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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할리우드 소녀영화 유행 분석 [3]

새로운 소녀관객의 등장 - 10대 영화, 자본주의 전선으로 뛰어들다 “어머머머머!” 그때 갑자기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케이디가 테이블로 뛰어왔다. “셰어 언니! 베로니카 아줌마! 아직도 할리우드 근처를 맴도세요? 셰어 언니는 과다체중으로 만날 신문에 오르내리더니 웬 빅맥세트? 잇힝. (눈을 찡긋하며) 슈퍼사이즈 유! 꺄르륵.” 담뱃재를 통째로 들이마신 표정의 일행이 할말을 잊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아랑곳하지 않는 케이디는 의자 하나를 가져와 턱하니 앉는다. “<퀸카…>가 굉장한 성공이었죠?” 기자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휴, 뭐. 약간. 영화 만들기 전에 할리우드의 배불뚝이 아저씨들이 말하길.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더만. 고루한 미신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고요. 요즘 미국 여자애들은 단체로 영화 보러가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단 말이지요.” 셰어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 <클루리스> 때도 그랬어. 사실 그때부터 새로운 소녀영화 붐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90년대 후반에 나왔던 영화들은 어때. 문학의 고전들을 10대 소녀영화의 세계로 끌고 들어왔던 <쉬즈 올 댓>이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는 얼마나 깔삼했니. 요즘 소녀영화들에는 그런 ‘고전의 향기’가 남아 있질 않아. 싼값으로 만들어 돈이나 좀 우려먹겠다는 제작자들 심보만 눈에 보이지.” 케이디의 눈에 쌍심지가 켜진다. “글쎄요. 고전의 향기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가 탱탱하던 시절의 소녀영화들이야말로 뭔가 좀 어긋난 데가 있는 것들이라고. 언니가 걸치고 다니던 값비싼 디자이너 파티복에 어떤 10대가 공감하겠어. <퀸카…>에 나오는 애들은 다르다고. 다들 할인매장 옷입고 앉아서 손톱 손질하고 남자친구 이야기 따위나 나불거릴 수 있을 것 같은 생생한 애들이란 말이지. 언니처럼 예쁘게 나이든 늙은이가 고등학생 역을 맡는 게 아니라. 린제이 로한이나 힐러리 더프 같은 진짜 10대들이 연기를 한단 말이에요.” 잔인한 소녀들, 베벌리힐스 잔혹사 “케이디! 곧 <오프라 윈프리 쇼> 녹화가 시잘될 참인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퀸카…>의 각본을 쓰고 수학선생으로 출연했던 티나 페이가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뒤따라 달려온 매니저들이 아직 말도 채 끝내지 못한 케이디를 우격다짐으로 밴에 싣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상황이 진정이 되자 조심스레 티나에게 말을 건넸다. “저희는 지금 올 한해 소녀영화들에 대해 담화 중이었는데요. 이렇게 <퀸카…>의 각본가를 만나게 되다니, 세상에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티나가 웃어젖힌다. “호호호. 원래 할리우드란 데가 우연의 씨줄 날줄로 이어진 세계잖아. 자기. 그런데 베로니카양도 여기 있었네! 반가워. 내가 <퀸카…>를 쓰면서도 <헤더스>를 많이 참고했거든" 베로니카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래도 <퀸카…>에 나오는 애들같이 우아하지 못한 암살쾡이들은 아니었어.” 티나는 그제야 조목조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글쎄. <헤더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였지만, <퀸카…>엔 나름대로의 리얼리티가 있어. 아마 그래서 좀 덜 우아할지도 모르지만. 알다시피 <퀸카…>의 원전은 <여왕 벌과 추종자들, 로잘린드 와이즈먼의 십대 소녀들의 행태에 대한 보고서>라는 딱딱한 논픽션이었어.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들을 많이 가져왔지. 사실 영화 개봉 뒤에 교육관계자들과 10대 소녀들은 영화가 실제 고등학교 사회와 굉장히 닮았다는 이야기들을 각종 매체들에서 토로하지 않았겠어?” “정말 요즘애들 무서워.” 셰어가 덧붙인다. “그런 패거리들의 살벌한 왕따문화는 우리 땐 본 적이 없다고. 어떤 면에서 <퀸카…>는 <캐리>나 <조브레이커>와 다를 바가 없는 호러영화야.” “정말 미국 여고생들은 그렇게 무섭나요?” 보은이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티나가 윙크를 보낸다. “꼭 소녀영화 속에서만 여자들이 그렇게 행동해온 것도 아니라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라스트 스쿨>(1993)의 파커 포시 기억나?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가 신입생들을 향해 “씨바 뭘 봐. 대가리를 확 뜯어버린다!”고 외치는 부분은 여전히 소름이 끼쳐.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 역시 호러영화에 가깝지. 린제이 로한도 10학년 때 전학간 적이 있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그런 ‘플라스틱’ 그룹이 정말로 있었다더라고. <완벽한…>에서도 그런 재수없는 패거리들이 등장하잖아.” 티나는 말을 잇는다. “그래도 <퀸카…>를 <헤더스>처럼 어둡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PG-13등급을 위한 파라마운트와의 타협이었지. 그래도 중요한 건 이 영화가 10대 소녀들에게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잖아. 오호호호.” 다들 그 웃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아무 말도 않는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참, 얼마 전에 만난 마크 워터스(주: <프리키 프라이데이> <퀸카…>의 감독)가 이러더라고. (그를 흉내내며) 10대 소녀들이 <퀸카…>를 마치 리얼리티 쇼처럼 관람하던데.” 티나가 또 한번 정신나간 듯이 웃는다. “깔깔깔. 그래서 내가 대꾸했지. 그애들 이 영화를 <소피의 선택> 보듯이 관람하던데요, 감독님. 꺄르르르륵.” 주체적인 소녀들, 그네들은 울고 웃고 소비한다. “정말 시끄러운 여자야.” 그녀가 떠나는 걸 지켜보는 베로니카가 혀를 찬다. “인정해. 2004년의 10대 영화가 예전과는 좀 다르다는 걸. 그러나 대부분이 소녀들 푼돈이나 한번 노려보려고 기획된 영화들인데다 값싸게 캐스팅한 텔레비전 스타로 가득하잖아. 다들 플롯은 염치없고, 캐릭터들은 바비인형처럼 딱딱해.” 거기에 조심스럽게 보은이 대꾸한다. “그래도 확실히 예전과는 다른 것 같은데요. 이젠 소녀영화들의 흥행을 보장해줄 새로운 소녀 관객층도 생겼고, 소녀스타들이 직접 자기 세대 영화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왕자님 판타지도 조금이나마 진보하는 중이고, 게다가 착하기만 한 소녀들 대신 잔인하고 나쁜 현실의 소녀들이 주역으로 등장하고….” 셰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보은을 바라본다. “확실히 효과가 있어. 이런 어린애한텐 에스프레소 한잔이 각성제라니까 각성제.” “제가 무슨 어린애인 줄 아세요. 저 이래봬도 어엿한 기혼녀라고요.” 셰어가 보은을 기특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클루리스>가 시작이었어. 닳아빠진 소녀들의 이야기도 얼마든지 흥미진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지. 예전 같으면 주변에서 들러리나 섰던 양갓집 규수들도 동세대의 살아 있는 아이들이라는 걸 처음으로 알려준 영화잖아. 무엇보다도 어른들 마음대로 창조했던 소녀상이 점점 피와 살을 얻어갔던 것도 90년대 들어서나 가능했던 일이지. <쉬즈 올 댓> 같은 영화들이 붐을 이루고 나서 사라 미셸 겔러 같은 애들이 화면 위에서 섹스와 마약을 시작하자 슬슬 그것도 끝물을 탔지만, 그래도 <브링 잇 온> 같은 영화는 어때? 예전 같으면 치어리더 따위는 고뇌하는 여자주인공에게 물세례나 퍼붓는 들러리나 섰을 거 아냐. 걔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고민과 치열한 투쟁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잠깐만, 잠깐만요.” 보은이 말을 막는다. “바로 그런 것들이 지난해와 올해의 소녀영화들을 만들어낸 거잖아요. <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와 <프린세스 다이어리2>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비록 시대착오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캐릭터들은 전과 달랐어요. 자기 결정은 자기가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인물들이었으니까. 게다가 악역으로 등장해야 할 남자 조연들에게까지 세심하게 인간미를 부여한 것도 좋았죠.” 베로니카가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훅 공중에 불어 도넛을 만든다. “착하고 엄마 말 잘 듣고, 힐러리 더프가 광고하는 건 뭐든 사모으는 시대의 충실한 소비자들. 10대 소녀들이여. 영화를 소비하라. 여기 제대로 상을 차려놓았다. 이런 거 아냐 어쨌든?”

<아홉살 인생> 춘사영화제 4개 주요부문 석권

윤인호 감독의 <아홉살 인생>이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약칭 춘사영화제)의 주요 부문을 휩쓸었다. 지난 3월말 개봉당시 전국관객 34만명을 기록한 바 있는 <아홉살 인생>은 흥행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아역배우들을 새롭게 발굴해 냈던 작품. <아홉살 인생>에 출연했던 아역배우들(이세영, 김석, 나아현, 김명재)은 나란히 아역상을 수상했으며 그밖에 최우수작품상(황기성), 감독상(윤인호), 각본상(이만희) 등 노른자 부위을 석권했다. <올드보이>도 춘사영화제의 주역이었다. <올드보이>는 심사위원 특별상(박찬욱), 남우연기상(최민식), 촬영상(정정훈), 편집상(김상범) 등을 수상해 <아홉살 인생>과 나란히 4개부문을 수상했다. 여우연기상은 <아는 여자>의 이나영과 <얼굴없는 미녀>의 김혜수가 나란히 공동수상했고, 남우조연상은 정두홍(<바람의 파이터>), 여우조연상은 고수심(<인어공주>)이 받았다. 신인감독상은 <비디오를 보는 남자>의 김학순 감독이, 남녀신인상은 각각 <태극기 휘날리며>의 원빈과 <어린 신부>의 문근영이 수상했다. 한편 심사위원 특별상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이외에 <실미도>의 강우석 감독과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등 3명이 공동수상했다. 춘사영화제는 한국영화계의 선각자였던 나운규 감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매년 주최하는 영화제로 작년에는 <살인의 추억>이 재작년에는 <오아시스>가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바 있다.

<태풍태양> 촬영현장

파티는 이미 끝난 뒤였다. 인라인 타고 강남 고층빌딩을 넘나드는 무법자 청년들을 보겠거니 했더니만, 웬걸. 그게 아니었다. 삼각형을 접붙인 외관의 D빌딩 앞에는 와이어 장치를 한 기중기 2대와 지미집이 전부였다. 저녁시간을 이용한 간담회가 끝나자 <태풍태양> 배우들은 촬영 준비 대신 뿔뿔이 흩어져 개별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고, 극중 깡맨 역할의 김상혁을 대신한 스턴트맨만이 4m 높이에 매달려 30cm가 못 되는 폭의 난간 위를 인라인으로 반복해서 훑고 있다. 아쉬움을 눈치챈 건가. 제작자인 필름매니아 지미향 대표가 다가와 “어제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한다. 주연배우들이 직접 인라인 신고 농구공처럼 허공으로 튀어오르고, 함성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던 장면은 전날 다 찍었다는 비보. “언제 저길 올라갔지?” 실망한 취재진을 달래기라도 할 심산인가. 어느새 대역 대신 김상혁이 직접 와이어를 등허리에 달고 이륙해 있다. 이날 제작진이 노출한 촬영 분량은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 팀의 두 기둥이자 뒤에 갈등을 빚게 되는 모기(김강우)와 갑바(이천희)가 화려한 인라인 기술을 펼친 뒤, 이에 지지 않으려는 깡맨이 건물 입구 지붕 위에 올라가 뛰어내리다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장면. 김병서 촬영감독과 간단한 대화를 나눈 정재은 감독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컷”, “다시 한번 가자”를 반복한다. 거꾸로 필름을 돌려보는 듯 비상과 착륙을 반복하는 김상혁은 와이어에 매달린 시간이 2시간이 넘자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결국 중심을 잃고 난간 위에서 떨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정재은 감독이 눈 깜짝한 건 아니다. 현장에서 가장 잘 챙겨주는 사람은 감독님이요, 라고 배우들은 입을 모았지만 거리두고 보는 자의 눈으론 잘 모르겠다. 배우의 몸상태에 대한 걱정보다는 인물이 움직이는 속도, 연결 동작의 자연스러움, 점핑 타이밍 등을 꼼꼼히 체크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하다. 정 감독의 꼼꼼한 지시에 가장 바빠지는 건 이홍표 무술감독. 그는 “이건 그냥 나는 것과 다르다”며 “와이어 설치도 평소 때보다 배로 힘이 든다”고 말한다. 지붕 난간을 타는 장면을 찍고 난 뒤 연결장면인 점핑을 찍을 때야 비로소 모니터에서 눈을 뗀 정재은 감독은 “모든 스탭들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장면이라 리허설이 길고 실제 촬영에서도 OK를 내는 데 더 신중해진다”고 덧붙인다. “(김)상혁이는 고생해도 돼. 지금까지 편한 장면이었잖아.” 그렇게 한마디한 것이 스탭이었나, 아니면 배우였나. 제작진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세계 익스트림 대회 장면 촬영을 LA에서 마쳤고, 이후 일산 호수공원, 잠실 등지에서 50%의 강행군 촬영을 마친 상태. 노동강도만 따지면 이미 영화 한편 너끈히 끝냈을 것이다. 주인공인 김강우의 말. “할수록 오기가 생겨요. 그럼 자학해요. 그리고 소리 지르고 한번 더 가요. 우린 아직 젊거든요. 그럼 담벼락도 타고 360도 회전도 하는 거죠.” 박주영 프로듀서의 귀띔도 다르지 않다. 인라인으로 세상과 싸우는 법을 알게 되는 소요 역의 천정명은 본인이 ‘한번 더’를 외치는 바람에 100번 넘게 테이크를 간 장면도 있었다고. 내년 2월17일 개봉.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틀간 관객동원 수, 일본 기록 갱신

지난 11월20일, 일본에서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하울이 움직이는 성>이 20일, 21일 이틀간 약 110만 5000명의 관객을 불러들이며 일본영화 사상 이틀간 관객동원 수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흥행 수입은 약 15억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일본 영화사상 최다 개봉관(448개관)으로도 이미 신기록의 첫 스타트를 끊기도 했다. 2001년 개봉되어 일본영화사의 모든 기록을 뒤엎었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틀간 관객 80만 4천명, 수익 약 11억엔을 기록한 바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배급을 맡은 토호는 관객 4000만명, 흥행 수입 500억엔(약 5200억원)이 최종목표라고 밝혔다. 참고로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기록한 총 관객 수는 2340만명, 흥행 수입은 304억엔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3년만에 선보이는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영국의 동명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며, 마녀의 저주로 90살 노파로 변한 17살 소녀 '소피'와 움직이는 성의 주인인 마법사 '하울'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일본의 국민적인 대스타 기무라 다쿠야가 하울의 목소리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음악은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의 토토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거의 모든 작품의 음악을 담당했던 히사이시 조가 맡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한국에서는 12월 24일 개봉된다.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 <노트북>

첫사랑이 죽는 날까지 식지 않는다면 행복할까. 한날 한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숨을 거둔다면 더 행복할까. 일견 지고지순해 보이는 이런 낭만적 연애관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발명품이지만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고, 자칫 끔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꾸로 보면 오직 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신파적 사랑 이야기가 벙어리 장갑과 털모자 노릇을 할 때도 있다.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쯤으로 요약될 <노트북>엔 직접 손으로 짠 벙어리 장갑의 따스한 분위기가 흐른다.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랑을 엮어나가는 뜨개질 솜씨 덕분이다. 누군가 손으로 공책에 써서 수십년 간직해온 이야기는 낡았을지는 몰라도 진실되다. 갈대가 흔들리는 노을진 강가를 누군가가 혼자 노를 저어가는 인상적인 도입부가 끝나면 병원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등장해 치매 걸린 할머니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껏해야 한 시간에 40센트를 버는 벌목공과 뉴욕의 명문 사립대 입학을 앞둔 부호의 딸이 사랑한다는 1940년대 이야기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몰라봐도, 그 낡은 사랑 이야기만큼은 계속 듣고 싶어한다. 빅밴드의 재즈 스탠더드 넘버가 나오면서 화면은 1940년대 미국의 남동부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넘어간다. 노아(라이언 고슬링)는 시골 별장으로 놀러온 엘리(레이첼 맥애덤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짝이 있는데도 거절의 말을 들었는데도 단념을 하기는커녕 노아의 마음은 더 불타오른다. 영화는 가난하지만 휘트먼의 시를 읽는 노아와 부호이지만 음담패설을 즐기는 엘리의 아버지를 대비시킨다. 신분 상승의 차이를 넘어서려는 무모한 사랑을 정직하게 그려낸다. 이런 정직함이 흠도 된다. 어디서 본 듯한 새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가난한 청년은 남고 부자 소녀는 큰 도시로 가야 하는 현실만큼이나. 현재와 과거가 어떻게 맺어질지가 궁금증을 낳지만, 이마저도 예상이 가능하다. 감동은 다른 곳에서 나온다. 엘리가 치는 쇼팽의 전주곡과 할머니가 기억이 아니라 마음을 따라서 치는 쇼팽의 전주곡 선율이 이어질 때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애틋한 마음과 바람 앞의 촛불처럼 깜빡거리는 할머니의 의식이 잠깐 이어질 때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곁을 지켜주는 사람의 소중함이 새삼 다가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일까.

브라이언 드 팔마와 <팜므 파탈> [2] - 드 팔마에 관한 5가지 키워드 (2)

3. 그는 과연 여성혐오자인가 왜 드 팔마는 어머니의 거세를 더 두려워하는가 드 팔마의 두려움은 그러나, 정치적 절망감이 아니라 거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부터? <필사의 추적>에서 잭 테리를 보라. 그는 샐리에게 전혀 성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숲의 바람소리를 채집하려는 잭 테리의 마이크는 그가(또는 드 팔마가) 지키고자 하는 상징적인 남근일지도 모른다(이 마이크는 아마 아버지의 부정을 기록하기 위해 소년 드 팔마가 필요했었을 그런 마이크가 아니었을까. 어린 드 팔마는 녹음장비를 들고 며칠을 아빠의 부정의 흔적을 녹음하기 위해 쫓아다녔다). 드 팔마의 영화는 이처럼 남성 캐릭터의 남근성을 지키고 ‘남성’이 되려는 여성을 징벌하는 데 애를 쓰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도 있다. 라이언과 켈너는 <카메라 폴리티카>에서 드 팔마의 작품에서 여성은 일반적으로 섹시한 백치나 못난 희생자, 아니면 위협적인 마녀로 재현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드 팔마는 이런 진단을 거부한다. “어두운 집 안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보다 네글리제 차림의 여자가 돌아다니는 게 더 좋다”(살롱닷컴과의 인터뷰)는 건 농담일지 모른다. <팜므 파탈>에 대해 드 팔마는 “나는 정치적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를 분노하게 하기 때문이다”(<필름 코멘트>)라고 말했다. 사실 캐리 리키 같은 이의 지적처럼 “여자들이 소름끼치게 희생되기는 하지만 남자들보다 더 고통을 받는 적은 한번도 없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드 팔마의 남성 주인공은 삼류배우(<침실의 표적>), 연약하고 늙은 신병(<전쟁의 사상자들>), 삼류영화 오디오맨(<필사의 추적>), 신경질적인 고등학생(<드레스드 투 킬>), 깡패 푼돈이나 뺏는 형사(<스네이크 아이즈>), 파파라치(<팜므 파탈>) 등으로 충분히 사회에서 고통받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여성을 구하지 못하면서 더욱 고통받는다. <스네이크 아이즈>와 <팜므 파탈>에서 보듯, 여성에 대한 처벌은 이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의 성장이 그를 두렵게 하는 걸까.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드 팔마는 여성의 지위 변화가 그로 하여금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낡은 클리셰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실토한 바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미션 투 마스>에 대해 표현한 “그의 유일한 주제는, 여성이다. 또는 어떻게 한 남자가 우주의 끝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여자를 다시 발견하는가이다”라는 구절이 농담은 아닐 것이다. 4. 그는 어째서 상반된 평가를 받는가 왜 프랑스는 그를 높이 평가하며 미 평단은 왜 그를 낮춰보는가 드 팔마의 스릴러와 공포영화는 매우 독창적으로 현대의 악몽을 재현한다. 그는 일상과 가정에 숨어든 악몽을 최대치까지 이끌어낸다. 그가 택한 흉기와 흉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라. <캐리>에서는 부엌칼이 날아다니며 <드레스드 투 킬>에선 면도칼이 흉기로 쓰인다. 그가 재현하는 공포의 방식도 개성적이다. <스카페이스>에선 사람의 팔과 두개골을 전기톱으로 자르지만 직접 그 장면을 보여주는 대신 톱 돌아가는 소리와 튀기는 핏물로 신경을 자극한다. <침실의 표적>에서 드릴로 배를 공격하기 전에 한번 플러그가 빠지면서 공포는 더 확장된다. 이런 시각적 충격은, 비록 냉소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보수적 가치를 노골적으로 깎아내린다. 재평가되고 있는 드 팔마의 ‘서인도제도판 대부’인 <스카페이스>와 <칼리토>는 현란한 수사학(카메라 세 대로 온통 통유리로 내부를 뒤덮은 나이트클럽 내부의 총격전을 훑는 <스카페이스>를 보라)으로 참담한 파국을 그려낸다. 수사학과 정치학이 서로를 향해 스며드는 방식은 미국의 환부를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다. 왜 이러한 영화적 유산들이 미국에서는 냉대를, 유럽에서는 환대를 받고 있을까. “유럽에서 잘되는 것은 내 영화들이 대화 위주가 아니라 시각적이어서다. 자막이 별 달리 필요가 없다. 미국도 아주 충직한 숭배자들이 있다. 내 첫 성공은 <그리팅>이었는데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았다. 유일한 대형 국제영화제 수상작이었다.” 동시대 작가인 코폴라나 스코시즈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 그는 드 팔마 웹사이트를 찾는 네티즌들에게 보상을 받는다. 5. 그는 왜 피와 구멍에 집착하는가 왜 그의 영화는 핏물이 흥건하고 성적 환상이 가득할까 정형외과 의사인 드 팔마의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수술장면을 구경할 수 있게 했다. “아버지가 사람의 몸을 열고 절단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피를 많이 봐도 잘 참아낼 수 있는 것 같다.” 핏덩이와 혈액과 시체는 어린 소년의 꿈과 현실에 자주 들락거렸다. 드 팔마는 삼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어머니는 팔마의 형들만 아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젊은 여자만 쫓아다녔다. 가정에 홀로 던져진 그가 할 수 있는 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컴퓨터의 세계였다. 드 팔마는 고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컴퓨터디자인과 과학경시전 참가로 보냈다. 전국과학경시대회에서 2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외로운 어린 시절은 <드레스드 투 킬>에서 앤지 디킨슨의 아들 키스 고든의 연기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고등학생의 판타지는 옷을 갈아입는 여학생의 탈의실 내부를 훔쳐보는 것이었을까. 그게 바로 필터를 입히고 몸을 핥듯이 지나가는 <캐리> 도입부의 카메라로 실현되었던 것일까. 드 팔마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설을 한번쯤 믿고 싶어진다. 그의 비평적 출세작인 <시스터즈>와 대중적 출세작인 <캐리>는 쌍둥이다. 그것도 몸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다. <시스터즈>가 더 복잡하고 음습한 그의 필모그래피의 축약이라면, <캐리>는 금발머리의 시체로 핏물이 흥건한 그의 대중적 공포영화의 축도다. <팜므 파탈>은 이 원류에서 헤모글로빈을 덜어내고 성적 환상을 더했다. 초기작 <그리팅>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여자의 옷을 하나둘 벗기며 사진을 찍던 카메라는 장구한 세월을 지나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건네졌다. 영화 자체가 훔쳐보기의 형식임을 늘 의식하는 이 달변의 수사학자는 여전히 하이테크와 미디어에 관해 우리를 놀라게 할 목록들을 숨기고 있다. 드 팔마 최고 작품은? 네티즌과 타란티노는 <필사의 추적>을 최고로 꼽아 2002년 초, 파리 퐁피두 미술관에서 열린 브라이언 드 팔마 회고전에서 드 팔마는 왜 <필사의 추적>(Blow Out)을 개막작으로 골랐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신의 영화 중 베스트로 <필사의 추적>이 뽑힌 걸 봤노라고 답했다. 이 사이트의 이름은 브라이언 드 팔마 홈페이지와 연결된 사이트인 ‘브라이언 드 팔마의 천국’(le paradis de Brian de Palma)이었다. 드 팔마의 팬사이트 가운데 하나인 ‘현대식 드팔마’는 아마도 드 팔마가 프랑스로 비평적 ‘망명’을 했을지는 몰라도 인터넷의 전세계 팬들이 드 팔마를 어느 때보다 더 보편적인 작가로 만들었다고 평했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천국’에서 2002년 11월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총점 22.60(만점 25점)을 받은 <필사의 추적>이 1위다. <드레스드 투 킬> <캐리>가 뒤를 이었고 <칼리토>와 <팜므 파탈>이 4, 5위를 차지했다. 직전 조사에서도 <필사의 추적>이 1위였다. 졸작으로 평가받는 <전쟁의 사상자들>이 의외로 6위에 올라 있다. <스카페이스>(7위)나 <시스터즈>(11위)보다 인기가 높다. <미션 임파서블>과 <스네이크 아이즈> <미션 투 마스>가 하위권인 15∼17위를 기록했고 <허영의 불꽃>은 최하위권인 21위다. 드 팔마의 팬들이 좋아하는 영화로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히치콕의 <현기증>이 1위로 손꼽혔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추종자이며 <캐리>의 존 트래볼타를 눈여겨본 뒤 <펄프 픽션>에 쓰기도 했던 쿠엔틴 타란티노도 <필사의 추적> 예찬자다. “가장 위대한 세편의 영화는 <리오 브라보> <택시 드라이버> <필사의 추적>이다.” (타란티노와 드 팔마의 인터뷰 가운데서)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제임슨처럼 <천국의 유령>을 꼽는 이도 있고 <가디언>의 앤드루 풀버나 정성일처럼 <칼리토>를 걸작으로 꼽는 이도 적지 않다. 로저 에버트는 <스카페이스>와 더불어 <팜므 파탈>을 최고작으로 골랐다.

최인호 원작 <해신>, 50부 퓨전사극 24일 첫 방송

“원작은 여기 하나도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정통 사극보다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영웅담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 흔적이 많이 느껴져 흐뭇하게 생각한다.” 24일 첫회가 방송되는 한국방송 2텔레비전의 새 수목드라마 〈해신〉(밤 9시55분)을 두고, 동명 원작 소설의 작가 최인호(59)씨(아래 인물사진, 우측은 <해신>의 중국촬영현장)는 약간의 아쉬움 속에 큰 기대를 담았다. 〈해신〉은 150억여원의 제작비를 들여 1200여년 전 신라·당·왜 3국을 넘나들며 거대한 해상제국을 건설했던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다. ‘퓨전 사극’을 표방한 만큼, 도입부 극적 흥미를 창출하기 위해 원작에는 없는 설정들을 많이 담았다. 장보고가 노예로 중국에 끌려가 검투사가 된다거나, 해적 상단과 라이벌 관계에 놓이며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의 아픔을 겪는다든가 하는 식이다. 최씨는 “원작은 자료에 충실해야 하니, 장보고가 당으로 건너가기까지 유년기와 청년기 모습은 많이 담지 못했다”며 “원작은 이미 출가외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영웅담을 만들어내려 한 제작진의 노력에 대해선 아낌없는 찬사를 보탰다. 초반 5회 분량의 촬영물이 압축공개된 지난 18일 시사회 직후 그는 “가슴이 뛰고 조마조마했다”고 감상을 전했다. 드라마는 초반부 둔황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 전투와 원형 격투장 안에서 벌어지는 검투 장면 등을 고화질(에이치디) 화면 에 역동적으로 담아낸다. “올해 초 피디와 10번 정도 만나 얘기를 나눴다. 피가 끓는 역사드라마를 보고 싶다고 했다. 어차피 1200년 전 역사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를 통해 살아가는 의욕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는 “요즘 역사 드라마가 너무 정형화돼 있다”며 “옛날 얘기가 아니라 오늘 얘기라는 현실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왜 지금 장보고라야 되는가. 서기 800년대 장보고는 이미 3국을 넘나드는 세계인이자 미래인이었다. 그는 또 패자부활전을 거쳐 이긴 사람이다. 암살 뒤 이렇게 부활한 사람이 우리 역사엔 없었다.” 그는 “우리 역사가 육지사관 중심인데, 바다에서 신화를 일군 영웅의 이야기로 젊은이들에게 드라마틱한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감동이 클 것”이라며 “긴장감이 50부 내내 동일하게 유지됐으면 하는 게 개인적 바람”이라고 말했다. 〈해신〉에선 최수종이 장보고로, 채시라가 장보고의 경쟁자 자미부인으로 나오며, 수애가 비련의 연인 역을 맡았다. 송일국은 젊은 시절 친구였다 나중에 장보고를 암살하는 염장을 연기한다.

근데, 이 건달은 대체 누구십니까? <귀여워>의 정재영

“근데, 이분은 대체 누구십니까아∼?” 한 여자를 둘러싼 네 부자의 못 말리는 소극(笑劇) <귀여워>의 한 장면.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난 건달 뭐시기가, 계속해서 난데없이 끼어드는 문제의 여자 순이에게 날리는 잊지 못할 명대사다. 뭐시기를 연기한 정재영은 그 장면을 두고, “그때, 그 상황에서 (예)지원이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런 말이 튀어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막상 <귀여워>를 보고난 관객이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다. ‘근데, 대체 누구십니까?’ <킬러들의 수다>의 엉뚱하고 멀끔한 저격수 재영 이후, 가진 것은 힘밖에 없는 독불(<피도 눈물도 없이>), 내세울 것은 깡 하나뿐인 제1조장 한상필(<실미도>), 어리숙하지만 사랑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동치성(<아는 여자>)까지, 따지고 보면 한번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그이건만 날건달의 진짜 세계를 (말 그대로) 맨몸으로 소화하는 신들린 연기를 보고 있으면 이 사람, 정말 어떤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는 8년 전 <박봉곤 가출사건>에서 외로운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당시에는 “동네 불량배 역할로 고작 두신 나오는 주제”에 온갖 설정을 준비해가는 바람에 감독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초록물고기> <조용한 가족> 등에도 출연했다지만, 어떤 장면에서 나왔는지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기억해내는 이 하나 없다. 그런 그가 장진 감독의 영화들을 통해 서서히 얼굴을 알렸고, <킬러들의 수다>에서 첫 주연을 맡았으며, 1천만 관객의 사랑을 받은 <실미도>를 거치면서 길거리를 나다니면 누구나 알아볼 만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묵직한 존재감 혹은 가능성을 만방에 떨친 전환점은, 단언컨대 <귀여워>다. 전라도 출신 날건달의 사소한 행동과 말투를 그대로 체화한 채 나름의 뭐시기를 만들어간 <귀여워>에서 그는 빛을 뿜어내는 듯 눈부시다. 균일하게 무게가 실린 만만찮은 캐릭터들 속에서 뭐시기가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귀여워>의 뭐시기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달려들 만큼 녹록한 캐릭터는 아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너무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뭐시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렵사리 시작한 촬영은 또 어찌나 오래 끌었던가. 순이를 연기한 예지원은 중간에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모두 찍고 개봉까지 마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은 촬영 중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시선을 앉으면서 줄 것이냐, 일어나면서 줄 것이냐, 같은 정말로 사소한 설정 하나를 가지고도 감독과 갈등할 만큼”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그에게 가장 큰 고민은, ‘또’ 건달 역할을 맡았다며 매너리즘을 운운할 주위의 시선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그럼 좀 다르게 가보자. 만날 보는 건달이 아닌 진짜 건달을 보여주자. 그러면 다른 얘기는 못하겠지.” 결과는 사뭇 감동적이다. 건달이 들어가지 않으면 영화도 아니라는 듯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지는 조폭영화 속에서 절대로 볼 수 없었던 ‘행동하는 건달’ 뭐시기가 그로 인해 탄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 조명이 켜진다. 이것저것 포즈를 취해보던 그가, 이내 “헤…. 이제 할 게 없네”라며 쑥스럽다는 듯 말꼬리를 흐린다.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바로 결과를 확인하고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 이게 누구예요?”라며 낯설어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과감하게 굴곡진 그 얼굴, 실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정말 잘난 얼굴이다.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죠?” 무심결에 던진 질문에 “많이 듣죠∼ 부모님한테. 남자는 모름지기 이렇게 생겨야지, 라면서”(웃음)라는 너스레가 돌아온다. 그러나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나름의 페이스를 잃지 않을 듯한 그에게도 소소한 고민들은 분명 존재한다고. “시나리오 안 들어오던 시절에는 어쩌다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되지만, 이제는 투자나 이런 부분까지 신경써야 하니까 좀 부담스럽죠. 무명일 땐 뭘 하든 망가지든 누가 신경도 안 쓰는데 이제는 선택도 신중해야 하고. 그런 부분들이 연기보다 더 힘들어요.” 자기도 모르는 새 명실상부한 충무로의 주연급 배우 중 한 사람이 되어버린 배우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솔직한 잡념들. 그러나 본인도 인정하다시피, 1시간 반 동안 이어지는 연극 무대에서조차 줄기차게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니던가. 하물며 이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연기 인생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고 작은 부침쯤은 느긋하게 참고 견딜 만한 여유가 그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정재영의 건달 체험기 - 나는 어떻게 뭐시기가 되었나 진짜 건달들이랑 1주일 정도 합숙했어요. 그 이후에도 이틀에 한번씩 만나서 술 먹고, 경마장 가고, 사우나도 가고. 이번 기회에 건달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어요. 처음에 같이 사우나에 갔을 땐, 아휴∼ 이건 뭐, 그냥 화투장들이 막 날아다니는 거야. 문신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는데…. 처음엔 눈길 둘 곳도 못 찾고 앉을 자리도 모르겠더라고요. 어렵게 자리 찾아서 앉아 있다가도 누가 들어오면 슥∼ 일어나는 거야(진짜 일어나 보이는). 신문도 좀 보다가 누가 옆에서 보려고 하는 것 같으면 다 본 것처럼 하고 내려놓고(역시 앞에 놓인 <씨네21>로 그대로 재현). 그러다가 이제 좀 편해지니까 “에∼ 이 문신은 좀 조잡하다”면서 친한 척도 하게 됐죠. 후후. 그렇게 같이 지내면서 관찰한 것들이 그대로 머시기의 모습으로 재현된 셈이에요. 실제로 그들도 만날 양복입고 다니고, 휴대폰을 보물 다루듯 하거든요. 휴대폰은 무조건 신형! 그게 신조예요. 영화 속에서 뭐시기가 출소하자마자 휴대폰 선물하는 장면 같은 건 정말 리얼한 장면이라니까요. 화장실 갈 때도 휴대폰을 끼고 다니다가 형님한테 전화오면, 벌떡 일어나서는 “예,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러면서 정자세로 받아요(그대로 재현해 보이는). 화나서 수화기를 입에 댔다가 귀로 가져갔다가 하는 장면도 실제로 참고한 설정이고. 정말 인상적이었던 건, 과장된 팔동작이었어요. 양복을 입으니까 팔이 불편해서 습관처럼 앉을 때나 일어날 때나 손을 한번 위로 올리게 되는 거예요. 처음엔 그게 진짜 이상했는데, 자꾸 하다보니까 나중엔 고치는 게 더 어렵더라니까. 그리고 그 표정! 극도로 화가 나기 전까지는 여유를 가지려고 애쓰는 어색한 표정도 많이 참고했죠. 말투의 경우는… 그게 원래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거든요. 전라도 출신 건달 말투랄까. 쪽팔려서 사투리를 안 쓰려다보니까 생긴 말투 같아요. 무조건 “∼까”랑 “∼다”로 일관하는 말투, “그랬습니까, 형님∼” 이런 식이죠. 이번에 그 말투는 확실하게 익혔어요. 어디서 다시 써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여인들의 수다로 만든 걸작, <여인들>

<여인들> The Women 1939년 감독 조지 큐커 상영시간 133분 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 음성포맷 DD 1.0 영어 자막 한글, 영어 출시사 워너 1939년의 할리우드는 너무나 위대해서 심지어 수다와 가십으로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MGM은 브로드웨이 666회 공연을 기록한 <여인들>의 영화화를 위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감독으로 내정됐던 조지 큐커를 영입했다. 무대 출신에다가 그간 여성을 다룬 영화에서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준 그였기 때문이다. <섹스 앤 시티>의 큰언니쯤 되는 <여인들>은 유럽 귀족사회를 흉내내던 1930년대 미국 상류사회의 한 단면도다. 바람난 남편을 둔 여자와 그녀의 심술궂은 친구 그리고 사나운 정부 사이에서 한바탕 이혼 소동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여인들>를 보는 것은 ‘어떻게 수다와 가십이 예술이 되었는가?’, ‘어떻게 천박함이 우아함을 획득하게 되었는가?’의 대답을 듣는 것과 같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의 질문이 추가된다. ‘왜 여자들은 남자 때문에 다투는가?’ 여자, 그것도 남자 때문에 이를 드러내고 경쟁하는 여자들을 보고 싶다면 <여인들> 이상이 없다. 게다가 흥겹기까지 하다. <여인들>은 각 캐릭터와 사슴, 표범, 원숭이, 여우 등의 동물이 짝을 이루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이 곳이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임을 밝히고, 이후 상류 유한계급 여성 내부의 정치구도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133분간 진행되는 <여인들>에는 정말로 135명의 여자 외에 단 한 명의 남자도 등장하지 않으니(아이들은 전부 딸이며, 개나 말조차 암컷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들의 부산한 몸짓과 끝없는 수다에 당신은 귀를 틀어막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독히 세련된 천박함엔 한번 웃어주면 그만인걸. ‘다 그런 거지 뭐.’ 사실 <여인들>의 이야기와 그 속에 투영된 뉴욕의 가십, 여배우들의 캐스팅과 제작 과정 중에 벌어진 신경전은 과거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리와 카페와 버스에서 요즘 여자들의 수다를 듣노라면 <여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여인들>이 지금도 모던함을 잃지 않고 있는 건 매끄럽게 포장된 보편적인 이야기 덕이다. 근래에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지는 <여인들>은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에 영향을 주었고, 맥 라이언이 유명 여배우들을 모아 리메이크를 기획 중이라고 한다. DVD 부록으론 MGM이 신작 홍보를 위해 제작한 짧은 다큐멘터리 두 편이 눈에 띈다. 당시 제작 상황과 스타, 패션 등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다. 그리고 극 중 유일하게 컬러로 찍힌 패션쇼 신의 흑백 버전, 워너의 고전 시리즈에서 익숙한 ‘영화음악 듣기’, 남자가 등장하는 1956년도 리메이크 판의 예고편 등이 제공된다.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