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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우리가 놓친 영화 [2] - 일본

91살 감독의 빛나는 독립영화 정신 신도 가네토의 노년의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그것은 젊은 날의 분노를 용서와 화해로 삭인, 세상을 관조하는 고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흔히 ‘노예술가가 말하는 인생의 교훈’이라 불리는 것 말이다. 부끄럽지만 나에겐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이런 굳어진 머리를 신도 가네토(新藤兼人) 감독의 (ふくろう)가 내리쳤다. 는 등을 통해 일본 독립영화의 상징으로 살아온 신도 감독이 91살인 2003년 감독, 미술, 시나리오를 도맡아 완성해 2004년 일본 전국에서 순차 개봉한 작품이다. 좀더 놀라운 건 90대 감독의 작품에 넘치는 비판정신과 저항의 에너지다. 저예산영화라는 조건에 맞춰 무대극 같은 1세트 형식을 끌어오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웃음’이 많은 블랙코미디를 만들어냈다. 평론계나 영화저널리즘이 이 현역 최고령 감독의 신작에 “고개를 숙인다”며 존경의 글을 앞다퉈 내보낸 것도 이 지칠 줄 모르는 실험정신 때문이다. 1980년 일본 도호쿠지방의 산간지역의 휑한 집 한칸. 나무껍질을 벗겨 국물을 우려 마시고, 살아 있는 거라면 쥐도 식량으로 마다않는 거지 같은 몰골의 어머니와 딸이 있다. 무언가 결심한 그들은 미친 듯 웃으며 몸을 닦고, 집안에 남아 있던 장례식용 깃발과 이불보자기를 찢는다. 장례식용 깃발은 검정색과 흰색 스트라이프의 모던한 원피스로, ‘희망언덕 개척단’이라고 선명하게 글씨가 새겨진 빨간 이불보자기는 섹시한 탱크톱으로 변신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동전 2개를 집어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는 1974년 신도가 촬영의 자료 수집차 갔던 지역에서 들었던 실화를 토대로 했다. 한 개척 마을에 남은 모녀는 살기 위해 댐공사 인부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지만, 소문이 퍼져나가자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2차대전 당시 일본 정부는 만주 개척사업을 위해 30만명의 농민들을 내보냈지만, 패전 뒤 돌아온 이는 반 정도. 조상의 묘까지 없애고 만주로 향했던 이들에겐 돌아갈 땅이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들에게 대신 내준 땅은 수십년을 개간해도 될까말까한 불모지였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수년 만에 마을을 떠나 부랑자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두번 배신당한 존재들이다. 의 모녀는 하지만 현실처럼 비참하게 패배하지 않는다. 그들은 남자들을 상대로 인생을 이야기하고, 선금을 받은 뒤 정성스럽게 ‘섹스’를 해주고, 마지막 특별 서비스로 소주를 먹인다. 공사장 인부, 수도공사 인부, 전기공사 인부, 직원을 찾으러 온 인력 감독…. 차례차례 소주를 마신 이들은 거품을 물고 돼지나 닭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이 모든 걸 지켜본 건 산속의 올빼미뿐. 유미에와 에미코가 떠난 뒤 이 마을에선 9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처럼 는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이전부터 강한 모성, 여성을 자신의 주제로 삼아온 신도 감독은, 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들에게 희생은 그만두라고, 구제불능의 남성을(궁극적으로 국가를) 혼내주라고 선동한다. 그리고 기꺼이 여성들의 편이 된다. 쓰러지는 남성들이 남기는 한마디는 각각 “좋았다”, “성공을 빈다” 등등이다. 같은 세트에서 반복되는 살인극의 패턴에 지루해질 법도 하지만, 탄탄한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밀폐된 공간의 긴장감은 오히려 상승된다. 어머니 역의 오오타케 시노부는 신도 감독이 출연을 약속받은 뒤 시나리오를 썼을 정도. 오오타케는 1994년 죽은 신도 감독의 아내이자 영화 파트너인 배우 오토와 노부코의 뒤를 이을 만한 신도 감독의 ‘뮤즈’라는 평을 받으며 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딸 역엔 의 이토 아유미, 9명의 남성들엔 에모토 아키라, 다구치 도모로 등 널리 알려진 연기파 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신도 감독은 이제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를 계획 중이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진 단 수초간의 삶과 죽음의 모습을 극명히 그리는 작품이다. 그는 1912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예산은 20억엔, 쉽지 않은 자금이지만 신도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 중이다. 이것이 일본 독립영화의 정신이다.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진화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의 오시이 마모루, 오토모 가쓰히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개봉하고 완전히 컴퓨터그래픽으로만 만들어진 , 실사와 애니메이션 또는 CG의 경계를 실험한 등이 속속 등장한 2004년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그 어느 해보다 풍작이었다. 이처럼 ‘별들의 전쟁’이 벌어졌던 한해, 12월 발표된 제8회 문화청미디어예술제는 의외의 작품에 올해의 애니메이션 대상을 돌렸다. 장·단편 등 294편의 출품작 가운데 는 물론 까지 우수상으로 밀어낸 작품은 . 극장판 등을 통해 ‘천재 애니메이터’라 소문 자자했던 유아사 마사아키(湯淺政明)의 장편 데뷔작이자, 를 제작한 스튜디오 4℃의 작품이다. 오해가 없길. 여기서 ‘의외’라는 건, 이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일 뿐이다. 사실 로빈 니시의 동명의 컬트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이 대박을 터뜨리기란 태생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오시이나 미야자키만이 재패니메이션의 전부라 생각하지 말라! 단언컨대 은 황당한 스토리와 뻔뻔스런 상상력으로 보는 이의 두손 두발을 다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폭력과 에로티즘, 유머가 맛깔스럽게 배합된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론가는 “재패니메이션의 새로운 진화형”이라고 극찬했고, 마니아와 자발적 응원단이 줄을 이었다. 해외 배급을 조엘 실버가 맡아 화제인데 그 과정도 저돌적인 스튜디오 4℃ 답다. 홍보를 위해 도쿄를 찾은 실버의 호텔 방에서 다나카 에이코 대표(일본 애니메이션업계 유일의 여성 CEO) 등이 ‘기습적으로’ 하이라이트를 테이프로 틀었고 자동차 추격장면에 매료된 실버가 덜컥 해외 배급을 약속했다는 것. 전반부는 환생 스토리에, 후반부는 버전이다. 소식이 끊겼던 첫사랑 명을 몇년 만에 만난 지리멸렬한 청춘 니시가, 명의 아버지를 찾는 사채업자들에 얽혀 총을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 돌아와 명과 명의 언니를 데리고 도망을 갔는데 야쿠자에 쫓기다가 빠진 구멍이 알고보니 고래 뱃속이더라, 라는 이야기. 그 고래 뱃속에서 30년을 살아온 노인이 니시 일행을 만나 놀라서 더듬거리며 건넨 첫마디는 이거다. “나, 나, 라디오 갖고 있어요.” 글로 옮기는 의 스토리는 이처럼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기도 하거니와, 전혀 중요하지도 않다. 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체험할 수밖에 없는 천상 애니메이션이다. 위기에 처한 첫사랑을 구하기는커녕 엎드려 벌벌 떨다가 얼떨결에 엉덩이에 야쿠자의 총을 맞고 죽은 니시가 ‘신’을 만나는 장면. 이 장면만으로도 본전 생각은 안 난다. 담배 피우는 물고기부터 피식 바람빠지는 풍선, 냄새 폴폴 나는 똥까지 수십 가지 버전으로 잠시도 쉬지 않고 얼굴이 변하는가 하면, “이제 20살인데 죽는 건가요?”라고 절규하는 니시에게 “나 데이트 있거든, 조오기 조오기로 곧~장 걸어가면 이제 넌 사라질 거야”라며 콧노래를 부르는 신의 모습이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초월한다. 배가 부르게 먹고 나면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놀라면 목이 쭈욱 늘어나고 눈알은 뿅 튀어나오는 식의 만화적 표현과, 똥 오줌 튀는 대사는 기본이다. 때로는 인물의 몸과 윤곽선의 그림 속에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들의 실제 얼굴만 심어놓기도 한다. 사실적인 세밀한 그림부터 그래픽 같은 그림, 과장과 왜곡이 심한 형태까지 실사와 2D, 3D를 자유자재로 섞은 그림체를 대사와 심리에 따라 바꾸는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로보’ 등의 활동으로 유명한 야마모토 세이치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은 좁은 의미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림’을 보는 쾌감을 새삼 일깨워주는 영상작품이다. 쿡쿡거리며 가볍게 즐겨도 그만이지만 103분이 후딱 지나고 나면 남는 여운은 꽤 길다. “나는 돌아갈 거야. 무엇보다 힘차게, 앞을 향해, 쭉쭉, 즐겁게, 생기 넘치게, 모든 힘을 다해 해보는 거야!”라 외치며 살아 돌아온 니시는 고래 안에서도 말한다. “자신을 끝까지 믿으니까 살아 돌아온 거야. 솔직하게, 성실하게. 믿는 그대로 행동하는 거야말로 모든 벽을 부수는 무기야.” 마지막, 니시의 발 밑에 다시 도입부와 똑같은 도시와 사람들의 모습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마인드 게임을 치른 니시와 우리는 더이상 지지부진한 청춘이 아니기에.

[백은하의 애버뉴C] 2nd street 서른 한 살의 데이-트리퍼

오늘은 여행을 떠나야겠군, 눈을 뜨자마자 그렇게 생각한다.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담고, 캔버스 끈을 조여 묶는다. 지하철 정액권을 체크하고, 펜과 수첩을 챙겨넣는다. 뉴욕의 겨울 바람과 싸우려면 든든한 목도리도 필요하다.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영화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데이-트립은 이 정도 준비물이면 충분하다. 물론 나의 정거장은 같은 블록버스터영화에서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타임스 스퀘어나 유명세 덕에 관광객들로 버글거리는 ‘세렌디피티’ 같은 카페가 아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록펠러 센터도 아니다. 이것은 생활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곳, 누군가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믿지 못할, 사소한 공간들에 대한 소박한 확인이다. 예전에 드라마 를 왜 그토록 좋아했었나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 중 하나가 드라마를 찍은 장소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가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친구와 잡담을 나누고, 일없이 방황하던 동네의 이야기. 홍대의 낯익은 길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다 보면, 이나영이 전경으로 양동근이 복수로, 저들의 삶이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졌었다. 맨해튼 미드타운, 34가의 나의 작은 아파트에서 걸어 나와 8 애비뉴쪽으로 향하면 ‘호텔 뉴요커’가 보인다. 유행하는 부티크 호텔도, 쉐라톤 같은 고급호텔도 아닌 이 회색의 을씨년스러운 건물 연회장에는 와 를 찍던 우디 앨런의 수다와 한숨이 스며 있다. 매주 커다란 빨래가방을 들고 묵은 빨래를 하러 가는 9 애비뉴 코인세탁소 옆 파키스탄 식당은 한 때 스코시즈가 을 촬영했던 ‘클럽 478’이었던 자리다. 저기 홀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이목구비 뚜렷한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귀한 청동기 유물로 밥을 지어먹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동쪽으로 몇 블록 더 올라가면 그랜드 센추럴 역이다. 프리츠 랑의 흥미진진한 누아르 에서 에드워드 G. 로빈슨은 조금 뒤 일어날 엄청난 살인 사건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 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과 이별한다. 지하철을 타고 다운타운 서쪽으로 내려가면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가게가 있는 소호에 다다른다. (After hours)은 의 제작에 들어가지 못해 좌절하던 마틴 스코시즈가 가벼운 마음으로 찍었던 영화인데 결국 스코시즈는 그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까지 받게 되었다. 이 밀도있는 드라마는 워킹 타이틀이었던 ‘소호에서의 하룻밤’에 걸맞게 한때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이 작은 구역을 벗어나지 않고 촬영되었다. 폴과 마시가 처음 만나 헨리 밀러의 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식당 ‘문댄스 다이너’ 도, 폴이 올라버린 지하철요금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던 스프링 스트릿 지하철역도 아직 그 자리에서 그대로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유적지를 보듯 찬찬히 그곳을 살펴보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니 예쁘장한 아가씨 하나가 배낭을 메고 눈앞을 휙 지나간다. 클레어 데인즈다. 누군가 그녀가 이 동네에 살고 있다고 귀띔해준다. 여행은 늘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주게 마련이다. 의 오프닝신에서 부감으로 보이던 리틀 이탈리아의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서쪽으로, 웨스트 빌리지로 내려온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에서 웨이터가 앤 헤이시에게 작업을 걸던 바로 그 카페다. 그 짧은 세월은 이 카페의 이름과 인테리어를 바꾸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눈앞에 보이는 이 길에서 몇년 전 누군가의 카메라는 열정적으로 그녀들의 우정이 균열되고 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담고 있었으리라. 겨울 맨해튼은 오후 4시면 어둑어둑해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가 간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마치 내가 준상이 집을 방문하는 일본의 ‘욘사마’ 팬처럼 느껴진다. 어떤 이들이 보기엔 하나 대단할 것 없는 여행이다. 그러나 열광하는 대상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은 무엇이라도 순례다. 이제 이 카페 문을 열고 또다시 거리로 나서면 여기저기 조용히 누워 있던 내 아름다운 우상들이 인사를 건넬 것이다. "안녕, 우디" "하이, 마틴" " 당신은 스파이크 리군요" 저기 리무진 운전석에는 오늘 사냥할 아가씨를 찾아 헤매는 알피(주드 로)가, 여기 스타벅스에서는 캐리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구나.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브로드웨이 13번가 한 가게에서는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우연히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열거하기에도 지쳤다. 서른 한 살의 데이 트리퍼 이것은 가슴 벅찬 하이쿠.

일본인이 본 <겨울연가> [1]

일본인이 잃은 순수, 이 드라마에 있었다 2004년의 문화계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한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한류는 한국의 문화상품 일반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2004년의 한류는 정확히 말해 일본에서 일어난 붐이라고 좁게 지칭해야 옳다. 욘사마 열풍 또한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 위성방송에서 시작해 공중파인 에서 재방송을 거듭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는 . 일본인들은 과연 이 드라마에서 무엇을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일본의 문화평론가 시미즈 마사시가 쓴 비평은 이 궁금증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시미즈 마사시는 현재 일본대학 예술학부 문예과와 대학원 예술학 연구과 교수로 등 문학·영화·만화를 넘나드는 다양한 저서를 내놓은 인물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한달 동안 유학을 하기에 앞서 특별히 어떤 준비를 하진 않았지만 한국에 간다면 꼭 를 봐두어야 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본래 유행에는 둔감하기 때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몇번이나 권유를 받는 바람에 그렇게까지 권한다면 첫 번째 이야기만이라도 볼까 하는 가벼운 기분으로 DVD판 1부를 학교에서 가지고 집에 왔다. 밤중에 가족 모두가 잠든 다음에 혼자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1부에 수록된 세 번째 이야기까지 계속해서 봐버렸다. 다음날 나머지 6부를 한꺼번에 보았다. 이틀간 20편을 보고 나서 분명히 이 드라마는 도중에 그만둘 수 없도록 구성돼 있음을 알았다. 달콤하고 슬픈 테마송을 시작으로 서정적인 영상과 아름다운 남녀의 조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회의 예고, 다음 편을 보면 테마송 뒤에 반드시 전편의 줄거리가 소개된다. 그러니까 어디에서부터 보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이번에 나는 1편을 통해 이 드라마의 특수성을 논해보고자 한다. ‘버스’를 쫓는 여자아이-체제에 대해 반항하지 않는 젊은이들 히로인인 여자아이 정유진은 고등학교 2학년. 항상 통학 버스를 뒤쫓는 지각 상습범. 히로인의 첫인상은 ‘달리고 있는 여자아이’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면 열여섯이나 열일곱이다. 유진 역의 최지우는 당시 25살. 고등학교 2학년으로 보기에는 약간 나이 들어 보인다는 인상은 감추기 어렵다. 이 정유진이 사귀고 있는 이가 소꿉친구 김상혁이다. 상혁은 반장인 우등생으로 전형적인 모범생 청년이다. 정유진은 언제나 버스를 놓칠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시간에 맞춰 도착한다. 유진은 지각 상습범이지만 학교를 퇴학당하거나 하진 않는다. 유진은 학교가 싫지만은 않으며 특별히 누군가에게 불만을 품고서 반항적인 태도를 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유진은 일반적으로 어디에나 있는 듯한 여고생으로 보인다. 너무나 보통스러워서 드라마 주인공답지 않은 타입으로도 보인다. 왜 이런 보통의 평범한 여자아이가 주인공이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유진을 연기하는 여우 최지우의 매력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에서 ‘며느리 삼고 싶은’ 여배우 넘버원인 히가시와 어딘가 닮은 최지우의 얼굴은 일본인이 좋아하는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유진은 ‘버스’라는 체제(질서, 모럴, 혹은 유교적 정신)에 반역하는 존재는 아니다. 유진은 언제나 열심히 ‘버스’를 놓치지 않도록 달리고 있다. 그녀의 달리는 모습에 반항의 흔적이나 항의, 빈정거림은 없다. 유진은 ‘버스’를 놓치지 않고 뒤쫓는다. 그러나 일단 ‘버스’를 타면 이번에는 안심하고 잠들어버린다. 여기에도 ‘버스’가 상징하는 체제에 대한 반역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진은 체제 안에 있을 때야말로 안심하고 있는 듯하다. 유진은 지각에 대해 주의를 주는 교사에 대해서도 전혀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유진뿐만이 아니라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체제에 대해서 반항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이같은 커다란 특징이 한결같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진은 질리지도 않고 ‘버스’를 뒤쫓으면서 지각을 반복하는 걸까. 여기에는 의외로 많은 관객이 간과하지 못하고 있는 유진의 성격에 대한 ‘비밀’이 잠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유진은 열심히 달리지 않으면 ‘버스’(체제)를 놓치고 겉돌거나 주변인이 되어버리는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닐까? 상혁은 유진의 소꿉친구이긴 하나 우등생이며 ‘체제’의 상징이다. 유진은 상혁과 함께 있으면 안심하기는 하지만 운명적인 사람은 아니다. 유진은 상혁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한번도 없다. 유진은 열심히 달려서 상혁을 뒤쫓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멀어져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잠들어버린 유진 곁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이 청년이 강준상이다. 과학고등학교에서 온 전학생. 수학과 음악 천재이며 말수가 적은 쿨한 청년이다. 확실히 만화책에 등장하는 백마 탄 왕자처럼 핸섬하다. 전학생이란 이유만으로도 어쩐지 매력적인 존재로 보이지만 배용준이 연기하는 스타일이 멋진 강준상은 왠지 모르게 그림자가 진 수재이기 때문에 클래스 여자아이들을 사로잡을 정도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유진은 준상과 만나기 위해 매일 ‘버스’에 늦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이다. 만약 유진이 지각을 하지 않는 모범스런 학생이었다면 준상과 버스 안에서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학과 음악 천재인 준상도 ‘버스’를 놓칠 정도로 지각을 하는 청년이며 그 점에서 그 또한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체제’로부터 떨어져나갈 듯한 경향을 지닌 청년이었다.

반 산트의 가장 성공적인 실험작, <엘리펀트>

두드러졌던 과 에서 번 돈을 장면 하나하나를 불필요하게 복제한 나 스타일의 같은 실패작들에 쏟아붓는 걸 보면 구스 반 산트도 대단하다. 비록 작품들이 고르지는 않아도 터무니없이 실험적인 상업영화감독으로는 거의 스티븐 소더버그 수준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반응을 일으킨 는 그중 가장 성공적인 실험작이다. 지난 5월 칸영화제의 기대치 않은 수상작인 제작의 는 미국 고등학교 총기 난사를 대담하게 다루고 있는 시적인 재앙영화다. 1999년 컬럼바인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는 다른 사건들의 세부점들을 섞어 대담한 탐미주의와 다큐멘터리식의 묘미로 보여준다. 해리스 사비즈가 1.33 대 1 표준 TV비율로 세련되게 촬영한 스펙터클은 롱숏들을 통해 복잡한 음향의 다리들을 건너 미끄러지듯 흘러가게 해준다. 이야기들은 짜여졌다기보다 눈앞에서 펼쳐진다. 인물들은 학교 식당에서 어울리거나 무미건조한 복도를 지나가며 소개된다. 사실 반 산트는 많은 시간을 와트 고교의 형광등 달린 복도를 따라 스탠리 큐브릭의 귀신 나오는 산장 호텔을 보여주듯 잘 나가는 아이들, 대식증 여자아이들, 덩치들과 샌님들, 주눅 든 얼간이들, 딴따라들을 어슬렁거리고 비틀거리는 유령처럼 보여준다. 모두 배우가 아닌 십대들이고 반 산트의 넋나간 듯한 시선 속에서 미화돼 있다. 이들의 존재와 임박한 이들의 부재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제이다(컬럼바인에 대한 더 심리극적인 명상이며 주요 인물이 실제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벤 코치오의 저예산 독립영화 처럼). 긴장이 쌓여간다. 엇갈리는 길들은 당신의 종교적 견해에 따라 신의 섭리일 수도 있고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브라운 운동일 수 있다. 약간 다른 견해에서 장면들이 되풀이되면서 와츠의 로커룸과 도서실은 큐비즘적인 중복을 보여준다. 베토벤의 에 맞춰 아이들은 나른하게 풋볼을 하고 호리호리한 소녀가 그 앞을 황홀하게 슬로모션으로 지나간다. (‘방 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의 바로 그 코끼리)는 가장 비전형적인 다큐드라마다(방 안의 코끼리는 분명히 모두가 볼 수 있지만 누구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 영화의 제작자들은 거의 아방가르드에 가까운 서술 구조에 그리 행복하지 않았겠지만 타임워너의 소속사인 는 반 산트가 컬럼바인의 살인자들이 를 보고 입었던 검정색 트렌치코트를 무시했다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테다. 적인 순간은 사춘기의 비열함에 강한 불만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예술적이고 그 자체의 불가사의함이 관철돼 있는 이 영화는 한편으론 연결된 구체적인 ‘텅 빈’ 순간들을 강력하게 환기시키지만 동기를 보여주는 덴 너무 약하다. 헤비메탈의 강한 소리는 없고 몰락한 학생들의 일상이, 가끔 들려오는 불길한 전조의 천둥소리로만 알 수 있는 하늘의 구름처럼 뭉게뭉게 일어난다. 그러는 동안 두 고립된 총격자는 지하실에서 총기류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TV다큐멘터리를 보며 숙제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순수하게 음란한 래리 클라크식의 마무리로 이 둘이 마지막 고별 샤워를 같이 하게 한 것은 반 산트의 가장 나쁜 아이디어다(래리 클라크는 십대의 문화, 폭력, 성, 마약 등을 거리낌없이 묘사한 작가. 성적인 암시가 가득한 소년들의 사진으로 유명하다). 는 자연스럽게 분열시키고 불안하게 하지만 또한 꽤 약아빠졌다. 너무 약지 않았나. 총격자들은 한쌍의 루시퍼가 되지만 이상하게도 악함이 결여되어 있다. 마치 감독은 컬럼바인이 의 감상적인 수호천사들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를 상상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한 시간 정도 이리저리 누비다가 반 산트는 정해진 결말에 승복하고 살륙극이 일어나게 한다. 대부분의 잔인한 장면들은 스크린 밖에서 일어나지만 갑작스런 혼돈과 경고의 외침들, 광적인 파괴음들, 겨냥된 사격들은 그만큼 처절하다. 비록 그 흐름을 멈추게 하면서도 계속 흘러가게 하려는 가련한 바람을 가졌으니 반 산트는 또 다른 제목의 고등학교 영화를 만들 수도 있었겠다. . 는 예술가가 어느 가을 아침의 표면을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헤아릴 수 없게 끌려들어가기 전 할 수 있는 만큼 걷어낸 일시적인 시간의 소용돌이 같다. (2003.10.22. 짐 호버먼은 미국 영화평단에서 대안영화의 옹호자로 가장 명망이 높은 평론가로 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과 는 기사교류 관계에 있습니다.) *는 하이퍼텍 나다에서 1월2일(일), 7일(금), 12일(수) 한회씩 상영됩니다(‘나다의 마지막 프로포즈’ 프로그램 참고).

[LA] 2004년 미국이 놓친 영화

2004년 연말도 갖가지 톱10영화 리스트로 마감했다. 가끔은 신선한 리스트들도 있지만, 대개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10편” 따위의 리스트이게 마련. 은근슬쩍 나의 한해 영화 안목은 양호했었는지 견주어보는 잣대가 되는 리스트도 바로 그것들이다. 이들 리스트의 한 가지 미덕이라면, 놓친 영화를 아쉬워하게 만들어 DVD 대여점으로 달려가게 하는 것이다. 리스트의 홍수가 한 차례 지나간 새해 첫주, 미국의 대표적인 독립영화언론 는 지난해 미국 내 배급사를 찾지 못해 때를 놓쳐버린 베스트 영화 15편을 발표했다. 새해를 기다림으로 시작하라는 뜻이다. 과연, 2005년에 이 영화들을 미국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는 또 다른 문제지만, 올 한해 극장가 풍경을 가늠하기에 유용할 리스트다. 리스트의 면면을 살펴보면, 지난해 다큐멘터리의 강세를 반영하듯, 몇편의 미국 다큐멘터리가 눈에 띈다. 리즈 멀민 감독의 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문을 연 미용학원을 소재로 탈리반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그린 작품. 리베리아 내전의 한가운데에 카메라를 들이댄 정통 시네마 베리테 스타일의 (조단 스택 감독)과 함께 최근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 쏟아지는 미국인들의 다양한 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두편의 비교적 전통적인 다큐멘터리와 함께 최근 트렌드를 반영하는 리얼리티 쇼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도 포함되었다. 신인 앤드루 와그너 감독이 3만달러의 예산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낸 이 황당한 자기 가족 여행기는 보통의 가족이 숨기고 있을 법한 치부들을 낱낱이 까발리는 대담함으로 올해 선댄스영화제의 기대를 받고 있다고. 한편, 리스트에는 지난해 부활했던 외국영화 흥행 바람을 타고 수면 위로 떠오를 외국산 다크 호스들이 몇편 들어 있다. 이미 배급사가 거의 결정된 메이저급 외국영화들(왕가위의 등)이 흥행을 주도하겠지만, 외국영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들 작은 영화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그중 루펜도의 (중국)는 중국사회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읽어내기 좋아하는 서구 비평가들이 반기는 두 임포턴트 남자의 이야기. 가 꼽는 올해 최고의 데뷔작 중 하나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리잔드로 알론소의 (Los Muertos)(아르헨티나)가 주목할 만하다고. 이미 국제영화제 서킷에서 뉴아르헨티나영화의 기수로 꼽히고 있는 알론소 감독의 신작으로, 딸을 찾아가는 한 중년 남자의 여정이라는 간단한 스토리를 신비로운 분위기의 우화로 만들어낸 수작이다. 그 밖에 페르난도 핌케의 (멕시코), 피어 젤리카의 오스카 출품작, (보스니아), 데이비드 플램홀크의 (스웨덴·영국), 루실 하드지파일로빅의 (프랑스), 제시카 하우즈너, (오스트리아·독일), 알랭 기로디 감독의 (프랑스) 등이 눈에 띈다. 의 픽션과 허구를 혼재한 다큐멘터리 스타일에서부터, 의 그림 동화판 호러, 의 리얼리즘과 누아르의 이종 교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실험이 엿보인다. 반면, 리스트에 포함된 미국영화들은 ‘극단의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내면 드라마’라는 미국 독립영화 특유의 소재를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포르로 잡지에 글을 쓰는 중년의 작가와 성에 눈뜬 10대 소년 사이의 사랑이 아닌 우정에 관한 영화, (브라이언 포이저 감독)를 비롯해서 이 영화가 배급사를 찾지 못한다면, 미국 독립영화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데브라 그라닉의 마약중독자 관찰기, 이 대표적이다. 모자의 사랑관계를 고딕영화의 스타일과 유머로 그려낸 아시아 아르젠토 감독의 도 한켠을 거든다. 위노나 라이더, 마이클 피트 등 독특한 분위기로 알려진 스타들이 대거 출현한다고. 지난해 장이모의 을 필두로 예년에 비해 월등한 흥행 성적을 거둔 외국영화들이 올해도 그 바람을 이어갈지, 다큐멘터리의 강세는 어디까지일지, 등 연내 개봉하는 한국영화의 위상은 어떠할지, 질문으로 새해를 맞는다. 미국 배급사들이 부지런히 달리길 바라면서.

13년만의 귀환, <철수♡영희>의 황규덕 감독

‘초등학생 황규덕’은 “신당동의 맹호부대장이었고, 지나가는 여자애들 세워놓고 너 이름 뭐냐고 윽박지르기 일쑤였고, 사립학교 다니는 애들을 굉장히 싫어해서 비만 오면 노란 옷에, 노란 우산 쓰고, 노란 스쿨버스 타고 다니는 애들 집을 끝까지 쫓아가서 초인종을 부수는 것”이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시절 명실공히 “반장, 부반장 해본 적 없고, 선생통인 그들이 싫어할 만한 야당 당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집안에서만큼은 조용하고 생각 많은 ‘방안퉁쇠’였다. 어른이 된 뒤, ‘감독 황규덕’은 등으로 한국의 교육 현실에 문제를 제기했고, 수많은 영화인들의 산실인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를 수년 동안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리고는 긴 휴지기 끝에 다시 대안교육자의 감성을 담아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디지털 장편영화 를 만들어 13년만에 돌아왔다. 시작 자체가 우여곡절이었다. 집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됐지만 제작비를 조달받지 못했고, 사비를 털어 홀로 거듭나야 했다. 그럼에도 타협과 구속은 없었던 영화이다. 타협없는 감독이 그만의 세상을 담아 만든 동화, 의 개봉을 계기로 그를 만났다. -드디어 개봉하게 됐다. 근황은. =지난해 4월경에 완성본이 나와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배급라인에는 다 풀어봤는데, 희한하게 CJ 딱 한 군데에서만 살려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소리를 들었다. 애정을 갖고 분위기를 지켜보자 했고, 7월에 CJ아시아인디영화제에 출품하게 됐고, 후반작업 지원받게 됐고, 약속한 대로 인디영화 전용관 3개관에서 걸리게 됐다. 그리고 다행인 건 언론시사 뒤에 반응이 좋으니까, 다른 멀티플렉스도 걸겠다고 나오고 있다. -여기저기 지면을 보니, 지금 충무로 제작 시스템에 대해서 할말이 많은 것 같다. =새로 판갈이를 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영화계가 발전하려면 돈이 아니라 인재가 필요하다. 내가 영화아카데미에 있으면서 느낀 건 영화적인 사고를 하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 세대들이 한국의 새로운 영화를 위한 틀을 짜내기 시작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고, 가장 무서운 건 디지털 세대 감독들이다. -디지털 매체가 앞으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보는가. -요즘 웃자고 찍는 한국영화 많지 않나. 어느 한컷도 필름다운 것이 없다. 그 비싼 카메라와 필름으로 왜 찍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같은 훌륭한 영화도 HD로 간다. 나만 해도 다음 프로젝트 혹은 평생을 디지털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정도다. 한국의 키네코 시스템도 놀랄 만큼 좋아졌다. 게다가 요즘 극장은 옛날 같지 않고, 작기 때문에 화질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 굳이 자본의 간섭을 받으면서 필름으로 찍을 이유가 뭐가 있나. 무슨 떼돈을 벌겠다고. 내가 꿈꾸는 세상을 표현하겠다고 영화를 하는 거지 영화해서 떼돈 벌겠다고 하나? 그럴 거면 차라리 부동산해서 떼돈 벌지. -이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가 나오는 바람에 지금은 약발이 좀 떨어진 이야긴데, 처음에는 시골 분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길게 있었다. 만든 놈이 이런 거 또 만들면 학교 얘기만 한다고 찍히니까 하지 말자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프로듀서 했던 박민이라는 친구가 같이 하자고 했다. 내가 시나리오를 짜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해서(웃음), 김윤경 작가의 시나리오를 보게 됐다. 그때 마침, 뉴시네마네트워크(NCN)가 출범한 거다. 2억원짜리 프로젝트니까, 워밍업 삼아 한번 해보자 했던 거다. 예전에는 어린애들을 보면 귀찮았는데, 2∼3년 사이 애들이 귀여워졌다. 저렇게 순수하고 맑은 인간들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굉장히 불쌍하게 살고 있구나, 우리에게 중요한 건 저런 애들이나 맑게 늙은 노인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런 감정을 소복하게 넣는 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겠구나 싶더라. 남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영화 못 찍고 방황하고서 지금 만드는 영화가 이렇게 작은 영화냐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조하고 싶지 않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자기만의 질감으로 만들기만 하면 의미있다고 생각하지, 꼭 스케일이 커야 한다는 건 강박관념처럼 느껴진다.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면 많이 달라졌을까. =그런 건 이미 지금 영화에 많이 반영되어 있다. 애당초 얘들이 잘 나가고, 또 잘 나갈 것 같았으면 보편성이 없었을 거다. 그 사회 안에서 나름대로는 존재를 드러내려고 발버둥치지만, 그저 사회의 익명성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희는 조숙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부모님 모두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면서 지원사격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보통으로 살 수밖에 없고, 철수도 횡설수설한 부모 밑에서 말썽꾸러기로 크는 순진하지만 덜떨어진 놈이고. 그런 애들의 삶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신화적 상징성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충분히 소중하게 가꿔줘야 할 싹이라는 생각을 했고, 경쾌한 판타지를 넣고 싶었다. 그래서 철수와 영희의 판타지가 첨가된 거다. 처음 시나리오는 일상적으로 그냥 끝났었다. -원래 작가가 붙인 제목도 였나. =아니다. 나도 얼마 전에야 확인했는데 이란 제목이었다. -질문한 이유가 있는데, 는 무척이나 보편성을 강조하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니 보기보다 그 보편성을 굉장히 센 강도로 강조하는 제목이라는 걸 알게 됐다. =뭐 그렇게 셀 건 없는데. (웃음) 제목에 대해서는 자신이 좀 없다. 카피라이터적인 재능이 별로 없다. 의 원래 제목도 였다. 너무 어필하는 게 없었다. 그래서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라고 배우 오디션 공고냈던 행사 제목이 영화제목이 됐다. 도, 잘 지어진 제목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 제목 안 된다고 했다. 어떤 유명한 카피라이터는 는 되는데 는 안 된다고 하더라. 그런데 나는 ‘철수와 영희가 사랑을 했다. 철수하고 영희하고 사랑한대요’ 하는 데서 출발한 거고, 찍고나서 보니까, 이 영화는 철수와 영희가 노는 이야기가 아니라 철수가 영희를 좋아하는 영화였다. 철수가 주어이고, 영희가 목적어고, 하트가 동사인 거다. 이게 맞다는 생각을 한다. 제목에 대한 칭찬은 한번도 못 들어봤다. (웃음) -실제 가족인 사람들을 영화에 많이 출연시켰다. 그게 이 영화의 어떤 태도처럼 느껴졌다. =‘태도’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30억원짜리 영화가 그런 태도를 보였다면 욕을 먹겠지. 중압감에서 벗어나니까, 가장 순진하게 접근하는 거다. 주변에 있는 가장 편한 사람들한테 부탁을 하는 거다. 어린 영희 부모님으로 출연하는 음악감독님 가족들의 출연도 그렇고, 영희 할머니로 출연하는 주부진씨 부군 되시는 복진오 교수가 할아버지로 나오는 것도 그렇고. 부인이 영화출연한다니까 그냥 촬영장에 오신 건데, 뵙고 나니까 인상이 좋아서 내가 역을 만들어낸 거다. -동물 연기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아이들 연기시키는 것일 텐데, 게다가 한명도 아니고 서른한명이다. = 때 촬영 회차의 거의 절반이 교실이었고, 동선 짜는 건 이미 거기서 다 해봤기 때문에 걱정없었다. 그런데, 질문한 대로 가장 큰 변수가 애들이더라. 고등학생들은 자기가 지금 일을 한다는 걸 알고 겁을 주면 통하는데, 초등학교 애들은 이게 놀이터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아찔했었는데, 내가 운좋게도 사대 출신이어서 초등학생들 교생실습을 하면서 이미 그런 걸 느꼈던 적이 있다. 그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뭐, 개판일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웃음) 어차피 윽박질러서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애들이 노는 대로 인정하고 흘러가는 거다. 아이들이 유지하고 내가 흐름을 타는 식으로. -꼭 4학년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선생님(정진영)이 음악회 무대에서 하는 대사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진지하게도 들렸다. =개인적으로 4학년 때부터 내 사춘기가 시작됐던 것 같다. 이 집단 안에서 의미없이 굴러가는 게 싫고, 내 개성은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에서 문성근이 한 학년을 올려보내면서 하는 말이 사실 그 영화의 주제다. 이 영화에서는 꼬마들의 이 시절이 인생이라는 명제 안에서 중요하다는 걸 정리해주고 싶었다. -세편의 장편영화 모두 학교를 소재로 하고 있다. =누구는 유치원 영화도 찍으라고 놀리는데, 그건 이미 프랑스에서 교육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찍으면서 해봤다. 다시 또 학교영화를 찍을 거냐고 물어보면, 긍정적으로 말하고 싶다. 도 70년대 대학생들이 나오고, 도 그 당시를 겪었던 노근리의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이다. -(명필름) 계획은 어떻게 돼가나. =지금은 이라고 가제를 붙여놨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니까…. 야 2억원 갖고 찍지만, 노근리는 그렇지가 않지 않나. 지금 이야기 중이다. 시나리오는 기본적으로 제작사하고 합의가 됐지만, 나는 이번 여름에 갔으면 좋겠다고 하고, 회사는 2006년 여름에 찍자고 한다. 소재 자체가 비상업적이기 때문에 아직 좀 두고봐야 한다. 중요한 건 자기가 가장 마음 편하게, 그 대신에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같다.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레즈비언 드라마

캐치온 플러스 수·목 밤 10시(1월12일 첫 방영) 오는 1월12일 레즈비언을 소재로 한 드라마, (14부작)가 국내 최초로 전파를 탄다. TV시리즈로는 드물게 1년여를 공들여 제작한 이 드라마는 레즈비언 커플 벳(제니퍼 빌스)과 티나(로렐 홀로먼)를 중심으로, 이성애자 제니(미아 커시너)와 제니를 좋아하는 마리나(카리나 롬바드), 유명세 때문에 커밍아웃을 못하는 테니스 선수 데나(에린 대니얼스), 양성애자 앨리스(레이샤 헤일리) 등이 겪게 되는 삶- 사랑과 이별, 순탄치 않은 가족사 등- 에 대한 스케치다. 제작진은 실제 레즈비언들로부터 ‘사실성’을 인정받는 동시에 일반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는 지점을 찾아내라는 초기의 과제를 레즈비언이 결코 ‘우리’와 다른 ‘그들’이 아님을 역설하는 것으로 풀어냈다. 새로 발견한 욕망(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성적 정체성!) 앞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 동성애 부모가 아이와 가정을 꾸리는 어려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양성애자의 딜레마 등을 전혀 특별하지 않게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그리면서. 이는 프로듀서(아이린 샤이켄과 영화 의 로즈 트로셰)와 주연배우(레이샤 헤일리)를 진짜 레즈비언이 맡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제니퍼 빌스와 에린 대니얼스, 로렐 홀로먼, 팸 그리어는 이성애자, 미아 커시너와 카리나 롬바드는 양성애자로 알려졌다. 중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쉐인으로 분한 케이트 모이닉은 레즈비언으로 보도됐지만, 그 스스로 밝힌 적은 없다). 의 가장 큰 의의는 ‘두 사람이 죽자 살자 사랑해서 행복했네, 혹은 슬펐네’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닥치는 감당하기 힘든 문제 앞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고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선다는 결말을 도출해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칫 외로울지도 모를 그 각자의 길에는 소중한 친구들이 항상 함께할 것이라는 용기를 준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녹록지 않은 현실에서는 혼자가 될 때 혹은 코너에 몰릴 때가 언제든 닥치는 법이니, 가 시사하는 용기는 기대 이상의 안도감을 준다. 는 이런 결말과는 상관없이 ‘레즈비언’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와 화려한(혹은 섹시한) 영상 때문에 미국에서도 방송 전부터 큰 화제가 됐다. 제작 초기 다음 시즌 제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쇼타임은 시즌1의 첫 에피소드가 방영된 직후 두 번째 시즌 제작을 결심했다(시즌2는 쇼타임을 통해 오는 2월 방송된다). 를 본 미국 시청자들은 그동안 동성애자들 사이에서도 소외시켰던 ‘레즈비언의 삶’에 대해 진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레즈비언에 대한 시선이 많은 부분 바뀐 것은 당연지사. “우리는 그동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았던 레즈비언들의 모습을 대신해 보여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통해 레즈비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조금이라도 변했으면 좋겠다”는 출연배우들의 바람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는 미국 여성 커뮤니티 ‘애프터 앨렌’(www.afterellen.com)으로부터 ‘2004 최고의 TV시리즈’로 선정되기도 했다. <피플>은 ‘2004년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제니퍼 빌스를 꼽았다( 열풍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인터넷을 통해 먼저 본 마니아들은 가 홈CGV의 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홈CGV를 통해 지난해 4월 최초로 동성애자(주로 게이인)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가 방송됐다. 는 동시간대 케이블 시청률 1위라는 큰 인기를 얻었다. 하나 이것만을 두고 가 무리없이 시청자들에게 찾아갈 수 있다는 장밋빛 예측을 내놓긴 힘들다. 아직도 지상파 드라마들은 동성애자를 ‘우리와 다른 그들’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트콤 에서 권오중과 이창훈, 드라마 에서 장금과 연생의 관계에서 ‘동성애’ 코드가 보이는 듯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 확실한 ‘물증’을 찾기에 갈 길은 멀다. 이는 국내 최초로 커밍아웃을 했던 홍석천씨의 경우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커밍아웃 이후 브라운관 밖으로 밀려났던 그가 지난해 에서 동성애자 역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이들은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점쳤었다. 하지만 지난 1월5일 첫 방송을 시작한 속의 다소 호들갑스러운데다 나약하며 여성스러운 배역 찰리는 오히려 후퇴한 느낌을 갖게 한다. 누구도 의도하진 않았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속 홍석천에게는 캐릭터 자체보다 ‘게이’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꽃미남들의 ‘쭉빵’ 몸매와 수위를 넘나드는 섹스신에 있었다는 점도 가 넘어야 할 힘겨운 산이다. 주시청층인 여성들에게 ‘꽃미남’은 또 그들의 ‘새끈한’ 몸매를 감상하는 일은 그들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게 해줄 만큼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과 같은 성별의 여성들이 벌이는 애정행각을 두고도 ‘꽃미남’들에게 보였던 만큼의 신비감과 관대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를 국내에 들여온 캐치온 플러스의 이충효 매니저는 “남자 동성애가 좀더 일반적이긴 하잖아요. 그럼 면에서 는 조금 낯설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코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는 나 등에 시청자들이 보여준 성원을 감안해보면 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예측했다. 의 캐릭터 열전 헷갈리지 말자, 주요 등장인물! 벳(제니퍼 빌스) 캘리포니아 미술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정렬적인 커리어우먼이다. 티나와 7년째 사귀고 있다. 제대로 된 가족을 만들고 싶어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 커플에게 쉽게 정자를 기증하는 트인 남성을 아직 찾지 못했다. 티나(로렐 홀로먼) 벳의 연인. 임신을 위해 노력 중이다. 아이를 갖겠다는 일념에 잘 다니던 영화사도 그만뒀다. 일보다 가정이 소중하다고 믿고 있는 인물. 제니(미아 커시너) 남자친구 팀과 함께 살기 위해 LA로 온 소설가. 이웃의 동성애자 티나와 벳을 만나며 문화적 충격을 경험한다. 매혹적인 마리나의 적극적인 대시 때문에 자신의 성정체성과 팀과의 사랑 사이에서 고민한다. 팀(에릭 마비우스) 제니의 애인. 대학에서 수영코치를 하고 있다. 제니가 마리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자 괴로워한다. 마리나(카리나 롬바드) 커피숍 ‘플레넷’의 주인. 제니에게 관심이 있다. 제니는 이성애자라는 친구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제니를 계속해 유혹한다. 킷(팸 그리어) 이성애자. 음악가다. 벳과 복잡한 과거를 공유한 이복자매. 현재 알코올중독과 싸우고 있다. 데나(에린 대니얼스) 유명한 프로 테니스 선수. 커밍아웃을 하면 팬들로부터 외면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려 노력한다. 쉐인(케이트 모이닉) 헤어드레서. 보이시한 매력이 돋보이는 바람둥이다. ‘사랑’엔 결코 빠지지 않는다는 그녀는 늘 다른 여자를 만나 즐긴다. 앨리스(레이샤 헤일리) 양성애자 저널리스트. 자신이 ‘남자를 만날 때와 여자를 만날 때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성애자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리 평탄한 삶은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

눈물의 의미를 아는 희극지왕, <쿵푸허슬>의 주성치

주성치가 쿵후영화를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2002년 로 처음, 폭이 넓은 한국 관객과 만났던 주성치는, 다시 한번 쿵후의 부흥을 꿈꾸는 그만의 소망을 스크린 위에 비급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주성치가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은 갱이 되고 싶은 청년 싱이 희생과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깨닫고 전설로만 전해지던 무공 여래신장을 터득하는 영화. 중국 상하이에서 극비리에 촬영된 은 이소룡을 숭배해서 무도인이 되고자 했던, 그리고 결국엔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던, 주성치의 오랜 꿈이 결정으로 맺힌 영화다. “진지한 쿵후액션영화” 에 홍콩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부어넣은 그는 지금 또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의 사형사제들과 칠소복의 일원이었던 원추를 거느리고 한국에 도착한 주성치를 만났다. 편집자 나는 주성치 마니아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주성치를 좋아한다, 믿는다. 그의 영화가 나온다면, 장르가 무엇이건 본다. 어떤 이야기이건 무조건 본다. 주성치가 출연한다면, 일정 정도의 즐거움은 확보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건 성룡이나 이연걸의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조금 차이가 있다. 성룡이나 이연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액션이다. 지나친 특수효과만 쓰지 않는다면, 영화가 엉망이어도 그들의 액션만 많이 볼 수 있다면 대체로 만족한다. 주성치는 액션배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전까지는 아니었다. 주성치는 말장난과 슬랩스틱으로 관객을 즐겁게 한다. 광둥어로 구사되는 고유한 개그도 희한하게 즐겁지만, 짐 캐리 이상의 표정연기와 패럴리 형제 이상의 엽기적인 상황으로 연속되는 주성치의 영화는 끊임없이 웃음을 안겨준다. 액션이 아니라 언제나 코미디로 타국의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성치는 그 어려운 일을,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해왔다. 주성치가 홍콩 최고의 스타를 넘어서, 전세계에 열광적인 마니아를 거느리는 배우가 된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다. 은 누구나 반기는 오락영화 하지만 주성치가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을까? 성룡과 주윤발, 이연걸처럼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전 세계인을 사로잡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만국공통의 액션이 아니라 각 나라, 민족에 고유한 웃음으로 승부하는 주성치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많을 때는 1년에 1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던 시절의 주성치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룡이 로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주성치 역시 착실하게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왔다. 아니 이미 이루어졌다. 등 히트작을 양산하던 주성치는, 마침내 1994년 에서 이력지와 공동연출을 하게 된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직접 만들게 된 주성치는, 언제나 꿈꾸어왔던 ‘쿵후’를 와 에서 주요한 소재로 사용하게 된다. 아니 쿵후의 정신을 그대로 영화에 담게 된다. 주성치 특유의 웃음에, 고난도의 액션이 더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에서 어린 싱이 거리에서 비급책을 사서 연습하는 장면은, 주성치의 어린 시절 그대로다. 주성치의 꿈은, 이소룡 같은 액션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어린이 쇼의 사회자를 맡으면서 천부적인 유머감각을 선보이고 최고의 코미디 배우가 되었지만, 결코 꿈은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쿵후 영화’를 만들 날을 기다렸다. 주성치는 이미 최고였지만, 너무나도 신중하고 철저했다. 전까지는, 단지 ‘자신감이 없어서’ 쿵후 영화에 도전하지 않았다니까. 그 먼 길을 돌아올 정도로 주성치는, 섬세한 완벽주의자다. 주성치를 만나면, 그가 얼마나 유머가 넘치는 한편 철저한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한때 은인이었던 이수현을 비롯하여 이력지, 오맹달과도 헤어진 주성치는 ‘인간관계가 서툴다’라는 말을 듣는다. ‘고독노인’이란 별명처럼, 그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인터뷰에서도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신중하게 자신이 할말을 고르고, 어떤 선까지만 이야기를 한다. 타인을 웃기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다. 생각이 없거나, 너무 많거나. 주성치는 명백한 후자이고, 지나칠 정도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배우이며 감독이다. 자신만의 성을 소유하고, 그 성에서 만들어낸 무엇으로 세계를 정복해가는 대중 예술가다. 컬럼비아의 자본으로, 세계시장을 목표로 만들어진 은 오락영화의 걸작이다. 이소룡과 찰리 채플린을 존경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은 웃음과 액션, 그리고 감동까지 모든 즐거움을 안겨준다. 엽기적인 웃음의 코드를 약간 줄이고, 액션의 강도를 높인 것은 주성치의 취향만이 아니라, 일반 관객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변화다. 그동안 주성치의 영화에 대한 반응은 극단적이었다. 너무 좋아하거나, 썰렁하거나.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주성치 영화는, 한국에서는 열광적인 마니아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가 그런 선입견을 깼고, 마침내 은 누구나가 반기는 오락영화가 되었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좋은 의미로 할리우드적이 된 것이다. 할리우드영화의 패러디를 넣은 것이 단지 ‘보편적인 커넥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은 누구나가 알고 있고, 누구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과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다. 무협지의 전통적인 플롯으로, 한때 길을 잘못 들었지만 회개하면서 최고수가 되는 남자의 역경이 그려진다. 우리의 꿈, 아픔을 웃음으로 뒤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이 승리한다. 혹은 ‘사랑’이 승리한다. 권선징악은 너무나 뻔한 것이지만,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초현대적인 영웅이라면, 일면적인 선과는 약간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악인지, 선인지 구분하기 힘든 주인공들은, 세기말부터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왔다. 그런 복합적인 영웅이 매력적인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의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라는 대사, 단지 사랑을 위하여 대의를 저버리는 의 인물들에게 끌린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이나 사랑을 위하여 헌신짝처럼 세상을 버릴 수 있는,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영웅도 이제는 너무나 흔하다. 그게 옳다고 우길 생각도 없다. 그보다는 의 싱처럼, 폼나게 살고 싶었지만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생명, 사랑을 어느 순간 깨닫는 영웅이 더욱 가슴을 울린다는 것을 안다. 결국은 돌아와야만 하고, 결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리, 혹은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영웅이, 21세기에는 필요하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주성치가 말하는 ‘쿵후’의 정신이다. 선이 악을 물리치고, 자신의 본질을 깨닫는 것. 주성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언뜻 보기에는 너무 특별한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주성치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소시민 혹은 빈민층이거나 정상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구렁텅이로 떨어져내린다. 그 바닥에서 절치부심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어가며 다시 시작한다. 에서 독사에게 입술을 물리거나, 야수에게 두들겨맞는 것 정도는 이전 주성치 영화의 고난과 비교해본다면, 정말 사소한 걸림돌 정도다. ‘나는 코미디를 엄숙한 제재를 사용하여 연기한다’는 말처럼, 주성치는 가장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코미디로 바꾸어버린다. 그 깊고도 섬세한 내면으로 들어가도 좋고, 아니어도 그냥 웃을 수 있다. 주성치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소인물의 감정과 소시민의 마음의 소리’라는 말처럼, 그의 영화에는 작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한껏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주성치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고, 이국에서도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으며, 지금 이란 걸작을 만들어낸 힘이다. 지금 주성치는 또 한 단계를 넘어서,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매년 주성치의 영화를 보는 것뿐이다. 에서 까지, 3년이란 세월은 너무 길었다. 주성치의 진지한, 혹은 진지하지 않은 ‘쿵후 영화’를 다시 만나고 싶다.

2005년 닭띠해 기념 프로젝트, 닭살의 유혹

전격 인터뷰! 닭, 드디어 부리를 열다 닭띠해를 맞아 인간과 모처럼 인터뷰한다며 인간언어 번역기를 달고 나온 닭은 솔직히 모양새가 처참했다. 그를 끌고나온 이가 살짝 귀띔한 바에 따르면, 치킨집에 가는 길에 “나는 닭이 아니다”고 외치며 분신을 시도하다가, 살짝 그슬리기만 하고 살아남은 전직 바비큐 닭이라고 했다. 앞으로 황우석 박사의 연구실 닭이 돼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포부를 지닌 그 닭은, 정말 닭살이었다. 접대 멘트로 12년 만에 축하 어쩌고 했더니, 닥치고 질문이나 하라고 마구 쪼아댔다. 성질머리 하곤. 누가 닭 아니랄까봐. -씨네21 | ‘닭대가리’라는 말 아나? =닭 | (기자의 머리를 쳐다보며) 그게 바로 요 아니냐? 그 말을 만든 건… 아무래도 소머리의 음모 같다. 지렁이도 있고, 아메바도 있다. 아무렴 우리가 걔네들보다도 못하단 거냐? 머리통 크기 작다고 머리 나쁜 줄 아는데 우리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속담은 아나? “닭대가리가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마라.” 봐라. 우리 머리가 소꼬리보다 낫다는 거 아니냐. -씨네21 | 소꼬리가 더 비싸고 좋은 거 아닌가? 어째 그 속담, ‘메이드 인 양계장’ 같다. =닭 | 아니다. “소, 닭 보듯 한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다. 그게 소가 닭을 질투해서 본단 소리다. 우리가 너무 뛰어난 동물이었던 게 죄다. 예부터 닭은 영물이었다. 전통혼례 잔칫상에도 닭 올라갔다. (기자 눈빛을 보고) 누드로 올라간 거 아니다. 우리도 꽃단장하고 올라갔다. 그리고 귀한 사위 오면 씨암탉 잡아 대접했다. -씨네21 | 우리 장모님도 내가 가면 닭백숙 잘해주신다. 우리 마누라도. =닭 | 그런데 왜 씨암탉 잡아주는 줄 아나? 몸보신하고 힘내서 우리 딸에게 아무쪼록 힘써 잘해라. 뭐 그런 뜻이다. 맞다. 토종 천연 기혼자용 비아그라다. 그뿐 아니다. 모가지를 비틀려가면서도 새벽을 오게 만든 게 우리다. -씨네21 | 그 말 좋아한 누군가의 별명이 닭대가리였던 거 같은데…. =닭 |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그건 우리 닭에 대한 모독이다. (…) 세상에 귀신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나? 우리다. 우리가 “꼬끼오!” 한번 질러봐라. 귀신도 사색이 돼서 도망간다. -씨네21 | 귀신은 원래 얼굴이 사색이다. 그리고 그건 닭 울음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해가 뜨는 줄 알고 놀라 도망간 거 아닌가? =닭 | 잘 모르는 소리. 옛날 어른들은 동네에 귀신 나오고 그러면 내 피를 문에 발랐다. 그러면 귀신이 못 들어왔다. 귀신에게 내 울음소리는, 뱀파이어에게 마늘이요, 십자가다. 귀신에게 내 피는 뱀파이어한테 성수와 같았다. 귀신들 사이에 이런 속담도 있다더라. 닭피 보고 놀란 가슴, 새발의 피 보고 놀란다. -씨네21 | 뭐냐? 그럼 우리나라 버전 를 찍으면 주인공인 귀신헌터가 닭이냐? =닭 | 맞다. 영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런 것도 문제 있다. 미운 오리 새끼, 알고 보니 백조였다, 이래선 안 된다. 알고 보니 닭이었다. 이랬어야 맞다. 아니, 커서도 밉상인 애들은 죽으란 거냐? 외모지상주의를 설파하는 그런 동화 문제 있다. 알고 보니 닭이더라. 얼마나 좋냐? 왜 이런 동화는 다시 쓰기 안 하나 모르겠다. 그리고 내 생각에 도 원래는 이었다. 생각해봐라. 무슨 애들이 돈이 많아서 만날 호두를 까고, 호두를 까는 인형을 갖고 놀았겠나? 집집마다 있는 닭털을 뽑으며 놀았으면 놀았지. 농경사회에서 애들도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도왔다. 말 되지 않냐? -씨네21 | (잠시 침묵) =닭 | 새해에는 모두 내 꿈 꿔라. 꿈에 나만 나와봐라. 출셋길 열린다. 이름 날린다. 개꿈과 차원이 다르다. 닭 꿈 꿔… 꼬꼬 꼬꼬 꼬꼬꼬. 다행히 인간언어 번역기 고장으로 뒷말은 듣지 않아도 됐다. 6가지 키워드로 엮어본 닭의 모든 것 1. 닭과 상징- 태초에 닭이 있었으니 농경사회에서는 때를 잘못 맞추는 것만큼이나 재수없는 일은 없다. ‘생뚱맞게’ 우는 닭은 사회의 적이다. 닭이 초저녁에 울면 세상이 어지러워질 징조며, 심지어는 낮에 울면 잡아죽여야 한다고 했다. 또 ‘닭벼슬이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라’거나 ‘닭의 새끼 봉이 되랴’는 속담이 있다. 다른 가축과 비교하면서 닭을 하찮은 동물로 여겨 경망스럽다거나 왜소하다고 업신여겼던 것이다. 서양에서도 닭은 딸을 의미하기 때문에 닭꿈을 꾼 임신부는 통곡했으며, 밤에 우는 닭은 마녀들과 함께 처형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사회 이전, 닭은 재앙을 물리치는 동물이고, 천지를 여는 동물이었다. 제주도의 창세 신화에서는 세상이 혼돈에 잠겼을 무렵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쳐 크게 우니” 빛이 열리고 천지개벽이 시작됐다고 한다. 중국 남방의 묘족들도 태초에 ‘해와 달을 만든 수탉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신화에서는 닭울음 소리가 세상의 종말을 알린다. 사방에서 검은 닭, 붉은 닭, 황금빛 닭이 울자 신과 인간의 나라를 떠받치는 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혼돈에 빨려든다. 서로 정반대의 신화지만, 닭을 혼돈과 질서라는 두 세계의 경계를 알리는 동물로 여겼다는 점은 같다. 닭울음 소리는 언제나 변화를 알리는 징조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전생에 닭으로 태어나 살생을 일삼는 매를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초에 닭과 호랑이의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여 액을 물리치려고 했고, 정월 대보름이면 집집마다 닭이 몇번 우는지 꼽아본다. 닭이 열번 이상 울면 그해에 풍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액이 찾아오면, 닭을 잡아 귀신에게 바치고, 모든 죄와 병을 닭에게 전가한다. 우리나라는 푸닥거리를 할 때 닭을 죽여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다 묻었고, 아프리카의 부두교들은 제의를 지낼 때 닭을 잡아 사방으로 둘러 보여준 뒤 목을 따서 신에게 바친다. 최소한의 모이만 먹고, 고기와 달걀을 주었던 닭은 죽을 때도 한 집안의 질병과 재앙을 모두 지고 떠난다. 2. 닭고기를 위한 과학- 렌즈 낀 병아리, 털없는 닭 하버드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미국의 한 젊은 농장주는 닭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거나 스트레스를 받자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병아리에게 장밋빛의 콘택트렌즈를 끼운 것이다. 황소는 붉은색을 보면 흥분하지만, 닭은 붉은색으로 앞을 가리면 양처럼 순해진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프랑스에서는 닭들에게 선글라스를 씌우는 방법을 실험했지만 닭들의 비협조로 번번이 실패한 일이 있었다. 이에 비해 콘택트렌즈는 반영구적이고, 부작용도 없어 일일이 렌즈를 끼워야 하는 번거로움과 돈이 좀 든다는 것만 극복하면 싸움 닭을 순한 닭으로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또 얼마 전 이스라엘에서는 털이 없는 벌거벗은 신종 닭을 개발했다. 덕분에 도계 과정에서 가장 번거롭고 세균 감염 확률이 높았던 닭털 뽑는 과정이 생략됐으며, 털이 없어 시원한 탓에 매년 여름이면 더위먹은 닭들이 줄줄이 참사를 당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게 됐다. 1평방미터의 좁은 닭장에서 가능한 한 좋은 고기와 많은 달걀을 얻어내려는 노력은 이해가 가지만, 닭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멀쩡한 닭을 병신으로 만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기껏해야 아이큐 7∼9 정도의 닭들이 무슨 생각이 있겠냐고? 그러나 품위없는 연구에만 상을 주기로 유명한 ‘이그 노벨상’(Ig Nobel Prizes)이 2003년 선정한 ‘닭들은 아름다운 사람을 선호한다’는 연구에 따르면 분명히 닭들도 생각이 있다. 스톡홀름대 연구팀은 닭들은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좋아하고, 그것도 예쁜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멀쩡히 성 구별은 물론 외모 구별까지 할 줄 아는 닭들에게 누가 콘택트렌즈를 씌우려 하는가? 범인은 프라이드 치킨에 길들여진 우리이다. 3. 닭과 요리- 켄터키 치킨이냐, 백숙이냐 조류독감에 대한 세계적인 공포에도 굴하지 않고 국내에선 2005년에도 닭 프랜차이즈 사업이 번창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 포장마차 최고의 안주인 닭똥집과 닭발만 떠올려봐도 닭은 버릴 게 없는 식재료 중 하나인데, 부위별 선호도는 다를지언정 동서양 닭요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 먹어도 실패할 확률이 적은 음식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닭을 먹는 곳은 단연 ‘켄터키 프라이드’를 내세운 미국. 패스트푸드의 왕국답게 국민 한 사람이 1년간 먹는 닭고기 양이 40kg에 가깝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와인과 향신료를 이용해 닭요리를 한다. 로스트 치킨처럼 닭을 통째로 구워먹거나 치킨 샐러드같이 여러 가지 채소를 곁들여 먹는다. 닭육수가 음식의 베이스로 쓰이는 요리도 많다. 서양에 프라이드 치킨이 있다면, 동양에는 인도 탄두리 치킨이 유명하다. 요구르트와 고추, 정향, 계피 같은 20여 가지 재료를 넣은 양념을 묻힌 닭을 탄두리에 구워내 맛과 향이 독특하다. 세계에서 닭을 가장 많이 키운다는 중국에도 우리에게 친숙한 깐풍기가 있다. 중국 요리 라조기, 류린기의 ‘기’가 ‘닭 계’(鷄)임을 모르는 이들이 이제는 많지 않을 것 같다. 삶고, 볶고, 튀기는 조리법에 있어서 우리나라도 빠지지 않는다. 삼계탕, 용봉탕 같은 보신음식부터 닭죽, 닭찜, 닭갈비, 매운 불닭발, 닭꼬치까지. 그야말로 닭이 부위별로 제대로 대우받고 사랑받는 곳이 대한민국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참고 4. 닭과 책- 제목에 ‘닭’ 붙어 눈길 끄는 책 “1993년 미국에서 출간된 이후 5년 동안 1천만부 이상 팔려”, “ 150주 연속 베스트셀러와 미국 역사상 가장 빨리, 가장 많이 팔려 ‘3초 만에 한권씩 팔린 책’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소개글이 눈에 띄는 를 먼저 거들떠보자. 감동적인 단편을 묶은 이 책은 국내 베스트셀러 반열에도 올라 다른 출판사에서도 같은 많은 ‘닭고기 수프’를 만들어냈다. 명실상부 ‘닭’ 제목을 붙인 대표서적인 셈. 중국 작가 류진운이 쓴 도 주목할 만한 소설이다. 등 3가지 중편을 담은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의 고단하고 쓸쓸한 인생을 풍자를 섞어 풀어낸다. 일본 혼다자동차 회사의 창시자, 혼다 슈이치로의 경영철학을 우화로 엮은 는 닭의 습성을 통해 혼다 경영의 비밀을 보여주며, 전통적인 민속놀이인 닭싸움을 통해 엿보는 아이들의 자존심 대결을 다룬 그림책 도 있다. 2005년 신간인 에서는 어학연수 비용을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20살에 시작한 닭꼬치 노점상을 44개 가맹점으로 성장시킨 장정윤의 성공기가 새로운 삶의 활력소가 필요한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5. 닭과 통계- 4조5천억원 시장이 ‘닭’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닭은 총 100조 마리. 닭을 가장 많이 사육하고 소비하는 나라는 ‘육류의 천국’ 미국이며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는 중국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사람당 일년에 약 10kg의 닭고기를 소비하는데, 이를 위해 국내에서 도축되는 닭은 한해에 5억 마리, 수입되는 닭고기는 8만여t(2003년 기준)에 이른다. 1970년대 일인당 1.7kg에 불과하던 국내 닭고기 소비량은 1980년대 통닭과 맥주를 파는 ‘치킨집’과 외국 패스트푸드 전문점이 들어서면서 6.7kg으로 뛰었고, 1990년대 들어 소규모 창업 바람이 불면서 한해에 10%씩 증가했다. 현재 국내 닭고기 시장 규모는 4조5천억원, 관련 브랜드는 200여개, 매장 수는 3만5천개에 달하며 치킨 소비자의 80%가 어린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닭을 구매하는 기업은 KFC, 2위는 맥도널드다. 햄버거 기업인 맥도널드가 2위로 급부상한 것은 1979년 닭고기 가슴살로 만든 메뉴 ‘맥너겟’을 내놓으면서부터. 맥너겟은 닭이 ‘마리’가 아니라 ‘부위’로 판매되는 계기가 됐는데, 현재 전체 닭고기 거래량의 90%가 부위별로 판매된다. 가로 30.5cm, 세로 46cm 우리에 4∼5마리의 병아리를 넣고 9주 동안 키워 1.7kg의 닭을 만드는 ‘현대 양계 기술 표준’은 인간을 위해 동물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매년 닭을 키우거나 닭털을 뽑는 일을 하는 노동자 100명당 23.2명이 다치거나 병을 앓는데, 이는 광산이나 건축 공사장 사고발생률의 2배나 되는 수치다. 유럽인들은 이런 ‘산업용 닭’보다는 13∼14주에 걸쳐 비타민이 풍부한 곡물을 먹이고 운동을 시켜가며 키우는 ‘마당에서 자란 닭’을 선호하며 프랑스인들은 40일 동안 키우고 흰 천으로 포장한 뒤 생산지를 표시해 판매하는 닭을 최고로 꼽는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해에 소비하는 달걀의 양은 1인당 187개다. 6. 닭과 영화·드라마- 최우수 닭 작품상은 ? 신사숙녀 여러분, 2005년 닭의 해를 맞아 그동안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닭들을 시상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본격적인 시상에 앞서 닭들의 권리 신장에 도움을 준 인간에게 수여하는 공로상 수상자가 발표되네요. 네, 의 주인공인 이영재와 한지은이 공동 수상자입니다. 평소 아메바와 더불어 지능을 심하게 의심받는 닭을 ‘사랑스런 동물’로 격상시키는 데 공헌했죠. 영재는 지은에게 틈만 나면 “닭대가리, 조류!”라고 놀렸는데요, 올 하반기 “애기야!”가 등장하기 전까지 “닭 대가리”는 연인을 부르는 가장 황홀한 애칭이었죠. 짝짝짝. 이번 시상식에서는 특히 최우수 연기상 부문 후보들의 경합이 뜨겁습니다. 영화 와 에서 삼계탕으로 열연한 닭들이 화면에 보이시죠? 연인들의 화끈한 하룻밤을 위해 기꺼이 보양식이 된 두닭의 삼계탕 연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수상자가 발표되네요. 삼계탕은 삼계탕인데, 의 삼계탕이군요. 심사위원들은 의 삼계탕이 육친의 정,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의 매개로 등장해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하는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고 극찬합니다. 영화 는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자료 화면이 나오는데요, 이른바 ‘닭 와이어신’ 촬영에 참여한 스탭의 증언을 들어보시죠. “화면에서 보이는 닭보다 실제 현장의 닭이 더 무서웠습니다. 그들은 밤에는 활동을 안 해 결국 밤신을 낮신으로 전환하게 만들 정도로 가공할 힘을 발휘했으며 주변 1km는 너끈히 집어삼키는 냄새와 깃털로 인해 맨정신에 밥을 먹고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스크린 안팎을 넘나들며 닭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 역시 작품상 탈 만하네요. 외국어 영화상은 젊은 여성을 ‘영계’라 부르는 한국인의 습속이 서양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White Chicks), 닭다리가 깜찍하고 재미있는 탈것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이 공동 수상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국내에서 과 같이 닭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 제작되지 않는다는 건데요, 영화계 종사닭들의 각성이 요구됩니다. 끝으로 를 위해 촬영장에서 대기하다가 급변한 환경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절명한 닭들을 위한 묵념으로 시상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 같이 묵념!

<말아톤>, 섬세한 연출력과 연기가 자아내는 감동

1월 1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영화 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다. 많은 취재진들이 몰린 이 날 시사회에는 감독 정윤철, 주연을 맡은 배우 조승우, 김미숙을 비롯해 이기영, 백성현이 무대인사에 나섰다. 이 첫 장편 데뷔작인 정윤철 감독이 "많은 분들이 큰 기대를 하셔서 부담스럽지만 잘 봐달라"면서 인사말을 열였고, 자폐증을 앓고 있는 20세 청년 '초원'역을 맡은 조승우는 "데뷔 이래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언론 시사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 것은 처음"이라며 소감을 밝혔다. 시사회에는 영화의 실제 모델인 배형진군이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영화를 관람했으며, , 으로 조승우와 인연을 맺은 정일성 촬영감독도 함께 했다. 은 이미 TV와 책을 통해 소개된 실제 인물 배형진군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로 자폐증 청년이 스스로의 힘으로 42.195km를 완주해내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다. 영화는 자칫 신파로 흐르기 쉬운 소재를 섬세하게 다루어 보는 이들의 감정을 조용하지만 깊게 자극한다. 정윤철 감독은 실제 모델인 배형진과 함께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1년간 마라톤을 했으며, 배우 조승우 역시 감독과 함께 실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이런 준비 과정이 밑바탕이 되어 에서 가장 중요한 달리기 장면은 생생하고 감동적이다. 햇빛과 바람, 음악이 조화를 이룬 의 인상적인 장면은 와 의 촬영을 맡았던 권혁준이 담당했다. 주연을 맡은 두 배우 조승우, 김미숙의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등의 많지 않은 출연작에도 불구하고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조승우는 자폐증 청년이라는 쉽지 않은 배역을 맡아 감정의 과잉 없이 그 역을 잘 소화해냈다. 자폐증에 걸린 자식을 키우며 쉽지 않은 인생을 사는 어머니 역을 맡은 김미숙 역시 자연스러운 연기를 통해 조승우와 함께 영화의 한 축을 지탱한다.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 인상적인 촬영 등이 조화를 이룬 영화 은 한국 영화의 언론 시사회에서는 이례적으로 관객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은 시네라인-투 제작,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배급으로 오는 1월 27일 개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