵커링(anchoring)이라고 할까. 거기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렇게 기본급이 보장되는 일을 하면 그 덕에 연구와 논문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 이제는 강의를 너무 많이 하면 지쳐요. - 벌써부터 <정희진의 공부>가 보탬이 되어 선생님이 원하는 글쓰기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작업하길 바라는 응원의 댓글들이 보입니다. = 저는 원래 강단에 설 마음이 추호도 없었어요. 첫째, 우리나라 대학교에 취직을 하면 글을 못 써요. 잡무가 너무 많으니까. 둘째, 시간강사를 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이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했지요. 생계는 중요하니까. 내가 바라본 한국 대학 사회는 지금 지식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예요. 그리고 학교가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데 역설적으로 대학 내외부에는 인문학자가 너무 필요한 상황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의 고통도 봤어요. 요즘 대학생들이 가장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글쓰기가 자기소개서인데 그걸 쓰지 못해서 너무나 괴로워합니다. 보다 못해 자기소개서 쓰는 수업을 열었어요. 명색이 대학 강의인데 강의명을 ‘자기소개서 쓰기’로 지을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름을 이렇게 붙여봤죠. 자기 재현의 윤리. (웃음) 저는 이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은 완전히 사라진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스스로 단 한번도 연구자, 학자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프로필에 그렇게 쓰여 있다면 그건 만드는 분들이 정리해주신 거고. 전 그저 어떤 연구를 지향하는 사람이지요. 그외 어떤 정체성도 없어요. 유일하게 있다면 당비만 내는 녹색당 당원? ㅇㅇ동 주민? - <정희진의 공부>는 총 5개의 코너로 전체 5~6시간 정도의 분량으로 꾸리셨더군요. 가장 먼저 어떤 코너부터 생각하셨어요? = ‘한 장면의 인생’이죠. 모든 영화는 인문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앎의 쾌락과 약간의 통증’은 원래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제목이었는데 나중에 바꿨습니다. 카피 뽑는 일엔 능숙해요. 신문 칼럼 보낼 때도 소제목까지 전부 다 써서 보냅니다. 편집자는 노동을 덜해서 좋고 나는 가장 정확한 제목으로 칼럼이 전달되니까 좋고. 한참 일을 많이 할 때는 일주일에 <한겨레>에 한편, <경향신문>에 한편, 두 신문에 글을 같이 썼어요.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피해자들이 하는 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를 정권 교체기에 정치 보복이 반복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머니볼>의 1루수가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공이 나한테 올 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의 의미를 살핍니다. 오직 대사 한줄로 영화 밖의 새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 전 그게 좋아요. 누구에게나 인상 깊은 대사 하나쯤은 있지요.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이미 그 영화의 내용을 다 아는데 또 굳이 거기에만 끼워 맞출 필요는 없지 않나요? 대사 하나, 표정 하나, 어떤 순간 하나가 함유하고 있는 굉장한 구조가 있잖아요. 그런 것을 보고 싶죠. 전형적인 고기능성 우울증인 저는 그저 살아갈 뿐, 1초도 인생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머니볼>의 많은 대사 중에서도 거기 꽂힌 거죠.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메일을 보내주었어요. 멀쩡한 얼굴을 한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 많은 거지요. 다음에 한번은 <나의 해방일지>를 다루려고 해요. ‘추앙’을 도대체 어떻게 번역하겠어요? ‘worship’이라고 하기엔 추앙은 너무나 복잡한 말이지요. 사랑도 존경도 존중도 아닌, 추앙이 무엇인가에 대해 10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나온 대로, “나를 써야만 비로소 획득되는 맥락” 혹은 “벼랑 끝에 서서 바라보는 부분적 관점으로의 읽기”가 선생님의 영화 비평이 갖는 독창성의 핵심이군요! = 제가 가르치는 게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이에요. 우리 몸이 모두 개별적이고 각자가 처한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떤 접점에서 만나는 거지요. 소통을 마치 ‘힐링’처럼 강조하는 사람은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고 조심해야 해요. 몸의 개별성에 대해 조금만 안다면 그 불가능성부터 사유해야죠.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고 느낀 무력감과 열패감에 관한 글도 기억납니다. 그 영화에 관해선 다들 아름다움에 대해 쓰기 바빴는데요. = 동성애 영화는 대부분 클래스 문제를 빼놓고 말하죠. 그러면 발전할 수가 없어요.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난하고 그들 내부에서도 엄청난 격차가 있는데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그런 것들은 전부 소거되어 있고…. 무엇보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부모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웃음) 학자인데 영화 속에 공부하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잖아요.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걸 마주할 때의 감정을 쓴 거예요. 같은 사안에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가가 그 사람의 정치학을 보여줍니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은 허상이고, 감정이야말로 정치의 최종심급이기 때문이지요. -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 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글쓰기를 실천하면서도, “자신을 버리고 언제나 상대방(타자)이 되는 삶” 혹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희진의 공부> 2월호 토크 콘서트 ‘사도 바울과 인문학’) 것은 과연 동시에 가능한가요? =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나를 변형(transform)한다는 의미도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상대방이 되고 또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죠. 제가 ‘혼합’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한자를 들여다보면 그 안에 물 ‘수(水)’ 자가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은, 한번 섞이면 절대 돌이킬 수가 없지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로만 머물지 않고 자꾸 나를 비우고 상대방에 빙의하자는 겁니다. 질적인 변화를 이루는 거지요. 혼합 중 제일은 말을 섞는 것이라 생각하고요. 우리가 말을 제대로 섞고 난 뒤의 친밀감, 그로 인한 변화는 굉장하지요. *이어지는 기사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비평] ‘애프터썬’, 형식이라는 강박관념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지난해 칸영화제를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호평받았고 영화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와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혔다. <씨네21>에서도 물론 다수의 평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캠코더에 보존된 유년기의 기록을 매개로 아버지와 동행한 오래된 휴가의 기억을 불러내는 이 영화에 쏟아진 전세계의 찬사는 보편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작은 비디오카메라 렌즈 앞에 놓인 대상에 이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시선의 힘을 느껴본 적이 없다”라는 소감을 남긴 클레르 드니의 말처럼, <애프터썬>은 내밀한 기억을 통해 뒤늦게 체감되는 감정과 그것에 접속하게 하는 영화적 회상의 매혹을 짚는 환대 섞인 감상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종류의 불만을 품고 있는 편이다. <애프터썬>이 형편없는 영화는 아닐 테지만 동시대 예술영화의 고착된 문제를 드러내는 한 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많은 장면에서 표준화된 예술영화가 의존하는 진부한 전략이 대안적 형식이라는 미명하에 돌출되어 있다. 적잖은 평론에서 그것을 탁월한 영화적 효과로 받아들이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애프터썬>이 전하는 내용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대신 이 영화가 구사하는 형식적 전략과 효과가 과연 흔쾌히 호평할 만한 것인지 의심스럽게 되묻고 싶다. 돌출된 미적 전략 <애프터썬>에는 두 차례 반복해서 제시되는 상황이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 나온 뒤 중반부에서 다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캠코더를 든 소피가 아버지 캘럼에게 장난스럽게 질문을 건네는 순간이다. 영화의 시작점에서 이 순간은 소피가 촬영하는 캠코더 화면으로 묘사되지만, 뒤에서는 탁자를 향해 고정된 앵글에 텔레비전에 비친 소피와 캘럼의 반영된 이미지로 변형돼서 나타난다. 첫 장면에 쓰이고 다시 한번 반복될 만큼 주의 깊게 강조되는 이 장면의 구도는 <애프터썬>이 구축한 미적 전략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다수의 장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아이의 손에 쥐어진 캠코더, 느닷없이 던져지고 나서 뒤늦게 밝혀지는 상황의 의미, 텔레비전에 반영된 이미지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이런 효과에 그 자체로 문제 삼을 부분은 없다. 하지만 <애프터썬>은 많은 장면에서 지적인 인식을 유도하기 위한 구도와 배치가 언제나 인물들이 직면한 상황에 앞선다. 이 장면의 생김새는 언뜻 심오한 연출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는 고전적 데쿠파주를 강박적으로 회피하는 연출자의 자의식을 드러낼 뿐이며 화면 내에서 충분히 활용되었어야 할 인물의 시선과 동작을 무시한 결과와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다. 소수의 관객과 비평가들이 알아보도록 노골적으로 조율된 장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장면에 설계된 장치를 인지하고 해독하는 절차다. 이 순간, 인물의 심리적 상태와 숏의 활동을 억제하고 의미를 설계하려는 감독의 흔적이 스크린 위로 불필요하게 묻어나온다. 이처럼 장면을 형성하는 구조적 장치들이 숏의 표면을 장악하는 가운데 지워지는 것은 샬롯 웰스가 수행했어야 하는 ‘연출’이라는 문제다. <애프터썬>이 기록장치를 매개로 아버지와 딸이 공유한 기억을 돌아보는 영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캠코더와 꺼진 TV에 비친 인물의 형체와 플래시백이라는 전제가 동원되는 것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장면을 구상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 완료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구체적인 숏의 세부로 만들어내기 위해 영화가 마련하는 연출의 방법으로 어떤 것들이 실천되고 있는가? <애프터썬>이 취한 미적 형식에는 바로 그 구체적인 연출의 방법이 희미하다. 속되게 말한다면 <애프터썬>은 장면을 구상하는 개념적 도식이 큰 비중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는 데 비해, 연출자가 어떻게 연기를 지도하고 동선을 짜고 배우들의 시선과 동작을 조정하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영화다. <애프터썬>에서 장면의 쓸모와 의미는 특정 위치에 사물이 놓이고 인물이 자리 잡을 때 일찌감치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영화에서의 연출이라기보다 낡은 사진적 배치에 가까울 것이다. 샬롯 웰스는 캠코더 화면의 물질성, 주체와 시점이 모호한 플래시백, 반영된(reflection) 이미지라는 숏의 미적 디자인에 의존하면서 화면 내부를 밀도 있게 운용해야 하는 연출의 업무를 방치한다. 연출자의 역할이 현장에서 연기를 지휘하고 장면의 길이를 조절하는 업무에 있다는 고전적 문제의식을 고집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앤디 워홀의 <잠>과 <키스>, 또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파이브>처럼 장면의 긴 지속 시간을 받아들여 개념적으로 설계된 형식과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을 결합한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의 작업은 연출자가 촬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탁월한 ‘연출’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명제를 급진적으로 증명해낸다(워홀은 종종 자신의 촬영 현장을 벗어났으며, 키아로스타미는 <파이브>를 찍는 동안 잠을 자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애프터썬>이 의존하는 숏의 개념적 전략은 설정된 장면의 목적에 가닿는 것도, 예기치 않은 우연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렴풋하게 뭉뚱그려진 미적 조합으로 완결된 의미를 방사할 뿐이다. 두 차례 반복되는 소피와 캘럼의 대화 장면에 연출자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은 희박하기 짝이 없다.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 장면을 포함해 <애프터썬>의 많은 장면에서 ‘연출’을 발견하지 못했다. 숏이 겨냥하는 바는 결정되어 있고 그 자리에 불확실한 면모가 개입할 여지는 현저히 적다. 대신 심미적 프레이밍을 위해 인물의 움직임을 철저히 억제하고, 장면에 담기는 정보나 변화에 비해 숏의 지속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관성적인 호흡이 주어질 뿐이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 감각은 언제나 보편적 수준의 일반화로 휘발된다. 무균실로서의 시공간 잘 거론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애프터썬>에서 적극적으로 환기되는 정서 가운데 하나는 유년기의 성적 긴장감이다. 소피는 화장실 열쇠 구멍 사이로 전날 있었던 성행위에 대해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영장에서 밀접하게 서로를 만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밤중에 게이 커플이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낯선 성적 체험이 소피의 시야에 침입하는 순간들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긴장을 충전하는 과정이기도 해서, 소피는 우연히 마주친 또래 남자아이 마이클과 밤의 수영장에서 키스하기에 이른다. 도발적인 독해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소피의 시선에 포착되는 성적 긴장이 소피와 캘럼이 함께 있는 장면에도 침범하고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매만지고 손을 붙잡는 장면의 질감에 근친상간적 긴장을 부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애프터썬>의 기록엔 레즈비언 커플로 부모의 입장에 선 소피가 실현되지 않은 유년기의 불온한 에로스를 되돌아보는 시선이 결부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정으로 문제적인 면모는 편재하는 성적 긴장이 아니라 그것을 미심쩍은 방식으로 억제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는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된 무균적 시공간을 내세우는 것이다. 소피와 캘럼이 머무는 호텔과 그 주변은 문자 그대로 청결하게 세공된 무대다. 이곳에선 소피와 조금이라도 관련 맺지 않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카메라에 보이지도, 마이크에 채집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공사 중인 호텔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도 노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무대에 진입하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소피와 캘럼의 근처를 맴돌아야 한다. 두 사람의 눈과 귀를 자극하지 않는다면,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어린 시절 기억을 빌려 펼쳐지는 시공간이라는 절대적 전제로 모든 현상을 회피할 순 없다. <애프터썬>이 소피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낯선 타인의 얼굴과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보편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세계다. 더 나아가 영화는 소피가 다른 사람과 만나며 겪는 (성적 긴장과 결부된) 불안과 위협마저도 철저히 차단한다. 이를테면, 캘럼과 다투고 나서 한밤중에 길을 잃은 소피가 마이클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마이클은 함께 있는 남자아이 무리를 가리키며 소피에게 “우리랑 놀래?”라고 제안한다. 혼자 밤거리를 배회하는 여자아이와 그에게 접근하는 여러 남자아이들의 모습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촉발하게 한다. 더군다나 소피는 지금 캘럼과 떨어져 있다. 그를 지켜줄 유일한 보호막이 사라진 듯한 위태로움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수영장에서 키스하는 소피와 마이클 단 두 사람의 모습이다. 이 경험은 불안하지도, 특별한 인상으로 남지도 않는다. 유년의 소피는 아무런 굴곡 없이 31살의 레즈비언 소피가 될 것이다. 이곳은 일탈적인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공간이라는 듯 불길한 예감은 회피되고 소피는 침대에 잠들어 있는 캘럼에게로 돌아간다. 성적인 유혹과 불안정한 일탈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소피는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버지가 느끼는 위태로운 감정에(만) 정확히 접속할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가 설정한 서사적 기획이므로 다른 가능성은 차단되어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샬롯 웰스는 타인의 불순한 흔적이 지워진 도착적인 무대를 그려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공된 영화적 무대의 기능이 노출된다. 주관적 기억에서 출발해 보고 들은 적 없는 순간까지도 플래시백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이는 <애프터썬>의 기록은, 개인이 간직한 기억의 부피를 초과해 타인에게 접속하고 비로소 아버지라는 거대한 수수께끼를 이해하는 여정이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비추는 공간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오직 소피와 캘럼, 두 사람의 감각으로만 수렴되는 영화적 지각의 수축성이다. 그들 바깥에는 위협적인 기억도, 세상의 잡스러운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애프터썬>이 과거에 발견하지 못했던 인식을 넓히려는 시도라면, 현실의 공간을 주변화하면서 세공된 무대 바깥의 얼굴과 목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는 형식은 기만적이다. 웰스가 세운 미적 전략은 여기서 다시 한번 심미적으로 자족하는 장치일 뿐, ‘연출’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니, 더 나아가 영화가 시도하는 ‘연출’을 훼손하는 독립적인 장치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해버린다. 장면의 미적 전략이 영화 내에 잠재하며 서로 다른 숏들과 일관된, 또는 의도적으로 불화하는 구성을 이루는 대신 그 자체로 영화를 규정하는 실체적인 조건으로 나타날 때, 그것을 조정하는 감독의 터치는 작품 속 세계를 부자연스럽게 왜곡하는 덧칠이 된다. 나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스크린에 떠오른 장면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장면들이 개념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거듭해서 받았다. 자율적 활동이 억제된 숏은 빈곤한 개념에 붙잡힐 수밖에 없다. 전신 마비에 걸린 영화 존 부어먼은 언젠가 장 뤽 고다르가 전해준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다르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만들려면 젊고 무식해야 한다. 우리만큼 많이 알면 영화 만들기는 불가능해진다.’ 고다르의 말은 연출자가 모든 문제를 예견할 수 있으면 결국 전신 마비만 일으킬 뿐이라는 뜻이었다.” 존 부어먼과 샬롯 웰스는 일견 어떤 접점도 없는 연출자 유형처럼 보이지만, <애프터썬>을 보고 나오면서 즉각적으로 떠올린 것은 부어먼이 언급한 영화의 전신 마비라는 비유적 상태였다. <애프터썬>의 정적인 장면들은 시적이고 아름답다기보다는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영화가 해결해야 할 특수한 주제나 역학을 구현하는 데서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연출의 방기에서 오는 무성의한 화면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다. 샬롯 웰스라는 이 젊은 감독은 그럴듯한 외형으로 치장된, 그러나 지나치게 유식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유식함이란 동시대 예술영화가 어떤 형태로 만들어지고 어떤 유형으로 옹호받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심술궂게 말하자면, <애프터썬>은 주류영화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툴게 감추면서 가장된 저항의 형식을 취해 보는 이들을 지적으로 호객하는 예술영화의 욕망을 드러낸다. 보편적 정서에 호소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짐짓 대안적인 형식을 구현하는 것처럼 구는 이중의 열망이 이 영화의 설계도에는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다(과거였다면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화제를 모으는 영화들에서 쉽게 보이는 욕망과 감수성이라 치부할 만한 이런 경향은, 이제는 칸에서도 베를린에서도 로카르노에서도 토론토에서도 무사히 환대받을 것이다). 영화의 정해진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종합적인 체계를 이탈해 다른 형식을 제안하던 지난 세기의 시도를 통속적으로 ‘예술영화’라 불렀다면, 오늘날 그 명칭은 부지런하게 정해진 규칙을 따르고 호평받는 영화적 표현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패턴화된 규범으로 의미를 옮기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동시대의 ‘작가’와 ‘예술영화’라는 표현의 쓰임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신작’이 유통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애프터썬>은 동시대적 예술영화의 양식에 철저하리만큼 충실한 작업이다. 이는 첫 장편영화를 만든 감독에겐 깊은 오명과도 같다.

[인터뷰] ‘구경이’ 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함께 집필한 성초이의 독특한 작업 방식

아이디어 핑퐁 게임 <구경이>의 극본을 쓴 ‘성초이’를 만나고 싶던 건 이런 반짝이는 이야기의 탄생 배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성초이를 2월15일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났다. 성초이는 한 작가의 이름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있는 작가팀”이다. (두 사람의 답변은 성초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정리하되, 각자의 답변을 나눌 필요가 있을 때만 ‘A’와 ‘B’로 임의로 적는다.) 각자 영화 작업을 해오던 이들이 드라마 작업을 함께하기 위해 만든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드라마를 쓸 때는 같이 합의할 수 있는 그림을 찾아보자는 맥락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체성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구경이> 아이디어를 처음 주고받은 건 2017년께다. “그 시기에 영화 하던 사람들이 드라마쪽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시작됐거든요. (각자 작업하다가) 짬 나는 시간에 드라마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한 게 시작이었어요.” 아이디어는 두 사람이 탁구를 하듯 주고받았다. “은퇴한 경찰 - 현재 보험조사관을 주인공으로 하자. 왜인지는 모름.” (핑!) “보험조사관 일을 하는 은퇴한 경찰 출신에게 후배가 찾아오자.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사건이 있다며.” (퐁!) “오 첫 회 재밌다.” (핑!) “도무지 해결되지 않은 사건은 뭐지?” (퐁!) “그건 진짜 경찰 사건 같은 거. 실종 사건. 1회 뒤에 시체 발견.”(핑!) “주인공에게는 당연히 우울증이 있겠지….” (퐁!) “당연. 맨날 술 마심. 우리처럼….”(핑!) “내가 지금 이소라님 보고 있는데 집에서 맨날 게임하심.” (퐁!) “그거다. 이소라님 생각하면서 써야겠다.” (핑!퐁!) 이렇게 던지고 받는 대화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이디어 노트로 한번 정리해보자고 해서 구글 문서를 처음 만들었어요. 처음엔 ‘몇 회’ 개념이 별로 없이 ‘일단 한번 써보자’ 하고 써내려갔죠.” <구경이> 시청자가 쾌재를 부른 건 이런 장면이다. 누아르영화에서 남성끼리 의리를 다지는 장소인 목욕탕에서 구경이와 용 국장이 마주하는 모습, 서로를 타박하면서도 끈끈한 믿음을 기반으로 호흡을 맞춰가는 구경이와 나제희 콤비(셜록과 왓슨, 이정재와 정우성 같은 여성 콤비를 떠올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려나가다 때론 몸으로, 때론 머리로 힘껏 충돌하는 구경이와 케이의 추격전. 해맑은 살인범 케이의 데드 리스트 이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굵직한 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설정된 건 ‘재미’를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이다. “굳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바꾸자고 작정한 건 아니”지만 “최종 빌런(악역)으로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지겨웠”다. “(대본에 어울리는) 배우를 떠올리면서 ‘이런 분이 하면 재밌지 않을까?’ ‘이 캐릭터가 이런 느낌이면 어떨까?’ 고민하다보니 용 국장은 편한 등산복도, 슈트도 잘 어울리는 중년 여성이 되어 있었어요. 그게 제일 재밌고 새로운 그림으로 보였어요.” 동시에 극은 연쇄살인범 케이를 통해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진한 분노와 공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케이가 ‘죽여도 된다’고 생각한 대상은 성매수 남성, 불법촬영 가해자, ‘갑질’과 탈법 위에 선 기득권층, n번방과 ‘웹하드 카르텔’의 주범들이다. 이는 대본을 쓰던 당대의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살아가는 성초이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저희가 작품을 쓰는 동안 미투 운동이 대중화됐고, 그 전후에도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사건이 너무 많았잖아요. 자연스럽게 ‘진짜 얘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을 소재로 쓰자 싶었어요.” 하나의 정체성으로 함께 일하는 성초이의 작업 방식이 좀더 궁금했다. 작업을 위한 필수 앱은 페이스타임(영상통화 앱), 구글독스, 텔레그램 세 가지다. 페이스타임이나 텔레그램으로 실시간 대화하고 각종 참고자료를 주고받으며 구글독스 공유문서로 장면을 완성해나간다. 방식은 그때그때 다르다. 각자 다른 신을 쓸 때도 있고 아예 한 장면을 같이 쓸 때도 있다. 상대가 입력하는 글자를 실시간으로 동시에 볼 수 있는 구글독스 공유문서의 기능을 톡톡히 이용한달까. 둘 다 이 작업 방식이 “아주 잘 맞는다”. 공동작업은 지칠 때 서로를 붙들어주면서 짐을 나눠 지기에 제격인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집에서 (작업을) 하면 잘 안될 때도 있잖아요. 그때 (페이스타임) 켜놓고 하면 집중도 되고요. ‘내가 좀 대충 봐도 상대가 열심히 봐주겠지’란 믿음도 있고요. (웃음) 스트레스가 경감되는 장점이 있죠.” <구경이>를 위한 자료 조사는 인터넷의 힘을 많이 빌렸다. <구경이> 곳곳엔 인터넷 밈을 적극 활용한 대사도 나오는데 “인터넷에 살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얻는다. 다만 저유조, 출렁다리, 인천 월미도 등의 장소는 직접 다녀오면서 대본이 구체화하기도 했다. 개별적인 작업 루틴은 조금 다르다. A는 ‘다섯신’ 이상을 넘겼거나 ‘하루 3시간 이상’ 썼다는 두 기준 중 하나를 충족하면 그만 쓴다. “욕심내면 다음날 작업에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래서 3시간 쓰고 나머지 시간에는 취미활동을 하든지 작업에 필요한 참고자료를 보든지 해요. ‘글을 안 쓰는 시간’이 확보돼야 쓰는 시간에 집중하게 돼요.” A는 ‘취미 부자’인데 피아노·프라모델·주짓수 등을 한다.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보다 오는 일”은 적절히 자신을 환기하면서, 오히려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영화·드라마·책은 일상이다. B는 “마감을 어기지 않는다” 정도의 기준을 두고 있다. 단 퇴고하는 시간을 꼭 갖는다. “마감 최소 3일 전에 끝내고 ‘글 청소’를 하는 게 마음이 좀 놓여요. 물론 끝나도 끝나는 게 아니고 퇴고도 완전한 퇴고도 아니지만요.” B의 취미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산책과 컴퓨터 온라인 게임을 열심히 하는 정도다. 방탈출은 성초이가 함께 즐기는 취미인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땐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며 문제를 풀어야 탈출 가능한 방탈출 게임을 하며 영감을 받기도 한다고. A는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꼭 있어야” 하지만, B는 반대다. “늘 (글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A는 “작업이 끝나서 노트북을 닫으면 아예 보지도 않는” 반면, B는 “모니터 세개에 게임, 레퍼런스가 되는 영상, 작업창을 모두 켜두는” 스타일이다. 게임 한 차례가 돌 때마다 15초가량 쉴 수 있는데 그때 한 문장씩 쓰곤 한다.

[인터뷰] ‘질투의 화신’ 서숙향 작가, "드라마를 쓴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구는 순간을 기다린다 서숙향 작가는 2002년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며 드라마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대체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작가들이 상금으로 작업용 노트북을 마련할 때, 그는 유유히 PC방을 찾았다. 현재 사용 중인 PC 역시 <파스타> 전부터 쓰고 있는 고물이다. 핸드폰도 여기저기 금이 간 지 오래다. 작가는 말한다. “그때 제 안에 묘한 경계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인터넷 자료에 매몰되기 시작하면 제 색깔과 시간을 잃어버릴까봐. 인턴 작가들은 1년 동안 매달 1편씩 단막극을 써야 했는데, 온라인에서 남의 소재를 끌어오지 말고 오직 내 안의 땅굴만 파고 또 파서 1년을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매달렸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내 안을 쳐다보겠나 하는 심정으로요.” - 배우 공효진의 생활감 넘치는 연기로 대표되는 일상적 구어, 속사포 같은 말하기가 서숙향표 대화의 특징입니다. 대사 쓰기의 원칙이 있을까요. = 더이상 뺄 것이 없을 때까지 빼겠다는 생각으로 한 문장, 한 대사를 짧게 쓰다보면 오히려 대사들의 행간이 살아납니다. 한 사람이 툭 던지면, 상대방이 슬쩍 받아내는 대사 사이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재미로 써요. 드라마를 20년 이상 쓰면서 대본, 연기, 연출의 3박자가 잘 맞는 순간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감사하게 됩니다. 서로 소통이 잘 안되면 대사의 묘미를 살리기 어려운 경우도 생길 수 있으니까요. 각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이 무엇일지 늘 고민되는 건 사실이에요. - 만년 구박이나 받는 셰프 지망생 서유경(<파스타>), 온갖 설움과 수모를 견디면서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은 기상 캐스터 표나리(<질투의 화신>)는 공효진의 청춘이었습니다. <별들에게 물어봐>에선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원정대장으로 변모했죠. 세월을 함께했으니 대본을 쓸 때 그의 목소리와 말투가 자동 재생될 것 같은데요. = 배우를 미리 상상하며 쓰는 스타일은 못 돼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하고요. 제가 캐릭터를 독자적으로 구축해놓으면 이후에 배우가 자신의 해석대로 더하고 빼면서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길 바라요. 서로의 영역이 있는 거죠. 공효진 배우는 이제 저와 제작에 필요한 여러 현실적인 여건들까지 함께 논의하는 프로 중의 프로죠. 언제나 변화에 열려 있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제가 의도한 대본의 행간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사람입니다. - <질투의 화신>에 이어 <기름진 멜로>에서 호흡을 맞춘 이미숙, 박지영 배우 역시 톡톡 튀는 대사들을 스타카토로 경쾌하게 소화해내죠. = 전 두분을 믿고 그래서 대사를 어마어마하게 써놓는 편입니다. 지문과 설명은 최소화하려는 편인데 가끔 ‘(컷을) 나누지 말고 배우가 한번에 소화하게 해주세요’라고 써놓을 때는 있어요. 혼자 떠드는 장면으로 A4 용지 2장까지 써본 것 같네요. 이게 가능한가? 배우들이 볼멘소리 할라치면 저는 슬쩍 딴 데 봅니다. (웃음) 특히 이 두분은 엄청난 베테랑이라 누가 툭 치면 술술 쏟아져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외운다고 하더라고요. - <드라마시티> 단막극 <나의 가장 사랑스러운 적>(2002) 이후 20년이 훌쩍 넘게 흘렀습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싶은 적은 없었는지요. = 제 인생이 제일 재밌을 때가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의 캐릭터가 자기 마음대로 굴 때, 뜻대로 신나서 이야기를 끌고 갈 때예요. 그 희열로 살고, 씁니다. - 자주 오나요, 그런 순간이. = 아니죠. 문제는 안 올 때가 대부분이라는 거죠. (웃음) 그리고 방송을 볼 때도 좋아요. 특히 현장에서 대본을 즐겁게 가지고 놀았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을 보면 작가로서는 더없이 기쁩니다. 그래서 지겨울 틈 없이 계속 합니다. 매력과 고난이 하나인 거지요. - 많은 서사 장르 중 드라마를 쓴다는 것.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가족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는데 밤 9시 무렵 환자들이 다들 잠들고 나서 혼자 복도로 나왔죠. 적막한 병원 로비 텔레비전에서 <커피 프린스>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제가 위로받게 됐어요. 앞으로 1시간 동안만큼은 드라마가 잠시 내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줄 테니까. 그냥 고마웠어요. 드라마의 역할이란 거,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선의의 로맨스 서숙향의 로맨스엔 지나치게 피로하거나 위악적인 갈등이 없다. 미운 얼굴은 있어도 악한은 드물다. 작가는 “장점이라기보단 약점인 것 같아 고민된다”고 했다. “저는 여자를 쓸 때만큼 남자를 쓸 때도 애정이 많이 가고 재미있는데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 크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귀가해서 보니 창가에 앉은 어머니가 혼자 발톱을 깎다가 울고 계시더군요. 수개월 만에 자기 발톱을 깎은 거예요. 그동안 엄마랑 저는 살면서 직접 발톱을 깎아본 적이 별로 없었던 거지요. 아버지가 그런 분이었어요. 수험생 시절에 잠이 모자라서 딱 1시간만 쪽잠 잔다고 하면 제 발에 실을 묶어 창밖에 떨어뜨려놓고 1시간 뒤 창가에서 실을 잡아당겨 깨우던 분이셨죠. 창밖에서 딸을 놀라게 해줄 무언가를 준비해 서 계셨고요.” 인물들이 서로 냉정히 상처 입히는 장면에서조차 묘한 온기가 감도는 그의 서사는 하루치의 긴장을 이완하는 시간에 드라마를 찾는 시청자들에게 미더운 선택지가 된다. 에필로그 10대 시절, 서숙향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미대 가면 굶어 죽는다는 그 시절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방송반을 기웃거린 건 반항심의 표출이었다. 그 뒤로 대학 방송부를 거쳐 평생 방송가에 몸담고 있으니 운명은 운명이다. 그는 어디를 가리킬지 모르는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지만 한번 꽂히면 깊고 길게 사랑한다. “어느 감독님과 연극을 보러 가는 길에 잠시 시간이 남아 인사동의 달항아리 전시장에 들렀죠. 그 앞에 서는 순간 마치 도공이 제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감독님 혼자 연극을 보고 나와서 다시 전시장에 돌아올 때까지 제가 내내 그 앞에 서 있었대요.” 한번 잡힌 집필 루틴도 변하는 법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씻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 전날 작업을 정리한다. “일어나면 어제 쓴 것에서 ‘덜어낼 감정’부터 떠오릅니다. 그걸 지우고 퇴고하고 나면 오전이 지나가고 점심 땐 열심히 청소를 하죠. 제2의 적성은 집 안 관리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미니멀하지만 이곳저곳 공들인 흔적이 가득하고 먼지 한톨 없이 깨끗한 그의 작업실은 “방송가에 안착한 30여년간 여의도를 벗어난 법이 거의 없”는 서숙향의 우주이고 정거장이다. “한참 골방에서 외롭게 글을 쓰고 나면 사람의 온기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찾아와요. 하지만 마음먹고 한 외출도 결국 여의도 근처죠. (웃음)” 고집스럽게 정주하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장 먼 곳을 상상한다는 점에서 그는 어떻게든 작가이고 말 운명이다.

[김세인의 데구루루] 굴러가는 영화

여자, 외계인, 아기, 임신, 자신, 복제, 출산, 탈피, 수영장, 반복… 인터넷을 처음 사용할 수 있게 된 10살 무렵부터 나는 종종 위의 키워드들을 나열해 검색했다. 위 키워드들은 텔레비전으로 본 어느 영화 속 한 장면이자 아주 긴 시간 간헐적으로 꿨던 꿈 장면의 요소이다. 중학생 때 수업이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에 컴퓨터실로 뛰어가 학교 컴퓨터로, 대학 신입생 때 도서관 컴퓨터로, 늦은 새벽 카페에서 과제를 하다 노트북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며 휴대폰으로 장면의 근체를 찾기 위해 검색했다. 이 미스터리는 장시간에 걸쳐 불현듯 얼굴을 드러내고 검색창에 나를 풍덩 빠뜨렸지만 재능 없는 탐정인 나는 여전히 어떤 영화의 장면인지 알지 못한다. 유치원 등원 중 작은 사고가 난 이후로 어린이 시절은 집에서 홀로 영화를 보며 지냈다. 영화 채널에서 나오는 영화들이었는데 팀 버튼 감독의 영화들, <애들이 줄었어요> 같은 가족 코미디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 <프라이트너> <엑시스텐즈> 등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들도 방영되는 대로 시청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며칠 전에 본 영화의 내용도 나에게는 희미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부분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쩐지 그중 여전히 생경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임신한 여자가 누군가로부터 쫓기고 있다. 그녀는 외계인으로 예상된다. 점점 배가 불러오더니 수영장에서 출산하게 되는데 정작 태어난 것은 아기가 아니라 자신, 여자였다. 출산이라기보다는 마치 탈피 과정 같은 모양새인데 그런 복제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이 장면은 지속적으로 꿈에서 반복되었고 문득 일상 속에서도 떠올랐다. 여름방학 초저녁 무렵 발톱을 깎다가 떠올라서 나를 선득하게 만들고, 몹시 피곤했던 비 오는 날에도 괜스레 장면이 떠올라 외계인 여자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늦은 낮잠 속 꿈에서도 선명히 떠올라 잠에서 깬 후 현실이 가짜인가 잠시 혼란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장면은 여러 감각으로 명징해지는데 어쩐지 영화의 정체는 점점 미궁으로 흘러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족한 검색 실력 탓에 찾을 수 없는 이 영화를 급기야 25살, 졸업영화로 찍어버리자 결심하기도 했었다. 당시 나는 여느 20대 청년이 그러하듯 자아라든지 정체성에 관한 고민으로 잠들기 어려웠고 그것들과 연결지어 반복되는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상상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정말로 실재하는 영화라면 결국 표절이라는 판단이 들어 시나리오도 쓰기 전에 그만두었다. 긴 세월 동안 머릿속에서 변형되고 섞인 장면은 이제 영화인지, 꿈인지 구분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난겨울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래서 좋고 저 영화는 저래서 좋고. 내 취향은 기준 없이 변덕스럽다. 나는 점심 메뉴도 정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러다 보니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 질문에는 우물쭈물하다 입을 꾹 다물게 된다. 부끄러웠다. 날을 잡고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생각했다. 뒤늦은 고민이었다.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은 뭘까. 가장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답이 어렵다면 가장 오래 생각한 영화는 뭘까. 가장 오래 나와 함께한 영화는 무엇일까. 그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을 포함해 비교해도 가장 오래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던 의문의 외계인 여자.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꿈으로 기억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내 곁에서, 내 안에서 부유했던 그 장면. 아무 기준 없이 떠올랐다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꽤 자주 그것은 내가 혼자일 때, 외로울 때, 혼란스러울 때 나타나 그 시간들을 함께했다. 섣부른 위로 없이 다만 암흑의 구멍으로 남아 혼란한 마음들, 쓸데없는 고민들을 뺏어가고 굉장한 호기심으로 시간들을 채워주었다. 사랑까지는 몰라도 꽤 의리 있는 우정이 아닌가. 이제는 이 장면을 영화라 불러도 될까. 그것은 이제 내 일부가 되고 내 일상이 되고 내 친구가 되었다. 나의 친밀한 미스터리. 어린이였던 내가 하릴없이 보았던 영화들, 늦은 새벽 깜깜한 거실에서 까무룩 흐릿해지는 의식으로 만났던 케이블TV에서 흘러나온 영화들, 실험영화제에서 의미도 모른 채 받아들였던 영화들, 이미 친구의 감상과 섞여버린 친구가 들려줬던 영화의 줄거리들. 온전한 몸체는 아니지만 나에게 내려앉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2022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지난 영화(<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관객과의 대화와 인터뷰를 진행하며 필사적으로 의미와 장치들, 설계 따위를 피력했지만 정말로는 상관없다. 솔직히 부끄럽게도 동료들과 친구들에게 영화가 관객에게 다르게 전달되면 어떡하냐며 세상 모든 호들갑은 다 떨었지만 정말, 정말로는 상관없다. 다만 위에 호출된 영화들과 나의 관계처럼 영화가 누군가에게 내려앉아 미지의 어떤 감각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에서 선생의 치마 속에서 튀어나온 구슬이 사람들을 경유해 흙바닥을 굴러가는 축구공이 되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누군가의 사연으로 누군가의 신비로운 구슬로 또 이내 천진한 사람들의 장난감이 되는 것을 상상해본다. 결국 내가 도달하고 싶은 것은 친밀함인가. 친밀한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나는 내가 만드는 영화, 이야기, 앞으로 <씨네21>에서 연재할 글들도 단지 어떤 단서로 남아 오래도록 사람들 사이를 무심하게 굴러갔으면 좋겠다. 아주 멀리, 깊은 곳으로 굴러가며 사람들 안에서 더해지고 덜어지며 마구 곡해되고 오해되고 가리가리 찢겼으면 한다. 3주에 한번, 이 지면을 통해 이야기를 쓰고 생각하는 생활에 대해 써보려 한다.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와중에 지금 이렇게 또 하나의 구슬이 식탁에 앉아 키보드를 치는 내 잠옷 속에서 튀어나와 굴러간다. 데구루루~

JEONJU IFF #4호 [인터뷰] '우.천.사' 한제이 감독, 불확실하기에 깊어지는 사랑의 마음

때는 1999년, 지구 종말론이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불안의 시대. 태권도 국가대표전을 준비하는 주영(박수연)과 소년원 학교 출신인 예지(이유미)는 ‘가정 프로젝트'라는 청소년 사회화 프로그램을 통해 같은 집에서 지내게 된다. ‘담쟁이' 넝쿨처럼 서로를 기대어 자라나는 두 소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종말의 시대에서 유일하게 다음을 약속하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랑은 무엇으로 존재하고 증명되는가.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야 답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 한제이 감독에게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이하 <우천사>)>를 통해 구현하고 싶은 세상의 모습에 대해 물었다. - <우천사>는 태권 소녀와 소년원 학교 출신 소녀의 만남과 사랑을 다룬다. 처음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 진행했나. =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전작 <담쟁이>가 상영되던 시기에 원작 작가님으로부터 연출을 부탁받았다. 태권도 선수와 소년원 출신의 아이가 만난다는 주요 골자는 그대로지만 원작은 더 어둡고 폭력적 묘사가 많았다. 그래서 기본 주제 의식은 지키되 사랑 이야기가 70% 더 도드라지도록 각색했다. - 1999년을 배경으로 둔 만큼 당대를 나타내는 소품들이 눈에 띈다. 90년대 특유의 현수막 글자체부터 뚱뚱한 컴퓨터 모니터, 스칼렛 컬러의 몰딩까지. 미술 구현 과정은 어땠나. = 예산이 많지 않아서 최소 주영의 집과 성희의 집만큼은 1999년의 풍경을 반영하려 했다. 붉은 몰딩도 우리가 새롭게 도배한 것이다. 다른 데 돈을 줄이는 대신 미술 표현을 더 강조했다. 제작사에도 ‘미술을 위해서라면 회차를 줄이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가장 구하기 어려웠던 소품은 태권도 대회에서 나왔던 호구다. 머리에 쓰는 보호 장구인데 옛날 버전을 구하기가 어려워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 시합장의 매트도 그 당시 쓰던 것을 찾아서 깔았다. - 장면에 맞춰 나오는 노래들은 어떻게 선정했나. 수연이 예지에게 반한 노래방 장면에서 자우림의 <애인발견>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신화의 <으쌰으쌰>가, 또 천국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고호경의 <처음이었어요>가 흘러나온다. = 노래 가사 자체가 시나리오 맥락과 일맥상통하길 바랐다. <애인발견>의 경우 ‘바보 같다 생각했어 널 처음 봤을 때' 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주영과 예지의 관계사를 보여주기도 하고, 끼 부리는 예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마지막 도장을 찍어준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어요>는 사실 가편집 단계에 김광석 노래를 깔아두었다. 그런데 김사월 음악감독이 여성의 목소리로 첫사랑의 설렘을 표현해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다. 한번 맞춰보니 정말 잘 어울리더라. 그렇게 최종 플레이리스트가 완성됐다. - 아티스트 김사월과는 <담쟁이>부터 음악감독으로서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어떻게 <우천사>까지 함께 하게 되었나. = 감독은 스탭과의 소통 방식을 따로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는데, 김사월 음악감독과는 합이 잘 맞았다. 뭐랄까, 텔레파시처럼 생각이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함께 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아이들이 납치된 모텔 신은 작업 전부터 어려웠는데, 감사하게도 내가 연출하고 싶은 바를 음악에 자연스레 녹여주었다. - 영화는 십대 청소년의 퀴어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자신을 알아가는 10대와 자기정체성, 이 두 키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데 이 사이에서 무엇을 포착하고 싶었나. = 주인공을 고등학생으로 설정한 가장 큰 이유는 주영에게 예지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보통 퀴어 영화에서 ‘여자를 사랑해도 괜찮은가?’ 하는 내적 갈등을 거치는데, <우천사>에서는 일부러 그런 과정을 빼버렸다. 첫사랑이야말로 그런 기준으로부터 가장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면 계산 없이 그냥 그 감정에 빠져버리고 말지 않나. 기준은 사회적 규범이나 여러 경험을 거칠수록 생겨나기 때문에 그냥 사랑하고 싶어하는, 순수한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다. - 이유미, 박수연 배우의 섬세한 감정 묘사가 큰 몰입을 키운다. 두 배우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 시나리오를 각색하면서 이유미 배우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한창 <우천사> 촬영을 하고 있을 때 <오징어 게임>이 공개됐다. 그리고 유미와 외형적으로나 연기적으로나 합이 가장 좋은 배우를 찾았는데 그게 바로 박수연 배우다. 풍파를 거친 예지와 달리 떼도 쓰고 철없어 보여도 그게 밉지 않은 사람이어야 했다. 수연은 연기 속에서 사랑스러운 구석을 잘 보여준다. 주변 인물들에게 물어물어 직접 전화통화로 캐스팅을 했다. 다른 독립영화에서 눈여겨 봐왔는데 밝고 순수한 면을 부각시킨 작품이 없던 것 같아 그런 면을 많이 강조했다. - 현재 패션 스타일로 각광 받는 Y2K는 사실 특정한 세대적 풍경이 담긴 언어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전 대두되었던 지구종말론과 각종 루머, 대중적 불안이 가득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예지와 주영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세기 말의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시대적 제한이 있어야 사랑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진짜 지구 종말이 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확실 속에서 영원을 말하고 사랑을 약속한다. 이런 배경 아래 예지와 주영이도 서로를 더 확신했을 것이다. 이 시기를 거쳐 본 모든 이들은 가장 막연한 시간 속에 다음을 약속해봤다. 향수처럼 그리운 그 때의 풍경을 드러내고자 했다. - 하지만 무려 지구 종말을 앞두고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라는 말은 발칙하고도 나이브하게 들린다. = 맞다. (웃음) 주영이는 그런 말도 한다. “내가 너 먹여 살릴게. 우리 나중에 커서 같이 살자.” 현실적이지 않지만 그 나이이기 때문에, 또 첫사랑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나이브함이다. 아마 주영이는 철저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 예지 곁에는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혈연관계가 아닌 이모가 있다. 예지는 소년원 학교 출신이지만 그에게도 좋은 어른이 있다는 게 무척 상징적이다. 태권도부 아이들에게도 주변 어른이 있지만 아무도 사고를 막지 못했잖나. <우천사>는 어른이 놓친 역할을 꼬집는다. = 예지에게도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길 바랐다. 그래야 예지가 살 것 같았다. 이모의 전사는 사실 이렇다. 이모도 레즈비언으로서 예지의 어머니를 사랑했고, 가정폭력 피해자인 예지 어머니가 남편을 죽였을 때 죄를 다 뒤집어쓰고 교도소에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마 예지도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 속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올바른 보호 속에 있지 않지만 나 또한 좋은 어른을 만나고 싶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런 어른이 되고 싶기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마음이 담겨 있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다락방

옛집에는 다락방이란 게 있었다. 집을 짓다 보면 생기게 마련인 허드레 공간인 셈인데, 좀 작으면 그냥 ‘다락’이었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여지가 있으면 다락‘방’이 되었다. 어릴 적 나는 이 다락방에서 많은 걸 했다. 사촌 동생과 놀아준다는 핑계로 어른들의 눈을 피해 나는 갖지 못했던 좋은 장난감을 충분히 만져볼 수 있었다. 보퉁이에 싸인 잡스러운 것들을 뒤져보는 재미에 더해 가끔씩 요긴한 물건을 ‘득템’하는 행운도 찾아왔다. 대개는 그곳에서 책을 읽었다. 퍽 학구적인 아동기를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계통이 잘 잡히지 않는 독서였다. 이른바 ‘남독’에 빠져 있던 셈인데, 삼중당문고 한국 근대문학 소설에서부터, 일본 대하소설 <대망>의 해적판, 고모가 보던 하이틴 잡지,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산 <생활상식백과>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꿈을 해몽하는 법을 배웠고, 일본의 전국시대를 머릿속에 그려넣었으며, 이름이 비슷한 김동인과 김동리의 확연한 차이를 알게 됐다. 필경 지금의 내 잡학 가운데 3할 정도는 그 다락방에서 만들어졌을 테다. 그때 내가 책을 읽었던 건, 할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텔레비전이 있었다. 하지만 매캐한 담배 연기로 싸인 증조부모 방에 가야 했고, 이분들은 전기를 금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셨다. 골목길에서 딱지와 구슬치기도 했다. 그러나 잦은 이사로 학교를 멀리 다녔던 까닭에 반 친구는 있어도 동네 친구는 많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놀아야 비로소 성이 차는 유형은 아니었던 나는, 그럴 때마다 다락방에 들어갔다. 움푹 팬 천장을 가로지르는 서까래 위에 아슬아슬하게 누워 문고판 책을 펼치면 비록 문장이나 단어는 생경하더라도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의 시공간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사람과 사물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지켜보고 묘사하는 습관이 들었던 것이리라. 오늘날의 집에는 다락방이 없다. 집을 지을 때부터 철저히 계산된 도면에는 손바닥만 한 자투리 공간에조차 구체적인 이름과 기능이 부여된다. 굳이 ‘팬트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수납 기능의 공간에는 여전히 잡스러운 물건이 들어차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의 내가 그곳에 처박혀 있으면, 필경 아내나 아이는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터. ‘우울증’이라든가 ‘중년 히키코모리’ 같은 검색어를 스마트폰에 쳐넣으면서 말이다. 할 건 너무나 많고, 읽고 보고 들을 것들이 차고 넘친다. 직업상 구독하고 있는 동영상 서비스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된다. 학자답게 문자 매체를 고집하고 싶다면, 내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책이 서재에 쌓여 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많은 ‘할 것들’에 깊이 스며들지 못한 채, 손가락으로 화면만 쓸어 넘기며 나른해한다. 다락방에 있던 빈곤 속의 풍요를 찬미하려는 것도 아니고, 콘텐츠 폭발 시대가 주는 풍요 속의 빈곤을 개탄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부족함 가운데 풍성함을 일궈냈던 것이 나라면, 너무나 많은 매체에 둘러싸여 나른해져버린 것도 나다. 내비게이션은 기계이고 장치다. 항행자는 결국 나다. 그런 내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 내 다락방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로 이 작은 지면을 채워갈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