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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특집] 2004년의 얼굴 - 백윤식 & 문근영

2004년을 대표하는 두 배우- <범죄의 재구성>의 백윤식과 <어린 신부>의 문근영 <범죄의 재구성>의 김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올해 두번이나 수술을 당했다. 그것도 심각한, 뇌수술 수준이었다. ‘어린 신부’ 문근영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김선생’ 백윤식의 서늘한 카리스마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동년배도 라이벌도 아닌 이들을 묶어 말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만, 2004년의 사건사고를 꼽아볼 때, 이들이 나란히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따져보면, 두 사람은 영화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한 시점이 비슷하고, 올 하반기에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던 포털 사이트의 얼굴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대에게 사랑받는 ‘진짜’ 십대 배우, 아버지상이 아닌 중년 배우라는 식으로, 이전 충무로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미미했던 영역을 개척하고 입지를 다진 스타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알다시피, 이들은 20대가 아니다. 그리고 이들의 팬들도 20대가 아니다. 대중문화의 주체, 트렌드 리더가 20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변화 한가운데 이들이 있다. 문근영은 얼마 전, 광고 브랜드 컨설팅 업체에서 실시한 소비자 설문 조사에서 ‘선호하는 모델’ 1위로 선정됐는데, 이때 10대 남자와 30대 여자의 가장 큰 지지를 얻었다. 이는 13살에서 16살의 로틴세대가 활발한 소비주체 그룹으로 떠올랐음을 알린 <어린 신부>의 폭발적인 흥행(전국 300만 동원)이 예고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귀엽고, 깜찍하고, 해맑고, 똘똘하고, 친근하고, 착실한 이미지로 어필한 문근영의 팬카페에는 ‘근영 누나’를 연호하는 남동생 팬들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다. 문근영과 동반 상승한 <어린 신부> 이후, <여고생 시집가기> <제니, 주노> 등 비슷한 컨셉의 십대 영화가 줄줄이 제작되는 등 그 여파도 만만치 않았다. 문화연대 문화사회연구소의 이동연 소장은 문근영의 등장을 ‘십대 문화’와 ‘십대 무비스타’의 부활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목한다. “배우들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고, 대중의 취향도 다양해지고 있다. 70년대 임예진이 있었듯, 청춘스타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키덜트’ 문화의 팬덤과 산업, 적극적으로 스타를 발굴하고 개입하는 10대 소비계층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영화에서 실종됐던 하이틴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문근영이 십대 문화의 포문을 열었다면, 백윤식은 충무로의 캐릭터와 장르 갈증을 채워준 독보적인 중년 배우다. 젊은 시절 지식인과 예술가 캐릭터를 도맡다시피 했던 그는 마흔 넘은 나이에 <서울의 달> <파랑새는 없다>의 포커페이스 사기꾼으로서 ‘웃길 줄도 아는’ 탤런트로 변신했다가, 최근 <지구를 지켜라!>라는 기상천외한 SF(백윤식은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다고 했다)와 <범죄의 재구성>이라는 매끈한 스릴러로, 뒤늦게 영화에 진출했다. 이 비범한 영화들을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린, 중년의 카리스마. 누구의 아버지나 삼촌으로서가 아니라, 젊은 오빠 백윤식에게 열광하는 이들에게, 이번엔 그가 대놓고 물었다. “조인성이하고 나하고, 누가 더 잘생겼냐?” 꽃미남 청춘스타와 맞장뜨겠다는 중년의 자신감에, 젊은이들 여럿 쓰러졌다. 두 배우 다 실제 나이대를 연기, 독창적으로 풀어나가 이들은 영화 속에서 실제 나이대 캐릭터를 맡아, 그 나이의 감성과 경험을 투사하되, 비전형적으로 풀어간다는 공통점도 있다. 고등학생인 문근영은 <장화, 홍련>과 <어린 신부>에서 자기 나이대의 캐릭터를 맡아 연기했다. 어려 보이는 20대 여배우가 아니라 10대 여배우가 또래들의 일상과 감수성을 보여준 것이다. 문근영 자신도 ‘어린 배우’로서의 강점을 인정한다. “인기? 내가 어려서가 아닐까? 다가오기 쉬우니까. 그리고 여성스럽지 않기 때문에 편한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예뻐해주는 것 같다.” 롤리타 콤플렉스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어린 신부>는 소녀에게 섹슈얼리티를 부여해서라기보다는 ‘어린’과 ‘신부’ 사이의 묘한 간극에 자리잡은 문근영 특유의 ‘무공해’ 이미지 때문에 더 각광받았던 경우다.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도 그런 문근영을 가리켜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불가사의한 아이”라고 칭한 바 있다. 나이의 의미가 각별하기론, 백윤식도 마찬가지다. 50대 후반인 백윤식이 연기한 강사장(<지구를 지켜라!>)과 김선생(<범죄의 재구성>)은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여유로운 황혼을 준비하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기업체 사장의 탈을 쓴 외계 행성의 왕자라든가 마지막 한탕의 유혹과 자존심 때문에 몰락하는 전설적인 사기꾼이라든가 하는 식의 캐릭터 반전이 숨어 있었다. 그가 임상수 감독의 신작 <그때 그 사람들>에서 보여줄 캐릭터와 연기도 분명 범상하진 않을 것이다. 이동연 소장은 백윤식의 독특한 입지를 이렇게 정리한다. “백윤식은 TV에서부터 카리스마 넘치면서 코믹한 모습, 그런 이율배반적이고 양면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대개 배우들은 진지한 카리스마를 보이거나 코믹하거나 둘 중 하나이지 이 둘을 섞어내지는 못한다. 그런 독특한 개성을 보여줄 만한 40∼50대 배우가 없었고, 백윤식은 그런 점에서 한국영화의 본격 장르화와 키치적 변화에 적합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즈음 TV에서 영화로 옮겨온 중견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현상에 따라붙는 “중년 배우 전성시대”라는 식의 카피를 백윤식은 사양한다. “나는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는데, 그렇게 집단적인 개념으로 묶는 건 적당하지 않다”는 지적은 타당하게 들린다. 어떤 캐릭터든 자기 것으로 소화, 대중의 사랑 받아 백윤식은 캐릭터에 다가가기보다는 자기쪽으로 끌어오는 배우다. “백윤식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만으로 더없는 스펙터클이 된 영화”라며 <범죄의 재구성>을 올해의 영화 중 한편으로 꼽은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백윤식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범죄의 재구성>에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고 박신양을 찾으러 다니는 표정, <담백하라>를 립싱크로 부를 때 그의 표정은 호소하지 않는다. 마음속에 지옥을 가진 사람의 얼굴, 무표정하게 살아가다 불쑥 삐져나오는 마음의 풍경이다.” 말하자면, 백윤식에겐 ‘인생을 아는’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건 테크닉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그 무엇, 관록과 연륜의 힘이다. 그런 백윤식의 개성에 기대어 기획된 캐릭터는 영화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와 CF로도 나타났다. <담백하라>의 뮤직비디오는 가수 김태욱이 반신반의하는 백윤식에게 비슷한 연배의 해외 뮤지션 스팅과 에릭 클랩튼의 공연 실황을 보여주며 설득한 경우. 이어진 것이 록, 발라드, 랩 등 여러 버전의 립싱크로 소개된 인터넷 포털 사이트 파란의 티저 광고다. 광고를 제작한 제일기획은 “후발주자인 만큼 주목도를 높이려면 돌출을 시도해야 했다. 연배가 있겠지만, 카리스마가 강해서, 젊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고 전한다. 파란닷컴쪽은 이 덕에 “포털 순위 22위에서 6위로 급상승할 수 있었다”며 상당한 광고 효과가 있었다고 일러준다. 문근영 또한 어떤 캐릭터든 ‘문근영화’하는 능력을 발한다. <어린 신부>가 도발적인 ‘로맨스’가 아니라 판타지가 가미된 ‘코미디’로 흘렀고, ‘문근영쇼’로 비쳤던 것은 그런 이유. 지금 촬영 중인 <댄서의 순정>에서 옌볜에서 건너와 세상 물정 잘 모르고, 첫사랑을 예감하며 가슴 떨려 하는 ‘열아홉 순정녀’는 문근영이 아니고는 생각하기 힘든 캐릭터다. 아이처럼 덜 자란 느낌의 귀여운 여자들, 이를테면 과거의 최진실이나 장나라의 계보에 들 수 있겠지만, 그들이 문근영처럼 ‘실제로’ 어리지는 않았다. 언젠가 차태현이 “문근영은 국보로 지정해 보호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것처럼, 문근영의 성숙(혹은 오염)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대중은,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은 문근영이 언젠가 넘어야 할 산이다. 당분간은 고3 수험생으로 살겠다는 문근영의 폭탄 선언이 야속하긴 하지만, 자신을 소모하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고,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영민함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린 문근영과 백윤식이 (각자)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교복 차림으로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 조금 더 기다려~”라고 노래하던 문근영은 얼마 전 외할머니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나도 사랑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멜로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그런 경험이 중요하지 않을까”라고. 왜 아니겠나. ‘준비된 배우’ 백윤식도 “처절한 사랑 이야기, 멜로를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비치고 있다. 2004년 전 국민의 여동생이자 막내딸이었던 문근영이 그렇게 예쁘게 성장해 가는 한편으로, ‘중년도 멋지다’는 걸 입증해 보인 백윤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자 하는 욕구로 충천하다. 다시 한번, 김선생 식으로 말하자면, 문근영과 백윤식, 그들과 함께하는 충무로는 지금, 시추에이션이 좋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인기 절정… 무채커플·무혁체 등 유행어도 양산

KBS 월화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인기가 엄청나다. 첫 방송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시청률 면에서 그리 뛰어난 성적을 보이지 못해 ‘마니아 드라마’로 분류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최근 시청률도 호조를 보이면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SBS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와 맞붙으면서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월요일, 화요일에 1승1패씩 주고받으며 근소한 시청률 차이를 보인 것. 그러나 지난 12월14일 전날 20.3%의 시청률보다 1.4% 상승한 수치로 방영 이래 최고인 21.7%(TNS 미디어코리아 집계)를 기록한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3주 연속 20%를 넘으며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는 14일 16.5%로 13일의 17.6%보다 1.1% 하락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독주 체제를 굳혀가는 것은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에서도 알 수 있다. 포털 사이트의 드라마 검색어 순위에서 정상을 지키고 있는 것은 물론 다양한 설문조사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엠파스 랭킹서비스가 네티즌 28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드라마 속 최고 커플은 누구?’라는 설문조사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임수정-소지섭 커플은 69%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1위에 올라섰다. ‘미사커플’, ‘무채커플’ 등으로 불리는 이들은 ‘둘의 연기 호흡이 완벽에 가깝다’는 등의 평가를 받으며 2위를 차지한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의 김태희-김래원 커플(23%), 3위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유진-지성 커플(6%)을 큰 차이로 제쳤다. 이 커플은 네오위즈 게임전문 사이트 피망에서 1만2348명을 대상으로 한 ‘올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고 싶은 TV 속 커플’ 설문조사에서도 41%의 지지로 1위를 차지했다. 방영 초반부터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열렬히 시청한 ‘미사폐인’들의 애정공세는 더욱 거세다. 13일 방송 직후에는 시청자 게시판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게시판은 20만건의 글이 올라오며 포화상태가 되자 지난주 새 게시판으로 교체했는데, 갑작스럽게 몰린 팬들의 시청소감 때문에 서버가 다운되고 만 것이다. 14일 오전 9시경 정상으로 복구된 게시판에는 16일 목요일 현재 벌써 13만건에 가까운 글이 올라와 있는 상태다. 드라마와 관련된 용어들을 모은 ‘미사 사전’도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소지섭 팬카페 소속 회원이 만든 이 사전에는 ‘미사폐인’, 무혁과 은채에게 빠져 게시판을 보다가 밤을 새우는 ‘월요병’, 무혁의 특별한 말투인 ‘무혁체’ 등의 용어가 정리되어 있다. ‘미사폐인’들은 머리에 총알이 박힌 채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무혁을 살리기 위해 ‘무살추’(무혁이 살리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치밀한 대본과 주인공들의 슬픔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영상 등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무혁과 은채의 캐릭터, 또한 완벽하게 극 중 인물이 된 소지섭과 임수정의 연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나도 살고 싶지만 그러면 드라마가 망가진다,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혁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고 밝힌 소지섭은 괴팍하고 다혈질인데다가 싸움도, 욕도 잘하지만 내면에 누구보다도 깊은 상처와 여린 슬픔을 지닌 무혁의 캐릭터에 더없이 어울리는 섬세한 감성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장화, 홍련> <…ing> 등의 영화에서 슬픈 사연을 지닌 어두운 역만 주로 맡다가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 변신의 가능성을 보여준 임수정 또한 죽음을 앞둔 무혁을 바라보는 은채의 애절한 사랑을 잘 표현해 시청자가 눈물을 쏟게 만들고 있다. 드라마의 감동을 배가시키는 O.S.T도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매력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드라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삽입곡들이 드라마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것. 타이틀곡으로 모바일 통화연결음 서비스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박효신의 <눈의 꽃>을 비롯해 바다, J, 정재욱 등이 부른 15곡이 수록된 O.S.T 음반은 요즘 같은 불황에 2만여장 정도가 팔렸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이례적으로 두 번째 O.S.T 음반도 발매될 예정이다. 12월 말 막을 내릴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이제 4회분만을 남겨놓고 있다. 지난 12월14일 방영된 12회에서 은채가 무혁의 예정된 죽음을 알게 되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충격적인 결말을 맞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윤(정경호)이 오들희(이혜영)의 친아들이 아닌 입양아임이 밝혀진다. 윤을 살리기 위해 무혁의 심장을 원하는 오들희는 친아들의 심장으로 양아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는 것. 무혁은 총알 제거 수술 방법을 알게 되지만 어머니가 아끼는 윤에게 심장을 주기 위해 묵묵히 예정된 죽음을 택하게 된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은채의 죽음. 윤과의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은채는 호주의 공동묘지에 묻힌 무혁을 찾아가 함께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무덤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14일 방영된 “아저씨와 나는 이번 세상에서는 인연이 없어. 다음 세상에서는 절대 아저씨를 놓치지 않을거야”라는 은채의 애절한 대사가 복선이었던 셈. 호주에서 이미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은채의 죽음은 ‘미사폐인’들에게 또 다른 안타까움을 안겨주고 있다. 지난해 <상두야 학교가자>에 이어 또다시 드라마의 마지막에 주인공들의 죽음을 선택한 이경희 작가는 “드라마를 통해 가르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무혁의 죽음을 통해 용서와 화해라는 메시지를 시청자가 음미해봤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제작진의 바람대로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끝까지 진한 여운을 남길 수 있을지 지켜보자.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명대사 “내 심장 윤이 줄 테니까 너 나한테 올래?” - “은채야, 그냥 너만 이렇게 업고 밤새 다녔으면 좋겠다. 아저씨, 따라갈래? 니가 같이 가주면 진짜 좋을 텐데. 너만 같이 가주면 내가 진짜로 좋을 텐데. 아, 그냥 우리 돌팅이 업고 이렇게 다니다 죽었으면 좋겠다. 다 왔네. 어, 동네 한 바퀴 더 돌아야겠다.” - 무혁이 은채 업고 - “아빠, 죄송한데요. 무혁이 아저씨요, 그만둘 수 없어요. 윤이 좋아할 때는요 대개 외롭고 서럽고 그랬는데요. 근데 무혁이 아저씨는 안 그래요. 대개 고맙고 따뜻해요. 무혁이 아저씨가 나 때문에 외로워 할까봐, 서러워할까봐 그게 걱정이에요. 그만둘 수 없어요, 이제.” - 은채가 무혁이를 반대하는 아빠에게 - “자꾸 반칙할래 송은채. 나랑 노는 동안은 그 새끼 생각하지마. 울지도 마. 찡그리지마. 슬프다, 괴롭다, 돌겠다, 집에 가고 싶다, 윤이가 걱정돼 죽겠다, 그런 거 절대로 드러내지마. 난 너랑 노는 데 내 심장을 걸었어. 나한테 집중하라구.” - 무혁이 윤 걱정하는 은채에게 - “언제 죽는다구요, 아저씨. 죽긴 확실히 죽어, 아저씨. 어, 좋아. 아저씨한테 갈게. 윤이만 살릴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온몸을 바쳐서 충성을 하지 내가. 잠도 같이 자줄게. 꼭 죽어. 꼭 죽어서 윤이 살려줘. 약속 지켜줘.” - 은채가 윤에게 심장을 주겠다는 무혁에게 - “윤이 내가 살려줄게. 내 심장 윤이 준다. 내 심장 떼서 윤이 줄 테니까 너 나한테 올래? 내가 살아 있는 시간까지만 나한테 올래?.” - 무혁이 윤에게 심장주겠다고 은채에게 - “당신이 원한 게 그거였어. 당신이 원한 게 내 심장이었어. 나두, 나두 당신 아들이라구. 나두 윤이처럼 당신이 낳아서 당신이 세상에 내놓은 당신 핏줄이란 말야. 나두 당신 아들이라구. 당신 아들이란 말야.” - 무혁이 어머니에게 절규하며

마네킹 주연 DVD ‘푸콘 가족’

새 디브이디 <푸콘 가족>은 등장인물이 모두 마네킹이다. 레고 인형까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판국에 마네킹이 뭐 대수일까 싶지만 <푸콘 가족>은 확실히 특별하다. 인형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컷을 이어붙여 동작을 만들어내는 보통의 인형 드라마와 달리 푸콘 가족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둑이 드나 부부싸움을 하나 엄마·아빠·아들이 모두 하하 웃고 있다. 미술과 퍼포먼스, 영화를 오가며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 크리에이터 이이바시 요시마사가 감독한 <푸콘 가족>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사온 푸콘 가족을 3분 안팎의 짧은 에피소드로 엮은 시리즈물이다. 어떻게 보면 뻔뻔하다 싶을 만큼 속 편하다. 대화는 만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황당한 사건도 계속 일어나지만 배우(마네킹)들은 표정이 변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스틸사진같은 느낌도 들지만 가만 보면 나뭇잎이나 커튼 등 등장인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감독은 뻣뻣하기 그지없는 등장인물들을 가지고 희한한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낸다. 푸콘 가족의 외아들인 마이키의 발랑 까진 사촌 로라는 소꿉놀이를 한다면서 놀이터에 술집 비슷한 걸 만들어 돈을 갈취하고, 결혼기념일 에피소드에는 바람난 마이키 아빠의 불륜현장을 습격한 엄마의 발차기가 연출된다. 물론 이 때도 주인공들은 고정된 얼굴 표정으로 하하하 웃고 있다. 이처럼 소재의 분방함과, 이미지와 이야기의 연결성을 깨는 파격이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다. 두장의 디스크에 52개의 에피소드가 실렸다.

브리짓, 이제 우리 헤어져,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이제 우리 헤어져.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말하지마. 2년 전 네가 잘 나가는, 게다가 키 크고, 잘생기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변호사와 본격적인 연애질 시작을 선언했을 때 물론 나, 배 아팠어. 그래도 너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았었다고. 그때 우리의 슬로건이 뭐였는지 너도 잘 알 거야. 그냥 ‘결혼으로 일어서자’가 아니라 ‘한명이라도 결혼으로 일으켜세우자’였잖아. 친구 잘 둬서 호강해보자는 게 우리 ‘성숙(나이 많고!)하고 여유(시간 남아돌고!)있는 커리어우먼(그래도 직장은 있다고!) 연대’의 설립 취지였던 거 기억하지? 우리의 30평대 아파트 소유주에게 회원 시집보내기 운동에서 유일하게 성과를 거둔 너에게 우리는 모두 아픈 배를 의연히 견디며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고. 근데 너 브리짓. 어떻게 너 갈수록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아질 수 있니. 2년 동안 살 못 빼고 술, 담배 못 끊은 거야 그냥 그렇다치자. 거야 우리 중 아무도 해낸 사람이 없으니. 영계들과의 경쟁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으로 채택한 품위와 교양은 도대체 어디 해외출장이라도 간 거야? 영계들의 외모 경쟁력에 주눅들기 시작하면 스스로 용도폐기를 인정하는 바와 다름없다고 우리 얼마나 많은 밤을 손잡고 맹세했었니. 근데 뭐야. 고작 여자 인턴 사원의 등장에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기 시작하다니. 더 기분 나쁜 건 네가 생각했던 위기의 순간, 친구들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친구가 뭐니. 친구는 그런 경쟁자가 나타났을 때 본인 손에 피묻히지 않고 테러하는 데 써먹으라고 있는 거 아냐? 네가 진작 연락했으면 그 젊고 예쁜 지지배, 우리가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었는데 너는 최악의 길을 선택했더구나. 남자한테 약점이나 잡히는. 소중한 친구들은 완전 카메오 수준으로 밀어놓고 말이지. 애인 생겼다고 친구 버리는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걔네들이야 복구 가능한 시간이 남아 있잖아. 삼십대 중반에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네 말대로 나중에 반쯤 썩은 시체로 고양이한테 발견되기 딱 좋은 조건 된다고. 네가 연락 안 했다고 헤어지자고까지 말할 나, 아니야. 난 네 한심스러운 회사생활을 보면서 정말 결별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어디 가도 개무시당하고, 항상 상사, 동료 뒷담화로 시간보내면서도 한번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노력했던 너는 어디 갔니. 게다가 말끝마다 ‘남자친구, 인권변호사’를 붙이며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라는 남자 꼰대들의 손을 들어주는 네 모습은 우리에게 남아 있던 연대감을 완전히 끊어버렸어. 브리짓, 그래도 마크랑 잘돼서 결혼하길 바래. 잡은 봉 놓치지 않는 것도 훌륭한 미덕이야. 다만 결혼했다고 남편 바람, 애 교육 걱정하는 지리멸렬한 이야기 들고 다시 돌아오지는 말길 바래. 그러면 정말 미워할 거야. 안녕.

전화, 대화, 영화

첫눈이 사납게 내린 이튿날이었다. 출근길 택시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이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는 뉴스였다. 소식을 전한 진행자는 천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럼, 크레인 위에 계신 분들을 연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어어 잠깐, 진짜로? 정말이었다. “위원장님 안녕하세요?” “예, 수고하십니다.” “물은 남아 있나요?” “예, 아직은.” 농성 노동자들은 바람 찬 공중으로부터 휴대폰으로 지상에 안부를 전하고 있었다. 지나고보니 내가 둔감하게 살아온 탓이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전화의 발달에 영향을 받은 것이 어디 뉴스의 꼭지 구성뿐이겠나. 그러고보니 휴대폰이 나오고 전화의 기능이 다양해지면서 현대를 무대로 한 영화와 TV드라마도 알게 모르게 변모했다. 우선 우리는 혼자 걸어다니며 중얼거리고 군중 속에서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대화의 미장센은 참으로 다양해졌다.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이 걸어온 눅눅한 구애 전화를 벌레 밟듯 응대하는 김상경과 그 앞에 펼쳐진 경치 좋은 강변의 대조라니. 핸드폰이 없었다면 맛보지 못했을 미묘한 그림이다. 러브스토리와 미스터리를 비틀기 위해 극중 인물 사이의 연락을 두절하는 일은 예전에 비해 훨씬 복잡한 작업이 됐다. 당신이 멜로드라마나 스릴러의 작가라면 주인공을 산중에 고립시키거나 연인들을 갈라놓기 전에 일단 휴대폰을 분실하거나 배터리가 방전될 만한 핑계를 고안해야 할 것이다. 조지 클루니와 미셸 파이퍼의 휴대폰을 바꿔치기하는 아이디어의 로맨스 <어느 멋진 날>은 끝없이 움직이는 남녀의 통화만으로 스토리를 끌어간다(사실 두 스타의 일정 맞출 일이 줄어든 연출부가 제일 기뻐했을 성싶다). 이쯤은 기본 응용이고 메시지, 자동응답, 다자간 통화 등 플롯의 재료는 많은 영화를 도왔다. <슬라이딩 도어즈>에서 기네스 팰트로는 네 자리 숫자를 누르면 직전 통화번호로 연결되는 영국 텔레콤(BT) 특유의 과잉 서비스 덕택에 애인의 배신을 발견한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전화의 역할은 화면 구성과 플롯에 끼치는 영향 이상이다. 세상 속으로 흩어진 소녀들의 엇갈리는 다자간 통화는 화면분할과 결합해 그들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그린다. 스크린 위로 또박또박 흘러 대사 같기도 하고 미술 같기도 한 소녀들의 문자 메시지는 영화와 하나가 되어 반짝거린다. 기술은 발전할수록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고 투명해진다. 전화가 추구하는 궁극의 형태는 텔레파시일 것이다. 텔레파시가 무슨무슨 텔레콤 상표 아래 상용화되는 시대의 영화는 어떤 모습일지. 인물의 배치와 이야기의 얼개를 놓고 미래의 시나리오 작가들은 더 심한 두통에 시달리게 될까? 아니면 더 큰 가능성을 만끽할까? 플롯의 고충은 정작 걱정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텔레파시로 나와 남 사이의 ‘정당한’ 거리가 사라져버린 세계에서도, 극장은 우리가 타인의 인생을- 호기심 많은 교환원처럼- 잠깐 엿듣는 밀실로서 여전히 호객에 성공할 수 있을까? 김혜리 vermeer@cine21.com

2004년 국내 흥행순위 탑10은?

국내외 작품을 모두 통틀어 올해의 흥행 탑10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1, 2위는 너무 쉽다. 굳이 데이터를 뒤지지 않더라도 천만관객이 넘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가 1, 2위임은 당연지사. 올 2월초에 개봉했던 <태극기 휘날리며>는 첫주에 서울관객 30여만명, 전국관객 178만여명을 불러 모으며 최종 전국누계는 1,174만여명을 기록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해서 종영하기까지 세운 모든 수치는 단 한가지만 빼고 그대로 “한국영화사상 최초”의 기록이 되었다. 그럼 <태극기 휘날리며>도 깨지 못한 최초의 기록은? 바로 <실미도>가 세운 “한국영화사상 최초 천만관객 돌파”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조금 앞서 개봉한 <실미도>가 세운 최초 기록들을 모두 보란듯이 깼지만 최초 천만관객 돌파는 여전히 <실미도>의 몫이다. 참고로 <실미도>의 최종 전국누계는 1,108만여명. 1, 2위가 싱겁게 결정났다면 3위는 어떤 작품일까. 3위는 알짜배기 흥행을 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에게 돌아갔다. <트로이>의 흥행성적은 전국 380만명. 경쟁작이 많은 여름 성수기 개봉을 피하고 5월말에 개봉했던 <트로이>는 극장가가 여름 시즌에 돌입하기 전까지 쏠쏠한 재미를 봤다. 4위는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슈렉2>로 전국 32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슈렉2>는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대박을 냈는데 참고로 미국의 경우에는 역대 흥행순위 3위에 올라가 있다. 5위는 모두 놀란 깜짝 흥행을 한 문근영의 <어린 신부>로 최종누계는 315만명이다. 철저한 기획영화 <어린 신부>가 대박나자 <여고생 시집가기>, <제니, 주노> 등 비슷한 아류작들이 충무로에 양산되기도 했다. 바로 뒤를 이은 6위는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라는 인상깊은 대사를 남겼던 <말죽거리 잔혹사>가 차지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전국 301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큰 성공을 거뒀고 유하 감독의 연출과 권상우의 연기도 깔끔했다는 평을 받았지만 연말의 상복은 별로 없었다. 7위는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 <투모로우>(295만명), 8위는 추석 극장가를 휩쓸었던 김상진 감독의 <귀신이 산다>(288만명), 9위는 가을 극장가에 멜로 열풍을 몰고 온 <내 머리속의 지우개>(255만명), 그리고 10위는 상반기 히트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52만명)가 각각 차지했다. 올해 국내에서 흥행한 탑10의 목록을 살펴보면 한국영화가 6편, 외국영화가 4편이었으며 전쟁, 액션, 코미디, 멜로, 애니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 성공을 거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름 성수기에 개봉했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인 <아이, 로봇>, <스파이더맨2>, <반헬싱>, <해리포터3> 등이 한 작품도 탑10에 들지 못했다는 것인데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서 서로 관객을 나눠 가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작품들의 최종 전국누계는 서로 비슷한 200만 정도. 개봉시기와 배급전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이밖에 기억에 남을만한 한국영화 흥행작은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늑대의 유혹>, <바람의 파이터>, <알 포인트> 등이 있었다. 국내 흥행순위 탑10(전국관객기준) 1. 태극기 휘날리며 1천174만명 2. 실미도 1천108만명 3. 트로이 380만명 4. 슈렉2 324만명 5. 어린 신부315만명 6. 말죽거리 잔혹사 301만명 7. 투모로우 295만명 8. 귀신이 산다 288만명 9. 내 머리 속의 지우개 255만명 10.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252만명

타임머신

요즘 과일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나온다. 딸기나 참외 같은 것들을 한겨울 동네 슈퍼에서도 흔히 구할 수 있으니, 거기서 예전 같은 감동을 느낄 이유가 없어졌다. 야채는 비닐하우스에서 사시사철 생산되고 과일들은 냉장 창고에 보존된다. 도시 외곽과 농촌의 풍경을 점점 더 낯설게 만드는 이 두 종류의 집은, 시간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타임머신이라 할 수 있다. 공상과학영화의 그것처럼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시간의 흐름에 개입하여 식물의 생장과 소멸에 관여하는 계절의 자연적인 순환을 임의로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간 기계’인 것이다. 일년 내내 인공적인 여름 아니면 겨울이 계속되는 그곳에서 계절이라는 말은 무의미해지고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한겨울에 우리가 무심코 집어드는 여름 과일들은 ‘다른 시간’으로부터 우리에게로 건너온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미지의 세계이다. 밤이 오고 다시 날이 밝는 것을 보고, 아이가 자라고 사람이 늙는 것을 보지만,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시간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한 짓(더러는 베풀어준 은총)의 흔적일 뿐이다. 그것이 끊임없이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그 도도한 흐름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무력한 희생자이며 관객에 불과하다. 우리가 거기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간을 통해서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공격하기 위해 또는 시간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는 시간의 강을 우회하여 공간을 이용한다. 돌을 깎아 기념비를 세우고 타임캡슐을 묻고 거대한 박물관을 짓는다. 박물관 건축이 요새처럼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목적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원래 시간과의 전쟁을 위한 방어진지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도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비닐하우스는 가짜 여름을 만든다.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특정한 온도와 습도에 의해 여름이 그대로 재현되고 지속된다. 햇빛과 열기는 받아들이되 고속성장에 방해가 되는 비와 바람과 밤이슬은 차단된다. 그 안에서 식물은 고단위로 압축된 시간, 영원히 계속되는 여름을 경험한다.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밟을 때처럼 시간이 빨리 간다. 반면에 냉장 창고는 ‘겨울의 집’이다. 그것은 저수지의 둑처럼 시간을 가두어 흐르지 못하게 함으로써 식물의 부패와 소멸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연장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숙명적인 부패의 속도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그것이 갓 수확되었을 때의 상태를 유지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겨울. 그 안에서 식물은 죽음과 삶 사이, 죽음도 아니고 삶도 아닌 시간을 겪어야 한다. 여기서 신선함이란 오래 지속되는 죽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쪽은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공장이고, 다른 한쪽은 성장이 완료된 열매가 썩어서 다시 씨앗을 틔우게 하는 자연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공장이다. 한쪽은 휴식없는 성장을, 다른 한쪽은 변화없는 휴식, 영원한 가사상태를 무한정으로 연장한다. 한쪽은 삶이, 다른 한쪽은 죽음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식물은 속는다. 혹은 속아준다. 가짜 여름을 여름이라고 믿는다. 돼지나 닭이 종족보존을 위해 양돈장이나 양계장에서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여기서 식물은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식물에 대한 이 성공적인 사기극으로 인해서 우리도 잃어버린 것이 있다.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 결핍을 참고 견디는 인내와 체념, 기다리던 것이 조금씩 다가올 때의 설렘, 그리고 오랜 기다림과 목마름의 대상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을 때의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은 사라져버렸다. 요즘 과일 맛, 음식들의 맛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글·드로잉 안규철/ 미술가

10가지 열쇠말로 돌아본 2004 방송계

안방극장은 올 한해도 한국인들의 가장 가까운 쉼터였다. 팍팍한 일상에 치인 시민들은 하루 평균 3시간씩 티브이에 눈과 귀를 맡겼다. 수많은 프로그램과 연예스타, 방송인들이 안방극장을 명멸했고, 가장 압도적인 장르인 드라마를 중심으로 숱한 뉴스가 양산됐다. 일본 열도의 열기를 흡수하며 태풍으로 번진 ‘한류 열풍’ 속에 방송 콘텐츠 생산과 유통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뒤안의 각축 또한 어느 때보다 거셌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소추’ 사태는 방송을 시민정치의 한가운데 서게 했다. 콘텐츠와 관련한 방송계의 주요 뉴스를 10개의 열쇠말로 정리해 본다. 드라마 ‘캔디+신데렐라’ 열풍 캔디렐라=올 한해 정규 프로그램 시청률 10강은 모두 드라마가 차지했다. 그 드라마를 이끈 핵심 모티프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였다. ‘왕자’를 욕망하는 신데렐라들은 게다가 한결같이 ‘캔디’였다. 장기불황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고픈, 그러면서도 ‘왕자’ 앞에서 심리적으로 당당하고 싶은 시청층의 욕구를 반영한 결과였다. 최고 시청률 56.3%를 기록한 <파리의 연인>은 그 정점을 찍으며, ‘캔디렐라’로 불리는 사회적 신드롬을 창출했다. 이런 물결을 거스르는 <장길산>과 <영웅시대> 등의 고답적 시대극은 부진에 시달렸다. <아일랜드> <단팥빵> <반올림> 등은 낮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마니아층을 결집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류, 일본열도마저 휩쓸다 욘사마=드라마의 힘은 나라 밖에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한류 드라마는 중국과 동남아를 돌아 마침내 일본 열도마저 휩쓸었다. <엔에이치케이>를 통해 <겨울연가>가 방영된 이래 한국 드라마의 낭만적 감수성은 일본 중·장년층의 심금을 울리며 한류 열기의 도약을 이끌었다. <겨울연가>의 드라마적 매력에서 시작된 일본 내 한류 바람은 나아가 ‘욘사마’ 배용준을 필두로 한 한류 스타 개인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팬덤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류스타를 내세워 처음부터 해외 수출을 겨냥한 드라마의 사전전작이 시도되는 등 드라마 제작과 유통 환경에도 급격한 변화가 일고 있다. 연예기획사와 독립제작사가 공동제작에 나선 <슬픈 연가>는 제작완료 전에 48억원에 해외시장에 팔렸다. 방송사가 주도하던 드라마 제작에 스타파워를 앞세운 연예기획사와 외주제작사의 입김이 거세질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진다. 병역비리 연예계를 울리고 병풍=차기 한류스타로 손꼽히는 송승헌의 병역 비리 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부 운동선수들의 신장 질환을 이용한 병역 면제 비리가 드러나면서, 송승헌을 비롯해 장혁, 한재석 등 남자 연예인들한테도 그 불똥이 튀었다. 드라마 <해신> 출연을 예정하고 있던 한재석은 방송사쪽의 발빠른 대응으로 큰 무리 없이 입대절차를 밟았으나, 송승헌의 경우 드라마 <슬픈 연가> 출연을 둘러싸고 긴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의원까지 가담해 드라마 촬영 뒤 군에 입대하도록 힘을 실어줬으나, 오히려 더 큰 역풍을 맞고 지난달 16일 현역 복무를 시작했다. 방송계 일각에서 공공연히 돌던 불법적인 병역 면제 수법 등이 완전히 퇴출되는 계기가 돼, 내년엔 원빈, 소지섭 등 많은 남자 배우들이 군 복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스타 복귀·변신 줄이어 고현정=드라마 붐 속, 왕년의 스타가 컴백하는 한편 음반 시장 불황에 따라 연기자로 변신하는 가수들도 대거 등장했다. 고현정은 내년 초 방송될 드라마 <봄날>을 통해 연예계 복귀를 선언했다. 지난 1995년 <모래시계>를 끝으로 재벌3세와 결혼하면서 연예계를 떠났다. 지난해 11월 이혼의 아픔을 겪은 지 1년 만에 티브이 드라마를 통한 연예계 복귀를 선언했고, 여러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했다. 가수들도 방송 드라마를 통한 연기자 변신에 힘쓴 한 해였다. 철저한 준비 끝에 성공적인 변신에 이른 이들이 있는 반면, 너도나도 연기자 변신 행렬에 끼어 쓴 맛을 본 이들도 있었다. 전자가 비, 유진 등이었다면, 후자는 박정아, 성유리였다. 가수들이 이처럼 연기에 열을 올린 것은 가요시장의 전반적 침체가 주요한 이유였다는 분석이다. 코미디, 경제불황 타고 ‘활짝’ 스탠드업=웃음이 많이 고픈 한 해였던가보다. 덕분에 코미디 프로가 크게 떴다. 다시 코미디의 시대가 온다는 말도 떠돈다. 수년간 차근차근 준비해온 <개그콘서트>에 이어, <폭소클럽>과 <웃찾사>가 어렵게 살림 사는 이들을 웃겼다. 특징은 우리 입맛에 맞게 변형된 스탠드업 코미디가 새로운 웃음을 선사했다는 것. 콩트보다 훨씬 간결하면서 강렬한 짧은 형식의 코미디가 시청자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갔다. 긴 시간 웃음에 목말라온 시청자들은 작고 짧은 자극에도 폭소를 터뜨렸다. 블랑카, 화니와 지니, 안어벙, 리마리오, 윤택 등 새 코미디 스타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장님 나빠요” “그때 그때 달라요” “쌩뚱맞죠” “뭐야” “마데 전자” 등 촌철살인의 맛 깊은 유행어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오락물 하향평준화를 막아라 !느낌표=연예인들의 잡담이 밤 시간대 텔레비전을 점령했다. 방송사를 가리지 않았다.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나와 판에 박은 듯한 수다로 밤을 지새웠다. <야심만만> <해피투게더> <상상플러스> <놀러와> <아이엠> <즐겨찾기> 등 제목도 채널도 달랐지만, 쌍둥이처럼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 서로 베끼고 닮아가며 하향 평준화의 길에 앞다퉈 줄섰다. 에스비에스가 주도하는 다툼이었다. 신동엽, 유재석, 강호동 등 나오는 이들도 겹치기로 바빴을 터다. 특정 연예인 의존도는 끝없이 커지고 있다. 시청률 경쟁 와중에 성우 장정진씨가 숨지는 참극도 빚어졌다. 막판에 가 7개월만에 다시 등장했다. ‘눈을 떠요’ 등 새로운 꼭지를 들고 나와 신선한 바람몰이를 이어가고 있다. <비타민> <스펀지> 등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도 적잖이 성공하면서 오락프로의 하향 평준화를 저지하고 있다. 중복중계 논란…채널선택권 위축 판박이=방송사의 연말 각종 시상식에 대한 폐지 요구가 잇따랐다. 이달초 연예기획사들 모임인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연제협)가 연말 가요시상식 폐지를 요구하며 불참을 선언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도 자사 이기주의에 따라 진행되는 각종 시상식의 폐지를 요구했다. 서로 다를 바 없는 시상식들이 각 방송사에 대한 기여도와 이해관계에 따라 나눠먹기식으로 진행된다는 지적이다. 이런 방송사간 담합성 경쟁에 대한 비판은 지난 8월 올림픽 중계방송에서도 불거졌다. 방송위원회의 분석 결과, 지상파 3사가 동시에 같은 경기를 중계한 시간은 하루 3시간 12분에 이르렀고, 2개 채널 이상 중복 중계시간도 하루 4시간30분을 넘었다. 그것도 일부 인기 종목에만 집중된 것이었다.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은 크게 제약됐다. 시사프로, 정치공세에 휘말려 탄핵=시사물과 보도·미디어비평 프로그램 등은 거센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초유의 사태를 공론장으로 끌어들인 방송계의 시도는 ‘편파방송’이라는 야당과 보수신문의 시비에 시달렸다. 한국방송의 14시간 탄핵 생방송과 문화방송 <신강균의 사실은> 등 탄핵 관련 프로그램들은 방송위원회의 심의대상에 올라, 첨예한 논란을 불렀다. 탄핵방송이 ‘불공정’했다는 언론학회 보고서가 작성자의 정치적 성향과 조사방법의 객관성을 둘러싼 신뢰성 논란으로 번져간 가운데, 방송위는 뒤늦게 탄핵방송 전반은 심의대상이 될 수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하반기 정기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야당은 <미디어포커스>와 <시사투나잇> 등이 ‘불공정’하다며 정치공세를 폈다.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는 자사 뉴스를 통해 국감에서 제기된 상대방의 의혹을 집중제기하는 ‘보도전쟁’을 펼쳐 ‘방송 사유화’ 논란을 일으켰다. 문화방송 ‘뉴스 보수화’ 논란도 연말 방송가를 달군 화두의 하나다. 다큐 ‘봇물’ …다큐폐인 등장 다큐 페스티벌=9월초 일주일 동안 다큐멘터리만을 종일 방영한 ‘제1회 이비에스 국제다큐페스티벌’은 “방송계를 일주일 동안 공황으로 몰아넣었다”. 99편의 세계 각 나라 작품들이 안방극장을 찾았고, ‘다큐폐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출품작인 <금지된 축구단>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방영중지 요청과 대상 수상자인 중국 다큐멘터리스트의 시상식 불참 소동, 통일부의 다큐 내용 일부 삭제 요청 등 잡음이 없잖았음에도, 다큐의 의미와 재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 대담한 기획으로 평가된다. 뒤이어 한국방송이 3년 기획 끝에 내놓은 문명사 다큐 <도자기>와 문화방송의 창사 특집 <빙하> <중동> 등도 독자적 시각과 빼어난 영상 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문화방송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에스비에스 <환경의 역습> 등도 새로운 문제 제기와 높은 성취도로 호응을 끌어냈다. 한국방송 시사다큐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지난 10월30일 출범 1년여만에 퇴장해 아쉬움을 남겼다. 케이블 자체제작영화 첫탄생 동상이몽=불황 여파로 방송산업도 전반적인 침체를 기록했으나, 케이블티브이 쪽만은 예외였다. 케이블과 위성방송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채널사업자(피피)들은 광고수주에서도 증가세를 이어갔다. 이를 기반으로 대형 복수채널사업자(엠피피)들은 자체 제작의 첫 걸음을 뗐다. 온미디어의 영화채널 <오시엔>은 15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국내 첫 티브이영화 <동상이몽> 6부작을 제작·방영했다. <동상이몽>은 닐슨미디어리서치 집계에서 98개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중 1위에 오르는 등 흥행에도 성공했다. 씨제이미디어 계열의 <엠넷>도 이달 말 가수 백지영이 출연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자체제작해 내년 초 방영할 계획이다. 그러나 인기 개그맨 신동엽이 <엠넷>의 <슈퍼바이브파티> 엠시를 맡기로 했다 1회만에 그만 두는 등 지상파에 맞선 자체제작의 한계 또한 뚜렷했다. 한겨레 손원제, 김진철 기자

못생기면 어떻고 폼 안 나면 어떠냐, <신석기 블루스>

‘뚜껑이 열리는 자동차’라고도 부르는 컨버터블. 그간 할리우드영화 속 잘 나가는 주인공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폼나는 차다. 그리고 여기, 머리카락을 맞바람에 맡긴 채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폼나게 질주하는 이 사람. 그는 당연히 웬만한 외모와 재력, 능력과 자신감을 겸비해야 하고, ‘쭉쭉빵빵’한 동승인까지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야말로 폼, 나는 광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누군가 무식하게(?) 반문한다.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그런 지붕없는 자동차를 타는 건, 매캐한 매연 속을 달리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냐고. 머리카락이 온통 바람에 엉켜버리는 바람에 정신도 차릴 수 없을 거라고. 그러느니 안전하고 경제적이며 실속있는 경차를 택하겠다는 호언장담까지. 이것은 폼생폼사, 명품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던지는, <신석기 블루스>의 일갈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동명이인의 신석기를 대비시킨다. 웬만해선 같을 수 없는 이름에 변호사라는 직업, 생일까지 똑같은 두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대차대조표가 제격이다. 일단, 킹카버전 신석기(이종혁). 최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러닝머신과 신선한 녹즙, 최신 금융소식으로 하루를 여는 그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색의 셔츠들이 꽉 들어찬 옷장 속에서 명품 양복을 꺼내 입고, 폼나는 컨버터블을 타고, 대기업 법무팀으로 출근한다. 그리고 얼꽝버전 신석기(이성재).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닭울음 소리를 내는 고물 자명종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과민성 설사와 천식흡입기를 달고 산다. 상가건물 한 귀퉁이에 위치한 후줄근한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의 교통수단은 자전거. 이렇듯 평생 가야 서로의 인생에 절대 영향을 끼치지 않을 듯 보이는 두 사내가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 나란히 선다. 불의의 사고로 둘의 영혼은 뒤바뀌고, 얼꽝 신석기의 육체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킹카의 영혼을 지녔으되 폭탄의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신석기의 모험담은, 이제부터다. 대형 기업의 M&A를 멋지게 성사시켰던 과거는, 잡스런 국선 변호용 서류 속에 흔적도 없다. 분위기 있는 재즈바에서 트럼펫을 연주하면서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생생하건만 지금의 “개미 같은” 체력으로는 트럼펫의 (삑사리가 아닌) 삑소리도 어림없다. 그러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던 신석기는 점차 삼류인생의 진가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과거 하룻밤 놀이상대로 취급했던 안내데스크 직원 서진영(김현주)에게 얼마나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되고, 골치아픈 국선변호를 안겨주던 상가 부흥회 주민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모아 자신을 돕는 순간에는 구질구질한 이 인생의 묘미를 발견한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이 결국은 껍데기에 불과함을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은, 성실하게 깔아두었던 복선들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여기에 아무 생각없이 웃고 즐길 수 있는 (그야말로!) 화장실 유머와 초반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간 주변 캐릭터들이 구사하는 코믹한 상황, 그럴듯한 첩보영화 속 익숙한 장면에 대한 재기발랄한 패러디 등이 덧붙여진다. “이처럼 한심한 인생이 어딨냐”면서 푸념하던 신석기가 진실에 눈을 뜨는 그 순간. 관객 역시 도무지 눈에 익을 것 같지 않았던 이성재의 외모변신에 적응하고,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던 신석기의 과민성 설사병 증상에 정을 붙인다. 부지불식간에 <신석기 블루스>의 결론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앞서 열거한 확연한 대차대조표를 통해 두 신석기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은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각각의 신석기가 끌어안아야 할 다양하고 입체적이며 한편으로 평범한 우리네 삶과의 괴리 때문이다. 따라서 잘 나가는 신석기의 일상은 모 아파트 CF 속 모델의 그것처럼 막연하고, 못 나가는 신석기를 둘러싼 모든 것들 역시 지나친 희화화에 의존해 현실성을 가지지 못한다. 이는 진영의 경우도 마찬가지. 요양원에서 투병 중인 장애인 어머니(김청)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진영의 캐릭터는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진영 역시 일류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라는 김현주의 해석이 무색하다. 신석기가 과거를 뉘우치거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 자연스런 이입을 방해하는 과잉된 음악과 연출도 문제다. 그럴듯함에 집착할 뿐 정작 실속은 없지 않냐는 컨버터블에 대한 일침,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주제를 풀어나가는 이 영화의 방식이, 또 하나의 형식적이고 막연한 ‘그럴듯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결국 비열한 인간의 뒤늦은 성장기는 다소간의 아쉬움 속에 끝을 맺는다. 영화가 제시하는 나름대로 신선한 결말도, 피할 수 있었던 진부함으로 인해 일종의 ‘제스처’에 그친다. <신석기 블루스>가 모처럼 착실하게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상업영화임을 생각하면, 이는 더욱 안타깝다. ::영혼 혹은 육체의 변화를 겪게 되는 영화 속 주인공들 앗, 내 몸이 바뀌었어요 두명의 신석기는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연히 사고를 당하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영혼이 뒤바뀐다. “어떤 인생이라도 선택할 수 있었던” 최고의 엘리트 신석기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변두리 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는,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이 삼류인생이 그처럼 한심하지 않음을, 오히려 자신이 전부인 줄 알았던 일류인생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처럼 주인공이 겪게 되는 극적인 육체의 변화는 할리우드영화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설정. 초현실적인 변화의 양상이나 결과는 모두 다르지만, 주인공이 일종의 역지사지를 경험하거나 미처 몰랐던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동일하다. 물론 마지막에 우리의 주인공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이러한 영화에서 긴장감을 더해주는 요소.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 주인공이 원상복귀에 성공하는 할리우드식 결말과 <신석기 블루스>의 결말을 비교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수많은 여자를 울렸던 바람둥이 스티브가 여자로 다시 태어나 그간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확인하는 <스위치>(1991)는, 입장바꾸기를 통해 득도에 성공하는 대표적인 영화. 지극한 남성우월주의자가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는 길은 육체가 변하는 길뿐인가. <왓 위민 원트>(2001)는 여자들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읽을 수만 있어도 된다고 말한다. 우연한 사고 이후, 여자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게 된 닉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여자들을 바라봤던 그 잣대 그대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들의 시선이었다. 이처럼 성(性)의 전환은 언제나 민감한 대립항을 통해 관객의 관심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성전환 못지않게 흥미로운 소재는, 바로 ‘나이’. 어서 빨리 나이를 먹고 좋아하는 누나와 데이트를 하고 싶었던 13살 소년 조슈의 기이한 성장담을 다룬 <빅>(1988)은, 야비한 어른들의 세계에 상처받은 주인공이 유년기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끝맺는다. 최근 개봉했던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2004)은, 지옥 같은 사춘기를 벗어나고 싶었던 제나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소원 그대로 서른이 된 이후를 그린다. 제나는 결국 그 지긋지긋했던 시절, 자신의 곁에 있어줬던 친구와 자신이 혐오했던 그 시절 모두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위치> <왓 위민 원트>가 죽음, 헤어드라이기 감전 등을 변화의 계기로 삼았다면, <빅>과 <완벽한 그녀…>는 같은 초현실이라도 조금 더 마법 같은 설정에 의지한다. 놀이공원의 소원을 비는 기계 졸타와 단짝 친구로부터 받은 생일선물에 뿌려진, 소원을 들어주는 가루가 그것. <신석기 블루스>의 경우 신석기가 심심풀이로 운을 점쳤던 ‘운세재떨이’가, 엘리베이터 사고와 함께 신비감을 더해주는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