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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기획] 칸영화제 화제작 대담, 어쩌면 이별의 셀러브레이션일

한국영화 <화란>의 첫 상영이 끝난 5월24일 낮, 16일에 개막한 영화제는 어느덧 중간점을 지나고 있었다. 빼곡한 상영 일정의 틈새를 노려 숙소 식탁에 둘러앉은 세명의 기자가 이날까지 공개된 17편의 경쟁부문 영화와 그외 섹션의 화제작들을 톺아보며 중간 결산의 시간을 가졌다. 1. 확장과 심화, 칸 단골들의 향연 김혜리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비롯한 올드 보이들의 귀환이 올해 키워드다. 1990년대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김홍준 감독님(구회영)이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책을 냈었는데 그 목차하고 거의 비슷한 이름들이 2023년 칸에 와 있더라. 빔 벤더스, 마틴 스코세이지, 빅토르 에리세, 기타노 다케시 등. 혹시 내가 타임머신을 탄 건가 착각을 부르는 라인업이다. 앞서 세번 칸을 방문할 동안 늘 켄 로치가 있었는데, 올해도 무려 네 번째로 함께한다. 송경원 이 정도면 운명적인 관계 아닌가. 현재까지 공개된 경쟁부문 영화 중 평점이 가장 높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폴른 리브스>는 일정 문제로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김소미 기자만 볼 수 있었는데, 영화 어땠나. 김소미 <희망의 건너편> 이후 6년 만의 귀환이면서 감독이 30년 전에 처음 시도한 워킹 클래스 3부작으로의 회귀라는 점에서 뭉클한 데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중계하는 라디오 사운드를 배경으로 고단한 노동자 남녀의 표정 없는 로맨틱 코미디를 펼친다. 카우리스마키의 30년 전 영화들에서 나아진 바 없이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더욱 쓸쓸하고 가차 없어졌지만 건조함 속에서도 삶을 향한 연민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김혜리 <폴른 리브스>가 카우리스마키의 노동 3부작을 잇는다고 평가할 만한 부분은 자본주의의 변화 양상을 인물들의 생활환경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가. 김소미 유통기한 지난 샌드위치를 집에 가져가려다 발각된 슈퍼마켓 직원과 술을 마시고 작업하다가 쫓겨난 공사장 인부가 제각기 해고된 이후에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에 영향을 받는데, 가난할수록 선택지가 적기 때문에 더욱 포기하기 힘든 삶의 어떤 필수 조건들로 인해 어긋나는 연인의 코미디를 보고 있다보면 <모던 타임즈>가 떠오른다. 이번엔 실제로 채플린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기도 하고. 김혜리 다르덴 형제는 <토리와 로키타>에서 미성년 난민에 주목했고 켄 로치는 <미안해요, 리키>에서 택배 기사를 주인공으로 긱 이코노미를 들여다보았으니 두 감독과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송경원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비관주의자의 낙관이 주는 힘이 있다. 누리 빌게 제일란과 비교되는 지점도 흥미롭다. 누리 빌게 제일란의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가 위선적인 인물들의 지적인 수다로 튀르키예의 현재를 들춘다면, <폴른 리브스>는 동시대의 전쟁 상황을 라디오를 통한 배경음 정도로만 간단히 처리하는데 관객에겐 후자가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김혜리 올드 보이들 외 칸 키드이자 단골이라 할 수 있는 토드 헤인스, 웨스 앤더슨까지 포함해 올해는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방법론과 스타일을 더욱 확장하거나 순도 높게 심화시킨 감독들의 결과물들이 눈에 띈다. 가령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아이리시맨>에 이어서 미국 자본주의가 어떻게 이 참혹한 지경까지 왔는지 그 배경을 보여주는 영화다. 원주민 구역에서 석유가 채굴되면서 갑자기 부유해진 오세이지족에 백인들이 접근하기 시작해 착취, 나아가 연쇄 살인까지 벌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로 경쟁부문을 찾은 웨스 앤더슨의 경우에는 확실히 취향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겠다. 웨스 앤더슨 초기 영화들 특유의 멜랑콜리함, 페이소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웨스 앤더슨의 최근 영화들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번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도 대사와 시각 정보의 양이 상당해 따라가기 벅찰 정도다. 한편 그의 애니메이션들을 연상시키는 인형극적 요소도 돋보인다. 웨스 앤더슨이 점점 더 전통적인 영역을 벗어나 자기 세계를 짓는 모습에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르게 보면 웨스 앤더슨이 시네마의 영토를 넓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송경원 경쟁부문 리스트에서 강력하게 한방을 보여준 작품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해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 본 영화 중 특히 언급하고 싶은 작품은 누리 빌게 제일란의 <어바웃 드라이 그래시스>다. 자기 복제의 소지도 있지만 끊임없는 대화 속에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문제를 녹이며 튀르키예의 현재에 관한 화두를 던진다. 미술 교사인 주인공이 스케치를 위해 계속 사진을 찍는 장면들도 기록 필름처럼 아름다웠다. 김소미 <파 프롬 헤븐>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김혜리 선배는 올해 토드 헤인스를 <메이 디셈버>로 다시 만났다. 두 작품의 괴리가 <메이 디셈버>의 개성을 말해주기도 하는데 감상이 어떤지 궁금하다. 김혜리 <파 프롬 헤븐>이 할리우드 고전 멜로드라마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정념의 영화라면, <메이 디셈버>는 굉장히 다성적인 형식으로 나아간다. 음악, 연기, 서사, 미장센 등이 서로 불협화음을 내면서 보는 사람을 자꾸만 영화 뒤편으로 끌어당긴다. 기본적으로 타블로이드적인 사랑 이야기의 뼈대 위에 있는 이야기다. 나이 차이가 많은 관계를 뜻하는 제목처럼 30대 중반의 여성이 13살 소년과 사랑에 빠져서 감옥에 가는데, 출소 후에도 그 사랑을 유지한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아서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자신을 연기할 배우가 찾아와 리서치를 목적으로 관찰과 인터뷰를 이어간다. 남녀를 바꿔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한 소재인 셈이다. 송경원 그래서 거리두기의 형식을 고집한 게 아닐까. 비틀린 코미디, 사이코 드라마, 소프오페라, 텔레노벨라의 요소가 모두 섞여 있다. 토드 헤인스 본인은 부정하지만 어쩔 수 없이 페드로 알모도바르도 떠오른다. 김소미 여러모로 토드 헤인스가 <벨벳 골드마인>과 <아임 낫 데어>의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다. 인물 구도 면에서는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김혜리 인터뷰 때 토드 헤인스 감독이 올해 칸에 배우 리브 울만이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베리만의 <페르소나> <겨울빛>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그분에게 직접 꼭 말하고 싶다고 무척 들뜬 얼굴로 말했었다. 또 하나 재밌었던 것이 이 영화의 거울숏이다. 그레이시(줄리앤 무어)와 그레이시를 모델로 한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준비 중인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를 거울 앞에 나란히 세우기도 하고 거울을 소품 삼아 경계선을 만들기도 한다. 이후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시가 되어 과거에 그레이시가 10대 소년에게 보냈던 편지를 읽는데, 관객이 엘리자베스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카메라 렌즈가 엘리자베스에겐 거울이 되는 효과가 생성되면서 두 여자가 겹쳐지는 궁극의 거울숏으로 수렴된다. <메이 디셈버>는 관계 바깥에 있던 외부자가 내부로 들어왔을 때 당사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믿고 있었던 것들을 어떻게 손쉽게 흔들어놓는가를 질문한다. 더욱이 이 영화 속 남녀는 둘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맹목적으로 믿지 않으면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도저히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수세적인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 송경원 또 다른 단골 손님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괴물>에서 선명한 변화를 시도한다. <라쇼몽> 형식으로 똑같은 상황을 두고 엄마의 시점, 선생님의 시점, 그리고 아이들 관점을 구분해 보여주는데 이것이 단순히 시점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체 편집의 호흡, 색감,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들도 완전히 바뀐다. 지금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향한 공통된 아쉬움이 있다고 한다면 익숙해서 진부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안전지향의 세공들로 인해 돌출된 에너지라든가 의외의 순간 같은 것은 부족하다는 점일 텐데 <괴물>은 주제가 선명히 부각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에 몰두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야심이 느껴져 크게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다만 프랑스, 영미권 매체에선 평가가 박하다. 김소미 고레에다의 첫 퀴어영화라는 점에 대해 서구 관객과 아시아 관객이 받아들이는 감각도 다를 듯싶다. 칸영화제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바라는 것은 <클로즈>가 아닐 테니. <태풍이 지나가고> 이후 <세번째 살인> <파비안느의 진실> 등 장르나 스타일 면에서 색다른 시도를 해왔지만 기본적으로 고레에다는 일본영화의 전통 안에서 개별 작품들이 각각 매우 안정적이고 균질한 장인의 미학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괴물>은 카메라워크부터 편집의 리듬감 등 모두 어떤 면에선 덜 다듬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과하고 역동적이다. 나도 이 도전을 지지하는 쪽이다. 2. 시간을 발명하는 영화들 송경원 올해 칸 상영작 중 러닝타임이 특징적인 영화들만 모아서 이야기해봐도 좋겠다. 우선 마틴 스코세이지의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러닝타임이 3시간26분으로 스코세이지 영화 중 가장 길다. 김혜리 이렇게나 에너지가 높고 리듬감이 살아 있는 스코세이지 영화가 전에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러닝타임은 길지만 마치 넷플릭스의 화제작 미니시리즈를 4화 정도까지 보고 나온 것 같은, 대가의 손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락함과 편안한 재미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릴리 글래드스턴 커플을 묘사하는 방식도 노련하다. 문화적인 뿌리, 세계관이 너무 다른 두 사람을 다룰 때 한 쪽을 신비화하거나 오리엔탈라이즈하기 쉬운데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은 원주민을 지나치게 이국적인 방식으로 재현하지 않고, 지독하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 어리석은 남자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편의적으로 용서하지도 않는다. Apple TV+가 창립 이후 영화 한편에 가장 많은 제작비를 쏟은 작품이라는 기념비적 의미도 있다. 스코세이지는 1986년 <특근> 이후 이번이 두 번째 칸 방문이다. 송경원 긴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빼놓기 힘든 작품이 경쟁부문의 다큐멘터리, 왕빙 감독의 <유스(스프링)>이다. <비터 머니> 이후 청년 노동자들에 대한 다큐가 다시 나왔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청춘들을 고발하려는 목적이 앞자리에 있는 영화는 아니고 극적인 터치를 최대한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물리적인 한계치까지 담아내려는 시도에 가깝다. 3시간32분 동안 의료 도시 작업장의 미싱 소리를 듣고 비슷한 노동 풍경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왕빙의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내가 카메라 뒤에 서서 미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감각이 찾아오기까지 최소한 2시간은 필요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고여 있는 시간을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살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김소미 왕빙의 앞선 작품들에 비해서 특별히 뛰어난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왕빙이라는 다큐멘터리스트의 작업이 가지는 수행적 면모가 영화 내적인 서사와 맞물려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루 종일 미싱을 돌리고 꿰매고 자르는 움직임, 한 사람에게서 또 한 사람에게로 반복적으로 초점을 옮기는 형식, 6년 가까이 그들 곁에서 머문 왕빙의 촬영 과정이 영화 안팎에서 하나로 거대한 노동으로 맞물린다. 송경원 칸에 도착해서 처음 본 경쟁부문 바깥의 영화가 칸 프리미어 섹션의 <유레카>였다. 러닝타임 2시간26분으로, 실제로 그리 긴 영화는 아닌데 꽤 긴 시간을 여행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리산드로 알론소가 <도원경>에서 했던 시도를 형식적으로 더 밀어붙인 작품이 <유레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평이 아주 좋지는 않은데, 그건 아무래도 관객과 더 멀어지는 선택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형식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라는 평가도 있다. 나는 아주 좋게 봤다.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서사를 펼치면서 늘 화면 안으로 파고드는 수직 운동을 하는 알론소의 스타일이 이번 영화에서도 역시 주제와 형식의 적절한 조우로 느껴진다. 극장에서 꼭 다시 보고 싶다. 김혜리 수입이 안될 텐데…. (일동 폭소) 김소미 우리를 고양시키는 영혼을 위한 영화라 하고 싶다. 시간의 속도에 타협하지 않는 태도가 더욱 강건해졌다. 리산드로 알론소는 이제 슬로 시네마가 아니라 슬리피 시네마로 나아가고 있다. 몽환적이거나 시적인 연출에 의존하지 않는데도 대단히 반내러티브적인 장면의 연결들로 인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의식 속에서 꿈꾸는 것과 비슷한 작용이 일어난다. 흑백의 서부극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해 뒤로 갈수록 신비주의적인 시간 여행이 일어나는데, 마치 내러티브가 점차 기화하는 것 같다. 한 매체는 발원지에서 먼 하구를 향해 뻗어가는 강의 지류가 끝없이 갈라지는 형상에 가깝다고 묘사하더라.

[김세인의 데구루루] 일곱시에 열두번 우는 뻐꾸기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 했다. 계획을 들은 사람들은 ‘그곳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에요!’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익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신없는 관광지인 것을 확인했던 터라 그곳이 글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공간인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산 앞에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또 ‘화산 앞에서 글을 쓰려고요’라고 말해보고 싶었다.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스스로 좀 근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케이블카를 타고 산등성이를 한차례 넘자 정거장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별 볼 일 없었다. 그날따라 날이 좋아서 역시 나는 운이 좋다며 신나게 숙소를 나섰는데 날이 심하게 너~무 좋아서 내리쬐는 태양 아래 증기도 연기도 신묘한 기세도 아무것도 없이 거대한 공사판 같은 날것의 흙바닥만 먼지를 피우고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수명을 7년 늘려준다는 검은 달걀을 사서 먹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먹자니 목이 막혀 수명이 더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것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샀는데 사진을 한장 찍자마자 고온의 날씨 탓에 초스피드로 흘러내려 엉덩이를 쭉 뺀 요상한 자세로 흡입해야만 했다. 양손이며 흰 운동화며 검은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되어서 화장실을 찾아 돌아다녔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자 아이스크림은 분명 입으로 먹었는데 뺨, 눈꺼풀, 코에도 검정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래서 다들 날 보고 웃었구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산통이 깨져 글은 무슨 글이냐 싶어 그대로 화산을 내려갔다. 화산 앞에 앉아서 드는 생각들에 대해 쓰려고 했지만 소득을 얻지 못해 다른 주제를 찾아야 했다. 꽤 오랫동안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외 별다른 주제가 생각나지 않아 괜히 애꿎게 이전에 썼던 글들만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며 뒤적였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하나 있다. 지난 세편의 글들 모두 과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였다. 유년 시절과 지난가을, 지난여름…. 그뿐만 아니라 이전에 썼던 각본집에 포함된 에세이들, 장단편의 시나리오들 또한 과거를 돌아보며 쓴 글들이다. 나는 과연 회고적 인간이구나 싶었다. 이러한 기질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이 과거를 향해 있는 것을 확인하자 민망했다. 일상을 보내며 어느 순간부터 시간의 초점이 계속 틀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감각 자체가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로 기울어져 있어 어정쩡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조금씩 야금야금 틀어져 몇해 전에는 이거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그 간극을 좁히려 여러 해 동안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고 익혔는데. 이렇게 글의 첫 문장들은 여전히 과거에 놓여 있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해야지만 정리되고 비로소 쓸 수 있었다. 어떤 글들은 그렇게 숙성의 과정을 거쳐 깊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시들해졌다. 계속 이런 식의 글쓰기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느끼는 것 자체로 담백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스탤지어라든지 어떤 꾸밈을 빌려야지만 글을 쓸 수 있는 자기 확신이 없는 겁쟁이 글쓰기 방식으로 말이다. 화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곳에 앉아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써내려가고 싶었던 거구나. 그 또한 지금에서야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요즘은 최승자 작가의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를 읽고 있다. 1994년 8월 말부터 1995년 1월 중순까지 하루하루의 지형이 소탈하지만 힘 있게 그려져 있다. 아까워서 급하게 읽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지난가을에는 하미나 작가의 <베를린 유학기>를 구독해 출근길에 읽었다. 정말 놀라운 작가들이다. 존경한다. 뜸 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현재의 상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기록해나가는 것이 굉장히 대범하다. 느끼는 즉시 써야지만 담기는 에너지가 분명 있다. 현재의 충만함, 기쁨, 슬픔, 아쉬움, 혼란, 분노, 만족, 창피함, 사랑…. 거쳐가는 수많은 감정을 어떠한 꾸밈도 용납하지 않고 독자에게 건넨다. 작가에게 발생하고 변화하고 소멸되는 어떤 것들이 그대로. 그야말로 날것의 활동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글들을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 한달 전 뻐꾸기시계를 샀다. 이번 봄에 선생님께서 ‘너의 말이 새소리처럼 상쾌하게 들린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문장이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의 말보다 해사하게 웃으며 말씀하신 선생님의 말이 더 고운 새소리처럼 느껴졌다. 뻐꾸기가 때마다 시간을 알려준다면 그 아름다운 문장처럼 일상도 상쾌하고 청아하고 개운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우리 집에도 친구네 집에도 어딜 가든 뻐꾸기시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싼 물건인 줄 몰랐다. 20만원에 가까운 금액으로 시계를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전통 뻐꾸기시계가 아닌 플라스틱 뻐꾸기시계로 구매했다. 그래도 색상은 한층 더 산뜻한 오렌지색이었기 때문에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배달된 시계는 너무 조악해서 깔짝깔짝 흔들리는 시계추도, 엉성하게 색칠된 뻐꾸기도 매우 간사해 보였다. 그래도 울음소리만큼은 우렁찼는데 이 녀석이 일곱시에는 열두번을 울고, 열두시에는 세번을 울고 제멋대로였다. 문도 벌컥 열고 나와 시간에도 맞지 않는 울음소리로 나를 헷갈리게 만들고 할 일 끝내고 문을 획 닫고 들어가는 게 좀 건방지게 느껴졌다. 고양이들은 익숙하지 않는 소리에 정각마다 화들짝 놀라 뻐꾸기 곁으로 후다닥 달려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귀도 수염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공허하게 울리는 바보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한동안은 꽤 짜증이 났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제는 어쩐지 가엾게 들린다. 오늘은 저 뻐꾸기를 손 좀 봐줘야겠다. 그래도 완전 애먼 시간이 아닌 정각에는 울기 때문에 조율이 꽤 수월할 거라 예상된다. 뻐꾸기집의 뚜껑을 열고 시계의 톱니바퀴를 세밀하게 잘 조율해봐야겠다. 뻐꾸기가 과거의 울음소리나 미래의 울음소리를 지저귀지 않게. 제때에 맞춰 상쾌하고 개운하게 그리고 우렁차게 울기를.

[김세인의 데구루루] 무서운 이야기

인천 자유시장 입구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성인의 걸음으로도 제법 다리를 올려야만 하는 높이였다. 한낮에 입구에서 계단 위를 바라보면 그곳은 너무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층에는 장터를 뺑 도는 창문 없는 복도가 사각형으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 한면만 해도 길이가 꽤 되었는데 고작 한두개의 전구만 꺼질 듯 희미하게 빛을 품고 있어 전혀 주변을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한쪽 모퉁이에서 다른 쪽 모퉁이를 바라보면 그저 한두개의 흰빛 덩어리만 보일 뿐이었다. 한층 아래는 활기 넘치는 시장의 소리가 들렸지만 한층만 올라서면 이따금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전구 곁을 지날 때만 들리는 전기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긴 복도에 여러 개의 문이 줄지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층을 사이에 둔 소리와 빛의 간극 덕분에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면 우리는 아주 먼 곳에 오래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더위에 한껏 빨갛게 달아올랐던 두뺨도 어느덧 금세 싸늘해졌다. 그럼 못내 아쉬워 주저하다 계단을 다시 오르곤 했다. 그렇게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도깨비 집’으로 불리던 그곳을 두세번 돌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가끔 전구 밑에 사람의 형태가 보였다. 그럼 우리는 그것이 진짜 귀신이었으면 바라면서도 진짜 귀신이 아니었으면 하는 상반된 오묘한 기대를 품고 한 걸음씩 다가갔다. 긴 복도의 바닥은 두세칸의 미니계단과 함께 이상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걷는 감각이 일상의 것과 사뭇 달라 울렁거렸다. 긴가 민가 하다 인식 범위에 들어서면 역시 짐 더미거나 쓰레기봉투였다. 안심하면서도 싱거운 마음으로 지나쳐가다 멀어지면 꼭 가자미눈으로 돌아보며 물체가 다시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역시 저게 진실일지도 몰라’ 생각했다. 하루는 저녁에 시장으로 심부름을 갔다가 호기롭게 혼자 그 계단을 올랐다. 껌껌한 복도 앞에서 금방 심장이 콩알만해져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데 한 남자애가 뚜벅뚜벅 계단을 올라왔다. 남자애도 공포 체험을 하러 온 거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시 쫓아 올라갔다. 복도를 반쯤 왔을까. 남자애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줄지어 서 있는 문 중 하나를 열었다.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어서 와’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된장찌개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 텔레비전 소리,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밝은 형광등 불빛 등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쏟아졌다. 남자애는 새침하게 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는 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깜짝 놀라 정신없이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갑자기 복도에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 문들이 단순히 방음이 잘된 집들이었다는 것, 고작 그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공포 체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미안하고도 이상한 마음이 들어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나는 괴담을 좋아해서 몇년 전까지는 동네 친구들과 둘러앉아 괴담을 즐겨 나눴다. 지금은 인터넷으로만 괴담을 찾아보는 정도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괴담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빼꼼 문이 열린다. 이윽고 어디선가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텔레비전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아니면 희미한 전구 불빛이 켜지고 그 밑에 쓰레기 봉지가 놓이는 것이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게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그럼 괴담들이 결국 모두 사람의 것으로, 너무나도 사람의 것으로 느껴져 무섭다기보다는 슬프고 미안해진다. 결국 공포는 삶의 어찌할 수 없음에서 오는 감각이기에. 결국 아주 깊은 슬픔은 공포이고, 공포는 아주 깊은 슬픔인 걸까. * 중학생 때 흔히 그렇듯 비 오는 날이면 선생님을 설득해 수업 대신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한 선생님은 교탁을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우리는 돌아가며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대개 그런 자리면 평소 말이 많고 나서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자리를 차지하지만 그때만큼은 꽤 공평하게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조용한 친구들이 오히려 인기가 좋았다. 고이 간직해둔 기묘한 비밀을 꺼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럴 때면 나름 인기가 좋았는데 입도 떼기 전에 ‘무서워!’, ‘쟨 그냥 무서워!’ 이런 소리를 듣는 것은 좀 억울했다. 사람 눈을 잘 못 쳐다봤기 때문에 허공을 보며 말한 것도, 목소리가 덜덜 떨렸던 것도, 도중에 머뭇거렸던 것도 괴담 발표자로사 인기에 한몫한 것 같다. 다양한 말투와 성향의 친구들이 번호 순서대로 나와 교탁을 잡았다. 때로는 깜짝 놀랄 종류의 무서운 이야기, 때로는 잔잔하지만 뒤늦게 밀려오는 종류의 무서운 이야기, 때로는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듣고 보니 웃긴 이야기 등 적절하게 배합되어 오히려 긴장했다가 풀렸다가 분위기가 아주 밀도 있게 쫄깃쫄깃했었달까. 비가 계속 왔다. 장마였다. 비가 오고 또 왔다. 우리의 무서운 이야기도 고갈되었다. 그럼에도 수업을 하기 싫다는 일념 하나로 선생님을 꼬드겨 다시 무서운 이야기 시간을 가졌다. 이제 선뜻 누구도 교탁에 서지 않았다. 결국 목소리가 큰 친구들만 다시 교탁을 잡았다. 그렇지만 이제 더이상 할 이야기가 없던 그 목소리가 큰 친구들은 저번에 했었던 무서운 이야기를 교묘하게, 비슷하게 다시 늘어놓았다. 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앞뒤가 맞지 않는 무서운 이야기, 시시한 무서운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나머지 친구들도 그 이야기들이 더이상 무섭지 않았지만 수업을 시작할까 봐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무서운 척했다. 목소리가 큰 친구들도 자신들의 이야기가 무섭지 않았지만, 믿기지 않았지만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아주 무서운 척했다. 선생님도 이야기가 무섭지 않았지만 수업을 하기 싫으셨는지 그냥 그대로 두었다. 결국 아무도 이야기를 무서워하는 사람 없이 눈치 보는 사람, 방관하는 사람만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가장 무서웠다. 그야말로 공포다.

[비평] 마주 보기의 불가능성을 마주보기, ‘애스터로이드 시티’와 ‘슬픔의 삼각형’

지난해와 올해 칸영화제에서 소개된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과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폐쇄된 장소를 무대로 삼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배경은 미지의 소행성이 발견된 건조한 평원이다. 혜성 관측일에 외계인을 태운 우주선이 출몰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물의 이동이 통제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망망대해 위의 크루즈와 크루즈 폭발 사고 이후 생존자들이 모인 외딴섬을 주된 장소로 삼는다. 영화에서 특정 장소에 갇히거나 이동이 통제된 인물을 보여줄 때, 그것은 영화관에 모인 관객의 비유로 인식되곤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움직임이 제한된 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해야 하는 관객은 갇힌 이들을 통해 자신의 현 상태를 자각한다고 이야기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동시대 상황 속에서 한정된 장소와 이동의 통제는 일상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거의 동시적이라 말해지는 극장의 위기와 팬데믹은 영화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를 일상에 침투한 재난 상황에 관한 비유로 바꾸었다. 팬데믹 이후라는 맥락에서 <슬픔의 삼각형>과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놓을 때, 두 영화에서 팬데믹은 하나의 소재로 쓰이기보다는 영화의 근원을 다시 보게 하는 창구 혹은 틀이라는 다른 가능성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두 작품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어떤 몸짓을 취득하거나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혹은 같은 몸짓이 어떻게 다른 의미망 속에 놓이게 되었나를 보게 한다. 이때 중요한 매개는 사진 혹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사진은 사실성을 바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증거와 기록으로 기능했다. 반면 조작이 손쉽고 정교해지면서 신뢰성을 상실해갔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전쟁 사진작가라는 오기(제이슨 슈워츠먼)의 직업은 설정일 뿐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곳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그는 전쟁과는 무관한 장면들을 촬영하며, 그의 직업은 다른 이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촬영하는 습관의 좋은 핑계가 될 뿐이다. 전쟁 사진을 찍지 않는 전쟁 사진작가는 나아가 리얼리즘 이미지가 처한 전반적인 위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광고와 화보 사진이 존재한다. <슬픔의 삼각형>에서 협찬으로 크루즈에 탑승한 모델 커플 야야(샬비 딘)와 칼(해리스 디킨슨)의 사진은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위장한 일종의 광고다. 일광욕이나 식사 도중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파스타를 한 움큼 집어들고 먹는 포즈를 취하는 야야를 본 다른 탑승객이 파스타를 실제로 먹을 거냐고 묻는데, 이는 무용한 질문이자 쓸데없는 사족이다. 파스타를 든 인물이 실제로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는지 여부는 사진의 가치와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배우 밋지(스칼릿 조핸슨)가 몸을 살짝 숙이자,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그 자세로 멈춰달라고 부탁한다. 밋지는 방금 무의식적으로 했던 동작을 의식적 상태로 반복한다. 두편의 영화는 진실에 다가가는 두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하나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 실체를 폭로하듯 말로 보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동작을 두번 반복하는 것이다. 한쪽이 사진 위에 일상화된 허구성을 지적하는 대화를 덧붙일 때, 다른 한쪽은 동일한 동작이 사진이 인화되는 것처럼 진실에서 진실과 비슷한 것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을 지켜본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오기는 필름 사진을 찍는다. 현상하기까지 기다림을 동반하는 필름 사진은 사진이 기억의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을 매개로 한 기억은 그리 오랜 시간 간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진이 찍히고 다시 현상되기까지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영화에서 전쟁 사진을 대체한 것은 밋지의 사진만이 아니다. 오기가 포착한 외계인 사진은 엄격한 통제를 뚫고 도시 밖으로 전파되어 사회적 파문과 변화를 불러오면서 전쟁 사진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때 외계인 사진은 그럴듯하기보다는 조악함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동그란 흰 바탕에 검은 점 두개로 표현한 눈을 비롯해 전반적으로 단순한 외양은 컴퓨터그래픽이 상용되기 이전에 일차원적으로 제작된 크리처처럼 보이고, 그를 찍은 사진은 외계인이 등장한 B급 고전영화의 기록용 스틸처럼 보인다. 허구의 외계인을 찍은 리얼한 사진은 무대와 텔레비전, 영화를 관통하는 허구의 역사가 전쟁 사진의 리얼리즘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의 전환적 회복이기도 했음을 증명한다. 마주 보는 것 <슬픔의 삼각형>에서 사진을 찍는 장면은 종종 등장하지만, 사진이 프레임에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칼이 노트북 작업을 하는 장면에서 흐릿한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이 야야의 사진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관객은 그저 찍히는 몸과 찍는 몸이 나란히 배치된 모습을 보게 될 따름이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찍을 때 상대방을 정면에서 마주 보고 찍는 경우는 드물다. 칼이 야야를 찍는 장면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놓인 두개의 선베드 위에 몸을 기댄 채 방향만 상대방쪽으로 튼 자세가 된다. 야야와 칼의 사진 촬영 숏 직후에는 이들을 모방하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남자와 포즈를 취하는 여자가 거울상으로 맞붙는다. 늙은 남자는 열심히 포즈를 취하는 상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기도 귀찮다는 듯 벌러덩 누운 자세로 손만 뻗어 버튼을 눌러댄다. 사진 찍는 장면이 사진을 대체한 광경은 사진의 아우라 상실의 원인이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사진 찍는 행위의 무성의함에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하게 한다. 무성의한 태도는 사진을 찍을 때 삭제되어버린 마주 보는 행위의 부재로 단적으로 표출된다. 마주 보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리포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방송을 준비할 때나 칼이 모델 면접을 보는 시퀀스처럼 압박받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마주 봄은 2부에 잠깐 등장하는 한 남성 승무원과 관련된다. 사진을 찍으며 일광욕을 즐기던 야야와 칼은 맞은편에서 작업 중인 승무원을 눈여겨본다. 선글라스를 낀 짙은 피부의 남성은 작업 전 상의를 벗은 채 몸에 오일을 바르며 커플의 눈길을 끈다. 승무원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야야가 인사를 받는다. 카메라는 올려다보는 야야와 칼의 시선과 살짝 내려다보는 승무원의 시선을 나누어 포착한다. 인물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마주 보는 상황을 전제하지만, 이들의 실제 위치를 조망할 수 있는 마스터숏은 등장하지 않기에 마주 봄은 어딘가 미심쩍은 것으로 남는다. 더군다나 잠깐의 마주 봄에 의해 남자는 크루즈에서 하차하는 뒷모습으로 퇴장해버린다. 마주 보는 행위의 불가능함 혹은 위험함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이 담긴 오프닝 시퀀스에서 예견된 바 있다. 칼과 몇몇 모델들은 진행자의 주문에 따라 브랜드의 위상에 따라 달라지는 표정 연기를 즉흥에서 실행해 보인다. 저가 브랜드가 친밀하고 밝은 미소로 관객을 끈다면, 고가 브랜드는 카리스마 있는 표정으로 위엄을 내세운다. 배우들은 촬영 중인 카메라를 바라보지만, 이 표정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고 느껴진다. 당신은 ‘발렌시아가파’인 가, ‘H&M(에이치앤엠)파’인가. 둘을 오간다거나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만,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농담에 H&M식으로 웃을 수 있는가, 혹은 발렌시아가식 무표정으로 전혀 웃지 않을 것인가. 여기에서 마주 보기란 어디까지 견디거나 참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종의 테스트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마주 보는 숏은 관객을 정면으로 마주 보되,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하진 않는다. 배우가 다른 배우와 대화한다는 전제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때, 그 마주 보기는 현대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밋지의 방과 오기의 방은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다. 창은 창문 없이 차광막이 달린 사각의 구멍으로, 조형적인 실내와 더불어 세트 느낌이 강화된다. 창가에 기댄 얼굴로 카메라에 가까이 다가선 밋지의 얼굴과 실없는 말들은 오늘날 각자의 집에서 개인 방송하는 유튜버를 연상시킨다. 창은 상황에 따라 여러 기능을 한다. 창은 대화를 나누는 창구이자, 작은 연극 무대 혹은 리허설 현장이다. 밋지는 몇개의 시퀀스를 즉흥에서 연기한다. 샤워 이후 가운으로 갈아입는 노출 장면과 약을 털어넣고 욕조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는 상황을 연기하며, 오기에게 상대역을 하도록 유도한다. 오기의 방이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이라면, 밋지의 방은 사진을 촬영하는 스튜디오다. 밋지가 포즈를 취하면 오기는 촬영을 한다. 마주 보기는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이뤄진다. 사람들이 고전적 VR 기계라 할 머리 하나 크기의 박스를 쓴 채 시공간을 뛰어넘어 도달한 붉은빛을 관측하는 장면에서 예상치 못한 초록빛과 함께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멍하게 외계인을 바라보는 사이 외계인은 보호 장치를 해제하고 소행성을 취득한다. 오기가 목에 걸린 필름 카메라를 천천히 들어올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외계인은 방금 취득한 소행성을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이에 응한다. 외계인이 마주 보기의 대상으로 들어온 것은 대면이 유예되었던 시기의 불가능했던 마주 보기를 기억하는 것이자, 되찾은 마주 보기의 기이함을 과장하는 것 같다. 거리를 두는 것 마주 보는 행위는 거리를 전제로 하는 행위다. 최소한의 거리가 생성되지 않으면 서로 마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은 정면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프레임에 각각 담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이를 보충하듯 마주 보는 사람들의 측면숏을 통해 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실제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측면숏의 의미가 단지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것만은 아니다. 인물이 서로 마주 볼 때, 관객의 시선은 언제나 그로부터 비켜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한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마주 볼 때 관객은 그와 마주 본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리액션숏이 등장함에 따라 마주 보는 느낌은 깨어지고 조정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이처럼 불가능을 긍정하는 한눈팔기를 허용한다. 관객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눈 맞춤을 가로지른 저 너머를 향하게 된다. 초점이 맞지 않는 그곳에선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관객이라는 공동체가 잃어버린 장소를 가리키는 가상의 조형물이 우리를 마주 본다. 배경 이미지는 고전영화의 풍경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며 영화는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의 한 세기와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슬픔의 삼각형>을 마주할 때의 거리감과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일정한 거리감을 통해 정념을 건드린다면, 후자는 관객과의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시종 관객을 겨냥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둘로 나뉜 세계를 전제한다. 나는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거나, 둘을 오갈 수 있다는 비선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의 풍자에 함께 웃거나 불쾌해하거나다. 병증 이후 ‘인 덴 볼켄’과 ‘나인’ 등 딱 두개의 독어로 긍정과 부정을 전달하게 된 테레즈(아이리스 베번)는 이분화된 세계에 허락된 두 가지 반응을 상징하는 인물과도 같다. 크루즈 안에서 게워내는 토사물과 나부끼는 몸마저 우연으로 점철된 놀라운 광경이기보다 예견되고 약속된 정돈된 동작처럼 보인다. 중간의 것, 애매한 것은 모두 솎인 자리에 남은 것은 전복이 아니라 속물과 아름다움이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섞는 회귀의 광경이다. 그러나 관객은 의도된 이야기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계급을 요트 위에 축소한 듯 굴지만, 실제 요트에서 보이는 것은 젊은 주인공과 나이 든 승객의 대조일 뿐이다. 영화라는 이미지의 계급 안에서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이를 이길 수 있는 부유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탑승객이 승무원에게 억지로 물에 몸을 담그라고 지시하는 장면이 주는 감정도 굴욕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가 설정한 계급은 관객의 심리에 그대로 복사되지 않는다. 관객 역시 때때로 이 사실을 망각한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단단한 이야기가 시각과 심리에 있어서의 미끄러짐과 이탈을 초래했다면. 웨스 앤더슨은 미끄러짐을 허용하지 않는 단단한 이미지의 세계를 짓는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배경과 사물은 실제보다 작게 보인다. 특히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그 자체로 가공된 미니어처라는 느낌을 지속해서 불러온다. 다른 매체와의 비교 속에서 영화가 거대함에서 존재 이유를 찾을 때, 웨스 앤더슨은 소유할 수 있을 만큼 작아지기를 택한다. 두드러진 세트의 활용은 세계의 허구성을 폭로하지만, 허구성은 세계의 진실을 돌려놓는다. 세트는 다른 세트에 의해, 허구는 다른 허구에 의해 감싸여 있다. 진실은 허구와 허구 사이를 지나칠 때, 그 사이에서 언뜻 비추는 것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구조에 관해 언급할 때 극중극이라는 말보다는 극바깥극이라는 말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극중극은 전체로서의 극이 하나의 극을 감싸는 형태지만, 극바깥극은 극 이후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극은 서로에게 개입하여 작은 구멍을 내고 틈새로 빠져나가면서 두개의 극 중 어느 것도 충분한 사실성과 허구성을 획득하진 않는다. 오기가 겹겹이 싸인 두 층위의 무대를 연속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분리된 것으로 인식된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폭로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오기가 건물 내부를 통과해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왔을 때, 프레임을 오른편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옆 건물 비상계단에 선 한 인물이 보인다. 오기의 죽은 아내를 연기한 배우(마고 로비)로, 본편에서는 사진으로만 등장했다. 순간적으로 오기가 죽은 아내를 만나는 초현실적인 장면인가 착각하게 되지만, 커다란 가발을 쓰고 귀족부인 분장을 한 배우는 다른 작품에 출연 중일 뿐이다. 극장가의 네온사인을 후면에 두고 공중에 붕 뜬 채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은 마치 발코니형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부로 등장했지만, 실제는 몇번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즉흥에서 본편에서 삭제되었던 대사를 읊는다. 극 중 죽음을 맞은 배우가 멀쩡히 나타나는 것은 본편의 설정을 깨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지만, 여기에서는 카메오로 사라지는 단역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관계의 서사와 감정을 도리어 생성한다. 배역이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는 잠깐의 시간이 주는 어딘가 찡한 감정은 죽은 아내와의 비현실적인 만남이라는 착각이 주는 벅찬 감정과 무람없이 뒤섞인다. 그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몸짓과 되찾은 몸짓, 일상적인 몸짓과 영화적인 몸짓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인터뷰] 일하는 여성의 모습 여성 연대에 방점을 찍다,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 이혜진 PD

남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을 말하시오.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어렵지 않게 이름을 댈 수 있다. 그렇다면 여성 독립운동가 세 사람일 경우는 어떨까? <여성백년사-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리다>(이하 <여성백년사>)는 유관순 외에 바로 떠오르는 여성 독립운동가가 없어 자기반성을 하는 패널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100여년 전 이 땅에서 본연의 목소리를 냈지만 주류 역사학계에서 자주 소환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미시사를 조명한다. 만연한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꺾이지 않는 존엄성을 지켰던 그들의 모습은 현 한국 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달의 좋은 프로그램’ 최우수상, YWCA가 뽑은 좋은 미디어콘텐츠상 대상을 받은 <여성백년사>를 연출한 이혜진 PD는 이 연결점에 주목하며 여성들의 역사를 수집해나갔다. - <여성백년사>는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 EBS <다큐 프라임> 시리즈는 PD들이 기획안을 내면 서류 심사와 프레젠테이션을 거쳐 기획의 참신성과 완성도, PD의 연출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된 아이템으로 제작된다. <여성백년사>는 내가 처음으로 쓴 <다큐 프라임>기획안이었다. 2009년 EBS에 입사했을 때부터 여성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었는데, 방송국 특성상 교육적인 의미가 담기지 않으면 편성되기가 어렵다. 100년 전 경성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보러 갔다가 그들이 남긴 기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여성 인권을 주장하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구성으로 기획안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입사 초부터 여성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대학교 4학년 때 들은 교양 수업에서 나혜석을 알게 됐다. 나혜석에 심취해서 거의 한달 동안 도서관에서 나혜석에 관한 책만 읽었다. 이를테면 이혼 여성을 향한 비난에 부조리를 느낀다든지 당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80년 전에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게 재밌었다. 오히려 과거 여성들이 더욱 거침없이 자기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도 신기했다. 나중에 나혜석 같은 여성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만든다면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후 하고 싶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발굴한다는 기획인 만큼 자료 조사의 난이도도 높았겠다. = <다큐 프라임>의 장점은 충분한 준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EBS 내부에서도 PD들이 무척 하고 싶어 하는 프로그램이다. 취재 작가와 메인 작가, 나 이렇게 셋이서 당시 신문, 잡지 기사는 거의 다 봤고 관련 논문도 많이 찾아봤다. 취재 작가의 가족이 한의사라서 고어 해석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웃음) 2부에 나오는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의 경우 신문에 작게 나온 토막 기사에서 발견한 것이다. 사실 방송에 담긴 것은 조사한 내용의 100분의 1도 안된다. - 자료 조사한 내용 중 무엇을 다큐멘터리에 담아낼 것인지를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나. = 현재를 반추해볼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단순히 그들이 입은 피해나 억울함에 초점을 두지 않고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일이 명확한 이들을 주목했다. 이를테면 1부에 나오는 김명순 소설가는 현대인들에게 ‘최초의 미투’로 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작가로서 무척 뛰어난 역량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다. 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을 소개했다. 근대 신여성이라고 하면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을 많이들 꼽는데 나혜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선을 넘는 녀석들: 마스터-X> 등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차례 다룬 바가 있다. - 유튜버 이승국, 통역사 안현모, 역사학자 심용환, 배우 김현숙 등 패널들이 시간 여행을 하고 과거 인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토크멘터리 형식을 취했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역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가고픈 연출자의 배려가 돋보였다. = 요즘 시청자들의 눈은 과거 경성을 재현한 영화와 드라마에 맞춰져 있다.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적은 다큐멘터리는 그 정도 규모의 세트와 의상, 보조 출연자를 동원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 기법에 역사 토크멘터리 형식을 접목했다. 사실 방송 전에는 시청자들이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과거 인물을 맡은 배우들이 뻔뻔하게 연기를 잘해줬다. (웃음) - <여성백년사> 1부는 김명순, 2부는 다양한 직업여성들, 3부는 N번방 사건을 추적한 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같은 흐름은 어떻게 결정됐나. = 1~2부는 과거, 3부는 현재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는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심지어 3부에서 요즘 여성들의 고민을 담기 위해 결혼 정보회사 대표도 취재했다. 그러던 중 추적단 불꽃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를 읽게 됐다. 이 이야기를 다루는 것만으로 1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이야기를 얕게 다루기보다는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이야기, 디지털 성폭력을 집중적으로 다루자고 결정했다. - 3부에는 대학생 신분으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취재했던 추적단 불꽃,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 리셋 외에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기자들이 등장한다.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흐름에서 김완 기자 같은 남성이 등장하는 것은, 사안의 맥락이나 <한겨레>의 기여도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돌출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 김완 기자를 사전 취재했을 때 여성 연대에 대한 의견을 잘 줬고, 무엇보다 “뿌리 깊은 남성들의 포르노 문화부터 잘못된 것”이라 말해준 것이 이 다큐멘터리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이야기를 남자 기자의 입으로 듣는 것이 의미 있었다. - 사실 패배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하다 보면 지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희망만을 강조하면 자칫 사건의 심각성을 약화시킬 수도 있고. 특히 현재를 다룬 3부 ‘N번의 잘못’의 구성과 접근 방식에 고민이 많았겠다. = 특히 1부 김명순 같은 경우는 오랜 기간 무수히 많은 성폭력을 당했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도 새드 엔딩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김명순이 정말 잘 싸웠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싶었다. 또한 2부에서 분위기를 전환해 동양 최초의 여성 택시 기사 이정옥, 한국 최초의 미용사 오엽주, 데파트 걸에서 시작해 기자가 된 송계월 등 피해자로서가 아닌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았다. 3부를 준비하던 중 넷플릭스에서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이하 <사이버 지옥>)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 아이템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사이버 지옥>은 아직 디지털 성폭력은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마무리됐고, 피해자의 용기에 집중한 반면 여성들의 연대를 깊이 다루지는 않았다. 이야기 흐름이나 출연자가 겹치지만 우리는 여성 연대에 좀더 방점을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비슷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지만 여성들의 연대 덕분에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오랫동안 지속됐던 성폭력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 처음 EBS에 입사하게 된 스토리도 듣고 싶다. 이후 EBS에서는 어떤 프로그램들을 연출했나. = 원래 시사 교양국을 지망하던 PD 지망생이었다. 그런데 최종 면접에서 “올해는 여자를 안 뽑는다”거나 “온실 속의 화초 같다”는 식의, 나의 여성성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말을 몇번 들었다. 그리고 고생을 모른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삼성중공업에 입사했다. (웃음) 거제도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1년 반 정도 일을 한 경험이 결과적으로 방송국 면접을 볼 때 무척 유리하게 작용했다. EBS는 입사 초부터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나 <딩동댕 유치원> 같은 유아·어린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다양한 방송을 경험할 수 있는 방송국이다. 어린이들과 소통하고 학부모의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받다 보면 디테일한 연출을 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오래 맡았던 방송은 <스페이스 공감>이다. 단순히 무대만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의 음악 세계와 앨범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서트 영상을 고민해야 한다. 추상적인 이야기를 이미지화하는 방식에 대해 공부가 많이 됐다. 관객의 감상이 실시간으로 오기 때문에 시청자 반응을 염두에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후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도 시청자가 너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고민하게 됐다. - EBS PD들의 성비는 어떻게 되나.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성비가 균형 있게 잡히면 회사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나. = 내가 입사한 이후에는 남자 PD가 더 많이 들어온 적이 한해도 없다. 그전에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확실히 여자가 많다. 성비가 맞춰지면 조직 전체가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시사회를 연 후 여성 PD들이 젠더 관점에서 의견을 많이 전달한다. 자연스럽게 남자 PD들도 생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 어떤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나. = 다른 작가가 했던 말 중에서 무척 공감한 내용이 있다. 보는 사람도 바뀌고 만드는 사람도 바뀌는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여성백년사>를 만들기 이전의 나는 젠더 이슈에 무척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이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의 일에 자신을 모두 던져가며 나서는 리셋과 추적단 불꽃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무언가 해야겠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지고, 이러한 변화가 시청자에게도 전해지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 나를 연출자로 만든 것 경험에서 비롯된 문제의식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영상이었다. 영상 매체는 내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한다.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 체력이 좋아지고 있는 것. 헬스를 열심히 하는 만큼 체력이 느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드라마처럼 현장 스탭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장비와 소품을 함께 옮겨야 하는데, 근력을 키워서 번쩍번쩍 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사실 8년 정도 필라테스를 할 때는 미용 목적이 컸는데, 내게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번 PT를 시작할 땐 다이어트가 아닌 무거운 장비를 드는 것이 목표라고 확실히 말씀드렸다.

[기획] 우수상 당선자 ‘김신’ 작품비평, Open 24 hours - ‘리코리쉬 피자’를 중심으로

1차 석유파동 전후의 산페르난도 밸리를 담아낸 <리코리쉬 피자>의 첫 번째 화면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 있는 주인공 개리 발렌타인의 뒤편에서 변기가 폭발하는 장면이다. 그 직후 영화는 장면을 바꿔 평화롭게 복도를 걸어가는 알라나와 개리가 처음 눈이 맞는 현장을 보여준다. 먼저, 상호연관성이 결여된 두 장면을 이어 붙인 이 몽타주를 다소 도식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몽타주가 여러 사건과 인물을 혼란스럽게 흡수하며 질주하는 <리코리쉬 피자>의 마취적 구성을 집약하는 미장아빔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해석을 제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첫 장면에서 개리가 변기 폭발을 피해 화장실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가 다음 장면에서 복도를 거니는 알라나와 마주칠 수 있었다는 인과론적 추정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두 장면이 시간적으로 인접해 있다는 근거는 없으므로 우리는 세 번째 해석을 제출해볼 수도 있다. 이게 우발적인 연결이든, 필연적인 만남이든, 딱히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은 얘기이긴 하지만, 여러 방향성으로 개방된 이 느슨한 접합의 방식이야말로 <리코리쉬 피자>의 무질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시대극을 오밀조밀한 세부로 채우는 리서치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석유파동과 베트남전쟁의 여파 속 여러 디테일과 인물은 선명한 사회학적 인과율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흐트러져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인물들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창업 아이템을 갈아타는 개리처럼 역사의 현장 안에 느슨하게 배열된 채 얼기설기 기워져 있다. 첫눈에 반해 알라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개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며, 신문 너머로 알라나를 쳐다볼 때도 지면에 새겨진 포르노 광고를 흘깃거린다. 알라나는 스스로를 영화 속 한 장면에 속한 배우로 소개하던 개리의 첫인사에 “그 수십명 중 네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대답한다. 하지만 몇 장면이 지나면 무대에 오른 수십명의 조연 사이에서 개리의 얼굴을 식별하며 뺨을 붉힌다. 대충 두세 장면 정도가 또 지나가면 개리의 친구인 랜스에게 반해 외도의 궤적을 그린다. 심지어 그 랜스조차 알라나의 가족 식사에 초대받아 몇 마디를 횡설수설한 후에는 화면 밖으로 추방된 뒤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보급된 이후의 세계를 영화화하는 게 어려워 시대극을 찍는다고 고백했던 폴 토머스 앤더슨은 동시대의 파편적 징후를 70년대의 풍경에 투사해 재구성했다. 영화를 관통하는 헐겁고 느슨한 공기는 그가 2010년대를 건너오며 점차 전작들을 가로지르던 신경증적이고 역사적인 강박관념과 작별하려 했다는 점과 유관할 것이다. 그전까지도 앤더슨은 지식인적 소명을 선명하게 표방하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인물은 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병리를 과도하게 수렴해낸 정념의 화신으로 나타나곤 했다. 텔레비전 쇼와 뮤직비디오의 문법을 영화에 편견 없이 수혈했던 <매그놀리아>의 인물들도 속죄를 갈망한다는 기독교적 형이상학의 전통을 내면화한 채 “우리는 과거를 잊었지만,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성찰적 대사를 내뱉은 바 있고, 일그러진 석고상 같은 클로즈업을 우당탕탕 디밀던 <마스터>의 탕아 프레디도 첫사랑 도리스와의 추억이 담긴 유년기의 과거와 직면해 “내면의 악”(Inherent Vice)을 길들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것은 앤더슨이 속죄와 치유를 목적으로 삼았다는 게 아니라, 그 목적의 실질적 달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심리적 외상을 구심점으로 작동하는 시대극을 조직하는 데 몰두했다는 뜻이다. <리코리쉬 피자>도 성년기를 통과하는 인물들의 성장담을 구성하는 영화다. 하지만 인물들은 속죄와 치유에의 강박으로부터 한층 자유롭다. 서사와 감정의 추이를 암시하는 단서도 치밀한 논리에 종속되지 않은 채 한가롭게 널브러져 있다. 그러므로 <리코리쉬 피자>의 인물들은 아마도 <매그놀리아>의 구절을 비틀어 다음과 같은 대사를 중얼거릴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과거를 ‘진짜로’ 잊었기 때문에 특별한 트라우마가 없으며, 과거도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고.” 대신 “평범한 사이즈”의 성기 크기(<리코리쉬 피자>는 랜스와 개리 모두가 말하는 이 특성 없는 범박함에 주목하려 하며, 이는 거대한 성기 사이즈로 포르노 산업의 중추를 누빈 인물을 소묘했던 <부기 나이트>의 기획과의 대조를 예시한다)와 사업가적 독립성을 갖춘 그들은 스스로의 동물적 활력을 길들이려는 이성에의 강박 없이 복수의 시공간을 환승하듯 건너뛴다. 그 증거로, 석유파동의 여파로 자동차가 모두 멈춘 도로 한복판에서 개리는 울기는커녕 “세상이 망했다”고 신명나게 소리치며 흥뚱거린다. 주인공이 앤더슨 필모그래피의 다른 주인공보다 어려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잭 홀든과 존 피터스 같은 어른들 또한 폴 토머스 앤더슨이 애덤 네이먼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말했듯, “최악의 빌어먹을 애X끼들처럼 행동한다”. 종종 거울과 공간으로 프레임을 분절해 인물들이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 미장센은 이런 파편적 세태를 은유하는 주요한 상징이다. 이완된 구성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장면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물침대를 판매하는 엑스포에서 난데없이 경찰에 붙잡힌 개리가 이내 누명을 썼음이 판명나 풀려나는 싱거운 시퀀스다. 개리가 풀려난 후, 알라나는 “너 마약 했냐? 사람 죽였냐?”라고 윽박지르지만, 2초 정도 지나면 진상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경쾌하게 질주하며 실없는 웃음을 흘린다. 인물들이 경찰에게 체포되면서 시대와의 불화를 증언했던 앤더슨의 전작을 떠올린다면 이 장면의 가벼운 뉘앙스는 더욱 두드러진다. 비슷한 맥락에서, 개리와 알라나는 가족에 의한 트라우마를 겪지 않는다. 개리의 집에는 <데어 윌 비 블러드>와 같은 억압적인 아버지의 자리가 애초에 비어 있으며, 주인공을 괴롭히는 <펀치 드렁크 러브>와 <팬텀 스레드>의 사나운 누님들도 자취를 감춘 채 없다. 아버지가 부재한 개리는 심지어 어머니와의 관계도 희미하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독립심을 갖춘 채 사업을 벌일 생각에 골몰한다. 대체로 두 주인공의 사정에 무관심한 가족들은 그저 70년대의 시민들이 “집에서 매일 밤 죽음을 기만하고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기 위해 TV를 본다”던 장뤼크 고다르의 관찰처럼(<넘버 2>)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TV나 보며 패스트푸드를 씹을 뿐이다. 쿨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종종 외로움을 타는 <리코리쉬 피자>의 군상이 겪는 소외감은 그들의 정체성이 가변적인 역사적 조건에 노출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몇 가지 표지로 구체화된다. 액션 배우 잭 홀든이 영화배우를 지망하는 알라나를 보고 레인보우라는 배역 명이나 그레이스 켈리라는 이미지로 호명하지만, 막상 알라나가 자연인인 본인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는 무감하게 그녀를 내동댕이치며 다른 여인의 이름을 외치던 장면을 떠올려보자. 영화 속 인물들은 안정적인 관계에 정착하지 못한 채 어긋난 신호를 주고받으며, 때로는 불분명하고 거무스름한 실루엣에 감싸인 채 자아의 변주를 겪는다. 실제로 폴 토머스 앤더슨은 알라나가 25살인지 28살인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지 모호화하는 사소한 대사를 은근슬쩍 기입해두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정치적 이상주의를 설파하는 인물인 시장 후보 조엘 왁스 또한 마이크와 카메라가 자리를 비운 일상에서는 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연기를 한다. 어쩌면 잭 홀든의 바이크가 버려둔 알라나의 실루엣이, 달려나가는 개리의 실루엣과 결합하는 장면의 드라마틱한 역광은 두 주인공의 자아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점을 지목하는 은유적인 장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상대의 정체를 식별할 수 없듯 불분명한 기호로 얼룩진 세계에서 두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합일에 이른다. 하지만 종막에서조차 영화는 분열적 기색을 오롯이 남겨두었다. 두 인물은 서로의 존재가 대체 불가능하다는 인식의 각성을 겪으며 화합하는 대신 다른 관계로부터 겪은 혼란과 소외감을 달래기 위한 동기로 급작스럽게 결합하며, 핀볼 가게를 메운 손님들은 “여러분, 알라나 발렌타인을 소개합니다!”는 개리의 말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인물의 개인적 드라마가 도시적 환경과 이격한다는 포스트모던한 징후를 보여주는 연출일 텐데, 관련해서 보다 적나라한 단서는 알라나가 개리를 다시 조우하기 직전의 화면에 음각되어 있다. 그 장면에서 알라나는 어느 건물의 회랑을 달리던 중 “Open 24 hours”라고 쓰인 간판 밑을 스쳐간다.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정교하게 계산된 도심의 구조와 조명이 주인공의 내면과 탁월하게 조응했다면, 여기서 알라나의 머리를 맴도는 간판의 메시지는 그들의 사랑이 언제든 또 다른 관계에 대해 “24시간 오픈” 될 수 있음을 짓궂게 암시한다. 누아르적 조명 밑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마주하던 <마스터>의 프레디와 도드는 다음 생에 만나자는 영원의 서약을 맺은 채 작별의 서정을 새기고 갔지만, <리코리쉬 피자>의 캐릭터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그렇게까지 진지할 의향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순간의 매혹에 몸을 던지며 입을 맞출 뿐이다. 감초처럼 길쭉하게 생긴 여인과 피자 같은 여드름을 지닌 소년의 괴상한 조합이 어찌저찌 하나의 메뉴를 구성하는 찰나의 순간이다.

[비평] ‘여자’는 팀이 될 수 있는가,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개봉 이후 톰 크루즈가 없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여기저기에서 종종 듣는다. 그 말에 100% 동의하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설정은 캐릭터가 몽땅 바뀌어도 이야기 진행에 아무 지장이 없는 종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의 배우들은 꾸준히 바뀌었고 1988년에 나온 속편 시리즈까지 포함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고정으로 출연한 배우와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피터 그레이브스(영화에서는 존 보이트)가 연기한 팀의 리더 짐 펠프스도 시즌2부터 등장했다(첫 번째 리더인 댄 브릭스는 배우 스티븐 힐이 안식일에 일하는 걸 꺼려하는 정통주의 유대교도라 하차했다). 설정에서 캐릭터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캐릭터들의 역할이었다. 리더, 변장의 명수, 테크 전문가, 근육 그리고 여자의 역할만 확보된다면, 그들이 누구더라도 팀은 별 탈 없이 움직였다. 여성 캐릭터의 ‘홍일점’ 위치 여기서 신경 쓰이는 건 ‘여자’라는 표현이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엔 늘 흑인 남자가 한명 있었지만 (이 전통은 영화 시리즈에서 빙 레임스가 연기한 캐릭터 루터 스티켈로 이어진다) 그들의 역할은 ‘흑인’이 아니었다. 모두 테크 전문가라는 역할이 따로 있었다. 하지만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뭐냐고 물으면 ‘여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가 연기를 해야 하는 사기 집단에 여자가 한명 있으면 큰 도움이 되긴 한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인가? 시리즈 내내 여성 캐릭터의 ‘홍일점’ 위치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다시 말해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여자들에게 ‘여자’ 역할이 아닌 무언가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속편에선 순전히 새 여성 멤버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이전 여성 멤버를 살해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속편의 케이시 랜들은 영화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시리즈 내에서 목숨을 잃은 유일한 IMF 멤버였다. 영화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지긴 했던 모양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감독한 <미션 임파서블> 도입부에선 여성 멤버가 둘로 늘어나 있다. 하지만 에단 헌트를 제외한 팀원들 전원이 몰살당하면서 이 느린 발전은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여기서부터 치밀한 팀워크라는 <미션 임파서블>의 설정도 깨진다. 그보다 에단 헌트의 버스터 키튼 스타일의 맨몸 액션이 더 중요해졌다. 에단 헌트가 근육, 변장의 명수, 리더까지 맡았으니 교묘한 사기 행각의 앙상블도 의미를 잃는다. 이제 미션 임파서블팀은 현장 요원과 테크 전문가로 나뉜다. 3편부터 사이먼 페그가 연기하는 벤지 던이 고정이 되었지만 이 캐릭터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테크 전문가다. 젠 레이(매기 큐)와 제인 카터(폴라 패튼)라는 여성 멤버가 3, 4편에 등장했지만 이들이 시리즈 안에 녹아들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들이 안정적으로 시리즈 안에 머물며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톰 크루즈라는 남성 슈퍼스타가 그 공간을 먹어버렸다. 다시 말해 여자들에게 IMF의 환경은 텔레비전 시리즈 때보다 나빴다. 이런 상황에서 레베카 페르구손이 연기한 일사 파우스트라는 캐릭터가 등장해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일사가 IMF라는 팀 바깥에서 존재하며 에단 헌트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사는 상대역이었다. 팀원이 아니라. 톰 크루즈가 버티는 한 IMF는 여자들에게 그리 좋은 직장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이런 걸 고려해봤을 때,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의 포스터는 예상외로 바람직했다. 일사 파우스트와 버네사 커비가 연기한 무기상 알라나 미트소폴리스를 포함해 적어도 네명의 여자들이 등장했다. 영화가 시작되니 네명의 존재감도 상당했다. 폼 클레멘티에프가 연기한 파리는 훌륭한 악당이었고 헤일리 앳웰이 연기한 소매치기 그레이스는 거의 투톱 주인공 중 한명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만능의 현장 액션 요원이 아닌, 자기 전문 특기가 있는 최초의 여성 캐릭터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게 바람직했다. ‘여자’ 역할 이상의 기능을 가진 존재는 가능할까 그러다 다들 분노하는 일이 일어났다. 일사 파우스트가 그레이스를 지키려다 죽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걸 고려한다고 해도 이 부분은 모든 게 안 맞았다. 일단 일사에게 어울리지 않는 안티 클라이맥스였다. 둘째로 이 죽음은 케이시 랜들의 죽음을 연상시켰다. 이놈의 시리즈는 수소 원자도 아니면서 내부의 여성 캐릭터를 오로지 한명밖에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여담이지만 죽음 전에 에단 헌트와 어울리지 않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걸렸다. 그 때문에 일사는 ‘냉장고 속 여자 친구’에 더 가까워졌다. 결국 조금 전으로 돌아간다.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이 많은 여성 캐릭터들에게 숨 쉬고 활동할 기회를 준 건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감과 운명은 오로지 에단 헌트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등장하자 궤도에서 튕겨나가는 일사에 비하면 에단 헌트가 목숨을 살려줬기 때문에 ‘은혜 갚은 호랑이’가 되는 파리는 그래도 정상적인 편이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 이번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수상쩍을 정도로 옛 본드 영화를 연상시킨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원작의 앙상블 공식이 유지되었다면 여자들의 위치는 보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여자’ 역에 그친다고 해도 그 위치는 리더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독립적일 것이기에. 우리가 본 영화는 시리즈의 1부다. 그리고 이 영화는 최근 유행하듯 나오고 있는 2부작의 1부치고는 이야기를 잘 마무리한 편이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의 끝이 열려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글과 어울리는 기대는 에단 헌트와 함께 일하는 여성 캐릭터가 두명 이상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한명은 ‘여자’ 역할 이상의 기능을 가진 존재일 것이다. 물론 이 수상쩍을 정도로 본드 영화스러운 흐름 속에서 이 숫자가 줄어들 가능성도 만만치 않고 반대로 우리가 지금까지 본 걸 다 뒤집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게 기대 이상으로 잘 풀린다고 해도 톰 크루즈의 원맨 액션쇼라는 영화 시리즈의 틀 안에서 이 여자들이 숨 쉴 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기회는 톰 크루즈가 퇴장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라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단계를 거쳐야 찾아오는 것일까.

[기획] 김소희, 김병규, 송경원, 송형국 평론가가 뽑은 2023년 한국영화의 결정적 장면

몽타주 속 은밀한 동조자 <비밀의 언덕> / 김소희 <비밀의 언덕>에서 마음이 흔들린 순간은 경희(장선)가 시에서 주최한 어린이 글짓기 대회 당선작이 실린 신문을 보는 장면에서였다. 단순하게는 경희의 반응이 상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자식을 무한히 자랑스러워할 부모의 존재를 연상시켰기 때문일 것이나, 감동의 경로를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이 장면은 혜진(장재희)이 대상 당선작을 낭독하는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가운데, 교내 방송을 통해 이를 청취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일련의 숏과 연속해서 등장한다. 즉 경희는 대상 수상작 청자의 자리에 불려나온 셈이다. 하지만 이어진 숏에서 경희는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명은(문승아)의 글을 가위로 오려내고 있을 뿐이다. 즉 이 장면은 대상 수상작의 무거움에 짓눌린 일련의 리액션을 중단하는 역할을 하기에 특별하다. 만약 명은이 대상을 받아들였다면 그 숏은 지금과 같은 힘을 지니기는커녕 홀로 무거움을 감내하는 전형적인 얼굴로 남겨졌을 것이다. 경희의 행위가 놓인 자리는 수상자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명은의 위치와 심리적으로 유사하다. 주요 수상자들에게 밀려 몸과 얼굴이 가린 명은의 자리는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대상 수상작에 얽힌 비밀의 당사자이자 기획자이기에 적절했다. 상의 이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를 스크랩하며 홀로 영광을 누리는 경희의 얼굴은 은밀한 배치에 의해 명은의 비밀과 우연히 조우한다. 이 텔레파시가 올해 내가 한국영화에서 발견한, 모녀 멜로드라마와 가족 신파의 유일한 생존 신호였다. 오늘날의 영화가 감정을 위해 발굴해야 할 지점은 충격적 사연이나 과잉 동조의 눈물이나 민망한 유머가 아니라, 더없이 담백한 기쁨을 위한 적절한 자리 선정이다. 영화가 감정을 다루는 적절한 태도는 조급한 개입이 아니라, 설사 관객이 눈치챌 수 없다 해도 찰나의 비밀로 남겨지길 고집하는 용기가 아닐까. 아파트와 한국영화의 잃어버린 장소 <드림팰리스>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김병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와 김희정 감독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같은 구도의 장면이 나온다. 집 안에서 창문 바깥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을 담아낸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창밖을 보는 여자들은 공통적으로 남편이 죽은 뒤에 새로운 집에 도착하거나 살던 집을 벗어나 다른 집으로 떠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카메라는 같은 집에 머물던 동반자의 죽음을 마주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내 두 영화의 방향성은 투쟁의 기록을 따라가는 것(<드림팰리스>)과 애도의 시간을 관측하는 것(<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으로 갈리지만 내게 흥미로운 부분은 서로 다른 두 영화가 집이라는 장소를 매개로 죽음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점이다. 10년 전이라면 이런 구도는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했을 것이다. 집에 남아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뒷모습은 과거의 상흔에도 불구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삶의 시간을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집은 미래로 향하는 안식의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서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집은 시도 때도 없이 녹물을 쏟아내고, 죽은 자와 나눴던 기억을 불러낼 것이다. 집은 해결되지 않는 유죄의 장소다. 우리는 그 ‘이후’의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김희정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그 안에 머무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정주를 제공하는 대신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혼란스럽게 되묻는 장소로 다가온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 출간된 동명의 책을 제목으로 삼은 엄태화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어쩌면 한국영화의 표면적 질서를 지탱하던 그 집의 표상을 폭파하는 분기점인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서울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아파트 내부의 질서는 붕괴하고 만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그곳은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집을 잃어버린 한국영화는 아직 장소를 찾지 못했다.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어디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 매치컷 <콘크리트 유토피아> / 송형국 영탁(이병헌)이 민성(박서준)에게 방범대장직을 부탁하는 회상 장면. 악수를 청하는 영탁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이어 맞잡지 않은 채 내려진 민성의 손이 매치된다. 악수할 듯 올라가는 손. 알고 보니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자신의 방 옷장 앞에 서 있는 민성의 손이었다. 그대로 옷장 행거 봉을 움켜쥐는 손. 방범대로 나설 것을 결심하는 손이다. 이로써 영탁과 민성의 늦은 악수가 완성된다. 주저함 속에 동조에 이르는 과정을 단 몇컷으로 요리한 장면이다. 민성은 망설임 끝에 폭력에 가담하는 구성원으로서의 기능이 부여된 인물이다. 고밀도 콘티뉴어티다. 지난 10년여 사이 세계 곳곳은 ‘악의 평범성’(해나 아렌트)과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가 재소환될 수밖에 없는 정치사회적 현실을 보여줬다. 웹툰 <유쾌한 왕따>나 등의 텍스트가 등장해온 흐름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탁이 얼떨결에 힘을 쥐고 외부의 적을 활용해 지지세를 유지하는 권력자 캐릭터라면, 민성은 폭력의 방관자, 동조자 혹은 가담자로서 ‘내집단 편향’에 순응해가는 평범한 시민의 얼굴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내러티브나 플롯뿐 아니라 콘티와 편집으로도 각 인물의 기능을 설득하는 장면들로 빼곡하다. 엄태화 감독은 박찬욱 감독으로부터 연출 수업을 받은 경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정교히 다듬어진 매치컷들을 여럿 배치한다. 영탁의 얼굴 측면 줌인-클로즈업에서 ‘아파트’ 노래방 기기로 들어가고, 여기에 인물의 사연을 알리는 플래시백을 매치시킨 다음 영탁의 얼굴 정면 줌아웃으로 빠져나오는 콘티에선, 엄태화 감독을 한국영화가 주목할 차세대 감독으로 손꼽기에 충분한 근면함이 보인다. 민성이 점차 폭력으로 물들어가며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 숏 뒤에 명화(박보영)가 영탁의 집 벽을 부수는 숏으로 매치시켜 폭력의 실체를 파고드는 대조적 교차 역시 부지런한 콘티 구성의 결과다. 소진된 자기 복제의 승리 <범죄도시3> / 송경원 2023년 그 어떤 한국영화 속 장면도 영화 밖 결정적 장면을 넘어서지 못한다. 올해 유일하게 1천만 관객의 선택을 받은 <범죄도시3>는 이미 한편의 영화 이상의 여진을 남기고 있다. 물론 흥행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체로 질적 평가와는 반비례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속편이 거듭될수록 열화되어 몇 안되는 장점마저 까먹어가고 있는 이 시리즈가 여전히 압도적인 차이로 2023년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하나의 징후로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범죄도시3>는 한편의 액션 오락영화로서 충분한 즐거움을 제공한다. 문제는 세 번째 선보인 이번 영화가 1편과 2편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결국 관객의 선택을 받았고 아는 맛이 무섭다는 걸 증명했다. 마동석을 중심에 두고 이 시리즈를 소비하는 감각은 사실 편한 마음으로 이미 본 시트콤을 보는 심리와 유사하다. 귀엽고 강력한 마동석이라는 아이콘은 불변의 고정값이 되어 늘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후 갈등이나 긴장은 거의 배제한 채 압도적인 힘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안전한 쾌감을 제공한다. 문제는 상황과 무대, 빌런만 교체하며 반복을 거듭하는 가운데 재미와 개성마저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런은 늘었지만 더 약해졌고, 무대는 넓어졌지만 산만해졌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석도 형사의 시그니처 개그 한방은 자기 복제 끝에 어느덧 솜 주먹이 됐다. 1편에서 “혼자야/어 싱글이야”, 2편에서 “5:5로 나누자./누가 5야?”라던 마석도는 이제 소스가 떨어져 개그마저 반복한다. “5:5 얘긴 꺼내지도 마. 어차피 내가 5잖아.” 개그의 핵심 중 하나는 반복과 변주다. 하지만 주먹을 내밀며 “인사해, 주 변호사야”라고 싱긋 웃는 마석도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빠져 슬슬 폐지가 가까워진 개그 코너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더 씁쓸한 건 이 익숙한 개그 코너 말고 돌릴 채널이 마땅치 않아 그냥 멍하니 틀어놓고 있는 우리다.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야

대구역 건너편 골목에 있는 교동시장은 1960년대생인 우리 엄마가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던, 지역 최고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90년대, 도시의 중심이 한일극장이 있는 동성로 2가로 완전히 옮겨가자 교동시장 부근은 영업을 중단한 단관 극장과 오래된 금은방, 철거하지 못한 백화점만 남았고, 이내 그곳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노인들만 거니는 동네의 외진 그림자가 되었다. 도시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안다. 위와 같은 히스토리를 가진 골목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70년대와 80년대의 흔적이 적당한 낭만으로 남아 있으면서, 90년대와 2000년대에 받은 외면으로 자릿세가 낮은 모든 골목들. 교동시장 골목 역시 2010년대를 거치며 ‘O리단길’ 혹은 ‘제2의 성수동’ 같은 장소가 되고 말았다. 단관 극장, 금은방, 백화점이 있던 오래된 골목에 어느새 에스프레소에 레몬을 넣어주는 카페, 레코드판과 향초를 함께 파는 잡화점,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주는 바버숍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그 상점들이 내뿜는 ‘쿨’한 공기는 모기향처럼 대구의 젊은 힙스터들과 관광객들을 수시로 끌어들였다. 2023년 7월. 나는 지금 교동을 걷고 있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느껴지는 젊음의 기운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어떤 가게는 간판이 없고, 어떤 가게는 문이 없는데 사람들은 줄을 길게 섰다. 나는 걸으며 줄 선 사람들을 바라본다. 여자들은 모두 뉴진스처럼 옷을 입었고, 남자들은 모두 유승준 스타일을 하고 있다. 2020년대와 90년대가 공존하는 ‘MZ존’인 것이다. 에스프레소를 연거푸 세잔을 마셔서인지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뛴다. 걷고 또 걸으니 ‘무궁화 백화점’과 ‘경상감영공원’이 보인다. 여기서부턴 ‘실버존’이다. 성인 카바레 앞, 팔에 장미 문신을 한 할아버지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고, 공원 어귀 벤치엔 키스하는 노인 커플과 그들을 바라보며 <퀴사스, 퀴사스, 퀴사스>를 부르는 할아버지가 있다. 이 좁고 긴 골목을 지날 때 나는 마치 한 ‘인싸’의 일생을 통과하는 느낌을 받고 말았다. 힙스터의 찬란한 생애에 잘못 방류된 불순물의 모습으로….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골목을 벗어나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비트의 음악이 내 심장을 움켜쥐었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보니 음악이 나오는 곳은 배달 오토바이의 스피커다. 사이렌 소리로 시끄러운 전주가 멎자 곧장 날카로운 목소리가 “모두 ‘쩨정신’이 아니야” 하며 귀를 찌른다. 골목을 탈출하던 밀레니얼 ‘아싸’는 순간 ‘이정현’이라는 텔레포트를 만나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정현은 누구인가? 아니, 이정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밀레니얼의 또 다른 이름이자, 세기말의 절망을 광기로 제패한 Y2K의 수호신, 21세기에 대한 불안과 기대를 굿판으로 털어내던 테크노 무당. 베를린 클럽에 가도 영혼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나의 테크노가 이정현이기 때문이요, 세상을 타도하는 트랩 뮤직을 들어도 피가 끓지 않는 이유는 나의 전사는 오직 이정현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마이크를 새끼손가락에 꽂고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겠는가, 어느 누가 부채에 그려진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려 하겠는가, 어느 누가 ‘저그족’의 익룡 날개를 달고 세상에 침을 뱉겠는가, 어느 누가 클레오파트라의 금붙이를 입고 세상에 제를 지내듯 춤을 추겠는가! ‘사실이 아니길 믿고 싶었’지만, 시대는 야속하게 저물었다. ‘이제 남은 건 눈물과 절망’뿐이라며 푸념을 하고 있는데 한바탕 살풀이를 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내게 와 줘!’를 외친다. 외계 행성에서 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 <와호장룡>을 연상케 하는 동양풍 의상과 헤어스타일, 꺾고 멈추기를 반복하는 다소 기괴한 춤, 떠나간 연인에게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노랫말…. 그의 데뷔곡 <와>는 시대가 바뀌며 발생하는 혼란을 연쇄적인 충격요법을 통해 수습했고, 나는 그의 춤과 노래를 통해 비로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종말이 올 거라는 예언보다 내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리는 게 더 두려웠던 1999년의 불안은 이정현의 등장과 함께 ‘새천년’을 향한 기대감으로 완전히 상쇄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겐 자신만의 음악 역사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구입한 앨범, 처음으로 반한 가수, 처음으로 외운 노래 가사…. 내게 <와>는 CD를 구매하게 하고, 이정현의 브로마이드를 방에 붙이게 한 나의 ‘첫 K팝’이다. 미련이 무엇인지, 한은 또 무엇인지 모르던 나와 내 친구들은 어깨보다 넓은 비녀를 꽂은 여자의 독기와 광기에 매료되어 새끼손가락에 쥐가 날 때까지 춤을 추고, ‘이제 남은 건 절망뿐’이라 함께 외치며 즐거워했다. ‘MZ존’과 ‘실버존’이 마주 보는 ‘인싸의 길’ 위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홀로 착각에 빠진다. 그렇다. 나는 절망을 즐길 수 있는 ‘아싸’로 길러졌으며, 이 도시의 낭만은 나의 고독으로 인해 완성된다. ‘젊은 인싸’와 ‘늙은 인싸’ 모두 자중하며 살라. 당신들의 빛은 나의 어둠에서 탄생한 것이니…. <와>를 귀에 꽂은 나는 당당한 ‘인싸’의 걸음으로 골목을 관광했다. 매일 부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동네. 여긴 10년 뒤엔 또 어떤 모습일까? 이런 도시의 순환을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인싸’인데…. 그렇게 2절이 시작되고 외관이 세련된 신상 카페에서 ‘MZ 인싸’들이 우르르 나오며 무겁게 속삭인다. “자리 개불편해. 빨리 집에 가고 싶음.” 아, 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너무나 처절해서 오히려 희망적으로 들리는 이 미친 노래를! 이제야 공공장소에서 이어폰을 쓰지 않고 큰 소리로 트로트를 듣는 노인들이 이해된다. 그것은 ‘인싸’, ‘아싸’ 구분 없이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소외감의 표현, ‘다 같이 놀자’라는 구조의 신호. 30년 후 ‘O리단길’에서 ‘인켈효도라디오’로 <와>를 듣는 노인을 발견한다면 새끼손가락을 입에 대고 화음을 넣어주세요. 당신이 ‘인싸’든, ‘아싸’든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흥을 나누는 것만으로 저는 위로를 받을 거예요. 도시라는 공사판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면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