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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방문기

암스테르담에서는 알겠다. 영화에 반한 그 청년이 왜 그토록 비의 리듬에 몰두했는지를.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 지난 11월18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17회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IDFA)는 비 속에서 개막돼, 오가는 빗줄기에 젖어 있었다. 빗줄기는 그때의 빗줄기가 아니겠지만, 그때의 거리는 곳곳에 남아 있었다. 요리스 이벤스들이 영화에 관한 토론으로 밤을 지샜다던 살롱들이 영화제가 열리는 광장 주변에서 여전히 손님을 맞고, 푸도프킨의 <어머니> 상영을 당국이 금지하자, 이벤스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는 아메리칸 호텔에는 다큐멘터리 마켓, 독스 포 세일이 차려졌다. 여전한 것은 또 있다. 현실을, 현실의 변화를 포착하려던 다큐의 정신이다. ‘변화’는 올 IDFA에서 중요한 표제어였다. ‘벽에 붙은 파리처럼’ 현실로 60년대 미국 다큐멘터리사에서 솟아오른 ‘시네마베리테’(혹은 다이렉트시네마) 감독들이 암스테르담에 나타났다. 존 F. 케네디가 말 그대로 새로운 별로 떠오른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고전 <프라이머리>의 존 드루와 리처드 리콕, 앨 메이슬스와 <티티컷 폴리>로 시네마베리테에 합류한 프레드릭 와이즈먼, 그 흐름의 막내 조앤 처칠이 한 테이블에 앉아 벌인 토론은 그 자체로 진기한 광경이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누벨바그와 시네마베리테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이들은 가벼워진 카메라를 들고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용하게, 관찰자로서. “벽에 붙은 파리처럼”이란 좌우명 아래 <해피 마더스 데이> <돈 룩 백> <세일즈맨> <호스피탈> 등 일련의 작품으로 다큐멘터리사의 한장을 만들어냈다. 파리처럼 대상을 지켜보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겠다는 그들 카메라의 존재가 정말로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40년 뒤의 토론장에서도 질문은 되풀이됐다. “<그레이가든>의 인물들이 카메라가 없었어도 그렇게 극적인 행동을 했을까?” 앨 메이슬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리석은 질문이다. 그 모습이 그대로 그들의 현실이다. 카메라가 대상을 변화시킨다고? 그런 일은 없었다.” 와이즈먼과 드루가 동조했다. 팔순의 리콕이 조용히 끼어든다. “페네베이커가 <크라이시스>를 찍는데, 케네디가 힐끗 카메라를 바라보더라는 거야. 그걸 의식하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촬영을 하다말고 페네베이커가 소리를 죽이고, 카메라 렌즈를 밑으로 숙였다는군. 사람들이 카메라에 반응하기는 해.” 장편 대상, 삼대의 생생한 삶을 포착한 <달의 형상> △ <크라이시스><달의 형상> 네덜란드 감독 레오나르드 레텔 헤름리히의 <달의 형상>은 올해의 개막작으로 초반부터 화제의 초점이 되더니, 장편부문 대상 요리스 이벤스상을 받았다.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태생인 감독의 카메라는 어머니의 고향에서 만난 한 가족, 어머니와 아들과 손녀딸 삼대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어머니의 원에 따라 이들은 자카르타의 빈민가로 이사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땅 한뼘 없는 고향, 일감을 찾아 이 논 저 논을 떠도는 생활이지만 감독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달의 형상’은 이슬람의 상징. 어머니는 기독교, 아들은 결혼을 위해 개종한 이슬람 교도다. 극영화보다 삶이 생생하게 포착된 것은 차치하고(다큐멘터리니까) 이야기는 밀도있고, 아름답다. 조너선 스탁과 제임스 브라바존의 <라이베리아, 언시빌 워>는 찰스 테일러 전 대통령이 망명하기 직전의 라이베리아 내전을 현장취재했다. 반군과 정부군 양쪽에서 촬영을 진행하며 내전의 참상을 포착하는 데 성공해 장편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신인상과 단편상 실버 울프 상은 루마니아의 일레나 스탄술레스크의 <다리>와 안드레이 파브노프의 <게오르기와 나비>에 각각 돌아갔다. 관객은 194편의 영화 가운데 댄 올먼, 사라 프라이스, 트리스 스미스 감독의 <예스멘>에 관객상을 보냈다. 언론 자유 그리고 대안의 미디어 시네마베리테 토론장,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 이후 미국 다큐멘터리들이 극장 진입에 성공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노 감독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무어는 다큐 감독이 아니라 코멘테이터”라고 리콕이, “이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와이즈먼이 답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의 바람은 IDFA를 고무시켰다. “<화씨 9/11>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앨리 덕스 집행위원장은 “올해는 어쨌든 다큐멘터리의 해”라고 불렀다. △ <다윈의 악몽><끔찍하게 정상적인> <아웃폭스트> (Weapons of Mass Deception: 대량기만무기. 대량살상무기와 이니셜을 같이 한 말유희) <예스멘> <월드 어코딩 투 부시> <대통령 사냥> <콘트롤 룸> 등 지난 미국 대선과정에서 상영된 반부시 다큐멘터리들이 올 영화제의 ‘현실반영’ 부문에 줄줄이 옮겨졌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 역시 이 부문에 초청됐다. 대자본에 장악된 미국 주류언론을 비판한 의 대니 셰프터 감독은 “대선에는 졌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라고 미국의 다큐 부흥 현상을 가리켰다. “미국인의 70%가 현재의 미디어를 불신하고 있다. 다큐의 성공은 사람들이 주류언론과 다른 미디어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증좌다. 한번 인터넷 사이트 미디어채널(mediachannel.org)에 들어가봐라. 1300개의 미디어 그룹이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스멘>이나 <다윈의 악몽>처럼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화를 풍자, 비판하는 영화들 역시 대안미디어로서 다큐가 지닌 가능성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사적인, 지극히 사적인 다큐의 등장 카메라가 싸졌다. 분쟁과 환경파괴의 현장으로 달려가기에 캠코더는 얼마나 가벼운가. 한편으로 기술의 진화는 사적인, 지극히 사적인 다큐멘터리의 등장을 부추겼다. 칼레스타 데이비스는 25년 전 어린 시절에 당한 성희롱의 상처를 안고 자랐다. 그는 가족의 친구였던 가해자를 찾아가 감춰둔 이야기를 밝히기로 작정한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그렇게 진행된다. 다큐멘터리는 데이비스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됐다. 음주와 마약, 폭력으로 얼룩진 청소년기를 보낸 트라비스 클로제의 방황은 아버지의 억압에서 시작됐다.클로제가 이제 아버지가 됐다. 그는 아들에게 자신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아버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수단으로 카메라를 택한다. <아버지에서 아들로>는 그 결과물이다. 덧붙이는 말 다시 리콕. “빌어먹을 방송사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캠코더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필름으로는 안 돌아간다.” 그런 방송이 다큐멘터리의 근거지가 될 수도 있었다. 올 IDFA에는 ‘톱 10: 야니 랑브로엑’ 부문이 있었다. 30년 이상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선정을 담당해온 랑브로엑이 그 작품 가운데 고른 명편을 여기서 선보였다. 이 주옥같은 다큐들을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왔다는 거지! 집행위원장 엘리 덕스 인터뷰 “다큐가 네덜란드 사람의 성향에 맞나 보다” 폐막식이 끝난 다음날, 영화제 본부가 있는 드 발리의 카페는 빈자리가 없었다. 영화제 내내 그랬듯이. 인터뷰를 위해 폐쇄된 프레스센터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 도중, <오퍼레이터의 유령>의 여성감독이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런 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 여성이라서 자랑스럽다”면서 덧붙이는 말. “상영이 끝나서 홀가분하게 영화 좀 보려니, 모두 매진이다. 내년에는 표 구하기가 좀더 쉬워졌으면 좋겠다.” 폐막식 뒤 이틀 동안 포스트 페스티벌이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매표가 문제는 문제”라는 집행위원장 엘리 덕스의 말이 행복하게 들렸다.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데 말이다. 요리스 이벤스의 도시라서 이런가. 다큐멘터리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성향에 맞는 영화인 듯싶다. 렘브란트를 봐라.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낭만은 우리 몫이 아닌가보다. 요리스 이벤스 같은 다큐멘터리의 대가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영화제를 시작했나. 사실은 젊어서 교육 비디오일을 했는데, 다큐멘터리의 전통이 강한 이 나라 사람들이 다큐멘터리에 관해 잘 모르더라. 그 충격에 영화제를 하기로 했는데, 반응은 차가웠다. 암스테르담 시당국조차 다큐라면 지원이 곤란하다는 거였다. 세명의 여자가 그럼 우리끼리 하지, 하고 시작했다. 상영작이 겨우 40편,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었다. 영화제가 관객을 교육한 건가. 그렇게까지야. 교육이라면, 영화제가 문화정책당국의 지원을 받아 8살부터 18살까지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다큐 교육을 한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판별시키는 일부터 시작해 리뷰까지 쓰게 만든다. 스스로 생각하는 이 영화제의 성과라면. 전세계 다큐멘터리가 모여 통로를 찾는 장이 되었다는 것. 올해엔 90여개 페스티벌의 프로그래머나 디렉터들이 참가했다. 지지난해 요리스 이벤스상 수상작 <체크포인트>의 경우 세계 67개국 페스티벌이나 텔레비전에 소개되거나 팔렸다. 올 국제 게스트는 2300명으로 로테르담영화제보다 많았다. 매스터 클래스나 디베이트, 토크쇼 등 토론이 참 왕성했는데.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서 이미 논쟁이고, 토론은 그 외연이자 목적이다. 세상에는 서로 다른 신념과 종교와 정치적 입장이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생각들을 암스테르담에 모두 불러내 대화를 꾀한다. 나치즘과 근본주의까지. 나치즘이라고 말했나. 그렇다. 올해 상영된 <아라키멘터리> 같은 포르노그라피까지. 그 생각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나가자는 것이다. 지난 1998년 얀 프리만 기금을 만들어 개발도상국 다큐멘터리를 지원하는 것도 국가통제만 있고 지원은 없는 나라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그렇게 지원받아 제작된 영화 가운데 27편이 올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 한국영화의 소개는 부진하다 싶은데. 아, 한국 다큐멘터리의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부산영화제에도 가봤는데, 우리 마감이 끝난 뒤라서 다큐를 가져올 수가 없었다. 돌아가거든 많은 영화와 정보들을 좀 보내달라고 한국 감독들에게 말해주지 않겠나?

한국 온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쉘 프로동

특집기사 준비차 방한한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 장 미쉘 프로동 <르몽드>의 영화부문 책임을 맡고 있던 장 미셸 프로동은 2003년 7월 역사 깊은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새 편집장으로 부임했다(첫 번째 편집장의 글을 쓴 건 9월이다).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2005년 1월호 특집기사로 한국영화를 싣기 위해 그가 한국에 왔다. 1980년대부터 폭넓게 아시아영화를 주목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일관된 편집방향과 한국영화에 많은 애정을 지닌 장 미셸 프로동 개인의 관심이 동석한 결과이다. 4박5일 중 4일째 되는 날 그를 만났고, 개인에 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현재, 그리고 한국영화에 관한 의견을 물어보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세계 영화역사의 커다란 사건이자 동력이 되어온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만나 밖으로부터 다시 안을 되돌아본다. <씨네21>에 몇 차례 기고한 적이 있지만, 공식 인터뷰는 처음인 것 같다. 우선 개인적인 경력이 궁금하다. 시사 주간지 <르포앵>에서 일하다가 <르몽드>의 영화기자로 옮겼다고 알고 있는데,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나. 사실 영화평론을 하기 전까지 많은 일들을 했다. 10년 정도 대안 교육자로 일한 적이 있고, 사진작가도 했었다. 1983년부터 <르포앵>에 들어가서 영화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몇년이 지나 <르포앵>의 영화 섹션 책임자가 됐고, 1990년에는 <르몽드>에서 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다. 유력 신문인 <르몽드>에서라면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특별한 기획들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옮기게 됐다. 13년 동안 그곳에서 영화기자를 했고, 1995년부터는 영화부문의 책임자로 일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로 옮겨 편집장을 맡고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공부를 해왔는가. 특별히 영화공부를 어떻게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관객으로서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닌 것밖에 없다.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거나, 영화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인 14살, 15살 때부터 이미 열성적인 영화관객이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공부였다. 한 가지 꼽자면 어린 시절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열심히 읽었다는 점이다. 영화에 대한 사유를 바로 이 잡지에서 배웠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에 관한 사유와 정치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에 대해 <카이에 뒤 시네마>를 보면서 많이 고민하게 됐다. 말하자면 전형적인 시네필의 길을 걸어온 셈인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그 시절에 촉발제가 됐다고 할 만한 작품들은 무엇이 있나. 너무나 많은 영화가 있지만, 굳이 꼽자면 고다르, 펠리니와 파졸리니, 글라우버 로샤, 에이젠슈테인, 프리츠 랑, 오슨 웰스, 그리고 70년대 특히 내게 중요했던 감독은 장 외스타슈, 오시마 나기사 등이다. 말했듯이 2003년부터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맡았다. 2000년에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전 편집장 샤를 테송은 “2000년 12월31일을 기점으로 <르몽드>의 지분이 82%가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에 어떤 변화의 바람이 일었던 것이며, 현재 <르몽드>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운영관계는 어떠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가. 90년대 말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둘러싸고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주들이 지분을 팔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문제는 그 대상이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여 이름은 유지하되, <프리미어>나 <스튜디오>처럼 상업적인 기사들을 실을 욕심을 가진 매체들이었다는 점이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가장 품격있는 잡지이기 때문에 그 제목과 역사의 무게를 자기들의 장점처럼 업고가면서 상업화할 생각이었던 거다. 그 일로 당시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투비아나가 나를 찾아왔고, 다른 언론사로 넘어가지 않도록 <르몽드>가 사달라고 부탁했다. <르몽드>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수하면 적어도 편집권을 보장해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는 몇달 동안 끈질기게 <카이에 뒤 시네마>를 살려야 한다고 당시 <르몽드>의 사장을 설득했다. 몇 개월간의 설득 끝에 지분을 사기로 결단을 내렸지만, 사장은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나보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가서 편집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내가 편집장을 맡기보다는 기존의 편집진에게 편집권을 보장해주는 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가 98년, 99년쯤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는 또다시 여러 문제들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문제, <카이에 뒤 시네마>와 <르몽드> 사이의 의견 충돌, 기사에 대한 불만스런 지적 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러자 <카이에 뒤 시네마>를 다른 곳으로 팔아버리자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마찬가지로 이때 사겠다고 나선 매체들은 90년대와 같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곳들이었다. 그래서 몇달 동안 다시 매달려 팔지 못하도록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편집장의 자리를 맡으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2003년 7월1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편집장을 맡은 이후 새롭게 주력한 편집방향은 무엇이었나. 내가 편집장을 맡기 이전에 <카이에 뒤 시네마>는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 게임, 리얼리티 쇼, 뮤직비디오 등에 관심분야를 넓혀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영역을 넓히면서 진짜 다뤄야 할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핵심 토대가 여전히 영화라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다른 영상물에 대한 기사를 다루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방향만 넓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사유를 기점으로 하는 편집방향을 갖고 가려 한다. 물론,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는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총체적인 영상물에 대한 잡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갖고 있다 상업적인 고충은 없나. 그 문제는 언제나 있어왔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잡지와 평론지의 중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일반 잡지보다는 좀 많이 팔리고, 평론지보다는 좀 적게 팔리는 경향이 있다. 그 점에서 <르몽드>의 도움이 크다. 현재 <카이에 뒤 시네마>의 사업 중 중요한 것 하나가 내년 1월부터 인터넷 사이트를 열려는 계획이다. 최초 발행됐던 1951년부터 현재 2004년까지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작업 중이다. <르몽드>는 돈을 벌어들이는 수단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위치와 품격을 지키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다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고 있다. 11월호 표지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이었다. 개봉작 소개 특집기사 중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할애도가 컸다. 필진 10명 중 6명이 그 영화에 별 넷을 줬고, 그중 한명이 당신이다. 예컨대, 아핏차퐁의 <열대병>처럼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공통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아시아 감독은 누구인가. 나뿐만 아니라 우리 편집진은 지난 10년간 세계 영화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80년대 이후 아시아영화에 꾸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지아장커, 왕빙, 리팅팜,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왕가위, 티엔주앙주앙, 기타노 다케시, 미이케 다카시, 그리고 한국의 홍상수 등이 우리의 명단이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 대해서는 개봉 당시 비중있는 기사를 쓴 바 있다. 물론 임권택 감독이 이 명단에 포함된다. 한국영화 특집기사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한다. 내년 1월호에 낼 생각이다. 한국의 시네아스트들에 대해 자세히 조명하고, 주목할 만한 영화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한국의 영화 시스템, 특히 산업적인 시스템과 영화제작 지원부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는 등등의 총체적인 밑그림을 얻기 위해 왔다. 실제로 한국영화가 프랑스에서 인기를 높여가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관객에게 영화 한편, 또는 감독 한명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한국영화의 전체 지형도를 그려서 프랑스 관객에게 좀더 심화된 지식을 얻게 해주려는 목적을 갖고 왔다. 또 한 가지, 내년 1월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한국영화 50편을 갖고 규모가 꽤 큰 회고전을 연다. 알다시피 <카이에 뒤 시네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협력관계에 있다. 그 회고전을 위한 실무적인 절차들의 처리도 이번 방문 목적 중 하나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영화가 지닌 어떤 요인들이 당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이게 된 것인가. 개별로서의 한국영화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나의 관심은 전체로서의 한국영화다. 흥미롭게 생각되는 몇 가지 면면들이 있다. 한국영화는 독창성, 다양성, 역동성을 갖고 있다. 영화제에서 만나게 되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예술성을 가지면서도 관객을 외면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점들이 인상적이다. 또 하나는 영화 지원 시스템이다. 프랑스와 똑같지는 않지만 한국은 우리와 유사한 영화 보호 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국의 영화를 보호하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영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다른 아시아영화들을 도와주고 지원하는 위치에까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번 취재 기간 동안 어떤 영화감독들을 만났나. 중요성이 아니라 만난 순서대로 이야기하자면 이창동, 임권택, 홍상수, 장선우, 장준환 감독을 만났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 각자 성향이 매우 달랐고, 하고자 하는 영화가 모두 달랐다. 봉준호, 김기덕 감독 역시 리스트에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차기작 준비 때문에 만나기가 어려웠고, 김기덕 감독은 지방에서 강의가 많아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번에 취재를 하면서 한국영화에 대해 새롭게 깨닫게 된 점이 있을 것 같다. 예술가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제작자, 배급자, 영진위, 문광부 사람들도 같이 만났는데, 개별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영화의 포괄적인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등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실미도>를 DVD로 본 것은 좋은 기회였다. <실미도>가 개인적인 예술세계를 다룬 여타 영화들과 동등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역사적 중요도에는 관심이 갔다. 그렇게 많은 관객과 만나게 한 방법과 스타일을 고려했을 때 다른 예술영화들만큼이나 중요한 영화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그게 새로운 경험 중 하나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 관해서도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그중 하나가 수익구조다. 외국은 수익창출의 구조 중 상영관 이외의 텔레비전이나 DVD의 수익구조가 높은 편인데, 한국은 아직 상영수익 중심이라는 점이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인 것 같다. 한국의 시네아스트에 관한 세 가지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임권택 감독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로 알고 있다. 첫 번째, 임권택 감독에 대한 당신 개인의 의견을 듣고 싶다.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화 대개는 한 국가의 역사를 짊어지고, 역사와 영화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 영화가 역사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이 99편 모두 걸작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본 영화들 모두가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인간 사이의 관계, 종교에 대한 물음, 가족에 대한 성찰 등 한국적인 것들을 다루는 그의 영화는 국가와 민족과 영화와 문명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어 내게는 소중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마치 존 포드가 그의 영화에서 미국을 다루고, 르누아르가 그의 영화에서 프랑스를 다룬 것처럼, 임권택 감독은 그만큼의 무게로 자신의 영화에서 한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진은 공통적으로 홍상수 감독에게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홍상수 감독의 무엇을 주목하는가. 내가 홍상수 감독에게 깊은 인상을 갖게 된 건 이미 <카이에 뒤 시네마>에 들어오기 전 <르몽드>에서 일할 때 봤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였다. 사실 홍상수 감독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들은 <카이에 뒤 시네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비평계의 상당 부분이 그의 작품에 호의적이다. 그가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특히 아시아영화가 그런 경우가 많은데, 그는 모던한 질문을 던지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란 어떤 것인가, 캐릭터란 무엇인가의 규정에서 독창적인 면을 갖고 있다. 인물들간의 심리적인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뿐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거리두기를 만드는 새로운 영화체험을 제공하는 영화다.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의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은 타 문화권 사람이 봐도 동의할 정도로 예민하고 날카롭다. 말하자면 홍상수는 시네마토그래피의 한 형태를 창조해내는 아주 용기있는 감독에 속한다. 세 번째, 유럽에서 김기덕 감독은 높은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만큼은 홍상수 감독에 비교해 김기덕 감독이 덜 다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홍상수 감독에 비해 김기덕 감독을 덜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를 비롯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진이 홍상수의 영화보다 김기덕의 영화를 덜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덜 다루는 이유는 그만큼 덜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이 있다. 그의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에너지, 그것은 특히 분노, 노여움에 가까운데, 그 에너지를 영화적으로 번역하고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적인 도구들, 장치들이 다소 제한되어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기덕 영화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하는 점에서 예측이 가능하다. 물론 김기덕은 관객에게 쇼크주는 것을 잘하는 듯하지만 김기덕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쇼크들은 사실 좀 제한되어 있는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다양성과 비교할 때 그 쇼크의 효과가 제한적인 것 같다.

<까불지마> 프로듀서 겸 단역배우 류병석

<까불지마>의 시사회장. 마이크 앞에서 사회를 보는 남자. 회상장면에서 소매치기로 나와 개떡(오지명)이 던진 돌에 맞아 죽는 단역배우다. 왠지 얼굴이 낯익은 그는 스스로를 <까불지마>의 프로듀서 류병석(35)이라고 조심스럽게 소개한다. <친구>의 롤러장과 극장 화장실에서 상택(서태화)에게 치도곤을 날리던 면도날, <돌려차기>에서 “바람 구멍 술술 날 거야”라고 협박하던 병수가 바로 그다. 본업은 <그놈은 멋있었다>를 거쳐 두 편째 제작을 책임진 프로듀서. 그가 말하는 프로듀서와 배우라는 충무로 ‘투잡’ 스토리. 시작은 배우였나, 제작부였나. 고등학교 때부터 오디션 본답시고 충무로를 들락거렸다. 일찍 군대를 가서 복무 중에 영화하는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영화세상 안동규 대표와의 인연으로 처음 제작부를 한 것이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그때는 제작부가 뭔지도 몰랐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까지 쭉 2년 동안 ‘차 막아, 밥 시켜, 날라와, 주차해’만 했다. 현장에서 차승재 대표를 보고 처음으로 ‘제작부가 이거구나’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진짜 잘하면 성룡처럼 되는 거야? 알았어, 그럼 일단은 배우 접어’ 하고 생각했다. (웃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하고 박광수 감독을 만나면서 ‘이게 영화구나’ 싶었다. 전태일 친구 역으로 15, 16회차를 연기하는데 배우, 제작을 다 하려니 힘들더라. 가끔 급하게 ‘차 막아’ 이럴 때 촬영하고 있는 건 좋았지만. (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 안 좋은 아이만 주로 했다. (웃음) <친구>의 면도날 역은 곽경택 감독이 나에게 많은 부분을 맡겨준 것이 고마웠다. <돌려차기>도 애드리브가 많아 나중에 옆에서 적어줄 정도였다. 문제는 아직도 그런 역이 들어온다는 거. 얼마 전에도 섬에서 창녀들을 지키는 포주 캐릭터를 제의받았다. 여자들이 도망가면 잡아와서 때리고 강간하는. 그래서 “형, 나 영화 10년 했는데 아직 부모님 한번도 극장에 오라고 못해봤어요”라며 거절했다. <까불지마>에선 노배우 세명과의 작업이 힘들지는 않았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까불지마>는 오히려 덜 힘들었다. 촬영 후반에 장마 때문에 2주 정도 혼난 것 외에는 순탄했다. 세 명이 다 아버지 연배인데 날씨가 너무 더워 신경이 많이 쓰였다. 한강철교가 행정적으로 가급 다리라 원래 촬영이 금지된 곳이다. 그리고 관공서 대여섯곳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천신만고 끝에 <까불지마>가 한강철교가 등장하는 첫 번째 영화가 되었다. 굳이 프로듀서랑 배우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배우. 단 조건이 있다. 나이가 있으니까 프로듀서 일만큼 수입만 된다면 연기만 한다. 밥먹고 살 만큼만 번다면 배우다. 자신이 생각하는 프로듀서란. 예전부터 프로덕션 PD보다는 기획 PD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정해진 예산으로 어떻게든 완성만 하는 게 프로듀서 역할의 전부라고 생각지 않는다. <씨네21>과 개인적 사연이 있다고. 정기구독자였다. 더 재밌는 건 3∼4년쯤 된 일인데 ‘스탭25시’ 코너에 나를 써달라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 (웃음) 전화받은 사람이 본인이 결정할 수 없다더라.

[팝콘&콜라] 최고를 지향하는 영화상, 권위와는 거리먼 까닭은

영화가 가장 보편적인 오락거리이자 대중예술이 된 나라들은 저마다 자국 영화에 수여하는 대표적인 시상제도를 가지고 있다. 미국의 아카데미, 프랑스의 세자르, 대만과 홍콩, 올해부터는 중국까지 아우르는 중화권의 금마장상 같은 것이다. 영화시장의 성장 규모와 세계적인 인지도로 따지면 우리나라도 하나쯤 있을 법한데 과연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최근 제25회 청룡영화상과 제3회 대한민국영화대상이 며칠 사이로 열렸다. 청룡영화상에서는 <실미도>(사진)가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는 <올드보이>가 예년의 수상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요부문 5개에서 ‘몰아주기’ 수상을 했다. 이 두 영화상과 6월에 열리는 대종상은 국내의 3대 영화상으로 꼽힌다. 이유는? 각각 KBS, MBC, SBS라는 국내 ‘3대’ 방송사에서 중계를 한다는 점 이외에는 해답을 찾기 힘들다. 세 영화상은 모두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공정성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있다. 결과는 올해처럼 언제나 세 영화상이 판이하다. 그렇다고 세 영화상이 서로 다른 개성과 작품성을 추구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작품성이라는 계량화할 수 없는 기준으로 영화들을 줄세우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또한 자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상이 꼭 하나일 필요도 없다. 미국에도 아카데미 뿐 아니라 골든글로브가 있고, 뉴욕비평가협회상, 전미비평가협회상 등이 있다. 비평가협회상은 다른 상에 비해 흥행성보다는 작품성에 좀 더 치중하는 차이점을 드러내면서도 이 상은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의 전초전으로, 또 골든글로브는 아카데미의 전초전으로 인식된다. 각자의 색깔을 구별하면서 서로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화상들은 각자 최고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왜 그에 상응하는 권위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 권위와 차별성이 없는 영화상은 집안 잔치처럼 열리는 각 방송사의 연말 연기자 대상 시상식을 떠올리게 한다. 받아서 나쁠 게 없지만 못받아도 아쉬울 것 없다는 게 영화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올해 대한민국영화대상의 작품상 후보에는 <송환>과 <선택>이 올랐다. 의외의 선택이라 말도 많았지만 다른 영화상들과 구별짓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모았다. 하지만 일반 네티즌을 비롯한 1000명의 심사위원단이 투표하는 결과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결선에 들지 못했다. 시상식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또 어땠을까? 보통 수상 결과에 대한 논란이 오르내리기 마련인 영화상 홈페이지는 가수 비의 시상식 축하공연에 관한 ‘논란’으로 가득 찼다. 이날 영화상의 진짜 주인공은 영화가 아니라 가수 비였던 셈이다.

바스크의 작가 훌리오 메뎀을 만난다, 12월10일부터 스페인영화제 상영

서울아트시네마, 12월10일부터 스페인영화제 상영 주한 스페인대사관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의 공동주관으로 펼쳐진 스페인영화제가 로드쇼의 마지막 일정인 서울에 도착했다.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청주의 지방상영을 마치고 12월10일부터 6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펼쳐질 이번 영화제가 소개할 감독은 ‘바스크의 초현실주의 작가’ 훌리오 메뎀과 할리우드에 고딕풍 호러 바람을 일으킨 신성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이다. <마스크 오브 조로>의 감독직을 제안했던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바스크에 집중하고 있는 메뎀과 <디 아더스>를 통해 영어권 진입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아메나바르의 현재 행보는 매우 대조적이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는 원래 칠레 출신이다. 피노체트를 피해 스페인으로 건너온 가족들 속에서 자란 아메나바르는 영화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론 중심 교육에 염증을 느끼고 그만둔다. 19살 때 만든 단편을 시작으로 24살에 선보인 장편 데뷔작 <떼시스>로 자신의 존재를 만방에 알린 그는 이듬해 <오픈 유어 아이즈>로 스페인과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신성으로 급부상한다. <디 아더스>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아메나바르의 최신작은 식물인간 라몬 삼페드로의 실화를 다룬 <바다 속으로>. 1958년생 훌리오 메뎀은 바스크 출신이며 의학을 전공했고 한때 영화평론가로 활약했다. 1992년 장편 데뷔작 <암소들>(사진)을 시작으로 <붉은 다람쥐> <대지> <북극의 연인들> <섹스 앤 루시아> 등 지속적으로 문제작을 선보였다. <북극의 연인들>은 자국에서만 4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그가 가진 흥행감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의 최신작은 2003년 <바스크의 공: 돌에 맞댄 살>이라는 다큐멘터리. 다음 작품도 전작처럼 바스크 지방의 갈등을 다룬 극영화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이번 영화제에는 아메나바르의 주요작 세편과 훌리오 메뎀의 작품 다섯편이 소개된다. 아메나바르의 작품은 모두 극장 개봉을 거쳤지만 메뎀의 경우 주요작들이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된다고 할 수 있다. 프리 이벤트로 스페인의 국가대표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와 <나쁜 교육>도 12월8, 9일 이틀간 4회씩 상영된다. 김수경 lyresto@cine21.com <암소들> Vacas l 훌리오 메뎀 마뇰 드 올리베이라와 테렌스 맬릭을 합친 듯한 형식미가 돋보이는 연대기로 구성된 옴니버스영화. 3대 60년간 얽히고 설킨 두 가문의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비극의 시작은 이리히벨이 카를로스 전쟁 도중에 죽어버린 친구이자 라이벌이던 맨딜루세의 죽음을 발판으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면서 비롯된다. 순환적 구조로 그려지는 애증과 분노는 스페인 전쟁의 종전과 함께 파국을 맞는다. <붉은 다람쥐> La Ardilla roja l The Red Squirrel l 훌리오 메뎀설정은 <하나와 앨리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히치콕. 주인공 호타는 교통사교를 당한 미녀를 구하고 그녀가 리사이며 자신과 4년간 사이라고 거짓말한다. 사실 호타는 4년동안 사귄 애인에게 버림받은 처지다. 병원을 벗어나 붉은 다람쥐라는 캠프장을 향하면서 그들의 운명은 시시각각 변해간다. 절묘한 음악과 정교한 플롯의 미스터리 스릴러 <대지> Tierra l 훌리오 메뎀라틴영화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와 멜로드라마의 낭만적 로맨스로 짜여지는 태피스트리. 열아홉살의 앙헬은 자신을 천사라고 믿는다. 그는 포도에 균을 만드는 해충을 구제하려고 와인을 생산하는 마을로 향하고, 그곳에서 앙헬라와 마리라는 두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성경의 도상학적 차용과 상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시공간의 구성이 인상적이다. <북극의 연인들> Los Amantes del Circulo Polar l 훌리오 메뎀반복과 순환을 한 남녀의 일대기적 사랑을 통해 그려낸 작품. 8살부터 시작된 남녀의 사랑은 부모에 의해 좌절되고 젊은이로 자란 그들은 북구 핀란드에서 재회한다. 감독의 이름처럼(Medem) 앞뒤로 읽어도 똑같은 점에서 착안한 이름의 주인공 아나(Ana)와 오토(otto)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사랑이 맞이하는 굴레를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작품. <섹스 앤 루시아>Lucia y el sexo l 훌리오 메뎀실연을 겪은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루시아는 아픔을 잊기 위해 지중해의 섬으로 떠나간다. 자유분방한 엘레나를 만나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루시아. 풍광과 인간의 중첩, 환상과 현실의 들고남을 통해 대담하게 섹슈얼리티의 세계를 그려낸다. 파스 베아의 연기만으로도 즐거운 영화.

[외신기자클럽] 임권택 감독의 가장 뛰어난 성공 중 하나 (+불어원문)

<하류인생>은 저주받은 작품인가? 한국에서의 상업적 실패를 겪은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가 프랑스에서 12월15일 개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글을 탈고할 때 즈음) 개봉이 막 취소됐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감독의 가장 뛰어난 성공 중 하나이다. 비처럼 차갑고 준엄한 <하류인생>은 <취화선>의 화려한 형식과는 거리가 있지만 논리적으로 그 작품을 뒤따를 만한 것으로 자리잡는다. 두 작품은 한국의 근대성의 탄생을 보여주는 한폭의 빼어난 병풍처럼 펼쳐진다. <하류인생>은 두개의 이야기를 나란히 좇는다. 가장 어두우며 또한 너무나도 명백한 이야기는 “메이드 인 코리아” 경제 기적의 가장 병적인 면에 대한 근원을 탐구하는 일로써 부패한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해부이다(주인공의 ‘태진산업’은 훗날 국가적 성공을 이끄는 재벌체제의 싹이다). 그렇지만 이 어두운 이야기는 뛰어난 여성 인물의 은근한 빛으로 상쇄된다. 만약 <하류인생>을 깡패들의 영웅담이 아니라 남녀 한쌍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최태웅(조성우)이 아니라 박해옥(김민선)이다. 해옥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미래를 나타낸다. 그녀의 여정은 두 장면 속에 압축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그녀는 태웅에게 스웨터를 갖고 온다. 무릎을 꿇고 옷 매무새를 잡아주는데 태웅이 그녀를 껴안는다. 수년이 흘러, 태웅은 바람을 피우는 폭력적인 남편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그를 떠나 시골에서 본업인 교사 일을 하며 산다. 그는 바로 그 회색 스웨터를 입고 그녀를 찾아 나서고, 그녀의 발 아래 진흙탕에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하여 그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한다- 이제부터는 태웅에게 해옥이 필요한 것이다. 청소년 때에, 그녀는 다리에 칼이 박혀 있는 그를 보았고, 그리고 선택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한 것도 그녀다. 첫밤을 지내는 여관에서 검문 경찰에게 문을 열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인데요…”라고 야무지게 대꾸하는 것도 그녀다. 그녀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 흙길까지 이끌어온 것이고 그는 그녀 없이 계속 살 수 없다. 그녀가 그의 따뜻함인 것이다. 그는 종종 돌아와 쪼그리고 앉아 부드러운 옷 속에 포개지듯 그녀의 팔에 안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아주 아름다운 여성적 몸짓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개천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임신한 그녀 또한 매몰차게 맞았다. 허벅지를 타고 내리는 피에는 무관심한 채, 그를 일으켜세우기 위해 그녀는 와 있었다. 차 뒷좌석에서 그는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기댄다. 막 아이를 잃은 그녀는 모성적 몸짓으로 그를 포개어 안는다. <하류인생>은 여자들이 근대의 문을 남자들보다 더 활기차게 열었음을 상기시킨다(여자들이 근대를 통해 얻은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이 그것을 쉽게 설명한다). 영화는 치마가 짧아지고 머리가 어깨에 자유롭게 스치던 시대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또 다른 인물들이 해옥과 겹쳐진다. 남편 대신 청탁 업무를 챙기는 중앙정보부장의 아내와 무엇보다도 땅바닥에 누워 “자, 내 가랑이를 찢어봐”라고 외치며 남녀 차별주의자를 깔아뭉개는 여배우. 주로 무시의 대상이었던 여배우들은 한번에 열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하며 악착스럽게 일했다. 아마도 그녀들이야말로 전적으로 독립적일 수 있었던 첫 세대의 여성들이며, 또한 많은 남자들보다도 돈을 많이 번 첫 세대 여성들이었을 수도 있다. 한편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보편적인 진리로 돌아가게 한다. 아이를 낳는 해옥의 얼굴을 가깝게 찍은 장면이다. 바싹 말라 반쯤 벌린 입술, 땀으로 뒤덮인 이마, 숨이 턱에 차올라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는 혼자이며 아름답다. 밖에선 1961년 5월16일의 아침이 밝아온다. 제2공화국은 사라지고, 박정희가 정권을 찬탈한다. 아이의 울음이 들리고, 그는 살아 있다. 아이는 험난한 시대의 새벽에 태어났지만… 아름다운 녀석이다. " La pegre " est-elle une œuvre maudite ? Apres un echec en Coree, le quatre vingt dix-neuvieme film d'Im Kwon-taek devait sortir en France le 15 decembre. La sortie vient d'etre annulee. Il s'agit pourtant de l'une des plus brillantes reussites de l'auteur. Glacial et austere comme la pluie, " La pegre " s'eloigne dans sa forme du flamboyant " Chihwaseon " en s'imposant comme sa suite logique. Les deux œuvres se deroulent telle une tapisserie magistrale qui raconterait la naissance de la modernite en Coree. " La pegre " suit deux histoires paralleles. L'une, la plus sombre, est aussi la plus evidente : la dissection minutieuse d'un systeme corrompu jusqu'a la moelle, l'exploration des origines les plus malsaines du miracle " Made in Korea " (" Daejin ", l'entreprise que dirige le heros est l'embryon de conglomerats qui feront plus tard la reussite de la nation). Cependant, ce noir tableau est compense par la lumiere discrete d'un formidable personnage feminin. Si on choisit de lire " La pegre " non comme la saga d'un gangster mais comme l'histoire d'un couple, il apparait que le heros n'est pas Choi Tae-woong (Cho Seung-woo) mais bien Park Hae-ok (Kim Min-sun). Hae-ok est le moteur du film, elle represente l'avenir. Son trajet se resume a deux scenes. Au debut du film elle vient porter un pull a Tae-woong. Elle se met a genoux devant lui pour l'ajuster et il la prend dans ses bras. Des annees plus tard, Choi est devenu un mari infidele et brutal. Elle le quitte pour vivre a la campagne exercant son metier d'institutrice. Il part la retrouver portant le fameux pull-over gris et tombe a ses pieds dans la boue. Il se soumet ainsi a un nouvel ordre : desormais il a besoin d'elle et non le contraire. Des qu'adolescente, elle l'avait vu un couteau plante dans la jambe, elle l'avait choisi. C'est elle qui l'impose contre l'avis de son pere. C'est elle qui ouvre a la police lorsqu'ils passent leur premiere nuit dans un motel et qui rembarre l'agent hilare d'un radical : " nous nous aimons, et alors ? ". Elle aura dirige toute leur histoire jusqu'a ce chemin de terre et sans elle il ne peut pas continuer. Elle est sa chaleur. Il revient souvent ainsi se blottir dans ses bras comme dans un doux vetement. Et c'est sur un geste feminin magnifique que se termine le film. Lui tabasse git au fond du ruisseau, elle enceinte a ete aussi impitoyablement frappee. Mais elle est encore la pour le relever, indifferente au sang qui coule le long de son mollet. A l'arriere de la voiture, il pose sa tete sur son epaule. Elle, qui vient de perdre son enfant, l'enlace dans un geste maternel. " La pegre " nous rappelle que les femmes ont pousse plus vigoureusement que les hommes les portes de la modernite (ce qui s'explique facilement : elles avaient plus a y gagner). Le film evoque ce temps ou les jupes raccourcissaient, ou les cheveux flottaient libres sur les epaules. D'autres personnages s'ajoutent a Hae-ok : l'epouse du chef de la KCIA qui dirige les services secrets a la place de son mari et surtout une star de cinema qui ecrase une remarque sexiste en s'allongeant par terre pour hurler " Vas-y ! Dechire moi l'entrejambe ! ". Les comediennes, souvent meprisees, etaient des travailleuses acharnees qui tournaient jusqu'a dix films en meme temps. Elles furent peut-etre les premieres femmes totalement independantes, les premieres qui gagnaient mieux leur vie que bien des hommes. Cependant la plus bouleversante scene du film nous renvoie a une verite universelle. Il s'agit d'un gros plan sur le visage de Hae-ok en train d'accoucher : ses levres seches entr'ouvertes, son front couvert de sueur, a bout de souffle, souffrante, seule et belle. Dehors le jour se leve sur le 16 mai 1961. La seconde republique est morte, Park Chung-hee s'empare du pouvoir. L'enfant pleure, il est vivant. Il est ne a l'aube d'une decennie de plomb... mais c'est un beau bebe.

[현지보고] 제41회 금마장영화제 수상식에서 본 대만영화의 위기

대만의 거장들은 어디로 갔나? “금마가 영화의 수레바퀴를 끌게 하라. 순수한 금처럼, 페가소스의 비행처럼, 예술에의 헌신을 위해….” 그러나 12월4일 타이청에서 열린 제41회 금마장영화제 수상식은 주제가와 달리 금마가 날기는커녕 아예 주저앉았음을 보여준 자리였다. 주지하다시피 금마장은 대만영화뿐만 아니라 중국어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경쟁영화제이며 비경쟁 부문에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국제영화제이기도 하다. 먼저 올해의 수상 결과부터 보자면 최우수 작품상은 루추안 감독(중국)의 <커커시리>(可可西里)에, 최우수 감독상은 <대사건>의 두기봉 감독(홍콩)에게, 남우주연상은 <무간도3 종극무간>의 유덕화(홍콩)(사진 왼쪽)에게, 남녀 조연상도 <뉴 폴리스 스토리>의 오삼조(홍콩)와 <만두>의 백령(홍콩)에게 돌아가 <달빛아래, 내 기억>으로 여우주연상을 탄 양귀매(사진 오른쪽)만이 겨우 대만인의 자존심을 지켜주었을 뿐이다. 스타급 영화인들 대거 불참 도대체 대만의 거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과 같은 80년대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들은 자금이 바닥난 이곳에서 영화제작을 포기한 지 오래이고 챠이밍량은 오랜 숙원인 칸의 붉은 카펫을 밟아보기 위해 신작 영화의 후반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올해의 금마장에서는 그들의 영화를 볼 수 없었다. △ <커커시리>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중국의 루추안 감독. 단지 허우샤오시엔이 <달빛아래, 내 기억>에 최우수 각색상과 <뉴 폴리스 스토리>에 최우수 특수효과상을 수여하기 위해 모습을 비췄을 뿐이다. 많은 상이 홍콩영화인에게 돌아갔지만 올해는 홍콩 빅스타들의 참가가 저조했다.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2046>의 경우 칸에서의 평가에 비해 중국어권에서의 악평으로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되었기 때문인지 왕가위, 장쯔이를 비롯해 대부분의 수상후보가 불참했고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양조위만이 참석해 예의를 갖추었다. 예상대로 <2046>은 주요 부문에서 제외되었고 최우수 영화음악상과 최우수 미술상에 그쳤다. 한편, 성룡이 제작·주연한 <뉴 폴리스 스토리>도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불참했으며, 장만옥이 최우수 미술상과 최우수 분장 및 의상상을 비디오를 통해 수여한 대신, 전 부인 장만옥과의 합작품인 <클린>의 대만 프로모션을 위해 참석한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이 <뉴 폴리스 스토리>에 관객상을 수여했다. 대만 신예 작품들 소재 빈곤 대만의 영화산업이 폐업 위기에 처한 것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뒤 스크린쿼터가 폐지되고 할리우드영화와의 경쟁에서 대만영화가 밀렸기 때문이라지만 신예감독들의 영화를 보면 소재의 빈곤과 천재의 부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중견감독인 임정성의 <달빛아래, 내 기억>이 대만의 현대사를 다룬 원작소설을 유려한 영상미와 뛰어난 각색으로 역시 대만영화의 중진은 건재하다는 느낌을 준 반면, 신예감독들의 영화는 화제성을 노린 상업영화가 대부분이었다. 특이한 현상은 신인배우상에 노미네이트된 4편의 영화 중 3편이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를 다룬 동성애영화였다는 것이다. 미남미녀가 등장하는 동성애영화가 대만영화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이유는 이성애를 조장하는 할리우드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11월25일∼12월5일 열린 타이베이금마장영화제 이름만 국제영화제 △ 메이드 인 저먼 부문에 상영된 <볼프스부르그> 타이베이에서는 11월25일부터 12월5일까지 비경쟁 국제영화제인 타이베이금마장영화제가 열렸다. 마스터 피스, 파노라마, 아시아영화의 창, 메이드 인 저먼, 현대 중국영화, 제5회 국제디지털단편영화제, 헝가리 감독 벨라 타르 회고전, 일본인 촬영감독 시노다 노보루 회고전, 홍콩 무술영화 감독 추위엔 회고전, 단편&애니메이션의 10개 부문에 20여개국 118편의 장편, 78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러나 구색을 갖춘 듯한 부문과 작품 수에 비해 내용은 이만저만 부실한 것이 아니었다. 마스터 피스와 파노라마는 올해 칸과 베네치아의 재탕이었고, 아시아영화의 창은 말만 아시아영화지 대부분 일본의 상업영화로 채워졌고 한국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단 한편만이 상영되었을 뿐이다. 벨라 타르 회고전에는 영화의 난해성 때문에, 혹은 그의 천재성에 대한 의문 때문인지 영화제 후반으로 갈수록 관객이 줄었고, 시노다 노보루와 추위엔 회고전은 이미 비디오화되어 있는 작품이 상영되었다. 유일하게 평가할 만한 부문은 젊은 독일 영화감독들의 영화전인 ‘메이드 인 저먼’이었는데 <필름 딘스트>의 평론가 뤼디거 주흐스란트의 ‘독일 청년영화’ 강연장에는 발디딜 틈 없이 대만의 젊은 영화학도들이 몰렸다. 히가시 요이치, 천싱잉, 루이안 감독 인터뷰 “스크린쿼터 지켰으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지난 11월30일, 금마장영화제의 유일한 외국인 심사위원이었던 히가시 요이치 감독(오른쪽), 대만의 신인 천싱잉, 루이안 감독에게 현 대만영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먼저 몬트리올영화제에서 <바람소리>(風音) 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으로서 올해 대만영화의 전반적인 인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히가시 요이치(이하 히가시) l 일단 작품 편수가 현저히 줄었고 수준도 7, 8년 전에 비하면 떨어진다. 대만영화는 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몇몇 천재들에 의해 활기를 얻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굉장한 침체기니만큼 천과 루 같은 젊은 감독들이 분발해야 한다. 천싱잉 l 나도 올해는 출품하지 않았다. 현재 대만에서는 자금문제 때문에 신인감독이 영화 만들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나 같은 경우는 자금문제 때문에 프리부르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번들>(Bundle)을 16mm로 찍었다. 루이안 l 영화산업이 침체기에 들어서서 감독들은 정부보조금에 크게 의존하게 됐는데, 지난해부터 보조금 지원제도가 점수제로 바뀌었다.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 몇점, 홍콩 스타를 캐스팅하면 몇점, 이런 식이니 젊은 감독들은 보조금을 얻을 기회도 없고 나처럼 자비로 데뷔작을 찍는 수밖에 없다. 대만영화는 80년대 말 에드워드 양, 허우샤오시엔의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90년대 챠이밍량의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지명도가 높았을 뿐 국내의 영화산업 자체는 그 당시에도 호황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천싱잉 l 사실이다. 대만은 매우 작은 시장이다. 게다가 제작비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할리우드영화와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루이안 l WTO에 가입하기 위해 스크린쿼터를 포기했는데 한국처럼 지켰으면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히가시 l 게다가 유명해진 감독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지. 한국을 봐라. 홍상수도 김기덕도 미국, 프랑스 갔다가 돌아와서 영화 만들지 않냐. 에드워드 양도 허우샤오시엔도 도통 자기 나라 영화에는 관심이 없더라. 서구 진출이 대만에서 영화를 만드는 가장 유력한 길이니 역시 젊은 감독들도 서구에서의 수상을 노린 작품을 계속 만드는 것 같다. 히가시 l 차이밍량의 <애정만세> 이후로 롱테이크와 음울한 분위기가 대만영화의 미학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그런데 롱테이크도 이유가 있어야지 이번 영화제에는 도대체가 의미없는 롱테이크가 너무 많아서 영화 보는 게 고문이었다. 천싱잉 l 그래서 대만 사람들도 대만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지 않는다는 거지. 지루하니까. 그래서 TV드라마와 경쟁해야 하는 판이다. 루이안 l 최근 대만에서는 한국영화를 연구하고 그 방법론을 배우자는 의견도 많다. 특히 스크린쿼터 같은 거. 히가시 l 내 생각에는 시스템도 배울 만하다. 한국영화의 스탭은 도제식이다. 도제식이 나쁜 점도 있지만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준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된다. 일본영화는 과거의 스튜디오 시스템이 유지되었을 때는 스탭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지만 스튜디오가 붕괴된 요즘은 날품팔이 처지가 되었다. 대만의 경우 스튜디오 시스템도 없고 도제 시스템도 없이 감독이 다 알아서 해야 하니 대부분의 신인감독들의 데뷔작이 곧 은퇴작이 되는 수밖에. 김려실/ 자유기고가

블루스가 어울리는 한쌍, <신석기 블루스> - 이성재

언뜻 조화롭지 못하다. 드라마보다 영화에 죽 몸을 파묻어온 이성재와 영화보다 드라마와 CF에서 윤곽이 뚜렷했던 김현주. 매체가 사람을 결정짓는 건 아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노련하게 다져진 두 기운이 섞인 느낌을 촬영장 한켠에 서서 느낀다. 김현주는 “이래야 다리가 길어 보여요, 오빠” 하거나 “난 왼쪽 얼굴이 더 예쁘게 나오니까 자리 바꿀래”라는 식으로 의사 표현이 매우 분명한데, 군말없이 김현주의 코치를 따르거나 순순히 자리를 바꿔주는 이성재도 상대방의 페이스만을 쉽게 따를 사람 같지는 않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어느 한쪽도 연약해 보이지 않은 두 사람은 그러나 프로페셔널하게 마블링 무늬처럼 뒤섞인다. 농담이 오가고 웃음소리가 울린다. 자기만의 페이스로 각각 카메라렌즈에 집중해도 만들어지는 근사한 조화 그리고 호흡. 동등한 프로의식이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결과다. “망가진 외모,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탈바꿈을 목말라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라는 인간을 버리고 환골탈태해 전혀 딴사람이 되는 것으로 배우란 직업을 스스로에게 먼저 증명하는 사람이, 이성재라고 생각했다. <미술관 옆 동물원> <자귀모> <주유소 습격사건> <플란다스의 개> <하루> <신라의 달밤> <공공의 적> <빙우> <바람의 전설>. 뜨끈한 마음과 달리 겉엔 가시가 돋친 청년 철수, 사색하는 유령 칸토라테스, 그냥 늘 꼭지가 돌아 있어 목소리도 딱딱한 깡패 노마크, 궁색하고 치사한 시간강사 윤주, 자상한 남편 석윤, 모범생 출신의 조폭 영준, 알고보니 비열한 화이트칼라 규환, 불륜의 사랑을 감춘 산악등반가 중현, 춤에 모든 걸 바친 남자 풍식. 멜로, 코미디, 액션. 좋은 놈, 나쁜 놈. 관객의 환호, 평단의 인정. 7년간 아홉편을 찍으면서 이것 저것 다 해본 배우. 언젠가 그는 “빨간 영화에선 빨갛게, 파란 영화에선 파랗게”라고 말했다. 인간 이성재, 하면 떠오르는 분위기는 있어도 배우 이성재, 했을 때 그만의 캐릭터는 딱히 집히지 않는다. 오히려 변신이 그를 설명할 일관된 키워드 같다. 그는 자기가 작정하고 이미지를 변신하거나 필모그라피의 장르 궤적을 따져 영화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추남 신석기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영화 <신석기 블루스>에서 그가 눈썹을 밀고 머리를 볶고 뻐드렁니를 끼웠다. 더이상 추해질 길도 없는 추남이 됐다 하여 ‘이번엔 추남 변신까지?’라고 묻는 것도 의미없는 일일까? “첫째로는 감독님이 가장 큰 이유예요. 이 시나리오는 솔직히 이전에도 봐오던 느낌의 시나리오였고, 좀 가벼운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망설였는데, 감독님을 만나보니까 전혀 다른 느낌의 영화를 생각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런 믿음 때문에 해볼 만하다 생각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못생긴 남자가 보철 끼고 눈썹 밀고 하잖아요. 이거 재밌네, 했죠. 일상적이지 않은 걸 할 때 쾌감을 느끼잖아요. 내 외모가 망가진 걸 보고 관객이 뭐라고 생각할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대중이 원하는 자기 이미지에만 매달리지 않는 그는, 진짜 추남이 되어버린 사진이 공개되고 주위에서 여전히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였을 때도 끄떡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선택기준은 캐릭터보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에 있고, 자기 느낌에 있다. 이성재는 “나만의 재미, 감동, 여운. 이 세 가지를 보죠”라는 말 뒤에 “전 지금까지 상업영화를 해왔어요”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폭을 넓혀갈 수도 있겠죠. 이 일을 1∼2년 더 하고 말 것도 아닌데…. 마음 같아선 칠십 먹어서까지도 계속 배우를 하고 싶어요. 그것도 젊은 여배우와 투톱으로. 저는 할리우드가 딴것 때문에 부러운 게 아니에요. 숀 코너리가 그렇게 늙어서도 젊고 예쁜 캐서린 제타 존스랑 일할 수 있는 게 부러운 거지.” 이성재는 <신석기 블루스>와 상관없는 질문을 해도 꼭 마지막엔 <신석기 블루스>에 대한 홍보 멘트를 잊지 않는다. 데뷔할 때부터 매니저를 두지 않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현장에서 나 때문에 누군가가 기다리는 걸 못 견뎌해요. 현장 사람들과 섞여서 나도 그 일원으로 있는 게 편하지, 다른 사람이 있으면 내 딴엔 배려를 해야 하니까 딴 일을 잘 못하거든요”라고 대답한다. 꼼꼼하고 조심스런 성격이 무슨 일에서든 드러나는 듯하다. “요즘은 예전처럼 열심히 시나리오 분석하고, 그렇게 안 해요. 나만의 작업, 내가 만들어놓고 정해놓고 생각해놔도 현장에 가서 감독의 생각과 다를 때는 거기 융화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요. <바람의 전설> 때부터 바뀐 거 같아요. 기본적인 목표만 생각해놓고 현장에서 최대한 인물에 맞게 움직이자. 옛날에는, 어유, 촬영 전날엔 무조건 대본 펴놓고 밤새 책상에 앉아 있었죠. 근데 그게 앉아만 있지 대사가 눈에 들어오나. 그래도 그래야지만 맘이 편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을 많이 열려고 하죠.” 열 번째 영화 <신석기 블루스>에 이르러 그가 갖게 된 10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비슷한 마음에서 나온 듯했다. “열번째까지는 습작이었다고 생각해요, 소설가가 글을 쓰기 전에 습작하는 것처럼. 열한 번째부터는 이제 나만의, 내 첫 번째 영화가 되는 거죠.” 그럼 열번째 영화 <신석기 블루스>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려는 찰나 그도 아차 싶었는지 “<신석기 블루스>부터 그 시작일 수도 있고요” 라고 덧붙인다.

[뉴욕] 연말맞이 DVD 봇물, 골라골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다양한 DVD 대거 발매… 영화사 총수입 63% DVD로 창출 미국에서 DVD가 보편화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특히 할리우드가 DVD 판매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연중 가장 큰 대목인 연말을 맞아 최근 발매된 박스 세트와 특별판 DVD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특별판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65주년 기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사진), 미국 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신작 <애비에이터>의 실제 주인공 하워드 휴스가 감독한 1930년작 <헬스 엔젤스>(Hell’s Angels) 등이 있다. 세 작품 모두 새로운 복원판이며, 다양한 보너스 트랙들이 포함돼 있다. 특히 <바람과…>는 4개 디스크 세트로 지금까지의 버전 중 가장 선명한 화질과 음질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박스 세트 중에는 130달러를 호가하는 <매트릭스 한정판 컬렉터 세트>나 <반지의 제왕 3부작> <스타워즈 3부작>, TV시트콤 <사인펠드> 시즌 1∼3편, <고질라 박스 세트> <해리 포터 컬렉션> 등 일반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DVD도 있지만,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는 것은 물론 영화 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작품도 많다. 파라마운트의 1948년 이전 작품의 판권을 가진 유니버설스튜디오는 1930년대 초반에 제작된 막스 형제의 작품 5편 <막스 브러더스 실버 스크린 컬렉션>을 출시했다. 먼지와 스크래치 등이 말끔하게 제거된 이 작품 가운데엔 <코코넛> <덕 스프> 등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 박스 세트에 대해 옛 영화 복원 세트 중 가장 제작이 잘된 작품들이라고 호평했다. <키노 인터내셔널>은 최근 프리츠 랑과 왕가위 컬렉션을 발매해 인기를 얻고 있다. <프리츠 랑 에픽 컬렉션>에는 <니벨룽겐의 노래>와 <메트로폴리스> 등 이미 발매된 적이 있는 복원 작품 외에도 1928년작 <스파이>와 1929년작 <달의 여인> 등이 포함돼 있다. <왕가위 컬렉션>에는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 <아비정전> <타락천사> <열혈남아> 등이 들어 있다. 이중 <아비정전>은 최근 뉴욕에서 처음으로 정식 개봉, 상영됐다. 터너 클래식 무비스는 <버스터 키튼 컬렉션>에서 키튼의 주요 작품은 물론 커리어와 사생활에서 굴곡 많았던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이 가운데에는 <제너럴>과 <카메라맨> 외에도 그의 첫 번째 유성영화 <프리 앤드 이지>도 포함돼 있다. 유명 감독들의 박스 세트도 연이어 발매되고 있는데 마틴 스코시즈와 앨프리드 히치콕, 존 카사베츠 등도 있다. 특히 <존 카사베츠-5 필름>은 DVD 복원과 보너스 내용들로 잘 알려진 크라이테리언 컬렉션에서 발매한 것으로, <그림자들>과 <오프닝 나이트>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 <영향 아래 있는 여자> <얼굴들> 등의 작품이 다양한 부가자료들과 함께 담겨 있다. 또 지난 40년대부터 특수효과와 작가, 프로듀서로 알려진 레이 해리하우젠의 <전설적인 몬스터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이중에는 <제이슨과 아르고너츠> <신배드의 일곱 번째 항해> 등 5개 작품이 포함돼 있다. 최근에 발매되진 않았으나 연말을 맞아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들로는 지난해 10월에 출시된 인디아나 존스 3부작 <인디아나 존스의 어드벤처>와 4월에 발매된 <대부 DVD 컬렉션>과 <핑크 팬더 필름 컬렉션> 등이 있다. 홈엔터테인먼트 전문 분석 회사 ‘애덤스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미국 내 영화사들의 총수입 중 63%가 DVD를 비롯한 소매상점에서의 영화 판매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반해 극장에서의 영화상영을 통한 박스오피스 수입은 21%에 그친다. 또 대부분의 영화사들은 DVD 판매로 극장 상영에서 얻은 수익의 두배 이상을 얻어내고 있다. 뉴욕=양지현 통신원

기자 양반들, 뭐가 좋다는 거요? <귀여워>

아무래도 ‘프레스 컬트’(press cult)라는 말이 생겨야 할 것 같다. 이건 물론 대다수의 일반관객의 기호나 반응에 대한 고려는 일체없이 각급 영화언론 종사자들이나 그 관계자들끼리만 일제히 좋아라 넘어지는 일련의 영화들과, 그 현상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프레스 컬트 현상은 과거, 국내관객의 평가 같은 것은 그닥 안중에 두지 않고 처음부터 영화제의 수상을 목표로 제작되었던 몇몇 ‘레디-메이드 영화제 무비’들이나, 뭔가 있어 보이려고 상당히 애는 썼으나 결국 뭐 하자는 영화였는지는 만든 주최쪽에서도 파악하는 데 실패해버리곤 했던 ‘본의 아닌 난해 무비’들에서 주로 발견되어왔다. 또, 가끔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한 전 국민적인 지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30t가량의 돌을 한꺼번에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하는 <용가리>등의 특수 영화들에서도 간간이 발견되어오곤 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확산, 관객 수준의 전반적인 향상 등으로 인해 최근 거의 사라지는 추세를 보여왔던 이 현상을 일순간에 부활시켜낸 프레스 컬트계의 기린아가 최근 개봉되었으니 그 제목은 다름 아닌 <귀여워>다. 뭔가 상당히 에미르 쿠스투리차스러운 냄새를 풍기려 하면서 뭔가 있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듯 보이나 어쨌든 영문도 이유도 근거도 개연성도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있는 척’ 스타일, 또한 도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인지 끝까지 알아먹을 수 없었던데다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머리로만 막나가는’ 스토리, 그리고 로컬 양아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낸 정재영의 연기와 완벽한 대척점을 이루면서 시종일관 근래 보기 드문 국어책 낭독 신공을 떨쳐 보이던 장선우의 연기와, 질세라, 도발적이고 발랄한 캐릭터를 시도때도 없는 오버를 통해서만 구현하려는 듯한 예지원의 연기 등등.. 이 영화가 준비해둔 이 모든 재앙들은, 평상시에도 국어책 낭독신공을 즐겨 구사한다는 장선우 감독의 개인적인 캐릭터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영화계에 정통한 국내외 프레스 관계자들이 마련한 ‘도발적이고도 엉뚱하고 판타스틱하면서도 한국영화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것 같은 예감’의 도가니탕 속에서 하나 되어 녹아들면서, 마침내 프레스 컬트라는 떠들썩하면서도 난해하고도 고고하면서도 판타스틱한 축제의 장으로 다시금 태어났던 것이다. 물론 문제의 근본적인 씨앗은 <귀여워>가 그 난해찬연한 함의와 혁신도발적인 스타일을 통해,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영화에도 찬연한 광휘를 흩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태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는, 필자 같은 예지력 미보유자가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언론 관계자 여러분들께서는, 부디 일반인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비중은 상당히 희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집필에 임해주셨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 하나 있다. 하긴, 지금 이렇게 태평한 얘기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필자도 앞으로 영화판에서 계속 글 써서 먹고살려면 정말 ‘장수로’ 같은 박수무당이라도 돼서 나름의 예지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허…. 한동원/영화칼럼니스트 hdw@handongw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