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열광을 재우고 일상을 깨울 때

월드컵이 폐막되고 나니 나 같은 사람도 뭔가 허전하다. 여기서 나 같은 사람이란 그동안 축구에 대해서 무지했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열광했던 사람을 뜻한다. 무엇이 아쉬운 것일까. 이젠 다 끝났는데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월드컵 후일담으로 축구선수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세세하게 읽거나 외출을 해야 하는데도 엉거주춤 선 채로 화면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번 기회로 축구 보는 재미를 새끼손톱만큼 알게 된 사람이 이런데 처음부터 축구에 열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찾아든 공허는 어떠할까. 아직 축구에 대한 열기로 채워져 있는 신문 한 귀퉁이에 일본 산카이주쿠 부토(舞蹈)무용단이 내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언제 한번 꼭 보고 싶은 공연이었는데도 그냥 넘겼는데 나보다 나중에 기사를 읽은 함께 사는 사람이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하였다. “시체들의 기괴한 몸부림”이라는 헤드라인을 본 순간 속으로 그 사람의 관심을 끌겠군, 했는데 틀리지 않았다. “부토”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시인 김혜순씨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다. 여간해서 주관적인 평을 잘 하지 않는 편인 그가 한마디로 “굉장하다”고 했다. “온몸에 회칠을 하고”라며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모습이 떠올라 신문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뜻밖에 R석이 3만원이라고 해서 다른 공연보다 저렴하네, 생각하며 선뜻 R석으로 하루 전에 예약을 했다. 당일 아침에 그쪽에서 전화가 왔다. 어제 내 예약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아르바이트생인데 공연료를 잘못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지불한 돈의 좌석은 A석이고 R석으로 하려면 2만원을 더 추가해야 한단다. 그러면 그렇지, 싶은데도 R석에 앉아볼 생각을 하고 있다가 A석에서 봐야 한다니 부당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는 사람과 동반하려고 4장을 예약해놓은 터였다. 전화를 걸어온 쪽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기색이 아니었으면 화라도 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어째야 하나 잠깐 망설이고 있는데 그쪽에서 죄송해요, A석 중에서 최대한 좋은 자리로 배치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 과정을 지루하게 이야기하는 건 이게 바로 우리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부토는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탄생한 일본 전위무용의 한 계보다. 부토의 창시자는 부토를 설명하기를 “시체가 일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이라고 했다. 짐작을 하고 갔는데도 온몸에 회칠을 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더 느렸다. 어느 순간 보는 사람을 벌떡 일어나고 싶게 할 정도였다. 내가 정상적으로 서거나 걸을 수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 확인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만큼 무표정해서 허무했으며 손이나 발 허리는 충격을 받아 기형이 된 사람들의 그것처럼 겨우겨우 움직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태아를 연상시켰고 똑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음향은 팔에 소름을 돋게 했다. 무표정의 육체가 비틀렸다 풀어질 때마다 금이 간 것처럼 움직이는 뼈를 한 시간도 넘게 지켜보는 어느 순간 나는 왜 엉뚱하게 월드컵 기간의 광화문 네거리가 떠올랐는지. 독일과 경기가 있던 날이었던가. 사직동의 친구네 집에서 함께 경기를 보고 끝난 뒤에 구경 삼아 광화문에 나가 보았는데 경기는 졌는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마음껏 노래부르고 걸어다니고 외치고 뛰어다녔다. 부토의 느리고 고통스럽고 기괴한 움직임 위에 왜 광화문 네거리에서 마주쳤던 힘차고 발랄하고 거침없던 육체들이 겹쳐졌는지. 우리를 살게 하는 건 지난 한달과 같은 열광의 나날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다. 느리게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를 유지시킨다. 지루하고 재미없어 이따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회의에 빠지기도 하지만 불시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가까운 누군가 불치의 병을 앓게 되면 새삼 별일없이 유지되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깨닫게 되기도 한다. 지금은 고통도 열광도 아닌 평범한 우리의 일상을 회복해야 하는 때인 것 같다.신경숙/ 소설가

자니 윤 10년만에 토크쇼 컴백

국내 텔레비전에 본격적인 심야 성인 토크쇼를 선보였던 쟈니윤이 10여년 만에 다시 텔레비전 무대에 선다. 그동안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연예활동을 계속해온 그는 오는 14일부터 방송되는 경인방송(iTV)의 <왓스 업>(일요일 밤 10시30분)에 출연해 새로운 토크쇼의 매력을 선사한다. 토크쇼와 시트콤의 장점을 결합한 <왓스 업>은 30~40대 시청자를 겨냥한다. 쟈니윤은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시트콤)이자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토크쇼)로 나선다. 그때그때 화제의 인물을 초청해 진행하는 토크쇼가 40%, 토크쇼 제작을 둘러싼 얘기가 30%,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미국에서 겪는 일상생활이 30%를 차지한다. 쟈니윤은 1992년 에스비에스 <쟈니윤 쇼>를 진행하며 국내에 성인 심야 토크쇼의 씨앗을 뿌렸다. 약간 혀꼬부라진 소리로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농담은 종종 세간에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쟈니윤은 한 나라의 부와 자유를 재는 척도가 토크쇼라고 강조한다. 국민들이 굶주리고 억눌려 있으면 토크쇼가 뿌리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0년 전 한국은 그에게 적지 않은 굴레를 씌웠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들어갔을 때였죠. 나라에는 전통이 있어야 하는데 ‘전통’이 없어졌다고 조크를 던졌는데, 나중에 보니 잘렸더군요.” 쟈니윤은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고 털어놓는다. 대통령이건 시골 농부건, 유치원 아이건 누구라도 토크쇼에 초청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시청률을 노린 탓인지 연예인 일색일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한 1년 지나자 더이상 부를 연예인이 없었다. <왓스 업>의 첫번째 토크쇼는 가수 조영남과 함께한다. 평소 형님아우하는 이들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안방을 찾는다. 병역기피 파문을 일으킨 가수 유승준도 미국의 일상생활을 담은 시트콤에서 모습을 보인다. 쟈니윤은 유승준에게 “이제 미국 시민이니 미국 군대나 가지 그래”라며 뼈있는(?) 농담을 던진다. 두번째 토크쇼의 손님은 ‘5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 의원이다.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비화가 공개된다. 요즘 텔레비전을 켜면 토크쇼가 넘쳐난다. ‘토크쇼 공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의 평가는 당부에 가깝다. “한국에서도 토크쇼가 많이 발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나가야 합니다.” 유강문 기자moon@hani.co.kr

부부문제 낱낱이 털어놓는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 SBS 토요일 밤 11시50분외주 제작 리얼리티 비전 <터닝 포인트 사랑과 이별>(이하 <사랑과 이별>)은 11시50분, 밤 늦은 시간에 방송된다. 상처받은 자들이 잔뜩 웅크린 시간이다. 사회자 한선교와 양금석, 그리고 패널 두명은 조용히 앉아 있다. 오늘도 문제 많은 부부의 산을 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텔레비전 앞에 웅크린 마음이 무거워진다. 소개와 함께 상처받은 부부가 등장한다. 6개월치 밀린 월급을 결혼이라는 중대결정으로 갚아버린 남자와 남편의 외도로 의심만 늘어가는 여자와 이해할 수 없는 생활습관 덕분에 차라리 배우자가 없었으면 하는 여자와, 외도도 아니라는데 불쑥불쑥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남자, 나이 많은 남자가 무조건 보기 싫다는 여자, 그들 앞에 남은 것은 이혼뿐인 것처럼 보인다. 구경하는 자의 자만이 불쑥 튀어나온다. 저러니 헤어지고 말지, 힘들게 뭐가 있어. 이혼은 쉽다. 가끔 말만큼 쉬울 때도 있다. 가끔 구경하는 것보다 쉬울 때도 있다. 그러나 구경하는 자의 마음은 상처가 없다. 상처받은 자들은 어렵게 생각한다. 명쾌하지 않다. 어렵다. 에둘러 가는 길, <사랑과 이별>은 그들의 편에 서서 어려운 길을 택했다. 시시콜콜한 인터뷰, 구질구질한 당신 삶으로 부부관계를 탐색하는 프로그램은 많다. 수많은 TV드라마들이 부부문제에서 출발한다. 부부의 문제만 집중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조정위원회에 접수된 부부의 상황을 재연하는 프로그램(<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KBS2))도 있고 문제를 가진 부부를 출연시켜 서로 대화의 시간을 마련하는 프로그램(<아침마당>(KBS2)의 ‘부부탐구’)도 있다. 그런 중 <사랑과 이별>의 특별한 점은 출연자들이 용기있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용기의 포스는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 부부관계를 낱낱이 털어내는 데까지 끌어올려져야 한다. <사랑과 이별>은 대략 한달간의 제작기간을 거친다. 그래서 동시에 네개의 조가 움직인다. 섭외중, 촬영중, 후반작업중, 작업 끝내고 쉬는 중. 남/녀/합동으로 이루어지는 인터뷰는 촬영 전 2∼3일에 이루어진다. 첫날의 인터뷰는 4시간에서 6시간에 육박한다. 이를 바탕으로 재연 시나리오가 짜인다. 이후 촬영을 진행하는 10일 내내 출연자들의 옆에는 카메라가 붙어다닌다. 촬영을 할 수 없는 경우, 부부만이 있어야 하는 상황에는 집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대략 카메라는 4대가 설치된다. 그 카메라를 제작진은 관찰카메라라 부른다. 정신과 상담과 심리극, 심리검사는 모든 부부들이 거쳐야 하는 필수코스다. 케이스별로 갖가지 특이한 프로그램이 뒤따른다. 의욕이 없는 사람은 극기훈련을 거치고, 아내가 가꾸지 않는 것이 불만일 경우는 아내의 모습을 바꾸어주기도 한다. 남자가 권위적이고 여자가 억눌려 살 경우 예절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부부는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보면 구경하는 자들의 쉬운 해결책을 버리고 급작스런 반전이 일어난다. 그들은 서로를 안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옛기억을 떠올린다. 밀쳐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사랑과 이별>에서 문제부부를 관찰하는 카메라는 관음증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은밀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당신 삶으로 안내한다. 즐거움이라 한다면 자신의 삶보다 더 구차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만족시키는 한에서 일어난다. 보는 순간 어떻게 얼굴을 내놓는 출연(40% 정도는 모자이크 처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음성변조는 하지 않는다)을 결정할 수 있었는지 하는 의문이 들 만큼 그들은 적나라하다. 텔레비전에서 절대로 비쳐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우리의 더러운 모습, 누추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들을 바로 그 현장에서 중계된다. 그러다 그 관찰카메라는 이상하다. 우리는 어떤 시선 앞에서 움찔한다. 그것마저 적나라하다. 69회 ‘돈이 뭐길래’의 경우 심리극에 참여한 부인은 남편에게 억눌렀던 감정을 표한다. 갑자기 돌변한 부인에게 당황하며 남편은 말한다. “이거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다른 회, 남편이 부부싸움에서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이자 부인은 말한다. “카메라 의식하는 거냐.”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 순간 ‘중계’를 담고 있지 않다. 최선을 다한 당신, 떠나라 관찰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상황은 돌변한다고 다큐멘터리의 교과서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정직한 다큐멘터리를 만날 수 없음을, 그런 시차적응 전 다큐멘터리는 애초에 정직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사랑과 이별>의 관찰카메라는 관찰하기 시작하는 순간의 돌변 상황을 그대로 ‘터닝 포인트’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간의 다큐멘터리의 허점을 장점으로 바꾼다. 그들이 용기를 내어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터닝 포인트’다. 카메라는 그들을 부추기고, 서로의 감정의 극단까지 가도록 부추기면서 ‘터닝’을 돕는다. 그러나 구경하는 사람에겐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극적인 구성을 위한 편집 권리를 가진 제작진, 그들은 상처자국을 급하게 봉합해버린 채 박수치고 떠날 수 있다. <사랑과 이별> 기획부장이자 작가인 최은영씨는 그들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갈등을 쌓은 시간에 비해 카메라가 다가가는 시간은 아주 짧다.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정을 했다면 후회없는 결정인가는 물어봐야 한다. 결혼이 중대사이듯 이혼도 마찬가지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어야 한다. 몇년을 같이 살아온 배우자에 대한 마지막 배려다.” 우리 팀의 선전을 두고 차범근 해설위원이 승리는 의도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뒤에 오는 부산물이라고 한 말과 비슷하다. 그래서 <사랑과 이별>에 출연한 부부가 이혼을 한 경우는 별로 없다. 다음날 예정된 심리극을 마다하고 사라진 남편을 두고, 혼자 심리극에 참여한 부인이 이혼을 결정했던 예가 유일하다고 한다. 그들이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할 때 그들은 관계개선의 첫 발자국, 시작이 반이라면 관계개선의 반을 지났다. 용기와 마지막 배려는 출구를 뚫었다. 저기 내 얼굴이 보이는군요 <사랑과 이별>의 방송이 끝나는 1시까지 제작진들은 사무실에 남아 있다. 저녁에도 울리지 않던 전화벨이 그때쯤 울린다. 텔레비전에 나의 얼굴이 보이는군요, 절망적인 우리 관계를 이야기할 용기가 이 늦은 밤중에 나는군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한 아줌마는 밤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 나보다 더 지겨운 삶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이 얄팍하지만 결말에 질투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 말하는 게 나하고 똑같다, 내가 들어도 짜증나네, 라고 스스로를 반성한다. 그들은 인생의 벼랑에 도달해 있다.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부부간 기강을 되살려야 한다는 교회의 새해 설교는 이혼이라는 주홍글씨를 목에 단다. <사랑과 이별>의 웅변은 간곡하다. 연사의 목은 막혔다. 이혼이 그렇게 쉽습니까. 구둘래 kuskus@dreamx.net제작진의 노하우로 전하는 부부생활 증진법 양말 냄새 맡을 때는 안 보이는 데서 부부 사이에 대화를 많이 하라는 것은 건강한 부부생활 증진법의 1조1항이다. 하지만 이 대화법에는 특별한 조례가 있으니. <동물원 사람들>의 운종과 하영처럼 30분 동안 할말이 없어 방바닥 때만 벗기는 일도 있지만, 격하게 마음이 쌓인 경우 서로 자기말만 쏘아대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들을 것. 전문가들은 5분 동안 자기 말을 하고 5분 동안 상대방의 말을 들어줄 것을 제안한다. 그 5분을 다른 사람이 소화하고 있는 경우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올라도 참아야 한다. 남이 떡이 커 보인다고 남의 5분이 더 길어 보인다면 앞에다 시계를 가져다놓는 것도 준법시민의 자세다. 부작용은 시계에만 몰두하다보면 상대방의 소리가 째깍째깍으로 들린다는 것. 시계바늘 소리는 너무 크지 않는 것으로 가져다놓는 것이 좋다. 벽이나 천장이나 문에다가 상대가 자신한테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과 했으면 하는 것을 정리하여 적어놓는 방법도 유용하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 오래라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의 항목을 적는 것에 손이 떨리는 유치함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꿋꿋이 참으며 항목을 적어내려가다보면 그간의 문제들이 일목요연하게 보일 것이다. 사람 부딪히고 사는 것은 유치한 것투성이라서 상대방의 양말 냄새 맡는 버릇(양말 냄새 맡을 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라)과 아껴놓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얌체 같은 행동(아이스크림 먹을 때는 소유주를 확인하라) 따위가 그녀 혹은 그의 냉전의 시발점일 수도 있다. 그런 항목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웃지 말고, 꼭 양말은 그냥 벗어라. 대화법에 못지않은 증진법은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로간의 양보가 없는 부부들은 ‘니 탓이요, 니 탓이요, 니 탓이요’라고 생각한다. ‘니가 못해줘서 내가 그렇지, 니가 잘해주면 내가 못해주겠냐’는 태도를 고쳐야 한다. ‘니가 못해줘도 내가 해준다’라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이것을 조건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라가 아니라)는 속담은 고언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은? 이 상황에는 부적절하다.

여성 감독들, 여전히 설 곳 없다

영화산업에서 가장 소외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영국의 온라인은 최근 영미권에서 여성 인력이 감내하는 열악한 지위에 관해 보도하면서 “여성은 영화산업에 뛰어들기 위해 여전히 힘들게 투쟁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1년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250위 안에 드는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6%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2000년의 11%에서 절반 가까이 떨어진 비율이기도 했다. 250편의 영화 중에서 여성 작가가 차지하는 비율 역시 2000년의 14%에서 10%로 내려앉았으며, 여성 촬영감독은 단 한명도 없었다.여성 영화인의 경력 향상과 권리 보호를 위한 조직 ‘우먼 인 필름 앤 텔레비전’(WIFT)의 회장 제인 커슨스는 이런 현상을 “매우 절망적”이라고 표현했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아카데미위원회가 올해 두명의 흑인배우에게 트로피를 안긴 데 반해, 지금까지 감독상에 지명된 여성 감독은 단 두명뿐이었다. 그러나 제인 캠피온과 리나 베르트뮐러 모두 수상은 하지 못했다. 커슨스는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여성 감독은 여자들이 모여앉아 퀼트나 만드는, 젊은 여자애들이 나오는 영화밖에 연출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공격했다.영국의 상황은 미국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영국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는 여성 감독은 부천영화제 개막작이자 박스오피스 성공작인 <슈팅 라이크 베컴>의 거린다 차다와 <마번 칼라>로 올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은 스콧 린 람제이 정도. 커슨스는 이런 현실에 대해 “여성 감독을 고의적으로 차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아직도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대우받는다. 사람들은 여자가 상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2)

report3 ┃SF로 간 문학도 3. 필립 K. 딕은 아서 C. 클라크나 아이작 아시모프처럼 ‘하드’한 작가는 아니었다.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에게 SF세계는 과학적 상상력과 연역 과정을 통해 예측한 ‘가능성 있는’ 미래였다. 하지만 딕에게 SF는 이미 그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현실세계를 기술하는 조금 독특한 도구였다. 그는 미래가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과학적 상상력으로 어떻게 미래의 기술을 예측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화성인이나 안드로이드 같은, 이미 존재하는 SF 장르의 클리셰들을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이용했다. 골수 SF팬에서 시작한 엔지니어/과학자 출신의 클라크나 아시모프와는 달리 그는 순문학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가 SF로 시선을 돌린 건, 그것이 그의 미치광이 비전을 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그의 VALIS를 보면 분명해진다. 우주의 진리와 기존 종교에 대한 장황한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 정신나간 소설은 어설프게나마 SF 모양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연역 과정을 통해 가공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SF의 장르와는 큰 관계가 없다. 이건 그냥 정신나간 사람이 자기 세계에 대해 쓴 보통 소설인 것이다. 그는 이 장르의 어느 누구보다도 정신병 환자들이나 약물중독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을 많이 썼다(A Scanner Darkly, VALIS…). 그의 비교적 멀쩡한 캐릭터들도, 밖의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인’은 절대로 아니다. 필립 K. 딕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대부분 광기와 중독의 기술이다. report4 ┃리얼리티를 비웃음, 세상에 완벽은 없다 4. 필립 K. 딕이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리얼리티의 허약함’이었다. 그는 버클리식 연역적 추론 과정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주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이 얼마나 쉽게 기만당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주제를 가장 명백하게 다룬 작품은 그의 비교적 초기 작품인

<마이너리티 리포트>등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작가 필립 K. 딕(1)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이 세편의 공통점은 원작자가 필립 K. 딕이라는 사실이다. 스크린에 옮겨진 편수는 극히 적지만 각 작품의 스케일과 중량감은 가히 위압적이다. 명망있는 할리우드 감독들이 기꺼이 스크린에 구현하고 싶어하는 유혹적인 미래세계를 빚어낸 필립 K. 딕은 세련된 문체로 인간의 정체성을 집요하게 파고든 SF작가였다. 미래의 살인을 방지하는 시스템의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 미래사회의 딜레마를 탐구한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스필버그라는 필터를 통과해 7월26일 관객과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21>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스템’에 접속하기 전, ‘필립 K. 딕 리포트’를 먼저 공개한다. 편집자 report1 ┃딕의 미래세계, 환상 그 이상의 환상 1. 최초로 필립 K. 딕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무엇일까? 물론 공식적인 정답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82년작 <블레이드 러너>다. 하지만 왜 나는 아직도 80년에 나온 텔레비전영화 <천국의 녹로>라고 박박 우기는 것일까? <천국의 녹로>의 원작자는 필립 K. 딕이 아니다. 딕만큼이나 중요한 SF/판타지 작가인 어슐러 르 귄의 작품을 각색한 작품이다. 하지만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꿈을 꾸는 남자에 대한 이 영화(또는 르 귄의 소설)를 보면 정말 필립 K. 딕의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주인공은 현실과 가상세계를 오가고 그 경계가 무너지는 곳에서 두 세계는 기괴한 충돌을 일으킨다…. 물론 어슐러 르 귄은 자기가 무엇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필립 K. 딕 소설’을 쓰고 있었다. 재능있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작가들은 그 이상의 일을 한다. 그들은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고 필립 K. 딕의 업적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세계는 우리를 삼켜버렸다. 필립 K. 딕은 작가의 영역을 넘어 장르가 되었다. 우린 지금까지 쏟아져나온 수많은 가상 현실물들의 원조를 윌리엄 깁슨과 그의 추종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깁슨이 만들어낸 사이버스페이스는 차갑고 건조한 매트릭스에 불과했다. 깁슨이 제공한 것은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역동적인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미지는 대부분 깁슨보다 필립 K. 딕의 덕을 더 보고 있다. 무엇이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생명력 넘치는 괴물로 만들었을까? 모든 꿈들은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든 환상은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필립 K. 딕의 세계를 그처럼 강렬하게 만들었던 건, 그가 단지 공허한 가상세계를 지어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실세계와 환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았고, 그가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세계는 그에게 당연한 현실세계의 또 다른 묘사였다. 그가 한 유명한 말처럼 ‘리얼리티란 관점에 불과했다’. report2 ┃공포증과 약물, 뒤엉킨 사생활 2. 필립 K. 딕은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란성 쌍둥이 누이인 제인은 태어난 지 6주 뒤에 죽었다. 딕은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거의 일평생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는 병약한 아이였다. 빈맥증상이 있었고 천식환자였으며 다양한 공포증에 시달렸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의 공포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약물중독자였고 끝도 없이 잘되지도 않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으며, 가끔 자살을 기도했고, 공포증 때문에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캘리포니아 안을 빙빙 도는 짤막한 여행을 반복했다. 그는 환영을 보았고 천사를 만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종종 그의 경험은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식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싸구려 사이비 종교풍으로 흐르기도 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남자였고, 존재하지 않는 병을 앓는 남자였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며 평생을 보낸 약물중독자였다. 그가 리얼리티와 아이덴티티라는 대상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그 둘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견고한 것이 못 됐다. 필립 K. 딕의 작품들 표지. 왼쪽부터 <스캐너 다클리> 높은 성의 사나이><발리스>. <판타스틱 유니버스>는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실렸던 잡지다. 그가 살았던 세계 역시 그를 단단한 현실에 잡아두지 못했다. 그가 작가로서 경력을 시작한 50년대는 미·소 냉전 속에서 다양한 편집증이 전염병처럼 유행하던 때였다. 50년대의 공포증이 넘어가자 60년대의 히피문화와 약물유행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 정신나간 사건들을 체험한 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맨 정신으로 있기 힘든 곳인 캘리포니아였다. 1974년 이후 그가 겪었던 종교적 경험과 그런 경험이 투영된 그의 후기작들은 그가 얼마나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였던가를 증명한다. 그가 동료인 론 허버드처럼 본격적으로 사이비 종교 교주로 나서는 대신 소설가 직업에 붙어 있었던 게 모두에게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소설 vs 영화 ┃블레이드 러너┃1992년, 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해리슨 포드, 숀 영, 룻거 하우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가장 먼저 나온 필립 K. 딕 영화이며,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딕의 소설을 각색한 많은 영화들처럼, 원작과 소설의 유사점은 비교적 약한 편이다. 심지어 영화는 제목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 ‘Blade Runner’는 원래 앨런 E. 너스의 인구폭발의 장수사회를 다룬 SF소설 제목에서 빌려온 것이다. 데이비드 피블스의 최종 각본은 원작의 필립 K. 딕풍의 주제와 소재들을 대폭 삭제했다. 영화는 소설이 다루는 마사교와 같은 종교적 설정, 핵전쟁 이후 살아 있는 생물체들에 필사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의 군상, 감정의 인위적 조작과 같은 것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원작의 건조한 딕식 미래 묘사가 줄어든 대신 영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기독교 상징으로 가득한 컴컴한 미래 버전 필름 누아르가 된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영화 두편 <레퀴엠><파이>의 함수관계

심장의 박동을 강탈해가는 영화, <레퀴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들(해리)은 어머니(사라)로부터 텔레비전을 빼앗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어머니는 그런 아들에 맞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결국 아들은 친구(타이론)와 함께 텔레비전을 들고 가 전당포에 팔아먹은 뒤 그 돈으로 마약을 사고, 어머니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유유히 그곳을 찾아 텔레비전을 다시 사온다. 이미 이들은 그 짓을 반복해왔다. 그러므로 첫 번째 신에서 방문을 사이에 두고 나눠지는 분할화면은 이 영화가 어디로 향할지를 예시한다. 분할화면은 여기에서만 설정되어 있는 단발적인 테크닉이 아니다. 적어도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총체적인 내러티브의 의도가 테크닉에 우선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영화의 테크닉이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에 심각하게 골몰하기보다 그것이 어느 때에 등장하는가에 눈길을 주면서 그 의도에 손쉽게 다가가는 경우가 있다.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언제, 무엇과 무엇 사이에 등장하여 서로를 갈라놓는가? 그것이 사라-해리, 해리-마리온(해리의 여자친구), 해리-타이론 사이에, 그리고 심지어는 사라-햄버거/냉장고 이에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영화에서 분할화면은 인물들간의 매끄럽게 봉합될 수 없는 관계 바깥으로 터져나온 굵직한 솔깃을 드러내고, 어긋남을 계속하는 욕망의 구도에 대한 스타일로서의 밑그림을 그린다(예를 들어 영화 초반부, 다정하게 누워 서로를 쓰다듬는 해리와 마리온의 분할화면을 눈여겨보라. 이 장면은 굳이 분할화면을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이 마냥 아름다운 사랑을 약속하는 것이라면.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두 화면의 인물 사이에 매치되지 않는 터치는 한눈에 들어오고, 그 다정함을 불길함으로 직감하게 한다). 하지만, 지금 분할화면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 중은 아니다. 파멸의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요구에 일단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영화의 중심을 대면할 수 있다. 중독된, 혹은 중독시키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사라ㆍ해리ㆍ마리온ㆍ타이론의 각각 단절된 상황으로부터 서로의 의미항을 이항시키면서 영화적인 고리를 지어내고 있다. 해리의 마약 투여장면은 사라의 커피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붙고, 해리가 돈을 꺼내는 장면과 사라가 드레스를 꺼내는 장면은 동일한 카메라 포지션으로 보여진다. 또는 마리온이 헤로인을 구하러 가기 위해 화장을 하는 장면은 약에 중독되어 고통스러워 하는 사라의 모습과 교차편집된다. 그리고 타이론은 환각상태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의미적으로, 해리가 헤로인에 중독되는 것과 사라가 다이어트 약에 중독되어가는 것은 같은 속도를 유지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라의 욕망은 마리온이 대신 보유하고 있고, 마리온의 물리적인 고통은 사라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또는, 타이론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해리의 변주곡이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파멸의 귀착을 위해 똑같은 경로의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때문에, 영화 안에서 떠도는 ‘플로리다’의 상징성은 정확히 여기쯤에 위치한다. 이 영화에는 봄이 없다. 대신 황무지로서의 플로리다가 있다. 사라가 시작하는 다이어트 요법의 제1장은 ‘삶은 계란(마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과 ‘자몽’이다. 해리와 타이론이 헤로인을 배급받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플로리다 오렌지’가 적힌 트럭은 그들 앞을 지나간다. 해리가 겪는 단 하나의 아름다운 환각은 해변에 서 있는 마리온이다. 급기야 해리와 타이론은 헤로인을 구하기 위해 겨울에 플로리다로 향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파국을 맞는다. 죽어버린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서 플로리다는 마치 잡히지 않는 무인도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한결같이 꿈을 잊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사라는 살을 빼서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를 입고 텔레비전 다이어트 쇼에 출연하는 것이 꿈이며, 해리는 돈을 모아 사라, 마리온과 함께 단란하게 사는 것이 꿈이고, 마리온은 옷가게를 여는 것이 꿈이다. 그리고 타이론에게 꿈은 ‘한몫잡아 보는 것’이다. <레퀴엠>에서 정작 이들의 꿈을 망치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없이 ‘약(마약)’이다. 사라에게도, 해리에게도, 마리온에게도, 타이론에게도, 약은 결코 그들이 이루고 싶은 꿈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연명하게 하는 것도 약이다. 해리가 약을 팔아 돈을 모으려 하고, 사라가 약을 먹고 살을 빼려 하고, 메리온이 몸을 팔아 약을 구해야만 하듯, 그들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있는 것 역시 다시금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의 약인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이 레퀴엠의 작곡자가 약 그 자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관계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극장을 나오는 우리에게 아마 중요한 건 그런 것이 아니었을 거라고 부인하게 한다. 마치 약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면 이 영화를 잘못 말하고 있는 것처럼, 대신 그것을 ‘중독’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면서 우회시켜, 격상시키고, 안심하려 한다.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조차 그런 것 같다. 고뇌인가 고통인가 그러면, ‘중독’이라고 정의할 때 그 방점이 어디에 찍히는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레퀴엠>에서 그것이 삶의 피폐함과 정신적인 외로움의 가속화를 일컫는 것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사라에게 물어보자. 사라는 그냥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은 것이 아니다. 해리의 졸업식날, 그녀와 남편과 아들이 행복한 한때를 이뤘을 그때 입었던, 바로 그 빨간 드레스를 입고 싶어한다. 과거를 돌리고 싶어한다. 그러면 해리의 졸업식까지만 해도 화목했던 이 가정이, 아버지가 없는 가족관계로 재구성되며 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각자의 세계에 매몰되게 되었을까(그리고 도대체 이 영화에서 아버지들은 죄다 어디로 간 것일까? 다들 해리의 아버지를 따라 단체로 죽은 걸까? 여기에 대한 어렴풋한 실마리는 <파이>에 있다). 설명들이 꼬리를 감춘다. 일부러 생략한 것이든, 잘못 누락된 것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영혼이 혼미해져 가는 정신적인 황폐함으로서의 중독은 이 영화의 의미생산에 부합하지 않는다. 영혼의 중독에 대해 말하려면 약 이외의, 삶과 세계의 부작용들에 관한 관계가 드러나야만 한다. 약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그것이 야기하는 삶의 고뇌가 부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숫자와 신, 질서와 무질서, 뇌와 직관, 동공과 태양이라는 대결구도를 맺으며 그 고뇌를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전작 <파이>이다. 이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규칙은 있는가, 과연 세계는 무질서 한 것인가, 그것을 숫자의 규칙성으로 파악해낼 수는 없는가, 왜 우리는 태양을 직시하지 못하는가, 216자리 숫자를 해독하는 순간 과연 신은 지상 위에 내려올 것인가, 과연 신의 섭리를 상대로 유레카라고 외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파이>의 천재수학자 맥스 역시 약에 중독되어 있지만 그에게 있어 약은 이런 고뇌의 질문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지, 의미없는 고통을 당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퀴엠>은 그런 ‘고뇌’가 아니라, ‘고통’에 매달리기 위해 약을 끌어들인다. 이 점이 바로 <파이>와 <레퀴엠> 사이의 가장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중독은 방점을 다시 찍고 순전히 ‘물리적인 중독’으로 옮겨가야 한다. 사라는 날이 갈수록 더 격한 환각의 상태로 빠져든다. 그녀의 말라가는 몸은 주사바늘의 흉터로 절단해야 하는 해리의 팔만큼 흉물스러워진다. 깊어가는 것은, 늘어나는 약에 따른 육체의 고통과 뇌 손상이다. 병원에 실려간 사라가 받는 치료가 무엇인가. 무지막지하게 달려든 의사들은 끝내 그녀의 뇌에 전기충격을 가한다. 또는 마리온의 ‘정신과(!)’ 의사 아놀드(<파이>에서 천재수학자 맥스 밀리언 역을 맡았던 션 굴레트)는 그녀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던가? 대화치료? 천만에. 대화 대신 그가 마리온에게 준 것은 몸값으로 건넨 돈이다. 마리온의 그 돈으로 해리는 또다시 약을 사려 한다. 추락의 몸짓들이 이어지고 있다. 진실과 모순, "유레카?" 대런 애르노프스키는 <파이>에서 던졌던 질문들의 단초를 <레퀴엠>에서 그대로 등장시키면서도 결론적으로는 패배와 무의미의 태도를 선택한다. 이 말은 영화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대런 애로노프스키 그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말하자면 <레퀴엠>이 물리적인 중독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라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망설이게 된다. 과연 어지러운 삶과 세계의 환부를 드러내는 정신의 중독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고통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혹은 물리적인 중독을 통해 걸어들어간 환각의 세계, 그 안에서 진실과 모순에 대한 질문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다 무슨 필요란 말인가. 그 물리적 중독의 강화가 궁극적으로 초대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인 환각. <파이>에서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맥스에게 강박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는 뇌였으며, 그것은 곧 신에 대한 수학적 도전을 제기하는 맥스 자신에 대한 고뇌의 변형이었다. 그러나 <레퀴엠>에서 뇌는 그 의미가 사라진 채 전기충격기기 사이에 끼워져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또, 동공은 <파이>에서 정면으로 신의 존재를 응시하려는 의지로서 드러났다. 그런데 <레퀴엠>에서 그것은 쾌감을 확장하는 미세한 세포의 움직임일 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신의 행세를 대신하고 있는 지상의 유혹(약)으로부터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파이>에서 벌벌 떠는 손으로도 마침내 맥스는 약을 집어던진다. 그리고 컴퓨터 유클리드의 뇌관을 열던 그 드릴로 자신의 뇌를 파괴하고 만다. 이것은 패배일까? 혹은 자살의 몸짓일까? 하지만 깨달음에는 ‘유레카’라고 소리칠 수 있는 진리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의 움직임에서조차 규칙을 찾으려던 맥스가 그 앞에 다시 서는 모습은 우리를 중얼거리게 한다. ‘엔소프’. 그러므로,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다음 영화가 <배트맨: 원년>인 것은 다시 한번 우리의 판단을 유예시킨다. 왜냐하면 배트맨은 신의 대리인들 중 가장 철학적인 전도사이며, 또한 가장 빠르게 쾌속 전진하는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믿어야 할지 모른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파리리포트] 프랑스영화는 동진(東進)중!

일본과 한국, <아멜리에> 등 흥행 성공하며 새로운 시장으로 떠올라지난 2001년 <늑대들의 후예>나 <아멜리에>와 같은 프랑스 상업영화의 부흥으로 해외시장에서 프랑스영화의 판매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근접 유럽국가나 미국이 지속적인 시장이었다면, 최근 이곳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아시아 국가들이다. 이는 올해 10회째인 요코하마프랑스영화제나 2회째인 서울프랑스영화제를 맞아 프랑스영화 해외 진출을 돕는 기구인 유니프랑스의 적극적인 주도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이나 제라르 랑뱅과 같은 유명 배우들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프랑스 영화시장에서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2001년 일본의 경우 50여개의 프랑스 제작영화가 수입돼 420만명의 관객을 모았고, 한국의 경우 15개의 프랑스 제작영화가 수입돼 230만명의 관객을 끌었다. 이곳에서 프랑스영화의 성공은 크게 뤽 베송으로 상징되는 스펙터클한 상업적 영화와 프랑스영화를 또 한편으로 상징하는 소규모 작가영화들의 꾸준한 공존에서 찾을 수 있다. 상업영화가 아닌 작가영화로 분류될 영화들을 이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유니프랑스의 다니엘 토스칸 뒤 플랑티에 위원장이 밝힌 전략은 ‘시네필들의 문으로 들어가 산업구조로 진입하는 것’. 일본의 예를 보자면 작가영화로 분류되는 프랑스영화는 예술관 단관에 개봉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할리우드영화를 제외한 미국의 인디영화나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의 영화들과 경쟁에서 우세를 보이면 이후 일반관에서 확대개봉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처음 예술관 한곳에서 개봉했다 이후 115개관에서 확대개봉돼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아멜리에>가 대표적인 예다. 물론 이것은 소규모 예술관들과 이곳을 찾는 탄탄한 시네필층이 일본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은 한국은 프랑스 영화시장으로서는 일본에 비해 어려움이 많다고 지적된다. 여기에 텔레비전에서 프랑스영화 방영 비율도 낮고 DVD의 경우 무단 복제본들이 횡행하는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그렇지만 이곳 언론은 유니프랑스 다니엘 토스칸 뒤 플랑티에 위원장의 말을 빌려 한국이 프랑스와 유사한 시스템으로 자국영화를 보호하고 있는 점이나 한국영화가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장기적인 차원에서 다양한 프랑스영화가 한국에 소개되고 궁극적으로는 양국 합작영화를 기획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보였다. 파리=성지혜 통신원

<눈물> <신라의 달밤> <공공의 적> <라이터를 켜라>의 성지루(2)

비결 2 쓸데없는 자존심은 쓸데없다 성지루는 <눈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눈물>에는 모두가 신인배우였기 때문이다. 조은지, 봉학규 등 연기신참들이 주연인 것이 영화신참인 그에게 심적 여유를 많이 주었다. 게다가 디지털영화였기 때문에 카메라워킹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음 작품인 <신라의 달밤> 때는 사정이 달랐다. 하던 대로 했건만, 정광석 촬영감독은 연신 그를 혼냈다. “여기 서라고 했는데 왜 여기 서냐.”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 성지루는, 영화배우로서는 신인이었지만 연극판에서는 극단 목화에서 총무까지 맡은 고참이었고 <새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로 우수작품 연기상을 받아 문예진흥원이 런던에 연수까지 보내준, 알아주는 베테랑이었다. 자존심을 버리고 틀리지 않으려고 속으로 끙끙대지도 않았다. 틀려가며 배웠고, 모르면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거기엔 나이도, 뭣도 없었다. “지금도요, 모르겠다 싶으면 다 물어봐요. 22살 먹은 연출부 막내한테도 이것저것 물어봐요. 그러다보니까 거꾸로 요즘에는 간혹 가다가 조명부며 연출부 중에 누가 ‘연기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죠’하고 물어봐 오기도 해요. (웃음)” 비결 3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임상수 감독이 아예 시나리오에 인물명을 ‘성지루’라고 해놓고는 나중에 그를 캐스팅했다는 <마지막 연애의 상상> 이야기를 하며 성지루가 조금 이상해졌다. 자폐증 환자처럼 시선을 흐리고 말도 더듬고…. 그는 그저 자신의 캐릭터인 우편배달부가 주인공 부부의 입양아를 죽이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서 ‘혹시 그 우편배달부가 자폐적인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더니 (세상에!) 그렇단다. 극중의 대사를 읊는 것도 아니고 그냥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바로 그 캐릭터로 돌변하다니. 알고보니 그의 이런 심각한 수준의 감정이입은 ‘철저한 자료조사’라는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일본의 한 자폐증 부부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끝자락을 보고 그는, 냉큼 프로그램 끝에 뜨는 ‘다시 보기 사이트 주소’를 받아적었다고 한다. 예의 우편배달부 생각이 났기 때문. <가문의 영광>을 찍기 전에는 또 조폭 캐릭터를 몸에 익히기 위해 “현역에 계신 분들”을 만나서 3일 동안 같이 생활하기도 했단다. 사흘간 ‘특별연수’를 하면서 녹음기에 그들의 말을 녹음해 외국어테이프 듣듯이 듣고 따라하며 말투를 익혔다고. ‘녹음’ 기법은 <신라의 달밤>을 준비하면서 대전 출신인 그가 경상도 사투리를 익히기 위해 이미 써먹었던 방법이기도 한데, 극중 자신의 배역인 덕섭의 직업과 같은 경상도의 포장마차 주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녹음했다니, 그 치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고급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자라면서, “집에서는 한두 마디밖에 못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시연합 응원단장이나 각종 행사의 MC를 도맡아” 하던 청소년 시절, 남 앞에 맘껏 나서는 것에서 행복을 느껴 그는 연극을 꿈꾸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의 기대를 과감히 저버리고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한 이후 그는 쭉 연극판에서 살았다.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등 많은 연극무대에 올랐고, 연극무대에서 그를 발견한 임상수 감독에 의해 2001년 <눈물>로 영화데뷔를 한 이후에도 그는 연극이 본업인 배우였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결심한 건, <눈물>을 다 찍고 런던에 연수를 가 4개월 되던 때. 한국에 있던 임신중인 아내가 아파트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그는 경제적으로 힘든 연극 대신 당시 출연제안이 들어와 있던 <신라의 달밤>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때 예정돼 있던 신작 연극 대신 영화를 하라고 허락해주신 오태석 선생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성지루. 이게 4번째 비결이 될까. “인기비결? 잘 모르겠는데….” 이렇게 말문을 열었지만 성지루가 3시간 동안 들려준 이야기는 사실상 모두가 ‘비결’이 되는 것이었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 ★ ★ ★ ★ 김승우가 본 성지루 성격파,그 이상의 성격파 나는 사실 성지루와 별로 친하지 않다.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성지루라는 배우를 영화와 현실을 통틀어서 <라이터를 켜라> 촬영장에서 첨 봤다. 바쁜 촬영스케줄 때문에 대본연습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그의 출세작인 <신라의 달밤>과 <눈물>을 이전에 보지도 못한 내 탓이 크다. 촬영장에서 처음 본 성지루는 무뚝뚝한 사내였다. 다만 담배 피우는 모습이나 누군가와 얘기하면서 웃을 때의 한없이 착해 보이는 눈웃음에서 꽤나 서민적일 것 같고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약간의 힌트를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날, 전날 촬영에서 성지루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는 장항준 감독님의 증언(?)이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순전히 ‘성지루를 보기 위해’ <신라의 달밤>을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그가 조금은 거칠게, 전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좋은 배우라는 것을. 게다가 나는 그의, 나이에 비해서 훨씬 오래산 것 같은 느낌의 외모(^^)가 풍기는 친근감에서 언뜻 최불암 선배의 넉넉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라이터를 켜라>에서 성지루는 아주 적은 분량에만 나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는 연기’란 게 무엇인지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시사회에 오셨던 나의 아버님마저도 당신의 아들 이외에 기억하셨던 유일한 배우였으니 말이다. (차승원이 아니라!).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