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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중년이 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의 다이앤 키튼

<애니 홀>의 주인공, 멋진 중년 되다 20여년 전 우디 앨런의 <애니 홀>로 유니섹스 패션 돌풍을 일으켰던 다이앤 키튼. 넥타이에 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영화팬들은 아직도 “뉴욕에서 애니 홀처럼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는 판타지를 간직하고 있을 정도다.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영화에 출연해온 키튼은 80년대 말부터 연기 외에도 제작과 연출에까지 발을 넓혔다. 특히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돌풍을 일으킨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키튼의 매력은 약간은 새침해 보이지만 마음은 따뜻한 도시여성을 연기할 때 발산된다. 우디 앨런이 키튼의 실제 성격을 바탕으로 쓴 <애니 홀> 이후 이같은 ‘맞춤 배역’을 맡지 못했던 그녀는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낸시 마이어 감독 덕분에 또 한번 기억에 남는 연기를 선보였다. 키튼은 마이어가 감독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로 올해 코미디 부문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이미 수상했고,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라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는 잭 니콜슨과 키아누 리브스가 키튼의 연인으로 출연하지만, 관객의 호응은 중년의 나이에 뒤늦게 ‘참사랑’을 찾는 여인을 연기한 키튼에게 쏟아지고 있다. 얼마 전 이 작품의 홍보를 위해 뉴욕을 찾은 다이앤 키튼을 만났다. “내 나이가 벌써 58살이다. 이 나이에 사랑 때문에 가슴 들떠하고,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배역을 다시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그런 역할을 맡은 지도 참 오래됐었다.” <마빈의 방> <레즈> <애니 홀>에 이어 이번 작품으로 키튼은 4번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에게 트로피를 안겨준 것은 그녀만의 특유한 매력을 발산했던 <애니 홀>.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는 <레즈>에서 함께 출연했던 잭 니콜슨과 호흡을 맞춘다. 50대 이혼녀 극작가 에리카와 20대 여자만을 사귀는 바람둥이 음반제작자 해리의 이야기는 어긋난 듯 시작되지만, 키튼과 니콜슨의 연륜만큼 부드럽게 맞아 들어간다. 이번 작품에서 전신 누드로 출연하는 그녀는 “따로 준비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각본에 나와 있는 장면이기 때문에 망설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나이의 여자의 몸을 영화 속에서 보여줘야 한다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전신 누드 촬영 장소에는 최소 인원의 촬영팀만 참석했고, 니콜슨은 물론 없었다고 한다. “누드장면이라지만 멀리서 와이드숏으로 몇초 만에 찍어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베드신 촬영할 때가 오래 걸렸지.” (웃음) 베드신 촬영에 걸린 시간은 무려 3주에 이른다고. 이같은 ‘자연산 몸매의 노출’로 중년 여성팬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데 대해 “요즘 여성들 사이에는 성형수술이 화장의 일부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는 키튼은 특히 할리우드와 TV에서 보여주는 모습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요즘 TV에는 시청자들에게 성형수술을 시켜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런 프로그램이나 성형수술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서, 미의 판단 기준은 과연 무엇이고 누가 세우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다. 그냥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키튼 자신은 심각한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배우이기 때문에 배역을 가리진 않는다”고 말했다. 결혼을 한 적은 없지만 두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있는 키튼은 그동안 출연한 작품 중 실패한 것도 많았다. 자기처럼 성공과 실패의 곡선이 심한 배우도 드물 것이라며, “난 그저 연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는 그녀는 자신은 절대로 아이콘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머가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키튼에게 “잭은 가장 환상적인 파트너”다. 어색하기 쉬운 베드신에서 니콜슨은 유머와 이야기 보따리로 키튼은 물론 스탭도 편하게 해주었다고. “잭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찌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지… 누군가 쫓아다니면서 녹음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녀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장면은 레스토랑 밖에서 니콜슨과 싸우는 신이다. “사랑하면 다치게 마련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아픔이 따라온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긴장감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무엇인가에 열정적으로 빠져든다는 것은 참 멋진 것 같다. 에리카는 결혼도 해봤고, 딸도 있지만 5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진정한 사랑을 못해본 여자이기 때문에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더 소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또 다른 연인 줄리안 역으로 출연하는 키아누 리브스와의 키스는 어땠냐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키튼은 가까이에서 본 키아누 리브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느냐고 반문했다. “꼭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 같다”는 그녀는 “키스하기 전에 창피하고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시나리오를 열심히 따라가면서, 소녀 같은 수줍음은 머릿속 한구석에 잘 숨겨두었다”며 웃었다. 잘생긴 젊은 의사와 60대의 플레이보이를 비교해달라는 요청에 키튼은 “키아누와 잭의 캐릭터를 비교하자면. 키아누는 판타지고, 잭은 현실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판타지는 아름답지만, 서로의 교감을 찾지는 못한다. 반면에 잭의 캐릭터는 에리카에게 어울리는 친구 같은 애인이다. 개인적으로도 에리카가 해리와 맺어지는 것이 더 좋다.” 오는 2월29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키튼은 <몬스터>의 샤를리즈 테론과 대적하게 된다. 그러나 <타임> 매거진 등 일부 미디어에서는 키튼의 환상적인 컴백에 몰표가 쏟아질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조국을 메쳐라

도쿠야마 마사모리와 야키야마 요시히로. 일본 오사카 태생의 29살 동갑내기 청년들이다. 도쿠야마는 슈퍼플라이급 남자권투 세계 챔피언이고, 야키야마는 일본 남자유도 81㎏급 국가대표 선수다. 도쿠야마는 조인주를 꺾고 세계 챔피언이 됐고, 야키야마는 부산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안동진을 이기고 금메달을 땄다. 그들이 한국인을 물리칠 때마다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도쿠야마는 홍창수, 야키야마는 추성훈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날, 바닥에 배를 깔고 채널을 돌리다 MBC-ESPN에서 기묘하다면 기묘한 장면을 보게 됐다. 기모노를 입은 라운드걸이 북한 노래 <조선은 하나다>에 맞춰 링을 돌고 있었다. 1월3일 오사카에서 열린 홍창수 선수의 8차 방어전이었다. 녹화 방송인 줄도 모르고 넋 놓고 싸움 구경을 했다. 지루한 경기 끝에 홍창수의 판정승. 그러나 경기보다 경기 외적인 요소가 더 재미있었다. 조선적 청년 홍창수의 트렁크에는 어김없이 ‘One korea’가 박혀 있었다. 그런데 머리 색깔은 노랗다. 레드 콤플렉스의 나라에서 살아온 내게 노란머리의 (조)총련계 청년이란 마치 형용모순처럼 느껴진다. 그의 낯선 외모 속에는 총련계 동포사회, 특히 2세, 3세들의 정체성이 녹아 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라는 ‘풀네임’을 가진 총련사회는 일본사회 속의 섬이다. 꼬아서 말하면, 고도 자본주의 속의 봉건사회, 뭐 그쯤으로 생각된다. 총련계 아이들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학교에 다니고, 총련계 신용조합에서 돈을 빌려 장사를 한다. 정과 이념과 돈으로 얽힌 끈끈한 공동체인 셈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일본 아이들이기도 해서 X-재팬을 모를 리 없고, 미야자키 하야오를 싫어할 리가 없다. 홍창수의 노란머리는 이런 불협화음 혹은 기묘한 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 봉건적 공동체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같은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본국에서 식민지 출신의 소수자로 살아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들은 이지메의 위협 속에서도 ‘본명 선언’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홍창수가 “링에는 38선이 없다”는 멘트를 ‘날리는’ 센스도 그 자존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또한 나는 이들을 연민한다. 불행히도 그들의 조국이 현실에서 패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의 패배를 바다 건너에서 그저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분단의 진정한 희생양일지 모른다. 하지만 홍창수의 링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한다. ‘조선인’ 홍창수가 기모노의 여인을 링에 세운 것처럼, 재일동포 2세, 3세들이 일본을 ‘또 하나의 조국’으로 받아들이기를 희망한다. 지난해 9월 같은 채널로 본 추성훈의 일그러진 얼굴도 잊을 수가 없다. 세계유도선수권대회 81kg 준결승, 일장기를 가슴에 단 청년이 목조르기를 당하고 있었다. 얼굴이 핏빛으로 변해도 청년은 기권하지 않았다. 겨우 목조르기를 빠져나왔지만, 이미 청년의 몸은 탈진상태였다. 아쉬운 판정패. 하필이면 그의 고향 오사카에서였다. 오사카는 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도시다. 이념으로 나뉜 동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등돌리고, 서로가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던 비애의 도시이기도 하다. 옛날 그 도시의 거리에서는 민단과 총련으로 나뉜 동포청년들 사이에 칼부림이 나기도 했다. 그 한서린 도시에서 추성훈이 금메달을 따기를 간절히 응원했다. 추성훈이 일장기를 달게 된 사연 또한 각별하기 때문이다. 한때 추성훈은 한국 대표선수를 꿈꾼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조국은 재일동포 청년에게 태극마크를 허하지 않았다. 한국 유도계의 텃세가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고, 태능선수촌의 훈련 방식은 그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그는 일본 귀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부산아시아 경기대회에서 한국 대표 안동진을 물리쳐 실력을 입증했다. 이 재일동포 청년에게 한국 관중은 야유를 퍼부었고, 일부 언론은 ‘조국을 메쳤다’고 썼다. 그러나 그는 귀화 이유를 묻는 한국 언론의 집요한 추궁에 “나의 유도에 맞는 나라를 선택했을 뿐”, “유도에는 국적이 없다”는 쿨한 말로 응답했다. 나는 이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청년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추성훈 아니 야키야마 요시히로 선수가 떳떳하게 일장기를 달고 아테네올림픽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는 장면을 보고 싶다. 홍창수 혹은 도쿠야마 마사모리 선수가 그의 바람대로, 비무장지대에서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더 많은 재일동포 2세, 3세 젊은이들이 불행한 역사를 딛고 ‘한국계 일본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조국은 하나일 수도 있지만, 여러 개일 수도 있다.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무서운 확신, <곰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 <곰이 되고 싶어요>를 보고, 코를 훌쩍이며 ‘곰 소년’을 처연하게 바라보다 “어제 저녁 청계산으로 달아난 늑대를 잡기 위한 포획작전이 계속되고 있지만 늑대는 요리조리 포획망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들으면 난 광분한 나머지, 달아난 동물이 잡히지 않길 기도한다. 짠한 건 늑대가 아니라 늑대를 무서워하는 우리가 아닐까. 늑대는 인간만을 두려워하지만, 우린 계산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을 두려워하잖아. 애완동물에겐 간도 쓸개도 내주면서 야생동물에겐 총알부터 갈기도록 길들여진 우린,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에 공포를 느끼도록 조련된 걸까. <곰이 되고 싶어요>에 코를 훌쩍이면서도, ‘곰이 된 소년’을 처연하게 바라보는 한 조각 의혹은 뭘까. 난 아직도 ‘암만 혀도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젤이여!’라는 무서운 믿음을 버리지 못했구나. 나를 인간으로 가두는 힘센 그물들에 놀라 움찔, 닭살이 끼친다. ‘인간아빠’가 찌른 작살로 ‘곰엄마’를 잃은 뒤, 곰-소년은 인간의 문명에 던져진다. 광포하게 질주하는 자동차, 셋만 모여도 하나를 왕따로 만드는 끔찍한 놀이문화. 그는 자신에게 덧씌워질 인간의 영혼이 두렵다. 세 가지 관문을 통과한 자만이 곰이 될 수 있다. 첫 번째 문턱은 거대한 해협. 수염고래는 분노한 바다에 저항한다. “넌 너무 잔인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줘야해.” 두 번째 문턱은 거센 북풍.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사람은 도와야 한댔어.” 진노한 북풍의 저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소떼는 소년을 에워싸며 바람막이가 된다. 마지막 문턱은 고독. 저만치 앞에는 가장 행복했던 기억, ‘곰엄마’의 뒷모습이 있다. 바로 뒤에는 가장 공포스런 기억, 이빨을 드러낸 늑대의 추격. 이제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다. 우렁찬 울음을 토해내며 발길질로 늑대를 물리치는 건, 항상 소년을 지켜주던 엄마곰이 아니라 소년, 아니 이제 곰이 된 자신이다. 곰-소년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인간엄마와 인간아빠. 그들은 연인을 잃고 슬피 우는 곰-소년의 몸짓을 읽어낸다. “살아 있는 것은 사슬이 아니라 사랑으로 붙드는 거지. 떠나거라, 얘야.” 이만하면 웅녀의 사람 되기보다 사람의 곰 되기가 몇 만배 힘들지 않은가. 단군신화는 홍익인간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를 가르친 건 아닌지. 당최, 곰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이 되겠다고 용을 쓸까. 마늘이랑 쑥, 계속 먹으면 좀 물리긴 하겠지만 그래도 ‘보양식’ 아닌감. 털도 발톱도 용맹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해협을, 북풍을, 게다가 가장 끔찍한 고독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이토록 아름다운 곰을 ‘미련 곰탱이’라는 불경스런 언사로 모욕하다니. 불가능에 도전하는 친구를 도와준 기억도, 또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존재를 걸 용기도 아스라한 나. 다행히 ‘곰스런’ 친구는 알고 있다. 대책없는 호기심이 타인의 상처가 됨을 몰랐던 아홉살의 난, 물었다. “삼촌도 걷고 싶지?” ‘1급 장애인’이었던 삼촌은 엷게 웃었지. “그래. 걷고 싶다.” 하늘이 내게만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때마다, 떠오른 건 위대한 예술가나 혁명가가 아니라 삼촌이었어. 삼촌, 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존재의 집을 허물고 이곳을 떠날 때, 내 싸늘한 시신 곁에서 심장이 마르도록 울어주는 친구가 그토록 많은. 난 이렇게 잘 걸을 수 있는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먹고 싶은 음식도 가고 싶은 곳도 많은데, 삼촌은 무슨 배짱으로 아프다는 말 한번 않고 우릴 떠났어? 삼촌, 언제부터 내 꿈은 고작 마감 잘 지키는 글쓰기 기계로 닫혀버렸을까. 삼촌, 나 이제 꿈을 조금만 더 크게 가져도 될까. 이젠 이런 것들이 되고 싶어. 너의 젖은 눈시울을 말려주는 따스한 햇살 한 줄기. 탁해진 머릿속을 헹궈주는 맑은 바람 한 자락. 네 입속으로 들어가, 네 타는 목마름을 어루만지는 맑은 술 한 모금. 삼촌, 거긴 어때? 참한 여자 많우? 거기선 맘껏 사랑할 수 있는 거지? 정여울/ 미디어 헌터

[김형태의 생각도감] 집10 - [1974년의 양옥집]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단어가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그런 집을 ‘양옥집’이리고 불렀다. 흔해빠진 슬레이트 지붕이나, 기와지붕보다는 훨씬 예리한 각도를 가진 초록색 뾰족지붕에, 2층에는 테라스가 있고, 집 한쪽에는 담쟁이 덩굴도 있고, 높은 돌담에 장미넝쿨이 멋지게 흐드러진 ‘일종의 서양식 저택’을 우리는 ‘양옥집’이라고 불렀다. 내 나이 열살이나 되었을 즈음의 1974년에 나는, 덕지덕지 판잣집들이 즐비한 청계천 뚝길을 지나 지금의 마장동 적십자사 앞을 지나는 등굣길에, 길 건너편에 밝고 예쁘고 동화 같은 뾰족지붕을 가진 양옥집 한채를 지나 다녔다. 길 하나를 건너 그 양옥집 근처에는 어쩐지 햇빛이 더 많이 내려 쬐이는 듯했고, 바람도 훨씬 잔잔한 듯했고, 무엇보다 눈부시게 보였던 것은 그 길가에서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아이의 샛노란 사립학교 교복이었다. 당시의 마장동 따위에 경유하는 노란색 스쿨버스란 마치 매일아침 미국에서 출발해서 양옥집에 사는 아이들만 태워가지고는 부랴부랴 다시 미국의 꿈과 환상의 학교로 데려가는 우주선처럼 보여졌다. 몇푼 안 되는 육성회비를 며칠 만에 겨우 받아가지고 등교하던 날에도 그 양옥집 앞을 지날 때는 장미내음이 물씬 풍겼고, 노란 교복은 스쿨버스가 늦다고 제 성질껏 투정을 부리고 있었고, 분명 우리집을 나설 때 우중충했던 날씨는 어느새 교향악이 울려퍼지듯 화창해져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 유년의 기억 속에서 양옥집이란 완벽한 풍요와 행복의 대사관으로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 넓은 정원 뒤를 잇는 장미 꽃밭/ 높고 긴 벽돌 담이 저택을 두르고/ 앞문에는 대리석과 금빛 찬란도 하지만/ 거대함과 위대함을 자랑하는 그 집의/ 이층방 한구석엔 홀로 앉은 소녀/ 아-아- 슬픈 옥이여 아-아- 슬픈 옥이여” “백색의 표정없는 둥근 얼굴 위의/ 빛 잃은 눈동자는 햐얀 벽을 보며/ 십칠년의 지난 인생 추억없이 넘긴 채/명예와 재산 위해 사는 부모님 아래/아무 말도 없이 아무 반항도 없이/ 아-아- 슬픈 옥이여 아-아- 슬픈 옥이여”(후략) - 1974년 한대수 작사·작곡 <옥의 슬픔> 10년이 조금 지나 대학생이 되어서 나는 한대수의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 노래가사에 묘사된 집은 분명 내가 동경하던 ‘양옥집’을 그린 것은 분명한데, 2층방 한구석에 슬픔이 있다니.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양옥집은 슬픔과는 거리가 멀어. 양옥집에도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행복은 어디 있다고. 그래선 안 된다고. 그럴 리가 없다고. 그렇게 거대하고 위대하고 예쁘고 아름다운 부잣집에까지 슬픔이 깃들 리가 없다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은 그랬는지, 이제는 해밝던 양옥집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내 유년의 동경도 점점 허물어져 간다. 글·그림 김형태/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

[셀프 인터뷰] 강우석, 강제규

힘찬 ‘태극기’ 할리우드랑 붙어볼 만. 강우석이 강우석을 말한다 60년생, 성균관대 영문과, 93년 강우석 프로덕션 설립, 같은 해 시네마서비스 대표 취임. 감독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9), <투캅스>(93), <마누라 죽이기>(94), <투캅스2>(96),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98), <공공의 적>(2001) 등. 제작 <미스터 맘마>(92), <초록물고기>(96), <투캅스3>(98), <킬러들의 수다>(2001) 등 다수. 출발 할리우드 키드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 졸업 뒤 무작정 충무로에 들어와서 고생은 험하게 하고 수입은 제로인 조감독 생활을 7년 넘게 했다. 데뷔 안하고 버티다가 안정된 제작사를 만나서 데뷔한 강제규 감독과 달리 나는 여러 영화사를 전전하다가 작은 영화사에서 첫작품 <달콤한 신부들>로 88년 데뷔했다. 터닝포인트 감독으로 터닝포인트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89), 이후 밥벌어 먹기 위해서 계속 찍다가 제작자로 나서게 된 작품이 <미스터 맘마>(1992), 내 회사를 차리고 내 작품을 찍게 된 영화는 <투캅스>(93)부터였다. 가장 큰 터닝포인트는 외자유치를 하면서 시네마서비스의 몸집이 부쩍 커진 2000년도 일 것이다. 고민 지금은 큰 고민 없지만 시네마서비스가 두세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영화를 관둘까 하는 이야기를 여러번 했다. 한두편의 영화가 잘 돼도 모이는 게 없고 번 돈은 순식간에 날아가는 일을 수차례 겪으면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 고민은 내가 감독 일에 치중했을 때, 제작하는 영화 편수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내가 보는 강제규 남들은 엄두도 못내는 걸 밀어붙이는 뚝심이 있다. 규모 뿐 아니라 드라마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쫙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저 상황에서 왜 저 대사를 쓰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어느 새 영화 안에 들어가있는 걸 느끼게 한다. 성격을 보면 이십대 때부터 별명이 애늙은이였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어려워도 힘든 티를 내지 않고 느긋해 보인다. 그런 성격이 남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영화를 찍게 하는 힘인 것같다. 또 그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단점일 수도 있다. 흔들림없는 ‘실미도’ 편안한 감동. 강제규가 강제규를 말한다 61년생, 중앙대 연극영화과, 98년 강제규 필름 설립. 감독 <은행나무 침대>(96), <쉬리>(99) 제작 <단적비연수>(2000), <베사메무초>(2001), <몽정기>(2002) 출발 어릴 적 친구네 집이 극장을 하는 덕에 헐리우드 키드로 컸지만 영화를 한다는 건 시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아버지가 카메라를 사서 사진찍는 것을 보고 나도 사진을 배우면서 영화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됐다. 대학 때부터 선배들의 ‘찍사’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 나 역시 조감독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악몽 때문에 설렁탕을 4년 동안, 자장면을 3년 동안 입에도 안 댔던 기억이 난다. 터닝포인트 대학 졸업 뒤 시나리오 작가 생활을 하다가 96년 <은행나무 침대>로 데뷔했다. <쉬리>부터 내 작품을 내가 직접 제작하게 된 건 조감독할 때부터 주변에서 어떤 의지나 기대가 자꾸 좌절되는 것을 봐서였다. 나 역시 <은행나무 침대> 때 신씨네 이외에는 모두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의기투합할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 직접 제작에 나서게 됐다. 고민 영화 찍을 때는 어렵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쉬리> 찍고 3년 동안 바깥일 하면서 정말 힘들었다. 비즈니스를 하다보니 인간관계에서 크고 작은 업무를 풀어가기가 쉽지 않아 정신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내 정체성이 뭔가 하는 고민도 들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으면서 고민에서 자유로워졌고 내 작품에 충실하는 게 나 자신과 우리 영화에도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가 보는 강우석 얼마전 일생을 분, 초 단위로 나눠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살았다는 어떤 물리학자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며 강우석 형을 떠올렸다. 영화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게으른데 형은 한시간도 다른 데 소모하지 않고 영화에만 매진해 왔다.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에 꺾이지 않는 독자성을 가지게 된 데는 그런 형의 에너지가 큰 역할을 해온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담배라도 끊었는데 형은 술 담배 다 한다.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60, 70대까지 현장에서 뛰며 후배들의 귀감이 돼야 할 텐데.

강제규의 대단한 혹은 대담한 도전, <태극기 휘날리며> [3]

9인의 대표스탭이 말하는 <태극기 휘날리며> 제작과정 8고지 점령기 “이건 내 영화 아니야.” 강제규 감독을 포함해서 <태극기 휘날리며>에 참여한 스탭들이 항상 뇌까리는 말이다. 제 혼자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는 것. 팀워크가 없었다면 300일 동안의 사투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이들의 말은 현장을 한번쯤 들여다본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법하다. 아니, 영화를 보면 이들의 말이 엄살이나 과장이 아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여기, 200명의 스탭들을 대표하여 9명의 ‘태극인’들이 모였다. 워낙 바쁜 영화인들이라 가상 테이블을 마련했다. 지금까지 이들과 인터뷰한 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장면 코멘터리를 꾸며 내놓는다. 지난하고 수고로운 제작과정을 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지만. <인터뷰 협조해준 제작진> 감독 강제규 I 촬영 홍경표 I 프로덕션디자인 신보경 I 특수효과 정도안 I CG 강종익 I 무술 정두홍, 김민수 I 사운드 김석원 I 특수분장 신재호 #6 종로-거리 일각 1950년 6월24일. 진태의 구두 따∼윽 소리를 흉내내는 진석. 두 사람의 다정한 한때 홍경표 |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오빠는 풍각쟁이>입니다. 역사적으로만 보면 좌·우익 대립이 심했던 때죠. 그런데 서로 비방하는 현수막 하나 안 보이죠. 일부러 안 걸었어요. 가족이라는 품 안에 있으면 시대와 상관없이 행복하다는 걸 말하는 거죠. 자연광을 이용해서 디테일한 사물들까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애썼던 장면이에요. 디지털 색보정 때는 최대한 밝은 브라운 톤으로 채색한 다음에 뽑아냈죠. 강제규 | 처음엔 나도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풍경일 거다, 사람들도 다들 생기없이 축 처졌을 거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진자료를 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꽃단장한 여인네들이 양산을 뽐내고 넥타이 맨 말쑥한 신사들도 보이고. 생동감 넘치는 거리의 모습이 느껴진 거죠. 왜곡했다기보다는 특정 분위기를 강조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느라 크랭크인 전부터 촬영팀이 사전 테스트를 무진장 했어요. 노 라이팅 상태라 기존 데이터를 사용할 순 없고 하니까. 인공조명을 갖고서도 몇번 테스트를 했는데 결과 보면 한눈에 가짜 같다는 느낌이 나서. 강종익 | 오픈세트에 자연광이니. 촬영 끝나고 나면 저희 팀도 거울처럼 100% 반사율을 갖고 있는 메탈볼을 현장에 놓고서 물체의 반사 정도를 체크해야 했어요. 신보경 | 서울은 화려하고 장식적인 공간이에요. 여성적인 아기자기함을 갖고 있는. 그래서 세트의 메인 도로를 정할 때 일부러 휘어진 곡선 길을 선택했죠. 재밌는 건 준비하면서 당시 상하이나 일본의 긴자 거리 등을 찍은 사진들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종로거리랑 비슷하다는 거예요. 글로벌 시대라는 수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그런 풍경이 존재한 거죠. 김석원 | 그림이 너무 좋아서 소리작업은 편했어요. 굳이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되니까. 강제규 | 부천의 <야인시대> 세트에서 찍었는데. 처음에는 화신백화점까지 세트로 재현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포기했죠. 아마 미술팀이 힘들었을 거예요. 드라마가 연장 방영하는 바람에 작업기간이 줄어들어 10일밖에 못 줬으니까. #18 대구역사-대합실 역무원과 승강이를 벌이는 피난민들 신보경 | 전방으로 가는 것 외에는 기차 운행이 중단됐다는 말에 피난민들이 우왕좌왕하는 장면입니다. 곧 진태와 진석은 징집되지만 아직은 전쟁을 체감하지 못해요. 김석원 | 이어지는 장면에서 증기기관차가 등장합니다. 강 감독이 꼭 담아달라고 주문했던 게 바로 진짜 증기기관차 소리였어요. 기적소리만으로 그 시대 느낌을 전할 수 있으니까. 그거 구하느라 충청도에서 방글라데시까지 뒤졌는데 섭외에 실패했어요. 하루종일 운행 안 하고 내줄 수는 없다는 것인데.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사운드 소스를 공수해왔습니다. #31 낙동강-능선전투지 첫 전투의 혼란스러움 속에 뛰어든 진태와 진석 홍경표 | 여기선 구릿빛 스킨 톤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습니다. 클로즈업 장면에서 배우들이 마치 스크린을 뛰쳐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이때만 해도 진태는 감정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평양 시가전을 기점으로 후반부 전투장면으로 갈수록 점점 화면의 채도는 낮아집니다. 마지막 두밀령 전투에선 무채색에 가까워져요. 디지털 색보정 하면서 탈색을 강하게 한 건데 인간성을 잃고 결국 지옥의 삭막함에 다다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겁니다. 강제규 | 인물들의 움직임이 분절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개각도 촬영을 많이 했죠. 이미지 셰이크도 효과적으로 쓰려고 했고. 홍경표 | 잘못하면 별로 재미를 못 보거든요. 개각도 촬영은 그래서 시나리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힘 줘야 할 장면부터 정했죠. 진석 같은 경우는 여기서 심장발작으로 괴로워하는 장면에 줬고. 진태는 후반부에 영신이 죽고 난 뒤 신임 대대장과의 대면장면에서 격렬하게 쓰였습니다. 강제규 | 개각도 촬영이라고 하지만 다 똑같은 느낌은 아니죠. 홍경표 | 각도를 줄일 경우 분절이 더욱 심해지죠. 무엇보다 어떻게 들고 찍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집니다. 이미지 셰이크는 기관총을 발사하거나 폭탄이 터졌을 때 카메라에 진동을 주는 장비인데요. <유령> 때는 그게 없어서 삼각대 아래 튜브를 놓고서 밟았습니다. 그런데 쿨렁쿨렁한 게 느낌이 안 나죠. 그래서 나중에는 삼각대를 밀었다 당겼다 했어요. 이번엔 할리우드에서 들여오려고 했는데 3주 이상은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열받게. 10개월을 써야 하는데. 그래서 아예 만들었습니다. 블랙박스도 있죠. 일종의 카메라 보호 기능을 하는 장비인데 폭파신 등에서 근접촬영이 가능하죠. 자신이 전쟁터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관객이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으로 만들었어요. 정도안 | 이 장면에서 인물들 앞에서 폭발물이 터져서 걱정하시는 분이 있는데. 별 사고없이 끝났어요. 출연자들과 스탭들의 안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건데. 뇌관을 굉장히 깊이 심어놓았거든요. 저희 데몰리션 작업실에 가면 따로 실험실이 있고 마루타도 있어요. 테스트 한두번만 하고 들어가겠어요? #56 기습전-적진 산 정상 산 정상 초소 인민군 경계병을 일순간에 제압하는 진태와 소대원들 강제규 | 급작스러운 전쟁이고. 소대원들 또한 전투 경험이 많지 않죠. 기습전이지만 한마디로 막싸움에 가까워요. 짱돌로 내리치고 목 조르고 눈 후벼파고. 의욕만 앞서는 거죠. 컨셉은 그래서 촌스러움이에요. 그에 비해 후반부의 두밀령 전투는 상대를 죽이는 데 익숙해져 있고 능숙하죠. 정두홍, 김민수 | 아무래도 프로들을 쓰면 모양새가 안 나올 테니까. 보조출연자들을 많이 썼던 장면이죠. 강제규 | 밤장면을 택한 건 기습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전투 유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견습하는 친구들이다 보니 익숙하지가 않던데요. 백병전하는 데도 몸 사리고 그러니까. 사실 위험하기도 했어요. 대검 꽂고 하는 거니까. 문제는 자기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합 한번 잘못하면 찔리는 거잖아요. 촬영 전에 그래서 뺑뺑이 많이 돌렸어요. 그래도 여전히 미숙하더라고. 설정상 그게 어울리는 거지만…. 정두홍, 김민수 | 진짜 싸움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우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고 무슨 돌려차기를 보여주거나 벽을 차고 올라서 뭘 할 수도 없고. 평지 아니면 비탈인데 동선 자체가 패턴화 되는 것 아닌가 고민 많이 했어요. 결국엔 감정을 따르기로 했죠. 전쟁이라는 게 처절한 거니까. 아, 저걸 놓치지 않고 계속 끌어가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67 평양-시가 일각 평양시에 진입하여 인민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아군 병사들 강제규 | 자료 확보하는 데 가장 애먹었던 평양에 왔군요. 중국에도 당시 평양을 찍은 사진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신보경 | 역사적 자료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웠죠. 그래서 서울하고 대비되는 남성적인 공간이라고 상상했어요. 백제나 신라에 비해 고구려가 갖는 웅장한 느낌들 있잖아요. 강종익 | 제 작업도 서울하고는 반대죠. 서울은 세트 뒤편에 아파트를 지워내고 산으로 대체했는데. 평양은 산을 지웠어요. 세트장 규모가 2만평이라 크지만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무래도 협소해 보일 수 있거든요. 평양이 산속 마을처럼 보이면 안 되죠. 강제규 | 이 장면에서는 모든 게 스트레이트예요. 동선 자체가 공간의 특성에 맞게 대부분 직선이죠. 인민군의 간헐적인 반격은 있지만 국군이 빠르게 북진하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홍경표 | 카메라를 계속 들고 찍었어요. 심지어 달리 위에서 이동하면서도 핸드헬드 잡았으니까. 해를 등지고 찍다가 여기서부터 역광이나 사광이 많이 등장하죠. 세트 건물들도 그런 카메라 동선을 염두에 두고서 지어졌어요. 신보경 | 이 작업할 때 코소보 전쟁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떠올렸는데. 안개나 연기를 많이 써서 서로 가까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가시상태를 만들려고 했어요. 여름을 지나 겨울로 향하는 계절과도 맞았지만 드라마 흐름상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두 형제의 갈등을 묘사할 수 있겠다 싶었죠. 정도안 | 평양 시가전 안에는 웬만한 폭파는 다 들어 있어요. 평양장면은 화기도 다양하고 또 폭발지점도 다양하다 보니 파편들도 다 다르죠. 그냥 펑하고 터지는 게 아니라는 거죠. 흙이냐 돌이냐 쇠냐에 따라서 질감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걸 섞어서 혼란이 심화되는 걸 보여주려고 했죠. 개인적으로 시가전을 언젠가 꼭 하고 싶었는데 이 장면에서 원없이 했어요. 김석원 | 한 장면 안에 등장하는 총이 열댓 가지는 돼요. 다 따로 채집했어요. 전차는 광주 보병학교에 가서 직접 따왔고. 총소리가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는데 아니에요. 소리만 듣고서 아, 저거 M1이다 하는 남자분들 많거든요. 비행기하고 증기기관차 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특히 총소리 들을 때는 뿌듯하죠. #81 숙영지-계곡 능선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들 강종익 | 인공지능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하는 장면이죠. 캐나다에서 들여온 비해비어(Behavior)라는 프로그램인데 이걸 이용하면 캐릭터끼리 부딪치지 않죠. 예를 들어 언덕이 있다고 했을 때 다른 프로그램들은 언덕을 피해서 가라, 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거든요. 근데 비해비어는 언덕만 설정해주면 알아서 피해가죠. 인공지능이라고 능사는 아니에요. 두밀령 국군 진격 장면이 문제였죠. 다른 프로그램 같으면 탱크에 머리를 촐싹대며 박았을 텐데. 이번엔 심어놓은 캐릭터가 탱크하고 같이 진격을 하는 게 아니라 탱크를 위험물로 파악하고 슬슬 내빼는 바람에 따로 작업해야 했죠. 김석원 | 촬영한 원소스를 보고서 대략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정도로 보조 출연자들을 모았어요. 현장 녹음을 더하려고. 근데 CG팀에서 넘어온 그림을 보니까 입이 쩍 벌어지는 거예요. 불러모은 사람들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게 명백했으니까. 게다가 프린트 넘어오는 대로 작업해야 했을 정도로 시간이 없었죠. 다행히 아이디어를 급조했는데. 사람 목소리뿐만 아니라 지진소리, 말달리는 소리 등을 뒤섞었거든요. 결과가 괜찮아서 망정이지. 신재호 | 일단 사체 물량만 해도 <무사>의 3배는 되죠. 게다가 사체에도 캐릭터를 부여하라. 이게 감독의 요구였어요. 이 장면 앞뒤로 사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냥 뻣뻣한 일직선 사체여선 안 된다고 봤죠. 양민학살 장면만 봐도 그래요.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자다가 죽을 수도 있고. 그 전 상황들을 설정해놓고서 마네킹을 만들었죠. 강제규 | 전쟁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면 하나같이 시체가 있어요. 그거 보면서 아, 이게 전쟁의 참혹함이구나 싶었고 아무 말 없지만 사체를 통해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84 퇴주로-트럭 안과 밖 피난 행렬 사이로 부대원들을 태운 트럭이 달려간다 홍경표 |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장면을 꼽으라면 여기예요. 육체적으로야 경사가 35도가 넘는 두밀령 전투겠지만. 이거 찍으면서 다른 장면은 유치하더라도 참을 수 있는데 이 장면만은 절대로 허투루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이거 액션영화 아니라 전쟁영화거든요. 전투장면의 경우 움직임이 많은 데 비해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정지해 있어요. 가만 있으면서 그 시대의 분위기나 공기를 전해줘야 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선 모든 인물들이 디테일한 면이 드러나야 한다고 봤어요. 등장인물들의 라인을 살리기 위해서 대형 조명기를 단 크레인 3대를 동원했죠. 군인들의 경우 헬멧의 빛 반사까지도 신경썼어요. 정도안 | 여기에선 폐타이어 정말 많이 태웠어요. 설원하고 대비되는 우울한 느낌을 내려고 그랬죠. 강종익 | 이 장면 찍는 데 모여든 보조출연자가 500명쯤 됐어요. 한 장면 찍고 블루스크린 옮기고, 한 장면 찍고 블루스크린 옮기고. 꼭두새벽부터 촬영준비해서 촬영에 들어갔는데 3시가 넘어서 겨우 점심을 먹었죠. 그런데 나온 게 주먹밥이었어요. 이성훈 프로듀서는 그게 4천원짜리 주먹밥이라고 말하지만. 보조출연자들이 조금이라도 술렁거렸다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분위기였죠. #132 두밀령-인민군 교통호 치열하게 육박전을 벌이던 도중 진태를 만나는 진석 신보경 | 앞장면의 서울 풍경을 보면 김일성 초상화 위에 국군들의 포스터가 나붙고, 또다시 그 위에 인민군들의 낙서가 쓰여지고. 뭐 그런 뺏고 뺏기는 상황이 진행되는데 두밀령에 와서는 극에 달하죠. 흑연가루를 몇십 포대 뿌렸다는 생각밖에 안 나요. 여기선 핏물 색깔도 썩은 듯한 색깔이죠. 오랜 전투 끝에 땅에서는 생의 기미라곤 보이지 않아요. 정두홍, 김민수 | 황매산에서 찍은 장면인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비탈이죠. 보기보다 경사가 심해요. 근데 여기서 액션, 그것도 육박전을 해야 하니까 힘들죠. 강제규 | 그래도 촬영 도중에 단련돼선지 이 장면 찍을 때는 다들 전사가 되어 있는 거예요. 독기가 머리끝까지 올라 있는. 정두홍, 김민수 | 이 장면 찍으면서 크레인이 넘어졌는데 그때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떨어져서 정신을 잃으셨죠. 홍경표 | 눈 뜨니까 멀쩡하더라고. 카메라만 조금 부서졌지. 그래도 이 장면이 지금 보면 가장 맘에 들어요. 진태의 마지막 최후장면인데. 전쟁영화의 사실감을 위해서 고속촬영은 한번도 안 하고 정석으로 갔거든요. 그러다 이 장면에서 썼는데 임팩트가 있는 것 같고. 카메라에 담긴 인물의 호흡하며 어둑해지는 저녁의 느낌이 잿빛 속에 잘 녹아든 것 같아요. “언제 이런 영화 해보겠어요.” 시간이 촉박해 제작비가 빠듯해 원하는 만큼 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으면서도 스탭들은 한결같이 자부심을 내놓았다. 하긴, <태극기 휘날리며>는 적어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만큼은 한국영화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한 듯 보인다.

오승욱 감독의 60, 70년대 한국 액션영화 자습서 [2]

제1장 너희가 한다면 우리도 한다! ◎ 문제 60년 대 말 장 피에르 멜빌 감독, 알랭 들롱 주연의 <사무라이>는 남자의 로망에 맛이 간 전세계 사내들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몇년 뒤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월터 힐은 상심한 듯한 눈빛의 사나이 라이언 오닐을 데리고 <드라이버>로 리메이크했었고, 10여년 뒤 홍콩의 오우삼은 주윤발을 데리고 <사무라이>의 홍콩판 <첩혈쌍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니올시다. <대부>에서 말론 브랜도가 토마토 밭에서 쓰러지는 장면에 버금가는 사과나무 밭에서 장동휘가 쓰러지는 멋진 영화가 있었다. 쟝 피에르 멜빌과 맞장뜨는 한국판 <사무라이>의 제목은? ◎ 답 <암살자>(이만희 감독, 장동휘·남궁원 주연). 이 문제를 맞혔다면 당신은 정말 장난이 아니다. 만약 당신의 나이가 마흔살, 그 언저리보다 어리다면 정말 앞날이 걱정된다. 병이 더 커지기 전에 병원에 가보시길 진심으로 권한다. 사실 고백을 하자면, 나 역시 이런 문제를 맞힐 수 없다. 그래서 난 다행이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 히히히. ◎ 심화학습 1. 외로운 늑대 알랭 들롱, 주윤발은 상처받은 영혼의 킬러다. 너희들만 그런 멋진 킬러가 있다고 착각하지 마라. 우리에겐 한없이 고단한 얼굴의 검은 가죽 장갑을 낀 킬러 장동휘가 있었다. 해방공간. 신탁통치 반대를 저지하기 위해 간악한 공산당은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는 얼굴을 찾아다니는 킬러 장동휘를 고용해 반탁의 주도 인물 암살을 계획한다. 자신이 죽인 자의 딸 전영선을 키우는 킬러 장동휘는 풋풋한 사춘기 소녀 전영선의 부탁인 가지와 파란 잎이 달려 있는 사과를 따주려다 공산당 남궁원에 의해 죽는다. 베어물면 이가 시린 국광사과(지금은 사라져서 보기 힘들다. 홍옥, 인도사과 역시 사라졌다. 부사사과에 밀려)들이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 밭에서 장동휘는 고목나무처럼 쓰러진다. 2. 〈7인의 사무라이〉를 본 율 브린너가 존 스터지스를 꼬드겨 <황야의 7인>을 만들었다면 너희들만 하냐? 정육점 주인 허장강 할아버지와 비실비실 배삼룡, <여로>의 바보 장욱제는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못된 깡패 장동휘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그들에게 대항할 깡패들을 모은다. 과거를 숨긴 미스터리의 사나이 최무룡. 그를 돕고자 나타난 바람처럼 빠른 사나이 독고성. 자기보다 강한 자가 있다면 기꺼이 대결하고 싶은 도박꾼 오지명. 술 한잔에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굽실거리는 알코올 중독자이지만 분노가 불타오르면 5m를 날아 상대방의 정수리를 뽀개버리는 평양 박치기 최불암. 그리고 전라도 사투리의 콧수염 용팔이 박(난 여자가 너무너무 좋아! 예쁜 여자의 아버지는 무조건 장인어른-미들네임이다) 노식. 이렇게 다섯 사나이가 시장 상인들을 위해 단돈 만원씩 받고 모여든다. 악당 장동휘여 기다려라(<오인의 건달들>. 고영남 감독)! 왜 일곱명이 아니냐고? 글쎄다… 하여튼 우리도 한다니까. 3. 좋게 말하면 동시대성을 가지고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복제품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해도 이만희의 영화는 서투른 모방이라고 볼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한 색깔이 있다. 혹심한 검열과 멸공의 시대였으니 결말이 이상해도, 밤장면으로만 이루어진 영화가 밤인지 새벽이지 도통 모르겠는 기술적 결함이 눈에 거슬려도, 이만희는 역시 이만희이다. 암살을 하러 가는 장동휘와 남궁원의 신, 킬러가 오기를 기다리는 반탁 정치가와 여자의 신, 전영선과 오지명의 신, 이렇게 세 신이 서로 교차되며 죽음 앞에 선 주인공들의 욕망과 입장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그 위에 졸리운 듯 나른하게 덧씌워지는 소녀 전영선의 은혜를 모르는 늑대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달님에게 물어봤다. 잡아먹으라 그랬지….” 그리고 또 하나, <원점>(이만희 감독, 신성일·문희 주연)의 첫 시퀀스를 보라. 압도적인 분위기를 몰아가는 공간과 신성일의 모습, 그뒤를 이은 계단 위에 쓰리진 채 미끄러지며 싸우는 격투신과 살인장면은 탄성을 자아낸다. 제2장 박노식, 우리의 용팔이 ◎ 문제 80년대 주윤발이 이 땅에 상륙해 의리가 사라진 강호의 현실을 서글퍼하며 한숨을 내쉴 때 같이 한숨을 내쉰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정수야, 죽음과 삶의 거리가 이렇게 가깝단 말이냐?”며 동생의 죽음 앞에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복수를 맹세하는 40대들에게는 주윤발의 원형으로 추앙받는 의리의 사나이는?(힌트. 의리하면 용팔이) ◎ 답 박노식. ◎ 심화학습 내가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갈 어린 나이였던 그 시절. 날 데리고 극장에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첫 번째가 연애를 하던 삼촌들이었는데, 그들은 데이트하는 체면이 있어서였는지 고상한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야망> <바이킹>과 그중 고상한 박노식의 <수호지>, 우리나라 최초의 입체영화 <임꺽정> 같은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또 한편, 이모와 고모들은 가기 싫다는 날 온갖 감언이설로 꼬셔서 데리고 가서는 크라운 산도 한 봉지 쥐어주고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엉엉 울면서 보는 그런 영화들이 있었다. 어린 나는 그녀들이 왜 우는지 모르겠고, 싸워서 해결하면 될 일들을 왜 저렇게 말로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그 어린 나이에 고독에 대한 의미를 그 컴컴한 극장 안에서 깨달아야 하는 상처를 받았었다. 그런 반면에 제일 내가 좋아했던 것은 집안 어른들이 혀를 끌끌 차는, 항상 당구장에서 죽때리고, 집에서는 딩가딩가 기타를 치며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을 부르고, 밤마다 만화책을 시멘트 종이로 감싸 숨겨 들어오는 사촌형이 보여주는 영화들이었다. 영화 속의 거지가 청경채를 밥 위에 덮밥으로 먹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시금치를 밥 위에 올려놓고 먹게 만든 <맹인 협객>을 보여주었고, 제목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화면에 박히는(어린 나는 무척이나 놀랐었다. 사람 얼굴이 그렇게 커다랗게 보여지는 것도 놀라웠는데, 글자가 움직이니…) <인왕산 호랑이>. 그리고 나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린 왕우의 영화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제일 스릴있고 범죄의 냄새가 나는 그래서 아직도 그때의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주인집의 초등학교 고학년 형들을 따라 극장엘 가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엄마를 어떻게 속여 돈을 타내는지를 가르쳐주고 내가 엄마를 속여 더 타낸 돈으로 자기는 돈 한푼 안 내고 같이 극장엘 가고, 거기서 깡패들에게 걸려 영화보다가 중간에 도망치던 그런 것이었다. 그런 형들과 본 영화들이 지금은 영화는 하나도 기억 안 나고 깡패들(고작해야 같은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 또는 그 또래의 소년들이었을 것이다)에게 쫓겨 눈덮인 언덕을 기어오르던 것만 생각난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의 박노식은 적들과 눈밭에서 싸웠지만 우리는 겁에 질려 눈밭을 죽자사자 도망쳤었다. 그렇게 엄마를 속이고, 깡패들에게 맞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보던 영화들이 바로 박노식이 눈에 힘주고 허장강을 째려보고, 장동휘가 아랫 입술에 힘주며 검은 가죽장갑으로 악당을 때려눕히던 영화들이었다. 왕우와 깡다위, 적룡이 단연코 나의 우상이었지만 그들은 사실 외국 사람들이었고, 내가 쓰는 말을 하는 박노식이 그보다 좀더 어렸을 때 나의 우상이었다. 왕우의 <외팔이>를 알기 전에 나에게 외팔이는 박노식이었고, 적룡의 <수호지 무송전>을 보기 전에 나에게 무송은 박노식이었다. 바늘 끝에서 천사들이 몇이나 올라가서 춤을 추는지 알고자 했던 중세의 신학자들의 진지함에 절대 뒤지지 않게 우리는 박노식의 원 펀치가 더 세냐, 장동휘의 원 펀치가 더 세냐를 갖고 싸웠다. 그런 우리 앞에서 누군가 최무룡과 신성일을 이야기하면 난 이모와 고모들이 사준 크라운 산도 한 조각에 속아 따라갔던 극장 안의 처절한 고독이 떠올라 박노식처럼 눈에 힘주고 허장강을 째려보듯 보았던 것이다. 여기 눈내리는 원한의 거리에 서서 지난날 의리를 배신하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려 사랑하는 아내 문희를 겁탈한 원수를 찾아 스티로폼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사내가 있다(<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 임권택 감독, 박노식·문희 주연). 지난날의 주먹을 숨기고 비굴한 성실함을 가면으로 쓰고서 사랑하는 아내 사미자가 어떤 위기에 빠졌는지도 모르고, 동대문 시장에서 신촌 서강대까지 사과상자를 배달하기 위해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고 솔찮히 무거운데 말이시’를 연신 중얼거리며 아현동 고개를 넘어가는 사내가 있다(<속 돌아온 팔도 사나이>, 편거영 감독, 박노식 주연). 죽은 동생의 눈먼 아내에게 차마 동생이 죽었다고 말을 못하고 동생 행세를 하다가 죽은 동생의 원수를 갚고 동생의 아내에게 눈을 기증한다는 안구 기증서를 한손에 쥐고 동생의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내가 있다(<인간 사표를 써라>, 박노식 감독, 박노식·김희라·김지미 주연). 그가 바로 의리의 사내 용팔이 박노식이다.

[인터뷰] <바람의 파이터> 주연 양동근

낡고 해진 도복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 검게 그을린 얼굴. 낭인 같은 모습이지만 형형한 눈빛 만큼은 상대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젊은 나이에 연기파 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양동근(梁東根ㆍ25)이 전설적인 무도인 최배달(본명 최영의ㆍ일본명 오야마 마쓰다쓰ㆍ大山倍達ㆍ1922∼1994)로 변신했다. 그는 최배달의 일대기를 그리는 영화 <바람의 파이터>(제작 아이비젼 엔터테인먼트)의 촬영을 위해 일본 나고야(名古屋) 근교 이누야마(犬山)시에 머물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양동근은 11일 오후 메이지 시대(1868∼1912) 주요 건축물을 보존 전시하고 있는 야외박물관 메이지무라(明治村)의 무술도장 무성당(無聲堂)에서 가라테 고수들과의 대결 장면을 촬영한 뒤 제국(帝國)호텔 중앙현관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과 일본의 기자들과 만났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너무 촉박했어요. 양윤호 감독님이 건네주신 비디오와 책자 등을 통해 최배달 선생님의 생애를 접했고 극진(極眞)가라테 부산지부에서 3박4일 동안 주요 동작을 익혔지요. 지금도 틈만 나면 아령도 들고 발차기도 연습하고 있지만 부족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나마 그분의 내면세계를 잘 표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양동근의 얼굴에는 진짜 미안하고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평은 그렇지 않다. 힙합 댄스로 다져진 유연한 몸과 카리스마를 내뿜는 표정으로 우려를 씻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한국인끼리 대화할 때 말고는 일본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랩 가수 경험 덕분인지 일본어 회화 코치가 "발음이 좋고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고 칭찬한다. 87년 TV 특집 드라마 <탑리>로 데뷔했으니 연기 경력으로만 따지면 18년째를 맞는 중견 배우. 2000년대 들어 <수취인불명>, <해적, 디스코왕 되다>, <와일드 카드> 등의 영화와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 `꽃미남'들이 득실거리는 충무로와 여의도에서 캐스팅 영순위로 떠올랐다. 최근에도 구자홍 감독의 영화 <마지막 늑대> 촬영을 마치자마자 지난해 12월 뒤늦게 <바람의 파이터>에 합류했다. 당초 캐스팅된 가수 비가 여러가지 문제로 도중하차하자 그 대안으로 양동근이 낙점된 배경에는 양윤호 감독과의 인연도 깔려 있다. 98년 <짱>에서 양동근과 호흡을 맞췄던 양윤호 감독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여서 내가 원하는 작품에 좀더 가깝게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방학기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바람의 파이터>는 지난해 11월 말 남양주 서울종합촬영소에서 아역 시절의 이야기부터 카메라에 담았으며 2일부터 14일까지 일본에서 총 60회 분량 중 12회를 촬영한다. 하루도 빠끔할 틈이 없는 강행군이어서 고생이 말이 아니지만 정작 양동근은 태평스럽기만 하다. "현장에서 양념이 별로 없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다보니 식사시간이 즐겁지 않고 영양소도 부족한지 얼굴에 버짐이 피네요. 그것 말고는 좋은 점이 훨씬 많아요. 저희 팀은 유명 관광지에서 문화재를 배경으로 촬영하는데 언제 이곳에 다시 와보겠어요. 가는 곳마다 온천도 있고요. 일본의 유명 배우들과 연기할 수 있는 것도 저로서는 큰 영광이에요. 외국 배우들과 연기할 기회를 얻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누야마=연합뉴스)

10명? 다 붙어! <바람의 파이터> 촬영현장

<바람의 파이터> 현지 로케이션 일본 메이지무라를 가다 나고야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아이치현 이누야마시의 메이지무라(明治村). 우리 식으로 말하면 민속촌에 해당한다. 100여년 전 학교, 병원, 전화국, 선술집, 교회, 역 등의 풍경이 줄지어 있는데 서구 문물을 본격적으로 들여오던 일본 개화기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이곳을 찾은 날은 건국기념일인 2월11일로 휴일이었지만 인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단, 제4고등학교의 무술도장이었다는 곳만은 예외였다. 전설적인 무도인 최배달의 생애을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22회차 촬영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50여명의 스탭들과 배우들로 채워진 뿌연 스모그 가득한 도장. 여기에 10여명의 취재진까지 가세하자 무성당(無聲堂)이라는 도장 현판은 더욱 무색해졌다. 이날 촬영은 니조 도장의10명과 차례차례 대결을 벌이는 최배달을 담았다. 극중 입산수도를 마치고 난 최배달이 일본 전국의 가라테 도장을 돌아다니며 고수들에게 대련을 청하는 장면이었는데 양윤호 감독은 좀처럼 ‘OK’ 사인을 내주지 않았다. 상대의 얼굴을 발로 내리찍는 액션을 쉼없이 몇 차례 반복한 탓에 최배달 역을 맡은 양동근도 넘어진 상대를 일으켜주고나서 곧바로 거친 숨을 뱉어낸다. “동근아 힘내라. 한번만 더 가자.” 이어지는 감독의 격려와 채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숨을 고르고 있던 누더기 차림의 최배달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카메라 앞으로 다시 뛰쳐나간다. 양동근은 얼마 뒤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터트리는 불청객들이 불편한지 적잖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방학기의 원작만화 <바람의 파이터>와 <넘버.3>에서 송강호의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 때문에 최배달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1922년 전라북도 김제 출생. 열여섯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감. 야마나시 소년항공 재학 중 1939년 공수도(가라테) 입문. 1947년 일본 공수도선수권대회 제패. 이후 산속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수련을 한 뒤 전세계 온갖 무술 고수들과 대결을 벌여 승리를 거둠. 황소를 맨손으로 때려눕히고 맨주먹으로 암석을 격파하는 등의 전설 같은 괴력의 소유자. 이번 영화는 그의 삶의 궤적을 따르되 “대결을 앞두고 두려움 때문에 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는 최배달의 인간적인 면모와 “귀화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싸움꾼이라 폄하됐지만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다”는 최배달의 민족애를 부각시킬 계획이다. <리베라 메>(2000) 이후 4년 만에 현장에 돌아온 양윤호 감독은 어릴 적부터 최배달의 팬이었다고. 현장 세팅 때 직접 자신이 벽돌을 같이 나르는 것도 그런 애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35% 촬영을 마친 <바람의 파이터>는 오는 한여름에 개봉할 예정. 일본 아이치현=글 이영진·사진제공 아이비젼엔터테인먼트 △ 오늘은 김두한 vs 김일. 내일은 역도산 vs 시라소니. 유년 시절 양윤호 감독은 전설의 영웅들을 머릿속에 불러들여 이종(異種) 격투기를 시켰다고. (왼쪽 사진) △ 양동근에 대한 감독의 신뢰는 기대 이상이다. 양윤호 감독은 “단지 감독과 배우 그 관계 이상”이라고 말한다. (오른쪽 사진) △ 계속되는 리플레이에 같은 부위를 계속 가격당했던 조연배우를 위해 양동근은 매번 잊지 않고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표했다. (왼쪽 사진) △ 기존에 일본에서 성행하던 가라테는 “가격 전에 동작을 멈추는 경기”였다. 이에 비해 최배달이 만든 극진(極盡) 가라테는 손에 의한 안면 공격 등을 제외하곤 자유로운 가격이 허용된다. (오른쪽 사진) △ 한국과 일본의 차이? 양윤호 감독의 한 차례 고성에 일본쪽 제작부 여자 스탭은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고. (왼쪽 사진) △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생전의 최배달은 ‘실전만이 증명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오른쪽 사진) 감독, 배우, 일본 프로듀서와의 토막토크 최배달은 한민족의 황비홍 메이지무라의 고풍스런 호텔 전시물 안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에는 양윤호 감독, 양동근 외에 일본 배우들이 함께 자리했다. 최배달의 연인인 게이샤 요우코 역을 맡은 히라야마 아야는 <워터 보이즈> <행복한 가족계획> 등에 출연했던 배우. 신발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1시간 가까이 행사 시작이 늦춰져 참석한 이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다행히 아는 한국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안녕하세요. … 음… 겉저리”라고 답해 좌중으로부터 폭소를 끌어냈다. 일본 최고의 무도인으로 최배달과 라이벌 관계인 가토 역의 가토 마사야는 <크라잉 프리맨> <브러더> <극도공포대장 우두> 등에서 얼굴을 알렸다. “최배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됐다고.” 이 밖에 종종 최배달을 위기에 빠뜨리는 친구 춘배 역의 정태우와 최배달의 제자이자 일본 현지 프로듀서인 마키 히사오가 동석했다. <마지막 늑대> 촬영을 끝내고 곧바로 합류했다. 최배달이라는 캐릭터를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양동근) 감독님이 보여준 비디오 자료를 먼저 챙겨봤고. 짬날 때마다 스트레칭 위주로 운동했다. 부산 극진회관 지부에 가서 3박4일 가라테 동작을 익히기도 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니 현재로선 각오를 다질 수밖에 없다. 양동근이라는 배우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양윤호) 감독과 배우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다. 양동근은 <짱>(1998) 할 때 만나서 작업한 적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편했다. 인간적인 모습의 최배달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서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고 도움을 많이 받는다. 최배달이라는 실제 인물을 연기하는 데 부담은 없나. (양동근, 옆에 앉은 양윤호 감독에게 고개를 돌려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뭐, 감독님께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셨… 죠? (웃음) 시나리오 읽을 때 실존 인물이다, 전설적인 영웅이다 하는 부담보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어떻게 부각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최배달의 인간적인 모습이라면 어떤 것인가. (마키 히사오) 소를 맨손으로 죽인 전설적인 영웅이지만 소심한 성격이었다. 언젠가 긴자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나보고 그러더라. ‘이런 데서 술먹다가 지진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웃음) 일본어도 따로 공부했나. 어떻게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양동근)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어떻게라는 게 따로 있나. (정태우) 내가 맡은 춘배라는 역할은 최배달보다 더 오래 일본에서 살았던 인물이라 더 능숙하게 해야 한다. 게다가 경상도 사투리도 구사해야 한다. 갑자기 2개의 외국어를 배워야 했는데. 경상도 사투리는 개그맨 김효진씨에게 배웠고, 일본어는 어학용 학습기를 사서 공부했다. 현지 로케이션이 쉽지 않을 텐데. 감독과 배우의 입장에서 힘든 점이 있다면. (양동근) 먹는 거다. (촬영현장에서) 주로 도시락을 먹는데 아무래도 양념이 우리와 달라서 음식이 입에 잘 안 맞는다. 영양소가 부족한지 버짐까지 피더라. 그래도 일본 곳곳을 언제 둘러볼 기회가 있겠나. 로케이션 장소가 4곳인데 좋은 그림 담으려고 헌팅한 곳들이라 정서 함양에 좋다. 가는 곳마다 슬쩍슬쩍 온천욕을 즐길 기회도 있고. (양윤호) 힘든 점보다는 좋은 일본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어 서 좋다. 연기도 그렇거니와 기본적으로 성실한 자세와 열의가 존경스럽다. 최배달이라는 인물의 무엇을 부각시키고 싶나. 또 액션 분량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연출할 계획인지. (양윤호) 우리에게 일제시대만큼 불행한 때는 없었다. 그 시대에 국내에는 김두한이라는 인물이 있었지만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은 최배달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최배달은 황비홍 같은 인물이라고 여겨진다. 어려운 시대에 훌륭하게 살아남은 청년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 액션장면에선 거짓말 액션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는 게 재미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스포츠가 영화보다 재밌는 건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인데, 영화의 액션마저 거짓말이라고 느껴지면 좀….

[이슈] 제한상영관, 갈 길이 멀고 험하네

제한상영관 문제가 재점화되고 있다. <칼리큘라>(사진)의 수입사인 유니코리아(유니코리아 문예투자와 다른 회사임)는 2월10일 <칼리큘라>가 수입추천 재심의에서 통과된 뒤 “20여개(서울의 매직시네마, 부산의 국도 2관 외) 극장이 제한상영관 설립신고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칼리큘라>에 하드코어 섹스신이 들어있는 걸 아는 이들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소식이다. 이제부터 극장에서 포르노를 보는 게 가능해진 거냐고 궁금해 할만도 하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는 않다. 유니코리아에서 제한상영관을 하겠다는 극장이 20여개나 된다고 했고, 앞으로도 제한상영을 염두에 두고 수입, 제작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적 벽은 여러가지다. 먼저 제한상영관 용도 변경부터 관할 행정기관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기존 일반상영관에서 제한상영관으로 용도를 변경해주는 것은 관할 행정조직(시, 구청)이지만 행정기관이 쉽게 용도 변경을 해줄지 불투명하다. 설사 용도변경이 되더라도 영화를 홍보할 창구를 상당 부분 제한한 법규와 배급사, 극장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제한상영관의 경우 광고·선전물의 외부노출을 금지한 영화진흥법 24조2항이나 DVD, 비디오 등 다른 매체로의 제작을 금지하는 29조2항2호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화계 일부에선 관련 법규의 개정 요구가 높다. 극장 상영만 가능하고 다른 매체로 전환할 수 없다면 제한상영 영화를 수입하거나 제작하는 입장에선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도 있다. 프로그램 수급이 어떻게 이뤄질지 생각해보자. 예컨대 스크린쿼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유니코리아는 스크린쿼터제에 대한 대비로 한국영화 10편을 제작 혹은 수급할 것을 천명했지만 얼마나 실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유니코리아가 직접 10편을 다 만든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만한 자본과 능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제한상영관으로 용도변경할 의사가 있는 극장이 실제로 얼마나 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유니코리아는 “20여개 극장의 명단을 알려줄 수 없다”고 했고, 언론에 보도된 매직시네마의 경우 기자와의 통화에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거론하며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게다가 제한상영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에도 불구하고 심의에서 문제가 됐던 장면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모자이크 처리 혹은 ‘안개 속의 풍경’ 버전으로 관람해야 한다는 결정적 걸림돌이 있다. <칼리큘라>도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추천심의를 통과했다. 제한상영관조차도 제한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 유니코리아가 제한상영관 설립문제를 거론한 것에 대해 단순히 <칼리큘라>의 홍보용이 아닌지 의심하는 이도 있다. 정말 제한상영관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다면 전국 20개가 아니라 단 1곳을 확보하더라도 현실성있는 프로그램부터 제시하는 게 더 바람직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문제는 제한상영관에서 상영할 영화를 수입한 업자가 있고 제한상영관을 하겠다는 극장이 나타나도 일이 쉽게 풀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로선 제한상영을 추진하는 유니코리아와 해당 극장이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면서 권리를 확보하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