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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정성일, 귀여니를 만나다 - 인터뷰 지상중계 [2]

힘되는 네티즌(^^v), 무서운 네티즌(-_-;;) 정성일 l 불편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네편 다 이야기 전체를 놓고 보면 이야기 균형감각은 참 불균질해요. 하지만 귀여니 최대의 장점은 심금을 울리는 상황을 잘 만들어요. ‘절대’ 명장면이라고 할까? 귀여니 l 구성 면에서 미약한 걸 알아요. 국어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구요. (ㅜ.ㅜ) 글을 많이 쓴 것도 아니고, 쓸 때에도 몇 차례씩 탈고해서 올린 글도 아니었어요. 그냥 즉석에서 자판에 손 가는 대로 쓰는 스타일이거든요. 정성일 l 한번 쓰면 안 고쳐요? (@@) 귀여니 l 맞춤법은 고치지만 내용 면에서는 크게 바뀌는 건 없는 거 같아요. 상황들은 어려서부터 머릿속으로 아빠 차 타고 가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상상하는 그런 애절한 상황을 그린 거예요. 그걸 소설 속에 넣을 때는 훨씬 수월했죠. (흠흠!!) 처음 생각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머릿속에 쌓아놓은 것들이니까. 정성일 l 귀여니 소설은 모두 온라인 연재를 한 거잖아요. 쓰다보니까 마지막 엔딩이 바뀌진 않아요? 귀여니 l 엔딩 생각해놓고 쓴 게 <내 남자친구에게>밖에 없어요. 그날그날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바뀌거나, 같고를 말씀드릴 수 없어요. 정성일 l 그럼 그 엔딩까지 가는 과정은, 자신의 결정과 네티즌 독자들의 반응, 양쪽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결정을 했어요? 귀여니 l “누가 멋있어요!” 하면 그 캐릭터 분량을 늘리긴 해요. 하지만 “누굴 죽이지 말아주세요”, “누구랑 누구를 헤어지게 하지 말아주세요” 하면 그럴수록 속에서는 “그래 죽여야겠다”, “헤어지게 해야겠다”는 욕망이 막 들끓어요. (@@) 누구나 그렇지 않나? (누구나 그러지는 않지…ㅠ.ㅠ) 정성일 l 그렇다면 <늑대의 유혹>에서 “태성이를 살려주세요!”라면 어떻게 할 참이었어요? 귀여니 l 태성이가 죽을 것처럼 하고 (소설이) 끊겨요. 난리가 났어요. 일단 살렸죠. 어차피 살릴 의도였고. 그리고 독자들이 안심하고 있을 때, 그때 죽여버렸어요. 마음놓고 있다가 충격이 컸던 거예요. 제 자신이 그걸 즐기는 것 같아요. 정성일 l 네티즌이란 귀여니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팬들도 있지만, 안티 사이트도 있잖아요. 귀여니 l 인터넷 연재 때는 힘되는 네티즌뿐이었는데, 소설을 마치고 제 이름 귀여니가 수면 위로 딱 떠올랐을 때 무서운 네티즌들이 등장했어요. (@@) 정성일 l 많이 울었어요? 귀여니 l 한달이면 하루, 이틀을 다 몰아서 울어버리고 깨끗하게 잊어요. 제 합성사진보고 낄낄대고 웃고 그래요. 정성일 l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자신이나 친구들의 경험에서 빌려오고 인용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밝혀진 가족관계만으로 따지면 신기하게 의도적으로 직접 관계되는 걸 피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데 그걸 오히려 직접 끌어안으면 훨씬 더 자기에게 진솔해지지 않을까요? 귀여니 l 일부러 피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친구 얘기나 그 여주인공의 가치관이나 남자를 보는 눈, 아니면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 혼나고 맞고 이런 건 제 얘기를 많이 닮았는데 제일 가까운 가족 얘기는 반대로 피하게 되는 거예요. 가족 이야기는 감싸안고 보여주기 싫어하는 게 있나봐요. 정성일 l 소설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느껴져요. 귀여니 l 엄마가 지금은 안 그런데, 음, 초등학교, 중학교 때 차가운 편이었어요. 집안에 힘든 일이 많아서 차갑고 잘 웃지 않으셨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린 맘에 엄만 왜 나한테 왜 이렇게 다른 엄마들처럼 안 해줄까하며 미움을 차곡차곡 쌓아뒀었어요. 어쩌면 그런 게…. 정성일 l 귀여니 비판은 이모티콘에 몰려 있는데, 저는 그 이모티콘이 비주얼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이야기 중간에 시각적인 클로즈업 숏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할까! 이모티콘의 사용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내리나요? 귀여니 l 슬프고 엄숙하고 진지한 분위기에는 이모티콘을 안 쓰죠. <늑대의 유혹> 때 쓰고 보니 웃겨서 지웠어요. 반대로 코믹한 표정에서는 주인공이 이렇게 눈을 질끈 감고 입을 동그랗게 벌려요. (*0*) 근데 그걸 글로 표현하면 죽어요, 많이 죽고 재미도 없어요. 주인공이 뜨악 하는 순간이나, 놀라는 순간이나 위기에 부딪쳤을 때 그때 주로 많이 사용해요. 정성일 l 만약 재판을 내면 원래대로 단락 구분을 바꿀 생각은 있나요? 인터넷 버전이랑 책이랑 단락 구분은 좀 다른데 호흡이 다르다는 느낌이 있어요. 복원한다고 할까. 귀여니 l 근데 저는 그때의 귀여니를 너무 많이 잃어버려서 자신이 없어요. 정성일 l 과거의 귀여니와는 일정 부분 작별을 한 건가요? 귀여니 l 작별한 거보다 작별을 시키더라구요. (ㅠ.ㅠ) <도레미파솔라시도> 때부터 슬슬 시작하고 <내 남자친구에게>에서 완전히 단절됐어요. 순정파(*^^*)와 남성의 우정에 대한 판타지 정성일 l <내 남자친구에게>가 거창하게 말하자면 제2의 데뷔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귀여니 소설에만 안 나오는 인물이 하나 있어요. 우등생이 전혀 나오지 않아요. 고의적으로 피한달까…. 귀여니 l ㅋㅋ *^^* 음, 그건 아마 제가 우등생을 싫어해서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나랑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우등생에 대해 잘 알지도 않고 특별히 친하게 지낸 적도 없어요. 제 친척들이 카이스트 나오고 전교 1, 2등 하고, 그런데 저만 유독 달랐어요. 엄마가 할머니댁 갔다오면 저희한테 화풀이를 하세요. 압박이 정말 심하거든요. 그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을 소설에 옮기면 끔찍하잖아요. 정성일 l 줄기차게 귀여니 소설의 주인공 남자들의 공통점은 몸짱, 얼짱이지만 동시에 순정파라는 점이에요, 순정파 남자라는 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귀여니 l 직접적으로 너밖에 없다고 덤비면 징그럽죠. ㅠ.ㅜ 은성이나 제 소설 남자들처럼 짓궂고 장난스럽고 바람도 피울 것 같지만, 정작 밖에 나가서 아무리 예쁜 여자가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는 남자는 모든 여자들의 이상인 것 같아요. (흠흠!!) 정성일 l 근데 그 몸짱, 얼짱한테 공부짱을 시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귀여니 l 그렇게 하면 우등생이잖아요! 하이틴 만화 보면 남자들이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자상해요. 은성이처럼 괴팍하다기보다 여자 챙겨주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데 그런 애들한테 매력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어요. (몰랐지?) 저는 좀 약간 무식한 타입으로 설정해버렸어요. 정성일 l 항상 드라마의 결정적 결단은 신기하게도 나이트에서 내립니다. 귀여니 소설 속에서 나이트는 성인식을 치르는 통과제의의 장소로 나오고 있어요. 귀여니 l 그때는 진짜 나이트를 가보고 싶었어요. 안 가보고 감히 쓴 거죠. 노는 아이들이라면 나이트에 가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 그 나이에 제일 수위가 높은 곳이 나이트였어요. △ 정성일 정성일 l <엽기적인 그녀>는 보았습니까? 귀여니 l 끝까지 안 보고 처음만 봤어요. 이상하게 <엽기적인 그녀>는 다 볼 기회가 없었어요. 그리고 영화관 가서 영화보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돼요. 고등학교 때는 일년에 한두번 정도 영화 보러 갔나? (음, 너무하는군!!) 정성일 l 소설 쓰다가 참고하는 건 없어요? 귀여니 l 저는 따라하는 게 싫었어요. 과거에 내가 한 걸 따라하는 건 몰라도, 남들하고 똑같은 게 너무 싫어서 교복도 남들이랑 달라야 했어요. 짧은 치마 유행할 때는 밑단을 뜯고, 교복바지 좁은 통이 유행하면 넓혀서 입고 그래서 선생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어요. (으쓱!) 정성일 l 어른이 됐으니까 직접적으로 질문하지요. 귀여니 소설을 보면 섹스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단순히 징그럽다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라 공포가 있어요. 귀여니 l 등장도 안 하죠. 지금은 아닌데, 그때는 하면 큰일나는 걸로 알았어요. 정성일 l 지금도 큰일나요. (흠흠!!) 귀여니 l 그래요? <그놈은 멋있었다>랑 <늑대의 유혹> 썼을 때는 남자랑 뽀뽀도 안 해봤을 때예요. (그럼 그 이후는?) 간혹 나와도 여주인공에 있어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정성일 l 그런데 <그놈은 멋있었다>는 키스로 시작해서, 에이즈, 지은성과 김효빈의 상상섹스, 그리고 동거에 이르기까지 섹스에 대한 암시가 즐비한데 비해 <늑대의 유혹>에서는 무언가 그런 접촉 자체를 의식적으로 조심스럽게 피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사실 <늑대의 유혹>에는 근친상간의 테마가 있는데 말입니다. (음, 너무 많이 나가나?) 귀여니 l <그놈은 멋있었다> 때는 솔직했고 <늑대의 유혹> 때는 솔직하지 못했던 거죠. ㅠ.ㅠ 정성일 l 귀여니의 연애는 줄기차게 삼각관계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군!!) 삼각관계에 대한 어떤 판타지가 있나요? 삼각관계는 (지금 소녀들의) 이상적 연애인가요? 귀여니 l (생각! 생각!) 음, 제가 실제로 심각하게 삼각관계에 빠진 적도 없고, 그냥 가볍게 얽힌 적은 있었지만…. 이상적이라기보다 둘보다 셋이 얽혀서 사랑하는 게 훨씬 재미있으니까, 관심을 더 유발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정성일 l 그 반대로 남성의 우정에 대한 판타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귀여니 l 전 어릴 때부터 사랑을 위해서 먼저 달려오는 남자보다 친구를 택하는 남자가 더 멋있어 보였고, 지금도 그래요. 이상형을 만날 남자가 봐서 멋있는 남자라고 하는 건 사랑보다 우정을 중요시하는 남자라는 뜻이거든요. 여자들도 실제로 친구를 팽개치고 내게 오는 남자를 좋아할 거 같지 않아요. (끄덕 끄덕) 자기 남자가 남자들 세계에서도 으뜸으로 인정받길 바라요. (0_*) 정성일 l 이상적인 남성의 우정 판타지는 어떤 모습인가요? 귀여니 l 드라마에서 예를 들면 <해피 투게더>에서 이병헌씨가 당하고 있을 때, 형을 적대시하던 송승헌 씨가 와서 함께 맞아줬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거예요. 귀여니 소설의 컨셉 : 사랑(●^^●) 혹은 간청 정성일 l 귀여니 소설이 갖고 있는 감정의 가장 큰 컨셉은 무엇입니까? 귀여니 l 사랑이에요. 부수적으로 따르는 게 우정이고. 그리고 그 둘이 결코 평탄하게 흐르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퍼지는 것. 주인공들의 불우한 환경이나 상황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걸 20대가 하기에는 용기를 내야 하거든요. 20대가 그렇게 싸우고 맹목적으로 사랑하면 주변에서 “철들만도 한데 왜 저럴까” 할 텐데, 10대에만 거침없이 나올 수 있는 행동이죠. 정성일 l 저는 귀여니 소설의 가장 큰 감정적 힘은 ‘간청’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에 대한, 우정에 대한 간청. 애절한 거와는 다른데, 제발 절 사랑해주세요, 제발 절 버리지마세요 하는. 저에게는 그게 마음을 움직입니다. 귀여니 l 음, 스스로 몰랐던 거예요. 0_0 한번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정성일 l <그놈은 멋있었다>의 지문은 이상하게도 자세히 묘사하는 건 항상 표정이지 심리는 아니에요. 심리는 쓰여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귀여니 l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한테 그 능력이 없었던 거죠. (겸손!) 나한테 솔직히 중요했던 건 무엇보다 외모였거든요. 그래서 은성이 외모를 표현하는 데에만 매달린 것 같아요. 정성일 l 글을 쓸 때 습관은 없어요? 귀여니 l 음악을 들으면서 써요. <그놈은 멋있었다>를 쓸 때는 롤러코스터의 <습관>을 들었는데, 영화에도 한예원이 좋아하는 노래로 나와요. 제가 전학 오기 전날 친구들이랑 노래방 가서 처음 술 마시고 막 울었는데 친구들이 제가 울며 부른 <습관>을 녹음해줬어요. 전학 오고 그걸 만날 이어폰 꽂고 들으면서 울었거든요. <늑대의 유혹> 때는 음악 사이트에 가서 서지원의 <내 눈물 모아>랑 슬픈 노래만 11곡을 모아서 번갈아 들었어요. <도레미파솔라시도> 때는 <네 멋대로 해라> O.S.T를 들었고 <내 남자친구에게>는 <짬뽕> 들었어요(이 노래는 영화 <그놈은 멋있었다>의 최고 명장면이자 정다빈의 생애의 명장면이다). 정성일 l 그런데 의외로 귀여니 소설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많아요. 귀여니 l 비밀인데, @@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김승표가 술 먹고 땅콩 쏟는 에피소드는 우리 엄마가 했던 일이거든요. 제 소설 주인공들이 평소에 차갑다가 술 마시면 귀여워지는 건 엄마랑 닮았어요. *^^* 정성일 l 두편의 영화에는 이상하게 귀여니 소설들을 읽다, 읽다 결국 포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해빈의 죽음을 왜 그렇게 여자들한테는 가르쳐주지 않고 남자들끼리만 알아야 하는 비밀인가, 하는 대목이에요. 이건 나도 좀 이상해 보입니다. 귀여니 l 그건 살아남은 한성이에 대한 의리예요. 해빈이가 죽은 건 한성이가 은성이를 말려서라고 남자아이들은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떠벌릴 만큼 입이 가벼운 남자들이 아닌 애들인 거지요. 정성일 l 귀여니 소설을 보다보면 남자들의 세계와 사람들의 세계, 두 세계가 있는 것 같아요.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가 아니구요. 그건 참 이상한 이분법입니다. 여자들의 커뮤니티는 남자 커뮤니티처럼 결속돼 있지 않아요. 귀여니 l 제가 남자였으면, 남자의 진짜 생각, 진짜 생활, 진짜 행동을 알면 그렇게 못 썼을 거예요. 제가 여자라 다른 성별에 갖는 환상이구요. 고리타분하지만,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하고, 남자다운 남자는 절대 배신하면 안 되고 남자끼리 같이 있을 때 빛이 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남자들은 흔히 여고에 신비감을 갖는다는데, 저는 이른바 논다는 남자애들한테 신비감을 가졌고 걔들이 흩어지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어요!

SICAF2004 초청작 - 장편

도쿄 갓파더즈 東京代父 곤 사토시 l 일본 l 2003년 l 90분 l 아시아의 빛 제목에서 <대부>의 일본 애니메이션 버전쯤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도시의 뒷골목, 밑바닥 인생, 총격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작품은 말하자면 ‘세 노숙자와 아기’에 가깝기 때문. 눈 내린 크리스마스, 노숙자인 여장남자 하나와 긴, 미유키는 쓰레기 더미에서 아기를 발견한다. 함께 발견된 명함과 사진을 단서 삼아 아기의 부모를 찾아나서는 세 사람. 이 도쿄의 대부, 대모들이 유괴 사건에 휘말리고, 타인을 돕기도 하며, 각자의 과거와 조우하는 동안, 무정한 겨울의 도시 곳곳에서 사람 사는 온기가 피어난다.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의 감독 곤 사토시의 신작. 전작들에서 보듯 다수 일본 애니과 다른 사실적인 이미지는 여전하나, 꼼꼼하게 연출된 아기자기한 에피소드 릴레이, 캐릭터의 개성과 스크루볼코미디식 웃음이 절묘한 하나의 퍼즐을 이루며 한층 푸근하고 가슴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퍼펫툰 무비 The Puppetoon Movie 아놀드 레이보비트 l 미국 l 1996년 l 76분 l 제3의 앵글 영화 촬영장, 공룡 어니는 감독 검비에게 조지 팔이 자신들, 곧 인형을 사용한 애니메이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여주기로 한다.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조지 팔은 “월트 디즈니가 미국인들에게 그랬듯, 유럽인들에게 판타지의 상인”이었던 애니메이션 감독. 1960년 영화 <타임머신>으로도 알려진 그는 할리우드 최초의 인형애니메이션스튜디오를 만들고, 단편 시리즈 <퍼펫툰>을 제작했다. 전당포 안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피아노와 트럼펫 등 악기들과 흥겨운 즉흥 연주를 벌이는 소년을 그린 〈Jasper in a Jam>, 저음으로도 멜로디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튜바를 다룬 〈Tubby the Tuba> 등 악기를 불 때 볼록해지는 볼, 눈꺼풀까지 꼼꼼하게 만든 인형들의 풍부한 표현력이 놀라운 조지 팔의 1930∼40년대 작품들을 담고 있다. 헤어 하이 Hair High 빌 플림턴 l 미국 l 2004년 l 75분 l SICAF 시선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 <뮤턴트 에일리언> 등 이미 국내에 소개된 장편들을 통해 기발한 상상력을 과시한 미국의 독립 애니메이터 빌 플림턴의 최신작. 전학 온 고교생 스퍼드는 학교의 스타인 로드와 체리 커플의 비위를 거스른 탓에 체리의 시중을 들게 된다. 학교의 여왕인 체리와 독서를 좋아하는 스퍼드. 어울릴 것 같지 않던 둘은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지고, 졸업 파티에 같이 가기로 한다. 하지만 분노한 로드의 음모로 사고를 당한 이들 커플은, 1년 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파티에 나타난다. 성과 폭력을 거침없는 농담 및 판타지의 재료로 삼곤 하던 플림턴 특유의 도발 수위는 전작보다 낮아진 듯. 대신 부풀린 헤어스타일처럼 과장된 스타일과 로큰롤의 시대로 기억되는 1950년대와 당시 미국 청춘들에 대한 독특한 오마주를, 감독이 직접 손으로 그렸다는 개성적인 펜화로 만날 수 있다. 벨빌의 세 쌍둥이 Les Triplettes de Belleville(Bellville Rendez-vous) 실뱅 쇼메 l 프랑스 l 2002년 l 80분 l SICAF 시선 <벨빌의 세 쌍둥이>는 참 희한한 장편애니메이션이다. 러닝타임 내내 대사가 거의 없는 데다 본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30분은 기다려야 하기 때문.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샹피옹은 내성적인 소년. 샹피옹이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자전거를 선물하고, 성장한 샹피옹은 ‘뚜르 드 프랑스’ 대회를 목표로 훈련한다. 하지만 대회 도중 샹피옹이 납치되자, 손자의 행방을 쫓아 벨빌에 이른 할머니는 노(老) 재즈 트리오 ‘세 쌍둥이’의 도움을 받아 구출작전에 나선다. 마른 몸에 다리 근육만 돋보이는 샹피옹처럼 과장된 캐릭터와 세밀한 삽화 같은 핸드드로잉의 독특한 이미지, 진공청소기 같은 일상의 요소를 악기로 삼는 벨빌 자매들을 비롯해 음향과 재즈풍 음악으로 대사를 대신한 연출 등 무성영화의 매력과 향수를 되살리는 개성 만점 애니메이션. 케이트-말괄량이 길들이기 Kate-The Taming of the Shrew 로베르토 리오니 l 이탈리아 l 2004년 l 77분 l 패밀리 스퀘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각색한 줄거리는 익숙하지만, 색색의 종이로 만들어진 동물 인형애니메이션이라면 볼거리가 다르다. 파두아 부호의 맏딸 카테리나(케이트)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를 비판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당찬 아가씨. 구혼자가 없어 아버지의 원망을 사던 그녀 앞에, 베로나의 바람둥이 페트루치오가 나타난다. 베니스의 카지노에서 재산을 탕진한 그는 지참금이 많은 데다 도발적인 카테리나에게 끌려 구혼한다. 카지노 쇼 무대에 나서고, 남자들을 검술로 물리치기도 하는 카테리나는 원작에 비해 현대적인 여걸 캐릭터. 수상 도시 베니스, 화려한 의상 등 정교한 세트와 인형, 검술과 추격전의 액션 연출 등 ‘페이퍼모션’이라 불리는 로베르토 리오니의 형형색색 종이 스펙터클과 유머, 음악과 춤과 수다가 넘치는 작품이다.

“고생하며 찍은 것밖에 생각 안나요”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의 현신, 양동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 무작정 열심히 찍었다. 고생하며 찍은 것밖에는 생각 안난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영화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양동근(25)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연기파 배우로 차곡차곡 실력을 쌓아가고 있는 그의 매력이 한껏 살아 숨쉰다. 맨손 하나로 일본 무술 세계를 평정한 최배달의 삶을 그린 이 영화에서 양동근은 목숨을 건 승부사의 모습을 강렬한 눈빛 연기로 잘 그려내고 있다. 영화 후반부 갈대가 울창한 무사시노 벌판에서 최배달과 대결을 펼치는 일본 무도 수장 가토로 나오는 가토 마사야는 양동근에 대해 "눈에서 느껴지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최배달 역할은 양동근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치켜세웠다. 영화에서 양동근은 오줌싸개로 놀림받을 때 굴욕감이 치밀어오르는 내면 표정부터 그 어떤 상대도 단번에 제압해버릴 만큼 화산처럼 분출하는 강인한 남자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연기를 오롯이 소화해내고 있다. 양동근이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은 "동근이 니가 맡아줘야겠다"며 전화를 먼저 건 양윤호 감독의 간곡한 부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지난 98년 영화 <짱>에서 처음 만났다. 양 감독은 "동근이는 타고난 배우다. 영화에 대한 이해, 순간의 순발력이 탁월하다. 그러면서 깊이가 있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뜻이 잘 통하는 관계라 촬영작업은 어려울 때는 어려웠지만 대체로 편하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영화나 TV드라마에서 보여준 활달한 모습과는 달리 실제 양동근은 무뚝뚝하기로 소문나 있다. 워낙 말수가 적은데다 입을 열었다해도 두 마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좀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그의 이런 모습은 지난 2일 오후 서울극장에서 <바람의 파이터> 시사회가 끝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고수머리의 양동근은 티셔츠 차림의 편안한 복장에다 귀걸이를 하고 피곤한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쏟아지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요리조리 비켜갔다.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장면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어색한 듯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면서 "특별히 좋고 안 좋고 할 게 있나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딨겠습니까"라고 피해갔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해 좌중을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액션 연기나 일본어를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느냐고 물으니 "액션은 무술감독들이 잘 지도해줘 어려움이 없었고, 일본어 역시 일본어 선생이 잘 가르쳐줘 힘들지 않았다"고 특유의 단답형 답변으로 일관했다. 아무튼 <바람의 파이터>는 <해변으로 가다>, <수취인불명>, <해적 디스코왕되다>, <와일드 카드>, <마지막 늑대> 등으로 이어지는 양동근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게 많기 때문이다.(서울=연합뉴스)

<얼굴없는 미녀> - 김인식 감독이 말하는 <얼굴없는 미녀>의 네 공간

소실점을 담보한 공허함의 통로 - 대학병원 구름다리 건물과 건물을 잇는, 즉 정신병동으로 향하는 긴 구름다리. 그곳에 창백한 지수가 하오의 햇살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있다. 그 긴 복도에 침울하게 서 있는 두 남자. 석원이 죽은 아내의 애인에게 휴대폰을 건네고 있다. 이젠 내게 아무 의미없는 물건이라는 말과 함께. 때마침 공명되어 들려오는 하이힐 소리. 석원의 아내 희선의 환영이 걸어오고 있다. 희선은 남편인 석원과 애인이었던 두 남자의 등을 어루만지다 지수를 스쳐 지나 천천히 사라진다. 영화에서 구름다리는 이렇게 처음 소개된다. 심도있는 그 긴 공간을 향해 걸어가는 영화 속의 인물들.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는, 마취과 의사인 석원 아내 희선의 발자국 소리, 힘없이 동료의사인 윤수를 찾아가는 석원의 발소리, 텅 빈 공간을 또박또박 걸어가는 지수의 공허한 하이힐 소리…. 이 영화에서의 발소리는 아주 중요한 사운드 컨셉으로 자리잡고 있다. ‘얼굴없는 미녀’의 모든 인물들은 끊임없이 소실점을 향해 걸어들어가고, 혹은 그 소실점에서 걸어와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 페이드인되면서 복도를 걸어오는 민석. 영화에서 구름다리는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는 통로처럼, 구름다리는 각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고독에 갇힌 그 남자의 자리 - 석원의 현재 공간, 클리닉 인간은 왜 외로워하는가?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독이라는 그 거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진정한 사랑, 우정, 이러한 것들로 외로움이라는 갈증이 해갈될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은 진정 소통할 수 없는 것일까? 난 어느 순간부터 고독이라는 놈과 친해지기로 했다.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할 것이므로. 석원은 고층 건물들로 빽빽이 들어선 24층 펜트하우스에서 침대에 홀로 누워마스터베이션하는 고독한 모습의 석원은 세상과 고립된 외딴 섬처럼 혼자 살아간다. 그를 찾는 환자들은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는 유리계단을 밟고 올라온다.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피아노 계단소리를 들을 때 석원은 비로소 외부와 소통한다. 상처받은 고독한 영혼들이 석원 앞에 앉아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석원 역시 그 환자들과 다름없는 고독한 영혼일 따름이다. 석원의 고독한 모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클리닉 내부 중정에 앙상한 나무들을 배치했고, 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유리계단 올라오는 사람들을 석원이 볼 수 있게 했다. 가끔 그가 클리닉 테라스로 나와 담배를 피울 때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허공 위에 떠 있는 셈이다. 석원은 고독이라는 감옥에 갇힌 캐릭터로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그를 찾아오는 지수가 그의 유일한 탈출구임을 깨닫게 하고 그녀의 사랑을 붙잡기 위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건너는 석원의 심정을 그려보고 싶었다. 알 수 없는 그 여자의 텅 빈 여백- 지수의 현재 공간, 서재 느린 시간, 확실치 않는 계절, 바다는 조용하다, 요트 위의 한 남자, 해변에 선 채 스카프처럼 흔들리는 여자를 본다. 여자, 남자의 반듯한 미소가 마음에 든다.그런데 그 남자의 이름은? 그 여자의 이름은? 그래 생각나겠지, 조금만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보자. 영화 도입부 지수가 서재에 틀어박혀 쓰고 있는 의문형 소설의 일부다. 이렇듯 지수는 과거의 희미한 기억에 매달려 그 과거를 생각해내려고 미친 듯이 글을 쓴다. 그때 지수 서재의 책들, 와인 잔과 투병한 유리병들, 지수의 액세서리, 조그마한 인형들이 방 안 가득 떠오른다. 그때 남편인 민석이 노크를 하고 나타나자 모든 사물들이 지수에게 떨어져 피범벅이 된 지수, 짐승처럼 비명을 지른다. 석원을 만나기 전 지수의 공간은 지수의 불분명한 의식처럼 분열적이다. 남편인 민석의 내레이션으로 보여지는 지수의 외부 세계도 공간이 빠르게 바뀌면서 어디가 어딘지 불분명하다. 1년 뒤 지수가 석원을 다시 만나고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지수 집의 외관이 보여지고 침실, 거실, 그리고 그녀가 걷고 있는 거리, 건물 내부의 공간들이 구체화되며 나타난다. 하지만 지수가 위치한 그 모든 공간들은 텅 비어 있다. 그녀가 내딛는 날카로운 하이힐 소리만 메아리로 들려올 뿐.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울려퍼지는 하이힐 소리. 지수의 도심의 밤과 낮, 그녀가 타고 있는 차 안에서조차도 거리는 텅 비어 있다. 그녀가 시선을 주는 사진들마저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끝없이 밀려오는 공허함, 자아를 상실한 한 여자의 심리를 그렇게 난 표현하고 싶다. 무의식에 조각된 사랑과 실연의 장소 - 지수의 회상 공간 지수씨, 지수씨는 지금 천천히 기억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지수씨는 가장 아픈 기억의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지수씨는 천천히 그 문을 열고 걸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주 천천히…. 석원의 그 주술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최면으로 빠져들어가는 지수. 그리고 보여지는 지수의 그 은밀한 과거의 공간들. 이 영화는 극도로 대사를 자제하고 내레이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난 촬영감독인 김우형씨에게 이 영화에 핸드헬드는 없다고 처음부터 말했다. 난 핸드헬드로 흐르는 이미지보다 견고하고 단단한 이미지들을 원했다. 출렁이는 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스키장의 백색의 세계. 숲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까지 잡고 싶었다. 최면 상태의 지수의 공간들은 지극히 자연과 밀착되어 있다. 그 넓고 청아한 공간에서 지수는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지고 또한 갑작스런 실연을 당한 뒤 처절하게 그 자연 속에서 흐느낀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회상 부분인 떠나간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채 삶을 포기하고 끝없이 담배와 술을 마시는 회상에서 또 회상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들 그녀의 모습은 카메라가 고정된 채 원신 원컷으로 강렬하게 찍히길 바랐다. 무드로 밀고가는 이 영화의 형식 속에서 영화가 끝난 뒤 정말 분위기만 남는 그런 영화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한편의 화보집을 보는 것처럼 이 영화의 영상들이 강렬하게 관객에게 각인되며 영화 속 캐릭터들의 고독이 확고하게 전달되기를 원했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감독 장현수

장현수 감독이 로맨틱코미디를? <어바웃 아담>의 리메이크라고? 주연이 이병헌이랑 최지우야? 모두가 의아해했다. 사실 <걸어서 하늘까지> <게임의 법칙> 그리고 <본투킬> <남자의 향기>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속에서 처절한 액션과 비극적 로맨스를 아우르던 장현수 감독의 ‘일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택시 기사 삼총사의 투박하고 비루한 일상을 그린 훈훈하고 튼실한 독립영화 <라이방>이 있었다. 당시 장현수 감독은 개인 투자자를 모으고 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어렵사리 제작비를 마련했고, 세 배우들과 1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는 실험적 시도를 했더랬다. 그 다음 영화를 <누구나 비밀은 있다>로 낙점하면서, 장현수 감독은 다시 한번 ‘극과 극’ 체험에 도전했다. 제작사에서 기획했고, 내로라 하는 스타들로 진용을 짠, 시스템 안의 영화, 게다가 그에게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는 로맨틱코미디였다. 그는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걸까. ‘액션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답답하고 지루했다는 그는 <라이방>을 통해 그리고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통해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장현수는 잊어달라고. 시사회 무대 인사 자리에 불참해서 놀랐다. 프로듀서랑 나랑 극장으로 오는 중에 꽉 막힌 길로 잘못 들어서 늦은 거다. 아무래도 시간 맞춰 가기 힘들 것 같아서, (이)병헌이한테 전화 해서 대신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했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직도 말 안 해준다. 영화가 성에 안 찼거나 무슨 불화가 있어서인 줄 오해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 오해에 대해서 나는 정태원 사장을 변호하고 싶다. 정 사장은 영화에 대한 열정도 많고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상업영화, 오락영화에 대해선 아이디어가 많고, 감각도 있어서, 현장에서 이런저런 제안들을 하는 편인데 그게 감독에 따라선 받아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도 한때 현장에서 발칵했던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말이 와전된 거였다. 지금은 아주 잘 지낸다. 이 영화 만들고 나서 기자들 만나기가 두렵다고 했다던데. 그전까지는 의미나 메시지를 챙기려고 많이 노력한 편이었지만, 이번엔 그런 부분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최지우 파트에서 두드러지는데, 재미를 주려는 목적이 가장 컸다. 애초의 의도대로,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79% 정도는 만족한다. 나머지 21%는 의례적인 아쉬움 같은 거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10을 갖고 시작해서 그중 몇개를 남기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여건좋은 외국에서야 10을 갖고 시작해도 20으로 만들 수 있지만, 한국에선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깨지고 잃는 부분이 생긴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가장 아쉽게 느껴지나. 촬영을 40회 정도 했다. 장소가 국한돼 있기 때문에 찍을 만큼 찍었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10번쯤 더 찍겠다는 생각으로, 더 공을 들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방> 때는 배우들과 1년 반을 함께 지내면서 연극도 하고, 미리 호흡을 많이 맞췄다. 상업적인 배우들과 일하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모여서 리딩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던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나. ‘의외의 선택’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나비>를 연출하려고 준비하던 때가 있었다. 그맘때 정태원 사장이 <어바웃 아담>의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리메이크 생각 있으면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게 벌써 3년 전인가. 그런데 <나비>에서 손떼고 나오고 나서, 문득 <어바웃 아담> 생각이 났다. 이번 기회에 확 바꿔볼까, 재밌는 영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라이방> 뒤끝이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고. 다시 영화를 봤는데, 전보다 훨씬 재밌었다. 도덕적 문제를 넘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도덕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어질러보고도 싶고 그렇지 않나. 잘하면 그런 점이 승부처가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진행하다 보니 관객이 도덕에 예민하다는 걸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피해가되, 유쾌하게 달려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다. 그래서 수현이란 인물에 어느 정도의 비현실성을 가미하느냐를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그게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수현을 약간은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는 것이 부도덕한 영화라는 지탄을 피할 수 있는 길이겠다 싶었다. 가령 수현은 사람 마음을 너무 잘 읽고,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러지 않나.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로 몰고가면, 들키니까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이 은근히 묻어나게 했다. 병헌이가 세심하게 연기를 잘해줬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부담은 없었나. 우리 식으로 각색하는 과정에 생각한 포인트는. 원작보다 낫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이 보기에 원작보다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한 거다.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결말일 텐데, 나는 수현이 자매들 곁에 남는 게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더라. 서부영화에서 악당을 평정하고 나면 주인공은 떠나야 한다.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면 퇴장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성과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처녀들의 저녁식사> <싱글즈>의 연장선상에 두는 견해도 있다. 그런 비교항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 영화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는 그런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담 옆을 걸어가는 사람한테 자꾸 담을 넘어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가정주부가 독립적인 삶을 결정하는 결론은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메시지를 주려던 게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게 잘사는 거다, 라는 걸 보여주려던 게 아니다. 굳이 하고자 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라는 것 정도다. 이번 작업을 통해 <게임의 법칙>의 박중훈이나 <남자의 향기>의 김승우의 예처럼 기존 이미지와 무관하게 새로운 면모를 이끌어냈다 싶은 배우가 있나. 이병헌이 그렇다. 처음에 시나리오 주니까 하고 싶어하면서도 선뜻 결정을 못하더라. 그래서 ‘나도 하는데 네가 왜 못 하냐’, ’그렇게 계속 무겁게 가다가 최민수 될래’ 그랬다. 그렇게 꼬박 한달을 설득했다. 워낙 리얼리티를 따지는 친구지만, 한번쯤 가벼워져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권했고, 결과적으로 잘해낸 것 같다. 여배우 셋이 다 열심히 했지만, 이번 기회에 최지우를 다시 보게 됐다. 닫혀 있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더라. 그래서 같이 작업하는 게 즐거웠다. 처음 60%는 같이 만들어갔다면, 나머지는 혼자 다 했다. (웃음) 여러 테이크 가다보면, 어느 순간 딱 맞는 지점을 찾아주더라. <누구나…> 이전에 <왕조의 눈>과 <나비>의 연출자로 내정돼 있었다. <왕조의 눈>은 7개월 정도 작업했는데, 제작자랑 방향이 많이 달랐다.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같은 영화들이 줄줄이 깨진 뒤라 나는 속을 먼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대표는 70억원짜리 영화인 만큼 외양을 많이 생각했다. <나비>는 ‘감동과 눈물’을 주는 영화가 우르르 기획되던 때인데, 나로서는 삼청교육대라는 사회적 이슈와 남녀의 멜로를 만나게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남자의 향기> <라이방> <누구나…>로 이어지는 최근 행보를 보면, 전작과 아주 다른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내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남자의 향기>가 잘 안 되고 나니까, 결과 좋을 것 같은 상업영화만 기획하게 되더라. 허무했다. 그래서 아예 망하러 가보자, 지금 아니면 못 만들 영화를 만들어보자 했던 게 <라이방>이다. 그러고나니 떳떳해졌다. 그렇게 힘든 영화 했으니 다시 상업영화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나는 늘 장선우 감독의 자유스러움이 부러웠다. 여러 장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보기 좋았고. 그런데 나를 보는 시선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완성된 감독도 아니고 한 장르만 고집할 생각도 없는데. 액션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싫었던가 보다. 지루했다. 그렇게 한 카테고리에 갇히는 게 싫더라. 로맨틱코미디는 해보니 어떻던가. 하는 동안 재밌었는데, 두번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웃음) 성에 안 차더라. 그 안의 감정이 나한테 충분한 즐거움을 못 주는 것 같다. 같이 영화를 보다 사람들이 웃는 걸 봐도 별로 쾌감이 없다. 가슴을 치는 느낌이 부족하달까. 다음 고지는 어디인가. 남자들끼리의 사랑을 그리고 싶다. 동성애 영화와도 다르고, 버디 영화와도 다른 느낌의 영화. 여배우들과의 작업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여자를 모르고 이상하게 표현하는 감독으로 찍혀 있는 만큼(웃음) 나를 많이 열었고, 최대한 교감하고 대화하려 했다.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남자배우들과의 작업이 즐겁고 또 그리운 게 사실이다.

프리머스로 불거진 층무로 세력 재편 바람

방학을 맞아 가벼운 ‘틴 무비’들이 스크린을 장악한 최근 2~3주 동안 스크린 밖의 충무로는 여느 때보다 무거운 이야기로 분주했다. (‘틴 무비’ 식으로 말하면) 충무로의 ‘짱’들끼리 한판 붙었기 때문이다. 투자·배급에서 충무로의 두 짱은 씨네마서비스(이하 CS)와 씨제이엔터테인먼트(이하 CJ)이다. 두 영화사의 지난해 배급물량을 합치면 전체 영화의 70%에 이른다. 자본력은 대기업 계열사인 CJ가 앞서지만, 다른 대기업인 동양과 롯데 그룹의 영화계 진출을 견제하려는 CJ는 이따금씩 CS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그래서 다른 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1·2위 회사간의 평화친선 관계가 이어져오다가 최근 신생 멀티플렉스 극장인 프리머스의 소유권을 놓고 두 회사가 결국 붙고 말았다. 워낙 덩치 큰 공룡의 싸움이다보니 군소 제작자들의 촉각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먼저 충무로 토종인 강우석 감독이 이끄는 CS쪽이 제작가협회에 에스오에스를 쳤다. CGV 극장체인을 갖고 있는 CJ가 프리머스마저 거머쥐면 사실상 독점 상태가 형성돼 제작 상황이 더 나빠질게 뻔하니 CS에 지원사격을 해달라는 거였다. 여기엔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이 잇달아 영화계에 뛰어들었다가 빠져나간 지난 8년 동안 강 감독이 ‘충무로 파워 1위’를 유지하며 충무로를 지켜왔다는 ‘영화인’으로서의 자부심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반응은 CS쪽의 기대와 달리 냉정했다. 제작자들의 입장은 ‘CJ 독점 방지론’과 ‘CS 지원 불가론’ 사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CS 지원 불가론’은 “당장은 극장이 없는 CS가 프리머스를 가지는 게 힘의 균형상 좋지만 3년 뒤 CS가 프리머스를 되팔 거라는 얘기가 오가는 상황에서 제 3자가 끼어들 만큼 둘 사이의 차별성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논리였다. 제작가협회 차원에서 통일된 입장이 나오지 않았고, 그 와중에 한 영화인 상가에서 마주친 차승재 사이더스 대표와 강우석 감독이 ‘CS 지원 불가론’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 프리머스가 CJ로 넘어갈 가능성이 커지자 한쪽에선 “제작·배급과 극장업의 겸업을 금지한 40년대 미국의 반독점법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작자들의 ‘CJ 줄서기’가 시작됐다는 말도 나돌았다. 독점 논란에 부닥친 CJ와 충무로의 지원을 얻는 데 실패한 CS는 재협상에 나서, CS가 프리머스 극장의 지분을 일부 양보하고 3년간 소유권을 가진 뒤 CJ에 되판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계약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결국 해프닝처럼 됐지만 이번 사건은 앞으로 이어질 영화계 강자들의 합종연횡의 전초전을 보여준 셈이다. 이 사태로 절대 강자 강우석 감독의 위치가 흔들렸고, 동양과 롯데 그룹은 예정대로 세력확장을 꾀할 것이다. 바야흐로 강호에 새로운 세력 재편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곳엔 우리의 꿈이 있었다

강의 상류엔 우리의 꿈이 있었다. 강의 위쪽으로 주욱 올라가면… (물론 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아니다. 우린 연어가 아니니까)… 버스 타고 올라가 조금 걸어들어가면 강의 상류와 만난다. 오후 다섯시가 되면 동네의 건아들이 그곳에 다 모였다. 내가 굳이 건아라고 표현을 하는 이유는 구체적 확인은 없었지만 그곳에 여자 학우들의 모습은 단 한번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곳에 모인 건아들의 맘속에 한 가지의 소망들로만 가득했다. 강을 건너리라~. 다섯시 반이 되면 강의 상류 그 위의 물벽을 틀어막고 있는 댐의 일일 방류가 시작된다. 그러면 상류의 물살은 몇곱으로 빨라질 것이고 우린 그 물살에 몸을 띄워 그 힘으로 강을 건너리라. 우리의 맘속에 똑같이 새겨놓은 횡단의 꿈은 그 당시 조오련이 보여준 대한해협의 가로지름과 맞먹는 것이었다. 강의 저 건너에 어떤 신기함이, 돈 될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저 저 강은 어느새인가부터 동네 또래들의 가슴속에 커다란 꿈으로 자리했고 우리의 꿈은 대통령도 장군도 사장님도 아닌 “강을 건너리오!”였다. 물론 이 꿈은 계절적인 영향이 있었다. 날이 더워지는 여름엔 우리는 모두 “강을 건널 거요!”를 외쳤지만 날이 추워지고 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꿈은 다시 “대통령이요”, “장군이요”, “사장님이요”, “임꺽정이요” 등으로 바뀌었다. 가끔 드물게 눈내리고 강이 언 겨울에도 “강을 건널 거요”라고 부르짖고 다니는 놈들이 있었지만… 동료들이 자신들을 보고 손가락을 세워 귀 근처에서 원을 몇 바퀴 그리면 금세 제정신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 최고의 바람은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물론 희생도 따랐다. 초등학교 4, 5학년 즈음이던 우리는 강의 건너편 육지에 발을 딛기 위해 동료들의 죽음도 맛보았다. 어제 내 옆에서 물살을 가르던 김군이 보이지 않고 김군의 친구들은 검은 리본을 러닝에 꽂고 나타나 죽은 친구의 영혼 앞에 내가 너 대신 건너리라, 주먹을 불끈 쥐곤 했으니…. 우리의 부모님들도 그 광경을 바라보시며 다시 한번만 한강 가서 헤엄치면 아주 패죽일 거라며 주먹을 불끈 쥐시던… 그리하여, 물론 초등학교 4, 5학년 즈음의 건아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여하튼 음주 뱅소니를 치는 것보다 한강에서 헤엄치다가 걸리는 것이 그 당시엔 우리에게 더 두려운 일이었다. 그랬다. 우리의 꿈이 초롱하던 그 시절… 강의 물살은 우릴 불렀고 우린 그 부름에 의심없이 발을 담궜다. 우리의 헤엄이 물살의 힘을 등에 업고 팔다리가 강의 정기를 타기 시작하면서 우린 드디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린 드디어 꿈을 이루어냈다. 하나 꿈을 이룬 우린 다신 그 꿈을 생각하지 않았다. 우린 어렸다. 서울에서 강으로 들어간 우린 뭍에 닿을 땐 그곳이 경기도라는 걸 알 수 없는 나이였다. “드디어 우린 강을 건넜네.” “그래, 꿈을 이룬 것이지 으하하.” “그런데 가만, … 여기가 어디지?” 오후 다섯시 반에 쏟아지는 물살을 타고 강을 건넌 우린 해가 지고 꿈을 이루었다. 다만, 다시 강을 건너가기에 힘이 너무나 빠진 우린, 밤 열두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고…. 각자의 부모님께 각자의 집에서 거진 비슷하게 두들겨맞은 얘긴 아무에게도 해줄 수 없었다. 장진/ 영화감독

짜릿한 액션의 영웅 신화, <바람의 파이터>

‘CG와 와이어를 거부하는’ 리얼 액션을 주창했던 모 영화에는 확실히 선견지명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국영화계에 있어 <돌려차기>나 <바람의 파이터> 그리고 <역도산>으로 이어지는 라인업들을 들여다보면 일체의 다른 도구 없이 육체와 육체가 직접 맞부딪치는 액션, 그 짜릿한 날것의 느낌에 당분간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이 중에서도 극진공수도라는 실전무술을 창시했던 무도인 최배달의 삶을 다루고 있는 <바람의 파이터>는 몇분을 채 넘지 않는 가운데 ‘일격필살의 한방’으로 승부를 가려야 하는 특유의 대결 구조 속에서 최대한 리얼한 액션의 쾌감을 살리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온갖 수모와 차별을 겪으면서도 일본 무도계를 제패하고 한국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잊지 않았던 최배달이라는, 드라마틱한 영웅의 인간적 면모 역시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일단 영화는 익숙한 블록버스터의 외형적 특성에 매우 충실하다. 적절한 고뇌와 시련을 거쳐 최고가 되는 주인공의 수련기, 모든 인과관계가 주인공의 삶과만 연결되는 주변 인물들의 형상화, 상당히 꼼꼼하게 재현된 시대적 배경, 화면의 중심을 철저하게 주인공에게 맞추는 촬영, 감정을 고양시키는 과장된 스코어의 사운드… 이 모든 요소들과 어울리며 최배달의 삶은 익숙한 영웅 서사 구조에 흡수되어간다. 잠깐, 사실 최배달은 방학기의 만화가 아니고서는 우리에게 썩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렇게 이 이야기가 ‘낯익어’ 보이는 걸까? 이건 말 그대로 그가 만화적인 인물, 캐리커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신화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실화의 절절한 정서가 증발되어버린 것이다. 실존했던 ‘우리들의 영웅’의 최초의 영상적 초상화가 아더왕이나 아킬레스 같은 서구 영웅들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인물을 더 가깝고 설득력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한 가능성을 크게 약화시키고 만다. 영화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감상적 민족주의도 그러하거니와 최배달과 주변 인물의 유기적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진행될수록 영화가 다소 늘어진다는 느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듯하다. 최배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무술 선생 범수는 비현실에 가까우리만치 맥없이 그려지고, 숙적 가토와 료마 역시 최배달이라는 당대의 마이너리티에 대비되는 인물로서 좀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면모를 부여받지 못하며 단순명료한 악역에 그치고 만다.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4] - 일본 ①

<영화예술> 407호 2004년 봄호 - <박하사탕>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살인의 추억> 역사의 망령을 껴안고 현재와 공명하다 - 기타고지 다카시/ 영화평론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한국영화의 선풍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거품을 터뜨린 통화위기 직후에 시작됐다. 이에 대해 한국의 영화연구자 김소영은 1998년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영화적 호황’과 ‘경제적 불황’을 기묘한 공존이라 부르며, 1929년 대공황의 끝에 막 시작됐던 193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상기시킨다(<유레카> 2001년 11월호)고 했지만, 여기선 단지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하겠다. 한국영화의 번성이 고도의 대중소비 사회에 이른 것을 배경으로 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대중소비 사회가 단순히 경제적 번영의 산물이 아니라 그 좌절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요컨대 현재 한국의 대중소비 사회는 경제적 번영 등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통스런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장이기도 하다. 무성에서 토키로 극적인 전환에 성공한 30년대 미국영화가 이른바 ‘고전적 영화’의 골격을 확립하면서 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가난에 시달리던 노동자와 농민의 모습을 효과적인 소재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한국영화는 경제성장을 향해 돌진해온 사회의 번영뿐 아니라 그 와해의 광경도 피사체로 삼고 있다. <박하사탕>의 시선 : 역사의 필연화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역시 상징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선 영호라는 평범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자살 직전의 광경부터 거꾸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며 그려진다. 불황에 따른 사업 실패와 결혼생활 파탄, 사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 반체제운동의 탄압에 손을 더럽혔던 형사 시절, 소박한 공장 노동자로서 지내던 나날…. 영호의 생애를 매개로 한국 현대사를 소급하는 말들을 배열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1998년 이후 한국영화의 특징은 한국이 경제성장과 그 좌절이라는 역사의 사이클을 끝냈다는 점을 배경으로 서두르며 빠뜨려왔던 역사를 ‘리사이클’(이야기화=소비)하려는 전략의 채용이다. <박하사탕>으로부터 최대한의 가능성을 끌어낸다면, 최후의 장면에서 강가에 잠시 머물던 젊은 날의 영호에게는 이제까지 우리가 목격해온 가혹한 역사-이야기가 다시 한번 기다리고 있을 뿐,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역사를 불가피한 필연으로 보려는 이런 태도는 예를 들어 한국산 블록버스터의 전형인 SF 대작(?)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수정주의적 역사관 만일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계속됐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2009년 일본 제3의 도시라는 지위에 만족하는 서울에서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파의 지하운동(테러리스트? 그렇다면 한국의 대테러 전쟁 참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이 대다수 ‘조선계 일본인’들로부터도 고립된 상황에서 끈질기게 계속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떤 일본인이 1909년으로 시간여행을 해 역사에 개입해 이토 암살을 실패하게 만든 결과 ‘거짓의 역사’를 현재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민족파가 노리는 것은 다시 1909년의 하얼빈에 돌아가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되돌려놓고, 원래의 정당한 역사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 일본 내 역사 수정주의의 고양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역사란 것은 픽션이며 어떻게든 바꿔쓸 수 있다는 역사 수정주의적인 주장에 대한 비판을 이 영화로부터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쪽에 의한 낯 두꺼운 역사 바꿔쓰기는 규탄하고 바른 역사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 영화- 작품으로서의 지루함은 제쳐놓더라도- 는 정당한 주장을 담은 영화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해 민족파가 채용하는 전략도 역사 수정주의의 변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도 결코 역사를 왜곡하려는 목적으로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점에서 본) 역사기술의 왜곡을 수정하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바람이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역사기술은 정당한 역사를 향해서 수정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태도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일본 역사 수정주의의 사이에 공유된다. 그리하여 이 둘은 역사의 안이한 리사이클쪽으로 움직이는, 역사의 종언 이후(?) 소비사회의 산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재앙을 당한 공동체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 원인을 찾아내고 죄인을 벌하거나 원인을 극복해 흐트러진 질서를 회복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선 어떤 죄가 범해진 뒤 범인이 체포되고 벌을 받지만, 그 반대는 없다. 무엇인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과거에서 구하지 미래에서 구하진 않는다(<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린 세계는 이런 점에선 독창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바라보면 이렇다. 일본인은 조국의 패전이라는 비극을 수정하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원인이 되었던 이토 암살사건을 없앤다. 한편 조선민족파도 거기에 대항해 과거로 돌아가 왜곡된 역사를 재수정한다…. <살인의 추억>, 떠나지 않는 역사의 망령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수정주의적 사관과 다른 태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박하사탕>은 역사를 거스르는 조작을 역사 수정주의와 공유하면서도, 처음으로 돌아간 역사가 다시 불가피한 비극을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바꿔쓰기와 역사=비극 이전의 목가적인 광경으로의 회귀를 암시하는 가능성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서 현재의 한국영화의 역사관 또는 기억에 관한 태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작품인 <살인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불러내고 싶다. 1986년부터 91년에 걸쳐 서울 근교의 농촌에서 실제 일어난 연쇄 여성 강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서울올림픽 직전의 한가한 농촌의 풍경,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관계, 학생들의 반체제 데모 등을 시대배경으로 효과적으로 짜넣어가면서도 단순한 연쇄살인물로 즐길 수 있을 만한 긴장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할 것은 <살인의 추억>이 역사를 교묘하게 리사이클하는 태도를 지금의 한국 오락영화와 공유하면서도 그 주류로부터 의연하게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뤄진 어둡고 참담한 연쇄살인 사건은 미해결로 끝났다. 따라서 단순한 과거에의 회귀 또는 역사=이야기화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봉준호의 명쾌하며 중후한 연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앞의 구도로 돌아가면 모든 공동체는 자신을 덮친 재앙의 원인을 과거에서 구하고 그것을 없애 질서를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에서 전개되는 사건은 그러한 악마 쫓기 같은 작업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히트하며 사건의 재조사 요구가 한국에서 높아졌다지만, 미해결의 사건=재앙은 결코 질서의 회복이나 상처의 치료를 주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흔적=망령으로서 공동체에 계속 들러붙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역사’가 아닐까. 자크 데리다의 논의를 참조해 말한다면 (포스트 콜로니얼이 아니라) 네오 콜로니얼한 상황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없앨 수 없는 흔적=망령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아닐까라고 강내희는 주장한다(<흔적> 1호). 몇번이든 되살아나고,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망령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식민지와 거듭된 전란, 남북 분단,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거품과 그 붕괴 등등을 경험해 소비사회화한 지금 한국에서 핵심이 될 만한 태도일 것이라고. 강내희도 언급하듯, C. S. 퍼스가 제창하는 인덱스 같은 기호개념은 무언가의 대리와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떤 종류의 물질성을 갖춘 흔적=망령이다. 예를 들어 일찍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기호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파괴한 것도 역시 ‘과거의 근절’을 이뤄내지 못한다. 식민지 지배의 기억은 역사에 들러붙어 기호=인덱스로서 잔존한다. 역사의 리사이클=소비에 분주하는 현재 한국영화의 주류는 꺼려지는 과거의 악마 쫓기(근절)를 목표로 해, 과거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건전한 미래지향을 표방하는 건망증 환자 같은 증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망령=흔적으로서 과거와 함께 톱니바퀴가 어긋난 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역사라는 인식 또한 <살인의 추억>과 같은 뛰어난 영화가 던지고 있다. 이런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장으로서 바라볼 때 한국영화의 현재는 우리가 살아가는 네오 콜로니얼한 세계 상황과 스릴 있는 공명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