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고어, 자극보다 풍요로운

아마 앞으로 전 의 금요일 자정에 방영했던 호러영화들에 대해 꽤 자주 이야기할 겁니다. 정말 좋아했던 시간대였으니까요. 요새 그 시간대에 호러영화를 방영하지 않는다는 게 서글퍼질 지경입니다. <트왈라이트 존>의 영화판 도입부에 나오는 노래 기억하세요? 대충 이렇게 시작되지요. ‘금요일 밤 호러영화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네, 그 기분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그때 굉장히 많은 영화들을 접했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 영화 취향을 결정한 것들도 그런 영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들만 했던 시간대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규칙적으로 보다보면 거둘 수 있는 수확은 엄청났습니다.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도 그런 영화들 중 하나였습니다. 습관적으로 신문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을 뒤적거리다 그 제목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는지. 당시는 꽤 어렸을 때라 호러영화에 대한 제 지식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 조지 로메로가 누군지 알았고, 그의 첫 영화가 얼마나 중요한 영화인지도 알았으며, 결정적으로 그 작품이 ‘ne plus ultra’의 평판을 들을 만큼 자극적인 호러영화였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었거든요. 하여간 그날 밤 전 완전무장을 했습니다.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쓴 뒤, 겁먹을 때 쓰려고 봉제인형들을 잔뜩 안에 끌어다놓았죠. 준비가 끝나자 전 당시 제가 전용으로 쓰고 있던 고물 흑백 텔레비전을 탁 켰습니다. 어땠냐고요? 솔직히 실망했었답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 자극적인 영화는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말이 ne plus ultra죠.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도 왕년의 ne plus ultra였다는 걸 아세요? 자극적이기는 그 몇주 전에 보았던 여대생 기숙사에 뛰어든 살인마 영화가 훨씬 더했습니다. 혹시 잘린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버전은 잘린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있었어도 아주 작은 부분이었겠지요. 적어도 그때 제가 보았던 버전은 국내 비디오 출시 버전보다 훨씬 멀쩡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비디오 버전이 왜 그렇게 찢겨져 나갔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전 고전에 대한 예우는 늘 차리는 터라, ‘그래도 좋은 영화이긴 했어’라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습니다. 근데 진짜 경험은 그때부터 시작되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로메로의 어두컴컴한 비전이 구렁이처럼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축축한 불쾌함은 그뒤로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공포와 불쾌함의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제가 그때까지 보았던 공포영화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느긋하게 저에게 전해주었던 그 축축하고 황량한 느낌이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 일주일 동안 제가 느꼈던 불안한 불쾌함은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을 당시 관객이 느꼈던 자극보다 훨씬 풍요로운 것이었을 겁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경악스러웠을 고어의 자극에 정신이 나갔었을 테니 다른 생각이 들 리 없었겠죠. 그 잔혹한 껍질을 벗겨내고 밑의 좀더 미묘한 공포의 뉘앙스를 즐기는 것은 저 같은 후대 관객의 몫이었습니다. djuna01@hanmail.net

진실과 재미, 그 힘겨운 줄타기

역사적 사실과 극적 재미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운명인가보다. 최근 러시아 잠수함을 배경으로 한 영화 도 이런 딜레마에 부딪혔다. 이 영화는 크랭크인을 눈앞에 두고, 영화의 모델이 된 러시아 선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최악의 경우 법적 싸움으로까지 이어질 태세다. 해리슨 포드와 리암 니슨이 출연하고 캐스린 비글로가 연출하는 는 1961년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 보유 잠수함이 원자로 이상으로 항해중에 위기를 맞았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잠수함의 선장 니콜라이 자테예브의 자서전을 토대로 작업한 시나리오가 지난해 겨울 생존 선원들에게 건네진 것이 사건의 발단. 이들은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심하게 왜곡하고 캐릭터 묘사에서도 러시아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천착했다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우리를 멍청하고 무례한데다 경보가 울리는 순간에도 술에 취해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는 것. 러시아 NTV도 “시나리오상에서 러시아 선원들은 ‘바다’나 ‘잠수함’보다 ‘보드카’와 ‘마시자’는 단어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고 보도했다. 생존 선원들은 시나리오가 수정되지 않을 경우, 제작중단을 요구하는 법적대응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실화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사건 관계자들과 제작진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은 2차대전을 지나치게 미국적으로 해석해 비난을 샀으며, 베트남전쟁을 그린 <우리는 한때 군인이었다>는 베트남 참전자들로부터 좋지 않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나 그렇듯 할리우드는 담담하다. 의 제작진도 이 논란을 기화로, 오히려 촬영 스케줄을 다잡고 의욕을 과시하고 있다. 공동제작사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텔레비전>은 “이 작품은 처절한 생존 실화를 밀도있게 담아낸 드라마로, 뒷받침하고 있는 자료도 방대하다”고 밝혔다. 믿거나 말거나.

제12회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리베라 메> 일본 극장 입성 준비 삿포로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약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유바리라는 작은 도시는 처음부터 영화적인 볼거리로 눈길을 잡아끌었다. 슈파로 호텔 사이로 난 좁은 도로엔 낮은 상점 건물들마다 온통 지금은 추억의 영화로 자리잡은 오래된 영화들의 그림 간판들이 걸려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찰리 채플린, 존 웨인,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장 가뱅에서부터 일본의 미후네 도시로와 이시하라 유지로 등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옛 스타들이 지극히 고풍스런(?)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런 풍경만을 보고서 과연 이곳은 영화와 관련된 도시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이 거리를 조금 둘러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유바리 키네마 거리(夕張キネマ街道)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에 아이러니하게도 시네마, 즉 영화관이라곤 도통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눈 속에 잠긴 이 도시의 지나친 고요함마저 떠올리면, 정말이지 이곳이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곳이 맞을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기에 이른다. 초행자의 이런 추측에 올해로 벌써 열두해째를 맞는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실제로도 국제영화제라기엔 아주 소박하기만 한 자태로 응수해주었다. 예컨대, 정식 영화관이 아니라 문화스포츠센터나 호텔의 강당 같은 장소에 임시로 자리를 마련해 영화를 상영한다는 점이나 번듯한 영화제 데일리조차 발행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은 유바리영화제가 한국에서 개최되는 여타 국제영화제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크지 않은 수준임을 일러주었다. 북한영화 만났다 공식초청 부문,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 디지털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오프 시어터 부문, 판타스틱 비디오 페스티벌 등으로 짜여진 이 영화제의 프로그램 가운데에서 외형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식초청 부문일 터. 이 부문에서 선보인 17편의 영화들 가운데에는 한국 관객에게는 이미 잘 알려진 ‘판타스틱’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올해 영화제의 개막작인 <프루프 오브 라이프>와 폐막작인 을 비롯해, <나인 야드>와 <치킨 런> 등의 할리우드영화들이 이미 한국의 관객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작품들인 것. 사미르 마흐말바프의 <칠판> 같은 경우도 부산영화제를 통해서 소수나마 한국 관객의 눈을 거쳐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식초청 부문의 식단이란 게 일본 관객에게는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한국인이 봤을 땐 당연하게도 다채롭고 푸짐한 성찬(盛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문에서 특기할 것으로는 북한영화 <태권도 여인 소미>(1997)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소미라는 이름의 여주인공이 무예를 연마해 결국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북한판 무술영화는 <민족과 운명> <임꺽정> 등 북한에서 주로 시대극과 역사영화를 만들었던 장용복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최근 일본을 강타하고 있는 한국영화의 열풍은 약 1만6천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홋카이도의 이 아담한 도시라고 해서 그냥 비켜가진 않았다. 양윤호 감독의 ‘파이어 액션영화’ <리베라 메>가 공식 초청 부문에 초대돼 일본 관객에게 또 한번 한국영화에 대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 이 영화의 상영장인 문화스포츠센터를 가득 메운 일본 관객은 영화의 흥미도 흥미려니와 무엇보다도 CG 도움없이 ‘불’을 연출해내는 솜씨에 놀라워하는 눈치들이었다. 유바리에서 보여준 <리베라 메>의 선전(善戰)은 이 영화가 일본 극장가에 공식적으로 입성하는 데에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해줄 전망이다. 제작사쪽에서는 일본 개봉까지 남은 기간 동안 영화의 드러나는 약점들을 보완할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엔젤>,<버서스> 관심 끌어 유바리에서 선보인 할리우드영화들 가운데 아직 한국 관객에게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다크 엔젤>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묵직한 중량감 때문에라도 관객의 관심을 끌어모은 영화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목 뒤에 굳이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Created by James Cameron)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이 영화 <다크 엔젤>은 실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것도, 또 그의 ‘영화’도 아닌 그런 작품이었다. 더 정확히 부연설명하자면, 그것은 카메론이 제작 총지휘와 공동각본을 맡아서 제작된 텔레비전 시리즈 <다크 엔젤>의 첫 에피소드였던 것이다. 영화는 미래의 2009년에서 시작한다. 어느 연구소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고 양육된 12명의 아이들이 연구소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살되고 단 한명만이 살아남는데, 그 생존자는 맥스라는 여자아이였다. 이제 영화는 10년 뒤, 그 본격적인 무대인 2019년으로 넘어온다. 보통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또한 미모도 출중한 소녀 맥스는, 억압과 빈곤, 부패로 가득한 세계에서 정의로운 ‘검은 천사’로 자라난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유전자 조작의 모티브는 각각 <다크 엔젤>이 <블레이드 러너>와 <엑스맨>의 요소를 흡수·융합한 영화임을 일러준다. 그렇듯, 영화는 암울한 미래세계에 대한 풍경과 맥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자주 왔다갔다한다. 문제는 영화가 그 두 이슈 사이를 어정쩡하게 왕복하다가 정작 카메론적인 스펙터클조차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곧 다음 이야기가 뒤를 이을 테니 속단하기는 이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다크 엔젤> 시리즈의 첫 편은 적당한 맛보기 정도로 끝나고 만다. 아마도 이 영화제에서 가장 많을 수를 차지할 일본영화들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영화는, “네오 인디펜던트의 기수”라는 다소 모호한 말로 소개된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버서스>(Versus)였다. 영 판타스틱 경쟁 부문에 초대된 이 영화는 정말이지 숨쉴 사이를 주지 않고 전개되는 영화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인물들은 싸우고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그것도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피를 흠뻑 묻혀가면서 싸운다. 목이 잘리는 것은 예사이고, 몸통에 구멍이 뚫리는 잔인한 장면도 자주 나온다. 감독의 잔인무도한 재기가 돋보이긴 하지만 그 대신 영화는 전체적으로 호흡 고르기에 실패했다는 느낌도 준다.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 내내 싸움만 반복되니 후반부로 갈수록 너무 길다는 인상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하튼 <버서스>는 일본 인디펜던트 고어영화(이런 말이 있는지는 사실 잘 알 수 없다)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가끔씩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잘 참기만 한다면. 디지털, 전진 또 전진 0과 1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다른 많은 영화제들에서처럼 유바리영화제에서도 작으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시어터’(Digital Theater)라 명명된 이 부문은 영화와 디지털을 어떻게 연결해볼 수 있을까를 모색해보는 자리였다. 물론 디지털과 관련한 섹션이 올해 처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유바리에서는 ‘디지털 시네마 프리젠테이션’이란 부문을 통해 디지털의 현재를 조망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지난해 디지털 섹션이 주로 미완성 필름과 견본 필름들만을 그저 ‘전시’(Presentation)하는 데 그쳤다면, 올해 디지털 섹션은 그보다 조금 더 심화된 실험을 해보였다. 일본의 통신회사인 NTT의 기술 협조를 받아 도쿄에서 디지털 신호를 전송하고 그 신호를 받아 유바리에서 단편애니메이션들과 실사영화들을 보여주는, 새로운 상영방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올 유바리영화제에서 이 디지털 시어터 부문을 기획한 사타니 히데미(수플렉스 영화사의 프로듀서)는 영화에서 디지털을 본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며 앞으로 디지털을 열심히 알리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현재 이야기되는 디지털 논의와 관련해 아주 중요한 말을 던졌다. “현재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를 쫓는 데만 너무 급급하다. 하도 디지털, 디지털, 하고 소리만 시끄러우니 이건 마치 디지털에게 오히려 이용되는 것만 같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다. 디지털을 아날로그와 어떻게 잘 이용할 것인가, 디지털을 왜 이용할 것인가를 잘 알고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테면, 무조건 제작비를 삭감하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그럼 당신은 디지털의 주요 목적이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야말로 솔직한 정답이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디지털은 아직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진행중인 무엇일 테니까 말이다. 유바리 =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 웹 애니메이션 <아치와 씨팍>

해는 뜨고,해는 지고

Fiddler On The Roof 1971년, 감독 노먼 주이슨 출연 하이먼 투폴 EBS 3월3일(토) 밤 9시 1960년대의 할리우드는 이른바 ‘와이드스크린’ 대작영화가 명멸하는 시기였다. 가정교사 줄리 앤드루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도라! 도라! 도라!> 등은 흥행에서 실패해 제작자에게 좀더 규모가 작고, 알뜰한 장르영화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 당시 주디 갤런드, 앤디 윌리엄스 등의 텔레비젼 쇼 프로그램을 연출한 경력이 있는 노먼 주이슨 감독은 두편의 뮤지컬을 제안받았다. 하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그리고 나머지 한편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였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이 두편의 영화는 노먼 주이슨 감독의 전작들, 즉 <신시네티 키드>와 <밤의 열기 속으로>, 그리고 <화려한 패배자> 등 비주얼에 방점이 찍힌 장르물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면이 있다. 노먼 주이슨이라는 감독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유연성을 요약해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장르 경계를 마음껏 넘나드는, 나무랄 데 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마을에서 우유 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다. 그는 수다스런 아내, 그리고 다섯명의 딸과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장녀가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양복점 직공을 사랑한다며 결혼하겠노라고 공언한다. 딸들은 하나씩 남자를 만나 아버지 곁을 떠나는데, 차르의 유대인 박해가 엄혹해지자 테비에 가족은 정든 마을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된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은, 희귀한 할리우드 뮤지컬이라 할 만하다.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영화의 주제로 삼곤 했던 노먼 주이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우크라이나 지방 유대인들의 생활상에 관심을 둔다. 그들의 고유한 태도와 종교의식, 그리고 가족사를 다소 지루할 만큼 꼼꼼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것이다. 특정 민족에 대한 관용과 동정의 철학으로 무장한 이 영화에 대해 톰 밀른 같은 평론가는 “감상주의와 촌뜨기 정신이 깃든” 작품이라고 힐난한 바 있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인종 문제에 관한 천착은 덴젤 워싱턴 주연의 영화 <허리케인 카터>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니 그 일관성 하나는 존경스럽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원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이다. 아이작 스턴 등의 음악가가 영화에 출연해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다. 원래 상영시간이 3시간여에 육박하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서사 뮤지컬의 대표작이라 할 만큼 상영시간, 그리고 규모면에서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는 영화다. 당시 관객에게 브로드웨이로 가지 않고도 스크린을 통해 뮤지컬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백미라면 <선라이즈 선셋>이라는 영화주제곡이 깔리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인간사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과정에 비유한 이 노래말은 단순명료한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종교적인 엄숙주의를 담고 있는 듯해 불편함을 느낄 사람도 없지 않을 듯하다. 처량한 멜로디의 노래를 듣기 위해선 영화가 시작한 뒤 또 한참을 기다려야만 하는 부담도 없지 않다. 김의찬 /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혼란한 세상, 영화로 살다

EBS 한국영화걸작선이란 프로그램에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을 방영하기 직전이었다. 홍 감독이 타계했다는 연락이 왔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홍준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지병으로 오랫동안 자리에 누워 있는 홍 감독의 빠른 쾌유를 빈다는 말로 김 감독은 해설을 마무리해놓은 상태였다. 해설은 “홍 감독이 타계했다, 명복을 빈다”로 바뀌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관객과 참 절묘하게 마지막 인사를 한 셈이지. 영화인장이라지만 쓸쓸했던 영결식을 끝내고 아직도 찬 땅에 그를 묻고 돌아와서, 공연히 섭섭한 마음이 들라치면 나는 그렇게 나를 달랜다. 6·25전쟁이 끝난 뒤, 한국영화계에 불어닥친 열풍은 다름아닌 멜로드라마였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겨, 곳곳이 무너져 앉은 땅덩어리처럼 팍팍한 가슴에 멜로영화가 선사하는 한 줄기 눈물과 웃음은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엇이었으니까. 그런 멜로영화의 선봉은 다름아닌 홍성기 감독과 신상옥 감독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성기 감독과는 <애인>(1955)으로 만나 동고동락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잠시 그와 만나기 전으로 거슬러올라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부터 설명하도록 하자. 전쟁이 발발하던 당시 20대 초입이던 나는 부산 견지동에서 ‘백양’이라는 이름의 사진관을 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만져본 것은 10살 때였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야마구치현의 오노다라는 작은 도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기에 이르렀고, 살림이 그런대로 윤택해서 그때로선 흔치 않던 카메라를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가족은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고,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양산 가까운 도시 부산에 자리를 잡았다. 취미가 생업이 되어서, 나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에서 사진관 주인이 되었다. 전쟁 때문에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렸는데, 서울에서 영화 만들던 작자들도 거의 부산에서 모이게 되었다. 영화판을 기웃거린 적 있는 조수 소송권을 통해 만난 이들과 나는 모두 젊은 나이여서 금세 술친구가 되었다. 영화도 결국은 사진 동생쯤 되는 일이겠거니 해서 같은 일 하는 사람입네 하는 동지감도 생겼다. 그러다 53년에 전쟁이 끝나고 각자 저 살던 데로 다들 떠나버리니까 영 적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울의 유명한 허바허바 사진관에서 일해보자는 제의가 왔을 때 옳거니, 하고 서울로 향한 것도 그래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곳은 부산 시절 조수 소송권이 있던 종로4가의 자그마한 사진관이었지만.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영화인들도 하나둘씩 찾아와 주었고, 그들과 어울려 촬영현장을 구경하러 다니기도 했다. 54년 <열애> 촬영현장에 갔다가 스쳐지나듯 홍성기 감독과 인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그와 같이 영화를 찍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국회 사진부를 거쳐 일숫돈을 얻어 종로2가에 사진관을 하나 냈다. 처음에는 어찌나 손님이 없던지 손님 끌어모으려고 별짓을 다 했지만, 차츰 실력이 알려지면서 살림살이도 피기 시작했다. 어느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승모 <중앙일보> 종군기자가 홍성기 감독이 <애인>을 찍는데 자기가 촬영부를 맡았으니 조수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사실 카메라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데다 ‘몽타주 이론’이나 ‘사운드 토키’에 관한 영화이론을 독학하고 있었기에 선뜻 그러마고 했다. 이승모를 따라 홍성기 감독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기 위해 명동성당 밑에 있는 신신영화사로 갔다. 아직 잔설이 녹지 않은 쌀쌀한 봄 날씨에 코끝에 저렸다. 서춘광이 운영하던 신신영화사는 보통 가정집의 모습이었다. 홍성기 감독과는 면식이 있던 터라 별로 어색한 기운은 없었다. 감독은 내가 찍은 사진을 몇장 보더니 조명이 특별하다고 했다. 그 말로 합격 인사를 대신하고 당장 촬영현장에 투입됐다. 조수로서 처음 맡은 일은 카메라 정비와 필름 교체, 촬영 전후 필름 테스트 등이었다. 당시에는 뉴스용 카메라인 미제 아미모 카메라를 주로 썼는데 기계가 금세 노화되어 장비 수리에 한계가 따랐다. 금세 망가지는 기계 앞에 노상 깨지는 건 촬영부 조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승모가 영화판을 떠나게 되어 대신 퍼스트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해에 찍은 <애인>은 <열애>의 실패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뒀고, 홍성기 감독은 그때부터 흥행감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19살에 만주 국립촬영소에서 우치다 도모 감독 밑에서 연출을 배운 뒤 최인규 감독의 문하생을 거쳐 <여성일기>로 데뷔한 이후 그에게 처음 주어진 행운이었다. 심우섭| 영화감독·1927년생·<남자식모>·<운수대통> 등 연출

빔 벤더스를 맞이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1976)의 후반부에서 로베르트는 기차역 근처에서 한 어린 소년을 만난다. 그 소년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건 노트에 적고 있다. 철로, 하늘, 구름, 가방을 든 남자, 검은 눈, 주먹, 돌 던지기…. 영화 속에서는 아주 잠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꽤 중요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 소년의 사소한 행위란 바로 빔 벤더스 감독 자신이 영화를 구축하는 방식, 영화에 대한 견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벤더스의 영화란 마치 어린아이가 무언가 난생 처음 보는 어떤 것을 접해서 기뻐하고 그것을 자기 기억 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하려고 애쓰는 행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그런 ‘순수한’ 시선을 가지려고 하는 것. 벤더스가 정의한 영화의 속성이란 일차적으로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영화는 움직인다, 고로 존재한다 벤더스는 기본적으로 영화란 (물질) 세계를 ‘발견’하고 또 ‘탐구’하게 할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화들 속에서 그것들이 만들어진 시대, 도시들, 풍경들, 그리고 사람들을 다루기를 원한다. 그런 사고가 벤더스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벤더스는 지금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그 이전에, 오즈 야스지로의 자취를 더듬으려 했던 <도쿄가>(1985) 이전에, 그리고 니콜라스 레이의 마지막을 기록한 <물 위의 번개>(1980) 이전에, 이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시네아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도시의 앨리스>(1974)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같은 경우는 스토리상의 시간 순서대로 촬영함으로써 발견이 드러난 바로 그 시간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이었던 것이다. 그것들은 사물을 ‘전시’하려고 하기보다는, 벤더스의 영화 제목을 빌리자면, ‘사물의 상태’를 기록한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뉴 저먼 시네마의 ‘실존주의자’ 또는 ‘새로운 감성’(Neue Sensibilitat)의 영화감독 같은 벤더스에 대한 호칭들은 모두 ‘다큐멘터리스트’로 집약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거의 모든 영화들이 로드 무비의 형식을 띠는 것도 분명 영화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와 관련있을 것이다. 정체해 있기보다는 유동할 때 이 세계와 접할 기회가 훨씬 많지 않겠는가 말이다. 미국, 무의식의 주인 혹은 캔버스 벤더스가 영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해준 매개는 주지하다시피 미국영화들이었다. 그가 50년대를 다룬 최고의 다큐멘터리들이라고 간주하는 영화들, 즉 하워드 혹스와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들이 그로 하여금 픽션영화는 종종 한 시대의 가장 뛰어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는 점을 몸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확실히 벤더스는 미국영화와 미국문화로부터 영화적 자양분을 섭취한 감독이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영화를 ‘발견’했고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전에 평론가로 먼저 활동했다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앞선 누벨바그 세대와 동류항에 넣게 만들어주는 것은 미국영화에 깊이 매혹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문화와 미국적 풍경을 비롯해 미국적인 것에 대한 ‘망집’에서 고다르나 트뤼포의 그것은 벤더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빠져나오기 힘들 정도의 이 집착은 80년대 이후 벤더스의 퇴행에 대한 한 가지 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벤더스는 구명대(life-savers)로서 미국영화와 미국의 록 음악이 없었더라면 미치지 않고 유년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물론 이런 탐닉은 단지 개인적 취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인들은 대개가 어느 정도는 미국문화에 동화돼 있었는데, 그건 그들이 파시즘의 수치스런 기억을 망각하려는 데서 생긴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과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벤더스와 미국문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대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 나오는 “양키들이 우리의 잠재의식을 식민화했어”이다. 하지만 이걸 아메리카가 깊숙이 침투한 미국화한 독일인의 심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는 언설로만 보면 좀 곤란하다. 지금껏 벤더스는 미국적인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을 가한 적은 있어도 완전히 등을 돌린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인 친구>(1977) 같은 경우는 유럽에 남아 있는 미국인이 과연 어떤 악행을 일삼고 있는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니콜라스 레이와 새뮤얼 퓰러에게 경의를 표하는 미국식 스릴러영화이기도 한 것이다. 벤더스와 미국문화 사이의 관계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또는 미국적인 것에 대한 애정이 심지어 그것에 대한 증오를 포용하기까지 하는 관계라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 80년대 초반 프랜시스 코폴라의 초청으로 할리우드까지 진출했던 벤더스가 결국엔 끔찍한 ‘악몽’만을 경험하고 독일로 돌아온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벤더스가 이후에 미국문화를 처절하게 혐오했느냐고 하면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파리 텍사스>(1984)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현대인의 고독과 상실감에 대한 영화이기도 했지만 또한 미국적인 것, 그것의 ‘황량한 아름다움’을 그린 우수 어린 블루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영화는 존 포드의 <수색자>에 바치는 벤더스의 오마주이기도 하지 않았던가(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임무’를 수행하고 그리고는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로 떠나는 트래비스라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수색자>의 이산과 공명한다). 비교적 근작에 속하는 <폭력의 종말>(1997)에서는 아예 LA라는 도시 자체의 초상을 만들어냈던 벤더스는 최근 이렇게 말했다. “나는 LA를 좋아한다. 그곳은 너무나 텅 빈 캔버스여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위에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이 돋보이는, 음악이 돋보이는 벤더스에 대한 비평문들의 상당수는 그에게 영향을 준 미국영화들 가운데 하나로 <이지 라이더>(1969)를 꼽는다. 벤더스 자신도 그 영화에 어느 정도 매혹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평론을 쓰곤 하던 젊은 시절에 그는 그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화이다. 두대의 커다란 모터사이클이 지나가는 땅이 아름답고, 우리가 듣는 음악이 아름다우며, 데니스 호퍼가 연기만 할 뿐이 아니라 연출까지 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벤더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어떤 평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더스의 영화경력이 <이지 라이더>의 리메이크라고 본다면 너무 단순한 도식에 빠지는 것일 터이다. 단지 이 글에서 우리는 벤더스가 옹호하는 영화, 또 그가 지향하는 영화가 어떤 타입의 것임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땅(풍경)이 아름다운(돋보이는) 영화, 그리고 음악이 아름다운 영화다. 여기에서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벤더스의 로드 무비란 무엇보다도 우리가 보고 듣는 것, 그것의 ‘묘사’(description)에 치중하는 영화가 될 것이었다. ‘묘사’라는 이 단어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벤더스의 많은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들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것(ambience), 즉 풍경이나 음악에 치중하는 영화들이다. <도시의 여름>(1971)에서처럼 친구를 찾으려고 하든, 또는 <도시의 앨리스>에서처럼 어느 순간 자기 손에 맡겨진 어린 소녀의 할머니를 찾아주려고 하든, 그 인물들의 추구 행위란 건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공간‘들’을 탐사하려는 구실에 불과할 뿐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공간적 자리바꿈을 해나갈수록 그 안의 인물들은 ‘빗나간 움직임’으로 발을 디뎌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쯤에도 그들은 어떤 의미 있는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요컨대, 그들은 외적으로는 움직였지만 내적으로는 여전히 정체 상태인 것이다. 벤더스의 영화들이 자아내는 정서적인 공허감은 상당 부분 여기에서 연원한다. 결국 벤더스의 로드 무비들에서 행위자(actor)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그 영화들은 인물들이 지나치는 풍경, 또는 도시에 관한 자발적인 다큐멘터리이다. 비록 오래 전이긴 하지만,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 벤더스는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했었다고 한다. “나는 항상 풍경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난 앞에 서 있는 누군가를 그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벤더스의 세계에선 음악도 배경 요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스토리가 되기도, 또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단편영화를 만들던 당시에 이미 벤더스는 그런 가능성을 실연해 보였다. 단편 <알라바마>(1969)에서 그는 밥 딜런이 부른 와 지미 헨드릭스가 부른 같은 곡의 차이를 영화적인 주요 요소로 이용했던 것이다.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처럼 ‘서술’의 방법보다는 주로 묘사의 방법을 통해 구축되는 벤더스의 영화들은 자연히 ‘이미지’ 중심적인 영화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감각주의적인 ‘이미지 메이커’(image-maker) 벤더스는 오래 전부터 그 (순수) 이미지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의 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던 영화감독이었다.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그의 사유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에서 ‘시네마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처럼 다소 부정적인 색채가 짙었다. <도시의 앨리스>의 저널리스트 필립은 그 자리에서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폴라로이드의 위력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한다. 그것 때문에 그는 세상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알고보니 현실을 복제한다는 그 이미지는 리얼리티 자체와도 별 연결점이 없는 것만 같다. 앨리스의 할머니를 찾는 데 할머니 집의 사진은 도통 도움이 되질 못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주조하는 테크놀로지가 여기서 한참을 더 발달한대도 사정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이 세상 끝까지>(1991)에 등장하는 20세기 말의 인간들은 비주얼 텔레커뮤니케이션이 상용화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젠 인간의 꿈과 기억마저 이미지로 재현하는 경이적인 테크놀로지를 개발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하이테크 미디어는 사람들을 이미지에의 중독증에 빠뜨린다. 해결책은 스토리텔링이라는 전통적인 기술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벤더스는 이미지와 영화의 문제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리스본 스토리>(1994)에서 영화감독인 친구의 부탁으로 리스본에 온 녹음 엔지니어 필립은 그 친구가 종적을 감춘 것을 발견한다. 친구는 비디오 테크놀로지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도대체 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결말부에서 필립은 친구에게 말한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영화를 찍으라고, 그러면 영화는 아직도 그것이 100년 전에 했던 일을 할 수 있다고. 필립의 그 전언은 시네마가 이리저리 착종된 이 복잡한 현실에서 사실 지나치게 나이브한 결론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면 어쩌면 그건 벤더스 자신을 위한 예언 내지는 자기 암시는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면이 있다. 90년대 내내 부진을 면치 못했던 벤더스가 자기 자신은 철저히 지운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오랜만에 감동을 만들어냈으니까 말이다. 사람들을 찾아 진실하게 찍었고 그것만으로도 소박한 감동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필립의 말이 그르지 않았다 홍성남/ 영화평론가 antihong@hitel.net

“파리로, 뉴욕으로, 나는 영원한 유랑자”

여행을 많이 다닌 친구와의 대화는 즐겁다. 그가 돌아온 길이 길고 다채로울수록 더욱. 이 땅의 영화 마니아 1세대들이 ‘색다른’ 영화에 목말랐던 시절, <도시의 앨리스> <베를린 천사의 시>처럼 세련된 그림에 존재의 망설임을 담은 영화로 화답해왔던 벤더스는 쉰여섯이 된 신세기 벽두에 카메라 뒤에 철저히 자신을 감춘 음악 다큐멘터리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서울의 극장가로 돌아왔다. 정식 개봉된 영화는 몇편 없지만 왠지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만 같은 기묘한 감독 빔 벤더스. 그에게 이 메일을 띄우면서 우리는 마치 펜팔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 관객과의 친밀한 대화를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독일인 친구’에게서 날아온 답장을 공개한다. 우리는 언제나 당신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지구상의 도시 가운데 당신이 진정 살고 싶은 곳은 어디죠. 솔직히 말하면, 오랫동안 가지 못한 모든 도시죠. 나는 베를린, 파리,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 시드니, 도쿄, 리스본에서 살아봤는데, 그 도시들 중 한곳이라도 들른 지 오래되면, 왠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냥 뉴욕과 센트럴파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향수병에 걸리고, 파리 지하철의 냄새를 떠올리자마자 1년 동안 파리에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시겠죠? 나는 계속 유랑해야만 합니다. 가끔은 내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아마 나의 소망일 따름이겠지요? 사람들은 지금이 인터넷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의사소통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영화에 대해 어떤 고전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영화가 커뮤니케이션의 한 통로일 수 있다고 믿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신뢰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그런데 인터넷도 직접 자주 돌아다니나요? 어쩐지 당신은 타자기를 고집하고 있을 것만 같거든요. 난 컴퓨터 중독자예요. 헤아려보면 타자기를 쓰지 않은 지 정확히 12년이 되었네요. 나는 인터넷을 사랑하지만, 점점 더 독서할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는 아직도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신세기가 열리는 이 시점에서도 강력하고 심지어는 성장중인 문화라고 깊이 믿으니까요. 20세기는 정녕 움직이는 이미지의 세기였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의 문턱에서, 시청각 문화는 전반적으로 가장 거대하고 영향력 있는 전 지구적 산업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이 산업 내에서 영화의 역할은 여전히 중대합니다. 영화는 우리의 취향, 우리의 습관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다른 어떤 예술이나 엔터테인먼트보다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크린 앞에서 우리가 홀로 보내는 수많은 시간이 말해주듯, 오늘날 문화의 일부는 인간을 더 고독하고 고립되게 만들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체험은 여전히 매우 사교적이며 타인과의 교섭을 지향하는 활동이지요. 나는 영화의 황금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영화가 지닌 시적인 이미지는 많은 이를 매혹했지요. 하지만 <세상 끝까지>에서는 마치 영화 스스로 이미지에 중독되는 일을 삼가는 듯한 인상을 풍겼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이미지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걸까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견해가 혹시 달라진 것은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는데요. 아니, 전혀 아닙니다. 영화는 세계를 향해 당신의 눈을 열어주고 우리를 타인의 목마름과 꿈과 접촉할 수 있도록, 혹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필요와 소망, 공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지요. <세상 끝까지>가 일종의 이미지에 대한 묵시록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문학이나 연극이나 다른 분야보다 영화에서 훨씬 화려하게 꽃피고 있는 스토리텔링 예술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인류가 태곳적부터 품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욕구이며 신화의 소통입니다. 스토리는 의미를 창조하고, 스토리는 무질서에 논리를 부여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의 세계는 더이상 이해가 가능한 곳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의 충격을 더이상 소화하지 못합니다. 영화는 그런 사람들을 종교보다 철학보다- 정치보다는 물론- 한층 훌륭하게 돕습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예정된 결론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가는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입장에서 당신도 알지 못한 종착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를 만드는 일이 조금 두려운 경험은 아니었을까요? 쿠바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서 당신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이 있었나요? 모든 뮤지션들을 규합해 콘서트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이 처음부터 서 있었나요. 애초의 아이디어는 음악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실제 삶보다 더 거대한 믿기 힘든 여정에 올랐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깨달았지요. 늙은 쿠바 사나이들이 망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여행, 아바나의 거리에서 빈털터리로 영락해 구두를 닦다가 비틀스 같은 팝 스타의 지위로 올라서는 여행 말입니다. 막바지에 와서야 나는 이 영화가 보통의 다큐멘터리들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심성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기적을, 아니 그 말이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라면 적어도 하나의 동화가 실현되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도요. 그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쿠바 음악의 생명력을 지탱해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개인적인 소감은 어땠나요. 그들과 나눈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듣고 싶고요. 그 자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들의 음악을 듣길 원치 않는 상황에서도, 자기와 자기 음악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정체성 의식이 가장 특별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불평할 만한 오만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음악에 흠뻑 빠진 나머지 그 음악이 좋은 음악이란 것을, 성공을 확인받을 필요조차 없었던 거죠. 세상에서 제일가는 성공을 거둔 지금도 그들은 같은 연주를 합니다. 조금도 덜하지 않은 열정과 에너지로 말입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순간은, 콤파이(기타리스트)가 내게 “올해가 내 평생 최고의 해예요!”라고 말했을 때입니다. 세상에, 그는 90년을 살았다고요. 또, 그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는 말이었어요. 우리의 모든 삶과 작업과 생에 대한 개념 자체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해준 말이었지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말미의 콘서트 시퀀스에 감동받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장면의 감흥은 말로 설명하려들면 무기력해집니다. 당신 스스로는 콘서트를 촬영하면서 어떤 심리 상태에 있었나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특권이라 할 만한 사상 최고로 위대한 콘서트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오로지 그것을 기록하기만 해야 했으니까요. 카네기홀은 조합 규율이 엄해서, 나는 단지 3대의 카메라만 들어가도록 허락받았습니다. 2대는 객석에 설치할 고정카메라였고, 1대는 스테디캠이었지만 맨끝 구역 뒤쪽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지요. 모니터도 금지돼 있어서 나머지 카메라맨들이 뭘 찍는지도 볼 수 없었어요. 무선 교신만 됐는데 그것도 도중에 자주 끊겼지요. 요컨대 콘서트는 황홀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걸 우리가 제대로 녹화하고 있는지도 몰랐던 거죠. 완전히 악몽이었어요. 나중에 밤이 깊어서야 우리가 몇 가지 핵심을, 그것도 아름답게 포착했다는 걸 알았죠.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입니다. 다큐멘터리이면서도 음악이 뮤지컬영화처럼 끊임없이 흐르는가 하면, 로드무비처럼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전체적인 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자유롭게 흘러가면서도 엄밀하게 조율된 듯도 합니다. 영화의 구조와 스타일 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화에 착수했을 때 나는 그저 아바나로 가서 3주간 촬영을 하고 돌아와 편집을 하면 끝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밴드가 콘서트에서 라이브 공연을 할 줄도 몰랐고, 심지어 당시 그들은 라이 쿠더의 발명품일 뿐 단일한 밴드로서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음악인을 모아서 상상의 밴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만들어낸 거죠. 그들 중 몇몇은 서로를 알고 함께 연주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함께 작업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스테르담 공연의 가능성이 떠올랐을 때 너무 좋아서 실감이 안 났어요. 나는 아바나 촬영을 끝낸 뒤 50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들고 LA로 돌아가 편집 준비에 들어간 상태에서 암스테르담에서 2회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다른 스탭들을 꾸려 몇주 뒤 암스테르담으로 날아갔지요. 4일간 리허설을 찍었고 그들은 평생 최초로 한 밴드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10대처럼 긴장해 있었어요. 무대공포증의 엄청난 습격이었죠. 하지만 청중들은 첫곡이 끝나자 이미 의자 위에 올라서 있었어요! 나는 촬영을 마치고 서른 시간의 추가 촬영분을 들고 LA로 돌아와서 생각했죠. 와, 이젠 정말 충분해. 그런데 다시 카네기홀 공연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결국 나는 3편의 장편영화를 만들고도 남을 만한 재료를 안고 편집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엮어낼 구조에 대한 필요성은 그 다음에야 제기됐습니다. 아바나와 암스테르담, 뉴욕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관객이 길을 잃지 않게 하려면 어찌 해야 할까? 정말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사건을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시작할 무렵에는 이 영화가 스토리를 갖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다큐멘터리란 원래 스토리가 없는 거잖아요! 구조를 정하고 암스테르담을 흑백으로 처리하고 아바나를 우편엽서 같은 원색으로 칠하고 뉴욕을 네온빛으로 꾸미겠다고 결정하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계획없이 그저 날아오는 펀치에 맞춰 움직인 셈이죠.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제안한 라이 쿠더는 실제 촬영기간중 어떤 역할을 수행했나요. 라이는 두 번째 앨범 준비에 너무 바빠서 내가 뭘하고 있는지 쳐다볼 시간도 거의 없었어요. 오랜 친구로서 라이는 내가 제대로 잘하고 있으리라 믿은 것 같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과 이브라힘과의 대화 장면을 위해서 내가 간신히 그를 스튜디오에서 끌어낸 반나절만 빼면 한번도 라이는 촬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찍은 장면이 뭐였는지도 1차 편집본을 보고서야 알았을 겁니다. 들리는 말로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디지털카메라 사용 결과에 대해 매우 흡족해했다면서요. 디지털영화에 고유한 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 영화를 찍고 나서 대강의 그림을 얻었다고 할 수 있나요. 디지털영화는 아직도 발명중입니다. 우리는 그저 시작을 목격한 것에 불과하죠. 그 발명의 과정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의 필름메이커에게 매우 신나는 일입니다. 나는 디지털영화의 도래는 유성영화의 그것에 비할 만한 이행이라고 봅니다.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갖고 감독들이 뭘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아직 희미한 스케치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물론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도구상자를 갖고 계속될 겁니다. 당신은 미국 대중문화, 특히 팝 음악의 열정적인 팬이었습니다. 여전히 미국적인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나요. 답은 예스이기도 하고 노이기도 합니다. 미국 문학과 음악은 내게 지금도 영감을 줍니다. 미국의 풍경도 그렇습니다. 독립영화 신의 몇몇 창의적인 미국영화들도요. 어떤 판박이 영화들은 나를 죽도록 지루하게 만들긴 하지만요. 지난 몇년간 내가 본 가장 놀라운 영화들은 아시아에서 온 영화들이었습니다. 즐거운 일이지요.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특별한 존경을 몇번이나 표현한 적이 있었지요? 오즈와 그의 영화가 당신의 영화 경력에 어떤 입김을 끼쳤나요. 나는 영화를 찍기 시작하고 나서야 오즈의 영화를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감독으로서의 형성기에는 별 영향이 없지요. 하지만 일단 그 영화들을 보고, 영화 예술 역사상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사랑하게 되고 나자, 그들은 내게 영화의 가장 신성한 보물과 같은 존재가 됐습니다. 실락원이라고 할까요. 저널리스트로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대관절 어떤 의미가 있을까 늘상 자문하고 회의합니다.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당신은 언론의 단독 인터뷰 요청을 뿌리치고 관객과의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요. 기자와 평론가들에 대해 당신의 정직한 의견을 듣고 싶군요. 나는 지적인 질문들에 대해 답하는 일을 즐깁니다. 나는 말보다 글에 능숙합니다. 내가 즉흥적으로 말을 내뱉고 질문에 답해야 할 때마다, 신문 인터뷰 같은 제도화된 틀을 빌리지 않을 때 나나 동료들이 얻는 바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인터뷰도 하긴 하지요. 20년 전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관객과 나눈 토론의 기억이 생생했던 나로서는, 지난 부산영화제에서 또 한번 그런 특권을 누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들- 특히 서구의- 에 대한 나의 정직한 견해를 말하자면, 비평가들은 점점 더 마케팅과 PR산업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생각하는 바를 실제로 평에 쓸 만큼 용감한 평론가들은 극소수입니다. 평론가 대부분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거대 스튜디오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비평’이라는 단어조차 쓰고 싶지 않아요. 나는 한편의 영화를 관객에게 열어주고 영화의 실상과 본인의 감정을 묘사해, 글이 한 영화에 대한 서비스가 되는 영화평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글은 희귀해졌습니다.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제 여론을 생산하는 비즈니스, 또는 가십을 제조하는 비즈니스에 속해 있습니다. 정직하게 말해 바로 이런 점이, 내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편이 시간을 잘 쓰는 방법이라고 판단하게 된 이유입니다. 관객은 자력으로 판단할 만큼 성숙하며, 또한 내가 영화를 만드는 것도 그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이 대답이 당신의 감정을 상하지나 않았는지요. 질문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정리 김혜리 기자 vermeer@hani.co.kr

아시아가 할리우드를 삼킨다

<씨네21>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샤를 테송 칼럼을 시작합니다. 이 프랑스 영화평론가는 범람하는 영상속에서 “중요한 영화를 고르고 미래의 영화를 발견하는 것”을 비평의 중요한 몫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시선을 아시아 영화와 그안의 한국영화까지 꾸준히 확장해왔습니다. 이제, 테송의 `선택과 옹호'를 부정기적으로 중계합니다.편집자 저무는 한해한해는 우리에게 그에 준하는 의식들을 강요한다. 우선 그해 상영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우수했던 영화 10편을 선정해야 한다. 이 목록을 작성하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애호가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에 느끼는 유아적 환희에 가깝다. 우리는 많은 영화를 본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물론 글을 쓰고 싶거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공통되게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우리를 영화애호가로 만든 요소가 내재해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 관해 기록한다. 때로는 평점을 매기는(별표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러고나선 잠시 멈춰서서 그 평점이 제대로 매겨졌는지 주의깊게 살펴본 다음 다른 작품으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영화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감상한 모든 영화들에 대해 기록하는 작업을 마친 뒤 (열광적이면서도 감격스러운 이 작업을 좀더 분석적인 글쓰기에 선행하는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들만 따로 모아 리스트를 만듦으로써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요구되는 규칙은 경이로운 숫자인 ‘10’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위원들은 그들이 추천한 영화들과 <카이에…>가 옹호했던 영화들이 때로는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모든 연인들의 사연처럼 각 편집위원들이 <카이에…>의 편집 방향과 더불어 형성해온 그들의 상상적 타자― 그들의 천국과 지옥― 의 이미지에 충실하면서도 배반적인 일종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선별 작업에서도 주위를 바라보는 시력을 잃는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자신을 되찾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기쁨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위험없이 어떤 그룹의 일부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2000년 리스트에는 아시아영화가 세편이나 들어 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의 <와호장룡>, 왕가위의 <화양연화>다. 20년 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심도있게 이 감독들을 주목해온 비평가들의 작업이 이제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 그 이전 할리우드영화가 관객 곁에서 누렸던 반응들을 세계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영화가 차지함으로써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르영화와 액션영화에 속하는 <와호장룡>은 수준높은 대중오락영화인가 하면, <화양연화>는 사랑하는 감정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관능적인 로맨스다. 할리우드영화들은 부동의 스타를 길러냄으로써 전세계인을 꿈꾸게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 꿈의 대상은 아시아 스타에게로 이전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영화 배우들은 대형 스크린에 데뷔하기도 전에 시트콤에 흡수돼 버린다. 다시 말해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기도 전에 고갈돼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체로는 저속함만이 판치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우아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들의 능력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에 따라 배우적 가치가 매겨진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숭고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중국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달에 있다면(밀로스 포먼 감독의 <맨 온더 문>(Man on the Moon)은 찰리 채플린의 <뉴욕의 왕> 이후 영화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여자는 ‘무드에 젖어 있기’(<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역자) 때문이다. 장만옥은 얼마나 멋진가! 왕가위 신드롬에서 주지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거다. 오랫동안 홍콩영화는 극장에서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남자들의(브루스 리, 성룡) 세계를 조명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들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구체적으로 20년대 상하이에서 촬영한 로맨스영화와 무술영화에 등장시켰다. 우시아피안(Wu xia pian)에서 탄생한 여검객은 <무명의 영웅들>(1926)의 여주인공인 쉬안징린(Xuan Jinglin)으로부터 호금전의 <대취객>(1966)의 여군주 쳉페이페이(그녀는 <와호장룡>의 악녀로도 출연했다), 그리고 무한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그와 더불어 성장했다. 우리는 할리우드 안에서 용해될 소지가 다분한 홍콩영화가(오우삼의 말에 따르면 이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한다) 그에 흡수·통합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실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카이에 뒤 시네마> 2001.1월호) 샤를 테송 /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파리3대학 교수

촌놈들,서울가다

1969년, 감독 유현목 출연 구봉서, 문희 ebs 3월17일(토) 오전 11시50분 1960년대 후반은 유현목 감독에게 다작의 시기였다. 흔히 감독의 연출인생에서 ‘1기’로 분류되곤 하는 <오발탄>과 <잉여인간> 등 시대에 대한 절망을 담은 리얼리즘영화를 통과해, 장르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1966년작 <특급 결혼작전>을 만든 감독은 “당시 난 비흥행감독이었다. 하지만 빠른 템포로 경박한 영화를 만들었더니 흥행이 잘 되었다. 이런 게 흥행가치구나 싶은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유현목 감독은 서사극과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차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카인의 후예>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으로 요약되는 1960년대 후반, 유현목 감독의 이른바 ‘반공영화’들이다. <수학여행>은 유현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예외적으로 속해 있는 코미디물이다. 코미디언으로 익히 알려진 구봉서 등의 스타가 출연하는 점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선유도 초등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사는 수학여행을 계획한다.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가려는 것. 처음에 반기를 들던 부모들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수학여행이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선유도 아이들은 온갖 신기한 것을 접한다. 전깃불에서 자동차, 그리고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은 창경원, 남산을 구경하는데 그 와중에 서울로 돈벌러온 가족을 만나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모든 경험을 뒤로 한 채 교사와 아이들은 다시 섬으로 향한다. 올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들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 채. 영화 <수학여행>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1960년대 당시 시대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에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으며 서울이라는 대도시 중심의 국토개발을 서둘렀다. 영화평론가 유지나는 같은 해 개봉된 노부부의 여행담을 다룬 영화 <팔도강산>에 대해 “조국근대화와 산업화론에 대한 찬양을 담은 국책 홍보영화이자 국민영화로 성공했다”라고 썼다. <수학여행> 역시 영화의 계몽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근대화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담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수학여행>은 에피소드식 구성을 취한다. 교사를 중심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외딴 섬 학생의 작은 체험을 연대기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아이들은 “서울물은 싱겁다네, 미리 먹을 물이나 챙겨가야겠다”라며 초행길을 두려워하다가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 여자가 서서 볼일 본다며 장발족을 비웃는다. 영화에선 전통과 문명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는다. 선유도 아이들은 세탁기와 전화기, TV라는 근대화의 상징 앞에서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따름이다. <오발탄>과 달리 영화 <수학여행>에서 서울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만사형통인 긍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부분적인 균열이 감지된다. 무지하고 촌티나는 한 섬마을 소녀는 신형 세탁기를 구경한 뒤 “이런 게 있으면 내가 앞으로 서울 와서 식모살이를 할 수 없겠구나”라며 한탄한다. 계몽영화의 외피를 두르면서 은근히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고, 또한 삶의 비애감을 섞어내는 것은 유현목 감독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1960년대라는 ‘시대’에 잔뜩 옥죄어 있는 이 영화를 구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