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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4)

씨네21 추천도서 - <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지음 창비 펴냄 영화 <해피엔드>에서 코우와 유타는 길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재일한국인인 코우만이 체류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힌다. 근미래가 배경인 영화지만 이와 유사한 사건은 한국에서도 시시각각 발생하는 중이다. 몽골인 부모님과 어릴 때 한국으로 이주한 고등학생 민호는 친구들 싸움에 휘말리고, 경찰은 민호만 연행한다. 친구들이 “얘는 잘못 없다”고 증언했음에도 경찰은 민호가 미등록 신분이라서 내보낼 수 없다며 출입국 당국에 인계하고, 민호는 수갑이 채워진 채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를 거쳐 구금 시설인 화성외국인보호소로 보내진다. 한국에서만 살아 몽골어도 서툰 민호는 강제 퇴거를 명령받고 몽골로 쫓겨난다. 부모와 함께 이주한 아동은 부모의 한국 체류 자격이 상실되면 미등록 이주 아동으로 분류되어 기본권도 보호받기 어렵다. 이처럼 우리가 믿는 ‘법’의 울타리에는 무수한 인권의 빈틈이 존재한다. 민호는 미성년 아동으로서 보호자에게 보호받을 권리를 박탈당했고 가족과 강제 분리조치되었다. 연고도 없이 몽골로 쫓겨난 민호 사건 역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변론을 맡았다. <그래도 되는 차별은 없다: 인권 최전선의 변론>은 공익변호사단체 ‘공감’이 수행한 사건들 가운데 한국 사회의 차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담당 변호사들이 법정에서의 과정을 조밀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주 난민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보호소 독방에서 새우 꺾기 고문을 당한 무라드,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피해자, 건강상의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었음에도 취업을 강요받고 사망한 피해자, 성소수자 난민의 인정 소송, 동성 동반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소송 등. 인간의 기본 권리조차 싸워 얻어내야만 했던 이들과 함께한 변호사의 기록은 한국 사회의 가장 아픈 물음이다. “설마 그래도 여긴 한국인데, 이렇게까지 야만적으로?” 변호사 스스로도 자문했다는 사건 과정을 읽으면 부끄러우면서도 암담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민호의 담임 선생님이, 피해자가, 그의 가족과 이웃이 포기하지 않고 끝내 혐오와 편견, 차별에 맞서 싸운 낱낱의 기록은 우리가 쉽게 세상을 비관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을, 인권의 최전선을 지켜야겠단 다짐을 하게 한다. 여성, 난민, 아동, 이주민, 노숙인, 성소수자, 장애인, 임시직 노동자… 누구도 차별해도 괜찮은 존재는 없기에. 오늘도 나와 다른 타인의 삶에 대해 공감하고 상상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제도의 빈곳을 찾아 소수자들의 자리를 기입하고자 분투합니다. 단 한명이라도 제도 밖의 예외적 존재로 남겨두는 것은 결코 정의(正義)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52쪽

[특집]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지브리화되었나

지난 3월 말,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이 자신의 SNS에 챗GPT-4로 생성한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 사진, 일명 ‘지브리 프사(프로필 사진)’를 올리자 전세계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 올리는 이색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챗GPT 사용자도 5억명에서 2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특히 한국에선 미국 다음으로 사용자가 늘면서 이 유행을 주도했다. 그렇다면 때아닌 이 지브리 밈은 우리나라에서 왜 그토록 관심과 인기를 끌었을까? 그 원인을 생각하다가 문득 1990년대 어느 해 겨울, 홍대 거리의 한 카페 앞에 서 있던 토토로 모양의 눈사람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살짝 해볼까 한다. 아침잠을 설치게 한 특선 만화 지브리 밈과 관련해 머릿속을 정신없이 뒤지다 보니, 어느새 기억 저편의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마땅한 놀이가 없던 시대, 텔레비전에서 매주 나오는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에게 큰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다. 당시 애니메이션은 ‘TV 만화’로 불리며 일본산 작품이 방송국마다 경쟁하듯 전파를 탔다. 특히 방학이나 공휴일 아침 시간대에 ‘특선 만화’라는 타이틀로 미국이나 일본의 극장용 작품을 자주 방영했는데, 눈곱 낀 눈을 비비면서 비몽사몽 본 기억이 난다. 지금은 세계의 거장이 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20대에 참여한 도에이 초창기 작품들도 이때 처음 보았다. 그중 1975년에 방영된 <장화 신은 고양이>가 뇌리에 짙게 남아 있다. 무서운 마왕에게 쫓겨 높은 탑 꼭대기에 올라 제발 해가 뜨기를 빌며 부둥켜안은 소년과 공주…. 자신도 모르게 두손을 꼭 잡고 흑백 브라운관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추억, 나만 갖고 있지는 않을 듯싶다. 웃픈 사실은 이 작품들이 일제가 아닌 미제로 둔갑해 소개됐다는 점이다. 미국에 수출된 일본산 필름을 미국산인 것처럼 수입했기 때문.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며 일본 문화를 개방하지 않았던 시절, 방송심의규정을 통과하기 위해 쓴 깜찍한 속임수였다. 그래서 누가 그렸는지, 어떤 회사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미야자키와 처음 만났다. 이후 그가 메인으로 참여한 명작 동화 소재의 <플란다스의 개>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차례로 방영되면서 비로소 지브리 스타일이라는 것을 접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자면, 지브리 스타일은 미야자키 고유의 것이 아니다. 1958년의 <몽견동자> 와 <백사전> 때부터 제작사 도에이 동화에 하나의 전통처럼 내려온 화풍에다 미야자키의 만화적인 몇몇 특징이 더해져 탄생했다. 이는 지금도 후배 애니메이터들에 의해 미세하게 진화하고 있다. 열혈 소년과 감성 소녀, 안방극장을 찢었다! 코난 세대 구별법을 아는가? 코난을 아느냐고 할 때 <미래소년 코난> 을 말하면 구세대, <명탐정 코난>을 말하면 신세대라는 철 지난 우스갯소리다. 이처럼 <미래소년 코난>은 1980년대 우리 어린이 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지브리 스타일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기발한 액션과 세기말 메시지로 TV 시청률도 고공행진이었는데, 방송국에 재방영을 요청하는 어린 시청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는 뒷얘기도 있다. ‘푸른 바다 저 멀리’로 시작하는 주제가는 가을 운동회 때 응원가로 목이 터져라 불렀고, 반마다 포비(코난의 단짝)라는 별명을 가진 학생이 한둘은 꼭 있을 만큼 몰입감도 상당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한국 최초의 지브리 밈이 아니었을까 싶다. <미래소년 코난>이 남자아이들의 로망이었다면, 1985년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은 여자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이화여고 신지식 선생이 국내에 처음 번역한 캐나다의 성장소설이 지브리 스타일로 TV 화면에 나오자 사춘기 여학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앤을 담당한 성우 정경애의 목소리는 캐릭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높은 인기에 한몫했다. 그녀의 호소력 있는 감성 보이스는 일본의 오리지널 성우보다 찰떡궁합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우리 문단엔 소설가 백영옥처럼 당시 <빨강머리 앤>을 보며 작가가 된 사람이 꽤 있다. 엄마와 딸이 함께 시청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의미가 크다. 201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 한자리를 차지한 ‘앤 컬처’도 이 애니메이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미녀와 야수> 하면 디즈니 작품을 떠올리듯 이제 <빨강머리 앤> 하면 어김없이 이 지브리 스타일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애니 덕후의 소장 1티어 1980년대 후반, 비디오의 대중화로 지브리 스타일은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리고 서울 명동의 회현 지하상가는 애니메이션 덕후들이 전국에서 시도 때도 없이 모여드는 본산이 되었다. 그곳을 통해 이전까지 애니메이션 잡지나 무크 등 해설과 스틸컷으로만 봐왔던 귀한 작품들을 비디오테이프로 소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가게가 용산이나 잠실에도 있었지만 명동처럼 많지 않았다). 당연히 이들 모두 불법복제였다. 해상도 420이라는, 당시로선 높은 해상도를 자랑하는 레이저디스크로 암암리에 카피한 해적판…! 하지만 일본 문화 개방이 안된 상황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싶은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오팔전자, 현대전자, 형음악실 등 애니메이션을 좀 봤다는 사람치고 이들 가게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가장 인기 있던 품목은 <이웃집 토토로>나 <천공의 성 라퓨타> 등 지브리 작품이었다. 구입을 예약한 사람이 너무 많아 일주일 이상 기다리는 것도 예사였다. 무엇보다 이 비디오테이프들이 전국 대학가를 돌면서 지브리를 테마로 한 소규모 애니메이션 영화제와 PC통신 동호회가 주도하는 감상회가 열렸다. 한편 일부 덕후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영화 개봉일에 맞춰 직접 일본에 가서 <붉은 돼지>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을 직관했다. 이른바 ‘원정 관람’이었다. <모노노케 히메>가 발표된 1997년은 그 기묘한 현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그래서 대체 지브리가 뭔데 비싼 해외여행 비용을 써가며 보느냐는 말도 무성했다. 유난을 떤다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지브리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동경의 싹을 틔웠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수가 훗날 대중문화 각 분야로 진출해 눈에 띄는 활약을 보였다. 서두에 언급한 홍대의 카페에 서 있던 토토로 눈사람도 아마 그런 꿈을 가진 학생이 만들지 않았을까? 지금은 꼰대가 됐을지 모를 X세대의 자유로운 일상의 한편에 어느새 이렇게 지브리가 들어와 있었다. 젊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1998년 일본대중문화개방 이후 지브리는 우리 일상에 더 깊고 더 넓게 자리 잡았다. 물론 지브리 판권 전쟁이 치열하게 치러진 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필두로 국내에 정식 개봉된 지브리 명작들은 성적이 그리 썩 좋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힘든 시기를 지나 2002년 개봉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덕후의 벽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큰 호응을 얻으며, 관객 200만명이라는 디즈니급 흥행을 거두었다. 2004년 겨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300만명을 흥행 몰이해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대세임을 입이런 사실을 직접 들었다. 이같은 현상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는증했다. 이후 <고양이의 보은> <게드 전기: 어스시의 전설> <벼랑 위의 포뇨> 등 신작이 속속 개봉하면서 지브리는 어느 영화 제작사보다 우리와 가까워졌다. 이런 흥행력과 친근감은 당연히 관련 굿즈의 판매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가방에는 토토로 액세서리가 달리고, 책상에는 하울의 피규어가 놓였다. 과거 지브리 캐릭터에 고개를 갸웃하던 사람은 줄고, 굿즈를 모으는 사람은 늘어 두터운 팬층을 이루었다. 이에 지브리 굿즈 숍은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지브리 음악으로 잘 알려진 히사이시 조는 <시네마 천국> 등의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음악가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테마곡 는 지금도 여전히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 곡 신청이 이어지고, 클래식 음악 콘서트에선 단골 연주곡으로 눈길을 끈다. 지브리 작품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즐거움마저 주고 있다. TV, 라디오, 신문, 잡지 등에 미야자키의 세계관이나 지브리의 성공담을 다룬 프로그램이나 기사의 노출도도 급상승했다. 2000년대, 트렌드 측정 기준이 된 포털사이트 검색에도 지브리와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단어는 매년 5위 안에 들었다. 젊은이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브리 스타일로 불리는 미야자키의 화풍은 불법의 시대 이후 합법의 시대에 우리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이 모두가 현재진행형이다. 토토로는 옥자를 낳고 2017년 프랑스의 칸영화제에서 <옥자>의 감독 봉준호는 “어릴 때부터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랐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 중에 자연과 생명에 대한 작품을 만들면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을 듯하다”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옥자>는 <이웃집 토토로> 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토토로의 배 위에서 곤히 잠든 메이를 연상시키는 해외 포스터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이전 <설국열차>는 사회 계급의 갈등이라는 미야자키의 전형적인 레퍼토리를 답습했고, 최신작 <미키 17>에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왕충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크리퍼라는 벌레형 우주 생명체도 선보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에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창작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었다. 과거 다른 영화에도 비슷한 예는 여럿 있다. 2005년 극장가 흥행 1위였던 <웰컴 투 동막골>은 마치 <미래소년 코난>의 무대 하이하버를 실사로 옮긴 듯하다. 어릴 적 <미래소년 코난>에 열광했던 경험과 그 메시지를 말하던 박광현 감독의 인터뷰로 미야자키의 영향력을 십분 느낄 수 있다. 또 같은 해 발표된 <청연>은 원래 <붉은 돼지>를 롤모델로 삼은 본격 항공영화였다. 지브리의 열렬한 팬이던 해당 기획자에게 이런 사실을 직접 들었다. 이같은 현상은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는 다. 유행에 민감한 대중음악도 마찬가지다. 이승환의 노래 <꽃>의 뮤직비디오에선 <천공의 성 라퓨타>의 SF 세계관을 느낄 수 있고, 그룹 코나의 <마녀! 여행을 떠나다>와 장나라의 <키키>를 들으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 <궁>의 주제가 를 제이와 듀엣으로 부른 남자 가수는 ‘하울’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이외에도 만화, 애니메이션, 소설, 드라마, 상업디자인 등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생각지 못한 다양한 분야에까지 지브리가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그야말로 ‘지브리 사조(思潮)’라고 불릴 만하다. 올봄, 세계인의 SNS을 뜨겁게 달군 챗GPT의 지브리 밈은 이 거대한 흐름의 한 지류에 불과하다. 순수하고 아련한 세계를 여는 열쇠 미야자키가 일으킨 지브리 사조는 오래전부터 전세계인의 창작 영역에 소소하게, 혹은 막대하게 영향을 끼쳐왔다. 2021년 블록버스터의 본고장인 할리우드에 아카데미영화박물관이 세워졌을 때 첫 전시회로 미야자키의 창작 세계를 다뤘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상업영화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나라보다 강한 미국에서, 게다가 자신들의 영화 역사를 드러내는 대규모 시설에서 개관 기념 전시의 테마를 미야자키 하야오로 정했다는 사실은 이미 그의 영향력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이 대단한 인지도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1963년 <멍멍 주신구라>에 동화 참여를 시작으로 2023년 마지막 장편으로 발표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까지, 미야자키는 백발의 야윈 모습이 가엾을 정도로 꼬박 60년을 제작 현장에서 쉼 없이 달려왔다. 필름영화, 흑백TV, 컬러TV, 2D 디지털영화, 3D CG영화의 시대를 거치며 상업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꾸준히 주목받은 세계 영상 역사상 유일무이한 행보다. 미야자키는 모든 세대를 관통한다.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TV나 영화를 보기 시작해 사춘기를 거쳐 청년이 되고 중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창작 세계와 함께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또 지브리 작품의 영상과 그림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AI 시대에 지브리 스타일이 유행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그저 그 시점이 언제일지가 문제였을 뿐…. 순수하고 아련하다는 말은 지브리 스타일을 가장 잘 대변한다. 부드러운 선과 따뜻한 색감은 그 느낌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미야자키 작품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AI로 만든 지브리 프사는 우리가 지브리의 순수하고 아련한 세계로 들어가 빡빡한 현실을 잠시 잊고 쉴 수 있는 비밀의 열쇠였는지도 모른다.

[리뷰] 몽환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사랑의 실험, <퀴어>

1950년대 멕시코시티, 작가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술과 마약에 중독된 채 방탕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리는 곁을 지켜줄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그의 호의는 종종 불쾌한 추파로 오해되거나 자신을 겨냥한 조롱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 외로움으로 방황하던 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유진(드루 스타키)을 발견한다. 아름다운 유진에게 마음을 빼앗긴 리와 달리 유진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유진에게 “일주일에 두번 정도만 다정하게 대해달라”며 리는 어떻게든 유진과 마주할 시간을 가지려 한다.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로 유진에 대한 리의 갈망은 더욱 강해졌지만 유진은 여전히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어느 날, 리는 상대와 텔레파시로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약초 야헤에 관해 듣는다. 어떻게 해서든 유진의 마음을 얻고 싶었던 리는 야헤가 있다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정글로 유진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진의 숨겨진 진심을 확인하고자 한다.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에 이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다시 한번 사랑의 열망에 빠진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챌린저스>를 촬영할 무렵부터 각본가 저스틴 커리츠케스와 <퀴어>에 관해 논의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차기작에서도 그와 합을 맞췄다. 소설가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의 자전적 소설이 바탕이 됐으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20대 때부터 해당 소설을 영화화하길 바라왔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현실적이지 않은 몽환적인 색감의 멕시코시티”를 원해 <퀴어>는 로마의 치네치타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레스토랑과 거리를 오가며 리와 유진은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원작 소설의 기본적인 설정과 뼈대는 유지하면서도 리와 유진이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순간을 농밀한 몸짓을 더한 마술적 시간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적이다. 해당 시퀀스만큼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도전적인 연출 중 하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와 유진은 교집합이 거의 없는 대조적인 위치에 서 있다. 청년과 중년이라는 시점 차이가 종종 강조되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반면 무언의 초조함을 느끼는 리와 달리 유진은 시종 느긋하다. 리처럼 부유하진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정착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덕이다. 이러한 대비에는 자신이 퀴어임을 인정한 자와 부정하는 자 사이의 갈등 또한 주요하게 작용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배우들의 변화다. 영화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헬레이저>, 드라마 <아우터뱅크스> 등에 출연한 드루 스타키는 유진 역으로 전작에서 발견하지 못한 매력을 선보인다. 대니얼 크레이그는 사랑의 열병에 시달리는 리로 분해 극의 화자로서 리의 예민한 내면을 전한다. 오랫동안 제임스 본드의 영역 안에 머물렀던 그의 또 다른 일면이 낯설고 반갑다. <퀴어>는 제8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으며 이 영화로 대니얼 크레이그는 제96회 전미비평가협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8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드라마 부문, 제30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제31회 미국배우조합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호명됐다. close-up 리와 유진이 처음 만난 순간, 난데없이 닭싸움이 펼쳐진 멕시코시티 거리의 혼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리는 오직 유진에게만 시선을 고정한다. 슬로모션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유진을 바라보는 리의 표정은 사랑에 빠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대변한다. check this movie <본즈 앤 올>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2022 정체성 혼란을 겪는 상대를 거울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고, 함께 일탈성 여행을 떠나는 리와 유진의 모습은 일면 <본즈 앤 올>의 리(티모테 샬라메)와 설리(마크 라일런스)를 떠올리게 한다. 긴밀히 결속된 리와 설리 같은 관계를 <퀴어>의 리 또한 갈망했겠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리뷰] 인생에 불순물이 좀 섞여줘야 면역력도 커지는 법이지, <후레루.>

햇볕이 직선으로 내리쬐는 작은 시골 마을. 함구증 증세를 보이는 초등학생 오노다 아키는 다른 친구들과 쉬이 섞이지 못한다. 어느 날 같은 반 소부에 료, 이노하라 유타와 장난스레 뒤섞이다가 고슴도치 같기도, 강아지 같기도 한 후레루를 마주한다. 후레루는 예부터 섬마을에 전해내려온 전설의 동물. 후레루만 있으면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전할 수 있다. 텔레파시의 힘은 실로 놀랍다. 세 친구는 허물없이 빠르게 가까워졌고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의 단층이 탄탄해졌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각기 다른 관심사와 취향이 생겨도 세 친구는 여전히 하나다. 그리고 이제 스무살. 섬마을을 떠나 도쿄에 상경한 이들은 기울어져가는 주택을 개조하여 함께 살아간다. 월셋집은 대도시를 부유하는 젊은이를 불안하게 하지만 내가 너고 네가 나 같은 단짝들은 동고동락하며 안정적으로 정착한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귀여운 후레루. 신비로운 의사소통 능력을 지닌 영물에게 세 친구는 삼시 세끼 맛있고 영양가 높은 사료를 먹이면서 애정으로 보살핀다. 이제 세 소년의 현실은 모두 다른 방향을 향한다. 아키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전히 말하기 어려운 순간을 맞닥뜨리고, 료는 부동산 회사의 신입사원이다. 유타는 의상디자이너를 꿈꾸며 유명 패션스쿨을 다니지만 아무도 모르는 열등감을 지니고 있다. 여느 날처럼 각자의 박자대로 일상이 흘러가던 어느 밤, 세 친구는 소매치기 당한 두 여성을 도와주다가 새 인연을 맺는다. 과거 유타와 같은 패션스쿨을 수료한 야사카와 나나,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모두 당차게 쏟아내는 카모자와 주리. 그중 나나가 스토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두 여자가 안전하게 집을 구할 때까지 한집에서 같이 살기로 결정한다. 손만 닿으면 모든 생각을 편리하게 나누는 <후레루.>는 차라리 혼자가 될지언정 남들과 불편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현대인의 피로함에 온화한 상상력을 날카롭게 찌른다. 이들은 언어 없이도 계속해서 느슨한 소통을 이어간다. 하지만 이 오랜 믿음에도 균열이 생겨난다. 한집에 사는 남녀 5인은 자꾸만 어긋나는 연애 감정으로 분노와 질투, 말싸움과 눈치 보기 등 복잡한 감정에 뒤덮인다. 그리고 마침내 후레루의 진실을 목도한다. 후레루를 통한 텔레파시에서는 마찰을 일으킬 불평불만이 자체적으로 제거된다는 것이다. 료의 말마따나 악플이 알아서 삭제 처리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부터 세 친구의 우정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해온 친구들이라 생각했는데. 불평을 일절 하지 않는 선한 사람들이라 믿어왔는데. 부정적인 생각이 후레루에 의해 차단된 것이라면 그동안 그들이 쌓아온 건 진짜 우정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워진 세 친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후레루.>는 상황적 모순에 의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하면서 소통과 대화의 진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다만 세 친구를 성장시키기 위한 구태의연한 이성애적 위기나 여성 캐릭터 나나와 주리에 대한 편협한 묘사, 스토킹 위협을 두고 피해자를 탓하는 대사 등이 튀어나온 나무뿌리처럼 자꾸만 발을 건다. close-up 생각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세 친구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하늘을 나는 것이다. 솜사탕 구름에 통통 튕기면서. 섬마을에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던 소년들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check this movie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감독 나가이 다쓰유키, 2013 나가이 다쓰유키 감독, 다나카 마사요시 캐릭터 디자이너, 오카다 마리 각본가 3인이 한몸이 되어 작업한 첫 번째 영화. 이외에도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가 있으며 가장 최근작이 바로 <후레루.>다. 전작을 통해 삼총사의 세계관을 지도처럼 따라가기 충분하다.

[비평] 환상은 이토록, 홍수정 평론가의 <퀴어>

“자꾸 나랑 자려고 하잖아. 하여간 이래서 퀴어들이 싫어. 그냥 친구로 만나는 게 불가능하다니까.” 영화의 초반, 리(대니얼 크레이그)와 함께 놀던 남자는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뒷담화를 한다. 폭력적인 말을 뒤로한 채 리는 걷는다(이때 스산하던 사운드가 너바나의 로 이어지는 순간의 쾌감이 상당하다). 중절모를 눌러쓴 채 흰색 슈트를 입고 휘적휘적 거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유령 같다. 이 걸음의 끝, 그는 유진(드루 스타키)과 마주친다. 첫 만남. 영혼처럼 흐릿하던 리는 그 순간 생생한 인간으로 돌아와 숨을 몰아쉬고 눈을 번뜩인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기. 그것은 ‘퀴어’라는 멸칭에 눌려 주변부를 떠돌던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강렬한 사랑과 마주하며 인생의 중심부로 복귀할 때 튀어 오르는 스파크다. 그런데 여기서 첫 만남의 짜릿함만큼이나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건 이 순간에 드러나는 두 가지 대비되는 영역. 바로 ‘환상’과 ‘현실’이다. 거리를 유령처럼 떠돌던 리(환상)는 생동감 넘치는 인간으로 돌아온다 (현실). 거칠게 말하자면, <퀴어>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리를 따라가는 영화다. 그의 걸음을 쫓을 때 우리는 <퀴어>, 그리고 루카 구아다니노가 진정 닿고자 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환상과 현실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퀴어>를 읽고, 이어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반복되는 어떤 결말을 통해 <퀴어>의 마지막을 다시 들여다볼 것이다. 현실과 환각 사이에서 일상에서 리는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그런 그가 일순간 변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리가 ‘퀴어’를 향한 세상의 벽을 마주하는 때다. 친구 기드리(제이슨 슈워츠먼)는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에서) “너무 퀴어”하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리는 몸이 굳는다. TV의 치지직대는 소음(리의 머릿속을 표현하는 듯하다)을 배경으로 그는 점점 흐릿해지고 투명해진다. 위에서 처음 설명한 장면에서도 리는 퀴어에 관한 혐오를 받고 나서 유령처럼 배회한다. 퀴어를 세상 밖으로 배격하며 내쫓는 말들. 그 말을 피해 리는 흐릿하고도 환상적인 세계에 들어선다. 이런 연출은 리의 사랑이 장벽에 부딪힐 때도 등장한다. 유진과 데이트할 때, 리의 흐릿한 손이 그의 얼굴을 만진다. 이 손은 리의 육체가 아니다. 유진을 쓰다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리의 마음이 이중 노출로 연출된 것이다. 리가 감춘 마음은 일상 위에 포개어진 옅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드러난다. 그가 퀴어로서의 정체성을 문득 자각할 때, 그러나 현실 안에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을 때, 영화는 환상 같은 이미지로 그것을 이루어낸다. 남미의 환상문학처럼 일순간 현실을 틈입하는 환상은 리의 서글픈 도피처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 퀴어의 정체성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마법이다. 몸은 현실에 있지만 정신은 환상을 향한 상태. 이것이 퀴어로서 고백하는 “몸과 정신이 분리된” 상태일 것이다. 한편 리와 달리 유진은 현실에 발 딛고 사는 인물이다. 그의 직업은 팩트를 다루는 기자다. 또한 그는 공적인 장소에서 여자 친구와 있는 등 헤테로섹슈얼의 규범이 지배하는 1950년대 미국 사회에서 남성에게 기대되는 성역할을 잘해낸다. 반대로 리는 마약중독자다. 이는 자꾸만 현실 저 너머로 도피하고픈 리의 열망이 파괴적인 지경에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이런 맥락에서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유진이 처음 리와 함께하며 퀴어 정체성을 표출한 순간, 그는 술에 취해 있다. 유진이 토할 정도로 취한 이후에야 그들의 첫 입맞춤은 이뤄진다. 유진에게 리와 함께하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 환각으로 들어가는 일이며, 일종의 배설(구토)과도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리에게 이것은 기다려왔던 순간이다. 환상 안에서만 그를 쓰다듬던 리의 손은 이 순간 스크린 위에서 육감적으로 체화된다. 리의 사랑은 유진의 환각 안에서 성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 뒤에 곧바로 리는 ‘야헤’를 찾는다. 그것이 환각을 주입하는 동시에, (텔레파시를 통해)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전달해줄 것이라 믿으며. 하지만 우연히 만난 남자는 야헤가 새로운 문이 아니라 ‘거울’에 불과하다고 경고한다. 거울은 ‘가상의 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안에 보이는 것은 현실의 우리일 뿐이다. 이것은 환상을 찾는 리의 시도가 결국 현실로의 귀환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야헤를 접하고 환각 안에서 서로를 탐닉하지만, 유진은 더 나아가길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 찾은 물질은 그 사랑을 끝내고야 만다. 그의 마지막(장면)에 대하여 이제 <퀴어>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말할 차례다. 리는 아마도 꿈을 꾸는 것 같다. 꿈 안에서 그는 조그만 창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본다. 리가 들어선 방에는 자기 꼬리를 문 뱀이 있다. 리는 자기 꿈에서, 자신을 보고, 뱀은 꼬리를 문다. 몇겹에 거쳐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는 이런 구조는 지독할 정도로 내면에 꼭꼭 갇힌 채 돌고 도는 운동을 연상하게 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이런 운동은 처음이 아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의 비밀스러운 연인은 상대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못한 채, 자기 이름을 속삭일 뿐이다. 여기에는 서글픈 회귀 운동이 있다. <본즈 앤 올>(2022)의 마지막은 희귀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연인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다룬다. 그토록 찾았던 연인은 함께하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수렴하고 만다. 루카 구아다니노 작품에서 사랑은 자주 밖을 향해 뻗어가지 못하고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내면에서 팽이처럼 돌고 돈다. <퀴어>는 이러한 운동이 한 인간의 내면을 파괴하는 사례이며, 이것이 루카 구아다니노가 생각하는 퀴어에게 강요된 사랑의 형태다. 리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방에서 빠져나온다.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 화풍을 연상하게 하는 배경에서 리는 노쇠한 탓인지, 유진에 대한 금단증상 때문인지 몸을 떨다 마지막을 맞는다. 그가 그토록 추구하던 ‘환상’은 결국 리의 요람이 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운동은 모두 아픈 현실을 피하기 위하여 이뤄진다. 그 목적지가 환상이든, 자기 내면이든, 일종의 도피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낯선 듯하나 실은 익숙한 이야기다. 밖에 꺼내놓지 못하고 안에 가둬두어 숙성 혹은 부패하고야 마는 그 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보통 이것은 지나가는 바람이지만, 이 안에서 일평생 살아가는 남자가 <퀴어>에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의 마지막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비평] 실패의 서사, 소멸의 이미지, 조현나 기자의 <퀴어>

“너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 말없이. 널 만지고 싶어.” 유진(드루 스타키)에게 첫눈에 반한 리(대니얼 크레이그)는 꾸준히 구애한다. 특히 그와 접촉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고 곁을 배회한다. 후반부에서 리는 바라던 대로 유진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전까지 반복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투명하게 현신한 리가 곁에 앉은 유진에게 계속해서 손을 뻗는 모습이다. 리의 상상에 기반해 구현됐을 가상의 신체는 그렇게라도 상대와 접촉하고 싶은 리의 욕망이 직접적으로 반영된 것일 테다. 투명한 신체가 리의 욕망을 대변한다는 전제는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갑작스레 전복된다. 텔레파시를 가능케 하는 ‘야헤’를 마시고 교감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돌연 리의 눈앞에 있던 유진의 몸이 투명해지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 뒤로 현실은 물론 리의 상상 속에서마저도 유진은 자취를 감춘다. 정사를 넘어선 ‘말없는 대화’가 마침내 가능해졌을 때 리가 그토록 갈구해온 유진의 육체, 유진이란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질문해볼 수 있겠다. <퀴어>가 묘사하는 신체의 소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는 왜 자신의 바람을 투영할 때조차 본인을 지우고 종국엔 사랑하는 유진까지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욕망을 인간의 오감을 통해 드러내길 즐기는 창작자다. 대상이 금기시된 존재일 경우 욕망과 신체적 반응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진다. <아이 엠 러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 등을 거쳐 <퀴어>에 이르러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탐하는 자와 대상간의 신체접촉을 더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만큼 신체의 부재를 더 자주 드러낸다. 끊임없이 장소를 바꿔가며 현실에 상상을 대입하는 리의 실험을 통해서 말이다. 취할 수 없기에 갈구하는 사랑의 대상 “너 퀴어 아니지?” 술집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 리가 묻는다. “쟤 퀴어일까?” 첫눈에 반한 유진을 바라보며 리가 넌지시 동료에게 말한다. 1950년대, 동성애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 질문은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되풀이된다. 성적 지향에 관해 리와 유진은 상반된 입장을 취한다. 표면적으로 리는 퀴어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오픈리 퀴어라고 해서 스스로를 오롯이 받아들인 건 아니다. 본인이 동성애자인 건 “저주”이며 “섹스 괴물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게 낫겠다”고 여겼던 과거를 리는 유진에게 자조하듯 고백한다. 비슷한 상황이 그의 꿈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이 숱하게 건넸던 ‘당신은 퀴어인가’라는 질문이 되돌아왔을 때 리는 부정한다. 그리고 답한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야.” 그 뒤로도 리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자주 거론하면서 동성에 대한 이끌림을 전부 육체의 욕구로 치환하고 그것을 본인과 유리시킨다. 자기혐오가 옅게 깔려 있을지언정 이러한 리의 입장에선 몸을 통해 다른 퀴어와 교감하는 것이 가장 명확한 소통 방식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한편 유진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태여 밝히지 않는다. 리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거리를 두며 그를 외면하려 한다. 그 거리감이 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내내 모호한 입장을 취하던 유진이 처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고백한 건 영화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다. 야헤를 마신 그는 “저 퀴어 아니에요. 정신과 육체가 분리된 거죠”라고 말하고, 그렇게 리의 환각 속에서 두 사람은 점점 사라져간다. 이를 토대로 보면 유진과 리가 정신과 육체의 분열이라는 이원적 구조를 받아들인다는 점은 같지만,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관해선 확연히 갈린다. 육신을 통해 동류를 감지하고 접촉하길 바라는 리와 달리 유진은 자신이 퀴어임을 자각게 하는 신체 교감이 반복될수록 도망치고 싶어 한다. 육체가 정체성을 드러낼 유일한 언어라 여기며 이를 기반으로 사랑을 표현하려는 자와 끝내 그 언어 자체를 외면해버리는 자. 둘 사이엔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존재한다. <퀴어> 의 “인물들이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타임>)에 관해 다루고 싶었다던 루카 구아다니노의 의도는 이러한 두 인물의 간극으로 구현됐다. <퀴어>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전술했던 신체의 소멸, 그리고 방황을 동반한 자기 탐구다. 특히 후자의 경우 루카 구아다니노가 다뤄온 인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지점이다. 사랑을 경유해 자기해방을 이룬 <아이 엠 러브>의 엠마(틸다 스윈턴)와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표류하던 <위 아 후 위 아>의 프레이저(잭 딜런 그레이저)와 케이틀린(조던 크리스틴 사먼), 첫사랑의 열병으로 정체성을 깨달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엘리오(티모테 샬라메), 식인이란 본성을 쉽게 시인하지 못하던 <본즈 앤 올>의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테 샬라메). 이중 <퀴어>와의 연결고리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이다. <퀴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은 각자의 방식으로 분리와 분열의 구조를 체화한다. 엘리오의 첫사랑이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 건 오래전 떠난 올리버(아미 해머)가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이며, 서로가 유일한 안식처였던 매런과 리의 동행은 사건 은폐를 위해 매런이 죽은 리의 육신을 섭취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들에게 사랑은 퀴어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성립될 수 없거나 반대로 기피하고 싶던 카니발리즘의 본성을 가장 극한의 방식으로 체화하게 만드는 대상이다. 비약하면 이들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이유로 욕망하는 대상을 끝내 곁에 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퀴어>에서 그려지는 리의 사랑 또한 필연적으로 실패에 다다른다. 이를 은유하는 시퀀스가 있다. 리와 유진이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할 때 표면적으로 둘의 시선은 나란히 스크린을 향하지만 여느 때와 같이 리는 유진에게 손을 뻗는 상상을 한다. 그런 둘을 지켜보던 카메라는 이들을 지나쳐 맞은편의 스크린으로 향한다. 스크린에선 장 콕토 감독의 <오르페>(1950) 중 오르페(장 마레)가 사망한 아내를 되찾기 위해 거울을 통과해 죽음의 세계로 향하는 장면이 상영되고 있다. 오르페우스 신화를 살짝 비튼 이 영화에서 오르페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여왕에게 반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산 자에게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다. 죽음의 여왕의 신하가 거울 앞에 선 오르페에게 말한다. “거울은 거울일 뿐이고 그 안에는 불행한 남자가 있어요”라고. 아직 죽음의 세계에 발도 들이지 않은 오르페를 두고 그는 왜 불행한 남자라고 칭했을까. 죽음을 갈구하는 이승의 존재에게 일찍이 이별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스크린에서 극장으로 시야를 넓혀보자. 불행한 남자로 칭해짐에도 결국 거울 안으로, 죽음의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오르페와 거울처럼 마주 선 이는 누구인가. 제 것이 아닌 이에게 무력화된 신체로나마 닿아보려는 리의 뒷모습이 더없이 처절하게 느껴진다. <퀴어>에서 육체의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 전시한 장면은 야헤를 마신 리가 유진과 춤을 추는 순간일 것이다. 둘은 서로 동화되다 못해 피부를 투과해 합치된다. 엠비언스 사운드까지 제거된 이 시퀀스가 어쩌면 리가 바라던 말없는 대화가 궁극적으로 실현된 때인지 모른다. 하지만 클라이맥스처럼 전개된 이 신 이후의 상황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리와 교감을 나눈 유진은 앞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리를 외면하고 결국 도망친다. 정글 속으로 사라진 유진을 좇던 리가 잠시 뒤를 봤다 시선을 돌렸을 때 유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다. 곧이어 리는 빨려 올라가듯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그가 처음 유진을 만났던 장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다. 2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리는 여전히 그곳을 배회하면서 떠난 유진을 그리워한다. <퀴어>엔 나오지 않았으나 <오르페>에도 유사한 장면이 있다. 신화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세계에서 금기를 깨고 뒤를 돌아본 오르페는 곧바로 생의 세계로 복귀한다. 그럼에도 오르페는 여전히 죽음의 여왕을 떠올린다. 리와 오르페,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의 소멸과 부재는, 그로 인한 사랑의 실패는 도리어 상대를 끝없이 갈구하는 발단이 된다. 닿을 수 없어서 꾸는 꿈 리가 복귀한 멕시코시티에 관해 좀더 살펴보자. 멕시코시티에 오게 된 연유에 관해 리는 동성애에 관한 차별로부터 도망쳐왔다고 넌지시 운을 띄운다. 그러나 이 도피처에서도 리가 퀴어라는 이유로 편협한 시선을 던지기란 매한가지고 결국 리는 유진에게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둘의 관계에 본격적인 진척이 이루어진 건 이때부터다. 본거지 밖으로 유랑하고 그곳에서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는 이들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엠마는 밀라노를 떠나 산레모에서 안토니오(에도아르도 가브리엘리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프랑스의 휴가지에서다. 매런 역시 엄마를 찾아가던 중 리를 만났으며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둘은 주기적으로 외부로 떠돌거나 타지로 이동해야만 한다. 이중 드물게도 리는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자신이 등장한 장소로 회귀한 인물이다. 10대 때부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하길 원했다고 밝혔다. <데이즈드>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당시 자신이 쓴 <퀴어> 각색본의 첫 페이지에 ‘모든 것은 무대에서 촬영되어야 한다’고 적었고 이번 영화에서 그 계획을 실현했다. 리가 유진을 만난 멕시코시티는 실제 로케이션에 적을 둔 것이 아닌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구현된 세트다. 멕시코시티에서 유진의 흔적조차 부재함을 알고 나서야 리는 비로소 유진과 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음을, 가상의 신체를 구현해내더라도 유진과 닿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호텔로 돌아온 리는 꿈을 꾼다. 꿈에서 리는 거대한 건물 형태의 세트장을 구성한 뒤 전지적 시점으로 내부를 들여다본다. 그곳에서 자신이 유진에게 총을 겨누고 쓰러진 유진이 사라진 뒤, 결국 자신마저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본다. 가상의 무대 위에 펼쳐진 한편의 영화를 관람하 듯이. 정체성, 방황, 자기 탐구, 욕망, 사랑. 주요 키워드로 <퀴어>를 요약한다면 전작들과의 여집합이 쉽게 걸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이 요소들을 긴밀히 엮고 다시 분리시킨다. 유진과의 사랑은 리가 자기부정을 행할 때만이 성립 가능한 일이었고 이는 치정, 불륜과는 결을 달리하는 또 다른 금기다. 정신과 분열된 신체의 언어는 결국 사랑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신체의 언어로 기록된 한 기억이 리로 하여금 반복해 유진의 빈자리를 되새기게 한다. 정글로 여행을 떠났을 때 크게 앓은 리는 옆에 누운 유진에게 덜덜 떨며 다가가 발을 겹친다. 이 기억은 노년이 된 리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킨다. 마지막으로 가상의 신체를 불러와 그와 나눈 온기를 더듬는 방식으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미 충분히 해석된 감독일까. 연출자로서 오랫동안 품어온 작품인 만큼 <퀴어>는 그의 연출론을 새롭게 바라볼 여지를 남긴다. 실패의 서사와 소멸의 이미지로 가득한 <퀴어>는 그만큼 서글프고, 매혹적이다.

[인터뷰] 반듯한 얼굴로 극한을 향할 때, <84제곱미터> 배우 강하늘

금리는 치솟고 집값은 떨어져 고통받는 직장인 우성(강하늘). 빚 갚는 것만도 괴로운데 정체불명의 층간소음에 시달리자 신경쇠약까지 뒤따른다. 배우 강하늘은 무너져가는 인물의 위태로운 감정선을 사실적인 터치와 기이한 만화적 감수성을 오가는 연기로 구현해냈다. 의심 없이 요약하고 싶다. <84제곱미터>에서 강하늘의 연기는, 그 자체로 보는 재미가 있다고. 올해 영화 <야당> <스트리밍>, 드라마 <당신의 맛>,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3까지 상반기 내내 신작으로 연이어 인사했고 개봉예정 영화 <퍼스트 라이드>까지 앞두고 있는 상황. 부지런한 그에겐 요즘 ‘월간 강하늘’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84제곱미터>는 그 가운데 강하늘의 끓는점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숨 고르기의 미덕을 아는 이 배우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집을 가리킨다. “아무도 들이지 않고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잠깐이나마 온전히 집을 누리는 시간을 갖겠다. 오늘은 소파, 내일은 침대, 그다음날은 텔레비전 앞에서.” - 주인공을 미화하지 않는 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배우가 망가져줘야 하고 풍자적 성격이 강한 작품인데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본이 재미있으면 내가 어떤 역할이든 상관없다. 연기자의 역할은 자신이 재미있게 읽은 대본을 사람들한테 재미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성이 얼마나 망가지든 얼마나 예쁘게 나오든 전혀 상관없었다. - 동세대로서 이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안타까웠다. 내가 연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이었다고 해도 우성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코 돈 문제가 아니다. 나는 승부사도 아니고 독한 향상심도 부족하다. 말하자면 주어진 대로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우성을 보면서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짠한 마음도 들었는데, 매사 절박해서 어리석은 짓까지 마다 않는 이 청년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많은 관객들이 공감해줄 것도 같았다. - 한정된 실내극의 조건 속에서 고조되는 감정선을 단계적으로 표현하는 데 고심한 지점이 있다면. 기술적으로 접근했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매우 뚜렷한데 감정의 높낮이는 계속 선명하게 바뀌어야 했다. 기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오직 감정의 진실성에만 기대어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럴 때 나는 영화 속 우성을 바라볼 관객을 상정하고 그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연기한다. 결국 관객에게 ‘보여야’ 한다. 조금씩 극한으로 향해가는 우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언젠가 내가 경험했던 감정과 순간들, 그리고 평소 관찰한 것들을 활용했다. - 우성은 거실 맨바닥에 엎어져 자고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늘 구부정하게 앉아 있어 자세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내가 관객일 때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이 흘러 이야기의 세부는 잊더라도 인물의 형태만큼은 사진처럼 기억한다. 갑자기 <포레스트 검프>에서 검프가 벤치에 앉아 있는 특유의 자세가 떠오른다. 머릿속에 새우밖에 없는 버바와 바닥 청소를 하는 장면에서 두 사람이 취한 몸의 ‘태’ 같은 것도 좋아한다. 몸의 자세로 전달되는 감정과 기 억을 표현하고 싶다. - 같은 맥락에서 억울하게 경찰서에 잡혀간 우성이 그 와중에 코인 매도 타이밍을 잡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을 언급할 수 있겠다. 희비극 사이의 균형감각이 돋보였다. 감독님과 굉장히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고심했던 장면이다. 마냥 웃기면 안된다. 웃긴 장면이 아니다. 우성 입장에선 전 재산이 걸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절박하게 표현하면 관객들이 달아날 것 같더라. 가족이 죽기 직전이라든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한다든가 하는 비극과는 비교할 수 없지 않나. 인물이 혼자 웃거나 혼자 처절할 때 관객은 오히려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뒤로 빠지게 된다. - 외향은 어떻게 만들어갔나. 철저한 맨얼굴에 평소보다 체중도 불린 것처럼 보인다. 일체의 메이크업 없이 현장 가서 옷 갈아입고 바로 촬영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감독님은 예민함이 극도에 달한 우성의 모습을 위해 체중 감량을 원했다. 그런데 내가 체중이 불어나는 게 맞겠다고 고집했다. 컴퓨터 앞에서 컵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만 먹고 소위 ‘개판 5분 전’으로 사는 남자다. 그런데 깡마른 몸을 연출하면 영화적으로 스타일리시한 캐릭터처럼 보일 것 같더라. 과자 부스러기, 소주병, 족발 뼈다귀와 함께 뒹구는 남자다운 리얼리티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 <84제곱미터>는 그야말로 난장의 미장센을 보여준다. 우성과 달리 실제 강하늘은 청소에 능한 깔끔한 성향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맞다. 청소 이야기를 하니 추천할 아이템이 생각난다. 걸어다니기만 해도 먼지나 머리카락이 싹 모이는 청소용 슬리퍼다. 하루 종일 신고다니다가 자기 전에 슬리퍼 뒷면만 깔끔히 정리해주면 된다. 요새 그 낙으로 산다. 그렇다고 각 맞추고 배열이 중요한 타입은 아니다. 물리적 깨끗함보다는 화학적 깨끗함을 추구하는 쪽인 것 같다. - 10대 시절에 일찍이 부산에서 서울로 배우 생활을 위해 이주했다. 강하늘에게 보금자리가 갖는 의미는. 10대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완전 집돌이다. 내성적인 탓도 있겠다. MBTI 검사를 하면 극단적인 I가 나온다. 집에 있을 때만이 휴식이고 집에 있어야만 편안하다. 집은 나만의 동굴이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실제로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동굴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잠시 연락이 안될 거라는 전언이기도 하다. 크고 좋은 공간은 아니지만 내게는 이보다 더 안락할 수 없는 철저한 쉼터다. - 단시간에 응축된 에너지를 밖에서 발산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온 이후의 배우는 어떤 모습인가. 내가 일을 하는 가치관으로 볼 때 전제부터가 조금 다르다. 연기할 때 매 순간 완전한 메소드로 몰입해 나 자신을 다 소진할 정도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방식은 지양한다. 대본의 의도를 충실히 전하기 위한 표현법을 고민하는 편에 가깝다. - 처음부터 그랬나. 아니면 어느 시점에 정립한 직업인으로서의 태도일까. 연기를 처음 배울 땐 나의 모든 영혼과 감성, 감정, 정서를 다 쏟아넣어서 한마디 한마디를 해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필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내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행복하지가 않더라. 내 일을 내가 즐기면서, 동시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감을 갖고서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연기를 위대한 예술로 놓고 큰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스스로 너무 무거워진다. 하지만 이게 나의 ‘일’이 되면 재미를 누릴 수 있다. 기자님이 주간 마감하듯이 나도 이 일을 계속 잘하고 싶다.

[포커스] ‘그 장면’과 그 이후를 향하여,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2 프레스 컨퍼런스

지옥을 끝내는 대신 곁에 있는 한 사람을 살리기로 한 조엘(페드로 파스칼)의 선택으로 막을 내린 <더 라스트 오브 어스> 시즌1은 원작에 버금가는 울림을 주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4월13일, 후속 시즌이 공개됐다. 게임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를 원작 삼은 시즌 2는 파격적인 전개로 발매 당시 게이머들의 반발을 샀던 만큼 공개 전부터 시청자들의 우려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첫화 공개부터 전작보다 13% 증가한 시청자 수 530만명으로 우려를 해소했다. 뜨거운 감자였던 2화는 오히려 두터운 감정선과 스펙터클한 공성전 연출로 호평받 았다. 일각에서는 애비(케이틀린 디버)와 엘리 (벨라 램지)의 시점을 전환하며 교차했던 게임과 달리 엘리의 시점을 고수한 시즌2의 연출로 서사가 지나치게 늘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 결과 최종회 시청자 수는 370만명으로 전 시즌 대비 절반 수준에 그쳤다. 다만 전 시즌을 웃도는 3700만명의 에피소드당 평균 시청자 수는 향후 시즌 흥행에 낙관적인 요소다. 최종화 공개 이틀 전이었던 5월23일, 원작자 닐 드럭만과 총괄 쇼러너 크레이그 메이진이 참석한 프레스 콘퍼런스가 열렸다. 가장 먼저 언급된 건 시즌2의 핵심 장면이었다. 드럭만은 조엘과 엘리의 마지막 대화를 담은 6화 ‘현관 시퀀스’를 “두 사람의 마지막 기회이자 용서와 사랑의 여지를 남긴 장면”으로 꼽았고, 메이진은 “가장 스크린으로 옮기고 싶었던 동시에 가장 두려웠던 장면”으로 “조엘의 죽음”을 들었 다. 메이진은 특히 “죽음을 보여주는 방식보다 그를 바라보는 엘리의 감정선을 설계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조엘의 부재 이후 시즌2의 정서적 중심이 “표면적으로는 엘리와 임신 중인 디나(이사벨라 메르세드)의 관계 지만 애비의 서사와 조엘의 부재 또한 여전히 서사의 핵심”이라고 짚었다. 두 사람은 각색 과정에서 “시리즈물과 게임이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데 집중했다. 기본 전제는 “게임은 플레이어가 속도를 조절하지만 드라마는 주제에 의해 설계된 경로가 있다”(닐 드럭만)는 점이었 다. 오리지널 캐릭터 게일(캐서린 오하라)의 등장과 유진(조 판토리아노)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누군가가 되는 경험을 주지만 드라마는 모두를 동일한 거리에서 보여주기” (크레이그 메이진)에 조엘과 엘리의 서사를 감정적으로 확장 하기 위해선 새로운 인물들의 입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점 구성에 관한 질문도 이어졌다. 메이진은 게임 특유의 시점 전환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텔레비전이 반대로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빠르게 타인의 관점으로 전환하여 충격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취재진에게 초유의 관심사는 후속 시즌에 대한 정보였다. 원작에선 엘리와 애비 사이의 복수의 고리가 처절하게 깊어지는데 드럭만은 “다음 시즌에도 조엘과 엘리의 이야기는 여전히 중요하다”며, 조엘의 부재가 “인물들의 감정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애비의 비중이 더 커질 다음 시즌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애비의 마지막을 아직 보지 못했지 않나”라는 메이 진의 말에서 준비 중인 시즌3를 향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기획] 모든 것을 끌어안은 뒤에야 알게 된 것들, <좀비딸> 배우 윤경호

2025년 여름 시장의 승자는 단연 <좀비딸>이다. <좀비딸>은 7월30일 개봉 이후 신기록을 계속 경신 중이다. 먼저 개봉 첫날 올해 최고 오프닝 스코어와 역대 한국 코미디영화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달성했고, 개봉 4일 만에 누적관객수 100만 관객, 6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좀비딸>의 압도적 점유를 모두가 주목하는 지금, <씨네21>은 배우 윤경호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정석과 이정은, 범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배우 기용은 <좀비딸>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여기에는 덧붙여 설명되어야 할 중요 요소가 있다. 웹예능 <핑계고>에 출연한 배우 윤경호의 클립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흥행 변수가 된 것이다. 과거 아동극 아르바이트 에피소드, 텔레마케팅 아르바이트 에피소드, 가수 박진영의 팬이었던 중학 시절 에피소드 등 윤경호 개인의 취향과 역사가 담긴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를 따라 유쾌하게 웃었다. 배우를 향한 대중의 관심과 호기심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시선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함께 웃다가 울다가 가까워지고 마는, <좀비딸>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거리감이 바로 윤경호 안에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좀비딸>의 흥행 곡선은 윤경호의 재발견과 맞닿아 있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가까이에 있었다. 무수한 드라마와 영화에서 그는 크고 작은 역할을 수행하며 다채로운 얼굴을 그려왔다. 너무 친숙한 나머지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윤경호의 시간을 들여다보고자 그를 만났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제가 말이 너무 많죠?”다. 손사래 치며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맞다. 타고난 이야기꾼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민하게 감각해내는 그였기에 가능했던 긴 대화를 따뜻한 서신처럼 정리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배우 윤경호와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또 다른 응답 - 21세기 영화의 감각 불가능성

21세기가 되었을 때 영화는 몸을 감각하며 20세기 영화의 질문을 연장했다. 20세기에 영화는 기억을 생산하고,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크린 위로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이 투사되었고, 스크린의 얼굴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았던 얼굴,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의 예술. 21세기를 여는 영화가 기억을 잃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가 여전히 기억의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자동차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여성이 있다. 여성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성은 낯선 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이름을 묻는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때 여성은 집 안 욕실 벽에 붙은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 <길다>(1946) 포스터에서 리타라는 이름을 훔친다. <길다>는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 리타 헤이워스의 이름, 매혹하는 여성의 이미지, 정체성과 속임수, 죽은 자의 회귀라는 모티브를 빌려준다. 이처럼 21세기의 영화는 20세기 영화의 줄을 붙잡고 망각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하룬 파로키는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 <손의 표현>과 같은 자신의 일련의 아카이브 영화 작업에 ‘이미지 어휘집’(Bilderschatz)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파로키의 ‘Bilderschatz’를 ‘이미지 어휘집’(Cinematic thesaurus)으로 번역하는 대신 보물창고(schat, 寶庫)라는 뜻을 살려 이미지 보고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이미지 안에 쌓아온 고통과 비애의 형식의 원천에 ‘고통의 보고’(Leidschatz)라는 이름을 붙였던 미술 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생각을 빌리고자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이안/리타는 영화라는 이미지 보고에서 이름을 훔쳤고, 환상을 훔쳤다. 그러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세기를 새롭게 연장하는 21세기의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킹 비더, 빌리 와일더, 앨프리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등 20세기 고전 할리우드영화와 유럽 모던 시네마의 탁월한 거장들이 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 위태로운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21세기의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위태로운 정체성에 대해 부재와 불가능성의 스크린으로 응답했던 모던 시네마와 다른 응답을 모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부부가 참여한 한밤의 파티와 산책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 끝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던한 <밤>의 방식으로 부부의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는 얼굴의 위기, 얼굴과 몸의 위기를 통해 정체성과 관계의 위기를 보여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는 <로스트 하이웨이>와 <트윈 픽스> 등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자주 스테디캠을 사용해 정지화면을 찍었는데 특히 이 방법으로 부서지듯 제자리에 있고, 몸과 분리된 채 몸 위에 있는 얼굴의 악몽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미지의 세계는 데이비드 린치가 악몽으로 표현했던 사태, 곧 얼굴과 몸의 분리가 일상화된 세계가 되었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얼굴 이미지의 수정, 조작, 생성, 공유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얼굴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안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얼굴은 나의 통제 아래 내 몸에 붙어 나를 드러내는 대신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나의 몸을 벗어난다. 이에 얼굴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얼굴의 가시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이 생겨난다. 카메라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서 카메라가 가득한 매체 환경에서 ‘안 보이게 되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시대(히토 슈타이얼)에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감각의 세계를 확장했던 영화는 이제 어떻게 얼굴의 가시성을 다루어야 할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2000년대를 열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영화,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은 인물을 다루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가 떠오른다. 특히 주인공이 병원에서 얼굴에 감고 있던 백색 붕대. 한 남성이 기차를 타고 핀란드 남부 항만도시인 헬싱키에 도착한다. 불량배들이 그를 두들겨 패고,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 유일한 기억, 유일한 과거를 파괴한다. 의식불명 상태로 사망을 선고받았다가 갑자기 부활하는 주인공은 얼굴과 온몸에 백색 붕대를 감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리타의 기억상실은 정체성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계기다. 리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쫓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누구에게 쫓기는지,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알지 못한 채로 리타는 변장을 시도한다. 이런 리타와 비교하자면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의 완전한 삭제와 갱신을 뜻하는 백색 붕대, 사망 선고, 부활을 경험하고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없는 이 남자는 권력, 제도, 시장에 신원 정보를 제출할 수 없다. 도시의 주변인인 룸펜들이 이 남자에게 빼앗은 것, 이 남자가 잃어버린 것은 인구학적 통제 수단인 신원 정보다. 반면 이 남자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동하는 신체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용접공으로 일했던 그는 기꺼이 낡은 레퍼토리를 가진 악단에 음악적 취향을 조언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직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용접 능력을 발휘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가 영화에 기댈 때, <과거가 없는 남자>는 (육체)노동에 기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서류, 일련번호, 통계자료로 개인을 환원하는 권력에 노동을 대조한다. 얼굴을 가시화하는 대신 노동을 가시화하기. 그런데 영화 초반부 주인공을 공격했던 불량배 중 하나는 주인공 가방에서 꺼낸 용접공 보호구를 얼굴에 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보호구를 뒤집어쓴 불량배는 예수를 끌고 가던 로마 병사나 <스타워즈>의 어둠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 중요성을 부여하자면 주인공을 예수적 형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딥페이크 시대 이전의 영화인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영화는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낙관에 기댄다. 지난 세기에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빅토르 에리세는 ‘이미지의 시세가 하락한’ 21세기에 새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를 만들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영화와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를 연결한다.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동차 주행이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파노라마가 매우 영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사고를 겪지 않는 자동차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자동차는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고를 겪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은 모두 사고를 겪었다. 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에게 실종을 둘러싼 사고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고를 겪었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이름뿐 아니라 신체의 기억도 잃은 것 같다. 요양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는 예술에 대한 취향이나 예술에 대한 직업적 능력, 죄의식과 불안조차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20세기 영화의 필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인물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준비한 상영에 소환된다. 영화는 일상의 아무 곳에서나 우리를 불러 세우지 않고, 우리를 응시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불안과 사랑을 알려주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가 이제 일상적인 세상을 보는 우리의 두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보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영화와 얼굴의 잔상, 한스 벨팅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신체 이미지라고 부른 이미지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2>(2024)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머리 없는 여인>(2008)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런데 카메라가 도처에 있는 시대에 만들어진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가정된다. 운전자가 모두 악천후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디지털매체 환경 시대의 사용자들이 대체로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이들도 산만한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편의 영화는 편재하는 카메라 시대, 감각과 시선 사이의 분리가 문제시되는 시대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비가시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교통사고를 다룬 20세기의 고전 중 하나를 떠올려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텔레비전용 장편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다. 샤브롤의 영화는 아들의 뺑소니범을 뒤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국영화와 넷플릭스 드라마 복수극에서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피해자의 전형과 유사하다. 그는 자식을 잃은 피해자지만 복수를 시행하기 위한 치밀함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정신을 잃은 듯 절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착오 없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스토리를 꾸민다. 피해자는 관객의 주목을 이끌어내면서 가학적이고 즉흥적이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범인에게 접근한다. 물론 샤브롤은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샤브롤이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아이의 얼굴과 함께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아이가 멀찍이 해안가에서부터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이 사이 한적한 마을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 숏이 끼어든다.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소리와 카 오디오의 클래식음악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전환된 화면에서 카메라는 마을 성당 앞 삼거리로 걸어오는 아이를 천천히 줌인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심지어 우리가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에 만족하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막 확인했을 때 자동차가 아이를 들이받는 걸 보여준다. 자동차 앞좌석의 승객이 비명을 지른다. 운전자는 그대로 차량을 몬다. 자동차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카메라 크레인은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비춘다. <배심원 #2>과 <머리 없는 여인>의 운전자들은 차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 운전자 모두 모종의 충돌을 감각했음을 인정한다. 사태는 이 감각에서부터 역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감각의 자극과 고양이 감각의 분별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는 기억의 주관성이나 관점의 주관성이 아니라 감각의 무분별함이다. 감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 진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머리 없는 여인>은 이와 함께 ‘보지 못함’의 근원에 있는 계급적이고 인종적 배경을 지적하는 영화다. 치과의사인 주인공이 모는 차가 저소득층 유색 선주민 거주 지역의 외딴 도로에서 무엇인가를 친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자신이 사람을 친 것인지, 산짐승을 친 것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로 현장을 벗어난다. 영화는 도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주인공과 다수의 선주민 가정부, 정원사 등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면서 식민주의는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결정하는 권력이고, 식민주의의 유산이 우리의 감각의 무능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문을 연 영화들은 몸과 감각을 통해 영화와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의 영화가 근심하는 것은 아마도 굴과 몸, 시선과 감각, 감각과 영화의 공존 불가능성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