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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극장가] 액션, 호러, 첩보, 가족 등 개봉작 진수성찬

주말에 뭐볼까? 여름이 막바지로 치닫는 이번 주말,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던 화제작들이 대거 개봉한다. <스파이더맨2>, <해리포터3>, <아이, 로봇> 등 한편에 쏠릴만한 초대형 블록버스터는 없지만 장르도 다채롭고 규모도 중간급 이상이 대부분이다. 이번 주말에 새로 개봉(한)하는 작품은 모두 7편. 소규모로 개봉하는 기타노 다케시의 초기작 과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의 <팻 걸>을 제외하면 배급규모도 일정하고 저마다 특색을 지닌 5편이 한꺼번에 극장에 걸린다. 아이들과 함께 방학이 가기전 극장 나들이를 한다면 단연 <가필드>가 선택 1순위. 게으르고 심술궂은데다 거만함까지 뚝뚝 떨어지지만 뚱보 고양이 가필드의 '원맨쇼'는 결코 밉살스럽지 않다. TV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영화속의 '가필드'는 이번이 처음으로 한국어 더빙판은 인기 개그맨 김용만이 가필드 역을 맡아 아이들도 친숙하게 볼 수 있다. 지옥에서 온 악마소년, 헬보이의 반영웅적 행로를 담은 <헬보이>는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독특한 블록버스터다. 다른 영웅들이 지구를 지키느라 정신이 없을때, 스스로 뿔을 자르고 지옥에서 돌아나온 헬보이는 영웅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무던히도 고뇌한다. 그렇다고 철학적인 블록버스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악당들을 물리치는 스피디한 액션신은 여름용 오락영화로서도 손색이 없다. 맷 데이먼을 액션스타로 확실하게 만들어준 <본 아이덴티티> 속편 <본 슈프리머시>도 첩보영화 팬들을 손짓한다. 007류의 매끈한 요원이 최첨단 장비를 뽐내던 기존 첩보물과 달리 <본 슈프리머시>는 주인공 본의 '정체성 찾기'에 날것 그대로의 거친 액션을 결합시켜 남성적인 시원시원한 화면을 선사한다. 감우성 주연의 <알 포인트>와 아시아 3개국 옴니버스 <쓰리, 몬스터>는 마지막으로 승차한 한국산 공포물들. <알 포인트>는 베트남 전쟁의 막바지에 '로미오 포인트'라는 작전지역에서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소대원들의 무전이 걸려오자 수색작업에 나서는 최태인 중위(감우성)와 여덟명의 소대원이 겪는 극한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전쟁과 호러의 행복한 만남을 시도한 <알 포인트>는 공포영화 장르에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찬욱과 프루트 챈, 미이케 다카시가 만든 3개국 호러 파티 <쓰리, 몬스터>도 매니아층이라면 쉽게 눈돌리기 힘든 작품. 증오, 질투, 탐욕의 세가지 화두로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지닌 아시아의 거장 감독들이 의기투합했다. 극장가에 만만치 않은 다섯 작품이 한꺼번에 나왔지만 기존 상영작들을 확실히 제압하기는 힘들듯하다. 예매율을 통해 본 관객반응에서는 아직도 전주 1위의 <바람의 파이터>와 <시실리 2km>도 인기가 있다. 씨네21 영화예매에서는 <가필드>가 22.3%로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바람의 파이터>도 21.7%의 근소한 수치로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본 슈프리머시>와 <알 포인트>는 10%대의 예매율로 3, 4위, <시실리 2km>는 10%가 조금 안되는 수치로 5위를 기록중이다.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헬보이>는 5위 안에 들지 못했고 잔혹장면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역효과를 일으켰는지 <쓰리, 몬스터>의 예매율도 시원찮다. 신작들의 대공세 속에서도 <바람의 파이터>가 2주연속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사실. 다음주 박스오피스 결과가 궁금해지는 대목이지만 흥행결과를 떠나 입맛따라 골라보기엔 이번주만큼 가지수가 풍성한 밥상도 드물다.

<쓰리, 몬스터>의 박찬욱·강혜정 [2] - 박찬욱

본전도 못할까봐. 그게 제일 큰 공포지 군말없는 감독 박찬욱 건방지고 오만하다? 오해다. 솔직하며 여유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착하다. “죽겠어요. 3편을 동시에 하는 셈이니. <쓰리, 몬스터> 후반 작업, <친절한 금자씨> 시나리오 작업, 네장으로 나오는 <올드보이> DVD 확장판 작업까지.” 그는 좀 봐달라고 했다. 파병반대 영화인 선언 직후, 그에게 파병반대에 관한 원고를 한 페이지만 써달라고 청탁하자 정작 그가 사정을 봐달라고 했다.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자마자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요. 미안해요” 한다. 다른 감독들이 다들 못 쓰겠다고 급박한 상황을 알렸더니 대번에 달라진다. “그래요? 그럼 할 수 없네.” 새벽 5시에 원고를 넣어주면서 두 문장을 첨가했다. “원고 보냅니다. 미워요.” 감독과 배우를 표지에 나란히 등장시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웬만해선 구도가 잘 안 나온다. ‘안타까운’ 마음에 양해도 구하지 않고 연출을 감행했다. 담배를 물리고 가슴을 풀어헤쳐 여배우의 손을 끼워넣었다. ‘양아치 같지 않느냐’고 한마디할 것도 같은데 군말이 없다. 순한 양 같다. -<올드보이> 이후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라 부담을 느끼지 않는가. =내가 그런 성격이 아니라서. 될 대로 되라는 스타일이라서…. -계급 갈등을 새롭게 다뤘는데. =예전의 가난했던 시절에 맨주먹으로 부를 이루던 때와 달리 부를 세습하면서 잘 교육받은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매너가 좋고 젠틀하며 어려서부터 어려움 없이 자라니까 성격은 꼬인 데가 없다. 그러니까 부자가 착하기도 한 세상이다. 반면 가난뱅이는 더욱 박탈감이 커지고, 가난해서 성격이 더 나빠지기 쉬운 세상이 됐다. 21세기를 생각한다는 무슨 모임에 나가게 된 적이 있는데 재벌 2세, 의사, 변호사 등의 내 또래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들 부드럽고 예의바를 수가 없었다. 겉으로만 내보이는 모습이랄 수도 있지만 속속들이 정말 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이 얘기가 시작된 것 같다. -영화 처음의 흡혈귀 장면은 <친절한 금자씨> 이후로 계획하고 있는 뱀파이어 영화 <박쥐>를 염두에 둔 것인지. =그 생각은 했는데 <박쥐>가 그런 스타일의 영화는 아니다. 소재는 같지만, 스타일은 딴판으로 갈 거다. 화려한 영화가 아니다. -장르로 따진다면. =종교영화! -호러, 하면 떠올리는 게 무언지, 어떤 호러를 하고 싶었나. =호러영화는 무서워서 극장에서 못 보고 주로 DVD로 본다. 보다가 너무 무서우면 잠시 꺼놓고 숨돌린 뒤 다시 본다. 극장에선 <장화, 홍련> 딱 한편 봤다.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에서 상자 속에서 눈이 끔벅끔벅하는 거, 남자가 복도에서 누군가를 볼 때 무서웠다. 이렇게 무서움을 타니까 호러를 좋아하는 거 아닐까. <쓰리, 몬스터>에선 초자연 현상이 없는 호러, 유머가 있는 호러를 하고 싶었다. -배우에게 어떤 주문을 했나. =임원희는 상황을 장악하고 세 사람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그 조건 안에서는 가장 거대하고 힘있는 존재다. 그렇다고 완전히 압도해버리는 악당이 아니었으면 했다. 엑스트라로서 그 유명한 감독에게 약간은 주눅들어 있는, 그 상황에서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길 원했다. 그런 걸 느꼈을지 모르겠는데 다 갖고 노는데 뭔가 꿀리는 느낌이 있다. 오히려 당하는 이병헌이 더 당당해 보이는 그런 게 있다. 두 사람의 계급적 정체성이 이런 조건에서도 완전히 역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병헌은 가장 변화가 많은 인물이다. 겁에 질렸다가 애원했다가 화도 냈다가 별의별 고백을 하기도 하는. 여러 감정의 변화를 부드럽게 넘어가는 걸 가장 중요시했고 본인도 그걸 가장 고민했다. -배우의 연기가 의도대로 나오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하나.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뭐가 미흡한지 알겠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알면 고치면 될 테고, 모르겠을 때는… 옛날에 데뷔작 찍을 때는 감독이 모르겠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말이 안 돼도 이렇게 해보라고 요구를 하고는 했지만 지금은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긴 아닌 것 같다고. 어떻게 바꿔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한번 해보자고. 그래서 막연히 다시 해서 뭔가 발견되기도 하고. 대개 감독들이 그렇듯 모니터에 녹화하니까 되풀이해서 보면 알게 된다. -연기 말고 본인이 원하는 상황 중 안 되는 것은 무언가. =극장. 문제가 많다. 이 영화는 비스타 비전이라 조금 다른데 장편을 찍을 때는 항상 시네마스코프로 찍는다. 그런데 좌우가 너무 많이 잘려나가고 심지어 위아래도 잘려나간다. 화면에는 내가 찍은 영화의 70, 80%밖에 안 나온다. 구도를 이렇게 답답하게 잡았던가 할 정도로. 외국에 나가서 보면 괜찮고. 할리우드영화도 다 이렇게 본다는 건데 정말 문제다. -전작들도, 이 영화도 한 인간과 그 인간을 몰락시키는 환경이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개인의 내면이나 서정성을 파고들어가는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나. =<친절한 금자씨>가 비교적 그런 것인데, 난 내면이 드러나지 않는 영화가 좋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가 잘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궁금한 영화가 더 좋은 것 같다. 행동만 있어서 그 행동으로 관객이 생각하게 하는. -아이와 인질의 구도가 나오는데, 이런 영화들이 자꾸 나온다. 〈4인용 식탁> <바람난 가족> 등. =아이들에 대한 폭력이 훨씬 더 폭력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영화 만들면서 느끼는 공포는. =흥행. 본전도 못할까봐. 그게 제일 큰 공포지. 그 다음은 마누라가 별로라고 그럴까봐. 제일 신경쓰이는 관객이다. 함께 사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이번에 <친절한 금자씨> 시나리오를 잘 못 썼다고 그래서 고치려고 한다. 2고까지 썼는데 지적이 많더라. 그리고는 별로 없는데.

대장과 막내가 함께 쓴 ‘남극에서 온 편지’ [2] - 유지태

"저요, 아직 성장중이죠" 선배들과 앙상블 연기에 목마른 유지태가 보내는 편지 언제였더라. 돌풍에 맞서 강호 선배가 카메라쪽으로 다가서는 장면 촬영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날이었어요. 순간적으로 입술을 약간 삐죽이시던데. 야. 저거구나. 시나리오상에서 날 받아줄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최도형 대장의 표정이 그대로 전해져왔어요. 나중에 강호 선배는 강풍기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일 뿐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요. <남극일기>를 품에 넣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선배 배우들에게 자극받고 또 그들과 앙상블 연기를 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이번엔 강호 선배 말고도 박희순, 김경익, 윤제문, 최덕문 등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쟁쟁한 이력을 다진 선배들까지 모셔야 할 분들이 한두분이 아닙니다. 제 역할은 김민재. 실제 나이로도 그렇고, 극중 여섯대원 중에서도 막내입니다. <남극일기>에서야 원래 제 나이를 찾게 됐죠. 그래서 기뻐요. <올드보이>에서 저, 최민식 선배와 동갑이었잖아요. 올백한 머리의 40대 남자.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에서는 또 어떻구요. 퉁퉁한 유부남이었으니까. 민재는 탐험대원 중 가장 영혼이 맑고 희망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시나리오를 본 누군가는 다소 전형적인 인물 아니냐고 하는데,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서 탈피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봐요. 대개 블록버스터라 하면 배우들은 온데간데없고 CG만 난무하는 영화를 연상하는데, <남극일기>는 아니에요. 민재만 하더라도 후반부의 극심한 변화를 겪죠. 배우들이 가려지는 영화는 아니에요. 제 역할만 놓고보면 성장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정도니까. 첫 촬영 때요? 음… 물론 힘들었죠. 발동이 걸리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탐험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민재가 크레바스에 빠지는 장면이었는데 첫 장면부터 액션이라 애먹었거든요. 후반부 촬영을 위해 헬기로 일부 스탭만 이동해서 찍는 마운트 가비 촬영분량이 남아 있는데 이게 저로선 숙제죠. 맏형인 강호 선배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왜 자기 커리어가 생기고 스타덤에 오르면 어느 지점에서 다른 이들이 더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거부하거나 다가서지 못하도록 벽을 만들게 마련인데 그런 게 없어요. 오히려 선배가 편하게 다가서는 편이죠. 동료나 후배들에게 친근하다는 뜻만은 아니고. 선배님 하시는 거 유심히 보고 있으면 다른 배우들까지 이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최도형처럼. 일종의 바운더리를 만들어주고 그 안으로 인도하는 거죠.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설화법을 쓰는 것도 시원해서 좋고. 이 팀워크를 그대로 한국에 갖고서 돌아가야죠. 뉴질랜드는 몇번 드른 적이 있는 곳이라 낯설진 않아요. 공기가 맑으니까 숨쉬기도 편하고 한국도 이러면 좋겠다 싶죠. 사람들도 친절하고, 또 여러 인종이 섞여 살지만 차별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죠. 호주와 달리. 아, 누군가 저보고 지나치게 진지해서 문제라고 했다면서요. 감독인가요. 아니면 프로듀서인가요? 근데 아시잖아요. 저 원래 그런 부류인 거. 찌운 살을 빼기 위해서 촬영 시작하고 나서 술과 담배는 전혀 입에 안 대고 있어요. 헬스요? 여기 그런 데가 어딨어요. 저도 줄곧 걷고, 달리고 이래요. 도달불능점을 향한 민재의 여정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남극일기 다 쓰는 날까지 쭉 그래야죠.

추억속으로 지다, 재개봉 극장

학교에 없던 것이 거기에 있었다. 스크린 맞은 편의 컴컴한 객석에 파묻혀 있는 동안 그곳은 해방구였다. 주입식 학습, 획일적 규율, 군사문화의 폭력을 피해 그곳으로 숨어들면 사랑과 모험과 영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속반에 걸릴까 숨 고르면서도 화면에 넋 놓고 빠져들던 까까머리, 단발머리 소년소녀들은 거기서 사랑과 꿈과 인생을 배웠다. 재개봉관! 개봉관에서 막 내린 영화를 뒤늦게 다시 틀던 그곳은 6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도시 변두리의 청소년들에게 세상을 향해 뚫린 창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개봉관은 입장료도 비쌌고 별도의 버스비까지 필요했다. 가난하던 그때 용돈이 궁하던 아이들은 문화 소비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즘처럼 인터넷도 없고, 대중문화에 대한 통제가 유달리 심했던 당시에 호기심 왕성한 사춘기 학생들의 발길은 변두리 재개봉관, (재개봉관에서 상영한 영화를 뒤이어 트는) 삼개봉관, 사개봉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고 갔다. 왜 재개봉관에선 중간에 상영이 중지돼 한참을 기다리는 일이 생기는지. 또 같은 영등포의 재개봉관인데도 이소룡 영화는 연흥극장에서만 하고, 튜니티 시리즈는 경원극장에서만 했는지. 그리곤 어른이 돼 돌아보니 그 재개봉관들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 한때는 객석 1천개가 안 되는 낡은 극장에 하루 1만명 넘는 관객이 들고, 극장 수표 주임이 관할 경찰서 소년계 형사까지 갈아치웠다는 그 ‘힘 세던’ 재개봉관이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언제부터 얼마나 줄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조차 없다. 70년대 초반 서울 시내에만 140여 개의 극장이 있었다. 그 중 개봉관은 10곳이 안 됐고 나머지 대부분인 130여 곳이 재개봉관, 삼개봉관, 사개봉관이었다. 지금은 멀티플렉스가 많아져 개봉관 50여 곳에 스크린수 300여 개인 데 반해 재개봉관은 극동극장, 바다극장, 이수시네마 등 서너 곳에 불과하다. 극동극장은 몇해전부터 간판 값이 나오질 않아 극장 입구에 포스터만 붙여놓고 영화를 튼다. 386세대의 후미대열을 끝으로 ‘시네마 천국’ 세대가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그 시절 ‘시네마 천국’에선 어떤 일이‥ 1980년대 중반 이전만 해도 한국 극장의 압도적 다수는 재개봉관 이하 삼개봉관, 사개봉관이었다. 그러나 이들 극장에 대한 자료는 드물다. 입장료 공시제도가 사라진 80년대 초반 이후엔 서울시극장협회나 영화진흥공사 모두 개봉관과 재개봉관을 구별해 기록하지 않아 재개봉관의 수치부터 파악이 안 된다. 재개봉관 이하 극장의 배급 시스템을 정리해 놓은 자료도 찾기 어렵다. 또 당시의 관객들이 영화산업, 그것도 개봉관에서 간판을 내린 뒤부터 시작하는 마이너 영화산업에 관심을 갖기도 힘들었을 터. 그 시절 ‘시네마 천국’의 이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필름 복사본 달랑 13벌 화면엔 비가 주룩주룩 필름 프린트 한 벌로 세 극장이 동시에 상영 1970년을 전후해 정부는 영화 한편의 필름 프린트 수를 제한했다. 한국 영화, 외국 영화 모두 편당 13벌의 프린트로 전국의 극장을 돌려야 했다. 당시의 배급은 전국을 서울, 경기·강원, 충남북, 전남북·제주, 경북, 경남의 6개 권역으로 나눠 이뤄졌다. 각 권역이 2벌씩 가져가 개봉했고 개봉관 배급은 영화 제작·수입사가 직접 했다. 개봉관 상영이 끝나면 권역별로 배급업자가 영화 제작·수입사로부터 프린트를 1년 안팎의 기간에 돈 주고 빌린다. 그걸 재개봉관에 거는데 서울의 경우 두 벌로는 수요를 메우기 어렵다. 홍콩 영화 뜨자 프린트 수 제한 지역별로 필름 바꿔치기 상영 배달사고 나면 하염없는 기다림 영등포 지역 재개봉관에 한 벌, 서대문과 남대문을 묶어 한 벌, 종로와 청량리를 묶어 한 벌씩 세 벌을 마련하기 위해 통상 경기·강원 지역에서 한 벌을 빌려온다. 그러면 영등포의 재개봉관은 프린트 한 벌 가지고 여유있게 틀고 나머지 지역은 두 극장이 한 벌을 가지고 돌려 튼다. 프린트 한벌은 필름 천자짜리(10분 분량) 통으로 나뉘어 있어 한 극장이 1번 통을 틀 때, 다른 극장은 4번 통을 틀면서 상영이 끝난 통을 자전거에 싣고 재빨리 날랐다. 배달사고가 나면 어쩔 수 없다. 상영 중간에 쉬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나아가 경기·강원지역에서 한 벌을 빌리지 못하거나 큰 흥행작일 경우엔 세 극장이 한 벌로 돌려틀었다. 이런 식으로 재개봉관이 끝나면 삼개봉관, 다시 4개봉관까지 간다. 그러니 프린트가 성할 리 없다. 13벌 중 남은 한 벌은 인기가 좋을 때 다시 개봉관에 걸기 위한, 영화사 별도 보관용이다. 60년대부터 배급업에 관여했던 김형종 롯데월드시네마 부사장은 “재개봉관이 필름 잘라서 틀었다고 하는데 오해다. 그거 한 컷 살리려고 테이프 붙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고 말했다. 홍콩 영화를 제한하라, ‘프린트 쿼터(?)제’ ▷ 서울에서 몇 곳 안 남은 재개봉관 중 하나인 사당동 이수시네마의 영사실 / 윤운식 기자 김 부사장 말로는 프린트 벌수를 제한한 건 60년대 후반 ‘외팔이’ 시리즈 등 홍콩 무협영화가 크게 히트하면서부터였다. 이전까지 흥행을 주도한 건 한국 영화였고, 프린트 제작비용 더 들일 필요 없이 10벌 안팎 선에서 앞의 방식으로 돌리면 적당한 흥행의 규모였다. 그런데 홍콩 영화가 대박이 터지면서 영화사들이 홍콩 영화의 프린트 수를 늘리려 하자 정부가 프린트 벌수를 제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 2~3년 동안 홍콩영화 수입 편수 자체를 1년에 1~3편으로 제한해 당시 허가돼 있던 20개 영화사들이 홍콩영화 수입 권리를 제비뽑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외팔이’ 시리즈 같은 화제작이 나올 때 관객들이 빨리 보고 싶어하는 건 당연했다. 재개봉관에 오기를 기다리는 관객을 줄이기 위해 개봉관들은 서울시극장협회 규정에 조항을 만들어 한 영화가 개봉관 상영이 끝난 뒤 2주가 지나야만 재개봉관에 걸 수 있도록 했다. 재개봉관으로선 속터지는 일이지만 개봉관의 힘이 센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다만 해당 영화를 상영한 개봉관이 양해하면 2주가 지나지 않아도 재개봉관에서 틀 수 있다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로비가 극심했음을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70년대판 ‘아트 시네마’, 외국영화 전문 재상영관 몇몇 홍콩영화를 빼면 70년대 초반까지 재개봉관 이하 극장의 흥행을 주도한 건 한국영화였다. 외국 영화 중에서도 특히 서양 영화는 재개봉관 배급업자들이 잘 취급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외국 영화를 수입한 영화사와 직접 거래해 외국 영화만 재개봉하는 특수한 극장이 생겨났다. 서울 명동의 명동극장, 프라자호텔 뒤 경남극장은 70년대판 ‘아트시네마’였고 대학생들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담배연기 동네광고 임검석‥ 60~70년대에 재개봉 극장은 인근 지역에서 제일 큰 건물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인기가 좋았던 ‘라이브 쇼’를 이 재개봉관에서 했다. 구봉서, 서영춘, 배삼룡씨 등 코미디언을 내세우고 가수 몇명과 짝지어 공연하는 이 쇼는 두 달에 한번 꼴로 재개봉관을 순회했다. 또 재개봉관이 주변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동네 사진관, 갈비집, 예식장 등을 광고하기에도 좋았다. 재개봉관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 5분 동안 슬라이드와 가끔씩 필름으로 찍은, 조악하면서도 정겨운 동네 광고들을 만났던 경험은 지금 멀티플렉스에선 찾아볼 수 없다. 지금 극장에서 담배를 핀다는 건 객석은 물론 휴게실에서도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의 재개봉관에도 스크린 양 옆에 ‘금연’과 ‘탈모’라는 표어판이 붙어있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 그냥 피웠고 그때의 담배관념에서 이 흡연을 말리는 이도 없었다. 스크린 앞으로 스멀스멀 담배연기가 올라가는 광경은 지금 같으면 범죄의 현장이 됐을 것이다. 반면 지금 극장에서 모자쓰는 걸 뭐라고 하는 사람이나 표어는 없다. 스크린 옆에 부착돼 있던 게 하나 더 있다. 대형 시계. 바늘 시계든, 숫자 시계든 껌껌할 때도 볼 수 있게 조명을 했다. 70년대부터 경원극장을 운영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이건 “당시만 해도 시계 없는 사람이 많았던” 데 따른 배려였다. 또 지정좌석제가 아닌 재개봉관은 입석관람이 허용됐다. 당국에서 객석 외의 공간 크기에 비례해 입석 가능 인원 수를 지정했다. 그 인원수가 평균해서 객석수의 10분의 1쯤 됐다. ▷ 서울 시내 한 극장의 간판 그리는 모습. 스크린으로부터 먼 뒷쪽 객석엔 ‘임검석’이라고 쓰여진 자리가 꼭 하나씩 있었다. 파출소 순경이 교대로 하루에 한번씩 이 자리에 와 임검부에 사인하고 갔다. 범죄자나,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에 청소년이 보러오는 걸 감시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단속은 이 자리를 찾는 순경이 아니라 주로 경찰, 시청문화과, 학교 교사로 짜여진 합동단속반의 몫이었다. 이들은 세달에 한번 꼴로 극장을 찾았고 신고가 들어오면 더 빨리 왔다. 앞의 관계자에 따르면 막상 재개봉관 운영자를 속 썩이게 만든 건 교외지도 교사였다. “원래 제도는 교외지도 교사가 극장 반경 50m 밖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교사들이 미성년자 관람가 영화임에도 수시로 극장 안에 들어와 학생들을 끌어낼 때면 속이 상했다.” 재개봉관 몰락사 1970년대 초 140여 곳에 이르던 서울의 극장수가 70년대 중반 70여 곳으로 줄었다. 세무 당국이 입장료의 30%를 입장세로 거둬간 탓에 이윤이 크게 남지 않았고, 부동산 붐이 일면서 건물주들이 극장을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77년에 세제가 바뀌어 입장료의 11분의 1을 부가세로 내기 시작하면서 극장업은 다시 활기를 띠는 듯했으나 80년대 초 프린트 벌수 제한이 풀리고 객석 100석 안팎의 소극장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소극장에 밀려 기존 재개봉관의 입지가 줄어든 것이다. 곧 이어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됐고, 관객은 할리우드 영화를 찾아 개봉관으로 향했다. 비디오 보급의 확대는 재개봉관에 찾아갈 필요성을 반감시켜 90년대초 소극장들을 문닫게 만들었다. 배급도 시들해져 마지막까지 서울에서 재개봉 배급을 해온 서울영화배급도 경기·강원 지역으로 옮겨갔다. 소극장에 밀리다 비디오에 결정타 80년대 중반부터 재개봉관들은 개봉관으로 하나둘씩 전환했고, 멀티플렉스 바람이 불자 기존 극장을 쪼개고 옆 건물을 임대하면서 스크린 수를 늘렸으나 경영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개봉관으로 옮겨간 동일, 대지, 성남, 새서울극장이 7년 전부터 지난해까지 잇따라 문을 닫았다. 삼개봉관이었다가 재개봉관을 거쳐 개봉관으로 ‘승격’한 녹번동 도원극장은 상암시지브이가 들어서면서, 80년대 중반 개봉관이 된 경원극장은 영등포 롯데시네마의 개관을 코앞에 두고서 깊은 한숨을 쉬고 있다. 홍기선 감독 특별 기고, 서극 <촉산>‥삼류극장의 재발견 고화질 대형 화면과 온 신경을 뒤흔드는 멀티 채널의 사운드, 최첨단을 자랑하는 요즘 극장에서 영화 감독들은 자신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올바로 전달되는 것에 만족하며 좀더 좋은 화면과 사운드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가운데 스크린이나 사운드 상태가 떨어지는 곳에 가면 내 작품이 여기저기 찢겨져 상영되는 것 같은 조바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가도 한편으로 내가 자라오면서 주로 경험한 극장들, 지금의 나를 있게 했던 극장들이 칙칙한 화면과 찢어지는 듯한 사운드, 낙후된 시설의 삼류 재개봉관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자조의 웃음이 나온다. 나는 6~7살 때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의 야외상영으로 처음 영화를 봤다. 개봉관, 재개봉관, 삼개봉관, 동시상영관 거쳐 트는 유랑극장인 셈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재수할 때 아르바이트하고 남산 시립도서관 가서 책 읽는 것 빼고 친구 하나 없는 내가 시간을 보낼 곳이 없었다. 그러다 발견한 곳이 파고다극장이었다. 파고다극장은 한 번 표를 사고 들어가면 종일 있어도 되는 동시상영관이었다. 하루종일 자다 깨며 코고는 사람, 상영 도중 영화가 끊기면 휘파람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필름이 낡아 화면은 빗물이 하얗게 내리는 것 같아 영사기 돌아가는 소음과 함께 마치 빗속에서 영화가 틀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 이런 환경의 극장에서 사춘기 시절 나를 영화의 세계로 끌어당긴 영화들을 만나게 됐다. 〈젊은이의 양지〉 〈미망인〉 〈내일을 향해 쏴라〉 등등 …. 당시 내가 몇번씩 보며 빠져들었던 영화들을 생각해보면 대개가 해피엔딩이 아닌 주인공이 마지막에 죽는 영화들이었던 것 같다. 동시상영하는 음침한 삼류극장의 비 내리는 스크린 앞에서 재수도 아닌 재수를 하며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린 16살 사춘기 소년이 마지막에 주인공이 죽는 비극적인 영화에 빠져 있는 모습이라니 …. 대학 졸업 뒤 서울영화집단에 있던 1983년께 장선우 선배가 재미있는 영화가 있으니 보러가자고 해 청계천 7가쯤에 있는 청계극장에 갔다. 1천석이 넘는 동시상영관이었는데도 자리가 거의 꽉 찼다. 그때 본 영화가 〈촉산〉이었다. 허공을 나는 기술이나 화면의 분위기가 이전의 홍콩 무협영화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마 개봉관에서는 각광을 받지 못하고 영화인들에게도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재개봉관을 전전하면서 관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궁금증에 미국문화원까지 가 자료를 찾아본 결과 감독 쉬커(서극)가 겨우 32살의 신진이고, 조지 루커스의 〈스타워스〉 특수효과를 맡은 기술팀과 함께 작업한 것을 알게 되었다. 쉬커 감독의 등장과 〈촉산〉은 이후 10년여의 홍콩영화의 르네상스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몇 해 뒤 개봉한 쉬커의 〈천녀유혼〉 또한 개봉관에서는 짧게 끝났지만 재개봉관 상영을 거치면서 소문이 나 많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때 재개봉관은 영화를 재발견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홍기선/〈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선택〉 감독

[정이현의 해석남녀] <바람난 가족>의 호정

여보세요. 나야, 뭐하고 있어? 응, 애 유치원 보내고 아침 토크쇼 보고 있다고? 그렇구나. 나는 회사야. 나, 어제 시어머니랑 또 한바탕 했다. 우리부부가 맞벌이 하니까 아주 돈을 갈고리로 긁어모으는 줄 아시나봐. 글쎄 우리더러 시동생 결혼하는데 한 밑천 보태라는 거 있지? 이젠 정말 지겨워서 못 살겠어.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아침마다 동동거리면서도 한푼이라도 더 벌러 나오는 며느리 사정은 모르나봐. 아무튼 이럴 땐 시집 잘 가서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고 호강하는 여자들이 젤 부럽다니까. 그래, 나도 호정이 소식 들었어. 기가 막히더라. 걔 결혼할 때 우리가 다 입 벌리고 부러워했잖아. 신랑은 인물 좋은 변호사에, 시댁에 돈도 많고, 또 신세대 시어머니에다... 세상 부러울 거 없이 사는 거 같더니 그렇게 한순간에 끝장나는구나, 싶더라.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은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거야. 남의 애 임신한 마누라한테 왕창 위자료 줄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니? 그 남편이 아무리 잘난 척 해도 겉으로만 그런 거지. 한국남자들 중에 어디 뼛속까지 쿨한 남자 있든? 점점 배는 불러오는데 호정이 걔 요즘 고생이 말이 아니라더라. 그러니까 즐기려면 조용히 즐기지. 바보처럼 왜 덜컥 임신은 했나 몰라. 애 하나 낳아서 키우는데 돈이 또 얼마나 드니? 지가 무슨 세기의 발레리나도 아니잖아. 동네 무용단이나 왔다갔다하면서 어떻게 갓난아기랑 둘이 입에 풀칠하고 산다니? 여태껏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써온 씀씀이가 있으니까 더 힘들텐데 말야. 자존심 챙기는 건 좋은데 세상물정을 너무 모르긴 했어. 근데 하고많은 남자 중에 왜 하필 ‘고딩’ 이랑 그랬을까. 물론 아직 때가 덜 탔으니까 애가 좀 순수하긴 했겠지. 하지만 과연 둘이 서로 사랑하고 이해했을까? 그 나이 남자애가 끌렸던 건 호정이라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저 ‘만질 수 있는 여자 몸’ 이었는지도 모르잖아. 혹여 애를 가지고 싶었다 해도 그래. 그 남자애가 무슨 ‘씨내리’나 정자은행쯤 되니? 한 생명은 엄마 뿐 아니라 아빠도 같이 나눠야 할 책임이라고 봐, 나는. 또 거기서 남녀가 바뀌었다고 생각해 봐. 결혼생활이 권태로운 아저씨가 옆집 여고생과 교감을 나누고 성애에 눈뜨게 했다? 이건 완전 파렴치범이 따로 없잖아. 휴, 아무튼 호정이가 나랑 딱 이틀만 바꿔 살아봤다면 그런 결정은 안 했을 거야. 솔직히 ‘있는 애들’ 이나 쿨한 거 아니니? 남편이랑 속궁합? ‘포인트’ 가 사라져? 놀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걔 인생에 고민은 그게 다였잖아. 누구는 돈 벌랴, 살림하랴, 애 키우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말야. 누구는 뭐 바보천치라서 이러고 사는 줄 아나? 진짜 그냥 확 관둬버릴까 싶다가도, 또 꾸역꾸역 살아지는 게 인생인데 어떡하니. 그나저나 우리 시동생 결혼 어쩌면 좋니? 이번 달에 들어갈 돈이 얼마나 많은데. 어휴, 내 팔자야.

시대를 뛰어넘은 어릿광대의 매혹, 페데리코 펠리니 특별전 상영

시네마테크 부산, 8월27일부터 페데리코 펠리니 특별전 상영 “내 영화는 보기 위한 것이지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인터비스타>(1987) 중에서 영화사의 거장들이 거장인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스타일과 영화문법의 성공적 실험, 혁신을 가능케 한 도저한 미학적 사유, 그도 아니면 의미심장한 시대정신의 체현과 같은.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들과 우리 사이에 놓인 시차를 변명하기엔 범접하기 어려운 간유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가 기본적으로 서커스의 요란한 볼거리(스펙터클)와 일맥상통한다고 굳게 믿어 거장이 된 페데리코 펠리니의 위치는 확실히 특이하다. 시대를 넘어서도 분명한 펠리니 영화의 매혹,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미덕과도 얼마간 통한다. 페데리코 펠리니는 광대였다. 한때 실제로도 그랬고, 그의 영화 이력도 여러모로 인구가 복작이는 도시로부터 한적한 해안마을까지 두루 다니는 유랑극단의 여정을 닮아 있다. 불을 뿜는 차력사와 반도네온의 선율, 무대 앞뒤를 오가며 연기하는 희극배우들은 그가 사랑하는 모티브였다. 전기와 후기의 차이라면, 그가 영화를 점점 더 서커스의 일종으로 여기면서,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이 그 서커스에 다 들어 있다고 점점 더 과격하게 확신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스스로의 내밀한 욕망이나 환상까지 그 쇼에 포함시키게 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네오리얼리즘에서 역사와 상상의 경계까지 무너뜨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쉬지 않고 전진했던 그의 영상 이력은 실은 모두 하나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페데리코 펠리니를 ‘가장 논쟁적인’ 거장으로 만들었다. 로셀리니를 위해 <무방비 도시>의 각본을 쓰며 영화를 배웠지만, 금세 네오리얼리즘에 등을 돌렸고, 가톨릭적 구원 주위를 배회하다가도 결국 가장 퇴폐적인 데카당스로 치달았던 펠리니. 파파라치가 암약하는 로마의 뒷골목, 지극히 현실적인 정경으로부터 자신의 추억과 내면으로 잠수해버렸던 펠리니에게서 시대적 무게를 상담하기란 애초에 번지수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서커스의 천진한 스펙터클에서 구원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성이 실패하는 네오리얼리즘의 냉담한 시선을 아슬아슬 줄타기하던 펠리니의 곡예는 그런 의미에서 천천히 무(無)를 향해 행진하는 바로크 스타일 가장행렬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의식의 박약을 늘 질타받았지만 대신 그 영화와의 연애를 꿈꾸는 이들에게 기억할 만한 상상력과 영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어릿광대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들이 오는 8월27일부터 9월12일까지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상영된다. ‘페데리코 펠리니 특별전’라는 제하의 이번 프로그램에는 그의 첫 단독 연출데뷔작인 <백인추장>에서부터 <길> 〈8과 1/2> <달콤한 인생>과 같은 대표작, 그리고 85년에 만든 <진저와 프레드>까지 총 14편이 망라돼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제 Fellini Retrospective> 일시 8월 27일(금)~9월12일(일)장소 시네마테크 부산 (해운대 요트경기장 내) 051-742-5377,5477주최 시네마테크 부산 http://cinema.piff.org/ <비텔로니> I Vitelloni, The Young and the passionate l 1953년 l 103분 l 흑백 <백인추장>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대타로 투입돼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흔히 <청춘군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네오리얼리즘의 수련을 끝낸 펠리니가 만든 사실상 첫 단독 연출작이다. 펠리니의 영화에서 자전적 요소가 있다는 것은 이제 너무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사전적으로는 ‘암소들’이라는 뜻이고 풀이하자면 ‘백수들’인 비텔로니들은 속에는 리미니라는 작은 해안소도시에서 자란 그의 얼굴이 여기저기 발견된다. 여자를 임신시키고 기행을 저지르는 악동, 극본을 쓰겠다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풋내기 예술가,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 그리고 결국 마을을 뜨는 청년 모랄도, 모두 어느 정도 펠리니 자신의 모습을 다룬 익살이다. 천사상을 훔친 악동이 어지럽게 어릿광대에게 쫓기는 카니발 장면에서 펠리니가 리얼리즘에 결코 머물지 않을 것임을 예견케 한다. <카비리아의 밤> Le Notti Di Cabiria, Nights of Cabiria l 1957년 l 110분 l 흑백 수난받으며 세상의 죄악을 정화하는 백치 여인이 펠리니만의 것은 아니지만, 이 수난을 서커스의 슬랩스틱으로 받아내는 것만큼은 펠리니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의 것이다. <길> <사기꾼들>에 이어 구원의 3부작으로 명명되는 이 영화에서 마시나는 아예 로마의 창녀 카비리아로 분해 구원의 약속을 가장한 가짜 기적들에 거듭 배신당한다. 계급과 사회의 폐부로 돌진해 인간성의 실패를 드러내는 네오리얼리즘의 눈과 구원을 바라는 순진한 눈길이 만드는 팽팽한 긴장을 견뎌내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수도사가 고해성사를 거절하고, 화려한 스타가 카비리아를 욕실 속에 가둘 때, 그나마 가녀린 희망이 소박한 거리의 스펙터클-축제에 남겨져 있다, 고 펠리니는 말한다. 물론 그도 이때까지뿐이다.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 l 1960년 l 174분 l 흑백 예수의 거상을 헬리콥터에 매달고 날아가는 그 유명한 첫 장면을 통해 펠리니는 ‘구원이 없다’고 일찌감치 선언한다. 음란한 쾌락과 부르주아들의 공허한 관계, 황폐한 소동으로 가득한 현대 로마는 어딜 가나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바벨탑의 정경을 연상시킨다. 카니발은 더이상 구원이 아니고, 순수한 영혼의 소녀는 정화를 포기하고 돌아가버린다. 이상한 일은, 밤이 오면 나이트클럽으로 하강했다가 새벽에 성 베드로 성당으로 고양하는 이 현기증나는 지옥도가 실은 아주 매력적이라는 데 있다. 네오리얼리즘의 수법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구원의 상징을 추적하며 데카당스의 매혹에도 동시에 흔들리는 이 영화는, 어쩌면 펠리니의 전·후기 모든 골자들을 망라한 진정한 대표작이다. 〈8과 1/2> 8 1/2 l 1963년 l 138분 l 흑백 너무 유명해서 뭔가 더 말을 보태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지만 사실, 〈8과 1/2>는 자서전적이라기보다 뻔뻔한 영화일지 모른다. 〈8과 1/2>의 현재진행형의 제작과정이 틀림없는 이 영화의 부분부분은 분명 다큐멘터리와 혼동되는 순간이 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빠져드는 감독의 백일몽을 통해 현재와 과거, 환상과 현실이 섞여들여오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모더니즘 양식으로 뛰쳐나간다. 하긴 스스로 광대였던 펠리니에게 자전영화란 애초, 서커스 무대 뒤 풍경을 찍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찍기 얼마 전부터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욕망과 무의식의 중층에서 스펙터클을 발견한 펠리니가 서서히 동시대의 현실과 작별을 고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티리콘> Fellini Satyricon l 1969년 l 138분 l 컬러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의 동명소설을 기초로 만든 펠리니 최초의 역사물 <사티리콘>은 한마디로 막 나가는 영화다. 로마를 방문해 추문의 스펙터클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달콤한 인생>의 과격한 1세기 버전이랄까. 역사는 말뿐이고, 1세기 로마인을 화성인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펠리니의 말처럼, 역사라는 설정으로 현실과 최소한의 접점을 포기한 만큼 펠리니는 그로테스크한 인물들, 남색, 수간, 카니발리즘 등 1세기 로마를 금기는 존재하지 않는 억눌린 욕망과 꿈의 상징계처럼 그려 보인다. 기름진 장식과 과잉의 에너지로 충만한 이 바로크풍 풍속화 속에서는 역사와 판타지간 최소한의 구별마저 사라지고 없다. <달콤한 인생>에서처럼 로마를 서구문명의 환유로 사용했던 펠리니는, 68혁명 이후의 여러 정황을 정말로 심각하게 비관했던 것일까? 데카당스를 경고하면서도 오히려 매혹된 듯한 인상의 이 작업은, 그의 두 번째 역사물(?) <카사노바>와 함께, ‘펠리니스크’(Fellinisque)한 스펙터클의 정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여인의 도시> La Citta Delle Donne l 1980년 l 140분 l 컬러 초로의 바람둥이가 기차에서 만난 여인을 쫓다 우연히 페미니스트들의 집회장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한다. 처음엔 이 여인천하가 잠시 자신이 꿈꾸던 낙원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위협을 느껴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이번에 도착한 곳은 1만명의 여인을 정복했다는 쇼비니스트의 성.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는 이 만화 같은 이야기는 초현실주의적이라거나 몽환적이라기보다는 아예 펠리니 자신이 꾼 꿈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애초 잉마르 베리만과 함께 구상하고 공동 작업할 생각이었다는 이 영화는, 실현되었다면 역사적 작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다만 모욕을 느낀 페미니스트 진영의 악의에 찬 비난을 받아야 했다. 펠리니는 그 때문에 해명을 거듭해야 했지만, 그의 진짜 저의가 무엇이었든 칼 융과 정신분석에 깊이 경도되어 꿈과 환상, 기표와 상징을 더 전면에 내세운 노년의 펠리니를 보게 해준다. 김종연/ 영화평론가 il_volo@freechal.com

독립장편영화에 희망을! ‘아트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더+’

‘아트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썬데이@서울>등 13편, 전국 릴레이 상영 와이드 릴리즈와 천만관객 시대의 그늘에서 “볼 만한 새 영화, 새로운 영화가 없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들에게 전하는 희소식. 오는 8월27일부터 10월7일까지 전국의 아트플러스 체인 8개 극장에서 13편의 새로운 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독립장편영화들을 두 섹션으로 나누어 섹션마다 1주일씩 각각의 극장에서 릴레이 상영하는 ‘아트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는 아트플러스가 주최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후원하는 행사. 그간 독립‘장편’영화는, 그나마 각종 영화제를 통해서 간간이 소개될 수 있었던 단편영화에 비해 일반관객에게 선보일 기회가 더욱 제한돼 있었던 분야. 최근 디지털영화의 보급으로 예전보다 많은 수의 장편들이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막상 이들을 수용할 만한 창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올 3월 다큐멘터리 <송환>을 배급하면서 저예산, 대안영화 배급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른 아트플러스 네트워크는, 하반기부터 정기적으로 장편독립영화를 배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번 릴레이 시사를 통해 좋은 반응을 얻은 작품은 이후 아트플러스의 배급망을 통해 좀더 많은 관객을 찾아가게 될 것이다. 한편 13편의 영화들은 좀처럼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다양한 면모를 자랑한다. 황규덕(<철수, 영희>), 이두용(<애>), 장길수(<초승달과 밤배>) 등 충무로에서 활동한 지 10년도 넘는 중견, 노장감독부터 이제 첫 장편을 완성한 조범구(<양아치어조>), 노동석(<마이 제너레이션>), 신재인(<신성일의 행방불명>) 등 단편영화계의 스타감독,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오명훈(<썬데이@서울>), 황철민(<프락치>) 감독, 그리고 조선족 감독으로 눈길을 끌었던 장률(<당시>)까지 연출자들의 이력과 출신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대담한 실험부터 서정적인 우화까지 각각의 영화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동시대를 고민하면서 소외된 이들에게 향해 있는 이들의 시선은 13편의 영화를 관통할 만한 키워드다. 충무로 경력이 없는 감독의 작품들 중, 그간 <씨네21> 지면에서 미처 소개하지 않았던 다섯 작품들을 소개한다. 아트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 주최 아트플러스 시네마네트워크 후원 영화진흥위원회 상영작 <선데이 서울> 등 총 13편의 한국영화 상영관 아트플러스 전국 8개관 일정 8월27일(금) ~ 10월7일(목) (전국 릴레이 상영) 문의 동숭아트센터 영상사업팀 02-766-3390 내선 552 <마이 제너레이션> 노동석 l 2004년 l 35mm l 85분 l 출연 김병석, 유재경 <초롱과 나> <나무들이 봤어>를 통해 동심과 세상이 만나는 섬뜩한 순간을 포착했던 노동석 감독. 이번에는 평범하고 특별한 커플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무심하게 그려낸다. 웨딩촬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병석과 사설 대출업체에 경리로 취직하려 하는 재경. 병석은 형이 남긴 빚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재경은 ‘우울하다’는 이유로 첫 출근날 해고당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지만, 이 커플이 당장 모텔비를 포함한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병석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성인 비디오테이프를 팔기 위해 호객행위를 하고, 재경은 피라미드형 인터넷 쇼핑몰에 가입했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인맥마저 ‘절단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세상에 대해 쉽게 분노하거나 타협하지 않은 채 나름의 페이스로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 세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재경은 〈1호선>에서 위태롭게 플랫폼을 서성이던 바로 그 얼굴이며, 주연을 포함한 모든 등장인물은 감독의 주변에서 세심하게 캐스팅되고 배치된 비전문 배우들이 연기했다. 한편 병석의 작은 캠코더를 통해 ‘우리 세대’를 근심하던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조심스럽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하루일과를 묻는 병석에게, 재경은 대답한다. “그거 치우면 얘기해줄게.” 그녀의 볼에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그 순간, 카메라를 치우고 세상을 만나고 싶다는 감독의 작은 바람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프락치> 황철민 l 2004년 l DV6mm l 100분 l 출연 양영조, 추헌엽 나른한 열기가 가시지 않는, 에어컨도 없는 여관방에 두 남자가 장기 투숙 중이다. 무릇 여관방이란 그런 것이어서 밤이면 신음소리로 잠을 설치고, 낮이면 시도때도 없이 출몰하는 바퀴벌레에 시달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간간이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뉴스소리뿐이다. 젊은 남자는 정체가 드러난 프락치이고, 좀더 나이든 다른 남자는 그를 감시 중인 기관원. 두 사람이 무료를 이기기 위해 택한 방법은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죄와 벌>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둘의 유희는 사이코 드라마와 부조리극으로 변해가고, 이제 그들 자신마저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배경도 설명해주지 않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급변하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각종 영화적 기법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작품. 다큐멘터리 <옥천전투>를 비롯하여 <삶은 달걀> <그녀의 핸드폰> <푸른하늘 은하수> 등을 통해 실험영화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황철민 감독의 최근작이다. <썬데이@서울> 오명훈 l 2004년 l 35mm l 72분 l 출연 서충식, 서정연 80년대를 풍미했던 잡지 <썬데이 서울>. 선정성과 일방적 시각을 꾸준히 견지했던 타블로이드 잡지의 한구석을 차지하던 소식들은, 믿을 수 없지만 엄연히 동시대인들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오명훈 감독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이러한 조각 단신들을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하나의 플롯으로 완성했다. 여관방을 비추는 CCTV 화면이 한가득 모자이크되는 첫 장면 이후,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이들의 일상이 촘촘하게 배치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정환은 자신이 성인이 되는 날 콜걸 수희를 만날 생각에 들떠 있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부 명주는 수영장에서 만난 자유분방한 신애를 통해 조금씩 변해간다. 대학교수 동천은 자신을 외면하는 예전 학생 은영에게 버림받고도 끈적거리는 인연의 끈을 놓을 줄 모르며, 유부남 형사 지욱의 집에서 한낮의 데이트를 즐기던 수희는 갑자기 들이닥친 지욱의 처를 피해 아파트 파이프에 매달리게 된다. 요지경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때때로 대담한 비주얼 혹은 내공있는 연출력을 통해 전달되는데, 대미를 장식하는 두개의 여관방 장면은 여러모로 압권이라 할 만하다. 원신 원컷으로 촬영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여관방 한구석에서 두 인물의 남루한 성행위를 응시하던 CCTV화면이 클로즈업되지만 남는 것은 결국 조각조각 분절된 디지털 화소들뿐이다. 2004년 로카르노영화제 초청작. <양아치어조> 조범구 l 2004년 l DV6mm l 140분 l 출연 여민구, 김종태, 최석준, 양은용 건달, 깡패 등과 혼용되어 사용되는 ‘양아치’는, 본래 거지를 뜻하는 동냥아치의 줄임말이었다. <친구>에서는 남자의 의리를 아는 사람들을 뜻하는 건달에 비해, 돈만 밝히고 구린 짓 많이 하는 놈들로 분류되는 등 유독 삼류인생의 느낌이 강한 단어이기도 하다. <장마> <어떤 여행의 기록>의 조범구 감독은 변두리 양아치의 인생을 때로 조용히 응시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익수가 어머니의 보험금으로 친구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주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유독 많은 수의 등장인물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고등학생 익수와 3명의 친구들, 익수의 원룸에 기거하는 현진과 그녀의 술집 동료 3명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여기에 각종 채무관계로 얽혀 있는 인물들까지 합치면 비중있는 캐릭터는 10명을 훌쩍 넘어선다. 단출한 인물배치를 통해 깊이있는 울림을 주었던 감독은 이제 각각의 캐릭터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조하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 같다. 자신이 초래한 것도 아닌 빚에 어깨를 짓눌린 이들은 모두 동네 어귀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얼굴의 소유자.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어조’를 구사하는 이들은 야구 방망이에 사시미를 들고도 선뜻 속시원한 싸움 한판 ‘뜨지’ 못하는 소심한 인생이다. 말끝마다 ‘씨발’과 ‘새끼’를 달고 살고, 압구정이 어딘지도 모르는 이들, 그러나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신성일의 행방불명> 신재인 l 2004년 l DV6mm l 100분 l 출연 조현식, 예수정 신재인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단언하건대 오직 그의 머리를 통해서만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인물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수 있게 된 소년(<재능있는 소년>), 어느 순간 입에서 진실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남자(<그의 진실이 전진한다>) 등. 이번에는 식비를 아끼기 위해 먹는 것을 치욕적인 일이라고 가르치는 고아원 원장 밑에서 아무리 금식을 해도 빠지지 않는 자신의 살을 원망하는 소년 신성일이 주인공이다. 넘치는 재능만큼이나 행보를 종잡을 수 없었던 그가 디지털장편을 통해 자신의 비전을 심화, 확장시켰다. 여전히 성경 구절을 흉내낸 잠언들이 넘쳐나고, 현실과 환상, 실제와 비유를 종횡무진 오가는 영화 속에서 관객의 길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가 제공하는 재미를 음미했던 관객에게는 ‘나름대로’ 익숙한 혼란이 아닐까. 성일이 과연 그 숨막히는 금기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인지 호기심이 더해진다. 오정연 miaw@cine21.com

가장 도덕성이 결여된 바람둥이는 누구? <누구나 비밀은 있다>

건달,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 왕인 척하는 소시민을 보다 흔히 남성 바람둥이의 원형은 세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유형은 ‘소시민형’ 바람둥이다. 이 자는 영자, 순자, 금자 이렇게 세명의 애인을 동시에 관리한다. 세명의 애인 각각이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믿게 해야 하는 이 남자는 3인분의 작업량 때문에 언제나 몸이 분주하다. 뿐만 아니라 혹시 방심한 사이 영자를 순자라고 부르는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호칭을 ‘자갸!’로 통일하는 등 머리도 부지런히 굴려야 한다. 기획력, 성실성, 논리적 치밀함, 그리고 중간 이상의 경제적 수입과 외모가 뒷받침돼야 성공적인 ‘소시민형’ 바람둥이가 될 수 있다. ‘소시민형’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흔한 유형이며 가장 도덕성이 결여된 유형이다. 이들에게 바람은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것이다. 이들이 복수의 애인을 통해 얻는 것은 남성으로서의 유능함에 대한 확인과 성적 쾌락이다. 이 두 가지 전리품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향해 있다. 그가 복수의 애인을 관리하는 유능함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무능하면 여성에게 버림받는다는 가부장적 거세 콤플렉스와 싸우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 전투에서 에너지를 소진하기 때문에 여성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 데 소요되는 노고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그는 여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성적 쾌락밖에 없다는 즉물성의 노예가 된다. 연애도 노동으로 생각하고 거기서 끝없이 비교우위를 추구하고, 비교우위를 가장 적은 투자에서 찾고, 그래서 인색함을 영리함으로 착각하는 ‘소시민형’은 몰가치한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욕망의 문법을 남녀관계에 투사시키는 사람이다. ‘예술가형’과 ‘제왕형’은 적어도 여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소시민형’보다 훨씬 도덕적이다. ‘예술가형’은 절대로 동시에 두 여자를 만나지 않는 대신 여자를 만나는 기간이 짧다. 기간이 짧은 대신 아침 점심 저녁 시도 때도 없이 만나며 헤어지면 깨끗이 잊어버린다. 이자는 연애를 삶의 양식이 아니라 예술로 생각한다. 절대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가정하고 거기에 삶을 소진시킨다. 애인을 자주 갈아치우는 것은 자신이 투사한 이미지를 보고 다가갔다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끝내기 때문이다. 그에게 바람은 절대적 사랑의 이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카사노바와 돈후안 같은 전설적인 바람둥이들은 대개가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비현실적이지만 비도덕적이지는 않다. ‘제왕형’은 연애하다 헤어지면 친한 친구로 남으면서 지속적으로 애인을 한명씩 유지한다. 시오노 나나미가 묘사한 로마황제 카이사르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여자를 성적 차이만 가진 대상이 아니라 남자와 80%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하면서 20%의 차이에 몰입하지만 헤어지면 80%의 공통점으로 인간적 관계를 지속한다. 사실 하나의 성별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성숙한 관계 맺기는 남녀 모두 ‘제왕형’ 스타일이지만 이런 바람둥이는 극소수다. 소시민화된 사회에서 이런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 능력과 용량을 가진 사람 자체가 드문데다 ‘제왕형’이 가장 흉악한 바람둥이로 난타당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결혼제도하에서 권장되는 남녀관계의 핵심은 ‘독점’과 ‘영속’이다. ‘제왕형’ 바람둥이는 독점과 영속을 나눈다. 독점하고픈 사랑의 순간에 대해서는 영속을 기대하지 않고, 영속을 추구할 때는 독점하고 싶은 찬란한 사랑의 순간을 욕망하지 않는다. 삶에 정직하고 처신에 지혜롭지 않은가.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소시민형’의 습성을 지닌 바람둥이가 ‘제왕형’의 철학을 설파한다. 외제 차와 세련된 외모로 세 자매를 차례로 유혹하는 이병헌의 철학은 ‘인간은 인간의 부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니들도 독점과 영속의 이념을 원론만 인정하고 각론에서는 부분을 즐기는 유쾌한 ‘비밀’을 만들어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지혜로 ‘독점을 포기한 영속’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미 ‘가정 따로 연애 따로’를 묵묵히 실천하는 남성들처럼? 그런데, 이 영화는 여자를 부분으로 사랑하는 남성의 태도가 관계 맺기에 대한 철학적 성숙함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남용에서 비롯된다는 현재의 사실에 너무 둔감한 것 같다. 잘생기고 지적이고 돈 많은 남성이 “나처럼 부분을 즐기라”는 메시지는 ‘나의 쾌락추구에 협조하라’는 말밖에 안 될 수도 있다. 나는 삼형제를 차례로 정복하는 여자 바람둥이가 나와 “변태 갈보년!” 소리와 싸우면서 무슨 말을 전할지 그게 궁금하다. 남재일/ 고려대 강사 commat@freechal.com

아시아전문 美케이블 ‘한류 열풍’ 선봉

미국 최초의 24시간 아시아 전문 케이블 TV가 개국해 <다모>(사진), <올인> 등 한국 인기 TV 드라마를 방영할 예정이어서 미국에서도 본격적인 한류 열풍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지난해 6월 창립된 미국 연예업체 `이매진아시안(Imaginasian) 엔터테인먼트'는 미국 최초로 24시간 아시아 전문 케이블 TV 방송인 `이매진아시아 TV'를 개국해 오는 30일부터 방송을 시작한다고 26일 발표했다. `이매진아시안 TV'는 특히 아시아 곳곳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의 대중 문화를 미국 시청자들에게 적극 소개한다는 방침 아래 <다모>, <올인>, <천국의 계단> 등 인기 TV 드라마의 방영계약을 완료하는 한편 <수취인 불명>, <안녕 유에프오>, <보리울의 여름> 등 영화들도 수입해 두고 있다. 개국 이전에 이미 600만명이 넘는 시청자를 확보한 `이매진아시안 TV'는 이와 함께 음악전문 케이블 m.net로부터 한국의 인기 뮤직 비디오도 수입해 방영할 예정이어서 한국 가수들의 미국 진출에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방송은 한국 이외에 일본 NHK, 아사히 TV, TBS, 중국의 CCTV 베트남 TV 등 아시아 주요 TV 방송사들 및 영화 배급업체들과도 제휴해 프로그램을 도입, 방영할 예정이다. 데이비드 추 편성담당 부사장은 "`이매진아시안 TV'는 흔히 국가별로 구성되는 다른 국제방송과는 달리 영화, 드라마 이외에도 애니메이션, 음악, 다큐멘터리, 뉴스, 스포츠 등 장르별로 프로그램을 편성할 방침이며 모든 프로그램에 영어 자막 처리를 하는 것은 물론 자체 제작을 통해 각 프로그램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문 MC의 설명도 곁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매진 엔터테인먼트'는 지난 7월 15일 뉴욕시 맨해튼에 아시아 영화 전용 상영관인 `이매진아시안 극장'을 개관해 운영해 오고 있다. 이 극장에서는 13일부터 19일까지 뉴욕 한국영화제의 일환으로 <살인의 추억>과 <바람난 가족>, <어린 신부> 등 한국 영화들이 상영된 바 있다.(뉴욕=연합뉴스)

[비평 릴레이] <철수 영희>, 김소영 영화평론가

간단한 산술로 하자면 단관이 아닌 멀티플렉스 극장이 각처에 늘어났으니 관객이 볼 영화도 다양해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 반대다. 관객 층을 정확히 ‘기획’한 영화가 아니면 이제 극장을 찾기란 매우 어렵다. 관객이 비기획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이다. 아트플러스 시네마 네트워크는 이러한 곤궁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위 미개봉, 저예산 영화 상영극장 네트워크인 아트플러스는 8월 27일부터 10월 7일까지 국내 저예산 미개봉작 10여편을 아트플러스 체인 8개 극장에서 상영한다. ‘아트 플러스의 선택 2004 하나 더 +’ 라는 다소 암기하기 힘든 제목의 이 릴레이 상영은 서울 하이퍼텍 나다와 뤼미에르 극장에서 시작해 목포 제일극장, 프리머스 제주, DMC 부산, 광주 극장, 서울 씨어터 2.0과 안산 시네마이즈로 이어진다고 한다. 저예산 상영관 ‘아트플러스’가 상영한 초등학교 친구들 담백한 추억이야기 현재 영화 아카데미 출신의 감독 20명이, 영화 아카데미 20주년을 기념해 따로 또 같이 만든 <이공 프로젝트>를 비롯해서 ><썬데이@서울> (오명훈 감독) 그리고 <신성일의 행방불명>(신재인 감독) 등의 장편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단관 극장 상영과 비디오 유통 그리고 텔레비전 방영이라는 연속체 안에서 영화가 관람되었던 90년대의 상황과 비교해, 현재는 홈 씨어터의 보급, 인터넷을 통한 영화 파일 공유 등으로 개봉관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메가박스 극장이 위치한 코엑스 몰이 보여주는 것처럼 극장이 고급 상가를 갖춘 대형 소비 공간으로 포섭됨에 따라 영화는 점점 지배적 소비문화 패턴에 맞춘 기획을 하게 되고, 개봉관은 영화들을 전시하는 강력한 쇼윈도로 기능한다. 이런 와중에 저예산 장편영화의 배급망이 선을 보이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번 ‘아트 플러스의 선택’에서 가족들 모두가 선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1989년 <꼴찌에서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로 일찌감치 고등학교 교육 현장을 찾아갔던 황규덕 감독의 <철수 영희>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멀티플렉스 극장 소비문화가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소위 금융 자본이 지배하는 후기 산업 사회와는 멀찌감치 떨어져 보이는 대전 대덕 초등학교 4학년의 세계를 담고 있다. 영화는 부모가 교통사고를 당해 꽃집을 하는 할머니와 살게 된 영희의 전학으로 시작된다. 모두 똑같은 푸른 색 운동복을 입고 집단 체조를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의 세계 역시 계층적 위화감으로 살짝 짓눌려있다. 유리라는 아이는 극성 엄마를 등에 업고 할머니와 함께 꽃집에 살고 있는 영희를 왕따하려 한다. 그러나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영희는 유리의 질투에도 불구하고 반장을 맡게 된다. 한편, 영희의 짝 철수는,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에게 ‘철수 바보’ 소리를 듣고 살뿐만 아니라 고무줄 끊기 등 온갖 고전적 장난을 도맡아 하는 장난꾸러기다. 그러나 영희를 좋아하게 되면서 철수는 변해 간다. 이윽고 영화의 구조는 ‘증여’를 모티브로 정점에 오르면서 모든 소소한 갈등들을 감싸 안게 되는데, 말하자면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서로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초가을 바람이 슬며시 새드는 이 즈음, <철수 영희>는 가족들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담백한 재미가 있는 선물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초등학교 친구들 생각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