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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국제영화제의 모든 것(1)

다음과 같은 분들은 아마도 이 글을 건너뛰실 거라고 예상합니다. 1. 영화는 방에서만 본다. 텔레비전 채널 이리저리 돌려가며 재미난 장면만 편집해 봐도 줄거리는 다 파악된다. 비디오 자주 빌리고, 때에 따라 비디오방에도 간다. 2. 멀티플렉스 로비에서 팝콘 한 봉지 들고 서 있으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형광색 인테리어, 게임기의 우당탕 소리와 댄스음악의 황홀한 조화. 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3. 이 세상에 스티븐 스필버그보다 더 훌륭한 감독은 없다고 본다. 조지 루카스도 스필버그만큼 훌륭한가, 이것이 나의 유일한 고민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의견 있으시면 제 이름 옆에 붙은 주소로 보내주십시오. 1. 마지막으로 극장에 가본 게 언제인지 기억 안 나지만 영화는 필름으로 봐야 제 맛이라는 느낌은 남아 있다. 더빙을 하거나 양옆으로 잘린 화면을 보면 열받기 때문에 주말의 명화도 보기 싫다. 2.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가면 꼭 나 혼자 튄다. 지루해 보이는 영화쪽으로 기웃거려서 성격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3. 어디론가 탈출하는 꿈을 매일 꾼다. 낯선 곳으로 가서 하루에 영화 네편씩 보며 며칠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 4. 영화제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대극장 앞의 붉은 주단을 확 뒤집어보고 싶다. ‘저건 쇼야’ 하는 직관이 발동한다. 5. ‘무슨무슨 영화제 초청’ 이런 거 대문짝만하게 써붙인 광고 보면 거부감이 든다. 유럽 한 바퀴 돌고 와서 잘난 척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재미있고 훌륭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6. 칸이나 베니스영화제말고 ‘곤충공포영화제’ 뭐 이런 거 없나 공상한다(그런 거 물론 있다. 8월에 미국 일리노이의 한 대학 캠퍼스에 가면 곤충요리 먹으면서 희한한 영화 볼 수 있다). 7. 국제영화제의 미학적, 산업적, 정치적 효과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상관성에 대해 관심있다(당신은 영화진흥위원회에 취직하거나 <씨네21> 기자가 되는 것이 좋겠다). 목적1 - 할리우드 틈새에서 살아남기 위와 같은 구분에 깔려 있는 다소 오만한 기색은 국제영화제의 기능 자체에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국제영화제의 목적을 한마디로 정의해보자면, ‘할리우드 틈새에서 살아남기’라고 말하겠다. 100년이 넘는 영화역사 동안 지역별, 시기별로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면 지구상의 영화시장은 대부분 할리우드 차지다. 우리나라 또한 일제강점기인 1926년의 한 신문이 “미국영화가 8, 9할, 유럽영화가 나머지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고 분개한 이래 오늘날까지 미국영화의 우세가 뒤집힌 적은 없다. 할리우드를 위해 일하는 재수 좋은 소수에 속하지 않는 전세계 영화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할리우드영화 스타일과 산업구조를 열심히 따라잡아 자국 시장에서 흥행작 내놓기, 아니면 작고 다양한 영화들을 만들어낸 다음 비슷한 사람끼리 1년에 한번씩 모여 잔치하고 띄워준 다음 서로 팔아주기. 국제영화제가 후자의 방침에 구미가 당기는 사람들을 위한 해결책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할리우드영화가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뛰어난 이야기 구성, 그리고 지구촌 스크린을 한꺼번에 뒤덮을 수 있는 배급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대중적 친화력이 강한 할리우드영화와 차별화하려면 정치적으로 교양 쌓기, 미학적으로 세련되어지기, 기술적으로 소박하거나 실험적으로 되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또한 각국에 존재하는 예술영화 시장을 한데 모으면 할리우드영화를 피해 제법 움직여볼 만한 여력이 된다. 유럽이라고 해도 개별 국가의 예술영화 시장은 매우 협소하다. 그러나 유럽과 미주, 아시아 등지의 주요 국가에 흩어져 존재하는 예술영화 관객을 한꺼번에 움직일 수 있다면 하나의 대안적인 배급망이 가동될 수 있다. 국제영화제는 바로 그 시장을 연결하는 하나의 박람회 구실을 한다. 한국영화가 외국에 수출되는 판로 역시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이들 아트영화 시장용인데, 국내에서 흥행하는 작품과 해외에서 팔리는 작품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또한 국내에서 예술영화라고 인정하는 작품과 해외에서 팔리는 작품 사이에도 다소 불일치가 있다. 교양과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예술영화 시장에 관한 한 유럽을 따라갈 대륙은 아직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정보가 공유되고 있는 375개가량의 영화제( ―Adam Langer, 2000년―의 참가신청서 제출 정보 기준) 가운데 압도적인 다수가 유럽에 몰려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3위권 영화제는 물론이고 카를로비 바리, 산 세바스찬, 로테르담, 로카르노 등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수의 영화제들도 태반이 유럽에 있다. 그 다음으로 많은 곳은 역시 북미 대륙으로 뉴욕,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몬트리올, 시애틀 등이 인구에 회자된다.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호주 등 나머지 대륙의 경우 세상은 넓으나 할 일은 많지 않다. 한국에는 총 24개의 영화제가 있고(영화진흥위원회 웹사이트 수록 정보 기준) 그중 상당수가 국제영화제이므로 땅 넓이에 비해서는 많은 편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명성을 얻는 영화제들은 예외없이 영화제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다.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주목할 만한 작가주의 영화 혹은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는 젊은 영화들을 부지런히 챙기고 골라서 푸짐하게 내놓는 것이 이들의 첫 번째 특징이다. 역량이 입증된 감독들의 작품 스무편 안팎을 골라 경쟁부문에 묶어서 흥미를 북돋우고, 나머지는 이런저런 이름의 부대 섹션에 모아둔다. 우리나라 저널들은 해외영화제를 다룰 때 경쟁부문 작품을 리뷰하고 수상 결과를 뉴스로 전하는 관습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경쟁부문은 국가별 안배, 지명도 등 영화 외적인 요소가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미덥지 못한 선정과 수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고, 관습적인 냄새를 풍기는 영화도 많아서 보는 재미가 덜하다. 특히 카메라의 시선을 모으기에 유리한 스타를 불러들이자면 경쟁부문 티켓을 가지고 쇼 비즈니스계와 타협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극장에 내걸리는 영화를 보면 그 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거나 영화제쪽에서 이런 일을 연중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짜임새 있고 훈련된 눈을 가진 일련의 조직이 가동되어야 한다. 그 정점에 집행위원장과 소수의 프로그래머가 있고, 이들은 각국의 영화계와 사적이고 외교적인 네트워크를 맺어 수시로 정보를 취득한다. 정보의 상당부분은 남의 나라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얻어진다. 거물급 인사들은 파티와 극장, 길거리를 낚시질의 장소로 요령껏 소화하게 마련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김형태의 오!컬트 <데블스 에드버킷>

나이를 어느 정도 채우다보니 어느덧 집을 사야 한다는 강박이 현실로 와닿기 시작한다. 즈음해서, 텔레비전에서는 아파트 광고가 부쩍 늘었다. 원래 많았었는데 내가 무심해서 몰랐던 것이었나? “이 아파트를 장만하세요. 그럼 당신 남편이 일찍 들어옵니다. 그리고 가정은 행복해집니다”가 요즘의 아파트 광고의 주된 설정인 것 같다. 하다못해 “노주현은 죽었다”라는 카피로 시작하는 아파트 광고도 등장했다. 섬뜩했다. 그리고 좀 의아해졌다. 고단한 인생살이에 지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노주현이 그 아파트를 사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인지, 그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 죽었다는 것인지 좀 헷갈린다. 화면에는 일과 술과 기타 등등의 삶의 현장에 지치고 찌들려 초죽음이 된 노주현을 보여주는 컷과 그 아파트에서 화목하고 행복한 노주현을 보여주는 두 가지 컷이 교차되는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그 아파트를 장만하느라 지쳐 쓰러져가는 노주현으로 보이더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섬뜩한 광고가 아닐 수 있으랴. “노주현은 죽었다. 이 아파트를 사느라고…”라는 카피로 시작하는 광고라니. 욕망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행복을 얻으려는 갈망의 또 다른 이름이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좋은 집. 품격있는 옷. 권위있는 명함과 신분을 대변해주는 고급 자동차. 그리고 ‘몸뚱이를 안락하게 해주는 물질들과 욕구를 채워주는 환경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들이다. 마음을 비우고 타인을 긍휼히 여기고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고 항상 근면성실하고 금욕하라는 가르침은 그런 것들을 독차지하려는 자들의 개수작일지도 모른다. 보아하니 이 세상은 분명코 악마가 경영하는 세계임에 틀림없다. 가장 온유하고 깊은 깨달음으로 가야 할 종교조차도 언제나 미움과 반목이 합리화되는 살육의 동기가 되어왔고 끊이지 않는 전쟁의 원흉이고보면 악마를 섬기는 것이 틀림없다. 이 세상은 물욕의 에너지로 꿈틀대는 악마의 세계이다.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좀더 잔인해질 것이며, 물질과 쾌락만을 삶의 본질로 여길 것이며 그 무한생존경쟁에서 결코 나약해지지 않고 기어코 살아남아 스스로가 악마의 피조물임을 실천해 보이겠노라고 악마에게 맹세하고 영혼을 담보로 계약을 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승승장구. 호화빌라도 당신 것. 예쁜 여자도 여럿. 나약한 것들은 기꺼이 당신 종이 되어서 굽실거릴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성현들은 따끔하게 꾸짖지만 뭐가 문제인가? 이 세상은 원래 악마의 것이거늘. 문제가 있는 쪽은 악마의 세계에 살면서 악마와 적절한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쪽에 있는 것이다. 영혼을 팔기를 거부하고, 물욕을 채우기를 거부하고 마음을 비운다는 핑계로 게으른 일상을 누리고 육신의 쾌락을 억제해서 생각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자꾸 가치관을 새로 따지는 것. 문제는 그들이다. 그들은 물질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먹거리를 확보하지 못해서 언제나 배고프고 물질은 물론 물리적 작용에도 나약해서 때리면 맞고 밟으면 터진다. 물질의 세계에서 영혼과 마음을 이야기하고 욕정의 세계에서 사랑과 자비를 갈구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고 과대망상인 것이다. 그런 불행한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치밀한 교육을 받는다. 노력해라. 1등이 최고다. 금메달을 따라. 정상에 올라라. 최고가 되어라. 그리하여 대마왕에게 간택받을 수 있도록, 그분께서 너를 하수인 1등급으로 임명한다면 네 인생은 천하무적 출세길이 열릴 것이다. 당신은 가장 빨리 달리는 당나귀가 된 것이다. 낚싯대에 매어진 눈앞의 홍당무를 먹기 위해서 악마의 수레를 끌고 달리는 당나귀.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잠시 빌려 쓰는 것. 그 대가로 당신 인생은 진짜로 지불되고 있다는 것만은 알면 좋겠다. 환불, 반품 절대불가.김형태/ 화가·황신혜밴드 http://hshband.net

<2424> 배우 소유진

소유진의 얼굴은 낯설지 않다. 드라마 탤런트로, 또 연예프로그램 MC로 일주일에 며칠은 고정적으로 텔레비전에 나왔던 소유진이, 아무리 첫 영화라고는 해도 <2424>를 찍으며 “너무 많이 떨렸다”는 것은 그래선지 의외였다. 그것도 “내가 떠는 게 스크린에 나타날까 걱정”될 만큼 떨었다니. 하지만, 곧 따라오는 설명이 이해를 돕는다. “저, 드라마 처음 할 때는 전혀 안 떨었고, 오히려 당돌했거든요. 백지상태여서 그랬던 거 같아요. 잘하면 좋고, 못해도 뭐…. 그랬죠. 근데 이번엔 벌써 해놓은 게 있어서 그런지 너무 달랐어요.” 발랄, 상큼, 깜찍. 소유진 하면 으레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거짓이 아니다. 그녀에겐 정말 발랄하고 상큼하고 깜찍한 면이 있다. “2년 만에 뭔가 그렇게 뚜렷한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좋은 일이죠.” 스스로도 그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전부는 아니다. 무명 시절 소유진은 긴 머리를 늘어뜨린, 별로 발랄하지 않고 오히려 청순가련한 여자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숱한 오디션에서 낙방하고 난 뒤, “차라리 망가져보자”고 마음먹은 게 통할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고. 오락 프로그램 <최고를 찾아라>가 그녀의 첫 무대였는데, 거기서 코브라를 먹는 등 엽기적인 모습을 보인 뒤, 그토록 기다리던 드라마 섭외가 들어왔다고 한다. <2424>에서 소유진은 다이아몬드를 밀반출하려는 조직에 맞서는 여형사 ‘독고’를 연기했다. 독고 형사는 거칠고 엽기적인 조폭코미디 속에서 그중 차분한 캐릭터. 브라운관에서 튀는 캐릭터를 주로 했던 것과는 무척 다르다. 액션스쿨을 다니며 배운 액션도 선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순하다고나 할까. 캐릭터의 성격부터 영화라는 전혀 다른 시스템까지, <2424>는 소유진에게 여러모로 실험이었다. 그 실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소유진은, “다음에는 주연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생겨요. 로맨틱코미디를 하고 싶어요”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모든 처음은 두려움을 안고 있지만, 소유진에게 첫 영화는 유독 그랬던 것 같다. 조금씩 그러나 몰라보게 그 두려움은 녹아 달아날 것이고, 스크린에서도 당돌하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소유진의 다음 작품 계획은 텔레비전도 영화도 아닌 라디오다. 10월21에 시작하는 SBS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소유진의 러브 앤드 뮤직>의 DJ를 할 예정. “좋아하는 음악도 많이 틀고 여유로움이 묻어나게 방송하고 싶어요. 제 이름이 붙어 있잖아요. 정말 ‘나의’ 방송으로 만들래요.” 포부를 밝힌다.

프리츠 상영작 13편 미리 보기(3)

<당신과 나> You and Me/ 1938년/ 94분/ 미국 집행유예로 감옥에서 나온 뒤 백화점 점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헬렌은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사랑하지만 주위의 시선 때문에 남남인 척한다. 전작 <분노> <한번 뿐인 삶>과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랑은 여기에 코미디와 뮤지컬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경쾌한 분위기의 복합장르를 시도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의 음악을 담당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쿠르트 바일이 음악을 담당하는 등 야심찬 기획이었지만 복합장르에 익숙지 않았던 당시 미국의 비평과 관객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Hangmen Also Die/ 1943년/ 134분/ 미국 체코를 점령한 나치의 악명 높은 사령관 하이드리히 암살사건과 이에 대한 독일의 대량 보복학살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전작인 <인간 사냥>(Man Hunt), <공포의 정부>(The Ministery of Fear)와 더불어 ‘반나치 삼부작’으로 불린다. 각색 작업에 당시 할리우드에 망명 중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참여했지만, 작업 도중 견해 차이로 도중하차했다. 랑은 이 영화를 나치의 본질에 어두운 미국인을 위하여 제작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진홍의 거리> Scarlet Street/ 1945년/ 102분/ 미국 평범하지만 성실한 중년의 사무원 크로스는 어느 날 거리에서 만난 캐서린이란 젊은 여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이를 눈치챈 그녀는 애인과 짜고 그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랑 자신이 설립한 다이아나프로덕션의 첫 영화로 장 르누아르의 <암캐>를 리메이크한 작품. <창속의 여인>과 함께 남자를 파멸시키는 팜므 파탈의 전형을 보여준 영화로 소박한 영혼이 어떻게 해서 자신과 주변의 탐욕에 의해 파멸해가는가를 랑에게서는 보기 드문 세밀한 심리묘사를 통해 그려낸 수작. <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 Das tausend Augen des Dr. Mabuse/ 1960년/ 105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할리우드에 분 매카시 선풍을 피해 다시 독일 정착을 꾀한 랑의 세 번째 작품이자 유작. 이전 작품에서 최면과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려던 마부제 박사는 이제 방송국을 통해 모든 것을 감시하고 원자폭탄으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항상 동시대의 문제를 영화 속에 담고자 했던 랑의 영화철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마부제 박사>의 지명도를 활용해 흥행에 재성공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카메라 예더봉

공원 잔디밭에서 젊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우리 아줌마들이 팥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하고 있다. 기다란 사각형 안에서 서른명의 사람들이 팥주머니를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나라별로 부스도 만들었다. 공원에 놀러나왔다가 만나는 구경거리다. 그 부스를 돌며 하얀 손수건에 아시아 각 나라 글씨로 사인도 받는다. 준비해둔 그 나라 음식들도 한점씩 맛본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운동회날이다. 중앙의 무대에선 나무판과 스티로폼으로 네모난 방을 하나 후닥닥 만들어 놓는다. 일일 감옥 체험프로그램이라도 하려나. 구경꾼이 구경을 놓칠 리 없다. 영화상영을 합니다. 집을 짓던 엉터리 목수가 잡는다. 무슨 영화? <데모크라시 예더봉>일까, 한국에서도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하는 노동자들에 관한 다큐멘터리였으니까 이런 데서 어울리긴 하겠네. 영화를 튼다는 방송이 나가자 아이들 대여섯이 신이 나서 달려든다. 그런 게 아니구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겁니다. 엔지 필름을 잘라내지도 않은, 찍힌 순서대로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는 초보 중에도 진짜 초보자의 솜씨다. 툰툰라 ‘감독’이 세상에서 처음 만들어본 영화들. MBC의 8·15 특집프로그램의 화면이 흔들거리며 건들거리며 스크린을 채우고, 감독 겸 주인공 툰툰라의 해설이 시작된다. 텔레비전 화면을 클로즈업하려는 감독의 의도와 달리 카메라가 옆에 선 자신을 비키지 못하자 툰툰라는 하는 수 없이 화면 오른쪽으로 자꾸자꾸 도망을 간다. 그러면서 할말은 한다. 오늘은 한국의 독립기념일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독립운동을 소개하는 특집방송들을 내보냅니다. 그런데 미얀마 방송은 이런 프로그램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미얀마에서도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다뤘으면 좋겠습니다. (치졸한) 극적 효과를 위해 감독의 국적을 지금에야 밝혔다. 정적인 아웅산 수지의 부친의 독립운동행적을 들추지 않을 수 없기에, 미얀마 군사정부는 그런 특집극을 금했을 테지. 강제추방에 항의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행진을 보여주다가도 툰툰라는 옆길로 샌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자유롭게 데모를 합니다. 미얀마에서도 군사독재가 끝나면…. 에이, 재미없다. 아이들은 툴툴거리며 부스럭거리며 자리를 뜨는데, 나이든 구경꾼은 코끝이 찡해진다. ‘카메라 예더봉(봉기)’을 준비하는 이 <데모크라시 예더봉>의 주인공들 앞에서.

21세기판 `성실한` 액션 히어로,<본 아이덴티티> 맷 데이먼

“도대체 라이언 일병이 어떻게 생긴 놈이야” 베를린을 함락시키기 위해 남은 전력을 모두 밀어붙이던 연합군 소속 밀러 대위 수하의 대원들은 자신들에게 떨어진 명령이 한심하고 화가 나기까지 한다. 적과 싸우기에도 힘이 부치는 판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졸병 하나를 찾아서 고국으로 돌려보내라니.영화 절반이 지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라이언 일병은, 그 모습만으로도 감동이었다. 귀여우면서도 믿음직한, 우리 모두의 막내가 거기 있었다. 전선의 한가운데에서도 기죽지 않고 생기가 남아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그 청년이라면 세상 어디에서도 남들의 신뢰를 잃지 않고 잘 해나갈 것 같다. 맷 데이먼은 바로 그런 인상이다. 어쩌면 이 인간은 딴따라판보다 건실한 조직사회에 몸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사소한 감성의 차이에 연연하는 까탈스러움이나, 타인의 감정을 후벼팔 위악적인 느낌이 없다. 대신 긍정적이며 책임감이 강해 보인다. 앞짱구에 주걱턱까진 아니라도 적잖이 솟아난 턱이, 위 아래로 눈·코·입을 옥죄는 구도는 고집스러움에 더해 어딘가 편집증이 있을 것 같은 혐의도 준다. 아무래도 자발적으로 아웃사이더가 되기는 힘든 얼굴이다. <레인메이커>에서 시작해 <본 아이덴터티>까지 그가 주연한 영화가 10편 남짓한 영화는, 이중인격인 <리플리>, 야인의 냉소를 드리운 <베가번스의 전설> 같은 예외적인 캐릭터를 빼고 대체로 정신적으로 건실하고, 육체적으로 성실한 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모처럼 도전한 액션영화 <본 아이덴터티>도 변신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책임감이 강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만 킬러로 살아갈 만큼 잔혹하지는 않아 보이는 인상이, 킬러가 기억상실증을 계기로 그 비정한 세계를 떠나는 드라마에 어울린다. 하지만 변화는 있다. 눈동자는 항상 가운데에 놓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는 우직하던 그가 익숙하고 재빠르게 곁눈질을 한다. 훈련된 전사처럼 민첩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석달 동안 복싱과 필리핀 무술 ‘칼리’를 단련한 결과다. 그에겐 비슷한 일화가 많이 따라다닌다. <커리지 언더 파이어>에선 체중 45파운드를 줄인 탓에 내분비장애를 앓았고, <베가번스의 전설> 때는 골프를 연습하다가 갈비뼈를 다쳤다. 89년 텔레비전영화에 캐스팅되기까지, 10년 동안 하버드대학도 중퇴하면서 ‘수천번의 오디션’을 거쳤다. 이런 끈기와 성실함이라면 루저가 되기도 글렀다. 앞짱구마저 들어가 기름기 흐르는 번듯한 이마가 됐다면 참 매력없을 인간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전투장면을 앞두고 스필버그 감독은 자기가 찍은 최고 명장면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보호받아야 할 라이언 일병 역이어서 이선에 있어야 했다. 톰 행크스는 행복하겠다 싶으면서 못내 속상했다.… (<본 아이덴터티> 이후) 내 이름은 액션 히어로의 명단에 올랐다. 스탤론이나 슈워제네거 같은 노장들이 계속 액션을 할 테니까 새로운 이가 나오는 것도 좋지 않은가.” 정말 액션영화에 맛을 들인 걸까. 몇달 전 볼프강 페터슨 감독이 <배트맨과 슈퍼맨>에 맷 데이먼을 캐스팅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구애를 보냈으나 그는 아직 대답이 없다. 대신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할 예정인, 미국 대기업 ADM의 비리사건을 다룬 <밀고자>(가제)에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출연할 것이라는 말이 나돈다. 맷 데이먼은 지난 10월8일 한 레스토랑에서 가족, 20여명의 팬, 봄볼로티 파스타, 새우칵테일과 함께 생일파티를 열고 만 32살이 됐다. 미니 드라이버, 페넬로페 크루즈, 위노나 라이더를 거쳐 만난, 한때 벤 애플렉의 비서였던 오데사 휘트마이어와 내년 겨울에 결혼할 예정이다. 막내로 있기는 더이상 힘들다. 귀엽고 믿음직하던 그 인상이 가장의 지위가 돼서 어떤 이미지를 띠게 될까. 어떻든 주류사회에 들어선 뒤에도, 아트영화 같은 모습으로 펀딩을 못해 구스 반 산트가 사재를 털어넣은 <제리>(2002)에 출연하고 벤 애플렉과 함께 ‘그린라이트 프로젝트’를 통해 신인 감독을 발굴·지원하고 있는 그라면, 돈과 규모로 승부하는 할리우드에 좀더 인간의 체취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해도 될 것 같다.

김형태의 오!컬트 <플레이어>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풍경 때문에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어떤 산골에 마을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입소문이 퍼지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면서 땅값이 오르고, 자본이 투입되어 마구잡이 개발로 대규모 리조트가 형성되고 깔끔한 도로와 위락시설들이 들어차게 될 것이다. 풋풋한 인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농부들은 집을 팔고 어디론가 떠나버렸거나 영악한 장삿꾼으로 변하게 되리라. 오직 관광객의 호주머니만을 털어내도록 개발된 그곳에서 사람들은 점점 환멸을 느끼고 ‘여기도 변했어’라는 말만 남기고는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다. 이런 설정은 가정이랄 것도 없다.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더이상 이런 일이 생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일어났었으니까. 문화예술이란 것도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찾아보는 여행지 같은 것이라고 비유해 보면, 그 운명도 관광단지가 되어 번영을 누리다가 결국엔 파괴되고 버림받는 산골마을과 닮은 과정이 있다. 처음에는 무목적의 거칠고 순수한 몸부림에서 시작된 어떤 창작의 행위들이 그 순수한 감동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본가가 꼬여들게 마련이다. 자본을 투자하고 규모를 키운다. 하지만, 자본가와 결탁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자본가의 것이 되고 만다. 왜냐고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왕이고 천재고 전문가고 권력이고 표준이고 지침이고 모범답안이다. 자본을 잘 모으고 많이 불리는 사람만이 최고의 발언권을 가진다. 왜냐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그러나 자본이 투입되고 자본을 관리하는 전문가가 개입되는 순간부터 창작의 주체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들, 이른바 기획자라고 불리는 자본관리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돈을 버는 대가로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이를테면 음악에서 돈냄새가 나면 이들은 즉각 달려가 ‘기획’에 착수한다. 작곡자를 사서 음악을 ‘주문제작’ 하고 어디선가 가수를 구해 온다. 필요하면 그룹도 결성시키고 구관조를 조련하듯 가수를 키운다. 모든 것은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한 기획이고 설정이다. 그 결과물과 행위들이 모두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지만 나중엔 그것이 음악이 아니었음을 알고는 외면하기 시작한다. 그런 이유로 요즘 음반 업계는 사랑받는 가수도, 존중받는 장르도 없이 늙은 창녀처럼 쫄딱 망해가는 중이다. 영화계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대체할 경쟁 장르가 없기 때문일 뿐이다. 영화는 이미 철저히 흥행을 목표로 기획된 위락시설일 뿐 예술작품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많은 기획자들이 개입되어 있고 예술가들의 발언권은 너무나 초라하다. 주문제작되는 시나리오와 고용된 감독. 그리고 제작 조건으로 제시되는 캐스팅. 흥행예감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되는 작품의 방향. 그렇게 흥행 전문가들에 의해서 철저히 제작되는 구조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재미있는 영화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우리는 가장 천박한 문화예술 장르로 영화를 꼽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현재 모든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 가요 프로그램이 가장 천박한 지경이 된 것을 목도하듯이 말이다. 사람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선수는 기획자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선수는 예술가들이다. 사람들이 처음 어떤 문화에 대해 주머니를 열었던 이유는 그것이 먼저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란 것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현재의 그 어떤 흥행대작도 그 원인은 대규모 제작비와 슈퍼스타를 동반한 탁월한 기획이 아니라 털끝만큼이라도 엿보이는 어떤 순수한 예술성 때문이라는 소박한 진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자본가들이여, 기획자들이여, 오래오래 잘살고 싶으면 예술가를 끝까지 존중하라.김형태/ 화가, 황신혜밴드 http://hshband.net

게임의 기초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북쪽 응원단에 관한 텔레비전의 특집방송을 봤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인했다는 뉴스 속에 빠져버리고 난 지금, 그 프로그램을 볼 때는 피식 웃으며 지나친 장면이 기억의 맨 앞줄로 기어나온다. 한판 붙게 된 남과 북의 여자레슬링 선수들이 애써 서로를 외면하고 있었다. 남북의 자매애를 상징하는 장면을 유도하고 싶어하는 카메라의 의중도 모른 척한다. 친밀감을 느끼면 경기진행이 어려워져서 저러는 거라는 해설이 곁들여진다. 뒤집어 생각하자면, 대결의 긴장을 눅이기 위해서 북쪽 선수들과 응원단은 반도 남단까지 찾아왔고, 이두용 감독은 신작 <아리랑>의 프리미어를 하러 평양으로 갔던 것이다. 이라크 공습 계획을 밝힌 미국 정부는 반대로 자기네 국민들의 전의상실을 염려해서 이란 감독들의 입국을 차례차례 거부했던 것이고. 그러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호전과는 거리가 먼, 지극한 평화주의자들이라는 사실도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 그저 외면할 뿐이다. 대화의 기운이 다시 충만해진 가을날, 북한 핵문제는 세계 곳곳에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왜 이 시점에 북한이 핵무기 개발계획을 시인했는지, 미국이 그 사실을 밝혔는지 분석들도 분분하다. 아무리 그렇다한들 반도 남단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만큼 심사가 복잡한 이들은 없을 것이다. 햇볕정책의 실패라고 공격하는 쪽이건, 한국이 북의 핵포기를 이끌어내면서 북미관계의 중간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건. 미국의 반응에 시청각을 집중하다가 북한과 이라크는 경우가 다르다는 발언에 안도하고, 핵문제를 대화로 일괄타결하고 싶다는 북쪽 관계자의 인터뷰 행간을 뒤져보는 이유야 물론 설명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네고시에이터> 같은 할리우드영화로 치자면 이 대치극의 인질들이니까. 잡지 마감 틈틈이 선 자리에 따라 시선이 달라지는 일간지들의 속보와 해설을 뒤져보다가, 아주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레슬링이 아니다. 스포츠의 긴장은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보아도 쾌락이 목적이지만, 이건 아니다.

1980년대 분위기 찾아 유랑극단처럼 전국일주하는 <살인의 추억>

전남 해남군 황산면, 너른 갈대밭에서 80여명의 경찰이 성인의 키를 훌쩍 덮는 갈대를 헤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크레인 위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며 찍고 있는 이 풍경은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이다. 25일 언론에 처음 공개된 촬영현장은 갈대밭에 버려진 여성 실종자의 사체를 발견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자못 긴장된 촬영 현장 옆에서 박두만 형사를 연기하는 송강호씨는 조용구 형사 역의 김뢰하씨와 실뜨기를 하고 있다. 서울서 온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전경들과 함께 실종자의 사체를 수색하는 동안, 두 형사는 실뜨기로 하릴없는 시간을 달래며 실종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한 ‘리허설’을 하고 있는 중이다. 삼엄한 사체 수색과 실뜨기 놀이라니. 부조화해 보이는 두 그림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의 독특한 분위기를 집약해 보여준다. 봉준호 감독이 고민 끝에 이 영화를 ‘농촌 스릴러’라 분류했다. “‘농촌’과 ‘스릴러’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충돌하는 이미지와 에피소드의 공존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서가 될 것”이라는 게 봉 감독의 설명이다. 형사들이 밤낮없이 수사만 하고 또 명쾌하게 사건을 해결해내는 장르영화의 전형성을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로 들린다. 논리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려는 서울 형사와 발로 뛰는 지방 형사의 갈등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축이다. 전형적인 형사물이라면 복장에서부터 차이가 나겠지만 현장에서 두 사람의 초췌한 행색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또한 형사물이라면 거침없는 액션이 먼저 떠오르지만 이런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적 리얼리티가 아닌 날것의 사실성에 영화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그 사실성은 이날 촬영된 장면처럼 소름돋는 공포와 난데없는 웃음을 옆자리에 나란히 앉힌다. 지난 8월 말 시작된 촬영은 지금까지 전체의 40% 정도가 진행됐다. 해남, 장성, 부안 등 전남북 일대와 인천 강화, 강원도 횡성 등 스태프들은 전국을 “유랑극단”처럼 돌아다녔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80년대 중반의 분위기가 훼손되지 않은 곳을 찾기는 그만큼 어려웠다. 에서 치고 달리느라 그을린 얼굴이 <살인의 추억>으로 더 검어진 송강호씨는 “풀리지 않는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만큼 통상적인 추리물의 결론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에는 가슴 짠한 여운을 주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2월에 경찰서 세트 촬영으로 마무리한 뒤 <살인의 추억>은 내년 봄께 관객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김상경 인터뷰 너무도 달라진 수척한 얼굴 옆에 두고도 “김상경 어딨지?” 촬영현장에서 만난 서태윤 역의 김상경(30)씨는 수척해 보였다. 배역을 위해 일부러 다이어트를 한 건 아니지만 매일되는 술자리 탓에 한참 몸이 불었던 <생활의 발견> 때보다 10kg 정도가 빠졌다. 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둔 머리칼은 귀밑을 덮었다. 사건 현장에서 그을린 얼굴을 만드느라 생전 처음 선탠까지 했다. 덕분에 촬영현장에 구경온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도 “김상경 어딨니” 옆의 친구에게 묻는다고 한다. “첫 영화가 독특해서 다음 작품 고르는 데 부담스럽지 않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렇지는 않았어요. 시나리오가 너무 좋았죠. 새벽 세시에 시나리오를 다 읽고 감독님과 통화하고 싶어서 밤을 샜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서태윤이 “틀에 박힌 인물이 아니라 좋다”고 했다. “서울서 온 형사라면 바바리 깃 날리는 엘리트적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근데 전혀 아니거든요. 중국집에서 사건을 가지고 심각하게 논쟁하다가도 “아줌마 짜장하고 면하고 따로 주세요”하는 말을 툭 던져요. 폼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죠.” 첫 영화 때 영화호흡에 적응하느라 고생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많이 편해졌다. “텔레비전 드라마 같으면 벌써 수십 신을 찍었을 시간에 영화는 한 컷도 못찍는 경우가 많죠. 늘 쫓기면서 촬영하다가 하염없이 기다리려니 안절부절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제 오히려 연기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서 좋습니다.” 김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서태윤이 관객들에게 “비현실적인 영웅심보다 인간으로서의 고민과 좌절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특별히 영화만 고수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영화가 “내 몸에 꼭 들어맞는 옷이 될 때까지” 당분간은 몰두하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