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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끝에 이르러 적의 실체를 깨닫는 남자의 모험담, <소울 어쌔신>

<소울 어쌔신>은 생소한 직종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케빈(스킷 울리히)은 “법질서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국가에 지사들을 갖고 있기에 고객과 사원의 안전을 자체 인력으로 보호하는 다국적 금융회사 요겐슨의 보안요원이다. 생부를 잃은 케빈을 거두어 양육한 사장은 그를 아들처럼 여기는데, 덕분에 사장의 친아들은 그를 원수로 여긴다. 승진한 케빈은 요겐슨사의 직원인 애인에게 청혼을 준비하지만, 룸서비스 대신 들이닥친 킬러는 연인의 심장과 케빈의 미래를 부숴놓는다. 범죄 현장에 출동한 인터폴은 살인이 돈세탁과 연루되어 있음을 내비치고 진실을 추적하는 케빈 앞에 드러나는 사실들은 속속 새로운 용의자를 지목한다. <소울 어쌔신>이 궁극적으로 고발하는 범죄는, 이윤을 위해서는 인간의 기능뿐 아니라 영혼까지 착취해 마땅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조직이다. 케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도구에 불과했으나 딱 한 가지, 바른 질문을 던지는 법만은 잊지 않았기에 영혼을 건진다. 그러나 이 깊은 교훈에 당도하기까지 영화의 플롯은 쏟아진 스파게티처럼 엉킨다. 게다가 추리의 매듭 거의 절반을 설명조의 대사로 푸는 바람에 내러티브가 복잡하되 평면적인 기묘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 부류의 영화에서 관객의 진지한 관심은 볼 만한 액션이 얼마나 매복하고 있는가에 모아질 것이다. 총격을 액션의 주메뉴로 삼는 네덜란드영화 <소울 어쌔신>은 국적을 새기듯 로테르담의 좁다란 골목, 운하, 노천카페를 자전거로 헤집고 심지어 풍차를 클라이맥스 접전의 무대로 택하기도 하지만, 소재 이상을 취하지는 못한다. 엄격히 말해 이 영화에서 폭발하는 것은 액션이 아니라 촬영과 편집이다. 뮤직비디오 이력을 공표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로렌스 멀킨 감독은 시종 카페인을 과용한 스타일을 고집하다가 극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사소한 대목에서 고속/저속 촬영을 구사해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은 듯 가세하는 강렬한 음악은, 액션의 반주라기보다 인근 클럽에서 흘러든 댄스뮤직처럼 들린다.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3]

두번째 조우_ 재일동포 3세 리상일 감독 소통과 자극의 문을 두드리다 어떤 이에게 ‘재일’이란 단어는 삶의 굴레였다. 오직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일본사회 밑바닥에서, 때론 불법의 일도 가리지 않아야 했던 재일동포 1세들. 그들은 ‘고난’의 상징이었고 차별의 대상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보통 재일동포 2세, 대부분 3세인 영화감독들에게 ‘재일’은 굴레가 아니다. 아마도 영상에서 그 상징적인 모습은 최양일 감독의 블랙코미디 터치 가득한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일 것이다. 재일동포는 여전히 차별받는 존재지만, 거기에 절망하거나 또는 정치적인 대항을 하는 의미는 엷어졌다. 흠, 그래, 나 재일동포다. 그래서? 자신을 재일동포라고 ‘커밍아웃’하는 단계를 넘어서, 재일동포 감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편적인 ‘마이너리티’가 보는 일본사회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재일’이란 창을 통해, 나아가 ‘마이너리티’라는 창을 통해 일본사회에 간절히 말걸고 싶어한다. 최양일 이후의 포스트세대들은 더더욱 분화를 보이고 있고 보일 게 틀림없다. 재일동포 감독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이들은 정말 각개약진 중이다. <윤의 거리>(각본)에서 재일동포의 초상을 그렸던 <지구>(감독)의 김수길(43) 감독은 올 여름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천의 바람이 되어-천국에의 편지>를 개봉할 예정이다. 텔레비전에서 SMAP의 연예프로를 오랜 기간 연출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텔레비전 시리즈, <학교괴담>의 비디오특별판 연출을 담당했던 리토시오(40)도 자신의 첫 장편 데뷔작을 찍고 있는 중이다. 원작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 할 만한 <아버지의 백드롭>으로 악역 프로레슬러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아들의 이야기다. 그 최전선에 서 있는 리상일 감독과 구수연 감독을 만났다. 리상일(30) 감독의 이름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그의 중편 <청>과 첫 장편 데뷔작 <보더라인>은 모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대됐다. 조선학교에 다니는 재일동포 고교생들을 그린 <청>은 2000년 일본 피아영화제에서 그랑프리 등 4개상을 석권했고 부산을 비롯해 로테르담, 뉴욕영화제 등에도 초대됐다.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는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한 <보더라인>을 ‘올해의 베스트 10’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다. 오는 7월10일 일본에선 그의 신작 〈69>이 개봉한다. 이를테면 독립영화 형태였던 이전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는 ‘메이저영화’다. 도에이가 배급하는 이 작품의 두 주연으로 요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고 주목받는 젊은 스타 츠마부키 사토시(<워터보이즈>)와 안도 마사노부(<키즈리턴> <사토라레>)를 앞세웠고, 무엇보다 원작이 1987년 출간된 무라카미 류의 자전적인 동명의 베스트셀러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다. 니가타현에서 재일동포 3세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까지 10년을 요코하마의 조선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른스런 소년이었던 편”이었다. “당시 남자친구들에게 화제는 파친코 아니면 담배였다. 둘 다 관심이 없었으니 쉬는 시간에도 혼자 소설만 읽고 있었다.” 〈69>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의 시끌벅적한 모습엔 그 시절, 리 감독이 곁눈질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묻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뒀던 청년은 무조건 시네콰논의 이봉우 사장을 찾아갔다.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 이 사장의 소개로 현장경험을 쌓던 그는 역시 이 사장의 권유대로 일본영화학교에 진학한다. 3년의 수업을 마치고 만든 졸업작품이 바로 <청>이었다. <당시> <청>의 제목은 일본어로도 ‘아오이’가 아니라 ‘청’이다. 일본에서 재일동포를 경멸하며 얘기할 때 “바보나 청이나 (똑같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 속담 중에 ‘냄새 나는 곳에 뚜껑을 덮는다’라는 말이 있다. 악취가 나는데 뚜껑을 덮으면 덮을수록 냄새는 더 지독해지지 않는가. 조금이라도 뚜껑을 열어 악취가 바람에 날아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리 감독에겐 ‘청’이란 비분강개해야 할 차별의 상징어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불리는 걸, 거꾸로 스스로 이름 붙이는 것이다. 대성은 조선학교의 야구부원이다. 누나가 결혼상대라며 일본인 남자를 데려오자 부모는 불같이 화를 내며, 어릴 때부터 친했던 여자동급생은 일본 학생과 교제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이지메당한다. 리 감독은 모교로부터 촬영협조를 기대했지만 “학교를 나쁘게 그렸다”는 이유로 영화에 나오는 학교는 교실 따로, 운동장 따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출연진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다. <청>은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과정을 통해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찾는 청춘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3 학생이 청년으로, 성인으로 자기를 발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소엔 별로 재일동포라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일단 생김새부터 별 차이가 없으니…. 아마 느낀다면, 지금처럼 이런 인터뷰를 하는 때가 아닐까.” 그는 재일동포들에게 ‘정체성’을 묻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편이다. “정체성이란 점점 사라져가는 단어 아닌가. 정체성은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구별되는 게 아니다.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 아닐까.” 경계에 서서 응시하다 <보더라인> <보더라인>에서 리 감독은 일본사회의 경계(보더라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엇갈리며 그려낸다. 아버지를 살해한 고교생과 그가 만나는 택시 운전사, 딸을 집에 두고 가출한 중년의 야쿠자와 딸의 입원비를 위해 수금비를 들고 달아난 아버지, 이지메당하는 어린아이와 남편의 해고를 눈앞에 둔 주부,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자포자기해 원조교제를 하다가 퇴학당한 여자 중학생의 이야기가 서로 스쳐 지나간다. 〈69>까지 세 작품 모두 분위기가 다르지만, 리 감독 작품의 인물들은 “큰 틀의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과 같은 마이너리티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미덕을 “객관성”이라고 한마디로 얘기했다. “조선학교에 다니면서, 일본에 살면서도 일본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컸기 때문에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보기에 쉬운 포지션이다. 메인스트림에 속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떨어져나와 어딘가에서 응시하는 게 나의 영화다.” 〈69> 또한 그에겐 단지 60년대를 그리는 복고풍의 청춘영화가 아니라 2004년 일본사회에 대해 말을 거는 과정이다. 리 감독은 “지금 젊은이들에겐 정열,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신념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 시기는 다양한, 각자의 가치관이 있던 시대였다”며 “그걸 지금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전공투 등을 비롯한 학생운동이 정말 무데뽀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대항하는 에너지가 있었기에 저항받는 그 대상이 잘못됐다는 것을 결국 입증할 수 있었던” 시대라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절대적’이란 말이 있었다. 절대로 아버지가 옳고, 절대적으로 선생님이 옳고. 권위주의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아래 세대에게 전할 룰이 있었다는 얘기다. 룰이라는 게 있어야 젊은 세대는 존경하기도 하고 거꾸로 그걸 부수거나 부정하기도 하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간다. 그에 비해 지금은 이상하게 평등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마 그 최소단위일 텐데, 그들에게 ‘대립’도 없다. 그저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 거다.” 이제까지 자신이 각본을 쓰고, 스탭과 배우들을 끌어모았던 전작들과 달리 〈69>은 프로듀서의 제의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현장에서 10년 넘게 경험을 쌓아 40살이 다 되어 데뷔하는 감독이 수두룩하고 작품 하나 내놓는 데 몇년씩 걸리는 일본에서 그는 예외적 존재로 보인다. 〈69>이 개봉도 하기 전, 그는 여름 크랭크인을 예정으로 새로운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이번엔 “20대처럼 여러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길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중도한파 같은 30살 전후, 내 또래의 인물의 이야기”라고 했다. 분위기는 〈69>의 밝은 분위기에서 <보더라인>쪽으로 다시 돌아갈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그는 하드보일드나 필름누아르를 좋아한다. <쎄븐> 이래 가장 충격을 받은 영화로 <살인의 추억>을 꼽았다. 그에게 일본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게 아니라 텔레비전에 비치는 영상만을 보고 그에 따를 뿐이다. 지난번 이라크에서 일본인 납치사건에 대해 ‘자기책임론’ 등의 반응이 그 단적인 예라며 “상상력이 부족한 나라”라고 웃는다. 북한에 대해 비난을 퍼붓던 시기 총련계 여학생들을 이지메하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화감독으로서 그에겐 “이 나라가 모자란 게 많은 게 희망”이며 영화로 그릴 가치가 있다. “편의점에 가면 모두 갖춰져 있는 듯 보이지만” 희망이란 건 자기가 찾지 않으면 안 되듯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기에. 태어나고 자란 일본사회에 대해 그는 ‘애증’을 감추지 않았다. 〈69>는 어떤 영화 일본 젊은이들에게 정열과 신념을 1969년 파리를 비롯한 전세계에 혁명의 기운이 넘실거리던 그해, 일본에선 도쿄대학 학생들의 야스다 강당 봉쇄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제되며 전공투가 중심이 되었던 전투적인 학생운동이 상징적인 막을 내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나가사키 사세보엔 68년 미국 해군의 원자력함 엔터프라이즈호가 입항해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인가. 그 시기 젊은이들에겐 ‘여자-패션-요리’가 주요화제였고, 야시꾸리한 프로그램 〈11PM>이 인기를 누리며 주간지 <헤이본 판치>는 바이블이었다. 〈69>에서 고교생들은 가치관이 혼재하던 그 시대를 좌충우돌 질주한다. 겐(쓰마부키 도시오)은 언제나 교실청소는 내팽겨친 채 친구들을 모아놓고 여자 얘기로 허풍을 떠는 고3 악동 학생. 어느 날 바지를 입고 매스게임을 연습하던 같은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보고, 결심한다. “그렇다! 여자의 탄력있는 몸은 바닷가를 달리기 위해 있는 법. 저들을 해방시켜주자!” 록음악과 영화를 상영하는 축제를 계획하고 내친 김에 한눈에 반한 여학생 ‘레이디 제인’을 주연으로 영화를 찍으려던 겐. 촬영카메라를 빌리러 간 당시 학생운동 본부에서 장난처럼 시작된 일은, 급기야 학교 옥상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하는 작전에까지 치닫는다. 야스다 강당 봉쇄사건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던 69년 여름, 학생들의 장난은 온 매스컴을 타게 된다.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옮긴 편이지만, 영상이 갖는 힘은 이 밝은 분위기의 청춘영화를 어느 순간 가슴 뭉클하게 만들어버린다. “상상력에 권력을!”이라고 쓰인 플래카드 사이로, 밤에 잠입한 학교 건물에 폭력적인 교사들을 고발하는 내용을 장난처럼 페인트로 휘갈길 때, 시대의 커다란 목소리에 파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개인들의 모습이 또렷이 떠오른다. 이처럼 개인과 시대의 엇갈림이야말로 영화가 바치는 1969년 당시에 대한 헌사다. 어찌보면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 같은 청춘들과 혼란스러운 가치관의 시대처럼 보이던 당시상황이 빚어내는 충돌은 시대와 개인을 모두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명랑한 분위기의 이 영화는 끊임없이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으로 이어지지만, 그 유머엔 품격이 있다. 크림(Cream)의 노래 등 영화 전편에 흐르는 록음악과 오프닝 타이틀의 그래픽도 매력적이다.

짧고 파격적인 상상력 - CGV 한국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

CGV, 화제작부터 신작까지 한국 단편애니메이션 23편 상영 때로는 일상, 때로는 욕망과 상상 속에 숨은 크고 작은 판타지를 살아 숨쉬게 하는 짧은 애니메이션들만의 축제로 이른 휴가를 떠나볼까. CGV 한국 단편애니메이션영화제가 오는 6월1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CGV상암과 CGV오리에서, 6월18일부터 20일까지 부산 CGV서면에서 열린다. 멀티플렉스 극장 체인 CJ-CGV가 주최하고, 한국독립애니메이션 작가연대 애니마포럼에서 주관하는 이 행사는 국내 단편애니메이션의 따끈한 신작들과 지난 화제작 가운데 23편의 작품을 모아 상영하는 영화제. 국내 작가들의 단편애니메이션은 올해에만 안시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본선에 8편,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본선에 6편이 진출하는 등 90년대 후반 이후 꾸준하고도 활발한 성장을 보이며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올해 안시페스티벌에서 한국 특별전이 개최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러한 단편애니메이션의 풍요로운 실험과 상상력이 축적해온 신뢰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단편애니메이션의 해외 페스티벌 진출 및 수상 소식은 점점 느는 데 비해 해당 작품을 볼 통로는 여전히 부족한 형편에서, 이번 영화제는 반가운 자리가 아닐 수 없다. 부산 등 각종 국제영화제나 독립영화제,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SICAF) 같은 애니메이션영화제에 하나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처럼 단편애니메이션에 초점을 맞춘 행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린이를 위한 ‘키즈 섹션’, 일반 관객을 위한 ‘CGV 섹션’, 그리고 애니메이션 팬들을 위한 ‘매니아 섹션’으로 구성된 이번 영화제에는 지난해와 올해 안시 본선에 진출한 7편이 포함돼 있다. 쓸모없다고 여겼던 자신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강아지똥의 이야기인 <강아지똥>, 집에서 쫓겨난 고양이와 이를 위로하는 개의 상반된 입장을 펜 터치가 섬세한 코미디로 살려낸 <존재> 등 기존 화제작들은 물론이고 다채롭고 파격적인 상상력과 이미지로 무장한 미공개 신작들을 만날 수 있을 듯. CJ CGV에서는 이번 행사에 대한 호응도에 따라 영화제를 연례 행사화하는 계획도 적극 고려 중이라니 성장의 기운은 감지되나 실체를 확인할 기회는 많지 않은 국내 단편애니메이션 전문 축제를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상영작 중 미공개작 및 최신작을 위주로 7편을 미리 들여다보자(관람료 섹션당 3천원/ 예매 6월7일부터 인터넷 www.cgv.co.kr, ARS 1544-1122). 황혜림 blauex@hanmail.net 추천작 7편 소개 <메리 크리스마스> 박세형/ 2003년/ 25분/ 2D 컴퓨터/ 매니아 섹션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쿠데타에 휘말린 군인의 이야기.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는 임무를 맡은 문 대위는 어쩔 수 없이 아군과 총격전을 벌인다. 명령을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문 대위. 혼란스러운 그의 머리 속에는 미군에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아이들, 동생 영희 등 유년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스쳐간다. 문 대위는 쿠데타를 막으려는 상관 송 대령과 대치하게 되고, 친분이 있던 두 사람이 서로 쏘지 못한 채 주춤하는 사이 쿠데타 세력이 들이닥친다. 어두운 색채와 정교한 작화에 바탕한 사실적인 액션,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권력의 전장으로 내몰린 남자의 비극이란 모티브 등에서 <인랑>을 연상시킬 법도 한 작품. 단편으로 소화하기엔 버거운 소재라 이야기에 빈틈이 있긴 하지만,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기억을 재구성한 매끄럽고 사실적인 영상이 돋보인다. <정현아> 강준원/ 2004년/ 7분/ 2D, 페이퍼/ 매니아 섹션 말하자면 ‘설거지에 대한 감독의 즐거운 일기’. 문이 열리고 부엌으로 들어온 인물은 지저분하게 널린 그릇들을 보고 망설인다. 이내 컴퓨터를 켜고 마우스를 누르는 손. 경쾌한 재즈곡이 흐르자 싱크대로 다가간 손은 설거지를 시작한다. 인물의 얼굴이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작품은, 수세미에 세척제를 묻히고 물을 튼 뒤 쌓아둔 접시들을 하나하나 씻어가는 손과 그릇들이 주인공. 페이퍼애니메이션을 컴퓨터에 옮긴 영상은 펜선 특유의 질감과 꼼꼼한 묘사를 보여주며, 재즈 리듬과 맞물린 그릇들의 움직임은 설거지를 유쾌한 유희처럼 그려낸다. 트럼펫 음색 사이에 달그락거리는 그릇,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 수저통에 꽂히는 수저 등 일상적인 사물들의 운동과 거기서 찾아낸 소리들을 또 하나의 악기처럼 끼워넣은 연출은 움직임과 사운드가 하나로 만난 애니메이션 특유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다. <지옥> 연상호/ 2003년/ 11분/ 플래시/ 매니아 섹션 크하수도 구석에 앉아 쥐를 뜯어먹는 남자. 역설적으로 들리는 “난 운좋은 사람”이란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은 그의 과거로 플래시백한다. 회사와 집을 오가고, 이따금 상사에게 닦달을 당하곤 했던 남자의 일상은 평범했다. 하지만 어느 날 천사에게 곧 죽을 것이며, 지옥에서 지금껏 느꼈던 가장 큰 고통의 10배를 느낄 것이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남자의 지루한 평화는 깨어진다. 지옥이 무서워 도피하고, 도망칠수록 배가된다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쫓길 수밖에 없는 남자의 현실은 이미 지옥에 다름 아니다. 저승사자들에게 붙들린 다른 희생자의 유혈 낭자한 죽음 등 악몽 같은 현실의 공포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가 두드러지며, 실제 사람을 촬영한 필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로토스코핑 기법을 이용한 움직임과 영상이 플래시애니메이션이라 보기 힘들 만큼 사실적이고 정교하다. <쏭의 명절> 이송희/ 2004년/ 8분25초/ 2D컴퓨터/ CGV 섹션 어릴 때야 맛난 음식을 먹고 용돈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자라면서는 그 잔치를 준비하는 노동(?)과 차례 등 가족으로서 함께 치러야 할 일들로 바쁜 명절. <쏭의 명절>은 “꿈 많은 애니메이터지만, 사람들은 시집 안 간 노처녀”라 부르는 29살 쏭의 명절맞이 풍경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추석 연휴에 음식 준비를 돕던 쏭은, 딱히 할 일이 없는 남동생들과 아빠를 두고 자신에게만 잔소리를 하는 엄마가 야속하다. 훌쩍이며 잠들었다가 바람을 쐬러 나가보지만, 갈 곳도 마땅치 않다. 집으로 돌아와 아직도 일하는 엄마를 보며 도울지 그냥 피할지 갈등하는 심리까지, 명절을 맞이한 미혼 여성의 일상과 내면을 세심하게 포착한 진솔한 시나리오가 돋보이는 작품. 방 안의 소품까지 아기자기하게 그려낸 배경, 귀염성 있는 그림체에 녹아든 일상의 우화는 명절과 가족의 의미를, 특히 여성의 시선으로 되짚어보게 한다. 〈Africa> 한태호/ 2004년/ 10분22초/ 2D, 3D컴퓨터/ CGV 섹션 오랜 가뭄과 기근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아프리카의 한 마을. 한 소녀가 어렵사리 배급받은 수프를 들고 오다가 그만 떨어뜨리고 만다. 좌절한 소녀 앞에 쏟아진 수프에 기운을 차린 듯 전설의 고래가 나타나고, 쩍쩍 갈라진 땅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형형색색으로 물들면서 꽃과 나무, 물과 갖가지 동물들이 마술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전설의 고래와 함께 아직 생명과 자연의 풍요로움이 넘쳐났던 시절의 아프리카로 떠나는 여행과 같은 작품. 풍부한 색감과 아프리카 전통 미술에 영감을 얻은 캐릭터디자인 등 세련된 만듦새와 이상은의 서정적인 음악이 어우러진 애니메이션으로, <바스토프레몬> 등 국내 TV시리즈와 해외 하청 작업으로 이력을 쌓아온 동우애니메이션이 제작했다. <오늘이> 이성강/ 2003년/ 16분/ 2D컴퓨터/ 키즈 섹션 <덤불 속의 재> 등 여러 단편과 장편 <마리 이야기>에서 컴퓨터애니메이션의 독창적인 질감을 탐사해온 이성강 감독의 시도는 <오늘이>에서도 계속된다. 계절의 향기와 바람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원천강. 전통 자수에서 볼 법한 화사한 문양의 자연 속에 소녀 오늘이와 커다란 학 야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납치된 오늘이는 풍랑을 만나 낯선 세상에 도착한다.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대는 소녀, 꽃을 한 송이밖에 피우지 못한다며 슬퍼하는 연뿌리, 비를 뿌리는 구름을 달고 사는 소년, 여의주를 아무리 모아도 승천하지 못하는 용. 원천강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러 존재에게 길을 묻고, 또 그들의 사정에 귀기울이는 오늘이의 여정이 진행되는 동안, 전통 미술에서 생명을 얻은 산수의 자태와 풍부한 색상의 절경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에그 콜라-에피소드1>홍성호/ 2003년/ 6분15초/ 3D컴퓨터/ 키즈 섹션 장편으로 제작 중인 3D 컴퓨터애니메이션 <에그콜라>의 두 번째 트레일러를 겸한 단편. 에그콜라의 제조비법을 캐내려는 도적단의 모험을 그릴 장편의 일면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사막을 지나던 주인공들이 에그콜라 때문에 겪게 되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벌레처럼 기어다니는 로봇을 타고 이동하던 도적단은 우연히 에그콜라를 떨어뜨리게 되고, 그 맛에 반한 사막의 생명체들의 맹렬한 추격을 받게 된다. 코믹한 캐릭터들의 이미지와 움직임, 사막의 모래 등 세련된 컴퓨터그래픽 테크놀로지와 역동적인 카메라워크, 유머 감각이 두드러지면서 장편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예고편.

한국영화를 흐르는 두개의 시간, 임권택과 홍상수

아버지-임권택과 아들-홍상수의 서로 다른 ‘길 가기’ 길 위의 소년·소녀로 끝나는 엄청나게 다른 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사마리아>를 매개로, 얼마 전 나는 어설프게나마 ‘아버지’를 둘러싼 한국영화의 지형도를 그려보려 했다(<씨네21> 448호). 그뒤 임권택과 홍상수가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하류인생>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역시 길 위에서 끝난다. 아버지가 된 남자와 아버지가 될 것 같지 않은 남자가 명동과 부천 어딘가를 터벅터벅 걸어가거나 뻘쭘하게 서성인다. 이 묘한 중첩은 그러나 길가기의 작가에 다름 아닌 임권택과 홍상수로선 절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길가기는 얼마나 다른 시간을 살아내는가? 그 시간성의 단층들 위에서, 정신분석에 묶였던 공시적 지형도는 통시적으로 확장돼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지난호의 김소영·정성일·허문영 대담은 몇몇 영감어린 화두들을 툭툭 던져주었다. 남은 일은 좀더 텍스트에 천착하여 숙제를 푸는 것일 테다. 임권택의 시간 - 근대적 아버지 체제 임권택은 90년대 들어 줄곧 한국 근현대사를 훑어왔다. 지난 1세기에 대한 뒤늦은 되새김이었다. 그 구멍난 역사의 마지막 한 조각인 <하류인생>은 임권택이 유독 비워둔 60년대 전후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여지없이 주파해버린다. 심지어 당시의 열악하고 검열 많았던 영화제작 현장까지 들추는 감독은 70년대까지 자신이 왜 반공영화 따위나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이 고백록은 권력과 무관하면서도 닮아가고 권력에 기생하면서도 반발했던 건달의 초상화로 변형된다. 그런데 시위대와 전경 사이를 얼결에 빠져나오던 최태웅은, 적절히 비굴하고 영악하게 ‘더러움을 매니지하며’ 살았을 대다수 소시민과 먼 존재가 아니다. 임권택에겐 체제/반체제, 진보/보수로 재단될 수 없는 틈새의 인간이 늘 관심사였기 때문. <하류인생>은 그 인간이 하류의 체제 아래서 어떻게 먹고살아야 했는지를 유례없이 보여준다. 최태웅은 정치깡패에서 영화제작자로, 미군에 빌붙는 군납업자로, 정보부에 알랑대는 건설업자로 아무 전문성도 없이 둔갑하는데, 고아에서 벼락부자로 출세하는 그 하류의 인생유전은 하류의 국가권력 및 천민자본주의와 한 몸이다. 우연찮게도 <효자동 이발사>는 터프한 건달 대신 순박한 소시민을 내세운 <하류인생>처럼 보인다. 임권택이 자기 세대를 얘기하는 동안 임권택의 아들뻘인(역시 임씨인) 임찬상은 아버지 세대의 얘기를 한다. 그 아버지 성한모 또한 권력의 머리맡까지 진입했다가 여지없이 퉁겨나는 하류인생이다. 이승만 때만 해도 세상물정 모르는 소년과 다름없던 성한모와 최태웅은 4·19와 5·16에 맞춰 아들(386세대)을 얻더니, 박정희 말기엔 세상만사 다 겪은 아버지(박정희 세대)가 돼버린다. 곧,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 이름없는 떠돌이 아비의 아들인 최태웅은 부재하는 아버지 대신 나쁜 아버지(권력) 밑에서 나쁜 아버지-되기를 학습한다. 성한모는 그 나쁜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살해한 뒤에야 겨우 아버지 구실을 한다. 한데 최태웅이 맑아질 즈음을 기준으로 <하류인생>을 뒤집으면 <박하사탕>이 된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성한모의 아들 낙안과 동갑내기일 김영호는, 20여년 뒤 IMF로 파탄날 차세대 아버지 아니던가?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나들던 그는 독재자들의 전성시대를 거쳐온 대부분의 하류인생에 온전한 아버지-되기가 불가능함을 이미 보여준 것 아닐까? 요컨대 ‘한국영화가 애타게 찾는 자기 이미지’의 한축은 (박정희 세대든 386세대든, 체제/반체제, 진보/보수 이전에) 허문영 말대로 프랭크 카프라의 주인공과 같은 근대적 시민-아버지일 텐데, 그 자리는 늘 근대화를 획책한 권력이 차지했던 거다. 근대적 아버지-되기의 실패는 다리의 상처를 반복한다. 최태웅은 다리에 칼이 꽂히고, 성낙안은 고문으로 주저앉으며, 김영호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그런데 신화 속의 오이디푸스 또한 친부로부터 버려질 때 생긴 발의 상처를 운명의 표지처럼 갖고 있다(오이디푸스=‘부은 발’이란 뜻). 물론 이런 물증이 없더라도, 해방 뒤 남한의 아들들은 국가권력을 겨냥한 부친살해와 그것에 굴복하는 나쁜 아버지-되기라는 딜레마에 처한 오이디푸스였다. 위안이라곤 창녀 아니면 어머니뿐. 어머니로 표상되는 순수를 앗아간 건 (한국영화에 줄기차게 등장해온) 기차로 표상되는 근대화의 시간, 곧 아버지 체제의 시간이다. 김영호가 절뚝거릴 때면 종종 기차가 지나가는데, 기차와 인간의 그 속도차는 근대화의 비극을 상징한다. 김영호는 그 일방적이고 거대한 완력을 멈추고자 팔을 벌리며 상상적으로 기차를 거꾸로 돌린다. <하류인생>은 하천가로 내려가며 시작했다가 하천가에서 올라오며 끝나는데, 최태웅이 하천가로 뛰어내릴 때 다리 위로 기차가 후닥닥 지나간다. 이 짧은 컷이야말로 이후에 펼쳐질 초고속 하류의 시대, 앞만 보고 내달리는 근대적 시간을 내포한 주름과 같다. 그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단 한번의 순간들을 일직선으로 주파한다. 근대를 질문하며 천착하는 노장 불행히도 남한의 근대화는 기차의 관점에선 진보지만 인간의 관점에선 타락이었다. <하류인생>의 잃어버린 시간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 변명과 ‘그래서 안타깝다’는 자기 연민으로 추억된다. 386세대의 과거는 한발 더 나아가 종종 ‘되찾고 싶다’는 열망으로 향수되었다. <박하사탕><친구><말죽거리 잔혹사><올드보이> 등이 돌아가는 70년대 후반은 박정희 죽음 직전의 폭풍전야 같은, 시간이 멈춘 듯한 찬란한 한때다. 그 순수의 기원은 <하류인생>에선 순수가 회복되려는 종착지처럼 어른거린다(“그의 인생이 맑아지려는 조짐이 보였다”). 이처럼 오염되지 않은 기원을 희구하는 건 그것을 유토피아처럼 투사하려는 열망과 닿아있다. 현재는 부정적이지만 과거와 미래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긍정되는 과거는, 사실 지금보다 덜 혹독했을 리 없는! 그때를 역사에서 떼어내어 판타지로 박제할 위험과 멀지 않다(유토피아도 마찬가지다). 많은 과거회귀 영화들이 노스탤지어에 그치는 이유가 그러하다. 역사는 세트에 안치된 채 지워지고, 그 자리엔 오이디푸스식 가족드라마와 휴머니즘이 상투적이고 장르적으로 들어선다. <효자동 이발사>는 허구와 역사 사이의 어긋난 균형을 배우의 개인기에 기댄 휴머니즘으로 땜질한다. <하류인생>도 이념, 체제, 역사적 성찰보다 세월을 해쳐온 인간의 정서에 주목하는 임권택 특유의 휴머니즘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임권택은 근대적 시간 위에서 꿈꿀 만한 판타지를 서늘하게, 때로 가볍게 피해가며 놀라움을 전해왔다. <길소뜸>이나 <서편제>에서 가족은 서로를 확인하면서도 헤어지며, <창>에서 그토록 그리던 고향은 싱겁게 확인되고 무시된다. 이창동에게선 고향-집-가족으로 연결되는 정주의 꿈을 임권택은 길 위에 풀어놓고 가버린다. 많은 영화들은 길을 비추며 끝나고, 그 길은 다음 영화로 이어진다. 어찌 보면 밋밋할 정도인 <하류인생>은 균질적이고 비가역적인 근대적 시간을 15년치만 뚝 잘라낸 영화다. 진짜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시간 자체로 보일 정도다. 임권택은 시간 위에서 인간을 묶어둘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걸까?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원상태를 회복하려는 바람은 그것이 판타지라 해도 시간을 견뎌내는 동력과 같다. 이데올로기적인 허구라 해도, 가족이나 민족 같은 상상적 공동체는 근대의 시간을 살게 하는 힘인 것이다. <하류인생>조차 그 이면에는 여전히 우리가 거처할 집은 어디인지, 제대로 아버지-되기는 가능할지, 의붓남매는 온전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을지 질문하는 임권택의 시선이 있다. 아직 분단 한국이 해결하지 못한 근대의 숙제에 이토록 매달리는 작가는 이 노장밖에 없다. 홍상수의 시간 - 끊임없이 자리이탈하는 아들 물론 근대의 숙제에 무관심하다 해도 대부분 영화는 어쨌든 근대적 시간 패러다임에 속한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일목요연한 재현법칙을 따른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가 홍상수다. 시간에 앞서 공간부터 보자. 가령 <하류인생>의 명동은 그 자체로 캐릭터지만, <여자는…>의 부천은 춘천이나 경주여도 무관한 떠도는 지명일 뿐이다. 의미 부여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으며, 어디나 엇비슷한 도시는 익명의 길과 같다. 그 안의 식당·술집, 정류소·탈것들, 길·공터 등도 모두 길의 변주다. 도처에서 왕래되고 교차하며 뻗어간다. 여관·호텔조차 ‘길 위의 집’일 뿐이다. 인물들은 이 무차별적이고 상투적인 공간들을 그저 떠돈다. 의미의 닻을 내릴 어떠한 허구적 관습적 종착지도 없는 길가기를 행할 뿐이다. 상상적 공동체의 거처인 유토피아가 뿌리내릴 과거 혹은 미래는 없다. 오직 현재의 끊임없는 자리이탈, 즉 아토피아(a-: 벗어난, topia: 장소)의 운동만이 가능하다. 일관된 방향없이 공전하는 이러한 시간을 편의상 탈근대적 시간이라 해두자. 그 시간을 선입관 없이 관찰하기 위해 카메라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한다. 보이는 건 표면뿐이다. 그런데 표면을 보다보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우리가 주인이 아닌 어떤 우발적인 요소들로 훨씬 많이 채워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생활의 발견>에서,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와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이라는 메모의 원본 및 저작권자는 사실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사한 언어구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를 떠다니는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기표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순수하면서 유치하며, 독창적일 때도 상투적이다. 자기만의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자기를 잃는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말한다기보다 언어가 인간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홍상수가 말하는 ‘모방’은 사실 인간들 사이로 기호와 사건, 습관과 욕망이 ‘전염’되는 과정이다. 그는 오직 그의 ! 가시범위에 있는 이 헐벗은 주체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 주체가 세상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자 껴입는 의미들은 인간의 본질을 가릴 뿐이다. 임권택이 체제/반체제, 진보/보수 사이를 파고든다면, 홍상수는 그런 이분법 자체가 이미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요 부정해야 할 믿음의 틀이라 여긴다. 그랬을 때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가? 놀랍게도 현재는 늘 과거와 뒤섞인다. 명숙과 선영이 비슷한 메모를 남길 때처럼, 경수에게 과거는 끝없이 다시 씌어진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근대적 시간은 공간적으로도(<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강원도의 힘>), 기억 속에서도(<오! 수정>) 다시 씌어진다. 다시 쓰기는 곧 지우고 쓰기인데, 지운 자리엔 과거의 흔적이 남는다. 한데 <여자는…>의 헌준은 첫눈을 밟듯 선화를 깨끗한 백지로 만들어 최초로 쓰고 싶어한다. 처음 쓰기는 서명처럼 소유의 환상을 주니까. 그 인간적인 환상이 순결 이데올로기다. 하지만 선화를 다시 쓰는 헌준도 문호도 기존의 흔적을 지우진 못하며, 그 흔적을 좇아 선화를 찾아간다. 게다가 태연하게 강간을 고백하는 선화는 애당초 처녀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선화는 과거-현재-미래로 근대적 시간을 따라 성숙해가는 긍정적인 여성이라기보다 이미 더렵혀진 백지이며, 계속해서 다시 씌어지는 탈근대적 시간 자체다. 그 위에서 의미는 고정될 수 없고 욕망은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한 여자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 홍상수 말대로 무(nothing)일지 모른다. 그러니 ‘시간의 뫼비우스’나 ‘낯술의 나쁜 꿈’(정성일)으로 굳이 짜 맞추지 않아도 <여자는…>은 애당초 선형적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까? 과거-현재-미래가 원형으로 순환해서가 아니라 무정형으로 공존하고 공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이미 와본 듯한 길가기는 기시감과 기억과 꿈까지 뒤섞이는 방향성 없는 시간과 같다. 내러티브가 샛길로 빠지는 것도 홍상수에게 늘 그렇듯 문호의 길가기가 귀가를 지연시키며 탈중심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탈근대적 시간은 이처럼 가출 중이다. 그것이 돌아갈 집은 아버지-되기가 강요되는 근대적 시공간일지 모른다. 상습적인 오이디푸스 도식이 욕망을 가족삼각형에 붙들어매는 곳. 김기덕보다 더 아버지에 무심한 홍상수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앉는다. 집 바깥에서도, 선배의 여자를 늘 후배가 차지하는 삼각형은 또 다른 삼각형으로 이어지며 와해된다. 이런 욕망의 운동은 물론 최종적인 충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길가기는 매순간 씌어지는 작은 흔적들로 충만하다. 홍상수는 그것들이 주체를 해체 재구성하는 탈근대적 시간으로부터 비롯됨을 보여준다. 거기선 감독 자신도 몰랐을 숨은 그림들이 관객 나름의 발견을 기다린다. 이야말로 전에 없던 한국영화 보기의 경지였고, 임권택을 단번에 넘어서는 포스트모던시네마의 드물게 긍정적인 지평이었다. 90년대의 클리셰에 안주하는 홍상수 그러나 <여자는…>은 나무 대신 숲의 매너리즘을 노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양식화되고 빈약해진 디테일 탓인지 영화는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로 전락했고, 페미니즘 운운하게 한 빌미도 거기 있다. 홍상수의 장점은 죽고, 피상적인 단점은 더없이 도드라진 거다. 무엇보다 이젠 그만 봐도 될만한 자조적 지식인이 10년 가까이 불가지론과 부정의 철학을 변함없는 안주삼아 술주정을 읊어댄다. 거기서부터 흔히 홍상수 하면 얘기되는 모든 것들- 지리멸렬한 일상, 비루한 욕망, 퇴행적 나르시시즘, 냉소와 위악, 삶의 부조리 등이 지루하게 반복된다. 이 환멸의 테마들은 80년대를 부정한 90년대의 클리셰 아닌가? 부정을 얘기할 때마다 홍상수는 여전히 90년대, 또한 80년대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때 탈근대적 시간은 근대적 시간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도피의 시간처럼 보인다. 철저히 사적 영역만을 배회하며 시간관념 모호한 행위들을 반복하는 거다. 그것은 시간의 진정한 가능성을 열지 못하고 상투화된 포스트모던의 명제로 환원돼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홍상수가 역사와 사회도 담아주길 바라곤 한다! 하지만 큰 이야기가 능사라면 90년대의 시대성을 집약하며 홍상수가 등장할 필요도 없었을 테다. 그땐 분명히 근대화의 반성과 함께 근대적 시간이 한계를 노출하던 때였다. 그럼 제3의 시간이라도 필요한 걸까? 김소영은 임권택을 일컬어 “아버지가 되지 못하게 하는 역사에 볼모잡히고 그것을 앓아냄으로써 영화의 아버지가 된다”고 했다(<씨네21> 450호). 이 아버지의 시간을 아들뻘인 홍상수는 기어코 모른 척하며 전혀 다른 시간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관객은 둘 모두의 시간을 혼란 없이 경험할 수 있다. 관객은 임권택과 홍상수를, 두 개의 시간을 가로지른다. 사실 사회적인 시간과 개별적인 시간, 선형적인 시간과 비선형적인 시간은 모순이 아니다. 또한 전자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선 허구적인 정체성이나마 필요하며, 그것이 억압적일 땐 후자의 시간으로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근대적 시간/탈근대적 시간이란 이름도 실은 환원적인 도식이자 관념에 불과할 테다. 안타까운 건 해방 후 한국사가 여태 전자만을 강요해왔단 점. 그래서 임권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할 때 거기엔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시간이 있지만, 그 아버지가 이제는 넘어서야할 존재인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홍상수는 분명 대안적인 시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임권택보다 홍상수를 지지해도, <하류인생>보다 <여자는…>을 지지하긴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아무래도 홍상수는 80년대의 부정으로서의 90년대로부터 먼저 벗어나야할 것만 같다. 그럴 때 소위 탈근대적 시간도 근대적 시간의 부정이 아니라, 시간 자체의 충만한 가능성으로 해방되지 않을까? 그건 영화적 시간의 가능성이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 감독의 미국사회에 관한 정신적 탐험, <대청소>

Coup De Torchon 1981년 감독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출연 필립 누아레 EBS 6월12일(토) 밤 11시 타베르니에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은 <라빠>(1995)라는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없이 성장한 청소년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내용의 영화였다. “희망의 나라 미국, 그곳에선 모든 게 쉬운 법이지”라며 일군의 청소년들이 작은 범죄에서 시작해 결국엔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라빠>는 타베르니에의 대표작이라 칭하기엔 머뭇거리게 되지만 그의 연출 스타일을 요약해주는 면이 없지 않다. 프랑스 사실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고전적 서사에 바탕을 두되, 범죄물의 계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1981년작인 <대청소>는 잔혹한 범죄와 살인극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라빠>와 통하는 점이 있다. 영화 주인공은 코르디에. 뤼시엥 코르디에는 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유일한 경찰로 나약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은 게으르기만 한 그의 무능을 비난한다. 그의 부인은 여기서 한술 더 뜬다. 남편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정도는 예사이고 포주들이 노골적으로 유혹할 정도이니 코르디에는 마을의 웃음거리일 뿐이다. 어느 날 밤 인종차별주의자 군인인 샤바송이 마을로 들어오자 무엇인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그의 영향으로 코르디에는 변화하여 점점 더 광기어린 살인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다. 코르디에의 태도에 주변 사람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대청소>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원작은 짐 톰슨의 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전혀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 원래 20세기 초반 무렵 미국이었던 작품 배경이 영화에서 아프리카로 훌쩍 이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인종차별 문제와 백인 위주의 성장정책 등 유사한 사항이 원작과 영화에서 나란히 흐르고 있는 점이 놀랍다. 불륜과 살인, 그리고 이기적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전혀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극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영화에서 주연배우들의 연기는 빼어나다. 우리에게 <일 포스티노>와 <시네마 천국>으로 잘 알려진 필립 누아레, 그리고 대표적인 프랑스 여배우인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다. 비교적 산만한 이야기, 그리고 돌발적 살인극으로 일관하는 영화에서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순간은 그나마 잠깐 동안의 구원의 순간이 되고 있다. 특히 코르디에 역할의 필립 누아레는 거의 표정 변화가 없는 캐릭터임에도 그의 내면세계의 풍부한 결을 적절하게 연기해내고 있다. 미국 원작을 블랙코미디로 각색한 <대청소> 이후 타베르니에 감독은 몇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사회에 관한 정신적 탐험을 계속했다. 얼마 전 소개했던 재즈영화 <라운드 미드나잇>이 그렇고 1983년작인 다큐멘터리 <미시시피 블루스>는 소설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정신적 유산과 블루스 음악의 뿌리를 찾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감독의 영화들은 모두 미국이라는 거대한 대륙과 그 문화를 재해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읽힌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오세암> 안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대상 수상

12일 폐막한 2004 안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오세암>이 최고 영예인 대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영화계는 올초부터 이어진 <사마리아>(김기덕)의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 <올드보이>(박찬욱)의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소식과 함께 겹경사를 맞고 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안시 페스티벌은 자그레브(크로아티아), 오타와(캐나다), 히로시마(일본) 페스티벌과 함께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로 꼽히고 있지만 권위나 역사, 영향력 면에서는 최고로 평가받으며 애니메이션의 칸 영화제로 불리고 있다. <오세암>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평균 제작비의 50분의 1이 조금 넘는 15억원을 들여 만들어졌다. 지난해 봄 국내에서 개봉해 소재나 캐릭터의 생김새, 배경의 색감 등에서 할리우드나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차별화되는 한국형 애니메이션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제작진은 실제로 한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단풍, 단청, 시냇물, 산길 등의 풍경을 자연과 비슷한 색깔로 재현해냈고 캐릭터도 쌍꺼풀 없는 눈에 끝이 올라간 눈꼬리와 얇은 눈썹, 작고 도톰한 입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주인공은 앞을 못보는 누나 감이, 삽살개 바람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다섯살 소년 길손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지만 길손이에게는 '바람이 시작되는 곳에 엄마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다. 추운 겨울이 시작될 즈음 일행은 젊은 스님 설정을 만나 산사 생활을 한다. 스님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절이 경건하게만 느껴질 수는 없다. 불경 외는 중 법당 뛰어다니기, 스님 목욕하고 있는 사이에 승복 노루 입히기, 스님들 신발 나무에 걸기 등 길손이의 장난기는 절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스님은 길손이를 데리고 산속 작은 암자에서 생활하기로 한다. 사건이 일어난 때는 어느 겨울날. 식량을 구하러 아랫마을에 간 설정 스님은 절로 돌아오는 길에 폭설을 만나 미끄러져 정신을 잃게 되고 암자에는 길손이만 혼자 남겨진다. 2001년 작고한 동화작가 정채봉의 동명 스테디셀러를 원작으로 <하얀 마음 백구>의 마고21이 제작했으며 윤도현, 이소은이 주제가를 불렀다. 많은 사람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오세암>은 극장 흥행에서는 참패를 거뒀다. 서울 15개 스크린에서 선보였지만 문제는 대부분이 편법으로 교차상영(오전 상영이나 1,3,5회 상영)한데다 개봉 1~2주도 넘기지 않고 극장이 상영을 중단했던 것. 결국 애니메이션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상영 관행 개선과 제도 마련을 주장했으며 네티즌들은 확대 상영 혹은 재개봉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번 수상으로 그동안 자국내 시장에서 외면받던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은 해외에서 다시 한번 작품성을 인정받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흥행성 확보라는 숙제도 남겨놓고 있다. 지난해 개봉한 <오세암>, <원더풀데이즈>, <엘리시움> 등 국산 애니메이션 세편은 전국 관객 기준으로 각각 10만명, 29만명, 4천200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제4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극영화는 모든 빗장이 풀렸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2년간 유예한 것도 열악한 국내 애니메이션업계의 사정을 고려한 것이었다. 극영화가 비평이나 흥행 양쪽 면에서 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애니메이션은 산업적으로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놓여 있다. 제작사들은 상영제도 개선을 통해 안정적인 유통망을 확보하는 등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인 육성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단은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 여기에 탄탄한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업계 안팎에서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서울=연합뉴스)

칸 쇼크

올해의 칸영화제는 여느 해, 어떤 영화제보다 대중적인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듯하다. 그 중심에는 막판에 경쟁부문으로 차를 갈아타고 개선 행진까지 해버린 <올드보이>가 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칸이 우리에게 이중의 쇼크를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고 있다는 점이다. 칸영화제-프랑스 평단-프랑스영화-프랑스의 교육과 이론은 오랫동안 효율적인 결합관계를 이루면서 칸으로 하여금 세계 영화미학의 선도자, 발견자, 중심지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런데 올해의 칸은 스스로 그와 같은 이미지에 일정 정도 균열을 일으켰다. <씨네21> 취재진의 노련하고 성실한 리포트는 칸의 정체성과 영향력이 형성된 기원과 메커니즘,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짐작하게 만들고, 언제부턴가 칸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기 시작했으며 칸의 집행부가 생각보다 허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일부 영화인들은 “칸은 늘 뒷북을 쳐왔다. 미래의 거장을 감식하는 데 느리고, 아시아 영화미학에 대해 아둔하며, 신예들의 베스트를 뽑지 못했다”거나 “프랑스 평단은 누벨바그 시절의 그 평단이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칸의 권위는 그렇게 간단하게 도전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칸에 드리워져 있던 신비의 휘장을 이런 식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정당한지 혹은 바람직한지는 논란의 대상으로 남는다. 특히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마지막 보루라고 불리는 프랑스 평단의 존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칸에 안이하게, 누군가는 때로 맹목적으로 의존해왔을 수도 있다. 나는 일부 영화인들의 칸을 향한 맹렬한 의지와 신뢰를 접할 때 이것이 혹시 서구를 중심으로 놓고 스스로를 변방으로 위치지운 채 그 텅 빈 중심을 향해 퀭한 시선을 던져온, 골수에 깃든 우리의 근대병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 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칸의 탈신화화를 지지한다. <올드보이>의 선정과 수상은 또 하나의 충격 요인이다. 평론가들이 대체로 당혹해하거나 ‘타란티노 궁합’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일반 관객은 “내가 원래부터 <올드보이>를 무지 좋게 봤다”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간단한 에피소드지만, <올드보이> ‘사건’이 영화제-평단-작가주의 진영보다는 시장-관객-상업적 장르영화 진영을 더 기쁘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평단의 보루였던 칸이 평단을 배신한 셈인가? 어쨌거나 이분법이란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기에 역부족이라는 점에서 나는 두 진영의 경계가 무너지는 조짐을 즐겁게 관찰하는 중이다. 다만 <올드보이> 사건이 역으로 반대쪽 편향을 정당화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칸이 남긴 쇼크는 외부의 시선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치고 우리 자신의 시선으로 한국의 영화, 아시아영화를 질문하는 방법을 새롭게 익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선한 자극 정도로 받아들이면 족할 것 같다.

별난 게임들로 가득한 지적 유희, <차례로 익사시키기>

‘씨씨 콜핏’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모녀 삼대가 있다. 노년의 씨씨1은 술 취한 바람둥이 남편을 욕조에 익사시킨다. 중년의 씨씨2는 도통 무심한 뚱보 남편을 바다에 익사시킨다. 갓 결혼한 씨씨3는 수영도 못하는 새신랑을 수영장에 익사시킨다. 그때마다 불려온 검시관 매짓은 연쇄살해극을 단순사고사로 위장해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모종의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는 매짓을 그녀들은 매번 퇴짜 맞힐 뿐이다. 이 기묘한 죽음의 퍼레이드와 욕망의 숨바꼭질이 영국산이라면, 히치콕 같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영화적 후예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줄넘기소녀의 별 이름 100개 외우기로 시작한 영화가 화면과 대사 곳곳에 1에서 100까지의 숫자를 숨은그림처럼 뿌려놓는다면? 실로 영화는 스릴러적 몰입을 방해하는 별난 게임들로 가득하다. 매짓의 아들 스멋은 제멋대로 창안한 꽤 지적이면서도 허망한 구석이 있는 게임들을 차례차례 선보인다. 피터 그리너웨이 체질이 아니라면 이마저 얼떨떨하겠지만,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필로우 북>이나 〈8과 1/2 우먼>처럼 관객을 차례로 졸음 속에 익사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밌는 축에 속하는 이 영화는 히트작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와 더불어 90년대 이전 그리너웨이의 지적 유희를 맛보기에 손색이 없다.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인 숫자 키워드는 여기서 3과 100이다. 3의 배수를 읊는 3명의 아내는 영화를 3등분하며 3명의 남편을 수장한다. 이 씨줄 위에, 씨씨-남편, 매짓-씨씨, 스멋-줄넘기소녀의 관계가 세겹의 날줄로 짜여든다. 여기에 미니멀한 바로크풍 관현악이 대략 3개의 라이트 모티브를 교대로 반복한다. 이같은 세개의 계열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이정표처럼 1∼100의 숫자들이 차례로 튀어나온다. 또한 별 이름 외기나 나뭇잎 색칠하기에 암시되듯, 100은 무수히 많은 것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기호들을 대표한다. 이런 숫자놀음은 그리너웨이 특유의 대칭구조로 통합되는데, 기하학적 미장센이나 닮은꼴 형제들뿐 아니라 게임구조 자체가 그렇다. 모든 게임들은 남/여, 승/패, 삶/죽음을 변주하며, 삼위일체를 이루는 세 여인은 이원구조의 한 항으로 수렴된다. 작은 게임들로 미분되고 큰 게임으로 적분되는 구조는 결국 인생이 게임이고 세상은 그 무대라는 그리너웨이 철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편 인생이 게임이기에 게임은 늘 욕망의 좌절과 구조의 붕괴에 직면하기도 한다. ‘송장되기 게임’을 가능케 하는 곤봉의 순환은 게이머들을 송장으로 만들면서 종결되게 마련. 구조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내부의 운동으로 인해 스스로 해체되는 거다. “매일 위대한 것들이 장렬히 죽어가는” 기호의 제국에선 100까지의 넘버링이 그래서 죽음의 카운트다운과 같다. 전작인 <하나의 Z와 두개의 O>에서 집요하게 추궁된 죽음과 부패의 문제는 여기서도 온갖 동식물과 벌레들의 클로즈업 속에 어른거린다. 검시관 부자는 이 편재하는 필사(必死)의 존재들, 그 시체들과 더불어 게임하는 시체애호가들이다. 시체와 몸을 섞었고 시체를 조작하는 매짓, 시체를 옐로/레드로 분류해서 추모하는 스멋은 모두 삶이라는 게임에 내장된 죽음의 기운을 엿보게 한다. 흥미롭게도 영화 속의 남자(“이기적 행동으로 불행을 몰고오는 자”)는 모두 죽는데, 그리너웨이의 페미니즘은 무책임한 가부장을 차례로 익사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종적인 과녁은 바로 검시관 부자이기 때문. 그러니까 세상을 체계화해서 장악하려는 자는 결국 남성이며, 남성적인 폐쇄 구조는 스멋의 자살처럼 죽음본능(타나토스)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인지 모른다. 발기불능에 민감한 매짓과 남자가 되고자 할례하는 스멋은 남성의 이 불모성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욕망은 미끄러지고 고꾸라질 뿐 충족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불가능한 미래다. 여자는 삼손을 거세시키는 데릴라처럼 가위를 휘두르며(할례도 일종의 거세다), 사이렌처럼 물 한복판으로 남자를 유혹한 뒤 좌초시킨다. 분류나 분할이 불가능한 물은 구조적 체계를 와해시키는 타나토스의 이미지다. 그러나 수영할 줄 알고 임신할 수 있는 여자에게 물은 에로스의 양수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장미꽃 만발한 밤의 수면은 그처럼 남성적 체제를 빠져나가며 익사시키는 여성의 위험한 매력으로 반짝인다. “능력있는 여자는 딸을 낳는다”니, 생을 거듭하는 건 씨씨라는 이름의 여성인 셈. 그렇다고 그리너웨이가 페미니스트인 건 아니며 철학없인 영화를 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중세 이래 서구 예술을 백과사전처럼 섭렵해서 전시하는 그의 많은 영화들처럼, <차례로 익사시키기> 역시 화려하고 풍성한 스타일만으로도 포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더없이 정교한 회화적 프레임과 (최근 내한공연한) 마이클 니먼의 전위적 클래식도 여전히 품격있는 볼거리, 들을거리들이다. 관객에 따라서는 꽤 낯설고 새로운 이미지와 사운드로 눈과 귀가 출렁댈지 모른다. 물론 이 미지의 기호들은 속시원히 답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현학취에 거부반응을 보이지만 않는다면, <차례로 익사시키기>는 익사의 위험을 유쾌하게 피해가면서 머리를 써봄직한 ‘예술영화’로 다가올 것이다. :: 숫자와 문자가 지배하는 영화들 피터 그리너웨이의 기호학적 세계 고다르는 매체의 물질성에 주목하고 거리두기를 가능케 하는 브레히트적 장치로 종종 숫자와 문자를 활용했다. 고다르와 프랑스 구조주의의 직접적 수혜자인 그리너웨이는 제목부터 언어 자체를 지시하는 메타언어인 경우가 많다. 2001년 회고전에서 소개된 〈H는 House의 첫 글자>〈H를 통과한 산책> 등의 초기 단편은 인간을 지배하는 기호에 대한 관심의 출발이었다. 그 뒤 알파벳과 숫자는 종종 그리너웨이 영화의 구조적 축이 된다. 출세작 <몰락>은 근미래의 신종 전염병에 걸린 92명의 환자를 보여주는데, 2003년 부산영화제 상영작 <털스 루퍼의 여행가방>도 92개의 가방을 찾아다닌다(92는 우라늄 원자번호라고도 함). 국내 출시된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은 12개의 그림을 그려가다 13번째에서 죽음과 마주치며, 동물원(zoo)을 뜻하는 <하나의 Z와 두 개의 O>는 1명의 여인과 2명의 쌍둥이를 26개의 알파벳과 겹쳐놓는다. <건축사의 배>에서 9달의 전시회 준비는 아내의 임신기간과 겹치며, <요리사…>는 7일간 7가지 색깔을 10개의 코스에 펼쳐놓는다. 펠리니의 〈8과 1/2>을 끌어쓴 〈8과 1/2 여인>은 반신불수 포함, 그 수만큼의 여자들을 채집한다. 초기 그리너웨이의 정태적인 구조주의가 기호를 통한 세계의 체계적 파악을 실험했다면, 이후 성과 죽음이 본격화된 영화들은 그 세계가 인류학과 진화론적으로 부패하고 변전하는 (다소 탈구조주의적인) 과정에 주목한다. 그러나 영화학에서도 기호학이 쇠퇴해간 80년대를 넘어서자 그리너웨이의 실험은 디지털 매체로 옮겨간다. 90년 전후의 〈TV 단테><프로스페로의 서재>는 HDTV를 활용한 이중인화나 흑백-컬러 결합 등을 시도했고, <필로우 북>에서 만개한 화면분할과 중첩은 <털스 루퍼…>에서 수많은 윈도의 생성으로 진화한다. 이런 변화는 아날로그 기호학의 단선적인 시간을 복수의 시간들로 증식시키면서 영화적 시공간 자체를 빅뱅시켰다. 이 분열증 걸린 스크린은 그리너웨이가 흠모하는 보르헤스의 끝없이 갈라지는 길과 우주적인 도서관을 점점 더 닮아가고있다. <털스 루퍼…> 시리즈는 지금도 제작 중이라 한다.

스크린쿼터 축소논란 정치권으로 확산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축소논란이 정치권으로 확산되고 있다. 야당 정치인들이 잇따라 문화당국의 스크린쿼터 축소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며 문화주권 보호에 앞장설 것을 촉구하고 나서 정치공방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權永吉)ㆍ천영세(千永世) 의원은 15일 스크린쿼터와 관련한 공동입장을 내어 "영화를 비롯한 문화를 자본의 시장개방 논리에 적용하고 일반상품과 똑같이 획일적인 개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스크린쿼터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우루과이라운드(UR) 서비스협상 등 국제법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각국의 고유문화 보호제도로 한국영화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므로 스크린쿼터를 유지하는 것은 세계화에 어긋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과 자본의 힘에 눌려 자국의 문화를 개방하려는 일련의 세력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며, 문화관광부를 비롯한 정부당국이 자국문화의 주권을 보호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는데 앞장설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앞서 한나라당 정병국(鄭柄國) 의원도 지난 14일 스크린쿼터 축소방침을 밝힌 이창동(李滄東) 장관에게 공개 질의서를 보내 "장관 교체설이 나돌고 있는 시점에서 교체될 장관이 이러한 결정을 하는 것은 독선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많다"며 "장관직을 물러나서도 같은 주장을 계속할 것인지 밝혀달라"고 말했다. 정의원은 "며칠 전까지 스크린쿼터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던 영화인 출신 장관이 축소 입장을 개진한 것은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서 현행 영화진흥법 시행령에 규정돼 있는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영화진흥법에 명시토록 하는 법안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 스크린쿼터 축소 논의가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서울=연합뉴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 대한 괜한 걱정 세 가지 [3]

셋, 음침한 디멘터들, 진짜 음침할까? 프로듀서가 되어 한발 물러난 여유를 즐긴 콜럼버스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매번 발전하는 시각효과”라고 자부했다.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섬세한 표현에 집중하지만,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역시 매순간 마법을 거는 듯한 시각효과로 가득 차 있다. 아즈카반의 간수 디멘터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가장 호기심을 모으는 존재였다. 사람을 죽음보다 비참한 지경에 몰아넣는 디멘터는 누구도 그 두건 밑을 본 적이 없다. 그 때문에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제작진은 온전한 상상력에 의존해 디멘터를 창조해야 했지만, 쿠아론의 말대로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사신(死神)이란 오랜 세월 영화에 등장해왔으므로” 참고할 문헌은 풍부했다. 쿠아론은 <반지의 제왕>의 악령 나즈굴과 <제7의 봉인>의 사신을 본받아 검은 두건 사이로 미라 같은 손을 뻗는 디멘터를 만들었다. “디멘터는 육체를 초월한, 엄청난 힘 그 자체를 형상화한 존재”라는 것이 쿠아론이 설명하는 디멘터의 개성. 원작과 달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디멘터들은 별다른 사건이 없어도 때때로 등장해 옷깃을 날리면서 호그와트의 불길한 운명을 예고하곤 한다. 음침한 디멘터들이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어둠을 장악한다면 마법사 구조 버스와 히포그리프 벅빅은 생기있는 모험을 주도한다. 복잡한 런던 시내를 질주하는 이 보라색 3층 버스는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실제 주행 속도는 30마일에 불과했다. 그 옆을 지나는 다른 자동차들이 시속 8마일로 거북이 운행을 했던 것. 스턴트 코디네이터 그렉 파웰은 “행인들은 극도로 느리게 걷도록 훈련받은 스턴트맨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벅빅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태어난 생물이었다. 제작진이 생각한 벅빅은 알바트로스처럼 하늘에서 자유로우나 땅 위에서 서툰 동물. 놀랍도록 발전한 기술에 힘입어 벅빅은 깃털 하나까지 진짜 새처럼 바람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이 판타지 세계에서 인간의 육체를 지닌 존재 중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이는 점술 교수 사이빌 트릴로니를 연기한 에마 톰슨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에마 왓슨이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톰슨은 지독한 근시를 표현하기 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장된 렌즈를 착용하고 출연했다. 소설과 달리 좀더 친근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데이비드 튤리스는 늑대인간이라는 비밀을 감추고 있는 리무스 루핀 교수. 그는 <해리 포터>만의 늑대인간을 고민했던 쿠아론 때문에 털 한 오라기 없고 두발로 걷는 이상한 늑대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두근거리며 기다린 이는 누구보다 새 덤블도어 마이클 갬본이었다. 2편을 찍고 세상을 떠난 리처드 해리스에게 그와 비슷한 아일랜드 억양으로 오마주를 바친 갬본은 “늙은 히피”를 바라는 쿠아론과 뜻이 잘 맞았다. 규칙을 어기고 아이들에게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준 덤블도어는 이전보다 귀엽고 장난기어린 캐릭터로 회춘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새로운 친구와 적들을 맞이한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엄청난 수의 관객 또한 호그와트로 맞아들였다. 지난 5월31일 영국에서 개봉한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첫날 500만파운드가 넘는 수입을 올려 영국영화사상 최고의 날을 기록했다. 지나치게 어둡고 답답하다는 평가가 해리의 모험에 중독된 이들에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일까. 7월16일 해리가 치른 성장의 고통과 모험의 열매가 무엇인지 한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Harry Potter characters, names related indicia are trademarks of and *Warner Bros. Ent. All Rights Reserved.) 시리우스 블랙 역 게리올드먼 인터뷰 “마법을 현실로 만드는 긴장과 정취가 있다” 게리 올드먼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매우 좋아하는 세 아이의 아버지다. 마음먹고 선택하진 않았는데도 악역을 자주 맡게 되었다는 그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서는 재능있고 반항적이었던 해리의 대부 시리우스 블랙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는 차가 막혀 걸어오느라 늦었다는 말로 짧은 인터뷰를 시작했다. -<해리 포터> 원작을 좋아했는가. =열다섯살 먹은 내 아들이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집으로 가져와서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물론 마음에 들었다. 이 시리즈는 아마도 성경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읽고 좋아한 책이 아닐까 싶다.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상업적인 프랜차이즈의 세 번째 영화다.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그리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은 이 영화를 다르게 만들기 위해 어떤 방법을 택했는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세계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나는 그 안으로 걸어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전편과는 다른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영화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이 영화는 감정과 긴장, 정취를 품고 있고, 마법을 현실로 만드는 재능이 깃들어 있다. 그것은 기술이나 물리적 장치가 대신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아마도 관객은 이전보다 훨씬 사실적인 이 영화를 보면서 이전과는 다른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해리 포터를 연기한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오래전부터 당신의 팬이었다고 말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그렇다. 나는 대니얼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시리우스 블랙이 되도록 노력했다. 대니얼과 다른 아역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에 들어갔을 때는, 내가 오히려 겁이 날 정도였다. -악역 연기가 매우 강한 이미지를 남겨왔다. =사실 나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함께 쇼핑도 하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보면 “아니 왜 술에 취해 있지 않은 거죠?”라며 놀라곤 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