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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를 압도하는 하류, <하류인생>의 조승우

“어허…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춘향뎐> 오디션을 보던 임권택 감독은 한 지원자의 원서를 보고 기가 딱 막혔다. 때깔 좋은 프로필사진 한장 정도는 첨부해 정성스럽게 응모해도 모자랄 판에 이 원서엔 ‘대충사이즈’의 흑백사진 한장이 참 볼품도 없이 달랑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진 속 아이의 모양새를 볼 것 같으면, 설상가상 점입가경이라. 까만 폴라 티셔츠에 아저씨 같은 기지바지를 입은 것까진 그렇다쳐도, 공사판에서 녹슨 쇠파이프를 들고 ‘나 사진찍기 겁나게 싫소’라는 말을 이마에 떡하니 써놓은, 세상만사 다 귀찮은 인상을 짓고 있었다. 사실 사건의 전모를 보자면 이렇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 소년에게는 변변한 독사진 하나 없었고, 배우는 해야겠고, 원서는 내야겠는데, 사진이 없으면 접수가 안 된다니 할 수 없이 고등학교 사진수업 시간에 친구들이 찍어준 사진을 붙여냈던 것이었다. 어쨌든 임권택 감독은 “어허, 이거 영화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이놈 완전 똥배짱이네…”라며 이 맹랑한 아이를 기억해두었고, “나중에 깡패로 만들면 괜찮을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날 이후 시작된 두 남자의 화학반응에 대한 것이다. 임권택이라는 용매(溶媒) 속으로 조승우라는 용질(溶質)이 어떻게 섞여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그리고 어떻게 <하류인생>이라는 용액(溶液)이 탄생되었는가 하는 케미스트리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이 고소하고 진한 때론 달콤하기까지한 독특한 ‘용질’에 대한 성분분석이기도 한, 그런 나름의 학구적인 잡담인 것이다. 이 도령이 배우 ‘조승우’가 되기까지 <클래식>을 끝낸 조승우는 치과교정을 하러가던 중에 우연히 태흥영화사 앞에 나와 있는 세 어른(이태원, 임권택, 정일성)을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려야지 하고 그들 앞으로 다가갔을 때, 임권택 감독은 대뜸 “승우야, 너 태권도 좀 배워야겠다. 골프도 쳐야겠고…”라는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도,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도 없었다. 무뚝뚝한 캐스팅 제안에 그 역시 “아니, 시나리오라도 주시든가…” 하는 군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예”라는 확답을 내놓고야 말았던 것이다. 궁금증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왜 조승우는 임권택 감독과 다시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까. <춘향뎐>은 이 배우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크게 데이면서 찍어내려간” 뼈아프고 살아픈 영화였다. 첫 영화에, 사극에,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카메라 앞에서 몸놀림은 자유롭지 못했고, 심심찮게 호통도 들었으며, “잔뜩 주눅이 든 상태”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임권택이라는 거장의 선택으로 데뷔했다는 것은 분명히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 도령이란 딱지는 꽤나 오랫동안 그의 꼬리뼈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춘향뎐>은 조승우에게 지울 수 없는 명징한 문신 같은 영화였다. 아무리 사랑했던 연인이라도 아픈 기억이 많으면 재회를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승우는 다시 “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왜? “예전부터 임 감독님이 50, 60년대 한 남자 이야기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다른 배우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영화 안에서 연령변화도 큰 역할이고, 액션도 많을 테고, 설마 날 찾을까, 전혀 상상도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에 휙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더라구요. ‘이제 그 옛날의 주눅든 승우가 아님을 보여드리고 싶다.’ 어쩌면 오기 같은 거였죠. 그건 ‘나 이만큼 컸어요’라는 건방진 자신감은 아니었구요. 이젠 예전처럼 답답하게 굴지는 않겠다는, 이제 좀더 적극적으로 그 배역에 달려들고, 욕심내서 도전하겠다는 그런 ‘예’였던 거죠. 사실 저에겐 도박일 수도 있는 영화였죠. 늘 그렇듯, 이미 나온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고, 30대 후반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건 무조건 해야 되는 거다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잠시, 이런 자신감의 성분들은 어떻게 조승우에게 스며들게 되었을까.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된 열여덟 신인배우의 발걸음은 처음만큼 가볍게 내디뎌지지는 않았다. <춘향뎐>을 끝내고 영화를 하자는 제의도 거의 안 들어왔을 뿐더러 그나마 출연을 약속한 뒤에도 감독과 제작자가 “어떻게 이 도령을 우리 영화에 쓰냐”며 싸우다 결국 캐스팅이 취소되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과연 계속 영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조승우는 섣불리 몸을 아무 곳에나 놀리거나, 자괴감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그런 식의 약골은 아니었다. 대신 늘 꿈꿔오던 뮤지컬 위로 날개를 펼쳤고, 대학로 무대에서 “거지에, 각설이에, 미친놈까지 상상도 못할 많은 역할들”을 맡아 데뷔작의 흔적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다. 두 번째 영화 <와니와 준하>에서도 그는 ‘준하’가 아니었다. 햇빛 쏟아지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던 소년, 순정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영민’은 극의 회상부분에서만 잠시 얼굴을 내미는 아련한 첫사랑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 짧은 등장은 조승우라는 배우의 정확한 색깔과 형태를 보여주진 않았지만 무거운 도포자락을 벗겨내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넌 누구니?”라고 묻는 영화 <후아유>를 통해 그는 적당히 현실적이고 능청스러운, 유들유들한 우리 시대 젊은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서서히 땅에 발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H>의 연쇄살인범은 언뜻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을 본뜬 듯한 역할이었다. 그러나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얌전한 걸음걸이, 정좌한 자세로 선문답을 던지는 이 살인자는 형사를 향해 뱀처럼 입맛을 다시는 ‘렉터 박사’가 아니었다. 비록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지만 공포감과 측은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 기묘한 캐릭터는 조승우의 연기의 스펙트럼을 한 단계 넓혀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를 ‘조승우’라는 이름 석자로 불리게 만든 영화는 <클래식>이었다. 소똥으로 얼굴을 더럽힌다 해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미소. 포크댄스를 추며 싱긋이 날려보내는 살가운 눈인사. 첫사랑의 신열에 들떠 공중을 향해 발을 굴리고, 비 오는 날 하루종일 그녀의 집 앞을 지키는 순정의 소년. 능글맞아서 사랑스럽고, 여려서 더욱 미더웠던 남자. <클래식>의 준하는 <소나기>의 소년 같은 순진무구함과 클래식 멜로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매력적인 남성성을 동시에 담아낸 캐릭터였다. 그리고 교실에서 시위현장으로, 베트남전에서 마침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유머러스하지만 비장한 흐름을 가진 이 러브스토리는 그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을 최고점으로 올려놓았다. 임권택 감독과의 새로운 재회 다시 돌아가자. 그러니까 <취화선>의 한풀이를 끝내고 <장군의 아들>의 땅으로 귀환한 임권택 감독이 <하류인생>의 길벗으로 조승우를 불러들였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조승우는 어느덧 적당한 날카로움과 알맞은 무게로 단련되어 있었고, 임권택은 여전히 연장을 멋지게 부릴 줄 아는 장인이었다. 그렇게 짧고 명쾌한 합의를 통해 촬영에 들어간 두 사람의 소통방식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물론 한신을 찍기에 앞서 임 감독은 모든 정황을 조승우에게 설명해준다. “승우야, 돈을 빌리러 갔어. 그런데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받았단 말야. 기분이 어떻겠니. 분에 받쳐 너의 가장 처절한 모습을 보여야겠지?….” 이것은 <춘향뎐>을 찍을 때 “니 앞에 예쁜 여자가 있어. 보듬고도 싶고 놀아도 보고 싶은데, 너는 양반이야. 적당히 바람기도 보이면서, 그렇다고 체통도 잃지 않는 그런 세심한 느낌을 살려야 해”라고 일일이 디렉션을 주던 것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감정선 안에서 의미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상관없다”며 많은 부분을 그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에는 과연 다 외울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의 긴 대사를 던져주었다. “승우야, 미안하다. 고약한 감독을 만나서 니가 고생이구나. 그런데 이 신은 감정이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신이거든. 다 외우면, 니가 준비가 됐다고 생각들면 올라와라,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감독님, 대사를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라고 용기있게 물어보았고 감독은 “네 느낌대로 해봐라, 니가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 그렇게 점점 걱정은 믿음으로 바뀌고, 두려움은 설렘으로 치환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땐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야기했고, 이해가 되면 재빨리 포기했다. “자신을 갈가리 찢어놓고 깨버리는 영화”였음이 분명했지만, 현장 역시 공포의 공간이 아니라 편안한 놀이터로 바뀌었다.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그 시대의 어색한 대화방식을 어느 순간 즐겼고, 자신의 연기를 보며 그 당시를 떠올리는 감독의 표정에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조승우는 ‘마이 컸다’. "제가 작아보이나요?" 사실 조승우는 작다. 눈도 작고, 키도 작고, 손도 작고, 발도 작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왜소한 체격을 가졌다. “뭐 요즘 여배우들이 워낙 크다보니 현장에서 ‘구두굽 잘라버린다’는 농담을 하기도 하죠. (웃음) 하지만 나는 내가 작다고 인식하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불만도 전혀 없구요. 내 키도 내 거고, 내 몸매도 내 거죠. 그런데 제가 작은가요?” 전혀 아니옵니다. 무릇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대로 남들이 보게 마련이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그가 등장하면 오히려 스크린이 작아 보인다. 그는 큰 사람처럼 연기하고, 큰 사람처럼 움직인다. <하류인생>에서 조승우는 눈빛이 아닌, 미소가 아닌, 그 큰 몸뚱이로 말을 건다. 점점 황폐해져가는 남자의 초상을 애절한 표정 대신 그 허한 뒷모습으로 보여준다. 조승우는 그렇게 크고 풍부한 물줄기다. 하류로 흐른다고 해도 선명한 수로자국을 남기며 가열차게 달려갈, 그리고 어느 날 상류까지 흘러들어 그 도도한 물살을 무섭게 덮쳐버리고 말.

여신의 아우라 지닌 광란의 암사자, <킬 빌2>의 우마 서먼 [1]

<킬 빌> 시리즈로 최고의 경지 이룩한 우마 서먼 “자, 스케줄대로 진행되고 있겠죠? 1월15일까지 당신이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말이죠….” 2001년 겨울, 우마 서먼은 이상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한테 자꾸 이런 식으로 부담주면, 약속을 깨버리는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빵을 굽는 게 아니에요. 아기를 가졌다구요.” <킬 빌>의 프로듀서 로렌스 벤더는 순간, 움찔했다. 우마 서먼이 <킬 빌>의 히로인일 뿐 아니라 아이의 출산을 앞둔 어머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우마 서먼은 하루의 오차도 없이 예정대로 둘째아이를 순산했다. 그리고 정확히 8주 뒤에 부기가 채 빠지지 않은 몸으로, 1년 남짓 자기만을 애타게 기다려온 타란티노와 원화평에게로 달려갔다. 우마 서먼에 의한, 우마 서먼을 위한 <킬 빌> 알려진 대로 <킬 빌>은 ‘우마 서먼의, 우마 서먼에 의한, 우마 서먼을 위한 영화’다. 10년 전, <펄프 픽션>의 촬영장에서 타란티노는 우마 서먼과 ‘여성복수극’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하다가 <킬 빌>의 캐릭터와 스토리 윤곽을 잡았지만, <재키 브라운>을 먼저 영화화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2000년 한 파티에서 재회한 우마 서먼에게 타란티노는 그녀의 서른 번째 생일에 <킬 빌>의 완고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나리오가 222쪽으로 불어나는 바람에 ‘생일선물’을 제때 전달하지 못했던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타란티노는 기다리다 지쳐 아기를 가져버린 우마 서먼의 출산과 산후 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에 클린트 이스트우드 아닌 다른 배우를 기용하고, 조셉 폰 스턴버그가 <모로코>에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아닌 다른 배우를 썼다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나. 나는 우마 서먼이 <킬 빌>에 나온다면 얼마나 근사할지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배우로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가 옳았다. <킬 빌>을 보면서, 다른 여배우들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근육질의 긴 팔다리를 힘차게 휘두르는 ‘여전사’ 우마 서먼의 액션은 상당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여자로서, 프로 킬러로서 브라이드의 복잡한 내면이 좀더 친절하게 설명되는 2부에 이르러서는 우마 서먼이라는 배우의 ‘깊이’에 새삼 경탄하게 된다. 브라이드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단순한 가학 본능이 아니라 ‘정의와 속죄’의 차원이었다는 사실을, 그 비장미와 결기를, 우마 서먼은 ‘냉정과 열정’을 오가며 능란하게 전달해낸다. “암사자는 새끼를 찾았고, 정글은 평화로워졌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아야 했는지 따위를 따져물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쯤되면, <킬 빌>의 촬영장에서 우마 서먼이 타란티노에게 자기고백처럼 던졌다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다른 영화를 찍을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왜 당신 영화에 나오면 내가 더 연기를 잘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마 서먼처럼 우리도, 그것이 알고 싶다. 타란티노-우마 서먼의 첫번째 조우 <펄프 픽션>열여섯에 데뷔한 우마 서먼의 커리어는 조울증 환자의 바이오 리듬처럼 등락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두번의 정점에는 어김없이 타란티노가 있었다. 본래 우마 서먼은 고독하고 신비로운 여왕 그레타 가르보와 잊을 수 없는 각선미의 여신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계보를 잇는 ‘여신과’의 배우였다. 스웨덴과 독일계 혈통으로서 모델로 활동했던 어머니,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티베트 불교에 귀의한 아버지, 인도 전설에 전해내려오는 빛과 아름다움의 여신과 같은 이름을 지닌 우마 서먼의 이미지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웠다. <바론의 대모험>이나 <위험한 관계> 등의 초기작에서 선보인 천상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감독들을 달뜨게 만들었고,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최종분석> <형사 매드독>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그녀의 성적 매력을 전시하려는 영화들에 불려다녔다. 테리 길리엄, 스티븐 프리어즈, 존 부어맨 등의 ‘한 예술’하는 영화에 연달아 출연하다보니, “지적인 남자들의 섹스 심벌”이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그러던 그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요부 캐릭터를 졸업하게 된 것은 타란티노와 <펄프 픽션>을 만나면서부터다. <펄프 픽션>에서 검은 생머리 가발(고다르 초기작의 안나 카리나처럼!)을 쓰고 나타난 우마 서먼의 비중은 크지 않았고, 여전히 섹스어필했지만, 분명히 전과 달랐다. 남편의 부재 중에 만난 남편의 부하(존 트래볼타)를 매혹하고 또 그에게 매혹당하지만, 트위스트 춤판과 약물 소동과 썰렁한 농담으로 그를 떠나보내던 그녀의 모습은 묘한 울림을 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생기있고 입체적인 캐릭터. 그리고 우마 서먼은 난생처음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도 하는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 할리우드 여전사의 계보 시고니 위버에서 안젤리나 졸리까지 <글로리아>의 지나 롤랜드로 시작된 할리우드 여전사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초기의 여전사들이 총을 들거나 주먹을 휘두른 이유는 대개 ‘모성’ 때문이었다. <글로리아>의 글로리아는 친구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옛 연인인 마피아 보스에 도전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자기 방어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터미네이터>의 린다 해밀턴도 2편에 이르러선 아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 <에이리언>의 시고니 위버는 삭발한 머리와 러닝셔츠 차림으로, 낯설고 강렬한 임팩트를 전하며, 외모와 분위기에서부터 기존의 여전사와 차별화됐던 인물. 평범한 여성에서, 모성을 겸비한 여전사로, 순교를 택하는 성녀로, 다시 정체성 혼란에 빠진 주변인으로, 매번 캐릭터가 달라졌다.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는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고통받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등 여러 얼굴을 보였고, 총격전과 육탄전에 모두 강한 모습이었다. ‘라라 크로프트’와 ‘미녀 삼총사’로 대표되는 이후의 여전사들은 ‘모성’을 거세한 뒤에, SF와 판타지어드벤처로 무대를 옮겨왔다. <툼레이더>의 안젤리나 졸리, <미녀 삼총사>의 세 여인,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보비치, <다크엔젤>의 제시카 알바가 그들. 하나같이 가죽 소재의 타이트한 의상을 즐겨입고, 섹시함을 과시했다. 그에 비하면 <킬 빌>의 우마 서먼은 아날로그적인 파이터다. 쿵후, 검술, 몸싸움에 모두 능하고, 총보다는 사무라이 검을 즐겨쓰며, 트레이닝복이나 청바지처럼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의상을 입었다. 기존 여전사들에 비해 자비심과 동정심이 부족해 섬뜩해 보이는 순간들도 있지만, 역시 모성애가 강한 인물이다. 라라 크로프트와 브라이드를 비교하는 이들에 대한 우마 서먼의 일갈. “라라 크로프트의 머릿속엔 섹스 생각이 있다. 브라이드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다른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 수가 없다. 브라이드의 여정은 ‘모험’이라 부를 수 없다. 그만큼 절박하단 얘기다.”

여신의 아우라 지닌 광란의 암사자, <킬 빌2>의 우마 서먼 [2]

<펄프 픽션> 이후, 우마 서먼은 멕 라이언과 줄리아 로버츠를 잇는 로맨틱코미디의 히로인으로 올라설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답긴 하되 친근하거나 따뜻한 느낌이 없는 우마 서먼은 이 방면에서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뷰티풀 걸스>에 출연했을 때는 내털리 포트먼의 그늘에 가려졌고,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에서는 ‘블론드 미인은 멍청하다’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조형된 캐릭터를 연기했다. 의기소침해진 우마 서먼은 이어 블록버스터를 공략하는 ‘악수’를 뒀다. 하필이면, 지금까지도 최악의 영화 후보에 오르내리는 <배트맨 & 로빈> 그리고 <어벤저>를 선택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배우도 이렇게 우스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 자체는 가상했지만, 영화의 함량이 그의 용단을 받쳐주지 못했다. 할로윈에나 어울릴 법한 기괴한 분장의 포이즌 아이비(<배트맨 & 로빈>), 다양한 가죽 의상으로 “영화보다 더 초현실적인 것은 우마 서먼의 몸매”라는 칭찬만을 얻어낸 닥터 필(<어벤저>)과 함께, 우마 서먼도 몰락하는 듯싶었다. 완벽한 우성인자를 지닌 ‘맞춤’ 캐릭터로 출연한 <가타카>에서 에단 호크를 만나 가정을 꾸린 뒤, 우마 서먼의 관심은 독립영화와 코스튬드라마로 옮겨갔다. “나는 주력 분야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대학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일찍 시작했고, 그런 만큼 탐험과 개발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 일찌감치 내가 잘하는 일을 찾아서 그것만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어벤저>는 내가 여배우로서 가졌던 초심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배우를 부각시킬 줄 아는 감독들, 그리고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따지게 된 것이다. 코미디와 할리우드 대작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우마 서먼의 새로운 선택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그는 대중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의 출연작들은 대부분 국내에 수입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시 우마 서먼은 타란티노를 만났다.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느 감독과 다르지 않았다. “카메론 디아즈와 우마 서먼은 아름답다. 카메론 디아즈 스타일의 여성은 드물긴 해도 곁에 존재하긴 한다. 나는 그런 미모와 이미지를 가진 소녀들과는 같이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우마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다. 그녀는 여신의 영역에서 가르보와 디트리히의 대를 잇고 있다.” 결정적으로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에게 각별한 감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자기의 ‘여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녀를 데리고 만들고자 한 영화가 매우 기발했기 때문이다. “우마 서먼의 긴 근육질 다리와 금발, 그녀가 선보일 동물적인 쿵후 동작과 사무라이 검술을 떠올리며 <킬 빌>의 시나리오 쓰는 내내 흥분했다.” <킬 빌> 이전에는 그 누구도 우마 서먼에게서 ‘액션 스타’로서의 자질을 엿보지 못했다. 사실 그런 가능성이란 애초 없었다. 폭력적인 영화는 보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여린 심장을 지닌데다 불교 신자인 부모에게서 분노나 증오는 억누르는 게 능사라고 배운 우마 서먼이 출연을 결정한 것은 “나를 배우로서 가장 잘 아는 감독”인 타란티노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브라이드가 되기 위한 과정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고된 훈련을 마친 밤마다 우마 서먼은 욕조에 앉아 울었다. “영화에서 나는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았고, 강간도 여러 번 당했고, 수없이 두들겨맞았으며, 사무라이 검에 베이고, 생매장을 당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킬 우마’로 지었어야 했다.” 하긴, 그것이 타란티노다운 애정 표현이다. 자기가 여신으로 숭배하던 여배우를 먼지 구덩이에 밀어넣고 피칠갑을 하는 일. <펄프 픽션>에서도 코카인 과용으로 빈사 상태에 빠진 우마 서먼의 가슴에 아드레날린 주사바늘을 내리꽂았던 그가 아닌가. Q & U, 완성의 경지를 창조하다 <킬 빌>로 인해 우마 서먼은 강해졌다. 우마 서먼은 그 힘의 비결을 ‘모성’에 돌린다. “나는 내 한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는데, 아기를 낳고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랑에도 능력에도 한계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의 모든 액션을 대역없이 소화한 유일한 액션 히로인이라는 자신감은 한동안 우마 서먼을 든든히 지탱해줄 것이다. <킬 빌>로 인한 변화가 다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 촬영 중에 흘러나온 타란티노와의 염문설에 욱해서 바람을 피웠다는 남편 에단 호크와는 얼마 전 남남이 됐다. 그리고 <킬 빌>을 준비하며 타란티노의 권유로 보았던 <첩혈쌍웅>에 반해 오우삼의 SF액션 <페이첵>에 출연하기도 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어쩌면 우마 서먼은 다시 내리막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킬 빌> 같은 ‘완성’의 경지를 경험하는 배우는 흔치 않다. <킬 빌>의 말미에 큼지막하게 박힌 엔딩 크레딧 “캐릭터 원안 Q(쿠엔틴 타란티노) & U(우마 서먼)”는 영화사를 바꾼 세기의 만남들을 연상시킨다. 장 뤽 고다르와 안나 카리나,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후네 도시로, 조셉 폰 스턴버그와 마를레네 디트리히, 세르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우마 서먼이 타란티노를 만난 것은,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만난 것은, 우리가 이들의 만남을 목도했다는 것은, 축복이고 행운이다. 박은영 cinepark@hani.co.kr :: 우마 서먼에 대한 말, 말, 말 비비안 리 혹은 여신 혹은 장난꾸러기 금발 미녀 제임스 아이보리 · 그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를 연상시킨다. 사랑과 질투와 집착 같은 복잡한 여성의 감정을 잘 체현할 수 있는 배우다. 그것은 그녀가 할리우드에서 충분히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워드 엔드>에 출연할 당시의 에마 톰슨처럼, 우마 서먼은 나이보다 성숙하고 재능있고 미더운 배우다. (<골든 볼>에 우마 서먼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리처드 기어 · 왜 네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 거니? (어린 우마 서먼이 아버지의 친구인 리처드 기어에게 처음으로 배우의 꿈을 털어놓았을 때 들은 말) 조엘 슈마허 · 그녀는 여신들처럼 영원불멸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면서도, 어리석게 굴 수 있고 웃길 수 있는 캐릭터다.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었을 때 루마니아 여왕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장난꾸러기 사내애처럼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여배우가 우마 서먼이다. (<배트맨 & 로빈>의 포이즌 아이비가 우마 서먼의 재기로 빛났다고 말하면서) 에단 호크 · 그녀는 아름답고 지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친절하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우마 서먼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쿠엔틴 타란티노 · “이렇게 예쁜 금발 본 적이 있나?”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는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는 거지.” “금발치곤 똑똑하다는 얘기였겠지.” “엄마가 세상에서 젤 예뻐.” “넌 나를 미치게 하는 여자야.” (<킬 빌>에서 타란티노가 우마 서먼을 염두에 두고 쓴 브라이드에 대한 대사들)

소녀들의 로맨스가 진화한다, 야오이 만화 [2]

사회적 개입 No! 감정적 갈등 Yes! 하드한 야오이에 비해 소프트한 야오이라고 불리는 로맨스물들에서도 재현된 주체와 여성관객 사이에 마찬가지의 관계가 설정된다. 낭만적 연애 판타지에 대한 욕구와 그 안에서의 여성 주체의 위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꺼림칙함을 미소년들의 연애 판타지로 대체하는 것이다. 팬픽의 경우는 남성 커플링의 동기는 연애 판타지의 충족이라기보다는 스타에 대한 배타적 독점욕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내가 독점할 수 없다면 누구도 그 스타와 연애관계로 연결되지 않기를 바라는 데서 오는 독점욕과 동성끼리의 로맨스라면 로맨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강한 이성애의 발현에 의해 역설적으로 팬픽의 동성애 커플링이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같은 팀 내에서의 커플링에 집착하는 경향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가 항상 같이 생활하는 팀 멤버들과 팬들 외에는 인간관계를 가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별 팬픽의 구체적인 텍스트 내에서의 인물들과 수용자가 가지는 관계는 여타의 야오이물들과 다르지 않다. 팬픽이라고 해서 선호하는 커플링 가운데 한명을 자신이 감정이입하는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야오이물의 유행은 퀴어 커뮤니티와 관련을 가지기보다는 소녀들에게 있어 할리퀸 로맨스와 여학교에 한두명은 꼭 존재하던 소년 같은 소녀, 리본의 기사와 오스칼에 대한 동경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하겠다. 야오이에 묘사되는 동성애 관계가 사실적이지 않고 관계 속에 사회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은 종종 야오이가 비판받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오이가 이성애자 여성들이 연애와 관련된 욕구와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방편이라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 내용의 타당성과 별도로 야오이에 대한 논의를 소모적으로 이끌곤 한다. 야오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인물간의 관계 맺기와 그 안에서 야기되는 감정적 갈등이다. 보통의 야오이물과 다르게 진지한 야오이로 평가받고 있는 마리모 라가와의 <뉴욕 뉴욕>이 야오이 팬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것은 <뉴욕 뉴욕>이라는 작품 자체보다는 야오이물을 보는 외부의 이해부족과 적대로부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 커플이 겪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들이 부각되는 작품은 야오이 팬들 스스로 야오이가 아니라 퀴어물로 분류한다. 동성애 커플의 사회적 인정은 야오이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계 내부의 쾌락을 추구하는 야오이물에서 동성애가 놓여 있는 사회적 관계가 개입되면 이 커플의 ‘평범하지 못함’이 의식되어 쾌락에 몰입하는 것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여성 연애 판타지 소녀문화 내의 아마추어 만화 동인이나 팬픽, 야오이에 대한 열광은 대개 일본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한국과 대만에서도 곧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어떤 특수한 아시아성이 작용한 결과일까? 같은 아시아라도 중국은 야오이 열풍에서 아직까지는 예외적이다. 중국의 특수성은 무엇일까? 강한 동성사회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에서 이성에 대한 인식과 기대는 실제 관계 맺기를 통해 구축되기보다는 성별 분업적으로 이상화된 역할 부여와 낭만적 연애에 대한 판타지로 관념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연애’ 외에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관계 맺기를 학습한 적이 없는 동성사회에서는 무수한 연애 판타지물과 실제 관계 맺기에 있어 미숙함이 동시에 양산된다. 일본이 20세기 초 서구의 근대 성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성을 접하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던 상황은 자유연애에 대한 동경을 여학교에서 보이시한 소녀들에 대한 연모로 표현하게 했고 <리본의 기사>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같은 남장여성들이 등장하는 만화들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일본을 경유한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였던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시간이 흘러 학교나 직장에서 남녀가 접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 동성사회를 해체시키기보다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이성 관계를 연애 관계로 강하게 환원시키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야오이물의 유행은 실제 이성애 관계에서 욕구 충족의 경험적 실패와 좌절로 연애 판타지에 순수하게 동일시할 수 없는 여성들이 순수한 연애 판타지와 그로부터의 쾌락을 얻는 수단이다. 근대 성개념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아시아 여타 국가들과 달랐던 중국의 경우에 게이/레즈비언 커뮤니티는 오히려 개방적이고 활발하지만 야오이는 유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체-대상, 자리 바꾸기의 한계 야오이물의 유행이 퀴어 커뮤니티의 확장과 동성애 인권의 신장이라는 측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이성애적 연애 관계에서 겪는 불만과 이성애적 관계에서 낭만적인 연애 판타지의 포기를 징후적으로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소녀들이 즐기는 로맨스가 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소녀들이 야오물을 창작/향유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와 거리를 두면서 이미지를 조작하고 생산하고 독해하여 스스로 능동적 응시자가 되어 쾌락을 얻는 방식은 관계 맺기에 있어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결과적으로 남성은 지골로가 되어 보이는 대상의 위치로 갈 뿐 주체-대상 이분법 구도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응시 이론가들은 영화의 쾌락구조 안에서 여성의 응시의 공간을 찾기보다는 영화의 구조를 해체시키기를 제안했을 것이다. 이것은 이성애, 동성애, 주체-대상의 자리 바꾸기를 떠나 일대일 연애 관계의 환상과 그로부터 얻는 쾌락 자체를 폐기할 것을 의미한다. 소녀들의 로맨스 읽기의 진화 과정의 방향은 어디일까? 최근 공수 구분이 여러 버전으로 다양화되다가 그마저도 희미해지고,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신분상승이 덧붙여지는 결혼에 골인하는 이성애 로맨스의 기승전결 구조는 아니더라도 사랑을 약속하는 기승전결 구조는 있었던 일반적 구조에서 탈피해 운명적 사랑이냐, 아니냐보다는 순간의 감정적 교류를 중시하는 야오이물들이 등장해 인기를 얻는 추세에 기대를 해본다. 황미요조/ 문화평론가 야오이 만화 5선 야오이·보이 러브(BL) 작품! 이것만 읽어도 완전정복!! 1. <그라비테이션>(전 11권 완) 무라카미 마키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 야오이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 야오이계에서 이례적으로 작가가 탁월한 개그센스를 발휘, 일부 남성팬까지 확보했다. 가수 지망생과 잘 나가는 연애소설 작가의 좌충우돌 러브스토리. 2. <러브모드>(전 11권 완) 시미즈 유키 지음/ 현대지능개발사 펴냄 : 장기 연재가 이루어지기 힘든 야오이계에서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 호스트 클럽을 둘러싼 이야기로 야오이 입문자의 거부반응이 우려되나 잔잔하고 귀여운 순애적 코드 때문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이 작품 때문에 야오이를 좋아하게 됐다고 하는 사람도 꽤 많은 편. 3. <낙원까지 조금만 더>(2권 발매 중) 이마 이치코 지음/ 시공사 펴냄 <백귀야행>의 작가 이마 이치코의 BL작으로 작가의 개그센스가 십분 발휘된 작품.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들이 볼 만하며 이어지는 사건 사고 또한 유쾌하다. 같은 작가의 다른 단편, <어른들의 문제> <키다리 아저씨의 행방> 등도 모두 BL 강력 추천작. 4. <어쩔 수 없잖아!>(전 7권 완) 고이데 미에코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원작자는 그 유명한 <후지미 2번가 교향악단>의 작가인 아키즈키 고 선생.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에 고이데 미에코의 예쁜 그림이 잘 어우러져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작품. 정숙한 모범생과 잘 나가는(?) 불량학생이 펼치는 학원물. 5. <절애, 브론즈 시리즈> 미나미 오자키 지음/ 학산문화사 펴냄 야오이의 고전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국내에는 이미 해적판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과장된 인체대비와 극단적인 스토리(피, 자해, 자살시도 등)로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이 작품은 야오이 골수팬들의 입문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승기연/ 만화편집기자

[칸 2004] 왕가위 신작 <2046> 드디어 공개

왕가위 감독의 이 마침내 칸에 모인 관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은 줄거리나 캐스팅에서 소문만 무성한 채 계속 완성이 미뤄져와 관객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던 영화여서 더욱 이목이 쏠렸다. 최근 2년간 칸이나 베니스 혹은 베를린 영화제 등 주요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초청작 목록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공개가 연기됐다. 뿐만 아니라 이번 칸영화제에서도 초청 확정후 완성본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상영 스케줄이 미뤄지는 등 해프닝이 있었다. 베일을 벗은 은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과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하지만 잊으려 할 수록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는 <아비정전>이나 <화양연화>의 연장선에 있어 보인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차우)과 직업(기자)이 같고 차우가 잊고 싶어하는 여자 수리진은 '아비정전'에서장만위가 연기했던 캐릭터와 같은 이름이다. 주요 배경은 이들 영화와 같은 1960년대 홍콩이다. 2046은 차우가 묶고 있는 호텔의 방 번호 중 하나. 그는 2047호에 머물면서 2046호의 여성들과 관계를 갖는다. 그동안 그의 영화의 주된 관심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가슴아픈 과거의 기억이었다면 감독은 이 오랜 고민에 대해 일단락을 짓고 싶어했던것 같다. 이런 고민은 차우가 2046년을 배경으로 쓰는 소설이며 영화의 또다른 액자에서드러나는 이야기에서 끊임없이 진행된다. 감독은 60년대의 이야기와 그로부터 80년후인 2046년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며 해결방법을 찾아 나선다. 액자의 주인공인 일본 남자(기무라 다쿠야ㆍ木村拓哉)는 사이보그 여자(王靖雯ㆍ왕정문)에게 묻는다. "나와 함께 떠날 수 있을 것인가?" '희망' 혹은 '꿈'이라는이미지의 미래로 떠나려 하지만 남자는 사이보그 여자에게 거절당한다. 아무도 과거로 부터 도망갈 수는 없다.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 은 우선 영상미에 있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 감독의 탁월한 감각이 돋보인다. 세상을 그처럼 아름답게 보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 눈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관객들을 영화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영화에는 중화권 혹은 아시아권의 톱스타들이 대거 등장한다. 량차오웨이와 카리나 로우, 특별출연하는 장만위 등이 이미 그와 호흡을 맞췄던 배우. 궁리, 장쯔이와 일본 배우이며 그룹 스마프의 멤버이기도 한 기무라 다쿠야 등은 새로 등장한 사람들. 21일 오후(현지시각) 열린 기자회견에는 감독을 비롯해 궁리를 제외한 대부분의배우들이 참석했다. 왕가위 감독은 "이번 상영으로 이제 '이 영화가 2046년 이전에는 완성될 것'이라는 식의 농담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농담을 던진 뒤 영화에 대해 "과거에서벗어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칸/연합뉴스)

\"<화씨 9/11> 수상은 정치적 수류탄\"

올해 칸 영화제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맹렬히 비난한 마이클 무어 감독(사진)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에 최고의 상인 황금종려상이주어진 데 대해 미국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부시 정부에 큰 정치적 충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무어 감독에게 이번 수상은 예술적 승리 이상을 의미한다. 이는 백악관을 겨냥한 정치적 수류탄이나 다름없다"고 논평했다. 뉴욕타임스도 "무어 감독이 그 곳에서 정치적 폭탄을 터뜨렸다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며 "<화씨 9/11>은 곧 온 동네 영화관에 배급돼 큰 수입을 올릴 것이다. 그러므로 국내 배급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이제 접어도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어 감독은 시사회에 앞서 당초 국내 상영관 배급 계약을 협상중이던 디즈니사가 정치적 압력 때문에 협상을 중단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미국내 상영관을 찾지 못했다고 밝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뉴욕타임스는 "디즈니사는 대가급 선동가이자 자기선전가인 무어 감독이 역량을발휘하지 못하도록까지 검열하지는 못했다"고 양쪽 모두를 꼬집고 "무어 감독은 외국 기자들과 (영국의 채널4와 같은) 방송사들, 그에게 불법 비디오를 건네 준 프리랜스 기자 및 미국 TV 종사자 등 다양한 취재원으로부터 일반인에겐 차단된 전쟁의영상을 입수해 공급했다"고 논평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9.11을 전후한 부시 정부와 그 정책에 대해 거침없이편파적으로 비난한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고 비판하고 "황금종려상 수상이 반드시 관객 증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경우는 수상 덕을 톡톡히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틀랜타 저널-컨스티튜션은 "마이클 무어를 사랑해"란 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모습을 만화로 보여줬다. 지난 17일 칸 영화제에서 시상식을 가진 <화씨 9/11>은 2000년 대선 승리 때부터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그리는 한편 9.11의 주범으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을 낳은 사우디아라비아의석유재벌 빈 라덴 일가와 부시 일가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한편 백악관의 수지 드프랜시스 대변인은 이 영화의 수상에 대해 "미국은 자유국가이며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것이다. 그 이상은 할말이 없다"며 불쾌감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무어 감독은 이 영화의 심사위원 9명중 프랑스인은 단 한 명 뿐이고 4명이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수 언론들이 자신의 수상을 프랑스인들의 의사표시로의미를 축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었다. (워싱턴 AFP/연합뉴스) 칸=사진 손홍주 기자 lightson@hani.co.kr

대종상영화제 부문별 후보작 발표

<올드보이> 최다부문 노미네이트 기록 제5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인 <올드보이>가 제41회 대종상영화제에도 최다부문 노미네이트를 기록했다. 대종상영화제 집행위원회(위원장 신우철)가 24일 발표한 부문별 후보 명단에 따르면 <올드보이>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등 노른자위 부문을 비롯해 총 20개 중 11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도 작품상ㆍ감독상과 함께 여우주연상 후보에 전도연과 이미숙이 나란히 오르는 등 10개 부문 노미네이트를 기록해 다관왕을 노리게 됐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흥행기록을 세운 <태극기 휘날리며>는 9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작품상 후보에서 탈락하는 이변을 낳았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함께 1천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는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아라한-장풍대작전>과 <장화, 홍련>은 각각 8개 부문, <바람난 가족>은 7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대종상영화제는 25일 본심을 시작하며 시상식은 6월 4일 오후 8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다. 이에 앞서 25일 낮 12시에는 서울 충무로 스카라극장과 명보극장 사이의 네거리에서 영화계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대종상 조형물 제막식이 개최된다. 부문별 후보작은 다음과 같다. 작품상 ▲바람난 가족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실미도 ▲올드보이 감독상 ▲실미도(강우석)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재용)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김기덕) ▲올드보이(박찬욱) 남우주연상 ▲범죄의 재구성(박신양) ▲아라한-장풍대작전(류승범) ▲올드보이(최민식) ▲와일드 카드(양동근) ▲태극기 휘날리며(장동건) 여우주연상 ▲그녀를 믿지 마세요(김하늘) ▲바람난 가족(문소리)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전도연)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미숙) ▲장화, 홍련(염정아) 남우조연상 ▲바람의 전설(김수로) ▲범죄의 재구성(이문식) ▲범죄의 재구성(천호진) ▲선택(안석환) ▲실미도(허준호) 여우조연상 ▲4인용 식탁(유선) ▲바람난 가족(윤여정) ▲바람의 전설(이칸희) ▲위대한 유산(김수미)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김가연) 신인남우상 ▲그녀를 믿지 마세요(강동원) ▲동해물과 백두산이(공형진) ▲바람난 가족(봉태규)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배용준) ▲어린 신부(김래원) 신인여우상 ▲아라한-장풍대작전(윤소이) ▲어린 신부(문근영) ▲올드보이(강혜정) ▲위대한 유산(김선아) ▲장화, 홍련(임수정) 신인감독상 ▲…ing(이언희) ▲4인용 식탁(이수연) ▲미소(박경희)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홍반장(강석범) 각본상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바람난 가족(임상수) ▲범죄의 재구성(최동훈) ▲와일드 카드(이만희) ▲…홍반장(강석범ㆍ신정구) 각색상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재용ㆍ김대우ㆍ김현정) ▲실미도(김희재) ▲싱글즈(노혜영) ▲오구(이윤택) ▲올드보이(박찬욱) 기획상 ▲선택(박건섭)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유진) ▲실미도(김형준)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황산벌(조철현) 조명상 ▲4인용 식탁(박종환) ▲바람난 가족(고낙선) ▲아라한-장풍대작전(서정달) ▲올드보이(박현원) ▲장화, 홍련(오승철) 촬영상 ▲바람난 가족(김우형)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김병일) ▲올드보이(정정훈) ▲장화, 홍련(이모개) ▲태극기 휘날리며(홍경표) 음악상 ▲바람의 전설(이상호)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이병우) ▲아라한 장풍대작전(한재권) ▲올드보이(조영욱) ▲장화, 홍련(이병우) 미술상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정구호) ▲아라한 장풍대작전(장근영ㆍ김경희) ▲올드보이(류성희) ▲장화, 홍련(조근현) ▲태극기 휘날리며(신보경<강창길/강보길>) 의상상 ▲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정구호ㆍ김희주) ▲장화, 홍련(옥수경) ▲청풍명월(권유진) ▲태극기 휘날리며(이자영ㆍ김정원) ▲황산벌(오석준) 편집상 ▲범죄의 재구성(신민경) ▲실미도(고임표) ▲아라한 장풍대작전(남나영) ▲올드보이(김상범) ▲와일드 카드(김현) ▲태극기 휘날리며(박곡지) 음향상 ▲내츄럴 시티(정광호ㆍ영화진흥위원회) ▲아라한 장풍대작전(정군ㆍ김석원<블루캡>) ▲와일드 카드(오세진ㆍ블루캡) ▲장화, 홍련(김경택ㆍ최태영) ▲태극기 휘날리며(이태규ㆍ김석원) 영상기술상 ▲내츄럴 시티(문병용ㆍ신재호ㆍ정도안) ▲아라한 장풍대작전(손승현ㆍ신재호ㆍ정도안) ▲올드보이(이전형ㆍ신재호ㆍ정도안) ▲태극기 휘날리며(강종익ㆍ신재호ㆍ정도안) ▲튜브(강종익ㆍ정도안)(서울=연합뉴스)

<하류인생> 혹은 임권택 [1]

임권택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 <취화선> 이후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전작들에 연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장처럼 사용됐던 형식들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새로움을 추구한다. 언제나 임권택 감독의 세계 안에서 영화와 예술의 본질을 헤아려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진심으로 이 너비를 해석하고 질문하면서 뒤쫓으려 한다. 정성들여 마련한 서문과 인터뷰를 통해 거장의 ‘지금’ 거처에 발을 디뎌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정성일/ 영화평론가나는 궁금했다. <취화선>을 만든 다음에 무슨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어떤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장승업의 삶을 통해 그 자신이 봉착한 예술적 괴로움과 여기에 이른 자신의 기나긴 시행착오를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펼쳐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혜원 김홍도나 추사 김정희가 아니라 오원 장승업을 통해서 조선화의 세계를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권택은 장승업의 입을 빌려 그의 오랜 예술적 믿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장승업의 입을 빌려야만 설득될 수 있는 그 자리로 간다. 그러므로 <취화선>에서 장승업은 임권택의 뼈와 살이며, 그의 육신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대사들만으로도 임권택 영화론의 집대성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이 위대한 화가를 밀쳐냈고, 수많은 열린 결론을 놓아두고 기어이 임권택은 장승업을 도자기 굽는 불가마 속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장승업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줌 재가 되어서 스스로 그 자신이 그린 그림의 일부가 되려 한다. 그럼으로써 저 넘쳐나는 열정은 동시에 숭고한 수난의 껴안음이 되고야 만다. 이름 모를 도공이 만든 도자기 안의 그림이 되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 어디에도 없으면서 세상 그 어디에도 있고자 하는 더없는 가능성 속의 감지 불능한 상태에로의 그 자신의 여김. 평생을 집없이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의 오만한 겸허함, 그 모순된 표현 그 자체. 여기에는 넘쳐남과 껴안음 사이에서 스스로를 한줌 재로 만들고야 말려는 의지가 있다. 그것은 무서운 결론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다른 사람의 이해를 구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혹은 이 영화는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해서 만든 영화이다. 오히려 임권택의 예술을 훔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영화 안으로 몰래 들어가 그 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이 임권택의 아흔여덟 번째 영화이다. 필사적이었던 아름다움에의 의지를 집어던지다 그런 다음 (내 생각과 달리) 임권택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왔다. 100편의 목록을 한편 앞두고 있는 그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는 <하류인생>이다. 그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으며, 여전히 그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영화를 만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1957년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 대강연이 있던 날 시작해서 1972년 10월 유신헌법 반대시위가 있던 날까지 최태웅(조승우)이라는 한 남자를 15년간 뒤따라간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가 바람나서 버림받았으며, 그 이후 싸움질로 커간다. 그러던 그는 친구 신명이 이웃 고등학교 떡대에게 매를 맞고 오자 그 길로 가서 매로 갚아준다(여기가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걸 보던 박승문은 “저 새끼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밟혀도 되는 거야!”라며 태웅의 다리에 잭나이프를 꽂고 도망친다. 그의 집까지 쫓아온 태웅을 승문의 누나 혜옥(김민선)이 처음 본 날이다. 태웅은 거리의 깡패가 되고, 혜옥은 그에게 이끌린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그리고 살림을 차린다. 4·19를 거쳐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 이후 그가 몸담던 깡패들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태웅은 깡패를 그만두고 영화제작에 손을 대지만 그러나 곧 망한다. 그리고 알고 지내던 상필에게 몸을 의탁해 건축업에 뛰어든다. 그것은 그를 가난과 배고픔에서 구해내기는 하지만 돈과 권력에 빌붙어 돈을 뜯어먹는 삶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런 그에게 혜옥은 말한다. “당신! 사람이 많이 탁해졌어, 전에는 맑고 순수하고 정직하고 그거 보고 결혼했는데, 당신 하는 일,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권력에 기생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다보니까 정신 자체가 부패해졌어.” 하지만 태웅은 이미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2년 10월 시위대가 명동거리를 뒤덮은 어느 날 태웅은 건축업 일로 정보부에 미운 털이 박힌 채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거리에 버려진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자막으로 “태웅은 이후에도 몇년을 더 그 일에 종사하다가, 1975년에 전업했다. 그의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 보였다”라고 후일담을 보탠다.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하류인생>에 있는 어떤 집어던짐의 의지이다. 맨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는 공들인 도자기를 깨버리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비유법이 아니다. 임권택은 (<족보>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만의 형상을 안겨주기 위해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식민지 강점하의 시대와,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야만적인 권력의 시간 안에서 흩어지고, 부서져내려서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 안에서도 (가련한)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거의 필사적인 복원작업이었다. 모두가 근대에 매달려 부숴뜨리는 동안, 혹은 그 부서짐에 매혹을 느끼는 동안 그는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혹 그것이 의심스러우면 그는 기꺼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갔다. 그에게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타임머신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아프지만 모든 것을 다해서 지킬 만한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였다. 아무리 부서져도 그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결국 삶이란 그 무엇보다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취화선>의 마지막 숏이 도자기로 끝나는 것은 임권택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걸 집어들어서 일시에 깨트려버리는 듯한 예술가적 몸짓은 내게 몹시도 신기하게 보였다. 물론 여전히 모든 숏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영화를 위해서 마치 처음부터 제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와서 척척 붙어 있으며, 대부분의 신인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사소한 움직임에서조차 영화 안으로 묻어 들어온다. 물론 그것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나 임권택은 여기서 공들인 화면이나 한숏, 한숏 안에서 세상의 모든 질서가 담기는 듯한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미장센의 우주를 그냥 밀쳐낸다. 여기서는 <취화선>에서 우리를 그렇게 취하게 만들었던 저 진경산수와도 같은 풍경 속의 인물을 볼 수 없다. 혹은 <춘향뎐>에서 느꼈던 음악과도 같은 리듬감 넘치는 동선과 그것을 펼쳐내는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하류인생>은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그냥 내달린다. 그 어느 순간에도 돌아보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그 15년이라는 시간을 단숨에 거의 추락하듯이 달려간다. 마치 어느 한순간이라도 숨을 돌려서 세상을 돌아볼세라 태웅은 세상에 밀려서, 또는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 어우러지면서, 혹은 숨가쁘게 이어지는 수없는 신에 밀려서, 그만 (부서져가는 인간성의)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야 만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186개의 신을 운용하면서, 임권택은 최태웅이라는 한 인간을 따라붙는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1960년대를 뒤따라가면서 명동거리를 회한에 젖어 돌아보는 방법이다. 회한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고스란히 겹치는 이 시대를 결코 추억에 가득 차서 돌아보지 않는다.

중년 남녀의 기억과 사랑의 줄타기, <레이디스 앤 젠틀맨>

너무 일찍 완성된 신화에 영원히 속박된 감독들이 있다. 누벨바그와 무관하게 프랑스영화의 대명사가 된 <남과 여>의 클로드 를르슈도 그렇다. 그 매혹적인 이미지-사운드의 울림에 반했던 이들에게 <남과 여 20년 후>는 차라리 보지 말았어야 할 영화였다. <아름다운 이야기> 로 프랑스영화의 규모를 과시하기도 했지만, 국민감독 를르슈는 <남과 여>의 세계적 감독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중년의 눈높이로 주특기에 복귀한 작품이 2002년 칸 폐막작으로 선정된 <레이디스 앤 젠틀맨>이다. 시놉시스만 보면 이 영화는 20년 뒤가 아니라 2002년의 <남과 여>가 돼야 할 것만 같다. 변장과 허풍의 대가인 영국의 보석털이범 발렌틴(제레미 아이언스)은 삶에 회의를 느끼고 아내를 놔둔 채 혼자 세계일주에 나선다. 프랑스의 재즈가수 제인(파트리샤 카스)은 애인이 동료와 바람를 피우자 우울하게 파리를 떠난다. 둘이 우연히 만난 곳은 모로코. 호텔 바에서 노래하던 제인에게 끌린 발렌틴은 그들 모두 부분기억상실증 환자임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치유와 공감, 사랑과 불륜의 여정이 경찰의 추적과 건망증을 넘나들며 아스라한 줄타기를 시작한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고급호텔과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북아프리카 사막을 배경으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역시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처럼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사랑을 끌어들인 품격있는 로망스다. 국제적이고 유럽적이며 무엇보다 프랑스적인 화면은 중년 남녀의 내적 위기와 새로운 모험을 시종일관 섬세한 교차편집으로 엮어낸다. 그러나 기억상실과 시공간 혼합 등 매우 지적일 수 있는 모티브들은 를르슈에게 장식품일 뿐이다. 심지어 영화 전체가 그렇다. 요트와 보석, 고급 홀에 둘러싸인 주인공들은 도둑과 가수가 아니라, 모로코를 신비롭고도 위험한 이국으로 바라보며 그들만의 고급한 멜랑콜리를 나누는 서구 부르주아의 전형이다. 모로코를 배경으로 한 상투적인 오리엔탈리즘에서 <남과 여>의 두근거리는 파토스를 기대하긴 무리다. 대신 노감독은 고전 샹송들을 비롯해 <남과 여> 주제곡까지 부르는 파트리샤 카스의 MTV풍 화면에 심혈을 쏟는다. 프랑스 영화의 한 경향은 그렇게 자신의 신화를 스스로 향수하며 나른한 백일몽을 읊조린다. 아쉬운 건, 영화가 참조한 “삶은 잠이고 사랑은 그 꿈이다”라는 알프레드 뮈세의 시구가 영화보다 더 인상적이라는 점이다.

2004 여름 개봉영화 올 가이드 [1]

스파이더 맨과 메리 제인, 슈렉과 피오나 부부, 호그와트의 귀여운 마법사들이 돌아오는 올 여름 극장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매력적인 캐릭터들과 작년보다 더 크게 무리지은 호러영화들의 비명소리로 눈과 귀가 바빠질 듯하다. 스티븐 소머즈가 창조한 고딕 세계 <반 헬싱>의 몬스터 킬러 반 헬싱과 그의 적수들, 기예르모 델 토로의 그로테스크한 악마 헬보이, 안톤 후쿠아가 사실적으로 재현했다는 <킹 아더>의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규모만으로 모든 것을 압도할 태세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이 원작인 <아이, 로봇>이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의 <터미널>도 스케일로는 지지 않는다. 3개국 감독의 3가지 호러를 다시 묶어낸 박찬욱, 미이케 다카시, 프루트 챈의 <쓰리, 몬스터>와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를 비롯한 호러물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 정통 호러에 가까운 <령>과 <인형사>, 연쇄살인을 소재로 한 <페이스>, 코미디를 가미한 <시실리 2km>, 베트남 전쟁이 배경인 <알포인트> 등이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다. 심리스릴러 <얼굴없는 미녀>와 M. 나이트 샤말란의 초자연적인 세계 <빌리지>는 늦여름의 더위를 식힐 것이다. 과다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이미 추워진 터라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다면 여기 아름다운 연인들을 만나볼 것을 권한다. 전지현과 장혁은 곽재용 감독의 슬픈 멜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 오랜만에 메가폰을 쥔 장진 감독의 신작 <아는 여자>에서는 이나영과 정재영이, <인어공주>에서는 전도연과 박해일이 고운 사랑의 향기를 피운다.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늑대의 유혹> <그 놈은 멋있었다>는 10대를 겨냥한 하이틴 로맨스물. 권상우와 하지원의 <신부수업>은 로맨스에 웃음이 조화된 영화다. 시원한 웃음만을 원하면 <달마야 놀자>의 속편 <달마야, 서울가자>와 박중훈-차태현 콤비의 <투 가이즈> 등을 기대해봄직 하다. 칸영화제가 불러들인 코언 형제와 톰 행크스의 코미디 <레이디 킬러>도 있다. 모두를 언급할 수는 없다. 6월3일 개봉작을 시작으로 8월의 마지막주까지 총 63편의 영화를 여기 촘촘히 소개한다. 선택은 볼 사람의 몫이므로,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고 한편한편 뜯어보면서 올 여름의 시작과 끝을 미리 정해보는 것은 어떨지. 편집자 Alternative Choice 영화광을 위한 여름 메뉴 한 극장에서도 여러 관을 차지한 블록버스터는 친구들과 이미 봤고, 1∼2주 걸리고서 없어지는 조그만 영화들은 개봉하기 무섭게 혼자 가서 봤다면, 가끔은 정말 극장에서 볼 영화가 없을 때도 있다. 그럴 때를 위한 여름의 얼터너티브. 우선 가장 메뉴가 풍성한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가보자. 하루도 쉼없이 빼곡히 영화제 메뉴를 차려놓은 이곳에서는 무성영화 코미디의 대부 버스터 키튼을 비롯,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50년대 할리우드영화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은 니콜라스 레이 그리고 한국의 김기영 등 거장 감독들의 특별전을 볼 수 있다. 국내에 크게 소개된 적이 없는 버스터 키튼의 영화는 <항해자> <셜록 주니어> <제너럴> 등 후기 장편은 물론이고 초기 단편들까지 총 31편이 상영된다. 로셀리니의 영화는 <무방비 도시> <독일 영년> <유로파 51> 등 16개 작품을, 니콜라스 레이는 <이유없는 반항> <뜨거운 피> 등 12편을 소개할 예정이다. 김기영 감독 회고전은 <하녀>를 비롯해 10여편을 상영한다(문의: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서초동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가도 가슴 뛰는 영화제를 만날 수 있다. 오는 6월8일부터 5일간은 최근 개봉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전이 열린다. <돼지와 군함> <일본곤충기> <붉은 살의> 등 총 7편을 볼 수 있다. 7월의 행사는 ‘한국액션영화전Ⅱ: 만주의 무법자’. 임권택 감독의 <두만강아 잘있거라> <황야의 독수리>,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 등이 상영된다. 8월에는 ‘납량영화: 그 여름밤 두견새 우는 사연’이라는 이름으로 신상옥 감독의 <이조괴담> <반혼녀>, 박윤교 감독의 <망령의 웨딩드레스> <망령의 곡>, 이혁수 감독의 <여곡성> 등 한국 고전 공포영화 11편이 상영될 예정(문의: 02-521-3147, www.koreafilm.or.kr).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과 <노스탤지아>를 7월 초 앙코르 상영한다. 8월에는 프랑스 누벨바그영화 4편, 트뤼포의 <투 잉글리쉬 걸스> <쥴 앤 짐>, 알랭 레네의 <내 미국 삼촌>,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를 소개할 예정이다. 호주영화제도 마련돼 있다. 호주 외교통상부와 호주 영화위원회가 주최하고 백두대간과 주한 호주대사관이 주관하는 이 영화제는 2000년 이후 호주에서 개봉한 최근 장편 8편을 비롯해 단편 21편, 다큐멘터리 1편 등 총 30편의 낯설지만 새로운 호주영화를 소개한다(문의: 02-747-7782). 대학로 하이퍼텍 나다에 가면 서울프랑스영화제가 열린다. 6월11일부터 19일까지 8일간. 가스파 노에의 <나는 혼자다>를 비롯 카트린 브레야의 <섹스 이즈 코미디> <팻 걸>과 르네 랄루의 <시간의 주인들>, 르네 클레망의 <철도의 전쟁> 등 프랑스영화 24편과 한국영화 8편이 상영된다(문의: 02-3672-0181). 서울을 벗어나 부천에 가면 무엇보다도 큰 행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있다. 7월15일부터 24일까지 10일간 계속되는 판타스틱한 이 축제는 1920~40년대의 일본 고전 애니메이션과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독립영화프로덕션 트로마의 영화들, 공포영화감독 요르그 부트게라이트를 소개하고, 홍콩 쇼브러더스의 두 번째 회고전도 갖는다(문의: 032-345-6313, www.pifan.com). 여름의 얼터너티브, 멀티플렉스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선택지들을 마음껏 골라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