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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마음은 언제나 꼬마 토토

심상용 아저씨는 춘천 육림극장의 영사기사다. 원래 나이는 쉰일곱, 호적 나이로는 쉰넷. 초로의 나이지만 열여섯에 시작한 영사기사 경력이 벌써 40년이 넘었다. 그를 만나러 육림극장을 찾아가는 길.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반 남짓, 춘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찾아간 육림극장은 닭갈비 골목이 있는 춘천시내 명동, “개고기 팝니다” 팻말이 즐비한 중앙시장 옆에 있었다. 흰 페인트칠이 돼 있는 오래된 극장 외벽에는 아직도 사진 대신 그림 간판이 걸려 ‘상영프로’와 ‘다음프로’를 알리고 있었고, 극장 안 어둑한 매점에는 오징어, 팝콘, 바나나우유가 그늘 속에 놓여 있었다. 예쁜 제복의 여자직원 대신 매표구에도 점퍼를 입은 아저씨가 떡 하니. “심상용 영사기사 아저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말을 물으니 올라가보라 한다. 영사실은 어디에 있을까. 일요일 낮인데도 관객은 별로 없고, 어둠 속에 몇번인가 발길은 계단턱을 더듬는다. 영사실 창에선 예의 빛다발이 쏟아져나오는데 그곳으로 가는 문은 어디 있는 걸까. 영사실은 뜻밖에, 아니 어쩌면 원래 그런 것인지, 상영관 바깥에 따로 출입구를 가지고 있었다. 작은 나무문을 가만히 열자, 아저씨 한분이 반갑게 맞이한다. “나야, 내가 심상용이야.” 영사실 안쪽 소파에 마주앉아 그렇게 영사기사 심상용씨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계속된 이야기. 까막눈 소년, 필름의 빛에 매료되다 1950년대, 춘천시내 1호 막국숫집 아들이었던 심상용씨는 학교를 가기 전 극장을 먼저 만났다. 말 그대로 그랬다. 집과 학교 사이, 그 길가에는 언제나 극장이 있었다. 극장 가까운 음식점이었던 그의 집에는 늘 극장 사람들이 막국수를 먹으러 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년에겐 쪼그려 숙제할 변변한 자리 하나 없었다. 6·25가 갓 끝났을 때의 얘기다. 소년에게 공부는 어렵고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극장이 있었고 늘 그를 귀여워해주는 ‘극장 아저씨들’이 있었다. 언제든 극장 문 앞에 서기만 하면 소년은 그냥 통과였다. 심심하면 모르는 아줌마 옆에 아들인 양 서기도 했다. 극장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편치 않던 소년의 ‘없는’ 의자 하나를, 아니 수백개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학교를 가는 대신 소년은 극장엘 갔다. 작은 아이의 오랜 시작. 소년의 영화에 대한 처음 기억은 ‘총싸움과 뽀뽀’다. 제목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느 한 장면, 총싸움을 하다 남자가 죽어버리자 여자가 남자한테 ‘뽀뽀’를 해주던 한 장면은 아직껏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극장에 있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심상용씨는 거의 까막눈이다. 대강 읽기는 하지만 쓸 줄은 모른다. 자신만의 글자가 있어서 그가 ‘프린스’라고 써놓은 글자를 보고 다른 이들은 ‘슈즈’라고 읽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다. 35년 동안 공부하고 또 했지만 불합격, 불합격. 아침부터 밤까지, 휴일도 없이, 명절날 남들 “떡에 술에 잘 먹을 때”도 영사기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60점에서 18점이 모자라 아직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는, 그러나 100점짜리 베테랑 영사기사다. “대한민국 최고극장” 메가박스에서 그가 받는 월급 100만원의 두배를 그의 후배가 받고 있다고 그는 자랑스러워 한다. 영사기사 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힘든 일이다. 중년의 영사기사에겐 더더욱. 최신장비를 갖춘 멀티플렉스들이 생겨나면서 일자리가 좀 늘긴 했지만, 30대 이하의 일손을 주로 원하고 있고, 게다가 기술발전으로 한명의 영사기사가 여러 관을 관리할 수 있게 되어 일자리가 크게 는 것도 아니다. 지방의 낡은 극장에 나이많은 영사기사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심상용씨에게 극장 일을 하며 산 보람이 뭔가 물으니 “덕분에 글씨 공부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낡은 영사기 옆에는 오랫동안 본 책 한권이 늘 놓여 있다. 영화를 틀기 위해서는 볼 필요가 없는 영사기사 매뉴얼. “그래도 40년을 했는데 자격증 하나 없으면 그렇잖아. 어떻게든 따려고 하지. 애들한테도 난 한글만 알면 대학 가는 거라 그랬거든.” 그래서 곁에 두는 책 한권이다. 한달 봉급 300원, 밥은 늘 밀가루 풀죽 ‘가케모치.’ 자전거로 필름을 배달하는 <시네마천국>의 토토를 기억한다면 심상용씨의 극장 초년생 시절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1960년, 심상용씨는 이 극장 저 극장 영화필름을 배달하는 ‘가케모치’로 극장 일을 시작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노가다’…. 사기를 당해 집에서 하던 막국수 가게가 문을 닫은 뒤 어린 나이에 별별 일을 다 하던 때였다. ‘문화극장에서 가케모치를 구한다’는 친구 말을 듣고선 바로 시장통 극장으로 달려갔다. 필름 한권이 10분짜리일 때였다. 한달 봉급은 300원. “노가다 뛰면 하루 200원 주던 때”, 봉급을 타면 견습생 소년은 이발을 하고 신발을 사는 데 그 돈을 다 써버리곤 했다. 밥은 늘 밀가루 풀죽이었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안고 쉴새없이 문화극장, 소양극장, 육림극장으로 페달을 밟던, 자전거가 없을 땐 필름을 들고도 뛰던 어느 날, 그는 자전거에 필름을 싣고 가다 버스 밑에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도랑께로 굴러가는 필름이 물 속에 빠지기 직전, 그는 젖을세라 필름을 품에 꼭 안고 극장까지 뛰었다. 몸이 다쳤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날, 영화는 1초도 끊기지 않았다고, 심상용씨는 아직도 자랑스레 그날 일을 이야기한다. 달리기 잘하던 ‘가케모치 소년’은 포스터도 붙이고 간판화가의 “빠레트도 닦고”, 극장이 좋아서, 또 먹고살 일이 필요해서 극장의 무슨 일이든 배우려 했다. 배우들 얼굴을 크게 그려붙이는 간판 일도 그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도 글씨가 있”는 탓에 그는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기계 일을 택했다. 영사기사. 글씨를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는 열여섯 나이에 그렇게 영사기사가 됐다. <또순이>부터 <클럽 버터플라이>까지, 나의 <한국영화회고록> “도금봉 나오는 <또순이>”를 시작으로 그는 3년간 잡던 걸렛자루를 놓고 영사기를 맡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도대체 몇편의 영화를, 몇권의 필름을 영사기에 끼웠을까. “다 이어붙이면 한 지구 세 바퀴는 돌겠지, 아마”, 그는 이렇게 짐작한다. 문희, 신성일, 최무룡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알랭 들롱이 최고 스타이던 시절, “짱개영화로는 <스잔나>, 액션물로다가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외화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콰이강의 다리>”가 그 시절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미워도 다시 한번>을 틀 때인가는 관객과 함께 펑펑 울었다. 탄소막대에 불을 붙여 그 빛을 거울에 반사시켜 작동시켰던 60년대 ‘카본’ 영사기 시절,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기는 걸로 나오는” 전쟁영화 일색이던 시절, 그리고 관객도 대부분 단체관람 온 학생들이던 시절, 그가 빛을 불어넣는 필름들엔 키스신조차 거의 없었다. 그렇게 큰 파장을 불러왔던 <자유부인>도 “다 입고 있다 쓱 벗고는 끝”이었다.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 육림극장 1관의 영사실에는 새로 들인 최신식 ‘CP500 디지털’ 음향설비에서 <클럽 버터플라이>의 끊이지 않는 교성이 민망할 만큼 계속 흘러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60년대 초는 한국영화에서 흑백시대가 가고 처음으로 “총천연색 영화”가 나온 때였다. “칠십미리 시네마스코프” 외화들도 꼬리물듯 달려왔다. <원탁의 기사> <왕중왕> <대장 부리바>. 영화가 펼쳐놓은 드넓은 세상을 보러 사람들이 너도나도 극장에 ‘영화구경’을 오던 때였다. 영사기사의 손놀림 또한 언제보다 더 신이 났다. 총천연색 영화 얘기에 흥을 내던 그가 80년대 와서 잠시 말을 멈춘다. 컬러TV가 나오면서부터, TV에 관객을 빼앗긴 시절인 것이다. 젊건 늙었건 사람들이 다 “테레비”만 보던 시절. 관객이 들지 않자 한국영화도 제작비를 많이 들이지 않았고, 그래서 영화도 별로였다. “팔십오년인가 육년인가, 규제가 풀리면서 러브신이 많아졌어. 그러니까 도로 관객이 늘었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된 거야.” 영화법이 바뀌어 제작자유화가 이뤄진 시기를 영사기 뒤의 산증인은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젖은 필름을 말려, 첫사랑을 영사하다 현재 춘천 육림극장에선, 80년대 들여온 한 시간짜리 필름용 일제 ‘마쓰다 제논 램프하우스’ 영사기를 한관에 두대씩 놓고 쓰고 있다. 순간전압 4500V의 이 일제 영사기는 영사기사를 한 시간에 한번씩 일어나게 만든다. 이야기에 푹 젖어들다가도 한 시간이 되면 심상용씨는 어김없이 일어나 능숙한 솜씨로 필름을 갈아끼웠다. 모터가 도와주긴 하지만 다 돌아간 필름을 되감는 일도 그의 몫. 그래도 좋아진 기계 덕에 식은 땀 날 사고는 별로 없다. 하지만 구식 영사기 시절엔 영사 사고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었다. “한번은 정전이 된 거야. 카본으로 할 때니 영사기는 돌릴 수 있지. 근데 소리는 못 내잖아. 그게 무슨 외국영화였거든. 갑자기 소리가 안 나니까 사람들이 웅성웅성거렸지. 그때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괜찮다고, 우리가 뭐 영어를 아냐고. 그냥 자막만 보면 되니까 계속 틀어달라고 외치더라구. 그래서, 소리없이 조용히 한 시간을 그렇게 틀었어. 사람들도 아무도 안 나가고 영화를 다 봤어.” 지금 같으면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건만, 그 시절 관객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게 더 궁금해서 기꺼이 무성영화를 청했던 것이다. 10분짜리, 20분짜리 필름이 한 영화에도 여러 개 들었던 시절, 필름 순서가 뒤바뀌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심상용씨는 재빨리 필름을 바꿔끼는 ‘즉석편집’을 하곤 했다. 관객은 실수가 있었던 건 추호도 모르고 ‘아, 아까 뭐 생각하는 장면이었나보다’ 하고 넘어가곤 했다. 각종 사고 대처에 능숙했던 그에게도 한번은 가슴 서늘한 순간이 있었으니, 때는 1968년, 심상용씨가 스물넷 청년이던 시절이다. 비가 거세게 쏟아지던 어느 날, 서울에서 남진이 나온다는 <저 언덕을 넘어서> 예고편이 도착했다. 필름은 모두 젖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상 위에 필름을 쭉 펼쳐놓고 그것을 말렸다. 겨우 말린 필름을 손때 묻은 영사기에 걸었을 때, 객석 위를 지난 빛줄기가 새겨내는 그림 속 여배우는 다름 아닌 그가 어릴 적부터 짝사랑하던 여인. 코흘리개 시절부터 한동네에 살며 “골려주며” 좋아하던 또래 짝사랑이 어느새 여배우가 되어 필름 속에 들어 있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잊지 못하던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스크린에 영사하며, “성공하니까 고향을 찾지 않는” 옛사랑이 희미한 빛으로 살아나는 걸 바라보며 청년 영사기사는 가슴이 무너졌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한 뒤 1971년, 그녀가 결혼해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한 뒤 얼마 안 있어, 우연인지 아닌지 그도 같은해 결혼을 한다. 신부는 친구의 사촌여동생. 4녀1남을 얻은 그는 어느새 큰딸에게서 태어날 첫 손주를 기다리고 있다. 나의 필름, 나의 극장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시네마천국>에서 마을 신부는 종을 쳐 키스신을 잘라내고, 토토는 훗날 신사가 되어 키스신만 모인 그만의 영화를 본다. 심상용씨에게도 그런 ‘필름쪼가리’들이 있다. 키스신은 아닐지라도, 영사실에서 일하면 흠집이 나거나 해서 이렇게저렇게 잘려나가는 필름들이 많이 있었다. 젊었을 적, 그 필름쪼가리들을 꼼꼼히 모으던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손수 환등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주일이 꼬박 걸려, 그는 깡통을 구해다가 전구를 넣고 필름쪼가리들을 걸어 환등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에 광목천을 걸고 친구들을 불러 슬라이드를 틀어줬다. 묘한 기쁨이 몰려왔다. 그만의 작은 가내 극장이었다. 젊을 때 이미 맛본 이 ‘내 극장’의 달콤한 꿈은 1992년, 그에게 현실이 되었다. 시내 밖, 양구군에 있는 150석짜리 작은 극장을 주인이 내놓았을 때, 심상용씨는 마을금고에서 2천만원을 빌려 극장을 빌렸다. 다달이 100만원씩 삯을 내야 했다. 당연히 직원을 쓸 돈은 없었기에, 그는 춘천 시내에 아내와 세딸, 아들을 남겨두고 어머니와 큰딸과 함께 극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자리를 비울 때면 영사기는 다른 가족의 손에 맡겨졌다. 그때 익힌 실력으로, 그의 자녀들은 다 영사기를 돌릴 줄 안다. 심 기사에서 심 사장이 되었던 날들. 필름을 가져다주는 버스기사들과 술 한잔 기울이고 얼마 만인지 다시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그는 즐거운 극장장이었다. 내키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 공짜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양구는 군부대가 있는 마을이었다. 손님은 주로 주말, 군인들과 그들을 면회하러 온 애인들. 그게 평일날 손님이 없는 이유였고, 2년 만에 그는 극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 속에 그가 다시 춘천시내로 돌아온 날, 그날 이후 양구의 그 작은 극장도 영영 문을 닫고 말았다. 양구를 떠난 그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곳이 육림극장이다. 이 오래된 극장에는 관이 두개 있어서 1관, 2관, 두개의 스크린에서 두편씩 영화를 상영한다. 동시에 지어졌지만, 지금 이곳 두관의 영사기사 나이는 36년이나 차이가 난다. 1관에는 쉰일곱의 심상용씨가 있고, 2관에선 최석순이라는 이름의 스물한살짜리 젊은 청년이 영사기를 돌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최석순씨는 메가박스에도, 키노에도, 씨네큐브에도 가 있다는 아저씨의 많은 제자 중 한명이다. 이들은 꼭 부자지간 같다. 젊은 기사가 방금 영사기에 걸어놓은 필름은 높은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버티칼 리미트>. 2관 영사실에 있는 비디오로 ‘늙은 기사’가 자신이 나온 3년 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녹화테이프를 틀어주고 있는 동안, 스물한살의 ‘최 기사’는 폴더형 PCS를 열어 누군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나이 많은 극장, 1관과 2관의 너무나 다른 풍경. 아무도 꾸미지 않았지만, 세월과 사람살이의 얼개는 이처럼 춘천의 한 극장에 영화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에게도 저만할 때가 있었겠지. 이 청년도 그처럼 나이들어갈 테고. 상념에 잠기는 사이 의 리포터는 심상용씨의 집을 찾아, 그가 오랫동안 수집해 놓은 영화 포스터들을 보여준다. 늙은 기사의 작은 집,작은 꿈 좁은 영사실에서 보낸 40년 인생. 그의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모아놓은 자료를 쥐가 갉아먹는 걸 보면서, 심상용씨의 요즘 꿈은 바로 그 자료들을 전시해놓을 수 있는 ‘영화박물관’을 차리는 것이다. 옛날 멍석 깔고 영화 보던 시절 풍경부터 극장 풍경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볼 수 있는, 또 온갖 팸플릿, 포스터, 문화영화들을 볼 수 있는 그런 박물관. 강원대학교 옆에 있는 그의 ‘산 1번지’ 집을 찾았을 때, 그는 마치 그 박물관 모습을 미리 연출하기라도 하려는 듯, 옛날 16mm 영사기를 틀어 반공영화 <아! 잊으랴>를 보여주었다. 스크린은 방문에 압정으로 꽂은 <어둠 속의 댄서> 포스터 ‘뒷면’이었다. 흰 ‘빠닥종이’ 위에서 자그마한 탱크와 그보다 더 자그마한 군인들이 포화를 쏘아대며 오물거렸다. 영화를 보기 위해 직접 스크린을 달고, 방의 형광등을 끄고, 그리고 윙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에 가슴 설렘을 선사하는 그의 방은, 기꺼이 시네마천국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검은 개 한 마리가 지키고 있는 대문 옆 담벼락에는 <정무문>부터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 달이 뜨는가> <탑건>까지 필름통들이 쌓여 있고, 돼지우리였다는 창고에는 수천장의 포스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늙은 영사기사의 작은 집. “다 꺼내서 보여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 저게 정리하는 데만 2년이 걸린 거거든.” 보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함께 안타까워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작은 고집인 양 심상용씨는 한참 동안이나 영사기를 끄지 않았다. 저녁이 다가와, <아! 잊으랴>를 다 보지 못하고 기자 일행이 서울로 발길을 돌리려 하자, 그제야 그는 아쉬운 듯 가만히 영사기를 끄고는, 영사기 옆에서 찍은 스무살 적 빛바랜 사진 하나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을 뿐이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엔 먼곳에서 날아온 노란 흙알갱이들이 마치 오래된 필름에서처럼 풍경에다 비를 긋고 있었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맞춘다

1968년생·추계예술대 작곡가 졸업,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졸업·드라마 SBS <결혼>, KBS <거짓말> <슬픈 유혹> <바보 같은 사랑> <푸른 안개>, MBC <나> <레디 고> <여자를 말한다> <해바라기> <사랑> 쏟아지는 빗속, 회사 후배에게 강간당하는 여자는 저항하다가 손을 꼭 쥔다. “내 몸 속에 있는 전구가 불을 켠 느낌”을 갖게 된 순간이란다. 논란이 될 만한 이 장면은 좌우를 오가는 카메라와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지고 느려지는 음악으로 인해 홀연한 아름다움을 띤다. 비판을 받아야야 할 장면에서 드라마의 흐름에 몸을 맡기게 하는 음악, 그것은 유죄일까, 무죄일까. <클럽 버터플라이>의 영화음악을 맡은 최완희씨는 에로틱한 영화에는 색소폰 등이 들어가는 흐느적거리는 음악이 적당하다는 통념 대신 오케스트라를 선택했다. 에로틱한 장면에 장중하게 깔리는 ‘음악이 시선을 빼앗도록’ 했다. 지금 오른손이 무엇을 하고 왼손이 무엇을 한다는 장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한 행위를 하는구나”라고 음악에 파도를 맡기다보면 아차싶게 흥분돼 있는, 그런 음악을 바랐던 것이었다. 때로는 호흡만 남겨두고, 음악은 개입을 자제하기도 했다. 혁과 경 부부가 엉킨 감정을 풀러 놀러간 곳의 장면이 그 한 예. 호흡만 있는 신을 겪고 나면 그들의 부부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감정적으로 연결된다. 최완희씨는 <클럽 버터플라이>가 영화음악 데뷔작이다. 8년 동안 <결혼> <레디 고> <해바라기> <거짓말> <바보 같은 사랑> 등의 텔레비전 드라마 음악을 해오면서 꼼꼼하게 음악을 다듬을 수 있는 영화음악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처음 맡게 된 탓일까, 손해를 감수하고 예산을 초과하는 일을 벌였다. 러시아로 날아가서 오케스트라에 영화음악 연주를 맡기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글로발리스(GLOBALIS)는 80명 규모로 <시티 오브 조이>나 <러브 오브 시베리아> 등 지금까지 450여편의 영화음악을 연주한 영화음악 전문 오케스트라다. 최완희씨의 러시아 시절 은사이기도 한 볼쇼이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크리미아가 지휘를 맡았다. <클럽 버터플라이>에는 전설적인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동생이자 유명 아코디언 연주자인 헥터 피아졸라의 연주도 포함돼 있다. 이 역시 그의 ‘무모함’이 작동한 결과다. 송년음악회에 참석한 그를 알아보고 이러이러한 영화의 음악을 녹음하고 있는데 시간이 되면 녹음실로 오시라고 말했는데, 이 당돌한 초대에 응한 피아졸라가 연주까지 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 대가는 하룻밤을 넘기는 보드카 술시중. 궁하면 통한다. 유행을 겨냥한 외국음악 스코어는 한곡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기특한 O.S.T는 ‘궁함’의 결과다. 외국곡을 삽입하면 지불해야 할 로열티는 영화음악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그래서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황보령의 신곡 <우주>로 채웠을 만큼 삽입곡들은 모두 창작곡이다. 최완희씨는 영화음악은 꼼꼼하게, 빈틈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일할 맛이 난다고 한다. 촬영이 모두 끝난 뒤 의뢰받은 작업. 러시아 체류기간 한달을 빼면 며칠 남지 않은 기간은 분명 동분서주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짧은 동안에도, 의욕이 앞섰던 초짜 영화음악가는 또 한번의 무모함을 발휘했다. 연주 녹음을 위해 러시아로 떠나기 전, 신시사이저로 음악을 입힌 비디오 편집본을 만들어 영화감독과 함께 보며 의견을 나누었다. 음악을 건네주고 그냥 입히기만 하는 관행 대신 영화와 음악의 궁합을 한번 더 생각하자고 선택한 방법이다. 러시아에서는 필름을 보면서 연주를 했다. 지휘자는 영상을 보면서 완급을 조절하고 연주자는 지휘자와 필름을 함께 보면서 음악을 연주했으니 베테랑들이 아니라면 NG없이 소화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음악이 되었다. 유죄든 무죄든 그게 영화음악 아닌가. 글 구둘래/ 객원기자 anyone@cartoonp.com 사진 오계옥 기자 klara@hani.co.kr

디즈니 애니메이션 주요 작품사 - 동화보다 아름다운, 캔디보다 달콤한

70년대, 아이들은 일요일 아침이면 늘 TV 앞에 모였다. 마법의 성 위로, 펑 하고 터지는 불꽃놀이. 디즈니랜드의 풍경이 펼쳐지면,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등 친숙한 얼굴들이 등장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유년 시절의 통과 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이미지들은 거의 무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미키 마우스라든지 도날드 덕, 거짓말을 해서 코가 길어진 피노키오의 얼굴이나 하늘로 훌쩍 날아가는 피터팬의 몸짓은 필요할 때마다 바로 연상되는 원초적인 기억이다. 1923년 월트 디즈니(1901∼66)가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러더스 촬영소’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제작소를 차린 이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그림동화나 안데르센 동화 이상으로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세기의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20세기의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감동시키고, 또 돈지갑을 열게 했을까. 거기에는 어떤 비결이 숨어 있고, 디즈니는 어떤 전략으로 성공을 거듭해왔을까. 월트 디즈니 탄생 100주년인 올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는 것은 모두의 과거에 간직돼 있는 ‘디즈니’라는 이름의 그림책을 다시 한번 꺼내보는 일이 될 것이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환타지아> <밤비>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와 <라이온 킹>,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영광을 만들어낸 주요작의 비법을 돌이켜본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 ::: 증기선 윌리 ::: 환타지아 ::: 덤보 ::: 밤비 ::: 잠자는 숲속의 미녀 신데렐라 ::: 101마리 강아지 ::: 인어공주 ::: 라이온 킹 ::: 미녀와 야수 ::: 포카혼타스 ::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동화보다 동화적인, 혹은 20세기의 '바람직한' 동화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시대를 연 작품으로 기록된다. 누구나 알고 있을 그림형제의 <백설공주>. 디즈니는 가장 대중적인 작품을 원작으로 활용하여, '디즈니' 하면 바로 연상되는 '권선징악'이라든가 '행복한 결말과 화해' 등의 공식을 일찌감치 확립했다. 그림형제가 썼던 <백설공주>도 원래는 잔혹한 살해와 배신이 담긴 이야기였지만, 당시 지배층의 요구로 순화시킨 작품이었다. 디즈니는 그것을 더욱 온순하게 길들였다. 희로애락의 드라마와 그것을 감싸는 유머, 권선징악적 해피엔드로 다듬어진 고전동화는 월트 디즈니가 발견한 최상의 애니메이션 스토리였다. 디즈니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사랑하는 동화 속에서 애니메이션에 적합한 캐릭터를 발견하고 강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백설공주>가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집단으로만 존재하던 각각의 난쟁이들을 개성있고 독특한 캐릭터로 가꾸어냈고, 이야기 진행과정에 맞추어 흥을 돋우는 음악을 병행함으로써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동화의 각색에서 고유한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인어공주> 등등 디즈니의 동화 전략은 색깔을 달리해 끊임없이 반복된다. 디즈니의 첫 장편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돋보인 것은 기술상의 발전도 한몫했다. 동화를 그린 셀지를 앞에 놓고 그 뒤쪽에 배경을 그린 여러 장의 투명유리를 거리를 두고 겹쳐놓고는 맨 앞의 셀지에 초점을 맞춰 촬영을 하는 ‘멀티플레인’이라는 촬영기법을 도입하여 좀더 사실성 있는 영상을 선보인 것이다. 멀티플레인은 일일이 원근을 고려해 그림을 그리던 기존 방식으로는 도달하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원근감을 만들어냈다. 140만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는 공황기였던 30년대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중이 현실을 잊고 안락한 동화의 세계에 빠져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 증기선 윌리 1928 미키 마우스 시리즈 제1탄. 최초의 토키 애니메이션으로 버스터 키튼이 나오는 무성영화 <증기선 빌 주니어>를 바탕으로 했다. 토키영화라고는 하지만, <증기선 윌리>에서 미키 마우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대신 휘파람을 불고 동물들을 악기삼아 음악을 연주한다. 소의 이빨이 실로폰이 되고 암퇘지의 젖꼭지가 아코디언의 버튼이 되는 디즈니 특유의 유머러스한 설정이 이때 이미 등장한다. 모든 것은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했다고, 월트 디즈니는 말하곤 했다. :: 환타지아 1940 이미지로 보는 음악의 세계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팀 버튼이 디즈니를 박차고 나온 것은, 늘 똑같은 캐릭터에 이야기만 그려내기 싫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변주도 예술이긴 하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만 변주하는 건 강요이고, 세뇌다. 팀 버튼처럼 유별나게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애니메이터에게 디즈니는, 사상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디즈니도 때로는, 휘황한 실험정신을 발한다. 작년 아이맥스판 <판타지아 2000>으로도 만들어졌던 <판타지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판타지아>는 소리를 이미지로 표현하겠다는 야심적인 시도로, 각각의 애니메이터들이 서로 다른 스타일로 빚어낸 걸작이었다.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탓에 <판타지아>는 당대의 관객들에게는 외면받는다.<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가 디즈니의 '이야기'를 확립했다면, <판타지아>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기술'을 한단계 고양시킨 작품이다. 처음으로 그림에 목소리를 입힌 토키 애니메이션 <증기선 윌리>(1928)를 만들었던 디즈니는 <판타지아>에서 소리와 그림을 하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실험을 했다. <판타지아>는 바흐, 베토벤 등의 클래식음악 8곡을 고르고, 각각 음악에 맞는 이야기 혹은 이미지를 고안해낸 후 음악의 흐름과 느낌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애니메이션이다. <판타지아>는 음악의 청각적 요소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요소를 결합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표현력을 한껏 과시했다. <판타지아>처럼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때로, 시대를 뛰어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것이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는 범작의 체증을 뚫어주기도 하고. :: 덤보 1941 커다란 귀로 하늘을 나는 아기코끼리 덤보의 이야기 <덤보>는 빈약하다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비교적 단순한 내용의 작품이다. 그러나 다소 지적이었던 <환타지아>의 후속작으로 관객의 만족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덤보>는 <피노키오>와 <환타지아>의 부진을 씻으며 흥행에 성공했고, 디즈니는 곧이어 한결 섬세한 작품 <밤비>를 내놓았다. :: 밤비 1942 사람과 함께 하는 동물, 인간 같은 동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뛰어난 장점 하나는 동물 캐릭터다. 미키 마우스에서 출발한 의인화된 동물은 물론이고, <정글북>이나 에 등장하는 동물은 움직임도, 감정표현도 극히 자연스럽다. 유난히 매력적인 동물캐릭터를 잘 만들어내는 디즈니의 첫 걸음은 <밤비>라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쿠엔틴 타란티노도 걸작이라고 칭할까. <밤비>는 동물캐릭터에 대한 디즈니의 기초훈련이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들만 나오는 애니메이션 <밤비>는 아기사슴 밤비가 자라 숲의 왕자가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큰 귀로 인한 콤플렉스를 가진 덤보가 밝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렸던 <덤보>(1941)와 비슷하게 아이들의 성장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인 팰릭스 셀튼의 소설 <밤비-숲 속의 삶>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디즈니는 <꼭두각시 이야기>를 <피노키오>(1940)로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전반적인 내용의 각색 없이, 예쁜 원작의 이야기와 느낌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동물들에 대한 의인화는 최소화하고, 자연의 생태를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제작진은 새끼사슴 두 마리를 스튜디오에 가져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LA의 동물원으로 자주 ‘견학’을 다니기도 했다. 숲의 풍경과 동물들의 동작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실제 자연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을 쓰기도 했다. <밤비>에서 시작된 철저하게 사실적인 동물캐릭터는 이후 50년도 더 지나 아프리카의 대초원을 그린 <라이온 킹>에서 절정에 달한다. <라이온 킹>은 <밤비>를 만들었던 그 세심함과 철저한 관찰작업을 이어받았다. 게다가 동물 그 자체의 묘사에다가, 적절하게 의인화된 모습을 통해 더욱 감동을 자아낸다. :: 잠자는 숲속의 미녀 1959 디즈니 최초의 70mm 장편애니메이션. 테크니라마사의 70mm 영상을 사용했다. TV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큰 스크린을 마련한 것.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달러가 소요됐으나 싸늘한 평가와 함께 박스오피스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나타냈다. :: 신데렐라 1950 역시 디즈니에게는 동화가 어울려 2차대전 동안 디즈니 스튜디오는 장편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단편을 묶은 패키지만을 극장에 내보냈다. 그러던 디즈니가 장편작업에 복귀한 작품이 <신데렐라>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전쟁홍보영화를 통해 꾸준히 수익금을 올려온 것이 <신데렐라> 제작에 밑거름이 됐다. 8년 만에 만드는 장편 <신데렐라>에 디즈니는 사활을 걸었다. <신데렐라>는 2차 대전 이전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모든 경험이 하나로 농축된, 이야기와 형식 그리고 기술적 측면에서 이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1697년에 쓰인 찰스 페로의 동화 <신데렐라>를 원작으로 디즈니 스튜디오는 이야기와 음악적 특징에서는 <백설공주>를, 회화적으로는 <밤비>의 사실적인 묘사를 활용하여 <신데렐라>를 완성했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었던 공식들만을 모방하여 만든 이 작품은 극장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새로운 기술이나 스토리전개를 보이지 못한 탓에 비평가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성공했고, 디즈니 스튜디오는 중단되었던 장편작업을 계속 전개할 수 있는 입지를 마련한다. 디즈니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공식에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양산해낸다. :: 101 달마시안 1961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비용절감 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1959)의 상처를 딛고 야심차게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전작이 실패한 여파로 월트 디즈니는 많은 스탭을 해고했고, 자신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디즈니랜드 같은 주변의 사업에 더욱 몰입해 있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은 처음으로 공동작업 없이 한명의 스토리작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상황은 안 좋았지만 을 살린 것은, ‘제록스’라는 신기술 덕이었다. 원화를 트레이싱지에 일일이 손으로 옮기던 작업을 복사로 대체하여 작업능률을 높이고 오리지널 터치의 생생함도 보존하는 ‘제록스’ 기법은 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애니메이터의 감정이 살아 있는 다양한 표정의 터치가 그대로 트레이싱지에 옮겨졌고, 101마리나 되는 점박이 강아지들의 무수하고 다양한 움직임도 거뜬하게 스크린 위에 살아났다. 제작진의 규모가 축소된 상황에서 제록스 기술이 없었으면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작품이 바로 이었다. 생생한 필선으로 살아난 사랑스럽고 씩씩한 이 점박이 강아지들은 1996년 존 휴즈가 제작을 맡아 동명의 실사영화로 리메이크된다. :: 인어공주 1989 디즈니 신화의 재림 1966년 폐암으로 월트 디즈니가 죽은 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몰락의 기미를 보였다. <멋쟁이 캣>(1970), <로빈 훗>(1973) 등의 잇따른 흥행저조는 80년대 초까지 이어졌고, 더이상 새로운 시도도 없었다. 1984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있었던 마이클 아이스너와 제프리 카첸버그는 각각 디즈니의 회장과 제작담당으로 새로운 팀을 짜, 디즈니의 변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리한 부진 끝에 디즈니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다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생각했다. 그들은 <백설공주>의 전략을 택했다. 바로 고전동화의 풍부한 감동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해내는 것. 1989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 이후 30년 만에 고전을 각색한 <인어공주>가 대성공을 거두고 애니메이션의 황금시대를 연 것은, 분명한 ‘마케팅’의 결과였다. <인어공주>의 원작은 1837년에 안데르센이 쓴 <아이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 개정판에 수록되었던 동명의 동화다. 인간 세상에 매료된 아름다운 인어 에리얼의 이야기를 존 무스커와 론 클레민츠 감독은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말괄량이 인어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기술적으로는 15만장 이상이라는,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 쓰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셀을 사용하고 특수효과를 충분히 써서 부드러우면서도 파격적인 새로운 감각의 영상을 완성했다. 바다 한복판의 폭풍이나 요동치는 돛, 물고기떼, 수면에 반사되는 풍경, 물거품 같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인어공주>의 약 팔할의 장면에는 특수효과가 사용됐다. 탄탄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실제보다 아름다운 영상과 감성을 울리는 음악, 재치있는 유머까지, <인어공주>는 팔릴만한 요소들로 가득한 새롭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애니메이션이었다. 풍부한 뮤지컬 장면은 어린이와 청소년만이 아니라 20대 연인들까지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조력했다. 풍부한 조연캐릭터들이 자아내는 현대적인 유머는 곳곳에서 성인 관객의 웃음을 끌어냈다. :: 라이온 킹 1994 디즈니의 절정, 그러나 고답적인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운 <라이온 킹>은 언제나 남의 이야기를 차용하던 디즈니 스튜디오가 처음으로 오리지널 스토리를 지어내 만든 작품이었다.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등의 잇따른 성공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디즈니 스튜디오가 과감하게 구미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직접 지어낸 것이다. <라이온 킹> 스토리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데츠카 오사무의 <밀림의 왕자 레오>의 이야기는 물론 캐릭터까지 훔쳐갔다고 비난했다. 아프리카 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숙부 무파사에 의해 사자의 왕이던 아버지를 잃은 어린 사자 심바의 이야기 <라이온 킹>은 <밤비> 이후 다시 동물캐릭터가 주도하는 작품이다. <밤비> 제작 과정에서 동물원을 찾았듯이 <라이온 킹> 제작진은 아프리카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풍경을 스케치했고, 스튜디오에 아예 사자를 데려다놓고 동작과 표정을 연구했다. 들소떼가 화면을 가득 메운 채 달리는 장면의 스펙터클을 위해서는 따로 컴퓨터그래픽팀이 장기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라이온 킹>은 엘튼 존이 주제가를 부르고 한스 짐머가 음악을 맡아 음악으로 감동을 강요하는 기존의 전략을 고수한다. 동물의 세계를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자는 밝은 색으로 나쁜 사자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한다든지 한 것으로 인해 <라이온 킹>은 <알라딘>에 이어 인종차별적인 태도가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은 이즈음 계속하여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받는 공격이었다. 1995년 디즈니는 픽사와 공동으로 인형이 나오는 3D 디지털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를 만든다. 1996년에는 카첸버그가 드림웍스를 차리며 떠난 후 첫 작품 <노틀담의 꼽추>를 개봉한다. <노틀담의 꼽추>는 학부모들의 원망을 들을 정도로 성인용 작품의 색채를 더욱 강하게 띤 작품이었다. 이후 디즈니는 그리스신화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다룬 <헤라클레스>(1997), 중국 민담에서 스토리를 따온 여성전사의 이야기 <뮬란>(1998), 열대밀림을 배경으로 한 <타잔>(1999), 그리고 <쿠스코? 쿠스코!>(2000)까지 다양한 신작들을 발표해왔다. 그것은 곧 끊임없이 좀더 신선한 소재, 감동적인 드라마를 찾아 다니는 디즈니 스튜디오의 행보였다. 그러나 ‘디즈니적인 것’이 반복될수록, 무엇을 다루든 디즈니 것은 똑같다는 인상이 생겨나고 획기적인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관객의 기대는 더욱 높아져만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것, 비슷하면서도 다른 즐거움을 주는 것, 기발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돈을 버는 것. 어떤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도 동일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 미녀와 야수 1991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야수의 성에 들어가 역시 사랑으로 야수에게서 왕자의 모습을 되찾아내는 여인 벨의 이야기. <비 아워 게스트> 노래가 흐르는 무도회 장면에서 화면은 매우 드라마틱한 카메라워크로 담아낸 듯한 영상을 그려낸다. 판타지를 뿜어내는 역동적인 영상이 인상적인 작품 <미녀와 야수>는 미국 내에서 6개월 이상 극장에 걸렸다. :: 포카혼타스 1994 디즈니가 채택한 첫 실재 인물의 이야기. 인디언 처녀와 그녀의 마을에 들어온 영국인 개척자의 사랑을 그렸다. 제작진은 실재 이야기에서 가능한 한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부각시키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비난을 사기도 했다. 제프리 카첸버그가 제작에 관여한 마지막 디즈니 작품. 1994년 아이스너와의 불화로 카첸버그는 디즈니를 떠나 드림웍스사를 세웠다. 최수임 기자 sooeem@hani.co.kr *참고문헌 : 황선길저 <애니메이션 영화사>(범우사 펴냄), 데이비드 코에닉저/ 서민수역 <애니메이션의 천재 디즈니의 비밀>(현대미디어 펴냄), 데이브 스미스저 (Hyperion), 밥 토마스저 "Disney’s Art of Animation-From Mickey Mouse to Beauty and the Beast"(Hyperion)

열정이냐, 권태냐

아는 친구의 콘서트를 갔다왔다. 마지막날 마지막 공연이어서 그런지 콘서트장은 수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나중에 듣기론 첫날부터 매진 행렬이었다고 한다). 공연내용도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무대 뒤로 찾아온 사람들이 꽤 많아 보였다. 거기엔 내가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고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분들도 있었다. 그들은 공연자에게 다가가 자신들이 받은 감동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온전하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한마디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들어보지 못할 것 같은 찬사의 파노라마였고 일종의 헌정시였으며 감동의 물결이었다. 나는 그 틈에 끼어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고 내가 조금만 여린 놈이었으면 그 한마디 한마디를 들을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엉엉 소리내며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 표현, 너무 아름다워요…. 엉엉.” 그들은 진심이었다. 나는 그때 엉거주춤 그 틈에 끼어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나는 그런 말을 못할까? 왜 나는 그런 표현을 못할까? 나도 분명히 감동받았는데…. TV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서 어떤 방송현장을 찾아갔는데 연출자가 오케이 사인을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열연을 아끼지 않은 배우에게 뛰어가 바로 그거야!를 외치면서 그 배우를 거의 안다시피 했다는 애길 들었다. 그 얘길 들으면서 난 정말 한번이라도 내가 배우나 스탭한테 느낀 감동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한번도 없었다. 분명 감동받은 적은 있지만…. 이런 일을 하다보면 몇 가지 떠오르는 화두 같은 게 있는데 그중에서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단어가 바로 열정적 또는 정열적이란 말이다. 누군가에게 열정적이다 혹은 정열적이다라고 말할 때는 그것은 대개 그 누군가에게서 보여진 또는 표현된 어떤 것들을 근거로 말을 하게 된다.예를 들어, 그 사람, 말하는 게 참으로 열정적이야. 또는 거참, 일하는 모습이 정말이지 열정적이더군. 하다못해 그 친구, 밤새 정열적으로 포커를 치더니만…. 뭐 이렇게 누군가에게 시지각적으로 인상지워진, 보여진 것들이거나 표현된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열정이나 정열이 한개도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바꿔 말해 나는 너무 표현 못하는 거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왜 안 되지? 표현하는 순간 그 진정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고작 이렇게 유치한 발상이 내가 표현에 미숙한 이유의 전부일까? 그냥 그도 저도 아닌 습관일 뿐인 걸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인정머리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상당히 건조하고 차가운 사람처럼 보이면서 다른 이를 섭섭하게 만들기도 하고 나 스스로도 갑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왜 가장 고조되고 충만되는 그 순간에 싸늘하게 냉각되는 걸까? 오래 전에 고 김현 선생이 죽파 김난초 선생을 두고 “김죽파는 계면조에 미친 젊은 예술가가 아니고 예술의 권태를 사랑하는 분이다”라고 써놓은 글을 읽고 감동받은 적이 있다. 나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으로뿐 아니라 한 자연인으로서도 열정적으로 표현하고 뿜어내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과 과연 궁극은 무엇일까 하고 회의하고 반문하는 노예술가의 처연함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불안하고 게으른 화두를 짐처럼 들고 서 있다. “그 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김지운 | 영화감독·<조용한 가족> <반칙왕>

원작영화, 초라 했다

전에도 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의 열성팬입니다. 최근 방영되는 시리즈 중 이처럼 다양한 재미를 주는 작품도 많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이미 전설이 된 <`X파일`>보다 훨씬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싸구려 B급 호러영화, 수퍼 히어로만화, 십대 소프 오페라가 뒤섞여 기가 막힌 장르 칵테일을 만들어 놓은 그릇 안에서 동성애나 학교 총격사건 같은 첨예한 이슈부터 진지하기 그지없는 고딕 로맨스를 거쳐 베리만식 존재론까지 당연하다는 듯 넘나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시리즈를 단순한 십대 취향 액션물이라고 무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리즈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이 작품에 원작영화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더욱 그렇지요. 왜인지는 저도 모르지만 영화의 출시제와 텔레비전 시리즈의 방영제가 달랐으니까요. 비디오 출시제는 <루크 페리의 뱀파이어 해결사>였고 MBC에서 방영될 때 텔레비전 시리즈의 제목은 <미녀와 뱀파이어>였지요. (도대체 누가 이 방영제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어쩔 수 없이 이 제목을 쓸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솟습니다. 너무 난처해요.) 텔레비전 시리즈 <버피>를 먼저보고 원작영화 <버피>를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심각한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몇년 동안 애정을 폭폭 쏟아가며 익혀왔던 ‘버피버스’와 이 영화의 설정은 전혀 다른 걸요. 물론 ‘해결사’나 ‘후견인’과 같은 기초적인 설정은 같습니다만, 같은 건 그것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기 전선에서 소외된 틴에이저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척점에 선 골빈 금발머리 치어리더죠. 이 영화의 버피는 너무나도 얄팍해서 텔레비전 시리즈의 코딜리아도 셰익스피어 캐릭터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죽은 흡혈귀들이 텔레비전 시리즈에서처럼 근사하게 가루가 되지도 않고, 윌리엄 S. 버로우즈에서부터 로드 러너 쇼까지 펼쳐져 있는 풍부한 문화적 인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윌로우, 잰더, 자일즈, 페이스, 스파이크와 같은 멋진 조연들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왜 크리스티 스완슨이 감히 자기를 버피라고 부르느냐 말이에요. 버피는 사라 미셸 겔러가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불평불만을 무시하고 영화를 보면 그 나름대로 재미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버피버스’만큼 복잡미묘하게 흥미롭지는 않지만 단순분명한 대조가 꽤 재미있는 효과를 내는 작품이죠. 예쁜 금발을 휘둘러대는 것 이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캘리포니아의 금발 미녀가 중세의 악귀들로부터 세상을 구한다는 단순무식한 아이러니 말이에요. 물론 당시에는 무명이었지만 지금은 유명해진 사람들을 발견하며 ‘와, 쟤는 힐라리 스왱크잖아! 쟤는 데이비드 아퀘트네? 아니, 벤 애플렉이 저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하고 외치는 재미도 있고요. 그러나 아무리 이 영화를 좋게 보려고 해도, 그 노력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아마 제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진짜 이유는 경건하게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영화는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꼭 ‘좋아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버피> 팬들이 저처럼 상대적으로 초라한 원작영화를 통해 뒤에 나온 시리즈의 우월성을 느끼며 흐뭇해할 겁니다. djuna01@hanmail.net

나? 광폭미감이야! <졸업>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을 본 것이 중학교 3학년 때다. 종로 뒷골목에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서였다. 그 극장은 재개봉관, 그때 말로 2류 극장이었다. 매표구 위에는 ‘미성년자 입장 불가’가 선명했는데, 아무튼 나는 입장했다. 규율은 늘 위반으로 마무리되니까. 내가 할리우드 영화를 즐기는 건 그것들이 대체로 해피엔딩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더러 언해피하게 끝나더라도 그 불행은 대개 감미료를 둠뿍 친 멜랑콜리에 가깝다. 극장 밖의 현실은 온갖 불행으로 그득 차 있으므로, 영화를 보면서까지 그 불행을 되씹으며 자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철학이다. 그래서 <졸업>의 해피엔딩에 나는 흡족했다. 번역자의 지나친 배려 때문에 로빈슨 부인이 일레인의 어머니인지 숙모인지가 좀 섞갈렸지만. 우선 그 영화를 인상적으로 만든 건, 다른 관객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폴 사이먼과 아트 가펑클의 노래들이었다. <스카보로 시장> <침묵의 소리> <로빈슨 부인> 같은 노래들을 내가 그 영화에서 처음 들었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영화를 본 뒤에는, 그 노래들을 지겹도록 들었다. <졸업>은 스토리나 그림 못지않게 소리로 한몫 본 영화다. 그러나 그 영화에서 노래들보다 더 내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은 일레인 역을 맡은 캐서린 로스의 미목수려(眉目秀麗)다. 나는 세상에 저렇게 기막히게 빚어진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하며 넋을 놓았다. 과장없이 적어도 그뒤 한달간, 나는 밤마다 나의 캐서린을 생각하느라 잠을 설쳤다. 그뒤 오래도록 나는 친구들에게도 캐서린 로스의 미색에 대해 떠벌렸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마다 내 심미안을 의심받았을 뿐이다. 그런 떡대가 어디가 좋으니?(아닌 게 아니라 캐서린 로스의 어깨는 남자 못지않게 넓다.) 세월은 흘러서 1993년 4월 말. 나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르투케라는 해변에 있었다. 유럽에서 8개월간의 저널리즘 연수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일종의 졸업여행을 온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베르뒤르라는 카페에서 나는 주잔나라는 여자 동료와 종알대고 있었다. 주잔나는 부다페스트에서 온 친구였다. 우리는 연수 기간 내내 붙어다녔다. 침대를 함께 쓰지는 않았지만. 르투케의 베르뒤르에서, 문득 십대 때 본 영화 <졸업>이 생각났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졸업여행’중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그것은 주잔나의 어깨가 캐서린 로스의 어깨처럼 쩍 벌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카페에서 내다보고 있던 바다의 쪽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옳다면, 영화 <졸업>에는 푸른 빛의 이미지가 또렷하다. 그것도 물빛이다. 비록 바닷물이 아니라 풀장의 물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나는 주잔나에게 <졸업> 얘기를 꺼냈다. 아쉽게도 그녀는 그 영화를 못 봤더구먼. 그때 우리는 우리가 돌아갈 도시들에 대해서, 그러니까 서울과 부다페스트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단지 이틀 동안 머물렀을 뿐인 부다페스트에 대해 그녀에게 얘기했고, 그녀는 오로지(1988년 올림픽 때) 텔레비전으로만 본 서울에 대해 나에게 얘기했다. 브라운관 속에서 본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에 대해 그녀가 떠벌리기에, 나는 육안으로 보는 서울, 숨쉬고 살아가야 하는 서울이 얼마나 흉하고 끔찍한 지옥인지를 찬찬히 얘기함으로써 그녀의 지리학적 교양을 크게 함양시켜 주었다. 최근에 <글루미 썬데이>라는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 사람 여럿 죽였다는, 같은 제목의 노래가 좋아서 영화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비치는 부다페스트 시가를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저기 가본 게 언제던가, 언제라도 다시 가볼 수는 있을까, 저기 어디쯤 주잔나가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마구 솟구쳤다. 브라운관 속의 부다페스트는 내가 실제로 본 부다페스트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아무렴! 마땅히 그래야지! 영화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의 주잔나는 그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이름을 모르겠다. 그냥 ‘글루미’라고 부르자)로 대체됐다. 정말 어디서 기가 막히게 예쁜 아가씨를 찾아내 캐스팅했군, 하고 나는 감탄했다. 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영화가 헝가리산(産)인지 독일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막판의 할리우드식 ‘해피엔딩’- 권선징악 레슨이라고 해야겠지- 이 나를 위로했다. 마지막 장면에 늙은 글루미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나는 뭔가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영화의 격조라는 측면에선 그 부분이 없는 게 더 나았겠지만. 글루미는 캐서린 로스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캐서린 로스가 활명적(活命的)으로 아름답다면, 글루미는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그 사이에 내 취향이 변한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도 캐서린 로스와 글루미가 동시에 좋다. 얼마 전 친구와의 술자리 대화 한 토막. 나 : 난 TV 연기자 가운데 한혜숙씨와 유호정씨가 젤 좋아. 친구 : 둘 다 미인이고 분위기가 있지만, 계열이 전혀 달라. 어느 한쪽을 좋아할 순 있지만, 두 사람 다를 좋아한다는 건 이해가 안 가네. 나 : 난 광폭미감이거든.

웃음의 파시즘, 비상구가 없다

<쇼! 무한탈출> SBS 토요일 저녁 6시 ‘생존’을 위해 눈물나는 게임을 벌이고, ‘목표 달성’을 위해 안쓰러운 몸부림이더니, 이번에는 ‘탈출’해야 한다고 대소란이다. 이쯤 되면 주말 저녁 텔레비전 앞은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이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악다구니들의 투쟁의 장임을 선언한다. 삶의 전쟁터에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돌아온 안방에는 또다른 전쟁터가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것은 없다. 피투성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아닌 그들이니까. ‘전천후 만능 쾌락도사’를 선포한 연예인들이 샌드백이 될 준비를 하고 줄줄이 사각의 링으로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의 임무다. 그리고 ‘큐’ 소리와 함께 말초적인 신경만 곤두세운 ‘바보’가 되면 그만이다. SBS가 봄 개편을 맞아 3월17일부터 새롭게 선보인 오락프로그램 <쇼! 무한탈출>(연출 남형석·공희철·유윤재)은 제목부터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탈출의 범주가 애초부터 ‘무한’이다. 다시 말해 탈출할 대상이 그 범위가 정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모든 고통받는 상황으로부터의 탈출이 기획의도라는 말이다. 이 얼마나 대담하고 또한 영리한 발상인가. 적어도 소재가 떨어져 문을 닫는 궁핍한 상황은 연출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막상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가 보면 탈출해야 하는 ‘고통’은 황당하고 궁색하다 못해 초라한 모습으로 우릴 맞이한다. 자유롭고 편안해지기 위한 탈출을 생각했다면 미리 마음을 고쳐먹자. #1. 신인에서 국민가수로의 ‘탈출’ 첫 음반을 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생짜’ 신인가수가 과연 국민가수로서의 가능성이 있는지 시험대에 선다. 이를 위해 600명의 ‘시민 대표단’이 꾸려지고, 가수 초년생은 그들 중 80%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힘찬 콧바람을 비롯한 온갖 잡기를 동원한다. 어, 노래로 실력을 인정받는 것 아니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 이 대목에서 그의 노래 실력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은 이 대표단들은 사실 그 가수가 판을 낸 사실도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가수 아무개를 구경하고 심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저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 앉은 것뿐이고, 따라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구태여 노래 실력‘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연출진들은 새삼 십원어치의 값도 못하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한다. 이른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는 ‘안티’세력을 출연시킨 것이 방패막이인 듯싶은데, 이들의 역할도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들은 결국 이 신인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부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단순한 구실 외에는 역할지어진 바 없음에서다. 이제 단순하게 정리하겠다. 그냥 띄우자는 거다. ‘신인 띄우기’의 오래된 버전업이다. #2. 一言二口에서 言行一致로의 ‘탈출’ God의 김태우가 말 실수를 했단다. 뭔고 하니, 옛날 옛적 어느 방송에 나와 “저희는 음식을 남기는 것은 용납 못하죠” 한 게 실수였단다. 왜 실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거두절미, 문맥무시. 단지 그 말을 내뱉은 게 화근이 되어 이들 다섯 멤버는 하루 저녁에 301가지의 중국 요리를 뱃속에 처형시켜야 하는 고문을 당한다. 음식을 다 못 먹을 때엔 음식값 배상과 더불어 무시무시한 레슬러의 ‘코브라’ 관절꺾기를 겪을 판이다. 그들은 142가지의 음식을 먹는 것으로 1회 방영을 마쳤다. 앗, 이번엔 방송 도중 사회자 김진수의 발언이 문제가 됐나보다. 그는 다음 시간에 온갖 보신음식을 먹어야 하는 고문을 당할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이제는 이유를 들을 차례다. 연출진들은 ‘스타의 말 한마디가 초래하는 엄청난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호언장담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사소한 말이라도 책임감을 갖고 실천케 함을 의도로 했다고 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을 용납 못한다”는 발언이 “아무리 많은 음식이라도 다 먹어치울 자신있다”는 호언장담으로 저도 몰래 바뀌는 순간이다. 앞으로 말조심 할지어다. '막걸리 보안법'보다 더 무서운 법이 여기에 있다. #3. 계급사회에서 평등사회로의 ‘탈출’ 대통령도 하지 못한 숙원의 사업 ‘계급과 계층의 화합’을 이 코너가 하겠다고 나섰다. 거기다 남녀의 화합까지. 보통 큰 과제가 아니다. ‘인간 대화합’이 기획의도라 하면 가히 메시아적인 프로그램이다. 처음엔 그저 이성관계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서로 다른 계층의 연인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소박한’ 의도로 출발했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는 몇쌍의 커플이 필요했다고. 그래서 생각한 첫 번째 커플이 ‘엘리트 모범생’ 남자와 ‘비행 가출소녀’다. 사실 조건은 더 있다. 인물이 훤칠하고 능력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엄격한 부모 밑에 예절바르게 큰 남자라는 점과 말 끝마다 욕을 달고 살지만 근본은 착한, 얼굴 예쁜 여자라는 점. 분명 통념을 깨뜨리는 커플이라고 소개했는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이다. 굳이 할리퀸 소설을 뒤적이지 않아도 드라마, 영화에서 날마다 보는 게 이런 커플일 텐데, 작가가 남자라서 잘 몰랐던 모양인가. 이 커플을 가지고 무슨 인간 화합에다 고정관념 타파를 이야기한다는 걸까. 오히려 이런 모습이 계층의 전형성을 확고히 다지고, 케케 묵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마저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그런데 묘하다. 이 코너를 보고 있다보면 그 와중에도 웃음이 나고 감정의 울림이 있다. 똑똑한 연출이다. 사실 자칫 계층의 차이에서 오는 몰이해와 갈등의 요소들을 로맨스라는 커다란 봉지에다 꽉꽉 봉인시켜버렸으니까. 남는 건 사랑이다. 사랑 앞에 죄는 허물어지고, 남는 건 예쁘디 예쁜 ‘러브 스토리’다. 다음에 준비중인 커플이 혹시 강남녀와 농촌남의 ‘화합’은 아닐는지. 두고볼 일이다. #4. 못난이에서 예쁜이로의 ‘탈출’ 가장 논란이 많이 일었던 부분.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는 못생긴 여자를 성형으로써 외모를 개선시키고 아울러 자신감과 삶의 의욕을 되찾게 하는 것이 코너의 목적이다. 앞에서 나열한 코너에 비하면 가장 의도가 왜곡되지 않고 잘 살아 있는 코너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더는 왜곡될 곳도 없다. 너무나 간단 명료한 목표니까. 그런데 문제가 되는 이유는 두 가지 요인에서이다. 한 가지는 과연 외모를 개선하기 위한 마지막 종착점이 성형수술이냐 하는 점과 또 한 가지는 외모의 개선만이 자신감과 삶의 의욕을 가지도록 하는 요소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외모의 평가란 것은 다분히 주관적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기준이 있어 그것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점에 문제가 있다. 성형수술이 극단적인 예인데, 미의 개념을 단지 ‘예쁘다’로 한정, 축소시키고 그것의 요소마저 획일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쁜 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쁘기로만 따지면 이 세상의 단지 몇 %에 불과한 소수만이 그 혜택을 누릴 뿐이다. 아름다움의 접근방법은 다양해져야 한다. 물론,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외모의 개선이 일조하리라는 생각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외모의 개선방법 가운데 성형수술을 택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자신의 외모를 인정하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 개발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인정하기 전에 먼저 부정해버리는 태도를, 방송이 앞장서서 조장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방송이라면 그녀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다양한 시도를 매회에 걸쳐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5. 가학과 엽기와 선정으로부터의 ‘탈출’ 현재의 쇼 오락 프로그램이 비난받는 가장 큰 이유 세 가지는 가학성, 엽기성, 선정성이다. 그런데 비난하지 말지어다. 위의 세 가지는 현존하는 오락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허탈해서, 더는 못 보겠기에 마침내 포기한 듯) 웃을 때까지’는 이들의 지상과제이자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오락 프로그램이 ‘재미없어서’ 못 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즐기지 못하는 것은 오락 프로가 지시하는 ‘룰’에 응하지 않아서이다. 룰은 의외로 간단하다. ‘먼저 머리로 생각하지 말 것, 그리고 정해진 곳에 가선 웃어줄 것.’ 파시즘적으로까지 보이는 오락 프로그램의 행태는 시청자에게 웃어야 할 곳과 야유를 보낼 순간까지 철저히 짚어준다. 이제 창의성의 부재에 따른 표절시비는 더이상 논쟁거리도 안 될 정도이고, 시청률과 상업주의 논란도 더는 지적하기에 고단한 지경에 이르렀다. 얼마 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에서는 성명서를 통해, <쇼! 무한탈출>의 폐지를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말마따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프로그램이 비단 위의 프로그램만은 아니라는 점. 아이들이 엄마 대신, 선생님 대신으로 삼고 있는 텔레비전이 이제 그 아이들의 뇌를 좀먹고 있는데, 어른들의 대응은 고작 ‘폐지하라’다. 그에 따른 대응책을 내놓길 기대하는 건 너무 무리일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이상 텔레비전이 ‘바보상자’로 더 변하기 전에 그 텃밭을 가꾸고 지켜보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더이상 방기하면 정말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텔레비전은 이제 무시무시한 폭탄이 되었다. 글 심지현/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사진제공 SBS 홍보실

몰입이라는 이름의 카타르시스, <에이리언2>

영화에 빠져서 현실을 잊는 사람들, 비디오 테이프 10개를 대여해서 밤을 새면서 보는 사람들, 소파에 누워서 케이블TV의 영화를 하염없이 보는 사람들, 대체로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영화는 심심함을 잊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영화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심심한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금은 한가한 말인지 모르지만, 궁핍하단 것이 견디기 어려운 점의 하나는 심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소속감을 엷게 만들고, 주위와 어울리는 일을 힘들게 만든다. 어릴 때 학교에서 돌아와 마주한 집 앞의 적막함이 주던 현실감의 증발을 커서도 느낀다는 것은 단적으로 심심하다는 말이다. 마루를 같이 써야 하는 셋방의 이웃들과의 ‘강제된 친밀성’도 역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주요한 수요가 하층계급에서 나오던, 영화사의 초기에 그랬듯이 영화관의 어둠은 빛이다. 현실 생활에서 영화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두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어둠이 끝나는 터널 끝의 빛을 보는 일이다. 영화관의 구조, 정신분석학적 관객 이론, 카메라와 스크린의 이데올로기적 장치 등등의 이야기는 이 빛 앞에서는 모두 바래버린 얼룩조차 되지 못한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에이리언2>를 본 것은 별로 맡겨진 일이라는 걸 갖지 못하던 시간강사 시절이었고, 신혼 초였다. 결혼해본 사람은 다 알지만, 이 시기도 심심하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에이리언2>는 말이 필요없었다. 몇년이 지난 뒤에, 미래의 자본주의에 대한 묘사, 감춰진 상징적 장치, 미장센의 성적배치 등에 대해 들었지만, 그 영화가 준 것은 몰입의 체험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동시상영관에서 두번을 더 보았다. 그 극장은 친절하게 좌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중 목욕탕에서 깔고 앉는 데 쓰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의자(?)를 주었다. 배급받은 그 의자를 들고, 맨 앞 좌석과 스크린 사이에 있는 공간에 가 앉아서, 다시 몰입할 수 있었다. 뒤에 취직을 해서 VTR을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테이프로 빌려 보았고, 명절 특선영화로 텔레비전에서 방영할 때도 빠뜨리지 않고 보았다. 그때의 몰입의 이유를 사후적인 가감없이 말한다면, SF영화 일반이 주는 비현실성, 즉 여기와 지금이 아닌 다른 공간, 시간에서의 사건이라는 점이 있다. 그러면서도 여늬 SF영화의 미래와는 달리, 현재로부터 많이 발전된 것 같지도 않은 우중충한 미래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아마 어떤 면에서는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눈을 끌어당긴 것은 영화에 나오는 빛들이다. 시작할 때 리플리가 잠들어 있는 우주선 내부를 검사하는 빛, 수없이 나오는 모니터들의 빛, 전체적으로 너무나 어두운 영화 전체에 걸쳐서 끌어당기는 것은 그 빛들이었다. 만일 고전이라는 것이 특정시기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작품을 말한다면, <에이리언2>는 고전이다. 물론 지금도 그 영화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 엄청난 힘을 가진 에일리언을 화물운반용의 작업로봇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는 해피엔딩에 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표현하는 일이다. 심심한 사람도 심심함을 표현하면서 산다.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은 가시화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시적인 것과 과시적인 것은 다르지 않을까. 에일리언이 끔찍한 이유는, 그것이 내부에서 외부로의 표현이 극단적인 과잉에 달한 존재라는 점이다. 점액은 몸의 내부에서 만들어져서 외부로 분비된다. 에일리언의 경우 점액은 피부 전체를 덮고 있을 뿐 아니라 과도하게 흘러넘쳐 언제나 자신의 흔적을 여기저기에다 묻혀 놓는다. 자기 표현, 자기 과시의 엄청남. 그중 입이 특징적이다. 입이 벌어지면 단순히 속살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입 속에서 나온 또다른 두 번째 입을 볼 수 있다. 입을 통해서 자기를 이중삼중으로 과시한다. 그것을 넘어서서 에일리언은 상처를 입으면 강산성의 피를 흘린다. 자신의 약점, 상처로도 상대방을 제압한다. 자신의 약점과 비루한 속내까지도 고백함으로써 힘을 과시한다. 이러한 자기과시는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존재의 생존본능이다. 그래서 도덕적 잣대나 논리적 반론은 어떤 처방도 되지 못한다. 그 존재의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무엇인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 대상을 숙주로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엽기의 시대에는 최고의 스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업로봇은 그저 노동수단일 뿐이다. 로봇은 자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리플리는 자기라는 것이 없는 두툼한 기계의 안쪽에 숨어 있다. 로봇이든 리플리든 자기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리플리가 착용한 로봇은 원래 전투용이 아니라 그저 운반용이다. 또 한가한 말이겠지만 로봇이 에일리언을 이겨서 정말 다행이다. 그 결말이 <에이리언2>를 여전히 좋아하게 만든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절 멜로를 싹틔우다

1950년부터 3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법. 50년대 중후반은 폐허와 절망 위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려 안간힘을 쓰던 고난의 시대였다. 유두연은 이 전후재건기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다. 영화는 이 궁핍했던 시대에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위로한 거의 유일한 오락수단이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이전이므로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는 직직거리는 소음을 대동한 라디오 드라마가 전부이던 그 시절, 영화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주고 눈물로 한(恨)을 씻어내게 만들었던 무소불위의 위력을 마음껏 발휘했다. 유두연은 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 동안 집중적으로 30편에 이르는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60년대에 크게 유행한 전후 멜로드라마의 기초를 닦고 한국영화 부흥의 초석을 마련한 작가로 평가된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유두연은 해주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경응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식민지의 엘리트청년이었다. 40년대 후반부터 선진적인 영화평론을 발표해오던 그는 한국전쟁 동안 부산으로 피난온 영화쪽 사람들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충무로 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시나리오 데뷔작은 환도 직후인 1954년 발표된 신상옥의 <코리아>. 당시의 시대정신에 발맞춰 우리의 국토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기 위해 제작된 작품인데,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들을 극화하여 삽입한 일종의 문화영화이다. <유전의 애수>는 부잣집 아들과 창녀가 부모의 반대와 사회적 매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맺으려 애쓴다는 내용으로 당대의 관객에게 눈물을 펑펑 쏟도록 만든 작품인데, 이후 60년대 후반까지 크게 히트한 이른바 ‘한국적 멜로’의 한 맹아를 보여준다. <마인>과 <실락원의 별>은 우리나라 추리소설계의 거목 김래성 원작의 장편소설을 각색한 작품. 특히 자신의 애독자와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는 유명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실락원의 별>은 흥행에 크게 성공해 이듬해인 1958년 그 속편까지 만들어진다. 유현목이 만든 <잃어버린 청춘>은 25시간이라는 한정된 타임프레임 안에 당대의 청춘들이 겪어야만 했던 불안하고 절박한 시대상황을 솜씨좋게 묘사해낸 수작으로 꼽힌다. 임화수가 제작한 <그림자 사랑>은 최무룡, 윤일봉과 더불어 홍콩배우들을 대거 출연시킨 한·홍합작의 멜로드라마로 홍콩에서는 <다정한>(多情恨)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됐다. 홍성기가 촬영과 감독을 겸한 <산넘어 바다건너>는 당시 떠오르던 청춘스타 김지미의 매력이 마음껏 발산된 초특급 흥행작. 고아로 자라난 스물두살의 아름다운 처녀 윤경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있으라!”며 절규하던 장면이 일품이었다는 것이 모든 원로영화인들의 한결같은 회고다. 당시 수십만명을 헤아리던 전쟁미망인들의 애달픈 삶을 안타깝게 묘사한 것이 유두연의 감독데뷔작 <유혹의 강>. 엄앵란과 노경희를 비롯하여 나애심, 김의향, 정애란, 김신재 등 당대의 여배우들이 총출동한 이 영화는 숱한 여성관객의 옷고름과 손수건을 적셨다. <귀거래> 역시 전쟁미망인이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 시대상황을 충실히 반영한 멜로. 홍성기의 <춘향전>은 같은 해 개봉된 신상옥의 <성춘향>과의 맞대결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 두 감독이 각각 자신들의 아내인 김지미·최은희를 내세워 정면대결을 펼쳤는데, 흥행결과는 배급업자들의 예상을 뒤엎고 <성춘향>의 일방적인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 맞대결의 결과 그동안 멜로 분야에서 절대우위를 지켜오던 홍성기의 위세가 차츰 사그라든 반면, 신상옥은 승승장구의 연타석 홈런으로 충무로의 패자가 된다. 평생 8편의 영화를 연출한 유두연의 마지막 감독작품은 자유당 시절 국회의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한 정치영화 <어딘지 가고 싶어>. 최무룡이 개혁의지에 불타는 젊은 국회의원으로 나와 열연을 펼친다. 전쟁 직후와 혁명 직후 각기 다른 내용과 스타일의 시나리오를 내놓는 것을 보면 유두연에게는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54년 신상옥의 <코리아> 1955년 김성민의 <망나니비사> 1956년 유현목의 <유전의 애수> 1957년 한형모의 <마인>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 ★ 홍성기의 <실락원의 별> ★ 1958년 김화랑의 <그림자 사랑> 홍성기의 <산넘어 바다건너> ★ 유두연의 <유혹의 강> 1959년 정창화의 <사랑이 가기 전에> 권영순의 <양지를 찾아서> 1960년 이용민의 <귀거래> 조성호의 <바위고개> 1961년 홍성기의 <춘향전> 1962년 유두연의 <어딘지 가고 싶어>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