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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화려하게, 혹은 음산하게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하이브리드 축제’ 표방하는 제3회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11월29일부터 연세대에서영화와 음악과 디자인, 그리고 예술의 모호한 점이지대, 개념의 틀을 성큼 넘어선 영상의 파티를 즐겨볼까. “다양한 문화적 장르와 요소를 함께 아우르는 하이브리드(hybrid: 혼성) 축제”를 표방하는 ‘레스페스트디지털영화제 2002’(이하 레스페스트)가 11월29일부터 12월5일까지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다.올해로 3회를 맞이한 서울의 레스페스트는 세계 각국 디지털 작가들의 재기발랄한 영상실험을 소개하는 영화제. 1995년 샌프란시스코의 아트갤러리에서 조촐하게 출발한 행사로 98년부터 미국을 비롯해 유럽, 일본 등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는 영화제로 확대됐고, 2000년부터 한국에서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올해의 개막작은 비욕 등 유명 뮤지션들의 실험적인 뮤직비디오로 잘 알려진 크리스 커닝햄의 뮤직비디오 특별전. “순수하게 사운드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내 상상력을 활성화한다”는 커닝햄의 뮤직비디오는 음울한 판타지와 블랙 유머를 품은 영상과 음악의 결합이다. 폐허 같은 아파트 앞 공터, 자유자재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모니터 안의 ‘악마 같은’ 존재와 괴물 같은 얼굴의 아이들이 난장을 벌이는 에이펙스 트윈의 는 그의 뮤직비디오 출세작. 좁고 어두운 공간, 일렁이는 머리칼부터 신발끈까지 물 속을 유영하는 듯한 인물의 이미지와 음산하면서도 몽환적인 포티스헤드의 트립합이 근사하게 어울린 , 청회색조의 황량한 들판에서 까만머리, 까만옷과 숄 차림으로 마녀의 의식처럼 주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돈나의 <프로즌>, 실제 로봇과 CG, 비욕의 연기를 합성한 로봇들의 인간적인 사랑을 담아낸 <올 이즈 풀 오브 러브> (사진) 등 클라이브 바커와 스탠리 큐브릭을 비롯해 10여년간 영화현장을 거쳐온 커닝햄 특유의 기이한 몽상세계를 엿볼 수 있다. 크게 글로벌 섹션과 국내 섹션, 특별초청 섹션으로 나뉘는 상영작은 모두 150편 이상. 글로벌 섹션은 소주제를 단 7개의 단편영화 섹션과 2개의 뮤직비디오 섹션으로 구성된다. 투명막에 쌓인 채 옆으로 움직이는 게인간들이 서로의 막을 깨뜨리며 싸우는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한 전쟁에 대한 우화 <크랩워>, <웨이킹 라이프>처럼 로토스코핑 기법을 이용해 마당의 자연풍경과 소리를 수채화풍의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야드> 등 12편.교통체증에 묶인 채 전화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남자의 이야기인 <어느 겨울날> 등 9편이 각각 ‘영화 같은 인생’과 ‘운수 없는 날’이란 주제 아래 일상의 틈새에서 다양한 풍경을 끌어내 보인다. ‘디자인 세계’는 실사 영상을 군데군데 들어내고 이질적인 요소를 콜라주한 기법으로 현대 직장인들의 소외된 심리를 드러낸 <프리스타일 디스코> 등 시각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에로틱 무비’는 포르노그라피처럼 찍었지만 여성의 육체를 에나멜로 지워버림으로써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는 것에 반격을 가하는 <지워진 육체>(사진) 등 성적 소재를 다루되 전형성을 벗어난 영화들을 모았다. ‘감독 클럽’에서는 REM 등 뮤직비디오와 <존 말코비치 되기>로 주목받은 감독 스파이크 존즈, 힙합 그룹 ‘파사이드’의 전 멤버 팻립이 의기투합해 래퍼의 삶에 대한 환상과 현실을 들추는 가짜 다큐멘터리 <왓츠 업, 팻츠립> 등 2편이 소개된다. 그 밖에 맨해튼의 바에서 10년 이상 찍어온 고객 사진들을 재구성한 뉴욕의 초상화 <터미널 바>와 그래피티를 지우는 덧칠 작업이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낳았다는 익살스런 풍자를 들려주는 <反그래피티 캠페인> 등 ‘미니 다큐멘터리’, 다양한 풍경과 기법을 동원한 길 위의 영화들을 모은 ‘로드무비’도 마련돼 있다. 왕가위의 화사한 색채가 돋보이는 DJ 섀도의 <식스 데이즈>, 흑백 일러스트 느낌이 나는 더 하이브즈의 <메인 오펜더> 등 이미지 실험과 음악이 어우러진 ‘시네마 일렉트로니카’와 ‘락 뮤직 비디오’의 상영작들도 놓치기 아까운 부문. 극/실험 단편 2개 부문과 단편애니메이션, 모션그래픽/뮤직비디오로 나뉘는 국내 섹션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의식을 현란한 색감으로 드러낸 <앨리스>, 크라프트 베르크의 전자 리듬에 맞춰 새로운 소통을 시도하는 세 인물을 만화적인 실사영상으로 담은 <데르 텔레폰 안루프: 크라프트 베르크> 등 국내 디지털 화제작을 망라하고 있다. 거리 부랑자와 주민 등을 대상으로 연기 워크숍을 꾸려온 텐더로인 액션그룹의 지원과 함께, 택시 기사들의 일상을 담은 <시그널7> 등 비전문배우와 직업배우가 조화를 이룬 사실주의적인 디지털장편영화를 제작해온 롭 닐슨의 회고전, ‘프랑스 단편 모음: 클레르몽 페랑 초청작’, 세계 TV광고 우수작을 모은 ‘Shots 2002 베스트 컬렉션’, 켄 이시이의 뮤직비디오를 포함해 레스페스트 일본의 공모작을 묶은 ‘도쿄 레스 믹스’ 등 초청 섹션의 프로그램도 푸짐하다. 폐막작은 “입을 사용해 일반적으로 기계에 의해 생성되는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비트박스 음악의 유래와 스타들에 대한 기록을 담은 다큐멘터리 <브레스 콘트롤>. 더그 E. 프레시, 팻 보이즈 등 어떤 악기 못지않게 화려한 비트와 소리를 지어내는 뮤지션들의 생생한 실연까지, 자기 표현에 경계를 두지 않는 상상력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황혜림 blauex@hani.co.kr▶ 레스페스트 영화제 상영시간표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돌아온 배우 최지우

“호호, <겨울 연가> 같아요. 그때 정말 추웠거든요.” 초겨울 쌀쌀한 날씨, 낙엽이 수북이 쌓인 공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최지우는 소녀 같은 목소리로 호호거렸다. 3년 만에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스크린에 돌아올 참이지만, 무심결에 <겨울 연가> 얘기를 꺼내는 그녀에게선 아직 ‘텔레비전’ 냄새가 물씬 났다. <신귀공자>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그동안 1년에 한편 정도씩 꾸준히 드라마를 하며 최지우는 ‘예쁜 탤런트’로 착실히 입지를 다져왔다. 그때, “드라마 할 때는 영화 시나리오 볼 시간도 없었다”. 최지우를 다시 스크린으로 데려온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그런데 최지우를 그냥 ‘예쁜 탤런트’로 가만히 놔두지 않을 듯하다. 지금까지의 최지우가 곱게곱게 단장된 모습이었다면, <피아노 치는 대통령>에서 그녀는 확실히 보기와 다르게 터프해진다. 대통령의 말 안 듣는 딸 영희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 은수가 그녀의 역. 대통령을 일개 학부모로 대하며 과감하게 교사직을 ‘수행’하는 그녀는 한편 엽기적인 선생님이자, 한편으로는 딸 교육에 관한 상담을 하며 대통령도 어느새 눈물을 흘리게 하는 따뜻한 여자다. 과연, 학부모와 교사로 시작된 만남은 그 이상으로 진전하고, 영화는 코미디와 멜로를 뒤섞게 된다. “완전히 캐릭터 변신이죠. 처음 이걸 하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최지우가 저런 걸 할 수 있을까, 했어요. 그런데 걱정과 달리 선생님이 잘 이끌어줘서 재밌게 했어요.” 선생님이라고 최지우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선생님’과 함께 찍었다. 바로 안성기 ‘선생님’. 영화 내용과는 반대로 촬영장에서 안성기는 최지우가 보고 배우고 의지하는 ‘선생님’이었다. 안성기와는 이미 <박봉곤 가출사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지만, 전작에서는 거의 같이 찍는 장면이 없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나란히 남녀 주연이라 새로운 기분이었다고. <피아노 치는 대통령>을 하게 된 것도, 먼저 캐스팅되어 있던 안성기가 최지우에게 같이 해보자고 하여 이루어졌다고, 최지우는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저는요, 사실 유부녀 언니들하고 친해요. 유호정, 신애라, 오연수… 언니들하고 계모임하면서 별 고민도 다 들어주고 그래요. 또래들보다 더 편한 거 있죠.” 인터뷰 도중 최지우가 가장 신이 나서 말한 건 ‘언니들’ 이야기였다. 이번 ‘캐릭터 변신건’과 관련해서, 미리 포석을 좀 까는 걸까. 자신은 원래 소탈하고 편한 사람이라고, 사실은 이게 참모습이라고 말이다. 마침 인터뷰 시간이 식사시간이라 김밥이며 떡볶이를 사다가 먹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으려니,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최지우가 브라운관에서 보이는 것만큼 새초롬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었다. 잘 웃고, 잘 먹고, 이야기도 조잘조잘 잘하고. 여고생들이 서로 나누는 친화력 같은 것을 최지우는 성격적으로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선 의외로 ‘푼수끼’ 같은 것도 느껴졌다. “패션쇼요 앙드레 김 선생님 것만 해요. 그런 옷, 재밌어요. 드레스니까 워킹도 필요없고 그냥 걸어갔다 걸어오면 되거든요.” 이런 식의 평범한 이야기도, 최지우가 하면 어딘가 코믹한 기운을 띠는 거였다. 과연, 영화에서는 어떨지. “그냥 이렇게 있는 것도요, 카메라 앞에서 하려면 굉장히 어려워요”라는 그녀이기에, 아직 최지우의 연기변신은 ‘설’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원래 성격대로만 나온다면, 아마도 최지우는 아주 색다른 코믹 여배우로 진짜 변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군대는 필수 아닌 선택?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을 보고 싶지만 안 보기로 작정했다. 장동건 때문이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와 장동건이 씩 웃을 때마다 허약체질이라 군대 안 갔다는 소문이 생각나서 남들은 군대가서 썩는 동안 돈 벌고 인기끌고 좋겠다며 채널을 돌려버린다. 아들을 전방으로 보내고나서 병역면제자에 대한 분노가 이성을 잃고 있는 수준인 것 같아 자제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남자배우나 가수를 평가할 때 군대에 다녀왔냐 안 다녀왔나가 기준이 되고,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군대 갔다온 사람과 안 갔다온 사람으로 구분하는가 하면, 친지나 동창생 동료들에게 아들을 군대에 보냈는지 은근히 물어본 연후에 군대를 안 보냈으면 등을 돌리게 되니 중증도 심한 중증인 것 같다. 까라면 무조건 까고, 기라면 군소리 없이 기고, 영장 나오면 툭툭 털고 군대에 가는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전날까지 철책근무는 너무 싫어 카투사로 갈까 의경으로 갈까 버팅기는 아들을 등 떠밀어 군대에 보냈다. 사흘이 지나 인터넷사이트를 뒤져보니 아들은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의 원통에 있는 전방부대로 떨어졌다. 철책근무 7~8개월은 필수라는 곳이다. 2주일만 지나면 편지가 온다더니 스무날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군사기밀이라 주소도 나와 있지 않아 편지도 못 보냈다. 열흘쯤 지나 입고 간 옷을 담은 소포가 왔는데 웃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주머니가 열댓개 되는데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보아도 쪽지 한장 나오지 않았다. 잽싼 놈들은 그 와중에도 한자 써서 집어넣는다던데 매사에 느릿느릿한 성격이 군대밥 사흘에 변할 수는 없지 하며 쓸쓸해졌다. 한 여론조사에서 고교생들의 34%만이 군대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했고 54.3%는 능력에 따라 갈수도 안 갈수도 있다고 답했다. 병역이 의무가 아니고 선택이고 능력이라니 죽어도 가야 한다고 아들들에게 누누이 강조해온 것이 무색해진다. 아마도 지난 몇년 동안 고위층이나 특권층들의 병역면제가 흔한 것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능력‘으로 간주될 뿐 아니라 출세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병역면제는 더이상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아니라 부러움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것은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두 아들이 병역면제를 받았는데도 아버지가 여전히 대통령 후보로 건재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5년 전 대선 때 이회창 후보는 소록도로 아들을 보내 나환자촌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했다. 소록도로 떠날 때 많은 부모들이 동정심을 보였다. 그런데 대통령선거에서 떨어지고 몇달 안 되어 소록도에서 나와 이곳저곳에서 경력을 쌓고 하와이에서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국민들은 배반감을 느꼈다. 5년 뒤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올 거라면 군대면제가 아무리 정당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몇년 동안의 봉사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 병역의무가 국민의 의무인 나라의 대통령 후보로서 떳떳한 자세였을 것이다. 아들들은 군대 때문에 인생 꼬인다고 푸념하고, 부모들은 자녀를 군대에 보내놓고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법에 따라 군대에 안 갔으니까 꿀릴 것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결코 ‘대쪽‘이나 ‘법대로‘ 정신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후보의 두 아들이 인생에서의 많은 계획들을 잠시 유보하고 지난 5년 동안 병역의무기간만큼씩 소록도건 어디에서건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의 대선국면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 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김선주/ <한겨레> 논설위원

정성일,지아장커를 만나다 <5>

1995년의 중국, 2002년의 중국 정성일: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소무>의 1995년 중국과 <임소요>의 2002년 중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지아장커: 가장 큰 차이는, 1995년에는 사람들이 현대화 사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임소요>에 들어와서는 그런 기대와 희망은 이미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소무>에는 현실적인 고민이 있고, 중국 안에서 산다는 것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2002년 중국을 산다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잘산다고 말하는데 실제 삶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소무> 안에 TV에서 나오는 내용은 거의 다 중국 지역, 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소요>에 나오는 것들은 현대사회의 부호 같은 소식들만 전합니다. 더 추상적인 듯한 내용들이고 실제로 내 생활과 관계없는 내용들, WTO 가입이 이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베이징올림픽 개최가 이 소년소녀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담론이 이 사람들의 생활, 실제 생활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지구는 부호입니다. 인터넷도, 인공위성도 중국의 변방의 소년소녀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무>가 물과 모래가 같이 혼재 되어 있는 것이라면 <임소요>의 경우에는 물이 위에 떠 있고 모래가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성일: 2년 전에 인터뷰를 했었을 때, <플랫폼>의 마지막 장면은 희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임소요>의 마지막 장면은 절망입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은 중국의 상황입니까, 당신의 시선의 변화입니까 지아장커: <임소요>의 결말부분은 특히 비관적인데,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느낌, 개인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실제로 어떠한 가능성이, 어떠한 일이 과연 중국의 현재를 바꿀 수 있는가를 전혀 못 느끼겠습니다. 그런 비관적인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상황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는 것이죠. 그러나 다음 영화가 또 다른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생활에 대한 한 사람의 생각은 매번 변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있다면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심리적으로 힘들다고 느꼈던 것을 한순간에 극복해 내기도 합니다. 항상 사람들은 직접 몸으로 이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 느끼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무언가 변화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 한 세대에 거쳐서 노력을 거친 게 아니라 몇 세대를 거쳐서 기나긴 시간을 통해야만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보면 이러한 과정 중에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가 바로 변화하고 있는 바로 그 과정입니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지금은 무슨 일을 할 때 아주 평온한, 평정한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원하는 일이 당장 그 결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또다시 희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점점. 정성일: 지금 준비 중인 다큐멘터리 다음에 찍을 다음 극영화는 어떤 내용이며 언제쯤 촬영을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까 지아장커: 원래는 내년 설 이전에 극영화를 하나 만들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유릭와이가 후반작업을 하느라고 바쁩니다. 그게 바로 나의 사촌동생에 관련된, 탄광에서 일하는, <플랫폼>에 나왔던 그 광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못 찍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내가 무척 좋아하는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년 가을에 찍게 될 것입니다. 정성일: 그 영화도 디지털로 찍게 될까요 지아장커: 슈퍼 35mm로 찍으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슈퍼 35mm로 찍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슈퍼 35mm로 찍어 가지고 필름이 국경선을 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직 결정을 안 했는데, HD로 찍을 수도 있고, 그렇지만 슈퍼 35mm로 찍고 싶습니다. 결국에는 슈퍼 35mm로 찍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정성 일: 허우오시엔의 <밀레니엄 맘보>를 혹시 봤는지요 지아장커: 봤습니다. 정성일: 당신 자신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당신 세대들도 다들 이구동성으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화어권 영화 전체의 일종의 좌표처럼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밀레니엄 맘보>를 보면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완전히 변해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변해버린 허우샤오시엔을 바라보는 당신이나, 당신들 세대의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지아장커: 저같은 경우에는 허우샤오시엔 작품의 변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감독이 우리가 원하는 영화만을 찍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밀레니엄 맘보>는 사실 허우샤오시엔 작품 중에서 그렇게 좋은 작품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작품이 감독의 변화하는 전환기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밀레니엄 맘보>를 통해서 허우샤오시엔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것, 그것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과정들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허우샤오시엔 자신도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다음의 영화가 될 수도 있구요. 정성일: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그런 동시대의 흐름 속에서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테마 의식은 무엇입니까 또는 당신 영화 속에서 절대 이것만은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아장커: 진실한 본토의 경험, 중국에서의 내가 보는 그 사실적인 경험. 이러한 경험들을 가장 객관적인 태도로 바라볼 수 있도록. 본토의 기본적인 토양을 벗어나면 창조력의 그 힘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문화적인 귀속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의 영화도 그런 귀속감이 있는 영화 중의 하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도 한 사람의 중국의 배운 사람, 인텔리로서, 영화 이외에 어떤 책임감도 많이 느낍니다. 난 요즘 최근에 중국에서 이 책임이라는 말을 갈수록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갈수록 중국에서 이 책임감이 적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피하고 싶지만 결국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최근 2년 동안 생각한 게 나의 이 지하전영 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최근에 중국 지하전영에서 출발한 감독들이 지하전영을 스스로 비판하는 것에서 대단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장위안은 지하전영 감독에서 이제는 정부의 공식영화 성격을 강하게 가진 감독으로 변절했는데, 앞으로 나는 나만의 지하전영 방식을 끝까지 지켜나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장위안의 선택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이니까.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면 모든 사람들은 또 그 문제에 부딪혀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지하전영의 대표적인 감독 중 한 사람인 장위안이 제작방식을 바꾸니까 중국의 영화관리국에서도 아, 지하전영을 하는 애들도 바뀔 수 있겠구나, 그래서 더 엄격하게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얻었던 한계가 있는 공간과 자유가 이제는 더 위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자유를 표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리가 아닙니까 만약에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이 예술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는 오늘날 중국의 지하전영에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이용하고, 감시당하고, 자기의 원칙을 버리고 타협하는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영화를 만든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은 정신을 무척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정성일: 긴 시간 인터뷰에 감사하고, 그리고 다음 영화를 좀더 빨리 봤으면 좋겠고, 그리고 인터뷰는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영화까지 미뤄지는 것입니다. (이 인터뷰는 2002년 11월22일과 23일에 이루어졌다. 베이징어로 인터뷰하였으며, 박연진씨가 통역을 하였다)사진 임종환 f301s@kebi.com

타이형 블럭버스터,<방라잔>

■ Story 1765년 미얀마의 왕권을 잡은 망그랑 왕은 그의 반대 세력을 지원하는 야유디야를 공격하기 위해 두개의 부대를 출정시킨다. 그중 하나인 네메아오의 부대는 방라잔 마을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친다. 방라잔 사람들은 뛰어난 전사인 잔을 찾아 마을 사람들을 통솔해줄 것을 부탁한다. 방라잔 사람들은 미얀마군의 대포에 맞서기 위해 야유디야에 대포 원조를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큰 전투가 다가올 즈음, 대포가 도착하지만 그것은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방라잔 사람들은 스스로의 칼과 창으로 마을을 지켜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 Review 타이, 야유디야 시대를 배경으로 일어난 방라잔의 활약은 수세기에 걸쳐 문학과 영화, 텔레비전 시리즈로 전해져왔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왜 싸우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으며, 그 이유를 알고도 감정의 파고를 타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이인들에게 이 소재는 너무나 낯익은 역사의 교과서일 것이다. 지금도 마찰을 빚고 있는 미얀마와의 관계 속에서 이 영화는 타이인들의 민족적 의지를 자극하며 타이 내에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현실의 문제가 역사의 한장을 빌려와 재생되고 있으며, 그 민감함이 산업적 흥행으로 보증받은 셈이다. 타닛 감독은 묘사의 초점을 방라잔 사람들과 미얀마군 사이의 대립에 맞추어놓았다. 미얀마군의 잔인한 학살장면과 그에 저항하는 방라잔 사람들의 정의로운 투쟁이 이분의 선을 긋는다. 여기에서 타이인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한편에 서려 할 것이다.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그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타닛 감독은 쉽게 그저그런 흔한 싸움처럼 보일 수 있음을 염려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벌어진 일임을 각인시키면서도(처음과 끝을 열고 닫는 설명들), 한편으론 캐릭터의 전형화와 상업영화로서의 구색들을 갖추어놓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쓴다. 격렬하게 벌어지는 전투장면들, 특히 방라잔 사람들이 전멸당하는 장면들은 생생한 전투를 실감시키기 위해 많은 인력과 장비가 동원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전투장면말고도 좀더 작은 로맨스가 있고, 로맨스 사이사이에는 그보다 또 좀더 작은 부분의 웃음이 있다.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 뛰어난 전사, 술에 곤죽이 되어 있으면서도 용기백배한 반골적인 전사, 남자들에 못지않은 열정을 지닌 여전사, 이들에 맞서는 잔인하게 추상화된 미얀마군, 그리고 어김없는 희생자들이 방라잔의 전투현장을 메운다. 결국 방라잔은 미얀마군에 의한 몰살의 현장이 되고, 그들의 정의로움과 로맨스와 웃음은 미얀마군조차 칭송할 정도였다는 영웅적인 겨레의식의 수준으로 고취된다. 현재도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의 맥락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전형적인 대립의 서사구조가 실력있는 솜씨로 담아져 있다는 점에서, 그 둘이 취합되어 상업적인 환호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아마도 ‘타이형 블록버스터’쯤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정사헌/ 영화평론가 taogi@freechal.com

대통령 후보 릴레이 인터뷰를 끝내며

대통령 후보들의 영화·문화정책을 묻는 릴레이 인터뷰를 약속대로 이번호로 종결한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 사이의 단일화가 이루어져, 19일의 선거에 나설 후보는 그 가운데 셋이 되었는데, 4주에 걸쳐 나간 기사의 형식과 분량은 동일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터뷰의 형식을 따른 것이었다. 서면인터뷰냐, 직접 대면한 경우냐를 기사에 반영했다. 활자로 얻은 답일 경우, 실제 만난 것처럼 분식하는 일은 피했다. 그것이 취재의 노고나 우리 매체의 ‘권위’를 과대포장하는 허위를 벗어나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육성을 서면답변보다 무겁게 대했다. 추상적 의견에 육성, 그리고 존재의 무게를 합산한 결과였다. 연속인터뷰의 지상중계를 마치며 둘러보니 이번 선거는 영화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통령선거가 되어 있다. 여당이 전국구 의석 하나쯤을 문화예술단체의 장에게 배정해주고, 상대 후보의 선거를 돕는 이들에게 불이익을 주던 문화는 이제 정말 퇴장당한 상태다. 영화인들이 운동과정의 ‘화동’, 아니 ‘꽃’의 역할을 하던 시대를 종영하고, 각자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과 희망을 행동으로 적극 표현하고 흐름을 이끌어가는 모습은 ‘발전’의 한 양상으로 보인다. 영화인들은 효순과 미선, 두 여중생의 압사사건의 무죄평결을 규탄하며 소파개정을 촉구하는 도도한 물결에도 합류하고 있다. 박찬욱, 류승완 감독이 광화문에서, 김지운 감독이 영화촬영현장에서 왜, 어떻게 머리를 깎았나를 조종국씨가 ‘충무로 다이어리’에서 고백하듯 보고했다. 한국영화의 정신이 한국의 현실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은 당연히, 우리들의 씨네스코프가 되었다. 우리들의 관심은 다시, 텔레비전 토론과 정치광고들이 대규모 유세를 대체하는 오늘의 선거로 돌아간다. 한쪽은 1988년 미국 대선에서 그 효용을 과시한 이른바 네거티브 광고와 전략을 택했고, 또 한쪽은 21세기와 상대하겠다며 포지티브 전략을 택했다. 그 효과는 앞으로 관계전문가들에게 흥미있는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위판단과 비평은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이다. 연구업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19일의 선택을 위해서.

역사의 한 장 그대로… 타이인의 나라지키기 ‘방라잔’

2000년 개봉돼 타이에서 역대 최고 흥행을 기록했던 <방라잔>이 국내에 개봉된다. <잔다라>, <아이언 레이디>에 이어 국내에 세번째로 소개되는 타이영화로 18세기 전쟁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1763년 고대 타이의 수도인 아유디야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버마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버마의 망그라왕은 1775년 그의 반대세력을 지원하는 아유디야를 물리치기 위해 대부대를 출정시킨다. 원정군 가운데 하나인 네메아오 장군의 부대는 아유디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방라잔 마을 사람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다. 수세기 동안 문학과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방라잔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3·1운동처럼 타이 국민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또한 가장 극적인 사건이라고 한다. 타닛 지트누쿨 감독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대규모의 액션스펙터클로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방라잔>은 제작과 흥행 규모에서 최초로 기록될 만한 타이형 블럭버스터영화다. 상영시간의 상당부분을 전투장면에 할애하는 이 영화는 방라잔 사람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가족을 버마군에게 잃고 도적이 돼 살아가던 아이잔을 비롯해 술주정꾼 아이인, 노인과 여성들까지 모든 마을사람들이 버마군의 집요한 괴롭힘 속에서 용맹스런 전사가 된다. 버마군의 여덟번째 공격에서 방라잔 사람들은 어른아이 할 것없이 마지막 저항을 벌이지만 결국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수만명의 엑스트라와 물소 떼를 동원해 연출한 마지막 전투장면은 쓰러져가는 주인공들을 느린 동작으로 잡아내며 사실성과 함께 비장함을 이끌어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방라잔을 접수한 버마의 장군까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용기를 칭송한다. 주인공 아이인을 연기한 위나이 크라이부트르는 지난해 <방라잔>과 함께 자국영화 붐을 일으켰던 <낭낙>에서도 주연을 한, 타이에서 가장 주가높은 배우다. 13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장화,홍련><살인의추억> 등 프로덕션디자인의 매력 <4>

<지구를 지켜라!>비틀리고, 휘고, 엇물리고 어떤 영화‥‥‥‥‥‥‥‥ 지구가 크나큰 위험에 처했다. 개기월식 때면 외계인들은 지구를 파괴할 것이다. 오직 한 사람, 병구만이 이 사실을 알고 지구를 수호하려 한다. 이를 위해 외계인으로 추정되는 강 사장을 납치해 잔인하게 고문하는 병구는 과대망상 환자이거나 편집광처럼 보인다. 강 사장은 병구가 예전에 다니던 공장의 사장으로, 병구의 모가지를 자른 장본인이며, 병구 어머니를 혼수상태에 이르게 한 주범이기도 하다. 병구가 마약 중독자라는 점으로 짐작건대 외계인과 지구파괴 음모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망상의 발로처럼 보이지만, 그의 논리는 꽤나 정연하고 구체적이다. 이처럼 <지구를 지켜라!>는 납치한 사람과 납치당한 사람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이며 망상과 현실의 괴리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실, 장준환 감독의 야심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화살촉이 노리는 과녁판에는 인류의 역사에서부터 지금의 사회제도까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내용이 들어가 있다. 이미지 컨셉‥‥‥‥‥‥‥‥ 장준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습도와 더위, 그리고 콘트라스트를 화면 안에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전개되는 병구네 오두막의 지하실은 어두컴컴하며 음습한 데 반해, 오두막의 외부는 신록의 산뜻한 녹색을 보여주는 등 전반적으로 강한 대비를 보여주겠다는 의도. <양들의 침묵>의 지하실 분위기나 <쎄븐>의 강한 콘트라스트 등은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미지. 후반부 지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부분에선 <메트로폴리스>의 실제 화면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패러디 장면도 오마주 차원에서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워낙 극적 반전이 많고 공간과 시간을 마구 넘나드는 작품이다보니 영향을 끼친 원형적 이미지 또한 다양하다. 때문에 프로덕션디자인에서 의상까지 비주얼 전반에 관한 책임을 맡았던 장근영, 김경희 미술감독은 “워낙 많은 이미지들이 종합돼 몇 가지를 짚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공간의 이미지‥‥‥‥‥‥‥‥ 장근영, 김경희 미술감독이 공간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점은 “병구를 포함한 각각의 캐릭터가 공간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장준환 감독과 콘티 작업부터 함께했기 때문에 충분한 고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가장 신경을 쓴 공간은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병구의 집, 그중에서도 지하실이었다. 고문실이 있는 비밀공간, 외계인에 대처하기 위한 병구의 연구실, 마네킹을 제작하는 작업실 등 3개로 나뉜 지하공간은 병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편집광적이며 정신병자 같지만, 그럼에도 열정적인 독학으로 외계인과의 전투를 준비해온 병구의 흔적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벽면은 실험도구, 고문기구, 무기, 온갖 기괴스런 표본, 연구 자료 등으로 꽉 채워졌다. 세트, 소품, 의상 등 각각의 요소들은 ‘의도적 조악함’이라는 차원에서 설계됐다. 병구의 캐릭터로 봤을 때 뭔가 어설프지만 정교하기도 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두명의 미술감독은 이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 병구의 입장이 돼, 아니 병구처럼 살면서 공간을 고민해야 했다. 결과물은 그야말로 ‘병구스럽다’. 강 사장을 고문할 때 사용한 의자는 이발소 의자에 변기를 바닥에 붙이고 치과 장비 같은 기구를 붙인 희한한 모양새였고, 외계인의 강력한 텔레파시 공격을 막는다며 병구와 순이가 늘 쓰고 다니는 헬멧에는 라이트, 배터리, 안테나 등을 달았다. 김경희씨는 “고문기구며 무기며 모든 소품은 새 것을 구입해 부순 뒤, 여러 개를 뒤섞어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한다. 또 세트 제작자가 “여기는 뭐 똑바로 된 게 하나도 없어”라고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모든 공간과 소품은 뭔가 비뚤어지고 휘고 엇물리는 느낌으로 디자인됐다. 때문에 음침하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이 엿보이는 지하실 공간은 마치 병구의 복잡한 뇌 속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전한다. 헌팅 & 세트‥‥‥‥‥‥‥‥ 강원도 함백산 1300m 고지에 세워진 병구네 집 세트도 “병구가 직접 설계하고 만들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산골짜기에서 조달할 수 있는 나무로 외관을 꾸민 너와집을 만든 것이나 울퉁불퉁 거친 느낌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장마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팀은 2개월 동안 상주하면서 자연스런 느낌이 나도록 돌 하나하나를 주변에서 갖다 날랐고, 풀을 한 포기씩 떠서 심었다. 폐광촌의 산 정상 부근에 만들어진 이 세트가 주위와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도 각별히 썼다. 또 워낙 감정의 기복이 심한 영화이다보니 보는 위치나 조명에 따라 평화롭게도,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일 수 있도록 외면을 다양하게 만들었다. 절벽 위에 집을 지은 것도 위태로워 보이는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 사실, 이 영화가 폐광촌을 배경으로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미술적인 점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어찌 보면 60∼70년대 느낌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현대적인 듯도 하고, 광산촌은 여러 가지 느낌이 조합돼 뭔가 새로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다. 이런 고민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폐광촌을 배경으로 삼은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한 장면‥‥‥‥‥‥‥‥ 지하 2층의 비밀 공간에서 병구의 추궁과 강 사장의 부인이 반복된다.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강 사장은 정연한 논리로 병구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당당한 강 사장과 흠칫하는 병구, 두 사람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오른다. 낡아빠진 듯한 외벽이나 소품들,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있는 전깃줄이 공포감을 유발하고 병구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준다.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된 조명은 병구의 표정에 음영을 드리우고, 박박 민 강 사장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강조한다. 일부만을 비추고 있는 조명은 그 아래 어둠 속에 감춰진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드러내고, 바닥의 끈적끈적한 느낌을 강화한다. 푸른빛과 붉은빛의 대조도 갈등을 증대시킨다. 무언가 폭발하기 직전의 이 긴장은 형사들의 추격, 강 사장의 반격으로 이내 이어지게 된다. “각자의 캐릭터에 맞는 공간 창조”라는 말이 들어맞는 장면이다. 프로덕션디자이너 장근영, 김경희 <지구를 지켜라!>는 장근영, 김경희가 프로덕션디자인을 맡은 두 번째 작품이다. 지난해 <화산고>로 처음 프로덕션디자이너라는 이름을 걸었지만, 영화계에는 1994년부터 뛰어들었다. 미대 조소과를 나란히 나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영화미술 작업을 하기로 결심한 두 미술감독은 <은행나무 침대>를 시작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등 다양한 작품에 참여해왔다. 데뷔작 <화산고>는 30개도 넘는 다양한 공간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힘든 작업이었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공간을 꽉 채워진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엄청난 소품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그 소품이란 것도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재조합을 해 만들어야 했던 탓에 어려움은 더 했다. 특히 100쪽 가까운 병구의 연구 노트를 일일이 구상하고 만들기까지 했기에 이들은 자연스레 병구처럼 편집증과 과대망상에 빠져들어갔다. “그동안 떨어졌던 에너지를 채우고 있는 중”이라는 이들은 <화산고>와 <지구를 지켜라!>에서 그랬듯, 아무도 해본 적 없는 작업에 또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이혜정 hyejung@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피아노를 치는 대통령> 음악감독 박혜성

시청률 50%대를 돌파한 화제의 드라마 SBS <야인시대>가 2002년 가을 최고의 이슈로 떠오르자 주제곡 <야인>을 부른 가수가 누구냐에 관심이 쏠렸다. 허스키하고 파워풀한 창법의 주인공으로는 김정민, 박상민, 캔 등 각종 가수들의 실명이 오르내렸다. 이에 <야인시대> O.S.T 제작사 TTM인터내셔널 프로덕션은 주제곡을 부른 이가 신인가수 강성이라고 밝히는 등 각종 ‘정보 흘리기’에 들어갔다. 또한 제작사쪽은 O.S.T 담당 프로듀서가 강성의 목소리에 매료돼 오디션을 부탁한 데서 비롯됐으며, 80년대 소녀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경아> <도시의 삐에로>를 히트시킨 바 있는 가수 박혜성이 O.S.T의 제작자 겸 작곡가라는 사실도 함께 전했다. 94년부터 꾸준히 광고음악을 해온 박혜성이 처음으로 도전한 드라마 O.S.T를 통해 프로듀서로서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렀다는 소식은 분명 놀랍고 반가운 뉴스였다. 그러나 놀라운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페라 CM으로 올해 광고대상을 수상한 하이마트의 CM송을 비롯해 그전부터 PCS oneshot 018, 신세대 중형차 라노스, 백지연의 뉴스 진행 형식으로 관심을 끈 누비라, 체어맨, 무쏘, 매그너스 등의 자동차 광고음악 등 역시 그의 손을 거쳤다는 것. <경아> 이후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만을 남겨놓고 사라졌다고 여긴 그가 실은 내내 우리 곁에 머무르며 쟁쟁한 광고음악가로 거듭났음을, 탄탄한 사업가가 됐음을 알리는 무시할 수 없는 증거들이었다. 한영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혜성의 가수 데뷔 뒤에는 엄격한 집안의 동의를 구하는 설득과정이 있었다. <경아>로 텔레비전 데뷔식을 치른 86년 12월6일은, 그래서 학력고사를 치른 뒤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시험까지 완전히 마무리해놓고 방송활동을 하길 원한 부모님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학교수업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던 동국대 연영과 재학 시절부터 점차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4집 <낯선 시간 속으로>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그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는 듯했다. 그뒤 노래보다는 작사에 치중한 소리없는 그의 암행이 시작된다. 일본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보면서 당시로선 전혀 새로운, 컴퓨터 작곡 프로그램도 익힌 그는 다른 가수들의 앨범 작업을 돕는 한편, 광고와 드라마음악으로 점차 활동영역을 넓혀나간다. <야인시대>는, 연출을 맡은 장형일 PD와 2년 전 <신TV문학관>을 통해 쌓은 인연으로 O.S.T 제작까지 맡게 된 케이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는 완전한 꿈을 이루게 됐다. 평소 그의 지론은 영화와 음악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다 고전적인 로맨틱코미디 음악은 그에게 새로운 의지와 감흥을 안겨주었다. “따뜻하고 예쁜 그림에 어울리는 음악을 입히려고 했어요. 마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나 <당신이 잠든 사이에>에서 쓰인 음악처럼 말이죠.”그리고 또 하나 그가 심혈을 기울인 엔딩곡에 대한 설명. “영화를 다 보고 극장문을 나섰을 때 밀려오는 공기를 마시는 기분, 때맞춰 눈이라도 내렸으면 하는 기대감, 그런 것들을 상쾌하고 가벼운 엔딩곡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만 하면 96분의 러닝타임을 기다려 그의 선물을 받고 싶어지지 않을까.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프로필 → 1971년생→ 1집 <경아>, 2집 <도시의 삐에로>를 시작으로 3집 <사랑 친구><쥴리아>→ 4집 <낯선 시간 속으로>, 듀엣 앨범 <센세이션>→ KBS 드라마 <꽃피고 새울면> 출연→ 89년 KBS 음악담당→ 2000년 KBS <신TV문학관> 중 <새>의 음악담당→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음악감독→ 각종 자동차, PCS 광고음악 제작. 전자제품 쇼핑몰 <하이마트> 광고음악 제작→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으로 음악감독 입봉→ 현재 <하이마트> 오페라 CM시리즈 마지막편인 4편 녹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