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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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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섹스&시티>?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

지난달 21일 시작한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극본 김인영, 연출 권석장)는 제목만 봐서는 그저그런 또하나의 드라마로 짐작하기 쉽다. 결혼을 두고 밀고당기는 뻔한 스토리를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20, 30대 젊은 여성들의 트렌디가 있다 기존 드라마가 배역이나 줄거리에서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드라마 주 소비층인 40, 50대 아줌마들을 겨냥한 것이 대부분이다. 방송사로서는 텔레비전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중년 여성들의 입맛에 맛는 드라마를 만드는 게 시청률에서 안전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러브팬터지’가 판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작 20, 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자기 이야기 같은 드라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모처럼 젊은 여성들의 트렌드와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 이 시대의 진정한 트렌디 드라마라고 할 만하다. 지난해 같은 문화방송에서 방영됐던 〈옥탑방 고양이〉나 〈앞집여자〉와 같은 계보라고 할까. 남자 친구한테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차인 뒤 결혼할 남자를 찾는 방송사 여기자 신영(명세빈), 병든 아버지에 뺑덕어멈 같은 과부 고모와 고모딸까지 부양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돈도 없고 남자도 없는 순애(이태란), 재벌가로 시집갔으나 남편에 맞서 맞바람을 피우다 파란눈의 아이를 낳은 죄로 시집과 친정에서 쫓겨난 연애박사 승리(변정수) 등 32살 동갑네기 세 친구의 내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가 경쾌하면서도 때론 가슴 찡하게 그려진다. 시청자 고미숙씨는 “31살 노처녀입니다. 오랜만에 나를 웃게 해준 것 같아 고마웠어요”라고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유숙희씨는 “20대는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고, 30대는 현재를 보며 공감하고 40, 50대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런 드라마 때문”이라고 소감을 남겼다. 20, 3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는 시청자 분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20% 미만이지만 세대별 시청점유율을 살펴보면 20대 여성과 30대 여성의 시청 점유율이 각각 33%, 30%로 드라마 주력 소비층인 40대와 50대 여성의 시청점유율(각각 23%, 21%)보다 높다고 시청률 조사기관인 티엔에스는 밝혔다. 경쾌함과 쓸쓸함, 세태풍자가 있다 이 드라마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 상당수는 “연기자들의 오버도 너무 재밌다” “다뤄지는 이야기들이 무거운데 유쾌함으로 풀어내는 것 같다” 등 드라마가 내세운 웃음의 코드에 적극 반응하는 내용들이다. 사실 그동안 다소곳하고 현모양처 같은 배역만을 맡아 내숭덩어리 이미지를 갖고 있는, 신영 역의 명세빈이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연기에 웃음이 터져나온다. 지난해 〈앞집여자〉에 이어 연애박사로 나오는 변정수의 화려한 몸짓도 경쾌하다. 신영과 준호(유준상)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진 이후 20여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도 다른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항문이 부어 병원을 찾아간 명세빈의 항문에 손을 집어넣은 사람이 다름아닌 유준상이라는 설정은 차라리 이 시대의 엽기코드와 맞닿아 있다. “너무 오버하는 것 아냐”라는 느낌도 들지만 바로 내숭을 떨지 않는 게 이 드라마의 미덕이자 매력이다. 노골적으로 조건에 집착하는 남녀관계를 드러냄으로써 뒤틀린 관계맺기를 풍자하기도 한다. 치과의사인 남자 친구로부터 “나이 많고 고집 세다”는 이유로 차인 신영은 준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육탄공세를 서슴지 않으나 그는 띠동갑 연예인을 소개시켜달라는 둥 철저하게 속물근성을 보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편마다 중간에 신영의 일기 같은 내레이션을 삽입해 자칫 시트콤처럼 흐르기 쉬운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나이 많은 여성이 홀로 살아가면서 겪는 인생의 팍팍함, 쓸쓸함 같은 것이 잘 드러난다. 승리의 자살을 말리며 세 친구가 목놓아 우는 장면 뒤에 흐르는 내레이션 같은 게 특히 그렇다. “서른 살 넘게 살다 보니 삶의 지혜도 얻게 됩니다. 인생엔 견뎌야 할 때가 있다는 것. 눈보라 친다고 해서 웅크리고 서 있으면 얼어죽는다는 것. 눈 비 바람 맞으면서도 걷고 또 걸어가야 한다는 것. 처절한 고통의 현장에서 눈물콧물 흘리는 이신영이었습니다.” 한국판 〈섹스&시티〉 같다는 얘기도 있다 뉴욕여성 4명의 일과 사랑, 섹스이야기를 절묘하게 그려내 높은 인기를 누리는 미국 시트콤 〈섹스&시티〉. 칼럼니스트 캐리가 헤어진 옛 남자친구를 다시 만나 어떻게든 꼬셔서 ‘섹스’를 하려고 안달하는 장면은 신영이 준호에게 공을 들이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 남자의 사랑을 원하는 순정파 샬럿은 진순애, 장승리는 자유분방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만다의 설정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프로그램 인터넷 게시판에도 “섹스&시티와 설정이 비슷한 것 같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섹스&시티〉가 섹스를,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결혼을 주요 모티브로 한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두 나라 여성이 처한 현실 때문이겠지만 〈섹스&시티〉의 여성들이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여성들보다 훨씬 진취적이고 도전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경우 신영과 같은 전문직 여성이 앞뒤 안가리고 결혼에 목을 매는 설정은 바로 드라마의 현실성을 약화시키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의 가치체계를 뒤엎으려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역시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보수적 설정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상자료원 5월의 테마 <산불>서 <매춘>까지 13편 상영

“예리한 지성은 차라리 아픔이었다. 가슴 속 깊이 타오르는 뜨거운 영상!”, “사랑 앞에-서 무엇을 감추랴 대자연도 숨죽인 강열한 육체언어” “풍만한 여인, 신비로운 예술적 에로티시즘”. 지금 읽어보면 야하기 보다는 너무 유치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 광고카피의 주인공들은 바로 70~80년대 한국 극장가에서 사랑받았던 이른바 ‘에로영화’들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매달 정기적으로 여는 주제별 상영전의 5월 테마는 ‘한국 영화 속의 에로티시즘’이다. 남성과 여성, 아내와 애인 관계 속에서 삼각, 사각으로 얽히는 사랑과 성을 소재로 제작됐던 한국 영화 13편이 18일부터 22일까지 서초동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상영된다. 60년대 대표감독인 김수용의 <산불>(1967), 신상옥의 <내시>(1968)부터 80년대 ‘에로영화’바람의 끝물을 탔던 유진선 감독의 <매춘>(1988)까지 시대별로 관객들을 자극했던 에로티시즘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다. 순결하고 지고지순한 여자가 빠지는 사랑과 비극이 주요테마였던 70년대 작품으로는 정소영 감독의 <성숙>(1974), 77년도 최고의 흥행작인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를 상영하며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많은 속편을 만들어낸 <애마부인>(정인엽 감독, 1982)과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뽕>(이두용 감독, 1985), 수많은 10대 남학생들을 동시상영관에 몰려들게 했던 이보희 주연의 <무릎과 무릎사이>(이장호 감독, 1984)등의 80년대 흥행작들을 만날 수 있다. 관람료 2000원. (02)521-3147.

팔루자, 쥐떼, 그리고 광주

또 쥐떼가 나타났댄다. 1980년에는 한국이더니, 이번에는 이라크의 팔루자랜다. 미군 합참의장 리처드 마이어스란 자는 미군이 지난 3월31일 발생한 미국 경호회사 직원 4인의 시신손상사건의 범인 체포를 위해 팔루자에 들어갔지만, “우리가 찾아낸 것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거대한 쥐떼들의 소굴이었다”라고 말했단다. 1980년 8월, 광주의 학살자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 오르려 할 때, 외국기자들은 주한 미군사령관 위컴에게 한국 사람들이 과연 전두환을 지지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위컴은 한국인들은 쥐떼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를 따라갈 것이라면서, 이미 한국인들은 쥐떼처럼 전두환 뒤에 줄을 서고 있다고 말했다. 위컴도 미국에 돌아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니, 미군 최고지휘관의 자격 요건에 혹시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쥐떼로 보는 탁월한 감식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절망감마저 들게 된다. 학살, 그 모진 일은 학살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을 때 일어났다. 팔루자에서 미국 경호회사 직원들의 시신이 훼손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미군 진주 뒤 후세인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바그다드 시민들의 모습만 기억하는 미국의 일반 시민들에게 그 광경은 더더욱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찌든 이라크 국민들에게 그 광경은 별로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머리가 터지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아니, 문자 그대로 뼈도 못 추리는 주검이 즐비한 게 전쟁의 현실이고, 이런 현실 속에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하루에 수십명이 새로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시신이 죽을 때 손상된 거냐 죽고 난 다음에 손상된 거냐는 차이가 과연 얼마만큼 절실한 문제일 수 있을까? 한국의 평화운동단체인 이라크평화네트워크가 발행한 <이라크의 광주-팔루자 학살의 증언>에 의하면 거리에는 채 묻지 못한 시체가 널려 있고, 개가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노근리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군은 ‘움직이는 것’은 모두 쏘아대고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 정부와 사회 일각에 포진해 있는 무조건 파병론자들은 이라크 상황이 급변한 다음에도 국제사회와의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면서 이라크 파병을 고집하고 있다. 이들은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됐던 한국인 인질들이 무사히 풀려난 것을 두고 이라크 사람들이 한국 사람에 대해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가며, 혹시라도 파병을 못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솔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이라크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한번 물어보자. 이라크 사람들 처지에서 생각하기 힘들다면 의병항쟁 때나 3·1운동 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일본군이 힘들다고 다른 외국군이 일본군 도우러 들어오면, 우리는 그 나라가 10여년 전에 길 잘 닦고 공사 잘했다고 환영할 것인가? 국제사회에 대해 한 약속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말도 그렇다. 과연 우리가 지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미국이 자행하는 학살을 결과적으로 도울 수밖에 없는 파병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이상의 학살을 막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할 것일까? 보이스카웃 캠핑을 보내는 것도 아닌데 국방부는 ‘안전’한 주둔지만 찾다가 지난 몇년간 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대한 시한폭탄인 쿠르드 지역에 깃발을 꽂겠다고 한다. 우리는 외국군에 의해 해방과 점령과 학살을 모두 경험했다. 광주 때는 미국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일어선 광주 시민들을 돕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했다고 좋아하다가,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학살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군 사령관은 우리를 쥐떼라고 불렀다. 노근리를 겪은 우리가, 광주를 겪은 우리가 정녕 이라크에 파병해야 하는가? 월드컵 때 시청 앞 광장에는 100만명이 모였고,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에는 10만명이 모였다. 그러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매일매일 또 다른 효순이, 미선이가 생겨나는 것을 막아보자는 반전평화집회에는 1만명에 한참 못 미치는 사람들만 모이고 있다. 이라크 문제가 긴박하게 돌아갔지만, 탄핵에 매몰된 한국사회는 파병문제에 응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라크 전쟁 나쁜 거 다 알지만 미국한테 찍히면 곤란하니까, 또는 이라크 파병 이미 결정난 거니까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달며 파병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는 윤동주의 <서시>라는 말을 듣고 괜히 화가 났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그린다는 사람들이 정말 무슨 생각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저 학살의 땅에 미군을 도우려 기어이 군대를 보내겠다는 대한민국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파병국가의 국민된 도리를 다해야 하는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사무처장

입이 아니라 몸을 해방하라, <바람의 전설>

건달, <바람의 전설> 을 보고 낡은 몸 담론에 대해 생각하다 나는 ‘봄’이 좋다. 봄은 단아하면서도 미세한 서성거림이 있다. 묵은 기운을 흘려보내고 새 기운을 받아들이는 행사를 그렇게 온화하게 치러낼 수 있다니! 그래서인지, 나도 봄바람을 맞으면 겨우내 가시를 돋우었던 마음의 옹이도 새순으로 변한다. 봄은 묵은 시간의 쳇바퀴 속으로 새로움이 회귀하는 소리없는 춤처럼 느껴진다. 말없던 지상의 모든 생명이 일제히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는 침묵의 군무. 수다쟁이 인간도 말을 반납하면 저 춤의 대열에 낄 수 있을까? 행여 모를 일이다. 4월에는 시금치처럼 입을 닫고 봄바람에 자빠트려져볼 일이다. 몸이 하는 말이 들릴 때까지 드가처럼, 드가처럼 열심히 춤을 몽상해볼 일이다. 언제 처음 춤을 추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불온 삐라처럼 드문드문 파편으로 박혀 있을 뿐 온전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때, 포크댄스라는 걸 전교생이 마당에 모여 했다. 아침 조회 끝나고 군대식 열병으로 교실로 들어가던 그때에 왜 미국의 민속춤을 가르쳤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도, 몇년 뒤에 배우게 될 국민체조, 제식훈련, 총검술 등의 워밍업이 아니었을까? 고등학교 때 교련복 입고 친구 자취방에 가서 당시 유행하던 팝송 ‘뒷골 땡겨’(Dizzy)에 맞춰 ‘고고’(Go Go)를 방구들이 내려앉도록 연습했다. 소풍날 공연을 했는데, 다음날 학교 와서 학생과장에게 엄한 문초를 받았다. ‘반장이 진로포도주에 불량한 춤까지!’ 대학에 들어와서는 같이 자취하던 친구가 열혈투사가 되는 바람에 ‘해방춤’을 배웠다. 그런데, 안무가 시원찮아서 해 떨어지면 종로의 디스코텍에 가서 디스코와 블루스를 별도로 학습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친구의 혹독한 비판에 스텝이 자주 엉켜서 그 짓도 그만둬버렸다. 그 이후 춤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 때 배운 막춤을 응용해 근근이 사회생활에 적응해왔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내가 춘 춤의 사위는 내 몸을 편안하게 받아주지 못했다. 춤은 언제나 노래보다 조금 더 억압당했고, 세미나보다 많이 핍박받았다. 70년대에는 노동 착취를 위한 군사문화의 규율이 유연한 몸을 용납하지 않았다. 80년대는 그 규율을 깨기 위한 집단적 행진에 자유로운 스텝이 딴죽 걸렸다. 혼자 추는 춤의 사위가 이럴진대, 남녀가 두손을 맞잡은 사교댄스의 세계는 오죽했을까. 춤도 불량한데, 거기에 남녀상열지사까지, 이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국가보안법 사안이 아닌가! 권력이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은 권력없이 행복한 인간이 활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동원의 논리가 허구라는 사실을 가장 설득력 있게 반박하는 살아 있는 물증이다. <바람의 전설>의 주인공인 박풍식이 언뜻 보면 이런 인물 같다. 그는 자칭 ‘무도예술가’ 타칭 ‘제비족’이다. 춤이 좋아서 팔도를 주유하며 무예를 닦고 하산한 뒤로는 카바레에서 춤 자체의 쾌락에 인생을 건다. 여자들에게 받는 돈은 부수적 효과이다. 그러니, 그의 주장대로라면 전문적으로 인생을 탕진하는 무익무해한 쾌락주의자인 셈이다.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그는 제비족일 뿐만 아니라 내면 연기에 익숙한 사기꾼이다. 진정한 사기꾼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는 훌륭한 연기자이다. 감독은 이 연기를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하지만, 사실은 몸을 억압해온 그 강고한 편견과 싸울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냥 먼발치에서 “박풍식은 예술가”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하는 정도이지, 박풍식을 위한 변론서를 써서 뛰어다니는 노고는 사양한다. 그래서, <바람의 전설>은 오랜 시간 역사적 한파에 얼어붙은 몸에 봄바람을 불어넣는 해방춤 같지만 사실은 춤처럼 안무된 제식훈련으로 끝나고 만다. 정치적 담론에서 해방을 선언하자마자 소비주의에 포획된 요즘의 사물화된 몸들이 벌이는 매스게임. 이게, 춤이라면 이 춤의 스텝은 쿨한 성적 교환을 준비하는 몸짱의 웰빙 라이프 행진곡에 조율돼 있다. 설마 이게 해방된 몸의 안무는 아니겠지. 정치판에서도 노동하는 몸이 10석이나 국회로 진출한 이 봄에 해방된 몸뚱어리 하나 그려 보이지 못할 만큼 우리 영화의 몸은 구식 담론에 짓눌려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문제는, 진정 해방되어야 할 것은, 입이 아니라 몸이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

기타의 카리스마에 매혹되다, <기타닷컴> www.guitar.com

요즘처럼 시절이 수상하면 정치 얘기에 침 튀기다가 피 튀기도록 논쟁을 벌이기가 일쑤다. 그건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정치란 것이 밤을 새서 얘기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관심한 이에게는 저들만의 놀이에 지나지 않을 것인즉,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는 일을 인류에게 공평하게 분배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신 그들에겐 다른 재미를 주지 않았던가. 다수의 애호가들이 모여서 밤을 새워 설왕설래를 해도 지겹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악, 그중에서도 기타를 꼽을 수 있다. 언제나 무대의 중심에 있으면서 불끈 솟은 기타의 카리스마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게다가 기타 뒤에는 록이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는 바람에, 이제 막 기타 실기에 입문한 녀석이나 재재발거리며 귀동냥으로 기타리스트의 족보를 꿰는 녀석이나 록의 정신 아래 가슴을 치며 병나발 불며 핏대를 올리는 것이다. 한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그 덕에 아티스트 문희준이 엄하게 욕먹긴 하지만. 기타에 대해 얼마만큼 알든 간에 기타에 관한 얘기라면 귀가 솔깃해지게 마련인데, 그런 읽을 거리를 찾는다면 기타닷컴(www.guitar.com)을 기본적으로 둘러볼 일이다. 프랑스어가 조금 된다면 기타리스트닷컴(www.guitariste.com)도 좋을 것 같다. 요란하고 말이 많은 곳은 아니지만 기타리스트닷컴(www.guitarist.com)도 권하고 싶다. 클래식기타와 플라멩코 기타만을 다루고 있는데, 초보자에게 유용할 정보가 많다. 특히 링크에 관련 사이트가 잘 정리되어 있다. 김성환/ 인터뷰 전문웹진 <퍼슨웹> 편집장

제6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 발표 [3] - 금상 작가 류훈

금상 작가 류훈 류훈(32)씨는 미대 출신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2학년 이후론 붓을 잡아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가족이나 친구들만이 찾는 전시회가 싫었고, 소통 불가능한 순수의 세계가 갑갑해졌다.” 그리곤 비디오 아트로 전향했다. 외국에서 유학한 젊은 교수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다 한편의 영화를 만났다. . 만삭의 아내와 함께 추운 겨울밤 덜덜 떨면서 극장을 찾았고, 나오는 길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지나 아내는 예쁜 딸을 낳았고, 그는 영화에의 꿈을 얻었다. 1년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아트 칼리지로 유학을 떠났고, 3년 동안 영화연출 공부를 마치고 2002년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급한 마음에 영화사를 전전하며 시나리오를 내밀었지만 매번 가능성만을 확인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는 “먹고살기 위해” 영화과 3∼4군데를 돌며 강의를 하는 동안 틈틈이 쓴 시나리오. 본인은 멜로가 전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가학과 피학의 80년대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뽑혀 당황했다고. 현재 동국대 영화영상제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남는 시간은 “주인공 안 죽이고도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멜로 시나리오 창작에 모조리 쏟아붓고 있다. -소재를 어떻게 얻었나. =지난해 아는 사람이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시놉시스를 말해준 적이 있다. 듣고보니 피해자로 알려졌던 사람이 가해자로 드러나고, 가해자인 것으로 지목됐던 사람이 사실은 피해자였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평소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야길 듣고서 남 주지 마라, 내가 써보겠다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으로 디졸브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광화문이 빨간색 옷을 입은 이들로 가득 찼을 때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광경만으로 어떤 살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빨갱이라고 낙인찍고 고문했던 당사자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암시의 의미였다. -연쇄살인범으로 나오는 고문형사 조갑영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가. =이근안을 모델로 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실제 그 사람의 비행과는 많이 다르다. 다만 어떤 행위 자체가 악인가 아니면 그 행위를 유발시킨 환경이나 조건이 악인가 뭐 이런 자문을 가졌었는데, 이번 시나리오에선 그런 고민을 푸는 방식으로 시대적 상황들을 끌어왔다. -시대를 불러들이는 방식도 그렇고, 농촌의 경찰서가 주무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더라. =사실 이쪽 장르의 컨벤션이나 이야기 전개방식을 잘 몰랐다. 그래서 <쎄븐>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을 보면서 참조하고 공부했다. <살인의 추억>은 어떤 설정을 따온 것은 아니고 그 정도의 톤이면 상업영화로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진범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곤란하다고 봤는데 그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좋은 텍스트였다. -사건을 풀어가는 인물이 아줌마 검사다. =처음부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남자 검사라면 지나치게 진부할 것 같아서. 평소 <파고>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여자 경찰의 캐릭터가 너무 좋았고, 그게 이번 시나리오에서 아줌마 검사라는 캐릭터로 나왔다. 이 시나리오의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좀더 잘 살리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고 싶다.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나. =캐릭터의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번 그런다. 이번에도 류옥임 검사는 문소리를, 노형사는 변희봉 선생님이나 박인환 선생님, 이모술은 안성기, 조갑영은 장두이라는 배우를 떠올리며 썼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의 문소리는 아니고.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가 보여줬던 이미지다.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에서 얻나. =목욕탕에 주로 간다. 따뜻한 물속에서 중얼거리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앞으로 계획은. =멜로영화를 준비 중인데 좋은 시나리오 만들어서 연출까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에 우리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아버지 직업란에 강사라고 안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놉시스 2002년 봄 월드컵 열기로 한창이던 어느 날. 충남 괴산의 작은 양어장에서 이가 빠진 한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단순히 월드컵 경기의 승리 때문에 생긴 음주 실족사로 결론내린 경찰은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지만 유가족들의 항의에 부딪혀 사건은 아줌마 검사 류옥임에게 넘어간다. 검사라기보다 가정주부로 더 바쁜 일과를 보내는 ‘사건 마무리 전담 검사’ 류옥임. 그러나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시체들이 모두 치아를 잃은 채 발견되자 류옥임은 단순 실족사가 아닌 연쇄살인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괴산에서 조그만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모술은 집으로 돌아가다 납치당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모술은 사건의 범인이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 조갑영이라고 진술한다. 광주항쟁 당시 파출소에 던져진 화염병으로 인해 파출소장이던 아버지를 잃은 조갑영은 “빨갱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 이모술의 진술을 통해 고문한 사람들의 정수리에 빨간 인두자국을 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조갑영의 실체가 드러나고 류옥임은 조갑영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에 들어간다. 조갑영의 다음 목표가 십여년 만에 입국하는 교수 문지용임을 알게 된 류옥임은 결국 조갑영과 맞닥뜨린 끝에 사살하게 되지만, 그의 머리에 남아 있는 인두자국을 확인하고 혼란에 빠진다. ●● 발췌 #1 INT. 취조, 고문실-낮-1987년 6월 누군가의 시점숏. 라디오에서는 6·29 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고문 중인 취조실. 고통스러운 듯 좌우로 저항하는 머리가 물에 잠길 때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고 물에서 나올 때 목소리는 정상이 된다. 반복되는 물고문. 목소리(O.S) 좆까는 소리하지 마! 빨갱이 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 누군가의 손이 낡은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 백영규의 <잊지는 말아야지>가 흘러나온다. ‘잊지는 말아야지∼만날 수 없어도∼.’ #7 INT. 부장검사실-낮 창 밖에 쏟아지는 비로 어두컴컴한 부장 검사실. 부장과 류옥임 검사가 마주 앉아 있다. 한심한 표정의 부장검사, 턱으로 류옥임 검사의 가슴 부위를 가리킨다. 부장검사: 오늘 도시락은 양이 좀 많군. 류옥임, 부장검사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가슴 부위를 쳐다본다. 정장 단추 위에 말라붙어 있는 밥풀덩어리. 흠칫 놀란 류옥임, 얼른 떼어내려는데 이미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겨우 떼어낸 마른 밥풀을 어찌할까 허둥대다가 입으로 넣는 류옥임. 부장검사: 어제 괴산 근처 양어장에서 실족사가 있었어. 자네가 좀 처리해야겠는데…. 류옥임: (실망한 얼굴로) 실족사라면 결과 다 나온 거 아닙니까? 왜 항상 저한텐 이런 사건만 주시는 거예요? 저도…. 부장검사: (말을 가로채며) 사건다운 걸 맡고 싶으면 가정부 일을 때려치던가! 그 일 때려치우면 원하는 사건을 주지. 류옥임: 가정부 일이라뇨? 이제 제 아이도 다 커서…. #57 INT. 고문실-밤-1987년 당시 비명을 지르는 30대 초반의 남자를 의자에 앉히고 강제로 이를 뽑는 조갑영. 공포에 질린 남자. 크게 떠진 눈이 새빨갛게 출혈되어 있다. 이모술(현재로부터 V.O): 고문이 끝나면 조갑영은 두 가지 일을 했죠. 마치 큰일을 끝내고 하는 의식 같은 거였는데… 하나는 이를 뽑는 일이고 하나는 정수리에 인두자국을 내는 일이었어요. 류옥임(현재로부터 V.O): 인두자국이요? 인두를 불에 달구는 조갑영의 손. 30대 초반의 남자, 공포에 질린 표정이다. 이모술(현재로부터 V.O): 조갑영은 철저한 놈이죠. 세월이 지난 후에도 빨갱이와 빨갱이가 아닌 사람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자기가 고문한 사람들의 정수리에 인두로 표시를 해두어 그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죠.

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3] - 영화제 싹쓸이파

영화제 싹쓸이파 박지만씨 1992년 4월. 국내 최초로 고다르 영화 10여편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영됐을 때, <네멋대로 해라>를 본 박지만(33)씨는 어떤 영화도 보여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개안의 순간’ 이후, 그는 시네마테크 ‘씨앙씨에’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김태일 감독을 따라 ‘푸른영상’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거나, 독립단편영화 스탭을 하면서 픽션과 논픽션, 영화제작과 감상의 경계에 있었다. 그런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소개할 수 있는 명칭은 ‘영화제 싹쓸이파’. “영화제를 한번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다. 광주영화제에서는 주간 4, 5편. 심야까지 이어서 보기를 3박4일 동안 했었다.” 하루에 8, 9편의 영화를 본 셈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잠은 언제? 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매표 시작하기 전 줄을 서면서 좀 잔다.” 이쯤되면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여기에 지난해 한해 그가 극장에서 본 영화가 1천여편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에게 영화보기는 중독의 수준으로 느껴진다. 시네마테크에서 복제한 비디오가 유일한 영화감상 통로였던 박지만씨에게 90년대 후반 생겨난 각종 국제영화제들은 엄청난 희열을 안겨줬다. “1회 부산영화제 때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다양한 영화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광주는 프로그램들이 너무 좋았고, 전주는 한적해서 좋고….” 각각의 영화제들을 회상하는 그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서울아트시네마, 하이퍼텍 나다 등에서 영화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감독들의 영화를 필름 상영하는 빈도가 높아진 것은 그에게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영화제는 빠짐없이 갔다. 감독별로 영화를 보면 일종의 연대기와 맥락이 그려지더라. 그중에는 비디오로 본 것도 있지만, 필름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에릭 로메르 영화는 일종의 지적 코미디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자막이 중요하고, 필름으로 본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는 넘쳐 흐르는 감정이 느껴진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가, 좀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DVD 등의 매체보다도 발품을 팔아야 하는 영화제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재의 시네필들은 과거에 어렵게 영화를 찾아보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잘 차려진 잔칫상 같지만 노력하는 만큼 얻어갈 수 있는 ‘영화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과거 씨앙씨에의 현판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는 박지만씨.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영화관람’은, 그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던 전 세대 시네필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씨네21 영화제’가 없어진 이유를 묻는 그는 더 많은 영화를 생생한 필름으로 접할 수 있는 좀더 다양한 영화제들을 바라고 있었다. 베스트10 (순위없음) <네 멋대로 해라>(장 뤽 고다르)/ 영화보기의 새로운 시작이 됐던 영화. <안개>(김수용), <원점>(이만희)/ 최근 한국영화 회고전에서 발견한 최고의 한국영화들. 한 인간의 내재된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안개>), 빈틈없는 스토리와 깔끔한 흑백영상(<원점>)이 훌륭하다.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알렉산더 소쿠로프)/ 1회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러시아 문학의 ‘영상버전’이다. <꿈의 미로>(이시이 소고)/ 1회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보고 난 뒤 정말 행복했던 영화. 광택이 흐르는 흑백화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제리>(구스 반 산트)/ 3회 광주영화제의 발견. 사막의 길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인상적인 두 남자의 로드무비. <열쇠>(이치가와 곤)/ 일본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 거장 15인전을 통해 봤다. 컬러영화지만 흑백 같은 느낌의 화면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 우주와 인간, 인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영원한 걸작. <제7의 봉인>(잉마르 베리만)/ 신의 존재와 인간의 운명,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죽음’과의 체스 한판. <400번의 구타>(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영화광으로서의 추억을, 소년의 좌절과 희망으로 그려냈다.

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4] - DVD 컬렉터

DVD 콜렉터 전승민씨 모 금융회사 과장 전승민(33)씨. 맞선 자리에서 오가는 그 흔한 질문이 그에겐 다소 곤란하다. “취미가 뭐예요?” “DVD 타이틀을 모으고 있습니다.” “몇장 모으셨어요?” “몇장일 것 같아요?” “설마 100장?” 이런 식이다. 그가 소장한 타이틀은 대략 1700여장. 그나마 박스 세트로 구입한 것들을 모두 한장으로 쳤을 때의 이야기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그것은 ‘제법이군’ 정도겠지만 일반인에게는 상상이 안 가는 수준이다. 전승민씨는 대학 때는 과후배들과 영화동호회를 운영했고, 단편영화 스탭으로 참여하기도 했지만, 시네마테크 문화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거기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영화를 제대로 모른다는 듯한, 왠지 모를 우월감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지난 2001년 퇴직금 중간 정산을 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로 AV 시스템을 소박하게 장만했다. 그렇게 눈뜨게 된 DVD의 세계. 예술영화전용관에서 개최하는 영화제들을 쫓아다니지 않는다고, 영화책에서만 접했던 고전들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 고전들을 친절한 설명(서플과 코멘터리)과 함께 집에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었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그는 현재 mydvdlist의 고전영화 동호회에서 활동 중이다)의 추천으로 타이틀을 구입한 뒤, 영화가 좋으면 금방이라도 그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다른 수집광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주변의 ‘펌프질’(바람잡이)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에이리언> 박스 세트가 대표적인 케이스. 그러나 <버스터 키튼 박스 세트>처럼 출발은 펌프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만족한 경우도 허다하기에, 원인을 따지는 건 이젠 거의 무의미하다. 어느 순간 구입속도가 감상속도를 앞질렀기에,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타이틀 중 못 본 것도 태반이다. 직장인인 그에게 언제든 마음이 내킬 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DVD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그도 한때는 영화와 관련한 직업을 가지려 했다. 그러나 “패기만으로 덤비기에는 당시 뛰어난 분들이 너무 많았다. 미련없이 좋은 관객으로 남겠다는 결심을 했다”. DVD를 모으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가 극장가는 빈도는 줄지 않았다. 최신작의 경우, 어쨌든 극장에서 영화를 본 뒤에 괜찮은 것들을 구입한다. 이 밖에 한주 만에 내려버릴 것 같은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고, 부산, 전주, 부천영화제를 찾아다니는 것은 ‘좋은 관객’이 되기 위한 노력들이다. HD급 DVD가 나온다 해도 현재 가지고 있는 타이틀을 모두 새로운 매체로 바꿀 것 같지는 않다는 전승민씨. 그는 모든 영화를 최고의 화질과 음질로 감상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AV광이 아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사랑해왔던 영화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매체로서 DVD를 사랑하고 있었다. 베스트10 (순위없음) <셜록 주니어>/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를 능가하는 ‘영화에 대한 영화’는 없다(‘The Art of Buster Keaton’ 11 디스크 박스 세트 중에 담겨 있으며, 해외에서 무사히 배송받고 제일 뿌듯했던 타이틀 중 하나). <동경 이야기>/ 평범한 일상에서 이끌어내는 비범한 진실(오즈의 전작이 출시된 일본판은 일본어 자막밖에 없어 미국판을 구입. 미국판에는 오즈에 관한 다큐멘터리 2편, 음성해설 등이 서플로 제공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스튜디오의 장르영화가 다다를 수 있는 경지.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총잡이는 비로소 하나의 인간으로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다(일반판과 2 디스크 스페셜 에디션 두 종류가 있고, 후자에는 리처드 시켈의 음성해설과 10주년 기념 다큐를 포함한 풍부한 서플이 담겨 있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장르영화가 어떻게 역사를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존 포드 서부극의 정점(시간의 흐름을 감안하면 양호한 화질이나 서플은 예고편 빼고 전무하다. 영화의 무게에 비교해 너무 가볍게 출시된 경우가 아닐까). <사랑은 비를 타고>/ 다시 재현할 수 없을 것 같은 할리우드 뮤지컬영화의 최고봉. 102분간 펼쳐지는 흥겨움의 롤러코스터(2 디스크 스페셜 에디션으로 아서 프리드와 그의 뮤지컬영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풍부한 서플이 담겨 있다). <아메리카의 밤>/ 영화와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트뤼포의 찬가(캐서린 비셋과 내털리 베이의 인터뷰를 비롯한 서플이 담겨 있다). <미스틱 리버>/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깊어지고 신랄해지는 이스트우드의 시선(미국 워너 출시예정, 현재 이 시점에 제일 기다리고 있는 타이틀로 미국에선 이스트우드의 서늘한 음악을 담고 있는 O.S.T 포함 3 디스크로 출시예정이나 국내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지 미지수). <로제타>/ 안타까움과 절망 끝에 간절히 희망을 원하게 만드는 진실한 감정의 영화(영국 Artificial Eye 출시, 감독의 전작인 <약속>이 별도의 디스크에 수록되어 있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고독과 의사소통에 관한 섬세(그래서 결국 깨져 버리고 마는)하고 미묘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 창의적인 속편(프랑스 TF1 출시, 감독 인터뷰, 삭제장면 등의 서플이 깔끔한 디지팩에 담겨 있는 프랑스판이 국내판보다 여러모로 낫다).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디즈니와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실제 배우들과 만화 캐릭터들의 유쾌한 한바탕 소동(미국 브에나비스타 출시, 국내에선 일반판으로 출시되었으나 월등히 나아진 품질의 본편과 저메키스의 음성해설을 비롯한 많은 서플, 로저 래빗과 제시카의 사인을 비롯한 멋진 패키지로 구성되어 2003년 재출시된 미국판이 추천할 만하다).

사이코드라마 속의 페미니즘, <인 더 컷>

여성주의적 ‘컷’들의 오디세이 <인 더 컷> 슬라보예 지젝의 책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는 히치콕의 영화 <나는 비밀을 안다>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이 눈길을 끈다. 아들이 납치된 뒤, 도리스 데이가 부르는 <케세라 세라>를 지젝은 아들이라는 주체를 어머니라는 사물과 연결시키는, 어머니라는 초자아가 아들을 사로잡는 근친상간적 탯줄과 같은 연계라고 해석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커서, 리셉션 룸의 사람들은 그러한 외설적 과시에 당황하고 노래 내용처럼 ‘무엇이든 원하는 것이 돼라’는 어머니의 악의적 무관심이 바로 초자아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지젝은 재미있게도, 어머니의 목소리에 의해 지배되는 아들, 케세라 세라에 대한 대답이 히치콕의 다음 영화 <싸이코>에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아들은 어머니와의 탯줄적 연계를 끊지 못하고 성적인 욕망을 느낄 때마다 여자를 살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리스 데이가 불렀던 저 상냥한 노래, <케세라 세라>가 어머니와 아들이 아닌 피해자인 딸과 어머니 사이에서 불릴 때 그것은 무엇을 담지하는가? 불길한 자장가처럼, 낡은 계단의 통로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 때 들리는 삐걱임처럼 영화 <인 더 컷>의 케세라 세라는 주인공 프래니의 무의식을 파고들며, 영화의 처음과 시작을 장식한다. 무엇이든 되고 싶은 대로 돼라. 그것은 차라리 초자아의 방임적인 악의라기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유혹하는 세이렌의 노래 같은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사라지고 어머니의 목소리만 남은, 케세라 케사라는 <인 더 컷>의 벌린 상처 속에 똬리를 틀며 메아리친다. 그것은 내가 그러했듯 너도 그러하라고 권유하는 목소리, 온통 존재론적인 합일을 이루고 싶은 이드의 미로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그래서 <나는 비밀을 안다>의 아들은 천장과 통하는 다락방에 유배되어 있지만, <인 더 컷>의 딸들은 깊숙한 지하의 미로에서 마침내 자신의 욕망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섬뜩한 ‘거세’ 이미지들의 콜라주 도심의 낙서가 커다란 문신처럼 보이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정원에서 프래니의 여동생 폴린은 흩날리는 꽃송이의 세례를 받는다. 프래니의 현재몽인 이 꿈속의 꽃송이는 너무나 강렬해서, 심지어 프래니가 꿈에서 깬 뒤에도 그 촉감을 느낄 정도이다. 다시 잠든 프래니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처음 만나 구혼을 했다는 낭만적인 동화의 한 토막 속으로 연이어 빠져든다. 이윽고 프래니의 현재몽 속의 꽃송이는 다시 과거몽 속에서는 흩날리는 눈송이로 연결되어진다. 그 눈을 맞이하며 프래니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신들의 연애를 축복 속에 시작한다. 아마 그 눈송이는 장차 프래니가 등대에서 살인범을 만나 기괴한 구혼을 받는 동안, 흩뿌리는 빗방울과 연관되어질 것이다. <인 더 컷>은 이런 식이다. 연상은 끊임없이 현실에서 미끄러지며 이완되고, 꽃-눈-비라는 흩날리는 사물들은 프래니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칵테일해낸다.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했지만, 제인 캠피온 역시 2000년대 현재를 살아가는 독신 여성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무의식의 흐름을 뉴욕 지하철 통로에서, 후미진 뒷골목의 바에서 문득문득 잡아내는 것이다. 그것은 탄생과 환희의 기쁨이자 새색시 같은 행복의 길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섬뜩한 거세의 공포를 장식하는 불길한 징조이기도 하다. 여성의 절단된 사지보다도 더 무서운, 이 정의내릴 수 없고 종잡을 수 없는 이미지들의 콜라주가 <인 더 컷>의 공포의 실체이다. 행복했던 스케이트장에서의 구혼, 프래니의 아버지는 알고보니 시시때때로 여자들을 버리는 무책임한 바람둥이였고, 이 상처로 프래니의 어머니는 죽어버리고 만다. 푸른 수염의 회유와 가면은 여전히 프래니 안에서 살아 숨쉬고, 그녀 역시 어머니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인가? <인 더 컷>은 그러한 면에서 피로 갈겨쓴 지워지지 않는 심리적 외상이자 여성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거세의 이미지에 관한 영화이다. 그것은 그 자체의 물리적 모양새로 컷, 꽃들의 언어와 침묵하는 사물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여성의 성기 그 자체이며,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물리적으로 <인 더 컷>. 그야말로 영화의 한컷한컷 속에 마음의 지형도를 담아두는 제인 캠피온이 시도하는 일종의 ‘컷들의 오디세이’이기도 하다. 일종의 불가능한 질환:어머니-되기 <인 더 컷>의 멕 라이언은 속어를 말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브로콜리가 음모 혹은 마리화나의 의미라면서, 속어는 성적이면서 폭력적인 데가 있다고 말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멕 라이언이 ‘말하는 여자’라는 설정은 그녀가 아버지의 법을 체화하는 주체 혹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으로 한다면 남근을 가진 어머니 즉 ‘코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동시에 <인 더 컷>의 언어는 차이가 아닌 차별로서, 그 속에 숨겨진 권력의지를 함께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프래니 앞에서 형사들은 여성을 병아리(chicks)로 동성애자를 몽둥이(fagot) 같은 속어로 지칭한다. 그들은 여성성을 비하하고 단어에서조차 그 어감을 거세시킴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리하여 9·11 테러 이후 폐허의 음산함과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뉴욕의 공기 아래에서 프래니의 ‘어머니-되기’란 욕망은 일종의 불가능한 질환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막상 도둑 고양이에게는 우유를 주지만, 신생아를 안고 층계 계단을 올라오는 가족에게는 눈길 한번 줄 수가 없다. 그녀는 모성에 관한 한 일종의 억압과 심한 왜곡을 경험하지만 스스로 그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많은 평자들이 <인 더 컷>을 여성의 욕망과 처벌로써의 죽음이라는 고전적인 할리우드영화들, 즉 <클루트>부터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와 같은 영화와 연관시키지만, <인 더 컷>의 프래니에게 있는 욕망은 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어머니의 육체성과 어머니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희구한다. 모성과의 합일에 대한 욕구는 그녀에게 끊임없는 결핍감을 제공하고, 의사 지망생이자 스토커인 조니가 자신의 애완견을 돌봐달라고 요청했을 때, 드디어 어머니-되기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 프래니는 매몰찬 거절로 그녀의 불안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그녀의 무의식에서 나온 또 다른 분신 같은 폴린, 프래니가 이복동생이자 친구라고 부르는 폴린은 그녀의 욕망을 알아차린 듯 유모차와 조그만 아이가 달린 팔찌를 선물하며 그녀를 달랜다(그러나 프래니는 유모차는커녕 늘 떠날 사람처럼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닐 뿐이다). 프래니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온통 붉은색 꽃으로 치장한 속에 ‘엄마’라고 써 있는 거대한 하트 모양의 화환과 부딪힌다. 그녀는 아이를 꿈꾸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말 그대로 현실을 침범하는 욕망과 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어미니와의 합일과 그 이탈이라는 과제 사이에서, 기호계와 상징계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널을 뛴다. 이것이야말로 제인 캠피온식의 모성의 시학이 아니던가? ‘구혼’의 반여성주의를 컷하다 그러나 <인 더 컷>은 <아리조나 유괴사건> 같은 코언 영화가 아니라 <피아노>의 제인 캠피온의 영화인 것이다. 캠피온 영화에서 여성들은 욕망을 하는 순간 위험에 빠져든다. 그들은 흔히 미친년으로, 괴상한 여자로 오해받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침묵했었다. 게다가 잘못된 남자를 선택한 상흔은 두고두고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멍들게 만든다. 그것은 가부장제하의 폭압성이 여성의 육체에 각인되는 의식, 일종의 캠피온식의 낭만적 사랑의 판타지를 깨부수는 고발의 순간이기도 하다. 결국 <피아노>의 아다는 손가락을 잃었고, <여인의 초상>의 이자벨은 차거운 겨울날 빈 껍데기 같은 집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결단을 내려야 한다. 당연히 <인 더 컷>에서 프래니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는 폴린은 욕망하는 여자의 법칙에 맞게, 사지절단당한 채 피범벅이 되어 바닥을 나뒹군다. 이렇듯 <인 더 컷>은 제인 캠피온의 어떤 영화보다도 가장 적극적인 방식으로 ‘구혼’이라는 제도 속에 깃든 허위성, 그 반여성주의적 태도를 날이 선 방식으로 갈라내버린다. 만난 지 30분 만에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렸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동화는 어머니의 다리를 아버지의 스케이트날이 싹둑 잘라내는 저 극단의 이미지로 완벽한 음화로 뒤바뀐다(캠피온은 종종 불길한 여성의 앞날을 흑백영화 같은 판타지 장면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여인의 초상> 때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낭만화되는 성적 실천이 바로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의 핵심임을,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가부장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구성되었다는 페미니스트 캐서린 매퀴논의 구호과 동일한 이미지로서의 주장이기도 하다. 잔혹한 유머의 힘을 빌은 전복 유부남 의사를 짝사랑한 폴린은 소망한다. ‘나도 한번 결혼해봤으면.’ 그녀의 소망은 가장 사디스틱한 방식의 구혼으로, 사지를 절단당하는 즉석 결혼의 형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의 흐름은 양심의 흐름과는 다른 것이야.’ 프래니가 이렇게 이야기하며 아이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에서>를 가지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자,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거기선 늙은 여자가 죽어요.’ ‘그럼 얼마나 많은 여자가 죽어야 멋있게 보이지?’ 그러자 아이들은 다시 대답한다. ‘적어도 셋이요.’ 이 계산법에 의하면 물론 네 번째 희생자인 프래니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셈이다. <인 더 컷>은 복선과 암시가 난마처럼 뒤얽혀서 때론 예언처럼 주인공들의 운명을 희롱한다. 그것은 일종의 논리적 에러인 동시에 제인 캠피온의 모호함이 주는 음습한 내음이 함께 풍기는 잔혹한 유머의 장치이기도 하다. 제자인 코넬리우스 웹의 이름을 거명하며, webb이란 이름이 두개의 b요 아니요?, 즉 to be or not to be냐고 물어보는 형사 말로이의 질문은 그대로 프래니의 앞날이 ‘삶이냐 죽음이냐’를 암시하는 운명의 노크소리가 된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은 <피아노>의 정색한 표정보다는 <홀리 스모크> 이후 성차 뒤바꾸기(gender switch) 같은 장난스러운 장치를 통해 잔혹한 유머의 힘을 어떤 여유로 뒤바꾸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홀리 스모크>에서 인도의 정신철학을 굳게 믿게 된 루스(케이트 윈슬럿)는 그녀를 교화하러 온 PJ 에게 하이힐을 신기고 여장과 화장을 모두 한 뒤, 그 앞에서 오줌을 줄줄 쌌었다. 비슷한 처지는 <인 더 컷>에서도 반복된다. 프래니와 사랑을 나눈 형사 말로이는 결국 수갑을 찬 채 애완 동물처럼 침대 기둥에 묶여 있다. 그는 묶여 있으니 자신이 정말 계집애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정작 살인범을 향해 총을 쏘아댄 프래니는 흠뻑 피의 세례를 받고 그의 곁에 눕는데도 말이다. 폴린이 죽은 뒤 프래니는 한번도 입지 않았던 진홍의 옷을 입고, 마침내 욕망의 해방구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그런 프래니를 말로이는 “너무나 아름다워, 널 쳐다보면 더이상 형사 노릇을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한다. 그러한 점에서 <인 더 컷>은 심지어 <양들의 침묵>의 페미니스트 버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들은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프래니에게는 한니발 박사도 필요없다. 영화의 마지막, 구원자/피해자의 등식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은 저 이상한 아말감 상태의 프래니를 보라. 그녀는 스릴러 장르의 교란자이며, 동시에 자기 확정적인 여성으로 변모한다. 그녀가 바로 이웃집 소녀 같은 매력과 로맨틱코미디의 여왕이었던 멕 라이언이다. 그녀의 스타 아이콘은 <인 더 컷>에서 오히려 전복적인 이미지로 무기처럼 관객에게 겨누어진다. 네티즌들은 ‘멕이 왜’라며 통탄해하지만, 누군가는 웃을 수밖에 없는 장난스러운 전복 말이다. 심리적 표준 거리의 위반 이제 <인 더 컷>의 컷은 마지막 한개의 수수께끼만을 남겨둔다. 대체 서두에서 말한 제인 캠피온식의 ‘컷들의 오디세이’는 무엇이냐 하는 것. <인 더 컷>의 컷 속의 주인공들이 클로즈업으로 잡힐 때 대개 그들의 머리는 프레임 밖으로 일부 잘려져나간 상태이다. 항상 스크린 안으로 주인공들의 머리가 들어오는 표준적인 장면을 보는 관객에게, 이러한 화면짜기는 매우 당혹스러운 느낌을 줄 게 뻔하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의 선, 표준 선의 위반인 것이다. 캠피온의 카메라는 보통 감독들이 정해놓은 암묵적으로 합의된 심리적 거리보다 조금 가까이서 주인공들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좁혀놓는다. 그것은 무의식의 의식 세계에 대한 침범이라는 캠피온의 주제가 형식에 가장 잘 녹아들어가는 일종의 모험적 시도이기도 하다. 디온 비비의 카메라가 인물을 롱숏이나 풀숏으로 잡을 때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배경이 인물을 감쌀 때, 뉴욕의 문화지정학적 위치를 드러낼 때뿐이다. 그곳에서 뉴욕은 팔뚝에 거대한 문신을 새긴 도시처럼 기괴한 낙서투성이의 전위적인 장소가 된다. 아울러 캠피온은 흔들리는 핸드헬드와 얕은 심도 구성으로 종종 주변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며 프래니의 주변의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점을 절묘하게 집어내 보인다. 그것은 모호한 캐릭터와 모호한 결론에 걸맞은 모호함을 인물 주변에 흩어놓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 더 컷>은 사람들이 의식적인 생활에서 영위하는 짧은 지각의 순간을 순간순간의 초점 이동으로 함께 따라붙는다. 인간의 의식의 흐름은 결코 딥포커스처럼 모든 것이 한번에 꿰뚫어 지각되어질 수 있는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요, 이러한 면에서 캠피온의 영화 실험은 ‘컷 안에서’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준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스릴러가 아닌 사이코드라마 <인 더 컷>은 개봉 당시 미국 평단의 많은 비평과 원성을 샀었다(<인 더 컷>의 IMDB 평점은 5.0에 불과하다). 제인 캠피온의 영화로서는 예외적으로 <인 더 컷>은 별다른 수상이나 영화제 초청을 받지 못했다. 짐 호버먼은 예의 뚱한 표정으로 <인 더 컷>에 대해 “살인마를 복원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복원하려는 제인 캠피온의 시도보다 더 웃긴 것이 어디 있겠느냐?”며 호통을 친다. 그는 <인 더 컷>이 ‘아트 하우스 스릴러’로서 지나치게 잔혹하고 피투성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말대로 <인 더 컷>은 어쩌면 실패한 스릴러인지도 모르겠다. 멕 라이언 대신 샤론 스톤이 다리를 꼬고 한 무더기의 음모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해야 마땅한. 그러나 <필름 코멘트>의 에미 토빈의 말대로 <인 더 컷>은 스릴러영화라기보다는 일종의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운 영화이다. 비록 살인마를 복원함으로써 페미니즘을 복원하려는 제인 캠피온의 시도가 매우 웃길지라도, 여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게 가끔 공포영화를 방불케 하는 허위 진술과 괴물들 사이의 줄다리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인 더 컷>의 공포가 그저 한 바가지의 피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인 더 컷>이 더 나아가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다음번 제인 캠피온 영화에서 멋진 라틴어풍의 이름 코넬리우스라는 제왕적 이름을 가진 흑인 제자와 한바탕 질펀한 섹스를 하는 멕 라이언을 볼지도 모를 일이다. 늘 호주, 인도, 뉴욕 등에서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하는 그녀가 이번엔 또 어떤 장소에서 여성의 욕망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지. 이왕 잘못된 남자를 골라 컷당할 운명에 처할 바에야 아주 다른 무지하게 다른 타자를 껴안는 우리 시대의 코라를 영접하기를. 뚱뚱한 여자, 문신한 남자, 고집스런 여자, 여장한 남자, 흑인, 백인이 뒤섞인 제인 캠피온식 아말감이야말로 허접스런 지구 위의 경계를 허무는 내 책상 위의 천사들이다.

홍상수도 나쁜 남자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페미니즘의 비평적 딜레마를 응시하기 “글로리아.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오늘 젊은 여성들에게 무슨 말을 남기고 싶어?” “네 자신을 믿어라!”(Trust yourself!) “겨우 그 한마디?” “응, 그 안에 모든 비밀이 들어 있지.” 진부한 질문 한마디. ‘왜 당신이 하면 로맨스이고 내가 하면 불륜이야?’ 김기덕은 똑같은 말을 농담으로 되풀이했다. “이창동이 만들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고 내가 만들면 다 ‘지가 하고 다니는 짓’인가.”(<씨네21> 441호) ‘페미니즘 비평 방법론을 쇄신하라’(<씨네21> 443호)는 글에서 강성률은 김기덕의 의문을 반복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다른 감독의 영화는 김기덕처럼 혹독하게 비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리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은 어떠했는가? 만약 필자가 페미니즘 평론가라면 임권택의 <취화선>을 혹평했을 것이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도 혹평했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에 대한 반론 ‘페미니즘 비평이 몸부림칠 때’(<씨네21> 445호)에서, 심영섭은 강성률의 지적을 인용해가며 조목조목 반박을 하고 있는데, 홍상수라는 이름은 이상하게 인용에서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강성률이 지적한 부분을 전부 나열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다른 부분에 대한 반박을 통해 홍상수의 대목까지 충분히 설명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씨네21>에 실린 심영섭의 20자평과 별점을 참고해보자. <나쁜 남자> “김기덕 감독, 자궁에서 도 닦는 버릇은 여전하구려” ★☆, <생활의 발견> “춘천 찍고, 경주 찍고, 허허실실 윤리학으로 턴턴” ★★★★). 나는 여기서 사라진 홍상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심영섭의 반론에 언급되지 않은 홍상수 영화에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페미니즘 비평에서 사라진 홍상수 김기덕의 영화를 둘러싸고 회자되는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은 “김기덕 영화를 남자평론가는 지지하고, 여자평론가는 싫어한다”라는 단언이다. 심지어 김기덕 감독조차 “여자평론가들은 내 영화를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여자평론가는 여자가 아니거나 평론가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 이 단언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싫어하는 사람은 대한민국을 싫어하는 사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단순 무식하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분법적 환원이며, 총체적 모순을 전체적 대립으로 후퇴해서 단순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유치하다고 해도 하나의 단언으로 나타날 때 그 뒤에는 어떤 법의 명령이 도사리게 된다. 따라서 김기덕 영화에 대한 단언은 은연중에 ‘김기덕을 지지하는 남자평론가는 마초이고, 김기덕을 좋아하는 여자평론가는 문제가 있거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기의를 내포하게 된다. 또는 여자평론가가 남자평론가를 침묵시키고 싶을 때, 남자평론가가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다”며 예외적 자기규정을 내세울 때, 편리한 방편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이 싸워야 하는 것은 이런 방식의 환원이며 단순화가 아닐까? 아무튼 여자평론가인 내게는 싫거나 좋지 않거나 좋아하는 김기덕 영화들이 있을 뿐이다. 이건 홍상수 영화에도 마찬가지이다. 홍상수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당시 한국영화 상황에서는 경이로웠고, 그뒤의 영화들은 매번 재미있게 즐기는 편이지만 ‘열혈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한마디로 여성에 대해 어떤 성찰도 없는, 한 남성의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이런 영화가 존재하고 소통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에 대한 위협이고 어떤 이유에서건 이 영화를 지지하는 행위는 여성들에 대한 모욕일 뿐”(강성률의 글에서 재인용)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던 김기덕의 <나쁜 남자>만큼 마음을 흔들었던 홍상수의 영화는 아직 없다. 그래서 기회가 닿았을 때 나는 그 영화에 대해 장문의 글을 쓰기도 했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이젠 그만 제자리로 보내주세요, 혹은 육신과 영혼의 도착증”). 정과리의 지적처럼 비록 신파조가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망가진 삶의 밑바닥을 고통스럽게 드러내는 그 처연하고 막막한 느낌은 매우 기괴한 방식으로 보는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반면 홍상수 영화는 낯뜨거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생활을 발견하게 만드는 순간은 있어도 그런 감정의 동요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김기덕의 영화는 그렇게 싫고 미운데 홍상수 영화는 별다른 문제없이 참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여기서 덧붙이자면, 나는 <오아시스>에서 홍종두가 한공주를 강간하려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공주가 종두에게 전화를 거는 대목에서 결정적으로 그 영화가 매우 불편해졌다. 또한 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는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그들 다수가 극찬하고 감동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김기덕의 영화보다 훨씬 위험한 영화로 보인다). 이제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 기대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통해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홍상수 영화에 문제를 제기해보려고 한다. 김기덕의 선화 vs 홍상수의 선화 자, 여기 두명의 선화가 있다. 하나는 <나쁜 남자>의 선화이고, 또 하나는 홍상수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이다. 흥미롭게도 두 여자 사이에는 이름말고도 공통점이 더 있는데, 미술에 관심이 있거나 미대를 다니다가 남자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채 신세를 망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쁜 남자>의 선화(두 여자의 구분이 필요한 경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는 박선화로 쓰기로 한다)는 애인의 손에 이끌려 모텔 앞까지 갔다가 완강하게 거절하며 도망치는 여자다. <오! 수정>의 수정처럼, 결혼이라는 계약행위에서 더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려고 처녀성을 놓고 게임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화는 자신의 의사를 능동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낸다. 사창가 깡패 한기의 덫에 걸려 강제적으로 창녀가 되는 과정에서도 선화는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완강하게 저항한다. 반면, 박선화는 고등학교 선배의 뻔한 거짓말에 넘어가 강간을 당한다. 그녀는 애인 헌준에게 ‘아는 선배와 같이 밥을 먹었는데 좀 맛이 없었다’는 말을 할 때처럼 태연한 어투로 그 사실을 알려준다. 헌준은 선화를 여관으로 데려가 ‘강간당한 그곳’을 자신의 손으로 세심하게 씻어낸다. 그리고 나서 섹스를 한다. “내가 섹스해서 깨끗하게 되는 거야… 그럼 깨끗하게 되는 거지”라는 남자의 말에 “나 깨끗하고 싶어, 깨끗하게 해줘”라고 여자는 화답한다(섹스로 인해 더렵혀진 몸을 섹스로 깨끗하게 하려는 선화의 행위는 마약복용 혐의로 땅에 떨어진 이미지를 누드영상집으로 만회하려 했던 배우 성현아의 현실 속 모습과 기이한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이 홍상수의 전략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깨끗하고 싶다’는 대사에는 이중의 울림이 있다). 바로 그 다음 장면에서 헌준은 선화를 버리고 유학을 떠난다. 선화가 ‘더렵혀진 여자’라는 사실을 지워버릴 수 없었거나, 사실은 강간이 아니라 화간을 한 ‘헤픈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였을 것이다. 선화를 회상하는 두 번째 남자 문호 역시 섹스하고 나서 그녀를 떠나간다. 지저분한 여관방에 앉기조차 꺼려하므로 결벽증이 의심되는 그는 털이 많은 선화의 다리를 본 다음부터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애인은 겉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위가 더러워서, 감추어진 애인은 겉으로 보이는 부위가 더러워서 각각 떠나간다. 반면에 한기는 선화와 함께 있고 싶어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까지 저지르면서 자신의 공간으로 데려온다. 그는 결코 선화를 떠나거나 버리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선화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강제적으로 창녀가 된 선화와 자발적으로 술집 여자가 된 선화에게는 두 가지 종류 혹은 세명의 ‘나쁜 남자들’이 있는 것이다. 박선화를 버렸던 헌준과 문호는 그로부터 7년 뒤, 선화를 찾아온다. 술집을 한다고 무조건 인생이 망가졌다고 하는 것은 편견이지만, (홍상수와) 헌준은 그렇게 생각한다. 문호가 선화에 대한 소식을 전했을 때, 헌준이 놀라면서 다소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천에서 옷가게 주인이 되었다고 했으면 그렇게 당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선화가 술집이 아니라 옷가게를 하고 있었다면, 두 남자가 눈오는 날 낮술을 마신 상태에서 ‘간다’, ‘못 간다’ 승강이를 하며 찾아갔을까? 아니면 술집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기대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들이 선화와 다시 시작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원망도 없이 선화는 다시 두 남자를 차례로 받아들이고, 홍상수의 영화가 흔히 그렇듯이 과거는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기이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비록 헌준이 선화 앞에 무릎을 꿇고 담뱃불로 자해를 시도하며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해도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선화를 비난하며 가차없이 떠나가는 것이다. 문호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선화는 더러운 여자이자 헤픈 여자라는 확증을 잡았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일말의 죄책감까지 말끔히 털어내면서 길바닥에 여자를 두고 가버린다. “너무 쉬운 거 아냐”라고 소리치는 선화의 대사처럼, 버리는 그의 행위는 역겨울 정도로 너무 쉽다. 멋진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문호 또한 선화와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비싼 집을 과시하고,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학교에서 강의한다고 자랑하고, 다시는 자기 아내와 포옹하지 말라고 느닷없이 소리지르는 문호를 보면, 헌준에 대한 어떤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헌준의 애인 선화를 차지함으로써, 자신도 그만큼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한다. “선화씨, 사실 오늘 헌준이 형보다 내가 더 오고 싶었어요”라고 하면서도, 선화의 소식을 알고 있었던 그는 혼자서는 결코 선화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 헌준이 선화를 만나겠다고 하자 자신이 헌준 이상의 남자로 남아 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려는 강박증에 막연한 기대가 더해져서 따라나서게 된 것뿐이다. 따라서 헌준이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 선화와 문호가 남는 것이 아니라, 선화를 이미 기억하지 않는 문호만 남게 된다. 결국 두 남자는 선화에 대한 죄책감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 또는 다시 시작해보려는 희망에서가 아니라 같은 여자를 두번 버리려고 찾아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자기의 공간으로 데려와서 섹스하지도 못한 채 바라보기만 하는 남자와 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버린 다음 7년 만에 찾아와 섹스하고 다시 버리는 남자, 어느 쪽이 더 잔인한 것일까? 여성에 대한 ‘생략’을 반복하는 홍상수 하지만 반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비슷한 형태로 변주된다. “남자는 다 똑같애. 다 개새끼들이야. 당신도, 그 사람도…”라고 말하는 선화의 대사처럼, 중국집 여종업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수작을 거는 걸 보면 헌준이나 문호나 그놈이 그놈이지만, 문호는 어쩌면 헌준보다 좀더 비열한 인간인 것 같다. 문호는 우연히 제자들을 만나고 술자리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하다가 한 학생으로부터 무례하게도 “당신, 저질 아냐”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헌준에 대한 열등감을 선화와의 섹스로 만회했듯이, 이번에는 제자가 안겨준 마음의 상처를 제자 경희와의 섹스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선화와의 관계는 은밀하게 즐길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만 문제의 학생에게 들키고 만다. 문호는 선화에게 그랬듯이 어린 제자의 앞날을 염려하기는커녕 자기 걱정만 한다. 선화와 똑같이 오럴을 해주었던(그래서 선화처럼 살게 될 수도 있는) 경희는 선화처럼 버려지고, 문호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이런 반복은 위험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홍상수의 반복이 갖는 잔인함이 있다. 반복의 긍정적 가능성은 성공적인 재현을 통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해보려는 시도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반복은 거기에 반성적 성찰이라는 매개를 괄호쳐 넣음으로써 차이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복할 때, 거기에 수많은 작은 차이들이 개입해서 결국은 동일하거나 더 나쁜 반복으로 이끌고 그 반복의 시도는 결국 허무한 몸짓으로 끝나고 만다. 이것은 지옥의 영겁회귀에 다름 아니다. 김기덕은 주로 남자의 악행에 의해 처참하게 망가져가는 여자,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자를 보여주면서, (여자) 관객의 분노를 자아낸다. 홍상수 영화의 경우, 여자들은 매번 남자들의 성적 욕망과 이기심의 대상으로 축소되고 소비된다. 여자가 완강하게 거절할 때 폭력을 동원하면서까지 섹스를 강요하지는 않지만, 대신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는 법이 없으며 오히려 언제나 하고 싶어하거나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임신이 의심되어 섹스하기 어려울 때(<강원도의 힘>), 오빠가 해달라고 요구할 때(<오! 수정>), 여관방이 지저분해서 누울 엄두가 안 날 때(<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그럴 때 여자들은 손이나 입으로 해준다. 그들은 남자주인공과의 섹스에 만족해하고, ‘너무 좋다’거나 ‘잘한다’고 하면서, 남자들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켜준다(김기덕의 남자들이 자기혐오에 시달린다면, 홍상수의 남자들은 나르시시스트들이다). 홍상수의 여자들이 더욱 이상한 점은, 남자들은 비록 속물적인 욕심이라고 해도 무엇이 되려고 동분서주하는 데 비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주인공 남자가 원하는 그 자리에 도착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스크린에서 그들의 고통이 생략되었기 때문에, (여자) 관객의 분노가 끼어들 틈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홍상수 영화의 여자들의 응답에 조건이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여자는 항상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남자, 조건이 더 좋은 남자쪽을 선택한다. 그렇지 못한 남자는 무시당하거나 버림받는다. 선영은 남편의 앞날이 창창하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자마자 경수를 버리고(<생활의 발견>), 수정은 무능력한 PD에게 끌리면서도 부잣집 남자 재훈과 섹스한다(<오! 수정>). 그러므로 유부녀는 능력있는 남편에 힘입어 미혼녀보다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어 있고, 바람 피우는 남자에게 착한 아내와 아빠 말을 잘 듣는 자식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욕망에 대한, 김기덕과 홍상수의 오해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김기덕의 영화는 용서가 안 되는데, 홍상수의 영화는 도마 위에도 오르지 않는 것일까? 홍상수와 김기덕의 관심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그들은 섹스에 관심이 많거나, 섹스를 중심에 놓으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홍상수는 그 중심의 주변을 불투명한 그물망으로 만든다. 그것이 불투명한 까닭은 시간의 구조를 통해 앞문으로 나간 욕망이 뒷문으로 다시 들어오는 식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상을 밀어내도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고, 욕망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그러므로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김기덕은 주변을 중심으로 만들고, 투명하게 만들려고 동분서주한다. 투명성을 향한 김기덕의 노력은 자꾸만 장면에 모든 것을 펼쳐놓고 보여주려고 한다. 홍상수가 욕망의 질문에 대한 환상의 대답이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김기덕은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 페미니즘의 딜레마가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홍상수는 도덕적으로 자기를 방어하지만 윤리적 차원에서는 자아의 자포자기가 있다. 그러나 김기덕은 도덕적으로 자포자기하지만 윤리적 차원에서는 자아를 종교적인 속죄에 던져버린다. 그래서 전자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 속에 남자, 여자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제목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발견해내고, 후자는 ‘나쁘다’는 윤리적 판단이 들어 있는 제목 <나쁜 남자>를 생각해낸다. 결국 홍상수든 김기덕이든, 그들 영화 속의 남성인물들은 고통의 자리를 껴안거나 게임의 형식을 가져와서, 여자를 즐긴다. 그들 영화가 주는 지옥 같은 경험은 그 즐거운 향락에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그것이 향락이 아니라 여자라는 대상이 주는 욕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결국 여성은 일종의 ‘팜므파탈’이다. 한기로 하여금 선화를 사창가로 끌고 가는 죄악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도 선화의 (경멸을 빙자한) 유혹 때문이며, 헌준과 문호를 눈오는 날 부천까지 기어이 이끌어내는 것도 시간의 그물망을 빌린 박선화의 유혹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운명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팜므파탈에게 이끌린다. 그들은 스스로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만, 그 잘못의 원인은 대상으로서의 그 여자 선화(들)에게로 돌려진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선택에 대해 반성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욕망에 대한 오해는 결국 그들 자신의 함정에 빠져 향락이라는 자멸에 이를 거라는 것을. 그러므로 페미니즘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자멸하기 전에 김기덕이든 홍상수든(혹은 이창동이든)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의 휴머니즘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