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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열정이냐, 권태냐

아는 친구의 콘서트를 갔다왔다. 마지막날 마지막 공연이어서 그런지 콘서트장은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나중에 듣기론 첫날부터 매진 행렬이었다고 한다). 공연내용도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무대 뒤로 찾아온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거기엔 내가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분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연자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받은 감동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온전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들어보지 못할 것 같은 찬사의 파노라마였고 일종의 헌정시였으며 감동의 물결이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고 내가 조금만 여린 놈이었으면 그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엉엉 소리내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표현, 너무 아름다워요…. 엉엉.” 그들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때 엉거주춤 그 틈에 끼어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나는 그런 말을 못할까? 왜 나는 그런 표현을 못할까? 나도 분명히 감동받았는데…. TV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어떤 방송현장을 찾아갔는데 연출자가 오케이 사인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열연을 아끼지 않은 배우에게 뛰어가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그 배우를 거의 안다시피 했다는 애길 들었다. 그 얘길 들으면서 난 정말 한번이라도 내가 배우나 스탭한테 느낀 감동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한번도 없었다. 분명 감동받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을 하다보면 몇 가지 떠오르는 화두 같은 게 있는데 그중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단어가 바로 열정적 또는 정열적이란 말이다. 누군가에게 열정적이다 혹은 정열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것은 대개 그 누군가에게서 보여진 또는 표현된 어떤 것들을 근거로 말을 하게 된다.예를 들어, 그 사람, 말하는 게 참으로 열정적이야. 또는 거참, 일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열정적이더군. 하다못해 그 친구, 밤새 정열적으로 포커를 치더니만…. 뭐 이렇게 누군가에게 시지각적으로 인상지워진, 보여진 것들이거나 표현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열정이나 정열이 한개도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꿔 말해 나는 너무 표현 못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왜 안 되지? 표현하는 순간 그 진정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작 이렇게 유치한 발상이 내가 표현에 미숙한 이유의 전부일까? 그냥 그도 저도 아닌 습관일 뿐인 걸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인정머리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상당히 건조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면서 다른 이를 섭섭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왜 가장 고조되고 충만되는 그 순간에 싸늘하게 냉각되는 걸까? 오래 전에 고 김현 선생이 죽파 김난초 선생을 두고 “김죽파는 계면조에 미친 젊은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의 권태를 사랑하는 분이다”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 감동받은 적이 있다. 나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뿐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도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뿜어내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과 과연 궁극은 무엇일까 하고 회의하고 반문하는 노예술가의 처연함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불안하고 게으른 화두를 짐처럼 들고 서 있다. “그 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김지운 |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원작영화, 초라 했다

전에도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의 열성팬입니다. 최근 방영되는 시리즈 중 이처럼 다양한 재미를 주는 작품도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이미 전설이 된 <`X파일`>보다 훨씬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싸구려 B급 호러영화, 수퍼 히어로만화, 십대 소프 오페라가 뒤섞여 기가 막힌 장르 칵테일을 만들어 놓은 그릇 안에서 동성애나 학교 총격사건 같은 첨예한 이슈부터 진지하기 그지없는 고딕 로맨스를 거쳐 베리만식 존재론까지 당연하다는 듯 넘나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시리즈를 단순한 십대 취향 액션물이라고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이 작품에 원작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더욱 그렇지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영화의 출시제와 텔레비전 시리즈의 방영제가 달랐으니까요. 비디오 출시제는 <루크 페리의 뱀파이어 해결사>였고 MBC에서 방영될 때 텔레비전 시리즈의 제목은 <미녀와 뱀파이어>였지요. (도대체 누가 이 방영제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이 이 제목을 쓸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솟습니다. 너무 난처해요.)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를 먼저보고 원작영화 <버피>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몇년 동안 애정을 폭폭 쏟아가며 익혀왔던 ‘버피버스’와 이 영화의 설정은 전혀 다른 걸요. 물론 ‘해결사’나 ‘후견인’과 같은 기초적인 설정은 같습니다만, 같은 건 그것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기 전선에서 소외된 틴에이저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척점에 선 골빈 금발머리 치어리더죠. 이 영화의 버피는 너무나도 얄팍해서 텔레비전 시리즈의 코딜리아도 셰익스피어 캐릭터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죽은 흡혈귀들이 텔레비전 시리즈에서처럼 근사하게 가루가 되지도 않고, 윌리엄 S. 버로우즈에서부터 로드 러너 쇼까지 펼쳐져 있는 풍부한 문화적 인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윌로우, 잰더, 자일즈, 페이스, 스파이크와 같은 멋진 조연들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왜 크리스티 스완슨이 감히 자기를 버피라고 부르느냐 말이에요. 버피는 사라 미셸 겔러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불평불만을 무시하고 영화를 보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버피버스’만큼 복잡미묘하게 흥미롭지는 않지만 단순분명한 대조가 꽤 재미있는 효과를 내는 작품이죠. 예쁜 금발을 휘둘러대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캘리포니아의 금발 미녀가 중세의 악귀들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단순무식한 아이러니 말이에요. 물론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유명해진 사람들을 발견하며 ‘와, 쟤는 힐라리 스왱크잖아! 쟤는 데이비드 아퀘트네? 아니, 벤 애플렉이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하고 외치는 재미도 있고요. 그러나 아무리 이 영화를 좋게 보려고 해도, 그 노력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아마 제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진짜 이유는 경건하게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영화는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꼭 ‘좋아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버피> 팬들이 저처럼 상대적으로 초라한 원작영화를 통해 뒤에 나온 시리즈의 우월성을 느끼며 흐뭇해할 겁니다. djuna01@hanmail.net

나? 광폭미감이야! <졸업>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을 본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다. 종로 뒷골목에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서였다. 그 극장은 재개봉관, 그때 말로 2류 극장이었다. 매표구 위에는 ‘미성년자 입장 불가’가 선명했는데, 아무튼 나는 입장했다. 규율은 늘 위반으로 마무리되니까. 내가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건 그것들이 대체로 해피엔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러 언해피하게 끝나더라도 그 불행은 대개 감미료를 둠뿍 친 멜랑콜리에 가깝다. 극장 밖의 현실은 온갖 불행으로 그득 차 있으므로, 영화를 보면서까지 그 불행을 되씹으며 자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그래서 <졸업>의 해피엔딩에 나는 흡족했다. 번역자의 지나친 배려 때문에 로빈슨 부인이 일레인의 어머니인지 숙모인지가 좀 섞갈렸지만. 우선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만든 건,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노래들이었다. <스카보로 시장> <침묵의 소리> <로빈슨 부인> 같은 노래들을 내가 그 영화에서 처음 들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영화를 본 뒤에는, 그 노래들을 지겹도록 들었다. <졸업>은 스토리나 그림 못지않게 소리로 한몫 본 영화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노래들보다 더 내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은 일레인 역을 맡은 캐서린 로스의 미목수려(眉目秀麗)다. 나는 세상에 저렇게 기막히게 빚어진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하며 넋을 놓았다. 과장없이 적어도 그뒤 한달간, 나는 밤마다 나의 캐서린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그뒤 오래도록 나는 친구들에게도 캐서린 로스의 미색에 대해 떠벌렸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내 심미안을 의심받았을 뿐이다. 그런 떡대가 어디가 좋으니?(아닌 게 아니라 캐서린 로스의 어깨는 남자 못지않게 넓다.) 세월은 흘러서 1993년 4월 말. 나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르투케라는 해변에 있었다. 유럽에서 8개월간의 저널리즘 연수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일종의 졸업여행을 온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베르뒤르라는 카페에서 나는 주잔나라는 여자 동료와 종알대고 있었다. 주잔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친구였다. 우리는 연수 기간 내내 붙어다녔다. 침대를 함께 쓰지는 않았지만. 르투케의 베르뒤르에서, 문득 십대 때 본 영화 <졸업>이 생각났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졸업여행’중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것은 주잔나의 어깨가 캐서린 로스의 어깨처럼 쩍 벌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카페에서 내다보고 있던 바다의 쪽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옳다면, 영화 <졸업>에는 푸른 빛의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것도 물빛이다. 비록 바닷물이 아니라 풀장의 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주잔나에게 <졸업> 얘기를 꺼냈다. 아쉽게도 그녀는 그 영화를 못 봤더구먼. 그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도시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단지 이틀 동안 머물렀을 뿐인 부다페스트에 대해 그녀에게 얘기했고, 그녀는 오로지(1988년 올림픽 때) 텔레비전으로만 본 서울에 대해 나에게 얘기했다. 브라운관 속에서 본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에 대해 그녀가 떠벌리기에, 나는 육안으로 보는 서울,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 서울이 얼마나 흉하고 끔찍한 지옥인지를 찬찬히 얘기함으로써 그녀의 지리학적 교양을 크게 함양시켜 주었다. 최근에 <글루미 썬데이>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 사람 여럿 죽였다는, 같은 제목의 노래가 좋아서 영화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비치는 부다페스트 시가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기 가본 게 언제던가, 언제라도 다시 가볼 수는 있을까, 저기 어디쯤 주잔나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마구 솟구쳤다. 브라운관 속의 부다페스트는 내가 실제로 본 부다페스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아무렴! 마땅히 그래야지!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의 주잔나는 그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이름을 모르겠다. 그냥 ‘글루미’라고 부르자)로 대체됐다. 정말 어디서 기가 막히게 예쁜 아가씨를 찾아내 캐스팅했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헝가리산(産)인지 독일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막판의 할리우드식 ‘해피엔딩’- 권선징악 레슨이라고 해야겠지- 이 나를 위로했다. 마지막 장면에 늙은 글루미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나는 뭔가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격조라는 측면에선 그 부분이 없는 게 더 나았겠지만. 글루미는 캐서린 로스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캐서린 로스가 활명적(活命的)으로 아름답다면, 글루미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그 사이에 내 취향이 변한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도 캐서린 로스와 글루미가 동시에 좋다. 얼마 전 친구와의 술자리 대화 한 토막. 나 : 난 TV 연기자 가운데 한혜숙씨와 유호정씨가 젤 좋아. 친구 : 둘 다 미인이고 분위기가 있지만, 계열이 전혀 달라. 어느 한쪽을 좋아할 순 있지만, 두 사람 다를 좋아한다는 건 이해가 안 가네. 나 : 난 광폭미감이거든.

웃음의 파시즘, 비상구가 없다

<쇼! 무한탈출> SBS 토요일 저녁 6시 ‘생존’을 위해 눈물나는 게임을 벌이고, ‘목표 달성’을 위해 안쓰러운 몸부림이더니, 이번에는 ‘탈출’해야 한다고 대소란이다. 이쯤 되면 주말 저녁 텔레비전 앞은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이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악다구니들의 투쟁의 장임을 선언한다. 삶의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돌아온 안방에는 또다른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니까. ‘전천후 만능 쾌락도사’를 선포한 연예인들이 샌드백이 될 준비를 하고 줄줄이 사각의 링으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다. 그리고 ‘큐’ 소리와 함께 말초적인 신경만 곤두세운 ‘바보’가 되면 그만이다. SBS가 봄 개편을 맞아 3월17일부터 새롭게 선보인 오락프로그램 <쇼! 무한탈출>(연출 남형석·공희철·유윤재)은 제목부터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탈출의 범주가 애초부터 ‘무한’이다. 다시 말해 탈출할 대상이 그 범위가 정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모든 고통받는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이 기획의도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대담하고 또한 영리한 발상인가. 적어도 소재가 떨어져 문을 닫는 궁핍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막상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 보면 탈출해야 하는 ‘고통’은 황당하고 궁색하다 못해 초라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한다. 자유롭고 편안해지기 위한 탈출을 생각했다면 미리 마음을 고쳐먹자. #1. 신인에서 국민가수로의 ‘탈출’ 첫 음반을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짜’ 신인가수가 과연 국민가수로서의 가능성이 있는지 시험대에 선다. 이를 위해 600명의 ‘시민 대표단’이 꾸려지고, 가수 초년생은 그들 중 80%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힘찬 콧바람을 비롯한 온갖 잡기를 동원한다. 어, 노래로 실력을 인정받는 것 아니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그의 노래 실력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이 대표단들은 사실 그 가수가 판을 낸 사실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가수 아무개를 구경하고 심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 앉은 것뿐이고, 따라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구태여 노래 실력‘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연출진들은 새삼 십원어치의 값도 못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이른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안티’세력을 출연시킨 것이 방패막이인 듯싶은데, 이들의 역할도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들은 결국 이 신인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단순한 구실 외에는 역할지어진 바 없음에서다. 이제 단순하게 정리하겠다. 그냥 띄우자는 거다. ‘신인 띄우기’의 오래된 버전업이다. #2. 一言二口에서 言行一致로의 ‘탈출’ God의 김태우가 말 실수를 했단다. 뭔고 하니, 옛날 옛적 어느 방송에 나와 “저희는 음식을 남기는 것은 용납 못하죠” 한 게 실수였단다. 왜 실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거두절미, 문맥무시. 단지 그 말을 내뱉은 게 화근이 되어 이들 다섯 멤버는 하루 저녁에 301가지의 중국 요리를 뱃속에 처형시켜야 하는 고문을 당한다. 음식을 다 못 먹을 때엔 음식값 배상과 더불어 무시무시한 레슬러의 ‘코브라’ 관절꺾기를 겪을 판이다. 그들은 142가지의 음식을 먹는 것으로 1회 방영을 마쳤다. 앗, 이번엔 방송 도중 사회자 김진수의 발언이 문제가 됐나보다. 그는 다음 시간에 온갖 보신음식을 먹어야 하는 고문을 당할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이제는 이유를 들을 차례다. 연출진들은 ‘스타의 말 한마디가 초래하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호언장담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사소한 말이라도 책임감을 갖고 실천케 함을 의도로 했다고 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을 용납 못한다”는 발언이 “아무리 많은 음식이라도 다 먹어치울 자신있다”는 호언장담으로 저도 몰래 바뀌는 순간이다. 앞으로 말조심 할지어다. '막걸리 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법이 여기에 있다. #3. 계급사회에서 평등사회로의 ‘탈출’ 대통령도 하지 못한 숙원의 사업 ‘계급과 계층의 화합’을 이 코너가 하겠다고 나섰다. 거기다 남녀의 화합까지. 보통 큰 과제가 아니다. ‘인간 대화합’이 기획의도라 하면 가히 메시아적인 프로그램이다. 처음엔 그저 이성관계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서로 다른 계층의 연인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소박한’ 의도로 출발했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는 몇쌍의 커플이 필요했다고. 그래서 생각한 첫 번째 커플이 ‘엘리트 모범생’ 남자와 ‘비행 가출소녀’다. 사실 조건은 더 있다.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부모 밑에 예절바르게 큰 남자라는 점과 말 끝마다 욕을 달고 살지만 근본은 착한, 얼굴 예쁜 여자라는 점. 분명 통념을 깨뜨리는 커플이라고 소개했는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이다. 굳이 할리퀸 소설을 뒤적이지 않아도 드라마, 영화에서 날마다 보는 게 이런 커플일 텐데, 작가가 남자라서 잘 몰랐던 모양인가. 이 커플을 가지고 무슨 인간 화합에다 고정관념 타파를 이야기한다는 걸까. 오히려 이런 모습이 계층의 전형성을 확고히 다지고, 케케 묵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마저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런데 묘하다. 이 코너를 보고 있다보면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고 감정의 울림이 있다. 똑똑한 연출이다. 사실 자칫 계층의 차이에서 오는 몰이해와 갈등의 요소들을 로맨스라는 커다란 봉지에다 꽉꽉 봉인시켜버렸으니까. 남는 건 사랑이다. 사랑 앞에 죄는 허물어지고, 남는 건 예쁘디 예쁜 ‘러브 스토리’다. 다음에 준비중인 커플이 혹시 강남녀와 농촌남의 ‘화합’은 아닐는지. 두고볼 일이다. #4. 못난이에서 예쁜이로의 ‘탈출’ 가장 논란이 많이 일었던 부분.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는 못생긴 여자를 성형으로써 외모를 개선시키고 아울러 자신감과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하는 것이 코너의 목적이다. 앞에서 나열한 코너에 비하면 가장 의도가 왜곡되지 않고 잘 살아 있는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더는 왜곡될 곳도 없다. 너무나 간단 명료한 목표니까. 그런데 문제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 요인에서이다. 한 가지는 과연 외모를 개선하기 위한 마지막 종착점이 성형수술이냐 하는 점과 또 한 가지는 외모의 개선만이 자신감과 삶의 의욕을 가지도록 하는 요소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외모의 평가란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 그것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점에 문제가 있다. 성형수술이 극단적인 예인데, 미의 개념을 단지 ‘예쁘다’로 한정, 축소시키고 그것의 요소마저 획일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쁘기로만 따지면 이 세상의 단지 몇 %에 불과한 소수만이 그 혜택을 누릴 뿐이다. 아름다움의 접근방법은 다양해져야 한다. 물론,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외모의 개선이 일조하리라는 생각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외모의 개선방법 가운데 성형수술을 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신의 외모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 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인정하기 전에 먼저 부정해버리는 태도를, 방송이 앞장서서 조장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방송이라면 그녀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다양한 시도를 매회에 걸쳐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5. 가학과 엽기와 선정으로부터의 ‘탈출’ 현재의 쇼 오락 프로그램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 세 가지는 가학성, 엽기성, 선정성이다. 그런데 비난하지 말지어다. 위의 세 가지는 현존하는 오락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허탈해서, 더는 못 보겠기에 마침내 포기한 듯) 웃을 때까지’는 이들의 지상과제이자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오락 프로그램이 ‘재미없어서’ 못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즐기지 못하는 것은 오락 프로가 지시하는 ‘룰’에 응하지 않아서이다. 룰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머리로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 정해진 곳에 가선 웃어줄 것.’ 파시즘적으로까지 보이는 오락 프로그램의 행태는 시청자에게 웃어야 할 곳과 야유를 보낼 순간까지 철저히 짚어준다. 이제 창의성의 부재에 따른 표절시비는 더이상 논쟁거리도 안 될 정도이고, 시청률과 상업주의 논란도 더는 지적하기에 고단한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에서는 성명서를 통해, <쇼! 무한탈출>의 폐지를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말마따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프로그램이 비단 위의 프로그램만은 아니라는 점. 아이들이 엄마 대신, 선생님 대신으로 삼고 있는 텔레비전이 이제 그 아이들의 뇌를 좀먹고 있는데, 어른들의 대응은 고작 ‘폐지하라’다. 그에 따른 대응책을 내놓길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일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이상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로 더 변하기 전에 그 텃밭을 가꾸고 지켜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더이상 방기하면 정말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이제 무시무시한 폭탄이 되었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사진제공 SBS 홍보실

몰입이라는 이름의 카타르시스, <에이리언2>

영화에 빠져서 현실을 잊는 사람들, 비디오 테이프 10개를 대여해서 밤을 새면서 보는 사람들, 소파에 누워서 케이블TV의 영화를 하염없이 보는 사람들, 대체로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영화는 심심함을 잊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영화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은 한가한 말인지 모르지만, 궁핍하단 것이 견디기 어려운 점의 하나는 심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엷게 만들고, 주위와 어울리는 일을 힘들게 만든다.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와 마주한 집 앞의 적막함이 주던 현실감의 증발을 커서도 느낀다는 것은 단적으로 심심하다는 말이다. 마루를 같이 써야 하는 셋방의 이웃들과의 ‘강제된 친밀성’도 역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주요한 수요가 하층계급에서 나오던, 영화사의 초기에 그랬듯이 영화관의 어둠은 빛이다. 현실 생활에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두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둠이 끝나는 터널 끝의 빛을 보는 일이다. 영화관의 구조, 정신분석학적 관객 이론, 카메라와 스크린의 이데올로기적 장치 등등의 이야기는 이 빛 앞에서는 모두 바래버린 얼룩조차 되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에이리언2>를 본 것은 별로 맡겨진 일이라는 걸 갖지 못하던 시간강사 시절이었고, 신혼 초였다. 결혼해본 사람은 다 알지만, 이 시기도 심심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에이리언2>는 말이 필요없었다. 몇년이 지난 뒤에, 미래의 자본주의에 대한 묘사, 감춰진 상징적 장치, 미장센의 성적배치 등에 대해 들었지만, 그 영화가 준 것은 몰입의 체험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동시상영관에서 두번을 더 보았다. 그 극장은 친절하게 좌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중 목욕탕에서 깔고 앉는 데 쓰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를 주었다. 배급받은 그 의자를 들고, 맨 앞 좌석과 스크린 사이에 있는 공간에 가 앉아서,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뒤에 취직을 해서 VTR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테이프로 빌려 보았고, 명절 특선영화로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도 빠뜨리지 않고 보았다. 그때의 몰입의 이유를 사후적인 가감없이 말한다면, SF영화 일반이 주는 비현실성, 즉 여기와 지금이 아닌 다른 공간, 시간에서의 사건이라는 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늬 SF영화의 미래와는 달리, 현재로부터 많이 발전된 것 같지도 않은 우중충한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아마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눈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에 나오는 빛들이다. 시작할 때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내부를 검사하는 빛, 수없이 나오는 모니터들의 빛, 전체적으로 너무나 어두운 영화 전체에 걸쳐서 끌어당기는 것은 그 빛들이었다. 만일 고전이라는 것이 특정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을 말한다면, <에이리언2>는 고전이다. 물론 지금도 그 영화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에일리언을 화물운반용의 작업로봇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에 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표현하는 일이다. 심심한 사람도 심심함을 표현하면서 산다.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은 가시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시적인 것과 과시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에일리언이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서 외부로의 표현이 극단적인 과잉에 달한 존재라는 점이다. 점액은 몸의 내부에서 만들어져서 외부로 분비된다. 에일리언의 경우 점액은 피부 전체를 덮고 있을 뿐 아니라 과도하게 흘러넘쳐 언제나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에다 묻혀 놓는다. 자기 표현, 자기 과시의 엄청남. 그중 입이 특징적이다. 입이 벌어지면 단순히 속살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입 속에서 나온 또다른 두 번째 입을 볼 수 있다. 입을 통해서 자기를 이중삼중으로 과시한다. 그것을 넘어서서 에일리언은 상처를 입으면 강산성의 피를 흘린다. 자신의 약점, 상처로도 상대방을 제압한다. 자신의 약점과 비루한 속내까지도 고백함으로써 힘을 과시한다. 이러한 자기과시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존재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도덕적 잣대나 논리적 반론은 어떤 처방도 되지 못한다. 그 존재의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무엇인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대상을 숙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엽기의 시대에는 최고의 스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업로봇은 그저 노동수단일 뿐이다. 로봇은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리플리는 자기라는 것이 없는 두툼한 기계의 안쪽에 숨어 있다. 로봇이든 리플리든 자기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리플리가 착용한 로봇은 원래 전투용이 아니라 그저 운반용이다. 또 한가한 말이겠지만 로봇이 에일리언을 이겨서 정말 다행이다. 그 결말이 <에이리언2>를 여전히 좋아하게 만든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절 멜로를 싹틔우다

1950년부터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법. 50년대 중후반은 폐허와 절망 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려 안간힘을 쓰던 고난의 시대였다. 유두연은 이 전후재건기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다. 영화는 이 궁핍했던 시대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위로한 거의 유일한 오락수단이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이전이므로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는 직직거리는 소음을 대동한 라디오 드라마가 전부이던 그 시절, 영화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고 눈물로 한(恨)을 씻어내게 만들었던 무소불위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유두연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30편에 이르는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60년대에 크게 유행한 전후 멜로드라마의 기초를 닦고 한국영화 부흥의 초석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된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유두연은 해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경응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식민지의 엘리트청년이었다. 40년대 후반부터 선진적인 영화평론을 발표해오던 그는 한국전쟁 동안 부산으로 피난온 영화쪽 사람들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충무로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환도 직후인 1954년 발표된 신상옥의 <코리아>. 당시의 시대정신에 발맞춰 우리의 국토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제작된 작품인데,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들을 극화하여 삽입한 일종의 문화영화이다. <유전의 애수>는 부잣집 아들과 창녀가 부모의 반대와 사회적 매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맺으려 애쓴다는 내용으로 당대의 관객에게 눈물을 펑펑 쏟도록 만든 작품인데, 이후 60년대 후반까지 크게 히트한 이른바 ‘한국적 멜로’의 한 맹아를 보여준다. <마인>과 <실락원의 별>은 우리나라 추리소설계의 거목 김래성 원작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작품. 특히 자신의 애독자와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유명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실락원의 별>은 흥행에 크게 성공해 이듬해인 1958년 그 속편까지 만들어진다. 유현목이 만든 <잃어버린 청춘>은 25시간이라는 한정된 타임프레임 안에 당대의 청춘들이 겪어야만 했던 불안하고 절박한 시대상황을 솜씨좋게 묘사해낸 수작으로 꼽힌다. 임화수가 제작한 <그림자 사랑>은 최무룡, 윤일봉과 더불어 홍콩배우들을 대거 출연시킨 한·홍합작의 멜로드라마로 홍콩에서는 <다정한>(多情恨)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홍성기가 촬영과 감독을 겸한 <산넘어 바다건너>는 당시 떠오르던 청춘스타 김지미의 매력이 마음껏 발산된 초특급 흥행작. 고아로 자라난 스물두살의 아름다운 처녀 윤경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있으라!”며 절규하던 장면이 일품이었다는 것이 모든 원로영화인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당시 수십만명을 헤아리던 전쟁미망인들의 애달픈 삶을 안타깝게 묘사한 것이 유두연의 감독데뷔작 <유혹의 강>. 엄앵란과 노경희를 비롯하여 나애심, 김의향, 정애란, 김신재 등 당대의 여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숱한 여성관객의 옷고름과 손수건을 적셨다. <귀거래> 역시 전쟁미망인이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시대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멜로. 홍성기의 <춘향전>은 같은 해 개봉된 신상옥의 <성춘향>과의 맞대결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 두 감독이 각각 자신들의 아내인 김지미·최은희를 내세워 정면대결을 펼쳤는데, 흥행결과는 배급업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성춘향>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 맞대결의 결과 그동안 멜로 분야에서 절대우위를 지켜오던 홍성기의 위세가 차츰 사그라든 반면, 신상옥은 승승장구의 연타석 홈런으로 충무로의 패자가 된다. 평생 8편의 영화를 연출한 유두연의 마지막 감독작품은 자유당 시절 국회의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한 정치영화 <어딘지 가고 싶어>. 최무룡이 개혁의지에 불타는 젊은 국회의원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전쟁 직후와 혁명 직후 각기 다른 내용과 스타일의 시나리오를 내놓는 것을 보면 유두연에게는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4년 신상옥의 <코리아> 1955년 김성민의 <망나니비사> 1956년 유현목의 <유전의 애수> 1957년 한형모의 <마인>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 ★ 홍성기의 <실락원의 별> ★ 1958년 김화랑의 <그림자 사랑> 홍성기의 <산넘어 바다건너> ★ 유두연의 <유혹의 강> 1959년 정창화의 <사랑이 가기 전에> 권영순의 <양지를 찾아서> 1960년 이용민의 <귀거래> 조성호의 <바위고개> 1961년 홍성기의 <춘향전> 1962년 유두연의 <어딘지 가고 싶어> ★는 자(타)선 대표작

카우리스마키의 무표정한 살의 음산한 개그

아키 카우리스마키(44)는 낯선 이름만큼 서먹한 얘기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핀란드 감독이다. 다섯 해 전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란 영화로 한국에 상륙했지만 그 진면목을 알리기도 전에 잊혀졌다. 21일 서울 광화문 아트큐브에서 개봉하는 <성냥공장 소녀>와 <레닌그라드…>는 카우리스마키 자신이 걸작과 졸작으로 꼽은 1989년작들로 세계 영화계가 일찌감치 알아 본 이 컬트 감독이 지닌 `겨자맛'을 강렬하게 풍긴다. <성냥공장 소녀>는 과묵한 영화다. 비쩍 마른 몸, 밋밋한 얼굴, 바삭거리듯 물기 없는 모습을 한 소녀(카티 오우티넨)는 말이 없다. 말을 잃었다. 어머니와 의붓 아비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거나 이미 잠들어 있다. 소녀는 무거운 짐짝처럼 그에게 얹혀져있는 부모를 위해 해가 뜨면 성냥공장으로 가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지리멸렬한 일상이 꾸역꾸역 계속되다 기껏 나오는 대사가 “밥먹자”나 “맥주 한 잔”이다. 오히려 뉴스에서 긴급하게 보도되는 중국 천안문 사태 화면이 더 영화같다. 소녀는 고무같이 질긴 현실을 견디고 또 견딘다. 무지막지한 사막을 낙타처럼 건너던 소녀가 어느날 문득 멈춰선다. 우연처럼 찾아온 사랑이 무시받고,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벽에 내몰렸을 때, 소녀는 묵묵한 인내가 조롱받는 세상을 저주하고 복수에 나선다.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살인 또한 건조하기 짝이 없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부모가 먹을 밥과 애인이 마실 술잔에 쥐약을 탄다. 술집에서 지분거리는 사내에게도 쥐약 한 방을 먹인다. 비통하면서 우습다. 소녀가 터뜨리는 분노조차 슬프고 우스꽝스럽다. 대사 대신 흐르는 음악이 노래한다. “모든 것을 주고 실망할 때에는 더욱 힘든 일이지… 너의 차가운 시선과 얼음 같은 웃음이 사랑을 죽여 버렸으니까.” 86년작 <천국의 그림자>, 88년작 <아리엘>과 함께 <성냥공장…>이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마도 소녀가 대표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을 향한 카우리스마키의 지지와 이해, 소외된 계층에 대한 동지애 때문일 것이다. 사람 죽이는 기계적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던지는 카우리스마키의 풍자는 <레닌그라드…>에서 더 졸깃해진다. 딱따구리 머리에 괴상한 옷차림을 한 록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가 미국에 온다. “아메리카에서는 뭐든 팔 수 있다”는 흥행업자 꼬임에 넘어간 핀란드 툰드라 촌놈들이 고생 끝에 낙을 얻는 곳은 멕시코다. 황량한 들판을 달리는 이들 얼치기 카우보이 뒤를 쫓는 카메라는 `로드 무비'풍이지만 흥겨운 음악 속에 비벼넣은 음산한 개그와 코미디는 쌉싸름하게 보는 이의 코를 자극한다. 87년작 <햄릿, 장사를 떠나다>에서 카우리스마키가 던진 한마디는 이랬다.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재숙 기자

팝 아트, 40여년만의 귀환

퐁피두 센터에서 ‘팝의 시대’ 전시회 열려 지난 3월15일부터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팝의 시대’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오는 6월18일까지 지속될 이 전시회는 1956년부터 1968년 사이 팝아트의 등장과 그 영향을 미술, 건축, 음악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총괄해 보여주고 있는데, 전시회와 병행해 팝아트를 주제로 한 영화제도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흔히 팝아트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인 앤디 워홀의 회고전과 함께 조나스 메카스, 스탠 브래키지, 브루스 코너 등과 같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영화제 목록에 포함되어 파리에서도 흔히 접하기 어려운 실험영화들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팝아트는 미국과 서구 유럽에서 50년대 이후 2차대전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경제가 재건되고, 텔레비전을 비롯한 매스미디어와 가정용 전자제품이 급속히 보급되어 본격적인 ‘소비사회’가 도래한 시기에 함께 등장한 ‘대중예술’을 가리킨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특징되는 새로운 삶의 조건 속에서 현대사회의 새로운 징후들을 때론 열광적으로, 때론 비판적인 시선으로 찾아낸 이들 작품들은, 미술의 경우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상실한 표현주의적 추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1957년 화가 리처드 해밀턴이 정리한 팝예술에 대한 다음의 정의는 이번 전시회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대중을 위해 창조된 것), 일시적이고 (단기간 동안 지탱), 소비가능하고 (쉽게 잊혀지고), 싸고, 시리즈로 만들어지고, 젊고 (젊은이가 대상), 정신적이고, 야하고, 환상적이고, 관능적이고, 돈이 벌리는 것이다.’ 타 예술분야에서 팝아트가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면, 이번 영화제에 선정된 영화들을 보면 과연 팝아트란 이름으로 같이 묶여질 수 있는지를 반문하게 된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상업적인 영화관습들과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고 영화를 통한 지각훈련에 가까운 실험적인 영화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영화와 팝문화’, ‘영화와 정치’라는 두 주제로 분류된 영화들 중 ‘영화와 팝문화’는 40여편의 앤디 워홀의 작품과 함께 마릴린 먼로나 브리지트 바르도와 같은 대중문화의 아이콘들을 다룬 영화들을 함께 상영한다. ‘영화와 정치’로 선정된 영화는 대부분 다큐멘터리 영화들로 요리스 이벤스, 크리스 마르케 등과 같은 좌파감독들의 작품들이 포함돼 있다. 타 예술과 달리 영화는 이미 시초부터 대중 상업영화가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 작업들의 목표 중 하나가 대중과의 거리 좁히기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이 영화제에 선정된 작품들과 일반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간의 시선에서의 이질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파리= 성지혜 통신원

입소문? 없으면 만들어!

할리우드영화 인터넷 마케팅, 가짜 팬사이트 제작에 열올려 영화팬인 당신은 좋아하는 영화의 공식 홈페이지와 팬사이트 중 어떤 것에 더 마음이 끌리는가. 물론 거칠지만 생생한 느낌이 살아 있는 팬사이트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나온 할리우드영화의 팬사이트에 접속할 땐 눈을 크게 뜰 필요가 있다. 팬사이트임을 자처한 여러 사이트 중에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가짜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의 기사에 따르면 최근 LA 인근 지역의 한 컴퓨터 박사는 여러 스튜디오에 영화 15편의 가짜 팬사이트를 만들어주고 15만달러의 거액을 챙겼다고 한다. 주당 1만달러가 넘는 이 알짜배기 아르바이트의 핵심은 좀더 촌스럽게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 홍보용 사진 대신 잡지책에서 오린 사진을 쓴다거나, 혹은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일부러 엉성하게 찍은 세트 사진을 쓰거나, 일부러 덜 세련된 디자인의 글씨체를 쓰거나 하는 것이 구체적인 방법이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홈페이지 주소를 추적해도 스튜디오의 이름은 찾을 수 없도록 해 홈페이지에서 제작사의 정체를 못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 이들 임무의 마지막. 가짜 웹사이트들의 목적은 두말할 것도 없이 좋은 입소문을 내는 것이다. 영화관계자들이 관련 게시판에 들어가 팬을 가장하고 글을 올리거나 하는 방법이야 이전에도 많이 쓰였지만 팬들이 만든 비공식 홈페이지들이 점차 힘을 얻으면서 이처럼 스튜디오들이 사이비 팬사이트를 조작하는 것이 새로운 게릴라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입소문에 목숨 거는 스튜디오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이 만나면서 영화 <블레어윗치>가 낳은 인터넷 마케팅 바람이 약간 이상한 방향으로 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블레어윗치>가 실화를 가장한 홈페이지로 관심을 모은 것처럼 뉴라인시네마가 지난해 제작한 스파이크 리의 영화 <뱀부즐드>는 영화 속에 나오는 텔레비전 쇼의 내용만을 가지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이곳을 찾은 팬들로 하여금 텔레비전 쇼가 실제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미국, 캐나다, 호주 3개국의 영화팬이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카운팅다운 닷컴’(countingdown.com)의 경우 ‘최고의 팬사이트’를 자처하며 영화팬들을 위한 각종 영화정보와 포럼 사이트임을 내세우지만 지난해 드림웍스가 소유권을 일부 갖게 되면서 아직 시나리오도 써지지 않은 <인디아나 존스4>의 홍보에 나서는 등 스필버그 영화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있어 순수 영화팬 사이트로서의 성격을 잃고 있다. 이처럼 활개치는 가짜 홍보 사이트에 대해 아직 이를 규제할 법은 없는 형편이다. 각종 미디어의 광고를 관할하는 정부기구인 연방무역위원회와 연방통신위원회 역시 아직 감시의 손길을 뻗질 않고 있어 이같은 가짜 사이트에 대해서는 스튜디오의 양심에 모든 걸 맡겨야 하는 상태다. LA=이윤정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