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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4)

[OBITUARY] 알랭 들롱 (Alain Delon, 1935~2024) 부고, 태양을 닮은 매혹

영화 <하프 어 찬스>(1998)를 촬영하던 시기에 알랭 들롱은 60대 초반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인 파트리스 르콩트는 촬영 중 있었던 일을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네사 파라디 때문에 사람들은 동요했다. 장폴 벨몽도가 세트장에 나타나면 흥분은 더 커졌다. 하지만 알랭 들롱이 도착하면 고요해졌다. 소리도 말도 없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앨랭 들롱이었다.” 전성기가 훌쩍 지난 시기였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닿을 수 없는 신화,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영화계의 성스러운 괴물이자 대체할수 없는 스타였다. 지난 8월18일, 88살로 알랭 들롱이 사망했다. 반세기간 그의 활동을 돌아보며 그가 영화계에 남긴 발자취를 추모하고자 한다. 1935년 11월8일, 파리 남부의 오드센 지역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불행에 가까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작은 영화관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약국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아이가 4살이던 무렵에 결별했고, 이후 그는 위탁가정에 맡겨져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제대로 학업을 성취하지 못한 채 17살 때 해군에 입대했다. 인도 차이나 파병 시절에 그는 리볼버를 훔친 혐의로 징역형을 받은 적도 있었다. 알랭 들롱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것은 20대 초반 즈음으로, 파리에서 그는 바텐더 등의 작은 일을 했다. 그사이에 3명의 여성을 만나며 그의 인생은 바뀐다. 가장 먼저 배우 브리지트 오버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영화 감독 이브 알레그레의 아내인 미셸 코르두의 추천으로 <여자가 참견할 때>(1957)에 캐스팅 됐다. 신인으로서 얻기 힘든 기회였다. 이 영화의 경력은 곧장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60)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억만장자의 아들 역이었지만 감독의 아내인 벨라 클레망의 의견으로 그는 톰 리플리 역에 낙점됐다. 이 영화에서 그가 거울을 보며 자신을 쓰다듬는 치명적인 장면은 지금 보아도 인상적이다. 맑고 건조한 눈빛, 확실히 그는 도시의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후 그의 경력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에 출연했고, 연달아 <레오파드>(1963)에 캐스팅됐다. 특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레오파드>는 그에게 표범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고양이과 맹수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그의 외모에 덧입혀졌다. 그리고 1962년, 또 다른 거장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작업했다. 이 작품이 바로 <일식>(1962)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아름다운 소년의 마음에 숨겨진 폭력적이고 추악한 진실을 연기한다. 당시 누벨바그 감독들과 작업했던 것은 아니지만 알랭 들롱은 프랑스 예술영화의 독보적인 배우로 떠오르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거장들과의 작업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지하실의 멜로디>(1963) 같은 상업적인 범죄영화에도 출연했고, <수영장>(1969) 같은 현대물도 경험했다. 특히 자크 드레이의 <수영장>은 여러모로 화제작이었다. 영화 속 럭셔리한 배경과 화려한 이미지는 1960년대의 이상향을 드러냈고, 이 영화의 결말은 <태양은 가득히>의 범죄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게다가 촬영 도중 발생한 경호원 사망 사건으로 경찰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유명세는 더 치러야 했다. 당시 헤어진 것으로 알려진 로미 슈나이더와의 재결합에도 대중은 관심을 보였다. 허구와 현실의 평행선 같은 연결고리,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의 어두운 면모는 현실과 상충작용을 일으키며 더욱더 미스터리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사무라이>(1967)에서 보인 그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어둠의 암살자로 변신한 배우가 모자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인물의 불안하고 모호한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어떤 영화들은 피상적인 표현만으로도 시나리오의 내용을 정확히 전달할 때가 있다. 장피에르 멜빌과 알랭 들롱의 협업은 대부분 그러했다. 이후로도 그들은 함께 작업했고 이 행보는 감독의 마지막 영화 <형사>(1972)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70년대에 알랭 들롱은 제작 분야에 뛰어들었다. 직접 출연하고 제작한 영화들 중에는 <애정의 미로>(1971)와 같은 로맨틱코미디도 있었지만 대다수 장르는 장 루이 트랭티냥이나 클로드 브라소가 출연한 누아르물이었다. 그중 각본을 쓰고 출연까지 한 <세 번째 희생자>(1980)는 대중적으로도 크게 성공 했다. 하지만 <세 번째 희생자> 이후 그의 활동 반경은 좁아지게 된다. 주로 수사물에 가까운 스릴러나 갱 이야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알랭 들롱이 직접 연출한 <형사 이야기>(1981) 나 <최후의 방어선>(1983)도 그런 성향의 영화들이었다. 많은 활약이 있었지만 1980년대 대중에게 그는 여전히 제작자가 아닌 배우로 인식됐다. 당시 텔레비전의 미니시리즈에서 연기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러 스캔들 덕분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로미 슈나이더, 나탈리 들롱, 미레유 다르크, 로잘리 반 브레멘 등과의 사생활 뉴스가 그랬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알랭 들롱은 뉴스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장마리 르펜을 지지한 내용은 특히 유명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알랭 들롱은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아트하우스영화의 목록이 비워진 것을 아쉬워했 다. 그리하여 칸영화제를 겨냥해서 에두아르 니르만즈의 <카사노바>(1993)를 작업했고, 장뤼크 고다르의 프로듀서 알랭 사르드에게 연락해서 <누벨바그>(1990)에 출연했다. 그 후로도 상업영화 대작인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 게임>(2009)에서 그는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를 패러디하는 역할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굳이 2009년 디오르의 향수 모델로 과거 사진을 사용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활동만으로도 충분히 알랭 들롱은 3세대 이상의 관객들에게 각인된 유명 배우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칸영화제는 명예 황금종려상을 그에게 수여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명, 누구보다 강한 성격을 가진 공인으로서 활약, 드넓은 음역을 거칠고 강하게 한곳으로 끌어모은 한 사내의 모습을 떠올린다. 매혹적이지만 뜨거운 태양 같은 배우, 그의 단호함과 용기를 기억한다.

[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영화의 끝없는 표류, 디지털 롱테이크가 부른 대항해의 시대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한 연출 방식 중 하나였던 롱테이크의 지위가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록 능력이 향상되면서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차이밍량, 아피찻풍 위라세타꾼, 페드로 코스타처럼 이미지의 정적인 흐름을 통해 관객의 관조적 관람을 유발하는 작품, 즉 슬로 시네마(slow cinema)에서 롱테이크가 자주 나타난 바 있다. 그 작품들은 기록의 사실성이 허구적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몽타주를 금지하자고 했던 앙드레 바쟁의 요청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디지털 합성과 CGI 기술 발전에 힘입어 액션영화, 전쟁영화, 공포영화, SF영화처럼 시각적 볼거리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강화하는 작품에서도 롱테이크 기법이 적용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프레임 내부에 공존하는 다양한 요소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거나 하나의 숏이 다른 숏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이음매 없이 결합하여 관객이 롱테이크라고 인지할 수밖에 없도록 연출된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영화에서 롱테이크는 리얼리티의 포착과 조작이라는 이중의 전략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연출자의 성향과 제작 여건에 따라서 두 방식은 함께 쓰이기도 한다. 작품 전체를 원테이크로 촬영한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2002)나 미국의 전원적인 풍경 또는 산업화의 풍경을 고집스럽게 기록하는 제임스 베닝의 여러 작품 또한 영화적 지속을 연장하기 위해 이미지와 사운드를 미시적으로 조작한 경우이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오류, 실패, 결점을 후반작업에서 수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했던 고전적 리얼리즘의 불문율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디지털영화에서는 후반작업을 통한 개입과 조작이 롱테이크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라는 점이다. 디지털영화의 롱테이크는 일종의 문턱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지의 지속, 이미지의 분절, 이미지의 합성을 동시에 수행하여 현실의 삶과 가상의 삶이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디지털 롱테이크의 경계 없음이 두드러진 작품으로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칠드런 오브 맨>(2006)이 있다. 전 인류가 불임으로 인해 멸망의 위기에 처한 디스토피아적 상황을 그린 이 작품은 오프닝 시퀀스의 폭탄 테러 장면, 중반부의 자동차 추격 장면, 후반부의 총격 장면 등을 롱테이크를 활용해 박진감 있게 그린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를 통해 현장감과 사실감을 극대화하고, 여기에 특수효과와 시각효과를 통해 장점을 극대화하거나 반대로 단점을 최소화한다. 중반부 롱테이크의 숨은 비결은 특수 고안된 자동차에 거치대를 설치해 카메라가 자동차 내외부를 유영하듯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또한 이 장면은 주행 중인 자동차의 내부에서 찍은 숏과 자동차가 멈춘 직후부터 외부에서 찍은 숏을 비가시적인 편집으로 결합했다. 이런 제작 과정을 놓고 보면 롱테이크에 기초한 이 영화 특유의 리얼리즘에 대한 평가는 여러 영화적 장치와 테크닉에 대한 설명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기술적 성취만 놓고 이 작품의 롱테이크가 기존의 관습을 벗어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칠드런 오브 맨>이 과거의 롱테이크와 차별화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오프닝에 50초 정도 지속되는 한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시퀀스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10~20초 정도 지속되는 세개의 숏과 50초 정도 지속되는 하나의 숏이다. 먼저 전 인류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한 남성의 사망 사건을 전달하는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서 화면이 바뀌면 어느 카페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를 쳐다보는 사람들과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두개의 숏을 통해 묘사된다. 다음으로 주인공이 카페 밖으로 나가서 커피 잔에 술을 따르는 사이 카페에서 폭탄이 터지면서 아비규환이 된 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숏이 약 50초 동안 계속된다. 오프닝 시퀀스 중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불안정한 주인공의 모습과 무질서한 거리의 풍경을 통해 작품 속 근미래의 세계가 붕괴 직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 롱테이크 장면에도 몇 가지 숨은 비밀이 있다. 그 장면은 이틀에 걸쳐서 촬영한 두개의 숏의 결합물이다.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가는 모습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인공이 카페를 나선 이후에 폭발이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의 제작 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촬영 단계에서는 배우, 엑스트라, 카메라의 동선을 맞추거나 주인공이 카페를 나설 때 버스가 지나가도록 하여 편집 지점을 계산하는 등의 노력이 있었다. 편집 단계에서는 현장 촬영으로 얻은 두개의 숏을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마야로 불러들여 공간적 좌표를 맞추는 작업을 한 다음에 다시 각각의 이미지를 디지털 합성 프로그램에서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있었다. 이 제작 공정과 그에 따른 결과물 속에서 영화의 최소 단위로서의 숏이나 이미지의 경계로서의 프레임의 의미는 다소 모호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장면은 컴퓨터의 계산값에 따라 주인공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구축한 것이며, 관객은 카메라와 스크린을 매개로 그 장면 속의 세계를 탐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의 롱테이크 장면이 구축한 세계는 관객인 우리에게 이미지로 지각되기 이전에 데이터를 코드화한 결과물로 존재한다. 실제로 이 작품의 오프닝은 작품 속 세계가 데이터와 정보가 상품처럼 교환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장면의 경우 거리, 행인, 버스 등 전경의 실사 촬영분에 해당하는 부분과 버스와 건물의 광고판에 출력되는 광고 영상처럼 후경의 CG로 처리된 배경 부분은 합성물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제작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이 작품 속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데이터, 정보, 이미지의 흐름의 지배 속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따라서 주인공과 그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단순히 물질적 공간을 배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항해하는(navigating) 것에 가깝다. 과거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오직 영화만이 물질적인 “삶의 흐름”을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바람과 달리 오늘날의 영화는 비물질적 삶의 흐름과 그렇게 구축된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영화는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세계에서 끝없이 표류하는 누군가의 항해일지와 같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비평] 영화가 재난을 응시할 때, 김병규 평론가의 기후의 영화들 - <트위스터스>와 <태풍클럽>

재난이 영화를 중단한다. 정이삭의 <트위스터스> 후반부에선 거대한 토네이도가 도시를 강타하는 상황이 묘사된다. 위협적인 폭풍의 경로를 따라간 카메라가 도착하는 장소는, 뜻밖에도 영화관이다. 토네이도는 극장을 위협한다. 영화를 보던 관객들을 대피시키고, 오래된 흑백영화가 상영되던 스크린을 파괴한다. 폭풍이 지나가고 극장에 남은 사람들은 스크린이 있던 자리에 뚫린 구멍을 통해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지켜본다. 재난이 남긴 광경은 영사기의 빛을 받아 스크린 속의 이미지로 남는다. <트위스터스>는 극장이라는 장소를 빌려, 이미지로서의 재난을 응시한다. 광폭한 태풍을 길들이는 첨단 과학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서사의 결말에 나타난 오래된 극장은 마치 20세기에 봉인된 시대착오적인 장소처럼 다가온다. 이 친밀하지만 이질적인 장소에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왜 영화는 끊임없이 재난을 불러오는가? 그리고 영화가 불러온 재난은 왜 극장의 스크린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관측되는가? 영화, 기후적 세계의 시스템 영화는 기후를 형성하고 그것과 대면하는 장치다. “대기만큼 문화적인 것은 없고 날씨만큼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라고 말한 롤랑 바르트의 견해를 따르자면, 영화 매체의 표면은 이 명제를 가장 촉각적인 물질로 구체화하는 장소일 것이다. 존 포드의 웨스턴이 미국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 공동체 재현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서부극의 영웅과 그가 속한 집단이 선보이는 아름답고 강렬한 행위를 학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의 기반이 되는 대지와 하늘의 형상을 모두가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의 화면은 미국인의 삶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스티븐 스필버그에게 지평선을 화면 상단이나 하단에 두라고 조언했듯이, 포드의 영화는 위와 아래로 분할된다. 상단에는 구름과 암석과 위대한 영웅이, 하단에는 모래바람과 강물과 소박한 사람들이 있다. 그 중간에 이따금 고개를 들어 무정형의 구름을 바라보고 지면에서 부는 바람에 옷깃이 휘날리는 수많은 인간이 위치한다. 포드가 창조한 프레임의 기후적 규칙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들을 통해 국가의 형상이 탄생하는 것이다. 아내가 죽은 뒤,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나란히 서서 새벽하늘의 고요한 날씨를 지켜보는 <동경 이야기>의 히라야마처럼 영화 속의 인간은 기후를 매개로 타인과 같은 대기의 조건 아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내밀한 감정을 공유한다. 기후는 숏보다 미세한 층위에서 서로 다른 개체를 공통의 기반에 붙잡아둔다. “영상의 기본적인 기능은 관객에게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영화평론가 V. F. 퍼킨스 말처럼 영화를 행동하는 인간들의 몸짓에 관한 유희라고 가정한다면, 화면 속의 행동을 유발하는 가장 직관적인 기제는 이야기나 주제가 아니라 기후와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난다. 이는 논리적인 인과율로 설명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었다면 이상한 집착에 사로잡힌 남자가 여자의 무릎에 손을 대는 신체적 사건(<클레르의 무릎>)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토대로 둔 영화는 한때 기후를 조정하는 거대한 규약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전기 할리우드 시스템은 인위적인 대형 강풍기와 살수차를 동원해 현실의 질감을 극단적으로 변형시키는 역량을 발휘했다. 버스터 키턴의 <스팀보트 빌 주니어>와 빅토르 셰스트룀의 <바람>이 일으키는 압도적인 바람, 존 포드의 <허리케인>이 빚어내는 폭풍과 해일의 물질성은 숏의 고정된 장소를 뒤흔들고 행동하는 인물의 신체를 집어삼켰다. 고전기 영화가 생산하는 재난의 이미지는 서사가 설정하는 규모를 초과하는 추상적인 형상으로 화면에 적힌다. 바람과 폭풍우가 들이닥치면서 집이 무너지고 버스터 키턴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간신히 빠져나온다. 창문을 침범해 들어오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릴리언 기시의 눈동자는 과도하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물론 대부분의 고전영화는 이 넘쳐나는 형상을 서사의 맥락에서 애써 수습하곤 하지만,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순식간에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재난의 파괴적인 형상이다. 재난의 이미지는 스튜디오 시스템 내부에서 그것을 붕괴하는 불안정성의 흔적으로 남는다. 변화무쌍한 기후는 영화를 뜻밖의 한계점으로 이끄는 망상이다. 프레임 내부를 완벽한 가상의 기후적 세계로 형성하려는 것은 할리우드만의 꿈은 아니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전함 포템킨>의 오데사 선착장 시퀀스에서 새벽 바다의 안개 낀 풍경을 순차적으로 비춘다. 자욱한 안개로 가득한 항구의 풍경이 나타나고 사라진 뒤, 동이 트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죽은 선원의 시신 앞에서 슬픔을 표하고 분노를 드러낸다. 선원의 죽음이 집단의 감정과 행동으로 전이되는 과정에 새벽 날씨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한 휴지 구간이 삽입되어 있다. 미세하게 변하는 항구의 기후는, 에이젠슈테인의 표현을 따르면 ‘무관심하지 않은 자연’으로 영화에 주어진다. 혁명의 몸짓을 일으키는 공동체의 감정은 내밀하게 움직이는 날씨와 무관하지 않다. 숏에 새겨진 기후의 어스름한 형체는 인간적 정념을 일으키고, 그렇게 공유된 감정이 집단의 행동으로 번진다. 그러므로 변모하는 기후를 묘사하는 영화의 실천은 하나와 다른 하나를 잇는 동반자를 구성하는 일이고, 다수의 인간이 이루는 통합된 세계를 생성하는 작업이 된다. 태풍의 인력 하지만 인물 내면의 의식과 발생하는 행위가 인과적으로 접속하지 않는 모던시네마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기후를 매개로 인간 공동체를 포획하는 고전영화의 믿음은 무너지고 만다. 소마이 신지의 걸작 <태풍클럽>은 영화의 믿음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태풍의 또 다른 역량을 실행하는 사례다. 적지 않은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소마이는 불운한 시기에 도착한 연출자다. 1980년에 첫 번째 극장용 장편 극영화를 연출한 그는 영화사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로 영화감독이 됐다. 70년대 초반에 닛카쓰 영화사에 입사해 스튜디오의 장인적 규범에 매혹됐던 소마이가 영화감독으로 활동을 시작한 시기에 일본영화는 스튜디오 시스템의 시대에 파산 선고를 내리고 있었다. 80년대 일본영화계는 구로사와 아키라에게도 충분한 자본이 허락되지 않았고, 로망포르노나 자주적 아방가르드 같은 우회적 실천도 지속할 수 없던 시기였다. 투명한 계승도 격렬한 저항도 가능하지 않았다. 소마이와 더불어 80년대 일본영화를 대표하는 연출자인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표현을 빌리면 “필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였다. 고전기 영화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토네이도처럼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반이었다면(앞서 언급한 포드와 셰스트룀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영화산업에 흡수된 연출자들이다), 소마이는 반대로 분해돼버린 영화의 조건을 재구성하는 임시적 인력으로 태풍을 활용했다. 태풍은 흩어진 사람들을 한 장소에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동등한 날씨의 경험을 제공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태풍클럽>은 벌거벗은 신체에 관한 기록이다. 태풍에 노출된 신체는 고립된 학교 안에서 비일상적이고 충동적인 움직임을 발명하고, 닫혀 있던 몸짓을 폭발시킨다. 비에 젖어 헐벗은 학생들의 몸은 그들의 보호자인 수학 선생 우메미야가 잔뜩 술에 취해 마주하는 약혼자 삼촌의 벌거벗은 상반신과 대비된다. 문신으로 뒤덮인 야쿠자 장르영화의 신체가 십대들의 신체를 다루는 영화에 불쑥 침범한다. 우메미야는 전자의 벗은 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후자의 벗은 몸에 굴복해야 한다. 한쪽은 자유롭고 순수하며, 한쪽은 억압적이고 추레하다. 하지만 두 종류의 몸은 모두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다. 미카미에게 “15년 뒤엔 너도 나처럼 될 거야”라고 말하는 수학 선생의 예언처럼, 벌거벗은 어른들의 억압과 추함은 아이 같은 자유로움과 순수함에서 온 것이고, 벌거벗은 아이들의 자유와 순수는 언제든지 억압으로 채워질 수 있다. 수학 선생과 미카미가 창문을 바라보며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몸짓을 공유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개체가 종을 넘어설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고민하던 미카미는 어른이라는 종족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 창밖으로 뛰어내리지만, 그 순간 우메미야와 같은 행위를 공유하며 경멸스러운 종족성에 가까워진다. 닫힌 세계는 외부의 침입에 잠재적으로 열려 있다. 소마이가 실천하는 영화의 의무는 주어진 모순을 간직한 채로 답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직 한번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리고 결코 반복할 수 없는 저항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교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는 <태풍클럽>의 롱테이크는 저항의 형식을 증명하는 숏이다. 영화를 지탱하던 기존의 질서가 유효하지 않을 때 소마이는 프레임 안으로 태풍을 침투시킨다. 통제 불가능한 태풍의 물질적 감각이 영화 내부의 질서 정연한 세계를 내파할지도 모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들은 비바람이 불어닥치는 날씨에 노출됨으로써 외부로 열린 다른 세계와 대면한다. 대면의 과정에서 신체는 변형된다. 소마이는 그것이 기후 장치인 영화를 갱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형식과 몸짓의 대립, 비극이자 코미디인 것 소마이의 태풍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 조건을 하나의 시공간에 가둔다.닫혀버린 공간의 형식과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몸짓, 무방비하게 젖은 학생들의 몸과 술에 취한 어른들의 몸, 집으로 되돌아오는 리에의 궤적과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선택, 변화를 지나친 삶과 종결된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험을 한 자리에서 마주보게 하는 일회적 시간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은, 소마이가 형성한 서로 다른 유형의 감각이 분리불가능하게 혼재되어 있다. <태풍클럽>은 세계의 재난과 인간적 규범이 혼란스럽게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비극이자 코미디이다. 이 영화에서 비극과 코미디는 대비되는 구조로,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평등하게 펼쳐지고 있다. <태풍클럽>에 새겨진 이와 같은 모순은 당대의 영화문화를 둘러싸고 있는 소마이의 투쟁을 가시화한다. 도쿄에서 기차를 놓친 리에는 폭우를 맞으며 갈팡질팡하는 몸짓으로 같은 거리를 오간다. 돌아가야 할까?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까? 소마이에게 주어져 있던 영화(‘스튜디오의 영화’)는 너무 일찍 끝났고, 그가 추구하던 영화(‘자주적 실천의 영화’)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붕괴 전야에 놓인 영화라는 종족의 시간 앞에 개체의 열망은 무기력하다. 이 장면은 이미 지나가버린 것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사이의 격차가 발생시킨 투쟁이 소마이의 필름에 무의식적으로 새겨지는 순간이다. 태풍과 폭우라는 물질에 접촉한 인간의 몸짓은 이처럼 불확실한 것이 된다. 그리고 화면의 외형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흐트러트리는 이 장면이 지나가면, 영화는 무언가 달라지고 만다. 소마이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러나 절대 회피할 수도 없는 불가피한 통과의례의 시간을 다룬다. 그 시간을 통과하는 <태풍클럽>의 학생들은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프레임 안팎을 오가지만 역설적으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닫힌 공간에 가둬진 소마이적 아이들은 미래로 향할 수 없다. 끊임없이 창문의 경계 사이를 오가며 프레임에서 탈출하려던 몸짓의 행렬을,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미카미의 자살이 끝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소마이에게 성장은 개체의 성숙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변화도, 미성숙한 인간이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는 선형적인 전진도 아니다. 우메미야의 불길한 예언처럼 성장은 단지 프레임을 벗어나는 일탈적 몸짓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태풍클럽>의 마지막 장면은 학교로 걸어가는 두 친구의 뒷모습을 비좁은 틀 안에 가두고 정지시키는 효과로 끝난다. 그러므로 학교/창문/프레임이라는 통제의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일으키는 학생들의 몸짓도 발견할 수 없다. 태풍을 유효한 사건으로 가시화하는 공간적인 구획도 관측되지 않는다. 영화는 억압된 프레임과 자유로운 신체적 활동이 대립하는 장소에서만이 태풍을 하나의 사건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아침, <태풍클럽>의 결말이 도착한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태풍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다. 태풍이 사라진 것은 학교에 갇혀 있던 미카미의 자살이나 도쿄에서 무사히 돌아온 리에의 귀환과는 상관없는 사건이다. 소마이의 영화는 무심하게 앞으로 이행하는 시간을 따른다. 태풍은 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간의 시간을 통과한다. 학교 주변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 있고, 리에는 등굣길에 만난 아키라에게 키가 자란 것 같다는 말을 건넨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태풍클럽>은 태풍이 치는 동안 한번도 마주친 적 없는 두 학생을 전과 달라져버린 세계로 불시착시킨다. 태풍이 사라지면 개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소마이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허구적인 일회성의 모험에 동참하는 일이고, 그 경험을 몸에 새긴 채로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가는 일이다. 소마이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속성을 비교하면서 텔레비전이 갖는 오락성은 인간 내면에 경험을 축적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영화는 그것을 공유한 인간 신체에 특정한 흔적을 남긴다. 허구를 매개로 생겨난 그 흔적은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재난의 리얼리즘 영화 속의 태풍은 세계의 질서를 정지하는 무정형의 견고한 형식이다. <태풍클럽>의 태풍은 일상의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하고 고립시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게 고립된 장소에서 인간은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던 다른 인간과 하나의 집단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에서 태풍이 가하는 힘은 실로 가혹한 것이어서 바로 직전까지 끔찍한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위치하던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느새 같은 무대 위에서 나란히 옷을 벗고 춤을 추기도 한다. 그 가혹함이란 영화 장치의 비인간적인 실행과 닮아 있는 것으로, 결말에서 미카미는 자살을 앞두고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장면이 바뀌면 갑작스럽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영화의 편집은 인물의 심리 변화가 설명되는 시간보다 빠르다. 기후는 그렇게 어긋나 있는 영화와 인간의 시간을 조정한다. 태풍이 도착하면 서사의 그럴듯한 논리는 뭉개진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지는 서사를 초과하는 변형의 신호로 독립적인 감정을 구현한다. <태풍클럽>은 현실에 귀속되지 않는 허구적 재난의 물질성을 발명함으로써 무엇보다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을 매개로 출현하는 하나의 진실이며 태풍이 부는 시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재난의 리얼리티다. 앞서 말했듯이, <트위스터스>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영화관의 부서진 벽을 통해 토네이도가 남긴 잔해를 지켜본다. 그들과 비슷한 자리에 앉아 같은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는 이제 깨닫는다. 재난의 물질성은 영화관의 프레임 없이는 지각되지 않는 것이고, 영화 속의 인간은 재난이 발생시키는 기후와 대기의 변형이 아니라면 변화의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서 극장의 스크린에 떠오르는 재난의 이미지는 하나의 리얼리즘이 된다. 영화가 재현하는 재난의 이미지가 변모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레임에 담긴 재난은 현실을 분해하고, 분해된 현실을 매개로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인간이라는 피사체가 직면하는 변화의 시간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화는 재난의 이미지를 외면할 수 없다. 혹은 같은 의미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세계의 외형을 갱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에 영화는 몇번이고 다시 재난을 응시할 것이다.

[트랜스크로스] 오빠의 긍지, 가수의 책임감, <오빠, 남진> 남진

목포 부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풍각쟁이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수로 데뷔했다. 베트남전에 파병돼 2년간 복무했고, 전역 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노래 <님과 함께>를 발매해 대한민국 가수 중 최초로 ‘오빠’라 불렸다. 1980년대 군사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 낙향, 도미했지만 이후에도 <빈잔> <둥지> 등이 두번이나 역주행 히트하며 70대 후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 가수로 무대에서 절정의 가창력을 뽐낸다. 영화래도 ‘이건 설정 과다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을 법한 이 서사의 주인공은 가수 남진이다. 영화 <오빠, 남진>은 올해 6월 출간된 동명의 도서와 마찬가지로 한국 근현대사, 대중음악사, 팬덤문화사에서 남진이 차지하는 좌표를 짚고 그가 각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선도했는지 설명한다. 여전히 ‘영원한 오빠’, ‘원조 오빠’로 소개되는 일이 가장 좋다는 가수 남진과 <씨네21>이 나눈 대화를 전한다. - 한국 대중가수 중 최초로 ‘오빠’ 호칭을 얻으셨습니다. 조직적인 팬클럽도 처음 가지셨고요. 1970년대만 해도 좋아하는 스타를 ‘오빠’, ‘언니’라 부르는 게 낯선 시절이었다고요. = 그땐 관객들이 무대가 끝나도 박수를 안 치던 시절이에요. 싫어서가 아니라 쑥스러워서요. 그래서 다들 가수를 오빠라 부르는 걸 부끄러워했을 거예요. 그러다 나를 시작으로 오빠 부대가 생긴 거죠. 한국 가수 중 처음으로 오빠 소리를 들은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껴요. 그래서 행사에서도 사회자에게 웬만하면 ‘영원한 오빠’, ‘원조 오빠’ 정도로 소개해달라 요청합니다. 그외의 다른 수식을 붙일 거면 그냥 붙이지 말라고 하죠. - 데뷔 초 선생님은 새로운 유형의 가수, ‘신가다’ (しんがた)라고 불렸습니다. 트렌드를 선도하는 사람이 느끼는 짜릿함과 아무도 닦아두지 않은 길을 앞장서 걷는 외로움을 동시에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시발점에 서 있으면 매사에 조심할 수밖에 없지요. 그땐 더 열심히 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낼 수 있다는 책임감이 컸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제 위로는 현역으로 활동하시는 선배들이 거의 안 계세요. 이 나이까지 노래한 사람이 몇이나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팬들을 위해서라도 지루한 가수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요. 다행히 내겐 트로트, 로큰롤 등 많은 장르의 노래가 있는 게 큰 자양분이 돼 오늘날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한 장르만 팠다면 금방 지겨워졌을 거예요. - 말씀하신 대로 선생님의 디스코그래피엔 트로트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 선생님이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음악가들도 로큰롤이나 블루스에 정통한 팝 뮤지션들이에요. 그런데 유독 ‘트로트 가수 남진’이라 소개되는 경우가 많으십니다. =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죠. 내 음악엔 트로트도 있지만 록도 있고 고고도 있어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트로트라는 장르에 대해 정확히 짚을 필요가 있어요. 트로트는 멜로디보단 리듬을 지칭하는 용어예요. 폭스트롯에서 연원한 음악이니까요. 그런데 트로트라 통칭하는 다수의 노래는 멜로디가 ‘뽕짝’인 데 비해 리듬은 트로트를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일본에서 트로트가 왔다고들 하는데 정작 일본에선 트로트 리듬의 곡을 엔카라 부르잖아요? 당연해요. 트로트는 리듬이지 음률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트로트 리듬의 곡은 불란서의 샹송이나 이탈리아의 칸초네에 가깝다고 봐요. - 매주 방송국 라이브쇼에서 활약한 선생님을 두고 ‘50년 전 남진은 탤런트적인 가수였다’라는 평가가 영화에 등장합니다. = 데뷔할 때만 해도 방송국이 KBS밖에 없었어요. 방송이라고 할 만한 건 전부 라디오였죠. 그래서 당시 가수들은 오디오에만 치중해도 괜찮았어요. 내가 한양대에서 연극을 전공해서 그런지 몰라도 3분30초 노래를 하는 건 1시간 반 러닝타임의 영화에서 연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연기하듯 노래를 했는데, 마침 텔레비전 방송국이 다수 개국하는 비디오 시대가 오면서 각광을 받았죠. 화면에서 노래할 줄 알았으니까요. - 한국영상자료원 기록에 따르면 <오빠, 남진>을 포함해 총 76편의 영화를 찍으셨습니다. 그중 1967년에서 1977년 사이에 무려 74편의 영화가 개봉했어요. 히트곡을 영화로 만든 기획 영화도 있지만 김수용, 임권택, 이두용 등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감독들의 초기작에도 모두 배우로 출연하셨어요. = 김수용 감독의 <수전지대>(1968)는 생생해요. 내 노래랑 아무 상관없는 염전 머슴들의 이야기였어요. 솔직히 그땐 인기 때문에 이런저런 영화에 나왔지 연기가 좋아서 출연을 결정한 건 아니에요. 그럭저럭 소화할 정도는 되니까 했겠죠. 연기를 잘하진 못했어요. - 영화 말미 “내 삶이 음악이다”라는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 데뷔 초만 해도 나에게 음악은 취미였어요. 마침 직업이 필요했던 시기라 운과 때가 맞았죠. 세월이 흘러 지금까지 음악을 하다 보니 가수가 나의 천직이고 노래가 나의 재능이라는 걸 느껴요. 그래서 각별한 만큼 나를 갈고닦게 되고, 외길 인생에 집착 내지 집념을 갖게 돼요. 하늘이 주신 재능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끝까지 노래할 수 있게 근면하게 노력하는 일은 나를 지금껏 사랑해준 팬들, 이 길을 오래 걸은 나에 대한 보은이기도 해요. 지금도 무대에 서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잠들기 전 매일 서너 시간씩 장르 구분 없이 음악을 들어요. 요샌 스마트폰도 있으니 음악 듣기 얼마나 편해요. 단순히 음악만 듣지 않고 동영상으로 그 음악을 소화하는 가수의 표정이나 몸짓까지 연구합니다. - 올해는 햇수로 데뷔 60년, 내년엔 데뷔 60주년을 맞이하십니다.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 계획 없어요. 그저 좋은 곡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인터뷰] 뜨거운 나날을 맞이하며, <아름다운 우리 여름> 최하늘 작가, 정다형 감독

네 아이를 동시에 잉태하는 일은 100만분의 1의 확률로 여겨진다. 네 쌍둥이는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10대의 어느 날 헤어진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아름(유영재), 다운(손상연), 우리(김민기) 형제가 쌍둥이 나라(김소혜)를 잃고 첫 여름을 나는 이야기다. 상실과 이별, 이후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자기혐오라는 문제를 따뜻한 감성으로 만져낸 최하늘 작가와 정다형 감독. 두 신진 창작자는 “드라마가 삶에 주는 용기”를 믿는다고 말한다. - 어떤 과정을 거쳐 오펜(O’PEN) 당선작 <아름다운 우리 여름>이 영상화했나. 정다형 한해 30편 정도의 당선작 중 영상화는 10편 내외로 이루어진다. 스튜디오드래곤 소속 연출자는 대본 중 1~3순위를 지정하는데 <아름다운 우리 여름>은 내게 0순위였다. 인물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우리 여름’을 보내려면 아름답지 않은 시절도 견뎌야 한다는 역설적인 메시지가 제목부터 내용까지 관통하도록 쓴 건 작가님이 유일했다. 예산, 세일즈, 흥행 등 현실적인 조건으로 제작 여부가 결정되는데 이 각본은 기획 포인트 역시 뚜렷했다. 최하늘 결말이 포함된 8부작 기획안을 제출해 당선되었고 최종적으로 2부작 제작·방영이 결정되어 지난 6개월간의 다시 쓰기 과정이 있었다. 전년도 오프닝 작품이자 감독님 전작인 <복숭아 누르지 마시오>를 보니 왜 우리 두 사람을 매칭했는지 바로 알겠더라. 나도 한 감수성 한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의 감수성과 섬세함은 정말 독보적이다. (웃음) 감독님은 다섯 주인공 각각에 대한 질문지를 써주셨고 나는 내가 창조한 인물들이 되어 답해야 했다. ‘쌍둥이는 서로의 연애를 목격한 적 있을까요?’, ‘나라의 플레이 리스트에는 어떤 노래가 있었을까요?’ 서로 문답을 주고받으며 인물들을 생각하니 이야기 속 아이들에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쌍둥이 여동생을 잃은 세 형제(아름, 다운, 우리)가 가정의 붕괴로 고통받는 소녀 여름(장규리)을 만나는 이야기다. 최하늘 가까웠던 지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적이 있다. 그의 마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고루 쓰다듬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사별 후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옆집 사는 여름이 역시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자신이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는 아이다. 서로 다른 이유로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연대하는 것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다. 정다형 그래서 고독에 대한 이해나 나름의 철학이 있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이 중요했다. 오디션 과정에서 내면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고 그에 진솔하게 부딪혀오는 배우들에 끌렸다. 작가님에게도 비밀로 지키고 있지만 20대 초중반인 그들 또한 삶에서 누군가를 잃어본 경험이 있었다. 대본과 공명하는 개인사에 관해 묻고 찬찬히 대화를 나누며 캐스팅을 결정했다. - 늘 그렇듯 단막극은 이제 막 시작하는 신인급 배우들에게 소중한 기회다. 최하늘 개성이 다른 세 쌍둥이 남자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각본의 착상이었다. 예능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대한, 민국, 만세처럼. (웃음) 학원물인 만큼 여학생들이 한번쯤 짝사랑해본 유형별 이상형의 남자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에 감독님은 어른스러운 모범생 첫째, 장난기 많고 스포티한 둘째, 아리송하고 비밀스러운 셋째 역에 꼭 맞는 배우들을 찾아와주셨다. 정다형 다섯 주연배우가 모두 내 새끼 같고 소중하다. (정 감독의 핸드폰 배경은 다섯 배우를 나란히 두고 찍은 사진이다.) 나라 역의 김소혜는 촬영 시작 전 혼자 로케이션을 돌아다니면서 나라의 마음을 상상하고 편지를 써서 주었다. “나라는 고개를 들어 빛을 마주할 것이다. 자연스럽고 싶던 것에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곳에서 뜨거운 나날을 뜨거운 마음으로 흠뻑 만끽할 것이다”라고. - 오는 9월14~15일 방영된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관람 포인트를 소개한다면. 최하늘 세 쌍둥이 앞에서는 티 내본 적 없지만 나라와 이별하고 잠을 자지 못해 수면제로 버티는 엄마 혜진(신은정)의 모습이 나온다. 2부 후반에 모종의 발견을 계기로 처음으로 편안하게 잠드는 그의 표정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정다형 아름, 다운, 우리, 여름과 세상을 떠난 나라가 다 함께 모이는 장면이다. 물론 리얼리티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다. 그 친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조금도 드라마 같지 않고 현실의 가족처럼 느껴졌다. 구성원을 먼저 떠나보낸 적 있는 유가족이라면 누구나 느낄 감정,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가장 잘 보이는 이 장면이 시청자에게도 소중하게 다가가길 바란다. 작업 시 나의 필수템 최하늘 이어폰. 작품을 쓸 때 그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음악을 들으면 감정에 몰입한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는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를 많이 들었다. 정다형 연필과 노트.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현장에서 ‘오늘은 날씨가 어땠고 배우가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게 귀여웠다’라고 적어놓으면 다음 회차에 슬쩍 비슷한 장면을 넣어본다. 나를 자극한 다른 작품 최하늘 2005년 드라마 <태릉선수촌>의 대사. 유도 후보 선수였던 민기가 양궁 금메달리스트 수아에게 “저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10점을 쏜 거냐” 물었을 때 수아가 대답한다. “그냥 판때기잖아”. 정말 어려운 일을 하고 있는데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마음가짐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프로필 문구로 삼았던 대사다. 정다형 “텔레비전은 재즈다”라는 문장. 방송 PD 출신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쓴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읽었다. 영상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한계들을 극복하며 즉흥적으로, 동시에 가장 진실되게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평] 누벨바그의 유령과 멜랑콜리, 이지현 평론가가 바라본 <국외자들>

영화 <국외자들>(1964)이 촬영될 즈음의 상황을 되짚는다. 당시 혁명적이었던 누벨바그의 열기가 시들면서 극장가에는 다시 전통적인 방식의 프랑스영화가 대두되고 있었다. 당시 누벨바그 작가들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400번의 구타>(1959) 후 프랑수아 트뤼포는 대중과 점차 멀어졌고, 알랭 레네의 신작 <뮤리엘>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자크 리베트의 경우에는 <파리는 우리의 것>(1961)이 실패한 이후로 완전히 창작을 멈춘 상태였다. 그나마 에릭 로메르가 텔레비전용 저예산영화를 지속적으로 선보였지만, 그의 방식은 지극히 장인적인 모델에 가까웠다. 장뤼크 고다르는 자신의 동료들과 비슷한 처지에 속해 있었다. <네 멋대로 해라>(1960) 이후에 그는 <작은 병정>(1963)을 작업했지만, 이 작품은 알제리전쟁에 대한 언급 탓에 3년간 검열 중이었다. 그사이에 <여자는 여자다>(1961)와 <기관총부대>(1963)가 개봉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물론 <경멸>(1963)은 예외라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브리지트 바르도의 출연작 중 가장 적은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란 사실은 상기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외자들>을 작업하던 시기에 고다르는 사라지는 누벨바그의 불꽃을 되살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캐스팅으로부터 시작되다 새 영화 <국외자들>을 위해 고다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캐스팅이었다. 이 작품을 위해서 그는 안나 카리나와 재회했다. 이 영화에는 총 세명의 주연배우들이 등장하는데, 단언컨대 오딜 역의 그녀가 가장 돋보인다. 우둔하지만 아름다운 인물인 오딜은 두명의 다정한 사기꾼들에게 휩싸여 있다. 먼저 사미 프레이가 연기하는 프란스는 항상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는 착한 늑대 같은 캐릭터로,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9분45초보다 더 빨리 루브르 뛰기’를 제안하는 장본인이다. 그리고 클로드 브라소가 연기하는 아르튀르가 등장한다. 언뜻 매우 불량하고 죄질이 나빠 보이는 이 캐릭터는 실상 어린양에 더 가깝다. 삼촌의 나쁜 요구에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총을 들고 그는 도둑질에 뛰어든다. 이렇게 세 인물이 만나서 영화의 이야기가 성사된다. 그들은 파리 근교의 어느 저택에 숨겨진 다량의 현금을 훔치기 위한 계획을 도모하는데, 만약 그들 중 한명이 빠졌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 계략이다. 고다르가 즐겨 사용한 코지프스키식 의미론에서 빌려서 표현하자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울지 않는다. 즉, 이 셋의 만남은 운명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서로 부딪히고 온갖 다양한 포즈를 지으면서 사건의 본질에 점점 더 다가간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제3자인 고다르의 목소리가 개입한다. 배우들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영화를 보다가도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면 관객들은 꿈에서 깬 듯 이야기에서 멀어진다. 일부 관객들은 이 때문에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기도 한다. 간혹 아주 다른 소설의 줄거리가 플롯 사이에 끼어들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거짓말쟁이 인디언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이 일화를 전달하는 프란스의 얼굴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런 그를 오딜은 사랑스럽게 여긴다. 이들의 관계는 마치 “이것은 영화다”라고 직언하는 듯 보인다. 영화에서 소개되는 인디언 서사는 미국의 소설가 잭 런던이 쓴 것인데, 이 이야기를 통해 프란스는 처음으로 오딜에게 관심받는다. 뒤이어 그는 자신이 상상한 ‘니스에서 이탈리아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그녀에게 들려주지만, 그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어쩌면 오딜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타인의 이야기뿐인 것 같다. 프란스는 이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무언가를 깨닫는다. 전달된 이야기의 방식, 시네마의 오류를 깨닫는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들의 회합 장소가 영어를 가르치는 어학원이란 점은 의미심장하다. 현대의 모든 것은 세월과 함께 자동적으로 고전이 된다는 T. S. 엘리엇의 명언을 설파하는 그곳의 풍경은 간혹 <영화의 역사(들)>(1988~98)의 극영화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온갖 부차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뜬금없이 토머스 하디의 시를 글자로 보여주거나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주인공의 입을 통해 발음한다. 무언가를 보여주며 다른 요소를 연결시키고, 또 다른 것을 말하며 여타의 것을 재현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의 얼굴은 영화를 유일하게 관통하는 통합의 요소가 된다. 파편화된 몽타주를 공간화시키는 이미지들의 존재, 이 장치가 모든 흩어진 사건을 한데 묶는다. 어쩌면 이 점이 고다르의 후기 작품과 이 영화의 진짜 차이점일 수도 있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발판으로 춤추는 인물들, 예술작품이 지워진 루브르를 흘러가듯 뜀박질하는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발딛고 선 파리 곳곳의 풍경이 도달하는 장소가 오쟁빌이란 점에 주목한다. 이곳이 파리 시내가 아니라 외딴 근교의 모래바람 휘날리는 장소라는 점은 흥미롭다. 오쟁빌의 저택에는 미국 소설에서 소개된 어느 도둑의 이야기가 재현되고 있다. 그곳의 여주인장은 현금을 눈앞에 쌓아두고 감추지 않는 방식으로 비밀스런 재화를 보관하는 중이다. 오딜은 말로만 전해지던 그 비법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다. 만일 그녀가 어학원에서 서사의 초월적인 힘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영화는 결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언컨대 고다르가 제작사인 컬럼비아 픽처스를 위해 여주인공과 누아르 다음으로 준비한 것은 웨스턴의 방식이다. 파리 시내에서 볼 수 없는 한적함을 머금은 교외의 어느 장소에서, 영화는 점차 인디언의 공격에 대항하는 서부극의 대목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니는 현실판 오케이목장을 지키는 것은 짖지 않는 개 한 마리뿐이다. 여러 오마주의 원전 이 영화가 고발하는 미국식 대중영화와 텔레비전의 성공 비밀에 대해 말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누벨바그의 유령을 떠올린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 루브르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곳에 보존된 예술이 아니라 그 건물의 말끔한 외양 때문이다. 이 점이 영화를 끊임없이 멜랑콜리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이중적으로 오마주한 <몽상가들>(2003)과 <펄프 픽션>(1994), <아비정전>(1990)의 특정 장면은 패러독스에 가깝다. 우리는 다시금 <영화의 역사(들)>를 생각한다. 그 영화가 중시하는 영화의 죄목, 무언가를 반사한 죄와 전쟁 이후에 너무 늦게 도착한 원죄에 대해 상기한다. 그럼에도 오딜을 통해 매력을 느끼는 것, 그것이 고다르의 유일한 창작방식일 것이다. 끊임없이 불우한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유혹하는 그의 방식, 아마도 시네마의 본질을 작품은 에둘러 표현하는 것 같다. 장르영화와 텔레비전 영상의 유치찬란한 발상, 그리고 누벨바그의 흑백에 가까운 모노톤의 기억을 상기한다. 몇몇의 아이콘과 날카로운 이미지로 남을 <국외자들>의 발견은 그런 맥락에서 근원적이다. 어쩌면 그 피상성만이 이 영화가 고발하는 진짜 서사일 수도 있다. 수많은 가짜와 가상의 이야기들, 이제 이 작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시네마스코프는 컬러로 채색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음의 작업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과거의 이미지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사진을 지우는 것만이 답인가요?”, 중고등학교 교사 11인이 말한 교실 속 딥페이크 성범죄

2019년 2월, 익명 메신저 텔레그램에 개설된 단체 채팅방을 통해 불법 음란물을 생성하고 거래한 N번방 사건이 전국을 뒤덮었다. 미성년자 성착취, 협박, 영상물 무단 유포, 불법 촬영물 대규모 공유 등 인면수심의 범죄가 일상을 침범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과거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은밀한 형태의 디지털성범죄가 고개를 들었다. 가족, 친인척, 학교 선생님과 친구 등 주변인의 이미지를 무단 도용한 범죄자들이 포르노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것으로 금전 거래까지 도모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번 딥페이크 성범죄의 쟁점은 10대 청소년 가해자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경찰청 보고에 따르면 지난 1월1일부터 9월25일까지 딥페이크 성범죄로 검거된 피의자는 총 387명, 그중 10대가 324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인 83.7%를 차지했다. 10살 이상 14살 미만의 촉법소년도 66명(17.1%)이나 된다. 5년 전, 디지털성범죄의 피해자가 10대 청소년으로 내려온 것을 넘어 이제는 가해자까지 학교 내에서 발생하고 있다. 아는 사람의 친근한 얼굴을 인간존엄을 짓밟는 포르노로 활용하는 왜곡된 성관념은 무너진 공동체의식에서 비롯한 것일까, 아니면 짧고 자극적인 영상 범람에 길들여진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이면이 뒤늦게 드러나는 것일까. 온라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인문학의 결핍이 참혹한 또래 문화를 만든 것일까. 죄의식 없는 놀이터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그곳을 찾는 이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씨네21>은 7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교사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현재 10대 청소년의 비디오 리터러시를 들여다보았다. 이 세대가 공통적으로 지닌 어떤 문화적 태도가 딥페이크 기술을 만나 거대한 범죄를 낳았는지, 어떻게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데에 실패했는지 교실 내의 풍경을 면밀하게 분석한다. 기사에 인용된 모든 응답자의 발언은 익명으로 기재한다. 급변한 디지털 환경을 따르지 못하는 교육 현재 1020세대는 영상을 편리하게 활용하는 만큼 그것의 제작에도 매우 익숙하다. 유튜브에서 공부 타임랩스, 등굣길 겟 레디 위드 미, 시험기간 브이로그 등 특정 주제가 암묵적으로 10대 크리에이터의 주요 장르로 인식될 만큼 영상 제작의 진입장벽은 낮다. 오직 여가 시간의 환경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2022년 서울시교육청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한 수업을 늘리기 위해 중학교 학생과 교원 전원에게 1인 1스마트기기를 지급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스마트기기가 같은 ‘교실 구성원 모두에게’ ‘공식적인 루트로’ ‘동등하게 보급’되다 보니 청소년들의 소셜미디어 활동과 온라인 세계의 진입은 장벽 없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스마트기기 보급 사업은 2020년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를 기점으로 디지털기기 보유가 힘든 청소년을 대상으로 부분 지급되었던 것을 바탕 삼아 발전했다. 지자체 교육청은 모든 청소년이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교육받을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고자 했지만, 기술과 기기 활용에 뒷받침되어야 할 윤리적 교육의 부재는 의도와 달리 범람하는 영상에 청소년들을 무차별적으로 노출시켰다. 틱톡, 릴스, 쇼츠 등 짧고 임팩트 강한 숏폼 콘텐츠가 아이들의 여가 시간을 채운다면, 스마트기기를 동반한 디지털 교육 환경과 영상 제작 과제 등이 아이들의 수업 시간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를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정보사회에서 디지털 기술은 일종의 생존 능력이자 자기 표현 방식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 기술을 자연스럽게 터득할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은 타당하다. 다만 학교 내에서 진행되는 대부분의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학생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미 제작된 교육부 영상을 시청하는 데 그쳐 중요도 높은 기술의 이면을 간과하고 만다. 중등교사 A씨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부족의 핵심을 예산 문제로 짚었다. “예산이 넉넉하면 반에 한명씩 외부 강사를 초청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눈맞춤하는 수업을 진행할 수 있지만 그런 학교가 많지 않다. 대부분 특정 주제로 제작된 영상을 전 교실에 송출하는 식이다. 이때 교사들도 아이들이 교육 영상을 보도록 지도하는 데 그친다. 각 교실 선생님을 따로 교육하여 강사 양성에 힘쓰면 좋겠지만, 생명존중 교육, 자살 예방, 안보 교육 등 법정 교육이 너무 많아 현실적으로 어렵다.” 일방적인 교육 방식도 문제지만 교육 콘텐츠의 내용도 적극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의무교육 영상을 잘 안 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아이들이 안 봐서 다행이다 싶은 아쉬운 수준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디지털성범죄 교육 영상에 피해 사례를 재연하는 짧은 드라마가 포함돼 있는데 아이들의 집중을 유도한 것인지 피해 내용을 너무 자극적으로 다루었더라. 아이들도 주요 메시지보다 재연 영상만 기억할 것 같았다. 디지털성범죄 예방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이들이 직면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살피고 적용하는 과정이 시급하다.”(중등교사 B씨) 성인지감수성 격차가 낳은 분열 디지털성범죄 교육, 정보 교육 등이 (간신히라도) 이뤄지지만 그것을 학습하는 사람이 마음을 닫으면 이 또한 무용지물이다. 총 11개 중고등학교 교사를 취재한 결과 한곳을 뺀 10군데에서 “디지털성범죄 수업의 남학생·여학생의 반응이 완전히 갈린다”라고 답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등교사 C씨는 “교실에서 성범죄 주제를 다룰 때 여학생들이 발언하는 경우가 이전보다 더 많아졌지만 신난 듯 이야기하는 남학생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라고 말했다. 교실 내 발언권이 기울어진 경우도 종종 목격된다. 부모 대상의 패륜적 표현이나 성적 농담을 큰 목소리로 구전하는 남학생들 모습에 여학생들이 직접 저지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디지털성범죄 교육 시간에 “피해자가 여성이라고 말하는 게 불쾌하다”는 남학생들의 집단적 불만은 곳곳에서 자연스레 제기된다. “젠더 이슈, 성평등 등을 거론하는 순간, 선생님이나 강사가 있어도 적대감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다.”(중등교사 D씨) 이번 취재를 계기로 몇몇 응답자 교사들은 교실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문제를 학생들과 토론하고 후일담을 전해주기도 했다. 남녀 학생의 판이하게 다른 반응은 여기서도 동일했다. 중등교사 E씨는 “성범죄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여학생들이 ‘범죄’에 무게를 싣는 반면, 남학생들은 ‘성’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여학생이 전반적으로 무성한 소문과 뉴스를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면 남학생은 문제점을 비난하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딥페이크 범죄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는 교실 내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의견의 귀결 과정에선 극명한 차이가 드러났다. 또래 피해자의 상황을 공감하는 측면이 있는 한편 “지인으로 딥페이크 합성을 해봤자 성적으로 흥분되지 않는데 쓸데없이 왜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의견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도덕적 기준을 성별로 나누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응답자인 교사들이 이러한 인식 차로 인해 딥페이크 성범죄 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요컨대 각 학생의 성인지감수성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을 만든 기성세대의 책임 오직 아이들만 문제일까. 청소년이 가해자가 되고, 또 미성년 피해자가 속출한 데에는 분명 어른들의 책임도 있다. 고등교사 F씨는 “OTT에 범람하는 선정적인 콘텐츠가 미성년자 유저 비율이 높은 숏폼 플랫폼에 흘러들어오는 상황에서 요즘 아이들은 이상한 것을 많이 보고 자란다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유튜브는 저작권 침해같이 사유재산 침해로 이어지는 문제는 적극 규제하면서 미성년자에게 유해한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는 왜 방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제도적 미비도 지적됐다. 현재 학교마다 학교폭력, 교내 도박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즉각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스쿨 폴리스 제도가 있다. 인근 관할 경찰서에서 각 학교를 전담하는 경찰을 배정해 사건을 집중 조사하도록 마련한 제도다. 이에 대해 중등교사 G씨는 “실제로 문제가 생기면 스쿨 폴리스가 아이들의 문제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결할지 확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학교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미수 사건을 맞닥뜨렸던 교사 G씨는 “경찰에서 진범을 잡기 어렵다는 말만 반복하거나 피해자에게 상황을 반복해 진술하게 하는 모습 등이 총체적으로 불신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청소년의 죄를 따져 묻기 전에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은, 기성세대가 만든 시스템에 어떤 구멍이 있는지, 그런 위험이 방치된 숨은 이유는 무엇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에필로그 <씨네21> 취재에 응한 한 교사는 딥페이크 성범죄에 관한 토론 중 한 학생이 <씨네21>에 꼭 보내고 싶다고 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반응과 비교했을 때, 이번 딥페이크 사건에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비슷한 문제라고 무뎌진 것일까? 문제는 제대로 해결되고 있나? 아무도 그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른들은 사진을 보면서 과거를 추억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조용히 지운다. 어른들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면 좋겠다.”

‘2번 클릭 1초 만에, 딥페이크 합성물을 만들다’, 영화기자의 딥페이크 체험기

9월24일 토요일 오후 9시 - 어딘가 어색하지만, 불쾌하지만, 분명 나였다 스마트폰을 메신저용으로 들고 다니는 내게 딥페이크는 고난도의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딥페이크란 말을 들으면 최신판 <혹성탈출> 시리즈의 주인공 시저가 복잡한 프로그램 실험 끝에 완성되는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지기도 한다. 딥페이크 콘텐츠를 직접 만들어보자고 결심하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포토숍을 처음 배우던 시절처럼 수많은 기능 쓰는 법을 익히고 이거 눌러라 저거 눌러라 하는 지시에 따르다 보면 내 일이 될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일단 시작. 그러나 대표 앱 하나를 알지 못해 아이폰 구글 앱스토어에 딥페이크를 검색했다. 광고를 제외하고 맨 상단에 올라온 리페이스(Reface)가 제일 유명하다 싶어 선택했다. ‘전세계에 1억5천만 창작자들로 구성된 리페이스 커뮤니티에 가입하세요… 자신만의 트렌드 콘텐츠를 만들어보세요.’ 눈에 띄는 마케팅 문구 곁에 비윤리적인 제작과 유포에 대한 경고성 멘트는 따로 없었다. 설치 뒤 앱을 켜니 성인 남성의 얼굴이 여성, 아이의 얼굴로 계속 바뀌는 첫 화면이 떴다. 하단엔 ‘너의 얼굴로 AI 콘텐츠를 만들어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그러한 페이스 체인지 페이지는 4번 더 이어졌다. 왠지 그 얼굴들과 눈을 마주치기가 싫어 빠르게 넘겼다. 기본 홈에 들어갔지만 사용법을 몰라 메인으로 보이는 하단의 ‘FaceSwap’를 눌렀다. X 타래처럼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FaceSwap에서 예시 템플릿 이미지가 유독 현란한 ‘Treding Videos’가 눈에 들어왔고 ‘See All’을 눌러 전체로 이동했다. 그러자 화려한 ‘움짤’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배나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채 섹시 댄스를 추는 어린 아시아 여성, 비키니를 입고 가슴이 강조되는 포즈를 취하는 젊은 백인 여성, 울음을 터뜨린 여자아이까지…. 화면을 아무리 아래로 내려도 유사 영상만 끝없이 나타났다. 마치 어딘가에 갇힌 것처럼 답답했다. 어쨌거나 제작이 목표였으니 템플릿을 하나 골랐다. 타이트한 흰색 셔츠에 딱 붙는 짧은 치마를 입은 아시아계 여성이 엉덩이를 강조하는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내 앨범에 접속해 내 얼굴 사진 한장을 골랐다. 사진 편집 단계에서는 꽤 망설였고 이때부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오른쪽 하단의 ‘선택’을 누르는 순간, 어쩐지 지금 업로드한 이미지가 아까 보았던 예시 중 하나로 올라갈 것만 같았고 그걸 보는 누군가의 뒤통수가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마음을 다독이며 ‘선택’을 누르자 다행히 ‘Choose a face’ 창이 나타났다. 그 안엔 얼굴을 크게 키워 편집한 내 사진이 들어가 있었다. ‘Swap Face’ 버튼을 누르자 1초 만에 완성 페이지로 넘어갔다. 허무하고 어이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최종 파일 속 여자의 얼굴은 어딘가 어색했지만 분명 나였다. 14초 동안 내 얼굴의 여성은 쉬지 않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어떠한 제동도 걸리지 않는 과정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9월25일 일요일 오후 - 3시 가짜 <씨네21> 표지로 동료들을 속이다 자기 전에 하지 말걸 그랬다. 나와 친구들의 딥페이크 음란물이 텔레그램 방에서 떠도는 악몽을 꾼 다음날 오후, 딥페이크로 가짜 <씨네21> 표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번에 쓸 앱은 ‘페이스 스와퍼’ (FaceSwapper). 앱 미리보기를 둘러볼 땐 ‘마법 같은 원클릭 얼굴 교체 기술’,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얼굴 교체 여행’ 같은 낭만적인 마케팅 문구가, 앱을 실행할 땐 ‘가벼운 장난, 끝없는 즐거움!’ 같은 달콤한 멘트가 눈에 걸렸다. 경고성 멘트는 역시나 없다.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 광장. 청소년들이 당사자 합의 없이 합성물을 제작하는 행위를 아무런 죄의식 없는 놀이로 인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이스 스와퍼는 메인 홈에 템플릿이 있다. 가슴이 부각된 의상을 입은 젊은 여성의 영상물이 상위를 차지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좋아요’를 받았는지 숫자로 표시된다. 여성들은 쉽게 평가받고 있었고 ‘비키니’ , ‘미인’ 같은 성적 대상화의 단어들이 강조되어 있었다. 다시 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리 저장해둔 여성배우 A의 기존 단독 표지 이미지를 선택한 뒤 여성배우 B의 패션 화보 사진을 가져왔다. 그리고 4초 만에 완성. 완성된 가짜는 놀라울 정도로 진짜 같았다. 어떠한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고 확대해봐도 어색함이 없다.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과 합성한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어울려 디테일하기까지 했다. 이 이미지를 동료 기자들 단톡방에 공유해보기로 했다. 빠르게 눈치채긴 했지만 동료들 역시 속았다. 이는 누구든지 가짜 <씨네21> 표지를 만들어 유포할 수 있고 얼마든지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친김에 페이스 스와퍼의 3일 무료 구독 서비스까지 신청했다. 무한 저장 혜택을 받다 보니 사진첩에 딥페이크 합성물이 순식간에 50개가 쌓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인 인증이나 성인 인증 절차가 전무하다. 실제 딥페이크 범죄 발생 시 진범을 찾기 어렵고 설사 찾더라도 혐의 입증이 어려운 현 상황을 돌아보면 무책임한 서비스 운영 방식이 결코 이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단 걸 알 수 있다. 딥페이크 성착취 엄벌 촉구 시위가 열리고 매일같이 관련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는 요즘, 궁금해진다. 윤리적 질문을 외면한 채 나 몰라라 손놓고 있는 앱은 정말 결백한가?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콘텐츠에 주목을 BAFTA TV상,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치하하는 수상 부문 포함하기로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BAFTA)가 2025년부터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을 치하하는 수상 부문을 시상식 중계에 포함하기로 했다. 공식 보도에 따르면 BAFTA는 어린이 영화 각본상, 어린이 비영화 각본상, 어린이 제작팀상 등 세 카테고리를 BAFTA TV상에 포함해 수상자를 발표한다. 이 결정은 <플레이스쿨>의 전 진행자 플로엘라 벤저민, <닥터 후>의 작가 러셀 T. 데이비스, <텔레토비> 등 다수의 어린이 TV프로그램 히트작을 만든 베테랑 제작자 앤 우드 등 업계 인사들의 지속적인 캠페인에 대한 BAFTA의 응답으로 보인다. 일간지 <가디언>은 이번 결정이 BAFTA가 2011년에 폐지한 어린이 TV 시상식을 일부 대체할 것이라 해석했다. 지난해 9월 ‘어린이·가족영화상’의 신설도 공표했고 이 또한 BAFTA 영화상 방송 중계에 포함될 계획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올해 개봉한 디즈니·픽사의 흥행작 <인사이드 아웃2>는 내년 BAFTA 영화상 장편애니메이션상과 어린이·가족영화상 두 부문 후보에 오를 수 있다. BAFTA 게임상 또한 가족상 부문이 추가될 예정이다. BAFTA의 의장 세라 풋은 “영화, 게임, 텔레비전은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스토리는 따뜻한 창의성을 통해 만들어진다”라고 언급하며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콘텐츠에 대한 주목을 더욱 확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취지를 역설했다. 앤드루 밀러 BAFTA 청소년 자문 그룹 의장은 “어린이·청소년 영화산업은 다양한 교육적인 스토리텔링을 선도하며, 그간 많은 창작자가 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전했다. 50년 이상 어린이와 청소년의 복지에 헌신한 공로로 올해 초 BAFTA 펠로십을 수상한 플로엘라 벤저민도 “지금 어린이들은 성인용 콘텐츠에 쉽게 노출되고 있다. BAFTA가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작품이 좀더 대중의 주목을 받도록 노력하고, 관련 제작자들에게는 영감을 주기 위해 지원하는 모습을 보게 돼 기쁘다”라고 말하며 BAFTA의 결정을 지지했다. BAFTA는 수년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해왔다. BAFTA의 이번 결정이 전세계 영화, TV 시상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4년부터 20년간 <씨네21>에 필자로 함께한 손주연 런던 통신원의 마지막 기사입니다. 긴 시간 <씨네21>에 런던 이야기를 들려준 손주연 통신원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인터뷰] 다음 세대에 횃불을 건네는 이야기, <파친코> 시즌2 쇼러너 수 휴

전쟁 중의 로맨스,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드문 우정, 시대를 거듭하며 이어지는 가족의 유산까지. <파친코> 시즌2에선 국적과 세대, 역사적 비극을 넘나드는 사랑의 물결이 더욱 세차게 흐른다. 2022년 <파친코> 시즌1 성공에 이어 시즌2를 이끈 쇼러너 수 휴에겐 “원작 소설 이상의 디테일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파친코> 시리즈 이후 Apple TV+와 계약을 맺고 신작 작업에 착수 중인 그는 지금 할리우드 드라마 시장이 주목하는 프로듀서이자 작가다. 작가방에서 이력을 시작해 작품 제작의 전반을 아우르는 쇼러너, 총괄 프로듀서(EP, Executive Producer),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직함을 넘나들게 된 수 휴와 <파친코> 시즌2에 관해 화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를 영상 작업으로 각색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원작 소설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넘어서는 확장력을 갖기 위해 시즌2에선 어떻게 접근했나. 시즌1은 책이 지닌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를 없애고 과거의 중심 주인공 선자(김민하)와 현재의 손자 솔로몬(진하)이 교차하는 구성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점이 핵심이었다. 이번 시즌엔 솔로몬이 작가들의 주요 과제가 됐다. 왜냐하면 원작에선 초반이 세부적으로 묘사되고 선자가 중년에 이르면 전개 속도가 매우 빨라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는 마치 삶이 주인공들을 쏜살같이 휩쓸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친코> 시즌2 역시 이를 따르기로 했지만 그래도 소설보다는 속도감을 늦추려 했다. 훨씬 더 많은 디테일을 상상하는 작업이었다. 시즌1을 작업하다 막힐 때면 이삭(노상현)의 행방불명 후 시장에서 김치를 파는 선자의 모습으로 에피소드가 끝나는 것을 복기하곤 했는데, 시즌2의 실마리 역시 언제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할 때 가닥이 잡혔다. 사람들이 시즌2는 좀더 쉬울 거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각본 작업은 물론이고 프로덕션도 쉽지 않았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때문에 모자수의 집과 파친코, 회사 등을 제외하면 세트를 모두 새로 지었다. - 선자가 상복을 입고 더 그래스 루츠의 에 맞춰 춤추는 시즌2의 오프닝 시퀀스 타이틀도 정서적으로 강력한 울림을 준다. 어떻게 나온 결과물인가. 이 장면은 놀랍게도 오프닝 시퀀스를 위해 따로 시간을 빼서 찍은 게 아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실제로 자신의 촬영 분량을 찍고 있을 때 잠깐 다른 스튜디오로 와 찍은 것이다. 특히 이삭의 죽음 후 상복을 입은 김민하 배우가 스튜디오에 등장해 즐겁게 춤을 출 때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많은 정서적 레이어가 형성되어 강력한 오프닝이 나올 거라고 현장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 배우가 작중 현실을 살다가 곧바로 뛰쳐나와 오프닝 시퀀스를 찍은 것이 오히려 훨씬 도움이 된 경우다. - <파친코> 시리즈를 작업한 작가들의 방은 다양한 국적, 젠더, 인종의 멤버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다. 시즌2의 캐릭터에 깊이를 더하는 과정에서 주로 어떤 논의를 했나. 일단 우리의 진짜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했다. 작가들의 성스러운 방에서는 다양한 헤리티지와 가족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부터 교감을 출발한다. 개인적인 기억을 꺼내 서슴없이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작가방, 그리고 현장의 모니터 옆에는 언제든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 있는 휴지가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크루들이 서로에게 배우는 협업 환경이 <파친코> 시리즈의 힘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또 극의 가장 중심 캐릭터인 선자의 선택과 방향성을 논의할 때 ‘슬라이딩도어’ 기술을 동원했다. ‘선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할 것’이라고 쉽게 단언하지 않고 ‘만약 선자가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하는 식으로 인생의 여러 가능성을 계속 던지고 답해보는 식이었다. - 멜로드라마의 줄기 속에서 가족간 세대간의 갈등과 결합이 시즌2 서사의 주요 골자를 이룬다. 주제적으로 고려한 점이 있나. 이번 작업을 하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다. <파친코> 시즌2의 멜로드라마성을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관문으로 이해해주어 고맙다. 이번 시즌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다음 세대에 횃불을 건네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자만큼이나 노아와 모자수, 그리고 솔로몬이 중요하고 그들이 쇼에서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데 그것이 사랑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길 바랐다. -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일본 역사극 <쇼군>이 18개 부문 수상과 더불어 아시아 최초 여우주연상 수상자(<파친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한 안나 사와이)를 배출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사용한 <파친코>가 등장한 이후의 현상으로 읽자면, 확실히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아시아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자막을 전보다 덜 낯설게 받아들인다는 증거도 된다. 매우 고무적인 성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자막이 들어가는 시리즈물, TV 작업의 어려움을 업계 실무자들은 선명히 체감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이 1인치의 장벽을 크게 무너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다국어 스토리를 텔레비전에 적용하고, 국제적 출연진과 함께 작업하며, 촬영장에서 문화적 차이를 수용하는 일에는 많은 조심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로 촬영된 <파친코> 시리즈는 4대에 걸친 한국 이민자 가족이 겪는 사랑과 상실의 복잡한 감정을 좇는다. 이때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메시지를 제작진이 얼마나 정확히 인식하고 그 토대를 탄탄히 세우는가 하는 점이다. 내게 <파친코>의 경험은 우리가 때로 수천 마일 떨어진 상태에서도 캐릭터와 이야기에 대해 원활히 논의할 수 있던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때마다 이 이야기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정한 문화적 맥락과 그로부터 생겨난 언어적 복잡성이 스토레틸링을 얼마나 풍부하게 하는지, 결과적으로 풍부한 이야기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