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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인터뷰] 호방한 개척자, 배우 중신링

“안녕하세요. 저는 배우이자 MC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뚱뚱했어요. 제 몸은 수치가 아니라 훌륭한 연기적 도구입니다. 독특한 체격 덕분에 좋은 역할을 많이 맡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 중신링은 자국에서 잘 알려진 멀티플레이어다. 금종상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세번이나 받은 실력자로, 대만 국민 드라마 <나의 귀여운 시어머니>에서 바로 그 시어머니로 분해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베테랑 진행자로도 맹활약 중인 그는 ‘텔레비전의 여왕'으로도 불리고 있다. 중신링은 인터뷰에서도 재치 넘치는 언변과 화려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그가 마지막 답변을 끝내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황홀한 쇼를 본 듯 박수를 쳤다. - 펑리수 가게를 배경으로 한 가족 코미디 <나의 귀여운 시어머니>는 시즌2에 이어 극장판까지 나왔다. 많은 동료와 긴 시간 함께 작업한 시절이 어떻게 남아 있나. = 다 함께 먹은 기억밖에 없다. (웃음) 식사 신이 정말 많았는데 이미 절반쯤 먹고 촬영을 시작 하곤 했다. 서로 밥 사기 바빠서 누가 사다둔 아침을 먹고 있으면 스태프가 곧 점심이 도착 한다며 빨리 먹으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그만큼 가족처럼 지냈고 그때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그립다. - 넷플릭스 시리즈 <네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다> 중 <고양이 새끼> 편에서는 아들의 어머니 역할을 맡아 평소와 다른 메마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 나 역시 두 아이의 엄마로서 매일 아이들과 부딪히며 산다. 엄마들에게는 아주 어두운 면이 있는데, 이 작품이 그걸 발견해주어서 공감이 갔고 위안이 됐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느끼는 엄마로서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자 했다. - 남들 앞에 서는 직업이 천직 같다.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나. = 어릴 적부터 형제자매와 집에서 연극 놀이하는 게 일상이었고 노래 경연 프로그램에도 나갔다. 고등학생 때 선생님 추천으로 국립타 베이예술대학교 연극대회에 나갔다가 잘돼서 그 학교 연극학과에 들어갔고. 그때만 해도 연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잘생기고 예쁜 선후배 들을 제치고 내가 배역을 따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공주 옆에 서는 공룡 역할을 맡았는데 선생님에게 ‘너, 참 잘한다’ 는 칭찬을 들었다. 그 무대에서 ‘나도 연기를 할수 있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 - 금종상에서 어린이·청소년 프로그램 최우수진 행자상을 수상한 이력도 눈에 띈다. TV 진행자 활동은 어떻게 시작했나. = 시작은 대타였다. 원래 담당이던 남자 MC가 진행할 수 없게 되면서 체격이 비슷한 내가 대신 행사를 맡게 됐다. 어릴 때부터 마이크 잡기를 좋아했는데 커서도 여전히 좋더라. 긴장지만 그걸 넘어서는 짜릿함이 있다. - 그동안 다양한 여성들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그리고 싶은 여성상이 있다면. = 주로 엄마 역할을 맡아왔는데 좋다. 고유한 결을 찾아 이전과 겹치지 않는 엄마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재밌다. 앞으로도 즐겁게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바라는 캐릭터가 있다면 악역이다. 예전에 한번 해봤는데, 악역은 감춰둔 것을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어서 쾌감이 컸다. 아주 조용한 캐릭터도 해보고 싶다. 평소에 내가 너무 시끄럽기 때문이다. (웃음)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또 다른 응답 - 21세기 영화의 감각 불가능성

21세기가 되었을 때 영화는 몸을 감각하며 20세기 영화의 질문을 연장했다. 20세기에 영화는 기억을 생산하고, 기억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스크린 위로 우리가 기억하는 얼굴이 투사되었고, 스크린의 얼굴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았던 얼굴, 우리를 바라보는 얼굴의 예술. 21세기를 여는 영화가 기억을 잃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가 여전히 기억의 예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스앤젤레스 근교 자동차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겪은 여성이 있다. 여성은 자기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성은 낯선 가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데, 이름을 묻는 주인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때 여성은 집 안 욕실 벽에 붙은 고전 할리우드 시기 영화 <길다>(1946) 포스터에서 리타라는 이름을 훔친다. <길다>는 이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에 리타 헤이워스의 이름, 매혹하는 여성의 이미지, 정체성과 속임수, 죽은 자의 회귀라는 모티브를 빌려준다. 이처럼 21세기의 영화는 20세기 영화의 줄을 붙잡고 망각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하룬 파로키는 <공장을 나서는 사람들> <손의 표현>과 같은 자신의 일련의 아카이브 영화 작업에 ‘이미지 어휘집’(Bilderschatz)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철학자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파로키의 ‘Bilderschatz’를 ‘이미지 어휘집’(Cinematic thesaurus)으로 번역하는 대신 보물창고(schat, 寶庫)라는 뜻을 살려 이미지 보고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인류가 이미지 안에 쌓아온 고통과 비애의 형식의 원천에 ‘고통의 보고’(Leidschatz)라는 이름을 붙였던 미술 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의 생각을 빌리고자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다이안/리타는 영화라는 이미지 보고에서 이름을 훔쳤고, 환상을 훔쳤다. 그러므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20세기를 새롭게 연장하는 21세기의 영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치는 킹 비더, 빌리 와일더, 앨프리드 히치콕, 잉마르 베리만 등 20세기 고전 할리우드영화와 유럽 모던 시네마의 탁월한 거장들이 집요하게 다루었던 문제, 위태로운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21세기의 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치가 위태로운 정체성에 대해 부재와 불가능성의 스크린으로 응답했던 모던 시네마와 다른 응답을 모색했던 것도 사실이다. 데이비드 린치는 부부가 참여한 한밤의 파티와 산책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올 때 끝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모던한 <밤>의 방식으로 부부의 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데이비드 린치는 얼굴의 위기, 얼굴과 몸의 위기를 통해 정체성과 관계의 위기를 보여준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또는 <로스트 하이웨이>와 <트윈 픽스> 등에서 데이비드 린치는 자주 스테디캠을 사용해 정지화면을 찍었는데 특히 이 방법으로 부서지듯 제자리에 있고, 몸과 분리된 채 몸 위에 있는 얼굴의 악몽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이미지의 세계는 데이비드 린치가 악몽으로 표현했던 사태, 곧 얼굴과 몸의 분리가 일상화된 세계가 되었다. 디지털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얼굴 이미지의 수정, 조작, 생성, 공유가 일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얼굴은 정체성을 표현하는 안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얼굴은 나의 통제 아래 내 몸에 붙어 나를 드러내는 대신 나의 통제를 벗어나고, 나의 몸을 벗어난다. 이에 얼굴에 대한 통제권을 지키기 위해 얼굴의 가시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역설적 상황이 생겨난다. 카메라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으로서 카메라가 가득한 매체 환경에서 ‘안 보이게 되기’를 실천할 것을 촉구하는 시대(히토 슈타이얼)에 이름 없는 사람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며 감각의 세계를 확장했던 영화는 이제 어떻게 얼굴의 가시성을 다루어야 할까?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2000년대를 열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영화,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은 인물을 다루는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2)가 떠오른다. 특히 주인공이 병원에서 얼굴에 감고 있던 백색 붕대. 한 남성이 기차를 타고 핀란드 남부 항만도시인 헬싱키에 도착한다. 불량배들이 그를 두들겨 패고,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 유일한 기억, 유일한 과거를 파괴한다. 의식불명 상태로 사망을 선고받았다가 갑자기 부활하는 주인공은 얼굴과 온몸에 백색 붕대를 감고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속 리타의 기억상실은 정체성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계기다. 리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쫓기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누구에게 쫓기는지, 무엇 때문에 쫓기는지 알지 못한 채로 리타는 변장을 시도한다. 이런 리타와 비교하자면 <과거가 없는 남자>는 과거의 완전한 삭제와 갱신을 뜻하는 백색 붕대, 사망 선고, 부활을 경험하고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없는 이 남자는 권력, 제도, 시장에 신원 정보를 제출할 수 없다. 도시의 주변인인 룸펜들이 이 남자에게 빼앗은 것, 이 남자가 잃어버린 것은 인구학적 통제 수단인 신원 정보다. 반면 이 남자는 음악에 대한 취향과 노동하는 신체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용접공으로 일했던 그는 기꺼이 낡은 레퍼토리를 가진 악단에 음악적 취향을 조언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자신의 직업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용접 능력을 발휘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기억을 잃어버린 인류가 영화에 기댈 때, <과거가 없는 남자>는 (육체)노동에 기댄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서류, 일련번호, 통계자료로 개인을 환원하는 권력에 노동을 대조한다. 얼굴을 가시화하는 대신 노동을 가시화하기. 그런데 영화 초반부 주인공을 공격했던 불량배 중 하나는 주인공 가방에서 꺼낸 용접공 보호구를 얼굴에 쓴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보호구를 뒤집어쓴 불량배는 예수를 끌고 가던 로마 병사나 <스타워즈>의 어둠의 전사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에 중요성을 부여하자면 주인공을 예수적 형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딥페이크 시대 이전의 영화인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 영화는 노동하는 신체에 대한 낙관에 기댄다. 지난 세기에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던 빅토르 에리세는 ‘이미지의 시세가 하락한’ 21세기에 새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3)를 만들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처럼 영화와 기억상실이라는 소재를 연결한다. 영화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자동차 주행이 만들어내는 원근법과 파노라마가 매우 영화적이라고 말한 바 있다. 무엇보다 사고를 겪지 않는 자동차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자동차는 영화적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사고를 겪고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나 <과거가 없는 남자>의 주인공은 모두 사고를 겪었다. 반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우리에게 실종을 둘러싼 사고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그가 어떤 사고를 겪었는지 알려주는 대신, 이미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이름뿐 아니라 신체의 기억도 잃은 것 같다. 요양원 벤치에 앉아 있는 그는 예술에 대한 취향이나 예술에 대한 직업적 능력, 죄의식과 불안조차 잊은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이 아니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20세기 영화의 필름은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인물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의식적으로 준비한 상영에 소환된다. 영화는 일상의 아무 곳에서나 우리를 불러 세우지 않고, 우리를 응시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불안과 사랑을 알려주지 않는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영화가 이제 일상적인 세상을 보는 우리의 두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 영화는 보기 위해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눈을 감고 영화와 얼굴의 잔상, 한스 벨팅이 ‘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신체 이미지라고 부른 이미지를 보라는 뜻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배심원#2>(2024)와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머리 없는 여인>(2008)은 교통사고를 일으킨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런데 카메라가 도처에 있는 시대에 만들어진 두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가정된다. 운전자가 모두 악천후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디지털매체 환경 시대의 사용자들이 대체로 여러 가지 일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이들도 산만한 상태에서 운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편의 영화는 편재하는 카메라 시대, 감각과 시선 사이의 분리가 문제시되는 시대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두 영화의 비가시성을 언급하기 전에 먼저 교통사고를 다룬 20세기의 고전 중 하나를 떠올려보려고 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텔레비전용 장편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던 클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1969)다. 샤브롤의 영화는 아들의 뺑소니범을 뒤쫓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국영화와 넷플릭스 드라마 복수극에서 관객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피해자의 전형과 유사하다. 그는 자식을 잃은 피해자지만 복수를 시행하기 위한 치밀함과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 복수를 다짐하며 정신을 잃은 듯 절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착오 없이 적에게 접근하기 위한 스토리를 꾸민다. 피해자는 관객의 주목을 이끌어내면서 가학적이고 즉흥적이며, 경제적으로 성공한 범인에게 접근한다. 물론 샤브롤은 전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는다. 그러나 샤브롤이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희생자의 얼굴과 이름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였다는 사실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아이의 얼굴과 함께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노란색 우비를 입은 아이가 멀찍이 해안가에서부터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이 사이 한적한 마을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 숏이 끼어든다. 시끄러운 자동차 엔진 소리와 카 오디오의 클래식음악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전환된 화면에서 카메라는 마을 성당 앞 삼거리로 걸어오는 아이를 천천히 줌인한다. 카메라는 우리에게, 심지어 우리가 바닷가에서 보낸 시간에 만족하듯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막 확인했을 때 자동차가 아이를 들이받는 걸 보여준다. 자동차 앞좌석의 승객이 비명을 지른다. 운전자는 그대로 차량을 몬다. 자동차는 화면 밖으로 사라지고 카메라 크레인은 바닥에 쓰러진 아이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비춘다. <배심원 #2>과 <머리 없는 여인>의 운전자들은 차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하고,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데 두 운전자 모두 모종의 충돌을 감각했음을 인정한다. 사태는 이 감각에서부터 역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감각의 자극과 고양이 감각의 분별로 이어지지 않음을 확인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더는 기억의 주관성이나 관점의 주관성이 아니라 감각의 무분별함이다. 감각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 진실에 대한 불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머리 없는 여인>은 이와 함께 ‘보지 못함’의 근원에 있는 계급적이고 인종적 배경을 지적하는 영화다. 치과의사인 주인공이 모는 차가 저소득층 유색 선주민 거주 지역의 외딴 도로에서 무엇인가를 친다. 겁에 질린 주인공은 자신이 사람을 친 것인지, 산짐승을 친 것인지 확인하지 않은 채로 현장을 벗어난다. 영화는 도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오프닝과 주인공과 다수의 선주민 가정부, 정원사 등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면서 식민주의는 가시화와 비가시화를 결정하는 권력이고, 식민주의의 유산이 우리의 감각의 무능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21세기의 문을 연 영화들은 몸과 감각을 통해 영화와 정체성의 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오늘의 영화가 근심하는 것은 아마도 굴과 몸, 시선과 감각, 감각과 영화의 공존 불가능성일 것이다.

BIFF #8호 [스페셜] 60년의 여정, 끊임없이 새로운 ① -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 마스터 클래스와 인터뷰

1965년 26세의 피렌체 출신 젊은 감독이 연출한 첫 장편 영화 <호주머니 속의 주먹>은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을 거부당했다. 가족 제도부터 사회 규범까지 모든 것에 반기를 들었던 이 문제작은 공개 직후 이탈리아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며 거장의 반열에 오른 마르코 벨로키오는 여전히 역사와 개인의 경계에 선 채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대의 폐부를 찌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영화 여정을 ‘지그재그’와 같다고 설명했던 그의 말처럼 이 문제적인 거장의 영화 세계를 한 단어로 일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마르코 벨로키오라는 이름은 관객이 어떤 작품을 보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허공으로의 도약>(1980)부터 <달콤한 꿈>(2016)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란 칼날 위에 서 있는 인간을 해부했던 빼어난 정신분석가이자, <내 어머니의 미소>(2002)와 <잠자는 미녀>(2012)를 통해 종교나 존엄성의 딜레마를 탐구하고자 했던 사색가이며, <중국은 가깝다>(1967)로부터 <익스테리어, 나잇>(2022)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의 정치와 역사를 관찰한 정치학자기도 할 것이다. 하나 명확한 점은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와 개인,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결코 안과 밖의 대립처럼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장편 데뷔 60주년을 맞아 마르코 벨로키오의 영화 세계를 유심히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했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라는 제목으로 구성된 특별기획 프로그램에는 그의 장편 데뷔작 <호주머니 속의 주먹>부터 HBO와 함께 제작한 시리즈 <뽀르또벨로>(2025)에 이르기까지 8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씨네21>이 특별전을 위해 부산을 찾은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과 만났다. 인간과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하며 투과되는 그의 영화 철학을 전해 들을 수 있던 귀중한 인터뷰였다. 동시에 9월 21일 14시부터 15시 30분까지 진행되었던 마스터 클래스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에서 그의 연출론을 살펴볼 수 있는 대담의 일부를 세 가지 키워드로 기록하여 옮겼다. - 부산국제영화제의 인연은 2004년 상영된 <굿모닝, 나잇>까지 2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해까지 총 10편에 달하는 감독님의 영화를 소개해 온 부산에서 60년 간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본 이번 회고전을 향한 소회가 남다를 것만 같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 영화들이 자주 상영되었다. 따라서 부산에서 회고전을 갖는 것은 내게도 매우 의미가 크다. 단 며칠 만에 한국 사회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번 회고전을 통해서 새로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간 텔레비전과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의 걸작들은 매우 도전적인 작품이었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영화의 한 갈래로 다가왔다. - 이번 특별 프로그램의 제목은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다. 첫 장편인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 비롯된 이 수식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통 주먹을 들어 올린다는 건 정치적 표현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주먹을 주머니에서 꺼낸 상태다. 지금 내 나이가 되면 급진적인 정치적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곱씹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는 정치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려는 방식의 변화를 모색했던 시기였다. <중국은 가깝다>를 찍었던 6, 70년대 당시 마오이즘 신화가 이탈리아와 유럽 청년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는 모두가 주먹을 쥐었지만, 이제 그 문구는 이전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대변하는 키워드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웃음) - 이탈리아의 근현대 역사와 시대를 꾸준히 소환했던 감독님의 영화에는 개인과 역사 사이의 역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미시사가 역사의 거시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역의 명제도 성립하고 있다. 개인에게 역사란, 역사에게 개인이란 어떤 관계인가. 역사와 개인 그 두 조합이 나를 매료시킨다. 역사의 거시사를 인물을 통해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개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려 한다. 단순히 한 개인만 아니라 그 주변의 관계마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익스테리어, 나잇>에서는 앤도 모로(파브리지오 기푸니)가 가족과 함께한 모습과 납치에 얽힌 다른 인물들의 사적인 모습을 통해 이들 모두가 납치와 암살이라는 국가적인 정치 사건 아래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결합 혹은 관계가 나를 끌어당기는 공식이다. 물론 역사에 충실해야 하지만 내 상상력은 역사에 대해 불충실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것이 스타일의 일부다. 가능할 수 있다면 인물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기에 역사책에 묘사되지 않은 공백을 채우고 싶다. - 한편, 시대의 초상 아래에서 감독님의 인물들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인다. <육체의 악마>의 자살 시도하는 광인, <종교의 시간>의 정신병자 형, <보모>(1999)의 산후우울증에 걸린 아내, <달콤한 꿈>의 마시모(발레리오 마스텐드리아)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광인이야말로 진리를 통달한 자라는 낭만적인 관점이 하나의 신화처럼 존재해 왔다. 가령 예술사에서도 반 고흐와 같은 예시가 있다. 그는 천재지만 정신병으로 인해 자살을 택하지 않았나. 그러나 내게 광기란 곧 불행이며, 고통받는 존재이고, 현실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자다. 나는 내 사적인 삶과 가족의 경험 속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은 이들을 마주해왔다. 그래서 <호주머니 속의 주먹>에서도 이를 바탕으로 비유적인 의미로서 ‘간질’을 인물에 부여했다. 그러므로 내가 정신 질환을 표현하는 방식은 바로 그 병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읽을 수 있다. 마시모 파지올리의 세미나를 통해 나는 정신질환의 파괴성을 극복하려는 작업을 모색했다.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을 묘사하는 작업이 내게는 중요하다. - 고통과 광기의 인물만큼이나 그들이 처한 상태에도 눈이 간다. 3번이나 다룬 알도 모로 총리의 납치 사건(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의 협치를 주도하던 전 총리를 붉은 여단이 납치한 사건 – 편집자)을 비롯해, 감독님의 인물들은 자의 혹은 타의로 감금, 납치, 혼수 상태 등 한정된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내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움직임이다. 인물들이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움직임을 발견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이 인물들은 집 안에 칩거하거나, 감옥에 투옥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 속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닫힘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외부를 향한 움직임을 그리고자 한다. <굿모닝, 나잇>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꿈속에 납치된 알도 모로가 거리로 나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마치 닫힌 공간을 벗어나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나에게 있어 이런 운동은 단순한 신체적 행위가 아니라, 억압과 감금 속에서도 자유를 찾아 나가는 내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움직임은 내 작업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 올해는 HBO와 손을 잡고 시리즈 <뽀르또벨로>를 공개했다. 3년 전 이탈리아 공영방송 Rai를 통해 제작한 <익스테리어, 나잇>에 이어 세계적인 OTT 플랫폼과 함께 협업에 나서게 됐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영화 산업 환경에 발맞춰 창작을 이어 나간 동력이 궁금하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마음이 끌린다. 내 정신이 깨어있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다. <뽀르또벨로>는 HBO라는 국제적인 플랫폼에서 먼저 프로젝트에 대해 훌륭한 제작 제안을 건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지극히 이탈리아적인 이야기다.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법 제도, 이탈리아 텔레비전을 다루는 이야기지만, 공동 제작사로 참여한 Rai를 통해 HBO 콘텐츠로 방영될 예정이다. 내게도 신선한 도전이었던 만큼 <뽀르또벨로>는 또 하나의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