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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2005 한국 호러영화 [2] - <레드 아이> <여고괴담4: 목소리>

‘열차 빙의’ 16년 전 죽은 영혼들이 깨어난다, *시놉시스 1988년 7월16일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내는 대형 열차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16년 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지막 운행을 위해 여수로 떠나는 무궁화호. 첫 근무를 위해 이 기차에 오른 열차승무원 미선(장신영). 승객이 하나둘 객차에 오르고 서울을 출발한 열차는 어느 순간 급정거한다. 잠시 뒤 열차의 운행은 재개되지만 그때부터 기차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미선은 열차 곳곳에서 88년 사고 당시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출발시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얼굴의 승객도 나타난다. 동시에 원래 탑승한 승객이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사실 이 열차에 오른 승객은 대부분 과거의 열차사고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 사고 당시의 상황과 후유증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가 복잡하게 뒤섞이면서 열차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계속 달린다. *모티브 2003년 태창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인 의 시나리오에서 김동빈 감독은 ‘달리는 기차’라는 제한된 시공간에 먼저 흥미를 느꼈다. 마지막 운행을 앞둔 현실의 열차와 유령열차라는 설정을 만들고 그 열차에 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KTX나 비행기를 주로 이용하는 속도제일주의 사회에서 교통수단으로 점점 예전의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는 열차의 모습이 의 출발점이 된다. 촬영 중에 폐선로 장면의 무대가 된 정선 구절리가 실제로 폐선로가 되어버린 일이나 통일호가 없어지고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만 남은 철도체계와 같은 현실은 이를 반영한다. 기차를 소재로 한 호러는 흔치 않다. 김감독이 알아본 사례 중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환상특급 중 이라는 에피소드 정도. 노부부가 유령열차를 기다리는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도 유령열차가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에서는 단순히 인간과 유령의 빙의가 아닌 기차와 유령열차간의 ‘빙의’가 시도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정한 시공간이 다른 시공간에 밀려들었을 때, 그 시공간은 두곳의 혼재된 모습을 지닌다. 선로가 겹쳐지듯 두 열차가 하나가 되었을 때, 유령과 현실의 승객이 서로 대립하는 구도가 아니라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든다. 따라서 이렇게 시공간을 포개놓을 때 인간과 유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라는 기차의 종착역이다. *공포의 방법론 1년간의 사전조사, 8개월간의 세트 제작, 6억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의 열차 세트. 똑같은 공간적 구성을 피하기 위해 침대차, 스낵카 등의 설정을 도입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기차 세트는 ‘빙의’ 뒤에는 최소한의 불빛만 존재하는 어둠과 공포의 공간으로 돌변한다. 는 유혈이 낭자하는 슬래셔무비는 아니지만 열차가 유령열차로 변하면서 피로 물드는 단 한 장면을 위해 준비된 300리터의 피도 관객을 놀라게 할 요소. 특정한 유령이 나타나 승객을 살해하는 게 아니라 검은 물체 같은 것이 나타나 승객을 해치우는 컨셉은 “기차라는 공간이 사람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보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와 연결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산 자와 죽은 자의 구분이 불명확해지고 기차에 같이 올랐던 일행이 자신을 해하는 존재로 돌아온다는 구조는 긴박감을 조성한다. 기차와 유령열차가 합체되는 ‘빙의’장면과 열차와 열차가 맞부딪치며 통과하는 종반부는 CG로 처리되었다. CG를 맡은 NIG의 여인수 팀장은 “배경 자체를 풀 3D로 만들어서 처리한 장면이 두컷 정도”라고 밝혔다. 그는 가장 공들인 작업으로 열차사고 때 사람들이 더미로 무너지는 장면을 꼽았다. 전반부에 보여질 열차사고의 생지옥을 그린 이 장면은 이후 본격적인 공포의 전초전이 된다. 기존의 몰핑 기법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사람들이 불타 죽은 재가 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오리지널리티 4시간이라는 영화 속의 운행시간, 기차라는 폐쇄공간은 라는 호러의 특징이 된다. 이러한 긴박하고 한정된 상황 때문에 미스터리물이나 액션 장르에서 기차를 소재로 한 영화는 있었다. 한국호러영화로는 처음 기차를 주무대로 삼은 는 동일한 공간이 반복되는 요소나 앵글을 제대로 잡아낼 수 없을 정도의 협소한 공간적 특성 때문에 연출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열컷 넘게 가야 하거나 풀숏은 복도에서만 가능한 상황”이 빈번히 주어졌다. 여덟량으로 이루어진 기차를 빌려 2주 정도 촬영한 운행장면은 한번 NG가 나면 다음역까지 기차를 보냈다가 기계로 돌려서 와야 하는 번거러움으로 제작진을 괴롭혔다. 한편 의 이야기 구조는 서구적인 호러의 기본공식에서 벗어나는 느낌이다. 종반부에 드라마가 강조되면서 결국 공포는 특정한 무서운 존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주체가 느끼는 서로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이며, 이것이 나중에 다른 감정으로 바뀔 수 있다는 드라마의 결론은 동양적 인과응보론에 가깝다. 순환적 구성으로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캐릭터간의 관계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한마디로 “1999년 을 만들 때만 해도 지금처럼 부담은 없었다. 좋은 원작소설과 영화가 이미 존재했고, 처음 하는 시도라 공포라는 장르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식도 부족했다. 그때는 기대도 많았지만 평균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현재는 1년에 5∼6편씩 호러가 만들어지는 상황이다. 현 상황에서 독창성이 없는 호러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장르적으로도 두 번째 시도이기도 하고. 요즘 사람들은 예전만큼 기차를 타지 않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젊었을 때, 특히 기분이 우울할 때면 밤에 기차를 많이 탔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면 다른 기분에 젖거나 묘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마지막 열차에 오르는 기분으로 를 본다면 관객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야, 나! 내 목소리 안 들리니?”, *시놉시스 영언은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소녀다. 출장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영언에겐 선민이 유일한 친구. 선민은 영언과 달리 물심양면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 구김살이 없고 친구가 많지만 그에게도 영언과 영언의 노랫소리가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런 영언의 노래연습을 곧잘 늦게까지 기다려주던 선민이 먼저 집에 돌아간 날, 영언은 누군가에 의해 하얀 악보 모서리로 목이 그어져 죽는다. 영언은 이것이 꿈이었다고 믿지만, 이튿날부터 영언의 존재는 아이들에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나야, 나! 내 목소리 안 들리니? 나 안 보이니?”라는 애타는 외침을 유일하게 듣는 사람은 선민뿐이다. 선민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영언이 죽은 게 아니라 믿으며 앞뒤 상황을 알아보고자 나선다. 그런 선민에게 평소 존재감이 없던 한반 친구 초아가 자신은 어려서부터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영언의 목소리가 들린다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학교 기계실 안에선 영언이 생전에 엄마처럼 따랐고 그런 영언을 편애했던 음악선생 희연의 시체가 발견된다. 이어 학교 엘리베이터 안에서 덜컥 나타나는 영언의 시체. 이제 선민은 귀신이 된 친구와 대화하기를 꺼리고, 영언은 선민의 외면으로 인해 점차 자신의 목소리가 희미해져감을 알고 두려워한다. *모티브 의 연출을 맡은 신인 최익환 감독은 1편의 조감독 출신이다. “ 현장에서 애들하고 매일 붙어 있다보니까 그냥 떠오른 것”이라고 설명한 감독의 당시 아이디어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귀신’이 전부였다. 영화화에 대한 기대나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무심코 발생했고 그래서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도 않았던 한 구절짜리 시놉시스는 1999년 미국에서 영화제작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체화됐다. 비디오아트, 퍼포먼스, 인스톨레이션 등 실험적인 영상 기교를 배우는 중에 사운드 테크놀로지의 세계에 매료된 감독은 사운드의 질감과 공간 활용의 상관관계, 사운드만으로 일으킬 수 있는 정서적 효과 등에 주목하고 그곳에서 라는 단편작업에 착수했다. 한 여자가 자신의 지난 삶을 내레이션으로 전달하는 이 단편은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아니라 어떤 기술적 효과를 낼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시도였다. “처음엔 보통의 내레이션처럼 들리다가 갈수록 목소리가 사라지면서 추상적인 사운드로 변한다. 그러면서 결국 남는 건, 여자의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이 기억하는 직접적인 경험들이다.” 여기에 오래 묵혀두었던 시놉, ‘목소리가 사라지는 귀신’이 연결됐다. *공포의 방법론 의 장르적 스펙터클은, 불만 꺼지면 어디서건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학교 내외를 보여주는 데 있지 않다. 의 주인공 영언은 목소리밖에 남지 않은 귀신이고, 공포의 방점은 목소리가 사라짐에 따라 존재도 사라진다는 두려움에 찍혀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감독은 영언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사라지게 만들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블루캡의 김석원 대표와 사운드 질감에 관한 상의와 실험을 했다. “결국 ‘관객이 그렇게 느낄 수만 있으면 된다’는 게 원칙이다. 정답은 아주 간단한 데 있을 수 있다. 기술은 마술이 돼야 한다. 쓰려면 아무도 모르게 써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쉽다.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여기는 필터도 두 가지만 섞어놓으면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모른다.” 학교 안에 담긴 일상적인 소리들도 섬세하게 부각될 거라고 감독은 덧붙였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바람 때문에 움직이는 사물소리, 기계실 안 전구의 필라멘트가 내는 소리. 와이드 사운드가 아닌 클로즈업 사운드를 지향하는 는 촬영에서도 한컷 안에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깊은 심도보다 훨씬 제한된 정보를 전달하는 얕은 심도의 촬영을 절대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공간을 잘게 쪼개고 묻혀 있던 소음들을 키워 친숙한 공간을 낯설게 만든 다음, 제 귀에 늘 익숙하게 들렸던 제 목소리가 지워지면서 존재의 위협을 느끼는 귀신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것이 최익환 감독이 구상하는 시리즈의 네 번째 학교 괴담이다. *오리지널리티 감독은 가 “우스갯소리로 두번 죽는 얘기”라고 말했다. “공포는 기본적으로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나오는 건데 귀신이 주인공이 되고 나면 걔는 이미 죽었으니 어떻게 공포를 만들어내요, 라고 물을 수 있다. 이 영화는 그 부분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사운드에 대한 색다른 경험과 더불어 가 공포영화로서 가질 수 있는 오리지널리티라면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연출하는 입장에서는 귀신만이 경험하는 세계를 묘사하는 게 아주 큰 일이라고 느끼고 있다.” 사실 은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공포영화 브랜드면서 동시에 여고를 배경으로 여고생들을 둘러싼 무서운 이야기를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공포영화들에 없는 전제조건을 짊어지고 가는 기획영화다. “생각해보면 이미 할 얘기 다 했고, 나올 소재도 다 나온 것 같다. 더이상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싶다”라며 감독은 국내 유일의 공포영화 시리즈물로 충무로 데뷔식을 치르게 된 부담을 살짝 털어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신인배우들이 연기를 어려워할 때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은 똑같다. 영언에겐 어느 날 네 존재가 목소리로만 남게 됐는데 그 목소리가 사라져간다면 어떻게 하겠니, 라고 묻고 선민에겐 네 친구가 목소리로만 너와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겠니, 라고 묻는다. 목소리는 생명이다. 내가 배우들에게 강조하는 건 이거 하나다. 더불어 이 영화는 사람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했을 때의 상황, 즉 조작가능한 기억과도 관련돼 있다. 그래서 규정할 수 없게 된 정체성에 대한 것이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다. 근데 그렇게 어렵게 안 봐줬으면 좋겠다. (웃음) 어쨌든 나는 20억원이 안 되는 저예산으로 라는 상업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 부분은 분명하다. 공포영화라는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내 얘기도 같이 묻어날 수 있으면 좋은 일이다.”

가볍게 초심으로 돌아가기, <깃>

영화 <깃>은 송일곤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2001)은 저마다 깊은 상처를 지닌 세 여성의 기나긴 여정을 뒤쫓는 로드무비였다. 그것은 ‘세명’이 함께하는 공생과 치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매우 한국적인 로드무비의 계보 속에 놓일 만한 작품이었다(에서 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로드무비는 세 인물의 여행기인 경우가 많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두 남자와 한 여자로 구성된 ‘삼인조’가 펼치는 ‘탈출/도피-공생/갈등-치유/죽음’의 궤적을 그리곤 한다). 그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공존을 통해 독특한 ‘시정’(詩情)을 담아낸다는 점, 이것이 의 새로움이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2004)은, 나에겐 조금 뜻밖의 작품으로 여겨졌다. 장르의 화법을 빌린, 죄의식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무의식 또는 고전적 비극의 세계에 대한 탐구. 그것은 또 한번의 징후적인 계통 발생의 반복이었다. 김지운이 을 통해, 박찬욱이 를 통해 보여준 궤적의 반복. 그들과 함께 송일곤은, 장르적 수사법의 세련화라는 일보전진과 새로운 영화적 발견의 부재라는 이보후퇴를 반복한다. 은 도스토예프스키적 소수적인 분열의 세계를 ‘원죄의식의 서사’라는 낡은 관념으로 봉합-설명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낡은 관념의 세계 속에서 새로운 영화적 발견(새로운 정서의 창조)이 이루어지기란 근본적으로 힘든 것임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송일곤의 세 번째 작품 은 생각보다 무척 빨리 세상에 나왔다. 의 무거운 관념의 세계의 끝자락에서 이미 이 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은 송일곤 특유의 겨울 하늘과 그것이 품고 있는 북구적 우수를 담고 있지만, 동시에 경쾌하고 가벼운 사랑스러움 또한 지니고 있다. 은 과 를 잇는 ‘감성 멜로’일 수 있지만, 단지 그것에 머물지 않는 텍스트적 의미를 지닌다. 세 영화가 새로운 ‘감성 멜로’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그들이 ‘사랑’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 사랑의 ‘예감’ 또는 그것이 시작되는 ‘순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그려내는 그 ‘순간’은 감독 자신의 영화적 시작의 순간 즉 ‘초심으로의 회귀’와 중첩되어 있다. 의 소녀 혜나(김혜나)는 ‘날개’를 들고 다니며 비상을 꿈꾸지만, 끝내 날 수는 없었다. 의 소녀 소연(이소연)은 단지 바람과 함께 흐르는 ‘깃’을 머리에 꽂고 경쾌한 탱고를 꿈꾼다, 그리고 출 수 있다. 날개와 달리 깃이 가벼운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바람을 타고 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존재 이유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무게에 짓눌려 더이상 시나리오를 쓸 수 없었던 감독 현성(장현성)은, 그 깃-소녀와의 만남을 통해 시나리오를 쓸 수 있게 된다. 그 깃-소녀는 비양도의 바다와 바람과 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설화 또는 지혜의 세계이기도 하다. 감독 송일곤은 그 세계로부터 얻은 것을 다시금 그 세계에 돌려주고, 그만큼 가벼워진다. ‘문지방을 긁어먹으면 글이 잘 써진다’는 민간요법을 몸소 실천하며, 기다림의 고통에 관한 비극적인 ‘망부’(望夫) 설화를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망부’(望婦) 설화로 살짝 바꾸어놓는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하나. 영화의 시작에 현성을 짓누르던 것은 80년대(광주)에 대한 시나리오였다. 마지막에 결국 그가 써낼 수 있었던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그 세대에게 또 하나의 버거움일 수밖에 없을 그 ‘관념’의 무게에 접근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던 것일까, 아니면 그냥 피해가기로 했던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이 보여주는 가벼움은 감독 송일곤이 새로운 긍정의 미학으로 접근해가는 징후로 읽힌다. 그래서, 반갑다.

지금, 이력서 다시 쓰는 남자들, <그때 그 사람들>의 백윤식+한석규

일요일 아침 9시30분부터 시작된 스틸 촬영은 저녁 8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꼼짝없이 수많은 스탭에 둘러싸인 채 스튜디오에 갇혀서 쉬지 않고 웃고, 포즈를 잡고, 옷을 몇 차례나 갈아입고, 렌즈를 의식해야 하는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들>의 백윤식 선생, 한석규 두 남자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입가에 머금은 웃음은 떠날 줄 몰랐고, 스튜디오를 나설 무렵엔 소풍을 떠나는 소년처럼 활기까지 넘쳤다. 두 사람이 육체의 경계선을 거꾸로 월경하고 있다고만 말하는 게 아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지금 영화의 이력서를 다시 쓰고 있지 않은가. 오랜 사진 촬영이 끝난 뒤, 한석규의 오랜 단골이라는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 선생은 자신의 성이 영어 B자로 시작하기 때문에 BMW와 벤츠가 어울린다는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고 한석규는 와인병 안에 들어간 코르크 마개 뽑는 법과 비틀스의 저작권 대부분이 마이클 잭슨에게 있다는 이야기로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한석규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식을 앞 접시에 골고루 나눠주면, 백 선생이 맞춤한 고명을 뿌리듯 농담을 던졌다. 촬영장이든 스튜디오든 늘 차분하게 자신의 에너지를 잘 모아뒀다가 일할 때 폭발시키는 집약수렴형 한석규, 언제 어디서든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어가는 ‘알 선생’(백 선생은 자칭 타칭 알 파치노로 불리는데 그 알 파치노의 약자)의 만남은 TV드라마 <서울의 달> 이후 10여년 만이었지만 그 공백은 길어 보이지 않았다. 정권 ‘수술’에 나선 남자와 그의 오른팔 역으로 호흡을 나눠서였을까. 식사시간은 한없이 늘어났고 인터뷰는 자정이 되어서야 끝낼 수 있었다. 백 | 윤 | 식 유연한 카리스마, 화양연화를 맞다 “원 보틀!” 술이 들어가면, ‘한잔 더’를 외치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백윤식은 통이 크게도 ‘한병 더’를 외친다. 그날도 그랬고, 그게 시작이었다. 임상수 감독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필’이 통한 백윤식은 영화보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대낮에 시작된 술자리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 감독이 임상수 감독에게 연출 수업을 받은 후배라는 것도, 그날 새벽 무렵 호출된 최 감독의 얘길 듣고서야 알았다. 임상수 감독이 우수한 인재이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믿음은 들었지만, 10·26을 재조명한 영화에 출연해주십사 하는 부탁에는 선뜻 응할 수가 없었다. “팍 접근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죠. 다큐 개념의 영화에서 배우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그런데 이 민감한 사안을, 작품적으로 잘 소화했더라고요.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객관적인 시야로, 간결하게.” 그래서 응했다. 언제나처럼, 그를 움직이게 만든 건 ‘책’이었다. <서울의 달> 이후 10년 만에 재회한 한석규가 “선생님, 안아도 되겠습니까?” 하면서 환대할 때, 좋은 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세상은 변하는 거야. 인생도, 사람도, 다 변해. 오늘, 변한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 ‘그날’의 거사를 주도하는 김 부장은 시나리오에 ‘외골수 마초 사무라이’라고 표현돼 있다. <지구를 지켜라!> <범죄의 재구성>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고 강렬했기 때문에 그가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증이 인다. 예고편에 비친 그는 비장하기도 하지만 코믹하기도 했다. “담백하고,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렸어요. 관직의 굴레에 있는 인간 군상의 원초적인 심리들을 보여주려 했다고 할까. 그렇게 기본을 잡고 가면, 디테일은 지남철에 쇠 붙어가듯 스르륵 딸려와요.” 12시간 동안 긴박하게 사건이 전개되지만, 김 부장의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배우로서 답답하기도 했을 터. “오리무중이죠. 감독한테 물어보니까,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영화를 찍는 거 아닙니까, 그러더라고요.” 실제 인물과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다큐멘터리나 전기영화가 아닌 만큼, 하나의 ‘창작품’으로 봐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동시대 사람으로서, 겸허하게 임했어요. 그때 그 일로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가신 분들께 명복을 빌고, 상처받으신 분들 앞에 살포시 옷깃을 여미는 마음입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백윤식은 벌써 몇편의 영화에서 ‘구애’를 받고 있다. 두어편, 마음에 둔 영화가 있다는데, 전에 했던 것과는 다른 색깔의 작품들이다. 그처럼, 뒤늦은 백윤식의 등장은, 장르와 캐릭터의 다양화를 꿈꾸는 젊은 감독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사건으로 보인다. 지난 해 <범죄의 재구성>으로, <담백하라>의 뮤직비디오로, 포털사이트와 화장품 CF로 ‘젊은 오빠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는, <씨네21> 송년호에서 기자와 평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배우’로 뽑히기도 했다. 문근영과 나란히 표지를 장식한 지 한달이 채 못 돼 이번엔 한석규와 짝을 이뤄 표지 촬영을 하고 있다. 기분이 어떠세요? 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촬영 짬짬이 흥얼거리는 콧노래, 휴대폰 벨소리로 울려퍼지는 <담백하라>가 날아갈 듯 경쾌했으니까.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날 원하는 분들과 일일이 한배를 못 타드리는 게, 미안할 뿐이죠.” 그야말로, 백윤식의 화려한 시절. 지난 연말 SBS 방송연기대상 2부 오프닝 무대에서 그는 드라마 여주인공들을 ‘나의 옛사랑들’이라고 소개하며, 캉캉과 블루스와 람바다 등을 곁들인 뮤지컬 콩트를 선보였다. 그는 그때 ‘옛사랑’이라는 단어가 맘에 들지 않아서 ‘아름다운 사랑’으로 바꿔 말했다고 했다.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의 사랑, 권위와 다른 차원의 카리스마, 편견이 없는 유연한 관록. 그에게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한 | 석 | 규 차분한 남자, 오늘, 폭발한다 조용히 뒷짐지고 가사를 음미하듯 부르는 장발 청년(1984년 강변가요제)의 모습이 겹쳐서 보였다. 스튜디오에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앉아 눈을 감은 채 <호텔 캘리포니아>를 따라 흥얼거리는 모습이 그런데 오히려 더 젊어 보인다. 짧은 머리칼 때문일까. 밥은 늘 먹던 데서, 머리도 늘 깎던 데서, 사진도 늘 찍던 데서 하는 이 배우에게선 늘 한결같은 모습이 보인다(<닥터 봉>부터 함께해왔다는 오형근 사진작가와 함께한다면 인터뷰를 하겠다는 게 그가 내건 조건이었다). 오직 영화만이 매번 다른 듯하다. 한석규의 앞에서는 시간의 격랑도 멈춰 서 있을 것 같다. 술 한잔 하지 않고, 괜한 과잉의 격정을 발하지도 않으며, 항상 늘 일정한 체온으로 있을 것 같은 배우다. 그러나 영화 현장에서 그는 장전된 탄환처럼 언제라도 튕겨나와 과녁을 향해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의리나 인맥, 감독의 이름 같은 외부요인이 아니라 오직 시나리오만으로 작품을 고르고, 영화 바깥으로는 자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 그런 모습이 이런 집중력을 낳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얼굴은 어떤 별다른 정보를 보여주지 않는, 그저 이정표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정상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다가 잠시 휘청거린 흔적조차 읽어내기 힘들다. 스포츠 가방에 신과 옷을 챙겨넣고 스튜디오를 내려 서는 모습은 혼자 운동을 마치고 가는 복싱선수의 이미지였다. 함께 타고 가자는 그의 말에, 매니저도 없이 혼자 운전하고 다닌다는 그의 애마인 SM5에 올랐다. “운전하기 힘들면 제작부 막내에게 부탁해서 함께 묻어가도 되고, 이제 극장에서 영화 혼자 보는 요령도 생겼으니까 혼자 하는 게 힘들지는 않다.” 가는 식당이 첫째와 막내 돌잔치를 한 데라는 것, 자식 건강한 것만큼 축복이 없다는 말도 두런두런 들려주었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 박 부장의 오른팔 주 과장으로 나온 그에게선 직전의 <주홍글씨>의 형사 기훈보다 오히려 <초록물고기>의 막동이와 의 태주 얼굴이 겹친다. 바싹 깎은 머리와 옅게 기른 턱수염, 신경질적으로 껍는 껌, 금연으로 인한 신경질적인 표정이 그렇다. 한석규는 임상수 감독이 “막 해줬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했다며 유감없이 그 고마운 ‘막’을 즐겼다고 했다. 각하를 할아버지로 말한다든가, 헌병을 화이바로 표현한 현장 애드리브도 감독은 그대로 받아줬다고 한다. “영화에서 껌을 씹는다는 게 튈 수도 있는 톤인데…. 수염도 기르고 흰머리도 군데군데 넣었으면 했는데, 그렇게 염색하기는 힘들다고 해서 수염만 길렀다.” 그러나 사실 임상수 감독과 한석규는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한석규는 ‘둘 모두 서울 깍쟁이’ 같은 면이 있고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 둘 사이를 잇는 고리라고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소설 <남부군>을 보면서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로, 줄곧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영화를 택했다. 임 감독의 시선도 또렷했고.” 이 영화의 예민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사실을 기초로 해서 만들었지만 실제 그분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한번 비틀어 접근하는 거다. 10·26은 현대사의 전환점이고 언제든 다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때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폭력적인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원산폭격부터, 땡볕에 그냥 서 있게 하는 체벌도 줬고…. 그런 게 가능했던 게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 아닐까. 생각하면 화나고 슬프다.” 주 과장에 대해서는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았지만 주 과장의 모델이 실제 아는 사람의 아버지라 부담도 느꼈다고 했다. “흉을 보자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그날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묻는 거지.” 그는 근 1년간 하루도 쉬지 못했다는 주 과장의 심정을 대신 헤아렸다고 했다. 머리를 희게 염색하고자 했던 뜻도, 머리가 셀 정도로 그렇게 회의가 많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에서였다. 그는 메뉴에도 없는 브루체타를 주문했다. 토마토 소스를 재료로 새콤하고 얼큰하게 만든 해산물 요리라고 한다. 일일이 다른 이들에게 서빙을 한 뒤 남김없이 비우는 모습이 익숙해 보이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메뉴에도 없는 요리를 찾아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유쾌함과 촬영장이나 기자회견장에서도 묵묵히 늘 자기 분위기를 지키던 과묵함이 오버랩됐다.

<뉴 폴리스 스토리> 홍보차 내한한 성룡

우리 시대의 버스터 키튼, 성룡이 돌아왔다. <뉴 폴리스 스토리>의 그는 예전처럼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웃음을 날리지 않는다. 술에 절어 길바닥에 몸을 누이고 한숨을 내쉬거나 비참하게 짓밟히는 주인공 진국영은 액션스타가 아닌 성격파 배우 성룡의 새로운 발걸음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층버스에 스파이더 맨처럼 달라붙어 홍콩 시내를 누비고, 마천루에 맨몸을 내던지는 애크러배틱한 열정도 식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입학할 나이에 연기에 발을 내디뎌 쉰살이 된 성룡을 주말 오전 서울 한복판에서 만났다. 하늘의 명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에 들어선 그가 말하는 영화 그리고 아시아 이야기. -당신의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인가? 1962년작 (1962)로 알려져 있는데. =아니다. <양산박과 축영태> <정상연>이 먼저다. 이 영화들 역시 옌준 감독이 연출하고 여배우 리리화가 출연한 영화다. 나는 리리화의 아들 역으로 나왔고, 그녀는 당시 평소에도 나를 아들처럼 돌봐줬다. -호금전의 <대취협>에도 참여한 걸로 안다. =출연은 아니고 더빙을 했다. 어린아이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그걸 내가 불렀다.(즉석에서 그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성룡) -<뉴 폴리스 스토리>는 당신의 몇 번째 작품인가. =몇편을 찍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홍콩 영화산업이 저조한 상황이라 홍콩 정부나 국민들이 홍콩에서 영화를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나 요청이 많았다. 그래서 JC라는 영화사를 설립하고 처음 찍은 영화가 <뉴 폴리스 스토리>다. 동남아시아에서 이렇게 큰 흥행을 거두리라는 예상은 못했다. 금마장영화제에서 6개 중 4개를 차지했고, 특히 관객상을 받은 점이 기뻤다. -뉴 폴리스 스토리>는 진지한 연기나 비극적인 캐릭터가 황지강이 감독한 당신의 전작 <중안조>를 떠올리게 한다. =진지한 면은 유사하지만 중안조의 캐릭터는 멋있는 슈퍼캅에 가깝다. 터프하고. <뉴 폴리스 스토리>의 진국영은 언뜻 보면 터프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면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아무리 강해도 약한 면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이전의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는 웃고 즐기는 즐거운 경찰 이야기에 국한되었다. 이번에는 진지한 연기를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이번 영화를 포함해서 나는 경찰 역을 너무 많이 해서 길에는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경찰로 기억한다. (웃음) -오언조, 사정봉 같은 젊은 배우들을 다양한 캐릭터로 대거 기용했다. 호흡은 잘 맞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새로운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새로운 인물을 찾는다. 특히 영어권에서도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능있는 젊은 배우들이다. 내가 새로운 역할을 보여주는 일만큼 젊은 배우들을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다. -<뉴 폴리스 스토리>는 할리우드에서 찍은 당신 전작들과 많이 다르다. 액션이 줄었다는 평도 있는데. =장이모나 리안이 드라마를 주로 만들다가 액션을 찍는 것처럼 나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었다. 현재는 내가 코미디 일변도의 영화를 찍는 것 같지는 않다. 이런저런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찍고 싶다. 다른 사람들이 액션스타라는 고정된 이미지로 나를 보는 게 무조건 좋지는 않다. 미국과 유럽에서 거닐때면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쿵후 동작으로 흉내내며 “재키 챈”라고 이름을 부른다. 그 누구도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에게는 이름을 부르며 그런 동작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생 액션배우만 해야 하는가 하는 회한이 밀려들었다. 연기실력이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력파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실력파 연기를 하는 배우는 일흔, 여든살이 되어도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액션영화는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찍을 수 없는 것과는 반대로. -사형인 홍금보, 사제인 원표 같은 동료들은 잘 지내고 있나. =연락은 자주 하고 만나지만 그들은 반쯤 은퇴한 상황에 있다. 그것은 홍콩 영화시장이 위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좋은 영화를 찍어도 많은 홍콩 사람들은 그걸 극장에서 안 보고 홈시어터로 본다. 그것도 불법복제로 본다. -9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시장의 영화 불법복제에 대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그건 중요한 문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괴로워하니까. 한국영화의 불법복제판이 홍콩에서도 범람하고 있다. 다만 한국 내 영화시장이 크고 단단해서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뿐이다. 현재 홍콩에서는 한편의 영화가 성공할 때 그것이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과거를 보자. 홍콩영화가 전성기였을 때 아시아 사람들은 홍콩 차, 홍콩 스타들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현재는 김치, 신라면을 먹고 한국 여행을 즐긴다. 홍콩 연예면에도 한국 스타들의 얼굴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중국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표 한장에 인민폐로 10원 정도밖에 안 했지만 현재는 60원이다. 불법복제로 인해 매출이 발생하고 그게 다시 영화제작에 투입되지 못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절대 불법복제 DVD나 CD에는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 중국에 갔을 때 어느 여자아이가 불법복제판을 들고와 사인을 해달라고 해서 안 해줬더니 나가서 또 사왔는데 두 번째 사온 것도 불법복제판이었다. 너무 안쓰러워서 매니저에게 140원짜리 정식발매판을 사오라고 돈을 줘서 보냈지만 두 시간을 뒤졌는데도 정품을 살 수 없었다. 이런 현실부터 개선되어야 한다. -할리우드에서 당신이 찍는 영화와 이번처럼 홍콩에서 찍는 영화의 차이점이 있다면. =영화에 따라 팬층이 다르다. 당신은 <러시아워>와 이번 작품 중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기자가 <뉴 폴리스 스토리>라고 답하자) 그것 봐라. 당신은 내 영화를 꾸준히 수십편 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 관중도 두 부류로 구분된다. 원래 팬들은 내 스타일을 잘 알고 홍콩에서 찍은 영화를 더 좋아한다. 반면에 미국의 젊은 새 관객은 <러시아워>에 열광한다. -최근에 한국 배우들과 같이 작업했는데 어땠는지. =한국 배우들의 프로정신은 굉장하다. 같이 작업한 최민수, 김희선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영화를 찍을 때 어떤 태도인지를 직접 목격할 수 있다. 영하 25도의 추위에 기절할 상황에서도 김희선은 울면서 계속 촬영을 강행했다. 최민수는 나와의 액션장면에서 피가 나는 타격에도 ‘괜찮다’라며 손을 내저으며 촬영에 임했다. 웬만한 젊은 배우였다면 바로 병원에 가자고 누웠을 것이다. (웃음) 함께 연기해보고 싶은 사람은 장동건. 정말 실력파 연기자다. 이병헌도 그렇다. 그들과 굉장히 남성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 -한국영화 드라마 합작계획이 있다고 밝혔는데. =드라마는 시나리오가 이미 나온 상황이다. 2월 중순쯤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다. 영화는 아직 드라마에 비해 진행이 빠르지는 않다. 영화는 한국에서 찍고, 드라마는 한국과 중국이 모두 등장하는 설정이 될 것 같다. 내용은 당연히 비밀. (웃음) 아시아 전체로 공동제작의 영역을 넓혀가고 싶다. -아시아영화의 공동제작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일까.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이 협력하면 아시아 관객만 20억명이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강점이다. 그런 20억 관객 중 대다수는 미국영화, 힙합에 영향받는 상황이지만 아시아에는 아시아만의 문화가 있어야 한다. 한국전쟁의 기억에서 비롯된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작품은 홍콩에서는 찍을 수 없다. 한국영화가 홍콩이 위력을 보이던 장르들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게 현실이다. 한국 액션영화도 갈수록 좋아지고 있지만. 우리 팀원 중에도 이미 한국 사람이 둘이나 있다. 그럼에도 홍콩이 강세를 가질 수 있는 장르는 액션일 것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나는 사람들이 극장을 나선 뒤에도 오랫동안 기억할 영화를 찍고 싶다. 내 영화가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까지나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런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는 계속 노력해봐야겠지만. 아시아 어느 곳을 가도 사람들은 <취권>과 <폴리스 스토리>를 기억한다. <사운드 오브 뮤직> <닥터 지바고>에 버금가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나의 꿈이다.

아름다운 젊은 예술가의 초상, 주드 로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지난해 11월, 주드 로의 기사를 쓰면서 이렇게 서두를 뗐다. “주드 로에 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그는 빼어나게 재능있는 배우다. 둘째, 그는 빼어나게 잘생긴 남자다.” 그런데, 주드 로가 뉴욕의 바람기 다분한 멋들어진 싱글남자로 분해 자신의 연기력과 외모를 한꺼번에 써먹을 수 있었던 영화 <나를 책임져, 알피>는 미국에서 고작 620만달러의 개봉성적을 냈다. 기사는 이렇게 이어진다.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두 자질을 합쳐놓는다 해서 할리우드 박스오피스까지 책임질 수 있는 스타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2004년의 주드 로는 할리우드의 다른 어떤 배우들보다 바빴다. 2년간을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일하면서 몰두했던 여섯편의 작품이 미국에서 4개월 안에 연달아 개봉했기 때문이다. 9월17일 <월드 오브 투모로우>, 10월15일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아이♥허커비>, 10월22일 <나를 책임져, 알피>, 12월3일 <클로저>, 12월17일 <에비에이터>, 마지막으로 <에비에이터>와 같은 날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목소리 출연까지. 여섯편에 전부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아마도 배급사들끼리는 오직 주드 로가 출연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서로 개봉일을 조정하느라 골치 아팠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드 로는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달랐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성격이나 장르도 다르고, 감독도 다르다. 근데 이렇게 한꺼번에 개봉하니 개중 어떤 영화들은 간과되고 사람들은 그저 ‘오, 주드 로가 또 나왔네’ 하고 말하게 됐다.” 주드 로는 그런 배우다. 앤서니 밍겔라의 <콜드 마운틴>으로 비로소 안정된 스타덤의 시기를 맞이했다고 주위에서 북적북적 떠들자마자 그는 지고한 예술가나 가질 법한 순수한 욕구와 워커홀릭의 태도를 더욱 굳혔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서는 100% 디지털 후반작업과 테크놀로지의 힘 앞에 가려지고 말 연기를 했고, 마틴 스코시즈의 <에비에이터>에선 여성편력 심한 다혈질 스타 에롤 플린을 맡아 카메오 수준의 단역으로 출연한 것을 그저 만족스러워했다.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의 목소리 출연을 빽빽한 스케줄표 속에 거추장스럽게 끼어든 이물질 정도로 취급하지 않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주드 로에게 중요한 건, 자기 모습을 두번 이상 고정시키지 않으려는 순수한 도전의식이다. 백색 석고상 같은 외모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며 그 속에 채워진 본질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동적 욕구가, 남들에겐 하찮아 보이는 선택들의 연속된 길 위에 깔려 있다. 부피를 포기하고 밀도에 집착하는 태도. 말이니 쉽지 누구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 <월드 오브 투모로우>의 감독 케리 콘랜은, 주드 로라는 밀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주드 로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매번 다른 사람이 된다. 특정 배우들은 그들이 어떻게든 영화 속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캐스팅되고 결과적으로 그 점이 관객을 끌어들인다. 주드 로는 그렇지 않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무비스타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그가 무비스타라 할지라도 그의 진짜 알맹이는 예술가의 그것이라는 말이다.” 주드 로는 외모에 집착하는 이 세상이 너무 슬프다 말했지만 세상은 그의 외모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그러니 <나를 책임져, 알피>의 흥행실패는 그에게 다행스러울 따름이다. 세간의 집착에 길들여져봐야 장사로 연결되지 않으니 더욱 고삐가 풀려버린 주드 로는 앞으로도 당분간, 벗기고 벗겨도 바닥이 없는 자기 껍데기를 계속 벗기려고 들 것이다. <로드 투 퍼디션> 때 손에서 미끄러져나간 오스카 트로피가 궁극적 목표는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주드 로는 네 아이의 아버지다. 열세살 된 양아들 핀레이 문로, 8살짜리 친아들 래퍼티, 세살배기 딸 아이리스, 한살 반이 된 루디 인디애나 오티스. 존 매든의 <튤립 피버>가 투자문제로 무산되고 난 뒤 숀 펜과 함께 <왕의 남자들>을 촬영하기 전까지 공백기 동안 이 많은 아이들을 이끌고 여행을 다니며 필립 풀만과 이탈로 칼비노의 책을 읽었다는 주드 로는, 이상하게 한번도 스크린 속에서 아버지상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걸 바라기는 분명 이르다. 이제 서른두살이라는 젊은 나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술가란 원래 쉽게 철들지 않는 족속이다.

자폐아 마라토너 이야기 <말아톤> [2] - 정윤철 감독 인터뷰

이야기 사이사이 누벼진 현실 그러고보면 그의 단편 <기념촬영>과 <동면>, 장편 <말아톤>은 시작과 먼 듯하면서 가까운 듯도 하다.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기념촬영>은 삼풍백화점 붕괴와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과 함께 ‘재난 3부작’을 이루는 영화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어느 여고생은 스케치북을 집에 두고와 뒤늦게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간다. 그 아이가 놓친 버스는 다리 아래로 추락했고, 언제인가 찍었던 친구들과의 사진 속에서 그녀 혼자만 살아남아 스무살이 된다. 대사를 아끼는 대신 공기와 햇빛을 타고 애틋한 감정이 넘쳐나는 <기념촬영>은 정윤철 감독만의 추모시다. “삼풍백화점 터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500, 600개는 돼보이는 그 사진들은 기념촬영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죽은 이를 쉽게 잊는다. 슬픔과 상실감은 당사자들만의 몫이다. 그래서 <기념촬영>을 찍었다. 성수대교 아래 위령비 하나 없고, 삼풍백화점 자리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고층빌딩이 올라가서.” IMF가 휩쓴 현실을 SF영화로 돌려 찍은 <동면> 또한 그의 발언이었다. 아이 키울 돈이 없어 갓 태어난 아기를 냉동장치에 담아 돌아오는 젊은 부부, 미래로 건너뛰어 현실의 참혹함을 되짚는 영화. 그의 영화들에선 판타지와 현실, 현재와 미래가 몸을 섞는다. 초원이 좋아하는 얼룩말이 판타지로 스며든다고 해도 <말아톤> 또한 현실을 누벼넣었다. 엄마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 알거든요, 초원이 완주할 수 있어? 없어, 끝까지 달릴 수 있어? 있어, 초원아 상추도 먹어야지, 운동선수는 뭐든 잘 먹어야 돼. 이런 상황과 대사들은 모두 현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다. 그럼에도 현실 그대로는 아니다. “재료를 가져다가 먹음직스럽게 차렸다고 할까. 향을 더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지하철 노선도를 몽땅 외우는 아이, 한달에 한번 비행기 타는 걸 취미로 삼은 아이(이 아이는 다행히도 아직 국제선의 존재를 모른다), 새로 다리가 생기면 꼭 가봐야 하는 아이, 그리고 어른의 얼굴에 어린아이의 표정을 가진 그 모두. 정윤철 감독과 두 작가는 직접 다가가 눈과 마음에 담은 자폐아들을 어느 하나 내치지 않고 초원 안에 담았다. 본 적 없는 존재여서 낯설지 몰라도, 초원은 우리 중 하나라고, 정윤철 감독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말했다. 개봉이라는 이름의 다음 코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석달을 꼬박 찍은 <말아톤>은 짧게 완성한 편에 속하지만 노동의 밀도만은 마라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달리는 호흡을 늦추며 바람의 감각을 일깨우는 이 영화는 짐작하는 것보다 지친 상태로 결승점에 도달한 셈이다. “언제 선상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분위기였고, 스탭도 배우도 나도 뭘 찍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정윤철 감독은, 겨울이 오면 영화가 끝나리라는 위안을, 초원이가 먹고 힘을 내는 초코파이 삼아 살았다. 마라톤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형진이와 마라톤을 하다가 42.195km를 완주했다. 10km는 경험이 있었고, 하프 지점까지는 어떻게 뛸 것 같았는데, 30km 넘어서니 죽을 것 같아도 돌아갈 길이 더 멀어서(웃음)…”라며 마라톤을 완주한 정윤철 감독은 단편과는 호흡과 무게가 다른 장편 앞에서 숨이 막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라토너보다는 불행하게도 감독에겐 완주가 끝이 아니다. 누가 돈내고 보러 올까,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소재로 출발한 <말아톤>은 이제 아득한 이미지 속으로 질주한다. 그를 오해했던 사람들과 손을 마주 부딪치고, 밀려났던 공간을 자유롭게 부유하고, 사바나 풀줄기를 줄무늬로 새긴 얼룩말과 나란히 달리는 초원. 그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라고 말해서 아들이 대학 들어간 것처럼 엄마를 기쁘게 했다는 형진이고, 결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어머니의 자식이다. 이렇게 순한 숨결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나 돌아보도록 만드는 <말아톤>은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해야 할 다음 코스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왕국에서 새끼를 기르는 이야기이다” 정윤철 감독 인터뷰 -실화를 바탕으로 삼은 영화는 드라마나 갈등이 부족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가.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코치와 엄마 사이에 로맨스가 생긴다거나 지친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다거나.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세팅된 그대로 깊게 파보자고만 생각했다. 물론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형진이가 혼자 춘천까지 가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건 아니지만, 형진이는 달리기를 정말 좋아한다. 엄마조차 그걸 모르다가 문득 깨닫고 아들의 손을 놓아주는 순간은 곧바로 우리 삶과도 통한다. 내 어머니도 <말아톤>을 보셨다. 그분도 당신과 나의 이야기 같아 감정몰입이 잘되더라고 하셨다. -배형진씨 가족은 이런 영화를 제작한다는 데 어떻게 반응했는가. 각색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텐데. =형진이 어머니는 기꺼이 도움을 주셨다. 자폐증이 장애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했다. 내가 걱정했던 건 다른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형진이는 어머니가 생선을 팔아서 자식 서울대 보냈다더라는 케이스와 비슷하게 특수한 경우다. 이 영화가 그렇게 특별한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로 비치지 않기를 원했다. 형진이 어머니가 그랬다. 살림이 넉넉했으면 아이를 시설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대안이 없었고, 자폐증이 질병처럼 완치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매달린 거였다고. -코치 정욱은 모정을 내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초원과의 관계도 깊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그의 존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고민했던 부분이다. 러닝타임이 충분했다면 정욱의 이야기도 넣을 수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좋아할지 자신이 없었고, 데뷔작으로 두 시간 넘는 영화는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이건 다 핑계일 거다. 영화 후반부는 초원이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초원은 춘천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날갯짓을 한다. 그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게 옳은 구조인 것 같았다. -치타를 보고 시나리오의 감을 잡았다고 했는데, 정작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얼룩말이다. =자폐아들은 제각기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 다들 돈이나 명예에 집착하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이상한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 정하려고 했는데, 달리는 동물이 좋을 것 같았고, 말은 식상했다. 얼룩말은 길들일 수 없다. 디자인 때문에 눈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보거나 만져본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초원이 사바나에서 얼룩말과 함께 뛰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잡고 싶어하는 무언가, 말하자면 유니콘 같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초원은 자주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을 중얼거린다. 도입부에서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실화에서 가져온 모티브인가. =<동물의 왕국>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새끼를 떠나는 치타 어미를 보고나서 조금 달라졌다. 이 영화는 인간의 왕국에서 새끼를 기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세렝게티를 보듯, 외계나 천상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치타가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 같다. 그 자신은 관찰할 수도 없고 목격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보게 해주니까. -조승우는 표정이 별로 없으면서도 남들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폐아를 연기했다. 아주 작은 차이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조승우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사악하게 보이기도 해서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담백한 크래커 같은 배우다. 무엇이든 얹어 먹을 수 있는. 몰입력이 강하고, 순간적으로 상승하는 힘이 있다. 조승우는 원래 완벽을 추구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를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그걸 다 놓고, 어린아이처럼 자연스럽고 편하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자폐아들은 어린애 표정이 어른 얼굴에서 나오는 거니까. 자폐아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개아’(自開兒)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을 속이고 만들지만, 그 아이들은 표정이 마음 그대로다. -경숙이 초원을 초코파이로 유혹하면서 산에 오르도록 만드는 장면은 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영화는 초코파이 PPL 안 받았다. (웃음) 형진이가 원래 초코파이를 좋아했는데, 우연히 내가 모티브를 얻은 영화 중 하나가 였다. 그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E.T와 엘리엇이 손가락을 맞대는 장면이다. 그게 소통이다. 말도 통하지 않던 존재와 마음으로 대화하는 거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기쁜 순간이 아닐까 한다.

[정이현의 해석남녀] <몽정기2> 의 오성은

소녀는 운명의 남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난 운명의 그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얼씨구, 아무래도 하이틴로맨스 소설을 너무 열심히 읽었나 보다. (하이틴로맨스 혹은 할리퀸로맨스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요약정리 해드리겠다. 어리고 착하고 예쁜 ‘처녀’ 여주인공이 멋지고 성격 나쁜 ‘바람둥이’ 남주인공을 만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운명적 상대임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그것은, 침실 장면을 적나라하되 뽀샤시하고 로맨틱하게 처리함으로써 현실에 지친 소녀들의 낭만적 사랑에의 욕구와 성적 환상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던, 10대 여성을 위한 성교육 교본이다. ‘운명적 상대’와 ‘침실 장면’과 ‘소녀들’에 밑줄 좍!) 혹자는 일찍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남자아이들은 포르노를 통해, 여자아이들은 로맨스 소설을 통해 성(性)의식을 내면화한다.” 그래서일까? <몽정기1>의 소년 동현과 <몽정기2>의 소녀 성은은, 서로 다른 별나라에서 온 인종들처럼 성에 대해 상이한 태도를 가진다. 교생선생과 ‘하룻밤’을 보낼 묘안을 짜내는 것이 이들 앞에 떨어진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것 말고는, 동현과 성은의 욕망은 닮은 데가 없다. 소년이 틈만 나면 ‘딱딱해지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온몸으로 꿈을 꾸었다면, 소녀는 남자의 ‘그것을 딱딱하게’ 만들어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애를 태우는 것이다. <몽정기2>의 여주인공 오성은 양은 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소녀다. 그런 성은이 밋밋한 가슴에 ‘뽕브라’를 하고, 샤워기와 오이를 도구 삼아 비장한 예행예습에 돌입하는 것은, 정말로 그것이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천진난만한 아이일 뿐이므로 성은은 제 몸이 욕망하는 쾌락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남자들이 여자의 어떤 모습에 섹시함을 느끼느냐고 또래 남학생에게 자문을 구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소녀는, 자신이 남자의 성적 충동을 유발하는 바로 그 대상이 되기를 갈망한다. 신음 소리를 내고 치마를 걷어 올리면서 이 조그만 여자아이는 남성적 시선의 섹시한 피사체로 스스로를 내면화한다. 자, 이제 상황을 정리해보자. 초경도 시작하지 않은, 교복 입은 예쁜 소녀가 있다. 그 소녀가 심지어 자발적으로 치마를 걷어 올리기 위해 안달이다. 왜? 아저씨를 사랑하니까. 처음이니까 아프겠지만 사랑으로 꾹 참겠다는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의 몽정으로 빚어낸 자동인형인가. 친절하게도 영화는 자상한 에피소드를 첨부하여 의문을 한방에 해결해준다. 그럼, 그렇지. 이토록 징글징글한 롤리타콤플렉스의 주체는 성기노출증 환자, 일명 ‘바바리 맨’ 이었다. 소녀는 운명의 남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출몰하는 것은 바바리 맨 뿐이다. 슬프고 끔찍한 현실이다.

제한시간 2분, 예고편의 재구성

<역도산>의 예고편은 설경구의 한 표정을 길게 비춘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의 환호성 속에 링에 오른 역도산(설경구)은 여유있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러다가 잠깐 고개 숙여 옆을 볼 때 입술 한쪽 끝을 위로 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공공연히 관객을 향해 연출하는 표정들 사이로 짧게 잡히는,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드러내는 얼굴. 거기엔 자신감에 더해 관객들에 대한 조롱과 자신에 대한 자조, 협잡꾼의 비열함 같은 느낌까지 많은 게 담겨 있다. 저런 표정은 어디서 나올까. 이 예고편은 영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이 영화가 평면적인 인간승리의 드라마가 아닐 것임을 예감케 한다. 막상 영화에선 설경구의 이 표정이 말 그대로 스치듯 지나간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안 잡힌다. 예고편을 만든 ‘죤앤룩필름’의 채은석 감독은 영화의 가편집본을 7~8번 돌려보면서 이 표정을 잡아챘고 그걸 길게 끌어 예고편의 한 가운데에 앉혔다. 호기심 자극과 내용 전달! 영화의 예고편은 호기심을 자극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반 광고와 같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고유의 문법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90분이 넘는 영화를 2분 안에 최대한 인상 깊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이건 단순한 축약을 넘어서는 재창조이기도 하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수사 검사와 피의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 둘이 만나는, 영화엔 나오지 않는 장면을 새로 찍어 함축적이고 긴장 강도가 높은 대사를 주고 받게 한다(<공공의 적 2>). 또, 10·26 사태라는 소재의 무거움을 이면으로 돌린 채 텔레비전 드라마 <수사반장>의 주제곡과 흡사한 음악으로 리듬감을 살리면서 영화 속 장면을 재배치한다(<그때 그사람들>). 한국 영화의 예고편의 발전은 90년대 후반 한국 영화의 비약적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본 영화와 별도로 예고편 제작 업체가 전담하기 시작했고 예고편의 형태도 티저 예고편, 텔레비전 스폿 광고, 컴퓨터 모니터용 온라인 예고편, 본 예고편 등으로 분화됐다. 마케팅이 전문화되면서 예고편은 영화만큼, 아니 영화보다 더 기발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선보이고 있다. 어떨 때는 예고편이 영화보다도 더 민감하게 동시대 대중의 기호를 낚아채기도 한다. 이제 예고편은 음식을 조금 떼내 주는 ‘맛배기’가 아닌, 별개의 맛을 가진 애피타이저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아이디어 경연장’ 예고편 어제와 오늘 호기심 자극 작전 그때그때 달라요 10년 전만 해도 한국 영화의 예고편은 개봉될 영화에 대한 ‘고지’에 불과했다. 조감독이 영화 본 편에 사용되지 않는 엔지 컷을 ‘짜깁기’해 완성하는 것으로 별도의 시간적, 기술적 투자가 없었기 때문에 화질이나 사운드 모두 조악할 수밖에 없었다. 예고편이 ‘광고전단’ 수준의 촌티를 벗어나기 시작한 건 영화에 기획과 마케팅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90년대 후반부터다. 물론 최초의 기획영화로 꼽히는 92년작 <결혼이야기>는 김의석 감독이 직접 예고편용 필름을 따로 찍기도 했지만 이런 일은 예외에 속했다. 영화의 때깔과 짜임새에서 한국 대중 영화의 분수령으로 꼽히는 97년작 <접속>은 예고편도 제작사 울타리를 벗어나 외주로 제작했다. 그 뒤부터 예고편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와 전문인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97년 홍보사 R&I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출발한 튜브픽처스 영상제작팀에 이어 모팩, 픽셀, 키메이커 등 예고편 전문 제작업체가 생겨났다. 여기에 프리랜서 감독, 광고를 겸업하면서 예고편을 만드는 회사까지 합쳐 현재 20곳 안팎의 업체가 예고편을 만들고 있다. 1분 안에 시선을 잡아라 예고편은 영화 개봉을 한달 앞두고 트는 본 예고편과, 개봉 서너달 전부터 내보내는 티저 예고편으로 나뉜다. 한국영화에서 본격적인 티저 예고편은 2000년작 <시월애>부터 만들기 시작해 2~3년 전부터는 제작이 대세가 됐다. 상영시간 2분 안팎의 본 예고편이 영화의 주요 장면과 스토리를 정보로 제공한다면, 1분 안팎의 티저 예고편의 목적은 호기심 유발이다. 튀는 아이디어는 그 핵심이다. 픽셀의 이규홍 감독은 “1분 안에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게 관건이며 이를 위해서는 로맨틱 코미디 예고편을 미스테리 식으로 구성하는 등 색다른 아이디어를 모두 끌어모은다”고 말했다. 코미디는 미스터리 구성, 드라마는 게임처럼 뮤비처럼 만화에 등장하는 말풍선의 삽입, 깜찍한 그래픽 활용으로 2002년 튀는 예고편의 전기를 마련했던 <집으로…>, 영화는 다분히 정적인 드라마지만 예고편에는 발랄한 게임 형식을 도입했던 <질투는 나의 힘> 등은 영화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예고편으로 시선을 모았던 경우다. <집으로…> 예고편으로 그래픽 유행을 선도했던 이현식 감독은 “손자가 할머니를 설명할 때 ‘그녀’라는 말을 사용해 마치 로맨스처럼 흘러가다가 반전처럼 할머니의 실체를 보여주는 게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요즘 뜨는 예고편 유행, 연출제작 예고편 최근 티저 예고편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 장면을 별도로 연출해 찍어 만드는 연출 예고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세 젊은 주인공의 이미지를 극대화해 한편의 뮤직비디오처럼 만든 <늑대의 유혹>이나 세 남자가 한 여자를 코믹하게 훔쳐보는 < S 다이어리 >가 모두 티저 예고편을 별도로 찍었다. 네 명의 남녀 주인공이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으로 영화의 발랄함을 쉽게 전달한 <싱글즈>의 예고편의 연출 예고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연출 예고편 제작에는 채은석, 용이 감독 등 CF 감독의 활약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교도소 복도로 끌려가는 여주인공과 철창 밖에서 애절하게 울부짖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으로 관객을 압도한 <인디언 썸머>(채은석 감독)의 예고편 제작을 진행했던 싸이더스의 권정인 팀장은 개봉 뒤 관객들로부터 “예고편에 나온 장면을 보러 갔는데 왜 나오지 않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연출 예고편이 보편화되지 않았을 당시 종종 받기도 했던 오해다. 최근엔 장면 별도연출 많아 전문제작사 20여곳 ‘시간전쟁’ 한국형 예고편 만들기 티저 예고편과 달리 본 예고편은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감흥을 의도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따라서 영화의 장면을 재편집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데 영화 촬영이 끝나고 개봉하기까지의 기간이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미국 영화와 달리 한국 영화는 길어야 두세달이다. 그 안에 예고편 제작을 끝내야 하는데 영화의 가편집 테입을 받기까지의 시간을 빼면 작업기간이 길어야 한달 반이다. 예고편 제작비는 보통 편당 2000만~4000만원, CF 감독을 동원해 예고편을 위한 별도의 연출·촬영을 할 경우 8000만~1억원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경우, 한국 영화 한편 제작비인 30억~40억원 가까이를 예고편 제작에 쏟는다. 또 한국 영화는 예고편 예산이 마케팅 비용에 포함되지만 할리우드는 제작비에 포함된다. 촉박한 시간, 제한된 예산 안에서 한국 영화 예고편은 화면과 사운드의 질보다 아이디어로 승부를 내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 시도를 하면서 한국 영화 예고편은 한국 영화 못지 않게 빠르게 발전해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녹음을 담당하는 나준택 기사는 “한국 영화 예고편을 본 외국인들은, 그 예고편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놀란다”고 말했다. 예고편 전문제작 모팩 한동성 실장 “이미지와 아이디어 싸움… 줄거리전달형 가장 까다롭죠” 예고편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회사 가운데, 제작 물량이 가장 많은 곳은 모팩이다. 1995년 컴퓨터그래픽 회사로 출발했다가 99년 <반칙왕>의 예고편을 만들면서 예고편 제작 전문 팀을 꾸려 컴퓨터그래픽과 함께 겸업하고 있다. 전체직원 20명에 예고편 전담 팀 5명이 한해에 제작하는 물량은 14~15편. <신라의 달밤> <황산벌>처럼 흥행에 성공한 상업영화에서부터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등 작가주의 색채가 짙은 영화까지 다루는 영화의 폭이 넓다. 한동성(31) 편집실장은 홍대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모팩에 입사해 첫 작품으로 임종재 감독의 <스물넷>의 예고편을 만들었다. 그뒤 <피도 눈물도 없이> <와니와 준하> <광복절 특사> <질투는 나의 힘> <지구를 지켜라> <효자동 이발사> <바람난 가족> 등 많은 영화의 예고편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t;피도 눈물도 없이>는 영국 팝그룹 블러의 노래 '송2'를 예고편 사상 처음으로 1천만원의 라이선스 비용을 주고 사와서 썼고, 예고편 자체도 비디오 테이프를 뒤에서 리와인드시키는 형식을 썼다. <신라의 달밤>은 컴퓨터 그래픽을 당시로선 ‘이래도 되나’ 하는 우려가 나올 만큼 많이 썼다. 석가탑이 빙글빙글 돌고, 글자가 툭툭 튀어나오고. 다행히 흥행이 잘 돼서 예고편 평가도 좋아졌고 투자·제작사로부터 보너스도 받았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컷 수가 많지 않아 예고편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한 실장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예고편을 만들면서 불경 낭송 같은 진중한 소리를 바탕에 깔았다. 화면에서 남녀가 벌이는 엉뚱한 행동들이 그 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묘한 아이러니를 불러일으키도록 의도한 것이다. 한 실장은 예고편의 유형을 세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이미지와 느낌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주로 멜로영화에 많이 쓰이게 된다. 둘째는 아이디어 중심형으로 영화의 컨셉을 어떤 아이디어 속에 담아 전하는 것이다. <광복절 특사> 예고편은 주말의 명화 형식을 빌어와 차승원과 설경구가 빠삐용처럼 감옥에 갇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셋째는 스토리텔링형으로 할리우드 영화 예고편들이 많이 쓰는 방식이다. 영화 본편의 장면들을 편집해 예고편을 만드는 방식인데 실제로 이게 제일 힘들다.” 남이 만든 예고편 가운데 그는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외국 영화 <스파이더 맨>을 베스트로 꼽았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사운드 작업이 충실하고 음악도 별도로 만들었으며 내용도 잘 전하고 있다. <스파이더 맨>은 스토리텔링 위주로 어떤 얘기인지, 이번엔 어떤 악당이 나오는지까지 전달하고 나서는 바로 성악 코러스를 깔면서 화려한 액션을 연이어 보여준다. 그렇게 영화의 스케일을 과시하면서 그 정점에 타이틀을 내건다. 스토리텔링형 예고편의 전범인 것같다.” 소리를 둘러싼 수수께끼 예고편은 사운드(음악과 음향)가 특히 중요하다. 90분이 넘는 영화를 1~2분 안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일은 청각에 호소하지 않고서는 쉽지가 않다. 많은 예고편 제작자들은 좋은 예고편의 조건으로 사운드를 두세 손가락 안에 꼽는다. 자기 영화를 관객에게 좀더 세게 광고하고 싶어하는 영화 제작자들은 당연히 예고편의 사운드가 크고 자극적이길 원한다. 그러나 소리의 크기가 일정량을 넘어서면 관객들이 괴로워한다.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해 미국처럼 한국도 예고편에 사운드를 입히는 업체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음량의 상한 규제선을 정했다. 영화진흥위원회 녹음실, 라이브톤, 블루캡, 웨비브랩 등 20개 업체가 지난 2003년말 모여 정한 이 상한선(LEQ값)은 85spl(사운드 프레셔 레벨)이다. 이 상한선은 영화 본편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듣기 힘들 만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영화라면 관객이 들지 않을 테니까 제작자들이 알아서 조절하게 되기 때문이다. 빵빵한 사운드 매력, 마구 키워도 될까. 한국영화 예고편 내레이션 드문 까닭은? 사운드와 관련해 생기는 한국 영화 예고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음악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경에 까는 방식의 예고편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영화 예고편 제작비의 규모 안에서 공포, 액션, 공상과학 등의 장르 영화의 질감을 전하는 효과음을 별도로 만들어낼 사운드 디자인 비용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본 영화에 쓰이는 효과음을 예고편에 따서 쓰려고 해도, 본 영화의 사운드 믹싱이 이뤄지기 전에 예고편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의치가 않다. 그러다보니 분위기에 맞는 음악 한 곡을 선곡해 죽 흐르게 하는 방식이 잦아지고 있다. 내레이션을 쓰지 않는 것도 한국 영화 예고편의 한 특징이다. 몇몇 코미디 영화의 예고편을 빼고는 한국 영화 예고편에서 대사와 별도로 성우가 내레이션을 하는 걸 보기 힘들다. 미국 영화 예고편에서의 내레이션은 익숙한데, 한국어로 하는 내레이션이 어색하다고 여기는 충무로의 풍토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할리우드 영화의 예고편 하면 바로 떠올리는 돈 라폰테인 같은 성우가 한국에는 없다. 영화의 제목을 낮은 저음으로 무게 잡아 한번 읽어주고, ‘커밍 순’ ‘디스 섬머’ 같은 말을 들려주는 돈 라폰테인을 흉내낸 한국 영화 예고편이 있기는 있었다. <낭만자객> 예고편의 끝부분에는 영어식 억양이 섞인 ‘낭만자객’이라는 네 글자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 내레이션은, 텔레비전 광고에서 영어로 된 제품명이나 회사 상호를 한번씩 읽어주는 일을 도맡아 하는 미국인 스톤버가 맡았다. 오래전부터 한국에 살면서 의 디제이를 했던 그는 한국 영화 예고편의 해외 버전에서 제목을 읽는 내레이션을 몇차례 맡기도 했다.

1318 소녀시대,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어디 가려고 해도 “민증을 보이라”는 바람에 쓸쓸히 돌아서서 몸에도 안 좋고 살만 뒤룩뒤룩 찐다는 ‘패스트푸드’점으로 가야 하는 이 심정을.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뭘 사려고 해도 “민증을 보이라”는 바람에 쓸쓸히 돌아서서 여느 으슥한 골목길에 위치한 구멍가게를 기웃거려야 하는 이 심정을.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똑같이 일하고도 “민증을 보이라”는 바람에, 시간당 1천원이나 싼값에 일하며 그것도 웬만한 데는 써주지도 않아 짜증이 텅 빈 지갑을 후벼파는 이 심정을.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우리더러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지만, 실은 우리는 ‘진탕 놀고’ 싶은 시기라는 것을.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른다. 우리도 생각이 있고, 우리도 알 만치 다 안다는 것을. 민증은 있으나, 감옥에 살고 있는 열아홉살을 제외한, 진정코 민증 있는 것들은 모르고 민증 없는 우리만 아는 1318세대, 18살 女girl들의 세계!(음흉한 아저씨는 입장을 삼가주세요) 휴대폰은 필수, 화장품은 기본, 아르바이트는 필살적으로 하는 1318 라이프 (※다음 내용은 최대한 표준어와 고운말로 교정됐습니다.) 난 이 땅에 핸드폰을 위해 태어났다. 00월00일 날씨: ? 친구들이 문자를 날렸다. 연말인데 뭐할까? 엄마는 고1 겨울방학이 중요하고 어쩌고 난리다. 아빠가 의사라고 나까지 의사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모르겠다. 의사 딸은 의사 하라고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써 있나?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내 의사는 의사가 아닌데. 우리반에 의사, 변호사 하겠단 애들이 꽤 된다. 쳇, 친구들이 스키장 간다는데, 나도 가고 싶다. 친구들하고 간다면 엄마가 허락할까? 핸드폰도 바꿔주면 좋겠다. 나도 ‘가로본능’이나 엠피스리폰 갖고 싶다. 저번에 그거 사달라고 했다가 죽을 뻔했다. 지금 있는 핸드폰은 핸드폰이 아니냔다. 핸드폰이 다 같은 핸드폰이 아니란 걸 엄만 모른다. 아니, 우리반에 핸드폰 없는 애가 있는 줄 아나? 엄마한테 다 있다고 뻥쳤다. 그러고보니 우리반에 민주만 없나? 엄마는 문자 날리는 만큼(내 손가락이 안 보인다고) 영어 문자 공부를 하면 어떻겠냐고 하는데, 천만에다. 쳇, 유진이한테 문자나 날려야겠다. 그런데 문자만 무제한 말고, 통화 시간도 무제한으로 해주면 안 되나? 난 정액제가 싫다. 펌: 래핑보아 강은경 과장 | “영화 가 메인 타깃이 10대라 모바일 문화를 많이 이용해요. ARS나 010 휴대폰 번호로 전화하면 배우 목소리 듣고 영화 노래 듣게 하고요. 아이들이 문자 보낼 수 있고, 문자 보내면 피자 배달해주는 이벤트도 하려고요. 아이들이 메시지 문화에 익숙해서요. 또 10대가 참여하고 자기 의견 제시하는 걸 좋아하는 리플 문화에 익숙해요. 인터랙티브를 좋아하죠. 그래서 직접 촬영이나 인터뷰 현장에 오게 하고 글쓰게 ‘제이제이 매거진’의 명예기자단을 꾸리고 그랬어요. 또 블로그를 만든 건, 싸이월드보다 인터랙티브 문화에 블로그가 더 맞는 시스템이어서예요.” 나도 알바할 줄 안다. 증도 있다 00월00일 날씨: 열라 춥다 유란이가 버디로 말했다. 봤단다. 다운받았냐니까 이것이 CGV에서 봤다는 거다. 어, 돈 많네? 놀렸더니 그런다. “남친이 냈어.” 그래, 미안하다. 나 남친 없다. 그래, 미안하다. 난 다운받았다. 돈 있거나 남친 있는 것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남친도 없고 돈도 없는 예쁜 것들은 나같이 집에서 다운받아 본다. 쳇 쳇 쳇. 버디 ‘친구 찾기’나 할까보다. 뭐 그것도 밤엔 귀찮긴 하다. 밤만 되면 온갖 쪽지가 날아오는데 짱난다. 어떻게 내가 예쁜 건 알아가지고. 수정이한테 문자나 보내야겠다. 내일 KFC 가자고 해야지. 우씨, 알바 구해야 하는데. 지윤이가 저번에 전단지 돌리고 얼마 받았다고 했지? 맞다. 500장당 5천원인가, 6천원인가. 맞다. 집집마다 돌리면 많이 받으면 1만2천원인가 받는단 거 같다. 까먹었다. 문자로 물어봐야지. 뭐니뭐니해도 은행 같은 데서 핸폰이나 정수기 광고 하는 게 제일이다. 대학생 학생증이… 맞다. 아영이 거다. 아영이한테 빌려달래서 그거나 할까? 아무튼 아영이는 대단하다. 별걸 다 만든다. 하긴 대학교 학생증 있으면 알바비가 달라지니까. 나도 하나 있었음 좋겠다. 똑같이 일하고 시간당 1천원이나 더 주잖아? 걔네는 알바로 돈 벌더니 저번에 동대문 갔다. 아, 나도 옷 사고 싶다. 쳇, 꽃이나 심으러 가야겠다.(역주: 담배 피우러 간다는 뜻) 펌: 버디버디냐? msn이냐? 인천 옥련여고 1학년 신민주 | “싸이는 하긴 하는데 버디버디 많이 해요. 동네 친구 찾고 쪽지 보내고. 싸이는 미니홈피만 하고 버디는 애들끼리 대화하고. msn 뭔지도 모르는 애들도 있어요. (msn 메신저) 알긴 아는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요. 나도 버디버디 하는데. 여자애들은 밤에 들어가면 남자애들이 문자 보내서 안 해요. 밤엔 쪽지 씹고 그래요.” 서울 선린인터넷고 1학년 박소영 | “msn은 문장이 쭉쭉 이어져 끊기 부담스러워요. 창이 뜨니까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버디는 짧은 얘기하는데 좋아요.” 서울 여의도고 1학년 서지승 | “저도 버디버디 해요.” 나도 뽀뽀할 줄 안다 00월00일 날씨: 모름 반 애들이 베이비 로션 사느라 난리다. 은서 말이, 인터넷 얼짱 남자애가 그랬단다. 자긴 베이비 냄새나는 여자애가 좋다. 그래서 애들이 베이비 로션 사느라 저리 지랄이었구나. 왜 그렇게 걔 보고 좋아 난리인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별론데. 지금 쓰는 립글로스도 맘에 안 드는데, 바꿨음 좋겠다. 내 건 ‘미샤’하고 ‘더 페이스’ 건데, 짝꿍 유민이는 ‘틴트’ 것이 더 좋다나? 하긴 우리반 애들은 틴트 쓰는 애가 많다. 유민이 말로는 립글로스가 반짝반짝하고 끈적거리지만 틴트는 바르자마자 싸악 말라서 끈적이지 않는다나? 입술 색깔만 빨개지고. 남친 있는 아영이 말로는 립글로스를 쓰면 뽀뽀할 때 남친이 싫어한단다. 끈적인다고. 그래서 자긴 끈적이는 글로스는 안 쓴다나 뭐라나. 남친 없는 거 알면서 일부러 나 들으라고 그러는 거다. 그래, 넌 뽀뽀도 하고 좋겠다. 절라 짱난다. 매직이나 해야겠다. 다 풀어져서 부스스하다. 귀도 한개 더 뚫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간지 짱인데. 까딱하다 아빠한테 걸리면 죽음이지만. 귀 좀 뚫는 거 같고 왜 그리 난리인지 모르겠다. 아빠 어렸을 때는 날라리나 귀뚫었다나? 요즘 귀 안 뚫는 애들이 있는 줄 아나? 우리반에 네개 뚫은 애도 있다. 위에는 조그맣고 착 달라붙는 걸 하고 맨 아래에는 링을 하는 거다. 우리집은 어떻게 엄마보다 아빠가 더 난리냐? 펌: ‘THE FACE SHOP’ 홍보팀 조상현 주임 | “10대들 주로 찾는 화장품은 기초보단 색조 위주예요. 또 일반 화장품보단 비누나 겨울철 립밤 같은 걸 찾아요. 가격 비싸지 않고 갖고 다닐 수 있는 걸 많이 선호하죠. 또 용기가 깜찍한 걸 좋아해요. 요구르트 팩이나 립글로스가 10대들이 주로 찾는 겁니다.” 1318 vs 1924 고딩과 대딩 이렇게 다르다 1. 1924가 오프라인 세대라면 1318은 온라인 세대. 2. 1924가 야채, 웰빙 먹을거리로 슬슬 넘어간다면 1318은 인스턴트, 패스트푸드 세대. 3. 1924가 msn 메신저라면 1318은 버디버디 메신저. 4. 1924가 나만의 독특한 글로벌 브랜드라면 1318은 동대문이나 중저가 브랜드. 5. 1924가 전반적인 옷차림에 신경쓴다면 1318은 무엇보다 신발에 신경쓴다(교복세대). 6. 1924가 개인적인 놀이에 열중한다면 1318은 또래문화 공통된 것에 열광. 7. 1924가 취업이 문제라면 1318은 성적과 부모님이 문제. 8. 1924가 전체 메이크업과 파우더에 집중한다면 1318은 오로지 립글클로스. 9. 1318이 싫어하는 건? 성적 갖고 차별하는 것. 술 못 먹게 하는 거. 간섭하는 거(제발 냅둬!). 통계와 조사로 알아본 10대들이 열광하는 것, 10대들을 살게 하는 것 우리나라 2004년 10~19살 인구는 656만명가량이다(통계청 자료. 월평균 용돈은 8만3천원(한국방송광고공사 MCR리포트)). 10대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린 이들은 어떤 인간들인가? 10대 성향 대열전. ‘Fun Producer’라는 이름의 재미 연출자 TTL과 TING 광고를 대행하는 화이트커뮤니케이션과 같은 계열사인 화이트넥스트의 ‘문화산업팀’은 일찍이 세대별 트렌드에 주목했다. 화이트넥스트와 화이트픽쳐스를 총괄하는 강수현 이사에 따르면 1318은 한마디로 ‘Fun Producer’다. 1318은 fun을 중심으로 만들고, 공유하고, 확산시킨다는 거였다. “10대는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한다. 20대가 ‘나’에 포커스를 맞춰 자신의 개성, 자신의 인간관계, 자신의 꿈과 앞날을 준비하려고 노력하는 데 반해 10대는 어떤 것이 가장 재미있는지, 누가 가장 재미있는지에 비중을 둔다. ‘재미있는 것’을 찾고 스스로 어떻게 놀면 가장 재미있을까 고민한다.” 2003년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발표한 MCR리포트 (이지연)도 흥미롭다. 이 리포트에 따르면 “10대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재미를 추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TV 시청 이유를 묻는 질문만 해도 20대 이상이 흥미, 오락을 위해(31.6%), 습관적으로(29.5%), 정보나 지식을 얻기 위해서(25.8%)였다면 10대는 흥미, 오락을 위해서(66.8%)가 압도적이다. 이 리포트에 따르면 식성도 다르다. 20대는 육류보다 채소를 좋아한다. 웰빙 푸드랄까? 하지만 10대는 대다수가 채소보다 육류다. 또 인스턴트 음식을 즐긴다. 셀프 메이킹 & 新공산주의? 화이트 강수현 이사에 따르면 1318은 ‘셀프-메이킹’ 세대(스타, 문구, 언어, 규칙 만들기)요, ‘공유-나눌수록 재밌다’ 세대다. “‘1318 新공산주의’라고 부를 만큼, 이들에겐 ‘내 것, 네 것’이 없다. 엄마한테 핸드폰 살 돈 받아내는 법부터 키스하는 법까지 온갖 노하우를 공유하고, 만화부터 일본 드라마까지 취향을 공유한다. 또 친구들끼리 예쁜 옷이나 액세서리를 같이 사서 빌려쓰고 016 사용자는 서로 ‘알’을 빌려주기도 한다(문자나 음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알’).” 이러니 놀이문화도 같을 리 없다. “1318이 온라인이 중심인 데 반해 1924는 오프라인으로 많이 옮아간다. 파티에 열광하고 홍익대 클럽을 즐겨 찾는 게 대표적이다. 한달에 한번 열리는 ‘클럽 데이’는 현재 매번 6천명 이상이 북적댄다. 경제관념도 다르다. 1318의 경제관념은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또래 사이의 친밀도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반면에 1924는 아르바이트도 돈을 얼마나 많이 주냐보다 자신에게 ‘경험’이 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선호한다. 또 쓰는 것도 많이 쓰지만 ‘돈 잘 쓰는 구두쇠’ 같은 모습을 보인다. 문화생활에는 아낌없이 투자하고 대부분은 먹는 데 쓴다.” 그래서 탄생한 게 ‘TTL’과 ‘TING’이다. TTL 처음 카피가 ‘처음 만나는 자유’였다. ‘남들과 다른 개성있는 자아로서의 나’를 추구하는 1924세대에 대한 철저한 분석 위에 탄생한 거였다. 반면 1318 문화의 핵은 바로 ‘학교’ 그리고 ‘반’(class)이다. 반이라는 집단에 개인 성향을 맞추어 나가는 또래문화다. 그래서 탄생한 게 팅 캠페인의 핵심을 이루는 ‘팅학교’ 컨셉이다. 그래서 팅 광고는 교실을 배경으로 폼나는 아이들 ‘집단’이 등장한다.

드라마 외국 현지촬영 배경에 이야기 가릴라

지난해는 아마도 해외 현지 촬영이 화제성 한국 드라마의 필수 장치로 등장한 해로 기록될 것 같다. <발리에서 생긴 일>을 시작으로 <영웅시대>와 <황태자의 첫사랑> <풀하우스> <파리의 연인> <두번째 프러포즈> <미안하다 사랑한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등이 해외의 풍광을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활용한 사례들이다. 결과는 엇갈린다. <황태자의 첫사랑>은 일본 훗카이도와 발리, 타히티 등 세계의 유명 리조트를 돌며 드라마 전체의 배경으로 삼았음에도, 시청자들의 시선끌기에 실패한 경우다. 풍광이 드라마의 이야기와 연기를 압도한 결과였다. 반면 <발리에서 생긴 일>과 <파리의 연인> <미안하다 사랑한다> 등은 극 초반과 후반부에서 제목에 거론된 지역을 각각 배경으로 활용해 성공을 거뒀다. 이야기와 배경의 이미지가 화학적 결합을 이룬 행복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국적인 풍광은 이야기 구조 안에 녹아들어, 초반 시청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 끝무렵 이야기를 닫는 데서도 해외 배경은 겉돌지 않고 극적 효과를 고조시키는 구실을 해냈다. 해외 현지 촬영이 시도되는 이유는 세가지 쯤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국적인 볼거리를 통해 멋진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하나다. 이야기 전개상 해외 촬영이 빠져선 안되는 경우도 있다. <발리에서 생긴 일>과 <파리의 연인>이 발리와 파리 현지 촬영 없이 방영된다면 상당히 생뚱맞은 느낌을 줄 것이다. 물론 이 경우도 국내에서 비슷한 곳을 찾아 촬영하거나,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처럼 미국이지만 실제론 하버드 아닌 유에스시대학에서 촬영하는 편법은 가능하다. 요즘 들어선 이른바 ‘협찬’이라는 제3의 요인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 드라마의 힘을 홍보에 빌리려는 해외 쪽의 자발적 요청과 협조 및 편의 제안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류드라마 열풍이 동남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까지 휩쓸면서, 상품과 지역을 한국 드라마 안에 배치함으로써 홍보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제 국내에 머물지 않는다. 올 2월16일 첫 방송이 나갈 에스비에스 <홍콩 익스프레스>의 경우, 홍콩관광청이 2억원의 현금을 협찬하며 현지취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도 한국 드라마 현지취재 유치를 위해 물밑교섭을 벌인다는 얘기가 들린다. 일본 제2의 대도시이면서도 일본 드라마들이 거의 도쿄를 배경으로 제작되는 바람에 도시 이미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며, 이럴 바엔 차라리 일본에서도 인기있는 한국 드라마를 활용하자는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세 이유는 별개가 아니며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문제는 세 요인의 갈등과 경합이 드라마의 완성도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멋진 그림에의 욕심이 이야기 전개의 필요성에 비해 부수적인 요인으로 치부할 수 있는 반면, ‘협찬’의 그늘은 자칫 이야기 구조 자체를 가리게 될 지도 모른다. 국제 관광자본의 협찬에 크게 의지했던 <황태자의 첫사랑>은 거듭 ‘반면교사’다. 한국 드라마가 국제적 홍보 대상으로까지 성장한 것은 반길 일이지만, 성장만큼 그늘 또한 넓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