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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백두대간 대표 이광모

조용한 바람몰이.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의 한 상영관인 아트큐브에서 상영 중인 <아타나주아>의 흥행을 두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3천명에 불과한 관객이지만, 77석짜리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깜짝성공’이 아닐 수 없다. 이 놀라운 흥행의 이면에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 예술영화를 소개해온 ‘예술영화의 전도사’ 이광모 백두대간 대표가 자리하고 있다. 1995년 <희생>을 필두로 70여편의 예술영화를 개봉시켰으며, 1998년에는 <아름다운 시절>을 연출해 해외 각종 영화제에서 숱한 상을 받았던 그가 백두대간 창립 10주년을 맞는 2004년 벽두부터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올해를 예술영화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만들고 4년 동안 기획했던 작품에도 돌입할 예정인 그는 <아타나주아>만큼이나 조용하지만, 큰 변화를 일으킬 채비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아타나주아>의 흥행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지난해 12월19일 개봉했는데, 12월30일까지 2800명 정도 들었다. 상영관인 아트큐브의 좌석 수가 77석인 것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적이다. 개봉 첫 주말 객석점유율이 93.4%였는데 개봉 다음 주말에는 98.2%를 기록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매진이었다. 관객이 떨어지지 않는 추세라 2월까지 장기상영할 계획이다. 1월8일부터는 엠파크에서도 개봉하고 시네마테크 부산과 광주극장에서도 순회상영을 가질 예정이다. 2만명 정도 들 것으로 본다. 이번에는 광고도 별로 안 했고 이벤트도 벌이지 않았는데 관객이 제 발로 찾아오더라. 관객이란 게 알 수 없어서 영화의 묘한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것 같다. 에스키모와 알래스카의 이국적 풍경을 보는 재미도 있겠지만, 그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과 인간미에 감동받는 것 같다. 2003년엔 활동이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일부러 조금 쉬어간 한해였다. 예술영화의 환경이 너무 안 좋아져 영화를 많이 하면 할수록 적자가 났다. 2003년의 전략은 극장수입으로 외화 수입·배급의 손실을 막아내자는 것이었다. <레전드 오브 리타> <베터 댄 섹스> <사랑의 시간> <내가 여자가 된 날> <칠판> <아타나주아>, 이렇게 6편을 개봉했는데 창사 이래 가장 적게 개봉한 것 같다. 수입배급한 작품 중 <아타나주아> 외엔 모두 적자였다. <베터 댄 섹스>는 53개 극장에서 개봉했는데 관객 7만명 정도 들어 손익분기점에 미치지 못했다. 예술영화를 수입·배급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것 같다. 갈수록 나빠진다. 특히 2002년부터 더 안 좋아졌다. 비디오 시장이 극장수입보다 더 컸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는데 완전히 붕괴하면서 수익을 거두기 어렵게 됐다. DVD의 경우 원가는 비싼데 덤핑시장이 너무 거세 내봐야 별 실익이 없다. 2004년부터 공중파와 케이블TV쪽은 조금 나아질 것 같다. 미국영화 비율을 제한하는 방송쿼터제와 케이블방송사의 증가로 판권 가격이 좀 올랐다. 2004년은 백두대간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1994년 2월 베를린영화제에 가서 판권을 구매했던 게 백두대간의 첫 활동이었던 것 같다. 10주년이란 게 큰 의미는 없지만 2004년을 계기로 예술영화를 부흥시키자는 르네상스 운동 같은 것을 펼쳐보자는 생각이다. 어떤 행사들을 기획하고 있나. 예술영화 수입·배급쪽으로는 네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는 예전에 우리가 수입했던 영화를 포함해서 과거 한국에서 개봉했던 좋은 영화들을 다시 보는 행사다. 두 번째는 기존 백두대간 영화들을 개봉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최신 트렌드랄까, 새롭고 젊은 감각의 영화를 집중 발굴하는 일이며, 네 번째는 다른 나라 대사관, 문화원들과 함께 기획전을 여는 것이다. 올해 4월부터 시작해 2005년 말까지 이뤄질 것이다. 차근차근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행사에선 어떤 영화들을 개봉하나.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국내에서 개봉됐던 영화들과 미개봉작 일부를 상영할 예정이다. 지금의 20대나 30대 초반조차 거의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예전에 했던 영화를 다시 본다는 의미뿐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고민케 하는 작품들을 보여줄 생각이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의 전범격이라 할 수 있는 <위선의 태양> 같은 영화 말이다. 루이 말의 <굿바이 칠드런>,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 쿠스투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첸카이거의 <현 위의 인생> 등이 개봉작이고, 미개봉작으로는 트뤼포의 <투 잉글리시 걸스>, 체코 지리 멘젤 감독의 <가까이서 본 기차> <줄 위의 종달새>, 루이 말의 <심장의 속삭임> <라콤 루시엔>, 타비아니 형제의 <피오릴레> 등이 있다. 다른 행사는 어떤가. 기존 백두대간 영화들로는 2월 <블러디 선데이>와 <인 디스 월드>를 시작으로 <노 맨스 랜드> <할리우드 엔딩> 등을 개봉한다. 그중에는 독일에서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패러디웨스턴 <마니토스 슈>나 2002년 이탈리아 흥행 1위를 했던 <라스트 키스>도 있다. 심의에서 통과하면 무라카미 류의 <도쿄 데카당스>도 개봉할 계획이다. 젊고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는 ‘뉴&영’ 시리즈로는 <알래스카> <줌> <권태> <룸 투 렌트>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리컨스트럭션> 등 아주 새로운 영화언어를 갖고 있는 작품들을 보여줄 생각이다. 기획전은 앞으로 계획을 짜봐야 한다. 예술영화 시장이 안 좋다면서도 굉장히 적극적인 것 같다.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영화 관객은 항상 있는데 우리가 못하기 때문에 안 드는 것이다. 다만 예술영화 진영이 열세에 몰리다보니까 뭔가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것 같아 좀더 다양하게 접근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다. 7∼8년 전만 해도 나름대로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게, 당시 충무로의 마케팅 비용은 2억∼3억원 정도였고 우리는 그 10분의 1 수준인 2천만원에서 2500만원 정도를 썼다. 또 매체들도 호의적으로 써줘 노출도나 인지도에서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그 사이 충무로의 마케팅 비용은 15억∼20억원으로 뛴 데 비해 우리는 비디오 시장이 나빠져 오히려 1천만~1500만원 정도밖에 못 쓰게 됐다. 게다가 기사도 잘 나지 않고 있다. 이젠 노출도 면에서 100분의 1도 안 된다. 결국, 상업영화의 방식과는 다른 수단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복안이 있는가. 예전 ‘미지의 명감독’ 행사를 했을 때처럼 매체와 평론가, 교수 등과 극장, 관객을 연결하는 것이다. 영화 상영과 함께 강의도 마련하고 자료집도 내고 출판으로 마무리해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하나의 흐름 속에서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씨네큐브도 2000년 11월 개관했으니 3년이 넘었다. 성과는 있는지.2001년 20만, 2002년 17만, 지난해 17만명 정도 관객이 찾았다. 괜찮은 편이다. 극장에서 흑자가 나서 수입·배급 적자를 메워줬으니까. 지난해 우리가 썩 잘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들었다는 것은 성장잠재력이 있다는 얘기다. 잘하면 25∼30만명까지는 될 것으로 본다. 이제 자리는 확실히 잡은 것으로 보인다.극장 색깔이 점점 명확해진다. 우리 극장에서 2003년 최고의 히트작은 <디 아워스> <그녀에게> 이런 작품이다. 고급스런 여성 취향 영화가 잘된다. 반면 가장 흥행이 안 됐던 작품들은 <낭만자객>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같은 한국 코미디영화다. 이들 영화는 하루 20∼30명 정도 들기도 했고, 개봉주인데도 아예 한명도 안 들어 상영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돈 벌려고 이런 영화도 하냐는 항의도 많이 들었다. 관객 취향이 확실하다는 게 장점일 수도 있지만, 부담일 수도 있겠다. 지금 같아선 큰 부담이다. 예술영화의 수급이 안 된다. 예술영화가 안 되니까 수입사가 어렵고, 그러다보니까 좋은 영화가 없다. 극장 입장에서는 1년에 50편 정도 필요한데 반도 안 된다. 예전 동숭아트센터에서 할 때보다 관객의 예술영화에 대한 열기가 떨어진 것은 아닌가. 열기가 떨어진 게 아니라 분산됐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처음으로 본격적이고 집중적으로 소개한 것이어서 동숭에 관객이 몰린 것 같다. 지금은 독립영화 행사며 감독들의 회고전, 국제영화제가 계속 열리고, 하이퍼텍 나다 등도 생긴 만큼 분산된 것 같다. 다만 구심점을 마련 못해서 흩어져 있는 것이다. 예술영화를 찾는 전체 관객의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생각진 않는다. 다만 흡입력 있는 기획을 못 내고 있다는 게 문제일 거다. 지난해 일부 회고전이 성공한 게 의미있다고 본다. 허우샤오시엔이나 데릭 저먼 회고전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 정도만 기획하면 관객은 온다는 얘기니까. 시네마테크와 협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씨네큐브와 시네마테크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얼마 전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공유하자고 얘기했다. 서로 협조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찾을 것이다. 예술영화전용관처럼 제도로서 보장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생적인 연대가 더욱 필요한 실정이다. <아름다운 시절>을 만든 게 1998년인데 아직까지 감독으로서 작품활동은 못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설립할 때부터 한국영화 제작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세웠었다. 사실, 올해의 가장 큰 목표는 한국영화 제작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10년 동안의 활동을 바탕으로 발전적 토대를 굳히는 일 정도까지가 내 역할이라고 본다. 그런 작업을 마무리하고 올해 안에 무조건 내 작품에 돌입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10주년이 하나의 매듭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 매듭을 지음과 동시에 나는 내 작품으로 들어갈 것이다. 작품이란 게 정기적으로, 의무감에서 하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작품을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 같다. 이제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고. 과연 이광모 없는 백두대간이 운영될 수 있겠나.영화에 전념하기 위한 첫 단계로 2002년 8월 교수직도 그만뒀다. 이제 회사일에서도 빠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단계다. 직원들이 알아서 할 수 있는 구도를 짜는 것이다. 이사급 2명도 영입할 예정이다. 이번 칸영화제를 마지막으로 올해 상반기부터 회사 업무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감독으로서 임하는 작품은 이전부터 기획했던 이산가족 프로젝트인가. <아름다운 시절>을 끝낸 뒤 다큐멘터리들을 보는 등 죽 리서치해왔다. 사실, 하고 싶은 다른 작품이 있긴 한데 이 작품을 마무리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안에 시작하게 된다. 어떤 영화인가. 기존 제작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찍는 게 목표다. 내 생각은 시나리오 없이 찍는 영화다. 리서치를 바탕으로 찍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가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시나리오 써서 거기에 맞춰서 관행대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재미없는 것 같다. 특히 이산가족 문제는 소재 자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인데, 기존의 영화적인 방법이라면 과거회상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즉흥적으로 찍는다고 해도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정해진 틀 안에서 이뤄지고, 결국 과거를 복원해내는 작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다. 소재가 흘러가는 대로 카메라가 같이 가면서 뭔가를 잡아내고 그것을 축적해나가면서 작업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하고 싶은데…. 모르겠다 너무 이상적인 건지. 정확히는 감이 안 잡히지만 왠지 다큐멘터리의 느낌이 강할 것 같다. 극영화적 접근이 있고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활용하는 게 있다. 다큐멘터리는 분명 아니다. 다큐를 만드는 것과 극영화가 나란히 가면서 현실을 콜라주하는 것이다. 극영화라는 것은 드라마, 스토리, 캐릭터라는 것 안에 갇혀 있는데, 그 소우주 속에서 전체를 대변하기 바라는데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불가능하다. 현실 속에 들어가서 취재를 하듯 카메라가 대상을 찍을 것이고, 미리 정해진 콜라주할 틀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일 것이다. 다큐라는 것은 한 인물을 따라가든 한 모티브를 따라가게 되는데 여기서는 그것보다 조금 폭넓은 개념으로 접근할 것이다. 분단과 이산이라는 것을 주제 삼아 다양한 것을 보여줘 관객이 커다란 흐름을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가 ‘이것이 이산가족이다’라며 아주 편협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게 이산가족으로 인해 일어나는 전체의 양상이야’라고 관객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게 하자는 거다. 프레스코 벽화 같은 느낌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래도 정확히 이해는 안 된다. 나도 이 프로젝트를 오래 구상해왔는데, 아마도 마이클 윈터보텀의 <인 디스 월드>가 가장 유사한 미학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는 이미 주인공들의 여정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다큐멘터리 같지만, 어떤 앵글은 반드시 연출됐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보인다. 내가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장면인데, 현실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인물을 던져넣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솔직히 나도 오리무중이다. 어쨌건 영화라는 게 한국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지는데, 따지고 보면 다 고만고만한 게임 아니냐. 리얼리티를 100% 전달하려고 할 때는 다른 접근이 필요한 것 같다. 이산가족 문제를 다루려는 이유는 뭔가.우리 집안도 이산가족이다. 할아버님의 경우 할머니, 고모 두분, 삼촌 두분을 북에 두고 내려오셨다. 북한 식구의 생존 여부도 모른 채 돌아가셨다. 살아계실 때 할아버님은 유언 비슷하게 영상물을 만들고 싶어하셨다. 당시 내가 비디오카메라로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이라 내게 부탁하셨는데, 나는 만류했다. 당시만 해도 정정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할아버님은 <아름다운 시절> 크랭크인을 하기로 했던 날 돌아가셨다. 그걸 찍어드렸어야 하는데 하면서 두고두고 한이 되고 죄스럽다. 우리 사회는 이산가족 문제를 헤어진 가족의 문제만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국사회처럼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사회가 드물다. 이 사회는 약자들을 돕는 데 인색하다. 우리 민족은 정신적 불구인 것이다. 그런 정신적 결함이 어디서 오나, 하는 것이 이산가족에서 시작된다. 너무 절박한 문제이기 때문에 빨리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것 같다. 한 4년 걸릴 것 같다. 촬영에만 3년이 걸린다. 애초에는 10부작 다큐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극영화 1∼2편을 뽑아낼 생각을 했는데 예산이 93억원이 나오더라. 최근까지도 고민하다가 극영화에 집중하고, 부산물로 다큐가 1∼2편 나오면 다행이라고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 전체적으로 45억원 정도 들 것이다. 별도 법인인 시네마 상상도 활동을 하게 되나. 시네마 상상도 4년간 준비해왔다. 기획 중인 작품이 12∼13개 정도 되는데, 올해부터 1년에 2편씩 제작하는 게 목표다. 대부분 상업영화이고 장르는 다양하게 가져갈 생각이다. 매우 바쁜 한해가 될 것 같다. 10년 동안 사무실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뛰고 싶다. 현실과 호흡도 같이 하면서 현재진행형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만드는 작업 자체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그렇게 현실을 만들어가는 그런 영화 말이다.

[새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유신 말기인 1978년. 그 시절 대부분 학교가 그랬듯이 고등학교는 청춘을 저당잡힌 수용소였다. 혈기방장한 남고생들은 `빨간 책'으로 불리는 도색잡지를 돌려보며 욕정을 달래거나 라디오 심야방송에 엽서를 보내 연정을 불태웠다. 그리고 욕망의 탈출구 저편에 `우리의 우상' 이소룡(李小龍)이 우뚝 서 있었다. 오는 16일 개봉될 <말죽거리 잔혹사>(제작 싸이더스)는 78년과 79년 서울 강남의 신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덕화와 임예진이 청춘 스타로 활약하던 시절이지만 당시 고교생들의 학교 안팎 생활은 <고교 얄개>처럼 유쾌하지도 않았고 <진짜 진짜 잊지마>처럼 로맨틱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현수(권상우)는 땅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고 서울 강남으로 이사온 어머니 때문에 정문고로 전학온다. 이곳은 교사들의 폭력과 학생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악명 높은 문제학교. 첫날부터 버스에서 상급생에게 칼라(교복 깃 안에 덧대는 장식)를 빼앗기고 교문을 들어서다가 복장 검사에 걸려 야구 배트로 두들겨맞는가 하면 1년 꿇었다는 급우에게 상납을 요구받는다. 앞으로 지낼 날들이 막막하지만 새로운 희망이 자리잡는다. 교내 최고의 주먹인 우식(이정진)의 권유로 농구 경기에 끼게 된 현수는 팀을 승리로 이끌고 우식과 나이트클럽까지 함께 갔다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그의 등하교길을 즐겁게 해준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근 여고의 3년생 은주(한가인). 올리비아 허시를 꼭 닮은 은주에게 마음을 빼앗긴 현수는 버스 안에서 불량배에게 시달리는 그를 도와주다가 가까워진다. 그러나 현수는 수줍음과 설렘 때문에 좀처럼 은주에게 다가서지 못하는데 우식은 `터프 가이'다운 방식으로 단번에 은주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정과 연정 사이에서 고민하던 현수는 우식이 선도부 종훈(이종혁)과 맞대결을 벌였다가 패한 뒤 은주와 함께 가출하자 삶의 의욕을 잃고 리샤오룽의 쌍절곤에 모든 희망을 건다. 시인 감독 유하는 40대 관객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학원 풍경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학교의 폭군인 교련 교사, 도색잡지를 파는 급우, 학교에서 특권층으로 대우 받는 삼성장군 아들 등은 어느 학교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인물이었고 선도부원(규율부원)이 늘어선 교문, 나이트 클럽의 디스코 춤, 라디오 심야방송의 엽서, 떡볶이집의 DJ 박스, 기타를 둘러메고 타는 경춘선 열차 등은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주는 삽화였다. 93년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로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유하 감독은 2002년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보란듯이 복귀에 성공한 뒤 사춘기 시절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영화로 완전한 명예 회복을 이뤘다. 콧속이 알싸해지고 가슴이 뻐근해지면서도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나게 만드는 추억담을 이렇게 완벽하게 재현해내기란 쉽지 않다. 미끈한 외모와 높은 인기에 비해 연기력이 떨어진다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권상우도 연기에 물이 올랐고 주변 인물들도 절묘한 캐스팅과 빼어난 호연으로 힘을 보탰다. 이종환, 박원웅, 차인태 등 남성 DJ들이 주름잡던 라디오 심야시간대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남성 청취자들의 귓가를 간지럽혀주던 서금옥도 특별출연했다. 상영시간 116분.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이창동 장관, 신년 간담회 일문 일답

"중국 베이징에 코리아센터 건립"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7일 오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해외홍보업무의 일원화를 위해 올해 중국 베이징(北京)에 코리아센터를 건립하겠다"고 말했다. 이 장관은 "한국의 달라진 위상에 비해 해외홍보가 미흡하고, 여러 분야로 흩어진 홍보창구를 일원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면서 "올해 베이징에 해외홍보분야를 통합한 코리아센터를 만들어 성공여부를 지켜본 뒤 다른 도시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장관은 한류(韓流)의 확산을 위해 올해중 중국 상하이(上海)에 한류전진기지를 건립하겠다는 계획도 이날 밝혔다. 한편, 이 장관은 "지난해 정부와 언론과의 관계정립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고, 관행을 바꾸는데 통증이 있었다"면서 "(언론이) 이같은 정부의 정책방향을 수용하고 협력해 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 장관과의 일문일답. 지난해를 보낸 소감은? ▲아시다시피 해보지 않은 경험을 했다. 새로운 도전이었고, 그만큼 힘들었다.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 노력만큼의 대가는 국민이 판단하고 느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 무겁다. 문화관광부가 올해 추진할 핵심 사업은? ▲히트상품 위주로 사업을 하지 않으려 한다. 문화를 통한 사회의 체질개선이 문화관광부의 새해 정책방향이 될 것이다. 지난해 각 분야에서 문화정책의 큰 틀을 짰다. 올해는 하나씩 실천해 나가겠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안으로는 체육분야의 경우 아테네 올림픽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일이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이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하도록 체육계 내부의 체제개혁을 추진하겠다. 문화산업분야는 이 분야를 세계 5대 강국으로 육성하는 원년으로 삼고 강력한 지원정책을 펼 계획이다. 현재 문화정책 전반에 걸쳐 중장기 계획을 수립중이다. 이 가운데 광주문화중심도시 계획은 문화예술계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대형 프로젝트이다. 지방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종합계획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준비하고 있다. 국민이 두고두고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려 한다. 그러려면 공무원들이 자율적이고 진심어린 정책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지난해는 그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내부체질 개선에 주력했다. 이것이 정부 혁신이라고 본다. 일본대중문화 4차 추가개방과 관련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가 영향을 끼치지 않나? ▲영향을 받지 않으려 한다. 예상 못했던 일이다. 결국 이런 문제는 양국간 이해부족에서 온 것이다. 이럴수록 교류를 늘려 서로 이해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문화산업 주무부처로서 게임 등 디지털콘텐츠와 관련해 정보통신부와 부처간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나? ▲부처간 영역 다툼의 인상을 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문화산업에 도움이 되느냐의 관점에서 봐야지 예민하게 따질 필요가 없다. 총선출마 제안을 받았나? ▲받지 않았다. 섭섭할 이유가 없다. 제안하는 것이 이상하다. 저같은 사람을 어디다 쓰려고... 스크린쿼터 제도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해치지 않나? 잘되는 영화만 잘 된다.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스크린쿼터가 다양한 영화의 제작과 배급에 미흡할 지 몰라도 순기능이 더 많다. 아마 배급 기회가 줄어들면 가장 먼저 영향을 받게 될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라 다양한 영화들이다. 문화관광부 내부 조직개편이나 산하기관 개편계획은 있나? ▲문화관광부 조직개편안은 이미 제출했다. 정부혁신위에서 논의하고 있을 것이다. 산하기관 조직개편 일정은 없다. 내부 조직개편안 가운데는 문화산업국을 분화시켜 문화미디어국을 신설하는 방안을 세워놓았다. 최근 재미있게 본 한국영화가 있나? ▲<실미도>와 <바람난 가족>을 봤다. 영화볼 기회가 없다. 그런 영화도 행사차 본 것이다. 영화에 비해 공연장이나 전시회는 상대적으로 자주 찾는 편이다. (영화계 출신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인지 영화쪽 행사에 가는 것이 눈치가 보인다.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문제에 대해 문화관광부는 어떻게 대처하나? ▲중국은 항상 자기 대륙내 소수민족의 역사를 자기 역사로 다뤄왔다. 그걸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국의 최근 움직임은 일부 방어적 측면이 있다. 정부 차원에서의 공식적 대응은 문제를 푸는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치쟁점화 하는 것은 오히려 중국의 그런 태도를 강화할 수 있다. 순수 민간차원에서 학계토론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고구려 벽화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록과 연계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벽화는 인류공동의 유산이고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북한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라도 협력을 얻어서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우리의 뜻을 이미 북한에 전달했다. 한류(韓流)를 확산시킬 정책은? ▲올해 중국 상하이에 한류전진기지를 건립할 계획이다. 해외홍보시스템도 구조적으로 바꿀 계획이다. 이를 위해 올해중 베이징에 코리아센터를 세워 해외홍보업무를 일원화하고, 성공여부를 지켜본 뒤 다른 도시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해외홍보업무 일원화와 관련해 국정홍보처와 갈등은 없나? ▲소관업무 쟁탈전은 없다. 문화관광부는 외부 전문가 자문과 리서치 등을 거쳐 나름대로 해외홍보업무 통합방안을 올렸으므로 정부혁신위에서 결정할 것이다.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된 뒤 재원마련 방안은? ▲통합복권법에 따라 지원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로또복권 수익이 연간 1조원이라 할 때 5%만 지원받아도 500억원이다. 217억원으로 예상된 지난해 문예진흥기금 모금액보다 많아 오히려 여유가 생기리라 본다. 일본대중문화개방으로 포르노성 프로그램이 방송될 수 있지 않나? ▲방송위원회나 방송사의자율심의 기능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문제가 일시적으로 생길 수 있을지 몰라도 방송위와 방송사의 심의기능을 신뢰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서울=연합뉴스)

[인터뷰] <말죽거리 잔혹사> 유하 감독

“압구정동에서 말죽거리까지 오는 데 십년 걸렸습니다.” 93년 자신이 발표했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영화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로 데뷔한 유하(41) 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 시사회 상영 전 이렇게 인사말을 갈음했다. 감독의 십대시절 학교생활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영화에서 여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의 주인공 현수는 유하 감독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많이 투영된 작품 같다. 실제 학교 생활은 어땠나. 한마디로 지옥 같았다. 본래 배우사진을 모으거나 라디오 프로그램에 엽서 보내는 걸 좋아하는 여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학교라는 사회는 남자답기를 폭력적으로 강요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싸움질을 일삼는 문제학생이 되어갔다. 그때는 그게 멋있고 남자가 되는 건 줄만 알았다. 70년대가 배경인데, 체벌이 금지된 요즘 학교를 다닌 젊은 친구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겠나. 그 모습은 변했어도 유일무이한 가치를 강요하는 건 요즘이나 옛날이나 변하지 않은 제도교육의 본질이다. 이를테면 대학입시 같은 것이다. 현수 역시 학교에서 난동을 부리고 거의 자발적으로 학교를 나오지만 결국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학원으로 간다. 그런 면에서 젊은 친구들 역시 제도교육이나 학교에 가지고 있는 불만은 우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 같은 건 없었는지. 시사회를 보면서 문득 지옥도 시효가 지나니까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시를 미화하거나 낭만적으로 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현수가 선도부 아이들과 싸우는 장면도 영웅적이기보다는 평범하던 아이가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현수도 그렇고 우식이나 재복이도 모두 불운한 출구를 향해 간다. 그 나이 때 상실해 가는 것들, 그리고 그를 통한 변화나 성장을 담으려고 했다. 영화에 이소룡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열혈팬인가. 사실 우리 세대에 이소룡의 열혈팬이라는 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다. 당시에는 누구나 이소룡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취향이나 놀이에서 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졌던 획일주의적 풍경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 영화에 등장시키게 됐다.

2004년 한국영화 트렌드 [2]

<집으로…>로 불붙은 가족 테마, 올해 <맹부삼천지교> 등 줄잡아 8편 채비 가족은 일종의 금기였다. 적어도 9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족이 중심에 놓인 영화는 극히 드물었다. 단적인 예로 90년대 전반기를 풍미한 로맨틱코미디에서 남녀는 그들의 부모세대와 마주치지 않았다. 9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신인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실험에서도 이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창동, 허진호, 김지운 등 몇몇 감독이 가족을 돌아보긴 했지만 장르로서 홈드라마 또는 가족 관객을 위한 영화는 결코 주류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2004년 개봉할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암울한 시대를 이겨낸 아버지상을 담은 <효자동 이발사>, 철없는 아버지를 그린 <아빠하고 나하고>, 뒤죽박죽인 가족관계를 그린 <귀여워>, 사라진 부모의 사랑을 찾아가는 <인어공주>,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와 어린 남매의 이야기인 <가족>, 반목하는 형제의 화해를 모색하는 <우리 형>, 9살 어린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담은 <아홉살 인생>, 자식의 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를 그린 <맹부삼천지교> 등 줄잡아 8편 이상이 새해에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가족영화가 쏟아져나오는 지금, ‘왜?’라는 질문은 당연할 것이다. 멀티플렉스는 가족영화의 토양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은 2002년 <집으로…>의 성공이다. <집으로….>는 그간 주류 영화계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기획이었지만 서울관객 159만명을 동원하며 <가문의 영광>에 이어 2002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2위에 올랐다. 이 영화의 흥행에 크게 자극을 받은 쪽은 무엇보다 스타 캐스팅에 매달렸던 제작자들이다. 그들은 <집으로…>를 통해 상업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는 스타는커녕 얼굴을 알 만한 배우조차 등장하지 않는 영화였고 제작자들이 믿고 있던 젊은이들의 취향과 상반된 이야기였다. 2003년 개봉한 <선생 김봉두>도 <집으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비록 차승원이라는 스타를 기용하긴 했지만 <선생 김봉두>가 보여주는 화면 역시 첨단유행과 거리가 멀었다. 두 영화는 지금 관객이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우는 데서 호소력을 발휘했다. 고향, 시골마을, 할머니, 동심 등 주류무대가 낯선 이야기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2003년 추석에 개봉해 흥행작이 된 <오! 브라더스>도 가족영화 유행에 기폭제가 됐다. 스타를 기용했으며 코미디 문법에 충실한 영화인 <오! 브라더스>는 <선생 김봉두>와 더불어 <집으로…>의 예외적 흥행을 상업영화의 틀에 안착시키려는 시도였다. 반면 대조적인 방식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있다. <바람난 가족>은 가족과 결혼제도에 대한 주류적 가치를 뒤집는 영화였다. 당연히 파격적인 주장이 두드러진 영화였지만 관객은 그런 도발을 신선하고 흥미로운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 <집으로…> 이후 상업영화가 가족을 감싸안는 스펙트럼이 <오! 브라더스>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펼쳐진 것은 가족영화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줄 만한 일이었다. 일부에선 이런 영화의 성공 배경에 멀티플렉스의 급성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거지 근처에 멀티플렉스가 속속 들어서면서 가족 단위 관객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오! 브라더스>는 지난해 추석, 가족이 볼 만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관객층이 넓어져서 가족영화가 늘어난 것인지, 가족영화가 많아져서 관객층이 넓어지는 것인지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런 영화들의 성공이 멀티플렉스의 확산과 관련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단적인 예로 할리우드에서 가족영화 또는 전체관람가 영화가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폭넓은 관객층이 있기 때문이다. 세대적 결핍과 허기를 달랜다 또 하나 제작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한동안 영화계를 풍미한 조폭코미디 유행이 잦아들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에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를 개봉한 튜브픽처스의 황우현 대표는 “관객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한다. 특급 캐스팅이라고 할 만한 차태현, 김선아를 내세웠지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선호도는 높지 않았다. 황우현 대표는 “비슷한 방식으로 웃기는 영화가 계속 이어진 탓에 또 그런 영화겠거니, 하는 인식이 형성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2년 전 <집으로…>를 제작해 유행을 선도했던 튜브픽처스는 올해 <귀여워>와 <가족>을 개봉할 계획이다. 위기철 원작의 <아홉살 인생>을 준비 중인 황기성사단 대표 황기성씨도 지나치게 20대를 겨냥한 영화만 나왔던 상황에서 <아홉살 인생>이 다양한 관객을 흡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희망한다. “한국영화가 다양성을 키우자면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대부분 그렇지 않나. <집으로…> 같은 영화가 흥행한 데서 알 수 있듯 관객의 요구는 있다. 그간 포기했던 관객을 껴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르로서 가족영화의 가능성에 의미를 두기보다 가족이 모두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황기성씨는 공포영화, 스릴러, 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듯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노인들이 주인공인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같은 영화도 그런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가족영화 유행이 의미있는 이유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관객의 저변을 확산시키는 노력이기 때문이지만 영화미학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허문영씨는 <씨네21> 381호에 실린 ‘타자와의 기꺼운 조우’라는 글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젊은이들의 놀이터였지만 그 세대적 폐쇄성은 윤리적 결핍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집으로…> <오아시스> <죽어도 좋아> 등 3편의 영화를 분석한 이 글에서 그는 “세 영화의 특별한 주인공들은 텍스트상의 기능을 넘어, 그들의 실존이 한국영화의 결핍과 허기를 상기시키고 달랜다. 요컨대 한국영화는 이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타자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새해 잇따라 개봉하는 가족영화가 이런 윤리적 결핍을 메울 작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몇몇 작품은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단순히 가족의 노스탤지어에 기대는 기획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집으로…>나 <바람난 가족>이 보여줬던 비주류적 모험에 비하면 개봉을 준비 중인 가족영화 중 상당수는 소재의 차이에만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가족영화 유행은 아주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2004년의 가족영화는 <집으로…>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스펙트럼을 넓힌 한국영화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를 보여줄 시금석으로 보인다. 처절하고 온화하고 엉뚱한 90년대 한국영화에서 드러난 가족 9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족을 다루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배짱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기획영화로서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건 20대 관객을 주타깃으로 삼는 영화계에서 쉽게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임권택 감독은 독보적인 존재다. <서편제>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어떤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었고 <축제>는 <집으로…> 이전에 할머니라는 낯선 타자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가족의 해체는 임권택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90년대 후반 등장한 이창동, 허진호, 김지운 등 세 감독의 데뷔작도 가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차이가 흥미롭다. <초록물고기>의 가족이 처절하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부자관계는 온화하며 <조용한 가족>의 가족은 엉뚱하다. 이창동 감독이 어딘가 망가진 가족관계를 그린 데 비해 허진호 감독은 가족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쪽이었고 김지운 감독은 개인주의자로 이뤄진 가족을 묘사했다. 세 감독의 스타일과 세계관의 차이를 그들이 그린 가족의 모습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세 감독의 영화 외에 가족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는 장길수 감독의 <아버지>와 윤인호 감독의 <마요네즈>가 대표적이다. <아버지>가 희생하는 아버지상의 전형을 보여준 반면 <마요네즈>의 어머니는 철없는 중년여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인 두 영화는 결국 관객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는데 이는 TV 홈드라마와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사실 TV 홈드라마는 가족영화의 기반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60년대 한국영화의 주축 가운데 하나였던 가족 멜로드라마는 TV 홈드라마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레 위축됐다. 지금 가족영화 역시 TV 홈드라마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2004년 한국영화 트렌드 [3]

<아홉살 인생> 윤인호 감독 말만 하지 말고 먼저 돌아봐 위기철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아홉살 인생>은 어른들이 보는 동화다. 가난한 집안에서 컸지만 생각이 깊은 아이 여민의 눈에 비친 어른과 아이들의 모습이 오랜 추억이 담긴 앨범처럼 펼쳐지는 이야기. <약속> <보리울의 여름> <와일드카드> 등의 시나리오를 쓴 이만희 작가가 각본을 썼으며 <바리케이드>와 <마요네즈>를 연출한 윤인호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가족에 관한 다른 영화를 준비하다가 황기성사단의 제안을 받고 원작소설을 읽게 됐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건 내가 9살 때 겪은 이야기라고 느꼈다. 70년대 중반 나도 9살이었고 그때 비슷한 경험을 했던 터라 가슴에 와닿았다. -오늘날 가족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가족이라고 말만 하지 말고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저 돌아보자는 것이다. 돌아보기만 하면 해소될 문제도 돌아볼 틈이 없어서 심각해지곤 한다. 돌아본다는 것이 추억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그 사람도 내게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경우, <바리케이드>와 <마요네즈>에 이어 <아홉살 인생>까지 모두 가족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 가족과 많이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 같다. <바리케이드>를 보고 아버지가 나한테 “말로 하지, 영화로 만들어서 돌려 말하냐”고 했고 <마요네즈>를 보고 어머니는 “내가 그렇게 못된 엄마였냐”고 되물으셨다. 두 영화가 나와 내 가족에 관한 영화였다면 이번엔 나와 다른 모든 가족의 얘기가 될 거 같다. -가족에 관한 기존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9살 소년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상이라는 점이다. 내가 했던 영화 가운데 등장인물의 범위가 가장 넓고 시각도 좀더 객관적이다. 어렸을 때 시각을 통해 어떤 정서와 공감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가족에 관한 영화로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굳이 가족에 관한 영화로 꼽긴 힘들고 <일 포스티노>나 <시네마천국> 같은 영화를 꿈꾸고 그런 정서를 담고 싶다. <일 포스티노>를 보면서도 주인공의 외로움이 가족과 떨어져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봤다. <시네마천국>의 영사기사도 또 다른 가족이다. 그가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이었다는 걸 돌아보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가족> 이정철 감독 위한답시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그럼 안 돼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는 남매의 이야기. 주인공은 절도 4범의 전과자 정은으로 교도소에서 나와 2년 만에 아버지와 해후하지만 잠시 뒤 아버지가 백혈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로 상처를 줬던 가족이 죽음과 싸우면서 화해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패자부활전>과 <비천무> 연출부를 거친 이정철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작품으로 올 상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월드컵 때 홍명보가 페널티 킥을 차넣었을 때 축구를 잘 모르는 아내가 우는 걸 봤다. 며칠 뒤에 장례식장에서 어린 아이들이 상주가 되어 장례 치르는 것을 봤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이 <가족> 시나리오를 쓰는 계기가 됐다. 아버지가 자식을 남겨두고 죽는 이야기를 희망적으로 그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가는 아버지는 축구를 좋아하는 어린 아들에게 상주의 역할이 축구팀 주장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주장이나 상주나 팔에 완장을 차는 것이 똑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 이 장면을 가장 먼저 썼다. -오늘날 가족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가족끼리 서로 위한답시고 거짓말하고 속이고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래야 서로 편하고 쉬운 관계가 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가족에 관한 기존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이 영화에서는 병에 걸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일상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영화에서 대체로 건너뛰고 묘사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아버지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가도 중요한데 <가족>의 아버지를 보면서 부모세대가 갖고 있는 희생정신을 돌아봤으면 싶다. -가족에 관한 영화로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인의 향기>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이 영화의 분위기는 <마빈스 룸>과 비슷한 거 같고. <여인의 향기>는 눈이 멀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캐릭터를 풍성하게 표현하는데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맹부삼천지교> 김지영 감독 부모와 자식, 각자의 인생이 있다 한국의 비정상적 교육열을 풍자한 코미디. 동태장수 맹만수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3번 이사를 하며 강남 대치동 아파트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곳에서 예상치 않은 문제에 직면하는데 바로 앞집에 조폭이 살고 있는 것이다. 맹만수는 아들을 유해환경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조폭을 쫓아낼 궁리를 시작하고 이로 인해 일대 소동이 벌어진다. <영어완전정복> 원안을 쓰고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를 각색한 김지영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사는 삶이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요즘 애들, 중고등학생만 되면 가치관이 분명해지는데 부모가 자기 기준에 맞춰 스스로 희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맹모삼천지교는 옛날얘기일 뿐이다. 2004년에 어울리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소재는 신문을 보다가 찾았다. 강남 집값이 왜 그렇게 높은가, 따져보니까 교육열 때문이다. 자식 교육을 위해 목숨 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얘기다. 그걸 코미디로 풀면 재미있겠다고 판단했다. -오늘날 가족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저녁시간 TV드라마를 보면 대개가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이야기다. 원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하길 강요하는 부모가 있고 그걸 극복하는 남녀가 있는. 그런 가족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이 나름대로 가치관을 인정하고 그걸 존중해줘야 한다. -가족에 관한 기존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기존 영화들이 갈등을 부각해서 화해로 끝맺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갈등이 풀리면서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소되는 영화다. 갈등이 눈녹듯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서로 타협하는 모습을 그리려 한다. 또한 이 영화는 아버지의 눈으로 가족을 바라보는 영화다. 대부분 영화가 자식의 관점에서 구성되지만 <맹부삼천지교>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래서 거꾸로 어린 친구들이 아버지 세대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장르는 코미디인데 조폭이 등장하지만 조폭코미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얘기다. 여러 가지 장르가 뒤섞인 영화가 될 것이다. -가족에 관한 영화로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수오 마사유키의 <쉘 위 댄스>를 좋아한다. <쉘 위 댄스>도 어떻게 보면 가족이 화해하는 과정을 다루는 영화다. 기본적으로 개성적인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천국의 아이들> <키즈 리턴> <인생은 아름다워> 등도 내게 영감을 준 영화들이다. <우리 형> 안권태 감독 늘 옆에 있다는 것, 그 소중함을 아니? 연년생 형제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감춰져 있던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모범생인 형과 반항아인 동생의 갈등이 영화의 기본축이며 원빈이 동생 역에 캐스팅된 상태. 3월에 크랭크인 해서 가을에 개봉할 예정이다. 경성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친구> 연출부를 했던 안권태 감독의 데뷔작으로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과 <똥개>를 만든 진인사필름에서 제작한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오랫동안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람 냄새 나는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다 문제가 많은 형제의 이야기를 쓰게 됐다. 실제로 동생이 하나 있는데 동생과 나의 관계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안에선 늘 심각한 갈등이 있는 가족, 그걸 영화로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오늘날 가족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가족의 의미가 많이 퇴색한 세상이다. 함께 살면서 애정은 있지만 표현하기 어렵고 무관심하기 쉽다. 늘 옆에 있어서 소중하다는 걸 모른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그런 소중함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가족에 관한 기존 영화와 어떻게 다른가. =다르다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점이 중요하다. 기존 영화와 차별성을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에 주안점을 뒀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게 차별성이 될 수 있다. 코미디나 다른 장르적 요소가 아니라 정직하게 드라마에 충실한 영화라는 사실도 다르다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형제애를 다룬 <오! 브라더스> 같은 영화도 있었지만 <우리 형>은 코미디 요소가 별로 없다. -가족에 관한 영화로서 가장 인상적인 영화는. =라세 할스트롬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 <길버트 그레이프>를 가장 좋아하는데 내가 닮고 싶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고 씁쓸한 이야기인데 담담하게 풀어가는 화법이 좋다. 보고나면 그 의미를 곱씹게 된다.

할리우드의 뉴 히로인 6 [6] - 앤 해서웨이

"그녀는 배우가 되고 싶어했고,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항상 자신에게 신경을 써왔다. 빈큼없이 화장한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여배우들처럼." ◀◀ REW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미아. 교내 공주들과 대적하던 중 진짜 공주가 된 고등학생. 오디션장에서 덤벙대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감독 게리 마셜의 호감을 샀다. 그럼에도 <데일리 버라이어티>는 헤서웨이에게 줄리아 로버츠와 오드리 헵번과 주디 갤런드를 섞어놓은 듯하다는 찬사를 보냈다. ▶ PLAY 앤 헤서웨이는 여왕 할머니를 만나기 전의 미아처럼 다듬지 않은 눈썹을 하고 거리에 나간 적이 있었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 순간 그녀는 “외롭고 주눅이 들었다”. 그녀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을 연기하는 어머니를 보며 배우가 되고 싶어했고,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항상 자신에게 신경을 써왔기 때문이다. 빈틈없이 화장한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여배우들처럼. 그러나 그런 삶에도 불만은 있었다. 헤서웨이의 아버지는 딸이 <프린세스 다이어리>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어린 시절을 되찾겠구나”라고 축하해주었다. 지방 연극무대였다고는 해도, 헤서웨이는 어린 시절부터 배우였고, 스스로 “현실이 아닌 삶을 살았다”고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TV시리즈 <겟 리얼> 뒤에 바로 찾아온 <프린세스 다이어리>는 처음으로 그녀 자신이 되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첫 영화 역시 기억해야 한다고 못박는다. 모르몬교 선교사업을 소재로 한 <천국의 반대편>은 “정치와 환경운동과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그녀에게 똑같이 소중한 영화였다. 지금 그녀를 만나는 기자들은 “전형적인 동부 사립대 여학생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 사이 판타지 <마법에 걸린 엘라>를 찍었지만, 헤서웨이는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또다시 <프린세스 다이어리>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쳤다. “세상일을 비롯한 모든 걸 가르쳐준, 세살 때부터 나의 우상” 줄리 앤드루스를 떠나 보내고, 헤서웨이는 지금 홀로서기 중이다. ▶▶ FF <프린세스 다이어리2>의 미아. 정략결혼을 할 수는 없는, 아직은 십대 소녀. 같은 인물을 두번 연기한다는 건 막 스물을 넘긴 배우에게 즐거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앤 헤서웨이가 어떻게 자랐을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테니….

조난당한 산악 드라마, <빙우>

산행 스토리의 미덕은 등산과 하산이라는 고도(高度)의 추이가 인물의 긴장과 대구를 이룬다는 것에 있다. 집결과 등정, 추락과 극복, 정상에서의 절정과 하산을 갖춘 산행 스토리는 그 자체로 서사장르의 시간표를 내장하고 있다. ‘산 밑’의 이야기가 어떻던가와 상관없이 산에선 산에서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 안엔 산 밑에서 살던 자연인(the natural)을 영적인 존재로 주목하는 신화적 긴장감이 있다. 산악영화는 따라서 이종교배된 다른 장르가 무엇이던가에 상관없이 항상 ‘산악영화’라는 메타의 장르로 회자되는 구석이 있다. 산악드라마를 통과하는 인물들에게서 입체적인 유형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내극의 좁다란 방 안에서도 납득할 만한 변화무쌍함을 가진 인물은 산을 오를 필요가 없다. 드라마가 인물에게 등반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단조롭다 못해, 편협하리만큼 집요하고 일관된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런 인물들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헤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조여오는 자기모순에 내던져졌으면서도 같은 바람을 반복하는 것밖에 모르는 인물들에게 산행(山行)은 강제적인 깊이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인물은 거의 운명이 되다시피한 스스로의 갈등만큼이나 잔혹한 시련과 자기 징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산은 인물들이 씨름하는 운명 그 자체의 은유가 되곤 한다. <빙우> 속 인물들도 그리고 그들의 갈등도, 따라서 매우 단순한 편이다. 경민(김하늘)은 대학 산악부 선배이자 유부남인 중현(이성재)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어린 시절 경민의 소꿉친구였던 우성(송승헌)은 번지수가 틀린 사랑을 경민에게 기대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경민이, 죽을 것 같이 보고 싶은 중현을 보기 위해 산을 오르고, 그녀가 죽고 나면 이제 그녀를 잊지 못하는 두 남자가 함께 산을 오르고 조난당해 서로의 기억이 한 여자로 겹쳐 있다는 것을 발견할 참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죽음, 고전적인 삼각관계가 산으로 이들을 이끄는 갈등의 모든 것이다. 세 사람 외의 등장인물들에게 좀처럼 시선을 주지 않는 영화의 이야기 얼개는,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고 포기하지도 못하는 그들의 태도만큼이나 평면적이고 단조롭다. 디테일마저 과감하게 생략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알래스카 설산의 스펙터클로 치닫는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아시아크(Asiaq)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이승에서 헤어진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산이다. 산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데에는 그런 종류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산 저편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혹한이나 악천후, 험난한 지형이 아닌, 신과의 씨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산은 중현, 경민, 우성 이 세 사람에게는,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고 동시에 구원이다. 이 영화가 산을 올라가야 하는 동기는 이렇게 드라마적 필연 위에 있다. 산의 스펙터클에만 주목할 한국형 산악블록버스터의 유혹을 피한, 대한민국 최초의 산악영화 <빙우>의 출발은 크게 보아 일단 옳게 꿰어진다. 삼각관계라는 뻔한 설정과 단조로운 인물들에게 생령을 불어넣으려는 구원의 방식으로. 하여 <빙우>가 한국 최초 산악영화로서 맞이하는 도전은 소재 자체에서 오는 기술적인 난점이 아니라 평범한 이야기와 인물에 서사의 깊이를 가불해주는 산악드라마의 미덕을 살려내느냐 아니냐에 있다. 따라서, 제작진 모두가 알고 있었겠지만 <빙우>는 ‘아시아크’에 ‘올-인’한 영화다. 경민은 대학 산악부 선배인 중현을 사랑하지만, 부인이 있는 중현과 경민의 사랑은 늘 위태롭다. 한편 소꿉친구였던 우성은 경민을 바라보지만, 이미 경민은 중현을 사랑하고 있으니 이는 가망없는 짝사랑일 뿐이다. 그러나 ‘산악멜로’를 자처하는 <빙우>는 산행의 디테일을 통해 감정선을 잡아나가기보다는 단조로운 이들의 삼각 연애담에 미스터리 기법을 도입하는 편을 택한다. ‘산악’보다 ‘멜로’에 방점이 찍힌 셈인데, 카메라는 중현과 우성이 조난당한 현재의 이야기와 산 밑에서의 일들 사이를 잦은 플래시백으로 오간다. 이것은 심플한 이야기에 밑줄을 칠 수 있는 감각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등반대의 여정은 플래시백들에 호흡이 잘려 순식간에 능선과 정상, 하산 사이를 느닷없이 비약해버린다. 관객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두 남자가 실은 한 여자로 얽혔다 같은)이나 혹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실들을 천천히 드러내려고 뜸을 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결과적으로 산 밑의 사건이 산 위 사건을 흡수해버리고 산악드라마는 실종된다. 거대한 풍광신과 세트촬영분이 좀처럼 하나로 붙질 못하고 세 배우들의 화학반응이 무디게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화는 대신 가능한 짧은 호흡으로 나뉜 산 밑 삼각연애담에 작은 장치들을 준비해놓고 비교적 무난한 멜로물로 향한다. 초반의 낯간지러운 장면들을 제외하고 최초 산악영화라는 기대치를 버리고 나면 라스트신의 슬픔이 그렇게 느닷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뒤로 광막한 스펙터클이 호화로운 병풍처럼 느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MBC드라마 <산>이나 포지션의 뮤직비디오에서 보았던 것처럼 주인공들의 사랑에 산이 들러리 서는 태도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 위에서 인간이 로프와 자일로 산과 대결하는 드라마를 통해 역으로 주인공들의 내면을 부각시킬 수도 있었던 <빙우>의 초기 설정과는 꽤 다른 것이다. 이 귀결은, 쉽지 않았을 산악로케이션의 촬영 강도와 산악영화로서의 첫삽으로서의 <빙우>의 의미를 생각해볼 때 아쉬움이 남는다. ‘아시아크’는 어디? 어디에도 없는 산 산악영화와 이종교배되는 서브 장르는 실로 다양하다. 능선을 따라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며 정상에 오르는 여정 속에 이미 내장된 산악드라마의 타고난 서사성 탓이다. 더구나 무한한 여백으로 개활된 곳이면서도 인물들에게는 심리적으로 협소한 공간이라는 이중성도 한몫하는 측면이 있어서 액션과 혼융된 산악영화는 <클리프 행어>에서처럼 폐쇄된 고립공간에서의 액션과 광활한 스펙터클을 함께 보여주는 장르적 장점을 가진다. 드라마적 얼개가 촘촘하게 갖춰져 있지 않더라도 산이라는 심리적 공간이 서사적 탄력을 담보해주는 점이 액션이 산악영화와 친밀도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기 되기 위해서 산에 다시 정서적인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한 법인데 연인을 잃은 곳이라거나 가족을 잃은 곳(<버티칼 리미트>) 등의 장치를 놓는 것은 흔한 편이다. <빙우>에서 세 주인공을 운명처럼 연결하는 ‘아시아크’(Asiaq)의 설정은 무척 중요했는데, 알프스나 매킨리 같은 관광지 이미지, 안나푸르나나 K2처럼 기존 이미지들을 피하기 위해 아예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시아크’라는 이름을 지어낸 것이 특기할 만한 점이다. 세 사람이 만남과 헤어짐을 넘어 이끌리는 산에 ‘이상향’의 이미지가 들어가기 원했던 제작진은 적합한 산의 이름을 찾기 위해 알래스카에 있는 산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에스키모어에서 적합한 단어를 뒤졌다. 그리고 그중에서 기후를 관장하고 악천후에서 인간을 돕는 여신의 이름이자 알래스카산(産) 블루베리의 이름이기도 한 아시아크를 찾아낸다. 기후와의 상관성 탓에 각종 기상연구소와 지구온난화 문제와 같은 기상대책포럼이나 회의 이름으로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 이 이름은, 천변만화하는 산 위의 기상을 감안하면 산의 이름으로서는 완벽할 수 있지만 세 사람이 불가능한 사랑의 실마리로 넘겨다보게 하기엔 부족했던 것이 사실. 따라서 이승에서 헤어진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길잡이의 여신으로 아시아크를 둔갑(?)시켜야 했다. 이렇게 사연과 이름을 갖고 태어난 아시아크의 ‘몸’은 캐나다 유콘주의 화이트 패스와 르웰린 빙하지대에서 가져왔다

거만 혹은 자신감, 소심 혹은 겸손함,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주인공 역은 권상우에게 딱 맞아 보였다. 비뚜름한 반항기와 단단한 터프함과 상대로 하여금 대꾸할 말을 잃게 하는 거만함은, 권상우의 이미지의 정체이자 그 인간의 정체 같아 보였다. 그러나 세상엔 오해가 많다. 배우들이 떠 안고 사는 오해는 더 많다. 권상우는 자기가 갖고 있는 이미지가 몸에 체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이젠 그런 이미지 좀 제발 깨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순하게, 때론 소심하게, ‘가오’보단 실리를 따져가며 천연덕스럽게도 살아왔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겨 준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잘 생긴 얼굴에 싸움도 잘 하고 여자도 잘 다루는 우식 역이 권상우가 으레 할 법한 캐릭터라면, 조용하고 숫기 없고 말주변도 없는 현수 역은 권상우가 공감할 법한 캐릭터다.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웠던 권상우의 일면을 현수가 갖고 있다. 말하자면 권상우의 침묵은 무게가 아니라 얌전함이다. 표정이나 어조에는 자의식이 딸려 있지 않다. 그에 관해 꾸준히 지적되는 문제, 일명 ‘혀짧은 발음’은 권상우의 실제 캐릭터를 훨씬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큰 키를 주체 못해 구부정하게 앉아 두손을 재킷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저 나사빠진 자세를 보고 연예인다운 무게를 잡는다고 아무도 말 못할 것이다. 빠른 말투는 인터뷰체로 다듬어진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다. <동갑내기…>와 <천국의 계단>은 어디까지나 영화였고 드라마였다. 학교에서 교실 맨 뒤에 앉아 제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을 걸어보면 순하고 재미있었을 법한 친구가 권상우다. 이 의외의 이미지는 소박한 꿈으로 이어진다. 권상우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연예계의 대성공으로 연결짓지 않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아버지상에 갖다댄다. 그러나 현재 하는 일에 관해 계획을 세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연예생활의 시작이 된 모델일을 “연기자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딱 1년만 할 생각”이었다는 건 권상우가 머릿속에 적어넣고 다니는 수많은 계획의 한 끝자락이다. 다섯살 차이나는 형이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그를 등교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학교에 가도록 형과 같은 시간에 잠을 깨웠다. 그때 생긴 부지런한 습관으로 남들이 열흘짜리 벼락치기를 할 때 “미리부터 안 해놓으면 불안해서” 자신은 20일동안 ‘장기 벼락’을 쳤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하고 열흘 벼락치기한 애보다 성적 안 나올 때 기분 아세요? 그 기분 모르시죠?” 권상우는 자기 머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열등감이 많은 성격이라 자신이 남들보다 못하는 것을 먼저 의식한다고 했다. 그래서 “현장에 가면 발악을 한다”고 했다. 그 발악의 결과인지는 몰라도 시청률이 40%에 달하게 된 드라마와 개봉 전부터 좋은 입소문이 돌고 있는 영화를 두고 권상우는 “한 마리 토끼는 이제 잡은 것 같고, 나머지 한 마리도 웬만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스스럼없이 밝힌다. 지나친 겸손과 부담스러운 자신감을 정신없이 오가는 것 같지만 그의 태도에는 어떤 오해의 소지도 없다. 권상우는 어떤 강한 자의식을 내비치기 이전에 마음이 열리는 대로 말을 쏟아놓는, 울타리가 없는 사람이다. 겸손함은 겸손함의 범위를, 자신감은 자신감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우식이 아니라 현수로 방향을 튼 권상우는 이번 영화로 “나한테도 뭔가 있구나, 하는 말을 듣고 싶어요”라는 바람을 또다시 느슨한 태도로부터 흘려내보낸다. 그러다가도 “<동갑내기…>가 500만명이 들었기 때문인지 200만, 300만명은 그냥 평범한 숫자 같다”는 말로 영화사 직원과 기자를 다시 한번 쓰러뜨린다. 그에게 욕심은 있지만 사심은 없다. 그의 이미지를 닮은 마초적 위압감이나 똥폼도 없다. 스타라는 자의식을 챙기지 않는다. 자의식을 챙긴다는 게 어떤 건지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닐까 싶다. 대역없이 소화한 <말죽거리 잔혹사>의 옥상 액션신에서 그가 보여주는 그림같은 발차기에만 반할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