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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춘향전>

EBS 2003년 12월28일(일) 밤 11시 “우리나라 영화의 획기적인 천연색씨네스코의 호화거편!”(당시 광고문안) <춘향전>은 50년대 멜로물의 일인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홍성기 감독의 역작이면서 그의 영화인생을 기로에 놓이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같은 해에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의 흥행 맞대결로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홍성기-김지미 커플과 신상옥-최은희 커플의 대결로도 세간의 관심을 받았던 이 작품은 <성춘향>보다 열흘 먼저 개봉하여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라는 기록을 차지했다. 그러나, 홍성기 감독은 <춘향전>으로 흥행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불행히도 감독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자유만세>를 만든 최인규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홍성기 감독은 해방 뒤 한국영화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많은 작품들인 <별아 내가슴에>(1958), <열애>(1956), <실락원의 별>(1957) 등을 감독했던 50년대 ‘잘 나가던’ 감독이었다. 그러나 <춘향전>의 실패 이후 한국 영화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게 되고 말았다. 아마도 홍성기 감독의 대표작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에 많은 애정이 가고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01년 2월 한국 방송사상 최초로 EBS에서 이 영화가 방영되고 있던 중에 홍성기 감독이 운명하셨기 때문이다. 개봉 이후 일반에겐 거의 공개된 적이 없을 정도로 보기 힘들었던 작품이기에, 어렵게 홍 감독님의 허락을 얻어 방송했는데 바로 그날 ‘귀천’하신… 그분의 영화열정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여러분 곁을 찾아간다. 이승훈/ EBS PD agonglee@freechal.com

[여성영화인축제 결산] 여성 프로듀서 5인의 막상막하 토크

지난 12월12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2003 여성영화인축제 중엔 흥미로운 포럼이 있었다. 바로 ‘여성 프로듀서 5인의 막상막하 토크’.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진행으로 진행된 이 포럼에는 <살인의 추억>의 김무령, 의 류진옥, <바람난 가족>의 심보경,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유진, <여섯개의 시선>의 이진숙 PD가 참석했다. 67년생에서 69년생까지 동갑이나 한두살 터울인 이들은 비디오가게 주인부터 매니지먼트, 제작부, 홍보 등 각기 다른 성장과정을 거쳐 프로듀서라는 자리에 올랐다. 심재명: 나를 1세대 여성 프로듀서라고 한다면 여기 모인 5명의 프로듀서를 2세대 여성 프로듀서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먼저 ‘나는 어떤 프로듀서다’라고 짧게 자신을 소개해주길 바란다. 가령 체력이 끝내준다든지 ‘암산왕’이라든지 미모로 승부한다든지(웃음)…. 이진숙: 부천영화제에서 헤어초크의 촬영감독이자, 프로듀서였던 한 노인이 상영 전에 관객에게 DVD를 파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그렇게 늙어서 힘없을 때까지 영화를 위해 살고 싶은 사람이다. 이유진: 아까 미모라고 소개해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난 그냥 하나만 집중해서 파는 프로듀서인 것 같다. 파다보면 늘 답이 나온다. 심보경: 미모로 승부하고 싶지만 잘 안 되더라. (웃음) 훌륭한 스탭들이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자리에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편이다. 원래는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이 일을 하면서 성격개조도 했고. 류진옥: 지금까지 돌이켜보면 늘 이전에 없었던 일들을 해왔던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남이 가지 않은 길을 확대해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김무령: 프로듀서라는 일이 늘 뒤에 있는 직업이라 이렇게 앞에 나와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다. 주변인들이 나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성질이 드럽다’고 한다. 이젠 따로 성질 안 부려도 익히 들어서인지 별 어려움 없이 도와준다. (웃음) 심재명: 김무령 PD 성질 더러운 거는 나와 <결혼이야기> 홍보할 때 알아봤다. 옆에서 한 방송사 연예 오락프로그램 작가랑 통화하는데, 물론 그쪽이 잘못을 했지만, 거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걸 보면서 참 이 여자 만만찮구나, 하지만 성격은 참 더럽구나 생각했다. 1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말을 듣는다면 이젠 김무령 PD의 특징으로 자리잡힌 것 같다. (웃음) 물론 그 성질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거겠지만. 창조적인 면인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역할인가 심재명: 프로듀서라는 개념은 한국에서 90년대 초반 ‘기획자’라는 말에서 출발했고, 그 사이 한국영화가 산업화되고, 제작 시스템이 성숙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각자 프로듀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말해보자. 특히 자신이 프로듀싱을 하면서 겪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이야기해주면 좋겠다. 심보경: 명필름의 제작 매뉴얼에 보면 ‘프로듀서란 창조적이면서 비즈니스적인 이해를 가지고 무장된 이야기꾼이다’라고 되어 있다. 포괄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라는 창조적인 작업에 참여하는 스탭으로서의 크리에이티브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단기간에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매체이기 때문에 예산을 집행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까지 프로듀서의 역할이라고 본다. <바람난 가족>으로 격었던 가장 큰 시행착오는 캐스팅이었다. 초반에 김혜수를 적극적으로 밀었던 이유는 이야기 자체가 무겁기 때문에 좀더 지명도 있으면서 상업적인 이슈가 될 수 있는 배우와 해야겠다는 거였다. 이후 알다시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가 수세적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았고 그런 방식으로 보강하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이진숙: 나는 비교적 늦게 영화일을 시작했고, 선배도 없었고, 조직에서 체계적으로 프로듀싱을 배운 적도 없다. 무모함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고 하면 맞을거다. 그래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몰랐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충분히 조사하고 사려있게 판단했다면 <뽀삐>나 <여섯개의 시선> 같은 영화는 만들지 못했을 것 같다. 최근 <여섯개의 시선>은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공무원들과 함께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국가기관으로부터 예산을 정상적으로 타내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국가인권위 찾아가서 왜 돈 안 주냐고 미친년처럼 소리 꽥꽥 지르고 심지어 드러눕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감독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고 그러다가 거의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때 6명 중 한명의 감독이 “너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철저히 돈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라”는 충고를 했다. 당시에는 왜 내가 국가기관의 편을 드냐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충고대로 했을 때 오히려 일이 편하게 풀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만치 않은 장애들이 여전히 많았다. 예를 들어 납품기한을 안 지킬 시엔 제작비의 몇배를 물어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조항도 있었고, 납품을 해야만 제작비의 50%를 받을 수가 있었다. 결국 국가인권위의 담당자가 몇억 개인대출을 받아서 가까스로 제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인권영화를 만드는 데 이런 인권을 유린하는 조항에 사인을 해야 하다니…. (웃음) 이유진: 영화는 1년은 기본이고 보통 2년 이상의 시간이 들어가는 비교적 사이클이 긴 작업이다. 그러다보니 초반의 자기확신을 개봉할 때까지 그대로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중간에 캐스팅도 안 되고, 투자가 어려울 때도 있고…. 그럴 때 초심을 유지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특히 <스캔들…>의 경우 사극이었기 때문에 흥행이 안 된다는 인식이 많아서 투자도 힘들었고, 심지어 계약 직전에 도망가는 배우도 있었다. 끝나고 나니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하는 시점에서 포기했던 것이 가장 후회로 남는다. 그때 한번 더 노력하고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좀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말이다. 류진옥: 한번도 독립영화를 만든 적도 없었고 한번도 주류영화를 만들지도 못했다. 늘 경계인 같은, 변방의 역할들을 해왔던 것 같다. <…전태일>도 그랬고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도 그랬고, 그나마 가 가장 메인스트림의 영화였는데 홀딱 깨져버렸기 때문에 괴롭고, 할말도 없다. 그간은 감독들을 컨트롤하는 역할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것의 가장 참혹한 결과가 였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프로듀서가 감독을 쥐고 컨트롤하면서 상업적인 부분에 저해되는 요소들은 과감히 잘라내야 하는 사람인가 하는 고민이 많다. 아까 말했듯이 창조적인 면인가 비즈니스맨으로서의 역할인가에 대한 고민인 거다. 내가 장선우 감독의 차기작을 한다고 하면 99%의 반응이 다시 한번 쳐다보는 거다. 저 사람은 도대체 장선우에게서 뭘 기대하고 있는 건가, 혹 당신이 과연 다 망해버린 장선우를 다시 컴백시켜낼 수 있다는 자만과 확신이 있나, 하는 얼굴로…. 글쎄, 장선우 감독과 다시 작업하겠다고 생각한 건 그 안에 있는 재능들을 여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간 컨트롤되지 못해 생겨난 엄청난 누수를 내가 100%는 아니지만 막아내면서, 그의 능력을 조금씩조금씩 회복시킬 거라는, 자만이라기보다는 ‘의지’로서 가고 있는 거다. 단계별, 공정별 기준이 명확히 만들어져야 심재명: 프로듀서는 지켜내고 성취해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잡았던 제작기간, 예산, 퀄리티를 지켜내면서 영화가 목표한 바를 성취해나가는 사람. 그런 면에서 프로듀서가 바라본 한국 영화제작 시스템의 문제점, 그리고 각자의 대안을 이야기해보자. 심보경: 현장 프로듀서로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문제는 총제작비의 급상승이다. 마케팅비의 상승도 너무 가파르다. 캐스팅부터 마케팅까지 제작비에 대해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단계별, 공정별 기준이 명확히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현재는 배우, 감독, 주요 스탭들이 과다한 개런티를 받기보다 영화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가지고 가는 인센티브제도를 계약시에 유도하려 하고 있다. 김무령: 프로듀서의 크레딧에도 문제가 있다. 지금 한국영화의 크레딧에는 제작과 프로듀서가 따로 명시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작은 뭐고, 프로듀서는 또 다른 거란 말인가? 심재명: 영어와 한글의 차이. (웃음) 김무령: 특히 크레딧이 영문 타이틀로 바뀌면서 엉뚱하게 나가는 경우도 많고, 상황따라 변용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하는 역할에 비해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불안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심재명: 크레딧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제작체계를 갖춰가는 문제인 것 같다. 그나저나 황당하게 번역이 된 적이 있나? 김무령: … 아예 없어진 경우가 있었다. 심재명: 한 시간이 이렇게 짧다. 이제 마지막으로 프로듀서로서 개인적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면 좋겠다. 김무령: 영화를 한 지 오래됐지만 <살인의 추억>으로 여러 가지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류진옥: 아까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냥 열심히 하고 싶다. 심재명: 장선우 감독님 거? (웃음) 이진숙: 어린나이에 비디오가게를 시작해서 현금과 가까이 살아왔다. (웃음) 뭔가 재밌는 게 없을까 하는 단순한 기분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요즘은 그 이상의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오랫동안 한 감독과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내가 한때 매스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심재명 대표를 보고, 이 사람 운전기사나 해주면서 일을 배워볼까, 했던 것처럼 프로듀서를 꿈꾸는 여성들의 역할모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싶다. 심보경: 글쎄… 이제 심재명 대표의 그늘에서 벗어나 훌륭하고 독립적인 프로듀서가 되는 것이 꿈이다. 심재명: … 럴수 럴수 이럴수가!

‘임수정·봉태규’ 떴느냐? 더 뜨거라! [1]

저무는 2003년, 한국 영화는 50%에 가까운 사상 최대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고서 2004년을 맞는다. 양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영화들이 많이 나오면서 흥행을 주도했다. 새 얼굴들이 이런 발전을 한 몫 거든 건 두말할 나위 없다. 서울 관객 100만명을 동원하며 올해 공포영화 붐을 견인했던 <장화, 홍련>에서, 과거의 죄의식 안에 차갑게 갇힌 수미 역의 임수정은 영화를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올해 한국 영화 중 유일하게 세계 3대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바람난 가족>에서 이웃집 유부녀 문소리와 사고를 치는 고등학생을 맡은 봉태규의 찰진 연기가 없었다면 이 우울한 이야기가 생동감과 리듬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다. 임수정은 대한민국 영화대상, 젊은 감독들이 뽑는 ‘디렉터스 컷’ 시상식 등 올해 말에 열린 6개의 영화제 가운데 춘사영화제를 뺀 나머지 5개의 신인 여자배우상을 휩쓸었다. 광고모델을 거쳐 지난해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조역으로 데뷔했으나, 완전한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장화, 홍련>의 오디션에 응시했다. 거기서 김지운 감독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연기가 뭔지 비로소 알게 된’ 임수정은 인기절정의 김래원과 함께 멜로영화 <…ing>에 출연해 연기 폭을 넓혔다. 봉태규는 전형적인 ‘길거리 캐스팅’으로 출발했다. 임상수 감독 <눈물>의 한 스탭의 눈에 띄어 불려갔다가 다른 스탭들이 “집에 가라”는 걸, 임 감독이 붙잡아 이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 한 것이 3년 전이다. 그러나 <눈물>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봉태규 스스로 인정하듯 ‘솔직히 꽃미남이 아닌’ 그가 다시 주연을 잡기는 쉽지 않았다. <품행 제로>를 거쳐 <바람난 가족>의 비중 큰 조역을 맡으면서 봉태규는 다시 ‘발견’됐다. 그는 올해 ‘디렉터스 컷’ 시상식에서 박해일과 함께 공동으로 신인 남자배우상을 받았다. 임수정, 봉태규 둘 다 아직은 자기 이미지가 굳지 않은, 그걸 막 만들어가는 시작 단계에 있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이들의 인상은 범상하지 않다. 차가와 보이는 임수정의 얼굴엔 그 또래 다른 여배우들과 다른 깊이감이 있고, 봉태규는 어떤 말로도 설득될 것 같지 않은 반항기를 풍긴다. 이 둘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수정·봉태규’ 떴느냐? 더 뜨거라! [3] - 봉태규

“학예회 하듯 쑥스럼 내가 이래도 되나, 푸하하” “내가 이래도 되나” 배우 봉태규(22)의 머릿 속에서 요사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질문이다. 시트콤 <논스톱> 촬영현장에서 주변에 모이는 아이들의 시선을 받을 때도, 스튜디오에서 환한 조명 아래 짓궂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을 때도 이 말이 계속 떠오른다. 순전히 ‘사고’로 - 2001년 초 봉태규는 버스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로 미대 실기시험을 포기하고 있다가 압구정동 길거리에서 캐스팅됐다-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지 3년 남짓.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시에프에까지 전방위적 성과를 올리고 있지만 스스로에게는 아직도 지금 하고 있는 인터뷰를 포함해 많은 게 낯설고 쑥스럽단다. 막을 통해 걸러져 나온 ‘실없고, 철없고, 대책없는’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인상이다. “나는 배우다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배우를 꿈꾸는 많은 분들이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요, 배우가 일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냥 취미다 생각하면 부담없이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숙명’이니, ‘영혼’이니 하는 단어를 써서 배우로서의 사명감과 태도를 보여주려는 코멘트는 영 닭살이라는 그는 이렇게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다. 신세대적인 경쾌함과 함께 결코 아이답지만은 않은 균형감각이 느껴진다. 그가 연기를 정색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것은 우연한 시작이라는 출발지점의 특별함에도 기인하는 듯하다. “<눈물> 찍을 때도 아 내가 연기를 한다, 이런 게 아니라 초등학교 때 친구들 앞에서 학예회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생님(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한 거죠. 그래서 칭찬받을 때 좋기도 하면서 빵반죽처럼 부풀려져 사람들에게 보여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래서 ‘차라리 본색을 보여주자, 그냥 망신당하고 영화랑 결판짓자’고 덤벼든 게 <품행제로>였다. “초반 한 30% 정도까지는 여전히 학예회 수준이었죠. 그게 좀 지나가니까 아 이렇게 해야 되는구나, 어 이래도 되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연기를 배우게 되더라구요.” 그랬던 그가 6개월 동안 사무실에 음료수 사가지고 출근하면서 스태프들을 설득해 따낸 게 <바람난 가족>의 신지운 역이었다. <눈물> 때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였던 그와 임 감독은 이 영화에서 파트너로 토론하고 함께 대사를 수정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는 ‘취미’라고 말했지만 어느새 ‘배우’가 된 것이다. 봉태규가 주변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는 “너무 민간인 같다”는 말이다. 배우로서 한계가 될 수도 있는 이 말을 그는 수긍한다. 아니 작정한다. “누가 봐도 제가 꽃미남과는 아니잖아요.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맡는 역할이 다 비슷하다고 비판하더라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데뷔작 <눈물>에서 지금 방영되는 <논스톱>까지의 모든 과정을 배움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조금씩 변하는 배우가 되고 싶단다. “관객이나 시청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금씩 다르게 가다가 문득 “아, 쟤가 옛날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저런 걸 하네”라고 말할 수 있도록 변하고 싶어요. <논스톱> 시작할 때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했지만 순발력이나 상황연구 같은 면에서 많은 걸 배웠거든요. 아직은 변신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배울 때인 것 같아요.” 최근 촬영을 마친 <안녕! 유에프오>에서 이범수의 동생역을 연기한 그는 앞으로 임순례 감독의 <세친구>같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큰 입을 활짝 열며 푸하하 웃는 밝은 모습 사이로 ‘내가 이래도 되나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불안함과 세상에 대한 어색함,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는 어른스러움이 툭툭 묻어나는 스물두 살의 배우, 봉태규의 다음 선택이 궁금해진다. ◆심보경 이사가 본 봉태규 긴장감 풀줄 아는 타고난 배우 <눈물> 때 봉태규의 인상을 좋게 보기는 했지만 화면 속의 이미지와 실제의 인상이 매우 달랐다. 다른 사람처럼 나도 그에 대해 코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만나 보면 나이보다 어른스럽다. 전에도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해봤는데 젊은 친구들은 보통 열의있고 진지하면 그만큼 경직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감독이나 제작자의 일 중 하나가 긴장을 풀어주는 건데 태규씨는 오히려 자신이 촬영장의 긴장감을 풀어줄 정도로 유연하고 여유가 있다. 특히 <바람난 가족>에서는 배우들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노출신 촬영도 있었는데 때로는 후배인 봉태규가 선배 문소리를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느낌까지 주었다. 그래서 농담처럼 한국에서 문소리를 다루는 유일한 남자배우가 봉태규라는 말까지 나오곤 했다. 외모로 뜨거나 연기공부를 해서 정규코스를 밟듯 배우에 입문하지 않은 것이 봉태규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경험이 많지 않은데도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고 연기가 자연스럽다. 스타로 출발하지 않아서인지 헝그리 정신 같은 것도 보인다. 이런 면에서 배우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송강호씨의 지론처럼 배우 봉태규도 시작한 계기는 우연이었지만 타고 난 배우라고 생각이 든다. 다만 아직 출발선상에 있는 만큼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타인을 통한 경험도 많이 쌓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하길 바란다.

2003 한국영화 결산 [1] - 2003 Best of Best

작가주의에게 해 피 엔 딩 2003년 최고의 영화는 무엇일까? 올해 최고의 감독과 배우는 누구인가? <씨네21>은 올해도 기자, 평론가 28명에게 설문을 보내 올해의 영화인과 올해의 영화를 선정했다. 올해의 영화인은 감독, 시나리오, 촬영, 제작자, 남녀 배우, 남녀 신인배우 등 8가지 부문에서 뽑아달라고 부탁했으며 올해의 영화는 1위부터 5위까지 베스트 5편의 명단을 주문했다. 기사는 올해의 영화인 가운데 남녀 배우로 선정된 송강호, 문소리의 이야기로 시작해 영화인 각 부문 선정자를 밝힌 다음 올해의 영화 베스트 5로 이어진다. 마지막에 배치한 외화 결산 각 부분 최고상은 유머를 덧붙인 보너스다. ★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5 김봉석 지구를 지켜라 / 영매 / 바람난 가족 / 장화, 홍련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김소영 바람난 가족 /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 4인용 식탁 / 지구를 지켜라, 질투는 나의 힘 김소희 영매 / 질투는 나의 힘 / 올드보이 / 4인용 식탁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은형 질투는 나의 힘 / 바람난 가족 / 살인의 추억 / 지구를 지켜라 / 동갑내기 과외하기 김의찬 살인의 추억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 지구를 지켜라 / 클래식 / 4인용 식탁 김종연 살인의 추억 / 올드보이 / 질투는 나의 힘 / 여섯개의 시선 / 4인용 식탁 김현정 지구를 지켜라 / 살인의 추억 / 질투는 나의 힘 / 4인용 식탁 / 올드보이 김혜리 질투는 나의 힘 / 지구를 지켜라 / 4인용 식탁 / 살인의 추억 / 아카시아 남동철 살인의 추억 / 지구를 지켜라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 질투는 나의 힘 / 올드보이 듀나 지구를 지켜라 /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 장화, 홍련 / 질투는 나의 힘 문석 지구를 지켜라 / 4인용 식탁 / 살인의 추억 / 바람난 가족 / 선택, 올드보이 박은영 살인의 추억 / 질투는 나의 힘 / 4인용 식탁 / 지구를 지켜라 / 바람난 가족, 올드보이 박평식 바람난 가족 / 올드보이 / 선택 / 지구를 지켜라 / 질투는 나의 힘 박혜명 살인의 추억 / 장화, 홍련 / 올드보이 / 질투는 나의 힘 / 바람난 가족 백은하 살인의 추억 / 바람난 가족 / 올드보이 / 질투는 나의 힘 / 4인용 식탁 변성찬 지구를 지켜라 / 여섯개의 시선, 영매 / 아카시아 / 살인의 추억 / 올드보이 심영섭 질투는 나의 힘 / 살인의 추억 / 지구를 지켜라 / 4인용 식탁 유운성 지구를 지켜라 / 선생 김봉두 이동진 살인의 추억 / 바람난 가족 / 올드보이 / 지구를 지켜라 / 질투는 나의 힘 이성욱 올드보이 / 살인의 추억 / 바람난 가족 / 지구를 지켜라 / 4인용 식탁 이영진 지구를 지켜라 / 질투는 나의 힘 / 살인의 추억 / 바람난 가족 / 올드보이 임범 지구를 지켜라 / 바람난 가족 / 살인의 추억 / 선택 / 질투는 나의 힘 정성일 선택 / 지구를 지켜라 / 질투는 나의 힘 / 영매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정승훈 지구를 지켜라 / 살인의 추억 / 올드보이 / 질투는 나의 힘 / 바람난 가족 정한석 바람난 가족 / 여섯개의 시선 / 질투는 나의 힘 / 선택 / 지구를 지켜라! 허문영 지구를 지켜라 / 선택 / 바람난 가족 / 질투는 나의 힘 / 아카시아 홍성남 지구를 지켜라 / 선택 / 와일드카드 / 질투는 나의 힘 / 여섯개의 시선 황진미 살인의 추억 / 올드보이 / 바람난 가족 / 지구를 지켜라 / 4인용 식탁

2003 한국영화 결산 [2] - 올해의 영화 BEST 5

1.<지구를 지켜라!> “데뷔작으로서 <지구를 지켜라!>는 최고의 영화다.”(김봉석) “이 황당무계하지만 탁월한 상상력이 그저 재기발랄한 농담으로 치부되고 만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차라리 병구의 광기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편이 낫다.”(유운성) <지구를 지켜라!>는 새로운 영화다. 수많은 평론가의 지지는 그 새로움을 반기는 환호성일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 <지구를 지켜라!>는 리얼리즘의 또 다른 출구를 발견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를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기존 한국영화의 한계를 돌파하는 비약의 순간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지구를 지켜라!>는 그 상상력의 규모 면에서 기존 한국영화를 압도해버린다. 주인공 병구가 지켜야 할 것은 애인이나 가족,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바로 지구다. 그는 무엇으로 지구를 지키려 드는가? 고작 외계인의 세뇌를 막을 수 있도록 고안된 헬멧과 물파스와 때밀이 수건이 전부 아닌가? 무모하다고? 물론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래서 ‘올해의 영화’가 될 수 있었다. 병구가 지켜야 할 대상의 전 지구적 규모와 병구가 가진 무기의 초라함이 이루는 극명한 대비(할리우드 SF영화에서 결코 기대할 수 없는!)야말로 <지구를 지켜라!>를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관객의 호응까지 끌어내진 못했지만 평론과 언론에서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감독 장준환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2. <살인의 추억>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연기가 이처럼 좋은 영화를 또 만날 수 있을까.”(이동진) “웰메이드 필름이란 바로 이런 것. 연기의 앙상블이란 바로 이런 것. 한국사회의 환부가 부어올라 그 농으로 만든 작품.”(심영섭) <살인의 추억>은 잘 만든 영화다. 연기, 연출, 촬영, 미술, 음악 등 어느 것 하나 처지는 구석이 없다. 아니 그 각각이 독립적으로 잘하는 게 아니라 숙련된 잼세션처럼 척척 들어맞아 놀라운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 탁월한 조화에 평론가들은 박수를 쳤고 관객은 열광했다. <살인의 추억>은 입소문을 타고 관객동원에 성공했으며 마침내 올해 최고의 흥행작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 지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영화산업이 어떤 좌표로 나아가야 하는지 되새기게 만들었다. <살인의 추억>은 <공동경비구역 JSA>가 그랬듯 지금 한국영화의 어떤 기준점을 제시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80년대에 접근한다. 독재정권의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무기력한 공권력을 우롱한다. 세명의 형사와 세명의 용의자, 그들이 벌이는 숨바꼭질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피할 길 없다. 끝내 범인을 잡을 수 없기에 영화는 그 시대를 어두운 터널에 남겨두고 헤어진다. 그 추억은 상처의 기억으로 남는다. 각종 국내 영화상을 휩쓸었던 <살인의 추억>은 산세바스찬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3. <질투는 나의 힘> “남녀 관계에서의 끌림과 밀침에 대한 정묘한 보고서.”(홍성남)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라는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박평식) <질투는 나의 힘>은 묘한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를 떠올렸지만 홍상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이 <질투는 나의 힘>의 매력이었다. 그것은 단지 남녀의 성차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다. 박찬옥 감독은 홍상수만큼 예리하고 깊게 파고들지만 영화의 구성요소 하나하나를 해체하지는 않는다. 홍상수 영화가 삶의 부조리한 덩어리 그 자체로 귀결되는 반면 <질투는 나의 힘>은 그 부조리한 삶에 깃든 감정과 인물에 주목하게 만든다. 영화의 주인공 원상은 두드러진 예다. 어떤 결핍에 시달리는 욕망의 포로라는 점에서 홍상수의 남자들과 다를 바 없지만 <질투는 나의 힘>은 원상의 고민과 갈등을 감추지 않는다. 영화는 인류학자의 관찰력으로 원상의 심리를 좇아가 마침내 그의 결핍이 우리가 칭송하는 ‘젊음’과 ‘청춘’의 실체임을 폭로한다. 그것은 <질투는 나의 힘>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본 청춘영화로 규정하게 만든다. 익숙한 청춘영화의 관습에 기대지 않은 채 고통스럽고 쓸쓸한 젊은 날을 정밀하게 그려낸 <질투는 나의 힘>은 70년대 <바보들의 행진>, 80년대 <고래사냥>, 90년대 <비트>가 차지했던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질투는 나의 힘>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4. <바람난 가족> “역설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를 암시한 영화.”(황진미) “바람난 아내나 남편의 이야기가 더이상 쿨하지 않은 반면 가족이 집단적으로 바람이 날 때 그것은 영화가 된다.”(김소영) <바람난 가족>은 도발적인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가족은 더이상 지켜야 할 소중한 대상이 아니며 정과 사랑으로 재건돼야 할 보금자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임상수 감독의 제안은 솔직히 까놓고 얘기하자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말, 그것은 <박하사탕>에서 고문받던 젊은이가 믿었던 ‘인생은 아름답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가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영화는 어떤 문제에도 쿨하게 대처하는 호정을 통해 암시를 던진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복수를 위해 맞바람을 피우는 것도 아니다. 호정은 그냥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응답한다. 아들을 사랑하고 이웃집 고등학생과 우정을 나누면서 그녀는 누구에게 종속된 삶을 거부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호정은 집으로 돌아와달라는 남편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고 춤을 추듯 움직인다. 경쾌하고 코믹한 그 움직임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말 쿨한 대응처럼 보인다. <바람난 가족>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주연배우 문소리는 스톡홀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5. <올드보이> “숙련되고 세련된, 그러나 무국적의 스릴러.”(변성찬) “숏 하나 하나가 미학적 긴장과 세련된 밀도로 범람하는, 그래서 영화 전체가 과잉일 수밖에 없는 영화.”(정승훈) <올드보이>는 강렬한 영화다. 휘발성 강한 이 영화의 에너지는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숨돌릴 틈없이 밀고나간다. <복수는 나의 것>에 이은 복수에 관한 두 번째 이야기이지만 <올드보이>의 화법은 전작과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감독의 말처럼 <복수는 나의 것>이 건조하고 차가운 반면 <올드보이>가 풍성하고 뜨겁다는 의미 이상이다. 일단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달리 미스터리스릴러라는 장르적 성격이 분명하다. 누가 왜 오대수를 15년간 감금했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의 게임은 차츰 질문을 바꾸면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다. 스릴러가 감춘 것과 드러낸 것의 조화로 이뤄지는 장르임을 염두에 둔다면 <올드보이>의 영리함은 더 분명해진다. “모래알이나 바윗덩어리나 물에 가라앉긴 마찬가지”라는 이 영화의 진술은 사소한 것으로 운명적 비극의 느낌까지 만들어내는 <올드보이> 자신에 대한 해석으로 읽히기도 한다.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행보를 가늠케 하는 영화로도 보인다. 많은 관객이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 사이에서 선택한 박찬욱의 길에 갈채를 보냈다. <올드보이>는 일본에 220만달러에 팔려 한국영화 최고 판매가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2003 외화 베스트 10 영화평론가 허문영씨는 <미스틱 리버>를 “올해 가장 무섭고 냉혹하며 비판적인 영화”라고 평했다. 동시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올해 가장 사랑했던 영화 리스트 맨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25년 전의 악몽에서 출발한 이 영화로 그 자신의 25년 전 시절을 까마득하게 잊을 법한 거장이 되었다. 2위와 3위에 오른 <그녀에게> <밀레니엄 맘보>도 건재한 기량을 과시하는 작가들의 영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현명하고 포근하게 나이를 먹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은 척박한 대만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았다고 전해주었다. 4위 <디 아워스>는 재미있게도 5위와 6위를 포함하고 있다. <파 프롬 헤븐>과는 줄리언 무어를, <도그빌>과는 니콜 키드먼을 공유하면서, 사이좋게 베스트 10 리스트 허리 부분을 장악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은 다소 서운한 7위에 머무르면서 3년 동안 들려준 전설을 마감했고, <킬 빌>은 2편이 남아 있음에도 벌써 8위에 올랐다. 서글프고도 갸륵한 사기극 <굿바이 레닌>은 9위.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은 신랄한 비판과 코미디영화 못지않은 유머로 숱한 극영화를 제치고 10위 자리를 채웠다. 이것으로 리스트는 완성되었지만, <니모를 찾아서>가 1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물고기와 거북이와 바닷새가 나오는, 설정만으로는 어린아이 눈높이에 꼭 맞는 <니모를 찾아서>는,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장담을 담은 애니메이션이었다. 아직 더 자라야 할 많은 어른들이 <니모를 찾아서>에 손을 들어주었다. 1. <미스틱 리버> 2. <그녀에게> 3. <밀레니엄 맘보> 4. <디 아워스> 5. <파 프롬 헤븐> 6. <도그빌> 7.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 8. <킬 빌> 9. <굿바이 레닌> 10. <볼링 포 콜럼바인>

2003 한국영화 결산 [4] - 올해의 배우 BEST 4

<살인의 추억> 송강호·<바람난 가족> 문소리 추웠다. 올해 최고의 배우로 뽑힌 두 배우가, 우연히도, 함께 출연하고 있는 <효자동 이발사>의 세트장은 차가웠다. 그것은 뚝 떨어진 기온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송강호와 문소리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활화산같이 불타오르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 사이에서, 두 사람은 반대로 빙점(氷点)에 가까운 연기를 펼친다.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는 ‘미치도록 잡고 싶었던’ 범인의 목덜미를 쥔 채 “밥은 먹고다니냐”고 조용히 읊조린다.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는 “잘할게”라며 다가오는 남편에게 “넌, 아웃이야”라는 냉정한 인사를 던지고 걸레질을 한다. 그들은 폭발하지도, 터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서늘하고 냉정한 기운으로 2003년 영화계를 기분 좋게 얼렸다. ‘냉정한 송C, 문C’와 나눈 ‘뜨거운’ 5문5답. 올해의 배우 - 송강호 가치관의 혁명은 연기의 혁명을 낳고 2003의 추억 의심없이 최고의 해였다. <살인의 추억>으로 상도 많이 받았지만 상을 떠나서, 무겁고 친숙하지 않은 소재였을 텐데도 열광적으로 지지해줬던 대중들이 있어서 행복한 한해였다. 개인적으로 <복수는 나의 것> 이후 섭섭함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2∼3년 뒤에 만들어졌다면 좀 다른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버림받은 자식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이 모든 것을 해소해준 것 같아 기뻤다. 박찬욱 감독이 다음 작품 <올드보이>로 인정받기도 했고. 사람들은 한해가 지나면 배우들의 연기 발전이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길 즐기는데, 연기든 연출이든 창조작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월이나 경험은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외형적인 테크닉이 자연스러워질 수는 있겠지만 연기는 태권도의 단을 따듯이 오래한다고, 열심히 한다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의 발전은 없다. 진짜 변화는 인간과 연기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 가치관의 혁명이 이루어진 뒤에 얻어지는 것이다. <복수는 나의 것>을 찍고 나서 연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 같다. 대사를 통해 감정과 상황을 이해시키는 것이 좋은 연기인가. 아니면 심정과 상황을 말이 아니라 그 배우가 가진 호흡 하나로 전달시키는 것이, 즉 숨기면서 하는 것이 좋은 연기인가 하는 것에 대한 고민. 그런 고민 이후 <살인의 추억>을 찍었다. 사실 <살인의 추억>은 배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봉준호라는 뛰어난 혜안을 가진 감독이 한 배우에게서 박두만이란 캐릭터를 영리하게 뽑아낸 경우였다. 돌이킬 수 없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촬영, 파주에서 비오는 날 여중생의 시체를 발견하는 신이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자 봉준호 감독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길거리에서 말없이 포옹을 나누었다. 6개월 동안의 긴 여정을 함께 걸어온 서로에 대한 고마움이었을 것이다. 강호와 소리 사이 <바람난 가족>을 보며 문소리의 배우로서의 능력이 꽃이 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극단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타고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모두들 문소리가 이창동 감독이라는 휼륭한 감독을 만나 키워졌다고만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이창동 감독이 좋은 재목을 알아보는 좋은 눈을 가졌던 것이라고 본다. 욕심도 열정도 대단하고 <효자동 이발사>를 함께 찍으면서 머리가 대단히 명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형적으로 고전적인 여배우의 장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그들보다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여지가 있고, 그것이 자신감으로 변했을 때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올해의 영화, 액추~얼리 원래 1년에 영화관에 몇번 안 가는 편이다. 그렇지만 올해는 <지구를 지켜라!>를 두번이나 봤고 <바람난 가족>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여섯개의 시선> <올드보이> 등 많은 영화를 봤다. 워낙 좋은 영화들이 많은 한해였으니까. 개인적으로 베스트를 뽑으라면 <올드보이>다. 박찬욱 감독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 영화이고, 최민식 선배의 연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지만 나는 유지태를 특히 주목해서 봤다. 지태에겐 배우로서 성숙할 수 있는 중요한 영화였다. 이우진이란 역할의 80%를 그가 해냈다고 본다. 2위를 뽑자면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의 괴물 같은 상상력을 보여준 영화였다. 상업적 코드의 유혹을 이긴 작가적인 뚝심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2004년을 지켜라 <효자동 이발사>의 촬영이 2004년 1월 말쯤 끝나면 4월에 개봉할 거다. 촬영이 35% 정도 남았는데 감이 좋다. 내년 초면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묘한 회한을 느낄 만한 따뜻한 영화 한편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6월이면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를 찍기 위해 뉴질랜드로 떠난다. 4개월 정도 촬영하고 나면 그렇게 내년도 훌쩍 갈 것 같다. 취미도 없고,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뭐 보러 다니는것도 싫고 귀찮다. 나란 사람이 그렇다. 영화 아니면 좋아하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다. 올해의 배우 - 문소리 천국과 지옥 사이, '레디'와 '고' 사이 2003년의 추억 사실 올해를 시작하면서 너무 걱정이었다. 2월 말 영화촬영이 끝나고 3, 4월엔 개인적으로는 최악의 상태였던 것 같다. 기분이 다운되어 잠도 못 자고, 잘 먹지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은 끝났는데 개봉날짜도 못 잡았고, 투자도 못 받고, 계속 후반작업만 하고, 후시녹음은 천번도 더하고, ‘<바람난 가족> 잘되면 눈 판다’는 소리나 들리고… 그땐 정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 영화 한편 열심히 찍은 죄밖에 없는데….’ 사실 이 작품을 선택하고 나서는 힘들다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두들 ‘그러게, 누가 하래?’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작품이 인정받아서 너무 고맙다. 연기자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개인적으로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도 했고, 부모 같은 이창동 감독, 명계남 대표로부터도 독립했고. 엉망으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기댈 데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그나마 현장에 있을 때가 그 외로움을 잊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물론 ‘레디’와 ‘컷’ 사이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이지만, 그건… 짧잖아. (웃음) 돌이킬 수 없는 포스터 촬영을 했던 이태원 스튜디오에서 나는 펑펑 울고 있었다. 물론 영화가 영화다 보니 전혀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홀딱 벗고 다리를 쫙 벌리고 있는 컨셉이라는 것은 스튜디오에 와서 알았다. 사실 벗고 있으면 슬퍼진다. 초라하잖아. 아무것도 없는, 몸만 있는 자신이란… 누구나 겪어보면 슬퍼질 거다. 집에서 혼자 옷벗고 있어봐라, 아마 참 초라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걸? 강호와 소리 사이 연극할 때부터 보면서 대단한 배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옆에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점쟁이가 송강호 선배에 대해 “난폭한 성질이 있으나, 눈에는 선하고 여린 심성이 비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거친 면이 있다. 그리고 여리고 순수한 면도 있다. 오로지 세상에 관심사는 영화뿐인 사람이다. 촬영장에서나 술자리에서나 늘 영화 이야기만 한다. 올해의 영화, 액추~얼리 이유는 알 수 없는데, 갈수록 점점 내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가 줄어든다. 예전엔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가슴이 내려앉기도 하고, 심장이 널뛰듯 뛰어서 잠도 잘 안 오는 영화들이 많았는데 요즘엔 그런 영화가 없다. 아마도 내가 변해서겠지. 그중 <살인의 추억>은 내 마음의 어떤 면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던 영화다. 재밌어서 좋기도 했고. 두 번째를 꼽으라면 <여섯개의 시선>. 시도 자체도 신선했고 나에게 인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게 한 작품이었다. 특히 정재은 감독의 작품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그 시도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다만 이왕 꺼낸 이야기니 조금 더 과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2004년을 지켜라 일단 2004년 초까지는 <효자동 이발사>에 전념해야 한다. 이 영화를 통해 조연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배우고 있다. 주연이 아니라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잠도 많이 못 자고 신경도 더 쓰이는 편이다. 상황에 맛깔스럽게 대처하지 못하면 조연은 그 신에서 의미가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준비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다. 하루는 영화 전체에 내가 나오는 부분만 체크해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주연일 때보다 영화 전체적인 것에 대해, 전체 리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이구, 앞으로 어떡해야 하나 생각할 때도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왕씨, 최씨 대사가 이만큼씩 늘어나 있다. 안 밀려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웃음) 몇몇 시나리오를 보고 있긴 하다. 예전에는 무거운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는데 좀더 다양해졌다. 다만 유부녀 역할이 많아져서 문제다.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 올해의 신인배우, 박해일·임수정 “아니, 영화를 보니까 나랑 김상경이 주연이 아니데. 박해일이 주연이더만….” <살인의 추억> 개봉 즈음, 송강호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곤 했다. 이 말은 창백한 얼굴의 용의자를 연기한 박해일에게 관객(특히 여성)들이 기울인 관심에 대한 일종의 ‘질투 어린 칭찬’이었을 것. 아닌 게 아니라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은 분노를 자아내면서도 이상한 매력을 뿜어내는 독특한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연적인 편집장을 증오하지만 서서히 그와 닮아가는 청년 역을 통해 순수와 타락의 공존을 선보였던 그는 <국화꽃 향기>에선 멜로 연기도 선보였다. “선과 악 무엇을 투사해도 좋을”(심영섭), “순수성과 악마성의 드문 공존”(변성찬) 등의 칭찬은 새로운 미남 연기파 배우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와 같은 것이리라. 임수정은 짧은 시간 동안 비약이라 할 만한 큰 성장을 이뤘다. 지난해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 나올 때만 해도 평범한 신인 연기자에 불과한 듯했지만, <장화, 홍련>과 <…ing>의 임수정은 확실히 달랐다. “또래 연기자들에게 찾을 수 없는 고전적인 여성성과 정서를 지녔다”는 김지운 감독의 말마따나 그는 신세대의 당돌함만으로 승부하려는 다른 신인급 연기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배우임을 선언하는 듯 보였다. 현재 충무로 감독들의 ‘캐스팅 1순위’가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셈이다. 분명, 임수정은 올해 한국영화계 최고의 발견 중 하나인 것이다.

2003 한국영화 결산 [5] - 올해의 영화인 BEST 4

올해의 감독 장준환 - 괴팍한 상상력의 제왕 “상상력의 독창성만 따진다면 최근 몇년 동안 한국영화에서는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만큼 독보적인 존재를 아직 보지 못했다. 어쩌면 한국 영화사의 가장 개성적인 감독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이가 바로 우리 시대에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은 흥분감마저 느끼게 한다.”(홍성남) 이제 첫 영화를 찍었을 뿐인데, 어떤 이는 장준환 감독을 김기영 감독에 비교하기도 한다. 괴이한 상상력과 B급 감수성으로 충만한 <지구를 지켜라!>가 그동안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어떤 ‘반역적인’ 기운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리라. 전국 6만8천여명이라는 초라한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내외에서 뜨거운 지지를 받은 점 또한 그러한 감성을 높이 산 탓일 것. “괴팍하고 귀여운 몽상가”(박평식), “장르적 기본기가 튼실하면서도 B급 영화적 상상력이 충만한 진정한 할리우드 키드의 탄생”(심영섭), “영화적으로 사유하고 영화적으로 꿈꾸는 ‘상상력의 제왕’”(황진미) 등의 칭찬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가 올해 최고의 신인감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대종상, 부산영평상, 서울영평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춘사영화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 등에서 신인감독상을 휩쓸었다는 데서 쉽게 증명이 됐다. 하지만 “단편을 통해 ‘약속’했던 바를, 장편을 통해 지켜낸 현 시기 유일한 데뷔감독”(변성찬)이라는 점에서 그는 신인이지만, 신인에 머물지 않았다. <지구를 지켜라!>는 단편 의 충격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이를 좀더 확장, 발전시켜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자신이 생각한 바를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그는 평단의 높은 지지를 얻어냈다. “자기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들 듯이 철저하게 자기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기어이 드러내 보인다”(정성일)는 평가는 이를 지적한 것. 결국, <지구를 지켜라!>는 ‘실수’나 ‘우연’으로 빚어진 게 아니라 감독의 일관된 ‘영화노선’에서 기인했다는 얘기다. 이처럼 높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장준환 감독의 속이 편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흥행에 초연하려 한들, 그래도 데뷔작에 10만명도 안 들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지 않을 감독은 없는 법. “사실, 섭섭했던 건 사실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고 고민도 했다. 그래도 이 영화를 사랑해준 적지만 소중한 관객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 물론 부담도 생긴 게 사실이다.” 특히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열혈 회원의 지지는 그에게 큰힘을 줬다. 숱한 트로피보다 자신의 영화를 사랑해준 소수의 관객을 통해 그는 용기를 얻은 것이다. 다만, “대단한 연기를 펼친 신하균에게도 시선이 좀 갔으면 하는 안타까움”은 여전히 그에게 남은 멍에 같은 것이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주인공 병구의 전사(前史)라 할 만한 내용으로 정재일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뒤, 현재 싸이더스에서 신작을 준비하기 시작한 장준환 감독은 “아직 어떤 작품을 할지 결정된 바는 없지만, 흥행도 좀 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올해의 프로듀서 차승재 - ‘웰메이드’ 작가영화를 향한 뚝심 “올해의 교훈? 하던 대로 해야 한다는 거다.” <살인의 추억> 등으로 건재함을 과시한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코미디 바람 등에 편승하지 않고 그동안처럼 ‘웰메이드영화’를 뚝심있게 밀어붙인 게 올해의 성과로 남았다고 자평한다. 올해는 차승재 대표가 충무로에 들어온 이래 최고의 해임에 틀림없다. 최고 흥행작인 <살인의 추억>을 만들었고, 문제작인 <지구를 지켜라!>와 <싱글즈>를 차례로 발표했으며, <말죽거리 잔혹사> <범죄의 재구성> <늑대의 유혹> 등을 활기차게 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에 트로피는 엄청 늘었지만 상금없는 상이 워낙 많아 술값만 늘었다”고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는 “분위기는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갈 길은 아직도 험한 셈”이라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올해의 촬영감독 김형구 - 시대적 공기의 시각적 포착 좋은 촬영감독은 프레임 안을 통해 그 바깥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의 김형구 촬영감독이 바로 그런 경우. 그는 단순히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들의 모습만이 아니라 “답답한 시대적 공기의 시각적 포착에 성공했다”(홍성남). “5공이라는 암흑기를 다루는 탓에 컬러를 빼는 것을 고민했고, 그래서 듀플리케이션 네거티브를 만들 때 블리치 바이패스 기법을 시도했다.” 또 그는 봉준호 감독과 함께 ‘비오는 장면은 흐린 날에만 찍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마다지 않았고, 70여 군데를 돌며 로케이션을 하는 와중에도 영상원 강의를 빼먹지 않았다. 현재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내년엔 <역도산>을 재현하는 데 뛰어들 예정이다. 올해의 시나리오 봉준호, 심성보 <살인의 추억> 탁월하고, 탁월하다 “그 시나리오 죽이더라.” 영화를 찍기 전부터 충무로에 자자했던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에 관한 소문은 영화를 통해 그 뛰어남이 입증됐다. 봉준호 감독이 대부분을 구상하고 스크립터이기도 한 심성보씨가 도움을 준 이 시나리오는 탁월한 캐릭터 묘사와 실감나는 대사가 문학적인 가치마저도 갖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시나리오는 초판 5천부가 다 팔리고 재판을 찍었을 정도다. 봉준호 감독은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시대적 무능과 한계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몇달이 걸렸다. 그뒤론 송강호, 서태윤, 조용구 등 캐릭터가 명확해졌다”고 말한다. 현재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와 3번째 작품을 준비 중인 그는 또다시 시나리오와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