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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소리로 느끼는 해양 블록버스터의 육중함,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 Master and Commander: The Far Side of the World 2003년 감독 피터 위어 상영시간 138분 화면포맷 2.40:1 아나모픽 음성포맷 DTS & DD 5.1 영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이십세기 폭스 <트루먼 쇼>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피터 위어의 신작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아카데미에서 10개 부문에 걸쳐 노미네이트되었고, 20여개의 저명한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비평적으로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흥행에서는 영화의 원작인 패트릭 오브라이언의 총 20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세부까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재현된 범선의 모습이 감명을 줄 정도로 해양모험물에 대한 전통이 깊고 선호도가 높은 미국과 영국에서도 제작비의 2/3에 채 미치지 못하는 참패를 거둬 대중성을 획득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스토리 구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영국 해군의 서프라이즈호와 프랑스 무장 선박 아케론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별다른 서브 플롯없이 138분에 걸쳐 묘사하고 있고, 그나마 기대했던 두 전함의 교전장면조차 스펙터클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오락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치기가 힘들다. 실제 범선과 거대한 실내 도크에 건조된 실물 크기의 세트, 1/6 크기 모형, 컴퓨터그래픽 등 다양한 방식으로 촬영된 각각 다른 배의 모습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도록 전체적으로 화면을 뿌옇게 처리했고, 무채색 톤에 색농도도 높지 않기 때문에 아나모픽 2.40:1 영상은 최신작치고는 다소 떨어지는 일반적인 수준의 해상도만을 보여준다. 영상과는 대조적으로 DTS 사운드는 대포나 총소리는 날카롭고 임팩트감 강하게, 파도소리나 선체의 삐걱대는 소리, 선창의 발걸음 소리 같은 일상 소음들은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구현해낸 최상급의 사운드디자인을 과시한다. 서플먼트 디스크에는 2개의 제작 다큐멘터리, 각본과 고증 설명, 특수효과와 음향 효과 해설, 인터랙티브 사운드 데모, 멀티 앵글 비교, 삭제장면, 스틸 갤러리 등이 푸짐하게 담겨 있다. 김태진 미국 자본으로 제작되었지만 영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해양 블록버스터 <마스터 앤드 커맨더: 위대한 정복자>와 프랑스영화 특유의 매력이 넘쳐나는 에 한국 무속의 세계를 깊이있게 조망한 다큐멘터리 <영매>까지 모처럼만에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하게 펼쳐진 한주이다. 영상은 다소 기대에 못 미치지만 매우 정교한 사운드디자인이 돋보인 <마스터 앤드 커맨드…>보다 PAL에서 NTSC로 전환한 까닭에 영상이 다소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연극과 영화의 장점만을 발췌해놓은 듯한 유쾌함과 함께 화려한 원색들의 강렬한 대비가 짜릿한 시각적 쾌감을 안겨준 쪽을 선택하지만, 공들인 작품인 <영매>에도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호금전 감독의 <방랑의 결투>도 놓칠 수 없는 고전 걸작이다. 잠시 칸에 다녀왔다. DVD 가게에 가보니 전면에 배치된 것은 물론 블록버스터 DVD들이었으나, 고전영화와 아시아영화의 DVD도 그에 못잖은 정성으로 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알랭 레네의 근작 <입술은 안 돼>는 사랑스러웠고, <카이에 뒤 시네마>가 지면의 반 이상을 에릭 로메르의 신작 <트리플 에이전트>에 할애한 것도 볼 수 있었다. 두루두루 영화를 사랑하는 그곳이 부러웠다. 결국 이번주 DVD 섹션에 불충실한 것에 대한 핑계다. 잠시 본 <마스터 앤 커맨더…>는 아카데미 촬영상 수상작이라 DVD를 잔뜩 기대했으나, 영상보다 오히려 소리가 더 인상적인 DVD였다. DVD는 영상표현이 썩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얄미운 그녀들의 화사한 얼굴을 빨리 보고 싶다. “낙엽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요짐보의 말에 자토이치(가쓰 신타로)는 “낙엽은 바람을 원망한다”라고 이야기한다. 가을이 아닌 봄에도 잎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봄바람이 차갑다. <마스터 앤 커맨더…> DVD는 실로 놀랄 만한 사운드를 담고 있다. 화질이 조금 불만족스럽기는 한데 사운드가 모든 것을 용서하게끔 만든다. <루니 툰: 백 인 액션>은 의외로 재미있어 지인들에게 홍보를 하고 다녔다. 친구와 함께 영퀴문제를 푸는 것처럼 보아도 재미있겠다. 은 오종의 영화 DVD 중 가장 좋은 화질을 보여준다. 3번째 디스크보다 O.S.T CD가 들어가는게 좋았으리라 생각되지만 나머지 2장의 디스크는 충실하게 제작되었다. 음질에 3점밖에 안 준 것은 사운드가 너무 프론트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주의 선택은 이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교회내 불법상영 성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을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불법 복제돼 교회에서 무단 상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개신교 연합단체가 불법상영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최근 `미국영화협회 한국지사'로부터 "불법 다운받은 동영상물을 교회 등에서 상영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요지의 `저작권 및 배급권 보호협조요청'을 받고 가맹교단과 단체에 이 영화가 불법상영되는 일이 없도록 주지시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고 15일 밝혔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미국영화협회 한국지사의 회원으로 있는 20세기 폭스코리아가 국내 수입, 배급하고 있다. 한기총 총무 박천일 목사는 "불법 복제된 영상물을 공적 장소에서 상영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만큼 기독교인들이 위법을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며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신앙적 감동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로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12시간을 표현한 이 영화는 지난 2일 국내 개봉한 이래 현재까지 152만여명의 관객이 관람했으며 오는 5월말까지 상영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서울=연합뉴스)

사무라이의 세계가 어떻길래 난리야, <바람의 검심>

와쓰키 노부히로가 1994∼99년에 걸쳐 집영사의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한 <바람의 검심-메이지 검객 낭만담>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초베스트셀러가 되었고, TV시리즈에 이어 극장판과 OVA <추억> <성상>편이 차례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발표되었다. 후루하시 가즈히로가 감독하여 1996년 1월부터 <후지TV>를 통해 방영된 TV판은 원작의 분위기와 동일하게 작화와 연출에 코믹함이 강조된 청소년 취향으로 제작되어, 켄신의 유신 지사 시절을 배경으로 한 만큼 비장한 내용과 심각한 작화로 일관했던 OVA <추억>편과는 대조적인 느낌을 준다. 모두 95편에 이르는 TV판 전편은 26장의 디스크에 담겨 5개의 박스로 나뉘어 발매될 예정인데, 첫 번째 박스에는 총 14화가 4장에 3·4·4·3화씩 수록되어 있다. 4:3 화면은 선명도나 색농도가 모두 TV시리즈의 평균적인 수준인 무난한 화질을 보여준다. 사운드는 스테레오이지만 압축전송률을 448kbps로 높게 잡아 수록한 덕분에 음의 밀도감이 높아 대사가 명료하고 공간감이 풍부한 음향을 들려준다. 우리말 더빙도 역시 또렷하지만, 볼륨이 대사에 집중되어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서플먼트는 첫 번째와 네 번째 장에 셀 일러스트 갤러리와 논크레딧 오프닝, 엔딩이 들어 있을 뿐이지만, 추후에 발매될 박스들에 160쪽 분량의 설정 자료집 2권과 TV 미방영분인 마지막 화를 수록한 보너스 디스크 등이 나뉘어 수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향기나는 폭탄, <…홍반장>

아가씨, <…홍반장>에서 로맨틱코미디의 힘과 가능성을 발견하다 맥가이버만큼 다재다능하고 섹시하며 순돌아빠만큼 만만하고 다정다감한 남자, 홍반장. 편의점 알바에 퀵서비스, 철가방에 부동산 중개까지 모든 것을 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 그러나 그를 진정한 ‘진상’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그의 만능 엔터테이너적 재능이 아니다. 그는 페인트공을 하든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든 고급 인테리어를 하든 반나절이면 2만5천원, 반의반 나절이면 1만2500원을 받는다. 홍반장은 다양한 노동분과를 ‘일당 5만원’이라는 철저한 원칙 아래 등가화한다. 노동과 노동 사이에 어떤 질적 차이나 위계도 없다. 게다가 하루도 똑같은 노동을 하지 않는다. 혁명적 노동의식으로 무장한 창조적 백수의 출현! 마을 곳곳을 유목하며 타인의 노동을 즐거이 땜빵해주는 그가 퀵서비스하는 진짜 우편물은 행복과 우정이다. 이러한 유쾌한 노동-유목민이 범람하는 잡초처럼 무섭게 번져나간다면, 청년실업이나 고용불안도 우리의 도발적 상상력으로 거뜬히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 고아가 된 홍두식을 차마 고아원에 보내지 못한 마을공동체는 돌아가면서 그를 키워낸다. 홍두식은 기꺼이 홍반장을 자처하며 마을을 지키는 독수리 형제가 된다. 이 작은 파라다이스에는 기브 앤 테이크식의 ‘교환’이 아닌, 조건없는 ‘증여’의 기쁨이 넘쳐난다. 또한 홍반장이 백마 탄 왕자가 아닌 이유는 그가 극중 엄정화를 돕는 형식이 시비걸기와 딴죽걸기로 일관되기 때문이다. 부자아빠에게 양육비까지 차근차근 갚아나가는 독한 그녀가 백마 탄 왕자의 느끼한 배려를 참아낼 리 없다. 때론 목욕탕에서 등을 빡빡 밀어줄 듯한 동성 친구, 때론 동성애적 우정을 나누는 수호천사, 가끔은 누구보다 섹시한 연인의 이미지를 뿜는 남자. 엄정화는 우정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세 가지 코드를 홍반장을 통해 한꺼번에 향유한다. 노동해방과 성적 차이화로부터의 해방을 한방에 쟁취하는 캐릭터를, 그것도 로맨틱코미디에서 발견하다니. 홍반장이 바닷바람을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에서 엄정화에게 시시콜콜 눈감아라, 바람의 냄새를 느껴보라 주문할 때, 난 얌전히 따라했다. 눈도 질끈 감고 극장에서 불어나오는 히터바람에 몸도 맡겼다. 로맨틱코미디에 저항해온 인간까지도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만들다니.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 실망한 ‘솔로레타리아’ 남자친구들은 말한다. 자기가 바로 홍반장인데, 세상은 홍반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자들은 아직도 전구 잘 갈아끼우고 자동차 수리 잘하는 홍반장보다는 의사나 변호사를 좋아한다고. 그러나 ‘소셜 포지션’이 달라도 한참 다른 엄정화가 홍반장에게 뿅 가는 건 홍반장의 번쩍번쩍함이 아니라 “그녀가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로맨틱코미디는 문화적 호기심을 채워주지만 지적 허기는 채워주지 못한다는 선입견.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세련된 진화과정이 곧 로맨틱코미디의 역사라는 편견. 물론 로맨틱코미디에는 ‘깨갱’, ‘얼차려’ 해야 하는 스케일 큰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로맨틱코미디를 보고 나오면 한마디라도 거들고 싶어한다. 부담없이 떠들 수 있고, 나의 이야기를 슬쩍 대입할 수도 있다. 그건 전쟁영화나 SF영화가 넘볼 수 없는 로맨틱코미디만의 미덕이다. 하여 로맨틱코미디에는 어떤 ‘퀴어’ 코드도 원활하게 탑승할 수 있다. 아무리 과격한 혁명적 구호들도 로맨틱코미디에 녹아들어가면 뽀사시하고 달콤쌉싸름해지니까.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웨딩싱어> <미술관 옆 동물원> <사랑의 블랙홀> 등은 수많은 퀴어 코드와 탈주의 철학으로 꿈틀대지 않는가. 혁명을 꿈꾸는 감독들이여, 로맨틱코미디 속에 ‘향기나는 폭탄’과 ‘리본을 단 슬로건’을 장전할 의향은 없으신지. 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

이거 ‘맛있게’ 할 수 있겠다 싶었지, <범죄의 재구성>의 백윤식

백윤식(57)은 지난해 각종 영화상의 남우조연상을 독식했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봉구(신하균)에게 외계인으로 찍혀 갖가지 고문을 당하는 강 사장 역할로 충무로를 깜짝 놀라게 했던 그에 대한 찬사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었다. “너무 늦게 왔다”는 불평이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그가 <범죄의 재구성>의 김 선생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사기꾼이다. 호주머니에 검찰 신분증을 넣어가지고 다니며 자존심 상하는 것을 못 참는 사기계의 전설. 몇년 동안 와인을 즐기며 잠수 중이었다가 한국은행을 털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소 싸움 하듯 장준환 감독과 캐릭터를 두고 싸웠던 <지구를 지켜라!> 때와 달리 이번 영화에선 최동훈 감독이 드라큘라처럼 자신의 연기를 빨아먹는 것을 수수방관했다고. “백윤식의 영화”라는 단언이 과하지 않을 만큼 그는 이번 영화에서도 그만의 개성을 뿜어낸다. 충무로의 외계인 같은 존재, 백윤식에게 몇 가지 물었다. <지구…>가 개봉한 지 1년이다. 극장에 걸리기 전 흥행을 자신했는데. 평단에서 칭찬하고, 일반시사 반응도 좋았잖아? 그래서 난 믿었지. 그런데 결과가 그렇게 되니까 나도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는 거야. 이런 황당한 일이 있나 싶었어. 영화는 이런 건가. 싸이더스에 전화해서 미스가 어디서 난 거냐 따지기도 했고. 얼마 전에 TV에서도 방영하기에 어떻게 나오나 싶어 봤는데. 근데 김이 팍 새더라고. 많은 장면이 편집이 돼버리니까. 우리 장준환 감독이 봤으면 잠 못 잤을 거야. 열딱지 떠가지고. 지난 이야기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그거는 온전히 해서 청소년들도 다 같이 봐야 할 영화라고. <범죄…> 출연을 제의받은 것도 <지구…> 개봉 무렵이다. 지난해 이맘때 첫 시사할 때였는데. 차 대표가 내가 할 작품이 하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러면서 이번 시나리에는 고생하는 거 없을 거라고 하더니만 ‘아 한번 있네, 한번 있네’ 그러더라고. 크흐흐흐. 액션장면이 있다는 거야. 차 대표가 나한테 딱 맞는 역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 노하우가 있잖아. 딱 보면 사람이 영화 그 자체를 좋아하더만. 아티스트 개념이 있는 제작자야. 가려운 데도 긁어줄 줄 알고. 어쨌든 그때는 (시나리오) 준비단계여서 나중에 완성되면 책 보내준다고 하는데 감독이 누군지도 몰랐었고. 그러고나서 한참 있다가 책을 받았는데. 읽어보니까 어, 이거… 맛있게 썼더라고. 배우야 자신의 배역 위주로 읽잖아. 그렇게 읽어내려가는데 여러 가지 떠오르는 부분이 있어. 이쪽에서 밥먹은 지 오래되니까 알지. 아 요렇게 하면 이거 맛있게 할 수가 있겠다 싶더라고. 감이 와. 이게 두 번째 작품이구나. 강 사장과 김 선생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매력은 배우 입장에서 어떻게 다른가. 영화 한편 한 다음에 책들이 오더라고. 근데 다 <지구…>에 비하면 싱거워. 시시하다는 말은 아니고. 강도의 차이가 있는 거지. <범죄…>도 <지구…>에 비하면 싱겁거든. <지구…>의 강 사장 안에는 오만 가지 캐릭터가 한꺼번에 들어 있다고. 그거에 비하면 조금 양이 안 차지. 근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지구…> 를 털고 가야 한다. 나만의 병이다. 빨리 정리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싶은 거야. <범죄…> 같은 경우는 어떤 대목이 좋다기보다 연기자만이 느끼는 건데 ‘휘리릭’ 오는 선이 서는 게 느껴져. <지구…>야 처음 읽을 때는 난이도가 좀 심했지. 근데 이번에는 쩍쩍 접목이 돼. 오감이 작동하는 거지. 캐릭터 구성을 할 때 필(feel)이 떠오르면 나만이 아는 비표 개념의 낙서와 메모를 해놓는다든지 하는데 작업 전까지 뿔뚝뿔뚝 계속해서 떠오르더라고. 처음에 시나리오를 보고서 최동훈 감독에게 <히트>의 로버트 드 니로 이야길 했다던데. 일례를 든 거지. <히트> 보면 다 성공하는 게임인데 드 니로가 자존심 때문에 발길 돌려서 가잖아. 사랑하는 여자랑 비행장 나가면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있는데 안 그러잖아. 배신당한 것에 대한 숙제가 미진하니까 풀고가야겠다, 자존심을 지켜야겠다고 가는 거지. 그 장면 봤을 때 너무 안타깝더라고. 드 니로야 극중에서 숙달된 조교니까 자기가 가서 한두놈 처치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하고 가는데 그게 불행의 구렁인 거지. 그걸 알면서도 남자의 자존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거고. 그런 부분이 내 대사에도 있더라구. 이 나이에 남는 건 돈, 배, 자존심밖에 없다고 하잖아. 시나리오 수정 중에 감독을 압박했다는 풍문도 있더라. 하하하하. 따진 적 있지. 14고부터 받았는데 가면 갈수록 점점 책이 이상해. 난 15고가 딱 좋아서 반했는데. 감독이 정리해서 새로 보냈습니다, 해서 보면 점점 안 좋아지는 거야. 내 역할에 대한 욕심을 빡 갖고 있는데 그게 흐려지더라구. 배우들은 다 손해 안 보고 싶어하잖아. 그래서 다음 버전이 나올 때마다 대비했다고. 책 비교해가면서 이거는 뭔가 체크했지. 아들 도빈이한테 이번에도 도움 많이 받았어. 야, 요거 한번 보면서 대비를 해봐라, 신이 바뀐 것 하고 대사 삭제된 것 하고 정리 좀 해달라 하고. 그러고나서 싸이더스에 가서 14고부터 그때까지 나온 시나리오를 한번에 쫙 펼쳐놓고서 이야길했지. 그런데 최동훈 감독이 들어와선 크게 변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근데 내 입장에선 이야기 구성을 바꾸니까 김 선생의 힘이 약해지고 모든 게 에피소드처럼 돼버려. 캐릭터가 축으로 서 있어야 드라마가 서는 것 아니냐 그랬더니 감독이 걱정하지 마십쇼 하더라고. 극중 김선생이 자주 쓰는 대사 중에 “청진기를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라는 게 있다. 그런 김 선생처럼 배우로서 자신의 연기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듯한데. 알아야 면장을 하지. 젊었을 땐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더라고. 다이얼로그 톤도 똑같고 어떤 작품에선 보이스를 변형해도 장난하는 것 같고. 보는 사람들에게 안 먹히고. 그런데 연륜이 쌓이니까 내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같아. 캐릭터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은 이럴 것이다, 아니 저럴 수도 있다 하는 추리를 하는 거지. 작가가 소설을 쓸 때 인물을 구상하듯이 배우도 마찬가지라고. 감독이 시나리오 쓸 때의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가. 어떤 배우들은 여기저기 찾아다닌다고 하더라고. 실제 저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관찰하고. 한데 난 그렇게 하는 건 좋지만 어려운 발상이라고 봐. 어떤 틀에 넣어야 하니까. 뭘 발견하면 저거구나 해서 그 사람의 형태에 자길 넣잖아. 난 좀 반대인데 그런 게 있겠다 싶으면 그걸 가져와서 내 가슴에다 붙이는 거지. 그래서 변신이라는 말이 웃기다고. 조금 다른 맛을 보여줬다 뭐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장준환 감독과 최동훈 감독, 두 사람 모두 영화아카데미 출신 신인감독이다. 작업 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최 감독은 리허설할 때 자기가 써준 거는 변형을 안 하는데 그거 아닌 부분은 프리(free)하게 배우들한테 맡겨. 전폭적으로 주는 거지. 배우 거를 다 뺏어먹는다고 할까. 그래서 편하고. 장준환 감독도 배우 피 빨아먹는 건 다르지 않는데 자기 고정 틀이 좀 강하지. 릴렉스하게 뽑아먹는 게 아니라 배우와 대립각이 서게 되니까. 그런 건 성격 차이겠지. 장단점이 있다고 봐.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장에서 즉흥적인 요소도 빼놓을 수가 없지. 박신양하고 염정아가 하는 걸 보면서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하는 대사가 있거든. 그건 애드리브야. 두 사람이 벌이는 수작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지. 근데 애드리브 같은 것도 준비된 상태에서 현장에서 접목이 돼야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돼. 알코올 촬영을 한 적도 있다던데. 최 감독이 그래? 있어. 몇번. 내가 엉덩이가 질기거든. 주책없이 말이지. 한번은 마시다가 최 감독이 ‘선생님 이젠 자야 해요’ 하고 징징대. 물론 배우야 잠깐잠깐 눈 붙일 수 있는데 감독은 안 되니까 그 마음이야 알지. 아유, 그래도 그렇지. 울긴 왜 울어. 하하하. ‘그래 알았다. 요거만 먹자’고 한 게 아침까지 들이켰더라고. 우리야 풀어만 주면 현장에서 연기가 슬슬 나와요. 만취만 안 하면 되지. 대사 톤이 독특하다. 낮게 깔리다가 고성이 터져나온다. 강약을 주는 포인트도 일반적인 연기와 좀 다른 것 같다. 배우들이 생각하는 건 감정의 극대화거든. 이 단어에 악센트를 주면 어떤 효과가 나온다 그런 거 다 알지. 주어냐 목적어냐 동사냐 그중에 어디에 힘줘야 모양새가 좋냐. 다른 배우들하고 좀 다른 건 내가 젊었을 때 드라마에서 목적극을 많이 했거든. 나운규, 이상화, 이중섭 등등. 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고 천재적인 예술가들이잖아. 이 사람들이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라고. 자기가 갖고 있는 재능이 사회적 여건에서 승화가 안 돼서 전쟁이나 그런 것들이 압박을 하니까. 나중에는 미쳐버리는 사람들도 많고. 하여튼 그런 역 했던 게 도움이 된 거 같아. 요즘에는 다들 생활에서처럼 대사를 치고 찍찍 뱉는데 극적으로 리얼한 톤이 따로 있거든. 오버하고는 다른 또 다른 리얼함이 있다고 봐요. 액션장면 촬영 때는 어려움이 없었나. 박신양하고 비 맞으면서 남산 필동 아래서 액션장면 찍는데 그때 첫 추위가 왔을 때야. 3일 내내 나이트신인데 힘들면서도 재밌더라고. 힘들어도 스트레스 안 받으니까 좋지. 박신양이 워낙 운동신경도 있고 자신에 넘쳐 있으니까 분위기도 무르익어가고. 나도 그래요. 대역 써줬으면 몸이 편할 텐데. 최 감독이 내가 하길 원했으니까. 또 내 몸이 움직여지니까 나도 하는 거지. 이 작품 나오면 액션쪽에서 많이 올 것 같아. 바람직한 상황은 아닌데. 이를 어째. 이 나이에 액션쪽으로 가면 어떻게 감당하지. 형사물 나오면 바로 캐스팅될 것 같은데. 몸이 탄탄하다. (배우한테) 양식이니까. 건강관리를 해야지. 그 전에도 좀 했는데 신경을 쓰게 된 건 <파랑새는 있다>에서 백 관장 맡으면서 신경이 좀더 쓰이더라고. 역할이 관장이었잖아. 화장실에서 서너놈 처치할 정도는 돼야 하니까 그때서부터 보강을 좀 했지. 연기는 어떻게 시작했나. 그냥 했지. 하하하. 젊었을 때는 물불 안 가리잖아. 만사 용기백배하고 쇠를 삼켜도 녹이는 그런 때 아닌가. 한번 접근해보고 싶더라고. 그 세계에. 근데 그때는 연극영화과가 얼마 안 생겼던 때인데. 대학 갈 무렵, 연극이나 영화를 좋아한데다, 그게 좀 진취적인 학과구나 싶더라고. 그래서 갔지. 고등학교 때 연극부에 있는 애들이 많이 왔더라고. 나는 완전히 불모지에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경우야. 브라운관에서 활동하는 동료 배우들에 비해 출연작이 적다. 겹치기를 잘 안 했으니까. 간혹 있었던 해가 있긴 한데. 그럴 때도 사극 하나 현대물 하나. 뭐 이렇게 갔어. 동료들이 내가 이런 소리 하면 왜 저렇게 틱틱거려 할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놈으로 겹치기 하면 나도 힘들고 시청자들도 식상하잖아. 가뜩이나 시장도 좁은데. 그리고 한 작품 해도 축을 이루는 역할을 하다 보니까 하려고 해도 스케줄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요즘 안 보이십디다 했던 분들이 있어. 요즘 너 뭐 먹고사냐 뭐 그런 말이지. 김 선생처럼 배신을 경험한 적이 있나. 나도 아픔 같은게 있거든. 전엔 캐스팅이 됐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이상한 방향으로 가기도 하고. 그래서 불이익을 보는 경우가 반복된 적도 있었고. 정상적으로 일이 이뤄져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것이 개입해서 망가뜨리는 일이 많았거든. 그럴 때마다 완전히 돌았지. 사회가 이런 거구나 싶고. 그래도 필이 안 오면 캐스팅 해달라고 달려가지 않으니까 다들 이상하다고 그랬어. 자존심 건드리면 우린 안 하거든. 그럴 때는 맘이 내키지가 않네요 하고 거절도 하고. 이제는 눈에 다 보여. 이 사람이 날 필요로 한다, 진실성이 없다, 그냥 이용가치 때문에 접근했구나 다 알아. 그래도 나를 필요로 하면 활용하라 이거지. 다만 스트레스는 주지 말고. <범죄의 재구성> 흥행은 어떨까요. 아이고. 그런 거는 이제 묻지 말라고…. 얼마 전에 차 대표하고 통화한 적 있는데 영화 잘 나왔다고 나보고 배역 운이 있다고 그래. 그래서 ‘지난해에 앓을 만큼 앓았구요, 담담합니다 담담해요’ 그랬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그랬어. 지난번엔 (영화가) 안 나와서 안 됐나? 크하하. 잘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죠. 영화사가 돈 좀 많이 가져갔으면 싶고. 그래야 좋은 작품 나오는 거고. 그래야 배우 입장에서도 좋은 기회가 오는 거니까.

내가 만약 조폭이 된다면? <나두야 간다> 촬영현장

벌써 아홉개째 구운 달걀을 먹고 있는 동화 역의 정준호는 약간 후회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만철(손창민)과 대화장면이 다소 밋밋한 듯하여 달걀을 먹으면서 얘기를 듣는 설정으로 본인이 아이디어를 낸 것. 그런데 정작 촬영에 들어가자 달걀 먹느라 대사가 꼬이거나 아니면 한 박자씩 늦는 바람에 연속 NG를 내고 남의 타는 속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손창민은 심지어 “여기 달걀 좀더 갖다줘라. 아휴 이 닭 냄새…” 하며 놀려대기까지. 그래도 정준호는 “나중에 과거신 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면 여기 달걀 수북하게 쌓여 있어야 된다”며 연출팀에 꼼꼼히 부탁하는 프로정신을 발휘한다. 마누라에게 허구한 날 구박받는 삼류소설가 동화가 폭력조직의 보스인 만철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되면서 두 사람이 인생의 대반전을 이루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인 <나두야 간다>는 동화 <왕자와 거지>의 형식을 빌린 리얼 판타지 코믹영화다. 자서전 대필을 위해 어울리게 된 두 사람은 각자에게 숨겨진 재능과 열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깡패는 소설가로, 소설가는 깡패로 각각 새로운 인생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을 “내가 만약 뭐가 된다면…”이라는 평범한 상상력에서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정연원 감독은 “넥타이부대들이 와서 이 영화를 보고 잠깐이나마 이태백이니 386이니 하는 고단한 현실을 잊고 상큼한 상상의 세계를 경험하면 좋겠다”고. 그러고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잠깐이나마 행복하지 않겠느냐며, 그래서 최대한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했고 순서편집을 본 소감으로는 의도한 대로 나온 것 같단다. 불쑥불쑥 카메라 파인더 안으로 끼어드는 동네주민들의 열띤 관심 속에 구멍가게 앞 장면은 마무리가 되고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맹활약을 보여주었던 바로 그 버스가 등장했다. 이제 90년대 초의 풋풋한 만철이 등장할 시간인 것이다. 정연원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촌스러운 옷을 입어도 세련돼 보이는 손창민씨” 때문에 의상팀이 준비한 옷을 다시 더 촌스러운 옷으로 갈아입은 손창민을 태우고 버스는 출발한다. 유행가 <골목길>이 골목마다 울려퍼지던 시절로 만철이 동화에게 들려주는 슬픈 사랑 얘기 부분을 촬영하는 것이다. 비좁은 버스 안은 장비와 스탭들로 혼란스럽지만 버스는 출발하고 일사분란하게 촬영이 이루어진다. 소수의 스탭만 탑승한 관계로 감독이 슬레이트도 치고 오케이 사인도 낸다. 지는 해를 연신 바라보며 얼른 다시 가게 앞으로 돌아온 촬영팀은 버스 정류소 앞에서 연인 만철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정소영))이를 한번 만에 찍는다. 그리고 해는 자취를 감추고 잠시의 휴식과 이른 저녁식사가 끝나면 카메라는 다시 배우들을 좇아 숨가쁘게 돌아갈 것이다. <동감>을 제작했던 (주)화이트 리 엔터테인먼트의 세 번째 작품이고 롯데시네마의 첫 배급영화가 될 <나두야 간다>는 이제 조만간 스크린이라는 마지막 종점에 도착할 예정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을지 5월28일이면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가평=사진·글 오계옥 △ 만철의 옛 연인 하늘이와 현재 만철을 사로잡는 연희를 동시에 연기하는 정소영은 이번이 영화가 처음이다. (왼쪽 사진) △ “네? 네… 그 그래도 잔금은 나오는 거죠?” 어리버리한 표정 연기가 일품인 정준호는 촬영장에선 점잖은 젠틀맨으로 통한다. (가운데 사진) △ 카메라 세팅을 기다리며 환담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 (오른쪽 사진) △ 촬영이 잠시 없는 틈을 이용하여 개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손창민. (왼쪽 사진) △ 항상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지 않고 입에선 얘기가 끊이지 않는 손창민은 슛 사인만 떨어지면 곧장 만철이가 되는 변신 아닌 변신(?)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 △ 뮤직비디오 형식으로 편집할 때 필요한 흙묻은 신발이나 사진을 쥐고 있는 손 등의 클로즈업 컷을 찍고 있다. (왼쪽 사진) △ <나두야 간다>는 박철수 감독 영화 <가족시네마>와 <봉자>의 조감독이었던 정연원 감독의 데뷔작이다. (오른쪽 사진)

아내, 누님 그리고 싸모님, <바람의 전설>의 이칸희

더이상 배울 것도, 가르쳐줄 스승도 없어 5년 만에 ‘하산’한 박풍식(이성재)이 춤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어 카바레를 찾는다. 그런데 풍식이 누군가. 그는 제비를 경멸하는 ‘예술가’다. 그 격에 맞는 파트너를 찾기 위해 신중을 기하다가 눈에 번쩍 띄는 우아한 사모님이 있었으니 경순(이칸희)이다. 기품이 뚝뚝 흘러넘치는 그들의 왈츠 자세에 카바레 필부필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스크린 밖에서 지켜보는 이에게도 이들의 만남이 어쩐지 설렌다. 그런데 정치하는 남편의 뒤통수만 봐도 울화통이 터지는 여인이 제 짝을 만난 건 춤만이 아니다. 지적인 눈빛과 어울리는 도도한 입술에서 의외의 말이 터져나온다. “오늘은 그냥 못 가. 나 배고파. 나 좀 채워줘.” 갑자기 묘한 긴장감과 함께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달리는 차 안에서 해방감에 취한 그녀가 70년대풍 한국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한다. “끼아아악! 미스터 박, 더 빨리 달려줄 수 있어? 끼아아악!” 급기야 술에 취해 흐트러진 자신을 침대에 온전히 재우고 불침번만 서버린 풍식에게 원망의 베개를 집어던진다. 이런 장면들은 웬만해선 유치찬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평소에 “어쩜 화장실 갈 때도 심각하니”라는 말을 들을 만큼 조신한 이칸희의 고운 자태를 만나 기막힌 유머가 됐다. 그녀는 풍식을 제목 <바람의 전설>에 어울릴 만한 제비들의 전설로 만들어주는 당사자인데 그녀가 나오는 시퀀스는 영화 속 영화 같다. “자신을 발견해준” 박정우 감독이 “아∼ 진짜 <미워도 다시 한번>이다”라고 감탄을 연발한 그대로 이들 장면을 그 고전적 영화 스타일로 찍었고, 그 속에서 이칸희의 기품과 어그러지는 대사가 의외의 화음을 발산한다. <공공의 적>에서 ‘공공의 적’ 이성재의 아내로 나왔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의 아내로 죽은 딸의 화장터에서 펑펑 울었지만 배우 이칸희를 기억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그런데 그는 어딘가 낯이 익다. 아기용품 CF에 나오곤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그렇군’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인상이다. <바람의 전설>에서 그는 진지할수록 웃음을 선사하는 캐릭터다. 실제로 아주 차분하고 진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찍은 장면들을 보고 시사회에서 그렇게 웃어댈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의외의 반응에 놀랐다. 하지만 그 표정이 밝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의 연극과 몇편의 드라마를 거쳐 어느덧 30대 중반에 이른 ‘여배우’로서 “역할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꾸준히 버틴 게 나의 힘이에요. <황산벌> 속 대사처럼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고 할까. 30대 여배우가 할 수 있는 공간이 아주 좁지만, 나이가 들수록 빛을 보는 연극계 출신 남자배우들이 좋은 모범이라고 생각해요.”

[새영화] 택시운전사의 두집살림기 <라이어>

두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면 거짓말일까 어려운 질문이지만, 여하튼 이 말이 정말이라고 우기면 십중팔구 한 여자도 옆에 남아있지 않게 될 터. 그래서 정만철(주진모)은 두 집 살림을 하면서 각각의 여자에게 다른 여자의 존재를 숨긴다. 택시 운전사인 그는 주·야간 교대근무를 핑계삼아 저녁은 이 집, 아침은 저 집 하는 식으로 하루도 빼지 않고 두 집 모두를 들러 남편 노릇을 성실히 한다. 이쯤 되면 정말 두 여자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난 두 여자 다 정말 사랑해”라는 말을 친구 한 명에게밖에 하지 못하는 그의 삶은,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라이어〉는 두 집 살림 하는 남자의 소동극이다. 정만철은 치밀한 시간계획으로 두 집 살림을 1년 동안 들통나지 않고 해왔다. 그런데 자기 택시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현상수배범이 탔고, 사고가 겹쳐 엉겁결에 이 범인을 자신이 붙잡은 결과가 됐다. 자기도 모르게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유명해지면 두 집 살림 하는 자기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기를 쓰고 기자들을 피하고, 그런 만철의 태도에 경찰은 경찰대로 다른 범죄혐의를 의심한다. 거짓말이 다른 거짓말을 낳고, 거짓말들끼리 모순되는 걸 피하기 위해 만철의 친구가 만철의 아들이 되고, 급기야 만철이 동성애자가 되기까지 한다. 원작이 영국 연극인 이 영화에서 거짓말들의 얼개는 대체로 잘 짜여 있다. 개연성이 있고, 서로 모순된 거짓말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는 폭소를 자아낸다. 상투적이거나 억지스런 거짓말들이 더러 있는데, 극의 구성을 위해 불가피해 보인다는 점에서 용인이 된다. 극의 구성이 요즘 코미디 영화들과 달리 고전적인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 배우들의 개인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등장하는 튀는 거짓말들은 좀 위태로워 보인다. 공형진, 손현주, 임현식의 코미디 연기도 9 대 1쯤의 비율로 잘 나가다가 위태로울 때가 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이 소동극에는 고급스런 의도가 담겨 있다. 이 남자는 ‘거짓말쟁이 바람둥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고, 그게 상식적이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이 상식과 이 남자의 자기 믿음 사이엔 이을 수 없는 균열이 있다. 두 여자를 향한 이 남자의 사랑이 진실할수록 그 균열은 더 커진다. 관객들로 하여금 상식에서 출발해 웃는 사이에 어느덧 균열과 마주치게 하자는 게 〈라이어〉의 의도다. 그 의도는 절반쯤 성공한다. 거짓말하기에 지친 만철이 다시 억지로 기운을 내 다른 거짓말을 만드는 모습에선 거꾸로 두 여자에 대한 만철의 사랑이 전해진다. 만철이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했다가, 그걸 번복하고 두 집 살림 한 사실을 인정하자 두 여자는 차라리 만철이 동성애자이기를 바라는 역설을 드러낸다. 급기야 동성애 흉내까지 쉴 새 없이, 가끔씩 튀는 수다 속에 그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 게 조금 아쉽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김경형 감독의 두번째 영화다. 23일 개봉.

거짓말에 휩싸여 자신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비애, <라이어>

<라이어>는 레이 쿠니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 한국에서도 연극으로는 보기 드문 성공을 거두었던 <라이어>는 적절하게 바꾸어놓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원제는 다) 거짓말만으로 전체를 이끌어나간다. 사소한 사고와 그로 인해 무너질 위기에 처한 한 남자의 삶, 그 삶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에 끌려든 몇몇 인물이 전부인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뼈대 위에 영화 한편을 올려놓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경형 감독은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성공작으로 만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는 이모티콘으로 얼버무리고 지나간 원작 인터넷 소설의 여백을 에너지로 채웠고, 그저 나열하기만 하는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흘러가는 드라마로 재구성했다. 김경형 감독은 또 한번 부딪힌, 집 한채를 뜯어고친다고 할 만한 어려운 각색을 어떻게 만들어왔을까. <라이어>는 구멍 하나없이 촘촘한 원작과 함께 그 변화에 대한 기대 때문에도 흥미로운 영화다. 설정과 규모가 약간 바뀌었지만 영화는 대체로 원작과 비슷하다. 택시기사 만철(주진모)은 고향에서 만난 아내 명순(신영희)과 부유하고 아름다운 또 다른 아내 정애(송선미)와 살고 있다. 복잡한 시간표를 따라 두집을 오가는 그는 1년 동안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이중의 삶을 꾸려왔다. 그러나 우연히 지명수배범 신장원을 태운 어느 밤, 그 시간표에 치명적인 구멍이 뚫린다. 교통사고가 나서 스케줄이 흐트러진데다가 신장원이 체포되는 바람에 시민영웅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만철은 같은 집에 사는 친구 상구(공형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 공모는 연이은 장애물에 부딪힌다. 박 형사(손현주)와 김 기자(임현식)가 그를 따라붙고, 신문엔 얼굴이 실리고, 명순은 급히 정애의 집으로 달아난 만철을 찾아다닌다. 즐거워야 할 생일. 만철은 작가도 감탄할 만한 거짓말을 이어가면서 진정 사랑하는 두 여자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라이어>에 제대로 모습을 보이는 인물은 이 여섯명과 정애집 위층에 사는 게이 알렉스가 전부다.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은 반나절 남짓. 노상강도와 싸우는 사건의 발단을 자동차가 뒤집히는 사고로 바꾸고 공간을 넓혔지만, 무대 위에서 긴장감 있게 치고받는 대사만으로 영화는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 때문인지 <라이어>는 연극보다 속도를 늦추는 역행을 택했다. 만철과 공범 상구는 두 여자와 두 남자에게 쉴새없이 거짓말을 쏟아놓아야 한다. 정애에겐 시골길에서 차가 고장나 밤을 샜다고, 김 기자에겐 동명이인 정만철이 존재한다고, 박 형사에겐 남모를 비밀생활이 있었다고, 명순에겐 만철이 회사갔다고. 그 와중에 여섯명은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서로 만나고 그때마다 또 다른 거짓말이 뛰어나와서 이전 거짓말에 몸을 포갠다. 급박할 거라고 기대하기 쉽지만, <라이어>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길게 만철과 상구의 난감한 표정과 몸짓에 머문다. 김경형 감독은 <라이어>는 재미있는 코미디이면서 거짓말에 휩싸여 그 자신마저 잃어버린 남자의 비애도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그런 비애는 몰아치기만 해선 느끼기 힘든 것이다. 발악에 가까운 거짓말은 코믹하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가엾게. 그 정서 사이에 조금은 높낮이가 어긋난 틈이 있어 삐걱거리기도 하지만 진심은 항상 마음을 사는 법이다그 진심이 자연스럽게 배어나기 위해선 연기도 중요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김경형 감독은 “공형진에게서 느린 연기를 끌어내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거짓말을 해대는 이들은, 혹은 반나절밖에 안 되는 시간 동안 수없이 정체성을 바꾸는 남자를 눈앞에서 보는 이들은, 어떻게 감정을 수습할까. <라이어>의 배우들은 그 궁금한 질문에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준다. 노련하거나 신선하거나 변신을 시도하는 이 배우들은 <라이어>가 재미있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지만, 그 재미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듯 자신을 과장하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럿이 함께 있어 책임을 나누고 서로 바라볼 때가 더 좋아 보인다. 흔치 않은 소재와 제약, 형식을 가진 <라이어>는 여러 면에서 자주 보긴 힘든 영화다. 이 영화에서 중혼이나 동성애는 배척하는 손짓에 밀려나지 않고 오해받고 있으므로 감싸야 할 이해의 시선으로 받아들여진다. 원작에 없는 에필로그를 덧붙인 김경형 감독은 감히 손대기 힘든 원작을 두고도 자신만의 정서를 덧붙이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가 싣고 싶었던 정서는 새로 생겨난 에필로그에서만 자기 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영화 전반에 희미하게나마 흔적을 남기는, 공감과 포용이 <라이어>에는 있다. 엄청난 흥행으로 시작한 신인감독의 두 번째 영화, 5년 동안 대학로를 평정해온 막강한 원작, 여섯 배우를 조율하는 섬세한 손길. 조그맣고 단단한 코미디영화인 <라이어>는 그 모습 뒤에 이처럼 엄청나게 무거운 그림자를 깔고 있지만, 그리고 그 그늘은 종종 <라이어> 위로 엄습해오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자로만 남겨두는 데에는 성공한 듯하다. :: 김경형 감독 인터뷰 원작에 내 색깔을 덧붙이고 싶었다 김경형 감독은 2003년 초 마흔셋의 나이에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라이어>는 그가 몇년 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작품. 하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끝낸 그는 도전이 주는 불안과 쉽지 않은 영화를 완성한 만족을 오가고 있었다. <라이어>는 원작에 없는 에필로그가 있다. 에필로그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박 형사는 뭐하고 있을까, 김 기자는 어떻게 됐을까.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머지 네명의 이야기만 넣은 거다. 원작에 내 색깔을 덧붙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지막에 명순과 정애가 만나고, 상구와 만철은 궁상맞게 함께 살고 있다. 두 여자가 같은 택시를 탄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아닐까. 인생은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여섯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마지막 부분은 120컷이 넘는다고 했다. 상당히 복잡한 촬영이었을 것 같다. 미니어처와 인형을 만들어서 미리 연습을 했다. 그렇게 해도 현장에 가니까 다 바뀌더라. (웃음) 그 장면은 속도가 다소 떨어지는 느낌도 있다. 거기에선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이미 거짓말은 다 했고, 언제 진짜가 나올지만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만철은 더이상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 박 형사나 김 기자는 악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만철과 상구를 만나 하루를 망치지 않나. 서로 다른 시선으로 만철을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반응을 담았다. 여섯명의 앙상블을 유지하려니까 너무 힘들었다. 이래서 밥먹고 살겠나 싶어 유학가고 싶다. (웃음) 영화 두편이 모두 코미디다. 다음 작품은 어떤 장르를 염두에 두고 있는가. 코미디는 가장 어려운 장르라서 나이 50이 넘어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영화는 만화가 원작인데 코미디는 아니고 차분한 드라마가 있는 작품이다. 1500컷 정도 되는 <라이어>에 비해 800컷 정도로 이루어지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소리없이 출몰하는 건조한 심리적 공포, <강령>

그들은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그들의 일상을 여지없이 부숴버린 그 비극을 작정하고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순간의 선택에서 비롯됐고, 그 선택은 따지고 보면 그들의 사소한 욕망이 낳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진짜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어느 날 유괴범한테 쫓기던 소녀가 우연히 사토(야쿠쇼 고지)의 가방에 숨어들고, 유괴사건의 담당 형사는 단서를 찾기 위해 혼령을 불러내는 능력을 지닌 준코(후부키 준)에게 접근한다. 준코는 결국 소녀를 남편 사토의 가방 속에서 발견하지만 사람들이 이를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망상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 순간부터 이들 부부가 보여주는 변화들은 영화의 전반부에 이미 암시된 것들이다. 준코는 자신만 볼 수 있는 원혼들로 인해 괴로워했지만, <식스 센스>의 소년과 달리 그들의 사정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떳떳하게 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토는 아내의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내심 그녀가 너무 유명해지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이중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제 영화는 그처럼 인정받고 싶어하던 자신의 능력을 기만하면서까지 사건을 수습하려는 준코와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홀로 소녀의 원혼을 마주하는 사토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강령>에는 공포영화의 대명사격인, 선행 사운드로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면 따위는 없다. 오직 건조한 심리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설명적인 신은 배제되고, 충격을 안겨줄 만한 결정적인 액션들은 생략되거나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지며, 화면은 느슨하게 구성되어 그 자체로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비어 있는 화면 한 구석에서는 마주하기 두려운 그것들이 나타나고,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소리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공포를 조성한다. 영화에서 소녀의 원혼과 사토는 물리적으로 접촉하는데 사토가 소녀의 원혼을 몽둥이로 폭행할 때의 둔탁한 소리, 소녀가 사토의 가슴에 진흙 묻은 손자국을 내는 순간의 질척한 소리는 그 어떤 음악이나 음향보다도 소름끼치는 울림이 된다. 일상적인 사운드에서 출발한 그 내면적인 울림은, 공포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의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