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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특집. 설연휴 볼거리, 읽을거리 [3] - 만화

2003년 추석, 나는 약간의 각오를 하고 고향집으로 갔다. 내게는 집과 작업실에 몇 마리의 고양이 동거자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실까 지레 겁을 먹고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전화를 하다가 내 방의 고양이 소리가 들리자, ‘고양이는 안 좋네’ 하면서 거부감을 표시하기도 하셨다.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나는 소리라고 둘러대기도 했지만, 그 이후 내가 고양이에 관한 책을 냈고 이제는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잔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집에 들어간 순간, 나를 먼저 반긴 것은 어머니도 조카들도 아닌,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였다. 그 사이 형의 가족이 시추 한 마리를 키우기 시작했고, 녀석의 애교에 부모님이 이미 넘어가버리셨던 것이다. 덕분에 나의 고양이 동거 생활도 은근슬쩍 묻혀버리게 되었다. 두세집 건너 한 마리씩 동물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강아지와 고양이는 물론, 새와 물고기, 파충류와 곤충류도 차례상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사실 만화만큼 동물들과 친한 매체도 없다. 공룡 둘리, 강아지 강가딘, 펭귄 만마루, 해달 보노보노…. 이들은 사람처럼 두발로 걸어다니고, 나불나불 사람 말로 떠들어대고, 시건방진 장난으로 인간들을 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화를 통해 ‘진짜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왓츠 마이클> 등을 시작으로 펼쳐진 ‘동물만화’의 세계는 점점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이들이 ‘가장 가족적인 만화’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파란만장 견공일기 <시바오> 누노오라 쓰바사 지음 I 삼양출판사 펴냄 눈이 녹은 도로에서 미끄러져 꾀죄죄한 행색으로 돌아다니는 시바오. 공사장 하수관에 들어갔다가 몸이 끼어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시바오. 칼 든 강도한테 붙잡혀 인질 신세가 된 시바오. 작은 몸집에 동그랗고 복스러운 꼬리를 가진 강아지 시바오의 삶은 파란만장하다. 비록 귀여운 눈빛과 앙증맞은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지만, 발가락 사이의 넓적한 물갈퀴가 증명하듯 녀석에게는 떠돌이 개의 피가 만만찮게 흐르고 있다. 이 만화는 떠돌이 강아지 시바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에피소드 연작인데, 요즘에 보기 어려울 정도의 따뜻한 서정이 깃들어 있다. 시바오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법을 가르쳐주는 요정과도 같다. 언덕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유모차를 몸을 던져 멈추는 영웅적인 행동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배고픈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곤경에 처한 그를 도와주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깨닫게 된다. 길거리 가수가 잃어버린 휴대폰, 부동산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지갑, 엄마와 헤어진 아기…. 시바오는 그것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안내하면서, 그 스스로는 여전히 방랑 중이다. 언젠가 이 꼬마 강아지가 머물며 함께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집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주인공은 당신일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시라. 우리는 고양이로소이다 <묘한 고양이 쿠로> 개인적으로 2003년에 나온 동물만화 가운데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개와 고양이를 1인칭으로 두고 이야기를 펼쳐가는 만화는 적지 않지만, 그들의 삶을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귀엽게 그리는 작품은 보기 어렵다. 쿠로는 자신의 여동생 칭코와 함께 ‘수염’이라고 이름 지은 너절한 싱글 남자의 연립주택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오는 날 놀이터에 버려졌다가 이 남자에게 거두어졌지만, 그를 주인이라고 생각지도 않고 집의 안과 밖을 오가며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 만화는 쿠로의 1인칭 일기처럼 그려지는데, 길거리 고양이 세계의 권력 다툼, 발정난 고양이들의 사랑 싸움, 교통사고로 죽은 새끼 고양이의 무덤 만들기와 같은 실제 고양이 세계의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펼쳐진다. 어쩌면 나스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유머와 귀여움를 좀더 담은 시점이라고도 여겨지는데, 쿠로의 친구 고양이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도 딱 고양이 발치에서 바라다본다.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지만 왕따에 가까운 소년, 커다란 몸집과 못생긴 얼굴로 실연의 상처를 입은 듯한 괴인 여자, 마른 몸에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만 고양이들을 챙겨주는 여우 여인. 정말 고양이가 인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겠구나 싶은 이야기들이 계속된다. 뾰로롱, 짹째꿀∼ 문조 몇 마리 키워보세요 <문조님과 나> <백귀야행> <어른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들의 행방> 등으로 국내에도 상당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마 이치코의 작품이다. 이미 그는 <백귀야행>에서 까마귀 요괴 오지로와 오구로를 등장시켜 새들을 인간과 교류하게 만들었고, 화실일기식의 단편을 통해 자신의 문조 사랑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문조 이야기가 만만찮은 인기를 얻어 이렇게 독립된 작품으로 내놓게 되었다. 동남아시아 원산으로 작은 몸집, 아름다운 외모, 놀라운 음악성, (잘만 키우면) 다정다감한 인간과의 사교성. 일본에서 문조는 반려동물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개가 모두 틀리지는 않았지만, 실제 여러 마리의 새들을 키우면 그들의 성격 차이와 기묘한 행동 때문에 놀라운 사건들이 연이어 터진다. 그리고 그 공간은 마감에 찌들려 야생과도 같이 어질러진 만화가의 화실이다. 거울을 보고 구애를 하는 나르시스트 후쿠, 그의 아내로 데려왔지만 곧 버림받는 하나, 그들의 아이로 인공 사육된 나이조, 나이조의 처로 데리고 왔지만 곧 남자로 밝혀지고 후쿠와 동성애 징후까지 보이는 스모모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려온 새로운 식구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것은 이마 이치코의 만화 세계와도 꼭 닮아 있다. 사사키 노리코의 <동물의사 닥터 스쿠르> 덕분에 일본의 시베리안 허스키 값이 10배로 뛰었다던데, 이 만화 덕분에 문조 값도 폭등하지는 않을까? 뻔뻔해도 좋다 같이만 살아다오 <메이(May)> 메이(May). 오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이웃의 토토로>의 여자아이만은 아니다. 이 통통한 뺨에 앙증맞은 꼬리를 가진 골든 레트리버 강아지의 이름도 메이다. 골든 레트리버라고? 견종을 잘못 안 거 아냐? 2등신도 안 될 것 같은 커다란 머리에 왕방울만한 눈. 도대체 뉘 집 강아지야? 그렇다. 뉘 집 강아지인지 알면, 메이의 체형이 왜 그런지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빨간머리 앤> <사각사각>의 개그 만화가 김나경이다. 그녀의 주인공은 모두 그 체형이 아닌가? 자신이 직접 키우는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은 만화가만이 가진 특권. 김나경 역시 그런 특권을 내버리지 않고, 강아지 메이를 주인공으로 네칸 만화를 펼치고 있다. 전통적으로 만화가의 분신 역할을 해왔던 ‘보바’도 등장하고, 그 가족들까지 메이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나름의 활약을 펼친다. 뻔뻔하고 고집 대장인 강아지의 이야기가 만화의 주를 이루지만, 직접 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생활상의 지식도 담겨 있어, 육견(育犬)만화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물론 작가 특유의 앙증맞으면서도 시니컬한 개그 감각은 빠지지 않는다.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느끼는 ‘기쁜 절망감’이 유머로 승화되어 있다. 기억하세요? 똥닦는 고양이? <캣>(CAT) 강현준의 <캣>은 이미 한국 동물만화의 대표작으로 높은 명성을 떨쳐왔기 때문에, 그 지명도로 보아서는 새삼 소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근 애장본으로 발간되어 새롭게 소장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기에 한번 더 강조의 방점을 더한다. 한쪽으로는 고양이의 습성 깊숙이, 다른 쪽으로는 만화적 상상력의 극단으로. 이것이 이 만화의 숨어 있는 전략이 아닐까? 어벙벙한 만화가 K,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검은 얼룩 고양이가 만화의 주인공으로 여러 주변의 미스터리한 인물들과 어울려 예측 불능의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일상은 아주 리얼하고 쪼잔하게, 망상은 대단히 거대하고 과격하게 탁구공을 튀긴다. 강호의 무림 고수가 고양이에게 참패하고 마는 묘권(描拳), 고양이가 나무를 긁는 바람에 벌어지는 지구 종말의 아마겟돈과 같은 에피소드에서는 고양이의 능력을 가공할 정도로 끌어올리지만, 오징어 냄새나 낚싯대의 멸치만으로 인간에게 농간당하고 마는 고양이의 비참한 모습도 쾌활하게 묘사한다. <캣>은 현실파와 망상파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선상의 동물만화라 할 수 있지만, 고양이 자체를 과도하게 의인화하지 않고 주변의 세계가 알아서 고양이에게 종속되도록 하는 점이 절묘한 유머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최근 <납골당 모녀>에서도 컬트적인 개그 감각을 선보이고는 있지만, 강현준의 발랄한 유머가 깃든 고양이 만화를 계속 이어서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당근있어요? <센타로의 일기> 일러스트레이터인 주인공 바쿠가 미니 토끼인 센타로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이 아기자기하게 펼쳐진다. 작은 몸집이지만 타고난 건강 체질로 항상 이런저런 사고를 벌이게 되는 센타로. 처음에는 토끼에 대해 잘 몰라 허둥대던 바쿠도 점차 이 놀라운 가족에 적응해가게 되는데, 서로 다른 습성의 존재들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롭다. 만화 속에는 토끼 이외의 여러 반려동물들이 등장하는데, 토끼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의 에피소드가 특별히 재미있다. 고양이는 사냥을 통해 먹이를 섭취하는 육식동물로 이 작은 토끼 정도는 먹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름의 우정을 가지고 접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 그래서 고양이는 토끼를 보고 야성에 번뜩이며 ‘본능!’이라고 손을 내밀다가, ‘우정!’이라며 이성을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토끼 역시 인간의 꽁치를 훔쳐먹는 고양이를 보고 자신의 채식 습성에 대해 고민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만화의 여러 소재들이 ‘사고’ 혹은 ‘사건’과 연결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자기 몸이 아프면 동물들의 밥을 챙겨주지 못해 더욱 걱정이 되고, 동물들까지 아픈 경우가 없지 않다. 자신없는 사람들은 섣불리 동물 식구를 들이는 것보다는 동물만화로 만족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토끼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머가 유행했을 때 <당근있어요?>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나온 작품. 모두 24권으로 동물만화로는 거의 최장의 작품에 속한다. 싸워!… 아니 싸우지 마 <하얀 전사 리키> <이겨라 벤> 스페인에 가서도 동물 학대라는 이유만으로도 투우 보기를 극력 사양했던 나이기에, 이 만화들을 동물 애호인들에게 감히 권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것도 동물과 우리가 관계맺고 있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사실이다. <하얀 전사 리키>와 <이겨라 벤>은 투견을 소재로 하는 한·일 만화다. 두 만화의 성격은 아주 비슷하다. 둘 다 1970∼80년대 열혈만화의 분위기로 깊은 우정을 나눈 소년과 개가 투견에 도전하고 승리해가는 이야기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스파르타식 훈련이 벌어지고, 흡사 ‘마구(魔球)만화’를 보는 듯한 필살기가 펼쳐진다. 라이벌들 역시 만만치 않지만, 주인공은 여러 핸디캡을 극복하며 그들을 물리쳐간다. 인간의 전투 본능을 해소하기 위해 개를 내세우는 ‘투견’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그 처절한 과정에서 개와 인간이 나누는 우정만큼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투견장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면서도 싸움을 계속하는 개들,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항복의 표시를 하지 못하는 주인들. 적어도 이 만화가 추구하는 주제는 분명하다. 투견과 주인의 사랑과 우정이 담긴 관계가 아니면, 그들은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 반려견 흉포하다 <생각하는 개> 사실파의 동물 주인공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건방진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다. 현실 속에서는 약자인 동물 주인공이 만화를 통해 인간 머리 위에 설 때 생겨나는 유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만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하다. 다이몬지는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중년의 남자다. 직장으로 보자면 일류 출판사의 존경받는 편집장이며, 가정으로 보자면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딸로부터 알뜰한 사랑을 받는 가장이다. 그런데 비오는 밤 종이상자에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를 ‘완전한 선의로’ 집에 데려온 것이 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신장 85cm, 체중 83kg의 대형견으로 자라난 (그러나 아직도 자라고 있는) 개 몬지로는 마치 다이몬지의 권위를 깔아뭉개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듯 그를 무지막지한 발로 밟으려 하는 것이다. 반려동물은 작고 귀엽다는 이미지는 여기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인간의 덩치보다 클 뿐 아니라 때론 자신의 방식으로 인간을 속여먹을 정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은 어떤 방법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는다. 침실에서 아내의 옆자리를 빼앗고, 아끼는 잠옷에 초대형의 변을 보고, 암캐의 냄새를 맡더니 내 몸에 ‘마운트’까지 한다. 물론 다이몬지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귀엽고 큰 개일 뿐이다. 동물의 편애와 기만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을 이 만화를 통해 똑똑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의 사실파 동물 주인공들 미소년 아니면 누더기 견, 무엇을 키우시겠습니까? <무당 거미> <황금 박쥐> <토끼> <미운 오리 왕자님>의 공통점은? 제목과는 달리 동물 주인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만화라는 점이다. 반면에 만화의 전면을 장악하지는 않지만, 인간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모습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여주는 조연급의 주인공들이 적지 않다. 해롤드 사쿠이시의 <벡>은 록 뮤지션이 되고 싶어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제목과 같은 이름의 ‘벡’이라는 개가 등장한다. 온몸이 누더기처럼 기워져 있어 보기에도 불량스러워 보이지만, 주인공에게는 특별히 불친절하다. 야마시타 가즈미의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서는 유 교수와 고양이 타마와의 관계가 매우 독특하게 그려져 있다. 어쩌면 이 만화에서 유 교수와 가장 평등하게 맞서는 존재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 특히 타마가 사라진 뒤 그를 추적하는 미스터리극의 구성에서, 고양이가 이 집 저 집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서로 다른 존재로 행동해왔다는 점이 재미있다. 정준규의 <얼렁뚱땅 하이파이브>에는 주인공 소년이 ‘반찬이’라고 부르는 비루먹은 피학대 강아지가 나온다. 소년이 부르면 미친 척하는 등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가장 비열한 행동까지 감내해야 한다. 한국 전통의 강아지상이라고나 할까.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카오루의 일기>에 나오는 고양이도 카오루로부터 ‘건전지를 넣는 로봇’ 취급을 받으며 가벼운 학대를 당한다. 후루야 미노루의 <이나중 탁구부>에서 이자와와 마에노가 닭 대신 키우는 산체나 <너는 펫>에서 미모의 30대 전문직 여성인 스미레에게 사육당하는 미소년 모모 등 인간이지만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경우도 간혹 발견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한번쯤 이렇게 편안히 살아보았으면 하는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제 신랑입니다, 멋진가요? - <어린 신부> 촬영현장

17살 고딩 보은(문근영)과 24살 대학생 상민(김래원)의 좌충우돌 티격태격 결혼 이야기. 집안 대대로 내려온 약속 때문에 결혼한다는 다소 황당한 스타트를 한 뒤 해피한 엔딩을 장식할 영화 <어린 신부>는 가족을 모티브로 삼은 한국적 코믹멜로영화다. 새해 들어 처음 내리는 눈발이 점점 커져가던 늦은 오후, 화곡동에 자리한 경복여자정보산업고등학교 실내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난 네가 싫어. 나도 정우 오빠를 좋아한단 말야” 하는 보은의 친한 친구인 혜원(신세경)의 대사가 쥐죽은 듯 고요한 실내체육관을 가득 울리며 문근영의 난감한 얼굴이 카메라에 만족스럽게 잡힌다. 유부녀임을 숨기고 평소 흠모해왔던 정우 오빠와 사귀는 보은을 혜원이 질투하는 장면이다. 곧 김호준 감독의 “컷!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숨죽이며 멈췄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인다. 감독은 현장편집하는 컴퓨터 앞으로, 스탭들은 다음 신 준비하러 각자의 위치로. 문근영은 특유의 발랄한 에너지를 전파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닌다. 체육관 한켠에서 농구연습을 하던 김래원이 “자 이제 골인하면 돼. 한번이면 되나?”라는 감독의 말에 “저 3년 만에 농구공 잡아봤어요. 자신없는데요”라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카메라가 돌아가자 단 두번 만에 멋지게 골인을 시킨다. 겉으론 바람둥이처럼 보이나 실은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고 남자다운 상민의 캐릭터에 애착이 많이 간다는 김래원은 촬영이 끝나가면서 무척 아쉬워했다. 심지어 현장에 오면 행복했었다고. ▲촬영용 밑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는 문근영. 하다보니 너무 재밌다고. 영화 <편지> <산책>의 조감독이었던 김호준 감독은 <어린 신부>를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또 배우 몰입도와 스탭 참여도가 높아 생각한 대로 그림이 잘 나왔다며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크랭크업을 코앞에 두고 이제 마지막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어린 신부>는 (주)컬처캡미디어의 작품으로 3월 초쯤이면 그 베일을 벗고 보은과 상민 부부의 알콩달콩한 결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사진·글 오계옥 ▲ 두 주연배우들의 즐거운 한때. 실제로도 여동생이 있다는 김래원은 문근영이 마치 친동생처럼 귀엽다고. (왼쪽 사진) ▲ “이렇게 내가 툭 치면 그 다음에 네가 반응을 보여야지. 너무 빨랐어.” 신세경에게 친절한 연기지도를 하는 김래원. (가운데 사진) ▲ “아휴 이 커다란 천에 그림을 다 그리라구∼.” 난감해하는 문근영. (오른쪽 사진) ▲ 배우들에게 한두 마디 툭 던져주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든다는 김호준 감독. (왼쪽 사진) ▲ 신나야 할 체육시간. 보은과 혜원은 심각하다. 학교의 킹카 정우 오빠를 사이에 두고 보은과 혜원이 갈등을 보이는 장면. (오른쪽 사진) ▲ “아니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그렇지. 그래 바로 거기야.” 촬영지점을 정해주는 서정민 촬영감독의 말에 “예”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문근영. (왼쪽 사진) ▲ 오케이 사인이 나자 얼른 컴퓨터 앞으로 집결해 꼼꼼히 체크하는 두 배우. (가운데 사진) ▲ 하하호호. 현장에서 사귄 친구들과 한 게임하며 즐거워하는 문근영. (오른쪽 사진)

기이한 로맨틱코미디, <안녕! 유에프오>

전화상담원이자 시각장애인인 경우(이은주)는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차인 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구파발의 한 동네에 세를 얻는다. 같은 동네엔 그녀가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타고 오는 154번 막차버스의 운전기사 박상현(이범수)이 살고 있다. 상현이 우연히 경우를 도와준 것을 계기로 그 둘은 점점 가까워지게 된다. 영화는 이후 행복한 순간들, 위기 그리고 화해와 결합이라는 수순을 착실히 밟아간다. 물론 다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여하간 이 익숙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감동을 끌어내기 위해 <안녕! 유에프오>는 몇 가지 부가적인 설정들을 덧붙이고 있다. 먼저 시각장애인인 경우는 어린 시절 딱 한번 자신의 두눈으로 세상을 본 적이 있다(혹은 그런 적이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그것이 돌연 자신의 앞에 나타났던 UFO 덕택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29살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간직된다. UFO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경우의 믿음은 급기야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전염되어 작은 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UFO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경우 그 자신이며, 결국 그 UFO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은 당연히 상현이다. 영화 초반에 경우는 헤어진 연인을 향해 잠결에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듣고 있는 이는 사실 상현이다(이는 분명 수신인에게 정확히 전달된 메시지이기는 하지만 그 함의가 너무 뻔한 까닭에 관객의 입장에선 별로 매력적인 대사는 되지 못한다). 경우는 29살이 된 지금까지도 UFO의 존재를 믿으며 다시 한번 보길 간절히 기다린다. 한편 버스기사 상현에게는 별다른 취미가 하나 있다. 바로 밤마다 자신이 DJ가 되어 <박상현과 뛰뛰빵빵>이라는 ‘짝퉁’ 교통방송을 녹음한 뒤 막차 손님들에게 틀어주는 것이다. 경우가 이 녹음된 방송을 관심있게 듣는다는 걸 깨닫게 된 뒤로 상현의 방송은 점점 그녀를 향한 남모를 연애편지가 되어간다(이를테면 그녀가 관심있어 할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방송을 구성하는 식이다). 문제는 자신이 버스기사라는 걸 밝히길 꺼려하는 상현이 경우에게 자신을 동네 전파사 ‘오너’인 박평구로 소개함으로써 생겨난다. 항상 제 시간보다 늦게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는 바람에 원망을 사는 154번 막차 버스기사, 새로 이사 온 동네에서 사귄 친절한 동네친구 박평구, 밤마다 귀가버스 안에서 듣는 교통방송의 DJ 박상현, 이 세 몫의 일을 감당하게 된 상현은 때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예컨대 경우가 ‘짝퉁’ 음악방송 DJ에게 자신의 사연이 적힌 편지를 적어 우체통에 넣는 것을 본 상현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섭게 우체국으로 달려간다. 따라서 <안녕! 유에프오>의 서사적 종결의 순간이 경우가 마침내 UFO를 보게 될 때(그리하여 다시 한번 세상을, 그리고 비로소 상현의 얼굴을 보게 될 때)이자, 상현이 자신의 정체를 경우에게 밝히는 때가 될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다. 아쉬운 것은 그 순간이 다가오기까지 <안녕! 유에프오>가 별다른 흥미로운 사건들의 연쇄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데서 기인한다. 나름대로 개성을 지닌 동네 사람들, 경우의 직장동료, 그리고 상현이 어린 시절 만났던 가수 전인권- 전인권 자신이 직접 연기했다- 등 제법 많은 수의 조역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찰나적이고 일회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서사적으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하는, 혹은 고작해야 방해가 될 뿐인 단순한 ‘끼어들기’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결국 <안녕! 유에프오>는 코믹함에 대해서는 로맨스가 로맨스에 대해서는 코믹함이 방해가 되는 기이한 로맨틱코미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경우가 보내는 사연엽서를 받기 위해 상현은 아침부터 우체국을 향해 달려간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매개를 통해 시각장애인 여성을 향한 사랑을 키워나가는 ‘순진무구한’ 남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언뜻 한국영화 <후아유>- 여기서는 인터넷이 매개가 되며, 여자주인공은 시각장애인은 아니지만 남자주인공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탓에 사실상 그 둘의 관계에 있어서는 거의 봉사나 다름없다- 나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같은 영화들을 부분적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안녕! 유에프오>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 3명의 작가가 투입된 영화치고는 긴장이 떨어지고 짜임새도 허술하기 그지없다. 영화 말미에 경우에게 아무리 유치해 보이고 바보 같아도 자신의 말은 진심이라고 외치는 상현의 모습을 볼 때는 꼭 그게 이 영화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자기지시적 발화처럼 들리는 탓에 쓴웃음밖에 안 나온다. 진심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써먹는 게 아니다. 그 말이 자리를 잘못 찾은 순간엔 정말이지 모든 게 바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U F O 를 믿 으 십 니 까 - UFO 혹은 외계인에 관하여 UFO 혹은 외계인을 만난다는 건 적어도 영화 속에서라면 드문 일은 아니다. 그것은 로버트 와이즈의 <지구가 멈추던 날>에서처럼 공포를 유발하는 일일 수도, 혹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제3종 근접조우>나 론 하워드의 <코쿤>에서처럼 구원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물론 <안녕! 유에프오>는 후자쪽에 가까운 영화다). 좀더 흥미롭게는 일종의 계시적 존재로서의 UFO를 통해 오스카 와일드의 탄생을 성서적이고 신화적인 시공간에 위치시키고 있는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 같은 영화를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여하간 여전히 UFO의 존재는 ‘믿거나 말거나’식의 논의 이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혹시?’라고 생각하며 <안녕! 유에프오>의 여자주인공 경우와 같은 희망을 품고 있는 이들이라면 (문명화된) 외계생명체가 존재할 확률에 관심을 가져보았을 법도 하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전파천문학자 프랭크 드레이크는 유명한 ‘드레이크 방정식’이라는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 방정식은 의외로 합리적이고 단순한 편인데, (특히 전파통신이 가능한) 외계문명의 수는 다음과 같은 변수들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명화된 생명체의 발달에 적합한 별(항성)의 생성비율, 이들 별이 행성을 지니고 있을 확률, 한별에 딸린 행성들 가운데 지구와 같은 행성의 수, 이 행성에서 생명체가 탄생할 확률, 이 생명체가 문명화된 생명체로 진화할 확률, 이 지적생명체가 외부에 자신의 존재를 알릴 전파통신기술을 갖고 있을 확률, 마지막으로 이 문명이 존속할 수 있는 기간이다. 계산의 결과값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어찌 되었건 0이 되지는 않으니, UFO 찾기에 도전해볼 만하겠다고? 이때 한 가지 유의할 점, 드레이크 방정식에는 문명화된 생명체가 행성간 (혹은 항성간) 여행이 가능한 UFO를 발명할 확률은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그걸 고려하면 UFO 찾기란 거의 하늘에서 별따기만큼이나 힘들다고 하겠다. 결론은? UFO의 출현은 영화에서 ‘기적’의 순간으로 간주되기에 아직까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거다.

피는 물보다 ‘징’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피는 물보다 ‘징’하다. KBS2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는 징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다. 이 집안의 내력은 아버지 김두칠(주현)이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타박하는 대사에 요약돼 있다. “집안꼴 잘돼 간다… 큰 딸년은 이혼하고, 둘째 딸년은 천하에 저밖에 모르게 키우고, 아들놈은 주먹질이나 해서 감방 들락거리고…. 애미가 돼가지고 밥만 잘하면 뭐해….” 참, 이토록 당당한 아버지는 젊은 여자하고 바람나서 딴살림을 살고 있는 중이다. 피가 물보다 ‘징’하지 않을 수 없는 내력이다. 이 콩가루 집안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지켜온 것은 억척스러운 큰딸과 바보 같은 어머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바보 같은 여자’들에게 바치는 꽃다발이다. 어머니 이영자(고두심)는 가족들에게 ‘바보 같은 사랑’을 베푼다. 남편이 가정을 버려도,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베풀고 또 베푼다. 어머니에게는 오직 그 사랑만이 ‘내가 사는 이유’다. 큰딸 미옥(배종옥)은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라는 처연한 자문 대신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간다. 이토록 비현실적인 ‘설정’을 노희경은 가슴에 와닿는, 눈물을 빼내는 이야기로 만든다. 하긴 우리 현실이, 우리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그토록 비현실적인 탓도 크다. 물론 가시없이 폐부를 찌르는 대사와 오버하지 않고 허를 찌르는 설정도 죽인다. <꽃보다 아름다워>에는 노희경표 가족드라마의 몇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우선 노희경의 가족드라마는 ‘성차별적’이다. 그는 아버지 세대와 딸 세대의 남녀 캐릭터를 설명하는 데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의 드라마에서 아버지 세대의 남자들은 대개 강하다. 그들은 그 강인함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가족들을 버린다. 남자들의 강인함은 폭력에 가깝다. 아버지 김두칠이 그러하다. 반면, 그 세대의 어머니들은 대개 연악한 존재들이다. 딸 세대로 오면 남녀 캐릭터는 뒤집어진다. 딸 세대의 여성들은 강하다. 그들은 그 강인함으로 버림받은 가족들을 추스르고 먹여살린다. 미옥의 예가 그러하다. 반면 남성들은 허약한 존재들이다. 미옥의 동생 재수(김흥수) 등이 그러하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여성 친화적이어서, 매우 성차별적이다. 이 엇갈린 시선에서 나쁜 남성 가부장과 착한 여성 가부장이라는 이중권력 상황이 나오고, 두 가부장의 충돌은 드라마의 한축을 이룬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는 제삿날, 두 가부장이 상을 엎으며 싸우는 장면에서 이런 갈등이 드러난다. 노희경의 여성관은 촌스러운 구석도 있다. 노희경은 사랑받는 여자란 모름지기 ‘살갑고 여우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니가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애교를 떨었으면 미쳤다고 내가 나가서 사느냐”고 쏘아대는 장면이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자기변명 속에도 묘한 진정성이 담겨 있다. 그의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버림받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곰 같거나 드세거나 그렇다. 그래서 노희경의 여성관은 답답한 구석도 있다. 그런데 이 답답한 여성관이 짜증나지가 않는다. 그 착한 여자들을 보고 있지만, 나도 절로 착해져서 그 여자들과 함께 울게 된다. 아버지가 다녀간 날, 어머니가 혼자 거울 앞에서 “여보, 내가 그렇게 여자 같지 않았어? 나도 이쁘게 웃을 수 있는데…”라고 처연하게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짓지 않을 수 없다. 시아버지 제삿날, 남편과 자식들이 대거리를 하지 않을까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착한 여자를 연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여자를 생각하면 자꾸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물이 고여서 글을 써내려 가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요일 저녁, 회사에서 인터넷으로 이 드라마를 보면서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엄마랑 놀아줘야겠다’, ‘혼자 계신 어머니한테 남자친구라도 소개시켜줘야겠다’는 반성과 다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 드라마 홈페이지에 떠 있는 “‘공영’ 방송 드라마로서 역할을 다하겠다”는 제작 취지가 십분 만족된 것이다. 어머니 있는 자, 수요일과 목요일 밤 10시면 <꽃보다 아름다워>를 틀어라! 추신. 친구가 아프리카로 떠난다. 아프리카 오지의 에이즈병원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러 간다. 그 친구는 아주 뛰어난 동성애자인권운동가다. 그는 오래전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했지만, 가족의 강권으로 결혼까지 해야 했다. 인권운동하는 놈이 ‘오죽하면’ 결혼까지 했겠는가? 그 친구도, 그 친구의 어머니도 모두 가련한 피해자들이다. 가해자는 없는데, 피해자의 신음소리만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것이 이땅의 가족주의다. 기가 막힌다. 내일이면 친구가 떠난다.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신윤동욱/ <한겨레>기자 syuk@hani.co.kr

세신버팔로, 강제규필름ㆍ명필름과 기업결합

영화 <쉬리>(사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필름(대표 최진화)과 <공동경비구역 JSA>, <바람난 가족>의 ㈜명필름(대표 심재명)이 국내 최대의 수공구 제조업체인 ㈜세신버팔로(대표 김문학)와 기업결합을 선언했다. 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은 26일 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인 세신버팔로와 계약을 맺고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오는 4월 주식교환이 완료되면 세신버팔로는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의 영문 이니셜을 딴 ‘MK버팔로’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동시에 기존의 제조업과 신규 영화사업을 아우르는 문화콘텐츠 기업으로 변신하게 된다. 강제규필름의 대주주인 강제규 감독, 명필름의 대주주인 이은 감독과 심재명 대표는 MK버팔로의 지분 가운데 각각 10.8%, 9.94%, 6.54%를 보유하게 되며 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은 MK버팔로의 100% 자회사가 된다. 세신버팔로는 신주를 발행해 강제규필름 주주들에게 주당 1.8567주, 명필름 주주들에게 주당 4.2197주를 배정하는 방식으로 기업결합키로 26일 이사회에서 결의, 이러한 내용을 27일 공시했다. 이들 3사의 기업결합 결의에 반대하는 주주들은 3월 9일부터 28일까지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주당 매수청구가격은 세신버팔로 1천764원, 강제규필름 1천230원, 명필름 2천956원이다. 세신버팔로는 오는 3월 9일 기업결합 승인을 위한 임시주주총회를 여는 데 이어 4월 10일 주식교환을 완료할 예정이다. CJ엔터테인먼트, 시네마서비스, 싸이더스 등 영화 배급사나 제작사가 코스닥에 상장된 경우는 있지만 영화사가 증권거래소 시장에 진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명필름의 박신규 경영지원실장은 "안정적인 투자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시너지 효과를 꾀하기 위해 기업결합과 우회상장을 결정했다"고 설명한 뒤 "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이 각기 지닌 기획, 제작, 마케팅 등의 강점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인력 교류와 시나리오 공동개발 등 활발한 협력사업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데뷔 20주년 재일교포 영화감독 최양일 회고전

1980년대 이후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통해 일본영화의 한켠을 채워오고 있는 최양일 감독의 회고전이 2월3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고등학교 시절 조명부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최양일은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83년작 로 데뷔하면서 최양일식 하드보일드의 신호탄을 터뜨렸다. 그후 최양일은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꽃의 아스카 조직> <막스의 산> 등에서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이어갔고,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헤이세이 무책임 일가, 도쿄 디럭스> <개 달리다> <형무소 안에서> 등에서는 블랙코미디를 덧붙여갔다. 하드보일드와 블랙코미디에 같은 무게의 관심을 보이면서(동시에 핑크영화의 맥락을 희미하게 유지해가면서), 최양일은 ‘기타노 다케시가 정적이라면, 최양일은 동적’이라는 평을 얻기도 한다. 주제 측면에서 국내에 익히 알려져 있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개 달리다>를 통해 재일한국인이라는 그의 소수민족 정체성이 두드러지게 특징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최양일은 초기작부터 끊임없이 일본 내 주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사회현상에 카메라를 들이대온 감독이다. 때문에 그의 영화 속에는 집단과 개인의 관계, 마이너리티 집단의 생존문제, 세대 격변에 따른 간극 현상, 문화와 민족의 다종성이 갖는 낯섦 등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들로 가득하다. 총 14편의 영화 중, 이번 회고전에 상영될 작품은 모두 10편이며, 6일에는 영화평론가 김영진씨가 강연을 한다. 데뷔작 부터 최근작 <형무소 안에서>까지 10편 상영 20년이 다 돼도록 순찰 주임만 하고 있는 말단 경찰관이 빚 독촉을 못 이겨 은행을 털게 된다는 1983년작 는 최양일이 일본사회에 던진 첫 번째 질문과 스타일이다. 한 평범한 경찰관이 미치광이 범죄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차갑게 바라본다. 1984년작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다>는 아카가와 지로의 미스터리소설을 각색하여 만든 소녀판 하드보일드영화이다. 아버지의 실종으로 인해 사건에 끼어들게 된 한 소녀가 일상에 숨겨진 진실들을 마주하면서 성장해간다. 1985년작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는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최양일의 첫 번째 작품이다. 오키나와의 작은 항구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의사가 악덕 건설회사와 그에 결탁한 부패 형사를 상대로 정의의 싸움을 벌인다. 기타가카 겐조의 동명소설을 각색했다. 다카구치 사토스미의 만화를 영화화한 1988년작 <꽃의 아스카 조직>은 뉴 가부키 타운의 두 거대조직이 지배권 쟁탈전을 벌인다는 설정하에 주인공 아스카가 복수극을 펼쳐나간다는 내용이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영화이다. 1989년작 〈A샤인 데이즈>는 일본내에 뿌리박힌 미국 문화를 들여다본다. 록 가수가 꿈인 에리는 오키나와의 미군 전용 클럽 밴드의 일원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점점 더 피폐해져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만 간다. 〈A샤인 데이즈>는 오키나와의 1968년에서 1975년까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1993년에 최양일의 대표작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가 만들어진다. 제일한국인 택시기사와 필리핀계 여인 코니를 주인공으로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마이너리티의 삶을 코믹하게 반영한다. 1995년작 <헤이세이 무책임 일가, 도쿄 디럭스>는 아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온 가족이 도쿄를 헤집으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영화이다. 최양일은 예민한 사회적 문제에서 잠시 뒤로 물러나 한 가짜 집단의 코믹함을 통해 따뜻함을 선사한다. 1995년작 <막스의 산>은 다시 한번 녹슬지 않은 최양일식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주제의식을 선보이고, 1998년 <개 달리다> 역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의 스타일을 넓혀 아시아적 관계를 고찰한다. 2002년 최양일의 최근작 <형무소 안에서>는 실제 감옥생활을 그린 만화를 각색하여 만든 영화이다. 바깥 세상보다 더 평온한 감옥생활이 등장해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 10편의 영화가 이번 회고전을 통해 최양일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추천작4편 10층의 모기 1983년/ 컬러/ 108분 최양일의 데뷔작. 20년 가까이 승진하지 못하고 말단에 머물고 있는 경찰관은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딸에게는 무시당한다. 매달 마련해야 할 위자료와 양육비에 허덕이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모터보트 경기에 내기돈을 걸게 되고, 거기에서 날린 돈을 채우기 위해 고리대금업자를 찾는다. 빚은 쌓여가고 고리대금업자들은 경찰서에까지 찾아와 그를 협박한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결국 경찰관은 반 미쳐 있는 상태로 우체국에 난입하여 돈을 강탈한다. 사회의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변두리로 밀려나고야 마는 경찰관 역을 70년대의 록스타 우치다 유야가 맡았다. 모터보트 경기장의 바람잡이로 별안간 등장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카메오 출연도 흥미롭다. 무력함으로 시작하여 잔혹함으로 끝나는 하드보일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1993년/ 컬러/ 109분 재일한국인 강충남은 그의 학교 동창 세이이치가 운영하는 택시회사에서 기사 노릇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간다. 오직 여자에게만 인생의 에너지를 쏟는 충남은 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코니라는 필리핀계 여성을 만난다. 충남이 코니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동안 회사는 부도가 나고, 택시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즈음 충남과 코니의 관계도 악화되어가고 코니는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양석일의 <택시 광조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해 <키네마준보> 1위를 차지하면서 최양일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알렸다. 하드보일드 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던 최양일은 사회에서 알아주지 않는 하층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일본의 현재를 비추는 블랙코미디를 만들었다. 막스의 산 1995년/ 컬러/ 138분 도쿄의 어느 길거리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그 즈음 법무성 형사과장이 살해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 사건의 수사에 참여한 아이다 형사는 뭔가 연관성을 주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내부의 알력관계 때문에 아이다는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 연쇄적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들이 곧 과거 학생운동 내의 파벌싸움에서 시작된 피의 진혼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오키 문학상을 수상한 다카무라 가오루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막스의 산>은 최양일의 돌아온 하드보일드이다. 최양일은 과거의 죄와 현재의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꼼꼼하게 역사와 스타일을 접목시킨다. 아이다 형사 외에도 여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사건의 숨은 진면목으로 관객을 이끈다. 개 달리다 1998년/ 컬러/ 110분 신주쿠 경찰서 소속 나카야마, 그리고 그의 재일한국인 정보원 히데요시(수길)는 중국 상하이 출신 모모를 동시에 좋아한다. 히데요시의 고향 후배이자 폭력조직 애호파의 두목 곤도(호남) 역시 모모를 좋아한다. 어느 날 모모가 곤도에게 살해당한 뒤 히데요시는 살인죄의 누명을 뒤집어쓰고 경찰과 곤도 일행에게 동시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제목 그대로 모두 ‘개’ 같은 삶을 살아간다. 살인, 마약, 매춘 등이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대변한다. 사회가 주시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들이 쫓고 쫓기며 미치도록 신주쿠를 달린다. 그러다가 영화는 아시아인의 삶과 웃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최양일의 사회적 탐문이면서 스타일적 혼합이기도 한 대표작. 상영시간표 일시 : 2월3일(화)~ 2월8일(일) / 장소 : 서울아트시네마 / 1회 관람료 : 6천원(강연 무료) 문의 : 문화학교 서울 01-743-6003 www.cinephile.co.kr 서울아트시네마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이소룡 세대의 교실이데아, <말죽거리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 시인 유하에서 감독 유하로 “시는 변방으로 귀양가버린 노래, 그리고 그 변방 중의 변방에 있는/ 나의 말을 나는 사랑한다.” 가장 최근 시집에 피력된 시인 유하의 뼈저린 자기 긍정이다. 그러던 그가, 변방 중의 변방인 한국 시로부터 중심 중의 중심을 욕망하는 한국영화로 한눈을 팔았다. 그것도 남의 소설을 밑천으로 모든 기혼자를 미치광이 삼으며. 나름대로 성공한 재기작이었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하지만 90년대 문학을 쇄신한 그의 시에 비하면 범작이었다.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영화계의 탕아가 아니라, 잠시 변방에서 외도한 가출 시인이었다. 한데 가속도 붙은 차기작 <말죽거리 잔혹사>는 가출이 출가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전한다.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 밖에서 서성이는 시가/ 언젠가는 다시 카니발의 아침을 열리라” 장담하던 시인 자신이 이미지의 카니발을 열려 한다. 유하는 제2의 이창동이 되려는 걸까? 이건 영화팬에겐 축복이지만, 시인 유하의 팬에겐 ‘배신이야 배신’이다. 청춘이 부닥친 벽과 분루를 거의 최초로 되살려내다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의 시에 트라우마처럼 조각나 있던 ‘세운상가 키드’의 자화상을 복구한 유하만의 영화다. 그는 어쩜 이 영화를 찍으려고 청춘을 보냈을지 모른다. 시인의 이 전사(前史)는 고로 그의 시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배태하는 영화다. 어찌 보면 뒤늦게 도래한, 이미 나왔어야 할 영화. 이런 시차는 <정무문>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이소룡 세대에 바치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반복된다. 유하 세대는 한국의 첫 대중문화 세대지만, 이 세대성은 신세대와 N세대가 한바탕 스크린을 휩쓴 뒤에야 영화화된 셈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과거 소환 경향에 비춰보면, 이 뒤늦은 부활은 억압된 것의 회귀와도 통한다. 가령 압구정동 오렌지한테 대중문화는 억압과 무관했고, 유하 역시 키치의 분방함으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찍은 바 있다. 그러나 유신체제로 멍든 70년대의 대중문화는 등록 거부된 해적판들로 존재하기 일쑤였다. 대중문화 자체가 체제와 전선을 긋는 마당이니, 가장 폭압적인 제도에 속한 고등학생에겐 삼류극장의 액션스타가 해방의 영웅인 게 당연했다. 70년대 ‘고딩’ 대중문화 세대는 80년대 ‘대딩’ 386세대보다 훨씬 순수하지만 무력한 문화적 방식으로, 반체제의 전투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래서 적잖은 유머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정공법으로 시대와 마주한다. 연배상 386이지만, 유하는 80년대에 착목한 386감독들과 다르게, 그 이전의 청춘이 부닥친 세상의 벽과 그 앞에서의 분루를 거의 최초로 되살려낸다. <바람부는…>의 한 대사는 여기서 꽤 시사적이다. 감독의 분신인 주인공 시인은 말한다. “미친 세상에 살려면 미친 세상보다 더 미친 광인이 되거나, 미친 세상과 무관한,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거나.” <바람부는…>의 시인은 오렌지족이 내다버린 순정을 지닌 거지가 되려 했다. 포스트모던 풍자시를 난사하긴 했어도 유하의 시적 고향은 ‘하나대’로 불린 서정적 전원이었듯, 그의 마음 바탕은 여성성으로 가득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도 순정파 서정시인이었다. 꽃 장식한 라디오 엽서로 <원 서머 나잇>의 ‘필링’을 전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통기타를 연습하는 대중문화 세대. 그러나 학교는 낭만을 불허했다. 교장 차 뒤꽁무니에 ‘충성’을 외치는 그곳은 법의 이름으로 폭력이 하달되는 저질 군대와 다름없다. 선생은 학생을 패고, 선배는 후배를 패고, 부모는 자식을 팬다. 동급생간에도 위계가 있다. 권력을 위임받은 깡패인 선도부는 학생들의 반감을 무력으로 앙갚음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선도부와 맞장뜬 뒤 자퇴하는 현수 뒤로는 ‘유신 교육의 심화’라는 학교 간판이 선명하게 잡힌다. 개발붐에 들어선 강남의 비리 사립고는, 근대화 빼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군부독제체제의 미친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폭발한다. 사랑이 불가능한 이 미친 세상은 그보다 더한 광기로만 견뎌진다. 타락한 방식으로 타락한 세상에 맞서기. 도색잡지 팔기와 ‘짤짤이’와 ‘삥듣기’에 골몰하는 것도 공부만이 합법인 체제를 벗어나려는 탈법의 몸부림들이다. 그 타락의 영토에선 성적순 대신 주먹순으로 자치권이 행사된다. 남성성이 위계화된 거기선 여자 앞에서 자해하며 사랑을 맹세하는 깡다구가 섬세한 진심보다 더 남자답고 멋진 섹스어필이다. 그러나 마초들의 무법지대 역시 군사문화의 왜곡된 하위체제일 뿐이다. 현수는 사랑을 재고품처럼 처분하려는 우식에게 처음으로 주먹을 날린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의 구원을 위해, 그는 누구보다도 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 광기의 도화선이 이소룡의 절권도다. 오직 이기기 위한 무도라 폄하되긴 해도, 절권도는 기존 무술의 정형성에 대한 해방의 선언이었다. 현수가 실천한 건 결코 법이 되지 않는 폭력의 진정성이었지, 아이들이 ‘똥폼’ 잡는 괴조음 스펙터클이 아니었다. 그래서 옥상 사투는 멋이 아니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처절함으로 베어든다. 법도 의리도 없는 이 개싸움은 우정과 규칙에 입각한 농구시합의 육체적 스펙터클을 그대로 뒤집는다. “쪽팔리면 학교생활 끝”이라던 우식은 쪽팔려서 학교를 떠난 마초일 뿐이다. 아름다운 의리 따윈 없다. 그게 현실이다. 현수는 이 모든 교실이데아의 ‘좆같음’을 일갈한 뒤, 승자의 권력을 버리고 학교를 떠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다. 로컬의 리얼리티, 변방성의 극점 78년의 대중문화는 결국 미친 세상을 잊게 하는 사랑의 묘약이었다가, 그마저 빼앗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된다. 이런 변화 덕분에 <말죽거리 잔혹사>는 판타지와 현실, 장르문법과 리얼리즘 사이를 줄타기한다. 사실 음악이나 미장센, 인물 배치와 갈등 구조는 관습적인 편이다. 하지만 쿨하게 끊은 편집과 미디엄숏 중심의 근접 촬영으로 거의 학교에 집중함에 따라, 영화는 70년대 한국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로컬의 리얼리티, 변방성의 극점으로 육박해간다. 그 변방성은 첫사랑의 상실만큼 쓰리고, 쓰림은 제도교육의 현실만큼 현재화된다. 이런 점에서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정직했던 학원물은 다른 상업장르에서도 드물었다. 정작 70년대 말은 <고교얄개>류의 건전 코미디뿐이었고, 80년대는 3S 열풍에 실린 스포츠만화로 묻혔다. 90년 무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이 이슈였긴 했지만, 제대로 된 도발은 서태지를 기다려야 했다. 90년대 후반부터의 ‘교복영화’들은 장르와 복고 코드를 하나씩 끼고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학교폭력, 삼각관계, 대중문화의 향수 등에서 <여고괴담> <친구> <화산고> <클래식> <품행제로> <해적, 디스코왕 되다> 등과 많이 겹친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파편적으로 건드린 한국 하이틴의 현실을 <말죽거리 잔혹사>는 코믹액션로망의 장르성으로 버무리면서도, 가장 전형적이고 전면적으로 갈무리한다. 이러한 현실 응시가 좀더 다각도로 투철했다면 싶지만, 감독 유하에겐 리얼리즘 소설가가 아니라 서정시인의 피가 흐른다. 아무리 현실을 정조준해도, 그는 과거가 아니라 “과거라는 고정관념을 추억”한다. 그것은 “낡은 만화책 냄새가 나는” “70년대의 객관적 상관물들”이자, “말죽처럼 짓이겨져 요약된 청춘”이다. 어떤 복고풍 영화보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과거를 되새김질한다. 하지만 <친구>식의 노스탤지어가 현재와 대비되는 ‘한때’의 순수를 장식적으로 만끽한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과거에서조차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헛것의 쓰라림으로 어른거렸을 뿐이라 말한다. 과거는 순수의 기원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흔적들이 퇴락한 유행가처럼 순수에의 환멸어린 욕망을 현재화한다고 해야겠다. ‘한때’가 남긴 유한성의 절실함, “그 ‘한때’라는 의미가 모든 종류의 유행가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추하는 복고의 극점에서 복고를 넘어서듯 집요하게 반복된다. 성룡의 세상이 왔어도, 현수의 몸엔 여전히 이소룡의 절실함이 내장돼 있는 것처럼. 고로 유하의 노스탤지어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얻지 못한 ‘한때’의 청춘을 이소룡 세대의 이름으로 호명하려는 시적 욕망에 가깝다. “나는 소멸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다.” 제도교육이 말소한 그 이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흔적을 통해 노스탤지어에 현재적 긴장을 불어넣는다. 1인칭 미소년의 마초되기 성장극 물론 한 시대를 갈음하는 영화니만큼 시대적 한계도 뚜렷하다.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폭력/사랑의 이분법은 남/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기대고, 속모를 여자는 전형적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다. ‘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내러티브는 1인칭 미소년의 마초되기 성장극에 머문다. 이건 거의 나르시시즘이다.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는 이소룡을 거울 삼아, 상투적인 몽타주로 자기 육체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공부 아니면 싸움이 인정투쟁의 전부였던 체제에선 여성성에 무지한 수컷들의 자기 강화만이 존재 증명의 길이었으니. 조폭영화와 복고영화는 양아치들의 한풀이성 욕설과 폭력으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체증 걸렸던 리비도의 폭주도 이제 한 챕터를 넘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마저 지나치게 손쉬운 재현술이 돼버린 탓이다. 현실은 아직 재현되지 않은 이분법 너머의 영역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한번 정리 안 하곤 못 배겼을 청춘의 몸살에 공감하게 만든 <말죽거리 잔혹사>는 또 나올 게 분명한 유하의 차기작을 기대케 한다. 게다가 그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미친 짓에 대한 이분법 탈피를 모색한 바 있다. 장르관습을 넘나들며 새로운 감성으로 한국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일은 유하 감독의 몫이 되기도 했다. 그의 시를 당분간 못 볼지 모르지만, 그의 영화에서 시적 자취를 찾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처음과 끝 두 단락 인용문은 유하의 시에서 따옴.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3]

카메라 밖을 기록한다 - 다큐멘터리 사진 김진형 In <태극기…> 촬영현장에 긴장만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슛’과 ‘컷’이 만들어내는 진공의 세계를 벗어나면 여백이 있다. 김진형(36)씨가 렌즈에 포착하고자 했던 것도 그것이었다. 장동건과 원빈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오지에서의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또 다른 카메라들이 배우들을 클로즈업하고, 제작과정을 따르는 동안 그는 여백을 쓸어담았다. 시나리오를 읽고나서 김씨는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묻힐 수 있는 디테일한 풍경들을 건져올리자는 것”을 컨셉으로 삼았다. 그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풍경뿐만 아니라 나름의 실험도 감행했다. 특수분장으로 만든 시체들을 실제상황처럼 찍어놓은 사진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인물의 경우 처참한 전투를 치른 생존자의 모습을 연출해 극대화하려 했다. 하지만 현장이 매번 그의 의도를 응원해주진 않았다. 4일을 기다렸던 최민식의 경우, 촬영 도중 총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곧바로 병원에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것. “한롤만 찍게 해달라”고 사정한 끝에 촬영에 들어갔지만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Before <태극기…> <라이프>를 들춰본 것이 화근(?)이었다. 생생한 사진들을 접하면서 그는 개안(開眼)했다. 아, 이게 진짜 세계구나. 신문사 사진기자 직을 내놓은 그는 곧장 사진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영화쪽 일을 하게 된 것은 학업을 마칠 무렵 오형근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영화 포스터 작업도 겸해왔던 스승을 따라 자연스레 충무로에 발을 딛게 됐다. 이후 〈H〉 <오구> 등에서 스틸 작업을 했다. My hope is… 그는 작은 규모의 코미디나 멜로영화 또한 제작현장의 구석구석을 잡아낸 기록사진이 필요하고, 이를 책으로 묶어내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수요가 없겠지만, 해외 마케팅에서는 2배의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SOME〉의 스틸을 담당하고 있는 그는 시간을 쪼개 2년 전부터 찍어온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공간 사진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조만간 이주노동자들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사전 조사작업에 들어갈 예정. 걸어다니는 총기사전 - 총기 전문 이주환 In <태극기…> 이주환(31)씨는 애초에는 제작부에 지원했다. 전쟁영화니만큼 꼭 참여하고 싶었다. 그런데 떨어졌다. 화기(火器)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마침 소품팀원을 구한다는 공고가 났다. 다시 응했고 이번엔 붙었다. 총에 대한 그의 유별난 애호와 지식은 금세 소문이 났다. 결국 원했던 제작부에 배치되어 총기를 담당하는 보직을 얻었다. 현장에서 그가 다뤘던 총은 진짜만 14종, 42정.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관총 등 소대별 중화기 배치까지 맡았다. 평양 전투장면에서 중화기로 무장한 인민군에 비해 진격해 들어간 국군의 화기가 딱총이 전부인 것을 확인하고서는 ‘저건 말이 안 된다’ 싶어 바쁜 강제규 감독 몰래 단역배우들에게 중화기를 쥐어주기도 했다. 예고편에서 뿜어져나오는 중화기를 보고서는 인정받은 듯해 뿌듯했다고. 반면, 이 장면 촬영이 끝나고서 MI 소총 한 자루가 분실되어 찾느라 혼쭐이 나기도 했다. 탄알이 장전된 상태인 중화기를 돌보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단역배우 중 누군가 예비군 기질을 발휘하여 어딘가에 총을 놓고 퇴장한 것이 화근이었다. 수입한 총기 관리 규정상 분실시 누군가는 감방에 가야 하는 상황. 2만평 부지의 세트를 샅샅이 뒤지다 이튿날 아침에서야 발견하고서 가슴을 쓸어내렸다는. Before <태극기…> 총기의 경우 제원은 물론이고 기능과 효과까지 달달 외우는 박사 수준이지만 정작 그는 몸무게 초과로 군면제를 받았다. 7살 때 샘 페킨파의 <크로스 오버>를 보고서 넋이 나간 뒤 중·고등학교 시절은 도서실에서 미군 군사 교범까지 독파하며 보냈다. 메카트로닉스(산업용 로봇 제작)를 대학에서 전공한 그는 한동안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지니고 있던 역마살을 주체하지 못해 뛰쳐나와 서울예술대학 영화과에 다시 입학했다. 10년이나 어린 동생들과 대학을 다니던 시절, 평소에도 철모 쓰고 워커 신고 다니는 기행을 벌여 눈길을 끌었을 정도다. My hope is… 소품용 수류탄에 제조 넘버까지 일일이 각인하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는 그는 자신을 밀리터리 마니아로 만든 “힘에 대한 동경”을 발판 삼아 직접 전쟁영화를 연출해보고픈 소망을 갖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막힌 스탭들 [4]

106명 배우들의 생활 조련사-스케줄매니저 최지윤 In <태극기…> 현장에서 최지윤(26)씨의 별명은 ‘꼴통’. 워낙에 고집이 세고 하는 행동이 나이답지 않게 강단지고 야무진 까닭에 붙은 별명이다. 동시녹음기사와 “∼통!!” 하는 수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아침은 시작된다. 전날 감독과 조감독이 리허설을 통해 짜놓은 촬영일정을 이미 배우들에게 연락은 넣어놓았으니, 현장에 오면 속속 도착하는 배우들 의상부터 챙긴다. 아침을 굶은 배우들에게 배낭에서 각자 입맛에 맞는 부식거리를 꺼내 먹이는 폼은 얼핏 동물원의 노련한 조련사 같다. “배우들은 모두 예민한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다음 수순은 부상자를 살피는 일이다. 작은 상처는 상비 구급약으로 처리하고, 부상이 깊은 배우들은 메모지에 적힌 인근 병원으로 전화를 돌려 왕진을 부탁하거나, 병원까지 직접 후송한다. 이제 쉬는 시간이다. 커피를 조르는 배우들에게 한방차, 율무차를 지급하고, 특히 골초배우들에겐 복숭아홍차로 목을 달래준다. 워낙 피로에 찌든 배우들은 단맛나는 건 뭐든지 OK. 초콜릿, 껌, 사탕이 신나게 팔릴 시간이다. 배낭은 비어가고(간혹 스탭들에게 털리기도 하며), 촬영지의 짧은 해가 저문다. 숙소에 배우들을 재우고, 다음날 일정을 정리하여 매니저들과 통화하고 나면 그녀의 육신이 위로받을 차례가 온다. 그녀의 직함이 뭘까? 고정 대사가 있는 86명을 포함, 106명의 주·조연배우들의 스케줄을 책임지는 스케줄매니저. 우리나라엔 처음 수입된 직함이다. Before <태극기…> 고등학교 연극부에서 연극 연출의 꿈을 키웠다. 반대하는 부모님에게는 ‘60개년 계획’을 정리해 보여드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중, <블루>의 연출부였던 친구가 새로운 작품에서 스케줄 매니저로 함께 일하자고 제안. 막상 <태극기 휘날리며>가 시작되고 한달 뒤 그 친구는 그만두고, 그녀 혼자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My hope is… 처음 발을 들인 영화계에서 사람 관리하는 게 어느 정도 자신의 성격과 맞다고 판단한 그녀. 나중 목표는 정부나 기관으로부터 투자받아 근사한 연극 하나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다. 연출을 위해서는 배우와 시스템 모두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주어지는 일들은 모두 경험해볼 생각. 예의 그 무시무시한 자신감으로 말이다. “지구의 자전으로 제가 도는 게 아니라 저로 인해 지구가 돈다고 생각해요. 꼴통, 파이팅!!!” 맥가이버 혹은 순돌이 아빠 - 특수촬영기사기 송선대 In <태극기…> ‘충무로의 맥가이버’ 송선대(34)씨의 눈썰미는 아무도 못 말린다. 팽이의 원리로 진동을 억제하는 스카이캠(헬기 등에서 아래의 전경을 찍는 카메라, 흔들림이 거의 없다)을 개발하고, 휴대폰 진동의 원리를 이용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뽀대나게’ 흔들리는 장면을 척척 만들어낸 건 빙산의 일각이다. 차량에 탈부착하여 달리기신부터 롤러 블레이드 경주신, 도로 추격장면을 찍게끔 만든 모빌캠의 경우, 진화를 거듭한 3기 모델이 등장했다. 얼마 전 개봉한 <터미네이터3>에 사용된 모빌캠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능을 갖췄다. 기존 할리우드의 모빌캠이 차량 앞뒤쪽에 거치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카메라를 부착한 것이라면 송씨의 모빌캠은 크레인에 카메라를 달아 상공 5m 높이의 플라잉신과 바닥에 달라붙는 신까지 한번에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했다. 초기개발비 1억원, 투자기간 1년이라는 시간이 한국의 특수촬영 지형을 360도 바꿔놓은 것이다. 송씨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전에 완성한 전기 자동차에 스테디캠(흔들림을 방지한 카메라)을 부착하여 좁은 골목과 보행신을 해결했고, 모빌캠으로 박진감 넘치는 전쟁 차량 이동신을 완성했다. Before <태극기…> 송선대씨는 원래 법학과 학생이었다. 제대한 뒤 방송에 뜻을 품고 97년 동아방송대학에 들어가 졸업 뒤 바로 KBS 보도국 VJ가 되었다. 절실함이 통했던 걸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방송기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송씨는 이제 충무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인물이 되었다. 그동안 참여한 영화로는 <가문의 영광> <마들렌> 〈2424〉 <밀애> <지구를 지켜라!>가 있으며, <지구…>에서 만난 홍경표 촬영감독이 <태극기 휘날리며>에 송씨를 천거했다. My hope is… 송씨의 꿈은 충무로에 산적한 촬영 기술들을 하나로 연결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기술만 놓고보면 할리우드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기술들이 쌓이지 못해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영상산업의 발전과 더불어 기술의 축적을 이뤄낼 그의 바람이 다부지다. 현재 그는 <라이어> <범죄의 재구성> 〈SOME〉에 참여 중이다.

개봉 연기 끝낸 <8명의 여인들>

지난해 초 개봉예정이었으나 큰 영화들의 등쌀에 여러 번 개봉이 연기됐던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이 1년여 만에 개봉한다. 프랑스 영화계의 유망주인 오종은 국내의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여러 번 작품이 소개돼 젊은 관객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감독. 지난해에는 그의 최신작 <스위밍 풀>이 개봉됐다. 은 일단 출연진 목록이 화려하다.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에마뉘엘 베아르, 그리고 최근 개봉한 <피터팬>에서 팅커벨로 분한 루디빈 사니에르 등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프랑스인들을 사로잡아온 스크린의 뮤즈들이 모두 모인다. 이 목록은 불과 삼십대 초반의 오종 감독이 프랑스 영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를 보여준다. 폭설로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성탄절 아침, 아버지 방에서 하녀 루이즈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온다. 달려간 식구들은 등에 칼이 꽂인 채 싸늘하게 식은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다. 경찰에게 연락도 할 수 없는 고립 속에서 하나의 단서만이 사건의 실마리를 던진다. 밤새 개들이 짖지 않았다는 것. 범인은 낯선 인물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 곧 남자의 아내와 두 딸, 장모와 처제, 여동생, 그리고 두 명의 하녀 가운데 한 명, 또는 여러 명이 되는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쥐덫>에서 영감받았을 법한 범죄 스릴러이지만 악동으로 소문난 오종은 여기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1950년대 할리우드 뮤지컬의 과잉된 분위기를 덧입힌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뭔가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는 순간 배우들은 태연하게 일어나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진행되는 거실은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도록 평면적으로 꾸며져 있으며 원색이 두드러지는 배우들의 옷차림도 의상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연극적 요소 가운데 하나다. 고립된 집 아버지 죽인 범인은? 드뇌브·위페르등 연기 돋보여 영화는 살인범을 찾는 것처럼 집안의 곳곳을 지만 여기서 정작 드러나는 것은 숨겨진 가족사의 비밀이다. 지난 밤 아버지의 방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동업자와 바람난 엄마의 결별 통고와 어린 딸의 임신 소식, 처제의 사랑고백 등 대형사고가 시간대별로 터져나왔던 것. 여기에 여인들의 묘한 알력과 갈등 속에서 근친상간, 동성애 등 오종 감독이 애착()을 보여온 주제들이 수면 위로 슬그머니 떠오른다. 이야기도 매력적이지만 역시나 명배우들의 빼어난 앙상블 연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드뇌브의 우아함와 위페르의 냉철함이 코미디 속에 크림처럼 녹아들어 상큼하고 달콤한 맛을 자아낸다. 13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