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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점잖은척 그만하자” 오락 강화

한국방송 문화방송 에스비에스 등 지상파 방송3사는 다음달 1일, 3일부터 봄철 프로그램 개편을 한다. 방송 3사 모두 오락 프로그램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춘 게 특징이다. 3일부터 새단장하는 한국방송에서는 예능전문 엠시선발 과정을 6주간 프로그램으로 만든 <엠시 서바이벌>(K2 토 밤 10시)이 눈길을 끈다. 1~5주간 본선 진출자 10여명의 장기자랑과 엠시자질 검증을 거쳐 매주 1명씩 시청자들의 전화투표로 탈락시키고 마지막 6주째 최고의 엠시 대상을 선발한다. 또 <일요일은 101%>의 한 꼭지였던 <열린 취업 꿈의 피라미드>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독립됐다(K2 일 오전 10시50분). 이에 따라 <일요일은 101%>은 오락성이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시청자가 경험한 기발한 사건이나 감동적 사연을 당사자 가족들이 직접 연기하는 <대단한 가족>(K2 토 저녁 7시)과 20대 청춘 드라마 <알게 될거야>(K2 오전 9시50분) 등도 신설됐다. <황금의 시간> 등은 폐지됐다. 1일부터 모두 9개를 새로 심은 에스비에스의 개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프로그램은 <최수종쇼>를 폐지하고 현재 방송가에서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두 개그맨 김용만과 신동엽을 내세운 버라이어티 <김용만 신동엽의 즐겨찾기>(화요일 밤 11시5분). 에스비에스는 애초 신동엽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주간시트콤 <신가네>(가제)를 편성할 계획이었으나 연예계 비리로 유죄판결을 받은 은경표 피디가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자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최근 웰빙 바람 확산에 따라 <잘먹고 잘사는 법>을 토요일 9시부터 두시간으로 확대편성했으며,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출연해 문화적 차이로 겪었던 웃지못할 경험담을 털어놓고 서로 허심탄회한 대화의 시간을 갖는 <외국인 대설전>(화요일 저녁 7시5분)도 신설했다. 한편 에스비에스는 이번 개편에서 방송위와 협의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낮방송 시간에 프로그램을 편성해 방송위의 반응이 주목된다. 이미 방송된 드라마에 시각장애인과 노인, 학습장애인을 위한 자막을 깐 <드라마 특선>(수·목 낮 12시5분)과 목요일 오전 생활캠페인 프로그램인 <티브이 아름다운 가게>(목 낮 11시35분) 등 공익성 강한 프로그램을 편성해 낮방송 허용의 징검다리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3일 개편에 들어가는 문화방송에서는 심리버라이어티 <누구 누구>가 없어지는 대신 지식, 인품, 체력 등 세 부문에 걸친 스타들의 대결을 펼치는 <질풍노도 라이벌>(토 저녁 6시5분)이 눈에 띈다. 또 직장인들이 마음에 쌓였던 이야기를 터놓고 나누는 신개념 토크쇼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토 저녁 10시35분)도 새로 생겼다. 일요일 오전시간대에 시트콤을 두개나 배치해 눈길을 모은다. 서로 다른 개성의 네 여자를 중심으로 그녀들의 일과 사랑, 가족 이야기를 경쾌하게 그린 시트콤 <아가씨와 아줌마 사이>(일 아침 10시)와 마술샴푸로 머리를 감으면 4시간동안 최고의 미녀로 변신하는 엽기 여고생 삼총사가 벌이는 좌충우돌 신세대 시트콤 <두근 두근 체인지>(일 낮 1시10분)도 신설됐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가 만든 ‘꿈의 공장’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 작품이었던 〈천공의 성 라퓨타〉(1986)가 4월30일 개봉한다. 하야오 감독이 푸른 창공과 하늘을 배경으로 힘차게 포물선을 그리는 비행의 아름다움을 남다르게 사랑했다는 건 이제까지의 작품들이 보여준 사실. 〈…라퓨타〉에서 감독은 아예 하늘에 떠있는 전설의 성을 소재로 자신이 열광했고, 〈붉은 돼지〉같은 〈…라퓨타〉 이후의 애니메이션들에서 관객을 매료시켰던 하늘과 비행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에서 가져온 모티브로 축조된 라퓨타는 오랜 옛날 만들어졌던 고도의 문명도시. 이제는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는 라퓨타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던 소년 타즈는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녀 시타를 구해내고, 시타를 통해 라퓨타가 실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시타의 목에 걸려있던 비행석을 빼앗으려는 군대와 악당 도라일행에게 시타와 타즈는 목숨을 위협받으며 추격을 당한다. 전설의 도시 재건할 ‘열쇠’,‘걸리버 여행기’에서 따와 조그마한 얼굴과 긴 팔을 가진, 이상하게 생긴 로봇과 귀여운 다람쥐가 푸른 녹음 속에서 사이좋게 사는 라퓨타는 자연과 문명이 공존하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고도로 발전한 문명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상실해버렸다. 상층부에는 소박하게 자연이 숨쉬지만, 하층부에는 굳게 닫힌 건물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하늘의 성 라퓨타는 이상향과 인간의 탐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시타와 타즈, 그리고 이들을 쫓는 비밀감찰관 무스카와 군대가 라퓨타를 찾아가는 속마음도 정반대다. 시타와 타즈에게 라퓨타는 다람쥐와 로봇이 함께 뛰어노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지만, 무스카 일행에게 라퓨타는 세상을 지배하는 문명의 정점이고, 그 문명을 장악하려는 권력에의 힘이다. 아이들 도시이자 권력의 장점, 마치 ‘반지의 제왕’반지처럼 문명이라는 미명으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려는 인간(어른)의 욕망과, 자연을 복원시키고 생명의 힘을 회복하려는 아이들의 꿈의 대비를 통해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천공의 성 라퓨타〉는 1984년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러나 문명과 자연이미지의 대립과 환경보호라는 메시지가 직접적인 〈…나우시카〉와 달리 〈…라퓨타〉의 메시지는 하늘과 비행의 판타지를 통해 좀더 은유적으로 이 주제에 다가간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라퓨타성의 재건에 열쇠 구실을 하는 시타의 비행석은 바다에 봉인된다. 어른들은 비행석을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을 벌이지만 아이들은 이것을 버리기 위해 힘있는 자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모양이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권력의 상징인 절대반지를 없애려는 호빗원정대와 이를 취하려는 사우론의 싸움과 닮았다.

사려 깊은 여성적 낙천주의,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

행복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이번 총선에서 어느 정당이 내건 구호이기 이전에,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가 끊임없이 관객에게 건네던 잠언이었다. 비록 당신의 성격이 더러워서 친구 한명 곁에 없어도, 눈가의 주름이 감춰지지 않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당장 살아갈 방도가 막막해서 몸을 팔아야 할지라도,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세상은 살 만해진다고. 그리고 이제 새로운 로맨틱코미디는 사랑의 대상은 많을수록 좋고(<어바웃 어 보이>), 반드시 이성일 필요도 없다고(<이브의 아름다운 키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다. 그래서 <엄마는 여자를 좋아해>는 말한다. 어느 날 당신의 엄마가 스무살 어린 체코 여자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직장 상사는 몇달째 저임금으로 부려먹고,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때려치우려면 구차하게 엄마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이며, 오랫동안 흠모해왔던 그와의 로맨스는 당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결정적 순간마다 삐걱대도,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면 사랑은 이루어지고, 가족은 행복해지며, 나아가 온 세계가(!) 화목해질 것이라고.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의 주인공은 엄마(로사 마리아 사르다)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을 계기로 자신감을 찾아가는 둘째딸 엘비라(레오노르 와틀링)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에서, 영화의 대부분을 대사는커녕 미동도 없는 식물인간으로 등장했음에도 깊은 인상을 주었던 그의 솔직 발랄한 모습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어처구니없는 그의 변덕에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비단 극중인물뿐만이 아니지만, 이내 후회하고 수습하려는 그의 모습은, 무수하게 반복된 ‘미워할 수 없는 푼수녀’의 스페인식 버전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두 여성이 공동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영화 <엄마는…>의 가장 큰 미덕은 사려 깊은 여성적 낙천주의다. 따라서 여성의 독립과 자아실현, 부모와의 갈등, 동성애, 그리고 결혼 제도 등 각종 껄끄러운 문제들이 던지는 중압감으로부터, 영화는 경쾌한 화법으로 벗어난다. 물론 엘비라를 짓누르는 그 모든 문제들이 어떤 이들의 가슴에는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영화가 감당해야 할 부분은 아닐 것이다. 깜짝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합법적 커플은 하나도 없지만 제도와 편견, 국경을 초월하여 어우러진 그들의 모습은 문득, 새로운 유럽에 대한 바람으로 읽힌다.

도시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무림고수들의 대결, <아라한 장풍대작전>

중국의 3대 기서로 꼽히는 책으로 <봉신연의>란 작품이 있다. 우리에게 강태공으로 알려진 태공망이 무왕을 도와 600년간 존립했던 은나라를 멸하고 주왕조를 구축한 역사적 사실을 도교적 세계관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신선과 요괴와 도사가 대거 등장하는 이 책은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많은 무협소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류승완 감독이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저변에 깔린 사고는 <봉신연의>와 다르지 않다. 지금, 이곳 서울 도심 한복판에도 신선이 살고 있다. 다만 일반인이 모를 뿐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렇게 첫운을 뗀다. 누구나 한번쯤 길에서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숨가쁜 일상에서 귀담아 듣기 힘든 그 말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액션코미디의 쾌감에 실어나른다. 여주인공 의진(윤소이)이 빌딩숲을 붕 날아오르는 순간 다가오는 짜릿한 흥분이 이 영화의 엉뚱한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이야기는 간단히 말하면 힘없는 말단 경찰 상환(류승범)이 우연히 도의 세계에 입문, 악당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수많은 액션영화가 착한 주인공과 악한의 대결을 그린 작품들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런 기본구조를 엉뚱한 곳에서 펼친다는 점에 있다. 장풍, 경공술, 점혈, 주화입마, 공중부양 등 무협소설의 용어가 2004년 서울 한복판에서 혈겁을 불러온다. 그러기 위해 류승완 감독은 크게 두 가지 포석을 깔아둔다. 첫째, 칠선의 존재다. 태초에 7명의 도인이 있었고 그중 흑운(정두홍)이 인간계의 분쟁에 뛰어들었다가 다른 도인들에 의해 봉인됐다는 이야기다. 선계의 규율을 어기고 칼을 들었던 흑운은 선계의 최고경지에 이르는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탐냈던 인물로 2004년 부활하여 아직 살아 있는 5명의 도인을 위협한다. 이것이 과거사라면 현재는 상환과 의진의 이야기다. 자운(안성기)의 딸 의진은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이어받을 인물이지만 혼자로는 부족하다. 전설에 따르면 아라한은 마루치와 아라치, 두 남녀의 힘으로 지켜질 것이다. 의진이 아라치라면 상환은 마루치가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일까? 비실거리고 허둥대는 상환을 보면 믿기지 않지만 자운은 상환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발견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건 당연하다. 류승완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그랬듯 장르영화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 감독이다. <스파이더 맨> <매트릭스> <저수지의 개들> <터미네이터> 같은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성룡이나 서극, 주성치 영화의 흔적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감독은 이런 영화를 자기 식으로 버무리면서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소림축구>의 전략과 유사하다. 쇠락한 소림사 고수들이 축구를 한다는 발상에서 웃음이 잉태되듯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현실에서 퇴물로, 낙오자로 인정받는 인물들에게 초능력에 가까운 힘이 있다는 전제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고층건물에 매달려 창문을 닦는 미화원, 층층이 밥상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줌마, 짐칸 크기의 수십배되는 물건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아저씨 등 자기 일에서 어떤 경지에 이른 인물을 모두 도인으로 보는 이 영화의 기본 전제는 훌륭한 유머가 되기 충분한 것이다. 번번이 당하며 사는 어수룩한 주인공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거듭나는 이야기도 관객의 공감을 얻기 좋은 소재다. <반칙왕>의 송강호와 전혀 다른 이미지지만 류승범은 그런 인물로 잘 어울린다. 전음입밀(일종의 텔레파시)의 수법으로 자운이 상환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상환의 대사 같은 경우는 장내를 폭소로 몰고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부분부분 흥미롭다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호기심을 끌 만큼 벌여놓은 이야기는 지나치게 단순해지고 액션의 쾌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반감된다. 전작들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정확히 짚어냈던 류승완의 내공도 이번 영화에서 잘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상환이 대적해야 할 악당으로 흑운을 선택한 것은 패착으로 보인다. 흑운이 누구인가? 인간계의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선계의 규율을 어긴 이단아, 혹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닌가? 당연히 비애를 느껴야 할 이 인물에서 영화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지를 안 준다. 또한 굳이 애꿎은 흑운을 비난하는 이유도 납득하기 힘들다. 드라마의 병법에 따르면 궁핍한 삶을 묵묵히 버티고 있는 도인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응징하는 편이 옳다. 덧붙이자면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상환이 장풍을 배우러 갔다가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되는 이야기다. 그런데 마지막 대결까지 상환은 장풍을 쓰지 못한다. 제목에 넣은 장풍이 허풍이었던 걸까? <아라한 장풍대작전>은 그럴듯한 허풍이긴 하지만 끝내 장풍을 날리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다. ::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조연배우들 안성기부터 무술감독 정두홍까지 류승완의 영화는 대체로 조연의 비중이 높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중요한 조연은 칠선의 남은 오인방 자운, 무운, 육봉, 설운, 반야가인이다. 의진의 아버지로 아라한으로 가는 열쇠를 지키는 인물 자운은 안성기가 맡았다. 극중 상환이 장풍 배우는 가격을 묻자 “그게 바람 크기에 따라 달라서”라고 말하는 대목은 안성기의 애드리브로 만든 장면. 상환을 가르치는 도장의 주인 무운으로 나온 인물은 베테랑 연극배우 윤주상. <쉬리>의 첩보국 국장, <유령>의 잠수함 함장으로 낯익다. 예전에 태권도를 배웠다는 윤주상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 젊은 배우들도 힘들어 하는 와이어액션을 선보인다. 육봉과 설운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 나왔던 김영인, 백찬기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빚독촉을 하러 다니는 나이든 건달로 나왔던 두 사람은 70∼80년대 액션영화에서 직접 스턴트를 하며 연기를 했던 배우들. 김영인은 <시라소니> <김두한> 등의 영화에서 이대근, 김희라 등의 대역 연기를 하기도 했으며 백찬기는 <수사반장>에서 악역을 단골로 맡아 익숙한 얼굴이다. 류승완 감독이 <피도 눈물도 없이>를 연출하며 재발견한 셈이다. 700서비스로 주역풀이를 해주며 돈을 버는 반야가인은 TV드라마로 친숙한 김지영. <행복한 장의사> <파이란> <그녀를 믿지 마세요> 등 영화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섯명의 착한 도사들과 맞서는 흑운은 무술감독 정두홍이 맡았다. 이번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처럼 악역연기를 보여준다. 이 밖에 파출소장으로 임하룡, 순경으로 박윤배 등이 나오며 윤도현, 봉태규, 이춘연, 이외수 등이 카메오로 나온다.

무던하지만 결정적 감동을 주는 아스라한 판타지, <천공의 성 라퓨타>

“어디엔가 하늘 끝엔 언제나 푸른 꿈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의 작은 별 하나가 있단다/ 맑은 미소 고운 눈빛 뛰노는 아이들처럼/ 오래전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겠지만 오래전 가요 중엔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고 있으면 이 가사가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러면 ‘라퓨타’가 작은 별?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라퓨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실체가 달라진다. 어른들 시선, 그것도 탐욕스런 어른의 시선으로 보는 라퓨타는 권력과 무력의 상징이다. 온갖 전투무기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힘이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는 라퓨타는 다르다. 새들이 노래하고 아늑한 평화가 존재하는 곳. 그래서 라퓨타는 각기 다른 상징과 비유로서 작품에서 기능하며 읽히기도 한다. 기계 견습공인 소년 파즈는 어느 날, 빛이 나는 목걸이를 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소녀를 구해준다. 소녀는 목걸이, 즉 비행석으로 인해 정부의 군대와 도라 일당에게 쫓기고 있던 신세. 시타가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던 중 파즈는 하늘에 떠 있는 성 ‘라퓨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소 라퓨타의 존재를 믿고 있던 파즈는 시타와 함께 라퓨타를 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즈와 시타는 군대에 사로잡히고, 시타는 정부 비밀 조사관인 무스카에게 파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협력을 약속한다. 도라 일당과 만난 파즈는 그들과 함께 시타를 구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시타로 인해 봉인이 풀려 라퓨타의 위치를 가리키게 된 비행석을 무스카에게 빼앗기고 만다. 어느 고전기 일본영화 감독은 자신을 ‘두부장수’라고 표현했다. 두부공장에서 두부를 찍어내는 사람이라고. 만약 같은 비유를 사용한다면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두부장수일지 모른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붉은 돼지>, 그리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기까지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늘 같았다. 모양과 맛이 거의 비슷했다. 아이들의 성장과 모험, 아스라한 판타지, 그리고 하늘을 나는 비행의 모티브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 언제나 작은 마을이 무대가 되고 있으며 캐릭터들 생김새가 엇비슷하다는 점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지일관을 설명하는 사례다. 요컨대,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수로 치면 늘 동일한 장르를 노래하는 사람이며 장사꾼으로 치면 같은 업종에 장기간 종사해온 인물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역시 다르지 않다. 파즈와 시타라는 아이들은 ‘꿈’을 동경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안다. 어른들이 라퓨타를 보물의 은닉처, 그리고 무력의 근원으로 사고하고 있을 때 아이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친구의 안전과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 이 사소한 에피소드가 거대한 하늘의 성을 자멸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으며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하나의 신호가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타와 파즈가 “함께 있자”라며 손을 모으는 순간, 그것은 라퓨타의 실체가 나타나는 순간이며 또한 작지만 위대한 사랑이 결실을 거두는 순간이다. 이렇듯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 세계는 언제나 같은 향과 맛의 두부처럼 무던하지만 결정적 감동을 준다. “날로 증가하는 컴퓨터의 사용은 그것 자체로 해로운 물건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이 문제다. 난 비관론자가 아니며 아이들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는지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을 통해 도울 수 있다.” 미야자키 감독의 말처럼 <천공의 성 라퓨타>는 문명과 탐욕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린 세대를 위한 작품이다. <걸리버 여행기>와 존 포드의 영화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온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이제는 낡은 애니메이션이 될지도 모른다. 현란한 3D 기법이 온갖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시점에서, 소박한 셀애니메이션을 굳이 봐야 할 이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전까지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본 적 있는 이라면,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면서 색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토토로와 키키, 포르코라는 익숙한 친구들 곁에 파즈와 시타 역시 어디엔가 낄 여유가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라고 중얼거리면서. :: <캐릭터 분석 ‘라퓨타’ 원정대 시타 본명은 류시타 토엘 우르 라퓨타. 이는 곧 정통 왕위 계승자 류시타 왕녀라는 의미다. 곤도아 계곡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을 할머니로부터 들으면서 성장했다. 이후 무스카 일행에게 납치된다. 파즈와 만나고 라퓨타와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목걸이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된다. 용기와 사랑을 고루 갖춘,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파즈 밝고 명랑한 소년.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오두막집에서 생활한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라퓨타의 존재를 믿고 있으며 언젠가 자신이 만든 비행기로 라퓨타를 찾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시타를 만나 정부 비밀조사단과 군대, 해적에게 쫓기는 그녀를 돕는다. 시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서 남는다. 무스카 정부 비밀조사단 소속. 라퓨타와 보물을 찾기 위해 정부에서 파견했다. 본명은 로무스카 파로 우르 라퓨타. 라퓨타 왕족의 또 다른 후예이다. 라퓨타를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지니고 있으며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도라 해적의 보스이자 여걸. 해적선을 지휘한다. 처음엔 비행석을 노린 것이지만 이후 천공의 성 라퓨타를 찾기 위해 파즈와 힘을 합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도라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어머니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한 적 있다. 해적 도라와 아들들, 그리고 기관사 등으로 구성된다. 해적답지 않게 착한 면도 지니고 있다. 특히 도라의 아들은 마마보이. 시타를 마음속으로 짝사랑하며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게 된다. 무오로 장군 라퓨타를 찾기 위해 정부에게 파견한 군장성. 부패한 장군의 전형적인 경우다. 스스로는 무스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이용당한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시타의 할머니 시타를 맡아 키우면서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주문을 그녀에게 알려준다. 폼 할아버지 광산을 사랑하며 광산촌의 바위들에 대해 잘 아는 백전노장. 시타와 파즈가 광산촌 터널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돕는다.

시골로 간 영화 <목포는 항구다> <마지막 늑대>

지난 97년에 개봉되었던 <넘버.3>와 <초록물고기>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연배우 한석규와 빛나는 조연 송강호의 얼굴일 것이다. 그러나 두 영화의 공통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신인감독들(송능한, 이창동)의 입봉작이었으며, 상업적인 장르영화(이른바 ‘깡패’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비평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다. 사회적 리얼리즘의 정신과 장르적 화법의 행복한 조우. 이것이 그러한 평가의 주된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04년, 우리는 그 영화들과 비슷한 장르적 성격을 지닌 두 신인감독의 영화를 극장에서 만난다. 김지훈 감독의 <목포는 항구다>와 구자홍 감독의 <마지막 늑대>. 하지만 이 두편의 영화는, 97년의 그것들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흥미로운 차이 중 하나는, 97년의 두편의 영화가 ‘상경’(上京)영화였다면, 2004년의 그 영화들은 일종의 ‘귀향’(歸鄕)영화라는 점이다. 상경영화와 대비되는 귀향영화들 97년의 <넘버.3>와 <초록물고기>는 철저한 ‘상경’(上京)의 영화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과 깡다구밖에 없는 그들에게 ‘상경’은 곧 ‘계층 상승’의 기회를 의미했다. 그들에게 서울은 기회의 땅이자,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할 처절한 생존경쟁의 무대였다. 이 영화들은 그 피비린내나는 처절한 ‘상경 투쟁’의 성공과 좌절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에게 시골(고향)은 일시적인 충전의 공간(송강호가 이끄는 불사파의 극기훈련)이거나, 성공한 뒤에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꿈의 공간(막동이의 느티나무집)이었다. 사실, 이러한 ‘상경’과 그 이면으로서의 ‘고향’의 이미지는, 이미 오래전에 한국 장르영화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공식’이기도 하다. 70년대의 호스티스물이 시골 소녀들의 좌절된 상경기였다면, 많은 범죄영화들은 시골 소년들의 무모한 상경기였다. 심지어 이미 지방 유지로 자리잡은 <가문의 영광>의 ‘조씨 일가’가 꿈꾸는 ‘가문의 영광’은 당당히 서울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포는 항구다>와 <마지막 늑대>는 그 기나긴 전통을 거스르며 강한 ‘귀향’ 의지를 보여준다.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이 ‘귀향’ 바람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2002년의 <집으로…>에서 시작된 고향 찾기는, 2003년의 <선생 김봉두>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들 속의 인물들이 고향을 찾아간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니다. <집으로…>의 아이는 돈을 벌어야 하는 엄마에 의해 시골 외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선생 김봉두>의 부패 교사는 실수로 시골로 전출된다.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고향’을 발견하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되찾는다. 고향은 그렇게 오염에 찌든 그들을 순화시키는 치유력의 공간으로 이상화된다. 그러나 그곳은 그들이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한뼘쯤 성장하고 정화된 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울로 올라가야만 한다. 무엇보다 산골 오지였던 그곳이 이상화된 ‘과거’의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4년, <그녀를 믿지 마세요>에서 그 고향 찾기는 다시 한번 반복된다. 앞선 영화들과 다른 점은, ‘그녀’가 끝내 그 고향에 정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 사기꾼인 주영주(김하늘)의 믿을 수 없는 말과 표정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서울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녀는 순박하고 넉넉한 시골의 인심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진심을 발견하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고아였던 그녀는 그곳에서 가족을 찾으며 정착한다. 그곳이 순박한 인심과 ‘고추 총각 선발’ 이벤트가 함께 공존하는 지방 소도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방도시 목포의 모호성과 매력 <목포는 항구다>는 서울 형사 이수철(조재현)의 지방 도시 목포에의 정착기라는 점에서 <그녀를 믿지 마세요>와 맥을 같이 한다. 단, 주영주는 정착을 통해 ‘신분’을 얻게 되지만, 이수철의 정착은 ‘신분’을 포기한 결과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떻게 그리고 왜 서울 형사 이수철은 목포의 건달이 되는가? 서울 형사 이수철이 지방 도시 목포에 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서울 검찰의 성기파 두목 백성기에 대한 어떤 ‘오해’ 때문이다. 서울 검찰과 이수철에게 목포-백성기는 철저한 오해의 대상이고, 비밀의 대상이다(백성기가 감방에서 모셨던 조태범의 추천서가 왜 거꾸로 생매장의 빌미가 되는지 그들은 끝내 알지 못한다). 둘째, 겁은 많고 운동 신경은 전혀 없는 이수철이 잠입 요원으로 선발되는 것은, 오로지 그가 가장 먼저 ‘말귀’를 알아듣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해에서 비롯된 그 잠입 수사 과정에서 이수철이 백성기의 비밀(진심)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그는 그만큼 백성기의 포로가 된다. 오해가 이해로 바뀌게 되면 그만큼 더 치명적인 인력으로 작용하는 법이다. ‘서울내기’를 상징하는(‘머리’는 좋고 ‘겁’은 많은) 이수철은 때묻지 않은 ‘지역성’을 간직하고 있는 성기파 두목 백성기(차인표)에게 점차 감화되며, 그리하여 백성기는 형님이 되고, 목포는 제2의 고향이 된다. 백성기에 대한 오해가 풀려가는 이 과정은, 곧 ‘목포에는 깡패만 산다’는 지역성에 대한 오해가 풀려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백성기가 보여주는 치명적인 매력은, 그 모호성과 비밀스러움(백성기에게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묘하게 공존한다)에 있으며, 그것은 곧 지방 도시 목포가 간직하고 있는 모호성과 매력이기도 하다.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백성기는 곧 건달의 도리를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울은 ‘사업’의 공간이고, 그곳으로의 진출은 곧 건달에서 ‘깡패’로 타락하는 길이기도 하다(어떤 의미에서 백성기는 현명하게도 자신들에게 서울의 최대치는 ‘영등포’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이수철은 제2의 고향 목포에서 형님의 도움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던 ‘육체성’을 되찾으며 제2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영화 <마지막 늑대>는 <선생 김봉두>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최철권(양동근)의 ‘귀향’ 동기는 한장의 사진이다. 그는 서울의 형사 생활을 통해 죽고 싶을 만큼 철저히 탈진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강원도 산골 마을로 귀향한다. 아마도 그는 많은 ‘귀향’영화 중에서 유일하게 ‘자발적 귀향’을 감행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가 무위마을에서 보여주는 행태는, 초야에 묻히기로 작정한 옛 지사나 도인의 그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그의 태도는 다양한 저항에 부딪힌다. 그곳엔 더이상 산골 오지로 남아 있고 싶어하지 않는 다양한 욕망이 있다. 먼저 여전히 서울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고정식(황정민)이 있다. 그리고 시골성을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무위마을 유일의 ‘벤처 기업가’ 광수의 욕망이 있다. 고정식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만(비록 그에게도 서울은 ‘영등포’일 수밖에 없겠지만), 최철권은 온전히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도달한 결론이다. 야생의 ‘늑대’가 발견되었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마지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늑대>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선언이 된다. 최철권은 끝내 하늘로 비약한다. <마지막 늑대>, 고향 찾기의 종착점 일련의 ‘귀향’영화에서 인물들이 돌아간 곳은 공간적으로 시골(고향)이며, 시간적으로는 과거(어린 시절)이다. 근원적 치유력을 지니고 있으며, 다시 한번 결핍된 성장의 기회를 약속하는 그곳. 그러나 그곳은 서울(사람)의 욕망이 투사된 이상화된 타자성의 공간이고 현실적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공간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늑대>는 ‘귀향’영화들이 감행한 고향 찾기(고향의 의미에 대한 탐색) 여정의 ‘마지막’ 도달점일 것이다. 서울의 삶이 팍팍하고 힘에 부치는 것인 한, 어쩌면 그 지방-어린 시절은 한국영화(이야기)의 영원한 젖줄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에는 ‘맹부삼천지교’의 처절한 ‘상경’ 욕망이 들끓고 있으며, 그것이 좀더 현실적이고 현재적인 우리 모두의 욕망이다. 그래도 한국영화가 다시 귀향해야 한다면, 이제는 더이상 ‘지방’(provincial)영화가 아니라, ‘지역’(local)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지방은 서울이 ‘아닌 곳’으로서만 의미화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지역은 그 자체로 의미화될 수 있는 삶의 공간이다. 서울의 관객을 소구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관객이 자신들의 ‘지역성’(locality)을 다시금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지역’영화는, 아직 한국영화에서는 과제로 남아 있다(나는 개인적으로 곽경택 감독의 <똥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단지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목포는 항구다>와 <마지막 늑대>에는, ‘무거움’와 ‘가벼움’의 이상하고 어색한 공존이 있다. 새삼스러이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하는 것은, 97년의 <넘버.3>에도 무거움과 가벼움의 공존이 있었지만, 그것은 결코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목포는 항구다>는 감독의 누아르적 감성에서 출발한 영화이며, <마지막 늑대> 역시 감독의 ‘삐딱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한다. 어쩌면 그 이상하고 어색한 동거는 현재의 한국영화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표정’일 것이다. 대중적인 상업영화가 근본적으로 다양한 영화 주체들(제작자에서 관객에까지 이르는)의 타협의 산물이라면, 이 어색한 공존은 단지 감독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한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감독 자신의 몫이다.

<씨네21> 창간 9주년 표지 촬영현장 - [3] <씨네21>과 나

안성기 아마 국민배우라는 말을 처음 쓴 게 <씨네21>이었지?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 모르겠어. (웃음) 국민배우니까 좀더 잘살아야겠구나,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어디 가서 술 먹고 엉뚱한 짓 하고 그러지 못하잖아. 그게 멍에를 씌운 것 같진 않아. 믿음을 계속 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생기는 거지.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일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이고. <씨네21>에 인터뷰하러 오면 기억에 남는 게 윤전기 소리야(과거엔 사진을 찍는 스튜디오가 신문윤전기가 돌아가는 옆에 있었으나 지금은 쾌적한 옥상으로 이전했음). 어찌나 시끄러운지 정말 대단히 큰 일 하고 돌아가는 느낌이 들더라고. (웃음) 예전에 <씨네21>에서 영화상 만들어서 상 줄 때 생각도 나네. 수상자를 부르는데 그분이 “신선하진 않지만 안성기”라고 그러시데. 수상소감으로 “푹 삭힌 된장맛도 괜찮다”고 했던 기억이 나. 아마 성질 급한 사람이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는데. (웃음) 그런데 <씨네21> 영화상은 왜 없앤 거지? 박중훈 국내 최초의 영화전문주간지로서 <씨네21>은 처음엔 진보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존 영화인들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 듯했다. 영화에 대해서, 만드는 의도가 의미있단 이유로 지나친 편애가 깊었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고 생각된다. 정의를 위장해 꼬여 있는 시각이었던 것 같고, 경쟁지 없이 독주하던 때의 오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4년 정도 절독했었는데, 환경이 달라지면서 다시 시각에 균형이 잡힌 듯하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독자로서 난 <씨네21>에 애증이 깊고, 그래서 9주년의 감회가 누구보다 새롭다. 엄정화 오래전부터 영화를 너무 하고 싶었고, 그래서 내가 찍은 영화 소식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때 처음으로 <씨네21>과 표지사진 찍고 인터뷰했을 때 정말 기뻤다. 영화를 하고 있다는 내 자신이 실감이 났고, 바람이 이뤄졌다는 것 때문에. (기자가 약간 뚱한 표정을 짓자) 어∼ 이거 진짜인데. 오늘도 스케줄이 굉장히 많았지만 꼭 하고 싶어서 어떻게든 달려온 건데. 같은 배우들끼리 이렇게 사진 찍고 하는 거 너무 재밌는 거 같다. 조재현 나는 조·단역으로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다. 표지를 처음 해본 것도 아마 <씨네21>이었던 것 같고. <악어>를 찍었을 때 다른 데는 평가조차 해주지 않았는데 남동철 기자가 리뷰를 써줬다. 오늘날 영화작가 김기덕을 알리는 데 <씨네21>이 구심점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건 나에게도, 김기덕 감독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의리로 정기구독 안 할 수도 없고…. 값은 내리지 마라. 자기 길 잃지 않으면서, 독립영화쪽에도 신경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이병헌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동안 자주 만나서인지, 특별한 추억 같은 건 없다. 영화하는 사람이 느끼는 정서가 다 그렇겠지만, 영화잡지와 영화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살갑게 느껴진다.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건 아마도 ‘영화’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거다. 나는 연기를 방송에서 시작했지만, 언제나 영화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영화계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씨네21>을 열심히 봤다. 특별한 바람은 없고, 평생 영화를 할 배우들에게 언제까지나 ‘좋은 친구’로 남아줬으면 좋겠다. 최지우 내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드라마 <첫사랑>을 통해서지만, 영화는 그 전에 출연한 <박봉곤 가출사건>이 데뷔작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한 것도 9년째이고, <씨네21>도 올해 9년째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린 ‘함께’ 커온 것이다. 데뷔작부터 함께한 잡지라 각별하게 느껴진다. 불만? 없지는 않다.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영화를 개봉도 하기 전에 너무 많이 드러낸다거나 비판한다거나 하는 건 좋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별점이 그런 의미에서 좀 가혹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별점이 없으면, 허전할 것 같기도 하다. (웃음)

그저 성장통 중

“지금도 그렇게 좋아?” “지금?…… 묻지마라.” “그렇게 요란스럽게 결혼하더니 행복해?” “행복? … 글쎄….” <장미의 전쟁>에서 남편의 무능함에 화가 나서 집을 나온 미연(최진실)이 동생 미란(송선미)과 여관에서 하룻밤 지내며 나누던 대사였다. 분명히 수철(최수종)을 죽도록 사랑하여 독한 어머니, 허영심 여사(윤여정)를 배반하고 보란 듯이 결혼하여 잘사는 모습을 과시하고 싶었을 미연은 미란의 좋으냐는 질문에도 행복하냐는 질문에도 선뜻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주저하는 태도는 정작 미란이 두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하(류진)와의 결혼을 강행하려고 하자 싸늘하게 충고하는 데로 이어진다.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랑과 행복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새로운 동반자를 찾았거나 찾아가는 딸들의 배후에 굳건한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하여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들의 어머니, 허영심 여사는 남편의 여자에게까지 콩팥을 떼어주던 <꽃보다 아름다운> 어머니가 아니었으며 전처의 소생을 제 자식보다 안타깝게 여기며 키우는 <백만송이 장미>의 헌신적인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녀는 딸들이 자신의 주장과 요구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절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강인하고 비정한 현실적인 여인이었다. 전혀 희생적이지 않은 어머니의 모습 앞에 우리는 불편해진다. 언제든 돌아와 웃을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후벼파도 그 속으로 뛰어들면 끝도 없는 안온함이 감싸줄 것만 같은 어머니가 그곳에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어머니가 부재하는 그곳에는 맥빠진 남성들의 군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알량한 정의감과 의협심에 무능력이 삼박자로 갖추어진 수철과, 안정된 집안에 기댄 허약한 귀공자 타입의 재하와, 가사와 아내의 병원관리에 말투까지 주부스러워진 미란의 아버지(주현)와, 허울뿐인 권위와 초라한 형편으로 호통은 언제나 종이호랑이뿐인 수철의 아버지(송재호)까지, 도대체 남성들은 그 당당함이 쭈그러들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꽃보다 아름다운’ 어머니들이 자식들과 함께 버둥거리며 살려고 애쓰던 때 그들은 아내들이 주는 인내와 안정을 딛고서 ‘바람 피우며 즐기고’ 살았기 때문이었는가? 그러나 강인하지만 불편한 어머니와 온순하지만 맥풀린 아버지들의 탄생은 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인내심 있는 어머니가 남성의 권위로 먹고살던 아버지를 받쳐준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후자의 쌍이 60, 70년대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기틀이었으며 그들의 피와 땀으로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면 2000년대에 확연히 모습을 드러내는 전자의 쌍을 우리는 불편하더라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작 그뒤에 도사린 더 중요한 문제는 그 희생적인 어머니와 권위적인 아버지가 키운 아들과 딸들이 이제는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그네들의 아들들은 어머니의 보호벽과 아버지의 허상 앞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할지 아버지를 거부해야 할지 방황하는 영원한 소년티를 못 벗어나고 있으며 그네들의 딸들은 어머니에게서도 아버지에게서도 이미 이탈하려는 조짐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씨네21> 488호 정승훈의 ‘영화읽기’에서). 아들은 나의 힘이라고 믿고 살아온 재하의 어머니가 바로 재하에게는 보호벽이자 성장하려면 넘어야 하는 장애가 되고, 남자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관념만을 물려준 수철의 아버지가 바로 수철에게는 버릴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는 아버지상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반면에 딸들은 용감했다. 사랑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정한 어머니라도 거칠 것이 없다. 현실의 거센 파고에 흔들리는 일이 있을지언정 그녀들에게 주요 문제는 이제 “사랑하고 행복하냐”는 것이다. 미연이 미란의 결혼 강행에 반대하는 것도 정작은 어머니를 걱정한 것이 아니었고 현실의 벽을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분명한 허영심 여사의 딸들이었다. 과연 그들은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여 부부와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겠는가? 걱정스럽게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지금의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들은 인내심 있는 아내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위로 무장된 아버지상을 극복해야 하는 아들들이 비권위적이면서도 당당하게 성장하여 그녀들의 동반자가 될 남성상을 정립하는 것을 아직은 꿈도 꿀 수 없다. 심각하게도 수철은 자신이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지 당황스러운 채, 그저 성장통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아버지를 기다려야 하는가….素霞(소하)/ 고전연구가

경쾌한 4박자, 우아한 3박자, <바람의 전설> O.S.T

초반 설정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하여 조금 억지로 세팅된 면이 없지 않다. 왜 춤 선생님은 모두 지방에 있으며 다 소주를 달고 사는 폐인일까를 갸우뚱하는 사이, 어느새 주인공은 춤을 마스터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예상외로 속도감 있게, 흥미롭게 진행된다. 점차 영화는, 기본이 제비인 ‘무도 예술가’의 알리바이가 예술가의 진정성과 헷갈리면서/겹치면서 과연 제비인 그의 진정성이 이야기상에서 어떻게 드러날 것인가 쪽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에서 춤꾼, 제비, 예술가라는 세 개념은 서로 상극인 다른 카드이면서 하나의 조커다. 이 영화의 대중적 기반의 하나는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 ‘동호회’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댄스 스포츠 바람이다. 댄스 스포츠에 등장하는 장르들, 룸바, 살사 등등의 리듬들은 그대로 음악 장르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는 우리에게 친근한 여러 음악들이 주인공들의 발에 날개를 달도록 해준다. 영화를 주름잡는 리듬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가 자이브고 다른 하나는 왈츠다. 그 개수가 좀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일단은 4박자의 경쾌한 춤 하나, 3박자의 우아한 춤 하나가 기본 축으로 작용하는 것은 심플하고도 선명한 측면도 있다. 신명나는 소통이나 공감대를 표현할 때에는 4박자의 리듬을, 로맨틱한 사랑의 일치감 같은 것을 표현할 때에는 3박자의 리듬을 구사함으로써 리듬의 특징들을 구별해주고 있다.영화 속에서 이른바 ‘자이브’를 출 때 많이 나오는 음악은 바로 빌 헤일리 앤 더 코메츠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 로큰롤이 아직 완벽하게 8비트로 넘어가기 전, 재즈의 4비트와 블루스의 백비트를 섞은 다음 그것을 다시 백인적인 2박자 단위로 자른 이른바 ‘로커빌리’ 리듬이라 할 수 있는 곡. 영화음악은 이상호 음악감독이 맡았다. 그는 <가위> <폰> 등의 영화에서 음악을 담당했으며 여러 TV물에서도 음악감독 역할을 했다. 이번 영화에서는 춤의 리듬 자체에 관한 박물학적인 정밀성보다는 춤의 기본 분위기를 살리는 ‘친근함’을 많이 강조한 듯하다. 아무리 흥겨워도 보는 사람의 다리를 절로 건들거리게 하지 않으면 좋은 댄스음악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댄스음악은 대중과의 소통이 필수적인데, 이 영화가 많이 신경쓰고 있는 대목 또한 그쪽이 아니었나 싶다. 일상에 지친 보통 사람이 춤의 세계에 빠진다는 착상은 어쩌면 일본의 <쉘 위 댄스>와 공유할지도 모르지만 그 접근법이나 테마는 조금 다르다. 일본의 그 영화가 춤이 어떻게 일상을 예쁘게 물들이는 맛난 조미료 역할을 하느냐에 관한 영화라면, <바람의 전설>은 박풍식의 일상에 불어젖힌 춤의 ‘바람’이 어떻게 일상을 제물로 삼느냐에 관한 영화다. 춤에 통달한 주인공치고는 추는 춤이 조금 단조롭다는 것이 흠이긴 하지만, 유쾌하고 흥미로운 음악 속에 전통에 빛나는 코리아 제비의 사깃발 서린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다는 시도는 신선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