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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여친소>, 난 재미있던데…

언제부턴가 영화를 절대평가한다는 게 불가능해졌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를 재밌게 본 건, <씨네21> 안팎을 통틀어 내 주변에서 나 혼자뿐이었다. 심지어 <조폭마누라>를 너무 재밌게 봤고 <가문의 영광>이 딱 자기 취향이라던 후배 녀석조차 <여친소>를 ‘증오’했다. 자진해서 왕따되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겨레21>의 영화기자 시절에 <긴급조치 19호>를 무척 좋게 봤고, 마침 <한겨레> 영화담당 선배와 취향이 맞아떨어져 의기투합형 기사를 나란히 쓴 적이 있다. 이를 두고 다른 영화기자들이 농반진반 ‘한겨레 긴급조치 사태’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했다. 물론 이들 영화와 그 어떤 근친 관계도 없다. 난 <긴급조치 19호>를 제작한 서세원을 혐오하는 쪽이고, <여친소>의 곽재용 감독의 전작들을 싫어하는 쪽이다. 특히 <클래식> 때는 뒤로 갈수록 끔찍했던 기억이 새롭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때 나에게는 특정한 가치로 꿈틀거리는 어떤 기억과 학습 효과가 작용했던 것 같다. <여친소>에서 그 기억은 X재팬의 발라드였고, 학습 효과는 엽기적인 그녀의 완성을 본 데 있었다(엽기적인 언니들이 주름잡는 세상이 좀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 학습 효과 말이다). 전지현이 처음으로 바람이 되어 돌아온 남자의 숨결을 느끼던 그 방 안의, 그 뻔한 360도 트래킹! 그런데 그 순간 BGM으로 깔리던 X재팬의 발라드가 아주 사적인 기억을 건드렸고, 난 그 어이없는 장면에 뭉클해져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것으로 <여친소>가 좋았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다. 전지현이 새로운 남자와 마주쳐 활짝 미소짓던 마지막 순간, 엽기적인 그녀가 자신을 결정적으로 구속하던 순정의 사슬을 마침내 집어던졌다는 통쾌감이 밀려왔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를 통제 불가능의 여성인 것처럼 ‘위장’시켰던 것이, 어이없게도 한 남자에 대한 순정이 아니었던가. <긴급조치 19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대중음악계가 군홧발 취향에 유린당했다는 공적인 기억과 비록 영화 속이긴 하나 가수 김장훈이 청와대 실세를 통쾌하게 엿먹이는 장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학습 효과가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게다가 약간 어설픈 영화의 만듦새가 소박한 맛까지 줬다(고 여겨졌다). 이들 두 영화를 놓고 완성도를 따질 생각은 당시나 지금이나 애당초 없다. 그래야 할 영화는 따로 있으니까. 나에겐 그럴 듯한 개성만으로 족한 영화들이 있다. 개인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특정한 기억들과 학습 효과의 합은 결국 내가 살아온 흔적이다. 그 흔적을 굳이 양보할 생각도, 강요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난 <조폭마누라>를 재밌게 봤다는 300만의 이웃들과 신경질나서 함께 살 수 없고, 한주에 서너편의 영화를 보고 각각의 기사의 크기와 종류를 결정해야 하는 직업인으로서 영화를 향유하고 존중해낼 방편이 없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만족감과 경이감을 안겨줬던 이마무라 쇼헤이나 로베르 브레송, 세르지오 레오네의 영화들은 다른 차원에서 존중해야 할 나만의 보물상자에 넣어둘 뿐이다. 그들 영화의 가치로 다른 영화를 재어보는 건 폭력이 아닐까. 이성욱 lewook@cine21.com

화려한 동화책 같은, 이소벨 켐벨 〈Amorino〉

큐피드 또는 천사, 로마 혹은 그리스의 사랑의 신, 아름답고 순수한 아이, 작은 사랑. 이상은 아모리노(amorino)란 이탈리아어의 의미다. 사랑이란 뜻의 아모레(amore)에서 파생된 단어임을 눈짐작으로 알 수 있다. 아모리노란 말에 이제는 ‘이소벨 캠벨’(의 음반 타이틀)이란 항목이 추가되었다. 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웹 검색 엔진과 팬들의 머릿속에는. 는 풋풋하고 복고적인 체임버 팝 음악으로 인기를 누려온 스코틀랜드 밴드 벨 앤드 세바스천(Belle & Sebastian)에서 첼로(와 간간이 싱어)를 담당했던 이소벨 캠벨의 솔로 데뷔 앨범이다. 크레딧을 보면 2000년부터 2년간, 30명 이상의 세션(30인조에 가까운 오케스트라를 제외하고도!)을 동원해 만들었다는 정보를 알 수 있다. 심혈을 기울였다는 인상은 15곡의 수록곡들을 들어보면 금세 드러난다. 벨 앤드 세바스천 시절의 체임버 팝은 물론 보사노바, 재즈, 1960년대 프렌치 팝, 포크/컨트리 등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담겨 있다. 이소벨 캠벨이 예의 가녀린 음성으로 속삭이듯 노래하는 타이틀곡 는 1960년대 프랑스영화 사운드트랙을 연상시킨다. 서정적인 컨트리/포크 스타일인 와 유진 켈리(바셀린스)와의 듀엣곡 는 자연스럽게 싱얼롱을 유도하는 곡이다. 그런데 음반에서 좀더 두드러지는 건 재즈적 색채다. 는 오래된 딕시랜드 재즈 LP를 틀어놓고 노래한 듯한 느낌이고, 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주앙 질베르투의 그림자가 묻어나며, 은 ‘보사노바로 편곡한 벨 앤드 세바스천’을 상상하게 한다. 는 재즈와 체임버 팝의 칵테일 같은 곡이다. 전체적으로 ‘두텁고 컬러풀한 동화책’ 같은 음반이다. 그 때문에 예스런 풋풋함을 그리워하는 팬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소벨 캠벨의 섬약한 음성이 여전히 매혹적이고 사랑스럽다는 점은 이의가 없을 것이다. 사랑의 상실이나 결핍이 화상처럼 남아 있는 이에게는 치유의 사운드트랙으로 오래도록 재생될 듯하고.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서플먼트] 프레데터 의상을 입은 배우는? <프레데터>

가장 인기있는 2대 크리처가 맞붙는 최신작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관람 전 전작들의 복습은 필수적인 작품이다. 복습에는 역시 DVD, 그리고 DVD의 꽃이라면 다양한 스페셜 피처다. 그러나 궁극의 4부작 박스세트까지 나온 <에이리언> 시리즈에 비해 <프레데터> 시리즈는 이 점에서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지난해 출시된 <프레데터 SE>가 스페셜 피처를 별도로 수록한 2디스크 구성으로 발매되어 팬들의 갈증을 달래주었을 따름이다. 특히 SE 디스크2의 부록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귀중한 영상들을 포함, 팬들이라면 요체크다. 이중 메이킹필름인 ‘If It bleeds, We Can Kill It’에서는 프레데터의 대단히 민망한 오리지널 디자인이 공개된다. 이것이 NG가 나는 바람에 제작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압권. ㄱ자 모양의 머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는 괴물 의상을 보노라면 후일 스탠 윈스턴이 새로 만든 의상의 우수성을 실감할 정도다. 프로덕션의 세부를 다룬 ‘Inside the Predator’에서는 프레데터의 두꺼운 의상을 입고 열연한 배우 케빈 피터 홀(1991년 사망)에 대한 제작진의 따뜻한 애정이 담긴 회고 영상을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진 ‘장 클로드 반담 프레데터설’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동시에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프레데터의 섬뜩한 매력을 창조해낸 배우의 노고를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인기도를 감안하면 분량면에서 다소 부족하지만 수록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영상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역전의 명수> 장항 선박수리소 촬영현장

채만식 문학관을 지나 금강 하구둑의 해안도로를 달리면 촬영장인 장항 선박수리소가 눈앞에 나타난다. 멀리 군산항의 불빛이 <위대한 개츠비>의 그것처럼 번득인다. 세트처럼 모래밭 위에 세워진 세척의 배들 사이로 파도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는 밤바다의 촬영장. 잿빛 ‘외연훼리’호의 뱃머리를 카메라가 지나치면 전북31 마9790 번호판을 단 검은색 그랜저가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조명 아래 빛난다. 한국 조폭의 상징인 각진 구형 그랜저 안에는 네 남자배우가 오밀조밀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명수가 탑에 걸리고 희만이까지 천천히 거쳐가는 느낌으로” 박흥식 감독(<인어공주>의 박흥식 감독과는 동명이인)이 무전기를 마다한 채 카메라와 모니터 사이 모래밭을 뛰어다니며 카메라워크를 일일이 체크한다. <역전의 명수>는 역전(驛前)에 사는 명수의 인생역전(逆轉)담이다. 2분17초 차이로 일란성 쌍둥이 형으로 태어난 시장통 건달 명수는 입으로는 매번 투덜대지만 엘리트 동생 현수를 위해 모든 걸 양보한다. 군대도 대신 가고 징역도 대신 살아준 명수에게 세상과 현수는 어떤 보답도 하지 않는다. <가문의 영광>의 박대서와 <두사부일체>의 계두식 사이를 줄타기하던 정준호의 몸놀림이 하나로 뭉쳐져 삼각주를 이루는 자리가 바로 <역전의 명수>의 1인2역이다. “촬영분량의 97%는 출연한다. 아무래도 출연료를 2배로 받아야 했는데 계산을 잘못 한 것 같다. 이제 와서 <인어공주>의 전도연씨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라며 너스레를 떠는 정준호. 명수와 현수의 촬영 분량은 6 대 4 정도라고 귀띔한다. 바닷바람이 차갑게 몰아치는 가운데 이석환 조명감독은 “바람이 세니까 오늘은 모기는 없네. 다 일장일단이 있어”라며 차 보닛을 넘나드는 카메라를 따라 발빠르게 조명을 세팅한다. 오늘 촬영의 하이라이트인 넙치(박효준)가 명수에게 뒤통수를 맞고 보닛의 유리를 깨는 장면. 슈팅 사인이 나고 정준호의 주먹이 넙치의 뒤통수로 날아든다. ‘쩍’하며 금이 가는 앞유리. 넙치도 놀라고 스탭들도 움찔한다. CG로 처리하거나 망치로 깨려던 유리를 머리로 받아 갈랐으니 놀랄 수밖에. 모니터 앞에 앉은 박 감독이 웃으며 “유리가 불량이거나 효준이 머리가 망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하자 녹음기사와 연출부가 입을 모아 한마디 거든다. “저거 발로 차도 잘 안 깨지는데….” 넙치의 예상 외의 ‘활약’으로 다음날 격투신 앞뒤를 장식할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자동차 추격신을 제외하고 90% 이상 촬영을 마무리한 <역전의 명수>는 12월5일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복수극, <맨 온 파이어>

80년대 혜성같이 등장하여 광고계에서 갈고닦은 화려한 비주얼로 영화계의 ‘때깔’을 바꿔놓았던 일군의 감독들 중 선두주자는 단연 토니 스콧이었다. <탑건>이라든가 <악마의 키스> <폭풍의 질주> <트루 로맨스> <크림슨 타이드> 등으로 명성을 날렸던 토니 스콧은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오면서는 방향을 잃은 듯했다. 토니 스콧보다 훨씬 스타일리시하고 야심만만한 신진감독들이 속속 등장했고, 9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더 팬>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스파이 게임> 등의 액션스릴러들은 여전히 근사한 화면을 보여주지만 그에 걸맞은 내러티브의 개연성과 깊이를 잃은 채 표류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토니 스콧의 위치는 화려했던 과거에 비해 몹시 어정쩡해졌다. 그러던 차에 그가 <미스틱 리버>의 작가 브라이언 헬겔런드와 손잡고 A. J. 퀸넬의 하드보일드한 소설 <맨 온 파이어>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뭔가 절치부심한 결과물이 나오겠다라는 기대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더러운 도시 멕시코시티의 충격적인 일상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미에서는 한 시간에 한건꼴로 유괴사건이 발생한다. 그들 중 70%는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전 CIA 전문암살요원 존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과거의 악몽 같은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알코올에 의지하며 정처없이 떠돌다, 옛 동료 레이번(크리스토퍼 워컨)의 권유로 멕시코시티에서 보디가드로 일하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청년 사업가 사뮤엘의 아홉살짜리 딸 피타(다코타 패닝)를 보호하는 것. 크리시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피타를 거부하지만 점차 그녀의 진심어린 애정에 동화된다. 그러나 피타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게 유괴되고 그 와중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크리시는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피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책감과 분노에 치를 떨던 크리시는 피타의 유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고 잔혹한 복수를 계획한다. 영화의 핵심은, 그러니까 2시간20여분에 달하는 기나긴 복수극에 심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 위한 필수적 장치는 피타와 크리시의 유대 관계에 대한 공감이다. 배우들 자체에는 그리 나무랄 데가 없다. 덴젤 워싱턴은 선악이 모호한 크리시라는 인물의 장면장면을 완벽하게 체현해내고, 다코타 패닝은 ‘신동’이라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두명의 프로페셔널 사이에는 화학작용이 없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환경에 속한 피타가 대체 왜 자신의 ‘일개’ 보디가드에게 그토록 진지하게 ‘구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피타는 그저 크리시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셈이며, 영화는 크리시에게도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피타의 진심을 믿으라고 지속적으로(별 효과는 없지만) 강요한다. 다시 말해 <보디가드>와 <레옹>을 기묘하게 뒤섞어놓은 전반부는 주인공인 크리시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과도한 감상주의를 진득한 설탕시럽처럼 두텁게 뿌려대면서 동시에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진지하게 노력한다. <보디가드>나 <레옹>처럼 아예 소프 오페라적인 멜로드라마로서의 과도한 감상주의를 대놓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거꾸로 어린 소녀와 나이든 보디가드 사이의 다정한 교감이 ‘지나치게 조숙한 꼬마’로서의 다코타 패닝과 불편하게 결부되면서 롤리타의 가능성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게끔 한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레옹>처럼 과도한 ‘롤리타적’ 감상주의를 멋지게 끌어내지도 못했고, <보디가드>처럼 섹슈얼한 판타지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심지어 유사 부녀적인 절절한 애정도 아닌 어정쩡한 무엇이 되고 말았다. “복수는 차게 해야 맛있는 음식 같다”는 구절이 <킬 빌>에 이어 <맨 온 파이어>에서도 또 한번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무참하게 파괴해버린 이들에 대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맨 온 파이어>는 <킬 빌>과의 비교에서, 혹은 포스트 9·11시대를 살아가는 미국사회라는 레퍼런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단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젠틀하고 멋진 덴젤 워싱턴의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뒤엎는 몇몇 장면이 분명 존재한다. 거의 항상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던 워싱턴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악당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내는 등의 장면은 기묘한 반전과 위반의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킬 빌>에서와 같은 차가운 아이러니와 조롱의 즐거움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토니 스콧은 크리시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과도한 종교적 이미지를 이용, 개연성을 부가하려고 심각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리시는 하드보일드한 예수 혹은 유다의 이미지다.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죄악에 고통받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거짓말하지 않는’ 총알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쏟아지는 빗속에서 정화된다. 또한 피타의 죽음 이후 그는 구약성서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성서의 ‘잔혹한 신’의 법칙을 직접 실행한다. 나를 분노케 한 자, 그만큼 당하리라. 잔혹한 죽음장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퍼지는 성가풍의 음악과 자신의 희생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구한다는 장엄한 엔딩 역시 희생과 순교의 과다한 정열을 관객에게 거의 숨막힐 지경으로 강요한다. 테러당한 이후 직접 테러하는 쪽으로 급선회한 뒤, 스스로를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여기는 미국의 일련의 ‘오버’가 이 영화에서 종교적 정열의 과잉으로까지 포장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맨 온 파이어>는 심각한 자아 도취로부터 구원받지 못했다. :: <맨 온 파이어>의 과거 크리시역은 원래 말론 브랜도였다? A. J. 퀸넬의 원작소설은 지금까지 두번 영화화됐다. 이미 20여년 전부터 이 소설을 점찍고 있던 토니 스콧은 원작의 배경인 이탈리아에서 촬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당시 그의 연출작 <악마의 키스>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제작자들의 우려로 영화는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처음 크리시 역으로 말론 브랜도를 염두에 두었던 스콧은 자꾸 살이 찌던 브랜도 대신 로버트 드 니로를 캐스팅했으나, 영화 제작이 미뤄지는 바람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덴젤 워싱턴으로 교체하게 된 것이다. 토니 스콧보다 한발 앞서 등장한 엘리 슈라키의 1987년작 <맨 온 파이어>에서 주인공은 <양들의 침묵>의 연쇄살인범 스콧 글렌이, 어린 소녀 역은 당시의 신성 제이드 말이 맡았다. 영화의 오프닝은 이미 죽어 가방 속에 던져진 스콧 글렌의 시체로 시작하고, “난 이렇게 죽었다”라는 망자의 첫 내레이션은 뻔한 복수극에 소름 끼치는 기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영화는 후반부 복수극에 대비하여 소녀와 보디가드가 친해지는 전반부를 지나치게 느리다고 여길 정도로 세심하게 진행시키며,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 버전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벌충한다.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5]

△ 도쿄 시부야의 미니시어터를 대표하는 ‘유로 스페이스’는 <고양이를 부탁해>를 상영하고 있었다. 유로 스페이스는 상영뿐 아니라 영화의 제작, 배급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어서 사무실 한켠에는 갖가지 영화들의 영상자료로 빼곡히 차 있다. 도쿄 시부야는 대중문화의 요람이다. 대중음악의 든든한 저변을 이루는 시설 좋은 라이브 클럽들이 몰려 있고, 시네마테크와 미니시어터가 집중해 있다. 도쿄의 시네마테크가 10여곳이라면, 미니시어터는 29개 극장 40개 스크린에 이르고 있는데 그중 상당수가 시부야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부야역을 바라보고 있는 ‘유로 스페이스’는 멀티플렉스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도쿄를 사수하고 있는 미니시어터의 대표주자다. 2개 상영관 중 한곳에서 <고양이를 부탁해>가 상영되고 있었다. 지배인 마사토 호조가 “시네마테크 부산의 사무국장 등 2명이 극장 프로그래밍을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 조금 전 다녀갔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지배인은 극장 설립자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않고 설립의 내력만 간추렸다. 1954년생인 극장주는 특별히 영화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지만 독일 유학 시절 뉴저먼 시네마를 즐겨봤고 이들 영화를 상영할 공간이 도쿄에 별로 없다는 생각에 1977년 유로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프로그래밍을 회고전에 국한하지 않고 신인감독의 좋은 데뷔작을 발굴해 선보인다는 원칙을 양대 축으로 삼아왔고 이것이 유로 스페이스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극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장르 불문, 국적 불문하고 재능있는 감독의 데뷔작을 장기 상영하는데,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나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도 그렇게 선택됐다. 그런데 마사토 호조 지배인, 솔직하다. “<플란다스의 개>는 관객이 적었는데 <고양이를 부탁해>는 관객층이 폭넓다. 극장 운영이 재정적으로 진짜 어렵다. 시네필의 숫자도 갈수록 줄어든다. 20년 전이 정점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판단이 들어도 관객층이 안 보일 때는 포기하고, 반면 아니다 싶은 작품도 관객이 몰리겠다 싶으면 타협한다. 프로그래밍의 기본은 6주간 상영이다. 인기가 높으면 12주로 늘리고 없으면 5주 정도에서 멈춘다.” 좀 부끄럽다는 듯 “타협하기도 한다”고 말했지만 유로 스페이스는 단순한 기능의 미니시어터가 아니었다. 20년 전부터 배급을 해왔고, 6년 전부터는 제작에도 손을 댔다. 직접 배급하거나 제작하는 영화의 수가 많지는 않았다. 배급은 연간 2∼3편 선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 에릭 로메르, 프랑수아 오종, 차이밍량 등 외국 감독의 작품이 주를 이뤘다. 흥미로운 건 제작쪽이었다. “영화미학교 출신의 신인감독 중에서 매년 4명 정도의 졸업작품을 제작한다. 물론 저예산이다. 이 작품들은 심야상영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아오야마 신지, 구로사와 기요시, 마쓰오카 조지 등 기성 감독의 저예산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그런데 극장 운영도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굳이 제작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해야 한다는 자의식에서 한다. 그렇게 해야 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데 디지털카메라의 확산 등으로 영화 만들기는 쉬워졌으나 영화 환경의 이런 변화가 실제로 좋은 신인감독을 배출하는 기반으로 잘 이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만든 영화미학교 역시 여전히 16mm가 중심이다. 새 매체의 변화에 주목하지 못해 시대 흐름과 잘 조우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두려움 같은 걸 갖고 있는 듯하다.” 선뜻 이해되는 말은 아니었다. 막연히 생각해보면, 일본영화의 주요한 특징인 자주영화의 기반이 이런 미니시어터의 유통망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최근의 일이란다. “시부야만 해도 미니시어터들이 자주영화를 가져다 상영하는 데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3년 전부터 완성도 높은 자주영화를 골라서 상영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자주영화의 퀄리티가 부쩍 좋아지면서 제작 편수도 늘어났다.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 선두격이다. 이런 감독 덕에 미니시어터가 자주영화에 대해 갖고 있던 알레르기를 없앨 수 있었다.” ‘실험영화=이미지 포럼’ △ “실험영화하면 이미지 포럼을 떠올린다”고 할 만큼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있는 이미지 포럼의 극장은 모던한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상영 중인 <바람난 가족>의 포스터를 걸어놓은 매표소는 갖가지 기념품과 책자를 함께 판다. 시부야역을 중심으로 유로 스페이스의 반대편에 ‘이미지 포럼’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지 포럼’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오는 10월 일본 문화청 주최로 서울의 메가박스에 열리는 일본 독립영화제의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고, 지난 3월엔 ‘한국독립영화 2004-영화의 새롭고 예리한 목소리’란 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 그때 이곳을 찾았던 김홍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프랑스문화원을 찾아 시네필의 목마름을 채우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이곳의 시설과 운영에 ‘찬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모던한 디자인의 건물이 아주 근사하다. 라퓨타 아사가야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탐스럽다. 가난한 시네마테크가 어떻게 이런 멋진 건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원래는 신주쿠에 있었는데 2000년에 이곳으로 이사왔다. 나라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대출로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 조건이 까다로운데 운좋게 그 제도의 수혜를 입어 이 건물을 지었다. 지금 그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다.” 프로그램 디렉터 히로유키 이케다는 돈 이야기부터 꺼내드는 이방인의 질문에 조금 곤혹스러워했다. “실험영화=이미지 포럼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다. 71년 설립 때부터 일본 실험영화 상영과 배급에 목적을 뒀다. 일주일에 한번씩 실험영화 상영회를 갖고 1년 과정의 프로그램으로 실험영화 제작 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지만 수업료로는 당연히 적자를 보전할 수 없다. 4층 사무실에 이미지 포럼의 운영을 지원하는 두개의 조직이 별도로 굴러가고 있다. DVD 사업을 포괄하는 다케레오 출판사와 2개의 극장 운영이다.” 2개의 극장은 시네마테크와 상업적 성격의 미니시어터로 적절히 활용 중이다. 그중 한곳에서 <바람난 가족>을 상영하고 있었다. 시부야로 이사오기 전 이미지 포럼은 자체 극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오시마 나기사의 프로듀서 출신인 여사장 도미야마 가쓰에는 꽤 오랫동안 데라야마 수지 감독이 운영하는 극단의 극장에 신세져왔다. 데라야마 수지는 실험영화감독이자 아방가르드 연극 연출가이며 시인으로 활동해온 인물. 이미지 포럼이 예나 지금이나 실험영화에 전념하는 건 분명해 보였다. 60∼70년대 실험영화 감독이었던 가와나카 노부히로, 스즈키 시로야스 등 9명을 전임 강사로 두고 드라마 만들기가 아닌 영상실험에 중점을 두고 1년에 150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프로그램 디렉터 히로유키 이케다카 역시 이 워크숍 출신이다. 78년 졸업생으로 80년부터 스탭으로 일해왔다. 그는 일본의 미니시어터가 곳곳에 산재해 있고 오래도록 지속해온 배경에 대해 의외의 답을 내놨다. “80년대 버블경제의 여파였다. 영화에도 거품이 일어 외국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사들여 쏟아냈는데 정작 적절하게 상영할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 생겨난 게 미니시어터들이다. 다행히 큰 영화뿐 아니라 작은 영화도 재밌다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지금껏 생존해올 수 있었다.” 멀티플렉스는 위협적이지만 엉뚱한 방식으로 경쟁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9개 스크린을 갖춘 롯폰기의 버진 시네마즈는 <스파이더 맨2>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블록버스터를 상영하지만 <아메리칸 스플랜더> 같은 미국 인디영화에 스크린 하나를 내줬다. 미니시어터는 <아메리칸 스플랜더> 같은 영화를 멀티플렉스에 뺏기는 데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다양한 프로그램의 새 세대 공간, 업링크 팩토리 △ 카페식 극장으로 운영되는 ‘업링크 팩토리’는 DVD와 비디오를 프로젝트로 상영하기 때문에 입장료가 비교적 저렴하지만 대신 객석 옆에 설치한 바에서 음료수를 제공한다. 극장 한켠에는 각종 시네마테크와 미니시어터의 전단들이 차곡히 모아져 있어 관객이 원하는 상영 프로그램과 행사 정보를 간단하게 얻을 수 있다. 마지막 방문지로 택한 ‘업링크 팩토리’는 시네마테크도 미니시어터도 아닌 제3의 노선을 걷고 있었다. 95년 문을 연 카페식 극장은 소박했으나 프로그램은 실로 다양했다. 체코괴기영화, 일본 에로틱DV, 오키나와영화제 등 영화상영을 주메뉴로 삼고 라이브 콘서트, 퍼포먼스, 사진전, 심포지엄 등 다양한 이벤트를 끊임없이 열고 있다. 마침 ‘국제학생영화제’란 행사를 열고 있었는데 초청강사 명단에 구로사와 기요시가 올라 있다. 출판사도 운영하고 있으나 주력은 DVD 사업이다. 그런데 출시하는 DVD가 독특하다. 기획·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가마다 에이지가 도쿄신문사 기자가 미군이 휩쓸고 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찍고 편집한 <전장의 여름휴가>란 DVD 견본품을 꺼내들고 보여준다. “상업용 DVD를 제외하고는 평균 수치라 할 1천장을 발매할 예정이다.” 업링크 팩토리 역시 정부 지원은 꿈도 꾸지 않는다. 자력갱생의 길을 모색할 뿐이어서 또 하나의 극장 ‘업링크X’ 개관을 준비 중이다. 일명 ‘하드디스크 시어터’. 디지털로 만든 영상물을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곧바로 프로젝트로 쏴서 상영하는 방식이다. 매킨토시의 아이포토에 직접 연결해 상영하는 걸 고려 중이다. 이미 운영 중인 디지털무비워크숍의 후속 프로그램 같다. 가마다 에이지는 디지털무비워크숍도, 하드디스크 시어터도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의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는 사진 촬영을 한사코 사양했다. 프랑스의 어느 현대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기획자로서 부재하는 존재로 남고 싶다.” 자기 철학과 열정으로 넘쳐나는 20대 후반의 가마다 에이지 같은 이들이 라퓨타 아사가야, 유로 스페이스, 아테네 프랑세즈 같은 60·70년대 시네필의 자리를 이어받을 새로운 세대일 것이다. 시네마테크에 관한 한 도쿄가 서울보다 더 희망적인 건 그들 스스로 개척의 발걸음을 멀찌감치 앞질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마다 에이지는 “나에게는 작은 시장의 성향을 잘 잡아내 상품인 동시에 문화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면서도 “일본 영상산업은 굉장히 세분화돼 있어 틈새시장이 가능하고 우리는 그걸 찾아가고 있다”며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5] - 오태석

그의 대사에는 _ 한국어의 질박하면서도 찰진 호흡이 있다 연기 못지 않게 오태석이 강조하는 것은 호흡과 대사다. 극단 목화 배우들은 가장 편하고 정확하게 한국어를 발음한다는 평가를 듣는다. 정은표는 “배우로 하여금 숨을 제대로 쉬게 하고, 따라서 우리말 고유의 리듬이 잘 살아난다. 목화 배우들의 공통점이라면 제대로 말을 잘 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태석 연극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대도 배우에겐 큰 가르침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배우들은 허겁지겁 그 엄청난 사유의 공간을 자신의 연기로 메꿔야 한다. “그만한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동원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상상력과 분석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독종이 될수밖에 없고 영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정원중의 지적이다. 그러나 허리라고 부를 만한 중견배우들이 하나둘 TV, 영화로 빠져나가고 연극학도들이 연극보다는 영화와 방송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세태 속에서 극단 목화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가 들린다. 연극이 위축되면서 독특한 목화만의 스카우트 방식도 차질을 빚고 있다. 그것이 오태석과 극단 목화의 근심이다. 당장 <백마강 달밤에>도 캐스팅에 애를 먹었다. 창단 20주년 기념과 연극열전 참여 프로그램이 겹치는 큰 공연이었지만 영화 출연 등으로 바쁜 고참급 배우를 부르기가 어려웠다. 더블 캐스팅도 허용하지 않고 연습 전 기간 참여를 해야 한다는 오태석의 고집도 한몫했다. 손병호와 성지루가 이번 작품에 참여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의 속마음이야 바깥으로 나간 제자들을 다 불러모으는 것이었겠지만, 배우들에 대한 애정보다 앞에 두는 것이 관객과의 약속이다. 영화와 TV로 간 제자들이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거나 공연을 보고 인사를 와도 오태석은 겉으로 반가움을 쉽게 내색하지 않는다. 올해 봄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공연이 모두 끝나고 쫑파티 때 일이다. 성지루가 인사를 하자 ‘누구세요’ 하며 딴청을 부려 제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가 섭섭함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는 이번 공연에 나선 성지루와 손병호를 두고 “점검하고 싶을 거야. 아마. 어디를 수리해야 하는지, 고쳐야 하는지”라며 내심 돌아온 제자들을 환영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해 차마 내색하지 않고 반가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할까. “퀴퀴한 지하실 냄새 나는 아룽구지 극장에서 저런 걸작들이 나온다는 건 기적”이라는 임상수 감독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극단 목화의 시스템은 언제나 똑같이 굴러간다. 연습과 공연이 끝날 때마다 오태석은 빼곡하게 적은 4∼8쪽의 노트를 들고 배우를 다시 만난다. 목엔 늘 수건을 두르고 있고 군복 같은 바지와 운동화 차림, 상의 호주머니엔 네개의 펜과 돋보기가 있다. 교수나 연출가라기보다는 영락없는 목수의 차림이다. 관객이 돈까지 내고 자신의 공연을 찾아오는데 허투루 준비할 수 없다고 그는 믿는다. 하루에 겨우 한두끼를 챙기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내 최난선씨의 속을 썩이는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오태석은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남 앞에 선다는 게 무엇인지, 내 모자란 걸 갖고 인생을 꾸려가야 하니 관객에게 여쭈어보고 의논드린다는 심정이야말로 볼거리를 만드는 이의 자세다.” 극단 목화 출신 배우들에게는 이런 엄격함과 성실함이 배어나온다. 글 이종도 nacho@cine21.com·사진 오계옥 klara@cine21.com 오태석의 배우들 개성으로 똘똘 뭉친 얼굴들 많은 배우들을 거느린 가장이라 그런지 오태석은 남들 앞에서 여간해서는 특정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다른 배우가 섭섭해할 수 있어서이리라.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은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친해지기 어렵지만 마음을 열면 한없이 따뜻한 이 성격을, 목화 배우이자 상임무대디자이너인 조은아는 ‘배우로서의 자존심’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어렵사리 몇몇 배우들에 대한 그의 칭찬을 적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깨물면 안 아플 열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목화가 배출한 배우들이 어디 한둘인가. <백마강 달밤에>에 출연 중인 배우와 최근 활약이 눈에 띄는 젊은 배우를 중심으로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느낌을 몇 마디 적어본다. 그는 넉넉한 연습기간을 갖고 준비하는 연극과 달리 한국영화가 급조하는 느낌이 있어 제자들의 영화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저평가된 배우를 꼽아달라는 부탁엔 정진각을 꼽았고 그 이상은 ‘아직 젊으니 더 지켜보자’는 말로 마무리했다. 손병호 l <파이란> <알포인트> <꽃섬>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에서 주정꾼 연기로 탁월하단 소릴 들었다. 즉흥성과 의외성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키포인트인데 거기서 잘 보여줬지. 믿을 수 있는 배우가 된 거다. <천년의 수인>에서 안두희 아들 역도 잘했고. 연극의 분위기를 확 뒤집어버리는 의외성을 잘 운영하는 지혜가 있다. 감각도 뛰어나고 몸짓과 제스처가 거침이 없다. 성지루 l <바람난 가족> <눈물> <공공의 적> 인물 추적에서 치밀하고 집요해. <부자유친>에서 영조대왕을 맡았는데 삼십대 초반에 그 역을 맡았다. 아들 역이 박희순이었는데 실제 두세살 차이 나는데 전혀 부자 사이라는 게 우습지가 않고 ‘어!’ 하게 만들어냈다고. 언어를 화려하게 구사하기보다 언어의 힘을 닦아서 광택이 나게 하는 사람이다. 황정민 l <지구를 지켜라!> <산부인과> ‘어, 저런 게 있어?!’ 하게 만들지. 표정이나 표변하는 힘이 어디서 나나 놀라울 정도다. <춘풍의 처>에서 남편을 찾아내려 애쓰는 여인네를 그 어린 나이에 도달한 것처럼 해내거든. 놀라운 거지. 서울예대 졸업 공연에서 <사천의 선인> 주인공을 했는데 평론가들 모두 ‘저런 애가 있냐’고 놀랐다. 임원희 l <쓰리, 몬스터> <다찌마와 리> <로미오와 줄리엣> <여우와 사랑을> 등에서 단역만 하다가 나갔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목검에 앞이빨이 부러지기도 했는데. 원희는 굉장히 순발력이 있다. 좀더 있어줬으면 했는데 아쉬움이 있다. 다시 올 줄 알았는데 더 바빠지더라. 박희순 l <가족> <남극일기> 희순이는 연극을 잘 안다. 그 친구 얘긴 선배들도 귀기울여 듣는다. <심청이는 왜…>에서 얼굴을 자해하고 물에 빠지는 여자 역을 맡았는데 객석을 숙연하게 하더라. ‘아, 이 친구 봐라’ 이랬지. <백마강 달밤에>에선 마을의 광대 역으로 나왔는데 우스운 연기를 잘했다.

애타게 순결한 영혼을 찾아서, <거미숲>

<거미숲>을 통해 본 송일곤 감독의 시적인 영화미학 내 얼굴이 한폭의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 기형도, 병(病) <입속의 검은 잎> 중 결혼식 초야를 치르고 독사에게 물린 아내를 저승사자에게 잃은 남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거문고를 연주하며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찾아 헤맨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저승의 계단. 남자는 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아내는 살아 있다.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그러나 남자는 결국 뒤돌아본다. 소금 기둥이 되는데도 뒤돌아본다. 검은 창에 자신의 모습만이 비추어지는 그 저승의 창문 앞에서. 기억은 흡혈당하고 길은 뫼비우스 띠처럼 자꾸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는 미로 속에서, 오르페우스이자 라스콜리니코프의 화신인 이 남자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다. <거미숲> - 한국영화 사상 드물게 영화의 ‘추상화’를 시도하다 송일곤 감독의 신작 <거미숲>은 신화와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들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켜 어두운 심연 사이에서 입을 벌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가르랑거리는 그런 영화이다. 감독 본인이 순순히 털어놓았듯, 이 영화에서 죄와 구원의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광기와 내통하고,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지워 내는 영화적 문법은 펠리니의 <여인의 도시>와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동시다발적으로 주석으로 삼았으며, 아내를 잃은 남자가 저승을 헤매는 듯한 주관적 기억의 순례기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한 조각이 감독의 눈에 들어갔음을 확신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 <거미숲>은 매혹적이다. 시적이고 우아하며 잘 계산되었고 지나치게 단아하다. 정신분석에 매혹된 사람으로써 <거미숲>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오이디푸스의 재현이자, 라캉과 지젝이 너무도 좋아했을 만한 정신과 환자의 케이스 스터디처럼 보인다. 주체는 분열되었고, 유령은 자신이 죽어 있는 것을 모르며, 욕망은 왜곡된 기억의 나선을 따라 현실을 뒤덮어버린다. 두번이라면 신물이 났을지도 모를, 그러나 한국 영화역사에서는 처음 있는, 송일곤 감독은 드물게도 스타일리시한 방법으로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꿈꾸며 욕망, 주체, 무의식, 실재계의 불협화음을 손에 잡힐 듯 시각화한다. 입 속의 검은 잎이 나풀거리듯, 이미 설암으로 입 속의 병든 잎을 경험했던 <꽃섬>의 주인공은 다시 한번 입 안에서 우굴거리는 거미들을 바라본다. 송일곤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혹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재림이란 입 안의 이파리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구강적 욕망이 살아 숨쉬는 그 장소에 오히려 죽음의 공기가 흡입되어지는 경지. 그리곤 그의 주인공들은 흔히 죄를 지어서 죄의식이 생기기보단, 더 많은 죄의식에 시달리기 위해 친족들을 살해하는 듯 보인다. 집단자살을 감행했던 <소풍>의 아이는 혼자 살아남았고, <간과 감자>의 카인은 감자 몇알에 형의 목숨을 바꾸고 그것으로 가족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져다준다. 그리곤 살아남은 이들 앞에 놓여 있는 심연 속에서, 물론 죽음보다 더 못한 삶이 기다릴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송일곤은 자신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거미숲>의 첫 프롤로그는 송일곤의 영화세계의 서명이자 인장이었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 미끄러지는 트래킹숏. 프레임과 유리창이라는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가르는 장치들. 무엇보다도 다시 겨울로 돌아간 변함없는 송일곤의 계절 감각. 음악에 앞서는 거칠고 황량한 바람소리. 이것은 앞이 아니라 뒷모습의 영화이며, 뒤를 쳐다보아 과거를 돌아나오는 영화이며,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에 미끄러지는 기표들, 기억들, 욕망들. 무엇보다도 영혼에 대한 영화라고. 그 한 프레임에는 송일곤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거미숲>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길 잃은 기억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의 창문이 그러하듯, 데이비드 린치의 ‘린치 타운’에 걸려 있는 벨벳으로 만든 파란 커튼이 그러하듯, 그곳은 나쁜 꿈이 현실이 되는 곳이며 검은 피가 무의식의 동맥에 녹아들어가 의식의 수액이 되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공간이다(지젝은 이걸 현실에 난 구멍, 실재계라 하겠지). 이것은 현실입니다. 이것은 과거입니다 하는 경계가 없는 공간이다. 기억의 미로를 숲으로 형상화시킨 이곳에서 여전히 여자들은 중력을 이기고 하늘로 올라가고(<꽃섬>의 마지막을 떠올려보라. 송일곤의 여자들은 늘 하늘로 떠오른다) 머리를 다친 남자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물론 여성주의 관점에서 맘에 안 드는 남성 판타지임에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송일곤 감독이 이 경계를 넘나드는 장치로 플래시백 대신에 선택한 것이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세명의 여성주인공들이 시종일관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던 <꽃섬>에서도 두드러지게 이용되었다. 과거-대과거-현재-과거-현재로 이어지는 이 복잡한 플롯 구성에서 우리가 시간의 이동과 편집의 구심점으로 찾아야 하는 지표는 플래시백이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이다. <거미숲>에서 헤어져야 했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의 왜곡된 기억의 흔적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에서 소녀를 떠나보낸 소년의 얼굴은 다시 바로 강민 PD의 얼굴로 이어진다. 혹은 죽은 아내의 얼굴은 꽃을 든 여자인 민수인의 얼굴로 이어진다. 역할이 어떠하든 <거미숲>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흔히 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영화 속 주인 찾기의 문제를 송일곤의 영화에서는 떠들어봤자 참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송일곤이 관심있는 것은 공간과 얼굴, 피사체에 대한 카메라의 멀고 가까움의 문제, 이의 등가성을 통해 확보하는 초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이동할 때,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현실과 판타지를 오갈 때, 그 심리적 통로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서 늘 송일곤은 느린 트래킹숏으로 공간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꽃섬>이 비평가들의 많은 비판을 받은 진정한 이유는 이 영화에서 얼굴에 대한 욕망이 공간에 대한 감각을 눌러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미숲>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수인과 강민 두 사람이 숲속을 걸어가는 롱숏을 떠올려보라. 반대로 가장 가슴 아픈 고백이나 신화적 서사가 끝난 뒤, 거기에는 늘 누군가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공간을 잡아내고 얼굴을 잡아내는 두숏은 피사체와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매우 비슷한 질감과 무게를 지닌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에서 얼굴 클로즈업은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선택한 정지의 움직임처럼 죽음을 이기려는 의지이며, 향수이자 신비이고 이 세계의 고통을 넘으려는 초월에의 희구같이 느껴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송일곤은 데이비드 린치와 한끝이 다르다. 송일곤의 영화에서는 그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포기할 수 없는 저 도도한 유러피언 마인드, 베리만이나 키에슬로프스키 같은 감독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초월에 대한 희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미숲>을 통해 감지되는 송일곤 감독의 무의식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은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우는 ‘윤리’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다. 지나치게 관념적이지만 순결한 시인의 영혼 그러한 면에서 송일곤 감독의 유일한 문제점은 그가 지나치게 잘 만든 영화쪽으로 다가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공법의 감독이고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는 <꽃섬>에서처럼 여자를 모르면서 여자 이야기를 하고, <거미숲>에서처럼 악을 모르면서 악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곤 늘 뒤탈이 난다. <거미숲>의 어떤 장면은 송일곤 감독의 특기인 시적인 서정성과 삐걱거리며 톤이 전혀 맞지 않는다. 특히 국장에 대한 묘사는 더욱더 그러하다. 사악한 아버지, 에우리디케를 물어버린 독사(국장의 별명은 실제로 독사이다) 혹은 대타자인 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강민 PD는 방송 중에 편집을 한다.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 여건이 안 되면 노력을 배가하라’는 그의 말은 전형적인 거세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가부장의 면모를 지녔지만, 막상 현실에서 넥타이를 목에 걸고 리포터의 머리채를 잡아 섹스를 하는 국장의 직설적인 행동은 우리가 다 떠올릴 수 있는 재미없는 평범한 인간의 그것이다. 오히려 송일곤 감독의 미학은 이미 죽어버린 여자를 마른 꽃으로, 켜켜이 앉은 기억의 실체를 푸른 먼지로, 인간을 관장하는 신의 이미지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 목덜미를 무는 드라큘라 곤충으로 표현하는 그 상징적이면서도 시적인 이미지의 배열에 있을 것이다. 특히 소리를 설계하는 그의 재주는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가장 잔혹한 살인의 방식은 분수처럼 품어지는 피가 아니라, 국장의 몸을 관통하는 낫의 소리이며, 귓가를 휘감는 바람의 소리는 방황하는 영혼의 비가처럼 들리기도 한다. 앞으로도 송일곤은 결코 음악을 남발하거나, 정서를 질질 짜내거나, 먹기 좋은 이야기로 관객을 기쁘게 하는 그런 유의 감독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무한대의 점근선처럼 영화쪽으로 다가가는 순결한 감독이지 그 틀을 훌쩍 뛰어넘는 도발적인 감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스파이더>란 영화에서 방 안에다 몇개의 줄을 쳐놓고도 거미줄이라고 우기지만, 송일곤 감독은 굳이 남도의 어디 끝까지 가서 진짜 <거미숲>을 찾아내고야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때, 송일곤의 탁월한 재주는 힘을 얻는다. 그의 영화언어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영혼을 지녔다. 서정은 동굴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는 강민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당신의 세계예요.” 이것이 송일곤 감독의 세계일 바에야 개인적으로 나는 관객과의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그가 컷을 낭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싶다. 어차피 <거미숲>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라면 슬로프가 멈춰지는 스키장 기계를 잡아내는 중간 숏이나 살인을 위해 문고리를 잡은 강민을 보여준 뒤 다시 그가 숲에서 무엇인가를 쳐다보는 설명 숏 같은 것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숲>의 어떤 장면들은 사족처럼 붙어서 결정적인 순간을 잘라먹고 들어오고, 반대로 어떤 장면은 더 길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데 짧아서 아쉽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불구하고 <거미숲>에서 내가 본 것은 한 재능있는 감독의 미래였다. 그가 여자를 알고 악을 알고 뼈에 사무치는 후회를 알고 나서 만들, 어둡고 아름답고 윤기있고 반짝이는, 낫을 든 남자와 꽃을 든 여자가 공존하는 세계. 앞으로 코미디를 만들더라도 송일곤의 영화미학의 본질은 순결한 영혼에의 희구, 시적인 이미지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리듬 감각만 살린다면, 그에게 돈을 댈 누군가가 그럴 자유를 준다면…. 거미가 된 영혼은 자신이 죽은 걸 모르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거미를 기억해준다면 그 거미는 영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과연 <거미숲>에 얼마의 관객이 들지는 모르지만, 그중에서 단 한명만이라도 송일곤의 영화를 기억해준다면, 이 감독은 기꺼이 ‘거미숲’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건투를 빈다.

미국적 순수함을 가진 샛별, <빌리지> 배우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를 보고 <초원의 집>의 ‘로라’를 떠올린 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도 첫눈에 그녀에게서 ‘미국적 순수함’(American purity)을 발견했다니까. 붉은 고수머리, 초록빛 눈동자, 바람이 묻어날 것만 같은 고집 센 미소. 하워드는 <빌리지>로 할리우드 평단을 열광시키고 있는 23살의 샛별 배우다. 하워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의 이름 세 어절을 뜯어볼 필요가 있다. 브라이스 캐넌의 돌처럼 머리칼이 붉고 댈러스에서 임신됐다 해서 ‘브라이스 댈러스’ 란 이름을 얻은 그녀는 <아폴로 13>과 <뷰티풀 마인드>을 연출한 아카데미 수상자 론 하워드 감독의 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 데뷔 전 연극배우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풀 네임을 ‘브라이스 댈러스’라고만 말해왔다. 아버지 론 하워드의 꼬리표를 달고 평가받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 심지어 가족들이 모두 엑스트라로 아버지의 영화 <에드 TV>에 출연했지만 그녀만은 출연을 거부했다. 공짜로 얻는 명성은 싫다는 이 고집통 딸깍발이 아가씨는 결국 셰익스피어 연극에 출연하던 도중 샤말란 감독의 눈에 들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빌리지>에서 하워드가 맡은 역할은 눈이 먼 소녀 ‘아이비 워커’. 19세기 말 외부와 격리된 마을에 사는 아이비는 사랑하는 남자를 구하기 위해 괴물이 산다는 숲으로 향한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과 목소리 높낮이의 변주로 관객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연기가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주눅든 기색 하나 없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연기의 독주를 보여준 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는 그러나 쏟아지는 호평에 관심이 없다. “호평을 믿다보면 결국은 악평에도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 이 당찬 23살 초짜배우의 지론이다. 지난해에야 LA에 이사 온, 배우보다는 작가나 법정인류학자가 되고 싶었다는 하워드는 앞으로도 아버지와 자신을 연결하고 비교하려는 시선을 거부하며 살 생각이다. 그러나 니콜 키드먼의 바통을 이어 <도그빌>의 속편,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만달레이>에 출연한다니 그녀를 향한 언론의 관심을 피하기는 당분간 힘들겠다. 어둠 속에 갇혀 있어도 다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아이비의 녹색 눈처럼, 영화는 찍기 싫었다지만 영화의 모든 것을 이미 꿰뚫고 있는 듯한 하워드의 재능은 첫 필모그래피의 계단을 가뿐히 뛰어넘은 것이다.

우리 시대 문제작과의 두 번째 조우, 두번째 ‘시네-랑데부’전

서울아트시네마, 9월30일부터 두번째 ‘시네-랑데부’전 상영 랑데부라는 단어는 얼마만큼 미래진행형의 설렘을 동반하고 있는가. 시네-랑데부, 혹은 새로운 영화와의 만남. 지난 9월1일부터 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렸던 첫 번째 ‘시네-랑데부’는 호기심에 찬 많은 관객에게 할 하틀리와 오타르 요셀리아니, 브루노 뒤몽,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을 기쁘게 선사하였고, 오는 9월30일부터 10월12일까지 그 두 번째 종합선물 패키지를 준비 중이다. 세계영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동시대 시네아스트를 소개한다는 취지하에 이번에는 이시이 소고의 <엔젤 더스트>와 짐 매케이의 <우리들의 노래>를 포함하여, 9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 현대영화의 어떤 경향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8편이 마련되었다. 가스파 노에, 로랑 캉테, 이시이 소고, 장 피에르 리모쟁, 엘렌느 앙젤, 안느 소피 비로, 짐 매케이, 필립 그랑드리외라는 비교적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호명될 이번 영화제를 통해,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응시했던 용기있는 젊은 작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시네랑데부: 새로운 영화와의 만남> 일시 9월30일(목)~10월12일(화) 13일간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주최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후원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상자료원 문의 02-720-9782, www.cinematheque.seoul.kr 제공 (주)퍼시픽엔터테인먼트 엔젤 더스트 Angel Dust l 이시이 소고 l 1994년 l 116분 80년대 일본 독립영화계에 반항적인 펑크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장본인 이시이 소고의 웰메이드한 심리스릴러. 매주 월요일 저녁 6시, 퇴근길의 피곤한 직장인들로 가득한 도쿄 지하철 내에서 젊은 여자들이 죽어간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독약이 묻은 침에 찔려 살해당한 여자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미궁에 빠진 사건 해결을 위해 투입된 범죄심리학자 세츠코는 옛 애인이자 심리학계의 이단아 아쿠 레이가 여기에 연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마인드 컨트롤, 세뇌, 과대망상증, 이단종교, 양성인간 등 세기말 일본을 감싸고 있는 온갖 기분 나쁜 징후들이 이곳저곳 출몰하면서 비현실적이리만치 세심하게 조율된 도쿄의 미래적인 룩(look)과 겹쳐지고, 점차 악몽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으스스한 아우라에 관객이 빠져들게끔 한다. 이시이 소고의 여타의 영화보다 훨씬 스타일리시한 이미지와 세련된 사운드를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역분사 가족>이라든가 <꿈의 미로>에 환호했던 관객이라면 예전의 그 활력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다는 점에 아쉬움을 느낄 듯. 아이 스탠드 얼론 Stand Alone l 가스파 노에 l 1998년 l 93분 아마도 이 데뷔작에 비한다면 가스파 노에의 최근작 <돌이킬 수 없는>은 장난 정도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 ‘만인을 향한 투쟁’이라는 원제의 <아이 스탠드 얼론>이 발표되자마자 가스파 노에는 <검모>의 하모니 코린과 더불어 ‘퍽큐 시네마’의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정제되지 않은 사악한 분노를 직접적인 쇼크의 연속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관객을 끊임없이 도발시켜왔다. 때는 1980년 프랑스. 어린 딸을 희롱한 남자를 죽인 전직 말 도살업자는 몇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가게는 이미 아랍인에게 넘어갔고 끔찍한 불황에 시달리는 친구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남자를 거부한다. 세상을 향한 증오를 나치와 프랑스 정부와 유색인종과 동성애자와 탐욕스런 여성들에게 돌리는 남자는 총 한 자루와 함께 그 모든 것에 대항하기로 마음먹는다. “내가 나빠져야 한다면 나빠질 것이다. 정말로 나빠질 것이다.” 무지막지한 무정부주의적 선동이 쉴새없이 난무하는 와중에 관객은 점점 주인공의 분노에 감염되거나 혹은 지독한 혐오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중 어느 쪽이든 도저히 잊기 힘든 강렬한 체험이 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도쿄 아이즈 Tokyo Eyes l 장 피에르 리모쟁 l 1998년 l 95분 <도쿄 아이즈>는 지난해 소개되었던 리모쟁의 또 다른 작품 <노보>가 보여주었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포화 상태에 이를 정도로 프레임을 꽉꽉 채우는 편집증적인 비전, 강렬한 테크노 사운드의 자극, 어디까지나 관념에 그치는 바람에 살아 있는 인물들로 느껴지지 않는 일군의 캐릭터들. 하루의 대부분을 비디오 게임과 테크노 음악, 행인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소일하던 외로운 소년이 어느 날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거리로 나가, 어지러운 시야에 비치는 것에 닥치는 대로 총을 쏘기 시작한다. 곧 호들갑스런 언론에 의해 소년에게는 ‘4개의 눈’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고, 이 미지의 킬러를 조사 중이던 경찰 로이의 여동생 히나노는 ‘4개의 눈’에게 매혹된다. <도쿄 아이즈>는 일본과의 합작을 통해 세기말 도쿄에서 일어나는 청춘의 혼돈과 방황을 다루고 있다. 리모쟁은 철저하게 자신이 방관자적 시각을 취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결국 영화는 그다지 흥미롭지 못한 피상적인 관찰기록이 되고 말았다. 솜브르 Sombre l 필립 그랑드리외 l 1998년 l 112분 <미녀와 야수> 혹은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버전.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 작업에 몰두하던 필립 그랑드리외의 장편 데뷔작 <솜브르>는 발표 즉시 격렬한 찬반논쟁에 휩싸였다. 별 이유없이 여자들을 유혹하여 강간 살해하는 연쇄살인범 장은 어느 날 지독하게 외로워 보이는 여자 끌레르와 마주친다. 끌레르는 장이 여자들을 위협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그의 정체를 눈치채고도 자발적인 의지로 그의 곁에 머무른다. 그녀는 그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자신의 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끝없는 수평 트래킹으로 이어지는 풍경 숏들이 쉴새없이 흔들린다. 오브제의 윤곽선은 뭉개지고 단지 명암으로 간신히 구분되는 덩어리로 제시된다. 둔탁한 소음과 기괴한 음향들이 이미지의 불투명한 선 위에 겹쳐지면서, 영화의 이미지는 마치 인상주의 화풍의 아방가르드 버전처럼 되어간다. 연쇄살인범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듯한 기이하고 암울한 비전, 부인할 수 없는 매혹적인 미감과 윤리의식 사이에서 불편하게 엉거주춤 머무르게 하는 지독하게 사악한 영화. 인력자원부 Human Resources l 로랑 캉테 l 1999년 l 100분 파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프랑크는 졸업을 앞두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가 30년 동안 근무했던 공장의 관리자 인턴으로 일하게 된다. 늙은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이 못내 자랑스럽다. 근로자들의 복지와 인사 관련 업무를 맡게 된 프랑크는 자신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주당 35시간 근무제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게 하는 시스템임을 깨닫고 번민한다. 육신 자체가 기계화되어버린 늙은 노동자 아버지와(그는 끊임없이 ‘나의 기계’라고 표현하며 자신이 다루는 기계를 어루만진다) 아버지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화이트칼라 아들 사이의 고통스런 딜레마를 통해, ‘인력 자원’이 어떻게 냉엄한 현실하에서 별다른 해결없이 착취당하는가를 고발하는 작품. ‘인간이 가족이나 직장 같은 사회집단 속에서 노동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정의되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결코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나가는 로랑 캉테의 연출력이 뛰어나다. 그는 90년대 중후반 자족적인 개인적 판타지에 머무르던 프랑스 영화계에 다시금 ‘공적 영역’으로의 관심을 환기시킨 경향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인간의 피부, 짐승의 심장 Skin of Man, Heart of a Beast l 엘렌느 앙젤 l 1999년 l 94분 1999년 로카르노영화제 금표범상 수상작. 순진한 아이들의 시선으로 어른들의 끔찍한 세상을 묘사하는 일련의 전통하에 놓여 있는 <인간의 피부, 짐승의 심장>은 그에 더해 소녀들의 성장이라는 예민한 토픽을 첨가시키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매혹적인 연출력을 보여준다. 아내가 도망간 뒤 어린 두딸과 함께 살고 있는 형사 프랭키는 업무상 과실로 징계를 받고 고향에 내려온다. 두 자매, 오렐리와 크리스텔은 다정한 할머니와 얌전하고 수줍은 막내 삼촌 알렉스와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어느 날 15년 동안 행방불명이었던 둘째 삼촌 코코가 돌아오면서 잔잔했던 일상에 균열이 발생한다. 아름답고 정적으로만 보였던 이 작은 산간마을에 점차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과 악몽이 풍경의 표면 위를 떠돈다. 마을의 늙은 사내들은 프랑스 현대사의 수치라 할 수 있는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고, 프랭키 형제들 역시 친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기억으로부터 어떻게 해방되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내들은 점차 파국으로 치닫지만, 그 틈새에서 어떻게든 자라나야 하는 소녀들은 아버지를 밀쳐내고 디바인 코미디의 노래 〈Tonight We Fly〉에 맞춰 전력질주하며 고함을 질러댄다. 이번 영화제 중 최고의 필견작. 소녀들은 수영을 못해 Girls Can’t Swim l 안느 소피 비로 l 1999년 l 101분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절친한 친구 그웬이 사는 브르타뉴 해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리즈가 올해에는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한없이 친구를 그리워하던 그웬은 마을 건달들과 어울리며 이성에 눈뜨게 되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방황하던 리즈가 몰래 그웬을 찾아오며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한다. 남성의 부재, 혹은 남성에 눈뜸이 소녀들에게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영화는 10대 소녀들의 예민한 감각을 십분 활용하여 지극히 정밀하게 그녀들의 일상을 훑어내다가 불현듯 차갑고도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카트린 브레이야가 클로드 샤브롤을 만났을 때 바로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우리들의 노래 Our Song l 짐 매케이 l 2000년 l 96분 뉴욕 브루클린 다운타운에 위치한 고등학교에서 ‘잭키 로빈슨 밴드’ 부원(일종의 역동적인 고적대라고 하면 될까?)인 라니샤와 마리아, 조슬린은 곧 다가올 음악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연습이 끝나면 셋은 함께 한여름의 브루클린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자신들의 사소한 일상에 대해 쉴새없이 수다를 떤다. 하지만 올해의 여름은 임신과 질병 등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별로 낯설지도 않은 몇몇 사건들로 인해 위기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다양한 뮤직비디오 작업을 통해 음악과 몸짓, 스타일에 관한 탁월한 감식안을 보여왔던 짐 매케이가 신중한 오디션을 통해 발탁한 신인배우들의 일상적인 연기, 그리고 실제를 방불케 하는 ‘잭키 로빈슨 밴드’의 열정적인 연주,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를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정공법적 묘사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브루클린 지역과 거기 사는 십대들의 삶에 숨김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매케이의 소박한 진심이 전해지는 작품.홍성남/ 영화평론가 gnosis88@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