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인생을 재건하려는 어느 이혼녀의 묻지마 프로젝트, <투스카니의 태양>

한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나가던 작가 프란시스(다이앤 레인).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맞는 바람에 졸지에 집에서도 쫓겨나 신세 처량한 이혼녀가 된다. 신세 비슷한 이들이 수두룩이 투숙한 호텔에 칩거한 그녀에게 정말 큰 문제는 삶의 의욕 내지는 창작에 대한 열정까지 모두 사라졌다는 것. 벽을 타고 들리는 울음소리에 공명하며 자살의 유혹까지 직면했으니 정말 위기의 여자랄밖에. 그나마 그녀에게 남은 행운은 마음 써주는 좋은 친구가 있다는 정도. 그녀가 레즈비언 친구 패티(산드라 오)의 권유를 받아들여 투스카니 여행 티켓을 손에 쥐면서 실의에 빠진 여인이 삶을 되찾는 희망의 갱생스토리가 펼쳐진다. 하지만 어떻게? 영화는 <투스카니의 태양>이 그녀에게 필요했던 처방의 모든 것이라는 식의 순진함을 보이진 않는다. 처방의 요점은 유쾌하고 낭만적인 일련의 일탈. 낙천적인 게이들 사이에 파묻혀 일종의 묻지마 관광을 떠난 것도 그렇지만 있는 돈 탈탈 털어 다 쓰러져가는 투스카니의 전원주택을 구입해 아예 눌러앉는 것은 이 ‘묻지마 행보’의 백미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유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해바라기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여인에게 ‘태양을 고대한다’는 뜻의 ‘브라마솔레’라는 이름의 저택이란, 삶에 다시 한번 햇살이 비추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도 결국 이 폐허가 된 집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지 않던가. 그녀의 창조성을 은유하는 메마른 수도꼭지가 있고, 비바람마저 막을 길 없는 이 저택의 폐허가 그녀 자신의 은유이고 보면, 영화가 집을 수리하는 과정과 그녀의 회복을 꼼꼼히 등치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로저 에버트가 이 과정을 ‘성공적인 도피주의(escapism)’로 평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따라붙는 것은 과연 성공적인 도피주의가 정말 가능한가에 관한 질문. 이 행복한 이야기에 대해 너그러움과 냉소, 호평과 혹평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도 여기서부터다. 가장 큰 혐의는 물론 이 영화가 여지없는 할리우드표 거짓 복음이라는 건데, 동명의 원작인 이 사실 이탈리아에 있는 집을 남편과 함께 개수하며 느낀 점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수상록이었다는 것과 절망적인 이혼녀 설정 따위는 있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자면 영화가 다만 ‘집의 개축=자아의 재건’이라는 컨셉과 장소만 가져왔다는 느낌도 물론 피하기 어렵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묻지마 행보 속 프란시스에게는 계속 무엇인가가 일어나거나 찾아온다. 플롯의 결락(缺落)을 말끔히 땜질하는 데 유용한 천둥번개를 시작으로, 뱀이 나타나고, 남자가 나타나며 애를 밴 친구 패티가 찾아온다. 그게 아니라면 주인공은 또다시 도피를 하여 새로운 실마리(또는 기적)를 물어온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비둘기 똥이 머리에 떨어지는 이적과 함께 시작된 이 행복한 상상은 어처구니없는 낙관이라기보다 ‘증거’(Sign)를 표지 삼아 구원을 향해 헤매는 종교적 순례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계시의 말씀을 들려주는 신(神)을 페데리코 펠리니가, ‘오라클’ 대신 ‘모자 쓴 여인’이 코믹하게 대신하기는 하지만. 거기다 시종 석양의 색채로 물든 파스텔 톤의 거리, 흙과 돌로 만든 길과 담이 정겨운 투스카니의 정경은 거의 약속의 땅만 같다. 영화는 이렇게 발랄한 흐름으로 관객에게 재생의 복음을 포교하는 중이다. 성실하게 집을 개축하며 믿음의 행위를 하는 주인공과 거듭되는 응답의 기적이 있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문제는 로맨틱한 천년왕국으로 가는 이 여정이 영화의 클리셰를 구해내기엔 너무 순조롭기만 하다는 점이다. 차라리 그 역할을 해내는 것은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로 필력을 인정받은 오드리 웰스가 기꺼이 자신의 문체를 집어넣어 버무린 작가적 육성이다. 실제로 30대 여성의 흔들리는 심리를 진솔하게 토로하는 프란시스의 감수성은 침대에 홀로 앉아 켜보는 ‘파워북’을 통해 <섹스&시티>의 캐리의 그것과 살짝 겹친다. 여기다 좌충우돌하는 액션으로 슬럼프에 빠진 한 작가의 감성 변화를 너끈히 받아넘긴 다이앤 레인의 호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감춰졌으며 영화가 어떤 잔재주를 썼는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화면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이 관객 스스로 이 뻔한 기적들을 믿도록 작동시키는가 일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 편협하고 성급한 답안을 제출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 자아의 은유인 ‘브라마솔레’가 재생의 대가로 그녀의 로맨스가 아닌 다른 이들의 삶을 축복할 때에야, 클리셰는 비로소 생태적 욕망으로 승화될 여지를 보이고 영화는 원작의 중의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 순간, 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투스카니의 태양>은 장르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작은 진심으로 빛난다. :: 비하인드 스토리 <투스카니의 태양>이 빛나기까지

[인터뷰] MBC 새 아침드라마 <열정>에 출연하는 조미령

남편 때리는 여자로 나오는데요. 혹시나 시집못 가나 싶을 정도예요(호호호). 탤런트 조미령(31)이 26일 MBC 새 아침드라마 <열정>(극본 주찬옥, 연출 한철수)에서 덜렁대는 허풍쟁이 남편(손현주 분)을 주전자로 열정적으로 패는(?) 다혈질의 시간강사 배역으로 아침 시청자들을 찾는다. 이른바 `패치워크 패밀리'를 다룬 이 드라마는 각각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 가정의 모습을 밝고 코믹한 터치로 그려간다. 치과의사인 준태(최철호 분)와 전업주부 인희(진희경)부부, 착하지만 몽상가인 우식(손현주)과 똑똑한 시간강사 아내 강지(조미령)부부가 각각 남편의 바람끼와 성격차이로 이혼한 뒤 최철호는 조미령과, 손현주는 진희경과 재혼한다. 드라마는 손현주-진희경 커플, 그리고 이들이 각각 데리고 온 6살, 7살짜리 아이들이 한 지붕 아래 새로운 가정을 만들어가는 얘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강지는 심한 성격 차이를 겪는 남편 준태의 새 여자인 인희를 만나 부족하지만 데리고 살라고 부추기는 당돌한 여성이다. "아무리 드라마이지만 이혼이 너무 쉽다"고 운을 떼자 조미령은 "아마도 이혼율이 높은 게 외아들, 외동딸이 만나 결혼하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봐요.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마음이 줄어들어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키워지니까. 전 7남매 중 막내예요. 어려서부터 엄청 양보하고 살았어요. 결혼하면 남편을 하늘로 모실 거예요.(호호)"라며 농담 반 진담 반 대꾸로 받아쳤다. "아침드라마 출연 결심이 쉽지 않았을텐데…"라고 물어보자 그는 "어두운 드라마였으면 안 했을거예요, 밝은 드라마고 또 손현주 오빠랑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드라마 선택할 때 역할이 크나 작나 그런 것보다는 성격이 강한 역할을 굉장히 좋아해요. 남들이 표현하지 않았던 거, 제가 표현해보지 못했던 거, 그런 것들을 좋아해요"라며 강한 캐릭터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연기자가 주연을 꿈꾸는 게 인지상정일텐데 정말 속으로는 `큰 배역을 원하겠지'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올해 소망을 묻자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올해 영화도 한 편 했고 드라마도 좋은 작품 많이 했는데 영화하고 드라마를 꾸준히 같이 했으면 좋겠어요. 저같은 케이스는 뭐 톱 스타를 꿈꾸는 케이스가 아니기 때문에 빛나는 조연으로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이 상태로만 꾸준했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런가 싶어 "왜 주연이 아니고 조연이냐"고 다시 한번 묻자 그는 `안분지족'론을 펼쳤다. "저는 주연이 아니예요. 사람은 자기 주제와 분수를 정확히 알아야 자기의 인생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걸 너무 일찍 알았어요(호호). 제 그릇은 이 만큼인데 그 이상을 바라면 넘쳐요, 화를 부를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내 그릇의 사이즈를 정확히 알고 그 그릇에 정확히 물을 담을 때 그게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조미령은 "(주연)하고 싶은데 못 해서 그렇지 않냐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전 항상 뭔가 튀는 역할이나 개성있는 역할, 나 아니면 못하는 역할을 찾았어요"라며 강조했다. "<천생연분>에 이어 이번에도 코믹한 연기 스타일인데 연기에 변신을 줄 생각은 없는가"라고 묻자 그는 갑작스러운 이미지 변신 시도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제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물론 연기자이기 때문에 여러 이미지를 갖는 것도 좋겠지만, 만약 지금 와서 `비련의 여인' 한다 이러면 저도 불편하고 보시는 분들도 굉장히 불편할거예요(호호). 같은 맥락의 밝은 연기이지만 거기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고 있어요. 시청자들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끝으로 조미령이 출연한 영화 <어깨동무>의 흥행참패를 묻는 소감에 그는 "다 대통령 탄핵 때문이에요(호호). 개봉날이 바로 그 날이었어요"라며 대통령 탄핵을 원망(?)했다.

[현지보고] 극찬 받은 <킬 빌2>의 LA 시사기

세상 모든 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수도 있고, 때로는 용두사미가 되기도 한다. 무덤에서 일어나 ‘빌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길고 긴 복수의 여정에 나섰던 전직 암살원(일명 브라이드, 우만 서먼)이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 4월13일, 미국 개봉을 며칠 앞두고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를 LA 할리우드의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만났다. 때맞춰 아크라이트 극장에서는 타란티노 회고전이 진행 중이었다. <킬 빌 Vol.1>의 DVD 발매와 겹쳐 이곳저곳에서 다시 타란티노의 얼굴을 볼 일도 많아졌다. 직접 선곡한 전편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히트하면서, 영화 못지않게 음악에 대한 취향도 인정받은 타란티노가 요즘 가장 인기있는 TV 가수 발굴쇼, <아메리칸 아이돌>의 심사위원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월16일, 타란티노가 가장 좋아한다는 아크라이트의 유명한 돔 극장에서는 <킬 빌 Vol.1>에 이어 <킬 빌2>가 자정을 기해 일반인들에게 첫선을 보인다. 엇갈린 평단의 논쟁 속에 복수의 첫걸음을 뗄 당시에 비하면, “탁월하게 재미있고 황홀하게 우아한 결말”이라는 <버라이어티>의 극찬은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잠깐. 전편의 폭력성과 키치적 감수성에 토를 달던 평단이 이구동성으로 “만족할 만한” 결론이라고 점잖게 만장일치를 내리는 것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일단 선정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강렬한 액션으로 기선을 잡은 전편에 비하면 2편은 겉보기엔 무척이나 점잖다. 음양의 이론까지 빗댄 <빌리지 보이스> 짐 호버먼의 말을 빌리자면, “전편은 살냄새 나는 ‘양’기가 느껴지고, 후편은 천상의 ‘음’기가 느껴지는” 격이다. ‘수다쟁이’ 타란티노가 돌아왔다고 할 만큼, 후편에서는 액션 못지않게 ‘설전’이 중심이어서일까. 복수극 자체보다는 이면에 감추어진, 실상 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이야기나 인물들이 드러나서일까. 그러고보니 ‘검은 코브라/브라이드’의 이름이며 기타 많은 비밀들이 밝혀진다. 살냄새 나는 양기로부터 천상의 음기로 총여섯장으로 이루어진 후편은 전편의 기억을 되살리는 브라이드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흑백 화면 가득 40, 50년대 영화에서나 봄직한 리어 프로젝션으로 영사되는 배경 풍경은 우리가 ‘향수와 기억’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필름누아르의 주인공처럼 어디론가 차를 몰며, 브라이드는 냉소적이고 센티멘털한 플래시백으로 친절히 복수의 시작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후편은 리스트에 남은 세명, ‘방울뱀’ 버드, ‘캘리포니아산 뱀’ 엘 드라이버와 그리고 두목 빌에게 차례로 복수하는 사건의 진행과 더불어 이 모든 복수극의 뒷사연을 추적하는 플래시백이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나는 구성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직전의 텍사스의 결혼식장에서 우리는 비로소 악명 높은 ‘빌’을 소개받는다. 빌과 검은 코브라의 사연이 드러나는 첫 번째 장이다. 후편의 주인공은 빌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두드러지는 빌의 페르소나는 사실 빌 역을 연기한 배우 데이비드 캐러딘의 페르소나와 무관하지 않다. 1970년대 미국에 브루스 리가 불을 지핀 쿵후영화 바람이 불었을 때 대인기를 끌었던 유명한 시리즈의 주인공, <쿵후>의 주인공을 맡은 이가 바로 데이비드 캐러딘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캐러딘이라는 캐스팅이야말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열광해 마지않는 70년대 대중문화, ‘미국판’ 아시아 문화 수용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하는 살아 있는 아이콘인 셈이다. 평단의 열광적인 반응은 예외없이 데이비드 캐러딘의 스크린 복귀를 언급하고 있다. 타란티노의 표현을 빌리자면,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포주’(pimp) 캐릭터와 쿵후 마스터의 아우라가 어우러진, 매력적으로 비열한 백인 악당 캐릭터는 올드영화 팬들의 향수를 자극할 만하다 그러나 애당초 <쿵후> 드라마 제작을 제안한 브루스 리가 ‘당연히’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사연이 ‘아시아 남자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인 쿵후 영웅 캐러딘의 페르소나에 대한 타란티노와 평단의 애정은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불편하다. 짐 호버먼이 애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인 숭배의 경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타란티노의 장르 사랑은 후편에서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과 쇼브러더스 쿵후영화의 결합으로 드러난다. 브라이드의 오적 중 빌을 제외한 유일한 남자 멤버인 방울뱀 ‘버드’는 황량한 사막에 둥지를 틀고, 브라이드를 기다리는 고독한 총잡이 역을 맡았다. <저수지의 개들>에서 미스터 블론드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마이클 매디슨이 연기하는 버드의 최후는 브라이드의 짜릿한 복수를 기대한 팬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 듯. 정작 전편에서처럼 몸으로 치고받는 복수극의 상대자는 엘 드라이버(대릴 한나)가 맡았다. 이 시점에서 브라이드의 복수극에서 드러난 패턴 하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 버드나 빌 같은 남자 캐릭터들은 할말 다하며 우아하고 심플하게 죽어가는데, 여자 주인공들은 난장판의 몸싸움 끝에(흔히 ‘고양이 싸움’ (Catfight)이라고 한다) 처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걸까. 평론가들이 종종 지적하듯, 볼썽사납게 죽어가기에는 너무나 쿨한 남자 영웅들에게, 타란티노는 절대로 ‘무례한’ 대접을 하지 않기 때문일까. "쿵후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러브스토리” 전편에서 브라이드에게 복수의 검을 쥐어준 하토리 한조가 있었다면, 후편에는 학권의 진수를 전수하는 소림사 쿵후의 아이콘, 파 메이(Pai Mei)가 있다. 쇼브러더스 소림사 시리즈의 전설, <소림사 36실>의 고든 류(Gordon Llu Lai-hui)가 몸소 브라이드의 ‘백발 도사’, 쿵후 스승으로 나온다. 소림사 시리즈에서 일종의 반골 악당 캐릭터인 ‘파 메이’는, 브라이드의 사부이기도 했던 빌이 또한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 중국에서 현지 촬영했다는 후편의 8장, “파 메이의 잔인한 수업”은 쇼브러더스 영화 스타일에 대한 타란티노의 헌신적인 애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올드스쿨 쿵후영화의 빛바랜 와이드스크린과 조악한 사운드 녹음, 과장된 대사들, 극단적인 줌인, 아웃의 촬영까지 70년대 초 쿵후영화의 정취를 그대로 옮겨놓았다. 사당 앞에 높인 길고 긴 계단만 봐도 도제수업을 받으러온 브라이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후편의 백미는 빌과의 한판 승부일 것인데, 불꽃 튀기는 한판 액션극이 벌어지지 않을까라는 예상과 달리 타란티노는 심리전이 동원된 ‘설전’으로 후반부를 장식한다. 타란티노의 표현을 빌리면, 미녀 킬러들을 거느린 ‘악마적인 보호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구사하는 빌의 능수능란함은 과연 블랙스플로이테이션판 포주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전편에 맛깔나는 대사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의식이라도 한 듯 후편에서는 ‘슈퍼맨’ 조크를 곁들인 말의 진수성찬을 준비해두었다. 전사로서의 검은 코브라가 아니라 여자로서의 브라이드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의외다. 타란티노는 전편에 죽은 ‘살모사’ 버니타의 딸과 젊은 시절의 빌을 주인공으로 한 외전격 애니메이션을 준비 중이라는데, 후편에 끝없이 반복되는 엔딩 크레딧처럼 <킬 빌>을 끝내고 싶지 않은 속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는지.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잘하는 건 당연히 알지만,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는 타란티노의 연출의 변이 그에 걸맞은 끝맺음을 했는지는 관객이 평가할 일이다. 하지만, 캐러던이 재치있게 정의했듯, “쿵후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러브스토리”로 끝나는 <킬 빌>에서 정작 복수에 성공하는 것은 터프한 여자 영웅, ‘검은 코브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게 장르와 시대와 국적을 막론한 잡식성 B급영화 취향을 참으로 순수(!)하리만치 옹호해낸 점에서 백인 남성 감독 타란티노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한국영화의 ‘소년성’진단과 김기덕, 페미니즘 논쟁에 덧붙여

1. 한국영화의 오이디푸스, 잠재적 아버지로서의 소년 <씨네21> 446호 ‘기획’에서 허문영은 전쟁 직후의 폐허에 원빈만을 남겨둔 <태극기 휘날리며>의 결말로부터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추론해낸다. 공동체를 대변하는 영웅이 아니라 공동체와 무관하게 홀로 남겨진 소년이 성장영화의 큰 틀에서 한국영화의 대성공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몇장 뒤에는 최근의 페미니즘 논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 황진미의 <사마리아> ‘영화읽기’가 실려 있었다. 상당한 공감과 부분적인 이견을 촉발한 두 글에 하나의 화답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은 <사마리아> 역시 주인공을 홀로 남겨두며 끝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성별이 다를 뿐. 아버지 없는 이 두 소년소녀는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없다. 그래서 김기덕의 지정학이 중요해진다. <태극기…>가 대박의 신화를 쓰는 동안, <태극기…>로는 엄두도 못 낼 상을 탄 <사마리아>가 완벽하게 소박맞았다는 점은 영화산업의 명암으로만 치부될 문제가 아니다. 여기엔 사회의 무의식과 공모하거나 단절하는 텍스트의 무의식이 관여하고 있다,는 게 이 글의 전제다. 가족 삼각형의 회귀 - 반영웅은 오지 않았다 가족삼각형을 들이대는 일도 식상할 때가 됐건만, ‘아버지-어머니-소년’의 도식이 계속 유효한 건 한국영화가 새 천년에도 여전히 유사가족의 테두리에 결박돼 있는 탓이다. 특히 아버지는 인물로는 부재해도 흔적으로 존재하며, 그 상징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정된 법과 제도, 그것을 구현한 공동체 등임은 정신분석의 상식이 되어 있다. 남재일은 한국 근대사에서 국가라는 아버지의 부재를 일제나 군사정권 따위의 의붓아버지 혹은 미국 같은 큰아버지가 대리했다고 보는데(441호), 부실한 정통성을 강력한 권위로 때우는 이 유사아버지는 허문영이 말한 나쁜 공동체와 다름없다. 하지만 소년이 모든 아버지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건 아니다. <태극기…>의 원빈은 홀로 남겨질 때조차 형이 떠맡던 착한 아버지로서의 ‘소년가장’ 역할을 승계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50년 뒤엔 ‘어르신’이 돼서 손녀딸의 영접을 받는다. <실미도>가 국가 자체보다 ‘나쁜 국가’를 비판한단 점은 주민등록 말소에 분개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사회적으로 공인받으려 한 고아들의 욕망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장동건이나 설경구에겐 그들을 용인하고 승인해줄 공동체가 어쨌든 필요하다. 그런 공동체의 법은 소년에게 가족의 법, 가부장의 길을 내면화하도록 중층적으로 프로그램돼 있다. 그 매트릭스를 벗어날 수 없는 고독한 소년, 그는 이미 잠재적인 아버지다. 그래서 나쁜 아버지에게 대들다 죽는 <실미도> <태극기…> <공동경비구역 JSA>까지 굳이 성장영화로 묶으려면, 이때 성장은 공동체와 무관한 소년의 모험이 아니라 모험의 좌절이 은연중에 제대로 된 아버지-공동체를 희구하며 소년은 거기서 이름을 얻고 그것과 동일시되려 한다는 전제로 이해돼야 한다. 1천만 관객이 눈물을 떨어뜨린 건 이 전제가 사실 극히 소박한 가족삼각형과 평화로운 사회체제로 구성돼 있는데, 그것조차 파괴된 우리의 과거가 한스러워서일 테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공동체에 냉소한다고 한국의 소년들을 60년대 미국의 반영웅들에 빗대는 건 무리가 아닐까? 두 영화가 1천만명이나 동원한 건 반영웅을 기다린 젊은이들 덕분이 아니라, 가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고 자부하는 ‘어르신들’까지 자신들이 동일시할 비극적 영웅을 보러 극장에 왕림해서다. 진정한 반영웅은 아직 한국의 스크린을 점령한 적이 없다. 허문영은 <지구를 지켜라!>가 드물게 공동체의 영웅을 보여준다지만, 거기서 지구는 오히려 병든 엄마(노동자)에 대한 착란적 은유일 뿐이며 엄마를 착취한 건 우주적 규모로 확대된 나쁜 아버지인 자본가다. 병구는 거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으로 엄마를 망상하고 아버지를 죽이려든다. 물론 저항은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전제하기에 그 좌절은 <실미도> 못지않게 가슴 아프지만, 공동체가 오히려 소수계급의 것이고 연출도 마이너의 래디컬한 실험이었단 점은 병구를 도리어 반영웅으로 보이게 할 정도다. 그러자 흥행 성적도 끔찍했다. 병구는 확실히 너무 일찍 찾아왔던 거다. 사라지지 않는 아버지들의 행렬 이런 ‘성장좌절영화’들과 달리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들은 온전한 성장영화에 속하는데, 청춘드라마의 성격상 여기서 거대한 공동체의 그림자를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친구>의 유오성은 결국 교도소로 들어가듯, 뭔 짓을 하든, 그들이 살 곳은 이 사회이고 사회의 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건 영화의 암묵적 전제와 같다. 이런 전제하에 영화에는 훨씬 미시적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절대 사라지지 않으며,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모습으로 환생한다. 프로이트의 시사대로, 아버지를 제거한 형제들 중에는 아버지가 다시 나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형제애는 결코 평등한 우애로 유지되지 않는다. <태극기…>의 장동건과 원빈은 부자간의 애증을 선보이며(김영하는 세대간 대립으로 본다), 그런 남성적 연대와 갈등은 <실미도>의 조장과 조원들 사이에서도 확인된다. <친구>의 ‘시다바리’ 장동건은 아버지 자리를 차지한 유오성의 여자와 권력을 탐하다 결국 처단된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도 이정진의 여자를 연모하다가 사랑도 우정도 잃고 만다. 여기서 아버지는 이정진→선도부장→대한민국 학교→유신체제로 점층된다. 하나를 물리치면 더 큰 아버지가 버티고 있다. 어느 순간, 기분 더럽더라도 타협하거나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게 잠재적 아버지로서의 소년의 운명이다. 첫사랑을 붙잡지 않고 학원으로 기어드는 권상우처럼. 성장은 그래서 종종 씁쓸하다. 소년의 이런 비애를 가장 현실적이고 원형적으로 보여준 건 놀랍게도 여성감독인데, <질투는 나의 힘>에서 가족삼각형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회적 관계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아버지(문성근)는 아들(박해일)이 사랑하는 여자(배종옥)를 차지하고는 내주지 않는다. 아들은 여자에게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라고 애원하지만, 아버지와 섹스하는 여자는 아들과는 키스만 한다. 아버지를 질투하던 아들의 최종선택은 당연히 금기의 수용과 권력의 계승을 통한 아버지-되기. 여자를 얻는 길도 거기 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대학원생의 오이디푸스 극복기는 아버지에 대한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 것과 다름없다. 아버지가 싫으면 아버지가 돼라! 그러니까 소년성과 관련된 모든 영화는 오이디푸스의 문제로 환원된다. <올드보이>에서 유지태의 근친상간에 금기의 잣대를 들이댄 건 최민식의 소문, 즉 언어라는 상징계의 법이다. 유지태는 이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거대한 팔루스의 탑에 기거하며 스스로 아버지가 되어 최민식을 오이디푸스의 자리로 밀어넣는다. 최민식이 딸을 범한 건 실은 딸과 같은 나이에 죽은 유지태의 여자(누나)를 범한 것과 같다. ‘유지태―누나/딸―최민식’은 15년의 시차로 ‘아버지―어머니―아들’의 놀이를 번갈아 한 셈이다. 겉으론 누나와 딸이지만 구조적으론 아버지의 여자가 문제인 거고, 올드한 보이들은 결국 오이디푸스였던 것이다. 페미니즘의 줄기찬 비판 대상인 성녀/창녀 도식도 넓게는 오이디푸스 체제의 문화적 산물이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시에 욕망되는 무한한 베풂의 존재인 어머니는 속성상 창녀성을 내장하는데, 어머니에 대한 금지(아버지로의 귀속)는 성욕이 부인된 어머니의 신성화와 성욕이 집중될 그외 여자의 창녀화로 분화된다. 그 과정에서 성적 억압이 확대될수록 오이디푸스의 원만한 사회화는 뒤틀린 성욕의 배출로 왜곡될 소지가 크다. 허문영은 아버지의 부재로 소년의 욕망이 충분히 억압되지 못해서 여자가 성기로 환원된다지만, 실은 상징적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 지나치게 강했던 게 한국사회다. <실미도>는 너무나 억압적인 체제로 인해 과격하게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리비도와 그 거세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체제는 그것에 대항하면서 그것에 적응하고 끝내 그것을 닮아가도록 체제의 구성원들을 조련하게 마련. 남성 액션멜로물의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거친 성과 폭력은 전쟁과 독재로 얼룩진 한국사회의 마초 아버지상이 미시적인 아버지들을 통해 전수되고 습속되는 과정의 산물이다. 누구나 그 안에서 커왔던, 다른 방식의 성장이 그닥 가능하지 않았던 한국 관객에게 성장영화는 무의식적으로 어필할 충분조건을 갖췄던 거다. 페미니즘의 비판 도식에 대한 검토 반영웅의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소년들은 아버지 거부와 아버지-되기라는 오이디푸스 이중구속(double bind)의 중간 어디쯤에서 계속 패배하거나 체념하고 있다. 예외적으로 경쾌한 경우는 산뜻한 성장 에필로그를 첨부한 <품행제로>와 아버지 찾기가 성공하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 정도. 그외는 <올드보이>부터 <실미도>까지, 원형적이든 국가적이든 다양한 수위의 상징적 아버지들이 소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해적…>의 중동 근로자나 이대근 이미지는 한국 근대사의 면면들이 아버지로 호출되는 예들이기도 하다. 그러니 한국영화의 소년성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아버지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 아버지는 부인되는 듯한 순간에도 좀더 훌륭한 아버지, 좀더 인간적인 학교, 사회, 국가를 환영처럼 비춘다. 소년은 이 아버지에서 저 아버지로 이동하면서 아버지가 되거나 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정상적으로 극복하려는 욕망이 흔적으로나마 항상 어른거리는 것이다. 아버지 없는 세상? 그것은 소년의 상상력에 아직 포함되지 않는다. 아버지를 정말로 진지하게 심문하는 건 성장좌절영화나 성장영화가 아니라, 허문영이 예견한 ‘성인영화’들이다. <바람난 가족>은 유해와 각혈로 부서지는 부계혈통주의 앞에서 자식과 아내마저 잃는 어른의 영화다. 아버지도 없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홀로 남겨진 어른. 에서 아들에게 살해된 전근대적 아버지(무당)는 근대적 아버지(목사)의 상징계를 뚫고, 살해된 유아(동생의 환유)의 환영이 식탁의 빈자리를 차지하듯 망각으로부터 귀환한다. 그러자 아버지-되기를 앞둔 끝물의 오이디푸스는 죄의식에 휩싸여 진퇴양난에 빠진다. 역시 홀로 남겨진 채 숟가락을 들지도 놓지도 못하는 그는 아버지를 거부할 수도 아버지가 될 수도 없는 이중구속에 처한다. 이 두 성인 오이디푸스는 곧 오이디푸스 체제의 허점이자 구멍을 드러낸다. 중요한 건 이런 딜레마가 공통되게 남성 아닌 여성에게서 대안적으로 성찰된다는 점. 아기를 징그러운 괴물인 양 떨쳐버리는 전지현은 가족주의와 모성이 억압과 착취의 신화임을 고발하며 가족삼각형을 깬다. 물론 그런 광기는 정신병으로 몰리고, 그녀에겐 근대 가족주의를 펑크내는 투신자살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남편을 “아웃”시키며 삼각형을 이탈한 문소리는 그러나 아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가 의미있는 건, 삼각형에 종속되지도 2자 관계의 상상계를 잃지도 않은 채, 상징계의 현실 속에 살아가려고 힘차게 걸레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실적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앞서, 홀로 남겨진 여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아마도 한국영화의 소년성을 극복하는 주체는 성인남성이 아니라, 오이디푸스 바깥을 기획하는 여성들일 확률이 더 클 것이다. 2. 김기덕, 아버지 없는 세상으로의 이탈 <사마리아>가 의미심장한 건 여기서부터다. 이를 두고 여전히 자궁에서 도닦는 김기덕의 여성관에 화내기도 지쳤다고 말하긴 쉽지만, 이는 누적된 불신 탓에 더이상 안 봐도 다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영화를 보기 전엔 나도 약간 이랬다). 하지만 황진미의 지적대로, 그저 복수하고 용서하는 아버지의 영화라기엔 <사마리아>의 딸들이 꽤 주체적이지 않은가? 세 챕터를 관통하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며, 그녀는 ‘나쁜 남자’에 강제로 포획돼 창녀로 전락한 게 아니다. 그래봤자 남성판타지라 우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다른 독법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그렇기에 김기덕의 세계에선 자고로 말도 안 되는 전제를 일단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가령 도무지 개연성 없는 유럽여행 경비를 위한 원조교제란 건 김기덕식 문제제기를 위한 관념적 가설, 즉 극히 건전하고 중산층다운 계획을 위한 자본주의 활용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 계산적 현실주의를 대변하는 여진은 재영에게 “섹스만 하라” 한다. 섹스는 좋은데 인간적 관계는 더럽다는 아이러니는 필요악으로서의 매춘은 용인하되 계약 이상의 바수밀다식 오버액션은 용납할 수 없다는 통념과 같다. 그것은 여성을 창녀/성녀로 분화한 오이디푸스 체제의 법에 기인하며, 경찰인 아버지의 법과 내통한다. 아버지로부터 이탈하기 위한 분열증 그래서 바수밀다의 진심은 무시하고 육체는 착취해온 악덕 포주 여진이 남자들을 만나 돈까지 돌려주면서 감행하는 ‘바수밀다-되기’는, 내면화된 자본주의와 법으로부터 이탈하는 분열증(schizophrenia)으로도 읽힌다. 그 결과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그녀는 황진미 말대로 더이상 심판이나 용서의 대상이 아닌데, 자꾸 아버지는 자신의 법으로 구원하려드는 거다. 이 아버지는 그저 나쁜 어른을 벌주는 게 아니다. 그에게 원조교제는 (친딸은 아니라도) 아버지가 딸을 범하는 짓과 같다. 모텔 안의 딸을 처음 목격할 때 그는 딸 또래의 여자가 피살된 모텔방에 있었다(거울상의 두 모텔은 섹스와 죽음을 변주한다). 잠자는 딸을 훑어보던 시선이 암시하듯 그는 금기 파괴의 원초적 장면을 목격한 건지 모른다. 고로 여진 또래의 딸을 가진 중년남자들은 경찰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으로’ 심판되는 거다. 끝에 굳이 자수하는 것도 내가 죽인 아비와 내가 다를 바 뭐냐는 원초적 자기 처단을 깔고 있다. 돌처럼 무거운 아버지의 법이 내면화된 탓이다. 돌이 아버지의 징벌 도구이자 그의 자동차를 가로막는 방해물이란 점은 매우 김기덕답다. 전자의 돌이 기독교적이라면 후자의 돌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업보를 상징하던 돌만큼 불교적이다. 그 돌을 치워 아버지의 운명의 무게를 들어주는 자는 딸이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는 “누가 그에게서 돌을 치워줄 수 있는가?”로 바뀌는 거다. 그러니 아버지가 딸을 구원한다고만 볼 수 있을까? 그 반대라는 건 아니지만, 분열자인 딸이 아버지의 법에서 좀더 자유로운 건 사실이다. 물론 유구한 남성판타지인 바수밀다의 삶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정답도 아니듯, 여진은 빚 갚기 차원에서 한시적으로만 바수밀다가 된다. 이런 법의 이탈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는 꿈이 암시하듯 불완전하다. 그러나 아버지 없는, 아버지가 꿈꾸던 기적 없는, 금기와 죄의식과 구원의 신 없는 세계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진흙탕에서 공회전하는 아버지의 자동차를 미련없이 버리고 떠난다. 아버지를 찾아서? 아닐 테다. 그녀는 <봄 여름…>의 폐쇄회로에 갇힌 대문자 ‘인간-남자’가 아니다. 아버지의 금기에 얽매인 <장화, 홍련>의 소녀, 아버지를 벗어나려다 호수 복판에서 도닦게 된 <미소>의 처녀가 여전히 진퇴양난의 이중구속에 빠진다면, <사마리아>의 단독자는 분열증의 잠재력을 내장한 채 아버지의 법 바깥을 오간다. 오이디푸스 체제 바깥을 넘볼 수 있는 힘 돌이켜보면 김기덕은 철저히 아버지를 등지고 있었다. 단지 아버지가 안 나오는 게 아니라 나쁜 아버지와 대놓고 싸우지도 않고 좋은 아버지를 꿈꾸지도 않았다. 체제의 변두리가 거처였던 그에게 아버지는 기껏해야 ‘수취인 불명’이다. 그 부재의 기표는 분리와 차별의 제도적 상징계로 뭉뚱그려져 부정되므로, 남녀간의 폭력적 합일은 다분히 어머니-아들이 구분 없었던 상상계에 대한 집착으로 끈적인다. 그 신화적 모태가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게 비극이다. 김기덕의 소년들은 오이디푸스적 성장이나 성장좌절 대신, 전 오이디푸스 단계로의 퇴행 혹은 퇴행좌절을 겪는 셈이다. 그래서 그의 여성상은 <태극기> <실미도>식의 성녀/창녀 이원론이 아니라, <올드보이>에 깃든 성녀=창녀 일원론이다. 이 역시 비판받아 마땅한 신화적 클리셰이긴 하다. 한데 <악어>부터 <해안선>까지 남성주도 작품은 아버지-되기의 거부와 어머니와의 합일의 불가능성이라는 이중구속에 빠져 늘 남녀가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 반면, <파란 대문>과 <사마리아>처럼 여성주도 작품이 의외로 열린 결말인 까닭은 뭘까? 아마도 창녀-되기가 여성 주체의 분열증에서 비롯하기 때문 아닐까? <나쁜 남자>의 강제적 창녀-되기가 여전히 남녀가 ‘붙어야 산다’는 전 오이디푸스 구조를 취한다면, <파란 대문>은 여자들끼리 붙어도 산다는 이상적인 뒤집기이고, <사마리아>는 여자 혼자도 살 수 있다는 미약하나마 현실적인 모색 아닐까? 오이디푸스 체제 바깥을 판타지라도 할 수 있는 건 심지어 김기덕에게서도 여성 아닌가? 페미니즘의 구속 페미니즘 비평은 당연히 되물을 것이다. 그딴 식으로 창녀-되기를 옹호하는 저의가 뭐냐고. 그러나 방점은 ‘창녀’가 아니라 ‘되기’에 찍혀야 한다. 창녀-되기는 아버지를 피해 어머니로 거슬러 간 남성 오이디푸스가 막다른 길에서 좌초할 때, 여성에 투사된 탈오이디푸스적 분열증의 한 예일 뿐이다. 김기덕의 상상력에선 그게 유일한 예란 게 문제지만, 요는 아버지-되기만 강요된 사회에서 다른 것 되기가 가능한지 관념적으로나마 따져보는 일이다. 고로 판타지인 걸 누구나 아는데도 그것을 현실의 법정에 자꾸만 소환하는 건 텍스트를 정치적 올바름의 척도로 꽁꽁 묶어두는 일밖에 안 된다. 이보다 더 무익한 건 다른 감독도 다 그런데 왜 김기덕만 갖고 난리냐고 네거티브 전법을 쓰는 것이다. 생산적인 페미니즘 논쟁이려면 김기덕을 페미니즘적으로 긍정할 수도 있을 일말의 여지를 찾아야 한다. 금기를 건드린 <올드보이>마저 결국엔 금기의 추인으로 대중의 무의식과 호응하는 판에, 김기덕은 거기서 단절하여 거의 유일하게 아버지와 담쌓는 행보를 지속했다. 어쩌면 그는 영화판의 장정일이다(출신배경, 게릴라 기질, 사회적 논란 및 소수의 팬덤도 그렇다). 장정일의 여성관이 아무리 남성적이어도 그의 아버지 거부는 남성주의에 균열을 가하듯, 김기덕판 ‘창녀들의 저녁식사’가 어떻게 소년들의 ‘성장제일주의’를 해체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그러니 제발 감독의 성별을 따지거나 평론가를 정신분석하려들지 말고, 변죽만 울리거나 개인사를 들먹이지 말고, 해봐야 서로 기분 나쁠 논쟁은 접어두고, 한국영화라는 텍스트의 무의식에 시선을 던지자. 거기선 아버지로 성장하는 소년과 아버지에게서 이탈하는 소녀가 9:1의 비율로 사회의 무의식과 접속하고 있다. 이 불균형이 어떻게 깨질지 주시해야한다.

<청풍명월> 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진출

김의석 감독의 <청풍명월>이 다음달 12일 개막하는 제57회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에 초청됐다. 최민수ㆍ조재현 주연의 영화 <청풍명월>(영어제목 Sword in the moon)은 조선시대 인조반정 시기 엘리트 무관 양성기관인 '청풍명월'을 배경으로 두 검객의 엇갈린 운명과 우정을 그린 영화. 주목할 만한 시선은 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부문으로 한국 영화로는 <물레야 물레야>(이두용),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유리>(양윤호), <내 안에 우는 바람>(전수일), <강원도의 힘>, <오! 수정>(이상 홍상수)이 이 부문에서 상영된 바 있다. 한편, 한국 단편 <날개>는 시네파운데이션(Cinefondation)에 진출했다. 이상의 소설 <날개>를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재학중인 서해영 감독의 작품. 시네파운데이션은 전세계 영화학교 학생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섹션이다. 이로써 이미 공식경쟁부문 진출이 확정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홍상수)와 <올드보이>(박찬욱)를 포함해 현재까지 올해 칸영화제에는 모두 네 편의 영화의 초청이 확정되게 됐다. 한편, <거미숲>(감독 송일곤)의 초청이 유력시되던 감독주간(Director's Fort night)의 초청작 발표는 27일로 예정돼 있으며 <하류인생>(감독 임권택)의 경쟁부문 진출 여부도 이달 안으로 결정될 전망이다.(서울=연합뉴스)

춤, 그림

영화가 어째서 신기한 물건인고 하면,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인 척하는 이미지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은 카메라니 영사기니 하는 특정한 기계 장치가 발명된 덕분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붙잡아서 놀아보려는 인간의 유희적 소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살았던 조선의 화가들은 그림 안에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긍재 김득신은 마루에서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말썽꾸러기 고양이를 뒤쫓느라 탕건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우당탕탕 마루를 내려서는 순간을 포착했다. 단원 김홍도는 음률에 맞추어 춤추는 무동의 옷자락 속에, 혹은 기와를 얹느라 하늘로 던져올린 물체의 하강 속에 순간성을 기록했다. 혜원 신윤복의 경우 유곽 앞에서 힘자랑하는 왈패들의 싸움 뒤끝이나, 밤길에 남몰래 만난 연인들의 밀회장면,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칼춤 추는 무희 등 육체의 움직임과 감정의 한순간을 특히 많이 그렸다. 같은 시기의 다산 정약용은 국화꽃을 촛불에 비춰보는 놀이를 즐겼다. 촛불에 비친 국화 그림자가 방 안 벽에 만들어내는 신기한 이미지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는 놀라워하는 반응에 으쓱하는 기분을 글로 남겼다. 그는 또 칠실관화설에 관심이 컸다. 옻칠을 한 커다란 검은 상자에 렌즈를 끼워놓고 들여다보며 사물과 산천의 이미지가 상하좌우로 뒤집힌 모양을 감상했으니, 서양말로 카메라 옵스큐라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이 땅에 활동사진이 전래되자마자 빠르게 확산되어 20여년 만에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감수성이 이와 같이 움직이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 그 시대의 사람들이 3차원의 움직임을 2차원에 붙잡아두는 재미에 빠졌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반대로 스크린에 붙잡힌 이미지로부터 현실의 움직임과 감정을 되살리는 재미로 산다. 되살려낸 느낌이 생생할 때 ‘영화 참 잘 봤다’고 말하는 것일 터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영화의 감동을 만들어낸 어떤 원천을 현실에서 직접 만나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짱’이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보고 나서 그 나이든 쿠바 뮤지션들의 내한 공연장에 갔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었고, 영화 <그녀에게>와 피나 바우쉬의 무대 공연을 연달아 만난 뒤에는 한동안 붕붕 떠다녔다. 이번주에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전설>에는 이런 유의 설렘이 살짝 깃들어 있다. 섹시 댄스를 최고의 재주로 치는 요즘과 달리, 몸의 욕망과 아름다움을 천시하고 억압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한 시절(혹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현재)을 사는 춤꾼 이야기인데, 영화의 리듬이 조금만 더 쾌적했더라면 극장에서 스텝 밟을 뻔했다. 이번주부터 새로 연재되는 ‘영화와 미술’ 코너는 미술이 영화와 만나는 접점들을 중심으로 영화사를 색다르게 조명한다. 2차원의 정지된 이미지가 역시 2차원의 평면 안에서 3차원의 환영(幻影)으로 변형되는 마술과 같은 순간들을 자유롭게 횡단하면서 물끄러미 응시하고 사색하다 다시 느릿한 걸음을 옮기는 필자 한창호 선생의 행보에 동참하는 기쁨이 크다. 김소희

외로움에 대하여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이 작은 행성 지구는 일종의 유배지와도 같다. 반경 몇 십 광년인지 몇 백 광년인지 아무튼 근처에 서로 외로움을 달래줄 다른 지적 생명체 하나 찾을 수 없는 이 외로운 별은 인간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어쩐지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광경이긴 해도 으슬한 고독이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아주아주 오래된 우주미아의 후손. 외로움은 태곳적부터 유전되었는지도 모른다. 혼자 있으면 공포에 가까운 외로움이 엄습하고, 여럿이 있으면 군중 속의 고독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고독의 뿔을 세운다. 누군가는 털어도 털어도 날아드는 먼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열렬하던 꿈과 희망과 사랑과 욕망이 모두 다 무감해지는 나이가 되어도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우주의 탄생이 빅뱅으로 시작되어 점차 식어가면서 별과 별들이 서로 멀어져가는 거대한 이별의 과정에 있듯이, 한 인간의 탄생도 뜨거운 결합에서 시작되어 점차 반복되는 결별들을 겪으며 점점 더 외로운 존재로 쪼글쪼글 타들어가는 과정에 던져진 것이 인생이다. 김수영 시인은,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거미>, 1954년작)라고 노래했다. ‘설움’은 외로움의 다른 표현일 터이다. 외로움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 몸을 까맣게 태우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가장 집요한 에너지는 다름 아닌 외로움이다. 희망과 욕망보다 더 강한 에너지가 외로움이다. 외로워서 언어를 만들었고, 외로워서 도시를 건설하고, 외로워서 사회를 이루고, 외로워서 도로와 뱃길과 우편과 전화와 인터넷을 만들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반을 수천장 모으는 것도, 다 외로워서 그런 것이다. 외로워서 동네방네 러브호텔을 짓고, 노래방을 만들고, 교회를 다니면서 한편으론 외계생명체를 찾겠다고 우주선을 쏘아올린다. 인간의 역사는 외로움의 에너지로 돌아가고 있다.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재테크가 필요하다. 외로울 때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까맣게 타들어갈 때 나는 진정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가. 외로움이란 ‘나 외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혼자서 깊이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은 창조적이며 건설적이고 발전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외로움의 에너지를 온갖 소모적 오락거리를 찾아서 형편없이 탕진해버리느라 바쁘다. 외로움을 기피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꿈도 없다. 글·그림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www.thegim.com

송강호와 <효자동 이발사> [1]

그 배우와 함께 에 밑줄 긋고 주석달기 스크린 위에서 인간미 없는 송강호의 모습은 없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오경필 중사와 〈YMCA야구단>의 이호창 선비 등 영화의 공기 자체가 친숙한 휴머니즘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 때는 물론이고 <넘버.3>의 삼류건달 조필, <반칙왕>의 소심한 샐러리맨 임대호 등 유쾌하지만 냉소적인 블랙코미디를 담은 영화에서도 그는 그랬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 형사야 말할 것도 없다. 하다못해 보는 이의 입을 바싹 타게 만드는 하드보일드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조차 동진의 잔인함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딸을 잃은 아버지의 분노라는 또 하나의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됐다. <효자동 이발사>의 포스터는 그 표정의 절정을 담고 있다.어쩌면 실제로 이 한컷의 이미지가 자연인 송강호를 일부분 닮은 것인지 모른다. 그가 오래전부터 반복 이야기했던 자신의 취향과 생각들, “사람에 대한 얘기가 있는 영화가 좋다”는 것과 “그 속에서 사람을 진실되게 표현하는 게 아름다운 것 같다”는 말은 사실 뻔한 이미지에 대한 뻔한 욕망이다. 중요한 건 그가 그 바람대로 해왔다는 데 있다. 물론 실제의 송강호는 포스터 속 웃음으로 짐작되는 것보다 더 예민하고 욕심 많고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가 바라는 길이 자신의 본질과 전혀 다른 방향을 향했었다면 이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더 부연하지 않고 송강호의 육성을 담는다. 지적이거나 유식한 개념어가 없는 쉬운 표현들은 송강호의 이미지가 왜 그의 실제처럼 다가오는지 말해주고, 정연히 정리해서 말하지 않는 설명방식은 그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연기의 방법이 머리와 말에 있는 게 아니라 가슴과 몸에 새겨져 있는 것임을 알려준다. 배우 송강호 성한모가 임신한 민자를 리어카에 태우고 4.19 데모대 한 가운데를 통과하던 순간 음… 그 장면을 찍을 때…, 그게…, 실제로 총 쏘고 많이 죽었잖아요, 사람들이…. 근데… 실제 같으면… (할말이 없는 듯) 진짜…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정색해 보지만) 그게 사실 4·19에 대한 장면을 찍는다고 해서 4·19에 대한 생각을…. 그냥 공부하고 아는 정도. 그 정도죠. 근데 배우가 있잖아요, 어떤 한 작품의 특정한 뭐다뭐다 이것들의 감정을 잡아야죠. 배우는 배우예요. 배우는 표현하는 사람이지, 배우가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 가슴 절절하게 느끼고 그럴 필요가 있나요? 표현하는 건데 뭘…. 그걸 일부러 몰라도 된다 그런 뜻이 아니라 알면 더 좋죠. 근데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것이죠. (잠시 침묵) 그러니까 지금 잘 접수가 안 되는 모양인데, 4·19를 찍는데 그 사건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공부를 많이 하고, 또 그렇게 할 작품도 아니고. 오히려 그럴 것 같으면 감독의 입장에서는 모든 걸, 그러니까 예를 들면 <살인의 추억> 같은 경우도 화성에 대한 얘기도 제가 전 사건에 대한 디테일한 모든 어떤 것들을 다 해야 이게 올바른 연기가 나오고 또 형사들의 어떤, 일일이 다 만나서 그때 심정 같은 걸 다 녹취해가지고 다 들어보고, 그래야 올바른… 그건 좀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건 흉내내는 것이지 본질을 파악하고 본질을 표현하는 거라고 생각이 안 들거든요. 모르겠어요, 이건 내 개인적인 어떤 연기방법이고. 다른 분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가지고 하고 그렇게 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오히려 난…. 본질에 접근하는 법 음… 그럴 수도 있구요, 사실은, 음… 그러니까 늘, 늘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 같아요, 배우들은. 저 자신도 가만히 앉아 있고 뭘 하더래도 늘 공부, 세상에 대해 공부하고, 사람에 대한 공부를 늘 지금 병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우리가 늘 해왔고 우리 옆에서 살아가고 모든, 그런 모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그죠? 그렇기 때문에 늘 공부를 해야죠. 늘. 그러니까 행려 역할도, 그때 잠시 서울역에 가 한달 동안 행려들하고 있는다고 배워지는 게(아니라), 행려가 왜, 행려자들이 왜 생겨나고 행려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행려들은 어…, 어떤 정서적인, 어떤, 어떤, 그… 가지고 있나, 이걸 늘 생각하는 거죠. 행려면 행려(행려 흉내). 이런 게 아니라 우리가 세상 살아가다보면 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 얘기를 듣잖아요. 그게 다 연기의 분량이죠. (잠시 침묵) 그런 게 아닌가…. 관찰력 관찰이라기보다는 성찰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저는. (기자 입가에 웃음이 둥실 뜨자) 왜 웃으세요? 관찰은 어떤 특정한 그걸 묘사하려고 보구 이런 거지만 관찰보다 더 큰 광범위한 성찰을 한다고, 개인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특정한 인물, 특정한 사건을 보고 연구하고 밀도있게, 이러… 는 게 꼭 필…, 그런 것보다는 인생 자체를 이렇게, 내 인생도 그렇고 남의 인생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성찰이 맞다고 생각해요. 표현을 똑바로 하자면. 늘 하죠. 정리하고…, 세상에 대한 정리하고…, 사회에 대한 정리하고…. 일기 아니오, 전 일기를 쓰지 않아요. 책 아니오. 전 신문을 많이 볽습니다(봅니다와 읽습니다가 한꺼번에 떠오른 듯). 신문을 많이 보고…. 음… 신문도 보도나 이런 기사를 많이 보지만, 사실 칼럼도 많이 보거든요. 상대적으로 책은 좀 덜 읽는 편이에요. 시간도 없을 뿐더러, 영화는 솔직히 OCN 통해서 많이 보고. 영화관은 잘 안 가고요. 제가 극장을 찾아가서 일부러 영화를 티켓팅해가지고 영화를 보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웃음) 이게 너무 귀찮아가지고. (웃음) 제가 귀찮은 걸 너무 싫어해서 뭐 몇시에 영화, 줄서서 기다려 표 끊고 또 이렇게 일반인들하고…, 사실 불편하잖아요. 그런 불편함도 있고 그러니까 오히려 시사회 때 안 가면 비디오나 OCN에서 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위기의식 속에 긴장하기 or 평정심 유지하기 후자쪽입니다, 저는. 왜냐하면 제가 사석에서나 우리 가족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지만…, 저는 배우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에요, 사실은. 전 배우 아니래도, 그러니까 배우…, 배우를 안 하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어요, 당장이라도. 저는 처음 연극할 때부터 그랬어요. 그러니까 물론 내가 원했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만, 내가 구차하게까지 하면서 이… 저기… 연기랄까… 배우를 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위기의식이라는 거는 특별히… 저는…. 단지 자연에 순화하고 싶어요, 저는. 내 나이에 맞는 얼굴과 목소리와 표정과 또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우라는 것이 나이를 들게 되면 점점 더 선택의 폭도 좁아지고 또 뭐 우리 훌륭한 후배들도 많이 생겼고 그러면 점점 주류에서 밀려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 다음에도 쓸모가 없을 땐 당장 그만 해야죠. 다른 일을 해야죠. 전 결혼할 때도 그런 얘길 했어요. 집사람한테도, 이 일이 뭐,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해가지고 꼭 성공을 하리라. 이런 얘기 한번도 안 했어요. 당장 내일이래도,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내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한 가치나 보람을 못 느낀다면 나 당장이라도 그만둔다. 그만둘 용기가 있고. 그 생각이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단지 지금까지는 내가 좋아서 그리고 내가 노력을 해오면서 살았던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하고 싶고 힘닿는 데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의 순리에 맞게끔 정리가 돼야 되는 게 맞지 않나….

연기는 준비, 애드리브는 신기(神氣), <라이어>의 배우 손현주

손현주의 얼굴은 재미있다. 짙은 눈썹과 길게 옆으로 뻗어 ‘한’인상 하게 보이는 눈, 거기에 두꺼운 입술이 언밸런스하게 붙어서 징글징글한 웃음을 만든다. 퉁명스러운 뚝배기 같은 얼굴은 한없이 수더분해 보이기도 하고, 한없이 장난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언뜻 드러나는 표정의 이면에는 ‘앞집 남자’의 평범함을 살짝 벗어나는 진지한 기운이 도사린다. <라이어>에서 그는 가죽점퍼와 배꼽 위까지 끌어올려진 바지를 입고 ‘라이어’(거짓말쟁이)를 쫓는 ‘박 형사’를 연기했다. 이런. <앞집 여자>의 손현주를 생각해보면 그건 분명히 낯설어야만 할 역할이었다. 그러나 소심하고 나약한 앞집 아저씨의 모습에서도,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무식하고 성깔있는 형사의 모습에서도, 배우 손현주는 자연스레 읽혀진다. KBS 분장실로 리허설을 마치고 황급히 들어오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본 것은 특유의 재간으로 가득 찬 작은형이었다. 그러나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그의 얼굴에서 보게 된 것은 진지하고 사려 깊은 천생 배우의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아마도 그 무게감은 “돈이 되지 않지만 연기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단막극을 선택”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본을 숙지”한다는 그의 책임감과 성실함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라이어> 촬영이 재미있었다고 들었다. 배우들이 모두 잘해주었으니까. 김경형 감독이 배우들의 앙상블을 중점적으로 지도했다. <라이어>는 동숭동에서 공연 중인 연극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잖나. 그래서 처음 대본 받았을 때 굉장히 걱정을 했었다. 연극과 영화는 메커니즘이 다른데 어떻게 카메라에 옮겨놓을 것인가가 궁금했다. 배우들의 앙상블 때문에 촬영 전에 리허설도 여러 번 했다. 그 많은 배우들과 연기호흡은 어떻게 해냈나. 만약에 이게 넓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무대는 변화가 많으니까 어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연기자가 잔뜩 나와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는 부분이 많으니 쉽지가 않았다. 처음엔 대본을 읽고나서 이 영화는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발을 빼려고 했다. 공형진이 다시 전화를 해와서 같이 하자고 설득을 했고, 김경형 감독의 능력을 믿기 때문에 수락했다. 연기를 하면서도 이게 화면 안에서 어떤 식으로 재현될까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감독과 모여서 회의와 토론을 많이 했다. 많은 연습과 수십번의 리허설을 거쳐 영화는 완성되었다. 김경형 감독이 처음부터 박 형사 역으로 본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나. 그랬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시더라고.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웃음) 처음엔 정말 안 하려고 했었다. 하도 그림이 떠오르지 않고 답답해서. 다른 영화대본들과 달리 감이 빨리 오지 않았고 박 형사라는 인물도 연기하기 어려웠다. 박 형사라는 캐릭터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도식적일 수 있는 인물인데. 그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 형사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린 결론은, 열심히 하면 덜떨어져 보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머리는 전혀 안 쓰고 집중적으로 한 사건만 매달리는 형사를 연기하니까 덜떨어진 사람처럼 나오더라. 캐릭터 분석을 굉장히 꼼꼼하게 하는 것 같다.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나는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도 마찬가지고, 애드리브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사이사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에만 살짝 애드리브를 넣는다. 감독이 연출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 선을 넘지 않고, 영화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한다. 대사의 톤이 색다르다. 감기 걸린 환자의 힘들게 새어나오는 목소리 같은. 그렇게 설정한 것인가. 나는 어떠한 대본을 받더라도 미리 구체적으로 그런 것들을 설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큰 그림만 먼저 그려둔다. 드라마든 영화든 큰 그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그리다보면 작은 애드리브나 설정은 나도 모르게 붙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신기(神氣)라 해야 하나. (웃음) 드라마에서는 굉장히 소심하고 현실적인 남편 역을 주로 하는 데 비해 영화에서는 빠른 감각이 필요한 코미디 연기를 주로한다. 의도적으로 영화에서 이런 역할을 선택하나. 아니. 대본들은 모두 사무실에서 가지고 오더라. (웃음) 지금 찍고 있는 <투가이즈>의 카메오 역할도. 뭐 이 영화에서는 카메오를 석달 동안 끌려다니면서 하니까 카메오가 아닌 것 같지만. (웃음) 그래도 <라이어>의 형사는 지금까지 드라마들의 역할을 뒤집는 묘미가 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마초를 불러들인 듯한. 그렇게 봤다니 고맙다. (웃음) <라이어>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찍었을 거라는 게 화면으로 묻어나온다. 재미있었지. 2003년 12월29일 첫 촬영을 한 것 같은데 어느덧 촬영이 끝나버렸더라. 끝나면서도 ‘어, 벌써 끝났어?’라고 할 정도로 현장 분위기도 재미있었고. 김경형 감독이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은 대단하다. 판단력이 빠르고 현명한 사람이고.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공형진은 대학 후배이기도 하고. 내가 연극에서 주인공할 때 공형진은 창지기도 하고 그랬다. (웃음) 지금까지 작업한 여섯편의 영화 중 어떤 영화를 촬영할 때가 가장 즐거웠나. <기막힌 사내들>은 드라마만 하다가 본격적인 영화를 처음으로 한 거였는데, 되게 지겹더라구. 장진에게는 미안한데. (웃음) 드라마는 속도가 빠른데 영화는 느리니까. 이제 여러 편의 영화를 찍어보니까 영화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피아노맨> 찍을 때는 영화의 조명이라는 것을 이해 못했다. ‘조명 뒤집을게요’라기에 ‘뒤집어2???????라고 대답을 하면서 속으로는 ‘조명 하나 뒤집는데 왜 나한테 말을 하고 그러지?’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야간조명이다 보니까 조명 뒤집는 데 2시간이 걸리더라. 그래서 두 시간을 길에서 벌벌 떨고 기다렸다. 그 조명이 천천히 뒤집어지기 시작하는데, 아우. 그걸로 2시간을 보내더라구. ‘다시 뒤집을게요’라고 했을때는 정말 ‘야이 xxx들아!’라고 하고 싶었다 . (웃음) 그때 영화는 이런 거구나 하고 느낀 건가. 그랬다. 드라마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분위기들을 보았다. 밥차가 오면 다같이 밥을 먹고, 여인숙에서 같이 숙식하고. 그런 영화만의 분위기들. 이래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장 스탭들과 석달 동안 함께 밥먹고 움직이고 술먹으니까 지금도 그 사람들이 그리워지더라. 말하자면 영화는 전체의 예술인 것 같다. 비록 배우가 스크린을 좌우하겠지만. 모든 스탭들이 하나의 빈틈없이 착착 돌아가는 모습이 대단하다고 본다. 본격적으로 영화작업에 재미를 느낀 건 어떤 영화부터인가. <킬러들의 수다>부터 재미를 느꼈다. <기막힌 사내들> 때는 드라마 2개 동시에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말했지만 전체적으로 큰 톱니가 돌아가는 모습 같은 현장이 정말 아름답다. 조명막내, 소품막내부터 감독까지. 그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정말로 아름답다. 재미와 관계없이 출연작 중 하나를 꼽는다면. <라이어>는 개봉 전이고. <맹부삼천지교>도 아직 개봉 중이고. 그 이전 작품들 중에서는 뭐 정신없이 했지만 <기막힌 사내들>이 좋다. 장진 감독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감각이 너무 빠른데 그걸 조금만 늦춰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본인이 연기하기에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점은 뭔가. 완성도 면에서도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드라마는 오늘밤 방송될 분량을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찍어서 겨우 내보내고 있다. 영화와는 비교를 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젊은 친구들이 그래서 영화로 많이 가는 것 아닌가. 좀더 배우에게 편하고, 얼마든지 감독과 대화를 하면서 모니터를 할 수도 있고. 특히나 신인들에게 드라마는 그야말로 순발력과 대사 암기력과의 승부다. 빨리 해야 30∼40신을 하루에 찍는데. ‘지금 대본 줄게 얼른 외워, 다 외웠지? 빨리 촬영 들어가자!’라는 식이니까. 물론 영화도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이른바 ‘떠’야만 인정을 받으니까. 어디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대형영화들도 좋지만 저예산의 조그마한 영화들도 빛을 봐야 하지 않겠나. 촬영준비가 대단히 철저하다고 들었다. 그렇다. 사실. 내 성격 자체가 그렇다. 드라마를 많이 해왔으니까. 대본이 숙지가 안 되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 일단 극의 흐름과, 작가의 대본은 완벽하게 숙지를 해가지고 간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대본에 찍힌 점 하나도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는 사람들이 내가 연기를 편하게만 하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오오. 완벽주의자인가. 완벽주의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 후배들도 많고, 이젠 나이도 40이 넘어가는 중견인데 현장에 나가서 못하면 창피하니까 그렇지. 후배들이 많으면 그런 부담이 있다. 주위의 선배들을 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완벽하게 관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성공했던 예가 없다. 91년에 월화드라마 <형>으로 데뷔했는데. 만약에 내가 트렌디드라마로 시작했다면 지금까지 계속 연기자로 남을 수 있었을까? 그때 내가 연기를 배웠던 사람으로는 주현, 오지명, 김영철 선배 등이 있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슬렁슬렁 연기하는 줄 알았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을 키워가는 데 단막극이 참 좋다고 본다. 일주일에 촬영이 모두 끝나게 되는데, 단막극을 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방송이 급박해도 충분히 PD랑 이야기할 수 있고. 배우로서 한 단계 성큼 나아가는 계기가 된 작품은. 그런 부분들은 다 단막극에서 채워진다. 단막극을 하면 연속극의 매너리즘에서 빠져나와 내 마음을 다시 가다듬게 된다. 단막극은 어떻게든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많이 할수록 도움이 된다. 틀림없다. 돈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방송 단막극들 많이 하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특히 젊은 친구들에게는. 단막극을 많이 하면 연기하는 마음 자체가 달라지고 앞으로 가야 할 연기의 길이 보인다. 단막극은 촬영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영화작업과도 비슷하다. 그런 마음으로 한다. 한편의 영화를 찍는다는 마음으로. 요즘은 드라마도 주연이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영화도 주연 욕심이 생길 것 같은데. 주연 조연 그런 것은 신경 안 쓴다. 내가 나오면 다 주연인 거다. (웃음) 뭐, 욕심나는 것들은 있다. <올드보이>에서의 최민식씨. 대단하다. 우리나라에 그런 배우들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 최민식, 설경구, 송강호 같은 배우들. 공형진도 그렇고. 공형진 자기 이야기 안 하면 삐칠걸. (웃음) 이범수도 좋은 배우다. 정말 모두 좋은 배우들이다. 최민식씨가 했던 <올드보이> 같은 역할은 정말 나도 해보고 싶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될 것이고, 그런 역할로 그것을 담아보고 싶다. 언급한 배우들도 그렇고, 본인도 극단 미추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지 않았나. 극단에 있었을 때의 마음가짐이나, 다른 동료들과 같이 어울렸던 그런 기억들이 마치 엊그제 일 같다. 연극은 마음의 고향처럼 탄탄한 장소다. 알 수 없는 연극의 기(氣)? 그런 것들이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중심이 잘 흔들리지 않는다. 배역이 어떻든 내가 만들게 나름이니까. 중앙대 대학원은 현재 휴학 중이라고 들었다. 복학을 하려고 했는데, 등록금이 너무 많이 올랐더라. (웃음) 가을에 복학할 생각이다. 야간이니까 촬영 없을 때는 학교를 갈 수 있고. 그래서 바쁜 스케줄에 크게 구애받지는 않는다. 사실 중양대 대학원을 가게 된 이유는 연기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된 내 자신이 점점 안일하게 무뎌져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니까. 노출신이 있는 영화는 안 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은 하고 싶은데. (웃음) 아내가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예술한다고 가정을 시끄럽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집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구태여 하고 싶지는 않다. 노출신이라…. (웃음) 내가 하면 흉하잖아. 내가 하면 바로 유호프로덕션이 되는 건데.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