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화사한 유년을 넘어 역동적인 청년기를 맞이하다, 배우 장동건 [3]

#2. 외모 콤플렉스의 두 배우, “잘생겨서 탈?” <인정사정…> 이후로 장동건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가능케 한 후배의 힘을 감지하는 박중훈. 세상의 웬만한 이치는 주로 축구에 빗대는 ‘비유의 대가’로서 박중훈은 공격수가 될 수 없는 이운재의 운명, 전방위 플레이어지만 수비에선 홍명보에 뒤지고 스트라이커로선 황선홍을 넘지 못하는 유상철의 위치를 들어가며 배우들의 다양한 포지셔닝을 한참 설명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인정사정…> 이후의 장동건의 커리어를 명쾌하게 분석해주지는 못했다. 그저 “누구보다 남자답다”는 말로 후배의 집요한 도전을 해석할 따름이었다. 박중훈 | 그해 청룡상 시상식에 니가 남우조연상 타고 나서, 정말 뜻하지 않게 “흔들릴 때 용기와 확신을 심어준 중훈이 형한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소감에서 했거든. 장동건 | 그 얘기를 한 이유가 뭐냐면, 찍으면서도 나는 이 영화가 너무너무 의심스러웠거든요. (웃음) 이게, 모니터를 보니까 뭐 때깔도 안 나고…. (웃음) 옛날영화 같고…. 하하하…. 그리고 이게 뭐 지금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연기도, 전 정말 지금도 그 영화에서 한 연기는 너무너무 부끄럽고…. 그때는 무조건 이명세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거든요? 말투까지도. 그러니까 내가 하는 것 같은 생각이 하나도 안 드는 거예요. 와서 찍으라면 찍고, 이런 상황이었는데, 형이랑 둘이 있을 때는 계속 그것에 대한 고민을 했잖아요. 근데 형은 “걱정하지 마, 이 영화는 됐어. 게임 끝이야,” 이러는 거예요. 그럼 난 또, 그런가보다…. 진짜로 형은 되게 자신있게, 확신있게 얘기했거든요. 박중훈 | 그치, 그치. 난 한 대여섯번쯤 찍을 때 감이 왔으니까. 장동건 | 그러니까 나는 또 마음으로 안심되면서, 아, 그런 거구나. 내가 몰라서 그런 거구나. 근데 결과적으로도 선배님들이 얘기하는 게 맞았으니까…. 만약에 그 영화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면, 거봐, 내가 맞았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웃음) 박중훈 | 근데 그 소감이 정말 고맙고 뿌듯하고….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나, 내가 그렇게 얘를 챙겨줬나 그런 생각도 들었어. 그러다가 <찰리의 진실> 찍으러 프랑스에 갔을 때, 사람들이 한국에서 <친구>가 난리가 났다는 거야. 장동건이가 연기를 예술로 했대. 그래서 국제전화로 동건이한테 전화해서 너무너무 축하한다고 전화해줬지. 너무너무 기뻤던 기억이 나. 그 다음부터야 뭐, (흐뭇해서) 승승장구하는 우리 동건이. 장동건 | (쑥스럽다는, 나지막한 웃음) 박중훈 | 동건이, 참 오래 가. 마치 오래 가지 말라는…. (웃음) 난 너를 참 잘 아는 사람인데, 그 오래 가는 힘이 뭐냐면, 넌 누구보다 야망이 크고,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큰 사람이야. 근데 장동건이는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처음에 20대 초반 때는 <천국의 계단>(아마도 <우리들의 천국>인 듯- 편집자) 이런 거 하다가, 딱 2년 정도 그만두고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들어가고…. 니가 내 기억으론 재순가 삼순가 하다가 연기를 했거든? 공부를 못하는 재수나 삼수가 아니었고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재수나 삼수였을 거야, 아마. 장동건 | (당연하다는 듯) 그렇죠. (바로 웃음) 박중훈 | (진지하게) 그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렇게 배우가 되고, 이게 아닌데 싶어서 그만두고 대학교를…. 그거 쉬운 거 아니야. 나도 연기하다가 중간에 유학 갔었지만. 그리고 너 지금 하는 것들을 보면, 마음은 불끈불끈 솟아도 발은 땅에 좍 붙어 있다고. <태극기 휘날리며>를 기획 때부터 1년여 정도를 뚝심있게 버티는 것도 그런 게 있어서고. 그런 게 빨리 소모 안 되고 마모 안 되고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런 것들이 관객한테 믿음을 주는 거 아닌가 싶어. 그리고 본인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듣는 얘기지만, 타고난 외모 같은 것도…. (목소리 좀 작아지고 엄숙해지며) 나하고 똑같은 딜레만데…. 장동건 | (일동 폭소하는 가운데 누구보다 크게 웃는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박중훈 | 나도 연기파로 거듭나는 데 힘들었거든. 힘들더라고. 뭘 해도 얼굴로 봐주고 그러니까. (웃음) 니가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도 사실 난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알았지만 그게 어떻게 보면 불쾌한 얘기일 수도 있어. 괜찮은 외모가 콤플렉스라는 건…. (웃음) 근데 아마 그런 걸 거야. 재벌이 권력까지 가지려고 할 때 굉장히 싫은 거. 외양이 괜찮은 배우에게는 연기파라고 얘기하기 싫은 거야. 장 폴 벨몽도하고 알랭 들롱이 나란히 있으면 왠지 장 폴 벨몽도가 연기파 같잖아. 근데 알랭 들롱이 연기 참 잘해. 그리고 이소룡이 액션배우라지만 연기 얼마나 잘하는데. 근데 연기파라고 분류를 안 하잖아. 로버트 레드퍼드도 연기를 얼마나 잘하니. 근데 연기파 배우는 윌렘 데포처럼 생겨야 되는 거야. 장동건 | (속이 다 시원하다는 듯) 하하하하. 박중훈 | 그러니까 장동건에 대한, 뭐랄까, 시기심이 있는 거지. 연기파라는 것까지 해서 쌍권총을 쥐어주고 싶지 않은 거야. 장동건 | 내가 <인정사정…>을 찍을 때가 그런 고민을 할 때였는데, 형이 알랭 들롱 얘기를 처음 해줬어요. 기억 못하실지도 모르겠는데…. 박중훈 | 야, 내가 너보고 <태양은 가득히> 좀 보라니까, 오케이해놓고선 석달 동안 안 봤잖아. 장동건 | (당혹감을 긴 웃음으로 무마한 뒤) 어쨌거나 알랭 들롱이란 배우를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 그 때 자세하게 관찰을 하게 됐고…. 그때부터 생각을 조금씩 바꿔 나가다가, 지금은 많이 편해졌어요. #3 장동건표 영화도 나올 수 있을까? 선배가 해주는 애정어린 말들에 고마워하던 장동건은 문득 ‘제작자 박중훈’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박중훈은 차태현과 함께 <투 가이즈>에 출연함과 동시에 제작자로 알려진 상태. 선후배의 간격이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낀다던 박중훈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에 다시 확인되는 건, 후배가 한뼘 나아갈 때 선배도 그만큼 나아가 있다는 사실이다. 장동건 | 형은 지금 영화제작도 하잖아요. 박중훈 | 기획자지. 제작까지는 아니고, 기획 정도. 장동건 | 현장에서는 좀 달라요? 그냥 연기만 할 때보다 신경쓰이는 것도 많고 그럴 거 아니에요. 박중훈 | 어험, 나 기획이다, 프로듀서까지 겸하고 있지, 이런 말은 공식적으로 한번도 한 적이 없거든? 철저하게 배우로 가려고 하는데…, 나이도 있고 경력도 있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거 같애. 그럼 안 되는데. 후배들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봐 그게 너무 부담스러워. 자기네들끼리 얘기하다가 내가 들어오면 얘기 끊기고 그런 거 있잖아. 너도 알지? 내가 뭐 하나 웃긴다고 멘트 좀 날리면 어디서 웃어야 될지 포인트 못 찾고 그런 거, 응? 장동건 | 아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박중훈 | 너, 84년생하고 농담 한번 해봐. 걔 웃길 자신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못 웃겨. 84년생 못 웃겨. (진지하게) 사실 이제는 좀 편하게 영화 찍고 싶었거든. 힘 들어가는 영화말고. 근데 그런 영화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이러이러한 영화가 있는데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내서 감독 만나고 그렇게 된 거지. 내 생각에 딱 맞는 영화가 있었다면 내가 제작 안 했겠지. 장동건 | 배우가 제작을 한다라는 건, 예를 들면, 내가 고등학생 역할을 하고 싶은데 더이상은 할 수 없는 때가 오잖아요. 그럼 그때 내가 그 영화를 만드는 거죠. 형은 잘할 거예요. 대한민국에서 감독, 배우, 제작자 통틀어서 30편 넘게 영화를 작업했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형은 제작자로서도 안목이 있을 거고, 그래서 박중훈표 영화를 만들어낸다면 정말 좋은 거죠. 박중훈 | 그래, 맞아. 한때는 사람들이 내가 나오는 코미디라면 무조건 지겹다고 한 적도 있고 나도 그게 싫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안 그렇거든. 사람이 자기 브랜드를 하나 가졌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거야. #엔딩 시퀀스. “연기파 하지 마, 동건아” 또다시 느닷없이, 장동건이 질문을 던진다. 그는 담담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박중훈만이 가진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박중훈의 멘트. 이로서 두 사람은 상대방이 가게 될 길을 내다보는 동시에 자신의 앞길을 점친다. 장동건 | 형이 스스로 생각하는, 형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대표작은 뭐예요? (기자에게) 이런 얘긴 술 먹으면서 한번도 안 해요. (웃음) 박중훈 | 그래, 맞아. 이게 지금 <씨네21>이니까 하는 거야. 나는, <인정사정…> <게임의 법칙> <우묵배미의 사랑>. 장동건 | 그러니까 그 영화들을 보면, 공통점이 관객과 평단한테 다 인정을 받았다는 거잖아요. 형은 그럴 때 가장 빛이 나는 거 같아요. 형만 가지고 있는, 형의 역할을 연기를 하면 그 캐릭터가 형한테 맞춰져서 바뀌잖아. <인정사정…> 같은 경우에도 그 역할을 다른 배우가 했으면 관객이 그렇게 재미있어 하면서 중간중간에 웃음이 터질 수 있는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박중훈 | 하드보일드해지지. 장동건 | 그런 게, 우리나라 배우 중에서 박중훈이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사실 형이 <세이 예스>라는 영화를 선택해서 찍게 됐다고 했을 때 어쩌면 내가 <해안선>을 찍는다고 했을 때의 마음하고 비슷했을 수도 있었을 거 같은 거예요. 박중훈 | (씩 웃으며) 예리하단 말야. 장동건 | 내가 <해안선> 찍는다고 했을 때 형이 그런 얘기 했어요. 잘할 수 있는 걸 놓치지 말라고. 계속 도전해보고 싶은 세계에 다가가는 것도 좋지만 니가 잘할 수 있는 것들도 놓치지 말라고.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형도 가끔씩 놓치고 가는 것들이 있지 않나 싶더라구요. <게임의 법칙>이나 <인정사정…>에서 형의 연기는 다른 배우로 대체가 전혀 안 되거든요. <인정사정…>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의 컷이 뭐냐면…, 박중훈 | 내가 맞혀볼게. “에이, 씨발놈아,” 이거 아니야? 장동건 | 아니야, 아니야. 박중훈 | (겸연쩍어져서) 으하하하하하하…. 장동건 | (같이 웃으며) 그것도 그거고, 왜, 눈 오는 날 누나네 집에 갔다가, 나오면서 약간 뒤돌아보면서 손만 들어서 인사하는 장면. 그걸 보면 페이소스가 있잖아요.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별로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박중훈 | 니가 참 잘 얘기했는데, 사실 그동안 내가 조심스러워서 얘기 못했었던 게 있거든? 이건 선배가 아니라 그냥 팬으로서, 관객의 입장으로서 장동건이란 배우를 바라본다면, 난 니가 ‘연기파 장동건’이란 말을 안 들었으면 좋겠어. 그냥 ‘멋있는 배우 장동건!’이란 말을 들었으면 좋겠어. 예전에도 내가 이 얘기 한번 했다가 얘가 반응이 시큰둥해서 그 다음부터 얘길 안 했지. 장동건 | (웃음) 박중훈 | 그냥, 멋있는 배우 장동건이를 보고 싶어. 그러니까 톰 크루즈가 〈7월4일생〉에서 연기 잘했는데 걔는 <탑 건>에서 오토바이 타고 나올 때가 제일 멋있거든. 〈7월4일생〉의 우아아, 이거는 윌렘 데포나 니콜라스 케이지한테서 보면 돼. 내 개인적인 바람은 그래.

아버지가 비운 자리를 채운 맏형 장동건, <태극기 휘날리며>

건달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실패한 아버지의 역사를 보다 격동기의 남자들은 집을 비운다. 여자들은 숨을 죽이고 일만 한다. 아이들은 저들끼리 풀꽃처럼 자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언덕 너머의 풍문이고 잠결에 잠시 스쳐가는 바람이다. 한국의 근대는 줄곧 그랬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국가라는 아버지는 사라졌다.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갔다는 풍문만 들려올 뿐이었다. 각 가정의 아버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독립운동하러 만주로, 돈벌러 일본으로, 황군의 징집영장을 받고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남은 아버지들은 일제라는 대부(代父)에 아부하여 친일파가 되거나, 고문당해 병신이 되거나, 절망하여 아편쟁이가 됐다.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오겠다던 아버지의 자리는 36년 동안 그렇게 비어 있었다. 해방이 되어 상하이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또 다른 대부의 자식인 의붓아버지에 의해 밀려났다. 1950년에는 의붓아버지들의 세력 다툼에 다시 각 가정의 아버지들이 남으로 북으로 흩어졌다. 의붓자식들끼리의 싸움은 피로 이 땅을 적셨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의붓아버지는 건재하고, 태극기 휘날리면 돌아오겠다던 아버지들은 다시 병신이 되거나 유골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1961년에 이르러, 더이상 아비 없는 자식들을 눈뜨고 볼 수 없다며, 의붓아버지의 경호원 한명이 ‘진짜 사나이’, 아니 ‘진짜 아버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의붓아버지를 총으로 몰아내고 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의 아버지, 조국(祖國)이 되겠다고 공언했다. 이 할아버지는 부족장답게 자상도 하여, 손자들의 정신교육을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짓고, 육체적 건강을 염려해 조기청소를 실시했다. 아버지들을 위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작업장 분위기를 가족처럼 만들어 노동자들이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일만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탕진할까 염려해 지금은 쥐꼬리만큼이지만 나중에 소대가리만큼 돌려주겠다는 ‘선성장 후분배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 말을 믿고 아버지들은 다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야간 잔업 현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은 그렇게 아버지가 비운 자리를 채운 맏형이다. 어머니에게는 애인이고 동생들에게는 아버지인 소년 가장. 아버지가 아니면서 아버지의 관념을 강박으로 지고 있기 때문에 더 아버지답고 더 아버지스러워야 하는 인물. 이 캐릭터는 아버지 없이 성장해서 소년의 육체로 아버지의 관념을 지고 살았던 한국 근대사의 모든 아버지들의 원형이다. 무력한 낙오자가 될까 하는 거세 공포 때문에 차라리 경직된 억압자의 길을 선택하는, 그리하여 결국은 아버지되기에 실패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가족의 억압자이고, 역사의 희생자이다. 또 과거의 상흔이면서 현재의 집단적 욕망이기도 한다. 2004년의 자식은 그 애증의 협곡에 갇혀 있다.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나이 들어 자기 안에서 아버지의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 죄의식과 그리움으로 화한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아버지는 실패했고 패자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성공을 위협한다는 거세공포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은 안다. 아버지의 역사가 곧바로 자신의 역사임을. 아무리 성공의 포즈를 취해도 결코 성공한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언제나 아버지를 기다리는 허기진 자식임을. 그리하여 마침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자기 연민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한국의 집단적 감정 구조를 호명하는 코드는 형제애다. ‘형’은 실패한 아버지를 공적으로 부정하면서 사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일종의 복화술이다. ‘형’은 부재했던 아버지가 결핍했던 것, 늘 가까이 있는 수평적 자상함을 가진 억압자이자 희생자로서의 아버지이다. 아파트 평수와 자식의 학벌과 높은 자리를 위해 여전히 집을 비우는 아버지는 소년의 육체로 아버지되기의 고단함 때문에 ‘형’을 호명한다. 아버지 없이, 아버지라는 관념 속에서 자란, 그 자식도 나중에 아버지를 부정하면서 형을 찾을까? 관객 천만명을 목표로 한 블록버스터가 조준한 상업적 탄착점이 이거라면 실패한 아버지의 역사는 여전히 우리 안에서 현재진행형이란 얘기일지도 모른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인터뷰] SBS <신인간시장>의 주연 김상경

다들 힘들고 어려우시잖아요. 이 드라마가 시청자 여러분들의 막힌 데를 시원하게 풀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배우 김상경이 SBS TV <왕의 여자> 후속으로 오는 3월 8일 첫방송되는 20부작 월화 미니시리즈 (극본 장영철, 연출 홍성창.손정현)의 주인공 장총찬 역을 맡았다. 장총찬은 `인간시장'이라 불리는 사회악의 본거지를 배경으로 악을 응징하고 선을 구현하는 인물. 그러나 김상경이 말하는 장총찬은 완벽한 영웅의 전형이 아니라 인간적인 냄새가 풀풀나는 인물이다. 요즘 세상에 너무 완벽한 영웅이라면 재미가 없지 않을까요? 장총찬은 선의 사도이긴 하지만 다혈질이라 쉽게 흥분하고 앞뒤 안가리고 달려 들어 저지르는 스타일이에요. 엉뚱하기도 하고 덜렁거리기도 잘해서 `짜장면' 먹고 얼굴에 묻히기도 하고요. 돈키호테 혹은 만화같은 캐릭터죠." MBC 드라마 `애드버킷'으로 데뷔한 김상경은 2001년 `홍국영'을 끝으로 브라운관을 떠나 지난해 흥행작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생활의 발견' 등 최근 3년간 영화에 주력해 왔다. 보통 TV가 잘 되면 영화로 가고 영화하다 안 되면 다시 TV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당시 `홍국영'이 `여인천하'한테 죽을 쑤고 영화로 갔거든요. 또 영화 잘된 다음에 TV로 왔으니까 정반대인 셈이죠. TV는 전국민이 다 본다는 장점이 있어서 좋아요. 영화는 인기가 있어도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거의 극장에 안 오시잖아요." 그는 데뷔 초기와 비교해 촬영에 임하는 자세가 한결 여유로워졌다고 말했다. `홍국영'할 때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시청률이 낮게 나오더라고요. 열심히만 한다고 시청률이나 관객 수가 제 마음대로 나오는 것도 아니라 그런 건 이미 제 소관을 떠난 것 같았죠. 그냥 열심히 즐기면서 재미있게 찍고 그러면서 결과를 기다리는 게 편하더군요. 마음 졸인다고 안되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은 스타가 된 그도 데뷔 때는 연기자가 항상 `가실업' 상태라는 점에 많은 부담을 느꼈단다. 배우는 한 작품 끝나면 고용이 같이 끝나잖아요. 저는 신인 때 한 작품하고 나서 한 달만 쉬면 `혹시 대중들이 나를 잊는게 아닐까' 조바심을 많이 냈었어요. 드라마 끝나고 한 보름이 지났는데 섭외가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다 단막극 섭외가 들어왔는데 내가 걱정했다고 결과가 그렇게 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 할일은 하고 운명에 맡기는 편이 편하겠구나 싶었어요." 이 드라마는 김홍신 원작인 1980년대 베스트셀러 `인간시장'을 현재 배경으로 리메이크한 작품. 여주인공 오다혜는 가수 겸 탤런트 박지윤이 연기하며 장총찬과 경쟁하는 사업가는 김상중이, 로비스트 홍시연은 탤런트 김소연이 맡았다. 이 드라마는 앞서 1987년 MBC의 김종학 PD가 송지나 작가와 함께 박상원, 박순천 주연으로 극화한 바 있다. 17년전에 통했던 내용이 지금도 리메이크되는 걸 보면 사회의 부조리는 변하지 않았나 봐요. 정치인의 부정 부패와 검은 돈도 그렇고요. 저는 김용옥 선생님의 TV 강의를 재미있게 보고 있거든요. 특히 재밌는 것은 조선 초 정도전 시대에도 기득권의 부패는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듣는 나이 드신 방청객들이 박수치며 동조하는 모습이에요. 그런 걸 보면 시대가 지나도 별로 변한게 없나봐요." 은 불법 장기매매를 비롯해 연예기획사의 비리와 정치권의 검은 커넥션 등 시대에 걸맞은 비리 문제를 다루게 된다. 4.15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 조심스럽지 않은지 물었다. 정말 `대장금'에서 콩이 몸에 좋다고 한마디만 하면 콩이 동이 난대요. 그런 걸 보면 TV의 힘이 무섭다는 걸 느끼죠. 정치권 부패를 다루더라도 특정 정당을 연상케 하거나 옹호 내지는 비판하지 않아야 되죠." 그는 현란한 액션신을 직접 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전사에서 쌓은 경험이 액션신 처리에 많은 도움이 된단다. 훈련소에서 차출되는 바람에 군생활을 특전사에서 했어요. 국군의 날 태권도와 격파 시범을 한 경험에다 특공무술 2단 경력이 도움이 많이 돼요." 그에게 종교가 있느냐고 묻자 우스개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다신교거든요. 낙하산에서 떨어져 보면 아실 거예요.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한번만 살려주세요. 하하."

단조로운 베를린, 금곰의 운명이 궁금해 [1]

베를린영화제 메인상영관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는 좀처럼 문이 닫히지 않는다. 경쟁부문 시사회에 참석한 기자들이 쉴새없이 밖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유럽영화의 거장 에릭 로메르와 켄 로치, 테오 앙겔로풀로스가 아직 시사회를 갖지 않았다고는 해도, 올해 베를린영화제는 대체로 고요한 편이다.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은 공식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베를린의 주말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떤 영화가 금곰상 트로피를 가져갈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자와 관객들은 코슬릭과는 다른 이유로 금곰상 트로피의 주인이 누구일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단조로운 베를린에서도 드물게 진심어린 박수가 터져나오는 순간은 있다. 2월10일 상영된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셋>은 우박이 떨어지는 날씨에도 어느 60대 관객이 바람을 맞으며 표 가진 사람을 찾고 있던 기대작이었고, 그 기대 이상으로 웃음과 탄성을 이끌어낸 첫 번째 영화였다. 패티 젠킨스의 데뷔작 <몬스터>는 가장 고르고 높은 별점을 받은 영화. <마리아의 은총> <잊혀진 포옹> <당신의 손길 속에서> 등 젊은 감독들의 영화도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만장일치에 가까운 별점 하나를 받은 노장 존 부어맨의 <컨트리 오브 마이 스컬>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아직 낯설지만 아주 먼, 언젠가는 에릭 로메르처럼 존경을 바치며 모시게 될지도 모르는 젊은이들. 이들의 영화를 작은 지면에 모아보았다.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오빠들의 잔혹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남성 추억담의 입체적 판타지 이동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jlee@chosun.com <말죽거리 잔혹사> 새해 한국영화는 온통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공적인 과거’인 ‘역사’를 다루는 데 비해 <말죽거리 잔혹사>는 ‘사적인 과거’인 ‘추억’을 다루고 있다. 지금 관객은 온통 ‘스펙터클한 역사의 잔상’에 열광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난 ‘화석이 된 추억의 이명(耳鳴)’에 더 관심이 있다. 완성도 높은 대중영화들로, 개별 에피소드까지 상당히 겹치는 이 셋은 농담 삼아 말하자면, ‘오빠는 고등학교 때 이랬단다 3부작’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근친관계에 있다. 하지만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이다. 나는 세 영화가 과거를 강렬히 환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과거를 대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점은 이 영화들이 흥행이란 형태로 대중에게 수용될 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다(이 글에서 <친구>는 비교를 위해 고교 시절을 다룬 전반부 위주로 논의한다). 1. 시제 - 증오가 강할수록 그리움도 깊다 1978년의 <말죽거리 잔혹사>, 1981년의 <친구>, 1986년의 <품행제로>는 모두 남자 고교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시대가 그러했듯, 영화 속 고교들 모습은 하나같이 정글 같다. 폭압적 권력의 축도인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의 메커니즘을 체화한 학생들 역시 ‘짱’이라는 권력의 정점 주위에 둘러서서 서로 주먹을 날린다. 그러나 <품행제로>에서 학생들은 일상화된 교사 폭력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교사가 발로 짓밟기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카메라는 맞는 아이들의 과장된 행동 위주로 코믹하게 담아냄으로써 폭력을 고발하진 않는다. <품행제로>에서 교사 폭력은 그저 그 시절의 풍경일 뿐이다. <친구>에서는 아버지 직업을 물으며 때리는 담임교사의 무자비한 폭력장면에서 매를 맞던 준석(유오성)이 화를 벌컥 내고 동수(장동건)와 함께 교실을 박차고 나온다. 동수는 패싸움으로 퇴학당한 뒤 학교를 찾아가 교무실의 장식장을 박살낸 뒤 놀라는 담임교사에게 “길에서 내하고 만나지 마소”라고 위협적으로 내뱉는다. 교사 폭력에 대한 증오가 가장 강한 것은 <말죽거리 잔혹사>이다. 군복 입은 교련교사의 ‘캐비닛 폭행’을 비롯한 교사 폭력은 양으로도 가장 많다. 학생들 반발도 제일 거세다. 현수(권상우)는 때리는 교련교사의 주먹을 쥐어 제지하고, 찍새(김인권)는 아예 그에게 ‘헤드록’을 걸어 직접적 위해를 가한다. 이는 서울 강남(<말죽거리 잔혹사>-양재동)과 강북(<품행제로>-종로), 그리고 지방 도시(<친구>-부산)라는 공간의 차이일 수도 있다. 교사 폭력 정도가 가장 강한 <말죽거리 잔혹사>의 강남은 지난 30년간 ‘욕망의 땅’으로 상징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런 차이는 과거와의 거리 정도에 달려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와의 심리적 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 <품행제로>의 순서로 가깝다. <품행제로>의 시제는 이미 발생한 일회적 사건을 기술하는 ‘과거시제’다. 이 영화는 뒷짐진 채 웃음과 관조가 반씩 섞인 시선으로 지난날을 바라본다. 과거를 이미 서랍 속에 정리해놓은 사람의 여유가 엿보이는 이 영화는 작품 마지막을 장난기 가득한 후일담으로 장식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거리를 확보했다. <친구>의 시제는 ‘과거완료’다. 영화 속 어린 시절과 고교 시절은 그 자체로 완벽한 폐곡선 같다. 노래하는 진숙(김보경)을 보고 친구들이 동시에 반하는 일로 시작해서 퇴학과 가출로 막을 내리는 고교 시절 부분은 결국 ‘우리 모두 하나였던 그리운 과거’로 완결지어져 있다. 사라진 (반)영웅들 뒤로 완결된 신화가 남은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제는 ‘현재완료진행형’이다. 여기서 과거는 여전히 현재의 악몽으로 출몰한다. 세월이 흘렀지만 만든 이는 과거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느끼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고통은 ‘고통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환부로 남아 영원한 통증을 안기는 고통’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현실이기에 고통을 안긴 대상에 대한 증오가 날것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강력한 악의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과거는 현재가 된다. 80년대의 상징인 성룡 앞에서 현수가 70년대를 은유하는 이소룡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엔딩은 이 영화의 과거에 대한 자세를 드러낸다. 2. 구조 - 숲에서 나오지 않으면 숲을 볼 수 없다 <품행제로> 스토리를 펼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런 차이는 더 확실해진다. <품행제로> 화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뒷말’을 나누는 장면들을 계속 집어넣는 것이다. 풍문으로 이야기 전체를 감싸는 방식은 이야기 자체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영화는 과거란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과장과 윤색으로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풍문의 메커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시킴으로써 과거를 ‘그저’ 과거로 남긴다. 가끔 그리워도, 과거란 결국 삶의 가십일 뿐이다. 여기서 풍문은 과거 사건을 다루는 ‘기사’의 구실을 한다. 반면 <친구>에서 상택(서태화)의 내레이션은 ‘편집 후기’와 같다. 감독의 시선을 품고 있는 캐릭터 상택은 관찰자이다. 그때그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친구들이 빚는 사건의 추이를 함께 담아내는 이 내레이션은 안정된 대표 집필로 ‘학급 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영화의 과거는 관찰자의 내레이션으로 표구된 채 액자에 완결된 형태로 담겼다. <말죽거리 잔혹사> 역시 내레이션을 곁들인다. 그러나 그 내레이션이 주인공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일기’와 흡사하다. 일기는 형식상 과거의 기록이지만, 내용적으론 생생한 현재를 담지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주관적이다. 펼쳐지는 순간 일기는 늘 세월을 소거해 현재 앞에 과거를 일으켜세운다. 일기 쓰는 사람이 쓰는 자신과 쓰여지는 대상인 자신을 구분하지 않듯, 이 영화 역시 과거 속으로 온몸을 던진다. 3. 액션 - 가장 강렬한 판타지는 리얼리즘의 외투를 입는다 세 영화는 개봉 당시 모두 ‘직접 치고받는 사실적 액션’을 강조했다. 그러나 <품행제로> 마지막 싸움장면의 리얼리티와 비교한다면, 잘 안무된 나머지 둘의 액션은 상대적으로 액션영화에 가깝게 양식화되어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만화적인 액션장면과 가장 사실적인 액션장면이 모두 다 <품행제로>에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엔 3개의 액션 시퀀스가 나오는데 중필과 태권도부의 싸움, ‘악당’ 상만과 유도부의 싸움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만화적 액션으로 펼쳐진다.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중필과 상만의 싸움장면은 말 그대로 ‘개싸움’이다. 중필과 민희(임은경)의 키스장면은 갖가지 앵글로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던 카메라가 여기선 흔들리는 촬영감독의 어깨에 실려 컷을 나누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한다. <품행제로>의 액션 판타지는 그 과장된 톤으로 오히려 ‘판타지스러움’을 스스로 발라낸다. 풍문에 따라 펼쳐지는 두개의 시퀀스를 최대한 과장한 뒤 가장 사실적인 싸움장면을 정점에 놓아 대조케 함으로써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 명확히 금을 긋는다. 판타지가 관객에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리얼리즘의 외투를 입었을 때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액션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현수가 여러 명의 선도부원들을 상대로 주먹과 발, 그리고 쌍절곤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은 동선과 액션이 잘 짜여진, 액션에 대한 관객의 판타지를 그대로 만족시켜주는 시퀀스이다. 다만 컷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고 카메라가 트릭을 부리지 않아 사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리얼리즘 그릇에 담긴 이 영화의 액션 판타지는 관객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친구>에서 극장 안 패싸움은 액션영화의 전형적 테크닉으로 구성됐다. 유리창과 소화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이 장면의 박진감은 고교 시절을 내내 역동적으로 담아온 카메라의 특성을 극대화한다. 다른 두 영화에서와 달리 <친구>의 극장 패싸움은 둘러서서 지켜보는 구경꾼들이 없다. 그건 <친구>가 이미 구경꾼 시선이 필요없는, 자기완결적 ‘과거완료’ 영화이기 때문이다. 4. 내용 - 우정, 사랑, 성장의 곁에 선 여성들 내용적으로 세 영화의 차이는 무엇보다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있다. 상대적 비교를 할 때, <품행제로>는 사랑에 대한 영화이고, <친구>는 우정에 대한 영화이며, <말죽거리 잔혹사>는 ‘성장’에 대한 영화이다.>&n <친구>에서 진숙은 그저 강렬한 ‘싸나이들의 우정’에 소품처럼 끼어 있다. 그는 사랑을 중심 테마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완전무결했던 우정에 첫 균열을 가져오는 뇌관 역할을 할 뿐이다. 참극의 순간까지도 비장한 우정으로 덧칠하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이다. 모든 의문을 무화시키는 동어반복적 대답은 결국 맹목적인 ‘내 편’의 갈구일 뿐이다. 달리 <친구> <친구>에서 진숙은 그저 강렬한 ‘싸나이들의 우정’에 소품처럼 끼어 있다. 그는 사랑을 중심 테마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완전무결했던 우정에 첫 균열을 가져오는 뇌관 역할을 할 뿐이다. 참극의 순간까지도 비장한 우정으로 덧칠하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이다. 모든 의문을 무화시키는 동어반복적 대답은 결국 맹목적인 ‘내 편’의 갈구일 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은주(한가인)는 참한 여고생으로 보이지만, 사실 ‘팜므파탈’에 가깝다. 두 남자 사이에서 이중적인 그의 처신은 결국 우식(이정진)과 현수의 우정을 망가뜨린다. 극중 비중에도 불구하고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은주는 현수의 ‘아픈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한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역할을 할 뿐이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친구>에 비하면 이 영화의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연히도 함께 농구를 잘해서 친구가 됐고, 무리가 되는 게 좀더 유리했기에 어울려 다닌 것뿐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식과 함께 떠난 우정이나 은주와 함께 사라진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게 증발하고 난 뒤 남겨진 현수가 느끼는 절망적 상황이며 세계와 홀로 대면하게 된 자의 실존 자체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세계’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은 아버지들이다. 이 두 영화는 세상과의 투쟁에 나선 남자(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행제로>에는 어머니만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다른 두 영화에서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하다. 그건 이 영화가 세상과 맞서는 대신, 세상을 끌어안거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 영화 중 <품행제로>의 민희만이 ‘평범한’ 여학생이다. 다른 두 영화와 달리 <품행제로>의 애정구도에선 남자가 중심이 된다. 중필을 둘러싸고 나영(공효진)과 민희가 신경전을 벌이는 구도가 말하는 것은 명백하다. 남성 화자가 이끄는 영화에서 남자가 삼각관계 중심이 된다는 것은 러브 스토리의 절대적 비중을 의미한다. 다른 두 ‘남성영화’와는 달리 여기선 여자 때문에 남자들끼리 맞서는 설정이 없다. 5. 향수 - 천국의 동경은 지옥의 불길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셋을 비교하면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말죽거리 잔혹사>가 다른 두편의 영화와 달리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이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 네 친구들이 바닷가에서 “조오련이 빠른지, 거북이가 빠른지” 즐겁게 논쟁하는 장면을 엔딩으로 삼을 정도로 지나간 과거를 ‘완벽했던 황금시대’로 여기는 <친구>는 초지일관 과거를 그리움으로 그리는 작품이고, <품행제로>는 과거에 명확히 떠나보낸 뒤 즐겁고도 느긋하게 ‘옛날얘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를 거세게 부정하면서도 거기서 뛰쳐나오기를 거절하는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 속 지옥 같은 학교생활 속에는 기이하게도 회귀본능에 가까운 짙은 향수가 담겨 있다. 폭력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머리’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가슴’은 ‘수컷다움’에 강렬한 매혹을 느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라는 현수의 고함이겠지만, 그가 싸움을 앞둔 채 거울을 보며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한판 뛸까”라고 싸움걸기를 연습하는 대사도 못잖게 중요하다. 세상에 제대로 싸움을 걸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의 억눌린 내면은 장렬한 클라이맥스 액션 속에서 그 내밀한 욕망을 발산한다. 그런데 사실 이율배반은 우리 모두의 ‘입체적 판타지’의 정체다. 우린 천국의 나날을 동경하면서도 불현듯 지옥의 불길도 궁금해한다. 구름 위에서 세상 모두를 품는 영화(榮華)를 바라면서도 모두에게서 처절하게 버려지는 밑바닥도 은밀히 꿈꾼다. 판타지는 종종 피학적이다. 어떤 종류의 판타지를 완성하기 위해선 사랑의 배반과 우정의 실종 그리고 압도적인 세상의 무게가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참혹한 과거를 그리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과거에 대해 제일 애착을 느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친구>는 과거를 이상화한다. <품행제로>는 과거를 관조한다.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한손으로 과거를 밀쳐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끌어당긴다. 영화는 결국 관객의 판타지를 겨냥한다. 관객은 스크린에 펼쳐진 ‘공적 판타지’ 중에서 자신과 맞는 부분을 ‘사적 판타지’로 받아들인다. <친구>는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안전한 신화적 영웅담이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카타르시스와 현재적 부담을 동시에 안기는 장렬한 패배의 연대기이며, <품행제로>는 과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억의 에피소드 모음집이다. 세 영화의 흥행 양상 차이는 부분적으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편 중 어떤 것을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느냐 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과거를 지나왔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건너온 과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현재는 경험하는 순간 휘발되어버리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은, 어차피 과거 뿐이다.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1]

신년호 특집이었던 ‘아시아 네트워크’ 후속으로 홍콩 영화산업과 홍콩 시네마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특집을 마련했다. 예측했던 대로 홍콩 영화계는 올해 중국과의 무역장벽이 사라지면서 ‘대륙으로, 대륙으로’를 외치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할리우드 메이저의 아시아 프로덕션을 대행해온 살롱 필름즈는 한국 영화계에 의미심장한 제안을 우회적으로 건네왔으며, <와호장룡> 이후 ‘아시아 영화계의 파워맨’으로 부상한 에드코필름의 빌 콩은 아시아 영화인의 역할 모델로 모자람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화라는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서는 홍콩국제영화제와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실무자가 97년 이후의 홍콩영화를 개괄해주었고, 주목할 만한 신예 감독들을 선별하고 소개해주는 작업은 홍콩에 거주하는 미국 평론가가 ‘제3자’의 입장에서 해주었다. "중국은 나의 조국, 나의 시장" 홍콩영화계, 중국과 경제 파트너십 협정 맺고 시장 잡기 혈투 CEPA 체결 - 중국 시장이 온다! 설 직후의 홍콩은 긴 연휴의 달콤함에 여전히 잠겨 있는 듯했다. 그들을 서둘러 깨우는 건 대륙에서 번져오는 조류독감의 그림자였지만 세계 최대의 비디오·DVD 체인점 ‘블록버스터’가 홍콩사업을 접고 더불어 중국 진출 계획도 포기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한몫했다. 각종 매체들이 홍콩의 임대료가 너무 비싸고 중국의 해적판 때문에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블록버스터’의 불평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느라 분분했지만 어쨌든 유쾌한 소식일 리 없다. 홍콩영화의 박스오피스 수입은 1993년 최고점을 기록한 뒤 99년까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12억4천만홍콩달러(약 1984억원)에서 3억8300만홍콩달러로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작품 수는 93년 242편에서 2001년 126편으로 줄었다. 반면 해외영화의 박스오피스는 5억홍콩달러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수익이 늘어난 해는 주성치의 <소림축구>가 바람을 일으킨 2001년이다. 이 해에는 4억5천만홍콩달러를 기록했다. <무간도> 시리즈가 기염을 토한 2002년, 2003년 역시 홍콩영화는 체면치레에 급급했고 2003년 제작편수는 70편이 채 못 된다. 암운 가득한 홍콩 영화계에 비추어봤을 때,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 1월26일치 1면에 실린 1단 기사는 의미심장해 보인다. 설 연휴 동안 중국 대륙에서 홍콩을 찾은 관광객이 전년 대비 31%(8만4천명) 증가한 27만3천명에 이르며 이들의 소비 지출로 상당한 경제효과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침체와 위기라는 대세에 큰 변화는 없지만 2004년의 홍콩 영화인들은 이같은 급격한 변화를 바탕으로 구세주를 만난 듯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중국이다. 홍콩과 중국 본토 사이의 자유무역협정이라 할 긴밀한 경제 파트너십 협정(CEPA: Closer Economic Partnership Agreement)이 올 1월 발효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국 본토와 홍콩의 합작영화는 참여인력과 제작비 투자비율에 관계없이 무조건 중국영화로 분류돼 20편으로 제한된 해외영화 배급 쿼터에서 자유로워졌고, 조인트 벤처에서 49%로 제한됐던 소유권 지분제한도 최대 75%까지 높일 수 있게 됐다. 13억 소비자로 들끓는 거대한 대륙시장이 외국보다 한발 앞서 홍콩에 활짝 열렸다는 뜻이다. 때맞춰 변화는 곳곳에서 보인다. 방송사 TVB를 운영하며 방송에만 몰두하던 왕년의 거대 스튜디오 쇼브러더스가 세계 최고 설비의 종합스튜디오 ‘홍콩무비시티’를 올해 안에 완공하고 영화제작 재개를 포함해 중국을 겨냥한 영화사업에 다시 뛰어들며, 홍콩 최대의 DVD 배급사이자 제작사인 유니버스 인터내셔널 홀딩스는 중국 광저우를 시작으로 상하이, 베이징에 직영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골든하베스트도 지난해 12월 홍콩 인근의 선전에 12개 스크린의 멀티플렉스를 짓고 오는 12월 7개 스크린을 더 늘릴 계획이며, 베이징의 차이나 필름 그룹과 배급업을 위한 조인트벤처 계약을 맺었다. <와호장룡>에 이어 장이모의 <영웅>과 제작 중인 <십면매복>(<영웅2>)의 프로듀서이자 홍콩 에드코필름의 대표인 빌콩의 표현은 선언적으로 들린다. “나는 홍콩 영화인과 영화계가 어떻게 중국에 통합되어 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국은 가장 중요한 시장이자 투자원이 됐다. 이제 홍콩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르겠다. 홍콩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한 부분일 뿐이다.” CEPA가 홍콩과 중국 사이에 합작 및 배급·극장분야에 뚜렷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면, 홍콩 내부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홍콩국제영화제가 내년부터 민영화되며 같은 해부터는 6월에 열리던 필름마트가 영화제 곁인 4월로 옮겨와 시너지 효과를 노린다. 최근에는 ‘필름 개런티 펀드’가 생겨 제작비의 3분의 1을 확보하면 나머지를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통로가 생겼고, 법인세의 일정 부분을 영화제작에 투자하면 세금을 감면해주는 법이 통과됐다. 이쯤에서 홍콩 영화산업 안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보자. ▲ 멀티플렉스 1개관을 예술영화 및 고전영화 상영관으로 활용하는 에드코필름의 팰리스극장 ▲ 올해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스튜디오 '홍콩무비시티'를 완공하면서 영화제작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는 쇼브러더스 45년 만의 변신, 살롱 필름즈가 변한 까닭 홍콩의 영화사는 ‘패밀리 비즈니스’인 경우가 흔하다. 살롱 필름즈도 그랬다. 회장 찰스 왕과 대표 프레드 왕은 형, 아우 사이로 두 형제는 1949년 중국 간쑤성에서 홍콩으로 건너왔다. 사진현상소에서 시작해 1959년 파라마운트 영화의 홍콩 로케이션 대행을 하면서 파나비전 카메라의 아시아 독점권과 홍콩의 다양한 기술스탭을 갖추고 할리우드의 현지 스튜디오 구실을 해왔다. 최근작으로는 <툼레이더>와 <러시아워> 1, 2편이 있고 현재는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울트라 바이올렛>(제작 콜럼비아, 제작비 4000만달러)을 진행 중이다. 홍콩에서 45년 동안 배급업이나 극장사업 등에 눈돌리지 않고 유일무이하게 한우물만 파온 살롱이 변신을 시작한 건 중국 때문이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에 이곳과 똑같은 멀티미디어센터를 만들고, 배급 및 극장사업에 뛰어들 채비를 끝냈으며 처음으로 자체 영화제작에 들어갔다. 영화제작은 물론 배급과 극장은 모두 디지털 방식이다. 중국과 패키지 딜로 계약한 HD영화 10편의 납품이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상하이에 지은 멀티미디어센터는 CEPA가 직접적 원인이다. CEPA로 중국에서의 제작이 늘어날 것이니까 당연히 후반작업 시설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봤다. 긴 세월 동안 배급이나 극장쪽으로 사업을 확장하지 않은 건 차근차근 우리가 하던 거 하면서 세상을 따라갈 뿐이라는 원칙 때문이었다. 세상이 변했다. 이제 자체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제작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들 모두 중국에서 진행한다.” 넉살좋은 웃음을 만면에 풍기는 찰스 왕에게 중국이 무슨 의미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은) 조국이고, 조국 없이는 나도 없다. 내가 그 일부임이 자랑스럽다. 우린 오랫동안 할리우드와 공동작업 경험, 커넥션, 철학 등을 유지해왔는데 중국의 영화산업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즈음, 양쪽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하게 된 게 영광스럽다.” 낯간지럽게 조국 운운하긴 했지만 중국에 대해 찰스 왕 정도의 기대감 혹은 절박함을 가지지 않은 홍콩 영화인은 만나보기 힘들었다. ‘웰메이드’ 바람 솔솔 한국에선 CJ엔터테인먼트나 시네마서비스 정도의 메이저에 해당하는 유니버스 인터내셔널 홀딩스는 98년 증시에 상장돼 홍콩 영화산업의 자본구조에 선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증시에 상장된 영화사는 최근 <쌍웅>으로 재미를 본 ‘중국성’(China Star)과 ‘메이아’(Mei Ah)를 포함해 세곳이다). 올해 CEPA 발효를 맞아 모험적인 사업확장을 꾀한 이 회사 역시 형제가 경영하는 ‘패밀리 비즈니스’다. 동생 앨빈 램의 명함에는 ‘운영총재’라고 적혀 있다. 올해에는 중국에서 시작한 극장사업 부문에서 들어올 적잖은 수입을 기대하는 눈치다. “미국과 비교해보면 중국의 극장 보급률은 수천분의 일에 불과하다. 미래 수입률이 엄청날 것이다. 물론 중국의 극장 수입이 온전히 회수되지 않는 불투명성이 골칫거리이긴 하지만 이는 좀더 광범위하고 직접적인 극장 운영을 통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중국 시장 변화 디지털 시네마 열풍 지난해 홍콩필름마트의 규모는 이례적으로 40%나 증가했다. 홍콩필름마트는 TV마켓이기도 해서 HD 콘텐츠에 목말라 하는 중국의 방송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온 것이다. 중국은 VCR 단계없이 DVD 시대로 건너뛴 것처럼 영화도 극장도 디지털 시대로 도약해버렸다. 중국의 성마다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방송사에서 자체 제작해 방송하는 HD영화와 HD드라마의 수요는 엄청나서 미처 채우지 못한 제작 물량이 홍콩으로 넘어오고 있다. 감독이나 기술 스탭이 홍콩에서 장기간 보이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HD영화나 HD드라마를 찍고 있다고 보면 십중팔구 맞는다. 80년대 홍콩 뉴웨이브의 주역이었던 관금붕 감독 역시 중국에서 방송용 HD영화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살롱 필름즈 사무실을 찾았을 때, 상하이 촬영을 앞두고 <울트라 바이올렛>의 스탭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킬 빌>의 짝퉁영화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울트라 바이올렛>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슈퍼 HD급 카메라인 HDW F-950을 사용한다. 이 기종이 쓰이는 건 <스타워즈 에피소드3> 이후 두 번째이며 살롱 필름즈는 이미 이 기종을 확보해둔 상태다. 홍콩무비시티의 기본 컨셉도 디지털 시네마를 겨냥하고 있다. “5개의 스튜디오는 할리우드와 달리 각각 방송사의 부조종실 같은 기능이 달려 있고 모든 후반시설이 디지털로 연결돼 단계마다 공정을 확인해가며 작업할 수 있다. 심지어 위성으로 연결해 미국에서의 촬영 분량과 연계해가며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CG와 실사 부분을 즉석에서 합성해보는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다.” 할리우드에서 건너와 2년째 전자장비 설계와 운용을 책임지고 있는 에릭 스탁의 설명이다.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2]

▲ <무간도> 시리즈로 돈과 명성을 동시에 얻은 홍콩의 메이저 ‘미디어아시아’의 야심찬 신작은 자동차 경주를 소재로 한 액션물이다. ▲ 미디어아시아의 배급·판매 책임자 제프린 첸은 아직은 미성숙한 중국시장에 서둘러 진출하기보다 시간과 돈을 더 들이더라도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올해 사업계획을 잡고 있다고 했다. 그는 “향후 10년 안에 (중국이란) 큰 시장이 생길 것이지만 나쁜 영화의 미래는 없다”며 좋은 영화 만들기를 강조했다. 시나리오 없이 트리트먼트 몇장만 쥐고 촬영에 들어가는 등 기획단계와 포스트 프로덕션의 구분이 애매하기 일쑤인 홍콩의 날림공사 관행은 과연 사라질까? 홍콩에는 평균 제작비라는 게 없다. 5억원이든 50억원이든 책정된 제작비에 맞추어 찍을 뿐이다. 사석에서 만난 한 관계자는 “최근 중국에서 한달 동안 30회 촬영을 나간 홍콩영화가 제작비를 6억원에 맞추는 걸 봤다. 열흘 만에 한편을 뚝딱 만들기도 한다. 퀄리티야 어찌됐든 영화 기능올림픽이 열린다면 홍콩이 죄다 금메달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유니버스의 요즘 제작비 규모는 30억원에서 80억원 사이다.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있고 다양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들 기회가 왔다. 지난 3년 동안 제작비가 가파르게 상승해 10억∼30억원 정도 올랐지만 중국이란 큰 시장이 하나 더 생긴 셈이어서 쓴 만큼 벌어들일 여건이 생겼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훌륭한 감독의 확보이며 그 다음은 시나리오 단계에 만전을 기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성룡과 <뉴 폴리스 스토리>를 찍는 진목승이나 대니 팡, 옥사이드 팡 형제 같은 감독들과 향후 2년간 1∼2편씩 만들기로 했다.” <무간도>의 투자·배급으로 명성을 얻은 ‘미디어 아시아’는 유니버스와 어깨를 견줄 만한 메이저다. 이 회사 역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됐다고 역설했다. “<무간도>가 우리의 제작이나 투자 방향에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아시아에서 우리 회사의 위상이 한 단계 격상됐음을 곳곳에서 느낀다. 이제 우리의 기본 전제는 <무간도>처럼 독창적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됐고, 그 다음 원칙은 국제적으로 통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한다는 거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작품을 1년에 2∼3편씩 지속적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아울러 다양한 중저예산의 영화도 기획하고 있다.”(배급·판매 책임자 제프리 챈) 그렇지만 이들 메이저가 즉각 ‘환골탈태’한 것 같지는 않다. 미디어 아시아는 <무간도>의 교훈을 실전 응용에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다. 각각 크리스마스와 설을 겨냥해 만든 로맨틱코미디 <매직 키친>과 양자경을 주연으로 한 SF무협 대작 <실버 호크>의 흥행 성적은 미디어 아시아를 실망시켰다. 게다가 이 두 영화는 홍콩시네마의 몰락을 재촉한 진부한 장르의 뻔한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었다. 홍콩 영화계의 구태 중 하나가 몇 안 되는 스타들을 메이저가 싹쓸이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슈퍼스타가 부재한데다 그나마 메이저의 싹쓸이로 ‘자원 분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제작비의 60∼70%를 캐스팅에 쓰게 되니 프로덕션의 질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홍콩의 대표적 매니지먼트사인 엠퍼러 그룹과 유니버스는 현재 인기 절정을 누리는 10대 아이돌 스타 ‘트윈스’를 과점하고 있다. 엠퍼러는 지난해 ‘트윈스’를 주연으로 한 <트윈 이펙트>를 제작해 흥행 톱 10에 진입시키는 재미를 봤다. 유니버스는 트윈스뿐 아니라 5∼6명의 스타와 연간 몇편을 찍는다는 패키지 계약을 맺고 있었지만 다른 작품을 해선 안 된다는 배타적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들이 다른 작품을 할 시간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엠퍼러그룹이 작품 기획안이 나오기도 전에 이효리와 2편의 영화를 찍겠다고 계약부터 하는 것도 이런 경우다). 유니버스는 또 <소림축구>의 아류가 명백한 <공부축구>(쿵푸 사커)를 제작 중이기도 하다. ‘아시아 영화제작의 허브’를 꿈꾸며 최소 1천억원 규모의 후반제작기지로 추진 중인 ‘씨네포트 부산’의 경쟁자로 지목받은 게 ‘홍콩무비시티’와 ‘사이버포트’다. 무비시티에 2400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쇼브러더스는 취재 요청을 순순히 받아줬고,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다른 홍콩영화 관계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18개월 전 공사가 시작된 이래로 무비시티의 실체가 공개된 적은 없다고 했다. 의아스러운 건 다른 데 있었다. 어떻게 무비시티의 완공이 CEPA 발효와 딱 맞아떨어지느냐는 것이다. CEPA의 실행이 애초 예정보다 2년 앞당겨졌는데다가 “중국시장에 홍콩영화가 진출하는 것이 상당 부분 제약을 받아오다가 최근 들어 업계의 강력한 로비와 홍콩 자치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많이 완화됐다”는 홍콩 중문대 영화과 교수인 샘호의 말을 듣자 모종의 거래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운이 따랐을 뿐이다. 1998년에 정부가 신계지 일부를 영화업계에 불하해준 게 계기였다. 불하받은 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 홍콩무비시티를 계획하게 됐다. 사실 이걸 기획할 때만 해도 정부가 많은 지원책을 말했지만 실제로 이뤄질지 회의적이었고 그것과 상관없이 그냥 가기로 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CEPA와 맞아떨어졌다. 영화업계의 길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서광이 비추는 듯하다.”(홍콩무비시티 책임자 레이먼드 챈) 6월부터 차례로 설비를 갖출 포스트 프로덕션 빌딩보다 눈길을 끄는 건 HD와 특수촬영 환경에 최적화된 소·중·대·초대형 사운드 스테이지(스튜디오) 5개동과 더빙 씨어터였다. 좌석이 지상으로부터 20피트 떠 있게 만들어지는 400석 규모의 더빙 시어터는 세계 최고 규모의 음향시설과 스크린을 갖추게 되며, 그 지하에는 역시 최고의 현상설비가 들어온다고 한다. ‘홍콩무비시티’는 쇼브러더스가 운영하는 사설 스튜디오다. 고가의 사용료가 요구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생각보다 비싸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레이먼드 챈은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긴 세월 동안 순차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곳은 백지상태에서 최대의 집적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한번에 설계했기 때문에 확보한 기술의 질에 비해 건설 비용이 상대적으로 아주 싼 편”이라며 “최소 8편의 작품을 동시에 촬영하고 후반작업할 수 있는 규모라서 이를 자체 활용할 영화제작을 곧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룡반도 안의 신계지(新界地) 깊숙한 곳에 지어지는 무비시티와 달리 올해 여름께 완공될 ‘사이버포트’는 홍콩섬 남단 해안에 위치했다. 사이버포트는 위압적으로 느껴질 만큼 미래도시적인 웅장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입주해 있는 이곳은 IT와 멀티미디어의 아시아 허브를 꿈꿀 만하지만 영화산업의 후반기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홍콩 최대의 디지털 후반작업 회사인 ‘센트로 디지털 픽처스’만이 입주해 있었다. 센트로의 존 추 대표는 “이곳은 HD 스튜디오, 레코딩 스튜디오, 모션캡처 스튜디오 등 공용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며 “그러나 다른 영화 후반업체가 입주한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풍운> <소림축구> <킬 빌> 등의 CG를 맡아 처리했고 현재 주성치의 <쿵푸>와 <킬 빌2>의 후반작업이 진행 중에 있었다. 무비시티에 인접해 있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느냐고 묻자 “그곳은 너무 멀다”며 손사래를 친다. CEPA 효과는 이 회사에도 있었다. 지난해 상하이에 자회사를 세운 뒤 그곳에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겸한 ‘중국식 해리 포터’ <시크릿 오브 우루>를 제작 중이다. “미라맥스와 장편애니메이션을 공동기획 중이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고 지금 이 시점의 홈베이스는 중국이다. 홍콩은 너무 작다. ▲ 공사 18개월째인 홍콩무비시티. 무비시티의 설비가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인지는 홍콩 안에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중국 효과’ 비관적 시각도 무비시티처럼 홍콩은 고도의 집적효과를 발휘하도록 설계되고 발전돼왔다. 지하철역과 쇼핑몰이 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 건물 내부에서 입구로 나서자 홍콩성시대학의 캠퍼스 안이다. <와호장룡> <툼레이더2> 등의 제작에 관여한 옥토버 픽처스 대표 필립 리는 홍콩성시대학의 ‘크리에이티브 미디어’ 학부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홍콩에서 만난 유일하고도 강력한 ‘비관론자’였다. 마침 그는 홍콩 영화산업에 대한 논문을 준비 중이었는데 ‘중국 효과’에 대한 홍콩 영화인의 믿음은 현재로선 환상이라고 단언했다. “CEPA로 중국 진출의 모든 장벽이 사라진 듯 이야기한다. 1∼2년은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만든 것, 만들 것 모조리 다 팔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퀄리티의 향상없이 지금 이 상태로 공급한다면 장기적으로 대륙 관객이 홍콩영화라면 질려서 외면하는 악재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짚은 홍콩 영화계의 문제점은 16가지에 이른다. 열정과 창의성의 부재, 투자자를 등돌리게 하는 투명성 부족, 독립영화 프로듀서의 부족, 영화계의 리더십과 국제적 비전 부재…. 그의 이런 비관의 근원은 주로 보수적이고 근시안적인 제작자들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한국 영화계에 충고하다 홍콩을 떠나기 전날 밤, 옛 중국은행 빌딩으로 초대됐다. 몇층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고급 사교클럽 ‘중국회’(中國會)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 전통의 레스토랑, 홍콩섬의 화려한 야경을 볼 수 있는 베란다, 사방 벽이 고급스런 책장과 책으로 가득 찬 거실, 서양식 바 등이 몇층에 걸쳐 화려하게 자리잡고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일종의 갤러리다. 계단과 복도에 수많은 그림들이 전시돼 있다. 그런데 바에 들어서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뼘 빈틈도 없이 빼곡히 걸려 있는 수십점의 그림들은 모조리 마오쩌둥과 중국 인민군대를 묘사한 것들이었다. 금융자본주의와 무역도시의 상징 같은 홍콩의 부유층이 모여 술잔을 부딪치는 곳에 마오쩌둥이라니…. 중국회는 97년 홍콩반환 직전에 만들어졌다. 새 시대를 향한 재빠른 변신일까, 숨겨뒀던 본색의 발현일까. 분명한 건 중국회처럼 홍콩 영화산업과 홍콩 시네마를 서서히 ‘지배’하는 것도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 거대한 대륙, 중국이었다. 필립 리처럼 홍콩영화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근거도, 빌콩처럼 더이상 홍콩영화를 따로 떼어내 보는 게 무의미해졌다는 이유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지만 홍콩이 한국과 기본적으로 다른 차별성은 분명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8일 동안 만난 홍콩 영화인들 중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제작자(와 감독)에게 해외부문은 ‘변수’(變數)일망정 ‘상수’(常數)는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홍콩 영화산업에서 ‘해외시장’은 늘 ‘상수’다. 중국어 이름과 영어 이름 두개를 동시에 사용하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차이나클럽으로도 불리는 중국회에서 살롱 필름즈의 프레드 왕은 한국 영화계에 대한 지적과 함께 의미심장한 ‘제안’을 건넸다. “한국은 HD영화라고 하는 미래의 디지털 시네마에 대한 기술이 절대적으로 떨어진다. 또 한국 바깥의 해외시장을 겨냥하는 노하우와 네트워크가 아주 취약하다. 지금은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 차원에서 제작을 도모하면서 할리우드와 경쟁할 때다. 난 지금 윈-윈 게임을 도모할 수 있는 아시아 펀드를 만들어 안정적인 영화제작을 꾀하고자 하며 한국쪽 파트너를 물색 중이다.” 그는 중국은 물론이고 방콕, 콸라룸푸르, 도쿄, 마닐라 등에 이미 지사를 세워놓았다. 한국과는 기존의 투자 펀드들 외의 금융계 인사와 접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살롱 필름즈는 지나온 돌다리도 다시 두드릴 만큼 신중하게 움직이는 회사로 유명해서 ‘아시아 펀드’ 구상이 언제 구체화되고 실행될지를 당장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홍콩에서 돌아온 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달시 파켓이 <씨네21> 439호 ‘외신기자클럽’에 쓴 글의 끄트머리 한 문장이 유달리 크게 보였다.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가 그 자체로 세계에서도 큰 편인 까닭을 잔뜩 써놓은 끝이다. “머잖은 미래에 중국시장의 한 귀퉁이라도 차지하고 있다면 한국 영화산업의 미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셀레스티알 픽처스 쇼브러더스의 모든 영화 DVD로 복원, 출시한다 쇼브러더스 라이브러리 760편의 판권을 모두 사들여 필름으로 복원해 DVD 출시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셀레스티알 픽처스는 사무실도 쇼브러더스의 옛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2002년 12월 첫 출시 이래 170편을 복원했고, 첫 타이틀은 지금까지 50만개가 팔렸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한국’을 내세운 팸플릿을 특별히 만들었다. “쇼브러더스가 한국의 영화 재능을 출발부터 지원하다”는 제목 아래 정창화 감독의 <천하제일권><더 킹 복서>, 1972)과 배우 신영균이 출연한 <철두황제>(<더 킹 위드 마이 페이스>, 1967)의 스틸 사진으로 태극 무늬를 만들어놓았다. 미국인 CEO 윌리엄 파이퍼는 “12살 때 뉴욕에서 정창화 감독의 <천하제일권>을 보고 홍콩 무협영화에 매혹됐고 그때 가졌된 꿈이 DVD 출시로 실현됐다”고 말했다. 쇼브러더스 라이브러리는 HBO, 소니 등에서도 욕심을 냈고 협상을 벌이기도 했지만 최종 거래는 셀레스티알과 성사됐다. 쇼브러더스 관계자는 “오너인 란란쇼와 셀레스티알의 소유주인 말레이시아 재벌이 친구 사이여서 판권을 그쪽으로 넘겼다”며 “DVD과 리메이크 작업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고 무비시티가 만들어지는 마당이어서 라이브러리를 팔아치운 걸 뒤늦게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셀레스티알 픽처스도 중국 진출이 활발하다. 최근 중국에서 ‘셀레스티알 무비즈’란 이름으로 24시간 방송할 케이블 채널을 확보해 2월18일 방영을 시작하며, 지난해 중국에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좋은 성과를 얻은 합작영화 <칼라, 마이 도그>를 제작했다.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3]

다양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다 홍콩에서 만난 영화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 특히 평론가나 학계쪽 인사가 빌 콩을 바람직한 역할 모델로 거론했다. 좋은 영화를 알아보는 눈이 있으며 할리우드 시스템의 장점과 약점을 체득해 국제적이고 미래적 비전을 갖고 있다는 이유다. 에드코필름의 대표인 빌콩은 <와호장룡> 프로듀서로 일약 세계적 인물이 됐고, 장이모의 <영웅> 1, 2편 제작에 이어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감독 곽재용, 출연 전지현·장혁)에 전액 투자하면서 국내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의 인물이 됐다. 빌콩은 10개의 멀티플렉스와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비롯해 제작과 배급까지 영화의 모든 분야에 관여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지만, 그가 취하는 노선은 한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도전적인 동시에 모범적이다. 홍콩의 최고층 빌딩 IFC(국제무역중심, 88층) 안에는 그가 운영하는 멀티플렉스 가운데 하나인 ‘팰리스극장’이 있다. 대리석으로 치장된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그곳의 6개 스크린 중 하나는 늘 고전영화나 예술영화가 상영된다. 한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모습 때문에 그가 취하는 노선을 두고 현지에선 “대안적 배급·극장 체인”이라고 언급하곤 한다. 독립영화로 제작된 프루트 챈의 <메이드 인 홍콩>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그만이 극장에 걸며 해외에 알렸고 영화는 성공했다. 취재팀이 홍콩에 체류하는 동안 해외에 머물던 그가 홍콩에 들른 시간은 고작 6시간. 인터뷰는 그 사이에 아주 어렵사리 이뤄졌다. “난 매우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라며 거듭 사진 촬영을 사양하더니 취재팀과 함께 찍는 걸로 양해를 해주었다. 홍콩에서 만난 영화인 중에서 가장 ‘맘좋은 아저씨’라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97년 홍콩 반환은 영화계에 긍정적 영향을 준 것인가. =나는 홍콩 안에서 반환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어떠한 보고도 듣거나 본 적이 없다. 부정적인 영향은커녕 좋은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봐도 중국과 영화적 교류의 물꼬가 터지고 활성화되는 계기가 됐기 때문에 매우 긍정적이다. -홍콩영화의 미래에 대해선. =역시 긍정적이다. 나는 항상 긍정적 관점에서 홍콩영화를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홍콩은 항상 중국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홍콩영화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영화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존재 때문에 홍콩을 포함한 아시아영화 전체의 미래는 상당히 밝다. -과거와 비교해봤을 때, 홍콩영화가 예전만 못한 건 사실 아닌가. =아마도 전반적으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국의 영화산업이 그간 성장해왔고, 홍콩의 스타들도 예전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최근 <무간도>나 <영웅> 같은 영화가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좀더 선별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한해 60여편이 외국으로 수출됐지만 지금은 한해 15편 내외다. 이 영화들은 여전히 훌륭하다. 전세계 모든 영화인들에게 핵심시장은 자국시장이다. 최근 수년 동안 홍콩에서 지배적인 장르는 지역색이 강한 코미디였다. 제작비가 저렴하고 그에 비해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외국 관객이 이런 영화를 좋아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또한 홍콩영화가 해외시장을 잃은 이유 중의 하나다. 다른 시장이 줄어들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중국시장이 존재한다. -<와호장룡>으로 당신은 아시아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커졌고, 많은 영화인들의 역할 모델이 됐다. 당시 <와호장룡>의 성공을 기대했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수정이 필요하다. 영화의 성공은 어떤 작품이든 감독의 몫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제작자의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와호장룡>이 성공한 것은 리안의 재능과 능력 덕분이고, <영웅>이 성공한 것은 장이모 덕분이다. 모두 감독의 비전과 능력에 달린 것이다. 모든 영화에서 감독이 공헌한 바는 100% 이상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만 그런 훌륭한 감독들과 일할 수 있었던 점에서 운이 좋았을 뿐이다. -<와호장룡>은 누가 먼저 제안했나, 리안이 굳이 당신과 일하기로 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리안은 오랫동안 그 작품을 하고 싶어했다. 내가 아니었어도 훌륭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배급업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그동안 홍콩과 인근 지역에 리안의 모든 영화를 배급해왔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였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장이모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고, 어떤 감독과 일하고 싶은가. =임호, 서극, 티엔주앙주앙 등과도 일해왔는데 내가 감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론 그들이 나를 선택하기도 한다. 영화를 크게 구분하자면 대중영화와 영화제를 위주로 소개되는 예술영화로 나뉜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나는 두 종류의 영화들을 다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작품마다 다르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독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관객과 어떻게 만날 것인지 분명히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다만 한 가지, 나는 항상 감독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와 틀을 벗어나서 그 이상을 추구하도록 격려한다. 그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최근 아시아영화는 제작이나 배급에서 교류가 활발하다. 유럽처럼 통합된 공동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보는가. =글쎄. 유럽의 경우 특수한 경우라서. 유럽 정부들의 정책이 장려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시아에서 비슷한 방식의 영화적 교류나 시장 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또 그게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공동제작, 공동시장의 가능성이나 전망 역시 근본적으로는 필름메이커의 능력과 관심사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에 주목하고 그것을 훌륭하게 만든다면 공동제작, 공동시장은 자연스럽게 형성될 거다. -좀더 다문화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인가. =다문화적이든 문화적 섞임이든 그런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일부 영화인들은 여러 나라의 배우들로 캐스팅을 뒤섞는 것으로 이를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야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다.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지역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캐릭터, 정서를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다. 예를 들어 한국의 <올드 보이>를 보자. 영화 속 상황에 처한 남자주인공의 심정과 행동은 어느 나라에 사는 누구라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매우 보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이런 거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 홍콩에서 제작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기대되는 것은. =몇몇 관심이 가는 작품이 있지만 그보다는 감독을 언급하는 게 낫겠다. 왕가위, 진가신, 서극, 두기봉, 유위강 등은 언제나 기대되는 감독들이다. 물론 작품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이들의 작품은 여간해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런 감독이 홍콩에서 15∼20명 정도 되지 않을까. 아참, 으로 이번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실비아 창도 훌륭한 감독이다. -제작비 조달에서 한국은 갈수록 ‘극장 자본’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홍콩에서 영화 투자자의 성격은 어떤가. =투자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한국은 큰 축복을 받고 행운을 누리고 있는 나라다. 홍콩과 비교하면 한국의 영화 투자자들은 영화하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인 것 같다. 하지만 홍콩에서 모든 투자자의 관심은 오직 돈뿐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첫마디가 손해를 봤니 안 봤니, 돈을 얼마나 벌었니 잃었니 하는 것뿐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굉장히 희귀하다. 그 기회와 축복을 잘 이용하고 활용해야 한다고 충고해주고 싶다. 영화에 대해 열정이 있는 투자자가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사실이니까. 만약 이런 성격의 돈이 사라진다면 한국 영화계는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마치 97, 98년의 홍콩처럼. 나는 <와호장룡>을 만들 때, 그런 투자자를 만나기가 힘들었고 돈을 구하려고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한마디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영화인들은 투자자들에게 책임감을 크게 느껴야 한다. 좋은 투자자가 손해보는 일은 결코 없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홍콩에서 투자 자본의 성격이 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변천하고 있을까? 글쎄. 미디어 아시아가 증시에 진입하기 이전에 모든 영화 투자자본은 개인 혹은 개인기업에서 나왔다. 미디어 아시아가 최초의 기관투자자가 됐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도 개인투자가 홍콩 영화자본의 지배적 추세다. 미래에는 자본의 성격이 바뀌기를 희망하지만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CEPA 발효로 중국 영화시장이 홍콩에 공식적으로 개방됐으나 극장 수익의 투명한 처리와 홍콩과 다른 검열 기준이 여전히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민감한 질문이다. 먼저 검열에 대해 생각해보면, 중국 당국에 홍콩 영화계의 이익이나 등급기준은 중요하지 않다. 극장 수익의 투명성이나 해적판의 문제도 중국 정부의 의지에 달렸다. 대만의 경우 수년 전까지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으나 개선을 기대하기는 곤란했다. 그런데 불과 수년 사이 모든 문제가 풀렸다. 정부가 나선 결과다. 이처럼 중국도 정부의 판단과 의지에 달렸다. 지금은 유연한 검열 기준에 의해 영화를 감상할 때가 안 됐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투명성 문제나 해적판 근절도 당국이 나서서 처리하겠다고 판단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CEPA도 그렇지만 홍콩국제영화제, 필름마트 등 정부정책의 변화가 많다.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 그런 시도들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전에는 없었던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고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영화산업은 해당 정부의 적절한 지원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영화산업이 향유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홍콩에는 오랜 기간 정부의 공식적 지원이 없었다. 이제 시작이어서 긍정적이다.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운영하면서도 멀티플렉스의 일부를 시네마테크처럼 활용하는 까닭은. =나는 배급업자로 영화에 입문했고 지금은 극장주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산업적 견지에서 책임감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다양한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어떤 책임감이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에드코필름의 식구들 모두는 영화에 대한 믿음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예술영화가 홍콩에서 성공하는 걸 지켜보는 게 특별히 즐거운 일이다. 최근 <굿바이 레닌> 같은 영화가 홍콩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경우가 그렇다.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 내의 예술영화, 고전영화 전용스크린은 늘 돈을 잃게 마련이다. 하지만 책임감과 열정 때문에 그런 일을 멈출 수가 없다. -홍콩과 해외의 거주 비율이 어떻게 되나. =반반 정도다. 내가 앞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늘 자신의 한계나 틀을 넘어서 그 이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고 했듯이 여행을 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늘 집에만 있어서야 자신의 바깥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일견 내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프로듀서로서 나 자신이 부당하게 과대평가되고 있는 걸 매우 불편하게 느낄 따름이다. 나는 나 자신이 감히 최고의 배급업자임을 자부한다.

홍콩에 대륙의 바람이 분다 [4]

97년 이후 ‘홍콩 시네마’의 흐름 홍콩영화 자체가 쇠락했기 때문이겠지만 우리는 ‘홍콩 시네마’의 흐름을 97년 부근까지만 면밀하게 ‘추적’해왔다. 그 이후의 흐름을 어떻게 일별해보느냐 하는 과제는 그들의 육성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어떤 선입견이 가져오는 섣부른 재단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홍콩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제이콥 왕과 홍콩필름아카이브의 연구주임 웡 아이링의 인터뷰를 그들의 목소리로 재조립했다. 당연히 특별한 ‘첨가물’은 없지만, 영화라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디테일과 서술방식이 아무래도 다를 두 평론가의 생각을 마구 섞은 결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제이콥 왕과 웡 아이링 (위부터) 97년 이전의 홍콩영화들에서 반환 이후의 미래에 대한 불안한 심리가 어떤 식으로 반영됐을 터이니 그걸 읽어내고야 말겠다는 식의 영화읽기는, 지금 생각해도, 우려스럽다. 그런 사회학적 관점에서의 접근은 잘 쓰면 재밌으나 자칫 잘못하면 굉장히 문제가 많다. 영화가 어떤 집단적 의식이나 욕구, 정서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보면 임호의 <홈 커밍> 정도가 홍콩 반환에 대해 직접적이고도 은유적으로 다룬 영화다. 홍콩인의 집단적 기억에 대해 말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나머지 모든 영화는 반환에 대해 이야기했다기보다 그렇게 읽힌 것이다. 당시 그런 식의 비평을 펼쳤던 논자들은 상당히 ‘심각한’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국 반환의 불안이라고? 그건 당신들의 생각! 2000년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요즘 영화들의 경향은 도피주의와 판타지다. 이번 설영화로 개봉한 <매직 키친>이 이런 트렌드를 대표한다. <섹스 & 시티>를 신데렐라 신드롬, 섹스, 성공에 대한 욕망이란 관점에서 홍콩식으로 재조립한 영화다. 말하자면 판타지영화다. 단순화를 무릅쓰면, 영화계는 물론이고 경제가 지속적으로 어렵다 보니 영화의 주제나 내용이 판타지에 집착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예술이다. 요즘의 중산층은 홍콩영화를 보지 않는다. 타깃 관객의 특징은 스스로 중산층이 될 만큼의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대학교육을 아직 마치지 않은 혹은 아예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실 이들이 스스로 판타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프로듀서가 관객이 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진가신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은 <골든 치킨2>는 대중적 코미디이지만 홍콩의 여러 문제를 잘 건드리고 있다. 너무 지역적이어서 해외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97년 이후의 테마와 캐릭터에서 각별해 보이는 건 중국이란 존재다. <무간도> 1, 2, 3편 내부의 변화 자체가 홍콩영화 전반에 스며드는 중국의 비중 변화를 보여주는 한 예이거나 메타포다. 3편을 보면 떠오르는 중국시장을 겨냥해 시나리오에 변화가 생기고, 중국의 유명 스타가 출연한다. 영화 끝에 유덕화가 어떤 마비의 증상을 보이는 반면 중국 스타는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복수를 담당하는데, 의도했는지 모르겠으나 비평가의 입장에서 보면 유덕화의 마비가 한 시대의 끝과 시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림축구>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어느 도시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중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홍콩은 분명히 아니다. 여자주인공 조위(미???)도 중국의 유명 배우다. 홍콩영화가 정점을 이룬 90년대는 아주 특수한 시기였다. 다른 문화적 코드가 별도로 존재했다기보다 홍콩영화의 문화 자체가 홍콩 영화산업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는, 기적적 시기였다. 기적적이라고 할 만큼 아주 희귀한 경우이기에 다시 반복되기 힘들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의 영화는 오락으로서도, 예술로서도 그 이전만큼의 비중을 갖고 있지 않다. 영화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인데 이런 점에서 80년대처럼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면서 예술성을 실험했던 시절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설사 다시 오더라도 그건 아마도 다른 방식으로 올 것이고, 우리는 그걸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미래에는 좀더 오락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지한 영화들의 위치는 아마도 현재의 순수문학과도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이건 세대론적으로 따져도 명백해 보인다. 80년대 뉴 웨이브 시절의 영화는 젊은 대중에게 가장 중요한 오락수단인 동시에 예술 형태였다. 물론 외국에서 교육받은 당시 감독들은 영화가 단순한 오락산업이 아닌 중요한 예술이라고 분명히 인식했다. 80년대 뉴웨이브를 주도했던 세대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부모 세대가 모두 홍콩인이 아니고 외부에서 왔다는 것이다. 부모 기준으로 봤을 때, 왕가위는 상하이 출신이고, 진가신은 타이 출신이며, 서극은 베트남 출신이다. ▲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와 병설돼 극장 옆에서 운영되는 ‘큐브릭’에선 국내외의 각종 영화서적 판매와 고전·예술영화 DVD, 비디오를 대여해준다. ▲ 뜻밖에도 홍콩영화의 긴 역사에 비해 필름을 복원·보관하는 작업이 시작된 건 최근이었다. 2001년에 지어진 홍콩필름아카이브 내부. 새로운 영화세대의 특징들 이들의 삶은 부모의 삶과 함께 가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언어적으로 풍족하고 문화적으론 복합적이며 정서적으로는 예민하다. 그들의 예민함은 급속한 변화의 시기를 겪던 60∼70년대 홍콩에서 성장한 데서 연유한다. 이들이, 곧 우리 세대가, 사회로 나오던 80년대는 영화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융성하던 시기여서 이전과 이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손쉽게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물려받은 재능과 기회가 많아 무엇이든 빨리 시작하고 성취할 수 있었던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 히피 세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후 세대의 특징은 단순성이라고까지 할 수 있으며, 주어지는 기회도 많지 않다. 영화로 봐도 젊은 감독들이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만들기에는 너무 힘든 여건이다. 저예산의 공포영화이든 엉망진창인 코미디물이든 일단 그런 영화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80년대를 거친 세대들이 지금의 홍콩영화에서 중추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중요해 보인다. 비록 방육평, 임호 등이 감감무소식이긴 해도 왕가위, 두기봉, 서극, 진가신 등은 홍콩의 역량있는 감독으로 더욱 다양해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진가신이 대표적인데 자기 작품은 물론이고 다른 감독의 작품에 프로듀서를 겸하며 작업한다. 이런 면에서 이 시기는 작가영화 시대의 종결이자 감독 겸 프로듀서 시대의 도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이들이 항상 어울려 일하는 자신들만의 그룹을 이뤄 지속적으로 작업한다는 것이다. 이건 넓은 의미의 개인적 작업 혹은 도제적 작업이다. 여기서 뭐가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두기봉 그룹과 유위강 그룹은 서로 무척 친하며 많은 걸 공유한다. 장르적인 것, 굉장히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면서 그 안에서 뭔가를 바꾸고 스스로 좋아하는 취향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여기서 크리에이티브의 힘이 나오며 그것이 업계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유위강 그룹이 만든 <무간도> 시리즈를 장르적 관점에서 보면 연속성과 단절성이 동시에 읽힌다. 연속성은 두 인물간의 대결구도라는 점이다. 장철, 오우삼, 두기봉, 유위강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공통된 특징이다. 탈피 요인은 액션 장르에 속하지만 오우삼이 액션에 방점을 찍었다면 유위강은 액션을 무시했을 만큼 드라마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