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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인터뷰] 끊임없이 사유하라, 그리고 질문하라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어맨다 킴 감독

TV 앞에 앉은 인자한 표정의 부처. 시종일관 형태를 알 수 없는 브라운관 송출 시그널. 차곡차곡 쌓인 텔레비전들. 백남준 작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보편적 이미지들이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백남준의 대표 작품을 한 꺼풀 벗겨내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삶과 태도를 들여다본다. 평범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장난스러운 친구로서, 새로운 시도를 고민한 예술가로서 그가 무엇을 좇고 무엇과 싸워왔는지 다양한 시각 자료를 빌려 이야기한다. 안정과 생존이 전세계적 구호였던 60년대, 백남준은 자기 안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혼자만의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그 시간을 현대적인 관점으로 다시 기록한 이가 있다.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백남준의 불안과 기쁨, 고민과 행복을 넓은 시야와 구체적인 일화로 관객에게 고백한 어맨다 킴 감독이다. - 영화 소재로 백남준 작가를 선택한 이유는. = 그의 작품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작업한 것처럼 무척 현대적이다. 심지어 그는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 삶에 미디어가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칠지 알고 있었다. 그때부터 백남준 작가가 궁금했다. 새 세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탐색해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몇몇 영상 속의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집착하듯 관련 영상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 인터뷰, TV프로그램, 뉴스 등 영화 속엔 그와 관련한 다양한 자료가 등장한다. 이 자료를 통해 관객은 작가로서 백남준의 지향점과 삶의 태도를 알 수 있다. 자료 수집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 아카이빙 자료 하나하나가 찾아내기 정말 어려웠던 것들이다. 몇년 동안 리서치에만 매달렸다. 다행히 훌륭한 아카이빙 PD와 조사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백남준은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라 자료가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찾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백남준 작가의 친구를 알게 되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얻었다. 그분이 다른 친구를 소개해주면 그분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자료를 얻었고, 또 다른 분을 소개받는 식으로 연결됐다. 마치 탐정이 된 것 같았다. (웃음) 조각난 정보를 수집해 하나의 큰 진실에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70년대 이전의 자료는 그 이후의 것보다 훨씬 찾기가 어려웠다. 워낙 문서나 사진, 영상 등으로 기록된 수량이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싸거나 접근이 불가능했다. -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박서보 화백, 샌프란시스코 MOMA 전 관장 데이비드 로스, 미술사가 에디트 데커 등 많은 이들이 백남준의 친구이자 동료로 등장한다. 이들은 작가에 관한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직접 들려주며 관객의 호기심을 높인다. 섭외 제안에 그들의 반응은 어땠나. = 크게 설득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물어봤을 때 굉장히 열린 자세로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백남준 작가와의 깊고 오래된 우정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이자 동료로서 모두가 백남준을 존경하고 있었다. - 영화는 백남준을 다양한 키워드로 나누어 보여준다.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평범한 아들, 가난하지만 명랑한 예술가, 장난꾸러기 친구, 자기만의 신념을 가진 용감한 예술가 등. 이중 가장 조명하고 싶었던 키워드는 무엇인가.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의 기본적인 목표는 백남준을 다양한 층위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다시금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방금 짚어준 키워드들이 백남준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그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존재할 수 있고, 그 요소들은 그의 작품 안에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중에서 나는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집중 조명하고 싶었다. 백남준은 항상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거슬러 모험했다. 삶을 지속시키는 건 오직 변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만 고집하지 않고 자기가 내린 결정에 계속해 질문을 던졌다. 무언가에 매몰되거나 고착되는 것을 무척 경계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범주를 확장시키던 모습을 영화로 보여주고 싶었다. - 배우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을 맡았다. 스티븐 연과 함께한 작업 과정은 어떠했나. = 스티븐 연은 백남준 작가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다. 백남준이 특정 문화권에 정착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본 모든 곳의 문화를 파고들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스티븐 연이 내레이션을 맡아줄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엇보다 스티븐 연은 백남준을 어설프게 흉내내지 않았다. 그보다 작가의 본질과 감정을 포착하려 했다. - 영화는 매스미디어에 미친 백남준의 영향력을 설명한다. 어맨다 킴 감독은 어떠한가. 이번 작품을 연출하면서, 백남준의 영향력이 어떻게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나. = 백남준의 정신이 내게 큰 힘을 주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기 같은 것. 그는 자신의 신념과 목표에 지치지 않았다. 그가 모험한 다양한 시도와 변화들이 그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았다. 꼭 영화 작업을 완주하고 싶었다.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예술가로서 백남준이 내게 남긴 유산 같은 것이다. 고난이 생겨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제목에 관해 묻고 싶다. 백남준의 작품명 <달은 가장 오래된 TV>를 영화 제목으로 차용한 이유는. =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그게 바로 백남준의 정신이다. 계속해서 사유하게 하는 것, 질문하게 하는 것. 영화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제목이다.

[리뷰]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시대를 앞선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

일제강점기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백남준은 학창 시절 12음 기법을 처음 만든 아방가르드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에게 매료돼 작곡가가 되기 위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그곳에서 백남준은 미지의 나라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었다. 고독과 외로움에 고통받던 어느 날, 그는 아방가르드 작곡가 존 케이지의 공연을 보고 예술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이후 당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함께 플럭서스 그룹에서 활동한다. 야심차게 준비한 파르나스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의 실패 후 그는 TV 방송의 본고장 뉴욕으로 이주하고 새로운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는 다양한 실험에 도전한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한국계 감독 어맨다 킴의 장편 데뷔작이다. 영화는 예술의 혁명가로서 미디어아트라는 예술 분야를 개척하고 예술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간 백남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에서 백남준의 글을 낭독하는 내레이션은 <미나리>에 출연한 배우 스티븐 연이 맡았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분의 시간을 할애한 오프닝 시퀀스다. 영화는 애피타이저처럼 백남준이란 예술가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전달하면서 관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감독은 백남준의 작품 활동에서 창작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연대기를 중심으로 생전의 인터뷰와 그의 글을 비롯해 동료 예술가, 큐레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배치한다. 여기에 공연 영상, 방송 화면, 신문 기사, 스틸 사진 등 방대한 자료 화면을 삽입해 빠른 리듬으로 보여준다. 다만, 지나친 정보 과잉으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천천히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 <사과 씨앗 같은 것>을 관람한다면 백남준의 무한한 상상력, 기술과 인간의 소통에 대한 탐구 정신을 직접 체험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23년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과 제1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베리테 부문에서 상영됐다.

[특집] 책으로 영화를 헤아리는 계절, 2023년 하반기에 쏟아진 주목할 만한 영화 관련 도서들, 그리고 사람들

영화를 잘 만드는 것과 강연을 잘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에겐 비슷하게 능숙해 보인다. 도쿄 릿쿄대학에서 하스미 시게이코를 스승으로 만난 그는 감독이자 현장 비평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에서 숨김없이 펼쳐 보이고, 독자는 말에서 글로 옮겨간 거장의 사유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겨울 초입에 출간된 이 흥미진진한 책을 필두로 올 하반기를 풍성하게 채운 주목할 만한 영화 서적 10편을 모아 소개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에 이어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의 <태양과의 대화>는 작가가 찍은 이미지와 영상을 기반으로 오픈AI의 GPT-3와 대화한 결과물들이다. 개성 강한 목소리와 실험정신이 녹아든 감독들의 책과 함께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마크 피셔 그리고 유운성 평론가가 쓴 번뜩이는 비평의 시선도 더했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은 뤼미에르, 파솔리니, 왕빙의 영화 등을 거쳐 ‘민중의 이미지’의 역사는 물론 새로운 가능성을 사유하고, 은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영화, 리얼리티 TV프로그램을 넘나들며 저항적으로 쓴 블로그 글의 정수를 보여준다. <식물성의 유혹: 사진 들린 영화>는 사진적 경험을 영화가 수용한 사례들에 관해 독창적 시각으로 탐구하는 책이다. 국내 1세대 영화평론가인 김종원 평론가가 60년의 직업적 기록을 담은 <시정신과 영화의 길> <시네마 천국>의 북토크 현장도 담았다. 영화를 매개로 우정을 쌓은 네명의 작가가 <씨네21>을 위해 다시 모인 단란한 풍경도 소개한다. 눈 내리는 겨울 오후, <사랑하는 장면이 내게로 왔다>의 서이제 소설가와 이지수 번역가는 책에서 못다 한 고백을 나눈 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을 보러 떠났고, <우리는 가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로 뭉친 금정연, 정지돈 작가는 한국영화와 영화문화 이야기에서 요나스 메카스의 새 책 <수동 타자기를 위한 레퀴엠>까지 너르고 열띤 수다를 나눴다. 긴 겨울밤, 책으로 영화를 헤아리는 희열을 만끽하길 바란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영화, 책 특집이 계속됩니다.

[특집] 이름 없는 존재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지음 | 여문주 옮김 | 현실문화A 펴냄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 엑스트라는 이름이 없다. 그들은 거리를 지나가는 익명의 시민이거나 사건 뒤편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는 행인들이다. 그들은 배경에 머물러 있으며 집단으로 화면에 포착된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하던 즈음에 연극무대와 구분되는 영화의 특별함은 배경을 포착하는 힘에 있었다. D. W. 그리피스가 영화의 아름다움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에 있다고 말한 것처럼(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능으로부터 멀어졌다고 안타까워하지만) 영화는 사건 뒤편에 있는 것들, 중심에서 이탈한 자들, 너무 하찮고 범상하기에 눈에 드러나지 않던 것들을 형상화하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민중들이 노출된다”라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민중들의 이미지: 노출된 민중들, 형상화하는 민중들>에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이 결핍/과잉 노출이라는 이중적 사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에 분명 노출되고 있지만, 이른바 ‘모자이크 처리’되어 노출된다. (…) 한편에선 가려진 얼굴이, 다른 한편에서는 흐릿해진 얼굴이 있다.”(19쪽) 오늘날의 민중은 너무 많이 드러나지만,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불투명한 얼굴을 갖는다. 민중의 이미지를 조직하는 것은 이 모순적인, 그러나 동시대의 이미지 지형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필리프 바쟁의 사진과 고야와 렘브란트의 회화, 그리고 로셀리니와 파솔리니, 에이젠슈테인과 왕빙의 영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환경에서 나타난 시각적 도상을 시대적 구분에 구애받지 않고 결합하는 이 책은 민중의 표상을 둘러싼 이중구속을 타개하는 저항의 방법을 모색한다. 디디 위베르만은 민중의 형상을 조직하는 방법론의 한 가지 예시로 ‘단역’(figurants)에 주목한다. 단역은 예술적 위계에서 가장 하부에 존재한다. 아무것도 아닌 배우인 단역은 그러나 그 안에 모든 형상(figure)을 포함하고 있는 가능태의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복수형으로 주어지는 단역의 형상에서 영화를 공동체의 장소로 수용하는 민중의 힘, 이미지를 두 사람 이상의 결합으로 제시하는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의 문장 안에서 에이젠슈테인의 <파업>에 나오는 인민들의 시신은 동시대적 민중의 형상으로 ‘시대착오적’인 형상화를 이뤄낸다. “카메라는 피사체의 얼굴과 전면을 프레이밍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랫동안 놓치게 될지라도 그 피사체를 뒤따라간다. 그것이 무엇이든 예견하거나 명령하길 거부한다. 카메라는 ‘선취하지도’ ‘포획하지도’ 않는다. 그저 ‘뒤따라갈’ 뿐이다.”_ 298쪽 하지만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저술이 민중의 얼굴과 목소리가 나타나는 것을 순진하게 긍정할 뿐인 것은 아니다.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형상을 노출하고 형상화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의 카메라는 민중의 뒤에서 그를 뒤따라갈 수밖에 없다. 디디 위베르만은 왕빙의 <이름 없는 남자>를 서술하면서 역사와 대면하는 이미지의 힘을 ‘뒤따르는’(Suivre) 카메라에서 찾는다. 강제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촬영된 사진이 그렇듯, 이미지는 현재를 일으키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영화는 그 이미지를 선점하거나 포획할 순 없다. 영화는 조금씩 늦게 뒤따라갈 것이다. 그 미세한 격차가 디디 위베르만의 시선에 새겨져 있다.

[특집] 블로그 시대의 비평 기록, '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

k-펑크: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1: 책 영화 텔레비전 마크 피셔 지음 | 대런 앰브로즈 엮음 | 박진철, 임경수 옮김 | 리시올 펴냄 k-펑크(punk)는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가 2003년 개설한 블로그의 이름이다. 록 음악, 포스트펑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바탕에 둔 음악 저술가이자 2000년대 초 1인 미디어의 새 장을 연 문화 이론가인 마크 피셔는, 사이버의 그리스어 어근 ‘kyber’의 앞글자를 따 학계와 주류잡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강도 높게 토론을 지속할 장소로서 자신의 블로그를 ‘k-punk’라 명명했다. 2017년 그의 사후에 블로그 게시물을 중심으로 매체 기고글, 인터뷰, 미발표 원고를 방대하게 엮은 824쪽 분량의 가 나왔고 국내에서는 리시올 출판사가 이를 4권으로 나눠 출간할 예정이다. 올해 9월에 나온 (이하 )은 문학, 영화, 텔레비전에 관한 글들을 중심으로 엮었다. 링크와 댓글을 타고 흩뿌려진 글들 사이로 즉각적인 이동이 가능한 블로그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 책을 반드시 순서대로 완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영미권의 케이블 채널 분석, 텔레비전 예능 등 한국 독자들에겐 다소 낯선 레퍼런스들이 등장하거나, 마크 피셔의 언어유희가 번역으로는 생생히 전달되지 않는 경우, 방대한 인용이 종종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대의 곤경을 혁신적으로 사고하는 피셔의 논리는 대체로 주의력을 잡아끈다. 특히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에서 데이비드 크로넌버그의 <네이키드 런치>로, <네이키드 런치>와 <스파이더>의 비교로, <폭력의 역사>와 히치콕의 영화의 대조로, <비디오드롬>과 <엑시스텐즈>에서 “디지털 시대의 진부함”으로 이어지는 글들의 전개는 마치 하나의 완성된 서사시를 방불케 한다. 앞선 피셔의 히트작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에서 그는 <칠드런 오브 맨> <월·Ⓔ>, 리얼리티쇼 <슈퍼 내니> 등을 아울러 동시대의 “지친 체념의 흔적”을 읽어낸다. 역시 밸러드를 필두로, 버로스, 크로넌버그를 통과하며 후기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 문제의식까지 포섭한 서사를 익숙하게 펼쳐 보이는 아이러니를 지적하고 있다. 현대의 병리학이 반체제적 독기를 잃어가는 과정과 이것의 ‘대안 없음’까지 직시하는 은 그렇기에 (피셔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우울과 비극감을 독자 역시도 피할 수 없는 책이다. “<폭력의 역사>는 21세기 미국이 폭력이 억압된 이면으로 남아 있는 나라가 아니라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고 있는 나라임을 시사한다.”_ 227쪽 크로넌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에서 주인공 톰 스톨에겐 또 다른 자아 조이 쿠색이 있다. 피셔는 이를 두고 “쿠색의 환상으로서의 스톨이 스톨의 환상으로서의 쿠색보다 훨씬 흥미롭다”고 짚고 <폭력의 역사>를 스톨의 환상으로 읽는 비평에 일침을 가한다. “이 설명이 잘못된 까닭은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 대한 이해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과 같은 ‘몽상적인 현실 탈출’이라는 해석- 두 영화는 긴 꿈 시퀀스로 해석되어왔다- 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독해는 궁극적으로 영화의 존재론적 위협을 잠재우려는 시도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화의 모든 변칙적 특징을 내면의 섬망 탓으로 돌리면서 평면화한다.”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재정의는 한층 더 날카롭다. 21세기 미국의 폭력은 이면에 억압된 것이 아니며, <폭력의 역사>는 비정하고 직설적으로 이를 노출함으로써 마지막 장면에서 톰 스톨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내 가정의 모든 풍경이 언캐니하게 보인다는 것이 피셔의 설명이다.

[특집] ‘개인의 역사 한국영화의 역사’, <시정신과 영화의 길> 김종원 영화평론가와의 대화

“오늘날 영화평론은 죽었습니다.” 얼핏 위험할 수도, 성급할 수도 있는 말에 가늠키 어려운 신뢰가 실린다. 김종원 평론가라는 화자의 무게감 때문이다. 자타공인 대한민국의 1세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이며, 1965년에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출범시켰고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인 그의 말을 쉬이 흘려들을 순 없다. 11월22일,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KOFA’의 첫 주인공으로 나선 김종원 평론가는 10월 말 출간한 회고록 <시정신과 영화의 길>에 기반하여 구순을 앞둔 개인의 인생사를 펼쳤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은 제1장 유년기, 제2장 소년기부터 제6장 노년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김종원 평론가라는 개인의 생애주기는 곧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장대한 문학사 및 영화사의 맥락과 진배없다. <자유만세> 등이 만들어졌던 해방 후의 한국영화사, 제주 4·3 사건의 전말, 50~60년대 한국 예술계의 산실이었던 명동 거리의 숱한 다방들, <영화잡지>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씨네팬> 등의 초창기 영화잡지들, 유신정권의 탄압과 당대 영화 제작사들의 명운, 나아가 영화평론가의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했던 80년대,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에서 활동했던 십수년,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의 영화를 가름하려 지금도 연구 중인 연구가로서의 생애가 장장 600쪽에 걸쳐 서술된다.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 “제가 경쟁력을 갖고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현장 비평이 아닙니다. 영화역사에 대한 치열한 도전입니다. 도전에 성과도 있었지만, 숱한 과오를 저질렀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원 평론가는 “오늘날의 영화평론은 죽었다”란 어구에 위와 같은 말을 덧붙였다. 영화사에의 탐구를 포함한 문자의 평론이 쇠약해지고, 언어 혹은 구술 평론이 주류로 자리 잡은 현재를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를 비하하거나 비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저의 시대는 대단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말처럼 1980년대는 영화 저널리즘과 영화 비평의 전성기였다. 개별 영화에 대한 감상뿐 아니라 정책, 검열, 산업 등 영화계 전반에 대한 평론가들의 강한 의견 표출과 시론이 중요한 시절이었다. 입지가 높아진 영화평론가 중에서도 김종원 평론가의 위치는 남달랐다. 저자와의 대화의 진행을 맡은 한상언 영화사연구자는 “<한겨레>와 <조선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했고, 90년대에 연구가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당대 영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은사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사회적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매스미디어와도 점차 친밀해졌다. “국내 4대 신문에 광고 모델로 나가고, 텔레비전에도 자주 출연했다”라는 그의 회상엔 모종의 부끄러움과 함께 속 깊은 우수가 느껴졌다. 이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그는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부산국제영화제 등 당시 터져나온 영화 축제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며 영향력을 높였다. 1994년엔 오랜 영화 동료 이영일 영화평론가와 함께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마치 영화평론가협회를 처음 꾸릴 때처럼 다방에서 그와 둘이 앉아 그의 생각을 구체화할 계획을 세웠다.” 대략 반세기 동안, 시대가 변할지라도 영화계에 파문을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뚜렷하다. 이러한 부흥기에 대해 김종원 평론가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러한 시대의 필요에 따른 것뿐이었다”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과거에 보여줬던 도전 정신만은 지금에도 유효해 보인다. 1959년 김종원 평론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영화 글의 제목은 ‘한국 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였다. 한국의 평론계를 “매스컴의 줄을 탄 시사평”, “매명화된 광고평”으로 나누고 “지엽적인 사이비 비평으로 타락”했다고 지적했다. 말미엔 “현대인의 고민과 한국인의 불안이 무엇이며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분석하고 한국인의 불안과 고민의 해체 방법을 제시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비평가에게 있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영화계를 한바탕 흔들어보고 싶었던 마음, 한마디로 건방을 떨었던” 젊은 날 그의 치기가 현재의 평단에도 큰 자극을 안겼다. 시네마 천국 김종원 지음 | 한상언영화연구소 펴냄 <시네마 천국>은 35년 만에 내놓은 김종원 평론가의 세 번째 시집이다. <시정신과 영화의 길> 발간에 맞추어 함께 발행됐다. 김종원 평론가는 애초 평론가, 연구가의 삶 이전에 시인으로 이력을 시작했다. 1952년 중학생 시절, 당대 유행했던 학생 월간지 <학원>에 <국화는 피어도>란 시를 발표하며 시의 행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남수, 조지훈, 박목월 등이 참여했던 <사상계>를 통해 1959년 본격적으로 시인에 등단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쌓인 그의 시 73편이 <시네마 천국>에 적혀 있다. 제1부 ’영화와의 헌사‘부터 제5부 ’바다와 여행‘까지 총 5개의 주제로 묶인 시집의 처음은 단행본 제목과 같은 <시네마 천국>이다. 그 시작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1. 뱃고동이 앗아간 망향의 부두도안개 낀 카사블랑카의 공항도노를 젓다 만 운하의 노천극장도불 꺼진 뒤엔 삭막하게 잠기지만 그것은 아주 꺼진 것이 아니다.새 날을 여는 축복의 불꽃처럼어둠 속에서 쓸쓸히 지켜본연인의 창문처럼그것은 정녕 닫힌 것이 아니다.(후략)

[파리] 제레미 페린 감독의 ‘화성 엑스프레스’, 프랑스 SF의 성과, 혹은 걸작의 답습

2200년. 일상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뒤섞여 살아가는 화성의 수도 노티스. 한 성격하는 알코올중독 탐정 알린 루비(레아 드루커)와 그의 안드로이드 파트너 카를로스 리베라(다니엘 엔조 로베)는 부유한 사업가 크리스 로이 데커(마티외 아말릭)의 요청으로 실종 사건을 맡는다. 사라진 이는 명문 사립대학에서 인공두뇌학을 공부하던 여학생 준 초우. 사건을 파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알린과 카를로스는 준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화성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를 노리는 정체 모를 괴한의 무차별 공격이 이어지고, 알린과 카를로스는 준의 복제 레프리컨트를 이용해 그녀의 기억을 소환해내기로 한다.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 레이첼(숀 영)의 트레이드마크인 잔뜩 부푼 앞머리를 그대로 따라한 알린. 사고로 죽기 전 인간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저장하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 카를로스. <공각 기동대>(1995) 특유의 디스토피아적 그래픽 화풍, <아키라>(1988)식의 박진감 넘치는 추격 장면, 준을 매섭게 추격하는 액체 금속 로봇(<터미네이터2>(1991)), 기억 소환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회사(<토탈 리콜>(1990))까지. 텔레비전 성인 애니메이션 시리즈 <라스트 맨>으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제러미 페린 감독은 그의 첫 장편애니메이션 <화성 엑스프레스>에서 사이버펑크 장르의 주옥 같은 걸작들에 노골적인 오마주를 보낸다. 프랑스 언론 사이에서는 “프랑스 SF영화의 가장 큰 성공작 중 하나”(주간지 <르푸앙>), “이 작품 이후 프랑스 SF는 절대 이전과 같을 수 없다”(영화 전문지 <프리미어>), “증강(augmented) SF의 카탈로그 같은 작품”(일간지 <르몽드>) 등과 같은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걸작들의 영향에 질식해서 정체성이 흐려진 작품”(영화 비평 사이트 ‘크리티카’ )이라는 혹평을 피해갈 순 없었다. 칸영화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화성 엑스프레스>는 11월23일 개봉 첫주에 4만9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프랑스 전국에선 아홉 번째로, 파리에선 다섯 번째로 높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척박한 성인애니메이션 시장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스코어다. 1980~90년대 사이버펑크 장르의 팬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될 작품이다.

[OTT 리뷰] ‘경성크리처’

넷플릭스 | 10부작 / 연출 정동윤 / 출연 박서준, 한소희, 수현, 김해숙, 조한철, 위하준, 김도현 / 공개 12월22일(파트1) 플레이지수 ▶▶▶ | 20자평 - 민족정론 플랫폼 넷플릭스 코리아? 미국의 도쿄 대공습이 시작되던 1945년 봄. 잘나가는 전당포 주인 장태상(박서준)과 만주를 누비며 실종자를 쫓던 토두꾼 윤채옥(한소희)이 만나는 곳은 일제 치하 경성이다. 경무관 이시카와(김도현)의 애첩 명자(지우)를 찾아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려는 태상, 헤어진 어머니와 다시 만나길 소망하는 채옥, 끌려간 애국단 동지들과 접선해 의거를 감행하려는 준택(위하준)은 각자의 목표를 갖고 옹성병원으로 향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비밀을 목도한다. <경성크리처>의 구성은 넷플릭스 코리아가 잘해온 것들과 모든 측면에서 정합한다. 700억원 규모의 대작 시대극에 청춘 스타들이 등장하여 센티멘털한 K로맨스를 수행한다. <스위트홈>에 이어 다시 한번 고강도 VFX 기술을 통해 크리처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선사하려 한다. 작품 그 자체보다도 괴물급 플랫폼과 역사적 윤리 의식의 조합이 만들어낼 파급력이 더 기대된다는 점은 양가적이다. <경성크리처>는 텔레비전-스트리밍 문화사 최초로 홀로코스트 아닌 이름으로 행해진 동양에서의 민족 학살을 그렸다. 예측 가능한 서사, 핍진성이 떨어지는 연기, 주입식 캐릭터 빌딩 등의 문제를 다방면으로 안고 있는 각본과 연출이지만, 슬픔과 고통과 환멸을 먹고 자란 한 민족의 역사를 고농축의 엔터테인먼트 에너지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거대 문화산업의 새로운 문을 여는 작품으로 평가받을 것이 분명하다.

[비평] 거장의 어깨 옆에서,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예술 작품은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게 하며 상반된 답들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역할을 한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충실히 거장의 경전 구절에 복무한다. 그래서 모호하다. 음악 팬들은 브루노 발터의 대타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는 25살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의 모습에 가슴이 뛰다가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같은 브로드웨이 하이라이트와 베를린장벽 붕괴 기념 음악회 등 중요한 순간이 축소된 영화를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번스타인이 1973년 케임브리지 일리 대성당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 2장 롱테이크 신 정도를 제외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의 구미를 당기는 장면은 거의 없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연극 혹은 뮤지컬처럼 느껴진다. 극의 주인공은 번스타인 혼자가 아니다. 번스타인과 그의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캐리 멀리건)의 부부 관계가 핵심이다. 매튜 리바티크가 촬영하고 미셸 테소로가 편집한 결과다. 화면 전환은 화려하고 시간 전환은 비선형적이며 배우들의 연기는 고양되어 있다. 흑백 화면과 박스 화면비율로 펼쳐지는 과거 신은 뉴욕의 좁은 아파트와 운명의 상대 펠리시아와의 첫 만남, 뮤지컬 <온 더 타운> 속 한 장면을 빌려 소개하는 로맨스로 장식된 거장의 젊은 날이다. 실제 번스타인은 이 시기 뉴욕 필하모닉 지휘 이후 찾아온 꽤 긴 무명의 시기를 견뎌야 했지만, 영화는 그런 갈등보다 펠리시아와의 행복한 한때와 대가의 편린, 그 와중에도 동성 애인에게 눈물 어린 이별을 고하는 번스타인의 복잡한 자아를 조명한다. “개성이 너무 강하다 보면 독이 될 수도 있거든. 레니가 기뻐하거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다면 못 맞춰줄 것도 없잖아? 대신 희생하지 않는 선에서 하는 거야. 희생하게 되면 내가 사라지니까.” 바로 이다음 장면에서 펠리시아는 두려움과 경외감의 눈빛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하는 번스타인의 그림자에 삼켜진다. 그런데 대가의 실루엣 가운데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은 펠리시아의 빛은 꺼지지 않는다. 힘찬 날갯짓에도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번스타인으로 인해 상처받는 펠리시아가 역으로 번스타인의 삶을 구원하며 그를 견인하는 인물임을 짐작게 하는 장면이다. <스타 이즈 본>의 잭슨 메인은 저물어가는 컨트리 가수로 그를 사랑하는 엘리에게 모든 것을 바쳤으나, 레너드 번스타인과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의 실제 삶은 할리우드의 고전 시나리오보다 훨씬 복잡했다. 테크니컬러 화면으로 전환되며 색이 돌아온다. 반대로 생동감은 꺼진다. 펠리시아와의 관계가 번스타인의 이중성으로 흔들린다. 희생하는 관계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극의 진행은 더없이 차분하다. 대저택 파티에서 번스타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젊은 남자에게 키스하는 광경을 목격한 펠리시아는 변명하는 남편에게 “머리 모양 좀 고쳐”라 말할 뿐이다. 펠리시아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의 동등한 주인공이다. 실제로도 그는 1940년대부터 브로드웨이, 극장, 텔레비전을 섭렵한 스타였으며 여성 인권 운동과 흑표범당을 후원하는 등 사회 활동에 열정적이던 스타였다. 번스타인이 1950년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CBS 음악 시리즈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때도 펠리시아는 파티를 통해 미국의 저명인사들과 만나고 서신을 교류하며 우정을 쌓아나갔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펠리시아의 사회적 활동을 소개하는 대신 그를 번스타인의 곁에서 지켜보는 관찰자이자 파트너로 설정했다. 번스타인의 갈등과 비범한 성격을 평가하는 대신 가장 오래 곁에서 그를 지켜본 인물로 끝없이 대화를 나눈다. 번스타인의 동생과, 번스타인의 딸과, 번스타인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람과 함께 번스타인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영화 속 펠리시아가 번스타인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흑백 화면 속 좁은 연극 연습 무대 위 두 사람은 서로를 동경한다. 초현실적인 <온 더 타운> 뮤지컬 신에서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끝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고백하는 번스타인에게 펠리시아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묵인하고 갈등하는 컬러 화면에서 펠리시아는 번스타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애초에 번스타인이 바빠 만날 일도 많지 않은 데다 중요한 대화는 자녀들을 통해 전한다. 번스타인이 거대한 대서사시 <미사>를 완성하는 순간에 펠리시아는 수영장에 몸을 던져 깊이 잠수해 귀를 막는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스타 이즈 본>으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이룬 브래들리 쿠퍼와 전기영화 전문 작가 조시 싱어가 각본을 썼다. 조시 싱어 전기영화의 주인공은 사회와 갈등하면서도 신념을 지키며 도전하는 인물이 주를 이룬다. <스포트라이트>에서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은 지역사회와 종교 역사에 뿌리 깊이 내린 악을 고발하는 언론 자유와 기자 정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의 추악한 비리가 담긴 펜타곤 페이퍼를 손에 쥔 <워싱턴 포스트> 신문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메릴 스트리프)은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1960년대 미국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을 깨트리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평생 다시 하지 못할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다. <퍼스트맨>의 닐 암스트롱은 숱한 정치적 회의론과 동료를 잃는 슬픔,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했던 제미니 우주선 탐사를 극복하고 달에 착륙하여 인류에게 위대한 도약을 선사한다.레너드 번스타인은 어떨까. 그는 매카시즘이 횡행하던 미국 사회에서 당당한 공산주의자였고 양성애 성향을 숨기지 않았으며 펠리시아 역시 사회적 투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예술인이었다. 단 하나의 대사건과 업적으로는 조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믿기 힘든 경력의 탑을 다방면에 쌓아올린 거장이었다. 번스타인은 시뻘건 용광로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켜 천재적인 창작의 결과물을 제련해냈다. 디오니소스적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절제와 고민, 갈등은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는 이상적 가정을 형성하고 이성애에 충실하여 아내를 보살폈으며 가정을 홀대하지 않았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에게 상처받았지만, 그의 비범함에 경의를 표했다. 아이러니하다. 상반된 답을 준다. 계속 질문하게 만든다. 이 파토스의 영역을 극으로 옮기는 데 탁월한 인물이 브래들리 쿠퍼다. <스타 이즈 본>에서 자기 파괴적이고 늙은 컨트리 가수 잭슨 메인을 연기하기 위해 1년 이상 음악을 배워 고유의 보컬 톤까지 개발한 그는 번스타인의 삶을 위해 지휘자 야니크 네제새갱에게 교습을 받고 가즈 히로에게 6시간 이상의 분장을 받아 20세기의 문제적 인물을 완벽히 소화했다. 마침내 둘의 갈등이 폭발하는 장면에서 펠리시아는 “당신의 진심은 새빨간 거짓말이야. 생기란 생기는 다 빨아들여서 남은 사람조차도 자기 본모습을 지키고 살 수가 없어.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사랑하고 인정하다 보면 그래”라며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번스타인의 성스러운 말러 교향곡 2장 성당 지휘를 지켜본 펠리시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혼신의 지휘를 펼치고 땀범벅이 되어 돌아온 그를 끌어안고 감격한다. 강력한 예술의 최면이자 불가사의한 사랑의 힘이며, 논리나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망각의 영역이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그래서 혼란스럽고도 아름다운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영화가 된다.

[기획] 뉴비가 덕질을 시작하고, 캐해에 열중하고 - 2023년, 왜 애니메이션이 이토록 열광적인 관심을 불러모았을까

2023년 영화시장의 승자는 단연 애니메이션이다. 지나치게 단호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여러 근거가 있다. 먼저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23년 1월1일부터 12월27일까지 해외영화 박스오피스 1·2·3위 모두 애니메이션이 차지했다. 1위 <엘리멘탈>(누적관객수 724만명), 2위 <스즈메의 문단속>(557만명), 3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479만명)가 이에 해당한다. 북미 열풍을 일으킨 주역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가 240만명으로 8위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201만명으로 9위를 차지했으니 톱10의 절반이 애니메이션이다. <존 윅4> <오펜하이머> <아바타: 물의 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ume 3>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등 2023년 국내 개봉한 박스오피스 10위권 안팎의 해외 실사영화를 생각하면 쟁쟁한 경쟁 속에 애니메이션이 우뚝 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장의 작품 상영 빈도를 나타내는 상영점유율이나 직접적 소비를 판단할 수 있는 좌석점유율도 크게 다르지 않다(표1·표2 참조). 여기서 <씨네21>은 질문을 건네보기로 했다. 극장의 침체기가 장기화된 와중에 관객들은 왜 애니메이션을 선택했을까. 볼거리, 즐길 거리, 경험할 거리가 다양해진 지금, 애니메이션이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 풍경이 2023년만의 것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두터운 마니아층의 충성도 높은 사랑을 받아온 장르다. 하지만 전반적인 영화시장의 약세에도 유독 굳건해 보이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최근 2~3년간 시나브로 차곡차곡 쌓여서 2023년에 두드러진 이 태동을 문화현상적으로 분석했다.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접근성이 높아지다 열풍이고 강세다. 유행이고 트렌드다. 애니메이션이 콘텐츠 시장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이행한 2023년, 많은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열풍을 주목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따른다. 모든 연령대 관객을 아우를 수 있어 누구나 쉽게 진입할 수 있다는 게 애니메이션의 본래 특성이자 장점인데, 왜 이 선택을 특별하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언뜻 당연해 보이는 목표 수행 앞에서 이 지표와 양상을 정리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이전과 다르게 나타나는 변화 때문이다. 2023년을 시간순으로 돌아보자. 1월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상영 초반까지만 해도 원작 만화 <슬램덩크>의 향수를 가진 독자 중심으로 화제가 됐다. 30여년 전 <슬램덩크>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건강한 스포츠 정신을 경험한 이들이 스크린으로 확장된 세계를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개봉 4주차까지만 해도 3040세대가 흥행을 주도했지만 5주차부터 1020세대의 진입이 빠르게 증가했다. 일종의 역주행이다. SNS를 통한 관람 인증과 자체 홍보에 강한 세대적 힘을 빌리면서 영화는 동심원을 크고 넓게 펼쳐갔다. 원작 만화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가졌거나 이전까지 제목만 얼핏 들어봤던 일명 ‘뉴비’(신입)들이 그 세계관으로 기꺼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콘텐츠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의 유입이 필연적인 것을 생각하면 1년간의 전례 없는 장기 상영의 바탕엔 결국 팬덤의 세대 전환과 주요 소비 방식에 변화가 있었단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흥행은 <슬램덩크> 원작 만화와 TVA 시리즈로 관심을 돌리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 2023년 1월10일부터 2월10일까지 한달 동안 원작 만화 판매율이 2299% 증가했고, 왓챠의 TVA 시리즈는 2022년 4분기 대비 2023년 1분기 동안 시청시간은 11배, 시청유저는 8배 증가했다. 3월에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 또한 10대의 힘을 받았다. 국내에도 팬덤이 큰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이라 이견 없는 흥행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전진 방식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아름답고 생동감 있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전면으로 이야기하던 것과 달리 <스즈메의 문단속>은 숏폼 플랫폼 틱톡과 흥행의 궤를 함께했다. 열려 있는 모든 문을 닫아버리는 유쾌한 챌린지는 숏폼 참여율이 높은 10대 사이에 유행처럼 번져갔고,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원작 안에서 작품을 디테일하게 파고들며 메시지를 분해하던 이전과 달리 애니메이션을 가벼운 게임으로 전환해내는 문화 태도는 실제 재난을 소재 삼은 무거운 영화 분위기에도 어린 연령층이 쉽게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즉 콘텐츠 가변성을 예리하게 찾아내고 2차 문화로 파생시키는 세대적 근육에 힘을 얻은 셈이다. 6월에 개봉한 <엘리멘탈>의 흥행은 한국에서 더 재미있는 해석을 낳는다. 세계 시장에서 아쉬운 성적을 거두는 동안 국내에서 뒷심을 발휘하며 흥행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입소문이 만든 기적. 역주행의 아이콘. 다양한 별명이 <엘리멘탈>을 설명하지만 과연 그것 때문만일까. 영화의 주요 소비층인 20대의 스테디한 관심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트위터에서는 불의 종족 앰버와 물의 종족 웨이드를 두고 MBTI를 유행처럼 추측했다. 앰버와 웨이드 중 어디에 더 가까운지 이야기하는 상황도 적잖게 목격됐다. MBTI 과몰입 시대에 ‘캐해’(캐릭터 해석)당하기를 좋아하는 Z세대들은 MBTI의 바다에서 콘텐츠를 활용하며 세계관을 확장했고, 각자의 경험과 사례를 덧붙여 설득력 높은 주장을 부지런히 완성했다. 오로지 MBTI 과몰입만이 <엘리멘탈>의 흥행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안에는 더 세세하고 복잡한 알고리즘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개입시킬 가능성과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두는 것은 그것을 재빠르게 낚아채는 20대 관객에게 보다 유효하다. 이전보다 가깝게, OTA가 만든 변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200만명을 달성하고 <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이 같은 날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을 꺾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동안 극장 밖에서도 애니메이션 붐은 이어졌다. 특히 <최애의 아이>는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진격의 거인>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등 이미 거대 규모의 팬덤이 형성돼 있는 초대형 작품이 아닌, 처음으로 한국 시청자에게 얼굴을 알린 작품이 왓챠 2023년 TV애니메이션 전체 인기 순위 2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3·4·5위에 차례로 등극한 <주술회전> <진격의 거인> <스파이 패밀리>가 신규 시즌으로 대중의 자동적인 선택을 받았다면, <최애의 아이>는 첫만남에 강렬한 호응을 얻은 것과 같다. 문성욱 왓챠 편성운영팀장은 “최근 1~2년 사이 전반적으로 애니메이션 시청수가 늘었”다며 “애니메이션 수요층의 증가로 새로운 작품에 대한 낯섦이 덜해졌”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과 시청자 사이의 거리감 변화는 2023년 애니메이션 부흥의 주요 요소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OTT가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넘어 극장용 애니메이션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애니메이션 산업 지형도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용어 정리가 필요하다. 기존에는 TV시리즈 애니메이션을 TVA(Television Animation), 비디오 애니메이션을 OVA(Original Video Animation)라 일컬었다. 각 용어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등 플랫폼 형태로 특정되었지만 OTT에서 재생되는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는 단어는 따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이에 따라 <씨네21>은 OTT로 유통되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을 반영한 언어를 제안하기 위해 ‘OTA’(OTT Based Animation)라고 칭하고자 한다. OTA는 유아용이나 가족용이 아닌, 성인을 주요 타깃으로 삼은 애니메이션을 가리키며 OTT 플랫폼으로 접근 가능한 유통구조까지 반영한다. 다시 돌아와 OTA를 통해 애니메이션에 진입하게 된 시청자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소재를 다룬 작품에 자연스레 노출된다. 어떤 디바이스에서건 장소와 상관없이 재생할 수 있다는 OTT의 일상성과 편의성을 생각하면 그만큼 애니메이션의 접근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애니메이션 수요 증가를 확인한 왓챠는 더 넓고 낮은 진입을 촉진하기 위해 <스킵과 로퍼> <쿨하고 바보 같은 남자> 등 로맨스물과 <야무진 고양이는 오늘도 우울> 등 잔잔한 일상물을 확대 편성했다. 애니메이션이 경계를 넘어서는 장면을 대중이 직접 확인하는 것도 OTA의 특성이다. 한국 넷플릭스 비영어권 TV 톱10에 실사 시리즈와 겨눠 이름을 올리는 애니메이션도 생겨났다. <주술회전> 2기는 7주 연속, <스파이 패밀리> 2기는 3주 연속, <최애의 아이>는 2주 연속 상위에 랭크됐다. 이러한 풍경을 목격하게 된 사람들은 은연중 애니메이션이 영화·드라마와 동등한 선택권, 동등한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시나브로 수용하게 된다. 이제는 애니메이션을 ‘하위 분류화’하지 않는 대중적 인식으로까지 가닿을 수 있던 배경이라 볼 수 있다. OTT의 보편화가 가속화된 코로나19 시기를 기점으로 ‘오타쿠’라는 용어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소셜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썸트렌드 조사 결과, 코로나19 발발 직전 해인 2019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온라인 커뮤니티,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등장한 오타쿠 관련 용어는 ‘사회성’ ‘샤워’ ‘과몰입’ ‘말투’ ‘소리’ ‘게임’ ‘일본어’ 등으로 나타난다. 그중 ‘과몰입’이 13만929회로 1위를 차지했다. 오타쿠에 관한 특정 이미지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단어를 종합해봤을 때 부정적 뉘앙스를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2023년 1월1일부터 12월27일까지 조사한 결과, 오타쿠와 관련한 단어로 ‘친구’ ‘카페’ ‘슬램덩크’ ‘갓생’ ‘갓반인’ ‘행사’ ‘이벤트’ ‘문화’ ‘취향’ 등이 등장한다. 이중 ‘친구’가 15만3331회로 가장 많이 언급됐으며, ‘갓반인’은 6만5422회로 10위 안에 든다. 종합하면 이렇다. 시간을 쪼개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들이는 사람. 남들보다 부지런하게 문화를 즐기는 사람. 작품 밖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체화하고 경험하는 사람.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가 건강하고 친근하고 가깝게 변한 것은 그만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절대다수가 상대적으로 더 존중받기 쉬운 세상의 흐름을 생각하더라도 그렇다. 언급량도 절대적으로 늘었다. 올 한해 오타쿠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은 총 427.4만회다. 125.8만회에 달하는 2019년에서 3배가량 증가했다.(썸트렌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장난스럽고 가볍게 오타쿠라 칭한다. 그것이 자신을 해하지 않는 것이라 알기 때문이다. 각광받는 OTA 작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OTA를 즐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중은 애니메이션과 가까워진다. 미묘한 거리를 만들었던 선이 조용히 지워지고 있다. 1020 남성에서 2030 여성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에 두드러지는 또 다른 변화는 바로 성별 분포, 연령 분포의 이동이다. 오랫동안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함께해온 영화 수입사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대표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전작인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1020 남성 관객층이 주를 이루었던 데 반해 <스즈메의 문단속>은 여성 관객이 압도적”이라고 설명했다. 왓챠 또한 자사의 영화평 기록 및 영화 추천 앱인 왓챠피디아를 통해 애니메이션으로 향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읽었다. 문성욱 왓챠 편성운영팀장은 “이전에는 애니메이션이라 하면 대체로 남성향 애니메이션이나 소년성장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왓챠피디아를 통해 새로운 수요를 읽고 여성을 타깃으로 한 작품들을 편성하거나 관련 작품을 추천해 유입을 연결시킨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2023년 해외영화 박스오피스 1·2·3위를 차지한 <엘리멘탈> <스즈메의 문단속>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모두 여성 관객의 비중이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CGV·메가박스 기준, 여성 관객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엘리멘탈>은 68%와 65.9%, <스즈메의 문단속은> 56%와 56.3%,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64%와 58.8%. 연령대에서도 공통적으로 20~30대 관람 비중이 높았다. 2030 여성이 극장 전반의 주요 소비층으로 두드러지는 만큼, 이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대중적 범주에 들어서는 것을 넘어 시장 내의 실질적인 파이를 키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정현 CGV 콘텐츠편성부장은 20대 여성 관객의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으로 자발성을 꼽았다. “여성 관객은 체험형 상영과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와 관련된 인증과 후기로 반응한다”며 문화적 촉매제로서 여성 관객이 어떤 긍정적 기능을 이행하는지 설명했다. 마케팅적 관점에서 20대 여성 관객을 공략할 때 성공적인 작품 흥행을 기대해볼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유독 여성 관객 팬덤이 부각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N차 관람 비중은 약 20%에 달한다. 5%가량의 평균 N차 비율보다 4배가량 높은 수치다(CGV 기준). 2023년 더현대서울 팝업 매출 순위에서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9억8천만원의 수익을 달성하며 3위를 차지했다. 1위 아이돌 제로베이스원(13억5천만원), 2위 빵빵이(12억8천만원)가 비 영화 콘텐츠라는 걸 감안하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영화 콘텐츠로서 독보적인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타쿠적 문화 소비에 기반을 둔 여성 관객들이 팬덤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구축하고 운영하는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팬덤 활동도 기술적으로 발전한다. 좋아하는 배우에게 편지를 보내던 세대는 일대 다수로 메시지를 교환하는 세대로 바뀌었고, 좋아하는 아이돌 얼굴로 펜 띠를 둘둘 말던 기술은 오늘의 포토카드(포카) 문화로 발전했다. 하지만 팬덤 활동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선정하면(덕통사고) 그것에 몰입하고(과몰입), 그들이 내 옆에 있는 듯한 물성들을 직접 만들어나가는(2차 창작물) 덕질의 문화적 유전자는 세대를 거쳐 고유하게 보존돼왔다. 이렇게 극장 밖에서, 콘서트장 밖에서, 무대 밖에서 은연중에 비슷한 경험을 전수하고 전수받은 여성들은 일종의 덕질 패턴을 체화하게 된다. 누가 정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2030 여성 팬덤이 비슷한 수준의 적극성과 자발성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심지어 트랜스 미디어적 변화도 있다. 애니메이션의 허들이 낮아지면서 각 분야에서 모여든 팬덤이 다양한 방식으로 융화되며 계속해 즐길 거리(일명 떡밥)를 생산하는 것이다. 아이돌을 좋아하던 이가 애니메이션 장르에 들어와 기존 방식대로 생일 카페를 열고, 게임을 하던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분석하면서 팬들은 자연스레 장르에 정착할 이유를 갖게 된다. 단순히 극장가를 점유해온 모집단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됐기 때문에 그 파이가 커진 게 아니다.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 활용할 줄 아는 문화적 기술을 지닌 여성들의 저변이 확대되었기에 극장가에도 애니메이션 열풍이 불어올 수 있었다. 변화의 물결은 (극장, 혹은 영화산업) 바깥으로부터 시작된다. 극장의 위상 변화라는 필연적인 태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멀리 바라보는 시야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