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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예술영화 DVD 전문 브랜드 탄생

콜럼비아트라이스타 홈엔터테인먼트가 예술영화 DVD, VHS 브랜드인 ‘블랙 하우스’를 만들었다. “대중성과 상업성에 치우친 현 비디오 시장에서 작품성 있는 영화, 특히 예술성과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영화들 혹은 제3세계 영화들의 출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다”고 브랜드 창출의 변을 밝히면서 ‘블랙 하우스’를 DVD 시장에서의 예술영화 활로를 위한 발판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첫 번째 출시작은 자체 타이틀인 <카란디루>를 포함, 예술영화 수입배급사 백두대간의 작품인 <블러디 선데이> <아타나주아> 세편이다. <카란디루>는 <거미 여인의 키스>로 유명한 헥터 바벤코의 최근 영화이며, <블러디 선데이>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참상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만든 영화이고, <아타나주아>는 에스키모인의 삶을 활력적으로 잡아내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이후에도 블랙 하우스는 콜럼비아의 자체 고전 및 예술 타이틀과 함께 다수 백두대간의 영화로 라인업을 짤 예정이다. 백두대간의 <아귀레 신의 분노>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레전드 오브 리타> 등과 함께 일본, 제3세계의 영화들이 블랙 하우스 브랜드를 달고 지속적으로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예술영화 관객이 극장에서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영화들을 DVD로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깊은 유통망이 형성된 셈이다. 백두대간의 관계자는 “기존에 상영했던 작품들은 DVD, VHS로 출시하기가 거의 힘들었다. 지금으로선 시장에 나간다는 것 자체로 일단 큰 의의가 있다. 게다가 콜럼비아는 메이저다. 극장 이외에서 예술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관객의 요구를 해소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신작들도 앞으로 상황을 살피며 출시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콜럼비아의 관계자 역시 “요즘은 다양한 영화들을 만나기가 힘들다. 대여숍도 만화책이 다 차지하고 있고, 좋은 영화는 아예 출시를 못하고 있다. 우리는 유통을 알고 백두대간은 좋은 작품이 있으니까 해볼 만하다”면서 의지를 펼쳤다. 국내 영화시장의 외화 불황 현상과 예술영화에 대한 저조한 관심 속에서 블랙 하우스가 “예술영화 시장의 스펙트럼을 넓힌다는 취지”를 달성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케이블,위성채널과 함께 “기쁜 성탄!”

성탄절이 다가온다. 휴일 지상파 방송은 “유달리 볼 게 없다”는 불만을 사기에 딱 맞다. 기존 예능·오락 프로그램을 윤색한 것이나 별 다를 것 없는 영화, 재방송하는 다큐멘터리 외엔 특별한 것이 없다. 집에서 성탄 전야와 성탄절을 보내는 이들은 케이블·위성 채널에 눈을 돌려볼 만하다. 먼저 영화다. 오시엔은 24~25일 오후 4시30분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세렌디피티>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놓고 재판을 하는 을 차례로 방영한다. 홈시지브이는 24일 저녁 7시30분 성탄절을 앞둔 두 남녀의 운명적 만남을 그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25일 오전 7시10분 <머펫 크리스마스 캐롤>, 오전 10시 <마이키 이야기 3>를 내보낸다. 캐치온은 24~25일 저녁 8시 <산타클로스 2> <나홀로 집에 4>를 각각 방송한다. 엑스티엠은 24~25일 오후 1시와 3시에 <어니스트 크리스마스 구출작전> <미녀와 뚱보> <호두까기 인형> <다이하드 2>를 차례로 방영한다.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도 풍성하다. 디즈니채널은 25일 저녁 8시30분 극장용 애니인 <니모를 찾아서>를 내보낸다. 아들 물고기 니모를 찾아 나서는 아빠 물고기 말린의 모험이 재미있게 그려졌다. 26일 저녁 8시30분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 방송된다. 투니버스는 24일 저녁 7시50분 <명탐정 코난> ‘티브이 스페셜’, 25일 밤 10시 <루팡 3세> ‘티브이 스페셜’을 내보내고 25일 오전 9시30분부터는 <포켓 몬스터> <아따맘마> <달빛 천사>등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를 모은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특집’을 준비했다. 애니원은 24일 <바람의 검심> 극장판 ‘추억’과 <포켓 몬스터> 극장판을 준비했고, 카툰네트워크는 24일 저녁 8시부터 26일 오전 8시까지 톰과 제리, 파워퍼프 걸, 캐스퍼 등 다양한 만화 주인공들이 모두 나오는 <제리의 크리스마스>(아래 그림)를 마련했다. 맛있는 성탄 특별요리를 만드는 법과 음악·파티·다큐 등도 준비됐다. 케이엠티브이는 24일 저녁 7시30분 크리스마스 관련 뮤직비디오를 모은 <에브리바디>를, 엠티브이코리아는 24일 오후 5시30분 <크리스마스 요리 특집>과 25일 오후 6시 콘서트 <쿨 크리스마스 2004> 중계방송을 준비했다. 푸드채널과 온스타일은 23일 케이크 만들기를 공개하는 <더 케이크>와 <나이젤라 크리스마스 스페셜>을 각각 방송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과 히스토리채널, 큐채널은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했다. 24일 오후 3시와 밤 11시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에서는 <알렉산더 대제>와 <바티칸에 가다>가 각각 방송된다. 히스토리채널은 24~25일 어린이를 위한 <이웃의 천사, 산타클로스>, <크리스마스 미스터리>와 <천사, 그의 두 얼굴>을 마련했고, 큐채널은 24~26일 밤 10시 3부작 <신의 아들 예수>를 방영한다.

권력과 관용의 함수관계에 대한 고찰, <룩 앳 미>

롤리타(마릴루 베리)는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포악한 삶 가운데 예술의 위안을 예찬하는 노래를. 그러나 소녀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녀가 이어폰을 빼자 택시 안의 우악스런 음악이 달려든다. 볼륨을 낮춰달라 부탁해도 택시기사는 막무가내다. 차 안의 권력은 그에게 있다. 결국 기사의 무례를 이기는 것은 소녀의 호소가 아니라, 롤리타의 아버지 에티엔(장 피에르 바크리)의 더 강력한 무례다. <룩 앳 미>는 이렇게 첫 장면부터 이 영화에서 ‘최강의 악당’이 롤리타의 아버지 에티엔임을 분명히 한다. 명성과 부를 누리는 작가이자 파리 문화계의 권력자인 에티엔은, 훌륭한 예술가라고 훌륭한 인격자는 아니라는 속설의 흉한 마스코트다. 그는 남의 이름을 결코 기억하지 않으며, 다른 인간에게서 귀기울일 만한 이야기가 나오리라 믿지 않기에 질문만 던지고 대답을 듣지 않는다. 가학적 농담을 사교의 기술로 착각하는 에티엔은 본인이 가장 연약할 때에도 위로하는 사람을 용케 상처줄 방법을 알아내는 타고난 포식자다. 외모와 재능에 대한 불안과 애정결핍증에 시달리는 스무살의 롤리타는 아빠의 관심을 갈망하지만 번번이 돌아오는 좌절에 증오만 커간다. <룩 앳 미>는 그러나 소녀의 순수가 폭군 가부장에게 일방적으로 상처받는 드라마는 아니다. 아녜스 자우이 감독의 인물들은, 주변 인물과 접촉하며 생긴 변형과 훼손까지 포함하는 유동적 존재다. 못된 취급을 받은 롤리타는 (당연히) 페어플레이할 여력이 없다. 그녀 역시 권력의 병을 앓는다. 아버지를 의식하고 접근하는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남들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미끼로 내세워 잘못된 관계를 맺는 악순환을 자초한다. “날 뭘 보고 좋아하겠어?” 롤리타는 남자친구를 포함해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의 돈과 권력의 부스러기를 노린다고 생각한다. 슬프지만 그것은 대개 사실이다. 소녀가 그나마 믿는 성악 교사 실비아(아녜스 자우이)도 다르지 않다. 실비아와 성공에 목마른 그녀의 작가 애인 피에르는 에티엔과 친분을 쌓고 덕을 보면서, 오랜 보헤미안 친구들에게 서서히 냉담해진다. 실비아 커플이 성공의 단맛에 취하는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가는 과정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려져 점묘파의 그림처럼 주변 공기에 녹아들어간다. <타인의 취향>이 2000년 프랑스 흥행 2위를 차지한 뒤 <씨네21>과 가진 인터뷰에서 아녜스 자우이는 “성공과 유명세는 관계를 변질시킨다. 이것 자체가 한편의 영화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고 <룩 앳 미>는 그 완성품이다. <룩 앳 미>가 제목으로 고려했던 <좋은 핑계> <모두 하는 짓> 같은 가제들은, 권력이 권력자뿐 아니라 지배받는 사람들에게도 모든 타협의 핑계, 악의 근원을 돌릴 수 있는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감독의 시각을 드러낸다. <룩 앳 미>는 권력의 파괴적 효과를 말하기 위해 비리와 이권, 이전투구를 끌어들이지 않는다. 심지어 아부와 차별을 그릴 필요도 못 느낀다. 현명하게도 <룩 앳 미>는 권력의 효과를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인내와 관용의 정도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권력은 나쁜 취향의 농담에 무골충처럼 웃게 하는 힘이다. 토끼고기를 싫어하는 피에르를 에티엔이 지정한 메뉴에 동의하게 만드는 힘이며, 오랜 친구가 에티엔이 두고 온 와인을 가져오겠다고 2시간의 운전을 기꺼이 떠맡게 만드는 힘이다. 이 모든 것은 굴종이 아니라 ‘친절’과 ‘예의’의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기에 교묘하다. 반면 더이상 얻을 게 없는 친구의 약점에 대한 관용은 자꾸만 얇아진다. 허술한 기억력도 엄살떠는 습관도 참을 수 없는 단점이 된다. <룩 앳 미>는 수용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타인의 속성 앞에서 예스냐 노냐를 결정하는 메커니즘이 바로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적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거의 모든 인간을 갉아먹는 미세한 ‘전향’과 ‘변절’의 과정을 포착한다(좀 엉뚱하지만 이런 점에서 <룩 앳 미>는 우리에게 에릭 로메르나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보다 김병욱 PD의 시트콤을 먼저 상기시킨다). “스위스 시계 같은 플롯”이라는 평을 얻은 시나리오는 각기 다른 방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은 두 사람이 복도 TV 앞에서 멍하니 공유하는 어색한 침묵까지 잡아낸다. 실비아로 분한 감독 자우이의 영화 속 위치는 흥미롭다. <타인의 취향>과 마찬가지로 드라마의 중심을 한뼘 비켜난 독특한 자리에 선 그녀는 주체이자 관찰자로서 이야기를 가로질러간다. 말하는 사람들만 주시하지 않고, 옆 테이블과 원경의 낯선 이들이 언제나 시선에 거치적거리게 촬영한 대화장면의 구도도 영화의 공기에 잘 어울린다. 사운드트랙은 노래도 아름답지만 아마추어들의 라이브 공연이 지닌 불완전함의 긴장과 매혹을 살린 레코딩도 일품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롤리타를 끌어안는다. 그녀를 구하는 것은 그녀의 노래에 귀기울이고 에티엔의 도움을 거절한 세바스티안이다. 그가 토끼고기가 싫다고 말한 파티의 유일한 손님이었고 웨이터의 윽박지름에 고개 숙인 기억을 흰 셔츠의 얼룩처럼 마음에 걸려하는 청년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룩 앳 미>의 제목 “나를 보세요”는 외로운 소녀의 간청이기도 하지만, 롤리타처럼 방치되고 실비아처럼 비겁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덜 외롭기를 바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룩 앳 미>는 비굴함에 대한 쓸쓸하고 따뜻한 연구다. :: 감독, 각본, 연기의 1인3역 아녜스 자우이 격없는 개방성과 치밀한 관찰력으로 연극에서 영화로 진출하는 예가 드문 프랑스 예술계에서 아녜스 자우이는 그녀의 파트너 장 피에르 바크리와 함께 예외적 존재로 꼽힌다. 그러나 <타인의 취향> <룩 앳 미>의 성공은 그들에게 “연극과 영화의 간극을 뛰어넘고, 장르영화와 작가영화의 다리를 놓았다”는 평가를 안겨주었다. 두 영화의 작가이자 연출자, 배우인 아녜스 자우이는 파리 교외에서 튀니지에서 이주한 유대계 집안에서 마케팅 컨설턴트 아버지와 정신분석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바크리도 알제리계이며 <룩 앳 미>에서 롤리타를 진심으로 대하는 단 한 사람의 청년도 북아프리카 출신이다). 기존의 통념을 믿지 않고 비판적 시선으로 일상을 해석하는 자우이의 정신은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것. 아버지는 교사에게 복종하지 않아 상을 받지 못한 어린 자우이에게 선물을 안겨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로 언어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법을 배운 자우이는 배우의 꿈을 품고 고교 졸업 뒤 파트리스 셰로 감독의 연기학교에 입학했고 1987년 해롤드 핀터의 <생일파티> 무대에 서면서 13살 연상의 장 피에르 바크리와 만났다. 남이 영감을 떠올릴 때까지, 좋은 역을 제안받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일에 싫증난 자우이-바크리 커플은 스스로 펜을 들었고 <부엌과 식기실> <가족 유사성>, 알랭 레네가 연출한 <스모킹/노 스모킹> <해묵은 노래>의 작가로 필명을 날렸다. 영화제작자 샤를 가소의 접근으로 영화에 대해 좀더 적극적으로 접근하게 된 자우이는 2000년 <타인의 취향>으로 <택시2>를 잇는 흥행 2위 기록을 내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매너와 편향을 냉정히 분석한 <타인의 취향> <룩 앳 미>가 말해주듯이,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우이의 최대 장점은 누구에게나 귀기울이는 개방성과 관찰력이다. 자기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배우의 일을 멈추지 않는 자우이는 크리스토프 블랑의 <외향적 여인>(2000), <필생의 역할>(2004)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둘이 각본을 쓰는 동안 좋아라 한 캐릭터를 꼭 아녜스 자우이가 연기한다는 것이 장 피에르 바크리의 시샘어린 불만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잠 못 드는 아이들을 위하여, <폴라 익스프레스>

단짝 로버트 저메키스, 톰 행크스가 <포레스트 검프>와 <캐스트 어웨이>에 이어 세 번째로 의기투합하여 선보인 영화는 3D애니메이션 <폴라 익스프레스>다. 제안은 네 아이를 가진 자상한 아버지 톰 행크스의 습관적인 동화책 읽어주기에서 비롯됐고, 합의는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줘야 한다는 두 어른들 사이의 소명의식으로 이뤄졌다. 메마른 어른들조차 현실을 구부러뜨려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크리스마스 전야, 그날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동화 <폴라 익스프레스>는 그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소재로 비쳤을 것이다. 산타를 기다리는 혹은 의심하는 스크린 안팎의 아이들 앞에 로버트 저메키스와 톰 행크스는 북극으로 가는 특급열차를 대령한다. 산타는 가짜다! <폴라 익스프레스>의 주인공 소년은 수집한 자료들을 서랍에서 다시 꺼내 확인하며 아쉽고도 불쾌한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전날 저녁 잠자리에 든다. 그때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고, 집 앞에는 난데없이 ‘폴라 익스프레스’가 당도한다. 차장의 권유로 기차에 올라탄 소년은 친구들을 사귀고, 또 열차 위에서 사는 떠돌이도 만난다. 드디어 도착한 산타마을. 그곳에서 소년은 없다고 믿었던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확인하며 기쁨에 젖는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잠든 뒤 맞은 크리스마스 아침. 여느 때처럼 소년은 눈을 뜬다. 변한 것이 없다. 꿈이었나?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쥐어줬던 방울이 선물상자에 들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믿는다’. 산타는 진짜다! 톰 행크스는 여기서 특수한 센서가 달린 기계장치 의복을 입고, 이른바 ‘퍼포먼스 캡처 기법’을 통해 주인공 소년, 소년의 아버지, 차장, 떠돌이, 그리고 산타클로스까지 1인5역을 한다. 톰 행크스가 이 수고를 마다지 않고 해낸 것은 아마도 <폴라 익스프레스>를 교육적인 장으로 벌여보고자 하는 열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폴라 익스프레스>가 담고 있는 교훈은 믿음이다. 떠올려보면, 로버트 저메키스와 톰 행크스는 이미 전작 두편의 영화에서도 본질적인 인간 요건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의를 본 적이 있다. 실상, 인성만큼은 병들지 않은 바보 소년 포레스트 검프가 대변한 것은 순수의 힘이었고,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려 한 건 존중할 만한 인간의 의지였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요즘 유행하는 어른 애니메이션들과는 확실히 상반된 길을 간다. ‘흉물스러움’, ‘촌철살인의 조크’, ‘특이한 반영웅’을 골자로 하는 어른용 애니메이션과 달리 여기에는 눙치는 기교들이 없다. 되도록 원작의 삽화와 유사한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원작에 실린 몇장의 그림으로 담기에는 불충분했던 문자의 이야기들을 아이들의 눈앞에 직접 끌어와 보여주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이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퍼포먼스 캡처 기법과 다각도의 3D 디지털 촬영기법을 동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인물들은 마치 실사의 배우들처럼 살아서 움직이고, 장면들은 실제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그 과정에 사라진 것이 한때 로버트 저메키스의 장점이었던 곡예 서술이고, 그러면서 피할 수 없게 된 단점은 맥풀린 이야기 구조이긴 하지만, 마치 거대한 성곽처럼 지어진 선물 공장 또는 산더미처럼 어마어마한 선물 보따리, 왕국처럼 그려진 산타마을의 광장 한복판 등은 눈앞에 당도한 것처럼 재현된다. 그런 점에서 <폴라 익스프레스>는 3D애니메이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시각장의 신천지라고 이해되는 편이 옳다. 아이들을 태운 특급 열차는 능선과 절벽을 오르내리며 감각을 놀라게 하고, 한순간에 점에서 전체로 퍼지는 조감숏은 심장에 바람을 불어넣고, 마음대로 좁혀졌다 넓어지는 건물과 광장 사이의 길목은 시야를 흔든다. 즉, 프레임의 전진과 후진, 상승과 하강, 막힘과 트임을 반복하며 입체적인 시각장의 깊이와 너비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로 <폴라 익스프레스>의 핵심이다. 그 점에서 <폴라 익스프레스>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아이맥스 극장을 찾는 것이다. 현지의 혹평 속에서도 아이맥스 극장에서만큼은 성공을 거두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쨌거나 시즌마다 이런 아버지들의 성심이 담긴 영화를 만날 때마다 좀 난감해지는데, 아이들에게 보여줄 크리스마스 선물용 애니메이션이 무엇에 그리 위해될 것이 있겠는가? 정말 꿈과 희망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못 만들어도 그만 아니겠나? 다만, 실재의 한쪽에 이미 물든 어른들에게, 폴라 익스프레스를 이미 놓쳐버린 어른들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말자. 그러면 그 유원지를 건설하기 위해 동원된 자본의 거대함에 대해 무효화를 부르짖고 싶어지니까. :: 원작자,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동화 세계 꿈이라고?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야! 톰 행크스와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 동화책을 읽을 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들이 손에 잡을 만하다고 여길 만한 품위있는 동화책이 없었다면,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선택한 건 바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세계다. <폴라 익스프레스>의 원작자 크리스 반 알스버그는 동화작가이기도 하고 삽화가로도 유명하다. 법학을 전공했지만, 미술에 더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뉴욕의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열며 1979년부터 목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우연히 휴튼 미플린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그림동화를 써볼 것을 제안받았고, 이후 그는 크게 성공하여 미국의 부모들이 존중하고, 아이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동화작가로 서게 됐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1986년 작품이고, 이 책으로 그는 <주만지>(1981) 이후 칼데콧 상을 두번이나 수상하는 명예를 남겼다. 국내에도 <장난꾸러기 개미 두 마리> <나그네의 선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 <압둘 가사지의 정원> <리버벤드 마을의 이상한 하루> <자수라(끝나지 않은 주만지 이야기)> 등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책이 다수 번역되어 나와 있는데, 그의 작품들은 주로 환상주의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성격의 이야기들과 단순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으로 그려져 있는 파스텔톤의 삽화들로 유명하다. 영화 <폴라 익스프레스>가 추구한 것도 그런 원작의 느낌들을 3차원적으로 구현해보고 싶은 열망에서였을 것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어떤 일상에서의 계기를 맞이하여 험난한 혹은 비현실적인 시공간의 세계를 모험하거나, 맞이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이런 내용들이 자주 소재의 중심이 되곤 한다. <폴라 익스프레스>는 그중에서도 크리스마스 이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날 북극으로 가는 기차가 집 앞에 느닷없이 도착하고, 잠을 자려고 누웠던 소년은 잠옷 바람으로 산타를 만나러 가게 되는 것이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특징은 이처럼 갑작스럽게 현실과 그 경계 너머의 무언가가 만나게 된다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 모험의 시간을 단지 꿈으로 접어놓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이라고 일러주는 것에 있다. 영화로는 주사위 게임판을 통해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다는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또 다른 동화 <주만지>가 이미 로빈 윌리엄스, 커스틴 던스트 등이 출연했던 <쥬만지>(감독 조 존스턴)로 만들어진 바 있다.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1]

사람들이 지도를 펴 드는 것은 대부분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다. 달리는 속도도 경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일보다 여행에서 중요하지 않다. 2004년의 대단원을 맞은 <씨네21>도 그런 마음으로 세 편집위원을 한자리에 초대했다. 상반기를 결산하는 좌담 이후 6개월 만의 자리였다. 박스오피스와 국제영화제의 어마어마한 기록들이 부추기는 연말 자축연의 공기는 아랑곳없이, 이날의 주제어는 영화와 작가와 시장이 봉착한 ‘곤경’이었다. 가장 최근에 도착한 한국영화 <역도산>에 대한 소회로부터 거슬러올라간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정성일 영화평론가, 허문영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대화를 옮긴다. /편집자 <역도산>: 합작 영화에 대한 우려를 극복하다 정성일 l 가장 최근에 본 영화부터, 그러니까 엊그제 본 <역도산>부터 거꾸로 올라가면서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 한해 내내 사람들이 기다린 영화이고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한국영화가 정점에 올랐다고 하기 무섭게 300만명이 마의 선처럼 여겨질 만큼 침체에 빠진 산업적 관점에서도 <역도산>은 큰 관심이다. 한편으론 지속적으로 계속돼온 역사 속 인물 다루기라는 맥에서도 정점에 이를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또한 <역도산>은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가 말한 필생의 프로젝트 3편 중 두 번째이고, 그래서 한국영화 시스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차승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할 텐데. 김소영 l 작은 이야기부터 하겠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영웅이 된 조선인 이야기라는 시나리오로 역산해보면 조선과 일본의 이분법을 벗어나 세계화로 풀어낸 기획이 탁월하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결국 스모 선수가 되지 못하고 미국에서 프로레슬러를 배워오는 궤적을 통해 동시대 우리의 강박인 민족, 지역, 세계화의 문제를 축으로 삼은 건 굉장히 훌륭하다. 블록버스터 문화가 결국 세트 문화이고 합작의 경우 세트의 뒤죽박죽된 시대성이 우려되는데 이 영화는 세트의 정교함 등에서 이제까지의 합작에 대한 우려점 혹은 오류는 없었다. 일본 배우들의 연기도 설득력 있었다. 놀랐던 건 관객 1천만을 흡수해야 환수될 만큼의 제작비 규모로 알고 있는데 대중에게 이야기거는 장치가 지나치게 절제돼 있다는 점이다. <역도산>은 링에 올라가는 순간에 <분노의 주먹>과 겨뤄야 한다. 어쨌든 그 영화에서 땀과 피가 튀는 최정점을 봤기 때문에. 그걸 넘어서든 다른 방식으로 가든 해야 할 텐데 <역도산>은 후자를 택한 듯하다. 소격효과를 쓰다시피 역도산의 다중적 인격과 교활함, 영웅본색을, 좋은 말로 하면 절제돼 있고, 나쁜 말로 하면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예컨대 칸노 회장의 후원을 받기 위해 거짓 사건을 벌이면서 일본 군가를 부르는 장면처럼 눈물을 흘릴 뻔한 사건들이 의아스러울 만큼 썰렁하게 처리됐다. 역도산이 불고기 먹는 장면도 먹는다는 행위의 특별한 감각성이 있어서 울컥하게 만들 수 있는데 지속시간도 짧고 대화 내용도 감정의 선을 울리는 것과 관계가 먼 방식으로 처리됐다. 역도산이 아내와 비서 앞에서 광기를 보이는 장면도 클로즈업숏이 아니라 투숏의 미디엄으로 찍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와 다르다는 설정은 알겠는데 10만∼20만을 안으려는 아트영화가 아니라 1천만을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이건 이해가 안 갈 정도다. 허문영 l 두 가지 점에서 <역도산>을 기대했다. 차승재의 첫 필생의 역작 <유령>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했고, 남성캐릭터의 힘에 감동받았었다. <역도산>은 <유령>의 위험한 요소, 즉 국수주의적이고 폐쇄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작방식으로는 한·일 합작을 통해서, 내용상으로는 한국과 일본을 오간 민족주의의 틀 속으로 포섭이 잘 안 되는 인물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극복될 수 있을 듯했다. 또 하나는 차승재 영화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가 곤경에 빠진 남성이 자기 육체로 그 곤경을 헤쳐나가는 것인데 모든 면에서 <역도산>만큼 차승재 영화의 전형성을 잘 드러내주는 영화가 없다. 캐릭터의 완성도에서 차승재 영화의 정점을 보여줄 수도 있을 듯했다. 더불어 송해성 감독이 <파이란>에서 내팽개쳐진 남자의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잘 그렸다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난 소감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고, 김 선생의 견해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왜 이 영화를 확실한 남자의 이야기로 끌고 가지 않았나 하는 불만이 있다. 물론 실존했던 인물이고 사실을 그려내야한다는 강박이 있겠으나 역도산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기보다 21세기에 재해석된 인물로서의 역도산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미스터리도 여전히 있고. 도전적으로 창의적으로 해석해도 좋았는데 사실에 상당히 얽매여 있다. 절도 사건을 조작할 만큼 승리에 집착한 인물이었다면 자기 육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승리에 대한 강박증을 내면적으로 더 파고 가야 하는데 외면의 궤적 중심으로 그려지면서 이 인물의 내면을 보여줄 때마다 편집이 끊긴다. 그건 절제라기보다 내면의 불충분한 묘사가 아닌가 싶다. 또 민족주의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혹은 지역성, 세계성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모호한 태도라서 불만스럽다. 자기 입으로 조선이고 일본이고 중요하지 않고 내가 남자로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애매한 민족주의에 대한 호소가 있고, 또 그것에 대한 애매한 탈피의 모습이 있다. 만든 이들의 불충분한 해석이 있는 듯하고, 나아가 한국영화에서 민족주의의 감성에서 벗어난 남성 영웅을 그릴 때의 난관이 아직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웰메이드 블럭버스터가 인물에 매달리는 이유 정성일 l 직관적으로만 말하면 <역도산>은, 20자평으로, 실망스러웠다. 이건 결론이 아니고 위험한 가설일 수 있고 그래서 도움을 구하고자 던지는 이야기인데 지금 한국영화가 웰메이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블록버스터영화를 만들며, 김소영 선생이 6개월 전에 지적한 대로 스튜디오 시스템을 세트 안에서 만들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 지적을 들은 이후 그 목표가 과거 영화사 속에서 어떻게 귀결되었는가를 생각했다. 이건 할리우드 모델을 이식해서 성공하려는 산업적 욕망일 텐데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를 만들려고 하는 이들이 일제히 인물에 매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효자동 이발사>, <슈퍼스타 감사용>, 역도산과 동시대를 살았던 <바람의 파이터>, 그리고 내년에는 <청연>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영화들을 보면서 이들이 최고가 되면 어떤 영화가 될까 생각하다가 난데없이 <시민 케인>이 떠올랐다. 영화의 완성도나 미학적 문제를 제쳐두면 결국 <시민 케인>으로 가고 있는 이 모습에서 한국영화가 다다른 단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블록버스터의 대척점에 디지털영화가 있다. <마이 제너레이션>처럼 저예산으로, 연기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을 데리고 거리를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의 참담함을 보여주려는 노력을 수많은 디지털영화에서 보면서 한국 디지털영화의 정신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 아닌가 싶었다. 결국 <시민 케인>이라는 제도권의 궁극의 모델, 그리고 디지털영화가 안고 있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보면서 영화사적으로 한국영화가 이제 비로소 모던한 영화로 진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아슬아슬한 생각을 해봤다. 김소영 l 즉각적인 비판을 한다면, 세계 영화사에 한국영화를 위치시키고 나서 서구 중심적인 연관 속에 다시 배열하는 역사기술의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또, 한국 영화사에 이미 유사한 순간이 있었다. 차승재의 움직임은 한·홍 합작과 스튜디오 시스템, <백사부인>에서 특수효과를 시도하며 60년대에 나름대로 지역화와 세계화를 꾀한 신상옥 감독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세계 영화사보다는 한국 영화사에서 거울 이미지가 있고, 그것이 반드시 발전의 개념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비판을 제외하면 ‘시민 케인’의 문제는 흥미롭다. <시민 케인>은 미국적인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복합성을 굉장히 정교하게 탐사한 영화인데 이런 점으로 봐서는 이 영화들의 인물탐사가 그것과 등가할 만한 것이 뭐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정성일 l <역도산>을 보면서 신기한 건 일본어로 진행되다 불현듯 한국말로 ‘나는 일본이고 조선이고 그런 거 신경 안 써’라는 요지로 말하는데 거기서 괄호쳐진 게 남한이었다. 사실상 <역도산>은 남한 사람들이 봐야 할 이유가 없는 영화였다. 내셔널시네마로는 완전히 괄호쳐진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차승재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남한에서 나가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민족주의이지만 이상한 민족주의다. <유령> <무사> <화산고>가 그랬다. <화산고>는 일본어로 더빙해서 유럽 관객에게 보여주면 한국영화라는 근거가 없어지는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도산>이 남성영웅신화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민족주의적 호소는 없는 듯하다. 허문영 l <바람의 파이터> 같은 치기어린 감상적 민족주의의 잔재는 없고, 그것과 결별하려는 애타는 노력이 확실하게 보인다. 그건 진전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걸 벗어던지고 나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했다는 거다. 정성일 l 그걸 슬픔으로 찍은 게 <역도산>이라면, 그걸 우습게 표현한 게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다. <내 여자친구…>에서 내셔널시네마라는 아이덴티티의 철저한 부정이 보인다는 점에서 <역도산>과 연결된다. 차승재 영화의 지향점은 어디인가 김소영 l <유령> <무사> <역도산>까지 놓고보면 생각할 공간이 있다. <유령>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중적 목소리로 하려고 했던 듯하다. 정우성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재밌는 장면이 정우성이 아버지를 플래시백으로 회상하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나오면서 부모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는 아이의 시선 같은 느낌을 준다. 거기에 굉장한 살부적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렇게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이 굉장히 모호하고, 그 다음에 살 수 있는 상상력도 모호하다. 그래서 자폭하는 결말로 나아간다. <무사>에서 가장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들이 왜 굳이 돌아오려고 하는가였다. 그렇게 남한 관객에게 이 영화를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듯하다. 흥미롭게도 <역도산>에서 남한 관객에게 말거는 장치는 설경구라는 배우 말고는 없는데 사실 설경구는 사람들이 ‘즐겁게’ 보러가는 배우는 아니다. 강동원은 아니니까. (웃음) <유령>이 어머니라는 모국의 정박점이 있고, <무사>에선 돌아오려는 게 억지로 느껴질 만큼 무국적적이라면 <역도산>에선 남한이라는 관객 대상이 계산돼 있지 않다. 이 영화에는 민족주의 이후를 생각하는 상상적 공간이나 사유적 능력이 없다. 긍정적인 건 자본에 접근 가능한 자리가 남아 있다는 거다. 칸노 회장이 거의 시민 케인 같은 사람이고. 허문영 l 역도산보다는 칸노라는 인물이 훨씬 더 잘 잡힌다. 역도산에는 모든 사소한, 시시껄렁한 담론을 뛰어넘으려는 초월적 영웅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문제는 갈망이 있으나 초월성 자체는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성일 l 지금 역사 속 인물을 다루는 한국영화에서 나타나는 공통점 중 하나가 아들 콤플렉스인 것 같다. <역도산>에서 어머니를 떠올리는 순간이나 <슈퍼스타 감사용>에서 어머니에게 애정을 바치는 모습,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월적 존재가 되려면 아버지를 밟고 넘어가야 하는데, 없애버리고 괄호치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대신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자리를 갖다놓아서 초월적 존재로 올라설 계단을 아예 치워버리는 게 아닌가, 그래서 자꾸 회귀적 인물, 퇴행적 인물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것이 우리 시대 대중이 원하는 영웅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가장 심각한 의미로 우리 시대에 불현듯 돌아온 박근혜의 회귀와 그리 먼 것 같지 않다. 그가 정치담론의 맨 윗자리에 있다는 게 한편 이들 영화의 지향점과 멀리 있지 않은 듯하다. 허문영 l 말씀하신 대로 한국의 대중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아버지의 자리가 애매하거나 지워져 있고 어머니는 항상 회귀의 판타지와 결부돼 나타난다. <역도산>이 다른 대중영화와 다른 점은 적어도 여기선 어머니라는 판타지와의 긴장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 긴장이 내러티브 전체에서 계속되지는 않지만 , 항상 감정적 고조가 필요할 때마다 인위적으로 끌어들이며 판타지를 맘껏 사용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의 판타지에 대한 긴장을 끌어들인다. 김소영 l 그것이 이 영화가 시원적인, 만능적 어머니상과 연결된 민족주의와 틈을 갖고 있는 점인 듯도 하다.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3]

박찬욱, 혼란스런 작가주의의 좌표 정성일 l 한국영화의 작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중의적인 의미로 김기덕과 연관지어서 표현하자면 김기덕이 있기 때문에 홍상수가 덜 외롭고 박찬욱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이다. 올해 단편영화를 심사하고, 영화아카데미 입학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느낀 건 박찬욱의 영향력이었다. 많은 차세대 영화지망생들이 박찬욱의 자장권 안에서 장면을 카피하고 영감을 받고 있다. 작가주의 담론을 논하기 위해선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옆에 그를 놓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칸이 주는 상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올드보이>는 공감하기 힘든 영화였다. 그냥 재미있는 상업영화였다. 그것도 많은 결함을 갖고 있는. 그런데 이제 그 영화가 많은 비평담론들에서 예술적으로 나아갈 좌표처럼 이야기되고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영화처럼 이야기될 때 대중성과 B급영화들이 가져야 할 자리와 예술성의 문제가 혼돈스러운 자리로 떨어져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 문제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난 이 담론이 웰메이드를 만들려는 제작자의 욕망과 뒤엉키면서 사실상 작가의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많은 시도들을 어렵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김소영 l 작가영화라는 배열로 홍상수, 김기덕을 갖고 있을 때는 <귀여워> <여자, 정혜>라는 영화들이 창백해 보이지 않는다. 그 집합에 가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기 세계를 가꿀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올드보이>는 무정부적인 <복수는 나의 것>이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기에 지그재그로 전략을 짜는 영화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가치가 더 있는 영화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판을 다시 짜면서 다른 영화를 창백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문제고 최근 젊은 감독들이 제출하는 시나리오에서 누구나 박찬욱의 상상력을 좇아가려는 상황은 우려할 만하다. B급 상상력은 카피하는 순간 F급으로 떨어진다. 자본과 만났을 때 가장 안 좋은 결과가 <쓰리 몬스터>의 에피소드다. 세트는 럭셔리로 지어놓고 들어와서 계급을 말하는 건 파탄, 재앙인 것 같다. 굉장한 돈을 갖고 정치도 말하고 B급적인 드라큘라도 만들 수 있고…. 허문영 l 개인적으로 박찬욱이라는 한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의 행로는 나름대로 흥미롭다. 한국영화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패턴이 있다. 주류영화와 비주류 예술영화로 쉽게 양분시켜 볼 수 있는데 한국에는 유난히 이 양쪽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적 장르의 길이 있다. 그 대표자가 차승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말할 때 주력군이 제3의 길에 속해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김성수, 봉준호, 박찬욱 등이 지속적으로 작품 자체에 관한 비평적 주목과 함게 대중의 호응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면 국내외적으로 동시에 이만큼 주목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시점에 이르러서는 제3의 한국적 장르의 길이 지나치게 다른 담론, 다른 길을 왜소하게 만들거나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우려스럽다. 차승재는 영화를 만들 때 작품상 받는 데 관심없고 의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소통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 노선으로 만들던 사람들이 비평적 찬사까지 걸머지면서 일정한 수 이하의 관객과 내밀한 소통을 이뤘던 작가주의 비주류 감독들이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더불어 그것들이 공존을 할 수 있으면 좋은데 지금은 영화학도들에게조차도 그것이 감독이 되는 가장 스탠더드한 길인 것처럼 보인다. 어디서나 제3의 길이 최상의 길인 것처럼 얘기되는. 최근 영화제의 상을 독식하는 현상은 지금까지 비교적 잘 이뤄져왔던 세 길의 공존과 균형을 무너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된다. 그 점에서는 비평계의 게으름이 굉장히 문제다. 각각의 영화들이 놓인 자리를 명료히 밝혀내고 그것이 어디쯤에 위치한 영화인지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소영 l 평론가가 박스오피스랑 동일한 행보를 걷는 건 확실히 게으른 것이다. 정성일 l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한국영화의 미학적 판단기준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아쉬움은 <하류인생> 같은 영화는 정말 설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미 임권택의 영화세계는 저예산으로 찍을 수 없는 스튜디오 시스템을 요구하고, 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물과 시간이 만나게 하는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을 받아들일 비평담론들조차도 거기에 외면하고 눈멀어 있다. 홍상수, 상승일로의 매너리즘 허문영 l 한국 영화계가 한번도 안정적으로 보인 적은 없다. 늘 불안하다가 불쑥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고 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왔는데, 지금이 가장 불안정한 시기 같다. <하류인생>이란 영화가 가진 몇 가지 텍스트적인 결함여부를 떠나서 한 노장감독이 보여준 중요한 여정의 일부- 그 나이에 새롭게 서론을 쓰려는 도박이자 모험인- 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한국 영화산업이 이 거장의 행로를 포용할 수 있는지 굉장히 불안하다. 이런 감독의 이런 미학적 여정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건 한국 영화계의 큰 결함이다. 정성일 l 사실 이 과정에서 굉장히 이상한 자리에 서버린 건 홍상수가 아닌가 싶다. 셋 중에서 홍상수에게 가장 큰 공감을 갖고 있고 곁에서 근심을 가진 허문영씨의 생각이 궁금하다. 허문영 l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자체에 대해선 덧붙일 말이 따로 없고, 지속적으로 홍 감독이 데뷔작을 만들 때부터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무엇이다’라는 것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드러날까, 그것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제일 궁금했다. 기묘하게도 그의 영화에는 탁월한 미학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잘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의 경우, 자기 제작사를 차려서 프로덕션을 진행하는 등 홍 감독으로선 실험적인 방식을 택했고 또 극장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대답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김소영 l 신인감독들의 작품이 많이 나오는데 96년에 홍상수의 데뷔작을 능가할 만한 영화를 찾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도 계속 기대하게 하는 것 같다. 근데 김기덕과 달리 홍상수는 발견 이후 계속 상승세를 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추락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너리즘의 미학 속으로 빠져든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의 매너에 대한 영화이면서 매너리즘에 대한 영화. 홍상수는 신화적으로 보면 일종의 상승의 영웅인데 그 사람이 계속 추락을 이야기하다보니까 긴장감이 없는 듯하다. 추락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추락을 이야기하는 것이. 한국영화는 왜 소년의 성장담인가? 정성일 l 성장담 영화로 들어가보자. 허문영씨가 <씨네21>에 한국 영화사를 소년의 성장사로 바라본 글을 썼는데 갑자기 그 문제를 던진 이유가 있을 듯한데. 허문영 l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대중영화와 보통 국제적으로 관객이 좋아하는 대중영화가 너무 다르다는 데서 출발한 거였다. 생각해보니 답이 단순하더라. 일반적으로 대중영화의 영웅은 그가 어른이든 소년이든 어른의 역할을 짊어진 자, 문제해결의 사명을 짊어진 자들의 이야기였는데 한국에선 주인공들이 짐을 짊어지지 않는다. 자기의 처지를 고통스러워하면서 유사형제, 유사가족을 찾아다닌다. 공동체의 짐을 짊어진 본래 의미의 영웅은 없고 소년들의 울부짖음만 많이 들려왔다. 도대체 이게 어디서 온 걸까, 어떻게 패턴화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 글을 쓴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연령대로 봐서는 나이가 올라갔는데, <바람의 파이터> <역도산> <효자동 이발사> 등, 여전히 공동체와는 절연된 상태에서 단독자로서의 고뇌에 빠져 있다. 한국 장르영화는 이런 면에서 인디영화의 감수성에 좀더 가까이 있다. 한국 영화계가 지속적으로 소년의 울부짖음을 소재화하다가 올해 들어와 발견한 출구가 역사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 남성을 끌어들인 건데 새롭게 소년의 울부짖음을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는 일부 소녀 성장담을 빼놓고는 남성 액션영화, 단독자로서 생존하고 승리하는 패턴의 액션영화가 아닌가 한다. 김소영 l 다른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하면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는 소년들의 곤경이 아니라 소녀가 작가이면서 수많은 팬을 거느린 인터넷 소녀가 나타났는데. 정성일 l 인터넷에는 소년작가는 없고 신기하게도 다 소녀작가인데, 공통점은 공주병이다. 올해 네편의 소녀작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영화도 흥행도 다 실패했다. <늑대의 유혹>의 관객은 사실 강동원을 보러간 것이고. 인터넷 독자, 소녀, 영화관객의 교집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소영 l 허문영씨의 글에서 인상적인 건 <태극기…>가 결국 소년의 시점으로 끝난다는 것, 어른들이 전쟁를 하는 데 그걸 끝내는 건 소년들이라는 것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면 권상우와 한가인은 똑같이 소년, 소녀로 지내다가 소녀는 얼른 가출하고 어른이 되는 데 비해 소년은 여전히 어리벙벙한 채 남아 있다. 그런데 소년들의 성장담으로 한국 영화사를 읽는 불편함은 소년과 남성을 이야기할 때 이런 식이어서 다른 상상과 글쓰기를 막을 수도 있다는 거다.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칭찬한 게 소년의 성장담으로 보이면서도 어느 정도 공생의 이야기여서다. <말죽거리…>처럼 소녀만 빨리 늙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대로이면서 비슷한 행보를 겪고 나중에 공존하는 방식으로. 허문영 l <아라한…>도 어떤 곤경의 산물이라는 생각이다. 성장을 하기 위해서 공동체와 만나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소년들이 공동체와 만날 수 있는 영화적 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한국영화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공동체가 이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무조건 서술하는 것으로 영화가 되지는 않으니까. 액션이라면 그걸 어떤 영화적 도상으로 끌여들여야 하는데 아직 그런 게 없다. <아라한…>의 경우는 그 길을 전승무예라고 하는 요소를 끌어들여 찾아낸다. 거기서 액션을 만들어내고 그것으로써 주인공이 세상과 만나는 길을 열어주는. 타이의 <옹박>이 아주 중요한 영화로 느껴진 게 한국보다 영화적으로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장르적으로는 훨씬 더 정상에 가까운 완성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옹박>은 현존하는 자기의 민속적 도상을 영화적 도상으로 바로 끌어들여 공동체의 문제와 통하는 길을 발견한다. 무에타이는 개인의 기량을 향상시키는 무예일 뿐 아니라 공동선으로 나아가는 정신적 당위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면서 이 인물은 공동체의 영웅이 되고 안정적인 내러티브가 짜여진다. 김소영 l <옹박>과의 비교는 적절하다. <아라한…>에서 징후적인 건 수련을 하는데 다 못한 상태에서 싸움터으로 끌려나간다는 거다. 본인도 수련이 다 끝난 게 아니라는 걸 아는데 나가서 싸워야 한다. 미국영화의 액션은 재난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인데 <옹박>에서는 시장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다치지 않게 피해나가면서 최고의 무예를 증명해내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반면 <아라한…>에선 미처 수련을 끝내기도 전에 끌려나간다. <아라한…>의 소년은 시라소니나 김두한이 식민지 시대의 거리에서 파이터가 된 이래 두 번째 영웅이 아닐까.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4]

대중영화의 이상한 경향들 정성일 l 다른 해와 달리 올해 이런 이상한 경향, 증후가 있었구나라고 감지한 게 있다면. 김소영 l TV와 영화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경향이 일종의 망각술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과거를 잊어버리고 과거의 사람을 새로운 정체성으로 만난다. 망각이 역사적으로 비정치화되는 거라고 볼 수 있는데. 허문영 l 상반기 좌담할 때 김소영 선생이 말한 한국영화의 세트에 대한 집착을 그 이후로 유심히 보게 됐다. 이를테면 여름 공포영화 대부분이 세트에서 촬영을 했던데 예컨대 어떤 학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외딴 곳에 세트를 지어놓고 공포를 만든다. <역도산>이나 <바람의 파이터>는 아예 무대를 일본으로 옮긴 경우에 해당하고. 괴담 유행의 시초였던 <여고괴담>은 그래도 의정부의 학교에서 직접 찍었다. 지금은 세트로 도피하거나 아예 무대를 딴 곳으로 옮겨간다. 이는 영화의 때깔을 높이려는 의도와 함께 제작비 규모의 상승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디지털 장편을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작비 규모의 한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리와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정성일 l 내가 본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유난히 시골영화가 많다는 것이다. 마치 시골영화라는 장르가 생긴 같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고독이 몸부림칠 때> <아홉살 인생> <마지막 늑대> <꽃피는 봄이 오면> 등등. 그렇다고 이곳에서 어떤 이데아를 찾는 것도, 탈도회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퇴행의 느낌도 아니고. 작가영화도 아니고 예외없이 상업영화인데, 대중들이 원하니까 기획이 됐을 텐데 왜 그럴까. 김소영 l 시골이지만 전원생활의 느낌이다. <…홍반장>이나 <귀신이 산다>에는 바다가 보이는 펜션형 주택이 등장하지 않나. <귀신이 산다>에서 차승원이 사는 집이 <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그토록 사고 싶어하는 거제도 땅이다. 바다가 보이는 펜션의 판타지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시골로 갔지만 주무대의 하나는 편의점 같은 도시적인 공간이다다. 전원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거꾸로 서울로 올라가는 영화도 있다 정성일 l <달마야 서울가자>는 <달마야 놀자>에 비하면 참혹하게 실패했다. ‘시골에서 서울’이라는 반대방향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일까? 김소영 l 결국은 거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근데 <달마야 서울가자>보다는 <귀신이 산다>가 약자 보호라는 점에서 좀더 전복적이다. <달마야 서울가자>는 이렇게 절충하는 영화가 다 있다 싶었다. 사찰 철거를 둘러싸고 싸우는 이야기인데 결국 도심 빌딩 위에 절을 세운다. 너무 순응적이다. 오히려 대중영화가 너무 순응적이면 안 보는 경향이 있다. 허문영 l 각각의 영화들이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한데, <마지막 늑대>는 명백히 시골 대 도시로 원시성에 대한 회귀본능을 말하기 위한 것 같고, <…홍반장> <귀신이 산다> <시실리 2km> 등은 그곳이 꼭 시골일 필요가 없고 가만히 보면 시골도 아니다. 그 공간이 모델로 하는 장소는 서구식 교외 주택단지다. 즉 새로운 공간을 탐색한다기보다는 이 공간으로부터 그저 멀어져 판타지를 만들어내려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힘든 공간들인데, 한국영화가 지닌 이탈의 욕망과 연결된 듯하다. 어쨌든 한국영화가 공간을 만들어내는 형식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다룰 만한 비평적 소재인 것 같다. 특히 장르영화 중심으로 맹렬히 넓어지고 있기 때문에, 근교의 판타지, 농촌의 판타지, 완전히 독립된 공간의 판타지…. 공간에 대한 거대한 판타지가 있다 김소영 l 더불어 지적하고 싶은 게 삶의 느낌이 안 묻어나는 실내 인테리어다. <정사>의 실내가 정구호의 디자인인데 그 이후 굉장히 미니멀하고 차갑게 영화 공간을 채워낸 듯 비워내고 있다. 제일 심한 게 <얼굴없는 미녀>다. 실내 미장센을 보면 도무지 신빙성이 안 간다. 정구호식 미니멀리즘 이후 아무런 정서도 담지 못하는 겉멋만 들린 이미지다. 정성일 l 아토피 걸릴 것 같은. (웃음) 김소영 l 페티시가 있는 것 같다. 교외와 전원에 대한 것처럼. 허문영 l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이 그렇다. 아파트 광고, 뮤직비디오의 서울은 절대로 서울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가능하지 않은 곳에 아파트를 지어놓고 와서 살 수 있다고 설파한다. 공간에 대한 판타지가 너무 거대해서 그것과 싸우는 영화와 수용하는 영화로 갈라지지 않을까 싶다. 정성일 l 시골영화 장르라고 했는데 시골가기가 일종의 길잃기와 맞물리면서 공포영화도 다 길 잃어버리는 이야기더라. <인형사> <령> 등이 그런데 같은 범주로 넣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거미숲>도 그렇다. 확장시키면 <알포인트>도 그렇고. 공포영화에서 시골가기가 길잃기가 되고 멜로에선 상대 만나기가 되고 <꽃피는…>에선 자기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 만나기가 되는 등 여러 장르에서 모티브가 교집합처럼 어떤 매듭을 만들고 있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여겨졌다. 한국에선 서울이 너무 큰 곳이어서, 사실 서울과 ‘안서울’ 두곳밖에 없는데, 서울을 부정하는 것이 대중들이 어떤 환상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김소영 l 그것의 답은 <썸>에 있는 것 같다. <썸>이 실패했고 재미도 없지만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시카메라가 CCTV로 작동하고 있고 그걸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그 카메라에 대응하는 것은 인간의 예지력이다. 중요한 건 서울이란 도시가 얼마나 끔찍한가. 교통방송 한번만 틀어봐도 알 수 있다. 정성일 l 서울을 담는 방법은 재난밖에 없을까. 그걸 고스란히 드러내는 영화가 <귀여워>다. 허문영 l 맞다. 한국 감독들이 그런 면에서는 불행하다고도 생각하는데 감독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져 있는 공간의 극단적 단조로움 때문에 여기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돈이 없어서 할 수 없이 네댓명 젊은 애들이 움직이니까 아무도 통제하지 않아서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었던 <마이 제너레이션>의 경험도 그렇고. 20, 30명이 서울 시내 공간을 찍으려 하자마자 큰 어려움과 돈이 든다. 김소영 l 그건 창의성과 전투력의 문제가 아닐까. 홍콩에 가면 사실 카메라 댈 데가 없는 대체 이 도시에서 어떻게 영화를 찍었을까 감탄한다. 액션영화나 왕가위 영화를 보면 도심의 시끄러운 공항도 상실과 동경의 메타포로 쓰인다. 정성일 l 시골에 감으로써 한국영화는 라이프가 없어진다. 시간적으로 영화가 거의 멈춰선 느낌이 들고 현실적 질료성이 사라지니까 점점 캐릭터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비주얼한 영화적 가능성에서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해서 몇몇 영화는 차라리 TV를 보지 뭐하러 보고 있나 싶었다. 재미, 만듦새를 떠나서 영화와 TV의 변별성에 있어서 한국영화는 급속히 퇴행하고 있다. 시골에 간다 해도 TV처럼 축소됐다는 느낌이어서 해방감이나 향수조차 전달하지 못한다. 영화적 질료성의 포기가 심각한 위기를 가져왔다는 느낌이 있다. 김소영 l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들은 올해 영화는 아니지만 <생활의 발견>과 무척 대조적이다. 막상 관광지에 가서는 청평사에 안 가고 경주에 가서는 능을 무슨 낮잠자는 언덕처럼 쓴다. 해체적인 전통적 공간의 사용방식이다. 시골과 도시의 변증법을 긴장있게 끌어들이는 감독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인데, <열대병>에서 놀라운 것이 정글과 소도시의 대조도 그렇지만 도시에서 정글로 가는 도중에 먼지가 날리면서 매연이 나오는 걸 촬영한 방식이다. 촉감, 감각을 그대로 전한다. 이 점에서 젊은 감독들이 홍상수 감독이나 아핏차퐁에게 배울 게 많다. 영화적 경험은 외출이다. 외출해서 볼 만한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약속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영화들은 끔찍하게 평면적이 돼가고 있다. 허문영 l 홍콩은 공간은 그 지경이지만 워낙 영화적 요소들이 중첩돼 있으니까 홍콩의 야경 장르라고 말할 만큼 야경으로 멋진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홍콩 감독들이 불안하고 사멸해가는 느낌을 발견했던 건데 그런 정서를 한국에서 똑같이 기대할 수는 없고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새로운 감수성으로 포착하는 영화를 기다릴 뿐이다. <귀여워>는 그런 영화의 한편이라고 생각된다. 김소영 l 그러나 <귀여워>가 기대만큼 공간을 치밀하게 사용한 것 같지는 않다. 정성일 l 정재영이 흑백화면으로 걸어오는 도입부를 생각하면 그런 걸 보여주겠구나 했는데, 결혼과 세리머니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내가 어디서 찍고 있는가와 영화의 물질성을 놓친 것 같다.

2004년 송년특집 편집위원 3인 좌담 [5]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디지털 장편의 매력 허문영 l 디지털 장편은 예전에는 이야기 매체로 일정한 결함이 있는 듯했으나 올해는 완결된 구조의 영화들이 나왔다. 그중 <마이 제너레이션> <양아치어조> <신성일의 행방불명>의 세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감독이 지닌 영화 매체에 대한 관심과 세계관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양아치어조>는 비교적 관습적인 이야기 방식을 채택하면서도 자기 번민의 감독적 독백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건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신성일…>은 감독의 개성에 걸맞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고도의 우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전체적으로 디지털 장편에 대한 기대나 호감은 그것이 지닌 물질적 제약 때문에 오히려 주류영화들보다 등장하는 인물도, 공간도 함께 살고 있다는 영화의 동시대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정성일 l 그것과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시실리 2km>의 성공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넘어간 대목이 HD로 찍었다는 점이다. 대부분 제작자들은 여전히 상업영화는 필름으로 찍어야 하고 관객은 필름이 아닌 것에 관심이 없다고 여기고, HD는 저예산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관객이 화면의 질료성이 필름이든 뭐든 매체의 질료와 아우라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한 것 같다. 스토리와 캐릭터만 좇아가면 된다는. 한편으로 <시실리 2km>의 성공은 한국영화의 대중이 아날로그와 필름의 아우라에 더이상 관심없다는 작별인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두분에게 올해의 얼굴은 누구였나. 허문영 l 역시 백윤식이 아닐까. 어떤 배우가 화면에 등장했을 때 얼굴만으로 화면의 톤을 장악한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지 않다. 백윤식은 사람이 지닌 주름의 깊이,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줬다. 정성일 l 올해의 얼굴 대신 올해의 이미지를 뽑는다면, 김선일의 이미지를 들고 싶다. 그 이미지에 내내 사로잡혀 있다. 그 이미지는 영원한 악업의 귀환이 될 것 같다. 2004년을 한국에서 어른으로 통과한 사람들이 벗어날 수 없는. 그것에 대해 한국영화가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이해가 안 된다. 그 정도의 이미지라면 이미지의 트라우마가 영화 속에 나타나는데 한국영화는 어떤 정신적 외상도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양심에 대한 외면 같은 걸 느꼈다. 김소영 l 원칙적으로 동의하는데 그 트라우마가 영화 속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적으로 좀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올해의 이미지라고 하면 전지현이 흥미로웠다. 한류 스타이지만 배용준은 일본에서의 인기만큼 한국에서 현상이 없는데, 전지현은 한국에선 CF도 폭발적이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로 꼽히며, 디카 문화 등 시대의 패션을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전면적으로 재현해왔다. 흥미로웠던 건 인터넷에서 본 지오다노 광고였다. 홍익대 앞 클럽의 댄스장면은 어떤 한국 여자배우의 육체보다 감각적이고 성숙한 육체였다. 진짜 짜릿한. 엽기적인 소녀로 소개된 여자가 완벽한 여자로 나타났는데 그 순간 결혼하니 어쩌니 하는 스캔들이 나오면서 추락하는 느낌도 주고. 소녀에서 여성으로 가는 조짐에서 벌어지는 일 같다. 정성일 l 추가하고 싶은 이야기가 수입영화에 대한 것이다. 올해 개봉한 외국영화 184편의 목록이 너무 형편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의 영화관객, 영화문화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세계의 영화라는 것의 동시대성으로부터 다시 동떨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다. 한국 관객에게 외국영화는 <역도산>이다. 이런 환경이 아니고선 95%의 90억원짜리 자막영화를 만들 용기를 어떻게 내나. 허문영 l 사실은 좀 된 이야기인데 이미 한국영화와 미국영화를 제외하고는 시장점유율 3%를 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시아영화이든, 유럽영화이든. 일종의 악순환이 된 것 같다. 이런 문화적 편식의 문제는 한 사람, 한쪽의 문제는 아닐 것 같고, 총체적으로 우리 문화가 가진 방향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한국영화가 외국 나가서 어떤 흥행성적을 올릴지, 외국영화가 한국에서 어떤 흥행을 올릴지 대충 짐작되는데, 한국영화가 한국 관객과 만날 때 어떤 현상을 만들어낼지는 전혀 짐작이 안 된다. 여전히 한국 관객은 기호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어디로 흘러갈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영화를 수입하고 제작하는 이들로선 큰 곤경이 아닌가. 정성일 l 산업적으로 한국영화가 돈 많이 벌지 모르나 문화적으로는 더 빈곤해지는 현실을 제작자들은 눈감아버리고 싶은 거 같고, 영화저널들도 큰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고, 더구나 비평가들도 언급하지 않는 게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 같다. 그런 빈곤함이 반드시 한국영화의 빈곤함으로 옮겨왔다는 생각이 든다. 홍상수, 김기덕은 해방구라기보다 일종의 게토라는 느낌이다. 텍스트가 빈곤한데 담론이 풍성한 건 사기라고 생각한다. 부탁건대 <씨네21>이 이슈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정책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 어쨌든 영화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이 책을 읽고 있으니까. 김소영 l 원칙과 바람은 동의하는데 지표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DVD 시장, 그리고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는 이들까지 지표에 넣어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시네필까지 포괄해서 말해야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 같다. 걱정하는 점은 파일 공유를 하더라도 고전영화는 어려운데, 중국에는 거의 모든 고전영화들이 다 있어 지하전영 친구들이 영화제가 없어도 다 볼 수 있다는 거다. 한국영화보다 더 나은 상황이다. 새로운 청춘영화를 보고 싶다 정성일 l 내년의 기대와 전망으로 정리해보자 허문영 l 늘 그렇듯 전망을 잘 못하겠다.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요소는 대중영화의 영웅들이 어떻게 공동체와 만날 것인가이다. 김선일 이미지도 지금의 대중영화의 맥락에서는 그 이미지에 접근할 길이 과연 보일까 싶다. 굉장히 무겁고 중요하기는 한데, 접근할 영화문법이 대중영화에서 축적되지 않았다는 거다. 지금 국제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세트로의 안주에서 벗어나서 동시대의 거리와 사람들을 만나는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김소영 l 시네마테크 문화가 더 활성화되고 자리잡을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정성일 l 한국영화의 올해 목록이 빈곤하게 느껴졌으나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의 영화를 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행복한 한해였다. 다만 내년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사라지는 청춘영화를 보고 싶다. 대중영화에서 청춘영화가 사라졌다는 건 그 나라의 영화가 굉장히 빨리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소년들이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들이 청춘영화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김소영 l <마이 제너레이션>은 청춘영화가 아닌가? 어떤 게 말씀하시는 청춘영화인가. 정성일 l 고다르의 누벨바그, <맨발의 청춘> <이지 라이더>처럼 저항과 분노가 있는 청춘영화. 청춘들이 봤을 때도 세상사는 이 답답함을 대변해주는구나 싶은. 청춘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새 캐릭터, 새 이야기를 새 테크놀로지로 찍는 것이다. 예컨대 <엽기적인 그녀>는 나에게는 청춘영화였으나 <내 여자친구…>는 아니었다. 김소영 l 청춘영화라기보다 뉴웨이브를 기다리는 게 아닌가. 정성일 l 최근 2~3년 사이 단편에서는 청춘영화를 보는데 그들이 제도권으로 들어와 장편을 찍으면 그 청춘들이 다 사라진다. 이 불구성이 21세기 한국의 물질적 토대 위에 반영된 어쩔 수 없는 불구성일까. 그만큼 한국영화가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설경구, 최민식, 송강호가 최고 배우뿐 아니라 최고 스타의 자리까지 함께 갖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다.

10.26사태 정면으로 다룬 <그때 그사람들> 촬영 마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던 1979년 10월 26일의 10.26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가 제작돼 일부 정치인과 관련인물들의 반발이 예상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은 심수봉의 곡명으로도 친숙한 ‘그때 그사람’을 연상시키는 <그때 그사람들>. 그동안 한번도 언론에 공식적으로 노출된 적이 없는 <그때 그사람들>은 지난 9월 10일 촬영을 시작해 최근 촬영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의 제작사인 강제규&명필름은 보도자료를 통한 입장표명에서 “대통령 시해사건을 다뤘다는 이유 때문에 정치적으로 불필요한 해석을 유발하여 영화에 대해 그릇된 평가가 내려질 것을 우려해 그동안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고 밝힌 후 “이 영화는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그 주변인물들에 초점을 맞춘 블랙코미디풍 작품”이라고 애써 정치적 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제작사의 의도와 상관없이, ‘박정희 시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기 때문에 이런저런 뒷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중견제작사 강제규&명필름의 작품이고 <바람난 가족> 등으로 유명한 임상수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데다, 주연배우가 한석규와 백윤식이라는 점도 파장에 기폭제로 작용할 전망이다. 총제작비가 60억인 대작에, 널리 알려진 감독과 배우가 만들었고, CJ엔터테인먼트가 대규모로 배급할 것으로 알려진 <그때 그사람들>이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백윤식은 대통령을 암살했던 김재규역에 해당하는 중앙정보부장을 맡았고, 한석규는 그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 요원 과장으로 출연한다. 극중 대통령역은 중견배우 송재호가, 심수봉이 연상되는 여가수 송금자역은 그룹 자우림 출신의 김윤아가 연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년 2월에 열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 작품은 현재 후반작업을 진행중이며 내년 설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존폐여부로 정치권이 대립하고 있는 이때, <그때 그사람들>이 영화계뿐만 아니라 정치권에 어떤 파장을 불러 일으킬지 주목된다.

[현지보고] 데니스 퀘이드 주연의 재난영화 <피닉스> LA 시사기

사막 한가운데서 불타오르는 비행기, 이 절망의 잿더미 위에서 희망이 솟아오른다는 이야기인 <피닉스>(Flight of the Phoenix)는 어찌 보면 고전적인 재난영화일 수 있다. 사막 위에 지어진, 이제는 낙관주의적인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자리한 LA의 샌타모니카 불러바드에 자리잡은 AMC극장에서 <피닉스>의 시사회가 열렸다. 이십세기 폭스사가 40년 만에 다시 손을 대 만든 리메이크작 공개다. 이미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막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인지를 1965년 원작 <사막의 기적>(The Flight of the Phoenix)에서 지켜본 탓인지 궁금증보다는 리메이크가 만들어진 배경과 원작과의 차이가 더 궁금했다. <캐스트 어웨이>의 떼버전 또는 <15소년 표류기>나 <파리 대왕> 어른판 같은 이 재난영화는 1965년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 작품이 원작이다. <그리솜 갱단>이나 <키스 미 데드리> <더티 더즌>처럼 <사막의 기적>도 알드리치만의 호흡이 느껴진다.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살아남으려 바둥대고 서로 다투고 갈등하는 인간세계의 축도 또는 사막에 버려진 인간집단 탐구라 할 만한 깊이와 짜임새로 성큼 마음을 파고드는 수작이다. 원작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아들이 제작자로 제작자 윌리엄 알드리치는 아버지 로버트 알드리치의 <사막의 기적>을 이십세기 폭스사에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했다. 1965년 원작의 리메이크 판권은 폭스사와 윌리엄의 회사인 알드리치 그룹의 공동소유. 1997년 양쪽이 리메이크를 합의했고, <에너미 라인스>를 만들던 감독 존 무어는 이 소식을 듣고 메가폰을 잡기를 자청했다. 알드리치는 13년 만에 다시 프로듀서를 하면서 아버지의 유품에 뛰어들었다. 13년 전 작품도 아버지의 원작을 리메이크한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의 TV 버전이다. 아버지가 만든 <그리솜 갱단>에 프로듀서로, <베이비 제인…>에서는 연출부로, <베이비 제인…>과 <사막의 기적>에선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리메이크는 원작의 다소 무거운 인간탐구 대신 사막의 비행기 추락과 이를 벗어나는 과정에 더 집중한다. 사막 로케이션, 특수 모델 비행기, 비행기 추락장면 등은 원작의 다소 밋밋해 보이는 재난적 성격을 강화했다. 리메이크는 몽골의 유전 석유 시추 사업 실패를 악몽의 서장으로 열어젖힌다. 피닉스라 불리는 화물 비행기의 프랭크 타운즈(데니스 퀘이드) 기장은 사업을 정리하고 철수하는 정유회사 직원 켈리 존슨(미란다 오토) 등을 태우고 베이징을 향해 출발한다. 그러나 모래폭풍을 맞아 비행기는 고비사막에서 추락하고 무전기 한대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열기와 모래폭풍 목마름과 싸우며 탈진해간다. 도대체 어디서 탈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절망과 피로가 엄습할 때 승객 중 한명인 엘리어트(지오바니 리비시)가 농담처럼 비행기 잔해를 모아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숨쉬기도 벅찬 마당에 비행기를 만들자고? 물 한 모금과 땀 한 방울이라도 아껴가며 구조를 기다리자는 현실주의자 타운즈와 무모한 과학주의자 엘리어트는 생존자의 유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원작보다 훨씬 선명한 대결구도, 무게있는 문어체 대사를 다 덜어낸 속어들, 비행기 추락의 악몽을 현실화한 박진감 넘치는 추락장면 등은 피닉스가 시간이 흐르며 더 날렵해졌다는 증거다. 리메이크는 인간보다는 사막을 더 깊게 파헤친 작품이다. 존 무어 감독은 고비사막이 던져주는 철저한 고립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원작의 무대였던 사하라사막은 나미비아사막으로 바꿨다. 제작진은 아무도 안 사는 광활한 오지, 누구도 들어가기 어려운 완벽한 고립의 땅을 원했지만 모로코, 호주의 사막 등 어느 후보지에서도 전신주와 도로가 없는 사막은 없었다. 자라던 나무와 풀도 다 없애가며 물 한 방울, 희망 한줌 얻을 수 없는 이미지를 나미비아사막에서 얻어냈다. 데니스 퀘이드는 시속 80km로 불어오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하루종일 모래 위를 걷는 건 너무 힘든 경험이었다고 토로했다. 1965년 원작에서 폴 맨츠(스턴트 파일럿)가 사망한 것을 보지 않더라도 사막에서의 촬영이 악전고투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인 비행기가 있다. 1950년 제작된 군용항공기 C-119라는 희귀한 항공기를 구하느라 제작진은 애리조나주의 비행기 묘지부터 케냐까지를 훑고 다녔다. 사막 한가운데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서기까지 비행기가 나오지 않는 장면은 없다고 과언이 아니다. 4대의 C-119 비행기를 모두 분해해 배에 싣고 나미비아사막까지 공수하는 수고를 마다할 수가 없었다. 재난적 성격 강화, 캐릭터는 다양화했으나 허약 그런데 왜 느닷없이 몽골에서의 석유 시추 사업 실패 이야기가 나올까. 이런 점에서 <피닉스>는 부시의 이라크전 침공을 읽는 데 곁들일 참고서처럼 보인다. 사막(또는 이라크)이라는 오지(미국식 문명이 아닌)에서 석유를 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젊은이들이야말로 지금 미국에서의 현실이자 또 하나의 진행형 신화가 아닌가. 전혀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재난어드벤처영화 속엔 희미하게나마 미국의 정치적 무의식이 배음처럼 흐르고 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원작과 리메이크를 가르는 큰 지점이다. 왜 40년 만의 리메이크가 나왔을까.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걷어내고 인간을 발가벗긴 알드리치 감독의 원작은 사소한 갈등만으로도 스크린에 긴장감을 드리웠다. 사막이 일으키는 정신적인 공황, 무질서해지는 군대,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둘러싼 싸움, 먼저 자기부터 살아남으려는 이들의 다툼, 최악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은유가 풍부했다. 베테랑 기장과 젊은 과학자 그러니까 타운즈와 엘리어트(원작에서는 독일계 도르프만)의 자존심 대결이 축을 이룬다는 건 마찬가지다. 신기술과 구기술, 구세대와 신세대,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하게 자신의 직감을 믿는 사나이와 잔인하면서도 냉정한 합리주의가 맞선다. 원작에서 과묵하고 치밀하며 독선적인 도르프만의 캐릭터는 조금 더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고 자아도취적인 엘리어트가 된다. 누가 대장이냐를 놓고 티격태격,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비열하기까지한 성격을 놓고 보면 리비시의 캐릭터 해석은 단순함과 코미디가 두 가지 축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원작의 배우진은 당대 최고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제임스 스튜어트, 어네스트 보그나인, 리처드 애튼버러가 운명의 싸움에서 피로함 가득한 연기를 보여줬다. 원작이 군인과 비행원 사업가 등 남성만으로 진용을 짰다면 리메이크는 민간인과 여성 유색인종으로 좀더 밝고 다채롭게 승객 명단을 꾸몄다. 화상과 열기가 쓸고 지나간 지친 얼굴로 대사를 뱉던 원작의 배우들에 비하면 개정판 <피닉스>의 배우들은 복숭아 통조림을 먹으며 사막에서 골프를 치고 카세트로 힙합을 즐기며 사막의 두려움을 미국적 낙관주의로 넘어선다. 아마도 시대적 반영이라 할 이 변화가 긍정적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에서 남자들을 압도하는 대찬 기질을 뽐냈던 에오윈 역의 미란다 오토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원작에서 기장 타운즈와 부기장 루 모란(리처드 애튼버러) 사이의 두터운 우정도 희미해졌다. 부기장 AJ(<패스트 앤 퓨리어스2>의 타이레스 깁슨)는 타운즈에게 큰 힘이 되지 못한다. 데니스 퀘이드말고는 모두 모래폭풍에 휩싸여버린 것 같다. 데이비드 린의 광팬으로 알려진 데니스 퀘이드를 위해 알드리치식 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원작에선 아랍 또는 낯선 이방인(정말 이방인은 이들 불시착한 백인들이나)에 대한 편견은 탈수증에 걸린 남자의 환상 속에 잠깐 등장한 아랍 여자의 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낙타를 몰고 다니는 도적단도 잠깐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건 마치 사막이라는 지옥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투다. 그러나 개정판은 대담하게도 도적단과의 결투를 치밀하게 묘사하며 미개하고 잔혹한 아시아 마적단과 백인 승객과의 싸움에 큰 비중을 둔다. 고비사막이라는 무대는 아시아인데 영화는 아시아의 지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건 그저 벗어나야 할 지옥일 뿐이다. 엘리어트가 숨겨둔 복선의 뇌관이 이런 정치적 무심함을 상쇄할지도 모른다. 부러진 날개가 다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를 때의 희열이 모든 것을 덮는다면 2005년 2월4일 개봉할 <피닉스>의 비행계획은 그렇게 무모한 것만도 아니다. 배우, 데니스 퀘이드, 지오바니 리비시 인터뷰 “원작과 차이? 그건 기자들이 알아볼 일이다” 애초에 데니스 퀘이드와 지오바니 리비시 그리고 <에너미 라인스>와 <피닉스>의 감독 존 무어가 인터뷰장에 나오기로 했다. 데니스 퀘이드와 지오바니 리비시는 정열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존 무어 감독을 칭찬했지만 정작 존 무어는 몸이 아파 나오지 못했다. -원작을 보았나. =데니스 퀘이드 l <피닉스> 원작은 어릴 때 아주 좋아한 영화였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다. -제임스 스튜어트와 하디 크루거가 원래 역을 맡았는데 실제 해보니 어떤가. =데니스 퀘이드 l (제임스 스튜어트 목소리를 흉내내다가) 정말 좋은 역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했겠지만 이건 정말 리메이크하기 좋은 작품이고 테크놀로지의 발전도 보여줄 수 있고 액션 시퀀스도 더 뛰어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감정 그리고 희망을 잘 다룬 좋은 이야기다.=지오바니 리비시 l 엘리어트는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다. 수줍어하는 성격이지만 또 한편으로 사이코다. 다른 영화라면 한니발 렉터 같은 역할이랄까. 하지만 꼭 악역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영향을 받을까봐 나는 원작을 보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더 신경을 썼다. -원작과 비교한다면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데니스 퀘이드 l 그건 기자들이 할 일이다. 이 작품에 비판을 한다고 해도 기자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는 않을 거다. (웃음) 그게 내 모토다. -실제 파일럿이라고 들었는데 하늘을 날면 기분이 어떤가. =데니스 퀘이드 l <필사의 도전>(1983)의 고든 쿠퍼 역을 할 때부터 비행기를 몰기 시작했는데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라스베이거스를 다녀오기도 한다. 운전석에 있으면 어둡고 무섭다. 하지만 하늘을 날면 자유를 만끽하는 기분을 느낀다. -사막에서 찍는다는 게 힘들지 않나. =데니스 퀘이드 l 바람이 거세고 매일 방향이 바뀐다. 촬영장 모습이 뒤바뀔 정도다. 아주 신비스런 곳이지만 정말 너무 거칠고 힘들다.=지오바니 리비시 l 낡은 커다란 강풍기 두대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 얼굴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미비아사막에서 첫날 일몰장면을 찍는데 말로 못할 정도로 아름답더라. 존 무어 감독도 찍다 말고 바라보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