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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감독이 느껴지는 타이틀,<트윈 픽스 극장판>

팬들이 호감을 표시하는 영화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출연배우들의 인기보다는 감독의 인지도가 그 이유인 경우가 많다. 디브이디 시장에서도 이 법칙이 똑같이 적용되어, ‘감독의 맛이 느껴지는 디브이디 타이틀’의 인기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최근에 출시된 작품들 중에 그런 예가 많은데, <집으로…>의 스페셜 에디션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 타이틀은 이정향 감독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정겨운 스타일을 녹여넣기 위해, 무려 두달이나 출시 일자를 연기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감독의 편안한 음성 해설은 물론, 7살의 꼬마 배우와 77살의 할머니 배우가 카메라 뒤편에서는 어떠한 모습이었나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부록들까지 가득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한편의 화제작은 <아메리칸 뷰티>로 완성도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샘 멘디스 감독의 갱스터 무비 <로드 투 퍼디션>의 디브이디 타이틀이다. 진한 부성애와 쫓고 쫓기는 자들간의 긴장감을 잘 살려낸 화질이 디브이디 구매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열렬한 컬트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트윈 픽스 극장판> 디브이디만큼, 감독이 디브이디 타이틀의 매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우는 흔치 않다. 무엇보다 린치 감독에 관한 보기 힘든 다큐멘터리가 수록되어 구매욕구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 린치 감독은 원래 웬만한 언론은 물론 자신의 영화가 수록된 디브이디 타이틀에도 얼굴을 내비치기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린 시절에 어떠한 생활을 했으며, 청·장년기에는 어떤 식으로 영화작업을 진행했었고, 현재는 어떠한 협력자들과 어떤 식으로 작업을 전개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상세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있으면 팬으로서 행복할 정도다. 그러한 내용의 다큐멘터리 중간중간에 그의 초기 습작들은 물론 <이레이저 헤드>, <블루 벨벳>, <로스트 하이웨이> 등 대표작들의 영상자료가 함께 제공되고 있는 점도 이 매력적이다. 한가지 주의할 점은 이미 출시되어 있는 <트윈 픽스> 텔레비전 시리즈보다 일주일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 본편 영화가 다소 난해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간상으로는 반대이지만, 텔레비전 시리즈의 타이틀을 먼저 보고 난 후 이 타이틀을 감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철민/디브이디 칼럼니스트 1992년작, 감독 데이비드 린치 자막 한국어, 영어화면포맷 아나몰픽 1.85:1 오디오 돌비디지털 2.0, 5.1지역 코드 3 출시사 알토미디어 ▶▶▶ 트윈픽스 극장판 [구매하기] ▶▶▶ 트윈픽스 시즌1 [구매하기]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2]

히치콕, 드 팔마는 그를 모방하지 않았다? 히치콕에 대한 트뤼포의 말을 조금 변형하자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영화를 따라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바로 브라이언 드 팔마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자신을 히치콕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싸이코>에 영감을 얻어 <자매들>을 만든 것이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평단은 브라이언 드 팔마를 히치콕의 인형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브라이언 드 팔마는 <강박관념>을 만든 뒤에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아가 히치콕의 <현기증>과 <사이코>를 조합한 것으로 유명한 <드레스드 투 킬>을 만든 다음에는 자신의 영화가 히치콕과 다른 점이 많다며 오히려 성질을 냈다. 특이한 반응이긴 하지만, 다행스럽게 드 팔마만의 창조력은 점점 더 빛을 발한다. 하지만 <강박관념>은 <현기증>을, <드레스드 투 킬>은 <싸이코>를, <침실의 표적>은 <이창>과 <현기증>을, <칼리토>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참조한다. 그러므로 브라이언 드 팔머는 일종의 히치콕적 환자이며, 히치콕적 주인공이다. 정말 자기가 히치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드 팔마는 <팜므파탈>에 이르기까지 히치콕주의자이다. 입으로는 히치콕을 버렸지만 영화로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오히려 그 점이 점점 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가 흥미있어지는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영화 <필사의 추적>(Blow Out)은 드 팔마가 히치콕 영화에 얼마나 익숙한지를 보여주는 숨은 무의식(아니면 얼마나 거짓말에 능숙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녹음기사 잭은 자동차 사고를 목격하고, 여자를 구해낸다. 샐리는 차 안에서 죽은 정치인과 동행이었다. 죽은 정치인의 입장을 고려해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침묵을 약속한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다시 듣게 되는 소리. 소리가 이상하다! 타이어 펑크로 인한 사고사로 판정되었지만, 다시 듣는 녹음기에서는 총소리가 들린다. 한마디로 <필사의 추적>은 귀로 듣는 <이창>이다. <이창>의 사진기자와 <필사의 추적>의 녹음기사는 동일한 역할을 한다. <이창>의 보는 것과 <필사의 추적>의 듣는 것은 동일한 모티브이다. <이창>의 담뱃불과 <필사의 추적>의 총소리는 같은 범죄이다. 히치콕이 시선에 잡히는 오점으로 서스펜스의 효과를 창조했다면, 드 팔마는 교묘하게 청각으로 뒤바꿔 그 서스펜스를 쫓아간 것이다. 몇개의 예가 끝났다. 히치콕의 영향 아래 있는 다수의 영화들이 오히려 히치콕적인 요소들을 다치게 하는 것은 그것을 단순히 패러디의 재미로 뒤바꾸려하거나, 소재의 차원에서만 이해하거나, 외연적인 틀만을 가져올 때 생겨난다. 아마도 그 점에서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히치콕 영화의 정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누벨바그 세대들일지 모른다. 앙리 뵈르네유에서부터 제임스 본드류의 영화까지, 히치콕 영화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감독의 이름과 영화들을 열거하던 트뤼포는 그 안에 스스로의 이름도 주저없이 끼워넣었다. 샤브롤과 로메르는 히치콕에 관한 저서를 낼 정도였다. 그러나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 안에서 히치콕의 인장을 낱낱의 작품에 한정해 말하는 것은 굉장히 모호하다. 그들이 히치콕의 영화를 두고 정의한 ‘죄의 전이’, ‘이중의 관계’, ‘범죄의 역전성’, ‘비극적 도덕’ 등등의 개념들이 샤브롤의 <도살자>, 트뤼포의 <이웃집 여인> 같은 영화에서 묻어나긴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적 지침들은 그 전체를 관통하면서 조금씩 굴곡되어 있다. 그들 역시 또 다른 창조를 요하는 영화감독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히치콕주의자들의 성공이란 히치콕을 벗어나는 것이다. 히치콕의 형식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히치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정작 히치콕의 흔적은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변형하기보다 전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히치콕의 영향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말의 역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치콕은 여전히 불멸하는 것이다. 정한석 mapping@hani.co.kr 히치콕 영화의 리메이크와 속편노먼은 그뒤에 어떻게 되었냐면…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들은 그 대중적인 호응을 증명이라도 하듯 리메이크와 속편 제작이 줄을 이었다. 히치콕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은 1934년 영국 시절 제작한 <너무 많이 안 사나이>를 1956년 캐리 그랜트 주연으로 다시 만들었을 때다. <너무 많이 안 사나이>의 리메이크는 다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히치콕의 의도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그 밖에 같은 내용, 또는 질적으로 떨어지는 영화들의 리메이크, 속편격의 영화들이 종종 다른 감독들에게서 만들어졌다. 부인의 외도에 대한 질투와 그녀의 돈 때문에 부인을 살해하기로 결심한 남자, 그리고 그 부인 사이에 벌어지는 스릴러물, <다이얼 M을 돌려라>(출연 그레이스 켈리, 1954)는 98년 <퍼펙트 머더>(감독 앤드루 데이비스, 출연 마이클 더글러스, 기네스 팰트로)라는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었다. 노먼 베이츠를 연기한 앤서니 퍼킨스를 일약 공포영화의 스타로 올려놓은 <싸이코>는 수많은 영화에서 욕실 살해장면이 인용되었고, 유사한 제목으로 수없이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했다. 한번도 히치콕이 만든 1편의 역량에 미친 작품들은 없었지만, 83년 <싸이코2>(리처드 프랭클린)에서 다시 한번 앤서니 퍼킨스는 노먼 베이츠로 등장하였고, 86년 <싸이코3>에서는 주연뿐 아니라 직접 감독을 맡기도 했다. <싸이코>의 시리즈화는 90년 제작된 <싸이코4>(믹 개리스)까지 속편을 낳았다. 그리고 리처드 로스테인에 의해 <베이츠 모텔>이라는 제목으로 텔레비전용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에는 구스 반 산트에 의해 거의 모든 장면(심지어 숏들까지)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화제를 낳기도 했다. 다프네 뒤 모리에의 원작으로, 히치콕 자신에 의해 스스로의 필모그래피 중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63년 작품 <새>는, 외딴섬에서의 새들의 공격이라는 공포스런 소재가 계기가 되어 앨런 스미시와 릭 로젠탈이 1994년 <새2>라는 텔레비전 영화로 속편 제작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히치콕 영화들은 많은 감독들에 의해 수차례 속편화, 또는 리메이크되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4월 4∼11일까지 열리는 히치콕 회고전 [1]

회고전 계기로 본 히치콕 베끼기의 역사 4월4일부터 4월1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히치콕 회고전’이 열린다. 수없이 많은 숭배자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서스펜스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히치콕. 히치콕과 그를 따르는 히치콕주의자들의 관계를 따라가며 그 간격의 폭을 재본다. (서울시네마테크는 5월 중순 히치콕 회고전 2탄을 준비 중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렇게 썼다. “히치콕이 서스펜스만을 다루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가 가장 덜 지루한 영화감독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1925년 <쾌락의 정원>으로 데뷔하여 76년 <패밀리 플롯>을 끝으로 은퇴하기까지 총 54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히치콕이 흥행에 실패한 사례는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는 언제나 대중을 사로잡는 감독이었다. 누벨바그 세대는 그런 히치콕을 전면에 세워 영화의 본질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라고 트뤼포는 히치콕의 독창적인 위치를 못 박았다. 트뤼포의 말은 눈먼 찬사라기보다 이를 데 없이 정확한 포착에 가깝다. 히치콕의 영화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치밀한 조합만으로 어떻게 영화가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교본과도 같다. “우리가 영화에서 스토리를 전할 때, 대사는 다른 식으로는 불가능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항상 스토리를 먼저 영화적 방법으로, 숏과 숏의 연결을 통해 풀어가려고 노력해왔습니다”라고 히치콕은 화답한다. 히치콕, 모방불가능? 그의 영화적 독창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용어인 서스펜스는 가장 평범한 장소에서, 가장 안이한 순간에 벌어지는 범죄에 의해 조장되었다. 그의 서스펜스는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만들어냈던 것처럼 내러티브에 기인한 서스펜스가 아니었다. <무대공포증>의 드레스에 묻은 피, <의혹>의 전구를 넣어 발광하는 우유, <이창>의 창문 너머 보이는 붉은 담뱃불,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상공 위의 비행기, <마니>의 장갑에 묻은 피, <해외특파원>의 거꾸로 돌아가는 풍차, 영화 이론가 파스칼 보니체르가 ‘오점’이라고 명명하는 그것들이 평이한 상황 안에 들어와 박힐 때 그의 영화는 순식간에 ‘낯선 친숙함’의 두려움으로 돌변한다. 히치콕은 그것을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그의 서스펜스는 내러티브의 전개와는 상관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히치콕적 서스펜스’는 그 자체로 개념이 되어갔다. 그러면서 히치콕을 숭배하는 ‘히치콕주의자’들이 생겨났다. 그는 영화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인용되고, 반복되었다. 히치콕주의자들은 그의 영화를 한편씩 골라 패러디하고, 그의 영화적 소재를 본떠 다른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보고, 그의 영화적 형식을 변형하여 창조를 모색하고, 그의 영화적 테마를 질적 변화시켜보려 노력했다. 여기 몇 가지의 사례가 있다. 잊을 때쯤 되면 영화 한편씩 만들어내는 감독 겸 배우 대니 드 비토는 히치콕의 <열차 속의 이방인>(Strangers on a Train)의 스토리를 가져와 <환상살인>(Throw Momma from the Trai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신경질적인 엄마(마치 <싸이코>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등쌀에 데이트 한번 못하고 있는, 물론 장가도 못 가고 있는 늙고 뚱뚱한 아들(대니 드 비토)은 괴롭기만 하다. 그는 시나리오 작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런데 그를 가르치는 시나리오 선생(빌리 크리스털) 역시 문제가 있다. 그의 아내는 다른 남자와 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히치콕의 영화 <열차 속의 이방인>을 보던 이 늙은 아들은 아내를 죽여버리고 싶다던 시나리오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본 교환살인을 시나리오 선생에게 똑같이 제안한다. 엎치락뒤치락 코미디가 벌어진다. <환상살인>은 농담 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앤서니 윌러의 스릴러 <무언의 목격자>가 히치콕적 서스펜스라고 불렸던 오해보다는 솔직한 편이다. 히치콕의 <현기증>을 <고소공포증>이란 제목으로 패러디한 멜 브룩스의 코미디보다는 못하지만. <커먼 웰스>의 알렉스 드 이글레시아가 <매트릭스>의 효과와 <스타워즈>의 인물에 <싸이코>의 수직과 수평의 오프닝 크레딧을 덧입히는 정도의 농담보다 훨씬 더 귀엽다. 생각해보면, <열차 속의 이방인>의 소재는 충분히 코미디화해볼 소지가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교환살인을 소재로 한 이 영화를 ‘죄의 전이’(<밧줄> <나는 고백한다>와 함께)에 관한 영화로 만들었다. 히치콕은 흥미를 위해 영화의 주제를 버린 적이 없다. 이게 바로 히치콕과 히치콕주의자들의 우선하는 차이점이다. “‘히치콕의 터치’는 기껏해야 패러디나 패스티시화할 수 있을 뿐이며 필연적으로 모방불가능”할 뿐이라는 파스칼 보니체르의 단정을 입증하는 수준일 뿐이다. 히치콕, 변형하는 순간 멀어진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이창>과 <싸이코>의 내러티브를 좀더 정교하게 조합하여 <왓 라이즈 비니스>를 만들었다. 클레어는 옆집에 이사온 남자가 부인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이웃에서의 살인 의혹. 이건 <이창>이다. 그러나 사건의 진원지는 자상하게만 보이는 미치광이 남편에게 있었다. 이건 <싸이코>다. 남편의 이름은 바로 노먼(<싸이코>의 노먼 베이츠의 이름을 딴)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영화의 전반부를 <이창>의 구조에 기대고, 후반부를 <싸이코>의 소재로 채워넣는다. 버나드 허먼식의 음악이 울려퍼지고, 여주인공은 <싸이코>의 자넷 리와 똑같은 자세로 욕조에서 넘어진다. 마침내 물속으로 가라앉는 자동차. 히치콕적 소재에 기반하고 있음에도 히치콕의 정수는 불려나오지 않는다. <이창>과 <싸이코>에는 있지만, 여기에는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제약과 무지. 만약 <이창>에서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휠체어에 의존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그의 한정된 시선은 쓸모없는 것이 됐을 것이고, 창문은 스크린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망원경으로 보는 제프리의 시선에 관음증적으로 동일화되는 관객의 시선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도망갈 처지도 아니다. <싸이코>에서 노먼이 무서운 건 그의 의식이 무의식을 누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왓 라이즈 비니스>에서 클레어의 남편은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너무나 정확히 알고 있다. 반면, 테리 길리엄의 가 한순간 전율을 일으키는 것은 히치콕의 영화를 패러디도, 모방도 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그냥 보여줬기 때문이다(구스 반 산트는 이런 태도를 확장해서 <싸이코>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그는 몇개를 제외한 모든 숏을 똑같이 찍었다. 히치콕을 변형하는 순간 히치콕과 멀어진다는 사실을 의식했던 것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에 나오는 <현기증>의 장면은 다른 할리우드영화들의 허름한 모방욕망과 동떨어져 히치콕의 진심을 되살린다. 에서 자꾸만 멸망한 과거로 되돌아가는 남자는 추적의 도피처로 극장에 들어간다. 거기서 <현기증>을 본다. <현기증>의 두 주인공 스코티와 마들렌(또는 쥬디)이 미국의 ‘시간’을 새겨놓은 나이테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 는 정지 이미지만으로 ‘과거지속’을 재현해낸 크리스 마르케의 실험적인 영화 <방파제>를 극화한 것이다. 테리 길리엄은 <현기증>이 시간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로메르와 의견을 같이하는 것이다. 누구 못지않은 히치콕 숭배자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이창> <너무 많이 안 사나이>와 삼부작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염소좌 아래> <나는 고백한다> <누명쓴 사나이>에서 히치콕이 주력했던 ‘비극적 도덕’이라는 주제와 갈라서는 지점이라고 말한다. 에릭 로메르는 <현기증>을 “시간 속에서의 상실의 감정을 창조”하는 영화로 보았다. <현기증>에서의 환경은 시간에 의해 구축되고, 더욱이 과거에 의해 방향지어진다고 말해주었다. 바로 ‘회상’. 그러니 가공되지 않은 <현기증>의 한 장면은 <12 몽키즈>의 전체를 압축하고도 남는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 가이드 [3]

<안느 트리스테>(Anne Trister) 감독 레아 풀/ 캐나다/ 1986년/ 103분/ 감독 특별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미지로 말한다. 어머니와의 유대를 통한 새로운 여성의 역사 쓰기 침대에 모로 누워 훌쩍이는 여자의 등. 모래 바람이 이는 황량한 사막. 침묵하는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안느 트리스테>를 열고 닫는다. 다시 침대에서 눈물을 삼키기까지, 다시 사막을 보기까지, 안느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스위스에서 캐나다로 떠나온 안느는 우연히 아동심리학자인 알릭스를 만나 함께 지내게 된다. 지혜롭고 여유로운 알릭스에게 의지하게 된 안느는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느낀다. 알릭스는 ‘그런 식의 사랑’은 줄 수 없다면서도 안느를 변함없이 아끼고 보살핀다. 안느 또한 “날 사랑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충직한 남자친구를 떠나 보내고, 알릭스의 남자친구에게 모욕을 당하고, 오래 공들인 설치미술 작품이 철거당하지만, 그렇게 많은 소중한 것들과 이별을 하지만, 안느의 곁엔 알릭스가 남았고, 안느는 비로소 홀로 서게 된다. 심리적, 물리적 망명의 길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중년 여인의 성장기 <안느 트리스테>는 단순히 늦깎이 레즈비언의 ‘커밍아웃’ 스토리가 아니다. 안느의 혼란과 고민 속에 성 정체성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탐문은 ‘완료’가 아닌 ‘진행형’ 시제를 취하고 있다. 안느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어딘가를 배회하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게 한다. 알릭스에 대한 안느의 사랑도, 연인을 향한 것이라고 치부하기엔 복잡하고 심오하다. 알릭스는 안느에게도, 알릭스의 고객 사라에게도, 모성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고 또 채워준 존재다. “나는 가족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일을 망쳐요. 내 엄마가 돼줄래요?” 사라는 이렇게 말했고, 안느는 이렇게 행동했다. 그들 모두에게 이상적인 어머니였던 알릭스가 기꺼이 꾸려간 ‘유사 가족’은, ‘여성 연대’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디 베닝 특별전 <단조로운 삶>/ Flat is Beautiful/ 1998년/ 50분 <쥬디 이야기>/ The Judy Spots/ 1995년/ 15분 <걸 파워>/ Girlpower/ 1992년/ 15분 <소녀 마케팅>/ Aerobidide/ 1999년/ 4분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이상한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언젠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13살 시골 소녀가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도래를 환영한 바 있다. 그 예언을 실현해 보이겠다는 듯 사디 베닝이 나타났다. 사디 베닝은 열다섯살에 선물받은 어린이용 홈비디오 카메라로 일기 쓰듯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기록했다. 비디오아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는 야심이나 기대를 품고 시작한 일은, 물론 아니었다. 북미 인디영화계에 ‘픽셀 비전’ 붐을 일으켰던 사디 베닝의 최근작 <단조로운 삶>은 미학적 실험과 초저예산 여성주의 영화제작의 모범이 될 만한 작품. 밀워키 노동계급 가정의 소녀 타일러는 예술에 빠져 사는 아빠와 헤어져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와 강퍅하게 살고 있다. 타일러는 커서 멋진 남자가 되는 게 소원인 양성 소녀로, 무료하게 텔레비젼을 보거나 게이인 위층 아저씨와 어울리는 게 낙이다. 종이에 이목구비를 쓱쓱 그려넣은 커다란 가면을 쓴 배우들은 어색하게 과장된 연기로 일관하고, 거친 화소의 흑백화면은 작은 박스처럼 포맷팅돼 답답한 느낌을 주지만, 이 형식적 실험은 영화스토리는 물론 주제와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정상적이라는 것, 아름답다는 것에 ‘절대 기준’이 존재하는 한, 이들- 양성 소녀, 싱글 맘, 게이- 의 일상은 소외와 고독과 좌절과 밀실 공포의 ‘단조로운’ 반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디 베닝 특별전은 이 밖에도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성찰을 글과 그림과 독백에 실어낸 단편 실험영화 <걸파워>와 5개 주제로 사회와 여성의 관계를 유머러스하게 풍자하는 단편애니메이션 <쥬디 이야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홍보 전략에 대한 비판을 담은 뮤직비디오 <소녀 마케팅> 등으로 사디 베닝의 활동 궤적을 훑고 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태동과 함께 카메라를 잡았던 소녀는 이제 서른살의 여인이 됐고, “하루가 다르게 업데이트되는 테크놀로지에 종속되고 싶지 않다”며 잠시 영화를 떠나 있다. 기이한 아이러니다. <분노를 터뜨려라!: 트라이브 8밴드에 관한 다큐멘터리>(Rise Above: The Tribe 8 Documentary) 감독 트레이스 플레니건/ 미국/ 2002년/ 80분/ 여성영상공동체 프로그래머 추천사 _ 여성 록가수로 살아남기 위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 밴드 이야기 “무서워요. 적응이 안 되네요. 그들에게도 도덕 관념이란 게 있는지, 의문이네요.” 남자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입을 모아 말한다. 여자 관객도 크게 즐긴 기색은 아니다. “음악은 정말 형편없어요. 그런데 공연이 흥미롭긴 하네요.” 여성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펑크록 밴드 ‘트라이브 8’의 공연 관람 소감이다. 이들의 공연엔 일정한 레퍼토리가 있다. 우선 멤버 대부분이 토플리스로 무대에 등장한다. 남성용 트렁크 차림의 리드 싱어는 그 속에서 거대한 인조 남성 성기를 꺼내 보인다. 그리고 스트레이트한 남성 관객을 무대로 끌어올려 머리채를 잡고 무릎을 꿇려 그 물건에 대고 오럴섹스를 하게 한다. 사도마조히즘적 성행위를 연상케하는 퍼포먼스가 줄줄이 곁들여진다. 노래 가사와 무대 매너도 이와 다르지 않아, 노골적이고 무례하며 폭력적이다. 보통 상식과 취향을 가진 이들이 불편해하고 불쾌해할 만하다.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이들의 퍼포먼스에 대한 저항이 우세하다. 엄연히 “여성에 대한 폭력”이며, “과도한 성폭력의 재현”이라는 이유에서다. <분노를 터뜨려라>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에 크게 ‘충격’을 받은 한 여성 영상작가가 “에스트로겐의 노예가 되길 거부한” 그들의 신념을 캐내기 위해 무려 4년 동안 카메라를 돌린 결과물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트라이브 8 밴드의 공연 실황과 이에 대한 반응들, 그리고 멤버 개개인을 따라붙은 밀착 인터뷰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신념이 어떤 맥락에서 싹트게 됐는지를 차분히 따져 묻는 것. 그리고 이들의 극단적인 행동들은 여성 뮤지션이 정형화된 성적 이미지로 어필해야 한다는, 그리고 활동 장르의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단지 노동계급의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비정하게 배척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임을 역설한다. “행실이 바른 여자는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선언과 극단적 실천에 대한 논쟁을 부추길 만한 작품.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사람들] 조폭 에미나이 고저 앉아보라우

나, 이번에는 여기 나옴둥~~.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 때로는 웃기는 아버지, 그래서 무엇이 진짜인지 모를 아저씨, 주현이 <조폭 마누라2: 돌아온 전설>(감독 정흥순, 제작 현진시네마)에 ‘고사채’로 출연한다. <박대박>에서는 못 말리는 얌체 변호사 아들을 상대로 코미디 법정극 한판을 겨루는 성실 그 자체의 판사로, <해피엔드>에서는 늙수그레하면서도 심성 고운 서점 주인으로, <친구>에서는 무서운 아버지이자 전설 속에 묻혀간 조직폭력배의 두목으로, 그리고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는 전설을 타고 돌아오자마자 굳센 아줌마에게 곤죽이 되는 조폭 두목 백사로, 정직한 판사에서 웃기는 조폭 두목까지 어느 것 하나 어색하지 않은 이 아저씨. 그 아저씨의 또 다른 배역 고사채가 무슨 뜻이냐고? 말 그대로 높은 사채! 북한에서 미그기를 몰고 남하하여 대한민국 시장통 한구석에 사채업을 차린 이 불굴의 평안도 사나이, 그에게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그녀가 바로 기억을 잃어버리고 어찌어찌 중국집 ‘슈슈’의 여종업원이 된 여두목 차은진. “에미나이 고저 앉아보라우.” 악랄하게 모아둔 돈을 앞세워 흠모의 정으로 뻔뻔하게 늘어붙는 고사채의 역이 이번 <조폭 마누라2: 돌아온 전설>에서 주현의 모습이다. 오래 전에 이미 <서울 뚝배기>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독특한 억양을 구사하며 “껄랑요~”라는 유행어를 창조해내기도 했던 실력으로 이번 영화에서도 멋들어지면서도 코믹한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할 예정이다.

[새 영화] 11일 개봉 <링0-버스데이>

사다코가 우물에 빠진날 공포는 시작된다 스즈키 고지의 소설 <링>과 나카다 히데오가 감독한 영화 <링> 사이에 몇가지 차이가 있지만, 공포를 유발하는 요소는 같다. 비디오라는 흔하디 흔한 매체를 통해 죽음의 바이러스가 유포된다는 것, 그리고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텔레비전 수상기에서 원혼이 머리 풀고 기어나온다는 것. <링0-버스데이>는 제목(‘버스데이’)이 말하는 대로 그 공포의 시원을 밝히는 영화다. 사다코가 어떻게 우물에 빠졌는가를 보여주는데 93분이 바쳐진다. 어머니가 죽고, 고향을 떠나 극단에서 새 삶을 찾는 사다코는 아직 자신의 초능력을 깨닫지 못한다. 천진하고 섬세한 성격의 사다코가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그 힘은 반사적으로 그 요인을, 사람을 치명적으로 파괴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꼬리를 물자 흥분한 단원들은 사다코를 살해한다. 초능력은 다르게 발전할 수도 있었다. 사다코를 사랑하게 된 음향감독 도야마가 병원에서 목격한 기적과 같이. 사다코는 불치의 환자를 일어서게 한다. 쓰루타 노리오 감독은 초능력의 대립되는 두 측면을 갈등시키며 <링0…>를 비극으로 끌고간다. 순결한 여주인공과 악마적 초능력을 분리시키려는 과도한 노력이 사다코라는 인물을 얇게 만들어버린 결과를 빚었다. 한가지, 이 영화는 <링> 애호가를 위한 외전이지만 시리즈를 못 봤어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을 만큼 독립적인 ‘전편’이다. 11일 개봉. 안정숙 기자 namu@hani.co.kr

10여년 만에 스크린에 나타난 배종옥

당찬 여성에서 떠도는 여인으로 세월의 더께 배종옥 연기의 변화 <질투는 나의 힘>이 주는 또다른 즐거움은, 작은 텔레비전 상자에 갇혀있던 배우 배종옥을 <걸어서 하늘까지>(1992) 이후 10여년 만에(그는 97년작 <깊은 슬픔>은 자신의 ‘본격적’인 영화에서 제쳐놓는다) 스크린에서 만난다는 사실이다. “의사가 곡기를 먹으래”라며 텅빈 냉장고 곁에 뻥튀기 한봉지를 두고 사는 성연의 얼굴을 볼 땐 가슴이 휑하게 쓸쓸하다. 그는 성연을 ‘과거에 커다랗게 믿었던 부분에서 상처를 받은 여자, 그 순간 빠질 수 있는 공황상태에 있는 여자’일 거라 생각했다. “늘 담배와 술을 가까이하는 여자, 나를 그냥 내버려두고 사는 여자, 내 감정 가는 대로 사는 느낌의 이런 자유로운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게 즐거웠어요.” 아마 드라마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이 없었다면 배씨의 이런 모습은 몹시 당혹스럽게 느껴졌을지 모른다. 한때 그는 ‘당돌한 커리어우먼의 표상’ 아니었던가. 당찬 여성에서, 무너질 듯한 삶의 여성에서, ‘세상을 부유하는’ 듯한 성연에 이르기까지 배씨는 한겹한겹 새로운 이미지를 덧입혀왔다. 완전한 변신이라기보다, 세월과 함께 쌓인 변화가 선후 없이 조금씩 안에서 비쳐나온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배씨가 “성연이 참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라 말할 때, 그 말은 그 자신에 대한 말 같기도 했다. 현실은 “아마 내 앞에 성연 같은 인물이 있다면 왜 그렇게 사니, 붙잡고 얘기할 것 같아요.” 가끔 “스스로 자학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야 할 일을 노상 꼽고, 작품에 들어가면 세상사·가족사에 신경을 꺼버려야 한다는 배씨다. 성격이나 말투 모두 배씨는 선명했다. 그동안 영화를 외면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그는 “벗는 게 싫어서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질투는…>의 시나리오에는 원래 성연의 가슴 노출 장면이 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캐릭터인데 도저히 감독님이 바꿀 수 없는 장면이라면 다른 배우를 선택해달라 감독에게 전화했어요.” 문화예술인 대상 시사회가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저기 머리 곱슬한 분도 감독님이에요”“저 감독은 어떤 영화 만들었죠” 스스럼없이 물어보는 것도 아는 척-있는 척 하는 것보다 명쾌하다. 그 선명함이, 여배우들에겐 (참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치명적’이라는 이혼을 겪고도 끊임없이 시청자와 관객에게 ‘새로운 발견’을 안겨준 배우 배종옥의 힘이 아닐까.

아톰! 나의 지구를 지켜줘!

아톰 생일맞아 일본열도 '들썩'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흐르며 눈을 뜨고, 팔을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톰의 모습을 기억하는지. 지난 7일 ‘우주소년 아톰’의 탄생일은 일본뿐 아니라 아톰을 보고 자라난 전세계 팬들에게 설레는 날이기도 했다.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에 따르면 아톰은 2003년 4월7일 도쿄 다카노바바의 ‘과학성’에서 탄생했다. 덴마박사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만든 또다른 아들 아톰은 10만마력의 힘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로켓추진의 빨간 장화를 신고 하늘을 가르며 사람들을 구했었다. 아톰의 탄생일을 맞아 일본 후지 TV에선 새로운 아톰 시리즈 50부작이 시작됐다. 아톰이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제작된 건 1963년, 1980년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다. <아스트로보이·철완 아톰>(감독 고나카 가즈야)이라는 제목의 이번 시리즈의 무대인 ‘패러럴월드 메트로시티’는 아톰처럼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들이 차례로 탄생해 인간과 공존하고 대립하는 세계다. 또한 1976~88년 오사무가 스튜디오를 설치했던 도쿄 다카노바바에는 열차 발착신호음이 아톰 주제가로 바뀌고, 아이 이름을 아톰으로 짓는 게 유행하는가 하면, 아톰 과자·초콜릿·신용카드·기념주화 등이 날개돋친듯 팔렸다. 3월부터 리뉴얼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한 다카라츠카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의 ‘아톰탄생의 순간’을 재현하는 특별전시실엔 매일같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7일자 신문에서 3개면에 기사를 실으며 “우리세대의 로봇 관계자들은 아톰이나 철인 28호를 동경했던 사람들”이라는 과학자들의 말을 전했다. 데즈카의 딸이 기획한 음반을 비롯해 아톰 기념 CD도 속속 등장해 침체한 음반산업에 희망을 줄 정도로 아톰은 경기침체의 일본에 다시 효자구실을 하고 있다. 세계 팬들 추억에 젖어 하지만 아톰이 일본에게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1950년 한 잡지에 데즈카 오사무가 <아톰대사>를 연재할 때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아톰은 ‘평화의 상징’이었다. 당시의 수폭실험 등을 보고 데즈카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사용하는 가상의 나라를 ‘아톰(원자) 대륙’이라 이름붙여 시작한 시리즈물. 등장인물 가운데 하나였던 로봇은 1953년 인간의 마음을 가진 <철완 아톰>의 주인공으로 사랑을 받았고, 1963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화된 뒤 전세계 40개국에 수출되었다. 데즈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술취한 미군 병사들에게 ‘점령국의 언어’를 못한다고 무섭게 얻어맞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은 내 만화주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지구인과 우주인의 알력, 이민족 사이의 분쟁, 로봇과 인간과의 비극…. 아톰의 테마가 바로 이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마지막회, 지구를 지키기 위해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던 아톰의 모습은 지금과 같은 시기, 더 생생할 수밖에 없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만만치 않는 주제들의 대중적 친화력,<그녀에게>

■ Story 식물인간이 된 발레리나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를 담당하고 있는 남자 간호사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에게는 평소 흠모해오던 알리샤를 돌볼 수 있게 된 것이 생애 최고로 기쁜 일이다. 그로서는 사랑을 하는 중이다. 여자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를 취재하러 갔다가 사랑에 빠졌던 저널리스트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또한 소에 받혀 식물인간이 된 리디아 때문에 병원에 온다. 같은 사정을 가진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서로 우정을 나누지만, ‘여자친구’의 엇갈리는 운명에 따라 두 남자의 운명도 서로 엇갈린다. ■ Review 코마 상태의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까지 하겠다는 남자 이야기. 이건 사실 기이한 강박증이고 호러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소재다. 그런데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시원찮은 남자에게 숭고한 사랑의 서사를 부여한 뒤 다시 모든 것을 미세한 분말처럼 가공해서, 마치 아기 피부에 스며드는 고급 영양크림처럼 보는 이의 가슴에 스며드는 멜로드라마로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했을까. 인간은 대개 삶과 죽음 사이에 줄을 하나 죽 그어놓고 이쪽 아니면 저쪽을 사유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건널 수 없는 경계라는 전제 위에서 만들어진다. 알모도바르는 특이하게도 삶과 죽음 사이에 그어진 그 줄 자체를 유심히 응시한다. 그리고 줄 위에 걸쳐져 있는 존재를 발견한다. 이른바 식물인간이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귀찮아하는 이 존재에 대해서 알모도바르는 특별한 방식으로 주목한다. 바로 식물인간의 살아 있는 몸을 매개로, 사랑의 육체성을 이야기해보는 거다. 살아 있는 몸(알리샤)을 돌보고 애무하고 그 몸이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을 대신 체험해본 다음에 자상하게 들려주는 사랑의 행위(베니그노). 영화 <그녀에게>는 이 커플이 얼마나 근사한지를 그럴듯하게 꾸며 보여준다. 이건 사실 능청맞은 코미디다. 그러나 알모도바르는 이 유머러스한 로맨스가 아늑한 공상에 안주하도록 놓아두질 않는다. 그는 이 사랑이 은폐된 한에서만 지켜지며, 노출되는 순간 하나의 질병 혹은 범죄로 받아들여지고 격리되리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친구’인 마르코조차도 베니그노에 대해 연민은 갖고 있지만 베니그노의 사랑이 관념적이라고 생각한다. 여행 전문 저널리스트인 마르코는 섬세함과 현실주의를 겸비한 캐릭터다. 그는 폭 넓고 예민한 정서 덕분에 리디아와 베니그노의 특이한 내면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현실주의 때문에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연인을 사실상 포기한다. 그는 기적과도 같은 증거가 눈앞에 나타난 다음에야 ‘그녀에게 말을 걸라’(Talk to her, 스페인어의 원제 Halbe con ella는 이런 맥락에서 왔다)던 베니그노를 진심으로 이해한다. 너무 늦은 시간에. 마치 우리처럼.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비극이 된다.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에 감금되어 있다. 여자 투우사의 스캔들을 캐내려고 악귀처럼 달려드는 텔레비전 진행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치부되는 식물인간 등 여성이 일차적인 희생자로 시작한다. 이어서 그 여성들에 대해 연민과 사랑을 갖게 된 남성들이 차례로 감금된다. 감옥에 갇힌 베니그노는 말할 것도 없고, 마르코 역시 알리샤에게 접근하지 말도록 요구받는다. 그런데 사회체제의 관용없음을 다루는 알모도바르의 방법이 너무나 부드러워서 고통마저도 감미롭게 여겨진다. 이처럼 알모도바르의 시선은 현실(real)로부터 붕 떠오르되(sur) 낮은 높이에 체공하면서 현실을 다시 바라본다. 이 짓궂음과 통찰을 쉬르리얼리즘(surrealism), 초현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녀에게>가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적 그림이나 안토니오 가우디의 분방한 건축물을 연상시키는 것은 비단 스페인 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특성이 멜로드라마 장르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게>의 커다란 특징이자 힘이다. ‘아트영화’로 낙인찍힐(?) 만한 요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친화력이 강한 것은 멜로드라마의 힘일 것이다. 이 틀 안에서 알모도바르는 육체성, 욕망, 사랑과 성, 사회적 편견 등 만만찮은 주제들을 편안하면서도 탐미적으로 풀어나간다. 사실 멜로드라마에 대한 경애는 알모도바르를 명망있는 대부분의 영화작가들과 구별짓는 중요한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신파조 섞인 사실주의 톤으로 극을 끌어가는 배우들의 능청도 이 유머러스하면서도 비극적인 멜로드라마에 단단히 기여한다. 특히 하비에라 카마라는 영화의 절대적인 중심이다. 단순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베니그노의 외모뿐만 아니라 눈빛과 목소리, 손길 등 모든 것이 베니그노식 사랑을 표현하면서 카메라를 자기 정서대로 끌고 다닌다. 한 작가가 이보다 더 나은 작품을 낼 수 있을까 두려워지는 상태. 알모도바르는 지금 절정에 도달한 것 같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 안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르를 취해 키치적인 악동으로부터 대중예술가로 정련해간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를 넘어서서 스페인이 배출한 여러 분야의 최고 예술가들과 나란히 거론될 만하다. :: <그녀에게> 속 예술지적이고 감각적인 <그녀에게>는 다양한 예술 장르들을 영화 안에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사고를 당하기 전의 알리샤와 딱 한번 대화를 했던 베니그노는 알리샤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을 섭렵하고 다닌다. 병원으로 돌아와서 알리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다. 그런 편력 중 하나가 흑백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Shrinking Lover)다. 여성과학자를 사랑하는 알프레도는 애인이 개발 중인 약품을 들이마신 뒤 몸이 점점 작아지는 부작용을 겪는다. 손가락만한 크기로 줄어든 나머지 애완용 인형처럼 애인의 몸을 더듬다 못해 드디어 여인의 몸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자궁 속으로의 퇴행이라는 남성 콤플렉스를 시각화한 이 기막힌 유머는 알모도바르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영화 안에 7분 분량으로 삽입한 것이다. 피나 바우쉬가 직접 공연한 무용은 이 영화의 앞과 뒤를 열고 닫는다. <카페 뮐러>가 영화의 첫 장면으로 사용되었는데 무대 위에 있는 두 여성의 고통을 눈물지으며 바라보는 객석의 두 남성까지 연결지음으로써 영화의 상징적인 서두 기능을 맡도록 했다. 근년의 피나 바우쉬는 한 도시에 오래도록 머물며 창작한 ‘세계 도시 시리즈’를 발표 중인데, 이 영화의 끝장면에 삽입된 것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배경으로 한 ‘마주르카 포고’다. 짧은 분량이지만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통합적으로 확장한 피나 바우쉬의 혁신성을 맛볼 수 있다. 가장 친숙한 것은 ‘쿠쿠루쿠쿠우우’ 하는 비둘기 울음소리가 인상적인 <비둘기>(Cucurrucucu Paloma)라는 노래. 19세기 스페인의 작곡가 이라디에르가 쿠바를 여행하던 중 하바네라 음악에 매료되어 만든 곡으로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에도 나온다. 이 영화에서는 브라질 출신의 카에타노 벨로소가 직접 출연해서 불렀는데, 여자 투우사 리디아의 강인한 섹시함과 공존하는 감상적인 슬픔, 죽음의 전조를 환기시킨다. 이 노래를 듣기 위해 극장 표를 구입한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