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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니를 DVD로 만나야 하는 이유, <욕망>

<욕망> Blow-Up 1966년 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상영시간 111분 화면포멧 1.85:1 아나모픽 DD 1.0 영어, 프랑스어 자막 영어 출시사 워너(미국)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은 지금까지 제작된 영화 중에서 가장 모호하면서 신비로운 영화의 하나인 동시에 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영화 중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일 것이다. 런던의 바람둥이 패션 사진작가 토마스가 우연히 촬영하게 된 연인의 정사장면이 해결할 수 없는 살인사건의 수수께끼에 단초를 제공한다. 미궁으로 빠져들어가는 과정을 카메라의 시선과 인식론적 사고간의 혼재와 분열의 과정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현실과 허상, 진실과 허구, 그리고 실재와 모사 사이의 가늘고 긴 경계선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과 1960년대 ‘스윙잉 런던’으로 표출된 비트 세대의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과감한 표현으로 그 철학적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발표 이래 꾸준한 대중의 관심을 받아왔다. 특히 이전의 안토니오니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차가운 모더니즘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과감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일련의 현란하고 빠른 편집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그리고 록음악 팬에게는 영화에 수록된 전설의 기타리스트 제프 백과 지미 페이지의 야드버즈 공연장면은 멋진 보너스이다). 2월17일 북미에서 발매된 <욕망>의 DVD는 모든 면에서 작품의 명성만큼이나 훌륭한 DVD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전의 결정판으로 알려져 있던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의 CAV LD 버전의 환상적인 화질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조차 DVD 특유의 푸른색 위주의 차가운 질감으로 트랜스퍼된 화면에서 뿜어내는 안토니오니 특유의 공허함과 런던 패션계의 화려한 색채 사이의 무덤덤한 대비는 DVD가 존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꼽을 정도로 훌륭하다. 오디오는 오리지널에서 지원하는 모노 음성이 지원되나 음향이 절대적으로 제어되어 있는 안토니오니 영화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그리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부록으로는 예고편과 음악 트랙 이외에 영화평론가이자 안토니오니에 대한 평전을 출간한 바 있는 영화학자 피터 브루넷의 육성해설이 담겨 있으나, 전해주는 정보의 많은 양에도 불구하고 그리 흥미롭지는 않다. 사실 <욕망>의 DVD는 작품 자체의 영화사적 가치나 북미에서 동시에 출시되었던 비스콘티의 <베니스의 죽음>의 국내 출시를 계기로 기대해본 타이틀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흥행의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복잡한 판권문제 때문인지 국내 출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현재 <욕망>의 DVD는 북미에서 지역코드 1로만 출시되어 있다. 이교동

계급도 성별도 옷차림도 벗어버리고 그냥 그루브하라!

<클럽문화의 발전을 위한 제언> : 홍대 클럽데이와 레이브 파티의 본고장 영국의 클럽 비교체험한장의 티켓만으로 대부분의 클럽을 마음껏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클럽데이의 철학은 그야말로 만국의 춤꾼들, 아니 마음껏 놀고 싶은 모든 ‘인류’를 위한 놀랍도록 평등한 아이디어다. 대체 이 철학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이미 서구의 일렉트로니카-클럽문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영향력을 훌쩍 넘어서서 그 독특한 놀이문화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중이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도달한 서울, 홍익대 앞이라는 변방의 지형도에서 그것은 어떻게 홀로 진화해왔을까. 34회 클럽데이의 파티 현장으로 들어가보자. 편집자 “만약 니가 오늘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거야. 파티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 마지막 레코드가 회전을 멈출 때까지는 말이지.” -영화 〈groove〉 중- 서울 홍익대 앞은 설레고 있었다. 한국의 어떠한 도시나 마찬가지이듯, 난잡한 간판들과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회색의 콘크리트 유리 결합체들이 좁게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그 골목들의 집합은 밤이 되면 ‘드랙’을 하기 시작한다. 스산한 바람과 잘못 선택되어지고 심어진 흉물스런 가로수가 둘러싼, 윗분들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걷고 싶은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없고 매주 마지막 금요일 밤 극동방송사 맞은편 주위의 골목 골목들 사이로만 비로소 거리는 살아나기 시작한다. 2월27일 제34회 클럽데이. 1만5천원짜리 티켓을 손에 쥐었다. 손목 주위에 걸어주는 티켓과(뜯어지면 무효라니 조심할 수밖에) 한장의 음료수 티켓. 이제 준비는 끝났다.11시가 갓 넘은 클럽들은 이미 온몸의 핏줄을 따라 할딱거리는 기계음으로 가득 차 있고 뿌연 연기와 클러버들의 몸으로부터 솟아나온 증기로 숨이 막힌다. 음료수를 하나 주문해서 손에 들고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어서 카운터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저 지금 옷 맡겨두실 자리가 없거든요” 하는 바텐더. 할 수 없이 바 옆에 쌓여 있는 맥주박스 위에 옷을 올려둔다. 분실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런 둔한 옷을 입고 클럽의 열기를 견뎌낼 수는 없다. 야광색 글루 스틱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뱅글뱅글 돌려대는 사람들, 두눈을 감고 흘러나오는 일렉트로니카 비트에 영혼을 맡긴 듯이 빠져 있는 사람들, 의자에 앉아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조용히 관전하는 사람들, 삼삼오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사람들. 그리고 열기들. 수입된 놀이로서의 클럽 “저 춤추고 계신데 죄송하지만 사진 한장만 찍어도 괜찮을까요?” 음악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느닷없는 방해꾼의 요구에 슬그머니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면서도 사람들은 ’너 따위는 사실 안중에도 없어’라는 표정으로 다시 음악에 몰입하며 몸을 흔든다. 자정이 넘어가자 이미 클럽데이에 참가한 15개의 클럽들은 발디딜 틈도 없이 클러버들로 가득 차 있어서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한 클럽에서는 꽤 유명한 듯한 사회자가 무대에 나와서 이벤트를 진행 중이었다. 낯선 광경. 이런 것들이 바로 한국적 클럽문화라는 것을 외부의 것(혹은 오리지널)과 구분하는 요소들이 되는 것일까. 클럽의 입구들마다 가득 쌓여 있는 판촉행사 중인 담배들과 그 옆에 서서 피곤한 듯이 웃고 있는 담배회사 아가씨.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홀연히 벌어지는 이벤트 시간, 금세까지 음악의 황홀경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대에 눈과 귀를 몰입하고 사회자의 말에 열심히, 착한 아이처럼 네! 하고 소리친다. 갑자기 뭔가 한없이 낯선 기분이 들었다. PLUR? 무슨 뜻이야? PLUR, Peace(평화), Love(사랑), Unity(화합) 그리고 Respect(존경)의 앞자들을 딴 거지.(엑스터시 타블렛을 삼키며) 좋아.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 -영화 〈groove〉 중- 새벽 2, 3시가 넘어가도록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위해 클럽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클럽데이에 참가하는 모든 클럽들을 전전하며 놀아보려는 사람들도 있고, 물좋은나이트 고르듯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다. 미군 출입금지 팻말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종이 혼재하는 홍익대의 거리들은 차가운 새벽의 냉기마저 털어내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열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서 머릿속을 공명해댄다. 왜 이 열기는 친철하고 즐겁게 모두 같이 타오르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서 타오르는 작은 열기들의 틈 사이로 여전히 서늘한 냉기를 느껴지게 만드는 것일까. 홍익대라는 공간이 적극적으로 수입해온 이 여전히 이질적인 놀이문화의 근원에는 여전히 평화, 사랑, 화합, 존경이라는 만세계 클러버들의 공통적인 모토가 자리잡고 있지 않았다는 말일까. 클럽들을 돌아다니다가 벽에 붙은 또 다른 파티의 광고를 보게 되었다. 3만원이 넘는 가격에 장소는 홍익대 앞이 아닌 강남의 한 클럽. 그러니까 꿈에 그리던 유명 DJ의 내한파티에 참가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한 건 가벼운 옷차림으로 홍익대 앞의 조그마한 클럽에 들르는 일이 아니라 성수대교를 건너 홍익대와는 전혀 다른 코드를 지닌 강남의 커다란 자본의 궁전에 3만5천원을 주고 들어가는 시간과 돈이다. 드레스 코드 역시 광고에 등장. 잠시 아찔함을 느꼈다. 한국 물가의 서너배를 거뜬히 넘어가는 살인적인 물가의 런던, 그 중심가의 클럽에 입장할 수 있는 돈도 비싸봐야 3만원이다. 그러니 결국 나는 런던의 클럽에 들어가는 돈과 똑같은 입장료를 내야만 같은 DJ들의 음악에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싸구려 면티에도 당당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한 반자본주의적 놀이터인 ‘본토’의 클럽과는 달리 나는 폴 스미스를 걸친 아이들의 값비싼 팬시 드레스들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것이다. 중간중간 진행되는 이벤트들이 지속되는 DJ의 턴테이블 주술을 탈색시켜버릴 것인데다가(아연실색하게도 ‘그냥 미치도록 춤만 추는 것이 아닌 다채로운 이벤트형 파티’라는 모토를 자랑스럽게 내건 강남의 클럽도 있었다) 모든 것은 마치 해운대, 유성온천, 강남역 전국 어디에나 혼재하는 부채들고 부킹하는 한국형 나이트클럽의 새로운 버전업으로도 보인다. 새로운 아이템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진해내는 젊고 싱싱한 육체의 값비싼 전시장으로서의 효용으로 가득 찬. 클럽문화의 모토는 PLUR! 레이브 파티(Rave Party)의 진원점은 영국이었다. 버려진 창고나 야외의 천막을 이용해서 밤새도록 음악을 틀어놓고 집단 트랜스 상태에 도달하는 일종의 공동체적 의식이었던 이 놀이문화의 일종은 당연한 수순으로 일렉트로니카 음악신을 흡수했다. 같은 비트를 몽환적으로 반복하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은 레이브 파티에 가장 어울리는 종류의 주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영국의 레이브 컬처는 80년대 말 태동한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수많은 하위문화의 징후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그렇다, 클럽문화는 하위문화다. 레이버(ravers: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중심으로 레이브 파티를 즐기는 무리), 지피(zippies: 히피+레이버), 크러스티(crusties: 남루한 복장을 하고 도시 주위를 떠도는 생태주의적 배회자), 스쿼터(squatters: 빈집을 점유하고 생활하는 떠돌이) 등등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레이브 파티에서 보는 것은 지금도 영국에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클러버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클럽에서 모두가 원하는 것은 말 그대로 평화(Peace), 사랑(Love), 화합(Unity) 그리고 존경(Respect)의 모토들. 옷차림과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음악을 매개로 아무런 신분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고 즐기는 것이다. 그것은 오래된 클럽문화의 진원지만이 지니고 있는 오리지널리티의 힘일까. 클럽문화를 엄청난 속도로 받아들이고 클럽데이라는 전무후무한 축제의 장까지 열어젖힌 홍익대의 클럽문화가 이같은 클럽 컬처의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직도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창고(Warehouse)에서의 무료 레이브 파티를 주최하려는 두 친구 넌 왜 이런 짓을 하지? 한푼도 받지 않는데다가 구속될 위험도 높고. 너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단 말이야? 몰라. 인사(nod). 인사? 내가 주최한 모든 파티에서 적어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지. 그리고 말해. “정말 이런 파티 만들어줘서 고마워. 정말로 나한테는 이게 필요했거든.” 그리고 나한테 고개 숙여 가볍게 인사하지. 그러면 나도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해.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야. -영화 〈groove〉 중- 새벽 5시가 가까워진 홍익대의 거리. 여전히 클럽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고, 한국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옷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시원한 새벽공기를 받으면서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여 땀을 식히고 있다. 그들만이 향유하는 그들만의 코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적이거나 대안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홍익대 클럽은 여전히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을 전시할 수 있는 절묘한 목적을 지닌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여전히 클러버 혹은 레이버라 지칭할 수 있는 무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클럽마다 다른 취향을 지닌 음악을 찾아서 돌아다니는 무리보다는 모든 클럽엘 잠시 잠시 들러 물을 보고 노는 무리들이 많아 보이기도 했다. 현재 홍익대 앞의 클럽문화는 기본적인 서구문화의 매개체에 머무르고 있고, 그 자신이 생산적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힘에 부쳐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새로운 문화적 징후들과 경향들이 이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가버린다. 팬시한 여성잡지들은 저마다 홍익대 클러빙을 위한 옷차림 제안 같은 싸구려 기사들로 클럽 컬처를 바비 인형들의 사교터로 만들고 있고, 클러빙을 즐기려면 이러이러한 옷차림에 이러저러한 댄스동작을 취하라는 가이드가 나올 때도 멀지 않았다. 엑스터시 타블렛들이 손에 손에 쥐어져 입으로 입으로 삼켜지는 영국의 드럭·레이브 문화의 위험한(혹은 자유로운) 징후 대신에 우리가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팬시 드레스로 가득 찬 근사한 금요일 밤의 또 다른 유흥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홍익대 앞이 만들어내고 소진하는 것들을 강남은 자본으로 굳건히 지켜낼지도 모른다. 이처럼 무서운 예언이 있을까마는. 홍대 앞에 진보의 가능성은 있는가 유고 내전이 한창이었던 1999년의 베오그라드, 언제 어느 블록에 떨어져 거대한 묘지를 만들지도 모르는 나토 폭격기의 미사일과 폭탄에도 불구하고 유고의 젋은이들은 언더그라운드 클럽에 모여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몸을 맡기고 클러버의 전쟁에 돌입했다. 밀로셰비치의 폭정에 항거하는 동시에 나토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새롭게 발견한 음악의 힘에 도취된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클럽에 모여 비밀스럽고 용감한 파티의 저항을 해나갔다. 2003년의 브리스톨 근교를 나는 기억한다. 일단의 젊은이들은 근교의 농장을 빌려서 3일 밤낮을 계속할 자그마한 그들만의 일렉트로니카 우드스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주일을 꼬박, 부모 클러버들을 위한 어린이 쉼터까지 완성한 그들에게 일단의 지역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그들의 파티는 그걸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끝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던 친구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행복한 사람들이 행복한 음악에 취해 함께 즐기는 것을 정부와 경찰은 원하지 않아.” 그 모든 현재진행형의 시련들을 딛고 서구의 클럽-파티-일렉트로니카 문화는 발전해가고 있다. 주체는 참가자들이며 모든 것은 그들에 의해 새로이 시도되고 만들어지고 방어되어진다. 이 지점에서 볼 때 홍익대는 모든 것이 거꾸로 만들어진 참으로 괴상한 공간이다. 인위적으로 생산되고 이식되어진 홍익대 앞의 클럽문화는 (서구에서는 적극적으로 클럽문화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공권력에 의해 오히려 문화상품으로 일정 부분 보장받고 있으며, 이는 여러 해 계속되어온 ‘엑스터시 파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 여기서 홍익대 앞 클럽문화의 주체를 찾는 일은 여전히 아리송하다. 음악으로 시작되어 커뮤니티를 형성한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이곳의 지형도가 만들어진 그 생성과정은, 커뮤니티를 먼저 형성하고 음악을 후발적으로 이용자들에게 알리는 순서로 진행되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혼란스런 클럽문화의 기이한 진화방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새롭기 그지없는 놀이문화의 살아 있는 징후들을 포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폭발하듯 발전을 거듭해온 홍익대 앞 클럽문화의 열기는 놀이문화가 절대적으로 부재한(주말에 친구들과 만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봐야 인구 1천만명이 다같이 관람한 ‘그’ 영화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권하는 ‘그’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이곳의 아이들에게 그 풍부한 ‘놀이’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클럽데이가 어땠냐고? 가능성 절반, 그러나 무릎을 꿇을 가능성도 절반. 자신을 쿨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쿨한 애티튜드를 취하며 자기애에 빠진 어리석은 철새 클러버가 늘어나는 속도만큼 음악을 즐기고 그 PLUR의 정신, 공동체적 문화의 본질에 흠뻑 취해 120BPM의 비트에 심장박동을 맡기는 클러버들도 늘어난다면 진화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그 진화의 전조들은 이미 34회째 클럽데이를 맞은 홍익대 앞 거리를 조심스레 기웃거리고 있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빛이 있으라” 그리고 심심해진 하나님은 “그루브(Groove)도 있으라” 하셨으니, 인종도 계급도 성별도 옷차림도 벗어버리고 그냥 그루브하라. 언제나처럼 그 철학은 단순하다. 글·사진 김도훈 closer21@hani.co.kr

김진균, 혹은 이름의 생명에 관하여

인디언들이 이름을 짓는 방식은 우리와 아주 다르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을 그대로 따서 이름을 짓는다. 특히 아이가 태어날 때 발생한 사건이나 그 주변에 있던 사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 태어날 때 천둥이 크게 쳤다면 ‘구르는 천둥’이 되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면 ‘바람의 아들’이 된다. 옆에 황소가 앉아 있었다면 ‘앉은 황소’, 하늘에 매가 날고 있었다면 ‘나르는 매’ 등과 같은 식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짓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경우 곰이 주는 다양한 감응을 연결해 이름을 지었다. 서 있는 곰, 곰이 노래해, 곰의 마음, 노란 곰 등등. 곰만이 아니라 독수리, 거북이, 여우, 들소, 말, 고라니 등의 동물들이 가장 빈번하게 이름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름 또한 한번 짓는 걸로 고정되지 않아서, 중요한 사건을 겪거나 새로운 재능을 탁월하게 발휘했을 때, 혹은 어떤 업적을 이루었을 때 다른 이름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점에서 인디언의 이름에는 ‘외부’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때로는 묘사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아이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는 동물적인 감응에 따라. 그것은 흔한 말로 ‘고유명사’지만, 개인에 고유한 것을 드러내기보다는 아이에게 기대하는 어떤 동물이나 사건의 특이성을 표현한다. 즉 그들의 이름에서 진정으로 ‘고유한’ 것은 곰이나 고라니, 독수리의 특이성이다. 이로써 그들은 아이와 동물, 아이와 자연이, 혹은 아이와 세계가 함께 어울리길 빌었을 것이다. 성(姓)이 없던 이들과 달리 서양인의 이름은 성으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성’에 해당하는 가족명이 있고, 그 앞에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이름이 주어지며, 그 아이에 고유한 명칭은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다. 폴, 피에르, 요한, 마리아, 크리스틴 등등. 여기서도 고유명사는 명명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들에게 귀결된다. 다만 인디언과 다른 것은, 함께 사는 동물이나 자연과 상생하라는 기원보다는 조상의 음덕이나 미덕이 함께하길, 혹은 그것으로 조상의 이름이 이어지고 연속되라는 기원이 깔려 있다. 동물이나 사건이 특이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조상으로 이어지는 동일성이 이름을 통해 작동한다. 우리의 이름은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있다. 조상의 혈통을 잇는 ‘성’이 있고, 그 혈통 안에서 위치를 표시하는 돌림자도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봄의 향기’나 ‘꿈속에 본 용’, ‘커다란 여름하늘’ 같은 시적인 이름을 사용한다. 한자로 짓기에 대개 잊혀진 채 불리고, 자연이나 사건에 대한 관심보다는 글자간의 조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지어진다는 점에서 인디언과 다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고유명사가 정말 ‘고유성’을 획득하는 것은 그 이름이 개인적인 고유성에서 벗어나게 될 때다. 가령 마르크스라는 이름은 단지 독일 출신의 어떤 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과 혁명을 사유하려는 순간 언제나 떠오르게 마련인 어떤 특이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특이하기에 차라리 보통명사라고 불러 마땅한 일반성을 갖는다. 이 경우 이름은 타인들의 흔적이 새겨진 이름이 아니라 타인들의 삶에 흔적을 남기는 이름이 된다. 최근에 작고하신 김진균 선생님의 이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지식인, 실천, 변혁의 꿈, 그리고 많은 이견을 싸안는 커다란 품 등이 계열화되며 만들어지는 하나의 특이성이 그 이름에 한 사람의 신체로부터 독립된 일반성을 부여한다. 이처럼 이름이 정말 고유한 특이성을 형성하게 되면 그것은 고유명사에서 벗어나 보통명사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특이성이 문제될 때마다 반복하여 되살아나는 생명을,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을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 시대를 전심으로 돌파한 그분의 죽음에서 죽지 않는 법을 다시 배운다. 아니, 그분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

영화사 신문 제33호 (1977∼1978년)

<스타워즈> 영화사의 새 장을 열다 상영관 32개로 개봉 석달 만에 1억달러 매출 ‘역대 최단기간’ <스타워즈>가 나왔다. 영화사의 온갖 기록과 관행들이 깨지고 있다. 조지 루카스의 첨단 SF영화 <스타워즈>는 1977년 개봉 일주일 만에 3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상영관이래봐야 고작 32개뿐이었다. 이어 석달 만에 1억달러 매출을 넘겼다. 역대 최단기간에 이뤄진 기록이다. 2년 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죠스>가 1억달러 매출을 넘겼을 때만 해도 언론은 그 기록이 웬만해선 깨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스타워즈>는 영화가 그저 영화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흥행과 함께 로봇 C-3PO와 R2D2는 캐릭터 인형으로 상품화하며 영화에 버금가는 수익을 올릴 전망이다. 수십년 역사의 로봇 개념은 <스타워즈>로 인해 일상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스타워즈>는 ‘우주활극’이라는 이제껏 상상하지 못했던 새롭고 독창적인 영화 장르를 탄생시켰다. 평론가들은 “서부극의 재미와 액션이 우주라는 예견치 못한 공간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됐다”고 한다. 조지 루카스는 1973년 자신의 출세작 <아메리칸 그래피티> 개봉에 즈음해 이미 <스타워즈>의 초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저예산으로 만든 <아메리칸 그래피티>의 대성공은 <스타워즈>를 만들기 위한 재원이 됐다. 공상 아닌 현실이란 착각을 줄 정도로 사실적인 <스타워즈>의 영상은 루카스가 영화 개봉 2년 전 설립한 ILM(Industrial Light & Magic)의 철저한 연구를 통해서 나왔다. 특수효과 전문회사인 ILM은 <스타워즈>를 위해 만들어졌고, 당시까지 나온 기술력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마크 해밀, 해리슨 포드, 캐리 피셔 주연의 1977년작 <스타워즈>는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의 우주 모험담이다. 루카스는 무언가 있을 법한 시간적 배경을 거두절미하고 은하제국의 독재로부터 영화를 시작했다. 반란, 공주의 탈출시도, 그리고 체포. 제다이 기사의 존재가 알려지자 루크도 훈련을 받고 제다이 기사가 된 뒤 은하계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내용이다. 전쟁은 확률 게임?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 ‘러시안 룰렛’으로 베트남전의 공포 묘사 1978년 12월, 때아닌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논란이다. 비평가들은 “베트남전 때 군인들이 러시안 룰렛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영화감독 마이클 치미노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는 일 아니냐”며 응수하고 있다. 치미노 감독이 연기자 로버트 드 니로와 ‘러시안 룰렛’ 장면의 사실성을 놓고 다퉜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디어 헌터> 그리고 러시안 룰렛 장면. 마이클 치미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베트남전의 아픔을 과거 어떤 영화보다도 소름 끼치는 방식으로, 극단으로 끌고 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탄알 1개가 든 6연발 권총의 실린더를 돌리고 번갈아 자신의 머리를 겨누는, 이어 방아쇠를 당기는 러시안 룰렛. <디어 헌터>에서 베트콩들한테 포로가 된 주인공 마이클(로버트 드 니로)과 닉(크리스토퍼 워컨)은 강압에 못이겨 러시안 룰렛을 한다. 인간성을 마비시키는 공포. 그러나 영화 말미 러시안 룰렛은 그저 도박이 된다. 닉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고 러시안 룰렛에 빠져 있다. 로버트 드 니로와 크리스토퍼 워컨의 연기는 베트남전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방해할 정도로 폭발적이고 흡입력 있다는 평가다. 영화사상 가장 거친 것으로 기억될 러시안 룰렛 장면 외에도 마이클이 영화가 끝날 무렵 총으로 사슴을 조준하다 그냥 놓아주는 연기는 관객을 숙연하게 했다. 영화 초반 사슴 사냥을 즐기던 마이클과 그 친구들이었다. 로버트 드 니로는 이 영화 촬영을 앞두고 몇달간 극중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오하이오의 철강 노동자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근무를 끝낸 노동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그들을 익혔다는 것이다. 드 니로는 철강 공장에 취직을 시도하다 거절당하기도 했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두 번째 영화. 1939년생 치미노 감독은 애초 TV광고를 만들다, 70년대 들어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74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출연한 <대도적>(Thunderbolt and Lightfoot)으로 감독 데뷔했고, <디어 헌터>는 두 번째 영화다. 존 새비지, 메릴 스트립이 함께 출연했다. AFI, 역대 미국의 10대 영화 선정 1977년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AFI)는 역대 미국의 10대 영화를 선정했다. 미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고, <카사블랑카> <사랑은 비를 타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사나이> <오즈의 마법사>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아프리카의 여왕> <시민 케인> <분노의 포도>가 그뒤를 이었다. 투표는 미국 내 50개주와 50개국에 달하는 해외 거주 AFI 회원 3만5천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것. 투표 결과는 감독, 프로듀서, 작가, 제작자, 영화배우를 비롯한 영화관계자들과 대통령 지미 카터, 영부인을 포함한 정치인들을 비롯해 2200명에 달하는 청중이 함께한 자리에서 공표 되었다. 마르타 메자로스의 <어돕션>은 유부남 애인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43살의 독신여성 케이트와 그녀의 삶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보호소 소녀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흑백영화다. 메자로스는 남편인 미클로시 얀초, 이스트만 자보와 함께 헝가리를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돕션>의 그랑프리 수상은 여성영화의 현주소를 가늠하게 하는 시금석의 의미를 갖는다. 60년대 중반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영화는 질과 양에서 급성장하고 있다. 1975년 한해만 살펴보아도 모더니즘영화의 사건으로 평가받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송>,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 마가레타 폰 그레타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영예> 등이 발표되어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이론진영에서는 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라는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다. “컬러는 세계를 싸구려로 만든다” “공포와 부조리한 유머의 혼합.” “지독하게 아름다운 초현실주의 코미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영화평들이다. 1978년, 32살의 데이비드 린치는 과거 어떤 영화와도 비교 불가능한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린치의 사실상 데뷔작인 흑백 톤의 <이레이저 헤드>(Eraserhead)는 미래의 영화사적 평가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걸작 반열에 오르는 느낌이다. 아메리칸 필름 인스티튜트(AFI)의 학생 데이비드 린치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영화가 이상하다는 사람이 많다. 영화 속 장면들이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세계 자체가 먼저 그렇게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영화 속 장면들은 이 세계로부터 촉발된 것이다. 나는 부조리한 것들을 사랑한다. 그건 나에게 대단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지난해(1977) 개봉했던 <스타워즈>만 봐도 색(色)의 향연이다. 그런데 당신에겐 흑과 백만 중요해 보인다. 약간은 과장인 것 같다. 그러나 흑과 백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빛과 어둠, 그리고 그 대비를 사랑한다. 흑과 백은 너무 순수하고 강력하다. 나는 흑과 백의 사운드가 있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다. 때론 컬러가 사물들을 싸구려로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의 취향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게 뭔가. 몇년 전 필라델피아 빈민가의 초라한 집에서 살았다. 거리엔 쓰레기와 공포뿐이었다. 조그만 아이들이 울어대기 일쑤였다. 아마 그 아이들의 아빠는 집에서 술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집으로 강도가 들어올까 무섭기도 했다. 그런 편집증적인 아름다움. <이레이저 헤드>는 아마도 거기서 탄생했을 것이다. 인물과 사건들이 상징적인 것은 일부러 노력해서인가. 꼭 그렇진 않다. 난 화가였고 그렇기 때문에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으리라 본다. 지금도 여전히 화가인 것처럼 말한다. 혹시 자신을 좌절한 예술가로 느낄 땐 없나. 없다. 영화를 만드는 것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내겐 똑같다. 둘 다 나 스스로(for myself) 만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독립적인 일들이다. 역사 인물 중에 누구를 좋아하나. 반 고흐를 정말 좋아한다. 그가 살던 시기의 파리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다이앤 키튼 “그녀는 카멜레온” <애니 홀>의 말괄량이에서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의 밤의 여인까지 변신귀재 막 서른을 넘긴 여배우 다이앤 키튼(1946년생)의 한계를 모르는 연기 변신이 눈부신 한해(1977년)다. 배우로서의 명성이야 <대부>(1972), <대부2>(1974)로 20대 때 이미 확고히 했다. <대부> 시리즈에서 극중 알 파치노의 아내로서 남편의 음울한 변신을 우울하게 지켜보던 키튼의 모습은 관객을 안타깝게 했다. 그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키튼은 올 들어 극과 극의 캐릭터를 소화하며 연기에 깊이를 더해 가는 모습이다. 상반기, 키튼은 유니섹스 패션의 말괄량이였다. 우디 앨런의 코미디영화 <애니 홀>(Annie Hall)에서 그는 그같은 중성적 매력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곧 가벼운 말괄량이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은 못 참겠다는 듯 키튼은 연말을 즈음해 대단히 해석하기 어려운 복합적 캐릭터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Looking For Mr. Goodbar)를 통해서다. 주디스 로스너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이 영화에서 키튼은 청각장애아들을 가르치는 정숙한 선생님이다. 그런데 밤만 되면 술집을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섭렵한다. 그리고 키튼의 성적 모험은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멀리 나간다. 극중 정상인으로 보기 어려운 동성애자 톰 베린저와의 격렬한 만남, 이어지는 리처드 기어와의 가학적이고도 피학적인 관계.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의 감독 리처드 브룩스는 “교사의 캐릭터에 깊숙이 내재한 어두운 측면을 키튼이 어떻게 표현해낼지 대단히 궁금했지만 이내 놀랐다”며 “키튼은 정말 센세이셔널했다”고 말했다. 중국 ‘5세대 영화인’ 출현할까 베이징영화아카데미 재개관… 첸카이거 장이모 등 입학 중국에서 ‘5세대 영화’는 가능할까. 문화혁명(1966∼76) 기간 내내 문을 닫았던 베이징영화아카데미가 1978년 다시 문을 열면서 영화인들 사이에 ‘5세대’의 출현을 점치는 낙관적 전망들이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과거 <무대의 두 자매>(Two Stage Sisters) 등이 연출로 성가를 높인 시에진 감독 등이 중국의 4세대 영화 제작인들로 꼽힌다. 그러나 1949년 혁명과 함께 경력을 시작했던 영화 제작인들을 선봉으로 한 4세대 영화 제작인들의 활동은 문화혁명으로 맥이 끊겼다. 영화 편수 자체가 많지 않았다. 1978년 들어 크게 늘고는 있지만 문화혁명 직후인 1977년의 영화 제작편수는 고작 19개에 불과했다. 영화인들은 오랜만의 문화적 해빙 속에서 이번 4년제 영화아카데미의 재등장이 대가 끊긴 중국의 영화를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1978년 수십년 만에 처음 받은 신입생 중에는 첸카이거, 장이모 등 감독 지망생들의 이름이 눈에 띈다. “텔 미 모어, 텔 미 모어…!” 미끄러지는 댄스, 댄스!! 댄싱 킹 존 크래볼타의 스텝은 계속 된다! 지난해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놀라운 춤실력으로 젊은 관객을 흥분시킨 존 트래볼타가 <그리스>(Grease)(1978년)라는 또 다른 댄스영화로 히트를 칠 조짐이다. <그리스>는 브로드웨이 흥행 뮤지컬을 토대로, 1950년대를 추억하며 만든 복고풍 뮤지컬영화. 제목 ‘Grease’는 머리에 바르는 포마드를 말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자동차 윤활유란 뜻으로, 일면 춤이 상징하는 이성간의 성적(性的) 윤활유 역할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톱스타인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이 존 트래볼타와 쌍벽을 이루는 여고생 댄싱 퀸으로 나와 흥겨운 로큰롤 스텝을 밟는다. 이 젊은이들의 ‘비치 파티’(Beach Party)영화는 영화 초반부터 <여름밤> <나를 봐, 나는 산드라 디>와 같은 빠른 댄스곡으로 관객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이 댄스열기엔 이브 아덴, 조앤 블론델, 프랭키 아발론과 같은 베테랑 스타군들도 대거 참여했다. 세기의 미녀 브룩 실즈, 뉴올리언스의 10대 창녀 변신 이미 성공한 10대 모델인 브룩 실즈는 지난해 <앨리스, 스위트 앨리스>로 갑작스레 영화계에 데뷔하더니, 올해(1978)는 루이 말 감독의 <프리티 베이비>에 출연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올해 고작 12살인 그녀가 맡은 배역은 1917년 뉴올리언스의 사창굴에 기거하는 10대 창녀. 어떤 기준을 갖다대도 위험한 이 영화에 대해 루이 말은 “난 언제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캐릭터, 주제를 드러내는 데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시도한 것뿐”이라고 일축한다. 어쨌든 루이 말은 논란거리가 된 사창굴을 브룩 실즈의 극중 엄마인 수잔 서랜던의 집이자 일터로 묘사하는, 사실적이고 무미건조한 접근법을 통해 성공적으로 선정주의를 피해갔다. 편집인 김재희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1]

<송환>이 12년간의 긴 제작 여정을 마침내 끝냈다. 3월19일 예술영화전용관 네트워크 ‘아트플러스’를 타고 일반에 공개되는 <송환>의 주인공은 비전향 장기수다. 촬영 테이프 500여개, 촬영시간 800여 시간 가운데 고작 2시간을 추려낸 <송환>은 선동과 계몽의 욕구가 앞서는 정치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스펙터클 비극이 도저히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사의 미세한 굴곡과 역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눈물을 뽑아낼 수는 있어도, 단단하고 현란한 논리가 구호와 행동을 자극할 수는 있어도, 삶의 고단한 역정이 동반하는 그 넓은 느낌까지 끌어안기란 쉽지 않다. <송환>은 섣부른 욕심이나 속단없이 그 모든 걸 하나씩 끌어내 보여준다. 배우 문소리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작업을 마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문소리는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송환>의 개봉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된다면”이란 희망으로 바쁜 일정을 쪼개 인터뷰어로 나서주었다. 그는 밤잠을 설쳐가며 홍기선 감독의 <선택>과 김동원 감독의 전작들을 구해 빠짐없이 보는 성의를 보여주었다. 문소리 | (영화 속 내레이션의) 목소리가 굉장히 부드러우시구나 느꼈어요. 김동원 | 디지털 녹음 덕분이지. 내 목소리가 침이 많이 섞여서 나온다는데 그걸 다 골라내서 깎아낸 거야. 문소리 | 제가 받아서 본 테이프는 사운드가 좀 작은 것 같더라구요. 김동원 | 그거 복사가 잘못 됐어. 새로 해야 해. 문소리 | DVD로도 제작하시나요? 김동원 | <살인의 추억> DVD를 만든 곳이 어디지? 2년 연속 우수 업체로 선정됐다던데. 그곳에서 연락와서 자기네들이 모금을 해서라도 제작할 테니까 맡겨달라고 연락이 왔더라고. DVD도 근데 다 내 일이지. 콘텐츠를 채워야 하니까. 게다가 소스가 너무 많아서 고르는 데 여간 힘든 게 아닐 것 같아. 문소리 | 인물들 중심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에피소드로 꾸려갈 것인가 구성을 정하는 것도 고민이 되실 것 같네요. 어쨌든 재밌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 인터뷰 때문에 <행당동 사람들> 챙겨봤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그 까만 팬티 입은 철거 용역 아저씨는 전에 어디서 많이 뵌 것 같기도 하고. 김동원 | 그 사람 칼 맞아서 죽었어.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철거 용역반 하다가 어디선가 술먹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문소리의 가족사, ‘역사’가 되다 잠시 <행당동 사람들>과 맞물리는 문소리의 집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부산에서 올라와 석촌호수 부근에서 어머니가 포장마차를 하면서 겪은 고생담. 88올림픽을 맞아 성황을 누리던 포장마차들에 대한 폭력적인 철거작업이 이뤄지고 그 ‘혈투’의 뒤편에서 손에 힘을 쥔 자들이 벌이던 뒷거래들. 김동원 감독은 “전국 노점상연합회가 그걸 계기로 생겼다. 그때만 해도 철거민연합회는 가능해도 노점상은 힘들 것이라고 봤는데 이를 위해 청춘을 불사른 사람이 있어 가능했다”며 ‘역사적으로’ 정리를 해줬다. 그 다음은 고생 끝의 어머니가 아파트 분양에 관심을 쏟으라는 당부와 여기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문소리와 동생의 이야기. 김 감독은 “어머니께 <행당동 사람들>을 보여드리면 좋겠네”라며 너털웃음을 짓더니 “악의는 없지만 몇평 더 넓혀가야 한다는 중산층의 생각이 부동산 투기 바람을 일으키고는 하는데,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거든다. 문소리 | 선댄스영화제는 수상 소식을 알려줘요. 미리? 김동원 | 약간 감은 잡았는데, 철저히 연막을 쳐서 전혀 몰랐어. 문소리 | ‘표현의 자유’상인데 전엔 어떤 작품들이 상을 받았나요? 김동원 | 난 들어보지도 못한 상이야. 지난해까지는 미국 다큐멘터리 안에서만 줬다고 그러더라고. 올해는 월드 다큐도 가능하니까 혹시 <송환>이 후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만 들었어. 심사위원이 셋이었는데. 다큐멘터리 심사위원하고는 달라. 비평가인 몰리 헤스켈하고 덴마크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작가하고 남아프리카 ABS라고 진보적인 방송사 국장급 되는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이 심사위원이었어. 다들 정치적 성향이 강한 것 같더라고. 다른 작품들을 스틸 보면서 대략 훑어봤더니 정치적이고 논쟁적인 작품이 없어서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큰 기대는 없었지. 문소리 | 상 이름처럼 사실 표현의 자유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고, <송환>에서도 왠지 그걸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고민한 흔적도 보이고. 더이상 밝힐 수 없고, 건드릴 수 없어 하는 뭐 그런. 김동원 | 밝히지 못하고 고민했다기보다는 절제했다고 생각하고 싶어. 모든 게 그렇지만 여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절제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그 이야길 했으면 후회했을 거야. 문소리 | 어떤 인터뷰에서 영화는 감추는 것인데 다큐멘터리는 드러내는 거다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김동원 | 아니 다큐멘터리의 경우 감추어지는 것이 많다고 했지. 문소리 | 아∼ 그런가. 보통 영화보다 다큐가 많이 드러내는 거라는 느낌을 줘서 착각했나봐요. (잠시 침묵) 배우라는 직업은 어쩌면 가장 자유로워야 하잖아요.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데 있어서. 그런데 점점 나를 감추려고 해요. 6년차인데 점점 나를 감추는 데 익숙해지고 나를 드러내는 게 두려워요. 그런 상황에서 <송환>을 봤는데 절제했다고 하셨지만 자기의 감정이나 의견이 솔직히 들어 있는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너무 대단해 보이던데요. 어떻게 저렇게 하셨을까 싶기도 하고. 김동원 | 감독의 주관적 내레이션이 있고 등장인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 떠오를 수 있지. 그래도 그보다는 훨씬 못해. 마이클 무어처럼 감독에게는 약간 쇼맨쉽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문소리 | 맘껏 조롱하고, 맘껏 놀리고. 김동원 | 그걸 보면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할 때가 있어. 그러면서도 그 다음에 ‘저건 내 것이 아니다’싶어. 난 죽었다 깨도 저건 못하는 것 아닌가. 내 나름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과 수준은 따로 있다는 거지. 그건 배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실생활이든 연기든 어느만큼 나를 표현하는 게 가장 나다운가 그런 질문을 하게 돼. 사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러지만 결국은 내 나이쯤 되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4]

차이로서의 거리, 바라볼 공간으로서의 거리 조창손 선생과 김 감독은 본인들 말처럼 ‘아버지와 아들’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렇지만 송환 직전까지 김 감독은 내심에 두고 있었던 인터뷰를 마무리짓지 못했다. 식량난 문제, 북의 권력 시스템 등에 대한 견해를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끝내 하지 못했다. 첫 만남 이후 4년이 지났음에도 선생들이 민감한 사안에 대한 촬영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차원이긴 하지만 김 감독과 장기수 선생의 괴리감은 사라질 듯하면서 이따금 불거져나오곤 했다. 초기에 “김일성 장군…”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는 선생들의 모습에 정서적 이질감을 느꼈던 것처럼 송환 결정이 난 뒤 술자리에서 선생들이 벌써 평양에 가 있는 듯 “강성대국”이라고 외치며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에도 그랬다. “거리는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가까이 본다고 잘 보는 것도 아니야. 코를 맞대고 있으면 오히려 상대방이 안 보여. 너무 가까우면 찍을 수가 없는거야.” 문소리 | 선생들을 결국 버티게 한 힘은 뭘까요? 김동원 | 아까 기자 시사회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어떤 분들한테는 정치적 신념이 움직일 수 없는 실체야. 그 사람들은 내가 만약 전향공작에 저항하는 거였다, 라고만 표현했다는 걸 알면 노하실 거야. 난 그것뿐만 아니라, 라고 이야기했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하실 수 있지. 다른 몇몇 선생들한테는 내가 이야기한 게 훨씬 더 현실적일 수 있는 것 같아. 김석형 선생처럼 이론으로 무장이 된 사람은 노할 테고 조창손 선생처럼 무장 안 됐지만 기본적 양심으로 버티신 분들은 내 말에 큰 찍자는 안 놓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조석형 선생 정도 차원밖에 이해를 못하는 거지. 김석형 선생은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 내가 사상적 수준이 그만큼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조 선생 그 정도 수준 되는 것 같으니까. 문소리 | 안학섭 선생은 어떤 분이세요? 김동원 | 우리 조연출한테는 막 불만을 이야기해. 그런데 나한테는 직접적으로 그런 이야기 안 하시는 분이지. (웃음) 서운한 게 있어도 오랫동안 지내서 직접 말씀 안 하시는 것 아닌가 싶어. 김영식 선생과 동등하게 취급받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껄끄럽게 생각하시지. 전향한 사람과 전향하지 않은 사람하고 같이 대우한다는 걸 기분 나빠하실 때도 있는 것 같고. 감옥 안의 생활은 우리가 모르는 게 많아. 감옥 안에서 어떻게 생활했냐 하는 게 그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난 단식을 주도했고 10일을 지켰는데 똑같은 비전향 장기수지만 저 친구는 밥을 먹었다, 그러면…. 또 간수한테 인사를 했냐, 안 했냐 이런 것도 작용하지. 대꾸 한마디가 투쟁인 거야. 김영식 선생 같은 경우는 간수가 하라고 하면 하지 뭐, 그랬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분 입장에선 그렇다고 양심을 파는 것은 아니라고 봤을 수도 있고. 문소리 | 관객이 <송환>을 보고 비전향 장기수들을 이렇게 바라봐줬으면 하는 것이 있나요? 김동원 | 아주 심하게 생각하면 영웅처럼 여기고, 정말 너무나 순결한 사람들로 보는 것은 원치 않지. <송환> 또한 30, 40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특별한 사람들을 12년 동안 따라다니며 찍은 특별한 감독의 특별한 다큐멘터리라고 여겨지면 안 될 것 같아. 스타가 없는데 스타를 만들려고 할 필요는 없지. 문소리 | <바람난 가족>도 벗은 것으로 이슈 만들려고 그러고. <바람난 가족>은 보셨나요? 김동원 | 난 선댄스에서 <바람난 가족>을 처음 봤어. 임상수 감독에게는 좀 편견 같은 게 있었거든. 영화도 생긴 것처럼 날아다닌다는 느낌이었고. <처녀들의 저녁식사>도 지나치게 너무 가벼운 영화 아닌가 싶더라고. 그런데 <바람난 가족>은 맥이 약하긴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 같아서 좋았거든. 근데 김일성 장군 노래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김인문씨가 꼭 넣자고 했다던데. 문소리 |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 그거 말이죠. 김동원 | <송환>에서도 선생들이 그 노래 부르잖아. 어떻게 그 노래를 알았을까 싶더라고. 문소리 | 김인문 선생이 어렸을 때부터 놀면서 부르던 노래였대요. 선명하게 기억하시긴 했는데 나중에 이거 니가 부르면 책임질 거냐면서 감독님한테 따지셨죠. (웃음) 김동원 | 이제 한국영화에도 사회가 있고, 사람이 있고, 정치적인 올가미 같은 것들이 담겨지는 것 같아. 균형이 어떻든 그걸 잡고 있으면 작품성에 플러스 알파가 있지 않을까.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평가받는 지점들이 그런 것일 텐데. 오락성 영화가 사회성까지 담보하려는 경우, 그게 부자연스럽지만 않다면 그렇게 된다고 봐. <바람난 가족>도 만만찮은 사회성이 있는 영화라고 보여지고. 문소리 | 두명의 김동원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자유주의자 김동원과 투사 김동원. 어디에 더 가까우세요? 김동원 | 어떤 평론가가 <송환> 보고서는 나한테 김일성주의 운운하면서 이념적 정체성이 뭐냐고 묻던데. (웃음) 그래서 작품 안에서 다 밝히지 않았냐, 자유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냐, 난 사회주의자가 되려고 하더라도 내 그릇으로는 못 될 것 같다. 그래도 사회주의자들을 존경한다 그렇게 이야기했지. 그들이 될 수 없지만 그 근처에 있는 사람으로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이해해달라고 그랬어. 그게 사실이고. 나한테 70년대 딴따라 하던 내 기질이나 히피의 기질이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크거든. 자연스러움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봐. 문소리 | 혹시 흔들릴 때가 없으세요? 김동원 | 사실 휘청휘청 많이 해. 하루에도 열두번씩 휘청휘청해. 나한테 다행히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그들이 나를 곧추세워주는 거지. 그들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가 나를 버티게 하는 것 같아. 또 영향을 끼치고. 할 일이 많은데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거든. 그럴 때가 있으면 도망을 가긴 하는데. 그런데도 다시 돌아와서 계속 이 길을 가야겠다 싶게 하는 계기들을 그들이 끊임없이 안겨준다고.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소설 중에 <침묵>이라는 게 있어. 일종의 종교소설인데. 일본의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때 예수 초상화를 밟고 가면 살려주고 아니면 죽이고 그런 상황들이 벌어진다고. 주인공 이름은 생각 안 나는데, 그 사람은 만날 밟고 지나가. 그러다가 안 밟고 지나간 사람들이 사형당할 때 그 옆에 와서 꺼이꺼이 운다고. 그 사람도 결국 순교자가 된다는 게 마지막 결말인데. 그 주인공이 나 같다는 생각을 해. 관계들 때문에 결코 도망갈 수 없는 사람. 비전향 장기수, 상계동 주민들, 행당동 주민들, 그들이 나를 붙잡고 있는 거야.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5]

송환, 장기수 스스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 김 감독은 송환 뒤 북한에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선생들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 작품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평양행 티켓을 손에 쥔 적까지 있으나 끝내 이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고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사됐다. 찍어온 화면과 자료 사진을 통해 선생들의 지금을 바라보며 김 감독은 이런 내레이션을 한다. “그들 앞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혁명과 투쟁의 길이 놓여 있다. 어쩌면 남한에서보다 더 힘들게 그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긴장감을 주던 투쟁의 대상이 눈앞에 없고 이젠 스스로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성대국’을 읊조리던 선생들이 감독의 이같은 말에 얼마나 동의할까? “다는 아니겠지만 깊이 생각한 몇몇 분들은 하실 거다. 선생들이 하실 것 다했으니 이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다. (선전용 사진을) 딱 찍으라고 포즈를 취하고 있잖아. 행복하고 당당해뵈는 모습 같고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저쪽 뒤에 보면 무표정한 선생들도 계시고. 그 안에 많은 표정이 있다고. 내레이션이 과도한 주문인 것 같긴 하지만 그분들이 가셨으니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미국의 위협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지.” ‘송환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송환>의 많은 ‘주인공’들 가운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팬클럽 조성 움직임까지 만들어낸 이가 김영식 선생이다. 그는 강제로 전향당해 출소한 뒤 사기까지 당해가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해 보이는” 성품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 강제 전향은 그에게 조 선생 같은 동료들과 북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지금 그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전향무효선언을 하고 2차 송환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 감독은 “<송환>의 조연출이었던 공은주 감독이 이분들을 촬영하고 있다. 2차 송환에 관한 작품일지 아니면 휴먼드라마가 될지 아직 모르겠으나 제작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송환> 대표 배우(?) 4인을 소개합니다 김석형(1914∼) “태극기 위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북한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출소 뒤 첫 대면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의견을 피력해 봉천동 주민들을 다소 당황하게 만듦. 김동원 감독은 ‘학식이 풍부하고 말솜씨가 좋았지만 지나치게 계몽적이었다’고 말함. 조선공산당 박천군 덕안면당 제1대 면당 책임비서 등을 맡은 간부급 당원으로, 1961년 6월 ‘남한의 지식인들을 포섭하고자’ 내려왔다 체포됨. 1991년 12월24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30년6개월 수감. 만주 신경신무학교에 다닐 적에 일본이 세운 만주 길림군관학교에 다니던 ‘키 작고 광대뼈 불거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 이름)를 만난 적 있음. 그로부터 30년 뒤, 결국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피오줌을 쌀 정도로’ 전기고문을 당함. 조창손(1929∼) <송환>의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하다. 감독이 별 거리낌없이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송환된 뒤 인편에 ‘(감독을) 아들처럼 여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감독은 지지부진한 편집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황해도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1962년 진태윤 등과 함께 연락선을 타고 경북 울진에 닿았으나 예상치 못한 총격을 받고서 인근 산으로 도주했다. 굶주림 끝에 “부탁을 하게 되면 동정해서 밥을 줄 줄 알고” 마을에 내려왔다가 사람들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29년8개월 동안 수감됐다. “동료의 빨래까지도 맡아줄 정도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무던한 성격으로, “새벽 4시면 동네를 쓰는 바람에” 봉천동 주민들의 일을 본의 아니게 뺏기도. 김영식(1934~) 조창손씨와 함께 남파된 연락선의 무전수. ‘떡봉’이라는 완장을 찬 깡패들의 몽둥이 찜질을 견뎌냈지만 정작 물고문을 견디지 못해 전향했다. 끔찍했던 옥살이를 기억하면서 “난 이 지구상의 어머니들에게 정말 호소하고 싶은 건 아들을 낳으려거든 나이팅게일 같은 그런 (착한) 사람을 낳았음 좋겠다”고 말하는 그를 김동원 감독은 “이보다 더 순박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평한다. 출소 뒤에 두번씩이나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살림일지라도 여전히 남에게 나눠주는 재미가 세상에서 가장 큰 재미라고 여기는 그는 강제전향 조치에 대한 무효 선언 이후 2차 송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영화를 본 이들이 팬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 <송환>에 이어 현재 그를 중심으로 한 촬영이 공은주 감독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안학섭(1930~) “취로사업 나가서 다른 사람은 꾀부려도 나는 해요. 내가 더한 만큼 다른 사람이 편해지니까.” 송환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려 동료들의 애정 어린 질시와 함께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던 안씨는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로 감독의 애를 여러 번 태웠다. <송환> 시사회 때 안씨를 소개했는데, “영화 속의 안학섭은 내가 아니라”며 혼자서 일어서기를 거부한 것이 일례. 조연출에게는 <송환>에 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도 감독이 확인하려 들면 “내가 어제 약주가 과해 실수로 그런 것 같다”며 말을 바꾸는 것도 그렇다. 부인에게 육포를 직접 만들어줄 정도로 자상한 남편인 그는 화날 때는 감독에게 속을 슬쩍 내보이기도 한다고. 푸른영상과 오랫동안 관계를 돈독히 해온 그는 <송환>의 이후 이야기가 촬영된다면 김영식씨와 함께 치열하게 주연 경쟁을 벌일 인물이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일지 [2]

7월4일_ “역시… 고사부터 지낼걸 그랬지?” 첫 촬영날이다.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 올 확률이 오전에는 40%, 오후에는 60%란다. 이게 무슨 뜻일까. 최기섭 제작부장의 해석에 따르면 비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단 말이란다. 음… 그렇군. “비가 온다면 얼마나 온다는 얘기지?” 최 부장이 얼른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한다. “그게… 아주 많이 올 수도 있고 전혀 안 올 수도 있다는데요.” “음… 그렇군.” 마치 부조리극의 대사 같다. 어쨌건 촬영은 시작되었다. 찬경(양택조)의 구멍가게에서 찬경 처(이주실)와 철수 엄마(홍정혜)가 썰렁한 수다를 떠는 장면이다. 첫 테이크에 NG가 난다. 이주실 선생의 사투리 억양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호호호 겸연쩍은 웃음을 날리더니 얼른 감춰둔 노트를 꺼내본다. 가만보니 낱낱이 억양과 강세를 표시해놓은 연습대본이다. 아하, 문제는 거기 있었다. 감각적으로 체화해야 할 걸 주입식으로 암기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긴장하면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억양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완벽한 사투리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있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방해받는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선생님, 사투리 그거 너무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보세요. 오늘 첫날이니까 연습하듯이, 필름 팍팍 써가면서 찍어보죠 뭐. 잘하시잖아요, 헤헤헤….” 저쪽 구석에서 지켜보던 오기민 대표가 실실 웃는다. 오래지 않아 이 선생의 연기도 점점 편해지고, 촬영은 제법 속도가 붙는다. 와! 이수인, 이거 첫날부터 너무 잘하고 있는 거 아냐? 스스로 뿌듯해하면서 한껏 교만한 포즈로 담배 한 모금을 쪼옥 빤다. 그 순간, 후두두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진다. 사방이 온통 검뿌옇다. 장비에 비닐을 씌우고 조명기 전원을 뽑고 소품을 옮기고 한바탕 난리가 난다. 아, 이게 아닌데…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망연자실, 내리는 비만 쳐다본다. 어느새 옆에 와 선 오 대표에게 넌지시 한마디 한다. “역시… 고사부터 지낼걸 그랬지?” “… 그러게….” 8월5일_ “양택조 선생님, 그냥 밟으세요!” 촬영 시작 뒤 최고로 화창한 날이다. 오 마이 선샤인, 렛 더 선 샤인! 찬경이 오토바이 무면허 운전을 하다 교통경찰한테 붙잡히는 장면. 한창 휴가철인데다 모처럼 맑은 날씨. 아름다운 해변이 즐비한 남해는 온통 외지에서 들어온 차들로 북새통이다. 경찰의 협조 약속을 얻어놓긴 했지만 왠지 수월할 것 같지 않다. 일찌감치 도착한 양 선생은 운전연습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연습을 많이 했다고 큰소리를 치시지만 왠지 불안해 보인다. 평소에 넉살 좋고 여유롭기만 한 양 선생, 진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태연한 척해보지만 속으로는 엄청 겁먹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예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기로 한 경찰 오토바이가 도착하지 않고 있다. 연락해본즉, 오는 도중에 오토바이가 고장났단다. 찍어야 할 분량은 만만치 않고, 양 선생은 오늘 찍고 올라가면 한동안 스케줄이 나오지 않는다. 버럭 조바심이 난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수리를 마친 오토바이가 도착한다. 다행히 경찰 역을 맡은 친구는 오토바이를 탄 지 며칠이 안 됐는데도 금방 능숙하게 기계를 다룬다. 고마워서 안아주고 싶다. 동시녹음 팀의 애마인 낡은 에스페로의 옆 문짝을 뜯어서 카메라를 장착한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된다. 옆에서는 카메라를 실은 차가 바짝 붙어 달리고, 뒤쪽에서는 경찰 오토바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격해오는 상황,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차 몇대가 나타난다. 제대로 통제가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차에 화들짝 놀란 양 선생이 비틀비틀 오토바이를 멈춘다. 또다시 NG. 오랜만에 나타난 태양은 왜 그리도 뜨거운지, 반나절도 안 돼 그 지겹던 비가 그리워진다. 언제 준비했는지 얼음물에 담근 녹색 수건이 일제히 지급된다. 머리에 얼음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챙모자를 쓴 스탭들의 모습이 꼭 모로코 독립 전사 같다. 8월9일_ 주현 vs 박영규, 제2라운드! 촬영이 끝나고 저녁 겸 소주를 한잔 마신다. 송재호 장로님은 술을 멀리 하시고 양택조 선생은 간이 안 좋아 술을 끊었다. 술자리의 헤게모니는 자연히 주 선생과 박 선배가 장악한다. 목소리 큰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는다. 나는 때로 모른 체하거나 양다리 걸치는 박쥐 노릇을 한다. 중달, 중범 두 형제 각각의 캐릭터와 둘의 관계에 대해 논쟁이 시작된다. 주 선생은 자기가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며, 조연인 박영규는 너무 튀는 연기를 함으로써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희석시키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 박 선배의 주장은, 이 영화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며 각자가 최대한 자기 역할을 돋보이기 위해 모든 재주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요약하면 ‘너 임마, 너무 튀지 마!’ vs ‘형, 나 너무 견제하지 마!’의 싸움이다. 좀 유치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건 넘치는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배우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어린애 같은 욕심이 있다. 그게 그들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어쨌건 이런 논쟁조차도 고맙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는 얍삽하게, 하지만 정당하게도 이렇게 말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다. “두분 다 원하는 대로, 보여주고 싶은 거 다 펼쳐 보여주세요. 단, 조절은 제가 합지요. 헤헤… 원샷!” 박영규 선배, 얼른 술잔을 든다. “그래그래, 원샷!” 그리곤 한입에 소주를 털어넣는 주 선생한테 또 한마디 한다. “형, 근데 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배우가 말이야….” 8월14일_ “8초만 버텨주면 되는데!” 야간 촬영이다. 선보러 나갔다가 선은 안 보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중범(박영규)이, 형 중달(주현)한테 맞장뜨다가 피터지게 얻어맞는 장면이다. 비 뿌리는 장비(강우기)를 설치하고, 몇 차례 강우 테스트를 해본다. 간단한 리허설이 뒤따른다. 분위기와 감정, 대략의 연기 구역과 동선만 설명하고 액션의 디테일은 연기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우리 연기자들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 감독이 시시콜콜 동작을 지시하고 챙기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감각을 믿는 것이다. 나도 그게 좋다. 다분히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서 맞닥뜨려지는 생생하고 힘있는 감정의 충돌, 그게 근사한 거다. 드디어 슛. 촤아아 내리 퍼붓는 빗발이 짱이다. 순아(희경)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중범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다가오자 마루에 앉았던 중달이 벌떡 내달려 중범의 뺨을 주먹으로 퍽 갈긴다. 중범이 그 자리에서 바로 고꾸라진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못 본 사람은 모르겠지만 주현 선생의 주먹은 무지하게 크다. 팔뚝은 꼭 참나무 등걸같이 굵고 단단하다. 그 팔뚝, 그 주먹으로 제대로 갈겼으니 박영규 선배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첫 리딩 때부터 계속 티격거려온 두 사람이 아니던가. 누가 봐도 주 선생의 주먹에는 감정이 섞여 있다. 작정하고 팬 셈이다. 대충 때리는 폼만 잡겠거니 방심했던 박 선배로서는 통한의 일격을 당한 셈이다. 저러다 두 사람이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닐까? 그러나 두 사람은 역시 프로다. 박 선배는 그 충격과 당혹감을 곧바로 캐릭터의 감정으로 만들어버린다. 주 선생 역시 팽팽한 리액션으로 맞받아친다. 빗속에서도 두 사람의 연기는 불꽃을 튕긴다. 모두들 입을 헤벌린 채 두 사람한테 완전히 빠져든다. 됐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때다. 일순 빗방울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비가 뚝 그친다.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우기를 올려다본다. 한참 연기에 몰입해 있던 연기자들은 그러고도 몇초가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한다. 물이 바닥난 것이다. 8초, 딱 8초만 더 버텨주면 되는데. 테스트에 너무 많은 물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럼 다시 채웠어야지. 분통이 터졌지만 싸늘한 침묵으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로 한다. 사람 좋게 생긴 특효팀장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리곤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더니 총알 같이 물탱크쪽으로 달려간다. 특효팀원 누군가가 허발나게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상처받은’ 표정을 유지한다. 그리곤 허탈해 하는 배우들에게 가서 가장 연약한 표정으로, 최고로 미안해 하는 미소를 지어본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온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가면 되지 뭐, 신경 쓰지 마.” 다시 물을 채우고 두 번째 테이크를 찍는다. 이번엔 주 선생이 달려와 팔을 쳐들자마자 박 선배가 먼저 바닥에 쓰러진다. 학습의 효과다. 아까 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면의 에너지가 떨어진다. 어떻해야 하나… 산등성이 너머로 까맣던 하늘이 파르스름해지기 시작한다. 한여름 밤은 너무 짧다. 너무.

<오세암> 안시 페스티벌 경쟁부문 진출

성백엽 감독의 애니메이션 <오세암>(제작 마고21)이 세계 최고 권위의 애니메이션 축제인 안시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메인 경쟁부문인 장편경쟁부문(Feature Films Competition)에 진출했다. 15일 페스티벌 조직위원회가 홈페이지(www.annecy.org)를 통해 발표한 초청작 리스트에 따르면 <오세암>은 <헤어 하이>(Hair Highㆍ빌 플림턴), (다니엘 로비쇼드)등 다른 4편과 함께 장편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이 영화제의 메인경쟁부문에 한국 작품이 초청된 것은 지난 2002년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이후 두번째로 <마리이야기>는 그해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다. 프랑스 안시에서 열리는 안시페스티벌은 자그레브(크로아티아), 오타와(캐나다), 히로시마(일본)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으며 영향력 면에서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로 불리기도 한다. 올해로 28회째를 맞는 이 페스티벌은 격년제로 운영돼오다 2000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그동안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비롯해 프레드릭 백(<나무를 심는 사나이>), 빌 플림턴(<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뮤턴트 에일리언) 등의 스타 감독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오세암>은 다섯 살 꼬마 '길손이'가 앞 못보는 누나 '감이', 삽살개 '바람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동화작가 고 정채봉씨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했다. 지난 해 4월 국내에서 개봉돼 2D 애니메이션의 따뜻함과 독특한 색감이 인상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상영관 확보의 어려움으로 국내에서는 10만명 내외의 흥행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다. 한편,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15일 홈페이지에 초청작 리스트를 발표하며 "한국은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핵심 국가"라며 올해 영화제에서 한국애니메이션 회고전을 열 계획임을 밝혔다.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6월7-12일 열린다(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