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KWVWS넴뷰탈디씨펜토바르비탈직구넴뷰탈디씨펜토�%

에서 이 병장이 불현듯 자살했다. 감독은 이들을 만나게 해주려 했다지만, 살아도 상관없는 사람을 기어이 죽였고, 그것에 대해 대중은 침묵을 지킨다. <비천무>에서 주인공은 하여튼 죽는다. 부모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고. 아들은 부모의 죽음을 보면서 저항하지 않는다. <리베라 메>에서 주인공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다. 또 한명의 소방관도 그저 나르시시즘을 느끼듯이 죽음을 받아들인다. <박하사탕>은 더할 나위 없이 죽음으로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단절을 요구하는 대중의 욕망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용기가 없어 보인다. 사소한 고민에 끈질기게 매달려 거꾸로 큰 고민을 잊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영화의 시대정신이 아닌가. 영화와 영화인들 사이에 침묵의 합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요즘 유행처럼 이야기지어진 ‘일상성’이, 지금 영화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정신은 아닌가.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죽음을 바라고, 제작자들은 관객이 그걸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들이 한국영화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다.

고어, 자극보다 풍요로운

아마 앞으로 전 의 금요일 자정에 방영했던 호러영화들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할 겁니다. 정말 좋아했던 시간대였으니까요. 요새 그 시간대에 호러영화를 방영하지 않는다는 게 서글퍼질 지경입니다. <트왈라이트 존>의 영화판 도입부에 나오는 노래 기억하세요? 대충 이렇게 시작되지요. ‘금요일 밤 호러영화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네, 그 기분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그때 굉장히 많은 영화들을 접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영화 취향을 결정한 것들도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들만 했던 시간대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규칙적으로 보다보면 거둘 수 있는 수확은 엄청났습니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였습니다. 습관적으로 신문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을 뒤적거리다 그 제목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당시는 꽤 어렸을 때라 호러영화에 대한 제 지식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 조지 로메로가 누군지 알았고, 그의 첫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 영화인지도 알았으며, 결정적으로 그 작품이 ‘ne plus ultra’의 평판을 들을 만큼 자극적인 호러영화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었거든요. 하여간 그날 밤 전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쓴 뒤, 겁먹을 때 쓰려고 봉제인형들을 잔뜩 안에 끌어다놓았죠. 준비가 끝나자 전 당시 제가 전용으로 쓰고 있던 고물 흑백 텔레비전을 탁 켰습니다. 어땠냐고요? 솔직히 실망했었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극적인 영화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말이 ne plus ultra죠.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도 왕년의 ne plus ultra였다는 걸 아세요? 자극적이기는 그 몇주 전에 보았던 여대생 기숙사에 뛰어든 살인마 영화가 훨씬 더했습니다. 혹시 잘린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버전은 잘린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있었어도 아주 작은 부분이었겠지요. 적어도 그때 제가 보았던 버전은 국내 비디오 출시 버전보다 훨씬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비디오 버전이 왜 그렇게 찢겨져 나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 고전에 대한 예우는 늘 차리는 터라, ‘그래도 좋은 영화이긴 했어’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습니다. 근데 진짜 경험은 그때부터 시작되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로메로의 어두컴컴한 비전이 구렁이처럼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축축한 불쾌함은 그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공포와 불쾌함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제가 그때까지 보았던 공포영화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느긋하게 저에게 전해주었던 그 축축하고 황량한 느낌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일주일 동안 제가 느꼈던 불안한 불쾌함은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관객이 느꼈던 자극보다 훨씬 풍요로운 것이었을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경악스러웠을 고어의 자극에 정신이 나갔었을 테니 다른 생각이 들 리 없었겠죠. 그 잔혹한 껍질을 벗겨내고 밑의 좀더 미묘한 공포의 뉘앙스를 즐기는 것은 저 같은 후대 관객의 몫이었습니다. djuna01@hanmail.net

진실과 재미, 그 힘겨운 줄타기

역사적 사실과 극적 재미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운명인가보다. 최근 러시아 잠수함을 배경으로 한 영화 도 이런 딜레마에 부딪혔다. 이 영화는 크랭크인을 눈앞에 두고, 영화의 모델이 된 러시아 선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최악의 경우 법적 싸움으로까지 이어질 태세다.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이 출연하고 캐스린 비글로가 연출하는 는 1961년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보유 잠수함이 원자로 이상으로 항해중에 위기를 맞았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잠수함의 선장 니콜라이 자테예브의 자서전을 토대로 작업한 시나리오가 지난해 겨울 생존 선원들에게 건네진 것이 사건의 발단. 이들은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심하게 왜곡하고 캐릭터 묘사에서도 러시아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천착했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우리를 멍청하고 무례한데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에도 술에 취해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는 것. 러시아 NTV도 “시나리오상에서 러시아 선원들은 ‘바다’나 ‘잠수함’보다 ‘보드카’와 ‘마시자’는 단어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고 보도했다. 생존 선원들은 시나리오가 수정되지 않을 경우, 제작중단을 요구하는 법적대응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실화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과 제작진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은 2차대전을 지나치게 미국적으로 해석해 비난을 샀으며, 베트남전쟁을 그린 <우리는 한때 군인이었다>는 베트남 참전자들로부터 좋지 않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나 그렇듯 할리우드는 담담하다. 의 제작진도 이 논란을 기화로, 오히려 촬영 스케줄을 다잡고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공동제작사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텔레비전>은 “이 작품은 처절한 생존 실화를 밀도있게 담아낸 드라마로, 뒷받침하고 있는 자료도 방대하다”고 밝혔다. 믿거나 말거나.

제12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 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정말이지 이곳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초행자의 이런 추측에 올해로 벌써 열두해째를 맞는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실제로도 국제영화제라기엔 아주 소박하기만 한 자태로 응수해주었다. 예컨대, 정식 영화관이 아니라 문화스포츠센터나 호텔의 강당 같은 장소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이나 번듯한 영화제 데일리조차 발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은 유바리영화제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타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수준임을 일러주었다. 북한영화 만났다 공식초청 부문,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 디지털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오프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비디오 페스티벌 등으로 짜여진 이 영화제의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식초청 부문일 터. 이 부문에서 선보인 17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한국 관객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판타스틱’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인 <프루프 오브 라이프>와 폐막작인 을 비롯해, <나인 야드>와 <치킨 런> 등의 할리우드영화들이 이미 한국의 관객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작품들인 것. 사미르 마흐말바프의 <칠판> 같은 경우도 부산영화제를 통해서 소수나마 한국 관객의 눈을 거쳐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초청 부문의 식단이란 게 일본 관객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이 봤을 땐 당연하게도 다채롭고 푸짐한 성찬(盛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문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북한영화 <태권도 여인 소미>(1997)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소미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무예를 연마해 결국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북한판 무술영화는 <민족과 운명> <임꺽정> 등 북한에서 주로 시대극과 역사영화를 만들었던 장용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최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열풍은 약 1만6천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이 아담한 도시라고 해서 그냥 비켜가진 않았다. 양윤호 감독의 ‘파이어 액션영화’ <리베라 메>가 공식 초청 부문에 초대돼 일본 관객에게 또 한번 한국영화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이 영화의 상영장인 문화스포츠센터를 가득 메운 일본 관객은 영화의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도 CG 도움없이 ‘불’을 연출해내는 솜씨에 놀라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유바리에서 보여준 <리베라 메>의 선전(善戰)은 이 영화가 일본 극장가에 공식적으로 입성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줄 전망이다. 제작사쪽에서는 일본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 영화의 드러나는 약점들을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엔젤>,<버서스> 관심 끌어 유바리에서 선보인 할리우드영화들 가운데 아직 한국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다크 엔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은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 뒤에 굳이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Created by James Camero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영화 <다크 엔젤>은 실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것도, 또 그의 ‘영화’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카메론이 제작 총지휘와 공동각본을 맡아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다크 엔젤>의 첫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영화는 미래의 2009년에서 시작한다. 어느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된 12명의 아이들이 연구소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이 살아남는데, 그 생존자는 맥스라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영화는 10년 뒤, 그 본격적인 무대인 2019년으로 넘어온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또한 미모도 출중한 소녀 맥스는, 억압과 빈곤, 부패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검은 천사’로 자라난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유전자 조작의 모티브는 각각 <다크 엔젤>이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맨>의 요소를 흡수·융합한 영화임을 일러준다. 그렇듯, 영화는 암울한 미래세계에 대한 풍경과 맥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자주 왔다갔다한다. 문제는 영화가 그 두 이슈 사이를 어정쩡하게 왕복하다가 정작 카메론적인 스펙터클조차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다음 이야기가 뒤를 이을 테니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크 엔젤> 시리즈의 첫 편은 적당한 맛보기 정도로 끝나고 만다. 아마도 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을 수를 차지할 일본영화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영화는, “네오 인디펜던트의 기수”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소개된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버서스>(Versus)였다.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대된 이 영화는 정말이지 숨쉴 사이를 주지 않고 전개되는 영화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인물들은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피를 흠뻑 묻혀가면서 싸운다. 목이 잘리는 것은 예사이고,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잔인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감독의 잔인무도한 재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영화는 전체적으로 호흡 고르기에 실패했다는 느낌도 준다.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싸움만 반복되니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버서스>는 일본 인디펜던트 고어영화(이런 말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잘 참기만 한다면. 디지털, 전진 또 전진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다른 많은 영화제들에서처럼 유바리영화제에서도 작으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어터’(Digital Theater)라 명명된 이 부문은 영화와 디지털을 어떻게 연결해볼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물론 디지털과 관련한 섹션이 올해 처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유바리에서는 ‘디지털 시네마 프리젠테이션’이란 부문을 통해 디지털의 현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지난해 디지털 섹션이 주로 미완성 필름과 견본 필름들만을 그저 ‘전시’(Presentation)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 디지털 섹션은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실험을 해보였다. 일본의 통신회사인 NTT의 기술 협조를 받아 도쿄에서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고 그 신호를 받아 유바리에서 단편애니메이션들과 실사영화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영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올 유바리영화제에서 이 디지털 시어터 부문을 기획한 사타니 히데미(수플렉스 영화사의 프로듀서)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 디지털을 열심히 알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이야기되는 디지털 논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을 던졌다. “현재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만 너무 급급하다. 하도 디지털, 디지털, 하고 소리만 시끄러우니 이건 마치 디지털에게 오히려 이용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와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디지털을 왜 이용할 것인가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조건 제작비를 삭감하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그럼 당신은 디지털의 주요 목적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솔직한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은 아직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진행중인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유바리 =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해는 뜨고,해는 지고

Fiddler On The Roof 1971년, 감독 노먼 주이슨 출연 하이먼 투폴 EBS 3월3일(토) 밤 9시 1960년대의 할리우드는 이른바 ‘와이드스크린’ 대작영화가 명멸하는 시기였다. 가정교사 줄리 앤드루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도라! 도라! 도라!> 등은 흥행에서 실패해 제작자에게 좀더 규모가 작고, 알뜰한 장르영화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 당시 주디 갤런드, 앤디 윌리엄스 등의 텔레비젼 쇼 프로그램을 연출한 경력이 있는 노먼 주이슨 감독은 두편의 뮤지컬을 제안받았다. 하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그리고 나머지 한편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였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편의 영화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전작들, 즉 <신시네티 키드>와 <밤의 열기 속으로>, 그리고 <화려한 패배자> 등 비주얼에 방점이 찍힌 장르물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노먼 주이슨이라는 감독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유연성을 요약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장르 경계를 마음껏 넘나드는, 나무랄 데 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마을에서 우유 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다. 그는 수다스런 아내, 그리고 다섯명의 딸과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장녀가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양복점 직공을 사랑한다며 결혼하겠노라고 공언한다. 딸들은 하나씩 남자를 만나 아버지 곁을 떠나는데, 차르의 유대인 박해가 엄혹해지자 테비에 가족은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은, 희귀한 할리우드 뮤지컬이라 할 만하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영화의 주제로 삼곤 했던 노먼 주이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크라이나 지방 유대인들의 생활상에 관심을 둔다. 그들의 고유한 태도와 종교의식, 그리고 가족사를 다소 지루할 만큼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민족에 대한 관용과 동정의 철학으로 무장한 이 영화에 대해 톰 밀른 같은 평론가는 “감상주의와 촌뜨기 정신이 깃든” 작품이라고 힐난한 바 있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인종 문제에 관한 천착은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허리케인 카터>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니 그 일관성 하나는 존경스럽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원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이다. 아이작 스턴 등의 음악가가 영화에 출연해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원래 상영시간이 3시간여에 육박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서사 뮤지컬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상영시간, 그리고 규모면에서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는 영화다. 당시 관객에게 브로드웨이로 가지 않고도 스크린을 통해 뮤지컬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백미라면 <선라이즈 선셋>이라는 영화주제곡이 깔리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인간사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과정에 비유한 이 노래말은 단순명료한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종교적인 엄숙주의를 담고 있는 듯해 불편함을 느낄 사람도 없지 않을 듯하다. 처량한 멜로디의 노래를 듣기 위해선 영화가 시작한 뒤 또 한참을 기다려야만 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김의찬 /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