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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꼬마들이 쓴 촬영기 [1]

배우 인생 ‘첫 번째 아홉수’ 이야기 “아저씨가 감독이에요?” <아홉살 인생>의 촬영장에는 이렇게 태도 불량(?)한 배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10명 안팎의 아이들이 이끌어가는 영화 속에서 연기 경험이 있는 배우는 단 두 사람. 나머지는 카메라 앞에는 사진 찍을 때말고는 서본 적 없던 초짜 배우들이었다. 연기의 테크닉이나 영화의 메커니즘을 이들이 알 턱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엉뚱한 상상력과 팔팔한 에너지, 또래간의 우정과 경쟁심, 로맨스가 싹트고 꽃피며, “인생을 알기에 충분한 나이” 아홉살을 넘긴 십대 초반의 꼬맹이들은 영화 속에서 몇 계절을 살았고 또 그만큼 자라났다. 5인의 아역배우가 수줍게 내민 촬영일기에서 ‘영화 찍기’에 대한 이들의 고민과 다짐을 엿본다. 10월14일 화요일 우림_  물에 빠져서 오늘은 충북 제천에 가서 물에 빠지는 신을 찍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시쯤 영화사에 도착했고 6시30분에 출발했다. 3시간 동안 달리고 달려서 9시30분에 도착했다. 아침을 늦게 먹어서 속이 안 좋았던데다가 1km 구보까지 해서 속이 울렁거리고 쓰렸다. 30분 정도 쉬다가 물에 들어갔는데 날씨도 추운데다가 수심이 5m라고 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물도 많이 먹었고 숨을 못 쉬어서 죽을 맛이었다. 다신 생각도 하기 싫은 대악몽이었다. 10월17일 월요일 여민_  옛날 옛날에는 생태공원 안에서 동네 싸움을 하는 날이다. 학원에서 다른 아이들도 많이 왔다. 새총으로 싸우는데 신이 났다. 추운 날 반팔 반바지 입고… 죽는 줄 알았다. 옛날에는 옷도 너무 초라하고 노는 것도 참 특이했다. 분장도 참 웃겼다. 기종_  연기의 첫걸음 오늘 서울에 있는 길동 자연 생태공원에서 ‘전투놀이’를 하였다. “와∼” 하고 오는데 내가 더 놀랐다. 철모를 뺏으려고 하기에 철모를 잡았는데 긁혀버렸다. 피가 약간 났지만 참았다. 오늘의 반성: 이제부터는 형들이나 누나들에게 대들지도 않고 까불지도 않겠다. 그런 날이 오길. 언젠가는. 검은 제비_  추억의 연기 냄비 철모 뺏기 놀이를 했는데, 정말 추억에 남는 연기가 될 것이다. 제일 먼저 함성을 지르면서 그냥 나오는 장면인데 이렇게 사소한 행동도 조금만 실수를 해도 NG가 난다. 그러니까 영화 찍는 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제일 재미있는 장면은 철모를 벗기고 우리가 이기는 장면이다. 먼저 와∼ 함성을 지르고 아랫동네의 철모를 벗기고 우리가 이겨서 와∼ 함성을 지르는 장면. 2학년 때 하던 전쟁놀이를 3년 만에 해보니 너무 재밌었고 정말 이거는 평생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연기가 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애들이 부러워하는 면이 있는데, 전혀 그럴 필요없다. 하고 싶으면 오디션을 보면 될 뿐 하나도 어려울 이유가 없다. 걸리기가 힘들다는 것뿐이지! 10월18일 화요일 금복_  유명한 배우 선생님들께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영화 <아홉살 인생> 오금복 역을 맡게 된 나아현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영화를 찍게 되었어요. 그런데 집중이 잘 안 되더라구요. 하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연기를 집중해서 하시더라구요. 집에서 연습할 때는 잘되던데…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집중을 잘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선생님들께서도 저에게 말해주세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요. 선생님들, 앞으로 열심히 해서 잘하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11월6일 목요일 검은 제비_  동시-카메라 예전엔/ 카메라가/ 두려웠어요 하지만/ 하다 보니/ 하던 대로만/ 하면 되니 이젠/ 카메라 앞에서도/ 두렵지/ 않아요. 앞으론/ 당당하고/ 두렵지 않게/ 설 거예요. 11월13일 목요일 검은 제비_  촬영 오늘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같이 찍는 장면이었는데, 간만에 연기를 볼 수 있어 재밌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예전에도 연기를 봤는데, 그때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았다. 부부 싸움을 하는데, 내가 못칼을 들고 나무에 찍으며 욕을 하는 장면. 이 장면은 못칼에 내 감정을 실어 한번에 찍어 날려보내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우스웠던 점이 우리 아버지가 지붕에 올라갈 때 원숭이가 뛰어오르는 것 같았다. 또 엄마는 아버지를 약올리며 올라와 봐라 놀리고, 난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인데 눈에 안약을 넣고 했다. 하지만 절대로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제비는 그런 약한 역할이 아니기 때문이다. :: 5인의 아역배우들 김석(백여민) “이 나이에도 지키고 싶은 여자가 있다”는 어른스러운 주인공 백여민 역의 김석은 승마 선수로 더 유명하다. <킬리만자로> 등에 출연한 적이 있지만 주인공을 맡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70년대 유행한 바가지 스타일로의 변신은 감수했지만, 오래 공들여 기른 구레나룻을 깎는 데는 망설였다는 후문. 물에 빠지고 얻어맞는 등 육체적으로 힘든 연기를 하면서도, 다른 배우와 스탭들을 먼저 배려하는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고. 박백리(검은 제비) 동네 쌈장 검은제비 역의 박백리는 유난히 많은 액션과 욕설 연기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윤인호 감독으로부터 경상도식 리듬과 억양을 살린 욕설 지도를 받아야 했다고. 평소엔 사색적인 문학 소년이다. 이세영(장우림) 아역 출연진 중에 가장 연기 경험이 많은 베테랑. <대장금>의 ‘어린 금영’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 비밀이 많은 새침데기 소녀 우림 역을 맡은 뒤에 ‘서울에서 전학온 아이’의 하얀 얼굴 ‘설정’을 위해 미백에 좋다는 녹차를 휴대하는 등 자기 관리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김명재(신기종) 여민이의 단짝 친구 기종이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김명재가 연기했다. 6학년 형 누나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한 장난꾸러기 막내 김명제는 틈만 나면 “영화가 대박나서, 울 아빠가 하는 곱창집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나아현(오금복) 여민이가 우림이와 친하게 지내자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하는 금복 역의 나아현은 역할에 몰입해 리얼한 연기를 펼친 나머지 여민 역의 김석을 실제로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낳기도 했다.

<아홉살 인생> 꼬마들이 쓴 촬영기 [2]

2003년 11월23일 일요일 여민_ 연속 촬영 몇 주째 오늘은 싸우는 신이다. 보조 출연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이 왔다. 노인회관이 좁아서 할아버지들에게 미안하고 정신이 없었다. 계속 연속 촬영 몇 주째. 이제는 몸이 아프고 감기가 온다. 오늘은 다행히 일찍 끝났다. 피곤하다. 나보다 물통 메는 아저씨가 더 힘들어 보인다. 미안하다. 2003년 11월27일 목요일 여민_ 홍보 비디오 아침 8시 집합. 날씨가 흐려서 홍보 비디오 찍는 데 힘들었다. 원래는 오늘부터 촬영인데 비가 와서 30일부터 찍는다. 홍보팀 누나 형들이 잘해주었다. 나는 눈에 카리스마가 없어서 홍보 비디오 찍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종, 금복, 제비, 우림, 나, 다섯명 다 고생하고 잘 찍었다. ' 2003년 11월30일 일요일 우림_  두 번째 촬영 오늘은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촬영을 하는 날이다. 점심을 먹고 한참 기다리다가 촬영을 했다. 랩을 칭칭 감고 물에 들어갔다. 빠지는 것을 내가 하지 않고 대역을 썼다. 어떤 언니가 대신 했는데, 나와 같은 옷을 입었다. 내가 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예상외로 촬영은 쉽게 끝났다. 날씨도 따뜻하고 물도 많이 차갑지 않았는데도 촬영 도중에 입이 덜덜덜덜 떨려서 꾹 참고 있었다. 많이 추웠지만 규민이 아버지 어머니께서 차에 태워주셔서 추위도 빨리 가시고 너무 감사했다. 촬영이 어렵지 않아서 안심했고 너무 기쁘다. 금복_  우림, 여민, 물에 빠지다 출동! 우리반 아이들이 모였다. 긴급 사태였다. 우림이가 물에 빠져서 여민이가 구하는 장면이었다. 그래서 우리반 아이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었다. 나중에 하상사 아저씨와 담임 선생님, 그리고 나, 기종이, 칠순이가 출동하는 장면이었다. 아, 오늘 더웠는데, 우림이 여민이는 좋겠다. 2003년 12월1일 월요일 여민_ 신기한 소품, 의상 화순에서 촬영했다. 몸이 피곤한데도 6시에 일어나서 촬영지를 갔는데 윤희 누나 옷이 없어서 12시까지 지루하게 기다렸다. 오늘은 똥 푸는 것 세어주는 신이다. 너무 웃기고 지금은 볼 수도 없는 똥지게였다. 하여간 영화팀들은 소품이나 의상을 어떻게 그렇게 잘 구하는지 신기하다. 2003년 12월8일 월요일 검은 제비_  취소 원래 오늘이 촬영날인데 토끼장 찍고 다른 것 이것저것 하다보니 촬영이 취소됐다. 그래서 조감독님에게 물어보니까 내일도 못 찍고 금요일날 촬영이 변경됐다고 했다. 아이고야, 정말 짜증이 났지만 꾸욱 눌러 참고 한숨을 내쉬었다. 엑스트라까지 피곤하게 왔다갔다 시키고 우리 부산 사람들도 순천까지 3시간 반 걸려서 지루하게 왔는데, 이렇게 걸린 게 약간 싫기도 하지만 영화 찍는 게 내 적성에 맞으니까 그리고 재밌으니까 한다. 어쩔 땐 하늘만큼 땅만큼 좋다. 후회감은 전혀 없다. 2003년 12월12일 금요일 우림_  거센 추위 # 오늘은 딱 2신밖에 못 찍었다. 항상 스케줄표의 계획대로 못하지만 거센 추위와 자꾸만 해를 가리는 구름 때문에 촬영이 빨리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석이(여민이)는 비 맞는 신이 있었는데, 살수차까지 출동! 나도 딱 1년 전에 촬영하느라 공원에서 쫄딱 젖은 적이 있는데… 오늘은 바람이 너무 세서 추웠고, 감기 더 걸릴까봐 걱정이다. # 2003년 12월13일 토요일 검은 제비_  고릴라 vs 검은 제비 # 촬영이 있어서 오늘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무슨 촬영이 있냐면 엄청난 전투신. 고릴라와 검은 제비와의 전투신이다. 난 지난번에 여민이와 싸우는 것을 촬영한 적이 있어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와 자신감이 있는 것은 잠시뿐. 그때보다 더 어려운 액션이었다. 첫 장면은 나무 둘레를 돌며 서로 노려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첫 번째 싸우는 장면은 내가 먼저 발로 차면 고릴라가 내 발을 잡고 날 잡으려고 달려올 때 내가 도망가고 한번 더 고릴라가 달려올 때 난 밑으로 수그리며 때리다가 고릴라에게 업혀서도 때린다. 고릴라가 날 내팽개치고 달려올 때 흙을 뿌리고, 머리로 받고, 또 깨물어버린다. 그러면 고릴라가 날 발로 차고 깔아버린다. 잠깐, 내가 제일 하기 싫은 게 고릴리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그리고 가짜 코피를 묻히는 건 괜찮은데 너무 오래 있어 찝찝했다. 게다가 너무 오래 땅바닥에 누워 있어 추워서 손과 발에 감각이 오지 않았다. 이제부턴 웬만한 추위는 다 참아낼 수 있고, 어려운 촬영은 다 끝이 났다. 학교 가면, 내가 이것을 촬영했다고 자랑해야지! # :: 캐스팅에서 촬영까지 꽃피는 과정을 지켜보다 어린이들이 이끌어가는 영화를 맡으면서, 윤인호 감독은 캐스팅 원칙을 하나 세웠다. 연기 경험이 너무 많은 노련한 아역 스타, 연예인을 지망하는 연기학원생은 ‘제치자’는 것이다. ‘트레이닝’을 받은 아이들의 연기란 것이 너무 획일적이라고 느껴온 그는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시골 아이들 중에서 역할 이미지와 어울리고 끼가 있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연극반과 합창반, 길거리와 해수욕장을 훑어 찾아낸 아이들을 오디션장으로 불러내 캐스팅을 마무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4개월. 모두 1500명의 아이들이 거쳐갔다. 최종 합격자 중에는 부산 아이들이 가장 많았고, 대부분 지방 출신이었는데, “지방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더 풍부하다”는 감독의 ‘경험’에 입각한 결론이었다. 주인공 김석과 이세영을 제외한 나머지 아역 전원은 연기 경험이 전무한 초짜들로, 감독은 앨범 등을 입수해 각자의 성장 배경과 성격 등에 기반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아이와 놀면서 관찰하기, 역할과 상황 이해시키기. 물론 상당한 이해심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꽃이 피는 과정을 지켜본” 기쁨과 보람도 만만치 않았다고.

<인어공주> 필리핀 바닷속 촬영 동행기 [1]

박흥식 감독, 전도연, 박해일 주연의 <인어공주>가 필리핀 세부에서 마지막 촬영을 했다. 딸이 우연한 계기로 젊은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목격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국내 촬영을 마쳤고 지난 3월6일부터 11일까지 필리핀에서 수중촬영 장면을 찍었다. 제작진과 동행해 취재한 <인어공주> 수중촬영 현장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자. “짐 이리 줘. 밑에 놓을게.” 지난 3월6일 필리핀 세부행 비행기, 뒷자리에 앉아 있는 전도연씨가 필름통을 받아든다. 앞뒤 좌석 간격이 좁기로 악명 높은 필리핀항공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있는 그는 마치 프로듀서 같다. 비즈니스 좌석이 아닌 걸 불평하기는커녕 스탭들이 책임질 필름통까지 나서서 챙긴다. 전도연 같은 스타가 스탭과 똑같은 대접을 감수하다니, 내심 놀래 뒤돌아봤지만 그의 행동이 가식처럼 보이진 않는다. 웬만한 배우면 지방촬영 때 묵을 호텔의 수준까지 미리 출연계약서에 못박고 들어가는 요즘 관행을 무시하는 전도연씨의 이런 태도가 스탭에게 어떤 신뢰를 주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나중에 “<인어공주> 촬영일정이 너무 늘어져서 전도연씨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다는 소문이 있던데”라고 떠보자 동행한 <인어공주> 투자사 유니코리아의 투자사업부 팀장 박덕배씨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너무 잘해줘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답했다. 태풍으로 페허된 제주바다를 대신해 “우리 영화, 아주 헝그리해요.” 옆자리에 앉은 박흥식 감독은 대뜸 이렇게 말한다. 평균 제작비가 30억원을 웃도는 요즘 전도연, 박해일 같은 스타급 배우를 쓰고도 제작예산이 25억원인 영화였다는 게 ‘헝그리’의 요지다. 아마 소문난 필리핀의 휴양지 세부까지 촬영을 가면서 ‘헝그리’라는 표현은 안 어울린다 여기겠지만 사정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당초 <인어공주>는 지난해 10월에서 12월까지 세달간 촬영을 마칠 계획이었다. 11회 서울 촬영을 마치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인 제주도 아래 작은 섬 우도에서 나머지 촬영을 진행했는데 섬의 기후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태풍 매미는 결정적이었다. 태풍이 치는 동안 영화를 찍은 건 아니었지만 매미가 휩쓸고간 뒤 우도의 풍광은 전과 달랐다. 무너진 돌담은 다시 쌓으면 되는 것이지만 바다 물속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작진은 우도에서 3일간 수중촬영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태풍으로 혼탁해진 탓에 물속 장면의 선명도가 확연히 떨어져 도저히 영화에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해양생태 전문가들은 1년이 지나야 다시 맑아질 것이라는 속편한 예언을 했다. 섬의 날씨변화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해가 쨍쨍해서 촬영 준비를 서두르고나면 갑자기 비가 내리고 비가 내려 철수하려고 들면 해가 드는 식이었다. 원래 일정대로 찍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배우들은 눈보라가 치는 바다에도 뛰어들어야 했다. 한번은 우도로 간 제작진으로부터 촬영이 연기됐다는 소식만 들려오자 제작사 나우필름 대표 이준동씨가 직접 섬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는 풍랑이 거세지는 바람에 3일간 섬을 떠나지 못했다. 아무튼 기후의 악조건 때문에 65회 예정된 촬영은 80회를 넘어섰고 제작비는 2억원이 초과됐다. 가능하다면 한겨울의 바다에도 뛰어들 용의가 있는 배우와 스탭이 있었지만 수중촬영만은 불가능했기에 마침내 필리핀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다. 심상치 않은 출발, 고두심 병원 긴급 우송 <인어공주> 제작진이 촬영장소로 선택한 세부는 필리핀에서도 스쿠버다이빙의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국내에선 신혼여행객이 자주 찾는 곳으로 세부와 다리로 연결된 막탄섬에서 수중촬영이 진행됐다. 이곳에서 촬영 첫날인 3월7일 오전, 전도연, 박해일 두 배우는 먼저 <씨네21> 표지촬영부터 했다. 근처 리조트를 섭외해 표지사진을 찍는 동안, 제작진은 촬영장소를 탐색하고 극중 어머니로 나오는 고두심씨의 촬영분부터 찍기로 했다. <인어공주>에서 고두심씨는 젊은 시절 해녀(전도연)였다가 지금은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관리사로 일하는 연순으로 등장한다. 지금 방영 중인 <꽃보다 아름다워>의 팬이라는 박흥식 감독은 고두심씨가 목욕탕에서 동네 아줌마와 싸우는 장면을 예로 들면서 <인어공주>의 고두심씨의 연기를 눈여겨보라고 당부한다. “싸우는 장면인데 너무 잘해서 컷을 못 불렀어요. 그런데 컷을 못 부르니까 (고두심씨가) 계속 대사를 만들어가면서 하는 거예요. 나중에 왜 컷을 안 불렀냐고 묻기에 이 장면은 고두심 선배가 됐다고 느낄 때 컷을 하세요, 그랬죠.” 이날 촬영분은 나이든 연순(고두심)이 물속에서 헤엄치며 다가오면 젊은 연순(전도연)으로 바뀌는 장면. 오후 2시가 넘어 촬영을 진행 중인 바다로 취재진과 전도연, 박해일 두 배우가 배를 타고 나갔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의 무전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수영을 하던 고두심씨가 원인 모를 구토를 하는 상황이라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무전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촬영팀이 모여 있는 배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담요로 몸을 감싼 고두심씨의 얼굴에서 불안과 공포를 읽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두심씨는 즉시 배를 옮겨타고 인근 병원으로 갔다. 제작진은 모두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두심씨를 뭍으로 올려보냈다. 다행히 고두심씨의 건강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제작일정은 처음부터 꼬이고 말았다. 감독은 고두심씨 없이 장면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진퇴양난에 빠졌다. 고두심씨에게 다시 물에 들어가자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장면을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두심씨는 <꽃보다 아름다워> 촬영 때문에 다음날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이곳에 왔던 것이다. 결국 박흥식 감독은 고두심씨 촬영분을 서울에 가서 다시 찍기로 하고 일단 첫날은 적응훈련에 투자하자고 결정했다. 고두심씨가 몸에 이상을 일으킨 것도 수심 5m가 넘는 낯선 바다에 대한 두려움이 결정적이었던 걸로 보였다. 오후 3시부터 전도연씨와 박해일씨는 해녀와 우체부 복장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안전요원인 스킨스쿠버 3명과 수중촬영 기사 박상훈씨가 배우들의 물속 움직임을 보살폈고 일조조건, 탁도 등 여러 가지 수중조건을 점검했다. 박상훈씨는 수중촬영의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수중촬영은 노출과 포커스를 맞추는 게 특히 어렵다. 기본적으로 물이 맑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데다 물속에서 촬영을 하면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것도 어렵다. 한컷 찍는 데 1시간 이상 걸리는 건 기본이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하루 10컷 넘게 찍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므로 수중촬영기사는 필름, 스킨스쿠버, 바다에 대해 완벽히 알고 있어야 한다.”

<대장금>이 보여준 여성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 [1]

 MBC 드라마 <대장금>이 23일 마침내 종영했다. 시청률과 평판 측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이 드라마는 몇 가지 익숙한 코드와 함께 적잖은 새로움과 중요한 생각거리들을 제시해주었다. 우리는 그 모든 유의미한 지점들을 열거하는 대신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측면에 간결하게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여성성의 본질과 여성적 관계의 문제다. <대장금>은 그동안 여성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재현되었던 사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그리고 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달성된 유려하고 대중적인 버전의 여성주의 드라마로 기록될 것이다. <대장금>의 인기 비결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탄탄한 구성, 만화적 상상력, 빛나는 조연, 매력적인 악인, 색다른 형식 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도 줄을 선다. 그러나 <대장금>이 <대망>이나 <다모> 등 여타의 새로운 형태의 사극으로 불렸던 작품들에 비해 <대장금>만의 미덕으로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은 의외로 쉬워진다. 사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여성 작가가 집필하고, 한 여성의 성공을 색다른 방식으로 조망하고 있는, 악역부터 현인까지 다채로운 여성캐릭터의 경합장으로 불릴 만한 이 드라마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여성드라마의 어떤 가능성이다. “전 지금 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놓게 됩니다. 나으리께서는 희망이 없어야 편하실지 몰라도 저는 안 되겠습니다. 풀 한 포기 약초 한 포기 자라는 것에라도 희망을 걸어야겠습니다.” -장금의 대사 중 비단 풀 한 포기뿐이겠는가. 제대로 된 물 한잔을 준비하는 것, 임금의 점심을 제시간에 준비하는 것, 최고의 디저트를 내놓는 것, 용기를 내어 시침을 하는 것, 의녀 시험에서 합격하는 것 등 온갖 크고 작은 미션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장금은 마치 시야를 한정시켜버린 경주마처럼 매 순간 집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목표를 삶의 의미로 삼는다. 이 모든 단기 목표들은 하나의 궁극적 목표로 귀결된다. 궁에 들어가서 최고상궁이 되는 것, 그리하여 어머니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 그리고 드라마의 종영을 한달도 채 안 남겨둔 지금에 와서야 장금의 단 하나의 목표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목표의 일환인, 어머니를 해한 세력에 대한 복수가 예사롭지 않다. 장금은 단기 목표를 통해 성장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장기적인 일생의 목표에 가까워진다. 가깝게는 최 상궁 일가로부터 멀리는 조정의 보수세력까지 어지럽게 얽혀 있어 실마리를 찾기 힘든 복수가 ‘그냥 열심히’ 실력을 쌓다보니 점점 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금의 복수극은 성공기로 변모한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각종 위기에 맞서다보니 어느새 많은 덕목을 갖추게 되고, 성공의 와중에 복수는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식이다. 그 안에서 악인들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자멸해간다. 악인들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진심으로 비는 용서만을 요구하는 장금의 방식은, 보통의 드라마에서 보이는 집요하고 유치한 여성들의 복수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남성들의 복수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은 모두, 장금이 진짜 실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짜 실력’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현대극 속의 캔디 캐릭터 여자주인공도 갖지 못한 보기 드문 설정이다. “옥사에서 내내 괜히 그랬다, 후회했습니다. 서 나인께서 잘못되실까, 후회했습니다.… 하나 서 나인은 해내십니다. 매번 해내십니다. 그게 저를 힘들게 합니다.” -민정호의 대사 중 <대장금> 속에서 장금과 민정호의 대사들은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고받는 남녀 대사의 역할바꾸기 버전이다. 초반 민정호의 어정쩡한 위치와 캐릭터의 주변성은 적잖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거칠 것 없는 장금의 복수극을 완벽하게 외조하는 민정호의 역할이 이제는 제법 눈에 익었고 그 역할바꾸기는 한편으로 또 다른 재미가 되었다. 나름대로 대하사극의 남자주인공이었던 민정호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목표로서의 복수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어느새 장인의 경지에 오른 장금에게 있어 이성에 대한 사랑은 우선 순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년 동안 애틋한 마음을 품었던 민정호와 장금의 사이에는 몇번의 포옹만이 있었을 뿐이고 닭살스런 사랑의 대화 역시 드라마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까지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제주도에서 의녀수련을 통해 다시 궁으로 돌아가겠다는 장금에게, 복수의 성공을 기원하면서도 차마 함께 남아 오붓한 여생을 보내자는 말은 꺼내지 못하는 민정호의 멀뚱한 미소가 답답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일생을 건 애틋한 사랑이 아무쪼록 드라마의 마지막에는 결실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볼 뿐이다. 이몽룡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와주기만을 기다리는 춘향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딱 그만큼. “나는 너처럼 완벽한 재능을 갖지도 못했고, 완벽한 열심을 갖지도 못했고, 완벽한 연정을 받지도 못했고….” -금영의 대사 중 숙명적으로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그 숙명을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은 평범한 악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장금의 영원한 라이벌, 금영의 대사들은 마치 살리에르의 절규처럼 일반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대로 이어진 최고상궁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 악인을 자처하는 금영과 최 상궁은 <대장금>을 더욱 풍부한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금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정호에게 음식을 올리면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요망스런 것이라 안 된다 할수록 더욱 불덩이가 되더이다.… 그렇게 저는 오랜 번민을 끝내려 합니다. 마음 한번 주시지 않으니 미움이 커서 끝내려 합니다.” 이처럼 절절한 금영의 사후적 고백은, 어떤 면에서 장금보다도 사랑에 목을 매는 이 악역을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고, 장금에 대한 그의 지울 수 없는 증오에 더욱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금영 역시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녀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자신의 커리어를 완성하고, 순수함을 버려가면서까지 얻었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풍부한 배경과 이유를 지닌 금영에 비해 최판술이나 오겸호 대감, 내의정 등은 일면 평범해 보인다. 최판술이나 오겸호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관료에 불과하고, 내의정은 모자라는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와 권위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별볼일 없는 사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아온 사극에서 중요시했던, 조정의 권력관계를 둘러싼 암투에 집중하는 이들 남성 악역들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재미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집안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는 금영과 몰락한 집안을 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열이 의녀는 그에 비해 얼마나 절실하고 현실적인가. 끝내 몰락해가는 그들의 최후가 못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평범한 우리 모두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소녀 장금의 성공기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것은 결국 비범하지 못하여 슬픈 그들 여성 악역들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들이다.

<대장금>이 보여준 여성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 [3]

<대장금>에서 전통 신화 속의 치료자 원형, 바리데기를 발견하다 크게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당대가 지난 뒤에도 호평받는 영화나 연극, TV드라마들을 잘 살펴보면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하여 인간 심성 깊은 곳에 이미 내재된 보편적 주제와 감성을 다룬 서사구조를 지닌 경우가 많다. 그들 중 다수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갈등과 해소 도식으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개인사적 경험의 더 아랫부분 심층에는 이른바 집단무의식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것은 대개 신화나 전설 또는 민담의 형태로 그 원형(原型)을 드러낸다. 그리고 역으로 이 시대의 신화, 즉 큰 대중적 영향을 끼치는 문화현상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 심층에 존재하는 어떠한 주제의 투영으로서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장금이는 솜씨있는 궁중요리사로 성장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참된 치료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전에도 훌륭한 의사, 즉 치료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종종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대장금>이 다시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가정해보자면, 장금은 우리의 전통 신화 속의 치료자 원형(healer archetype)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데기’의 현신(現身)으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질병과 치유의 경험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의술이 과학의 영역에 포함되기 이전의 원시사회부터, 치료자는 환자를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해냄과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 이후의 내세로 인도해주기도 하는 샤먼의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그러기 위해 치료자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료자 자신이 ‘상처받은 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상처입은 치료자’(wounded healer)라는 조건은 치료자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죽음 내지 그에 준하는 경험을 극복하고 회생하여 돌아온 이후에야 그로부터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민중을 치료하고 인도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치료자 원형(healer archetype)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의사단체나 대형 병원의 문장(紋章)으로 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감긴 심벌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이다. 두번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은 이후에야 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중재하는 치료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이제 <대장금>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바리공주, 일명 바리데기 설화는 우리 민족의 전통 무의(巫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해줄 것을 비는 지노귀굿, 씻김굿, 오구굿, 망묵이굿 등에서 불리는 서사무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상처받은 치료자’로서의 장금이 바리데기 설화는 여타 다른 문명에서의 영웅신화 속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많은 공통점, 예컨대 어린 시절에 버림받고 홀로 길을 떠나 여러 시험을 통과하면서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진다는 유사한 성인의례의 서사구조를 공유한다. 사실 이 과정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각자의 심리적 삶에서 무의식적 성장과정을 겪으며 참된 자기로 통합되어가는 도정을 전형적으로 상징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대의 신화라고도 볼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그에게 공감하게 되고, 스스로 위로받으면서 의미있는 내적 성장, 즉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장금>의 인기 역시 그녀가 바리데기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은 치료자’로서 성장해가는 삶을 통해 우리의 집단무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리데기 설화가 다른 서구 신화와 차이점이 있고 그것이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투영된다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특징적인 점은, 대다수의 신화 속 영웅이 남성인 것과 달리 우리의 바리데기와 대장금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바리데기가 버림받는 계기이자 장금이 조선사회에서 겪게 되는 남존여비 전통은 현대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도 중요한 억압으로 작용하는 집단적 가치체계이다. 드라마 속 궁궐 여인들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행복을 저당잡힌 채 오로지 왕, 즉 남성을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이념은, 국민 대다수가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호주제 폐지 하나 성취하지 못하는 현대의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듯 남성성을 우위에 두는 가치체계는 비단 여성들에게 현실적 장애로 작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시대의 남녀 모두에게 스스로의 내부에 지니고 있는 아니마를 의식화하는 것을 억압하여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자기실현과 균형잡힌 사회가치의 성장을 방해한다. 장금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완숙한 치료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딸이라 버림받았지만 스스로 중요한 소명을 띠고 여정을 떠나는 바리데기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모험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가치로부터 형성된 페르소나를 극복하고 참된 자기로 통합되어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성장 과제를 대리하여 수행해주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 속 궁궐 여성들의 삶과 지극정성의 음식문화 속에 반영된 여성성을 경험하며, 우리는 가부장적 힘의 논리에 세뇌된 스스로로부터 조금 더 성숙할 수 있다. 요컨대 드라마에 몰입하고 감동받는 부지불식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이전보다 성숙한 아니마가 발휘되는, 말하자면 좀더 덜 완고하고 더 유연한 사람으로 조금씩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성적 영웅성-나눔과 베풂 ‘버림’받는다는 경험은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상징하며, 또한 그 안에는 ‘구함’ 내지 ‘찾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심리적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버림’ 즉 ‘상실’의 경험을 겪은 이후 다음 단계의 자아를 찾아가면서 성장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대개 그 ‘구함’의 일차적 대상은 내 안에 있는 나, 즉 부모의 모습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프로이트를 위시한 대다수의 서구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대상이 아버지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머니, 즉 모성(母性)에의 동일시는 상대적으로 간과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편파성의 일부는 서구의 영웅신화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바리데기가 버림받는 경험을 극복하고 부모를 구하러 가는 것처럼, 일찍이 고아가 된 장금은 참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부모가 일하고 만난 곳, 궁궐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찾고자 한 자신의 일부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이루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극 스토리 배후의 큰 축을 이루는 이 ‘여성성’이라는 주제에서 서구와는 대비되는 우리 신화 속 치료자 원형의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길가메시처럼 대개의 남자 영웅들이 악을 무찌르고 없애는 과정을 밟으면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성의 영웅성은 나누어주고 베푸는 것으로써 그 위력을 발휘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의 도정에서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장금 역시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많은 위기 상황에서 여러 차례 경쟁을 치르기는 하지만 그 경쟁은 항상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질병을 치료해주는, 말하자면 돌보아줌의 틀 안에서의 경쟁이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정성을 기울이고 상대를 감동시킴으로써 승자가 된다. 그녀는 백성을 해치는 왜구의 우두머리를 치료하여 물러가게 하고, 질투에 마비된 대왕대비에게 모성을 일깨워줌으로써 시련을 극복한다.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 안에 자리잡은 치료자의 모습은 단순히 질병과 악을 도려내고 제거하는 싸움의 수준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모습이며, 그것을 대장금이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장금이 상대를 돌보고 감복시켜가는 치료 행위에 감동받으면서, 경쟁과 대결구도가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가 야기한 무의식 속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아픔을 덜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장금>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복수극이다. 이 복수극이 ‘새로운’ 이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장금이 용서의 가능성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인기극들 속에서 상실과 그에 따른 분노, 질투와 죄책감의 주제가 반복되는 것에 공감하면서 온당한 복수 내지는 권선징악의 절차가 이어지는 것에 위안받아왔다. 이런 방식의 마무리는 좀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벌어진 일을 벌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이른바 ‘애도’의 과정을 통한 정신내적 치유 효과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구와는 달리 우리 문화에는 상실을 인정하는 애도의 경험을 넘어선, 이른바 ‘용서’라는 위력적인 치유기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전형을 바리데기의 삶이 보여주고 있다. 애도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타협인 것과 달리 용서는 대상을 포용하는 화해의 과정이다. 인기있는 대중 드라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달래주는 중요한 집단적 방어기제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그 드라마는 우리에게 퇴행의 강박적 반복을 통하여 얕은 수준의 일상 속 불안을 감소시켜주는 저급한 방어기제로 기능할 때도 있고, 드물게 사회집단 모두에 집단적 카타르시스 내지는 살풀이를 제공함으로써 성숙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 장금은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고 궁궐에서 내쫓겨 귀양을 가게 되는 두 차례의 ‘버림받음’을 극복하며 스스로 참다워지는 과정을 밟는다. 바리데기가 강보에 싸인 채 바다에 버려지고 또 나중에 약을 구하기 위해 지옥을 통과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가 두번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의신이 되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무의식 속 삶과 죽음의 주제를, 우리는 이 드라마를 보며 재경험하고 있다. 그 과정을 겪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권세를 포기하고 민중 곁으로 가기를 원한 바리데기처럼 장금이 역시 그러한 선택을 해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케이블·위성TV의 힘 [3] - 리얼리티 쇼 (2)

국내 리얼리티 쇼는 아직 수입 시대 주로 지상파에서 리얼리티 쇼를 주관하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케이블·위성채널들이 나서서 리얼리티 쇼를 수입, 방영하고 있는 국내의 경우 리얼리티 쇼의 양상 자체는 다소 소극적이다. 대부분이 미국에서 이미 방영되었던 시리즈를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직접 제작할 여건이 안 되는 것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방송위원회의 심의나 여론이 두려운 까닭도 있을 것이다. 참가자들을 오지에 떨어뜨려놓고 매회 게임을 통해 한명씩 탈락시켜 최후의 한명에게만 100만달러를 주는 미국의 <서바이버> 시리즈를 국내에 최초로 들여와 현재 시리즈 8탄에 이른 Q채널의 경우 유사한 포맷인 <컴뱃 미션>, 스파이를 가려내는 두뇌게임 <더 몰>을 방영했고, 리얼리티 쇼에 사립탐정의 요소를 가미한 <치터스>를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치터스>는 대부분의 가정문제가 ‘배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포착한 현직 변호사가 배신을 리얼리티 쇼와 결합해 탄생시킨, 르포 형식의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배우자나 애인의 ‘배신’을 의심하는 의뢰인이 케이스를 의뢰하면 취재진은 2주 동안 상대방을 밀착 취재하여 의혹의 증거를 찍는다. 증거가 확보되면 의뢰인에게 제시해 반응을 살핀 뒤 배신자를 직접 대면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바람을 피우는 대상이 대부분 가까운 친지이며 대부분의 바람둥이들이 발뺌을 한다는 것이다. 간통죄가 없는 미국에서나 가능할 <치터스>를 보다보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치터스>는 커플이 그뒤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려주는데 종종 진행자가 지나치게 윤리적인 잣대를 사용해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캐치온의 경우 <도전 슈퍼모델> <미스터 퍼스널리티> <더 패밀리> <러브 vs 머니> 등의 다양한 미국 프로그램들을 수입해 방영했다. 그중 <러브 vs 머니>는 1명의 남자를 두고 15명의 여자가 경쟁을 벌이는 이색 짝짓기 프로그램인데, 기존의 리얼리티 쇼와 달리 남자가 최종 승자를 직접 결정하고 선택된 여자가 100만달러와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트릭을 숨기고 있다. 남자를 선택하면 100만달러와 남자를 동시에 얻게 되지만 100만달러를 선택하면 돈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시리즈는 돈을 선택한 현실적인 여자 승자로 인해 2편이 제작됐는데, 2편에서는 돈을 선택했던 여자가 다시 15명의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역전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결국 여자가 선택한 남자가 돈 대신 여자를 선택하고 사랑과 돈을 얻게 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행복한 결말이다. 그외에 동아TV는 <베첼러> <러브 서바이벌> <도전! 신데렐라> 등의 시리즈를, 지난해 개국한 XTM은 <빅 브러더> <도전 미션 임파서블>, <오마이 갓> 등의 ‘강도 높은’ 시리즈들을 방영했다. 여기에 가세하여 지난 2월 개국한 온스타일 역시 백만장자 상속녀들이 등장하는 <심플 라이프>와 이색 집짓기 경쟁 <도전! 최고의 집>을 방영하고 있는 중이며, 이 밖에 다른 케이블들도 경쟁적으로 미국의 철지난 리얼리티 쇼나 동일 유형의 프로그램을 유치하려 한다. 리얼리티 쇼의 심리적 기반은 관음증 외국의 리얼리티 쇼들이 저작권만을 사서 자국에서 제작하고 수익을 유통하는 ‘생산적인’ 구조인 반면, 한국 케이블 방송사들은 시청률 외에는 이익이 없는데다 경쟁으로 인해 수입가격까지 상승시키고 있다. 외국 방송사들의 리얼리티 쇼가 철저하게 계산되어 시청자들과 벌이는 한바탕의 쇼이자 비즈니스라면 한국의 리얼리티 쇼는 먼 나라에서 벌어졌던 쇼의 재방송을 그저 한가롭게 지켜보며 돈만 내는 소비행위에 국한되는 셈이다. 리얼리티 쇼의 심리적 기반은 ‘관음증’에 있다. 실험실의 모르모트처럼 인간을 가두고 실험하며 해부하는 집단적 가학성을 유발한다. 리얼리티 쇼에 집착하는 주요 시청자들이 10∼20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은 곱씹어볼 현실이다.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리얼리티 쇼가 전세계 TV를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리얼리티 쇼를 단순한 유행이나 일시적인 문화현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리얼리티 쇼로 인해 만들어진 ‘우리’라는 집단이 인류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가공의 ‘감성의 공화국’이며, 리얼리티 쇼가 자본주의 태생의 규격품이라는 게 <카이에 뒤 시네마>의 지적이다. ::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케이블에서 괴력 발휘하는 다큐 프로그램 위성 및 케이블 방송이 자리잡으며 특별한 마니아층을 형성한 장르가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싶다. 놀라운 점은 영화나 스포츠, 음악방송에 비해 전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다큐채널들은 시청률에서 늘 일정 수위를 고수한다는 점이다. 게다가 다른 장르의 해외 프로그램들이 문화적 간극으로 국내 시청자들에게 곧잘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는 데 반해 다큐는 정보와 문화의 다양성으로 ‘무마’되는 경향이 짙다. 공중파 전유물인 방송 대상마저도 빼앗는 괴력을 과시한 Q채널은 국내의 간판 다큐채널이다. 디스커버리 채널을 벤치마킹한 Q채널은 <커버스토리> <도시탐험 아시아> <영화보다 재미있는 영화이야기> 등 자체 프로와 함께 다양한 국내 프로를 50% 가까이 방송하며 해외다큐채널과 차별화된 토종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그 밖에 리얼리티 다큐인 <서바이버> 시리즈를 독점 공급해 상당수의 젊은 시청자들을 다큐채널로 유도하는 성과까지 거두고 있다. Q채널의 대표 프로그램은 60분짜리 6㎜다큐 <논픽션 커버스토리60>이다. <뷰파인더>가 시사와 휴먼에 아이템을 한정했던 데 반해 <커버스토리>는 마치 월간지의 기획기사처럼 소재를 한정하지 않고 전방위로 확대해가고 있다. 기형아를 임신한 엄마의 다른 두 가지의 선택을 다룬 <사랑, 10개월의 선택>, BBC다큐를 보는 듯 사람과 사물이 교묘히 엮어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신발에 대한 명상>, 최근 사회보호법 개정 폐지운동과 맞물려 오랜 기간 감호된 뒤 출소한 이들의 사회 부적응을 파헤친 <청송감호소 출소 그 후> 등은 지상파 방송다큐와의 질적 비교평가가 이미 철지난 논의임을 입증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은 오락과 정보를 표방하는 점에서 다소 트렌디한 경향을 지닌다. 종합선물세트같이 자연, 과학, 역사, 문화 등 어느 분야에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며 모든 다큐 시청자층을 긁어모으는 저인망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은 애초부터 시청자들을 세계화시켜 그 채널만의 표준화된 프로그램- 대부분이 필름으로 제작된 60분 형식- 을 소개한다. 비교하자면 디스커버리는 한시적인 베스트셀러 프로를 지향하는 데 반해 내셔널지오그래픽은 항구적인 스테디셀러를 양산하고 있다. 예컨대 과학다큐의 선두격인 디스커버리 사이언스에서는 <키스의 신비>에서 키스라는 야릇한 소재에 대한 서술, 열거적인 접근으로 솔깃한 재미를 보이는 반면 내셔널지오그래피 <터부> 시리즈에서는 마약, 악령, 성, 문신에 이르는 다소 광범위하고 인류학적인 관심사에 렌즈를 돌려 느긋하고 깊게 접근하고 있다. 다만, 두 채널은 직접 송출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탓에 광고나 자막, 해설 부분이 국내 시청자들에게 거리감을 준다. 이에 반해 히스토리 채널은 해외채널과는 달리 편성권을 자체적으로 행사한다. 자체제작물을 소개하기도 하고 국내 시청자들의 성향을 고려하여 선택적으로 여과해서 편성해 짧은 기간 안에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 채널에서 자체 제작한 <다시 읽는 역사, 호외>는 활자매체와 영상의 훌륭한 조합물로 평가받는다. 묵은 신문철에서 곰팡이와 함께 삭아가는 한국의 현대사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나아가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도 소홀하지 않다. 3월 방송 예정인 <북으로 간 사람들> 시리즈는 정치적인 입장차에서 월북한 이들과 통일운동을 위해 저항적으로 분단을 넘고자 했던 이들, 그리고 실미도 사건처럼 간첩활동으로 북으로 간 이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1편 <경계를 넘다>에서는 월북과 함께 이 땅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은밀히 사라져간 부산대 교수 윤노빈에 대한 추적이 방송 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다른 채널에 비해 다큐채널들은 프로그램의 질적인 면에서 상당히 다양하고 안정되어 있다. 하지만 개국 당시 Q채널에서 몇년간 시도하다 채산성 문제로 접었던 독립다큐나 해외 수상작들을 소개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은 좀 아쉽다. 비제도권 다큐들은 시청자가 소수이긴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마이너 방송에서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케이블·위성TV의 힘 [5] - 외화 시리즈· 성인채널

<섹스 & 시티> <프렌즈> 등 두터운 마니아층 형성한 외화시리즈들 <브이> <맥가이버> <케빈은 12살> 등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드라마 못지않게 시청자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외화시리즈들을 기억하는지. 이후 지상파에서 외화시리즈 편성비중을 급격히 줄이면서 이에 대한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이 바로 케이블채널이었다. 지상파에서 방영될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작품이 쏟아졌고 시청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마음껏 골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양대산맥을 꼽으라면 단연 <프렌즈>와 <섹스 & 시티>일 것이다.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여러 부가적인 문화현상까지 낳은 두 작품은 국내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몇년째 그 인기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프렌즈>가 시즌 10, <섹스 & 시티>가 시즌 6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음 시즌을 목빠지게 기다렸던 팬들의 아쉬움이 클 수밖에. 그만큼 어떻게 결말을 맞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크다. 케이블 인기 외화시리즈 1호, <프렌즈> <프렌즈>는 지난 3월1일부터 동아TV를 통해 시즌 10이 방영되고 있다. 시즌 10은 지난 시즌들이 24편 정도였던 것에 비해 다소 적은 18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국 〈NBC>에서 현재 14편까지 방영된 상태다. 1994년 미국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10년 동안 줄곧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듯 국내에서도 1996년 동아TV에서 방영을 시작한 뒤 주인공들의 쿨한 삶의 태도에 매료된 마니아가 양산되었다. 미국에서 방영된 다음날 바로 동영상이 올라오는 기동성이 장점인 한 포털 사이트의 <프렌즈> 동호회 회원수는 8만명이 넘을 정도. 여섯 친구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연애사가 줄거리의 중심축이었던 <프렌즈>는 시즌 9에서 레이첼과 조이의 키스장면이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시청자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딸 엠마를 낳아 함께 기르는 레이첼과 로스는 정말 이대로 끝나는 것인지, 10년 동안 좋은 친구였던 레이첼과 조이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인지. 시즌 10에서 레이첼과 조이는 연인관계로 발전하지만 이들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세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정리될 것인지는 <프렌즈>가 막을 내리는 그 순간까지 관심을 집중시킬 듯하다. 아이를 가지는 데 실패하고 입양을 결정한 모니카, 챈들러 부부가 예쁜 아기를 얻을 수 있을지, 가장 엉뚱한 캐릭터인 피비가 마이크(폴 러드)와의 결혼을 앞두고 또 어떤 기발한 행동을 보여줄지도 시즌 10의 관심사 중 하나다. 20대 중반에 만나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했던 여섯 친구들을 보내는 마음은 아쉽기 그지없지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유쾌한 이들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흐뭇한 웃음을 안겨줄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기획한 <테이큰> 방영 예정 ‘성공한’ 네명의 여성 뉴요커가 풀어놓는 솔직한 성담론으로 화제가 되었던 <섹스 & 시티>도 오는 5월 캐치온을 통해 방영되는 시즌 6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HBO>를 통해 지난 2월 이미 막을 내린 <섹스 & 시티>의 마지막 회를 본 시청자는 1천만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성 칼럼니스트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를 중심으로 바람둥이 홍보이사 사만다(킴 캐트럴), 보수적인 성향의 큐레이터 샬롯(크리스틴 데이비스), 냉철한 성격의 변호사 미란다(신시아 닉슨)의 자유분방한 연애사가 중심이지만, 주인공들의 화려한 패션 스타일로 더욱 관심을 끌기도 했다. 때문에 시즌 6에서 캐릭터마다 또 어떤 개성적인 의상을 선보일지도 팬들의 관심거리다. 발레스타이자 영화배우인 미하일 바르시니코프와 〈X파일>의 멀더 요원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도 시즌 6의 특징이다. 시즌 6에서 러시아 아티스트와 사랑에 빠지는 캐리와 유방암에 걸린 사만다, 결혼을 결심한 샬롯과 미란다의 삶과 사랑은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정리될 것인가. 오는 5월이면 그 모든 궁금증을 풀 수 있다. <프렌즈> <섹스 & 시티> 두 작품 외에도 국내 드라마와는 차별화된 색다른 재미로 눈길을 끄는 외화시리즈의 폭은 넓다. 무비플러스에서 방영하는 〈X파일>은 모든 시즌이 종영된 뒤 재방영이 이어지고 있는 데도 여전히 인기가 높으며 일부 시즌만이 소개되었던 의학드라마〈ER>은 시청자의 요청으로 시네포에버에서 시즌 3, 스카이HD에서 시즌 6에서 9까지가 방영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진들의 활약을 그린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과 장의사 가족이 겪는 에피소드를 담은 블랙코미디 <식스 핏 언더>도 캐치온에서 방영을 시작한 이후 해가 거듭될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3월20일부터는 또 하나의 기대작이 선을 보인다. 홈CGV에서 방영할 10부작 SF <테이큰>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총제작·기획을 맡았다는 것만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가 〈E.T.> <미지와의 조우> 등에서 보여주었던 우주와 외계인에 대한 관심, 인간과 외계인의 만남, 상상을 현실화시키는 SF적 기술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테이큰>이기 때문. 크로포드가, 키스가, 클락가의 세 가문을 중심으로 1947년부터 현재까지 50여년의 세월 동안 4대에 걸쳐 펼쳐지는 외계인의 인간유괴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시청자를 원대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할 듯. 성인채널 낮에는 언니들, 밤에는 오빠들이 즐기는 핑크채널 특정 타깃 공략이냐, 질이냐. 성인채널이 2004년 내놓은 전략은 이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위성방송의 성인전문 방송들은 지난해 주요 ‘인기 품목’이었던 국산 에로물과 성인 애니메이션을 주요 편성 전략으로 삼으면서 일본 AV의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미드나잇채널 편성팀의 어일경 PD는 “자체 시청률 조사 결과 국산 에로물이 서양물보다 4∼5배나 높게 나왔다”면서 “지난해 10월 시작한 애니메이션도 3배 정도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미드나잇채널은 3월부터 홍콩과 타이, 중국 등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아시아 콘텐츠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일단은 호의적(아시아 콘텐츠도 서양물에 비해 3배 정도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어일경 PD는 “일본 문화가 좀더 개방됐을 때를 대비해 일본 성인물을 확보하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면서 “올 하반기 정도에는 일본과 합작한 작품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드나잇채널의 장점은 가상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 무협에로, 원시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등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다는 점이다. 이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올 여름을 겨냥한 국내 공포에로물. “짧은 에피소드로 이뤄진 도시괴담 형식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에 성적인 코드를 살린 작품이 될 것”이라는 설명. 플레이보이사의 프로그램을 독점공급하고 있는 스파이스TV도 지난해 국산 에로물의 상대적 인기 구가에 따라 국내물의 편성비율을 30%까지 높였다. 하지만 스파이스TV의 장민석 국장은 이에 그리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그는 “16㎜ 국산 에로물을 많이 틀면 30∼40대 남성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나 나이든 분들은 ‘신음소리’ 등에서 많이 거북해 한다”고 말했다. 스파이스TV의 노영선 부사장도 “종합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 플레이보이사와 손잡고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개발에 힘쓸 것”이라고 올해 사업계획을 밝혔다. 그는 성인채널 시청률 조사에서 눈에 띄는 점이 낮에는 스파이스TV가, 밤에는 미드나잇채널이 강세를 보인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낮 시간대에는 스파이스TV의 하우투 프로그램과 드라마 시리즈를 즐기는 여성이, 밤 시간대에는 미드나잇채널의 16㎜ 국산 에로물을 즐기는 남성이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과라고 해석했다. 2004년 스파이스TV는 HD로 제작된 고화질의 프로그램 공급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새 영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 <폴리와 함께>

"옛날에 하마가 한 마리 있었는데 자기가 하마인 게 그렇게 싫더래. 그래서 몸에 줄을 그었지. 얼룩말처럼 보이려고. 그런데 그렇다고 얼룩말이 되겠어? 결국 그냥 하마처럼 살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그때부터 행복해졌다더군." '소심남' 루벤(벤 스틸러)은 신혼여행에서 신부가 프랑스인 스킨스쿠버 강사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줄 그은 하마' 이야기는 이 프랑스 남자가 위로랍시고 해준 얘기. 해줄 수 있는 모든 저주를 퍼붓고 일상으로 돌아온 루벤. 주위 사람들의 지나친 위로는 부담스럽기만 하고 결혼 선물로 가득 찬 집은 쓸쓸할 뿐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채 충격이 가시지 않은 그에게 초등학교인지 중학교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동창생 폴리(제니퍼 애니스톤)가 나타난다. 보험회사의 득실(得失) 분석사로 루벤은 철저한 안전우선주의자다. 길을 건널 때 사망 가능성을 계산하고 호프집에서 땅콩을 집어먹을 때는 머릿 속에는 평균 세균수가 떠오르는 극단적인 '웰빙' 우선주의자. 그런 그에게 폴리는 너무 위험한 여자다. 집안은 항상 난장판인 데다 직업도 잔혹한 그림을 그려대는 동화 작가로 전망이 없다. 무엇보다도 다른 남자와 야한 춤을 즐기는 그녀를 보는 것은 한번 눈 앞에서 신부를 놓친 경험이 있는 루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괴로운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둘 사이의 사랑이 깊어갈 무렵, 신혼여행지에 눌러앉았던 전 부인이 나타난다. 루벤과 재결합을 원한다는 것. 게다가 결혼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폴리는 점점 루벤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자 루벤의 마음은 두 여자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내달 2일 개봉하는 영화 <폴리와 함께>(원제 Along Came Polly)는 철저하게 정리된 삶을 사는 소심한 남자와 히피스타일의 자유분방한 여자 사이의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매리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로 익숙한 벤 스틸러와 시트콤 <프랜즈>의 제니퍼 애니스톤이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데다 <미트 페어런츠>의 각본을 썼던 존 햄버그 감독이 시나리오와 함께 연출을 맡았으니 일단 기분좋은 코미디 한 편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듯. 일단 대조적인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매력적으로 잘 설정이 돼 있는 편이지만 영화가 주는 주된 웃음은 캐릭터에서보다는 화장실 유머에서 나온다. 주인공이 '재난'상태의 곤란함에 빠지게 되는 이런 식의 유머는 제법 웃음을 주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영화 전체를 끌고가기는 힘에 부쳐 보인다. 느닷없이 사랑에 빠지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사랑을 이뤄가는 식의 평범한 줄거리는 특히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한계를 드러낸다. 부담없이 즐길만한 코미디라고 흐뭇해하면서도 극장문을 나설 때 하품이 나오는 것은 이때문이다. 상영시간 89분. 15세 이상 관람가. (서울=연합뉴스)

지금 극장가는 춤바람중

봄 극장가에 국내외 댄스 영화 줄이어 <허니>, <바람의 전설>, <더티 댄싱:하바나 나이트>, <댄스 오브 드림>까지 새 봄 극장가에 '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있다. 이달 말부터 춤을 소재로 한 국내외 영화들이 줄을 이어 선보이는 것이다. 26일 테이프를 끊을 <허니>는 아웃 캐스트, 백 스트리트 보이즈, 어셔,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톱스타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빌리 우드러프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힙합 댄스가 신나게 펼쳐진다. 레코드점과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면서 거리의 흑인 소년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주인공이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의 눈에 띄어 프로 안무가로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타이틀롤을 맡은 주인공 제시카 엘바의 청순한 듯하면서도 요염한 매력이 볼 만하다. 4월 9일에는 국내 최초의 본격 댄스 영화를 표방한 <바람의 전설>이 간판을 내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부터 '댄스 스포츠'란 이름으로 정식 경기종목에 지정된 일명 사교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주인공은 예술가를 자처하는 박풍식. 춤에 미친 평범한 사내가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의 고수들한테서 여러 종류의 춤을 전수받아 전설적인 최고의 달인이 된다. 형사 송연화도 풍식을 '제비족'으로 판단하고 추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춤의 매력에 빠져든다. 싸이더스 전신인 우노필름의 기획이사, 영화향기 대표, 시네마서비스 제작이사 등을 거친 지미향씨와 <주유소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의 시나리오를 쓴 박정우 작가가 함께 설립한 필름매니아의 창립작이자 박정우 작가의 감독 데뷔작. 시네마서비스의 강우석 감독이 기획과 함께 투자ㆍ배급을 맡았다. 충무로 톱스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성재와 스크린에 처음 얼굴을 내미는 탤런트 박솔미가 주연으로 호흡을 맞추고 조연 전문배우 김수로가 풍식을 사교춤의 세계로 이끄는 송만수로 등장한다. 4월 14일에는 <더티 댄싱:하바나 나이트>가 바통을 이어받는다. 1987년 전세계 극장가를 댄스 열기로 뜨겁게 달군 <더티 댄싱>의 속편 격이다. 당시 주연을 맡아 젊은 여성을 사로잡았던 패트릭 스웨이지가 이번에는 댄스강사 역으로 17년만에 특별출연하고 아카데미 주제가상의 영예를 안은 '(I've had)The time of my life'가 주인공의 러브 테마로 삽입돼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쿠바로 이사간 미국 소녀 케이티가 라틴 댄스의 매력에 빠져들고 호텔 웨이터 하비에와 함께 댄스경연대회에 출전한다는 것이 기둥줄거리. 남녀 주인공인 디에고 루나와 로몰라 게리가 열정적인 춤 솜씨와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준다. 산타나, 크리스티나 아귈레라, 마야, 모니카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랩에서 팝까지 현대적인 비트와 라틴음악을 결합시킨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냈다. 다음달 말에는 홍콩 영화 <댄스 오브 드림>도 춤 열풍에 가세한다. 류웨이장(劉偉强) 감독의 2002년 작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무이임퐁(梅艶芳ㆍ영어명 아니타 무이)이 류더화(劉德華)와 함께 출연한다. 일에만 파묻혀 사는 여성 호텔 경영자가 변두리 무도학원 강사와 파티장에서 우연히 만나 춤을 통해 사랑을 가꿔간다는 로맨틱 코미디. 이에 앞서 4월 2일 개봉하는 벤 스틸러ㆍ제니퍼 애니스톤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폴리와 함께>(감독 존 햄버그)에서도 흥겹고 에로틱한 살사 댄스 장면이 등장해 관객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든다.(서울=연합뉴스)

그녀 안의 곡선과 직선,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최지우

검은 아이라이너로 눈꼬리를 쑤욱 치켜올린 진한 화장, 메두사처럼 어지럽게 뒤엉킨 굵은 웨이브 머리의 최지우가 몸에 달라붙는 슈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삐딱하게 선 채로 상반신을 이리저리 틀어 포즈를 취하는 최지우의 눈매가 서늘하다. 본격적인 촬영에 접어들었을 때 스튜디오에 렉시의 <애송이>가 흐른다. 그러자 최지우의 표정이 노래 가사를 따라 점점 더 도발적으로 바뀌어간다. “자신있음 이리 와봐. 애송이들아.” 팜므파탈 버전의 최지우가 낯설긴 하지만, 의외로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재밌어요. 나 아닌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보여준다는 게.”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했던 최지우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하게 풀어져 있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나 아닌 나’로의 변신이 재밌다고 말하지만, 정작 최지우에게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양하지 않다.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으로 이어져온 ‘눈물의 여왕’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일 것이다. 종방 1개월이 지났지만, 스토리와 배우에 홀딱 빠졌던 열혈팬에게도, 씹는 재미로 본다던 안티팬에게도 <천국의 계단>의 ‘여진’은 남아 있다. 뒤늦게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히트하면서, 최지우 다큐멘터리다, 최지우 관광상품이다, 해외로부터의 구애도 뜨거운 이즈음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하루도 못 쉬고 일했다”는 증언이 아니더라도, 최지우가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지고보면, 최지우가 최루성 멜로라는 한우물만 판 것은 아니다. 영화로는 주로 로맨틱코미디에 출연해온 최지우의 캐릭터는 강단도 있었고, 애환도 있었고, 푼수끼도 있었다. 하지만 사슴 같은 눈에서 또르르 떨어져내리는 최지우의 눈물을 대중은 더 많이 사랑했다. 그런 최지우가 다시 한번 조심스러운 ‘배신’을 기도하고 있다. “우는 신이 없어서”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는 최지우는 천하의 바람둥이에 꽂혀, 숙맥에서 선수로 돌변하는 자신의 캐릭터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전한다. 눈물없이, 그는 어떻게 우릴 설득하려 하는지, 기다리고 또 지켜봐야 할 것이다. -대체 최지우 불패신화의 비결이 뭔가. =영화에선 아니었다. (웃음) 내가 다작하는 편은 아니어서, 1년에 1편 정도 해왔는데, 작품 복, 파트너 복이 있었다. 연기한 지 올해로 9년째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 앞에선 연기하는 게 쑥스럽다. <천국의 계단>의 경우는 친분이 있는 이장수 감독님과의 작업이라 무척 편했다. 백지 상태로 나를 비워내고서 역할에 몰입하고 파트너와 호흡을 잘 맞춘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에선 왜 아니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망한 영화는 없다. 작품 고르는 기준이 드라마와 영화가 다르진 않다. 사람들 먼저, 시나리오는 그 다음이다. 다만 영화는 촬영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식이기 때문에 순간 집중력이 좋은 나로서는 감정 연결이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이번엔 병헌 오빠랑 이미 호흡도 맞춰봤고, 내 또래 배우들이 여럿 함께하기 때문에 재밌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중국, 대만에서 인기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인가. =엄마랑 샌프란시스코에 놀러갔을 때, 맨 얼굴에 슬리퍼 끌고 돌아다니다가 “유진(<겨울연가>의 캐릭터) 아니냐?”며 알아보는 일본, 대만인들과 많이 마주쳤다. 아줌마팬이 많은데, 동생처럼 친구처럼 아껴준다. 힘들겠다고 안쓰러워하고, 촬영장에 보양식 싸들고오고 그런다. 일본에서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데, ‘날 뭘 찍나, 내가 그 정도 되나’ 싶고, 작품 고를 때도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티팬도 적지 않다. 그들의 독설에 위축될 때도 있나. =그럴 때는 지났다. 나이가 몇인데. (웃음) 처음엔 상처받았지만, 이젠 편안해졌다. 연기 못한다는 얘기 많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할 일을 해왔다. 보기와는 다르게 내가 좀 낙천적이다. 죽을 둥 살 둥 목숨 걸고 하는 스타일도 못 된다.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변화되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한다. -연기가 재밌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언제부터 연기를 즐기게 됐나. =연기에 대해 알 것 같다고 느껴진 게 <아름다운 날들>을 할 때고, 연기가 부쩍 재밌어진 건 <겨울연가>부터다. 카메라 앞에서 편해진 건 <천국의 계단>에 와서다. 전과 똑같이 우는 연기를 해도, 가슴이 후련해지곤 했다. -청순가련 이미지를 고수할 것인가. 아님 대안을 생각하고 있나. =그러니까 이런 영화(<누구나 비밀은 있다>)도 하는 거 아니겠나. 이건 청순가련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한참 멀다. 영화에서 나는 단 한번도 청순가련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었다. 드라마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성급하게 변신을 말하긴 싫다. 준비됐을 때 하고 싶다. 아직은 한 역할보다 안 한 역할이 많다. 천천히 도전하고 싶다. 멜로 하면, 최지우가 떠오르는 거,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새 영화에 베드신이 있다고 들었다. 많이 예민해 있겠다. =나 안 벗는다고 선언한 적 없다. (웃음) <올가미>에도 ‘나름대로’ 베드신이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다. 흐름상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과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다. 끈적끈적하게는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재밌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연기 9년째다. ‘여배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MBC 공채 탤런트로 뽑혔을 때 내가 제일 어렸다. 사방에 언니, 오빠뿐이었는데, 이제 현장에 ‘선배님’이라 부르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졌고, 더러 군기도 잡는다. (웃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여배우를 볼 때 눈가의 주름을 보려들지 말고, 눈의 깊이를 봐달라고. 나도 연륜을 쌓아가면서 눈빛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