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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궤변과 억견의 코미디, <애니씽 엘스>

초창기에 우디 앨런은 ‘상황’ 코미디를 많이 사용했다. 어설픈 갱단으로 분한 그가 비누로 깎은 권총을 들이밀고 협박할 때는 비가 내려 총이 거품이 됐고(<돈을 갖고 튀어라>), 하얀 쫄쫄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자신이 이제 막 바깥으로 튀어나갈 정자라고 우겨대기도 했다(<당신이 섹스에 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그러나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그러다가 그의 영화에서 뉴욕의 삶이 철학과 예술을 양옆에 끼고 등장한 것은 ‘말’이 영화의 중심적 양식을 차지한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우디 앨런은 뉴욕의 일상을 다룰 때 대화의 영화, 말의 영화를 고집한다. 스스로를 비롯하여 인물들은 많은 말을 한다. 레스토랑이 등장할 때 그곳은 메뉴가 중요한 곳이 아니라 잡담과 수다의 화제가 중요한 곳이다. 맨해튼의 거리와 센트럴 공원의 벤치가 존재하는 이유는 설전과 논쟁과 설교의 장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로 벌이는 정신상담은 말로서 문제 해결을 보려는 최후책이지만, 머리맡에 앉아 초침을 바라보며 ‘시간 다 됐습니다’를 연발하는 상담의를 보여주는 것은 그 말들이 어쩌면 상습의 일환이라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고도 모자라 흘러나오는 독백은 대화들 속에서 미처 주장하지 못한, 또는 차마 상대방에게 하지 못한 나머지 대화를 표현하는 양식이다. 인물들은 독백조차도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관객에게 한다. <애니씽 엘스>도 그렇다. 내면화하는 것 없이 모든 심리적 요소를 말로 끌어내 외면화한다.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는 침대에서의 섹스도 거리에서의 담화 대상이며, 사람의 변심도 말꼬리의 변주로서 눈치챌 수 있는 것이다. 숨겨진 심리에서가 아니라 까발려진 말들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때때로, 코미디가 먼저가 아니라, 말이 먼저인 것이다. 그 말들이 웃긴 것은 대체로 궤변이기 때문이고, 억견이기 때문인데, 뒤집어 생각하면 심각한 진실일 때가 많다. <애니씽 엘스>는 이 두 가지 말의 양면을 모두 보여주는 코미디영화이다. 제리(제이슨 빅스)는 상승길에 접어든 코미디 감독이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아내 아만다(크리스티나 리치)가 있다. 그런데 제리와 그녀 사이에는 문제가 많다. 그녀의 철없는 어머니가 집으로 쳐들어와 동거를 시작하는 것은 참아줄 만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아내가 6개월째 그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다. 그 즈음 제리는 우연히 알게 된 괴짜 코미디 작가 도벨(우디 앨런)과 친해지고, 집에까지 초대한다. 그런데 제리의 아내를 본 도벨은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고 단정한다. 그것은 곧 사실로 밝혀진다. 제리는 낙심하지만, 아내는 당당하게 말한다. 사랑하는데 왜 섹스가 안 되는지 걱정이었고, 그래서 불감증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남자와 잠을 잤고, 너무 좋아서 손톱으로 벽까지 긁었으니 불감증은 아닌 것 같다고. 다른 남자와 여행을 갔다 와서도, 섹스는 했지만 그 순간 생각한 건 당신이었으니 정말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니겠냐고. <애니씽 엘스>에서 문제를 어지럽혀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그녀 말의 억견이다. 그러나, 문제를 정리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도벨의 억견이 담긴 말들이다. 유대인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총을 가져야 한다에서 시작하여 온갖 조언에 이르기까지 수상한 점이 많지만, 끝내 제리의 결단력을 추진시키는 것은 ‘사이코’ 도벨의 ‘가르침’ 덕택이다. 우디 앨런이 유대인인 자신을 유머의 소재로 삼은 것은 오래되고 흔한 일이다. 이제 <애니씽 엘스>에서는 젊은 주인공까지도 유대인으로 등장시킨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코미디 작가로 설정한다. 자신이 늙은 코미디 작가를 하고, 제이슨 빅스를 젊은 코미디 작가로 설정한 것은 종전에 자신이 했던 역할을 제이슨 빅스에게 투영하려 한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질문과 대답의 방식이 바뀐다는 것이다. 문장화하자면 이런 것인데,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돼가는 거야?’. 우디 앨런은 영화 속 인물들(특히 뉴욕 거주자들)을 통해 항상 이렇게 물어왔다.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난 다음, 어렵게 답을 찾고는 다시 다음 영화에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애니씽 엘스>에서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 아니라 제이슨 빅스이다. <애니씽 엘스>의 주인공은 제이슨 빅스지만, 이 영화의 문제에 대답하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다. 대신 우디 앨런은 어떻게든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대답을 해주는 사람의 위치를 맡는다. 우디 앨런은 젊고, 늙은 유대인 코미디 작가의 대화를 통해 코미디의 ‘토라’(Torah)를 쓰듯이 <애니씽 엘스>를 만들었다. 슬랩스틱부터 삶에 대한 성찰 담은 코미디까지 우디 앨런의 코미디영화들 우디 앨런의 영화에 대해 투박한 몇개의 범주화를 시도할 수가 있다. 우선 그의 초창기 영화들은 철학과는 거리가 먼 편이었고, 상황 발생적인 코미디들이 많았고, 풍자적인 성격이 강했고, 슬랩스틱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시도들도 있었다. 우디 앨런이 허약한 갱으로 출연했던 <돈을 갖고 튀어라>는 영화보다 코미디 작가로 먼저 성공했던 그의 일면을 확인시키는 데뷔작이다. 뒤이어 만들어진 <바나나>는 풍자코미디고, <당신이 섹스에 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그러나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은 성에 관한 단막식 실험극이다. 우스꽝스런 인물을 통한 가상 시대극은 우디 앨런의 또 다른 장기이기도 하다. <사랑과 죽음>은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나폴레옹 암살 작전이 펼쳐지는 영화이고, 우디 앨런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젤리그>는 젤리그라는 가상 인물의 가짜 다큐멘터리 역사극이다. 한편으로는 영화에 관한 자기 반영적인 영화들도 많다. 우디 앨런이 영화 속 영화감독을 맡아,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의 장면을 흉내내면서 시작하는 <스타더스트 메모리>가 그 대표작이지만, 영화 속 영화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카이로의 붉은 장미>는 영화사적으로도 몇 안 되는 유쾌한 자기반영적 영화에 속한다. 우디 앨런은 그가 좋아한 영화작가 잉마르 베리만의 영향 아래서 영화를 완성하기도 했다. 베리만과 작업을 같이한 스벤 닉비스트가 촬영을 맡았던 <또다른 여인>이 있고, 베리만의 존재론적인 주제관과 좀더 잘 이어져 있는 <범죄와 비행>이 있다. 90년대를 넘어서서 우디 앨런이 새롭게 시도한 것 중에는 뮤지컬영화가 있다.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가 대표적이다. 무엇보다도, 우디 앨런의 영화는 곧 대도시 뉴욕의 정조와 등치되어 이야기된다. 그의 영화 상당수가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중에서도 뉴요커들의 일상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큰 호평을 받았던 <애니홀>이다. <애니홀>에서 우디 앨런은 다이앤 키튼과 함께 앞으로 그의 영화 속에서 만들어질 뉴요커들의 전형을 담아낸다. 흑백 시네마스코프로 찍어낸 <맨하탄>에서는 나이 차 많은 연하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첫 번째 사례를 만들고,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는 세 자매와 남자들의 복잡한 관계가 중심이 되고, 이혼과 이별에 대한 성찰이 담긴 <부부일기>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틴 스코시즈,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뉴욕 스토리>도 있다. 이렇게 보면, 우디 앨런의 코미디영화도 꽤 여러 가지 범주가 있는 셈이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남과 여> 아누크 에메

몽정을 했다. 사실 나는 그 때,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이길 더 바랬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날 이후 나는 떨어지는 꿈을 꿔서 키가 훌쩍 자라길 바랬지만 그 여자(또는 그 여자를 대신하는 잔상들)가 내 꿈을 지배했고 나 또한 그 여자를 만나 속옷을 흥건히 적시곤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영화 제목도 생각이 나질 않는, 주말의 명화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영화였던 것은 얼핏 기억이 난다. 당연히 영화 스토리는 잊은 지 오래지만 그 여자만은 너무나 또렷하게 내 마음 속에 아직도 있다. 라쿠웰 월치? 그 여자의 이름도 바른 표기법으로 쓸 줄 모르지만 그 여자가 내 열다섯 가슴에 들어올 때, 몸의 들고 나는 환상적 형태와 착 달라붙고 짧았던 그 도발적 의상들은 눈을 감고도 아직 그려낼 수 있다. 그 여자 때문에 나는 한 동안 스크린에서 여자 연기자들을 볼 때, 연기는 물론 얼굴도 채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몸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잔상만으로 남아있을 뿐 너무나 빨리 이별하고 말았다. 사실 그 여자 같은 역할모델들은 이후 너무나 쉽게 봐올 수 있던 터라 사랑의 미묘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꿈에서 등장하지 않았다, “박하사탕” 들꽃같은 여인이여… 아주 오랫동안 내 마음에 담아두었던 여인은 미처 그 이름도 모른 채였다. 아누크 에메. 나는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이 영화만을, 딱 한 편만 본 줄 알았다. 남과 여의 문제를 <남과 여>라는 단편적인 창을 통해 이해하는데도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여인 때문이었다. 요즈음 말처럼, 필이 꽂힌 채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좋아했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었다. 도빌의 바닷가, 파도가 일렁이고 아이들이 분주하게 뛰는 그 회색빛 해안가의 바람처럼 그 여인의 서늘한 눈빛은 한없는 깊이를 가진 여인의 모습으로 나로 하여금 성적대상으로서 여배우와 관계를 정리하게 만들었다. 얇은 입술이 가진 관능 그리고 검은 브래지어로 이등분된 여윈 등판이 아름다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만든 그 여인은 상당한 기간 동안 현실에서 여자친구조차 비교하게 만든 나의 절대 지배자이기도 했다. 사실 그 여인의 외모를 잘 기억해내지 못한다. 다만 그 여인의 냄새(영화인데도 말이다), 같이 있었던 카페의 소음들, 그 여인이 머리를 손가락 사이에 넣어 쓸어 올릴 때 우아한 그 움직임들을 어느 것 하나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특이하게도, 아니 애타게도 내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사게 했던 장본인이다. 그 여인이 나온 영화를 볼 때, 나는 미처 그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오직 <남과 여>에서 그 여인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다고 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내처 달려가 봤던 <남과 여 20년 후>. 그 여인 또한 20년 후였다. 세월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도 서늘하고 깊은 고혹적인 눈빛과 아름다운 지혜를 가득 문 입술, 그리고 세월을 내려놓지 않는 시원한 이마로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 여인이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했었다. 최소한, 나이 들어(?) 영화 속에서 인연으로 만나는 그 따위 일들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처음, 너무 촌스러워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데 다급하게 빠져나가는 병사들의 소란스러움과 그 여자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의 여유로움 사이에서 그 여자는 너무나 어리숙하고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소리. 그 여자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애감정이 생기는 대상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달뜬 감정이 몸을 데우고 복받쳐 오르는 끓는 감정을 촉발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여자가 왠지 내 연인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만든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를 면회 온 그 여자의 청초한 들꽃 같은 모습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클로저> 감독 마이크 니콜스 [2] - 자타공인 걸작 베스트 5

배우들의 마음을 열게하는 그만의 연출 방식 마이크 니콜스는 배우 복이 많은 편이다. 심지어 <울프>나 <너 어느 별에서 왔니?>처럼 ‘감독님, 왜 이런 영화를 만드셨나요?’라고 묻고 싶어지는 영화들도 출연진은 화려했다. 40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니콜스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배우들도 있다. 잭 니콜슨, 메릴 스트립, 에마 톰슨 등은 다양한 작품에서 그에게 힘을 보탠 충성스런 배우들. 잭 니콜슨처럼 까다롭기로 유명한 배우도 “당신이 부른다면 언제든지”라며 달려오곤 한다. 그가 배우 조련에 비상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결과로도 입증됐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애정과 욕망>의 앤 마거릿, <워킹걸>의 멜라니 그리피스, <버드 케이지>의 네이선 레인 등 ‘연기파’로 공인된 적 없던 배우들이 그를 통해 ‘일생일대’의 연기를 펼쳐 보일 수 있었다. <클로저>의 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기 배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감독에게, 배우는 최선을 다해 보답하게 마련이다.” <프라이머리 컬러스> <위트> <엔젤스 인 아메리카>에서 함께한 에마 톰슨의 증언이다. 배우들과의 교감이 저절로 이뤄진 건 아니다. 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테라피 세션”(빌리 밥 손튼)으로 불리는 특별한 리허설을 갖는다고 알려져 있다. <클로저>의 경우도 주연배우 넷을 모아놓고 4주간 토론과 훈련을 시켰다고 하는데, 줄리아 로버츠에 따르면, “그의 리허설은 인간 행태에 관한 수업 같다”는 것이다. “배우들이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게 좋다. 마음을 열어도 좋다고,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캐릭터와 배우에 남다른 공을 들이는 그의 연출 방식이, 연극무대에서 출발한 그의 노하우와 철학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40년 부침의 세월을 건너 다시 전진한다 미국의 쇼비즈니스를 좌우하는 상이 네개 있다. 영화의 오스카, 연극의 토니, TV의 에미, 그리고 음악(공연)의 그래미. 마이크 니콜스는 이 네 가지 상을 모두 받았다. 그와 더불어 ‘4관왕’의 고지에 오른 이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멜 브룩스 정도다. 니콜스는 그런 의미에서, 누구보다도 성공한 ‘예능인’이지만, 적어도 영화감독으로서는, 몇번의 심각한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졸업> 등의 초기작에서 보여줬던 패기가, <캐치-22>나 <애정과 욕망> 같은 다소 과격한 실험으로 전이됐고, 이어진 작품들의 실패로 8년간 할리우드를 떠나 있던 것이 첫 번째 위기. “다시 현장에 돌아왔을 때, 다음 신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전과 달리, 무의식적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영화의 전공정을 즐기게 된 건 이때부터다.” 83년 <실크우드>로 돌아온 그는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환대를 받았지만, 수면제로 처방받은 약물 부작용으로, 가진 돈을 모두 잃었다는 망상,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약물 부작용에서 헤어나고, 훗날 네 번째 아내가 된 방송의 저널리스트 다이앤 소여를 만나면서, 전보다 밝고 가벼워진 코미디 <워킹걸>을 선보인 것이 1988년. 이어진 니콜스의 90년대 필모는 <헨리 이야기> <울프> <버드 케이지>등 좀더 대중적인 영화들로 채워졌다. 또다시 <프라이머리 컬러스>가 미국 밖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너 어느 별에서 왔니?>는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했지만, 니콜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통찰력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스카상을 타는 건, 자정 무렵 텅 빈 베벌리힐스 호텔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반면 실패하게 되면, 행복이 바로 내 곁에, 내 집에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편집 보조로 일하던 시절, 빌리 와일더가 들려준 이야기를 되새겼는지도 모른다. “매순간을 보석으로 만들려 하지 말아라. 진주를 꿸 줄을 만들 시간도 필요하다”는. 누구도 칠순에 접어든 그의 재기를 믿지 않았지만, 그는 여유롭게 연극을 보았고, 희곡을 읽었고, 그중 몇을 연달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쏟아냈다.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고 있는 니콜스의 작품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거칠고 뜨겁다’. 자타공인 걸작 베스트 5 누가 이 영화빼고 니콜스를 논할수 있으랴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 에드워드 알비의 동명 희곡이 원작으로, 스크린에 연극의 리얼리즘을 끌어들인 작품. “당시까지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신성모독적이며 외설적인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역사학 교수 조지와 그의 다혈질 아내 마사가 술에 취해 언쟁을 벌이고, 마침 집에 초대된 신임 강사 부부도 이들의 싸움에 휘말린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욕설과 논쟁과 일탈의 난장판이 벌어지지만, 새벽 무렵 이들의 아들에 얽힌 비밀이 밝혀진다. 이전까지 미모만 부각됐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술과 담배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자기파괴적인 중년 여인으로 열연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니콜스는 역시 이 작품으로 오스카를 수상한 촬영감독 하스켈 웩슬러와 견원지간이었다고 고백하면서도, 촬영의 메커니즘을 배운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밝힌다. <졸업>(1967) 유혹과 불륜, 반역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시대를 앞서간’ 영화.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출신으로, 수동적으로 살아온 모범생 벤자민은 로빈슨 부인과의 은밀한 관계에 탐닉하지만, 그녀의 딸 일레인을 사랑하면서 혼란에 빠진다. 둘의 관계를 알게 된 일레인이 떠나가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려던 날, 벤자민은 웨딩드레스 차림의 일레인을 데리고 사랑의 도주를 벌인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 메시지, 비전형적인 얼굴의 히어로가 내뿜던 조용한 카리스마,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섬세한 음악이 풍성하게 어우러진 명작. 로빈슨 부인의 미끈한 다리 아래로 작게만 보이는 벤자민의 무력한 모습, 잠수복을 입은 채 수경 밖으로 부모를 바라보는 벤자민의 시점, 결혼식 날 도망쳐 버스에 오른 두 남녀의 조용한 미소는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들이다. <애정과 욕망>(1971) 인물의 구도에서, <클로저>와 가장 많이 닮은 영화. 이성관계에 보수적인 남자와 본능에 충실하게 관계를 시작하고 맺는 또 다른 남자가,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랑과 성에 대한 다양한 탐색을 벌이는 이야기. 마이크 니콜스는 이를 자신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어둡고 느린 영화”로 꼽으며, 가장 큰 애착을 보인 바 있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미국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상영이 금지됐고, 잭 니콜슨이 연기한 방탕한 남자 캐릭터를 중심으로 여성을 비하한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니콜스의 생각은 다르다. “그 시대 남자들은 ‘휴 헤프너(<플레이보이> 발행인) 세대’라고 할 수 있었다. 여자들을 대상화했고, 여자들에게 스스로 대상화하길 권했다. 이후 남녀관계에 평등이 대두된 건, 바람직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위트>(2001) 마거릿 에드슨의 퓰리처 수상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 저명한 여교수가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병원에서 힘겨운 치료를 받던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느낌을 이야기하는가 하면, 현재의 세팅에서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는 판타지를 보여준다. 사무적인 의사들을 보며, 학생들에게 가혹했던 자신을 떠올리고, 용어와 화법을 깐깐하게 분석하던 자신이, 고통과 느낌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되자, 황망해하기도 한다. “죽음이여, 그대는 날 죽일 수 없다. 죽음은 영원하지 않다. 죽음, 그대는 죽을 것이다”라는 시구로 암전. 죽음을 통해, 거꾸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니콜스의 ‘화려한 재기작’이 되었다. 에마 톰슨 역시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2003) 2003년 12월 에서 방영돼 전미를 발칵 뒤집어놓은 작품.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수상한 극작가 토니 쿠시너의 장편 희곡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6천만달러의 제작비와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대작. 레이건 시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두 커플, 그리고 보스와 부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로 사랑하던 게이 커플은 둘 중 하나가 에이즈에 걸리면서 파경을 맞는다. 성생활이 없는 젊은 부부의 문제는 모르몬교도에 공화당원인 남편이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악덕 변호사인 남자의 보스 또한 에이즈에 걸렸지만, 그는 “나는 남자와 자는 헤테로이고, 암환자”라며,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에이즈 문제를 방치했던 레이건 시대를 고발하고, 인종과 종교와 정치와 성별과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자행되는 ‘미국의 지금’을 돌아보게 하는 이 작품은 지난해 골든글로브 5개, 에미상 11개 부문을 독식했다.

허진호 감독의 <외출> [1]

허진호 감독의 <외출>은 지금 막 시작되려 한다. 1월19일 강원도 삼척 현지 테스트 촬영으로 외투의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 나면, 곧바로 겨울바람 속으로 나아가 크랭크인이다. 4년 만인 그의 세 번째 장편은 여느 때보다 조금 소란스레 시동을 걸었다. 한류 격랑의 꼭대기에 선 배용준과 아시아 관객에게 인지도가 높은 손예진의 캐스팅은 <외출>(제작 블루스톰, 투자 쇼이스트)에 쏠린 시선의 무게를 부쩍 늘려놓았다. 그러잖아도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아시아의 동료 감독과 관객에게 사랑받았고 <봄날은 간다>는 홍콩, 일본(어플로즈 픽처스, 쇼치쿠)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비평가들은 그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이나 오즈 야스지로를 거명해왔다. 허진호 사랑론의 3장을 기다리는 관객은 우리만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의 영화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고 이별이 있다. 그리고 죽음이 서성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프레임 바깥으로 밀려나는 연애의 이면에 허진호 감독은 또다시 유심한 눈길을 준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사랑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에, <봄날은 간다>가 유리그릇처럼 금이 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궤적에 주목했다면, <외출>은 두 기혼 남녀의 밀애가 교통사고로 말미암아 피투성이로 까발려진 다음, 병상에서 두 배우자가 마주쳤을 때 어처구니없이 불붙는 사랑 이야기다. 등을 맞대고 있는 두쌍의 감정 또는 네 남녀의 사방무늬 같은 관계에 대한 흥미는 지난해에 만들어진 허진호 감독의 단편 <따로 또 같이> <나의 새 남자친구>로부터 엿볼 수 있다. <따로 또 같이>에서는 짐 싸서 헤어진 남녀가 행복한 시절 녹화된 이미지를 보고 각자 울음을 터뜨린다. 분명 자신들이지만 어떤 타인보다도 지금의 자기와 다르게 느껴지는 두 연인의 이미지를 응시하며. 후속 단편 <나의 새 남자친구>에서는 실연한 여자와 남자가 사랑의 낙서를 지우러 백마의 카페에 갔다가 바로 짝을 짓는다. 환하게 웃으며 돌아오는 신생 커플의 어깨 뒤에는 지워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에 대한 추억과 <외출>이 경계를 긋는 부분은, 주인공 인수와 서영의 사랑에 내포된 격렬한 삶의 위기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봄날은 간다>의 아픔이, 비록 찢어지는 고통이었을지언정 외적인 일상의 수면에 파문을 남기지 않는 ‘내상’이었다면 교통사고의 파열음이 두들겨 깨우는 <외출>의 갈등은 생사와 결혼의 무거운 계약이 흔들리는 지각변동이다. “내 영화에서도 감정이 표출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인물의 감정이 무척 크다면 그것 자체는 거짓이 아니다”라고 간간이 말해왔던 허진호 감독은 <외출>에서 스스로를 강제해서라도 카메라를 인물에 한발 더 밀착시키고 영화를 응시의 자리에서 밀어내 인물 심리에 연루시키려고 한다. 그것은 <외출>의 이야기 자체가 허진호 감독이 원하는 거리감을 깨뜨리는 ‘침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눈물과 신음의 멜로드라마를 상상하면 낭패 볼 공산이 크다. 예나 지금이나 허진호 감독은 분노와 절망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이해의 단서부터 찾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허진호 감독의 두 영화가 보여준 농밀한 정적 언저리에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아주 망그러뜨리지 않으려는 엷은 연민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배신의 중첩으로 요약되는 <외출>의 ‘선정적인’ 모티브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의 설정이라기보다 TV연속극적인 상황에 가까워 보인다. 플로베르는 불륜을 “통속성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저항”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평정한 세계에 대한 감독의 연민이 명해온 금기를 대범하게 쓸어 담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서지지 않는 경지를 보여주려는 야심을 <외출>에서 읽는다면 예단일까. 이튿날이면, 삼척행 국도를 달리는 차 안의 카메라 뒤에서 인수의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허진호 감독에게 <외출>의 자세한 경위를 물었다. -2001년 가을 <봄날은 간다> 이후 <외출>이 있기까지, 두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고 한 장편에 관한 이뤄지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2003년 인터뷰에서 들려준 “이제 감정의 분출을 그리고 싶다”는 말은 당신의 영화가 나아가려는 방향을 막연히 짐작하게 했다. 아카데미 20주년 옴니버스 단편 <따로 또 같이>부터 이야기해보자. <따로 또 같이>는 오직 사랑이 끝난 여자와 남자의 흐느낌만 번갈아 보여준다. ‘연애에 실패해서 우는 남녀를 찍는 법’을 실습한 것 같다. 이들이 왜 헤어졌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장편 <행복>의 시나리오를 쓰는 도중 한달 동안 만들었다. “비디오를 본다”는 명제에서 시작했던 것 같다. 왜 요즘 누구나 디지털 비디오를 많이 찍지 않나. 동거하던 남녀가 헤어져 여자가 짐을 싸서 나가는 상황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나쁜 상태에서 행복했던 날 모습을 찍은 비디오를 볼 때 느끼는 어떤 역설, ‘차이’가 만들어내는 슬픔이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비디오 내용을 하드코어로 갈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다음검색 페스티벌 단편 <나의 새 남자친구>는 <따로 또 같이>에 이어지는 후일담이다. 실연을 극복하는 온갖 방법을 시도하던 여자가 또 다른 실연남과 맺어진다. 이 영화에는 허진호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가장 가까운 클로즈업이 나온다. 연애의 유치함을 마음껏 보여주기도 한다. =문득 연작의 형식을 떠올렸다. 클로즈업은, 안 그러면 내가 자꾸 인물에게서 떨어지려고 하는 것 같아 의도적으로 확 들어가서 찍자고 했다. 또 일부러 가볍게 찍었다. 이모개 촬영감독도 놀라더라. <봄날은 간다> 일반 시사회의 폭소를 들으며 “내 영화, 로맨틱코미디구나”라고 느끼기도 했다. -본디 세 번째 장편으로 계획했다가 <외출> 다음 순서로 밀린 <행복>은, 병들어 요양소에서 만난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고 들었다. <외출>은 그 병실 바깥을 서성이는 두 사람 파트너의 이야기인 듯해 차례가 바뀌는 편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두 이야기는 쌍둥이이거나 변주인가? <따로 또 같이>와 <나의 새 남자친구>의 관계처럼. =아니다. <행복>은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그리는 영화이고 <외출>은 과연 이렇게 만날 수가 있나 싶은 상황에서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다. 일상에서 동떨어진 공간에서 만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행복>의 남녀와 <외출>의 남녀가 나눈 시간의 성격은 다르다. 요양소 세팅 등 여러 문제가 겹쳐 <행복>을 결국 미루고 날짜도 정확히 기억하는데 지난해 7월1일에 “자, <외출> 하자!”고 스탭들에게 말했다. <외출>의 모티브는 2003년 상반기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 심사에서 접한 이일 작가의 <바람-소년 소녀 여행을 떠나다>에서 왔다. 원안은 여자와 보험회사 직원의 연관이 밝혀지는 등 일종의 반전 스릴러였는데, 이야기 첫머리의 교통사고가 특이하면서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 담아두었다. <외출> <행복>, 2편의 장편을 한해에 찍어볼까 의욕도 냈는데 그건 좀 힘들어진 것 같다. 그래도 <외출>이 끝나면 지체없이 <행복>을 찍고 싶다. -그런 조바심은 <행복>까지 한 시기를 마감하고, 이후에는 판이한 작품을 찍고 싶어서인가. =맞다. 다음다음 영화도 구체적으로 여러 편 상상해두었다. 연애 이야기가 있되 서브 플롯으로만 들어가기도 하고. 차기작을 안고 영화 찍기는 처음이라 부자가 된 기분이다.

한국영화 속 ‘소녀들의 섹슈얼리티’의 진부한 도식

지난 한해, <어린 신부>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폭 아저씨들과 80년대 오빠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나는 사랑을 아직 몰라”라며 깜찍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들의 등장. 이 소녀들은 더이상 첫사랑에 눈물을 머금는 순진한 십대도, 그렇다고 제도와 세상물정을 꿰뚫는 속세의 여인도, <나쁜 영화>나 <눈물>에서처럼 사회의 극단을 체현하는 ‘주변부’ 아이들도 아니다. 그렇다면 소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백지의 표정을 지으며 그 무거운 제도와 사랑과 성을 단순한 종잇조각 혹은 게임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일까? 철없음을 무기로 사실은 매우 영악하게 거대 담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 진지함으로 포장된 제도, 사랑, 성의 이면에는 아무런 본질이나 진리가 존재하지 않음을 자신들만의 언어로 조롱하고 있는 것일까? 아쉽지만 위의 의문은 단지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대를 실현하기에 소녀들은 여전히 진부함과 순종의 울타리를 맴돌고 있다. 금기를 ‘말한다’는 것이 곧 그것을 ‘사고한다’는 의미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소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랑과 성에 대해 조잘대지만, 그녀들의 ‘말’에는 아무런 울림이 없다. 소녀들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영화들이 이제는 꽤 다양해진 에피소드들과 함께 우후죽순처럼 쏟아짐에도 그 양에 비해 이러한 영화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토대로 재생산되고 있다. 그 구조는 소녀와 섹슈얼리티간의 파격적인 만남을 억지로 순화시켜 ‘정상’의 범주에 끼워넣는 데 일조한다. 소녀와 섹슈얼리티는 서로를 도발하는 대신 서로의 날카로운 톱니바퀴들을 무디게 갈아서 새로운 기획 상품으로 변신한다. 조폭영화, 복고영화의 뒤를 잇는 <어린 신부> 속편들. 이러한 경향을 롤리타 콤플렉스와 같은 남성 판타지로 규정하기에는 영화의 주요 관객층이 소녀들 자신이라는 이유를 굳이 제시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이 글은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재생산되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살펴보며 이 영화들의 화려한 껍데기를 벗겨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껍데기 속에 감추어진 지극히 상투적인 구조에 주목한다.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소재로 펼쳐지는 최근의 영화들에는 대개 안전장치가 존재한다. 이것은 팔팔 뛰는 섹슈얼리티의 에너지 혹은 퇴폐와 고통을 넘나드는 그것의 그림자를 적당한 강도로 억제시키기 위해 이 영화들이 선택하는 배경의 문제이다. 안전장치1: 학교 제도 안의 소녀들에게 안착하는 섹슈얼리티 첫째, 섹슈얼리티의 담론을 학교 울타리 안에서 구성해내며 제도 안에서의 성장통을 강조한다. <어린 신부> <돈텔파파> <여선생 vs 여제자> <몽정기2> <여고생 시집가기> <제니, 주노>부터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에 이르기까지 소녀들은 교복을 입고 사랑하고 욕망한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임신을 하고(<제니, 주노>), 결혼을 하고(<어린 신부>) 거침없이 성담론 위에 올라 마치 표면적으로는 제도의 틀에 균열을 일으키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직 학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리 성인의 범주를 침범하더라도 여전히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 그 어떤 욕망도 철없음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학교라는 제도가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선사하는 너그러움이다. 그것은 학교 안 소녀들의 욕망은 어차피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안전장치2: 낭만적인 로맨스로 중화되는 섹슈얼리티 둘째, 위와 같이 학교 안 소녀들의 욕망에서 전복성을 제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로맨스로 중화시키는 것이다. 선생님에 대한 짝사랑이건(<몽정기2> <어린 신부> <여선생 vs 여제자>), 동갑내기를 향한 사랑이건 그 사랑에는 언제나 쓴물이 빠진 낭만적인 단물만이 남는다. 소녀들의 성적 욕망은 선생님의 탈을 쓴 자상한 젊은 오빠로 향하는 과정에서 싱싱함을 잃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승화된다. 예컨대, <몽정기2>의 은비나 <어린 신부>의 보은, <여선생 vs 여제자>의 미남은 그녀들의 욕망이 애초 영화적으로 재단된 것이었다 해도 막무가내로 방방 뛰는 힘이 있었지만,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거나 소중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정리한다. 혹은 <그놈은 멋있었다>나 <늑대의 유혹>에서처럼 소녀들의 욕망은 모성에 대한 남자아이들의 욕망에 흡수되어 사랑의 이름으로 포섭된다.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밖으로 흩어지지 않고 차오르는 순간 내부로 봉합된다. 소녀들은 그렇게 성숙한다.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어찌 되었건 로맨스를 완성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동안 소년의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재현되었는가? 소년들의 성은 거친 말투와 다양한 방식(도색잡지, 비디오부터 자위를 위한 기상천외한 수단들)을 통해 노골적으로 제시되어왔다. 남학생들은 사랑이 아니라 섹스를 꿈꾼다. <몽정기>에서 로맨스의 환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소년들이 아니라 그들의 여자 교생(김선아)이었다. 그녀는 소년들의 완벽한 ‘캔디’(영화에서 이 단어는 그들의 성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을 일컫는 은어이다)로 존재하지만 그녀는 정작 키스 한번 못해보고 운명적 사랑만을 되풀이하는, 꿈만 먹고 사는 여자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안전장치3: 가족이나 운명의 보호를 받는 섹슈얼리티 셋째,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는 학교뿐만 아니라 무방비하게 노출된 그녀들의 성을 정리정돈시켜주는 가족, 운명의 보호를 받는다. 그녀들은 자기 욕망의 자율적 주체가 아니다. 그녀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어린 신부>에서 소녀의 결혼은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여고생 시집가기>에서는 평강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한 운명적 선택으로 정당화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드라마 <낭랑 18세>나 <쾌걸 춘향>에서도 그녀들의 이른 결혼은 언제나 자기 결정권 밖에 존재한다). 소녀들은 교복을 입은 채, 어느 순간 유부녀가 되어 있다. 소녀의 결혼은 조선시대로 돌아가 21세기로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에 의해 당시의 방식으로 아무런 무리없이 진행된다. 소녀들은 부모의 뜻을 거역할 수 없고, 하늘의 뜻을 피할 수 없고, 심지어 새 생명을 죽일 수 없어서(<제니, 주노>) 사랑의 끝, 결혼으로 골인한다. 이 21세기의 심청이는 도대체 누구 욕망의 산물일까. 이 영화들은 결혼이란 이같은 고지식한 무지함 속에서만 가능한 제도임을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전유하며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기존의 가치, 관습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하는 소녀들이 자기 몸의 소리에 민감할 리 없다. 예컨대, <몽정기2>에 등장하는 세명의 소녀들에게 섹스는 남성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너, 섹스 해봤어?”는 곧 “너, 어른이야?”의 의미로 직행한다. 그에 따라 그녀들이 그 무지한 성적 지식으로 집중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상대 남자의 성기를 발기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절박한 고민이다. 이것이 남성감독 자신의 욕망인지, 혹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환상인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란 고작 ‘그들’의 남근이 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운명의 남자를 위해 남근이 되려고 그토록 ‘사고’하면서도 자위의 문제에서는 “걱정 마, 그건 유행이야”라며 안심하는 소녀들. ‘나의 욕망’을 모르는 소녀들, 내가 나의 욕망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소녀들 덕택에, 그리고 그녀들을 감싸주는 제도와 운명 덕택에 그녀들의 섹슈얼리티는 그야말로 하나의 유행이 되고 만다. 안전장치4: 결함을 내세워 변명하는 섹슈얼리티 넷째, 위와 같이 결혼으로도, 낭만적 로맨스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소녀들의 성은 비정상적 환경의 산물로 재현되며 결함의 논리와 결부되고 있다. <귀여워>와 <여선생 vs 여제자>의 어린 소녀들은 각 영화의 성인 여자보다도 성숙하고 당돌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귀여워>에서 예지원과 경쟁하는 소녀는 억척스럽고 천박한, 전형화된 주변부 여자의 이미지를 모방한다. 소녀는 성인 여자와 함께한 남자를 욕망하고 소주를 마시고 화장을 한다. 학교, 가족, 또래집단 모두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듯한 소녀의 모습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밍키와 유사하다.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환상 속의 어린 마녀처럼 그녀의 이미지는 그로테스크하다. 그런데 아이의 얼굴로 성인의 섹슈얼리티를 능숙하게 흡수한 소녀는 어김없이 철거촌이라는 주변부가 만들어낸 결과물로 재현된다. 그녀는 부모 없이, 가족 없이, 든든한 울타리 없이 방치되어 되바라진 존재, 불행한 미래가 뻔하게 상상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어린 소녀가 성인의 섹슈얼리티를 모방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성적 의미로 읽혀지지 않는다. 다만 어른을 따라하는 위험한 아이, 성장의 ‘정상적’인 도로를 일탈한 아이로 규정된다. 한편, <여선생 vs 여제자>에서는 염정아보다 전략적이고 성숙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도도한 방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이용하며 상대방의 욕망을 읽어낸다. 그러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어른스럽게 보였던 소녀 역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엄마와 단 둘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소녀의 영리함은 더이상 성숙함의 표상이 아니다. 그녀는 사랑과 관심의 결핍에 시달리는 아이로 추락한다. 소녀가 그토록 집착했던 미술 선생님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가 없는 아이의 대체 욕망으로 규정되어 사그라진다. 이는 <몽정기2>에서도 나타나는 바, 아버지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교생 선생님에 대한 복합적인 심정과 그녀의 혼란한 섹슈얼리티에 질서정연한 논리를 부여해주는 존재이다. 그녀는 마치 왕자와 공주처럼 아버지와 춤을 추며 동화 속에서 방황을 끝낸다. 그러니까 소녀들은 아버지와 유사 아버지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한순간 매듭짓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것이다. 소녀들의 성은 아버지의 상실을 또 다른 아버지로 채우길 반복하면서 폭발하려는 순간 가라앉는다. 섹슈얼리티의 중심에는 ‘내’가 아니라 ‘그’가 존재하고 ‘그’ 또한 위험수위마다 경보음을 울리며 가족, 로맨스, 운명 등을 제시하는 기계 같은 존재이다. 소녀들은 마치 근친상간 금기의 경계 위에서 매순간 교묘하게 그 금기를 넘어서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서서히 자신의 욕망에 귀기울이는 법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소녀=성=사랑=결혼, 완결된 서사에 대한 집착 이제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이 영화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분명해진다. 그것은 소녀들의 몸이다. 그 몸에 대한 사유이다. 결혼, 사랑, 성적 욕망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도 그 에피소드들이 여전히 판타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수놓는 결혼과 사랑에 대한 온갖 환상들과 그야말로 성교육 시간에만 배우는 ‘건강한 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자이크처럼 짜맞춰져 있을 뿐, 거기에는 몸에 대한 세밀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의 감독이 공교롭게도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기보다는(예컨대, ‘남자는 여자의 섹슈얼리티를 모른다. 여자의 욕망을 알 수 없다’ 등) 이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완결된 서사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서사 구조상의 문제는 소녀들과 섹슈얼리티의 담론에서만큼은 그 내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소녀들의 성이 축 늘어진, 이미 시들어버린 꽃처럼 힘을 잃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로맨스 혹은 결혼에 안착한 까닭은 이 영화들이 보이는 여성의 성에 대한, 특히 소녀들의 성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완성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가. 위의 영화들은 이에 대해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성이라는 것이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완결의 구조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물론, 소녀=성=사랑=결혼이라는 도식 자체에도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 이러한 영화적 경향들에서 언제나 이슈가 되었던 것은 ‘소녀’가 성을 말하고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소녀’의 결혼은 그다지 놀라워할 만한 부분이 아니다. 문제는 소녀에서 시작하여 결혼으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이 완벽한 도식, 다시 말해, 처녀에서 시작하여 엄마가 되는 여자들의 운명이 과거에 비해 좀더 노골적으로, 그러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순진함’ 속에 가두고 전유하며 영악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영화들은 소녀의 섹슈얼리티에 기승전결의 구도를 부여하여 성이 결국은 정신적 성숙을 통해 제도에 안착하는 완벽한 질서를 구상해냈다. 그들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란 한번의 성장통으로 완성되는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사유와 아픔의 과정임을 알지 못한다. 완전한 구조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자연히 해피엔딩에 대한 강박을 낳으며 소녀들의 성에 억지로 코미디와 감상적인 눈물과 천진난만한 깨달음을 부여한다. 언제나 유사한 도식과 유사한 결말을 준비하는 이러한 서사에 동시대적 고민이 담길 리 없다. <몽정기2>에서처럼 소녀들은 어중간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온갖 뒤떨어진 클리셰들을 안고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몸에 대한 사유없이 진행되는 결혼, 임신, 사랑의 언어들 속에는 소녀들의 몸이 조각상처럼 존재할 뿐, 몸의 언어가 부재한다. 총체적 서사에 대한 강박은 통합된 몸, 통합적 질서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분리되고 흩어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를 읽어내지 못한다. 공포와 슬픔으로 귀환하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여고생들의 섹슈얼리티는 결코 ‘건강’하지 않았으나 아픈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성애와 동성애를 가로지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옥상의 끝을 오가던 조숙한 소녀의 몸은 내밀하게 떨렸다. 판타지의 공주가 되는 대신, 공포 속에서 몸의 슬픈 울림을 듣는 소녀들의 모습. 남성 중심적 사회의 수많은 아버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말라가는 소녀들의 섹슈얼리티는 그렇게 유령이 되어 끊임없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이 우울한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몸으로 스스로를 언어화하며 몸에 새겨진 상처를 사유하는, 몸으로 말하는 소녀들을 본다. 로맨스와 결혼과 가족 대신 자신의 섹슈얼리티로 스스로와 내밀한 소통을 나누는 소녀들을 발견한다.

저주받은 작가의 전설을 만난다,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

1951년에 파리에서 공개된 니콜라스 레이의 데뷔작 <그들은 밤에 산다>를 보고서 극장을 나온 관객은 화가 나 얼굴이 붉어져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보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처럼 처음으로 프랑스를 찾은 레이의 영화는 매정한 반응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안 있어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의 지위에 올랐으니, 프랑스의 어떤 시네필들, 특히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글을 쓰던 이들이 그 영화의 진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와 프랑수아 트뤼포는 둘 다 <그들은 밤에 산다>가 놀랍게도 브레송적인 측면을 가진 미국영화라고 상찬했다. 이후로 레이의 필모그래피가 확장될수록 레이에 대한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의 비평적 환대 역시 두터워졌다. 그들이 레이에게서 본 것은 ‘시스템’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개인적인 인장이 새겨진 영화들을 만들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영화감독이었다. 레이야말로 ‘작가’의 진정한 표본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번 트뤼포의 언급을 인용하자면, 그는 레이를 두고 “황혼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꽤 적절한 말인 것은, ‘황혼’이란 단어로부터 환기되는 것들, 즉 어둠, 고독, 폭력, 불안, 환멸 그리고 서정성 등이 레이의 세계를 구축하는 주요 자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둡고 외로운 세계 안에서 폭력의 충동을 분출하거나(<고독한 영혼>의 딕스, <어둠 속에서>의 짐), 반항의 절규를 내지르거나(<이유없는 반항>의 짐) 또는 위협적인 괴물이 되어버린(<실물보다 큰>의 에드) 이들과 만나게 된다. 레이가 그리는 인물들이란 대개가 자기 내부에 악마를 가지고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폭력에의 매혹에 빠져들거나 아니면 폭력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을 행사하게 된다. 레이는 그처럼 온전히 사회의 품에 안길 수가 없고 힘든 싸움을 벌이며 소외와 고통의 원환(종종 여기에 자기파괴까지 포함된)을 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박력있게 그려냈다. 주로 내적인 고통과 과민의 정서에 카메라를 가져간 영화들인 만큼 레이의 영화에는 (극적·시각적) 발작의 순간들이 자주 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으로는 <고독한 영혼>의 한 장면을 꼽을 수 있다. 딕스가 앞에 앉은 경찰 부부에게 살인의 순간을 재연하도록 할 때, 레이는 딕스의 눈에 빛을 던짐으로써 그의 내면에 자리한 도취적 광분을 효과적이고 분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조차 스펙터클로 만들 수 있는 레이의 능력에 대한 단지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만일 대본에 모든 게 다 있다면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라고 말한 레이는 무엇보다도 화면으로, 특히 뛰어난 공간감각과 색채감각이 발휘된 화면으로, 말을 할 줄 아는 그야말로 시각적인 시네아스트였다. 그리고 그가 만든 화면들은, <이유없는 반항>이나 <자니 기타>에서 보듯이, 추상화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렇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브레송이 레이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다소 단순화해 말하자면, 레이는 정말이지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스펙터클화할 줄 아는 영화를 만들었고 그렇게 독자적인 경지를 보여줌으로써 <카이에 뒤 시네마> 비평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그들(과 다른 일부의 영미권 평자들)로부터의 ‘과도한’(?) 환대를 제외하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지 못했다. 심지어는 상업영화를 만든 감독 정도로 치부되며 “(샤티야지트) 레이냐 아니면 (니콜라스) 레이냐?”는 식의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레이라는 시네아스트를 재발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레이 걸작선 일자: 2월15일(화)~24일(목) 장소: 서울아트시네마 문의: 02-3272-8707, www.cinemathequeseoul.org ☞ 상영일정표 보러가기 상영작 소개 그들은 밤에 산다 이전에 함께 연극 활동을 했던 엘리아 카잔의 영화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1945)에서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 만들기를 스스로 배웠던 니콜라스 레이는 데뷔작부터 대단히 인상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레이의 첫 영화인 <그들은 밤에 산다>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가 탈옥한 청년 보위와 그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여인 키치가 야음 속에서 사랑의 도주를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두운 범죄 이야기와 운명적인 러브스토리를 절묘하게 배합함으로써 영화는 우아하게 멜랑콜리한 기운을 얻는다. <그들은 밤에 산다>는 제작사쪽의 머뭇거리는 태도로 인해 제작된 지 2년이 지나서야 개봉되고 결국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레이의 탁월한 시각적 감수성은 이것을 <시민 케인>과 미국영화 최고의 데뷔작을 겨룰 ‘고전’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고독한 영혼 니콜라스 레이의 많은 영화들이 소외와 실패, 그리고 상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면, <고독한 영혼>은 그 전형적인 실례가 될 만한 영화다. 영화는 살인 혐의를 받게 된 시나리오 작가 딕스 스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얼음같이 차가운 태도로 세상을 보다가도 자신의 성미를 건드리는 대상에게는 분출하는 폭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이 지극히 폭력적이고 이기적이며 냉소적인 인물에 대한 초상을 그리면서 결국에는 그가 처한 곳이 왜 고독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고독한 영혼>은 그처럼 험프리 보가트 자신의 그간의 페르소나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이미지’에 대해 성찰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셋 대로>와 함께 가장 어두운 비전으로 할리우드를 바라보는 영화이고 강박적으로 로맨틱하며 미묘하게 불안한 필름누아르의 대표작이란 점에서도 매력적이다. 어둠 속에서 영화 속에서 악당처럼 행동하는 경찰이라면 흔히 <더티 하리>부터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레이는 그보다 20년 전에 이미 그 선배격인 인물을 보여주었다. <어둠 속에서>의 주인공 짐은 폭력의 습성을 내재화하고 있는 형사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우선 그런 주인공의 캐릭터 때문이지만 뒤로 가면 전·후반이 대칭을 이루는 영화의 구조 때문이기도 함이 드러난다. 너무 과격하게 행동하는 짐은 유아살해 사건을 해결하라며 시골 마을로 보내지고 눈먼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그렇게 도시에서 눈덮인 시골로 공간을 옮기면서 고독의 이야기에서 구원의 이야기로 이동한다. 그러면서 마치 <이유없는 반항>을 연상케 하는 인물들 사이의 대칭과 균형의 구도가 설정된다. <어둠 속에서>는 레이 자신은 실패작이라 여겼지만 오히려 평자들로부터 복합적이며 모던한 영화라는 평가를 들었다. 러스티 맨 오랫동안 로데오 챔피언으로 군림했다가 이제는 은퇴한 주인공 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못 탈 말도 없고 안 떨어지는 카우보이도 없죠.” 그의 이 한마디는 <러스티 맨>의 정신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레이의 세계관도 잘 요약해준다.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자부심에 사로잡혀서는 결국에 자기 파괴의 길로 빠져들고 마는 남자들의 미성숙 혹은 운명이 <러스티 맨>(과 레이 영화들)의 주제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오래 지켜보는 로데오 장면들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을 품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가 정해진 무모한 행위의 아름다움 또한 느끼게 만든다. 남자의 내면과 미국에 대한 언급이 담긴 로데오 영화에 서두르지 않는 필치로 그려진 삼각관계 이야기가 더해져 <러스티 맨>은 시적이고 애상적인 걸작영화가 되었다. 실물보다 큰 주제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니콜라스 레이는 시대를 앞서 나간 면이 있었다. <실물보다 큰>은 레이의 그 예가 되는 영화인데, 이것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들 가운데 최초로 약물과 그것으로 인한 중독의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단순한 사회문제 영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가장 에드는 심각한 병을 앓게 돼 새로 개발된 약을 복용하며 치료를 받는다. 그런데 그는 이 약에 중독되어서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괴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가족 멜로드라마로 시작했다가 마치 <샤이닝>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호러영화로 바뀌는데, 그 전이지점에서 레이는 동시대 미국 중산층의 가치관을 의문시한다. 한편으로 <실물보다 큰>은 시네마스코프를 가장 잘 활용한 영화감독이라는 레이의 명성을 확인케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야생의 순수 <파티 걸>은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레이의 연출력이 완벽에 달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레이 자신에게는 고용인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준 영화였다. 다음 영화로 그는 할리우드의 울타리를 벗어나 야심적으로 합작을 시도하는데, 그 결과물이 <야생의 순수>이다. 또 다른 실락원 이야기인 <에버글레이즈에 부는 바람>과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이 영화는 에스키모인 이누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문화 갈등의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들려준다. 그리고 자연의 본모습 그대로를 담겠다는 레이의 의도대로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포착해낸다. 강렬하고 매혹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에게만 평가를 받은 <야생의 순수>는 밥 딜런의 <마이티 퀸>이란 노래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여기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앤서니 퀸이다).

[긴급특집] <그때 그 사람들> 가위질에 항의한다

법원이 10·26 사태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3장면을 삭제하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장례식 모습 등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삽입돼 관객들에게 영화가 실제라는 인식을 줄 수 있다며 삭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는군요. 이에 씨네21은 이 삭제 결정에 대해 반대하며 이번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헌법이 만만한 홍어 거시기인가? <그때 그사람들>을 개봉하려면 세 장면을 삭제하라! 이게 무슨 낮도깨비같은 소리인가? 법원이 영화의 특정 장면을 자르라고 명령할 수 있다니, 금치산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9년전 그러니까 1996년 10월,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는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영화가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에 미리 보고 상영 여부를 결정하거나 특정 장면을 삭제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헌법을 위반하는 행위라는 판결이다. 의 세 장면을 삭제하라는 법원 결정은 정확히 헌법재판소가 금지한 사전심의 그대로다. 혹시 9년전에 한 판결이라 까먹은 것인가? 아니면 담당 판사는 헌법을 만만한 홍어 거시기라고 생각한 것인가? (관습헌법에 따라 수도이전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헌법을 우롱한 전례가 있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다) 헌법을 걸레 취급하는 사람들이 판사 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은 법관이 되기엔 너무 머리가 나쁜 자들이거나 법을 지킬 용기가 없는 비겁한 인간들이다. 최악은 그런 자들이 법을 남용하는 경우인데 이번 판결이 딱 그렇다. - 씨네21 남동철 편집장 블로그 중에서 (블로그에서 전체 글 보기) 장면 삭제 관련 기사 - <그때 그사람들> 3장면 삭제결정, 다큐 가위질 - 법원은 <그때 그사람들> 인물들과 닮은 꼴이다 - <그때 그사람들> 영화계 “사전검열·표현자유 침해”      - 법원, 닮은 영화에 다른 잣대, <실미도> 상영금지 신청은 기각 <그때 그 사람들>은 어떤 영화? - <그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소문과 진실 - 임상수 감독 인터뷰, “반응이 두렵냐고? 그랬다면 진작 산에 틀어박혔지” - [리뷰] 피칠갑으로 둔갑한 독재자의 은밀한 술자리 진상 네티즌 글 모음 - 순진하기 그지없는 법원 판결, 강제규 필름의 완전한 승리(human0) - 관습법을 무시한 위헌적 판결(mwkim72) - 무삭제판 시사회 봄. 한국영화 빅3 안에 드는 수작!(varydegy) - <그때 그 사람들> 조건부 상영 결정, 왜? (ozzyz) - 법원 판사들을 씨네21 정규 영화평 기고자로!(tomhyung) 네티즌 여러분들도 덧글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한국 영화 관객들의 수준을 무시하는 이번 결정에 대한 의견을 아래 남겨주십시요!

MBC의 시청률 탈환대작전

요즘 MBC의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시청률로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를 평가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성적이 바닥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TNS미디어코리아에서 집계한 1월 셋쨋주(1월17∼23일) 시청률 순위에 따르면 10위권 안에는 MBC 프로그램이 단 한개도 없다. 20위 안으로 범위를 넓히면 <왕꽃선녀님>(12위), <느낌표>(16위), <섹션TV 연예통신>(17위), 세개의 프로그램이 그나마 체면유지를 하고 있을 뿐이다. 높은 관심 속에 수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시작한 드라마 <한강수 타령> <영웅시대> <슬픈 연가>도 기대 이하로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고, 코미디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웃음을 찾는 사람들>(SBS), <개그콘서트>(KBS)에 비해 <코미디 하우스>에 대한 호응도는 현저하게 낮다. 이러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1월 말부터 구원병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부분 개편으로 새 프로그램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는 것. 첫 번째 선수는 지난 1월23일 방송을 시작한 <좋은 친구 해피타임>이다.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조용한 인기를 끌었던 <단팥빵> 후속으로 일요일 아침 시청자와 만나는 <좋은 친구 해피타임>은 한마디로 NG 소개 프로그램이다. 박수홍, 최은경이 진행하고 김한석, 유채영, 채연, 김승현 등이 패널로 출연하는 이 프로그램은 명절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였던 TV 속 숨은 NG, 제작현장 에피소드, 편집된 미공개 방송분 등 방송 뒷이야기를 풀어낸다. ‘촬영 현장 속으로’ 코너에서는 매주 MBC 프로그램의 촬영현장을 찾아가 감독, 배우, 스탭들의 뒷모습을 살펴보고 ‘NG 베스트 오브 베스트’에서는 한주 동안 MBC에서 방송된 장르별 베스트 NG를 모아 소개한다.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은 물론 보도국에서 일어난 NG, 라디오 방송 현장의 엽기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매주 한 프로그램을 선택해 출연하는 연예인 두명이 NG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은 ‘도전, NG는 없다’, 영화와 CF NG를 소개하는 ‘TV 밖 NG 베스트’, 방송에서 편집된 부분을 보여주는 ‘미공개 X파일’, 추억의 스타 NG 퍼레이드인 ‘NG캡슐! 그땐 그랬지? 등도 흥미롭다. 월요일 밤에 신설된 주간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도 1월24일 첫선을 보였다. <세친구> <연인들>의 영광을 재현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판타지 시트콤 <두근두근 체인지>로 방송가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노도철 PD와 신정구 작가가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 흡혈귀 가족이라는 이색적이고 독특한 설정을 통해 기존 가족시트콤과는 차별화된 웃음을 만들어내며 세대간 갈등과 바쁜 일상으로 점점 해체되어가고 있는 오늘날 가족의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차갑고 지적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엉뚱한 면이 있는 엄마(심혜진), 혜진에게 물려 흡혈귀가 된 뒤 혜진을 증오하는 아빠(이두일), 섹시하고 남자를 밝히는 이모(정려원), 잘생겼지만 무식한 아들(이켠), 겉모습은 깜찍발랄한 중3 소녀지만 실은 수천년 묵은 흡혈귀인 대왕고모님(박슬기), 한 가족으로 위장해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웃음의 위력이 벌써부터 심상치 않다. 첫 방송 시청률은 지난주까지 같은 시간대에 방송되던 교양 프로그램 <실화극장 죄와 벌>보다 낮아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낳았지만 신선한 소재와 주인공들의 호연이 시청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공포드라마인 줄 알았다가 가족들 모두 배꼽 잡고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진짜 웃긴 시트콤이다” 등 호평과 함께 다음 회를 기대한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월요일 밤시간대의 ‘절대강자’인 SBS <야심만만>과 정면대결을 벌여야 해서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노도철 PD는 “다른 색깔의 프로그램인 만큼 좋은 승부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1월29일 첫 방송되는 <퀴즈의 힘>은 <퀴즈가 좋다> 이후 MBC에서 야심차게 선보이는 퀴즈 프로그램이다. 안정감 있고 편안한 진행자 아나운서 이금희가 맡은 이 프로그램은 고교 동창생 7명으로 구성된 두팀이 출연해 모교의 명예를 걸고 대결을 펼친다. 매회 상금의 50%를 모교 장학금으로 기증하며 국내 퀴즈 프로그램으로는 최초로 대결에서 승리하면 무제한 출연이 가능하다. 28일 세 시간 동안 진행된 특별 생방송 <학교를 살리자>로 문을 연 <연중기획 교육이 미래다>는 MBC와 EBS가 함께 기획한 공동 캠페인. 각종 교육문제 및 이슈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통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는 교육 진단 프로그램으로 벼랑 끝에 선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바를 모색해본다. 오는 2월18일에는 강호동이 진행을 맡아 벌써부터 화제가 되고 있는 토크쇼 <강호동의 봄이 오면>, ‘명품 핸드백 파문’으로 물의를 일으킨 <신강균의 뉴스서비스 사실은> 후속인 새로운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뉴스 플러스 암니옴니>도 시작된다. 이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어 다시 MBC의 명성에 밝은 빛을 비춰줄지 지켜볼 일이다. 노도철 PD가 알려주는 <안녕, 프란체스카> 즐감 방법 한 패션하는 흡혈귀 본 적 있수? 첫째, 두일(이두일)은 프란체스카(심혜진)에게 물려 흡혈귀 가족에 합류하게 된다. 두일은 도대체 왜 자신이 물렸는지 이유도 모른 채 프란체스카를 증오하지만 화를 내는 프란체스카에게 더 무섭게 당하기만 한다. 둘은 늘 서로 무시하고 치고 박고 싸우며 전쟁을 벌이는데, 결국 끝이 어떻게 날까? 둘째, 극중 엘리자베스(정려원)는 타고난 패션감각으로 매회 가장 감각적인 의상과 소품을 선보여 패션에 관심이 많은 20, 30대 여성들의 눈을 즐겁게 할 예정이다. 또한, 엘리자베스는 완벽한 인간 남자를 만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 매회, 혹은 3∼4주마다 계속해서 새로운 남자 신인들과 만남을 가진다. 그가 보여주는 패션과 다양한 연애방식도 볼거리. 셋째, <안녕, 프란체스카> 방송사 홈페이지 ‘노PD의 제작일지’ 코너에는 첫 촬영날 눈이 내리는 바람에 NG가 났던 일, 이날 추운 날씨에도 모든 출연자들이 비장한 각오로 촬영에 임했던 일 등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노 PD는 “방송가엔 첫 촬영 때 죽어라 고생하면 반드시 대박난다는 속설이 있다”며 이 시트콤이 많은 인기를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줬다. 시청자를 위해 노 PD가 계속 공개할 제작 뒷이야기도 놓치지 말 것.

촬영감독 김동은

2월3일 개봉하는 영화 의 촬영감독 김동은(34)은 독립영화쪽에 돋보이는 커리어를 가졌다. 그가 참여한 <비둘기> <호흡법, 제2장> <빵과 우유> <세라진> 등은 국내외에서 두루 호평받고 회자돼온 단편들. 그의 촬영은 영화마다 다른 색조, 움직임, 결을 가졌지만 공통적으론 이야기의 깊은 본심을 이해하는 동반자의 눈길을 닮았다. 옴니버스 단편 <여섯개의 시선>에서 박진표 감독의 <신비한 영어나라>, 영화아카데미 20주년 기념 프로젝트 <이공>에서 허진호 감독의 단편 <따로 또 같이>는 충무로 기성감독과 작업한 단편들. 로맨틱코미디 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전공을 알려달라.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영화아카데미를 거쳐 영상원 전문사 촬영을 전공했다. -촬영감독을 결심한 계기는. =제대 뒤 사진에 심취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찍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그 이후 학교에서 친구들 작품을 촬영해주며 이 길이 맞다 싶어서 전공하게 됐다. 정말 촬영을 해야겠다 생각한 건, 지금 충무로에서 데뷔를 준비하는 이규만 감독의 <절망 Ms. AVE>를 했을 때다. 그걸로 한국방송카메라맨협회가 주최하는 제1회 대한민국영상대전 때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 바람에 재능이 있구나, 생각하고 그뒤로 단편을 많이 했다. -감독들과는 어떤 식으로 작업하나. =영화를 찍을 때마다 시간을 통으로 비우고 감독과 합숙을 한다. 그러면서 영화 외적인 얘기를 많이 나눈다. 감독이 이 영화를 왜 찍고 싶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그러다보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아이디어도 많이 내놓는 편이다. 열개 정도 아이디어를 주면 그중에서 한개를 건져도 좋고 안 건져도 좋으니까 그건 감독님이 선택을 하시라,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나 영화, 촬영감독이 있나. =<이공> 프로젝트 작업할 때까지만 해도 난, 임팩트가 강한 영화, 촬영이 돋보이는 영화가 내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근데 허진호 감독과 작업하면서 그런 생각들이 허물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배우의 감정을 카메라를 통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게 만들더라. 좋은 경험이었다. 감정이 동화되는 느낌. 좋아하는 촬영감독은 스승이기도 한 김형구 촬영감독. 많이 따르려고 한다. -어떻게 에 참여하게 됐나. =시나리오를 몇개를 받았는데, 가장 빨리 진행이 됐다. 장편 데뷔를 하고 나면 내가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들이 있다. 단편을 같이 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하고 충무로 시스템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으려면 나라도 먼저 경험을 쌓아놓아야 할 것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 대상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이 되고 싶나. =내가 앞으로 갈 길은 멀고도 험난할 거 같다. 아직 할 것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고, 단편할 때도 그랬지만 뭘 하고 싶다는 걸 벌써부터 고착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장르건 이야기건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투덜군 투덜양] 공유재산을 혼자 가지면 쓰나? <나를 책임져, 알피>

여자로서 같은 군락에 속하는 인종을 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를 책임져, 알피>의 엔딩 크레딧에서 일레인이니 다이애나니 하는 여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올라가는 걸 보고 실망했다. 특별히 사는 데 문제도 없는 바람둥이를 굳이 무릎 꿇여 개과천선시키려는 우격다짐이라니…. 물론 영화는 번민하는 알피를 보여주는 정도로 끝나면서 쿨한 척하지만 그 속이야 뻔하다. “알피, 이제 정신차리고 한 여자에 정착해!” 아니겠나. 언니들 왜 이러시나. <…알피>를 보며 그동안 주드 로의 매력을 방기했던 세월을 한탄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여자들에게 상처주는 알피보다 더 부도덕하고 잔인한 건 알피를 독점하려는 여자들의 욕망이라는 걸. 왼쪽 필자분께서는 일찍이 주드 로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지 않는 건 유네스코의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설파하셨다. 해설하자면 이렇다. 만약 종묘나 석굴암 같은 세계문화유산을 자신의 집 울타리 안에 놓고 혼자 즐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네티즌을 비롯한 전 국민이 나서서 그 인물의 이기성을 성토하고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외모로 봤을 때 주드 로와 동일인물인 알피는 그런 존재다. 팔짱 끼고 거리를 한번 걷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한번의 데이트만으로도 평생의 추억이 될 만한 남자다. 그런 사람을 한 사람이 독점하며 집 안에 꼭꼭 가둬둔다는 건 고흐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훔쳐다가 내 방에 걸어놓고 혼자 보면서 즐거워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심보가 아닐까. 물론 알피는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나오면서 대성통곡하는 사람은 없지만 알피와 이별하는 여자들은 고통스러운 눈물을 짓는다. 그러나 사랑이 달콤하면 할수록 이별은 더욱 쓰게 마련이다. 어차피 모든 사탕은 입속에서 녹아 없어지게 마련인데 남보다 맛있는 사탕을 먹고 나서 사탕이 없어질 줄 몰랐어요 하고 떼를 쓰면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남보다 맛있는 사탕을 집었을 때의 행복감은 왜 잊어버리나. 마지막 장면에서 고뇌하는 알피를 보면서 나는 알피가 개과천선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다. 바람둥이는 그 세계의 윤리강령을 지키면서 가능한 많은 이성 또는 동성들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게 이 세상에 일조하는 거다. 그걸 하나의 관습과 제도로 맞춰서 보려는 것도 폭력이라면 폭력이다. 그러나 세상의 알피들에게 딱 두 가지의 충고는 하고 싶다. 때와 장소, 상대방(친한 친구의 애인까지도)을 가리지 않는 분방함을 즐기시려면 콘돔 정도는 상비해가지고 다녀주는 센스! 는 기본이다.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오픈 마인드를 유지하려면 자신 역시 여자친구 집에 가서 다른 남자의 향기를 발견했을 시 조용하게 나와주는 정도의 센스! 도 당근 기본이다. 바람둥이가 되는 길에도 철저한 준비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