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기획] 부산, 로케이션 이상의 글로벌 영화제작 거점으로 - 설립 25주년 맞이한 부산영상위원회의 현재와 미래, AFCNet 20주년 세미나

부산영상위원회가 창립 25주년을 맞은 올해. 부산영상위원회가 의장을 맡고 있는 아시아영상위원회네트워크(AFCNet) 역시 20주년을 맞이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이를 기념하는 세미나와 리셉션이 열렸다.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 기간 중 마켓 행사장 내에서 진행한 이번 행사들은 변화하는 글로벌 프로덕션의 환경과 AI 시대에 대한 뜨거운 관심 속에서 부산과 해외 영화인들이 만나는 네트워킹의 장으로 거듭났다. ACFM 현장, 그리고 세미나를 전체적으로 기획한 강성규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과 AI 세션을 준비한 양종곤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의 인터뷰를 함께 전한다. 부산영상위원회가 AFCNet 설립 20주년을 맞아 지난 10월7일 오전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6일부터 부산 벡스코 제2시전시장에서 문을 연 ACFM의 일환이다. AFCNet은 아시아 내 필름 커미션 및 촬영 지원 기구로 이뤄진 국제 네트워크로, 현재 19개국 49개 기관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장을 맡은 부산영상위원회가 주도해 꾸린 이번 특별 세미나에선 변화하는 글로벌 영상 분야의 전망이 핵심 주제로 떠올랐다. 영국 미디어 경영 컨설팅 회사인 올스버그·SPI의 레온 포드 대표이사가 ‘변화를 앞서가기: 영상위원회 미래에 대한 통찰’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맡았다. 레온 포드는 세계 각국 영화산업 분야의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시행해온 전문가이자,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기자로 15년간 활동했다. 기조 발제는 인센티브 유인책이 세계적 추세인 점을 주목했다. 인센티브제도는 특정 지역에서 영화나 영상을 촬영하며 쓴 제작비의 일부를 해당 도시가 현금 형태로 제작자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레온 포드 대표이사는 부산 또한 글로벌 콘텐츠가 공략할 현지화 작품의 성공적 유치를 위해 영화 로케이션 인센티브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고서에서 밝힌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프로덕션 인텐티브 비율 현황에 따르면, 한국이 20~25%, 일본이 50%로 각각 최저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어 캐나다 앨버트주 캘거리시의 성공적인 사례도 소개됐다. 캘거리경제개발공사 창조산업 부사장 루크 아제베도는 캘거리 지역에 촬영한 영화의 사례를 토대로 필름 커미션의 역할과 성공 사례를 발표했다. 드라마 <라스트 오브 어스>의 촬영 유치로 1800억원이 넘는 지역 경제효과를 얻은 캘거리시는 이를 계기로 1천만달러의 인센티브 상한선을 없애고 지역 인력 창출 및 물품 구입 등 조건을 충족하면 소비 금액의 22%를 금액 제한 없이 돌려주는 전략을 세웠다. 루크 아제베도 부사장은 인센티브 금액 외에도 인프라 홍보가 중요하다면서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부산을 찾는 해외 관계자들과 시 차원에서 도시의 특징적 경관을 소개하는 팸투어 등을 적극 유치하고 숙박 및 레스토랑 산업과 연계한 서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올스버그·SPI는 OTT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숏폼 등의 증가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현지화한 제작 전략을 세워 글로벌 스크린 콘텐츠에 대한 투자를 늘릴 것을 강조했다. 특히 앞으로는 중남미, 사하라사막 이남 이프리카, 중동 및 동유럽 등이 콘텐츠의 성장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을 밝혔다. 이들이 발표한 전세계 영화,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제작 부문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성공적 정책의 7가지 원칙은 (1) 프로덕션 인센티브 (2) 지역 인력 수용 능력 (3) 인프라 개발 (4) 영화 친화성 (5) 다양성, 형평성 및 포용성 (6) 지속 가능성 (7) 파트너십이다. 아시아 주요 촬영 지원 기관에서 모인 5명의 패널이 ‘변화에 대한 적응: 영상위원회 전략의 다양하고 선제적인 접근’이라는 주제로 종합 토론을 진행했다. 좌장은 레온 포드 대표이사가 맡고, 양종곤 부산영상위원회 사무처장, 세키네 루리코 일본영상위원회 사무총장, 모한나드 알 바크리 요르단왕립영상위원회 대표이사, 텐진 겔첸 부탄국립영상위원회 프로그램 오피서, 캘거리경제개발공사 창조산업의 루크 아제베도 부사장이 패널로 참여했다. 세액공제와 행정 지원책 등 각국이 집중하는 촬영 유치 강점 및 현실적인 고민이 다양하게 거론됐다. 양종곤 사무처장은 “상대적으로 인센티브는 약하지만 부산영상위원회만이 주력할 수 있는 지역 로케이션 유치의 강점을 찾으려고 한다”면서 “작가 지원, 부산 지역 자체 펀드 조성 등을 통해 부산 지역 제작사를 지원해 지역 스토리텔링을 보강”하는 방안을 설명했다. 부산아시아영화학교를 통한 프로듀서 배출, 디지털 로케이션의 최전선으로서 갖춘 촬영 시설 경쟁력에도 방점을 찍었다. 또 양종곤 사무처장은 K콘텐츠 열풍을 바라보는 해외 패널의 질문에 한국영화 산업의 명과 암을 두루 짚었다. 그는 “한국 시장은 자국 영화 비율이 높지만 제작 작품 수가 코로나19 이후 급감했고 신규 투자도 동결됐다. 이에 프로듀서들은 해외 공동제작 전망을 적극적으로 내다보고 있다”면서 “규모에 상관없이 여러 나라의 합작 프로젝트, 아시아 지역의 국제 공동제작 비즈니스 미팅에 부산 역시 활발히 대응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날 세미나가 마무리된 이후 부산영상위원회는 25주년을 맞이한 부산 로케이션 이니셔티브(BLI)를 발표했다.

[리뷰] 종말의 이미지가 소생하는 엄숙한 생(生)의 감각, <룸 넥스트 도어>

베스트셀러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앤 무어)는 신간 출판 기념 사인회에서 옛 친구 마사(틸다 스윈턴)의 근황을 듣는다. 유력 언론에서 종군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마사가 현재 수술로도 손쓸 도리가 없는 자궁경부암 3기 환자라는 것. 해후한 두 친구는 이후 병실과 집을 왕래하며 소식이 두절된 채 살아온 수십년의 공백을 끝없는 대화로 채운다. 언제나 말하는 쪽은 마사고, 듣는 쪽은 잉그리드다. 여느 때처럼 마사와 만나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잉그리드는, 마사가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결심한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게다가 마사는 스스로 끝을 선택한 날 잉그리드가 자신의 옆방에 머물길 바란다. 전장을 누비던 시절부터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직면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행이 존재했다는 이유다. 결국 잉그리드는 마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함께 지낼 뉴욕 교외의 별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룸 넥스트 도어>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첫 영어 장편영화다. 스페인을 떠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신기하리만치 대사량이 적고, 텔레노벨라풍의 서사 전개도 전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 작품은 그의 40여년의 감독 경력 중 많지 않은 소설 원작(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의 작품이다. 일견 알모도바르의 자장에서 비껴난 작품처럼 보이지만 <룸 넥스트 도어>가 알모도바르의 연출작임을 알아채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터다. 가장 확실한 알모도바르의 인장은 역시 컬러 팔레트다. 알모도바르 영화 속 스페인이 실제 스페인이기보단 알모도바르식 스페인이었듯 이번 영화 속 뉴욕은 우디 앨런이나 노라 에프런 영화에서 본 뉴욕과는 거리가 먼 강렬한 원색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먼셀의 20색상환에 입각해 철저히 보색 대비를 맞춘 듯한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의 의상을 주시하면 더욱 흥미로운 감상이 될 것이다. 그간 앙리 마티스나 파블로 피카소의 화풍에 비유된 알모도바르의 영화가 이번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인유하는 화가는 에드워드 호퍼다. 호퍼의 그림은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물론 후반부 결정적인 장면에 배우의 몸으로 직접 육화되며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 <패러렐 마더스>(2021) 등을 통해 질병과 전쟁이 말미암은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서로 다른 세대에 놓인 인물이 혈연을 어 유대하는 과정을 담아왔다. <룸 넥스트 도어> 또한 앞선 두 장편영화와 함께 ‘죽음 3부작’으로 묶일 법하다. 시한부판정을 받은 마사와 엄마와 거리를 두는 딸 미셸,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 등 미국의 패권 추구가 앗아간 무고한 생명들과 생존자에게 야기한 불안, 코로나19 팬데믹과 전세계적 기후 위기까지 <룸 넥스트 도어>는 알모도바르의 그 어떤 영화보다 멸망 앞에 선 자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으로 즐비하다. 하지만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한 이 비범한 영화는 단지 종말을 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죽음의 이미지를 앞세워 삶의 존엄을 성찰하고 예정된 정지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이 통렬히 깨우치는 생의 감각을 섬세히 들여다보는,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일깨우는 노장의 걸작 이다. close-up 영화엔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가 수십년간 보여준 명연기를 오마주한 듯한 숏이 내내 등장한다. 아픈 친구의 훌륭한 대화 상대가 되는 잉그리드는 <싱글맨>의 찰리와 겹치고, 딸과 평생 가까워지지 못한 마사는 <케빈에 대하여>의 에바와 포개진다. 꽃을 사들고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는 줄리앤 무어의 숏은 <디 아워스>의 오프닝 시퀀스와 조응한다. 틸다 스윈턴은 이번 작품에서도 흥미로운 1인2역을 시도하는데, 분장한 모습이 <어댑테이션>의 영화사 간부 발레리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check this movie <멋진 하루> 감독 이윤기, 2008 스윈턴이 절정의 액션을 하면, 무어가 진심어린 리액션을 한다. 서로의 호흡을 그대로 받아 돌려주는 두 배우의 연기는 두 연인의 탁구 랠리 같은 대화 시퀀스로 꽉 찬 영화 <멋진 하루>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영화를 볼 땐 말을 거는 쪽의 얼굴에 집중하지만, 보고 난 후엔 말을 듣던 쪽의 얼굴이 잔상으로 남는다는 점에서도 어울리는 한쌍이다.

[남다은 평론가의 RECORDER] 정직한 교환, 마침내 한 사람의 얼굴

지난 8월 개봉한 <리볼버>는 관객 24만명을 동원했다. 평단의 반응 역시 뜨거운 편은 아니다. <씨네21>(1471호)은 이에 대한 “자그마한 항변”으로 ‘<리볼버>는 문제작인가?’라는 기획을 마련했는데, 김영진 평론가의 글을 제외하고는 다소 소극적인 방어처럼 읽힌다. 10월 초, 부일영화상은 <리볼버>에 최우수작품상을 수여했다.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언제나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부당하게 평가절하된 <리볼버>의 경우라면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리볼버>가 ‘2024년의 영화’로 앞으로 더 말해지길 희망하며, 이 작품이 안긴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뒤늦게 싣는다. <리볼버>를 향한 비판 중 일부는 액션은 미약한데 말은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장르물로서 대사가 과하게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오승욱 감독도 이 영화가 ‘대화의 영화’라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가 영화의 축으로 삼은 ‘대화’가 서사의 세세한 전달을 목표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는 행동의 원인이나 심리, 영화가 생략한 시간의 일들을 명징하게 제시하는 데 복무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는 하수영(전도연)이 임석용(이정재)과 앤디(지창욱)의 제안 혹은 협박을 덜컥 받아들이는 내적 계기나 감옥에서 그가 겪은 변화, 정윤선(임지연)이 하수영을 끈질기게 맴도는 진짜 이유, 임석용이 두 여자와 맺은 관계 등을 내밀하게 알지 못한다. 인물들의 대화가 그들 각자의 욕망을 지시한다고 해도, 그 수준은 피상적이다. 이 영화는 서사의 인과율과 개연성을 빈틈없이 드러내는 데 힘을 쏟지 않는다. <리볼버>를 즐기지 못한 이들은 그러한 면모를 이 영화의 허술함과 허세, 혹은 지루함의 근원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달리 느낀다. <리볼버>가 오승욱의 말대로 ‘대화의 영화’라면, 그건 이 세계가 대사로 기술된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 ‘장면’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둘은 엄연히 다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대화 장면은 두 인물이 시선을 교환하며 말한다는 설정을 숏/리버스숏의 교차로 재현한다. 영화사에서 관습이 된 이 규칙은 오늘날, 대체로 기계적으로 적용되어 내러티브의 평범한 도구로 기능하거나 더러는 균열과 해체의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을 미지의 영역으로 새삼 탐색하는 작품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숏/리버스숏의 연쇄로 구성된 대화 장면이 이를테면 얼굴의 크기와 표정, 시선의 방향, 카메라의 위치, 숏의 길이처럼 물질적 세부와 운동의 미세한 차이들을 예민하게 운용한 결과이며, 대사, 나아가 서사를 초과하는 영화적 쾌감의 지평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더이상 대담히 시도되지도, 섬세하게 다뤄지지도 않는 것 같다. <리볼버>가 ‘대화의 영화’라는 점은 이 맥락에서 이야기되어야 한다. 이 작품의 감동은 이제는 통념이 되어버린 대화 장면의 구도를 묘수를 부리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는 과정만으로, 아예 영화의 뼈대로 삼아 전진시킴으로써 독자적인 내적 질서를 성취해낸다는 사실에 있다. 이 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구조는 인물들의 말을 전달하는 기법을 넘어 세계를 대하는 태도에 이른다. 이처럼 특별한 일은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 도입부, 하수영이 출소 후, 한 아파트를 올려다보는 모습 다음으로 그의 2년 전 상황이 등장한다. 그중 가장 강렬한 대목은 하수영이 임석용, 앤디, 그리고 변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차 내부 장면이다. 하수영은 개인 뇌물 수수 혐의를 인정하고 경찰 옷을 벗는 조건으로 변호사가 제안한 위로금 7억원과 이스턴 프로미스 경호실 이사 자리만이 아니라, 앞 장면에서 부푼 마음으로 돌아보던 신축 아파트 입주를 내건다. “내가 다 뒤집어쓰죠. 됐어요. 여기서 끝내요.” 이 장면의 힘은 하수영의 머뭇댐 없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가 이 장면의 리듬을 주관한다. 앞좌석에 앉아 하수영을 힐끗거리거나 겨우 뒤돌아보며 간보던 두 남자의 궁색한 얼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을 향하며 결정의 주체가 되는 하수영의 얼굴과 대비된다. 하수영의 얼굴이 그들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의 방식이 우회로를 마련하지 않고 직진한다는 점에서, 그가 가장 불리한 상황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더 강력해 보인다. 여기서 하수영이 주시하는 건 그 자신의 심리적 동요가 아니라, 이들 사이에 생긴 약속이다. 그가 이 대목에서 수용한 건 더러운 대가가 아니라, 정당한 교환의 약속이다. 여기가 <리볼버>의 근원이다. 상황은 하수영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죄수복을 입은 채, 변호사와 접견하며 감옥에서 버텨야 할 2년을 체념적으로 곱씹는다. 홀로 다 뒤집어쓰겠다고 선언하던 하수영의 화려한 얼굴은 오간 데 없고 상처 입은 무력한 얼굴이 프레임을 겨우 버틴다. 그 피폐한 얼굴이 교도소 면회실로 디졸브되면, 임석용과 하수영이 마주 앉는다. 이 장면은 둘의 정면과 측면 얼굴, 어깨를 걸고 찍은 숏/리버스숏, 투명한 막을 사이에 둔 투숏을 망라하는 대범한 구성과 화면을 채운 두 얼굴의 미묘한 변화로 사회와 격리된 무색무취의 면회실을 인물들의 굴곡진 시간과 내면이 응축된 ‘영화적’ 장소로 변모시킨다. 서로를 바라보는 하수영과 임석용의 투숏이 ‘모든 걸 잊겠지만, 당신이 한 짓은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하수영의 말과 함께 그들 각각의 측면 숏으로 단호히 분리되고, “어느 날인가 썰물처럼 과장님에 대한 감정이 사라져버렸어요”라며 빤히 정면을 향하는 하수영의 얼굴로 이행될 때, 임석용의 반응 숏은 그런 하수영의 숏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한다. 그러니 묻게 된다. 갇힌 자는 누구일까. 출소까지 남은 시간, 65일을 또박또박 상기하는 하수영의 표정은 묘한 미소를 삼키며 움찔댄다. 그것은 우위를 점한 얼굴,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얼굴,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한 얼굴, 죗값을 치른 얼굴, 임석용과의 질긴 투숏에서 벗어난 얼굴, 그러니까, 이제 약속의 실현만을 앞둔 얼굴이다. 그것은 앞서 화장으로 치장한 하수영의 얼굴에서 초라하게 퇴행한 것이 아니라, 무섭게 자유로워진 것이다. 미련 없이 개운한 이 얼굴은 임석용의 불투명한 얼굴을 이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귀결은 쓰라린 실패다. 장면의 끝, 교도소 텔레비전에서는 임석용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진다. 하수영이 그곳에서 견딘 2년이라는 시간, 면회실 장면이 숏/리버스숏으로 품격 있게 진전시킨 그의 얼굴은 초기화된다. 우리가 영화 시작에 본 하수영의 표정 잃은 얼굴의 정체는 그것이다. <리볼버>의 모든 장면은 하수영이 차에서 세 남자와 협상한 장면과 출소를 얼마 안 남기고 그 약속이 기약 없이 깨졌음을 깨달은 장면에 대한 반응이다. 이제 하수영의 목표는 단 하나, 파기된 약속을 되찾는 일이다. 그가 경찰 신분으로 거래한 돈은 부패한 뇌물이지만, 적어도 수감 생활을 마치고 집요하게 환기하는 7억원과 아파트는 합당한 교환의 산물이다. 그것은 돈이기 전에 약속이다. 하수영이 가장 자주 꺼내는 단어는 ‘약속’이고 가장 싫어하는 말은 ‘각오’다. ‘약속을 지켜.’ 그에게 그 말은 무언가를 각오한 요구가 아니라, 온당한 권리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은 왜 이토록 고되어야 하는가. 하수영은 ‘정당한 교환’을 보장한 남자들의 음성 녹음 파일마저 지워진 상태에서, 그야말로 맨몸 하나로 싸워야 한다. 아무런 증거 없이 그는 홀로 약속을 복구해야 한다. 하수영이 교도소에서 나와 민기현(정재영), 신동호(김준한), 정윤선, 조 사장(정만식), 앤디 등과 이룬 숏/리버스숏의 연쇄는 그저 소통이나 시선 교환 같은 것이 아니라, 거처도, 돈도, 증거도 없는 자가 자기 얼굴과 육체만으로 상대와 승부를 보는 형식이다. 하수영이 약속에 한발 한발 접근하기 위해 구축한 ‘주고받음’의 질서다. 큰 약속에 다가가는 작은 약속들의 운동. 하수영에게는 과거의 약속을 되찾는 일만큼이나 그의 행로 일부가 된 상대와의 약속, 이를테면 정 마담에게 사례할 2천만원을 잊지 않는 일 또한 중요하다. 하수영이 앤디를 기어코 찾아간 건 7억원을 받기 위해서지만 삼단 봉으로 그의 발목을 내려친 건 그가 종업원의 피가 섞인 위스키를 마시면 돈을 주겠다는 말을 어겼기 때문이다. 리볼버로 상대를 손쉽게 제거하지 않고 약속에 닿을 때까지 손바닥에 피가 맺히도록 삼단 봉만 휘두르며 이 교환의 질서를 지켜내는 일, 액션과 리액션을 모두 살려두는 일, 그것은 하수영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이자, 이 영화의 마음가짐이다. 살해 행위는 여기 섣불리 들어서면 안된다. 죽음은 교환이 아닌 삭제이며, 그것은 결국 복수극의 열망일 것이다. <리볼버>는 리볼버를 내내 장착하면서도 복수극을 원하지 않는다. 리볼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으로 사람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거듭 상기하기 위해 이 세계에 존재한다. 정 마담의 차가 어둠 속 산길 한가운데, 휠체어를 탄 채 하수영을 기다리는 앤디와 맞닥뜨린 대목에서 하수영은 말한다. “확, 밀어버려!” 그 순간은 짓궂은 농담처럼 지나가고 하수영은 다시 삼단 봉을 들고 앤디 앞에 서지만, 그 말을 내뱉던 순간, 하수영의 얼굴에 일어난 묘한 생기, 거기 내비친 일탈의 욕망은 결국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짜릿한 잔상을 남긴다. 하수영은 약속의 행로를 농락하는 어리석은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대신, 그들의 활동성을 무력화하는 길을 택한다. 앤디, 신 형사, 조 사장, 그리고 건달들은 훼손된 신체로 널브러지거나 겨우 움직여 퇴장한다. 그들은 사악하기보다는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하수영이 하는 일은 정의롭지 않은 이들을 처벌하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질서를 방해하는 이들의 소란함을 중지시키는 행위다.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으려는 영화의 선택과 관련해 일련의 대목들도 달리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정미의 죽음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 설정은 이처럼 비밀스러운 죽음이 하수영의 서사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음을 우회적으로 주장하는 방식이 아닐까. 임석용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플래시백의 다소 난데없는 삽입과 과잉된 스타일은 이처럼 극적인 죽음의 분위기가 하수영의 여정에는 함부로 개입할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이 아닐까. 하수영은 곁눈질하지 않고 자신의 질서를 밀고 나간다. 그 길에서 남자들은 결국 쓸모없는 장애물이지만, 정윤선만은 여러 면에서 의아하고 이질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그 역시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여타의 인물들과 가장 번잡하게 얽힌 인간이다. 전남편의 빚, 하수영의 집문서, 그에게 받을 2천만원 등 정윤선이 이 사슬에서 도망치지 않는 이유는 제시되지만, 전남편과의 구체적인 사연은 설명되지 않고, 결말에 이르도록 그가 하수영에게 보상받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는 실질적 이득 없이 사슬을 요란하게 흔드는 동시에 거기 기꺼이 속한다. 하수영이 화종사에서 황정미의 인감을 손에 쥔 후, 한밤 산길에서 앤디, 건달들, 신 형사, 조 사장을 대면하는 클라이맥스는 정윤선의 박쥐 같은 행동이 낳은 결과다. 그 클라이맥스는 하수영을 남자들과의 싸움으로 밀어넣어 위협하지만, 이들을 한꺼번에 해치우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클라이맥스에서 하수영은 앤디의 목숨을 쥐고 최후의 교환에 성큼 다가선다. 그러니 정윤선은 하수영의 질서를 추동하는 조력자인가, 흩뜨리는 배신자인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하수영이 신동호의 차에서 내려 그를 쳐다보는 모습은 신 형사를 만나러 술집에 들어서는 정윤선의 뒷모습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정 마담이 신 형사에게 약점을 잡혀 하수영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정황상 신동호와 정윤선은 주종 관계지만, 흥미롭게도 정 마담의 천박한 태도는 신 형사의 허영을 교묘히 부각하며 그와 겨룬다. 결정적 국면은 장면 끝에 나온다. 신 형사가 하수영을 다루는 법에 대해 “열개를 말하면 아홉개는 진실”이어야 한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충고하자, 정 마담은 신 형사가 죽은 임석용의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없이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한다. “따라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 장면의 흐름은 여기서 끊긴다. 정 마담의 비아냥에 대한 신 형사의 반응 숏은 마치 의도적으로 삭제된 것처럼 부재한다. 정 마담의 조롱에 신 형사의 허세는 대응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영화는 이 장면의 우위를 정윤선에게 부여한다. 그러고 보면 정윤선의 말은 신 형사만이 아니라, 누아르 속 남성성을 어설프게 ‘흉내내는’ <리볼버>의 남자들을 겨냥한 논평으로 들리기도 한다. 누아르를 모방하는 남성성의 세계에서 하수영의 무기가 리볼버 대신 손에 쥔 삼단 봉이라면, 정윤선의 그것은 모호한 입장을 지속함으로써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자의 눈이다. <리볼버>는 공격보다 방어의 힘을 믿는 세계다. 하수영은 삼단 봉을 먼저 들지 않고 리볼버를 무작정 겨누지 않는다.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야 한다. 이 영화의 숏/리버스숏의 구조는 그 단계를 주시하고 보존하려는 과정이다. 하수영이 리볼버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방아쇠를 당기는 손짓 하나로 멀리서도 단번에 여러 명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그가 숲에 들어간 건 도로 한복판의 불빛 아래에서는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는 건장한 건달 셋과 리볼버 없이 대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숲속의 어둠에 숨어서야 그는 비로소 삼단 봉으로 남자들을 차례로 한명씩 기습할 수 있다. <무뢰한>에서 형사 정재곤(김남길)을 감싼 어둠은 그의 내면이나 그가 속한 세계의 상태를 형상화한 분위기다. 하지만 <리볼버>에서 내내 정면을 주시하던 하수영의 얼굴을 가리는 숲의 어둠은 스타일이 아니라 대결의 단계를 오롯이 받아들이려는 육체의 선택이다. 그 육체가 끝내 지켜낸 앤디의 휠체어를 밀고 혼신의 힘으로 언덕길을 오른다.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다.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은 허허벌판에서 하수영은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홀로 여기까지 왔다. 이 장면에서 하수영이 밀어올리는 무게는 그 자신의 자존감이기도 하다. 그레이스(전혜진)가 혼자 나타나 하수영에게 돈가방을 건넨다. 하수영은 그 휠체어를 끌고 가파른 길을 잘도 올라왔는데, 어쩐 일인지 그레이스는 평지에서도 휠체어를 이동시키지 못한다. 그레이스가 분노를 참으며 안간힘을 다해 휠체어를 밀어보려 애쓰는 동안, 하수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뒤에서 가방 속 돈을 센다. 마치 잠금장치를 걸어둔 듯, 한자리에서 멈춰버린 휠체어는 이후 그레이스와 앤디의 모자 관계가 밝혀지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화면 한 귀퉁이에서 지폐를 세는 하수영을 위한 것이다. 최종적인 교환은 정확히, 공정하게 이루어졌는가. 정당한 교환은 마침내 완수되었는가. 휠체어가 지연한 건 하수영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승인하기 위한 시간이다. 가방을 챙겨 떠나려던 하수영은 앤디와 그레이스에게 되돌아와 리볼버를 겨눈다. “나는 불행했던 당신 과거 이용하지 않을 거고, 오늘 있었던 일은 깨끗이 지울 거야.” 7억원이 담긴 가방이 아니라, 하수영의 다짐이 이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는 약속의 주체가 되어 이 행로를 완료한다. 휠체어는 겨우 더디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하수영이 이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더이상 뒤쫓지 않는다. 하수영의 얼굴이 아닌 그 움직임의 광경이 고요한 부감으로 담긴다. 이 순간 영화는, 하수영은, 운명처럼 짊어지던 숏/리버스숏의 질긴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하수영이 이른 곳은 어디인가. 비 내리는 부둣가, 소주와 꽁치구이를 파는 노점에 하수영이 앉는다. 여자 상인이 커다란 컵에 내어준 소주를 마신 후, 하수영은 가방에서 돈다발을 꺼내 여인 앞에 내려둔다. 지난 장면들에서 상대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던 하수영의 눈은 어쩐 일인지 아래로 향해 있다. 느슨한 투숏 안에서 하수영의 얼굴을 처음으로 가만히 쳐다보던 여인은 5만원 한장만 집어든 다음, 소주 한잔을 더 따라준다. 이 대목을 마주하는 동안, 하수영의 마지막 장소가 그가 그리 갈구하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노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깨닫는다. 정당한 교환을 좇아 맹목적으로 내달리던 하수영의 길이 도착한 곳은 정직한 교환의 자리다. 과한 보상도 미진한 대가도 아닌, 정당함이나 정확함과도 다른, ‘정직한’ 교환의 존엄성. 말없이 상대를 응시한 후, 소주를 따르고 꽁치를 굽고 지폐 한장만을 빼가는 이 여인의 측면에 닿기 위해 하수영은 앞만 보고 견뎌온 것일까. 두 여자의 모습을 정윤선이 아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 여자 사이의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감, 그러나 아득하게 연결된 선이 이 순간의 평온을 예의를 갖춰 지속시킨다. 황정미의 행방을 묻던 하수영에게 무당은 “승냥이 같은 년”이라고 힐난했다. “승냥이”의 눈빛으로 해야만 했던 일들, 개척해야만 했던 행로에서 하수영의 얼굴은 마침내 해방되었나. <리볼버>의 끝에서 우리는 여전히 거처가 없는 얼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얼굴을 본다. 의미와 고통과 분노와 사명, 그리고 지난 시간을 모두 내려놓은 얼굴, 피로와 고독만 남았으나, 결국 책임을 다해 자기 힘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얼굴이 여기 있다.

[장윤미의 인서트 숏] 흔들리는 카메라

10년 전에는 주인공의 눈물을 찍는 것도 주저했다. 한 병역거부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을 때다. 그는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몇 개월간의 경찰 조사, 몇 차례의 재판까지 충실히 겪은 뒤 최종 선고일을 맞았다. 최후진술을 마친 그는 법정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자 홀가분함, 슬픔, 그동안의 고생스러움과 앞으로의 고난 등이 떠오르면서 온갖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을 것이다. 어쩌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될 순간이었다. 그러니 가까이 다가가서 찍어야 하는데, 그의 곁에 서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와 거리를 두고 선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안 찍을 수는 없어서 주저하다가 어정쩡하게 담고 말았다. 첫 작업이었고, 다큐멘터리 윤리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상황을 겪고 나서야 자문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그가 눈물을 흘릴 때 카메라 드는 걸 주저했던 걸까? 누군가의 아픔, 괴로움, 고통 같은 것을 찍을 때면 유독 카메라가 흔들린다. 촬영 대상의 아픔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또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사실 내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겠다. 반사적인 망설임이다. 기록한다는 명분이 있을 때도 개운치는 않다. 그러니까 그런 내 마음은 알겠는데, 가끔은 그만 주저하라고 스스로를 타박한다. 반드시 포착해야 할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올렸다 내렸다, 물러났다 다가갔다 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장면만이 남을 때면 더욱. 물론 그 주저하고 흔들리는 카메라마저 때로는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 창작자의 욕망은 참 복잡하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를 의심한다. 카메라를 드는 일은 곧 방황의 시작이다. 작은 캠코더 하나 들고 찍을 때 신체가 확장되며 더없는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실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황은 극히 드물다. 새삼 그 사실을 더욱 깨닫는 요즘이다. 상대가 비인간동물이면 방황은 더 심해진다. 그러해야만 하고. 축산동물이라 규정된 존재들을 찍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촬영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관련한 고민은 몇 차례의 변화를 겪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학대받는 동물의 이미지는 내게 한편으로는 화나고 슬프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알려야 한다는 목적만을 앞세워 정작 그 동물에 대한 존중은 간과하는 것 같았다. 고통만 부각되고 당사자는 사라지는 일종의 대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대상화하지 않은 동물 이미지를 찾기가 더 어렵다마는.) 그러다 동물운동을 접하면서 생각이 좀 변했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고자 활동을 시작했는데 고통의 이미지가 어쩌고 했던 한때의 내 고민이 한가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감금당하는 동물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서, 그들이 죽고 싶지 않아 하는 걸 못 봐서, 이 문제에 덜 절실해서 내가 그런 우아한 고민이나 했던 것이다, 하고. 잔인한 장면이 많대서 계속 피했던 다큐멘터리 <도미니언>도 결국 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영화 장면들에 시달렸다. 나는 주로 개농장을 찾아다니는 활동을 했다. 좁은 뜬장에 갇혀 사는 개들을 직접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어떤 동물은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여길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현장에서 좀더 비참해 보이는 장면을 찾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개들의 가여운 모습을 부각했다. 어쨌든 조작하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았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나는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물의 비참함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빠져 있다가도 거기서 조금 빠져나와 이미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후부터다. 저널리즘의 영역과는 달리 그저 동물의 현실을 담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 영화적인 것이라 할 무엇. ‘어떻게 동물을 좀 다르게 찍을 수 있을까?’ 동물의 고통 앞에서 이런 고민이 욕심 같지만 해야만 했다. 여전히 동물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인간의 잔혹성을 자각할 만한 이미지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동물의 몸이 훼손된 장면일지라도.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동물운동에 붙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음이 힘들어지는 고통의 이미지는 다들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축산동물의 현실은 알 만큼 안다고 여긴다. 어떻게 환기해줄 수 있을까. 그걸 위해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운동가 김영환은 이런 말을 해주었다. “고통스러우냐 아니냐는 식으로만 보여주면 거기에 무뎌지기 쉬워요. 직접 겪는 것이 아니라서요. 당사자가 겪는 고통은 그 종류에 따라 점점 더 민감도가 커지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보는 사람이) 안 무뎌진다는 건 뭐냐, 일단 머릿속에 계속 담고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계속 이 존재를 생각하면서 떠올려야 되잖아요. 계속 재생될 그 무엇. 끊임없이 리마인드시키게 되는, 그러다 나로 하여금 비로소 사유하게 만드는 것 있잖아요. 수동적으로 텔레비전 보면서 ‘잘 봤다, 끝’ 이게 아니고 내가 발견하지 못한 무엇이 있다, 끝끝내 다 포착하지 못할, 즉 개체성이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있잖아요.” 이미지 속 대상에 대해 ‘잘 알겠다’가 아닌 ‘다 알 수 없다’고 느끼는 영역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이게 존중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동물운동을 접하기 전 피상적인 고민을 할 때와는 분명 달라졌다. 닭이 처한 처절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 이미지 속 닭이 소외되지는 않는 분명 더 나은 촬영과 재현의 방식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걸 고민하는 게 우리의 일일 테다. 아직 현실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비인간동물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걸 의무화하는 걸로도 벅차다. <도미니언>처럼 축산업 현장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도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도 언젠가는 비인간동물에게도 인간을 촬영할 때 발생하는 온갖 복잡한 윤리적인 고민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며, 거기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다.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고다르와 원죄 없는 영화, <열정> 속 회화의 문제

이나라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장뤼크 고다르의 <열정>(1982)은 첫눈에 영화와 회화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렘브란트의 <야경>과 같은 유명 회화를 <열정>이라는 제목을 단 영화로 재구성하느라 분주한 영화인지 텔레비전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대규모 제작 현장이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조명기기가 현장을 비추고 있고 감독, 프로듀서, 장치, 운영진이 내는 소리와 움직임으로 사방이 들썩이는 가운데 17세기 바로크회화의 구성을 재구성하는 배우들은 정지상태로 숨을 고르고 있다. 고다르의 영화 <경멸> <주말> 등을 촬영했던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카메라는 <야경>의 세부와 인물에 차례로 포커스를 맞춘다. <야경>과 함께 보이스오버 목소리가 영화 제작진에 “이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묻는다. 제작진은 “여기에는 이야기가 없다. 이것은 구성이다”. “이 (영화적 재구성) 장면은 사실 밤의 순찰이 아니라 낮의 순찰에 가깝다” 같은 답을 내놓는다. 영화 속 스크립터는 “외부 현실과 분리된 채 그럴듯함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계산”, 곧 영화적 장치가 만들어낸 “진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닌 장면”이라고 답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그럴듯함을 만들어내는 고도의 계산”은 애초부터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영화가 진행될수록 계산 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폴란드 출신의 감독 제르지는 적절한 영화의 빛을 찾는 것에 실패할 뿐 아니라 영화 제작자의 압력에 시달린 채 혼란을 겪는다. 결국 영화제작은 좌초되고 영화 제작자는 할리우드로 떠난다. 그렇다면 고다르의 <열정>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렘브란트, 고야, 들라크루아, 엘 그레코 등의 회화적 세계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 실패하는 기술 재생산 시대의 기계적 매체를 다루는 이야기일까? 하지만 우리는 고다르가 영화산업을 비판하기 위해 “아우라의 예술”을 동원하는 순진한 예술 애호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열정>의 시나리오는 고다르가 처음부터 고전 회화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열정: 세계와 세계의 은유>라는 제목을 가진 이 영화를 구상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고전 회화는 영화와 함께 세계를 은유하는 매체로 영화에서 다루어진다. 특히 영화 속 활인화 인용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 그레코의 <원죄 없는 마리아>는 가장 적극적으로 영화적 서사와 의미의 생산에 기여한다. “원죄 없는 마리아”란 가톨릭 교회에서 수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주제다. 처녀로 신이자 인간인 예수를 잉태한 성모 역시 인간과 달리 원죄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주장, 곧 인간의 육체적 관계 없이 태어났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고다르는 극 중 영화감독 제르지와 마을 노동자 이자벨의 최초의 내밀한 관계가 이루어지는 장면에 죄 없이 태어난 성모를 주제로 삼는 그림을 교차편집한다. 제르지와 이자벨의 대화와 엘 그레코 회화 사이의 교차편집을 세밀하게 언급하기에 앞서 영화에 앞서 등장했던 회화적 재구성과 영화 디제시스 공간 사이의 상호작용 사례 몇 가지를 잠깐 언급해보자. 들라크루아의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재구성 장면을 보자.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된 <야경> 촬영과 달리 십자군전쟁의 혼란과 참상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의 활인화 촬영장은 카오스 상태다. 재구성에 동원된 말이 촬영장을 누비는가 하면 엑스트라 배우도 영화 제작진과 실랑이를 벌인다. 촬영장 밖에서는 호텔 주인 부부 사이의 실랑이, 파업 주동자 이자벨과 이자벨을 내쫓기 위해 온 경찰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진다. 촬영장에서 천사로 분장한 한 배우는 들라크루아의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에서 재현된 천사의 몸짓으로 감독에게 임금 지불을 요구하며 달려든다. 한편으로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영화 촬영 현장, 마을 사람들 사이의 소요와 혼란, 곧 세속 세계의 혼란을 ‘이미’ 형상화한 그림이라 가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현실 세계와 그림 속 세계의 분리 불가능성을 가정할 수도 있다. 회화 또는 영화가 제작과 노동의 문제인 동시에 사랑의 문제로서 세계를 은유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도 있다. 파업을 시도하는 노동자 이자벨이 영화감독에게 관심을 호소할 때 이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것인가, 사랑을 호소하는 것인가? 이자벨은 “노동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노동하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사랑과 노동은 같은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같은 몸짓”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노동을 요청한다. 영화 이전과 이후, 영화 촬영 현장과 바깥의 노동 없이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영화의 역사는 자본에 배신당하는 동시에 노동을 배신하며 쓰였다. 이자벨의 말처럼 “영화는 공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사랑을 소재로 삼고, 사랑을 동력 삼아 만들어진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는 언제나 세계의 사랑을 착취한다. 사랑, 노동, 영화를 염두에 두고 다시 스페인 바로크회화의 전성기를 열었던 엘 그레코의 회화가 등장하는 시퀀스로 돌아가보자. 제르지는 영화 연출을 포기하고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한다. 호텔의 소란 속에서 가벼운 자상을 입고 이자벨의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르지와 애정 관계를 맺고 있던 한나의 짧은 방문, 해고된 이자벨에게 돈을 지불하러 온 고용주의 짧은 방문, 야누스 데이 알레고리 시퀀스가 차례로 이어진 후 이자벨은 제르지에게 왜 자신이 영화 촬영장을 방문할 수 없었는지 묻는다. 이자벨은 그 때문에 자신은 (인간 예수가 아버지 예수에게 버림받은 듯이 느꼈던 것처럼) “버려진 것으로 느꼈다”고 말한다. 제르지는 이자벨에게 답하는 대신 “노동을 사랑하는지”, “사랑이 낱말에서 오는 것”인지 묻는다. 이자벨이 사랑은 낱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낱말을 향하는 것이라고 하자 (사랑을) 할 것을 제안하고 “처녀인지” 묻는다. 장면은 이제 회화적 주제와 세 가지 가닥으로 느슨하게 전개되던 영화 속 이야기를 ‘묶으면서’(영화학자 제임스 로이 맥빈) 엘 그레코의 <원죄 없는 마리아>로 이어진다. 수직으로 상승하며 엘 그레코의 그림을 조명하는 두개의 숏과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뒤로 할 것을 제안하는 제르지와 이자벨의 침실 장면을 보여주는 두개의 숏이 교차된다. 제르지는 창조주를 자처하며 창작의 노동을 포기하고, 조삼모사의 논리로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을 장담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엘 그레코의 회화 속 공간 배치에서 회화적 몽타주의 탁월한 사례를 발견했었다. 톨레도(현실 공간)의 정경 위로 마리아와 천사의 환희를 그려넣었던 엘 그레코의 그림과 달리 제르지의 <원죄 없는 마리아> 활인화에서 현실 공간은 모두 사라진다. 고다르는 노동과 함께 사랑이, 사랑과 함께 영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일까?

[비평] <클로즈 유어 아이즈>, 두 개의 영화, 무능한 기적

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에 장 뤽 고다르는 영화감독의 자화상 작업을 착수한다. 만들어진 영화엔 (이하 )이란 제목이 붙는다. 영화잡지 「필름 코멘트」와의 인터뷰에서 고다르는 이 영화의 제목이 ‘고다르에 의한 고다르(JLG by JLG)’가 아니라 단지 ‘고다르/고다르(JLG/JLG)’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영화감독의 자화상이란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하나의 초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로 나뉜 위계 없는 형상을 조직하는 것이다. 는 픽션과 현실, 신원 미상의 어린아이 사진과 노년의 영화감독, 눈앞에 보이는 세계와 스크린에 영사된 이미지를 교차한다. 고다르의 손은 고다르의 자화상을 스크린에 새긴다. 고다르는 고다르를 이중인화한다. “인간은 포지티브로 태어나 네거티브를 요구받는다”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하는 이 영화는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이미지로 이루어진 필름의 물질성에서 매체의 근본적인 원리를 찾는다. 영화는 둘로 분리된 이미지의 외양(빛과 어둠,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현실의 흔적과 허구적 재현)으로 통합된 세계를 형성한다. 그 안에서 둘이자 하나인 모순적 운명에 노출된 자화상이 생겨난다. 고다르보다 10여 년 앞서 또 다른 영화감독의 자화상이 만들어진 바 있다. 하지만 그 자화상은 연출자의 사후에 공개될 것을 전제로 제작되었기에 뒤늦게 공유될 수밖에 없었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은 1981년에 완성되고 나서 그의 죽음 이후인 2015년에 공개되었다. 그림자 같은 형체로 보이는 두 명의 방문객은 기나긴 기다림을 끝내고 올리베이라의 저택에 들어선다. 올리베이라는 무명의 방문객들에게 가족의 모습을 담은 오래된 사진과 필름의 기록을 보여준다. 그는 기억의 주체가 사라진 기억을 영사기에 태워 전달한다. 한 번도 드러난 적 없던 내밀한 과거는 뒤늦은 미래의 시간에 도착한다. 우리는 올리베이라의 영화를 뒤늦게 마주하며 필름 이미지에 의해 분할된 시제 속에 위치한다. 두 편의 영화는 영화감독의 사적인 자화상이자 영화가 스쳐 지나간 역사의 자화상이며 스크린에 투사된 영화 매체의 기억이 꿈꾸는 자화상이다. 이들에게 영화란 조각난 시간의 몽타주를 실행하는 장소이고, 과거와 현재의 꿈이 만나는 접촉면이다. 이 말을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 영화감독 미겔이 그의 편집기사 맥스와 함께 다큐멘터리에 상영될 과거의 영화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에리세는 영사기에 돌아가는 필름 릴의 네거티브 이미지를 노출한다. 발광하는 이미지의 반대편에 현실에서 빌린 어둠이 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두 이미지 사이에 걸쳐 있는 물질적 유령으로 출현한다. 둘로 나뉜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완성되지 못한 영화로 시작한다. 미겔은 오랜 친구인 훌리오를 주인공으로 <작별의 눈빛>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지만 훌리오의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촬영이 중단된다. 미겔의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라진 훌리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실은 한순간에 영화를 둘러싼 모든 관계를 무너뜨린다. 실종의 미스터리 앞에서 기억과 증거는 흩어지고 있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적힌 영화의 위상은 빅토르 에리세의 작업에 감도는 미완성의 흔적을 환기한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남쪽>은 절반의 이야기를 촬영하지 못한 미완성의 영화다. 이후로 에리세는 보르헤스의 단편 <죽음과 나침반>을 각색해 세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려 했지만 무산되었다. 후안 마르세의 원작 소설로 <상하이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계획했지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영화엔 스크린에 실현된 기록과 실현되지 못한 영화가 나란히 존재한다. 하나의 뒷면에는 둘의 기억이 잠재해 있다. 에리세는 현실의 실패를 만회하는 장소에서 영화가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그의 새로운 영화는 영화가 손상된 자리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직전에 다시 시작한다. 미겔이 만든 영화 속 영화는 도입부에서 야누스 조각상을 비춘다. 영화에 삽입된 조각은 몇 가지 함의를 포함한다. 견고하게 정지해 있는 조각은 움직임의 예술인 영화의 특권을 중단하는 불손한 매개다. 침묵하는 조각의 얼굴은 숏과 리버스 숏의 교환으로 성립되는 영화적 시선의 문법을 교란하는 무관심한 세계의 표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앞뒤로 붙은 두 얼굴이 하나의 조각을 구성하는 야누스상의 형태는 영화 곳곳에 편재된 원리를 마주하게 한다. 서로의 눈빛을 바라볼 수 없는 두 개의 얼굴로 만들어진 조각상. 조각은 하나의 몸이 둘로 나뉘는 영화적 육체의 운명을 환기할 것이다. 야누스 조각의 미장센이 보여주는 것처럼, 빅토르 에리세는 둘로 나뉜 얼굴을 여러 곳에 배치한다. 미겔의 영화 <작별의 눈빛>에서 훌리오가 연기한 역할인 프랑크는 유대인 레비의 딸을 데려오라는 의뢰를 받는다. 레비의 딸은 프랑스에서 불리던 ‘주디스’라는 이름과 중국에서 불리는 ‘차오수’로 나뉘어 있다. 실종된 훌리오를 찾는 미겔은 실패한 영화감독이지만 여러 편의 책을 출간한 소설가이다. 그의 이름은 미겔이지만 휴양지의 해변에서는 마이크로 불린다. 미겔의 오랜 연인인 로라는 미겔과 훌리오를 번갈아 만났다고 말한다. 미겔이 찾는 옛 친구는 해변에서 사라진 배우 훌리오와 요양원에서 기억을 잃고 살아가는 가르델로 찢어져 있다. 그리고 영화의 처음과 끝에 놓인 <작별의 눈빛>의 필름이 있다. 처음에 이 필름은 훌리오를 찾는 탐사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으로 활용되는 도구였지만, 영화의 끝에선 훌리오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한 증거물이 된다. 이 영화의 피사체들에겐 끝없는 대칭과 불일치가 드리우고 있다. 하나와 다른 하나는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관계에 놓인다. 이런 무대에서 에리세가 수행하는 영화의 실천은 서로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의 교환을 성립시키는 것이고, 얼굴과 얼굴의 대면이라는 영화의 소박한 원리로 불가능한 기억에 다가서는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얼굴’이 복잡하게 얽힌 채로 유발되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산한다. 하지만 두 얼굴은 아직 직접 만나지 않는다. 두 얼굴의 시선이 마주하는 몽타주는, 아직 이 영화가 실행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무능한 영화 망각과 회고의 감각을 다루는 이 영화의 화면에는 기억을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들로 가득하다. 사라진 훌리오를 취재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영화의 리허설 과정이 녹음된 녹음기, 옛 연인 로라에게 선물한 미겔의 첫 번째 소설, 로라가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의 선율, 훌리오의 기록이 적힌 신문 기사, 미겔의 죽은 아들이 그린 만화, 훌리오가 간직한 <작별의 눈빛> 속 어린 소녀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예술과 매체에 남겨진 기록이 과거를 되짚는 미겔의 여정을 채운다. 그런데 이토록 복잡하게 뒤얽힌 매체의 기록 사이에서 영화는 무기력하다. 에리세에게 있어 영화는 회고의 매체가 아니다. 영화 속 이야기는 불충분하고, 이미지의 빛은 소실되었으며, 관객의 기억은 지워져 있다. 영화와 인접한 매체들의 여정이 기억을 되짚고 돌아본다면, 영화의 여정은 기억을 유예하고 지연시킨다. 영화는 불순한 매체의 흔적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는 프랑켄슈타인의 조각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는 무능한 예술이다. 완성되지 못한 미겔의 영화는 훌리오의 기록이 남아 있는 자료로 제시되지만, 실종자의 실체에 가닿을 수 없는 한계를 노출한다. 미겔은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 무책임한 영화감독이면서 훌리오의 행방을 찾지 못한 무력한 조사관이다. 사라진 훌리오의 궤적을 뒤따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서사에서 영화는 추적을 방해하고 실종자의 주변을 무의미하게 배회한다. 영화감독으로서 미겔은 훌리오의 실종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그는 탐문의 역량을 잃어버린 조사관이다. 빅토르 에리세는 이 무능한 예술인 영화에 두 번째 기회를 건넨다. 영화의 절반 지점에서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탐문의 여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되찾는 대상과 방법이 달라진다. 미겔은 어느 수녀원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가르델이 훌리오인 것 같다는 연락을 받는다. 수녀원에 도착한 미겔은 가르델을 보고 그가 훌리오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가르델은 역행성 건망증으로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다. 에리세는 추적의 형식조차도 둘로 나눈다. 미겔은 두 번의 수동적인 추적을 반복한다. 전반부의 이야기가 남겨진 기록과 흔적을 통해 실종된 훌리오의 삶을 되돌아보는 형태로 주어진다면, 후반부는 기억을 잃은 가르델의 삶에 기록과 흔적을 채우는 형식으로 주어진다. 추적은 미겔에게 은총처럼 주어진다. 이와 결부된 또 다른 변화는 전반부에서 미겔과 훌리오를 둘러싸고 있던 매체의 기록이 후반부의 수녀원에서는 완벽하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른 매체의 기억은 사라지고 오직 영화와 영화의 물질적 토대인 사진적 이미지만이 존재한다. 무능한 영화의 흔적만이 잔존하는 이 장소에서 에리세는 둘로 나뉘는 시선, 가설, 변주로 영화라는 기억장치의 의미를 재구성한다. 미겔과 가르델은 반복해서 수녀원 숙소 앞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두 사람은 담배를 나눠 피우고,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같이 찍힌 사진을 꺼내 보고, 둘만 아는 방법으로 매듭을 풀고, 서로의 손을 만지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 하지만 가르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한곳을 향해 던져질 뿐 되돌아오지 않는다. 20세기 영화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사물과 동작을 매개로 영화의 매혹적인 순간을 고안해내고 스크린의 특별한 기억으로 남겨두었다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 영화의 특권적인 몸짓은 그 역할을 잃는다. 대화하고 손짓하고 바라보고 재회하는 몸짓의 조건으로도 영화는 기억을 되돌리지 못한다. 영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벤치 앞에서, 또 다시 무능력의 예술이 된다. 망각의 영화(관) 이토록 무능한 영화는 그러나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다. 눈앞의 세계가 둘로 나뉜 얼굴을 관측할 수 없다면, 영화는 그 무능함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장치로 거듭날 수 있다. 스크린은 영화 매체에 깃든 무능력을 자각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비로소 낡고 오래된 영화관에 도착한다. 미겔은 완성하지 못한 영화를 상영한다면 훌리오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에리세는 마치 영화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듯 영화관에 도착한다.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벌집의 정령>의 도입부에서 마을의 관객들에게 도착한 영화는 한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허구의 체험을 건넨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결말에서 기억을 잊어버린 관객 공동체를 초대한 영화는 한 남자의 시선에서 그 체험의 가능성을 다시 검토한다. 20세기의 아이들이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 벗어난 관능적인 몽상을 꿈꿀 수 있었다면, 21세기의 노인들은 영화를 빌려 현실로 되돌아오는 감각의 회복을 탐색한다. 미겔은 <작별의 눈빛>을 상영하는 극장에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일일이 지정한다. 스크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두 명의 수녀를, 훌리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한 방송국 프로듀서 마르타와 가르델을 찾아낸 수녀원의 직원 벨렌을 그 앞에, 훌리오의 딸 아나를 스크린 가장 가까이에 앉힌다. 마지막으로 가르델에게 아나의 옆자리에 앉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상영 시작을 알린 뒤 객석 맨 앞자리에 앉는다. 관객이 앉을 자리를 정하는 그의 요청은 ‘영화감독’인 미겔이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연출의 일부분이다. 그는 훌리오/가르델을 둘러싸고 있는 미스터리와 탐사의 과정에 더 많이 개입한 순서대로 관객들의 위치를 조정한다. 그러므로 그의 ‘연출’에서 스크린에 가장 가까이 앉아야 하는 자는 미겔 자신이다. 미겔은 스스로 실패하고 무능한 예술의 한 조각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가 시도하는 무능한 예술은 22년 전의 영화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앞에서 스크린 위의 훌리오가 보이고, 그의 뒤편에 기억을 잃은 가르델이 위치한다. 그는 훌리오와 가르델이라는 공존 불가능한 두 개의 얼굴 사이에 있다. 미겔은 극장에서 실현되는 두 얼굴과 시선의 결합을 통해 <작별의 눈빛> 속의 야누스 조각상과 같은 존재가 된다. 마침내 미겔의 앞뒤로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얼굴(훌리오/가르델)이 나란히 위치한다. 이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얼굴을 앞뒤에 나란히 배치한 야누스적 건축의 장소다. 같은 의미에서 <작별의 눈빛>이 상영되는 폐관된 극장은 이중적인 영화의 장소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첫 장면에서 지켜본 완성되지 못한 영화를 관객의 기억에 투영하는 뒤늦은 몽타주의 장소라는 측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에서 끝없이 둘로 나뉘던 한 사람의 얼굴을 하나의 평면에 겹쳐두는 재귀적 몽타주를 실현하는 장소라는 측면에서 이 위상을 획득한다. 불가능한 얼굴의 결합을 꿈꾸는 바로 이곳에 두 겹으로 겹친 에리세의 영화가 거주한다. 우리를 응시했던 영화 <작별의 눈빛>이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영화 속에서 프랑크를 연기한 훌리오는 레비의 딸 주디스 혹은 차오수를 데리고 의뢰인의 집에 되돌아온다. 미겔은 비스듬히 시선을 돌려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가르델의 얼굴을 돌아본다. 돌아오지 않던 실종자, 시선, 그리고 영화가 스크린에서 되돌아온다. 뒤돌아보는 미겔의 눈빛에서 우리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저승의 어둠으로 향한 오르페우스의 여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20세기의 끄트머리에 영화의 세기를 돌아보는 작업인 <영화사(들)>에서 고다르는 “영화는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아도 죽지 않도록 한다.”라고 말한다. 오직 극장의 어둠 속에서만이 우리는 스크린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시선 뒤에 머무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미겔은 스크린을 중간에 두고 두 가지 시간과 눈빛과 영화가 교차하는 것을 되돌아본다. 영화 속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훌리오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스크린 너머로 전달된다. 가르델은 과거를 향한 기억이 제거된 눈빛으로 스크린 속의 프랑크, 혹은 훌리오와 마주한다. 둘로 나뉜 얼굴은 이토록 단순하고 고전적인 시선의 결합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석에 앉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경험이 아니다. 가르델은 스크린 위의 훌리오를 모호한 얼굴로 바라본다. 그의 기억 없는 눈빛은 현실과 영화의 표면에 덧씌워진 완결된 의미의 기호를 걷어낸다. 에리세는 아직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시하지도, 무언가를 분명하게 의미하지도 않는 미완결의 장면으로 두 세계를 만나게 한다. 에리세는 영화의 끝에서 단호하게 선언한다. 되살아난 영화를 기적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망각한 자의 눈이다. 영화의 기적은, 기억에 잠겨 과거를 회고하는 눈빛이 아니라 스크린에 투사되는 빛을 생경하게 바라보는 기억 없는 시선에 의지하는 경험이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자들의 시선에 영화의 몽타주는 주어지지 않는다. 막스의 말처럼 “드레이어가 죽은 이후에 영화관에 기적은 없어”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자들은 망각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공교롭게도 드레이어가 사망한 이듬해(1969년)에 첫 단편을 연출한 빅토르 에리세는 그 이력을 잊어버린 듯한 마지막 장면을 조각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기억 없는 남자의 눈빛으로 영화를 다시 마주할 것을 요청한다. 이때 영화는 과거에 매개된 이미지가 아닌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솟아오른다. 스크린에는 오직 ‘남자’, ‘소녀’, ‘눈물’, ‘시선’이 존재한다. 그 이미지가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가 그것들을 미결정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기적은 영화의 것이 아닐 것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모든 기억을 잃고 두 눈을 감는 가르델의 시선을 빌려 무능력한 영화가 묘사하는 기적의 모양을 더듬거린다. 미겔이 뒤를 돌아보고, 가르델은 눈을 감는다. 에리세의 영화관은 두 시선이 만나는 장소이면서 하나의 시선을 잃어버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영화는 돌아보고 눈을 감는 관계 속에 깃든다. 기억의 원죄에 사로잡힌 우리는 이 장면에서 또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처럼 하나의 조각상에서 시작하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와는 반대로 누군가 눈을 뜨는 장면으로 끝나는 그 영화는 가난한 떠돌이와 눈먼 소녀의 사랑을 그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시력을 되찾은 소녀는 떠돌이와 재회한다. 떠돌이는 소녀를 보며 말한다. “이제 볼 수 있나요?” 무성영화의 황혼기에 공개된 <시티 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눈앞의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영화의 기적이 재회한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시티 라이트>의 (눈)빛에 두 눈을 감는 관객의 모습으로 대응한다. 영화는,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에리세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다운 것은 이것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끝이기 때문이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를 향한 고별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무능력으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기적에 가닿으려는 작은 섬광이며 영화의 또 다른 시작점으로 향하는 탄생의 희극이다. 가르델이 눈을 감는다. 검은 화면 위로 영사기에 돌아가던 필름 소리가 그친다. 이제 불 꺼진 스크린 앞에 앉은 우리가 영화를 마주할 차례다. “아이는 무엇을 아는 것일까? 그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던 세르주 다네라는 이 아이는 무엇을 알았던 것일까? ‘세계의’ 어떤 부재가 ‘세계의’ 이미지들의 현존을 훗날 요청하는 것일까? 나는 장 루이 셰페르가 그의 저서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우리의 유년기를 응시했던 영화들’이라고 말한 것보다 더 아름다운 표현을 알지 못한다.” (세르주 다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기획] 대만 콘텐츠의 현주소, 아시아 영상산업의 허브로 거듭나는 TCCF - 김소미 기자의 TCCF,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 방문기

개회 5년차를 맞이한 대만문화콘텐츠페스티벌(Taiwan Creative Content Fest, TCCF)은 올해도 순항했다. 대만 내 문화예술산업을 전담하는 문화부 산하 대만콘텐츠진흥원(TAICCA)의 막강한 지원 아래, 영화·방송을 아우르는 대규모 콘텐츠 교섭의 장을 꿈꾸는 TCCF는 마켓과 피칭 프로그램에 더불어 양질의 포럼이 종일 열리는 독특한 성격의 행사다. 11월5일부터 8일까지 나흘간 진행된 이번 행사에 관해 수에왕 대만 문화부 차관, 홈차이 TAICCA 이사장은 유망한 IP를 국제 투자자들과 연결하고 전세계 콘텐츠 전문가들간의 네트워킹을 도모하며, 산업 트렌드를 담론화하는 TCCF가 아시아 콘텐츠 산업의 허브로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음을 역설했다. 분주했던 피칭, 마켓, 포럼 등 세개의 주요 섹션을 아울러 2024 TCCF의 현지 리포트를 전한다. 피칭 워크숍을 위해 대만을 찾은 <쇼군> 프로듀서 미야가와 에리코로부터 에미상 시상식 18개 부문 수상에 달하는 영광 너머의 고민을, 배우 가진동을 비롯한 네명의 대만 아티스트들에게서 국제적 협업 프로젝트의 경험담을 들어보았다. 관광 스폿이 밀집된 타이베이 중심지를 지나 난강구에 다다르자 단연 랜드마크라 할 만한 거대 종합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개회 5년차에 쑹산 문화창의공원 일대를 떠난 TCCF의 새 무대로 자리매김한 난강전람홀이다. 이곳 7층에 올라서면 프레스, 세일즈, 심사위원(decision maker), 크리에이터 등 각자의 역할대로 배지를 부여받은 이들이 QR 코드를 찍은 뒤 전시장 안에 입장하는 정연한 풍경이 첫인상으로 자리 잡는다. 이어 펼쳐치는 거대한 부스 공간엔 베트남 텔레비전, TV도쿄, 후지TV, 라쿠텐 그룹, 싱가포르영화협회 등 전세계 88개 기관 및 기업이 저작권 거래와 네트워킹을 위해 포진해 있다. 대만 내 참가자로는 행사장 한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자리 잡은 대만 케이블TV 비디오랜드, 그리고 유저조이, 인벤텍, ADATA, 아수스 등 발군의 기술 기업들이 눈에 띈다. 100개 이상으로 전년보다 늘어난 부스에 폐막까지 약 1만명에 달하는 내빈 규모 등에서 역대 최고 기록을 알린 TAICCA는 특히 한국 참가진의 방문을 강조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TCCF에 첫 참가했고,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은 영화, 숏폼, 애니메이션 등을 아우르는 한국 창작자들로 꾸려진 사절단을 대동해 단독으로 K콘텐츠 피칭쇼를 가졌다. 지난해 싱가포르 ATF(Asia TV Forum & Market), 올해 8월 열린 2024 국제방송영상마켓(BCWW)에서 교류의 물꼬를 튼 TAICCA와 경기콘텐츠진흥원(GCA)은 개회 첫날 양해각서(MOU) 체결식도 가졌다. “기관의 규모, 추진사업 등 유사점이 많은 두 기관이 앞으로 지속가능한 협력 관계를 구축해 마켓 프로그램 교환, 공동제작 및 공동펀드 등 협력 사업 개발에 시너지를 내겠다”(탁용석 경기콘텐츠진흥원 원장)는 취지다. 로컬화 성공 전략 역동적이다. 마켓 부스와 포럼, 피칭 스테이지가 한 공간에 모인 거대 스튜디오 구조의 TCCF 전시장을 누비면서 느낀 감각이었다. 나흘간 기분 좋은 생동감은 계속됐다. 100여개의 부스를 지나면 곧장 나오는 포럼용 메인 스테이지, 그 옆 코너에 마련된 살롱에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의제가 쏟아져나왔다. 계산기를 두드리는 관계자들 너머로 창작자들이 모여 ‘대만영화는 과연 살아 있는가?’를 토론했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침체된 영화산업을 향한 우려를 거듭하다가도, 이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아시아 배우들의 활약을 짚어보는 포럼이 이어졌다. 찰럼차트리 유콜 태국 국가소프트파워전략위원회 영화·드라마 분과위원장은 ‘태국 소프트 파워’ 포럼을 통해 최근 영상산업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태국이 콘텐츠 산업의 자원을 영상 분야로 집중(2025년 예산 약 670만달러)하고, 한국과 대만을 모델 삼아 태국콘텐츠진흥원(THACCA)을 설립할 것이라 밝혔다. 그는 로맨스, 학원물, 공포, 판타지, 특히 BL(Boy’ s Love)까지 태국 문화에 밀착한 장르 서사의 약진을 강조하는 한편 “20년 전 태국에서 아피찻퐁 위라세타꾼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마이크로시네마의 회복이 필요함을 절감한다”고도 짚었다. 이처럼 TCCF는 하나의 정답을 찾는 곳이 아니라 자본과 창작의 요구를 생산적으로 충돌시키는 모색의 장이다. 그 가운데 올해 TCCF에서 유달리 각광받은 콘텐츠의 주제는 BL, 키즈, 호러,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버라이어티 쇼였다. 핵심은 현지화다. 일본 인기 만화 <체리 마호: 30년까지 동정이면 마법사가 될 수 있대>가 일본 심야 드라마로, 일본 드라마가 태국 드라마 <체리 매직>으로 리메이크돼 사랑받은 사례에 특히 관심이 모였다. 지난 3월 방영된 태국 드라마의 최종회는 인스타그램에서 200만 조회수에 육박하는 기록도 세웠다. 작품을 연출한 눗타퐁 몽콜사와스 태국 GMMTV 컴퍼니 리미티드 프로듀서는 불교 사원, 배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수로 등 현지의 특수한 공간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이와 어울리는 판타지적 요소를 극대화했다고 장면별로 상세한 설명을 더했다. 일본 드라마를 담당한 혼마 가나미 TV도쿄 프로듀서의 전략은 반대였다. 일본 드라마는 20, 30대 여성 관객을 타깃으로 보편적인 공감이 가능하도록 직장 내 갈등이나 오피스 환경을 강조했다. 시사점은, 각기 다른 로케이션 세팅을 보여준 이들의 전략이 내수시장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로컬화의 목적은 오히려 동일한 원작과 BL 장르의 관습을 색다른 배경에서 다시 즐기기 원하는 글로벌 시청자들을 겨냥하는 것에 가깝다. 한편 키즈 콘텐츠 세션에는 주혜민 더 핑크퐁 컴퍼니 사업개발총괄이사(CBO)와 조셉 얍 BBC 스튜디오스 아시아 지역 수석 브랜드 및 라이선싱 매니저가 참석해 <핑크퐁>과 <블루이>의 전세계적 성공 배경을 논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가치는 문화적 다양성과 깊이, 그리고 키즈 콘텐츠에 요구되는 ‘360도 접근성’이다. 유튜브, OTT, 케이블 사업자 등 노출 기회를 최대화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대표성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를 별도로 운영해 현지의 전통문화와 대중문화 트렌드를 검수한다. 주혜민 CBO와 조셉 얍 수석 매니저 모두 “유니버설 스토리텔링을 위한 전문가, 또는 현지 전문가를 따로 고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예능의 소박한 ‘진정성’에 반하다 TCCF 웰컴 파티에 유일한 게스트로 무대에 오른 이가 조진웅 배우라는 것, 외신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심심찮게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대한 반응이 인사 대신 들려왔다는 사실을 올해의 소소한 미담으로 남겨둘 수 있을까. 인터뷰로 만난 대만 아이돌 그룹 JC 크루 출신의 배우 JC 린은 “황정민, 하정우, 조정석, 류준열, 손예진, 구교환, 김지원을 존경한다. 시리즈, <우리들의 블루스> <슬기로운 의사생활> 등이 내 인생 드라마다. 한국에 진출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 중”이라고 열띠게 답할 정도였다. 한국 콘텐츠를 향한 관심의 절정은 행사 마지막날 열린 나영석 PD의 단독 강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만 인기 예능의 프로듀서인 A는 “오직 이 세션을 보기 위해 6만원 상당의 배지를 구입했다”고 귀띔했다. 무대에 오른 나영석 PD는 <서진이네> <뿅뿅 지구오락실> <채널 십오야>의 각기 다른 운영 전략을 설명하면서 “친밀감에의 소구”를 키워드로 꼽았다. 한국 예능이 대만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로도 “특정 그룹의 친밀하고 자연스러운 관계성을 지켜볼 때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 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감수성”이라고 해석했다. 나영석 PD는 “<서진이네>는 이서진, <뿅뿅 지구오락실>은 이영지라는 키맨을 우선 설정한 뒤 그와 어울리는 조합을 만드는 데 집중한 예능이다. 이들의 성격적 조화가 미션이나 극한상황을 만나서 각자의 장단점, 인간적인 실수, 성장 지점을 드러나게 한다. 내 모든 예능은 이 효과를 이끌어내고 밀어붙이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TCCF가 열리는 동안 타이베이 중심가 101타워 인근에서는 <뿅뿅 지구오락실> 팝업 행사도 성황을 이뤘다. 나영석 PD의 등장에 앞서 전세계적인 버라이어티 쇼의 약진과 성공 비밀을 파헤치는 개막 세션의 연사도 모두 한국 패널- 김인순 썸씽스페셜 부사장, 김지우 MBC 프로듀서- 로 구성됐다. 일본 와 한일 합작 연애 리얼리티 제작을 추진 중인 썸씽스페셜은 연애, 댄스를 키워드로 하는 합작 리얼리티쇼를 내년 2월 런던에서 열리는 밉(MIPTV)에서 구체적으로 공개할 것이라 예고했다. 앞서 는 배우 채종협 주연의 한일 합작 드라마 <아이 러브 유>의 성공을 누린 바 있다. 한편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의 김지우 PD는 <나 혼자 산다>로 대표되는 이른바 한국형 논-스크립티드 리얼리티의 매력을 강조했다. “비슷한 형식의 킴 카다시안 쇼가 스타의 화려하고 비일상적인 모습 속에서 재미를 찾는 데 반해 <나 혼자 산다>는 스타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소탈한 모습을 지닌 점에서 재미를 찾아 ‘공감’과 ‘익숙함’이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역시 기존의 여행 예능이 톱스타 섭외, 아름답고 로맨틱한 공간, 맛집과 힐링, 수십대의 카메라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덜 유명하더라도 솔직하고 리얼한 출연자들을 섭외, 작은 카메라로 대부분을 촬영해 친밀감을 더하는 작업 방식을 활용했다.” TCCF의 꽃인 피칭 프로그램은 올해 21개국 62개 프로젝트가 참가했다. 새롭게 후원사로 참여한 CJ ENM HK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이하 부천영화제)의 아시아판타스틱영화네트워크(NAFF) 및 기술, 금융, 애니메이션 분야의 다양한 단체가 후원해 총 735만TWD의 상금을 확보, 30개 이상의 시상과 국제 페스티벌 교류를 추진했다. TCCF와 교환 프로그램 MOU를 맺은 지 3년차인 부천영화제에선 올해 모은영 프로그래머가 참석해 부천영화제의 IP 개발 프로그램인 괴담 캠퍼스 선정작 <안구> 피칭을 도왔다. 그리고 대만 호러 코미디 <돈 워리 어바웃 뱀파이어>가 타이베이국제영화상, 그리고 BIFAN+ 어워드를 수상해 2025년 부천영화제 아시안프로젝트마켓 초청작으로 최종 선정됐다. 대상격인 TAICCA X CNC상은 대만 장편애니메이션 <클라우디드 레오파드>(망고워크 스튜디오), 심사위원 특별상은 한국, 카타르, 덴마크 공동제작 다큐멘터리 <더 앨리웨이>가 수상했고 허광한 주연의 넷플릭스 시리즈 <정강 경찰서>로도 알려진 인전하오 감독이 대만, 한국 합작의 코믹 스릴러 <콜 오브 랍스터>로 중화텔레콤상을 받았다. 다양한 대만 피칭 참가작을 확인한 모은영 프로그래머는 “레퍼런스로 거론된 수많은 한국영화들의 존재감에 놀랐다. 한류 붐은 예년만 못하지만 한국형 제작 모델에 대한 관심이 뜨거움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 호러 코미디 등이 강세를 보인 피칭작 수상 결과 역시 장르적 경쟁력에서 돌파구를 찾는 업계의 공교로운 관심사를 나타내는 바로미터였다.

[기획] '찬란하게 서글퍼서', <아침바다 갈매기는> 리뷰와 배우 윤주상, 양희경 인터뷰

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세월을 필요로 한다. 캐릭터의 나이와 배우의 나이가 만나 생기는 주름진 굴곡 속에서만 온전히 전할 수 있는 감정이 <아침바다 갈매기는>에 담겨 있다. 나이듦과 빈곤의 문제, 쇠락하고 갈등하는 지역 공동체, 다문화가정 내부의 서글픈 역학 관계를 바라본 이 영화는 노련한 70대 배우들이 이끌어나간다. 얼굴만큼이나 목소리도 친숙해서 공교로운 조합, 윤주상과 양희경이다. 굵직한 연극무대와 안방 드라마를 수놓아온 베테랑들이지만 영화 주연작으로서는 실로 반가운 복귀이기도 하다. 곡진한 서사를 온몸으로 추진한 배우 윤주상과 양희경을 만나 어촌의 모진 풍파에 녹아든 과정을 물었다. 일평생을 예술하는 직업에 임해온 두 장인은 자기 앞의 생을 마주하는 짐짓 무던한 자세마저 닮아 있어 그들의 무연한 깊이를 가늠하게 했다. 보험 사기극을 꾸며 남은 가족들을 부양하고 자신은 마을을 떠나기로 한 어느 젊은 선원의 결심으로부터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어촌 마을의 내막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가 주의 깊게 내려앉는 자리는 청년의 마음이 아니라 그를 조력하기로 한 나이 든 선장의 입장이다. 70대의 선장 영국(윤주상)은 15년을 자식처럼 함께해온 선원 용수(박종환)가 바다에 빠졌다고 신고한 이후로 예기치 못한 길고 지난한 소동에 휩싸인다. 보험금 지급 과정이 지지부진한 양상을 띠면서 아들을 기다리는 용수의 모 판례(양희경), 베트남에서 온 용수의 아내 영란(카작) 역시 각자의 이유로 서러워진다. 변덕스러운 바다에 둘러싸인 그들의 터전은 마을공동체의 긴밀함이 곧 족쇄와 상처의 원인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고기잡이로 변변찮은 생계를 유지하는 장년층은 진즉 지쳤고, 젊은이는 마을을 떠나고자 한다. 떠나지 못한 어떤 청년은 스스로 죽음도 초래했다. 일찍이 영국은 아버지의 강한 저지에 불응하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막내딸을 가슴에 묻은 바 있다. 마음의 무게에 반쯤 짓눌려 살아가는 그이건만 삶의 파도는 야속하게도 자꾸만 아픈 기억을 데려다놓는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내기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박이웅 감독은 데뷔작 <불도저를 탄 소녀>에 이어 이번에도 호감의 요소로 점철된 주인공을 구현하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우리는 정 붙이기 어려운 70대의 노선장, 구구절절한 말보다는 등짝을 한대 내리치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는 것이 더 익숙한 류머티즘 환자와 동행하게 된다. 굵게 팬 주름과 상심한 입꼬리로 일관하는 두 주역은 영화의 서사를 단단히 밧줄로 고정해 정확한 감정 위에 정박하게 한다. 파도와 금빛 노을, 갈매기가 오가는 세계는 문득 정감 있다가도 생존이 급선무인 현실의 비정함으로 돌변하기 일쑤다. 비밀과 오해로 점철된 사기극, 뒤엉킨 상실의 아픔, 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충돌하는 커뮤니티 내부를 다루는 박이웅 감독이 보편의 정서를 핍진하게 그리면서도, 인물의 내면세계와는 거리감을 유지해서다. 거칠고 압축적인 대사와 몸으로 인생을 부딪쳐온 이들의 정동은 바로 이런 순간에 불씨를 지핀다. 말하자면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일견 투박한 외연으로 쓰여진, 그러나 한번도 절절히 끓지 않은 적 없는 내연의 드라마다.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건드리면서 결국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빈자리에 관한 영화로 수렴된다.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멸을 전제로 한 삶의 자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떠나지 못한 딸과 마침내 떠난 아들. 그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이들은 점점 사라지면서도, 계속 살아간다. 전통적인 텔레비전 드라마의 세팅이 아니고서는 가히 희귀하다시피 했던 무대와 인물을 스크린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 <아침바다 갈매기는>이 가진 힘도 여기에 있다. 너무도 불완전한 자기 앞의 생. 어김없이 돌아오는 아침이면 그것을 다시 살아내기로 하는 사람들의 처연한 완력을 닮은 영화다.

[장윤미의 인서트 숏] 소의 삶

소 경매시장에 다녀왔다. 소들이 사고 팔리는 곳이다. 다들 소 경매시장이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텔레비전에서 종종 봤던 풍경이라 낯설지는 않았다. 수많은 소들이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채 일렬로 쭉 묶여 있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소들의 몸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리고 경매가 끝나면 소들은 새로운 주인과 함께 트럭에 실려 떠난다.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조금 난감했다. 밀폐된 공간에 수만 마리의 닭들이 사는 양계장이나 돼지들이 맞으며 끌려가는 도살장 앞에서 느꼈던 충격을 바로 받지는 않아서였다. 상대적으로 낫다는 착각이 들어서일까. 많은 인파가 내 시선을 흩트리기도 했다. 소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다. 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담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뭘 찍고 있냐, 유튜브 하는 거냐, 여기에 뭐 찍을 게 있냐. 그러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촬영하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그중 한명이 물었다. “이거 왜 찍어요?” 나는 카메라 화면에 여전히 반쯤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동물들 찍으러 다니고 있다고. 소, 돼지, 닭 등의 삶을 찍는다고. 아차, 동물의 ‘삶’이라니. 적당히 둘러대도 되는데 너무 진지하게 답을 해버렸다. 그냥 흘려들을 법도 한데 그가 되물었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잠시 정적….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별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계속 이어가자니 초면에 깊은 대화가 될 것이므로. 여기서 내 진심을 드러낼 필요도 없다. “얘네들한테 삶이 있어요? 죽는 게 삶 아니에요?” 이상하게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그러게. 죽기 위해 태어난 동물들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죽임당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20대 초반 정도 됐을까. 소를 팔러 왔다고 했다. 아마 아침부터 농장에서 트럭에 타지 않으려는 소들을 힘들게 실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연배가 있는 축산업 관계자들과 대화할 때면 소는 가축이고 이용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너무 견고하게 느껴져서 개인의 깊은 생각이 궁금해지진 않았다. 그저 경매시장에 관한 정보를 얻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젊은 사람의 말은 뭐랄까, 여운이 남아 자꾸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소에게 삶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그런데 삶이란 뭘까. 삶이란 어떠해야 하나. 그럼 나는 소의 삶이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소가 겪는 일들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소에게는 삶이 없다고, 그에게 삶을 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에게 삶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지금 현재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니까 이런 삶은 의미 없다고 말하는 건 무례하고, 이것도 삶이라는 말이 현실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지는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묻지는 못했지만 말을 건 그에게도 묻고 싶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소를 돌보았을 그에게. 소가 저렇게 사는 걸 정말 당연하게 여겨서 던진 말인지, 당연하지 않은데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건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삶’이라는 이 흔한 단어를 축산동물에 갖다 붙이니 ‘소의 삶’이라는 말이 얼마나 정치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동물의 복지를 개선해야 한다거나 인도적인 도축이 필요하다는 식의, 결국은 축산업을 견고하게 하는 언어가 아닌 돼지의 삶, 닭의 죽음과 같이 동물의 편에 있는 언어를 적극적으로 쓰고 싶다. 발화하다 보면, 우리가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폭력이 서서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경매시장에 있은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카메라 프레임 한가운데에 소들을 담으며 인간들이 ‘아무렇지 않다’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 역시 처음 경매시장에 들어섰을 때 애써 노력해야만 겨우 소의 표정이 보이고 그의 감정을 느낄 만한 상태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카메라를 들고 소에게 다가간다. 눈에 익숙할 뿐, 사실 너무 이상하고 어지러운 풍경이다. 다리에 힘이 없는지 한 소가 주저앉았는데 머리에 끈이 매여 있어서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다. 얼마나 불편할까.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한 소는 다른 소들보다 덩치가 작고 얼굴과 몸 곳곳에 버짐이 심하게 퍼져 있다. 얼굴의 끈이 닿는 부분에서 피와 진물이 흐르고 있다. 엄마 소와 같이 온 아기 소도 있다. 다리를 접고 앉은 아기 소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섰다가, 혼자가 되면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한다. 칸막이 옆의 엄마 소는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있다. 바닥에 침이 뚝뚝 떨어질 정도다.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통로쪽으로 엉덩이를 향한 소들이 늘어선 모습은 모욕적이다. 친구는 이를 두고 “대신 수치심을 느낀다”고 표현했다. 문득, 과거의 노예시장도 이렇지 않았을까.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풍경이 지금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물의 경매시장은? 잊히지 않는 소가 있다. 경매시장의 한쪽에서 수의사들이 소들에게 접종을 하고 있었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소들이 크게 울었다. 그중 한 소에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칸막이 옆의 소가 주사를 맞으며 소리를 지르자 이 소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알아채지 않을 수가 없다. 그 표정에 서린 공포, 두려움을. 소는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줄로 묶여 있어서 도망칠 수 없다. 이제 자신이 주사를 맞을 차례가 되자 소는 수의사가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펄쩍펄쩍 뛴다. 주삿바늘이 몸에 들어가자 마구 소리를 지른다. 이제 수의사는 접종 완료의 표시로 파란 래커를 소의 이마에 뿌린다. 소는 또 깜짝 놀란다. 살아 있다. 살아서 느끼고 있다. 이마에는 대충 그어진 파란 줄이 남았다. 래커 칠은 직전에 본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 소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으로, 또 카메라로 소를 가까이서 보고 그의 표정을 보며 감정을 알아채는 건 사실 힘들다. 마음이 힘들다. 그렇다고 동물에게 신경 쓰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비평]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부모 바보>

영진(안은수)은 전과가 있다. 이 정보는 영화 초반부, 지각한 영진이 진현(윤혁진)에게 핀잔을 들은 뒤 밖으로 나가면 옆자리 이 과장의 빈정대는 대사(“전과 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로 전달된다. 이런 대사가 영화의 도입에 한번 기입되고 나면 관객은 그 내막을 궁금해할 수밖에 없다. 움직임은 굼뜨고 말은 어눌하며 늘 무표정한 영진은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복지관장이 매일 캠코더를 들고 다니는 영진을 수상하게 여기며 ‘몰래카메라’를 연상하듯이, 자신을 변호하기는커녕 모든 종류의 오해와 왜곡에 스스로를 내놓는 이 미심쩍은 청년에게 혹시 험악한 폭력의 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우리는 내내 은밀하게 짐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진현의 말마따나 “잡범”이었다. 텔레마케팅 일을 하던 친구의 작업대출에 연루되어 6개월간 징역을 살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행위는 공적인 언어로는 사기이고 불법이지만, 동시에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유감스러운 사태의 일면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진현이 실소와 함께 영진더러 “잡범이네”라고 말할 때, 이 장면에는 어딘가 안도감이 있다. 진현은 이 순간 그 사실을 조금은 다행으로 여긴 건 아닐까? 진현과 관객이 공유하던 비밀스러운 오류가 정말로 오류였음이 드러나면서 이 장면에서는 희미하게나마 우정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음 장면에서 진현이 관장에게 직접 영진의 겸직 허가를 요청하고, 곧이어 그의 생일을 축하하며 푸짐한 식사까지 대접하니 말이다. 달리 말해 <부모 바보>는 ‘잡범’을 위시하여 내 주위에 편재하는, 동의할 수 없는 타자의 이질성을 (재)감각해나가는 과정을 비춘다. 내게 <부모 바보>는 유달리 불화하는 방식으로서 지탱되는 우정을, 그리고 그 우정을 지속하(고 또 어그러뜨리)는 어떤 도덕적 태도를 들여다보는 영화였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잡범답게도 영진은 자주 지각을 한다. 그런데 어딘가에 늦는다는 건 한편으론 적어도 다른 곳에(는)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기 늦는다면 거기에는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일종의 말장난이지만, 구태여 곱씹는 이유는 기실 이 영화의 관객이라면 영진이 누구보다 부지런한 인물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이동한다. 방이 없으니 먹고 자고 누울 곳이 없으므로 늘 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러다 어딘가에 (잠시) 정착하면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린다. 이 영화에서 진현이 자는 장면은 나와도 영진은 겨우 졸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영진이라는 빈틈을 통해 진현의 일상을 이루던 균열이 드러난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이 잡범의 흔적들이 지금 진현을 깨우고 있다고. 취침이 아니라 기상으로, 안락한 수면이 아니라 불안한 졸음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러니까 <부모 바보>의 규칙은 이런 것이다. 마치 숨바꼭질처럼, 누군가가 사라지고 다른 이는 그를 찾아 헤맨다. 대개 영진이 뭔가를 (안 하거나) 한다. 그럼 진현이 그를 따라 나선다(와중에 겹쳐지는 순례(나호숙)의 이야기는 이와 반대 방향에 가깝다. 순례는 진현이 원하지 않음에도 그를 계속해서 찾아온다). 이를테면 어쩌다 진현의 집에 얹혀 지내게 된 영진은 자주 생라면을 부숴 먹는데, 그러다 라면 부스러기를 밟은 진현이 영진을 찾으러 주차장으로 나간다. 문제는, 찾더라도 그를 일시적으로 자리에 돌려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 타자를 내가 어찌 할 수 없다는 감각, 그리고 내가 그를 어찌 할 수 없으므로 그가 타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생경한 감각으로 그려낸 영화를 나는 근래에 본 적이 없다. 이는 <부모 바보>가 사회복지관이라는 장소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찾는(searching) 여정의 주체가, 다양한 민원인과 지역 주민의 방문을 받는 사회복지사 진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제도(와 그 바깥)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실무자이지만 이 적용과 집행은 탁상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관장은 사무실의 자리 배치가 권위적이니 한번 바꿔보자, 는 말을 매우 권위적으로 한다(게다가 자리 배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혀 바뀌지 않는다). 이 끄떡없는 무대에서 진현은 누락된 현장을 발굴하는 일을 떠맡는다. 주체와 타자의 반복되는 대결을 불화라는 조건을 중심으로 다루는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에서 얼핏 김덕중 감독의 <에듀케이션>이 머릿속을 스치기도 한다. <에듀케이션>에서 관객은 (그러고 보니 공교롭게도 사회복지학과 졸업생인) 성희(문혜인)를 경유하여 소년 현목(김준형)을 ‘못마땅해하는 동시에 측은해하는’ 양가적인 입장에 처하게 된다. <부모 바보>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어른인 진현의 입장에서 영진을 바라본다. 그러나 <에듀케이션>의 불화가 누적된 갈등을 마침내 물리적 충돌로 터뜨리는 발산으로 귀결된다면, <부모 바보>는 여태 가까스로 적층된 압력을 인물의 실종으로 순식간에 휘발시킨다. 전자는 상대가 여전히 눈앞에 있는 데서 대결하는 와중에 닫히지만, 후자는 그의 존재를 확신할 수조차 없게 된 사태에서 중단된다. 실상 타자와의 문제는 주체 내부의 문제와도 멀지 않다. 내가 주체적인 관찰자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발각될 때, 그야말로 세에서 가장 낯선 자신이 될 때의 까마득함이야말로 진정한 타자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부모 바보>에서 권력적인 시선을 가진 자는 진현이 아니다. 시점숏이 드문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무언가 렌즈에 담고 포착해내는 인물은 영진이다. 그렇다면 영진이 조는 이유는 그가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가설을 제안해볼 수도 있다. 그가 졸고 있다는 것은 표면적인 진술이다. 그보다 그는 자신의 앞을 회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가령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둘의 정면 모습은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구도다. 평행하게 앉아 시각적 교류를 포기하기. 또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등장하는 어떤 날, 진현이 영진을 향해 “차라리 니가 부럽다”라는 말을 던지자 영진은 역시 졸고 있는데, 이를 보고 진현이 자리를 떠나자 별안간 두눈을 뜬 채 앉아 있는 영진의 클로즈업이 담긴다(그리고 다음날 아침, 그는 또 말없이 사라진다). 그는 정말 졸았던 게 맞을까? 존재의 증빙과 사라짐 공간은 주체가 여기에 있을 때나 성립되는 현장이므로, 진현은 당연히 영진의 집에 가본 적이 없다. 영진이 아예 사라져버리자 그제야 진현은 영진이 노숙하는 다리 아래로 향한다. 조촐한 침낭과 여행가방, 페트병 등이 널브러져 있다. 그리고 쓰레기종량제봉투가 있다. 영진은 왜 그 어둡고 앙상한 곳에서마저 쓰레기를 모아두었을까. 잠깐, <부모 바보>에는 한밤중 청소차가 도시의 쓰레기봉투를 수거하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곧장 붙는 것은 진현의 수면 장면이다. 그 시간에 영진은 거처를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깊은 밤에 이동하는 자는 제대로 보지 못해 어렴풋한 흔적을 남긴다. 바닥에 떨어진 라면 부스러기, 점차 녹아 농으로 굳는 촛불, 흘러내려 물이 되는 얼음과 같은 상태야말로 영진이 스스로를 존재한다고 증빙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에 가깝다. 제도라는 모눈을 벗어나는 얼음처럼 영영, 그러나 이물을 남긴 채 그는 사라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