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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1]

미야자키 하야오의 9번째 장편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18살 소녀 소피가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90살 노파로 변하고, 젊은 마법사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청소부로 취직하면서 시작된다. 소피, 마법사 견습생 마르클과 저주에 걸린 허수아비, 불의 악마 캘시퍼로 구성된 대안가족은 괴조(怪鳥)로 변신해 전쟁터에 뛰어들어야 하는 ‘집주인’ 하울의 운명에 얽혀들고, 그 운명론적 모험 속에서 소피는 90살의 지혜를 익히며 성숙해간다. 이것은 언뜻 익숙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험담이다. 하지만 그 모험담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듯도 하다. 주인공들은 이제 종종 변덕을 부리거나 우울해하고, 마법의 힘으로 외모를 바꾸거나 세상을 움직이려 들며, 그들을 품고 가는 이야기는 가끔 엉뚱한 곳으로 새어나가버린 다음 느긋하게 한참을 머물다가 본궤도로 돌아온다. 미야자키는 이제 “살아라!”(<모노노케 히메>)라고 부르짖지도 않고 “네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살라”(<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며 교훈을 던져주지도 않는다. 대신에 “이제는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라고 간접적으로, 혹은 “사랑한다”며 상대를 향해 돌진하기도 하고, “나이가 드니 영악해진다”며 슬그머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거나 “마음은 원래 무거운 것”이라고 말해놓고도 잠시 뒤에 “원래 사람 마음은 언제나 변하니까”라며 변덕을 부린다. 미야자키의 영화들에서 전통적인 이야기 구조는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으며, 주제의식은 조금씩 무게를 덜어가는 듯하다. <하울의…>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영감님의 베갯머리 동화처럼 편안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모든 것을 온전히 지녔으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창문 역시 조심스레 열어 보이는 <하울의…>에 담긴, A부터 Z까지 2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의 흔적들을 되살펴본다. Alice in Wonderland(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마찬가지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한 소녀가 마법에 걸려 낯선 장소로 떨어져 내린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식 플롯 구조를 지니고 있다. 권선징악의 결말이 없이 소녀의 꿈을 꾸는 듯한 모험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루이스 캐럴의 은유로 가득 찬 세계의 영향력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주변 캐릭터들에서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를 읽어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전작 <센과 치히로…>의 캐릭터들은 ‘하트의 여왕=유바바, 공작부인의 돼지로 변한 아들=돼지로 변한 유바바의 아들’로서 대구를 이루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빠져나온 듯한 개구리 시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Beldame(노파, 못된 노파, 마귀할멈, 할머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아버지의 존재가 없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하울의…>에서는 아버지가 이미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고, 나우시카의 아버지는 도중에 군대에 목숨을 잃게 되며, 그외의 작품들에서도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있더라도 주인공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를 대체하는 것은 어머니상이거나 그보다도 더 빈번하게 등장하는 할머니상이다. <하울의…>에서 90살 노파로 변해버린 소피는 꼬마 견습생 마르클과 하울의 대체 어머니 역할을 수행하고, <천공의…>의 해적대장 도라나 <센과 치히로…>의 마녀 자매는 주인공을 강하게 성장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미야자키가 그려내는 세계관(자연이 모성이며 여성의 근원적 힘이 세계와 남성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Castle(성) <하울의…>에서 가장 압도적인 스펙터클은 ‘움직이는 성’ 그 자체다. 마치 군함을 해체해 재조립한 듯한 외양에 증기를 뿜어내며 네 다리로 걸어다니는 이 괴물은 다이애나 윈 존스가 글로 이미지화했던 미끈한 유럽식 성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의 필모그래피에서 성(城)이라는 제목이 직접적으로 인용된 영화만도 본작을 포함해 <루팡 3세-카리오스트로성의 비밀> <천공의 성 라퓨타>까지 세 번째이며, 성체가 등장하는 영화들(<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 혹은 <센과 치히로…>에서 유바바의 온천여관 ‘아부라야’)을 포함한다면 전체 필모그래피의 절반을 넘어선다. Disney(디즈니) <모노노케 히메>부터 지브리는 미국 배급권을 디즈니에 이양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의 계약일 뿐 지브리는 여전히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상태이며 합작 애니메이션 제작의 계획은 전무하다. “디즈니는 부모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고, 미야자키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뫼비우스, 프랑스 만화가) Ecologism(생태주의) “나는 생태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울의…>에서도 자연은 전쟁의 화염으로 가득한 문명에 대비되는 메타포를 지니지만, 생태주의라 일컬을 만한 미야자키의 목소리가 가장 두드러졌던 작품은 아마도 <모노노케 히메>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죽어버렸으면’을 외치며 파멸로 치닫는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신세기 에반게리온> <최종병기 그녀>)의 급진적 생태주의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혁명이나 문화적 패러다임 교체만이 파멸로부터 지구를 구한다고 믿는 급진적 생태주의와 달리 미야자키의 생태주의는 문명과 자연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生きる)는 조언을 던지기 때문이다.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2]

20세기 초 SF 화가들의 일러스트레이션. 지브리는 19~20세기 초에 서구인들이 상상했던 비행도구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는다. Flight(비행)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대한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비행의 쾌감’이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날틀과 추락에 대한 두려움 없이 비상하고 하강하는 역동감을 즐기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하야오의 작품들을 대변하는 이미지다. 다만 <센과 치히로…>에서는 <바람계곡의…>나 <천공의…>의 날틀이나 <마녀배달부 키키>의 빗자루 등 인간을 태울 만한 도구없이 용(하쿠)에 의해 비행이 행해지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변모했고, <하울의…>에서 괴조(怪鳥)로 변신해 날아다니는 하울의 모습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다만 <하울의…>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아 매너리즘에 빠진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천공의…>나 <바람계곡의…>에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비행함선들이나 2인용 날틀이 익숙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브리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SF나 판타지 작가들이 상상했던 비행도구들의 모습을 수집해서 그것으로부터 수많은 비행도구들의 디자인을 창조하고 모아두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irl(소녀)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의 주인공은 언제나 소녀다. 강하고 정의로운 소년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소녀가 쥐고 있는 열쇠를 푸는 데 필요한 조연에 머무른다. <하울의…>의 주인공 소피는 독립적이고 인기있는 여동생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고, 삶에 대한 도전적인 의지가 없는 소녀로서 첫 등장한다. 하지만 90살 노파로 변하는 저주를 받고나서는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와 감정의 표현방식에서 점점 대범해진다. <천공의…>의 시타, <미래소년 코난>의 나나, <바람계곡의…>의 나우시카, <모노노케 히메>의 산,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는 모두 소년(남자)들의 철없는 생명력을 다스리며 그들의 성장을 진두지휘하는 독립적인 캐릭터로서의 힘을 얻는다. 특히 남자들을 구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능력은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녀배달부 키키>에서도 키키는 사춘기의 정체성 혼란에 빠져 날아다니는 법을 잊어버리지만 남자친구인 톰보가 위기에 처하자 비행능력을 되찾는다. “나는 내가 날아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 이제 내 자신을 돌아보고나니까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알겠어.” Hisaishi Joe(히사이시 조) 히사이시 조는 <바람계곡의…>부터 <하울의…>까지 미야자키 영화들의 스코어를 모두 담당한, 미야자키 세계를 이야기할 때 떼어놓을 수 없는 음악가. <하울의…>에서 그는 상당수의 메인 테마를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유럽풍 도시들에 걸맞은 왈츠풍으로 작곡해냈다. 전작들만큼 귀에 강렬한 진운을 남기는 맛은 없지만, 영화에 알맞은 ‘동화적’인 스코어로서 미야자키 세계를 적절하게 그려낸다. Inanimate matter(무생물) <하울의…>에서 2개의 주요 캐릭터인 캘시퍼(불)과 무대가리(허수아비)는 무생물이다. 미야자키의 전작들에서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에 공히 등장하는 스스와타리(숯검댕이 정령)을 제외한다면, 무생물의 의인화되어 등장했던 예는 없었다.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에 있던 캐릭터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하울의…>는 미야자키의 이전 작들과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만물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토착 신앙의 믿음을 품고 있는 미야자키의 전반적인 작품세계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Japan(일본) “나는 일본인만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해외 어느 나라에서 공개된다 하더라도 영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미야자키 하야오) Kimura Takuya(기무라 다쿠야)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다쿠야가 <하울의…>의 남자주인공 ‘하울’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그는 처음으로 지브리가 고용한 ‘스타’ 배우 출신의 아마추어 성우다. Love Story(사랑) 홍보문구처럼 <하울의…>가 ‘러브스토리’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만한 작품은 아니다. 여전히 미야자키는 조금이라도 섹슈얼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울이 소피에게 “이제 지켜야 할 것이 생겼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려고 들거나, 소피가 “사랑한다”라고 고백하며 하울에게 키스를 보내는 것은, 분명히 이전 미야자키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이다. Move away, Move out(이사: 移徙) 미야자키 작품에서 ‘이사’라는 것은 일상에서 판타지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쓰키와 메이는 어머니의 요양을 위해 시골로 이사하고, <센과 치히로…>의 치히로는 이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소녀다. <마녀배달부 키키>에서 키키는 마녀실습을 위해 인간세계로 이사한다. <하울의…>에서 소피가 직접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저주를 받은 순간부터가 아니라 ‘하울의 성’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면서부터다. 새로운 장소와 세계 속으로 몸을 옮기는 것에서 미야자키의 세계는 문을 여는 것이다. 이사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공간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소로 심리적인 보금자리를 옮긴다는 막중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하울의…>에서는 ‘마법’이라는 도구가 있으므로 그 의미가 옅어지기는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처럼 일상적인 세계로 시작하는 작품들에서는, 일상적인 인간활동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벌어지는 일은 아닌 ‘이사’라는 것이 일상세계와 판타지 세계를 연결해주는 설득력 있는 도구로 보여진다. Naturalism(자연주의) “살다보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빛에 주목하게 된다. 또한 이것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다보면 어느새 자연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 아니겠는가? 또한 이 점은 <바람계곡의…>로부터 계속해서 내 작업 흐름의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미야자키 하야오) Original Work(원작) <하울의…>는 <마녀배달부 키키> 이후 15년 만에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야자키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미야자키는 다이애나 윈 존스의 원작으로부터 움직이는 성과 캐릭터들만 가져와 완전히 재창조했다. 영국식의 드라이한 유머감각을 대신한 것은 미야자키 특유의 캐릭터들(특히 원작에서 자멸하는 황야의 마녀를 미야자키는 보통의 ‘할머니’로 만들어서 또 다른 성격을 부여했고, 대마법사인 설리만은 여자로 재창조되었다)과 좀더 직접적인 반전의 메시지 등이다. “나는 오랫동안 미야자키의 팬이었어요. 그는 이야기의 리듬과 힘을 잃지 않고서도 세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거든요. 그런 사람의 영화에 간섭하거나 조바심을 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지요.”(다이애나 윈 존스) Pet(애완동물) 다른 미야자키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하울의…>에도 늙은 개 ‘힌’을 비롯해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작은 애완동물들이 등장한다. 소소한 유머를 던져주는 극적 장치이지만 미야자키 작품들에서 특이한 점이라면, 작은 동물 캐릭터들이 처음부터 그리 귀엽게 굴거나 주인공에게 친근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람계곡의…>에서 작은 여우다람쥐는 나우시카의 손가락을 깨물고 나서야 가까워지며, <센과 치히로…>의 작은 돼지는 원래 유바바의 아들로서 치히로의 생명을 위협하던 존재였다. <하울의…>의 ‘힌’ 역시 비슷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3]

Quest(탐색여행, 원정) 미야자키 작품들이 ‘탈일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일본적인 롤 플레잉 게임의 전형(주인공이 길을 떠나 한명한명 새로운 캐릭터들을 만나면서 목적을 향해 여행하거나 모험을 겪는 것)이 드리워져 있다. 이것은 하나의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는 공동체적인 주인공의 경험을 중시하는 미야자키의 세계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Retirement(은퇴)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노노케 히메>를 감독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 이야기했고, <센과 치히로…> 역시 미야자키의 은퇴작으로 홍보되었다. 이에 대해 방한한 스즈키 도시오 PD(사진)는 “미야자키 감독은 ‘대체 관객이 얼마나 와줄 것인가’ 하는 기분으로 매 작품이 개봉할 때마다 ‘은퇴할 작정’이라고 말하지만, 손님이 많이 들게 되면 그런 겸허한 기분은 다 사라지고 다시 열심히 다음 작품을 준비하게 된다”고 웃으며 설명했다. Steam Punk(스팀 펑크) 스팀 펑크는 SF의 서브 장르로서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과학기술이 발달한 19세기를 무대로 하는 대체역사 장르다. 특히 스팀 펑크는 일본의 SF문학이나 게임시장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은데, 이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완벽하게 다른 방식의 사조와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전하기 시작했던 ‘근대’라는 세계에 대한 향수를 크게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미야자키 영화들 역시 ‘증기기관’을 위주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한 20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울의…>에서는 이것이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지만, 거대한 연통으로 연기를 뿜으며 걸어다니는 하울의 성의 외양은 증기기관의 그것과 흡사하다. Transformation(변신, 변태) <하울의…>에서 주요인물들은 모두 신체의 변형을 겪는다. 하울의 마법사 견습생 마르클은 노인의 모습으로 시시각각 변신하고, 거대한 몸집의 황무지 마녀는 사랑스러운 보통의 노인으로 변하며, 하울은 미청년에서 괴조(怪鳥) 전쟁병기로 몸을 탈바꿈할 수 있는데다가 불의 악마 캘시퍼는 화염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하울의 심장이기도 하다. 영화 속 소피의 모습은 18살 소녀와 90살 노파, 혹은 그 중간 나이의 모습으로 시시때때 다르게 화면에 보여진다(처음 등장했을 때의 소피의 모습과 머리를 자르고 난 뒤의 모습은 작화 자체가 조금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스즈키 도시오에 따르면 이는 “머리를 자름으로써 마침내 히로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야자키 영화에서 이러한 주인공들의 신체변형은 <붉은 돼지> 이후 보여지는 특징으로, 캐릭터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장치로 요긴하게 쓰인다.Utopia(유토피아) <바람계곡의…>의 바람계곡, <천공의 성…>의 슬러그 계곡, <모노노케 히메>의 타타라 마을, 더 나아가서 <미래소년 코난>의 하이하바까지. 미야자키는 이상적인 공동체 부락을 일종의 유토피아로 제시한다. 그것들은 마치 중세유럽의 봉건사회와도 같은 순박한 서구적 이상향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같은 유토피아상은 전제국가 토르메키아(<바람계곡의…>), 강력한 군사정부(<천공의 성…>), 1인 독재국가 인더스트리아(<미래소년 코난>) 등의 파시즘적인 집단의 등장에 의해 더욱 순결한 것으로 힘을 얻는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같은 유토피아상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일은 드물다. <하울의…>에서 제시되는, 등장인물들이 만들어낸 대안가족은 미야자키가 그려냈던 유토피아의 축소형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다. Villain(악당) 미야자키 영화에 진정한 악당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예외를 찾는다면 <천공의…>의 무스카 정도). War fire(전화: 戰火)) 미야자키 영화에서 불은 전화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한다. <바람계곡의…>에서 마을 사람들은 “불은 숲을 하루에 재로 만들지, 물과 바람은 100년에 걸쳐 그 숲을 키웠는데. 우리는 물과 바람이 더 좋아”라고 침략자 토르메키아인들에게 말한다. <하울의…>에서 불의 악마 캘시퍼가 가장 친근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은 원작에서 가져오지 않을 수 없었던 캐릭터였기 때문. 그래서 미야자키는 캘시퍼의 입을 빌려 아이러니한 처지를 귀엽게 변명한다. “화약의 불은 싫어. 놈들은 예의가 없어!” Xenophile(외국에의 동경) 한국 비평계는 미야자키 작품들이 ‘탈역사성’과 ‘서구(특히 유럽)에 대한 무조건적 동경’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해 왔다. 하지만 이것은 미야자키 작품들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미야자키에게 역사라는 것은 부재하는 것이 아니며,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만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울의…>의 전쟁장면은 분명히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을 위해 삽입된 것으로 보이며,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코 뮐러는 <하울의…>를 ‘올해 베니스영화제의 유일한 반전(反戰)영화’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울의…>에 등장하는 유럽적인 배경은 사실 프랑스, 영국, 스위스, 동유럽을 철저히 뒤섞어서 창조해낸 완벽하게 무국적인 판타지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방적인 유럽에의 동경이 아니라 ‘판타지 문학 장르’의 애호가라면 누구나가 자연스레 지니게 되는 문화적 감수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본인이 보는 서양의 모습이다. 미야자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서양을 그린 것이고 그것은 실재와는 다르다.”(스즈키 도시오 PD) Yen(엔-흥행수익) 현재 일본 역대 흥행순위 1위와 2위는 모두 미야자키의 작품들이다. <센과 치히로…>가 2400만명을 동원해 300억엔의 수익을 올렸고, <모노노케 히메>가 1430만명의 관객동원에 193억엔의 수익으로 2위에 올라 있다. 현재 <하울의…>는 12월5일까지 522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70억엔의 수익을 기록 중이며, 최종적으로는 <센과 치히로…>의 수익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Zeitgeist(시대정신) 미야자키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붉은 돼지>를 만들고 난 이후에는 “지금은 그저 정치를 좌우로 가르지 않는다. 다만 물질문명에 비판적이라는 진보적 경향은 남아 있다”고 술회한다. <붉은 돼지>의 엔딩송에 나오는 가사 “그날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라고 아무도 말하진 않아. 지금도 똑같이 다 그리지 못한 꿈을 그리며 계속 달리고 있겠지, 어딘가에서…”는 과거 공산당 지지자였다가 현실 사회주의에 실망한 채 이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애정만을 간직하고 있는 미야자키의 개인적인 술회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같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적 은유는 가오나시의 돈을 거부하며 “난 받을 수 없어.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은 이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센과 치히로…>의 대사처럼 여전히 미야자키의 기본적인 정서를 유지하고 있고, <붉은 돼지>의 포르코나 <하울의…>의 마법사 하울처럼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인물들에서도 나타난다. “미야자키 감독은 하울이라는 캐릭터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스즈키 도시오 PD)

26개 키워드로 본 <하울의 움직이는 성> [4]

첫 극장용 장편 감독작부터 7분짜리 뮤직비디오까지 1. <마녀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 1989) 마녀인 엄마와 인간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키키는 13살이 되던 날 완전한 마녀가 되기 위해 바닷가 소도시로 수행을 떠난다. <마녀배달부 키키>는 마녀수련(우편배달부 일)에 돌입한 소녀 키키가 사춘기 소녀로서 당연히 겪을 만한 정체성 혼돈을 겪으면서 하나의 인간(마녀)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가쿠노 에이코의 원작동화를 애니메이션화한 <마녀배달부 키키>는 원래 젊은 지브리 스탭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지던 작품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감독까지 맡아 완성하게 되었다(이때 작화감독으로 참여했던 곤도 가쓰야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다시 작화감독을 맡으며 복귀한다). <이웃집 토토로>로 고조되어 있던 지브리의 흥행신화가 폭발하듯 시작된 첫 번째 박스오피스 성공작이었으며(총관객 246만명), 강하고 자립적인 소녀 주인공의 정체성 찾기라는 주제의식은 이 작품을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로 만들었다. 국제영화제 수상 경력이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수입이 불가능하다는 국내 법규 때문에 DVD로도 출시되지 못한 미야자키의 숨겨진 걸작. 2. <온 유어 마크>(On Your Mark, 1995) 미야자키 하야오가 일본 그룹 차게 앤드 아스카(Chage and Aska)를 위해 제작한 6분40초짜리 뮤직비디오. 사교집단을 기습한 두 경찰이 그곳에서 우상시되던 천사를 발견하게 되고, 정부에 의해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된 그녀를 두 사람이 구해내서 하늘로 날려보내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평범한 스토리 라인을 살짝 벗어나 여러 겹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풀어내는 연출이 일품이다. 이 짧은 뮤직비디오는 사실 가장 특이한 하야오의 작품이기도 한데, 일반적인 일본 SF만화의 무대나 메커닉을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미야자키는 <온 유어 마크>에서 (오시이 마모루나 오토모 가쓰히로가 살짝 떠오르는) 메커닉이나 미래도시를 거리낌없이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귀를 기울이면>의 극장 개봉시 일종의 팬서비스로 동시공개되었다(사실 국내에서도 이 작품을 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며, 각종 카페와 블로그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루팡 3세-카리오스트로의 성>(ルパン三世-カリオストロの城, 1979) 국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첫 번째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 감독작’에 걸맞은 대접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작품이 본작이다. 몽키펀치의 인기만화 <루팡 3세>(1967)를 TV애니메이션 시리즈화하는 작업에 참가했던 미야자키는, 그때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자신의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다분히 성인용인 오리지널 만화를 지금처럼 밝은 분위기로 탈바꿈한 것에서도 미야자키의 손길이 느껴지며, 79년 작품이라고는 여간해서 여겨지지 않는 작화 퀄리티와 역동적인 액션연출은 이 작품을 수많은 극장판 <루팡 3세> 중에서도 여전히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게 만든다. 일본 개봉시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재평가받았고, 무명의 미야자키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제작에 착수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2004년 한국 영화계 10대 이슈 [3]

8 . HD 영상물 제작 열풍 - “충무로와 방송사, 가까워지나?” 2003년 여름 전편을 HD로 사전제작한 MBC 대하드라마 <다모>의 성공은 ‘시도, 보험’ 정도로 여겨지던 방송사의 HD영상물 제작에 불을 댕겼다. 올해 들어 디지털방송에 대한 대비와 맞물리면서 HD는 스포츠, 다큐멘터리 등 전방위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다큐 <출가> <도자기>와 같은 작품들은 이러한 기술적 변화의 성과를 가시화하고 있다. 현재 방영 중인 <미안하다, 사랑한다> <해신>을 비롯하여 드라마시티, 베스트극장으로 대표되는 단막극 영역도 HD가 ENG를 밀어내고 안방 브라운관의 ‘고화질’ 시대 개막을 예고한다. 방송보다 접근은 늦었지만 영화도 상황은 마찬가지. 2004년 대표적인 슬리퍼 히트작인 <시실리 2Km>는 파나소닉의 HD카메라 베리캠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부산영화제의 화제작 <여자, 정혜>도 HD영화. 봉만대 감독이 선보인 TV영화 연작 <동상이몽>도 HD로 만들어졌다. <동상이몽>처럼 HD가 방송과 영상의 가교가 되고 개별 분야의 새로운 방법론이 될 것이라는 인식이 방송가와 충무로에 공유되고 있다. 영진위와 KBS의 TV영화(Tele-Film) 공동제작지원작으로 5편의 프로젝트가 선정되었고 싸이더스와 MBC의 HD공동제작도 권석장 PD를 시작으로 닻을 올린 상태다. 영화는 후반작업에서도 HD의 바람이 거세다. 이명세 감독의 복귀작 <형사>의 경우도 HD로 후반작업을 행할 계획이다. DVD 제작을 위해 HD소스를 사용은 일반화된 추세. 방송과는 달리 HD로 촬영된 영상물을 소스대로 상영할 수 있는 디지털영사시스템(DLP)의 확충이 영화계에는 절실한 문제로 부각될 전망이다. 현재 국내에 DLP를 갖춘 곳은 현상소와 공공기관을 포함해 11개에 불과하다. 와이드릴리즈로 인한 배급비용의 급증을 감안해도 디지털배급과 영사시스템은 정책적 대응이 필요한 요소일 것이다. “한국 영화산업과 국내 경제의 독특한 특성으로 한국은 디지털영화의 시대를 열기에 딱 알맞은 곳으로 보인다”는 외신기자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시점이다. 9. 제작사 상장시대 - “상장은 산업화의 증거?” 올해 1월 보안기술업체 상장사인 씨큐리콥이 싸이더스를 인수하면서 유력 제작사들의 주식시장 진입이 본격화됐다. 같은 달, 명필름과 강제규필름이 수공구 제조업체인 세신버팔로와 상호주식교환을 통해 MK버팔로라는 이름으로 증권거래소 상장사가 됐다. 또 매니지먼트를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싸이더스HQ가 속옷전문업체인 라보라와 합병한 뒤 IHQ로 우회상장했고, 코스닥의 지니웍스가 아이픽처스와 한식구가 됐으며, 최근에는 엔바이오테크놀러지가 튜브엔터테인먼트 인수를 위한 실사를 진행 중이다. 제작사들이 무더기로 주식시장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좀더 안정적인 자본 확보에 있다. 투자·배급사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개발·제작을 위한 기반을 갖추는 동시에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한 ‘총알’ 확보가 목적이다. 가장 발빠르게 움직이는 건 영화제작사 아이필름을 계열사로 둔 IHQ다. (주)캐슬인더스카이엔터테인먼트를 계열사로 편입해 드라마 제작에 진출했고, 지난 12월1일에는 교육 관련 콘텐츠 제작과 아카데미 교육사업 진출을 위해 아이에이컨텐츠를 설립했다. 상장의 효과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IHQ의 정훈탁 대표는 “상장을 계기로 파생사업을 진행 중이나 내년이 돼야 본격화돼 과실을 따지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 명필름의 이은 감독도 “상장을 통한 사업이 대부분 진행 중이라서 성과 측정은 내년 중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시장을 통해 자본을 모집하는 방식이 유효하느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 본격적으로 산업화되는 자연스런 결과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주의 이익을 보호, 보장해야 한다는 자본의 윤리와 작품성을 제작의 최우선 순위로 여겨온 문화적 가치의 상충에 대한 우려에 대해 이은 감독은 ‘기우’라고 단언한다. “회사와 주주의 이해,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방향이 일치하는 게 영화산업의 특성이다. 단기간 이익실현을 꾀하는 주식투자가나 머니게임을 하려는 주주들의 요구에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려는 제작사들의 행보는 계속될 전망이다. LJ필름의 이승재 대표는 “우회상장이라기보다 큰 기업과 결합하는 방식을 준비 중”이라며 “영화사 단독으로 상장하는 건 요원하지만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나 기업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영화계는 급속히 산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10 . 멀티플렉스의 지속적인 확장세 - “멀티플렉스, 꽉 찼나?” 멀티플렉스의 확장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전국 곳곳으로 멀티플렉스가 파고들면서 스크린 수가 급증하는 가운데, 관객 수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 ‘극장 포화사태’에 대한 우려까지 낳고 있다. 전국의 스크린 수는 2001년 13.6%, 2002년 19.4%, 2003년 15.9%씩 증가한 데 이어 올해 또한 17%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세는 내년에도 지속될 것으로 보여, 올해 말까지 26개 극장의 207개 스크린을 확보하게 되는 CGV는 내년 8개 극장 60여개 스크린을 추가로 갖출 예정이며, 메가박스는 현재의 5개 극장 48개 스크린이 내년 말이면 8∼9개 극장 88개 스크린으로 늘어나게 된다. 롯데시네마 또한 내년에 스크린을 대폭 늘릴 것으로 예상돼 스크린 수 증가율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관객 수 증가율은 2001년 44.9%를 기록한 이후 2002년 17.6%, 2003년 13.6%, 올해 8%대로 갈수록 둔화되고 있다. 결국 관객 수가 느는 정도보다 스크린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얘기. 특히 지난 9월 이후 관객 수가 뚜렷하게 감소세를 보이고 경제상황 또한 그리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인 탓에 극장이 텅텅 비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하지만 메가박스의 서동욱 본부장은 “극장의 가장 큰 변수는 콘텐츠의 질”이라고 전제한 뒤, “최근의 관객 감소는 볼 만한 영화가 없었다는 데에서 기인한 일시적 현상이지, 경기문제나 영화관객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CGV의 김민지씨도 “지난 한해 동안 1개 스크린이 동원한 평균 관객 수가 10만5천여명인데, 호주 같은 경우는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며 스크린 수가 더 늘어날 여지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한국의 1인당 평균 영화관람 횟수가 지난해 2.36회에 불과한데, 미국이 5.1회, 호주가 4.6회인 것을 감안하면 시장의 잠재력은 아직도 상당하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인디영화 전용 스크린이나 각종 영화제 개최 등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려는 노력도 하고 있다는 것. 멀티플렉스 관계자들은 2007년쯤부터 스크린의 포화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지만, 과열경쟁으로 인구가 적은 곳에도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은 시장이 휘청할 때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만인의 연인에서 속깊은 배우로, 의 이동건

“최악이죠. 앞이 캄캄해요.” 영화 와 드라마 <유리화>의 촬영이 릴레이로 이어진 어느 밤에 만난 이동건에게 두 작품을 병행하는 어려움을 묻자, 덜컥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화면으로도 얼굴이 많이 안돼 보였던 이동건은 입은 옷이 휘휘 돌아갈 정도로 살이 빠져 있었다. 얼굴에도 지치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곤한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우리 메이컵팀이 고생이죠.” 올해 중반 <파리의 연인>으로 ‘만인의 연인’이 되고 나서, 소신껏 선택한 두 작품이 맞물리면서 ‘과부하’가 걸린 탓이다. “다행인 건 캐릭터 잡아가는 기간이 겹치지 않았다는 거예요. 영화 캐릭터 잡고 나서 드라마를 시작했거든요. 드라마도 초반에 많은 걸 보여준 상태라 지금은 부담이 덜해요. 몸이 힘든 건 참고 견디면 되지만, 결과 나오면, 후회하게 될까봐 그게 걱정이죠.” 이동건은 올해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첫 주연작 <낭랑 18세>에서 가문에서 점지한 앳된 소녀를 아내로 맞는 검사로 눈길을 끌더니, <파리의 연인>에서 외사랑의 아픔을 절절히 전하며, 급속히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패션, 행동, 대사, 모든 게 화제이고 유행이었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자기 가슴에 대고 “이 안에 너 있다”고 고백했을 때, 뭇 여성의 마음이 녹아내렸더랬다. 그가 ‘눈 오는 날 데이트하고 싶은 남자’, ‘연말 술자리에서 흑기사가 돼주길 바라는 남자’로 꼽히는 것도, <파리의 연인>에서의 로맨틱하고 순정적인 남자 수혁, 그 이미지의 여운 때문이다. 이동건의 영화 데뷔는 그러니까, 시간문제였다. 이동건이 <파리의 연인> 이후 받아든 시나리오가 50∼60권에 이른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결국 그의 ‘낙점’을 받은 영화는 였다. “<파리의 연인>에서 워낙 어둡게 끝나서, 캐릭터가 어두워지는 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밝게 풀어가보자, 많이 웃고, 사랑받는 역할을 해보자는 바람이 있었어요. 그동안 사랑받지 못하는 역할(<네 멋대로 해라> <상두야 학교가자> <파리의 연인>)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 갈증을 채워줄 수 있는 역할, 드라마에서 못 보여줬지만 나에게 있는 모습을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나리오가 매력이 있었고, 상대역에 대한 호감도 있었고, 영화 작업은 여유있다고 듣기도 했고, 상황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또 그동안 착하고 바른 남자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많이 배우고, 많이 누리고, 많이 갖고 있는, 지극히 메이저적인 역할. 수혁으로 착하고 부드러운 남자를 탈피했다면, 이번엔 바른 남자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겠다 싶었죠. 내 안에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싸가지나 근성이 있을 거거든요. 자주 보여주지 못한 부분들, 내가 원했던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 끌렸어요.” 그런데 자타공인 ‘원단 A형’인 이동건으로서는 “이기주의와 싸가지의 극치”로 타입화된 B형 남자 영빈을 연기하기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특이하고 못돼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B형 남자라지만, 너무 못됐다 싶은 막말과 행동에 반감이 일더라는 것이다. “이거 너무 나쁜 놈 아니냐, 그러면 감독님은 B형이 원래 그렇다 그러세요. 촬영 중반쯤엔 B형이 너무 이슈화돼버린 거예요. 영화가 나오면, 다 아는 걸 또 보여주는 식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됐죠. 거기서 오는 혼돈이 있었어요. 감독님은 더 세게, 더 못되게 표현하길 원하시고, 저는 나름대로 지키고 싶은 선이 있고, 그래서 아직도 대화하면서 맞춰나가는 중이예요.” 조용히 관망하는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아니다’ ’모르겠다’ 싶은 대목에선 목소리를 높일 줄도 아는 소신과 강단이, 그에겐 있었다. 하긴, 우리가 이동건을 제대로 알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얼굴에 솜털 보송보송하던 학생가수 이동건이 쇼프로 MC와 시트콤 연기자로 활동하더니, 언제부턴가 ‘연기자’의 무게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외양도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다. 1집 활동과 <광끼> 출연 무렵엔 ‘범생’이자 ‘샌님’ 같은 느낌이었고, <세 친구>에서 이의정의 단순무식한 남친일 적엔 저런 ‘엉뚱함’도 있구나 싶었지만, 이후로 그에게 따라붙은 건 주로 ‘엘리트’와 ‘바람둥이’ 이미지였다. 상실의 아픔으로 어두워지고 파괴적으로 돌변하는 수혁에 이르러서는, 그 안의 ‘어둠’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밝고 엉뚱하고 재밌는 면은 저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요. 어둡고 외롭고 쓸쓸한 면이 더 크죠. 내가 가진 걸 보여주고자 했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엔 ‘가수 은퇴 선언’과 함께 연기에만 매진하겠다는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했다. 앨범 홍보를 위해, 노래하기 위해, 연기를 시작했다던 이동건이 ‘연기자 선언’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그 얘기라면 밤을 새도 모자랄 거라고 했다. “가수로 데뷔했는데, 알려지긴 시트콤으로 알려져서,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하는 상황이 됐어요. 심경이 복잡해져서, 2년 동안 쉬었어요. 술도 많이 먹고,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생각을 많이 했고, 변하게 된 것 같아요. 저는 흔히 말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적이 없어요. 얼토당토않은 수식어죠. 내가 뭔지 모르면서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게 끔찍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공백을 가진 거였죠. 하나로 거듭나야 한다면 연기자여야 할 것 같았어요. 내가 가야 할 길은 이 길인데 자꾸 다른 길을 가려고 하니까, 쓰러지고 지치는 게 아닐까, 이쪽에서 오라고 하는데 한번 가보자, 대신 끝까지 가보자 마음먹게 된 거죠.”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그는 ‘배우 이동건’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대신, ‘인간 이동건’을 잃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피곤했기 때문일까, 늦은 밤이었기 때문일까. 한참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을 만끽해도 좋을 지금, 그는 두발을 단단히 땅에 디디고 서 있었고, 심지어 땅밑을 파고들어가 동면을 취할 태세를 보이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내년 달력은 비어 있다. 항간에 떠도는 입대 계획은 적어도 내년엔 없다고 했다. “내년은 별 활동 안 할 생각이에요. 막연히 이런 거다, 저런 거다, 말씀드리긴 좀 그러네요. 다만 이동건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상상 못했던 그 무언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기가 될 것 같아요.” 짧은 시간에 아주 솔직하고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쏟아낸 이동건이 올해 스물다섯살이라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부활, <바람 불어 좋은 날>

EBS 1월2일(일) 밤 11시50분 2005년 새해 첫 한국영화는 감독, 출연자, 영화 모두가 한국 영화사에서 각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시작한다. 우선, 감독. 이장호 감독은 지난해 12월 특별전으로 방영된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다. 1974년 <별들의 고향>으로 데뷔하자마자 이른바 대박을 터뜨린 이장호는, 그러나 1976년 대마초 혐의로 활동이 정지되었다가 해금된 이후 이 작품으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이장호 감독은 80년대 후반까지 가장 잘 나가는 감독으로 활동한다. 다음은 배우. 남자주인공 3명 중 특히 안성기에게 이 작품은 그의 연기 인생을 재개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의미를 지닌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의 아역으로 데뷔한 그는 학업과 군복무로 한동안 영화 활동을 중단했다가 다시 배우로 복귀했는데 이 작품으로 부활에 성공한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59년 이후 21년 만에 대종상 신인상을 받는다. 또한 이발소 조수 춘식 역의 이영호는 이장호 감독의 친동생이기도 하다. 여관 종업원 길남 역의 김성찬은 TV 탤런트로 더 많이 알려졌지만, 이 작품에서 그의 배우로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그는 99년 모 방송프로그램의 오지탐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해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외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한축이었던 유지인, 하이틴 스타 출신의 임예진, 김보연 등 당시엔 청춘스타였고, 지금은 중견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의 모습이 대거 보인다. 하지만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한동안 맥이 끊겼던 한국 리얼리즘영화 계보를 되살린 신호탄이란 점에 있을 것이다. 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이른바 3S정책으로 대중을 우민화하려는 유화정책을 썼고, 그 결과 영화계에선 에로영화 제작이 성행하는 한축과 이장호, 배창호로 이어지는 사회의식과 작품성을 담보하며 제작되는 한축으로 양립하고 있었다. 이 경향은 80년대 말의 한국영화 뉴웨이브 시기까지 이어진다.

ABC 드라마 <로스트>의 김윤진

“‘할리우드’라서가 아니라, ‘할리우드가 가진 시장 능력’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미국에 진출했습니다. (할리우드를 통하면) 전 세계에 알려지기가 쉽거든요. 꿈이 현실로, 현실이 기회가 돼서 한국배우들의 진출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김윤진(31·사진)은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진출했고, 미국에서 요즘 가장 인기있는 드라마의 주연으로 맹활약 중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미국에서 전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신인 연기자”라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1단계 성공’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우연이 아니다. 김윤진 하면 흔히 영화 <쉬리>(1999년)를 떠올린다. 남한 정보기관원과 사랑에 빠지는 북한 첩보원으로 열연해, 그의 얼굴과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이다. 그러나 김윤진은 티브이 드라마로 한국 연예계에 데뷔했다. 1996년 <화려한 귀가>로 출발해, <예감>(1997년·문화방송) <웨딩드레서>(1998년·한국방송) 등에서 진취적인 직업 여성의 독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연기 공부는 미국 보스턴 대학과 영국 드라마아카데미에서 마쳤다. 연기뿐 아니라 능숙한 영어 구사도 국외 진출에 큰 구실을 했다. 실패도 여럿 겪었다. 영화 <아이언 팜>(2001년)에선 코믹연기 변신에 실패했고, <밀애>(2002년)에선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연기의 또 다른 장을 펼쳐보였으나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현재 그는 미국 <에이비시>의 미니시리즈 <로스트> 덕분에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9월부터 미국 전역에서 방송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1800만명의 미국 시청자들이 매주 수요일 <로스트>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100여 나라에 수출됐다. 우리나라는 <한국방송>이 수입해 지난달 25일부터 방송을 시작했다. 오는 4월부터는 케이블채널 <홈시지브이>에서도 방영한다. 김윤진은 또 얼마전 올해 6월 크랭크인하는 미국 영화 <조지아 히트>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돼, 할리우드 스타인 빌리 밥 손튼과 함께 연기하게 된다. 그러나 김윤진은 아직 성공을 실감하지 못한 듯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 배우 김윤진이 미국 드라마에 출연하고, 다시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를 소개한다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고마운 생각이 드네요. 미국활동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올래 걸려 2년간 국내 활동을 못해서 이러다 잊혀지지나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는데요, 사실 꿈만 같아요. ‘김윤진은 한국배우’라고 말하실 때 창피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김윤진은 올해 초 영화 를 통해 한국 활동도 다시 시작한다. 준비된 배우 김윤진의 2005년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주목된다.

‘겨울연가’ 다시 한번! KBS 2TV, 8일부터 매주 토요일밤 재방송

유난히 눈 구경이 어려운 이 겨울, 티브이가 온통 새하얀 눈세상을 준비했다. 온 세상을 뒤덮을 듯 쏟아져내리는 함박눈의 군무와 눈사람을 배경으로, 그 눈만큼이나 순수한 빛깔의 운명적인 첫사랑을 그려냈던 한국방송 드라마 〈겨울연가〉가 8일부터 매주 앙코르 방영된다. 2텔레비전 〈토요명화〉가 송출되던 매주 토요일 밤 11시15분(첫회는 11시5분)부터 한번에 2편씩 10주간 총 20부작이 다시 전파를 탄다. 〈겨울연가〉의 귀환은 2002년 꼭 이맘때 안방극장을 찾은 지 2년 만이다. 일본열도를 적신 뜨거운 한류 열기의 후광에 힘입은 바 크다. 열기 이어질지 촉각 〈겨울연가〉는 한국 첫 방영 때도 배용준 목도리며, 폴라리스 목걸이, 배경음악 등이 큰 바람을 타는 등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다. 그러나 시청률만으로 보면, 한번도 30%를 넘지 못하는 등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영상엔 찬탄이 쏟아졌으나, 시청자 감성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주제곡의 반복과 기억상실·출생의 비밀 등 상투적 이야기 구조를 두고는 호오가 갈렸다. 그러다 일본으로 최고 수출가에 넘어간 뒤 거대한 태풍으로 번졌다. 〈겨울연가〉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는 일본 중·장년층 시청자를 티브이 앞으로 불러모으며 사회적 신드롬을 형성했고, ‘욘사마’는 작년 일본 최고의 유행어로 떠올랐다. 돌아온 〈겨울연가〉가 새해 벽두 시작된 대작 드라마들의 안방 공세를 넘어 다시 한번 한국 시청자들에게 환상의 준거가 될 수 있을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가을동화〉로 안방 시청자의 40%를 한개 채널 앞에 붙들어두었던 윤석호 피디 순정극의 매력은 〈겨울연가〉로 약간 주춤한 듯 하면서도 일정한 열기의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이어진 〈여름향기〉에선 스스로 ‘실패’라고 자인하는 결과에 봉착했다. 한국 시청자들의 기호가 윤 피디 특유의 순정극에 대한 몰입에서 벗어나는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가능한 지점이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치 못한 열기가 불러온 드라마에 대한 호기심과 문화적 자부심 등이 〈겨울연가〉의 흥행가도를 밝혀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방송은 8일 1·2부 방영에 앞서 밤 10시5분부터는 50분간 〈겨울연가 스페셜〉을 특집으로 내보낸다. ‘토요명화’ 시청자들 항의 손범수·김윤지 아나운서 진행으로 이규형(영화감독), 미즈노(전남대 교수), 김지선(개그우먼) 등이 〈겨울연가〉의 줄거리와 매력요인 등을 소개하고, 일본 내 신드롬의 실체를 들여다본다. 한편, 〈겨울연가〉 편성에 따른 〈토요명화〉 중단에 반발하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속출하고 있으나, 한국방송 쪽은 “〈토요명화〉는 폐지된 게 아니며, 〈겨울연가〉가 끝나면 다시 나가게 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백은하의 애버뉴C] 1st street - '천국보다 더 낯선'

“나는 한번 완성한 필름을 다시는 보지 않아요.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들이 보신 영화 도 한 20년 전에 보고 안 봤다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디테일한 질문은 하지 마세요.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니까 (웃음)” 지난 해 11월 BAM (브룩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씨네마테크에서는 짐 자무시 특별전이 열렸다. ‘독립적인 영혼: 짐 자무시’라는 이름 아래 열린 이 특별전은 뉴욕대학 재학시절 만든 데뷔작 부터 최근작 까지 그의 전작들을 볼 수 있는 기회였는데, 뉴욕을 대표하는 감독답게 극장을 찾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행렬로 초겨울 삭막한 브룩클린은 붉은 혈색을 띄고 있었다. 특히 감독과의 만남을 위해 그가 직접 극장을 찾은 날은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남색 트레이닝 윗도리에 청바지, 생수병을 들고 스크린 앞으로 걸어 들어오는 짐 자무시의 행색은 델리에 샌드위치 사러 나온, 혹은 지하철에서 천만번쯤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의 그것이었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그 흰머리, 위로 뻗은 변함없는 스타일의 백발만큼은 그를 독특하게 차별화시키고 있었다. ‘관객과 감독’의 관계는 ‘기자와 감독’의 관계에선 상상할 수 없는 따뜻한 기운과 신뢰가 오간다. 저기 스크린 앞에 서 있는 저 남자는 재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만난, 전세계 기자들 앞에서 심드렁하게 대답을 이어가던 그 사람이 아니다. 수백 번은 대답했을, 처음 영화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마치 처음처럼 흥미롭게 이야기해주던 그가, 최근 대통령선거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잠시 침묵 끝에 입을 연다. "깊은 슬픔, 통탄의 시절을 보내고 있어요. 여전히 이 나라, 이 땅을 사랑하지만, 선거결과를 보고는 당장 파리로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만큼" 부시의 재선에 대한 뉴욕커들의 깊은 탄식은, 짐 자무시를 포함하여, 거의 비슷하다. 이어서 한때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빔 벤더스의 최근 몇몇 작품들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감과 (그러나 여전한 개인적인 친분과) 자신의 느린 작업스타일, 그리고 영원히 독립영화인으로 살수 밖에 없는 이유를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근 조근 설명했다. 30,40분간의 짧은 만남,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문 밖을 나오니 바람이 불고, 날씨가 춥다. 뉴욕의 겨울이 시작되는 소리다. ‘커피와 시가렛’이 허락되지 않은 상영관 밖을 나와 씨네필들 사이에 둘러싸여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무시. 그 어둠 속에서, 짐의 흰머리가 빛나고 있었다. 수줍어 차마 인사한마디 나누지 못한 채 돌아서는 길, 지하철로 향하는 그 길에 나는 생각이란 걸 했다. 이런 짧은 만남들을 기록하고, 이 생생한 느낌들을 기록하리라. 그렇게 나는 ‘애비뉴C’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모르겠다. ‘천국보다 더 낯선’ 이 도시에서 끄적거리게 될 아주 사적인 영화노트들이 어떤 모습이 될는지. 이 기행문을 써나가는 길엔 ‘맛있는 영화리스트’를 뽑아주는 친절한 ‘자가트(zagat)리스트’도 지도도, 방향계도 없다. 도시 곳곳에 흩뿌려진 수많은 영화의 흔적을 찾아 끊임없이 방황하고 배회한 난삽한 기록이 당신에게 짧은 휴식이나마 줄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표를 끊는 긴 줄 앞에, 홀로 앉은 극장의 옆자리에, 늘 당신의 자리를 비워두겠다. 한 순간도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자, 성실한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