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KWVWS넴뷰탈디씨펜토바르비탈직구넴뷰탈디씨펜토�%

편집위원들은 그들이 추천한 영화들과 <카이에…>가 옹호했던 영화들이 때로는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모든 연인들의 사연처럼 각 편집위원들이 <카이에…>의 편집 방향과 더불어 형성해온 그들의 상상적 타자― 그들의 천국과 지옥― 의 이미지에 충실하면서도 배반적인 일종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선별 작업에서도 주위를 바라보는 시력을 잃는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자신을 되찾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기쁨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위험없이 어떤 그룹의 일부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2000년 리스트에는 아시아영화가 세편이나 들어 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의 <와호장룡>, 왕가위의 <화양연화>다. 20년 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심도있게 이 감독들을 주목해온 비평가들의 작업이 이제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 그 이전 할리우드영화가 관객 곁에서 누렸던 반응들을 세계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영화가 차지함으로써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르영화와 액션영화에 속하는 <와호장룡>은 수준높은 대중오락영화인가 하면, <화양연화>는 사랑하는 감정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관능적인 로맨스다. 할리우드영화들은 부동의 스타를 길러냄으로써 전세계인을 꿈꾸게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 꿈의 대상은 아시아 스타에게로 이전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영화 배우들은 대형 스크린에 데뷔하기도 전에 시트콤에 흡수돼 버린다. 다시 말해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기도 전에 고갈돼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체로는 저속함만이 판치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우아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들의 능력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에 따라 배우적 가치가 매겨진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숭고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중국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달에 있다면(밀로스 포먼 감독의 <맨 온더 문>(Man on the Moon)은 찰리 채플린의 <뉴욕의 왕> 이후 영화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여자는 ‘무드에 젖어 있기’(<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역자) 때문이다. 장만옥은 얼마나 멋진가! 왕가위 신드롬에서 주지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거다. 오랫동안 홍콩영화는 극장에서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남자들의(브루스 리, 성룡) 세계를 조명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들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구체적으로 20년대 상하이에서 촬영한 로맨스영화와 무술영화에 등장시켰다. 우시아피안(Wu xia pian)에서 탄생한 여검객은 <무명의 영웅들>(1926)의 여주인공인 쉬안징린(Xuan Jinglin)으로부터 호금전의 <대취객>(1966)의 여군주 쳉페이페이(그녀는 <와호장룡>의 악녀로도 출연했다), 그리고 무한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그와 더불어 성장했다. 우리는 할리우드 안에서 용해될 소지가 다분한 홍콩영화가(오우삼의 말에 따르면 이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한다) 그에 흡수·통합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실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카이에 뒤 시네마> 2001.1월호) 샤를 테송 /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파리3대학 교수

촌놈들,서울가다

1969년, 감독 유현목 출연 구봉서, 문희 ebs 3월17일(토) 오전 11시50분 1960년대 후반은 유현목 감독에게 다작의 시기였다. 흔히 감독의 연출인생에서 ‘1기’로 분류되곤 하는 <오발탄>과 <잉여인간> 등 시대에 대한 절망을 담은 리얼리즘영화를 통과해, 장르물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1966년작 <특급 결혼작전>을 만든 감독은 “당시 난 비흥행감독이었다. 하지만 빠른 템포로 경박한 영화를 만들었더니 흥행이 잘 되었다. 이런 게 흥행가치구나 싶은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유현목 감독은 서사극과 멜로드라마의 양식을 차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카인의 후예>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 등으로 요약되는 1960년대 후반, 유현목 감독의 이른바 ‘반공영화’들이다. <수학여행>은 유현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예외적으로 속해 있는 코미디물이다. 코미디언으로 익히 알려진 구봉서 등의 스타가 출연하는 점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선유도 초등학교에 부임한 젊은 교사는 수학여행을 계획한다.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가려는 것. 처음에 반기를 들던 부모들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수학여행이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서울에 도착한 선유도 아이들은 온갖 신기한 것을 접한다. 전깃불에서 자동차, 그리고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아이들은 창경원, 남산을 구경하는데 그 와중에 서울로 돈벌러온 가족을 만나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한다. 모든 경험을 뒤로 한 채 교사와 아이들은 다시 섬으로 향한다. 올 때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그들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진 채. 영화 <수학여행>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1960년대 당시 시대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에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으며 서울이라는 대도시 중심의 국토개발을 서둘렀다. 영화평론가 유지나는 같은 해 개봉된 노부부의 여행담을 다룬 영화 <팔도강산>에 대해 “조국근대화와 산업화론에 대한 찬양을 담은 국책 홍보영화이자 국민영화로 성공했다”라고 썼다. <수학여행> 역시 영화의 계몽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근대화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담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수학여행>은 에피소드식 구성을 취한다. 교사를 중심으로, 서울을 방문하는 외딴 섬 학생의 작은 체험을 연대기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 아이들은 “서울물은 싱겁다네, 미리 먹을 물이나 챙겨가야겠다”라며 초행길을 두려워하다가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 여자가 서서 볼일 본다며 장발족을 비웃는다. 영화에선 전통과 문명의 대립이 전면에 부각되진 않는다. 선유도 아이들은 세탁기와 전화기, TV라는 근대화의 상징 앞에서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따름이다. <오발탄>과 달리 영화 <수학여행>에서 서울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만사형통인 긍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런데 부분적인 균열이 감지된다. 무지하고 촌티나는 한 섬마을 소녀는 신형 세탁기를 구경한 뒤 “이런 게 있으면 내가 앞으로 서울 와서 식모살이를 할 수 없겠구나”라며 한탄한다. 계몽영화의 외피를 두르면서 은근히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고, 또한 삶의 비애감을 섞어내는 것은 유현목 감독의 탁월한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1960년대라는 ‘시대’에 잔뜩 옥죄어 있는 이 영화를 구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nuage01@hitel.net

TV영화 -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

A Fish Called Wanda 1988년, 감독 찰스 크릭턴 출연 케빈 클라인, 제이미 리 커티스 ebs 3월17일(토) 밤 9시 1960년대 이후 주로 텔레비전 연출자로 일하던 찰스 크릭턴 감독 연출작. 조지 일당은 은행을 털어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훔친다. 조지가 경찰에게 붙잡히지만 교활한 조지는 훔친 물건을 숨겨놓은 상태다. 조지의 애인이면서 외국어만 들으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완다와 그녀의 숨겨놓은 애인 오토, 그리고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를 끔찍이 아끼는 조지의 아들 켄이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일대 소동을 벌인다. 완다와 오토라는 커플로 분한 케빈 클라인과 제이미 리 커티스의 과장된 연기가 웃음을 자아낸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작.

마음은 언제나 꼬마 토토

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 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 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 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있는 걸까. 영사실은 뜻밖에,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인지, 상영관 바깥에 따로 출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을 가만히 열자, 아저씨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야, 내가 심상용이야.” 영사실 안쪽 소파에 마주앉아 그렇게 영사기사 심상용씨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된 이야기. 까막눈 소년, 필름의 빛에 매료되다 1950년대, 춘천시내 1호 막국숫집 아들이었던 심상용씨는 학교를 가기 전 극장을 먼저 만났다. 말 그대로 그랬다. 집과 학교 사이, 그 길가에는 언제나 극장이 있었다. 극장 가까운 음식점이었던 그의 집에는 늘 극장 사람들이 막국수를 먹으러 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년에겐 쪼그려 숙제할 변변한 자리 하나 없었다. 6·25가 갓 끝났을 때의 얘기다. 소년에게 공부는 어렵고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극장이 있었고 늘 그를 귀여워해주는 ‘극장 아저씨들’이 있었다. 언제든 극장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소년은 그냥 통과였다. 심심하면 모르는 아줌마 옆에 아들인 양 서기도 했다. 극장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치 않던 소년의 ‘없는’ 의자 하나를, 아니 수백개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를 가는 대신 소년은 극장엘 갔다. 작은 아이의 오랜 시작. 소년의 영화에 대한 처음 기억은 ‘총싸움과 뽀뽀’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느 한 장면, 총싸움을 하다 남자가 죽어버리자 여자가 남자한테 ‘뽀뽀’를 해주던 한 장면은 아직껏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극장에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심상용씨는 거의 까막눈이다. 대강 읽기는 하지만 쓸 줄은 모른다. 자신만의 글자가 있어서 그가 ‘프린스’라고 써놓은 글자를 보고 다른 이들은 ‘슈즈’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다. 35년 동안 공부하고 또 했지만 불합격, 불합격. 아침부터 밤까지, 휴일도 없이, 명절날 남들 “떡에 술에 잘 먹을 때”도 영사기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60점에서 18점이 모자라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는, 그러나 100점짜리 베테랑 영사기사다. “대한민국 최고극장” 메가박스에서 그가 받는 월급 100만원의 두배를 그의 후배가 받고 있다고 그는 자랑스러워 한다. 영사기사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다. 중년의 영사기사에겐 더더욱. 최신장비를 갖춘 멀티플렉스들이 생겨나면서 일자리가 좀 늘긴 했지만, 30대 이하의 일손을 주로 원하고 있고, 게다가 기술발전으로 한명의 영사기사가 여러 관을 관리할 수 있게 되어 일자리가 크게 는 것도 아니다. 지방의 낡은 극장에 나이많은 영사기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심상용씨에게 극장 일을 하며 산 보람이 뭔가 물으니 “덕분에 글씨 공부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낡은 영사기 옆에는 오랫동안 본 책 한권이 늘 놓여 있다. 영화를 틀기 위해서는 볼 필요가 없는 영사기사 매뉴얼. “그래도 40년을 했는데 자격증 하나 없으면 그렇잖아. 어떻게든 따려고 하지. 애들한테도 난 한글만 알면 대학 가는 거라 그랬거든.” 그래서 곁에 두는 책 한권이다. 한달 봉급 300원, 밥은 늘 밀가루 풀죽 ‘가케모치.’ 자전거로 필름을 배달하는 <시네마천국>의 토토를 기억한다면 심상용씨의 극장 초년생 시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960년, 심상용씨는 이 극장 저 극장 영화필름을 배달하는 ‘가케모치’로 극장 일을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노가다’…. 사기를 당해 집에서 하던 막국수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어린 나이에 별별 일을 다 하던 때였다. ‘문화극장에서 가케모치를 구한다’는 친구 말을 듣고선 바로 시장통 극장으로 달려갔다. 필름 한권이 10분짜리일 때였다. 한달 봉급은 300원. “노가다 뛰면 하루 200원 주던 때”, 봉급을 타면 견습생 소년은 이발을 하고 신발을 사는 데 그 돈을 다 써버리곤 했다. 밥은 늘 밀가루 풀죽이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안고 쉴새없이 문화극장, 소양극장, 육림극장으로 페달을 밟던, 자전거가 없을 땐 필름을 들고도 뛰던 어느 날, 그는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가다 버스 밑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도랑께로 굴러가는 필름이 물 속에 빠지기 직전, 그는 젖을세라 필름을 품에 꼭 안고 극장까지 뛰었다. 몸이 다쳤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 영화는 1초도 끊기지 않았다고, 심상용씨는 아직도 자랑스레 그날 일을 이야기한다. 달리기 잘하던 ‘가케모치 소년’은 포스터도 붙이고 간판화가의 “빠레트도 닦고”, 극장이 좋아서, 또 먹고살 일이 필요해서 극장의 무슨 일이든 배우려 했다. 배우들 얼굴을 크게 그려붙이는 간판 일도 그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도 글씨가 있”는 탓에 그는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기계 일을 택했다. 영사기사. 글씨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는 열여섯 나이에 그렇게 영사기사가 됐다. <또순이>부터 <클럽 버터플라이>까지, 나의 <한국영화회고록> “도금봉 나오는 <또순이>”를 시작으로 그는 3년간 잡던 걸렛자루를 놓고 영사기를 맡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도대체 몇편의 영화를, 몇권의 필름을 영사기에 끼웠을까. “다 이어붙이면 한 지구 세 바퀴는 돌겠지, 아마”, 그는 이렇게 짐작한다. 문희, 신성일, 최무룡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알랭 들롱이 최고 스타이던 시절, “짱개영화로는 <스잔나>, 액션물로다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외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콰이강의 다리>”가 그 시절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틀 때인가는 관객과 함께 펑펑 울었다. 탄소막대에 불을 붙여 그 빛을 거울에 반사시켜 작동시켰던 60년대 ‘카본’ 영사기 시절,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기는 걸로 나오는” 전쟁영화 일색이던 시절, 그리고 관객도 대부분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던 시절, 그가 빛을 불어넣는 필름들엔 키스신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왔던 <자유부인>도 “다 입고 있다 쓱 벗고는 끝”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육림극장 1관의 영사실에는 새로 들인 최신식 ‘CP500 디지털’ 음향설비에서 <클럽 버터플라이>의 끊이지 않는 교성이 민망할 만큼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60년대 초는 한국영화에서 흑백시대가 가고 처음으로 “총천연색 영화”가 나온 때였다. “칠십미리 시네마스코프” 외화들도 꼬리물듯 달려왔다. <원탁의 기사> <왕중왕> <대장 부리바>. 영화가 펼쳐놓은 드넓은 세상을 보러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에 ‘영화구경’을 오던 때였다. 영사기사의 손놀림 또한 언제보다 더 신이 났다. 총천연색 영화 얘기에 흥을 내던 그가 80년대 와서 잠시 말을 멈춘다. 컬러TV가 나오면서부터, TV에 관객을 빼앗긴 시절인 것이다. 젊건 늙었건 사람들이 다 “테레비”만 보던 시절. 관객이 들지 않자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도 별로였다. “팔십오년인가 육년인가, 규제가 풀리면서 러브신이 많아졌어. 그러니까 도로 관객이 늘었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야.” 영화법이 바뀌어 제작자유화가 이뤄진 시기를 영사기 뒤의 산증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젖은 필름을 말려, 첫사랑을 영사하다 현재 춘천 육림극장에선, 80년대 들여온 한 시간짜리 필름용 일제 ‘마쓰다 제논 램프하우스’ 영사기를 한관에 두대씩 놓고 쓰고 있다. 순간전압 4500V의 이 일제 영사기는 영사기사를 한 시간에 한번씩 일어나게 만든다. 이야기에 푹 젖어들다가도 한 시간이 되면 심상용씨는 어김없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필름을 갈아끼웠다. 모터가 도와주긴 하지만 다 돌아간 필름을 되감는 일도 그의 몫. 그래도 좋아진 기계 덕에 식은 땀 날 사고는 별로 없다. 하지만 구식 영사기 시절엔 영사 사고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한번은 정전이 된 거야. 카본으로 할 때니 영사기는 돌릴 수 있지. 근데 소리는 못 내잖아. 그게 무슨 외국영화였거든. 갑자기 소리가 안 나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지. 그때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우리가 뭐 영어를 아냐고. 그냥 자막만 보면 되니까 계속 틀어달라고 외치더라구.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히 한 시간을 그렇게 틀었어. 사람들도 아무도 안 나가고 영화를 다 봤어.” 지금 같으면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건만, 그 시절 관객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게 더 궁금해서 기꺼이 무성영화를 청했던 것이다. 10분짜리, 20분짜리 필름이 한 영화에도 여러 개 들었던 시절, 필름 순서가 뒤바뀌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심상용씨는 재빨리 필름을 바꿔끼는 ‘즉석편집’을 하곤 했다. 관객은 실수가 있었던 건 추호도 모르고 ‘아, 아까 뭐 생각하는 장면이었나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각종 사고 대처에 능숙했던 그에게도 한번은 가슴 서늘한 순간이 있었으니, 때는 1968년, 심상용씨가 스물넷 청년이던 시절이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남진이 나온다는 <저 언덕을 넘어서> 예고편이 도착했다. 필름은 모두 젖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상 위에 필름을 쭉 펼쳐놓고 그것을 말렸다. 겨우 말린 필름을 손때 묻은 영사기에 걸었을 때, 객석 위를 지난 빛줄기가 새겨내는 그림 속 여배우는 다름 아닌 그가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던 여인.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며 “골려주며” 좋아하던 또래 짝사랑이 어느새 여배우가 되어 필름 속에 들어 있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던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스크린에 영사하며, “성공하니까 고향을 찾지 않는” 옛사랑이 희미한 빛으로 살아나는 걸 바라보며 청년 영사기사는 가슴이 무너졌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 1971년, 그녀가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안 있어, 우연인지 아닌지 그도 같은해 결혼을 한다. 신부는 친구의 사촌여동생. 4녀1남을 얻은 그는 어느새 큰딸에게서 태어날 첫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필름, 나의 극장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서 마을 신부는 종을 쳐 키스신을 잘라내고, 토토는 훗날 신사가 되어 키스신만 모인 그만의 영화를 본다. 심상용씨에게도 그런 ‘필름쪼가리’들이 있다. 키스신은 아닐지라도, 영사실에서 일하면 흠집이 나거나 해서 이렇게저렇게 잘려나가는 필름들이 많이 있었다. 젊었을 적, 그 필름쪼가리들을 꼼꼼히 모으던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손수 환등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 그는 깡통을 구해다가 전구를 넣고 필름쪼가리들을 걸어 환등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광목천을 걸고 친구들을 불러 슬라이드를 틀어줬다. 묘한 기쁨이 몰려왔다. 그만의 작은 가내 극장이었다. 젊을 때 이미 맛본 이 ‘내 극장’의 달콤한 꿈은 1992년, 그에게 현실이 되었다. 시내 밖, 양구군에 있는 150석짜리 작은 극장을 주인이 내놓았을 때, 심상용씨는 마을금고에서 2천만원을 빌려 극장을 빌렸다. 다달이 100만원씩 삯을 내야 했다. 당연히 직원을 쓸 돈은 없었기에, 그는 춘천 시내에 아내와 세딸, 아들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큰딸과 함께 극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영사기는 다른 가족의 손에 맡겨졌다. 그때 익힌 실력으로, 그의 자녀들은 다 영사기를 돌릴 줄 안다. 심 기사에서 심 사장이 되었던 날들. 필름을 가져다주는 버스기사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얼마 만인지 다시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그는 즐거운 극장장이었다. 내키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공짜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양구는 군부대가 있는 마을이었다. 손님은 주로 주말, 군인들과 그들을 면회하러 온 애인들. 그게 평일날 손님이 없는 이유였고, 2년 만에 그는 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 속에 그가 다시 춘천시내로 돌아온 날, 그날 이후 양구의 그 작은 극장도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양구를 떠난 그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곳이 육림극장이다. 이 오래된 극장에는 관이 두개 있어서 1관, 2관, 두개의 스크린에서 두편씩 영화를 상영한다. 동시에 지어졌지만, 지금 이곳 두관의 영사기사 나이는 36년이나 차이가 난다. 1관에는 쉰일곱의 심상용씨가 있고, 2관에선 최석순이라는 이름의 스물한살짜리 젊은 청년이 영사기를 돌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최석순씨는 메가박스에도, 키노에도, 씨네큐브에도 가 있다는 아저씨의 많은 제자 중 한명이다. 이들은 꼭 부자지간 같다. 젊은 기사가 방금 영사기에 걸어놓은 필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버티칼 리미트>. 2관 영사실에 있는 비디오로 ‘늙은 기사’가 자신이 나온 3년 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녹화테이프를 틀어주고 있는 동안, 스물한살의 ‘최 기사’는 폴더형 PCS를 열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이 많은 극장, 1관과 2관의 너무나 다른 풍경. 아무도 꾸미지 않았지만, 세월과 사람살이의 얼개는 이처럼 춘천의 한 극장에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저만할 때가 있었겠지. 이 청년도 그처럼 나이들어갈 테고. 상념에 잠기는 사이 의 리포터는 심상용씨의 집을 찾아, 그가 오랫동안 수집해 놓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늙은 기사의 작은 집,작은 꿈 좁은 영사실에서 보낸 40년 인생. 그의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모아놓은 자료를 쥐가 갉아먹는 걸 보면서, 심상용씨의 요즘 꿈은 바로 그 자료들을 전시해놓을 수 있는 ‘영화박물관’을 차리는 것이다. 옛날 멍석 깔고 영화 보던 시절 풍경부터 극장 풍경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볼 수 있는, 또 온갖 팸플릿, 포스터, 문화영화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강원대학교 옆에 있는 그의 ‘산 1번지’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마치 그 박물관 모습을 미리 연출하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16mm 영사기를 틀어 반공영화 <아! 잊으랴>를 보여주었다. 스크린은 방문에 압정으로 꽂은 <어둠 속의 댄서> 포스터 ‘뒷면’이었다. 흰 ‘빠닥종이’ 위에서 자그마한 탱크와 그보다 더 자그마한 군인들이 포화를 쏘아대며 오물거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직접 스크린을 달고, 방의 형광등을 끄고, 그리고 윙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에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그의 방은, 기꺼이 시네마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대문 옆 담벼락에는 <정무문>부터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 <탑건>까지 필름통들이 쌓여 있고, 돼지우리였다는 창고에는 수천장의 포스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늙은 영사기사의 작은 집. “다 꺼내서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저게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린 거거든.” 보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함께 안타까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고집인 양 심상용씨는 한참 동안이나 영사기를 끄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와, <아! 잊으랴>를 다 보지 못하고 기자 일행이 서울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제야 그는 아쉬운 듯 가만히 영사기를 끄고는, 영사기 옆에서 찍은 스무살 적 빛바랜 사진 하나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먼곳에서 날아온 노란 흙알갱이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에서처럼 풍경에다 비를 긋고 있었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맞춘다

1968년생·추계예술대 작곡가 졸업,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졸업·드라마 SBS <결혼>, KBS <거짓말> <슬픈 유혹> <바보 같은 사랑> <푸른 안개>, MBC <나> <레디 고> <여자를 말한다> <해바라기> <사랑> 쏟아지는 빗속, 회사 후배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는 저항하다가 손을 꼭 쥔다. “내 몸 속에 있는 전구가 불을 켠 느낌”을 갖게 된 순간이란다. 논란이 될 만한 이 장면은 좌우를 오가는 카메라와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지고 느려지는 음악으로 인해 홀연한 아름다움을 띤다. 비판을 받아야야 할 장면에서 드라마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하는 음악, 그것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클럽 버터플라이>의 영화음악을 맡은 최완희씨는 에로틱한 영화에는 색소폰 등이 들어가는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적당하다는 통념 대신 오케스트라를 선택했다. 에로틱한 장면에 장중하게 깔리는 ‘음악이 시선을 빼앗도록’ 했다. 지금 오른손이 무엇을 하고 왼손이 무엇을 한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행위를 하는구나”라고 음악에 파도를 맡기다보면 아차싶게 흥분돼 있는, 그런 음악을 바랐던 것이었다. 때로는 호흡만 남겨두고, 음악은 개입을 자제하기도 했다. 혁과 경 부부가 엉킨 감정을 풀러 놀러간 곳의 장면이 그 한 예. 호흡만 있는 신을 겪고 나면 그들의 부부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최완희씨는 <클럽 버터플라이>가 영화음악 데뷔작이다. 8년 동안 <결혼> <레디 고> <해바라기>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 음악을 해오면서 꼼꼼하게 음악을 다듬을 수 있는 영화음악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맡게 된 탓일까, 손해를 감수하고 예산을 초과하는 일을 벌였다. 러시아로 날아가서 오케스트라에 영화음악 연주를 맡기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글로발리스(GLOBALIS)는 80명 규모로 <시티 오브 조이>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 지금까지 450여편의 영화음악을 연주한 영화음악 전문 오케스트라다. 최완희씨의 러시아 시절 은사이기도 한 볼쇼이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크리미아가 지휘를 맡았다. <클럽 버터플라이>에는 전설적인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동생이자 유명 아코디언 연주자인 헥터 피아졸라의 연주도 포함돼 있다. 이 역시 그의 ‘무모함’이 작동한 결과다. 송년음악회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이러이러한 영화의 음악을 녹음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면 녹음실로 오시라고 말했는데, 이 당돌한 초대에 응한 피아졸라가 연주까지 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 대가는 하룻밤을 넘기는 보드카 술시중. 궁하면 통한다. 유행을 겨냥한 외국음악 스코어는 한곡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기특한 O.S.T는 ‘궁함’의 결과다. 외국곡을 삽입하면 지불해야 할 로열티는 영화음악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그래서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황보령의 신곡 <우주>로 채웠을 만큼 삽입곡들은 모두 창작곡이다. 최완희씨는 영화음악은 꼼꼼하게, 빈틈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고 한다. 촬영이 모두 끝난 뒤 의뢰받은 작업. 러시아 체류기간 한달을 빼면 며칠 남지 않은 기간은 분명 동분서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짧은 동안에도, 의욕이 앞섰던 초짜 영화음악가는 또 한번의 무모함을 발휘했다. 연주 녹음을 위해 러시아로 떠나기 전, 신시사이저로 음악을 입힌 비디오 편집본을 만들어 영화감독과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음악을 건네주고 그냥 입히기만 하는 관행 대신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한번 더 생각하자고 선택한 방법이다. 러시아에서는 필름을 보면서 연주를 했다. 지휘자는 영상을 보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연주자는 지휘자와 필름을 함께 보면서 음악을 연주했으니 베테랑들이 아니라면 NG없이 소화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음악이 되었다. 유죄든 무죄든 그게 영화음악 아닌가. 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요 작품사 - 동화보다 아름다운, 캔디보다 달콤한

70년대,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늘 TV 앞에 모였다. 마법의 성 위로, 펑 하고 터지는 불꽃놀이.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펼쳐지면,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등 친숙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유년 시절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이미지들은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미키 마우스라든지 도날드 덕,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의 얼굴이나 하늘로 훌쩍 날아가는 피터팬의 몸짓은 필요할 때마다 바로 연상되는 원초적인 기억이다. 1923년 월트 디즈니(1901∼66)가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러더스 촬영소’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제작소를 차린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그림동화나 안데르센 동화 이상으로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세기의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20세기의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감동시키고, 또 돈지갑을 열게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고, 디즈니는 어떤 전략으로 성공을 거듭해왔을까. 월트 디즈니 탄생 100주년인 올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은 모두의 과거에 간직돼 있는 ‘디즈니’라는 이름의 그림책을 다시 한번 꺼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환타지아> <밤비>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와 <라이온 킹>,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광을 만들어낸 주요작의 비법을 돌이켜본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 증기선 윌리 ::: 환타지아 ::: 덤보 ::: 밤비 :::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신데렐라 ::: 101마리 강아지 ::: 인어공주 ::: 라이온 킹 ::: 미녀와 야수 ::: 포카혼타스 ::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동화보다 동화적인, 혹은 20세기의 '바람직한'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시대를 연 작품으로 기록된다. 누구나 알고 있을 그림형제의 <백설공주>. 디즈니는 가장 대중적인 작품을 원작으로 활용하여, '디즈니' 하면 바로 연상되는 '권선징악'이라든가 '행복한 결말과 화해' 등의 공식을 일찌감치 확립했다. 그림형제가 썼던 <백설공주>도 원래는 잔혹한 살해와 배신이 담긴 이야기였지만, 당시 지배층의 요구로 순화시킨 작품이었다. 디즈니는 그것을 더욱 온순하게 길들였다. 희로애락의 드라마와 그것을 감싸는 유머, 권선징악적 해피엔드로 다듬어진 고전동화는 월트 디즈니가 발견한 최상의 애니메이션 스토리였다. 디즈니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사랑하는 동화 속에서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캐릭터를 발견하고 강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백설공주>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집단으로만 존재하던 각각의 난쟁이들을 개성있고 독특한 캐릭터로 가꾸어냈고, 이야기 진행과정에 맞추어 흥을 돋우는 음악을 병행함으로써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동화의 각색에서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인어공주> 등등 디즈니의 동화 전략은 색깔을 달리해 끊임없이 반복된다. 디즈니의 첫 장편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돋보인 것은 기술상의 발전도 한몫했다. 동화를 그린 셀지를 앞에 놓고 그 뒤쪽에 배경을 그린 여러 장의 투명유리를 거리를 두고 겹쳐놓고는 맨 앞의 셀지에 초점을 맞춰 촬영을 하는 ‘멀티플레인’이라는 촬영기법을 도입하여 좀더 사실성 있는 영상을 선보인 것이다. 멀티플레인은 일일이 원근을 고려해 그림을 그리던 기존 방식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만들어냈다. 14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공황기였던 30년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중이 현실을 잊고 안락한 동화의 세계에 빠져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증기선 윌리 1928 미키 마우스 시리즈 제1탄.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으로 버스터 키튼이 나오는 무성영화 <증기선 빌 주니어>를 바탕으로 했다. 토키영화라고는 하지만, <증기선 윌리>에서 미키 마우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휘파람을 불고 동물들을 악기삼아 음악을 연주한다. 소의 이빨이 실로폰이 되고 암퇘지의 젖꼭지가 아코디언의 버튼이 되는 디즈니 특유의 유머러스한 설정이 이때 이미 등장한다.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했다고, 월트 디즈니는 말하곤 했다. :: 환타지아 1940 이미지로 보는 음악의 세계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팀 버튼이 디즈니를 박차고 나온 것은, 늘 똑같은 캐릭터에 이야기만 그려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변주도 예술이긴 하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만 변주하는 건 강요이고, 세뇌다. 팀 버튼처럼 유별나게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애니메이터에게 디즈니는, 사상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디즈니도 때로는, 휘황한 실험정신을 발한다. 작년 아이맥스판 <판타지아 2000>으로도 만들어졌던 <판타지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판타지아>는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하겠다는 야심적인 시도로, 각각의 애니메이터들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빚어낸 걸작이었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탓에 <판타지아>는 당대의 관객들에게는 외면받는다.<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디즈니의 '이야기'를 확립했다면, <판타지아>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기술'을 한단계 고양시킨 작품이다. 처음으로 그림에 목소리를 입힌 토키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1928)를 만들었던 디즈니는 <판타지아>에서 소리와 그림을 하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실험을 했다. <판타지아>는 바흐, 베토벤 등의 클래식음악 8곡을 고르고, 각각 음악에 맞는 이야기 혹은 이미지를 고안해낸 후 음악의 흐름과 느낌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애니메이션이다. <판타지아>는 음악의 청각적 요소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요소를 결합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을 한껏 과시했다. <판타지아>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때로, 시대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는 범작의 체증을 뚫어주기도 하고. :: 덤보 1941 커다란 귀로 하늘을 나는 아기코끼리 덤보의 이야기 <덤보>는 빈약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단순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러나 다소 지적이었던 <환타지아>의 후속작으로 관객의 만족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덤보>는 <피노키오>와 <환타지아>의 부진을 씻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디즈니는 곧이어 한결 섬세한 작품 <밤비>를 내놓았다. :: 밤비 1942 사람과 함께 하는 동물, 인간 같은 동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뛰어난 장점 하나는 동물 캐릭터다. 미키 마우스에서 출발한 의인화된 동물은 물론이고, <정글북>이나 에 등장하는 동물은 움직임도, 감정표현도 극히 자연스럽다. 유난히 매력적인 동물캐릭터를 잘 만들어내는 디즈니의 첫 걸음은 <밤비>라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쿠엔틴 타란티노도 걸작이라고 칭할까. <밤비>는 동물캐릭터에 대한 디즈니의 기초훈련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밤비>는 아기사슴 밤비가 자라 숲의 왕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큰 귀로 인한 콤플렉스를 가진 덤보가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던 <덤보>(1941)와 비슷하게 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인 팰릭스 셀튼의 소설 <밤비-숲 속의 삶>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디즈니는 <꼭두각시 이야기>를 <피노키오>(1940)로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전반적인 내용의 각색 없이, 예쁜 원작의 이야기와 느낌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동물들에 대한 의인화는 최소화하고, 자연의 생태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제작진은 새끼사슴 두 마리를 스튜디오에 가져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LA의 동물원으로 자주 ‘견학’을 다니기도 했다. 숲의 풍경과 동물들의 동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실제 자연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밤비>에서 시작된 철저하게 사실적인 동물캐릭터는 이후 50년도 더 지나 아프리카의 대초원을 그린 <라이온 킹>에서 절정에 달한다. <라이온 킹>은 <밤비>를 만들었던 그 세심함과 철저한 관찰작업을 이어받았다. 게다가 동물 그 자체의 묘사에다가, 적절하게 의인화된 모습을 통해 더욱 감동을 자아낸다. :: 잠자는 숲속의 미녀 1959 디즈니 최초의 70mm 장편애니메이션. 테크니라마사의 70mm 영상을 사용했다. TV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큰 스크린을 마련한 것.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달러가 소요됐으나 싸늘한 평가와 함께 박스오피스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나타냈다. :: 신데렐라 1950 역시 디즈니에게는 동화가 어울려 2차대전 동안 디즈니 스튜디오는 장편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단편을 묶은 패키지만을 극장에 내보냈다. 그러던 디즈니가 장편작업에 복귀한 작품이 <신데렐라>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홍보영화를 통해 꾸준히 수익금을 올려온 것이 <신데렐라> 제작에 밑거름이 됐다. 8년 만에 만드는 장편 <신데렐라>에 디즈니는 사활을 걸었다. <신데렐라>는 2차 대전 이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모든 경험이 하나로 농축된, 이야기와 형식 그리고 기술적 측면에서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1697년에 쓰인 찰스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를 원작으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야기와 음악적 특징에서는 <백설공주>를, 회화적으로는 <밤비>의 사실적인 묘사를 활용하여 <신데렐라>를 완성했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공식들만을 모방하여 만든 이 작품은 극장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나 스토리전개를 보이지 못한 탓에 비평가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성공했고, 디즈니 스튜디오는 중단되었던 장편작업을 계속 전개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한다. 디즈니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공식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양산해낸다. :: 101 달마시안 1961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비용절감 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의 상처를 딛고 야심차게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전작이 실패한 여파로 월트 디즈니는 많은 스탭을 해고했고, 자신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디즈니랜드 같은 주변의 사업에 더욱 몰입해 있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은 처음으로 공동작업 없이 한명의 스토리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상황은 안 좋았지만 을 살린 것은, ‘제록스’라는 신기술 덕이었다. 원화를 트레이싱지에 일일이 손으로 옮기던 작업을 복사로 대체하여 작업능률을 높이고 오리지널 터치의 생생함도 보존하는 ‘제록스’ 기법은 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애니메이터의 감정이 살아 있는 다양한 표정의 터치가 그대로 트레이싱지에 옮겨졌고, 101마리나 되는 점박이 강아지들의 무수하고 다양한 움직임도 거뜬하게 스크린 위에 살아났다. 제작진의 규모가 축소된 상황에서 제록스 기술이 없었으면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작품이 바로 이었다. 생생한 필선으로 살아난 사랑스럽고 씩씩한 이 점박이 강아지들은 1996년 존 휴즈가 제작을 맡아 동명의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된다. :: 인어공주 1989 디즈니 신화의 재림 1966년 폐암으로 월트 디즈니가 죽은 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몰락의 기미를 보였다. <멋쟁이 캣>(1970), <로빈 훗>(1973) 등의 잇따른 흥행저조는 80년대 초까지 이어졌고, 더이상 새로운 시도도 없었다. 1984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있었던 마이클 아이스너와 제프리 카첸버그는 각각 디즈니의 회장과 제작담당으로 새로운 팀을 짜, 디즈니의 변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리한 부진 끝에 디즈니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다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생각했다. 그들은 <백설공주>의 전략을 택했다. 바로 고전동화의 풍부한 감동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해내는 것. 1989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후 30년 만에 고전을 각색한 <인어공주>가 대성공을 거두고 애니메이션의 황금시대를 연 것은, 분명한 ‘마케팅’의 결과였다. <인어공주>의 원작은 1837년에 안데르센이 쓴 <아이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 개정판에 수록되었던 동명의 동화다. 인간 세상에 매료된 아름다운 인어 에리얼의 이야기를 존 무스커와 론 클레민츠 감독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말괄량이 인어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는 15만장 이상이라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셀을 사용하고 특수효과를 충분히 써서 부드러우면서도 파격적인 새로운 감각의 영상을 완성했다. 바다 한복판의 폭풍이나 요동치는 돛, 물고기떼, 수면에 반사되는 풍경, 물거품 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인어공주>의 약 팔할의 장면에는 특수효과가 사용됐다. 탄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실제보다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을 울리는 음악, 재치있는 유머까지, <인어공주>는 팔릴만한 요소들로 가득한 새롭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풍부한 뮤지컬 장면은 어린이와 청소년만이 아니라 20대 연인들까지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조력했다. 풍부한 조연캐릭터들이 자아내는 현대적인 유머는 곳곳에서 성인 관객의 웃음을 끌어냈다. :: 라이온 킹 1994 디즈니의 절정, 그러나 고답적인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차용하던 디즈니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지어내 만든 작품이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과감하게 구미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직접 지어낸 것이다. <라이온 킹>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데츠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이야기는 물론 캐릭터까지 훔쳐갔다고 비난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숙부 무파사에 의해 사자의 왕이던 아버지를 잃은 어린 사자 심바의 이야기 <라이온 킹>은 <밤비> 이후 다시 동물캐릭터가 주도하는 작품이다. <밤비> 제작 과정에서 동물원을 찾았듯이 <라이온 킹> 제작진은 아프리카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스케치했고, 스튜디오에 아예 사자를 데려다놓고 동작과 표정을 연구했다. 들소떼가 화면을 가득 메운 채 달리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위해서는 따로 컴퓨터그래픽팀이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라이온 킹>은 엘튼 존이 주제가를 부르고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아 음악으로 감동을 강요하는 기존의 전략을 고수한다. 동물의 세계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자는 밝은 색으로 나쁜 사자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다든지 한 것으로 인해 <라이온 킹>은 <알라딘>에 이어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은 이즈음 계속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받는 공격이었다. 1995년 디즈니는 픽사와 공동으로 인형이 나오는 3D 디지털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든다. 1996년에는 카첸버그가 드림웍스를 차리며 떠난 후 첫 작품 <노틀담의 꼽추>를 개봉한다. <노틀담의 꼽추>는 학부모들의 원망을 들을 정도로 성인용 작품의 색채를 더욱 강하게 띤 작품이었다. 이후 디즈니는 그리스신화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룬 <헤라클레스>(1997), 중국 민담에서 스토리를 따온 여성전사의 이야기 <뮬란>(1998), 열대밀림을 배경으로 한 <타잔>(1999), 그리고 <쿠스코? 쿠스코!>(2000)까지 다양한 신작들을 발표해왔다. 그것은 곧 끊임없이 좀더 신선한 소재, 감동적인 드라마를 찾아 다니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행보였다. 그러나 ‘디즈니적인 것’이 반복될수록, 무엇을 다루든 디즈니 것은 똑같다는 인상이 생겨나고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것, 비슷하면서도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 기발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돈을 버는 것. 어떤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동일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미녀와 야수 1991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야수의 성에 들어가 역시 사랑으로 야수에게서 왕자의 모습을 되찾아내는 여인 벨의 이야기. <비 아워 게스트> 노래가 흐르는 무도회 장면에서 화면은 매우 드라마틱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낸 듯한 영상을 그려낸다. 판타지를 뿜어내는 역동적인 영상이 인상적인 작품 <미녀와 야수>는 미국 내에서 6개월 이상 극장에 걸렸다. :: 포카혼타스 1994 디즈니가 채택한 첫 실재 인물의 이야기. 인디언 처녀와 그녀의 마을에 들어온 영국인 개척자의 사랑을 그렸다. 제작진은 실재 이야기에서 가능한 한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부각시키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비난을 사기도 했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제작에 관여한 마지막 디즈니 작품. 1994년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떠나 드림웍스사를 세웠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참고문헌 : 황선길저 <애니메이션 영화사>(범우사 펴냄), 데이비드 코에닉저/ 서민수역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현대미디어 펴냄), 데이브 스미스저 (Hyperion), 밥 토마스저 "Disney’s Art of Animation-From Mickey Mouse to Beauty and the Beast"(Hyperion)

열정이냐, 권태냐

아는 친구의 콘서트를 갔다왔다. 마지막날 마지막 공연이어서 그런지 콘서트장은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나중에 듣기론 첫날부터 매진 행렬이었다고 한다). 공연내용도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무대 뒤로 찾아온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거기엔 내가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분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연자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받은 감동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온전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들어보지 못할 것 같은 찬사의 파노라마였고 일종의 헌정시였으며 감동의 물결이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고 내가 조금만 여린 놈이었으면 그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엉엉 소리내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표현, 너무 아름다워요…. 엉엉.” 그들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때 엉거주춤 그 틈에 끼어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나는 그런 말을 못할까? 왜 나는 그런 표현을 못할까? 나도 분명히 감동받았는데…. TV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어떤 방송현장을 찾아갔는데 연출자가 오케이 사인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열연을 아끼지 않은 배우에게 뛰어가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그 배우를 거의 안다시피 했다는 애길 들었다. 그 얘길 들으면서 난 정말 한번이라도 내가 배우나 스탭한테 느낀 감동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한번도 없었다. 분명 감동받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을 하다보면 몇 가지 떠오르는 화두 같은 게 있는데 그중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단어가 바로 열정적 또는 정열적이란 말이다. 누군가에게 열정적이다 혹은 정열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것은 대개 그 누군가에게서 보여진 또는 표현된 어떤 것들을 근거로 말을 하게 된다.예를 들어, 그 사람, 말하는 게 참으로 열정적이야. 또는 거참, 일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열정적이더군. 하다못해 그 친구, 밤새 정열적으로 포커를 치더니만…. 뭐 이렇게 누군가에게 시지각적으로 인상지워진, 보여진 것들이거나 표현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열정이나 정열이 한개도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꿔 말해 나는 너무 표현 못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왜 안 되지? 표현하는 순간 그 진정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작 이렇게 유치한 발상이 내가 표현에 미숙한 이유의 전부일까? 그냥 그도 저도 아닌 습관일 뿐인 걸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인정머리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상당히 건조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면서 다른 이를 섭섭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왜 가장 고조되고 충만되는 그 순간에 싸늘하게 냉각되는 걸까? 오래 전에 고 김현 선생이 죽파 김난초 선생을 두고 “김죽파는 계면조에 미친 젊은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의 권태를 사랑하는 분이다”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 감동받은 적이 있다. 나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뿐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도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뿜어내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과 과연 궁극은 무엇일까 하고 회의하고 반문하는 노예술가의 처연함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불안하고 게으른 화두를 짐처럼 들고 서 있다. “그 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김지운 |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