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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 대중영화는 어느 비평가보다 더 지적이다 ” 김소영 교수, 영화학계의 살아있는 족보 토마스 엘새서를 만나다 8월27일 폐막한 제4회 세네프영화제를 방문한 토마스 엘새서(60) 교수는, “당신이 학자로서 걸어온 길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청하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인물 중 하나다. 우리에게 돌아올 대답은, 어쩌면 특정 학문의 발전사를 개괄하는 반 시간 넘는 강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 테이블에 마주앉은 김소영 영상원 교수가 즉석에서 붙여준 “살아 있는 영화학계 족보”라는 별명처럼, 토마스 엘새서는 1960, 70년대에 걸쳐 동세대 시네필들- 영화학과 신입생들의 필독서 목록에 줄줄이 이름이 발견되는- 과 더불어 영화학이라는 신생 학문의 터를 닦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이후 5세대에 이르는 제자를 길러낸 거인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해 교육받았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체류한 바 있는 ‘코스모폴리탄’ 엘새서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의 영화/텔레비전 학과장으로서 왕성한 교육,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70년대 중반 더글러스 서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멜로드라마의 효과를 탁월하게 분석한 교과서적 에세이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로 첫 명성을 얻은 엘새서가 권위를 자랑하는 분야로는 뉴 저먼 시네마, 멜로드라마, 초기 영화, 디지털 매체의 영화사적 의의 등을 꼽을 수 있다. 영화예술, 영화매체에 대한 30년이 넘는 매혹과 탐구의 소산은 그가 생산한 250여편의 방대한 논문에 담겨 전세계의 도서관에서 부지런한 영화학도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가장 열정적인 영화의 관객/독자를 대신해 만남을 청한 김소영 교수와 토마스 엘새서교수의 대화는 긴 호흡으로 흘러갔다. 수면 부족과 피로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던 엘새서교수는 언제 그랬냐 싶게 끈질기고 상세한 설명에 몰두했다. 역시 성실한 노학자의 오랜 습관은 여독보다 강했다. 토마스 엘새서(Tomas Elsaesser)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 영화 · 텔레비전학과장 주요 저서 및 편서 <파스빈더의 독일>(1996) · <디지털 시대의 영화>(1998) · (1999) · <바이마르 영화와 이후>(2000) · <현대 미국 영화 연구>(2001) 등이 있음 김소영__ 아무래도 당신이 거쳐온 기나긴 지적 여정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고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서술을 테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적 여정이랄 수는 없지만 대학 시절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된 타보 음베키와 연적이 된 경력도 있다. (웃음) 1966년 교내 필름 클럽을 창설하고 개봉작 정보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영향이 엿보이는 긴 기사가 같이 실린 <브라이튼 필름 리뷰>라는 잡지도 펴냈다. 내가 속한 그룹은 작가주의적 관점에서 할리우드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60, 70년대는 장 뤽 고다르로 대표되는 정치적 영화의 시대였고 영화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폭발한 시대였다. 프랑스 역사학에 관한 논문을 위해 파리에서 보낸 1년은 바로 1967년에서 1968년 5월에 이르는 격동기였다. 격동기에 영화를 만나다 김소영__ 절묘한 타이밍, 절묘한 장소다. 토마스 엘새서__ 말하자면 나는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는 1968년에, 역사가 칼라일과 미슐레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저술을 남긴 또 다른 혁명기 1848년의 역사서술을 연구했던 셈이다! 아침이면 국립 비디오테크로 직행해 프랑스 혁명사 서술에 관한 자료를 뒤졌고 6시에 비디오테크가 문을 닫으면 당장 지하철을 타고 끼니도 거른 채 시네마테크로 향했고 거기서 의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통해 앙리 랑글루아,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뤽 고다르와 교분을 가졌다. 당시 그들은 미국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고 정치화되는 국면에 있었지만, 나는 60년대 초 그들이 쓴 글을 통해 샘 풀러, 니콜라스 레이, 빈센트 미넬리, 하워드 혹스, 앨프리드 히치콕 같은 감독에 관심을 가졌고 영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했다. 1971년에는 <네 멋대로 해라>가 헌정된 B급영화 프로덕션의 이름을 딴 <모노그램>이라는 잡지를 더 광범위한 독자를 겨냥해 런던에서 발행했다. 이 잡지는 아무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입에 올리지 않던 시대에 이미 포스트모던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카이에 뒤 시네마>를 인용한 영국의 <무비>라는 잡지를 재차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웃음) 우리는 <스크린>이 알튀세르나 라캉의 이론에 경도되고 영화의 정치적 해석에 몰두하던 그 즈음에 의식적으로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 매진했다. 김소영__ 그러한 태도는 영화를 연구하는 공동체 내에서 긴장을 자아냈을 법하다. 토마스 엘새서__ 실제로 대립이 있었다. 영화학자 폴 윌먼은 내게 비판적이었다. 내 입장에 우호적이었던 인물로는 당시 영국영화연구소(BFI) 교육 부서에 있으면서 영화잡지에 대한 후원도 맡았던 영화학자 피터 월런이 있는데 그도 역시 분열적인 인간이었다. 월런이 얼마나 분열적이냐면 최근 출간된 책에서 자신의 필명 리 러셀을 인터뷰어로 동원해 셀프 인터뷰를 실었던 위인이다. (웃음) 나와 피터 월런, 로라 멀비(페미니즘영화 연구의 시금석이 된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의 저자)는 1972년 에든버러영화제에서 더글러스 서크 회고전을 기획하기도 했다. 김소영__ 더글러스 서크를 비롯한 몇몇 감독에 대한 당신의 특별한 관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토마스 엘새서__ 당시 나는 두 가지에 매혹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특정한 부류의 영화, 즉 ‘미장센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속성을 가진 영화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대중문화였다. 더글러스 서크에 대한 관심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 역시 독일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 그곳을 떠난 만큼 이민, 망명 감독에게 시선이 쏠렸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은 서크를 연구하던 도중 발견했고 처음 영국에 소개했다. 뉴 저먼 시네마 회고전을 영국에서 주최하면서 내가 할 일이라는 확신이 섰다. 나는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처럼 <스크린>이 옹호한 해체적인 영화보다 대중과의 고리를 유지하는 영화에 끌렸다. 김소영__ 1970년대 중반은 영화학이 대학 안에서 학문으로서 제도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토마스 엘새서__ 1970년대 초 영국의 영화문화는 풍요로웠다. 지금 아시아영화 전문가인 토니 레인즈나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된 사이먼 필드 등 많은 시네필들은 각자 자신의 잡지를 만들고 있었고 서로 친밀했다. 매우 정치적이고 정열적이며 논쟁적인 시대였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나는 BFI의 에드워드 보스콘과 함께 어드바이저 자격으로, 1960년대 들어 개교한 젊은 대학- 워릭, 켄트, 에섹스, 이스트 앵글리아, 키일대학에 교수 보직을 만들고 영화학과를 여는 일을 도왔다. 이때 로빈 우드, 리처드 다이어, 피터 월런, 찰스 바, 존 엘리스 등이 각 학교 영화과에 부임했다. 하나같이 성취 동기가 강했고 저널리즘 출신이 많았으며 박사학위 소지자는 거의 없었다. 제도화된 영화학의 출발은 영화비평과 학자로서의 연구를 병행해온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 대중영화를 위한 매트릭스의 탄생 김소영__ 역사, 대중문화 등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모여 대중영화 연구의 새로운 매트릭스가 탄생한 것 같다. 당신의 논문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만 예로 보더라도 그렇다. 문학적 지식, 프랑스 혁명이나 19세기 사회에 대한 언급 같은 다른 학문의 트레이닝이 논증을 뒷받침하고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가 힘을 발휘한 것은 그 글이 골수 시네필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탐구할 수 있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대중영화가 빚진 가장 중요한 전통은 19세기 소설이라고 믿는다. 그 글에 나오는 부르주아 소설, 빅토리아 멜로드라마 연극의 논거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경험에 나온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연구자들은 각기 특별한 방식으로 영화학에 제도적 권위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후 다이어의 뮤지컬 연구, 나의 멜로드라마 연구, 로빈 우드의 호러 장르 탐구에서 보듯 장르영화에 대한 천착으로 발전해나갔다. 대중문화, 장르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특별한 매트릭스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소영__ 버밍엄 학파의 형성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던 셈인가? 토마스 엘새서__ 리처드 다이어가 버밍엄 학파의 문화연구 성과를 영화학에 끌어들인 선구자다. 영화학은 버밍엄 학파의 영향도 받았지만 여전히 작가주의가 강세였다. 나 역시 스튜어트 홀의 방법론을 알고 있었지만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는 영화적 형식에 관한 연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음향과 분노의 이야기>에 깔려 있던 의도는 영화작가를 작가주의의 울타리 밖으로 끌어내 장르 시네마 안에서 탐구해보려는 것이었다. 그 논문은 더글러스 서크, 빈센트 미넬리 감독을 분석한 글이지만 동시에 미장센 같은 형식적 이슈도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특정 장르를 하나의 징후로서 읽고 비평적 독법이 가능한 대상으로 접근하려고 했다. 리처드 다이어는 ‘대중문화 속의 유토피아적 순간’을 언급한 바 있다. 나 역시 내가 왜 이렇게 미국 영화에 계속 집착했는지 자문하곤 한다. 그들은 거대한 공적인데 말이다. (웃음) 이유는 그것이 대중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김소영__ 그러한 입장은 린다 윌리엄스(<하드 코어>를 쓴 페미니스트 영화학자)의 저작에서도 읽을 수 있다. 토마스 엘새서__ 오, 그녀는 내가 시도 못한 장르, 포르노그라피를 영화학의 지평에 더했다. 윌리엄스의 연구에는 영국 페미니즘도 영향을 끼쳤다. 1970년대 후반 나는 베를린자유대학과 아이오와대학에서 뉴 저먼 시네마를 강의했다. 아이오와와 가까운 밀워키에서 그맘때 열린 밀워키 컨퍼런스는 영국의 영화 문화가 미국으로, 즉 <스크린>의 이론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모멘트를 마련했다. 크리스티앙 메츠, 스티븐 히스, 로라 멀비, 더들리 앤드루가 모여들었고 데이비드 보드웰과 크리스틴 톰슨은 당시 더들리 앤드루의 제자였다. 영화학의 역사는 아이디어의 역사이지만 그 이면은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움직이고 여행하는 개인들의 네트워크다. 트라우마로서의 미국영화 김소영__ 어제 강연에서 당신은 테크놀로지가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킬까라는 이야기 중에 <매트릭스>와 <터미네이터3>의 액션과 자동차 추격전이 어떻게 디지털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안무됐는가를 비교했다. 동시대의 액션영화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엘새서: 미국영화는 언제나 나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미국영화는 진지한 영화학자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진지하게 취급되지 못했고 영화광들도 1980, 90년대 미국영화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이른바 미국 액션영화를 자세히 보면 사실 ‘리액션(reaction) 영화’라고 불러 마땅하다. 포스트 베트남, 포스트 워터게이트 영화를 포함한 1980, 90년대 미국영화는 내가 보기에 ‘트라우마의 영화’다. 현재 집필 중인 책의 제목도 <멜로드라마와 트라우마, 미국영화가 보여주는 문화적 기억의 방식>이다. 논지는 멜로드라마의 예에서 출발한다. 멜로드라마는 특정한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고 그로 인해 여성의 관심을 끄는 장르다. 멜로드라마는 기다림, 행동하고 싶은 욕망과 행동의 불가능함의 장르이며, 그래서 히스테리와 위기의 영화다. 내 주장은 1950년대 멜로드라마가 한 역할과 1980년, 90년대 액션영화의 역할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람보, 슈워제네거 같은 우익영화 속 남성영웅의 몸은 트라우마를 가진 육체다. 김소영__ 그럴 수가! 나 역시 195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를 거쳐 지금은 1970년대 한국 액션영화를 홍콩 합작영화와 연관 속에서 연구 중이다. 좀전에도 영화연구의 매트릭스가 형성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하나의 연구가 다른 연구와 만나고 서로 흘러드는 양상은 재미있다. 토마스 엘새서__ 나는 얼핏 보기엔 액션히어로의 영화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액션의 위기, 액션을 가로막는 장애, 하이퍼 액션, 리액션을 발견하는 영화를 주목한다. <포레스트 검프>나 <메멘토>도 예로 언급되는 영화들이다. 멜로드라마의 시대였던 전후는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로 등극하고 첫 번째 메이저 헤게모니를 갖게 된 시기였다. 미국은 승자였고 유럽과 아시아에 막대한 입김을 끼치기 시작했다. 내 질문은 미국은 왜 그처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던 시대에 미국이 스스로를 회의하는 장르, 멜로드라마와 필름누아르를 만들었는가다. 1980, 90년대에도 동일한 질문이 가능하다. 내 책의 한 챕터는 남자주인공이 이미 죽은 다음에 시작되는 <아메리칸 뷰티> <메멘토> <식스 센스> 같은 영화들에 관한 것이다. 남성영웅이 극단적으로 무력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필름누아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액션히어로라기보다 리액션 히어로, 인액션(inaction) 히어로다. 내가 붙인 이름은 포스트 모던 시네마가 아닌 포스트 모르템(postmortem) 영화다. 한국말로도 말장난이 될까? (웃음) 김소영__ (웃음) 내가 지금 썼던 논문의 제목은 한국 액션영화 <유령>(Phantom Submarine)에서 따온 ‘Phantom States’인데, 죽은 주인공이 바다 위를 부유하며 뇌까리는 독백이 서두다. 토마스 엘새서__ 그거야말로 <썬셋대로> 아닌가! 할리우드는 늘 그러했고 현재도 그렇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할리우드영화도 사회적 현상의 징후를 드러낸다. 나의 이런 관점은 나와 지크프리드 크라카우어(<칼리가리부터 히틀러까지>라는 저서에서 1920년대 바이마르 영화를 파시즘의 징후로 진단한 학자)의 끝나지 않는 대화이기도 하다. 나에게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 부정적인 감정에 관한 예술이다.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1] ▶ 김소영-토마스 엘새서대담 [2]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 아쓰미 기요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토라상’의 캐릭터는 그가 제시한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다고 들었다. 당시 아쓰미 기요시는 텔레비전에서 코미디 스타였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 그를 알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상하며 장난치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사는 토라상의 삶은 그가 어렸을 때 동경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들려준 캐릭터이다.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다. --- | (이주일 사진을 보여주며) 한국에도 아쓰미 기요시와 비슷하게 생긴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있었다. > 아쓰미 기요시는 “내 얼굴은 네모다. 눈도 깨처럼 작다. 하지만, 나도 부모님에게 부탁해서 이 얼굴로 태어난 건 아니다” 하는 식의 자기 얼굴을 갖고 하는 농담을 즐겼다. 그는 오히려 자기 얼굴 못생긴 걸 자랑으로 여긴 사람이다. 그런 말은 영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 | 이 분의 유행어도 “못생겨서 죄송합니다”이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는 이런 말을 했다. “코미디 프로는 참 잔혹하네요, 그 사람의 보기 싫은 모습을 보고 웃으니까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아쓰미 기요시는 다른 영화에는 출연도 하지 않았고, 돈을 벌었어도 고급주택에 살거나 하지 않았다. 자가용도 없이, 어느 날 택시 타고 쓱 왔다가, 쓱 가고는 했다. --- | 그런데 왜 3편과 4편의 감독은 거절했었는가. 2편까지 만들고 나서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자꾸만 만들기를 강요했다. 그렇다면, “3편은 각본만 쓰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또 히트를 해버렸다. 그래서 4편의 각본을 또 썼다. 그런데 배우가 같고, 시나리오 작가가 같은데도 감독이 바뀌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감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런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다시 한번만 더 감독을 맡기로 했다. 그렇게 5편을 만들었는데, 또 대히트를 했다. 그뒤로는 그만둘 수 없게 돼버렸다. --- | 오랜 기간 이어온 시리즈였고,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된 배우들이 있을 것이다. 작은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8편 때 사망해서 교체했고, 14편 때 또 교체됐다. 그래서 작은아버지는 총 세명의 배우가 연기했다. 그리고 큰스님 역을 맡은 류 치슈는 46편 때 죽었다. 그리고나서 아쓰미 기요시가 죽은 뒤 시리즈가 완전히 끝난 것이다. 작은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가 죽었을 때는 이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전국의 극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려서 계속하게 됐다. --- | 그렇다면 시리즈를 이어가는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적이 바로 그때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 | 혹시 시리즈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생각하나. 시리즈는 감독도 다르고, 배우도 모두 다르고, 스토리도 항상 바뀐다. 그런 점에서 유사한 면은 없다. --- | 내가 본 <남자는 괴로워>의 토라상은 매 영화에서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그의 의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가. 그렇다.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옷은 매번 새롭게 만들었다. 토라상이 입고 있는 그 체크 무늬 양복은 일반적으로는 없는 것이다. 그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사기도 했고, 또 여름과 겨울 촬영을 위해 똑같은 옷으로 동복과 하복도 준비했다. --- | 오랜 시간 동안 오로지 토라상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그가 살고 있는 삶의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느리고 여유있다. 그 점이 흥미롭다. 맞다. 토라상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 | 그렇다면, 혹시 이런 점을 염두에 두는가? 1960년 <남자는 괴로워> 망향편에서 ‘기차’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10년 뒤 1970년 <남자는 괴로워> 하이비스카스편에서는 ‘비행기’가 그 역할을 한다. 떠돌이로서의 토라상에게 이런 교통수단은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 교통수단이 중요하다. 토라상은 절대로 고속전철은 타지 않는다. 승용차도 타지 않는다. 왜냐하면, 토라상에게는 초고속전철과 승용차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려 하는 사람이 아니다. 느린 기차를 타고 천천히 이야기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술도 마신다. 토라상에게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 | 48편 모두 토라상의 꿈 시퀀스로 영화가 시작하는가? 꿈장면은 그 영화의 전체를 요약하거나,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인생은 꿈같은 것이 아니던가’ 하는 메시지도 받게 된다. 맞다. 그런 식으로 만들고 있다. 말한 그대로다. --- |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에서 토라상이 그렇지만, 다른 영화에서도 인물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항상 등장한다. 1970년 <가족> 같은 영화 역시 그렇다. 오페라에서 막과 막 사이에 연주음악을 들려주는 것처럼 나는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어느 순간에 노래를 들려준다. 그 순간에는 관객도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잠시 쉬었으면 한다. 나는 어느 영화를 만들든지 그 안에 꼭 노래를 집어넣는다. --- | 당신 영화에는 그 이전 영화의 내용들을 스스로 참조하거나 유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족>에는 아쓰미 기요시가 카메오로 등장하고, 하이비스카스편에는 “그놈 뭐 뱀에게나 물려 죽었겠지”라는 대사도 나온다. 그런 건 시나리오를 적으면서 떠오르는 것이다. 하이비스카스편은 오키나와에서 찍었는데, 거기에는 뱀이 많다. 아마 그래서 그런 대사가 나왔을 것이다. --- | 1996년에 아쓰미 기요시가 죽었다. <남자는 괴로워>의 마지막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이 시리즈에 총 네번 나온 ‘리리’가 토라상의 최후의 연인이다. 마지막에 그 둘이 가고시마로 동거를 하러 가는 걸로 처리했다. 아마미라는 섬이다. 마지막 영화의 로케이션 촬영도 거기에서 했다. 아쓰미는 이미 병이 악화되고 있었고, 매우 괴로워했었다. 대사도 하기 힘들어했고, 목소리의 힘도 떨어졌다. --- | 그렇다면 영화 속에 등장한 ‘토라상’의 마지막 모습은 어떤 것이었나. 고베에 지진이 있었고 토라상은 병문안을 간다. 고베에 있는 나가타인데, 그곳은 재일동포가 많은 곳이다. 그때 ‘마당’이라는 재일동포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 춤을 추는 장면을 보는 토라상의 모습이 마지막이다. --- | 당신의 최근작은 의외로 사무라이영화, <황혼의 사무라이>이다. 사실, 일본의 사무라이영화는 를 제외하곤 대부분 거짓말이다. 리얼리티가 없다. 나는 진짜 사무라이영화를 그리고 싶었다. 예를 들면. 사무라이가 많은 사람과 싸우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영화는 뒤에 있는 사람이 칼을 내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다. 이런 거짓말 영화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진짜 사무라이를 그리고 싶었다. 사무라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세수하는지, 뭘 먹고, 뭘 입는지 하는 그런 것들. 사무라이의 진짜 생활을 그리고 싶었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싸우는 영화이지만, 여전히 ‘가족’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남자는 괴로워>와 통하고 있다.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1]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2]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이노우에 히로미치 [5]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인생은 꿈같은 것이 아니던가 " <황혼의 사무라이> 감독 야마다 요지 인터뷰 광주=글 정한석 mapping@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세계에서 가장 긴 시리즈 영화는 이 아니라 야마다 요지의 희극영화 <남자는 괴로워>이다. 1969년 시작된 이 시리즈는 아쓰미 기요시라는 걸출한 코미디 배우를 앞세워 그가 1996년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27년간 총 48편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남자는 괴로워>는 매년 한편 정도 개봉하여 일본 관객의 명절 행사로 자리잡았고, 어떤 해에는 3편이나 만들어지기도 했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그의 말에 따르면 “공부를 못해 별다르게 할 게 없어서 들어가게 된” 쇼치쿠영화사. 그의 동기 중에는 오시마 나기사가 있었다. “쇼치쿠는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죽은 사자이다”라고 말하며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영화를 추구해간 쇼치쿠 누벨바그의 기수 오시마 나기사와는 달리 야마다 요지는 말 그대로 쇼치쿠의 순한 ‘효자’였다. 닛카쓰영화사가 핑크영화에서 로망포르노로 진지를 바꾸고, 도에이영화사가 야쿠자영화로 명맥을 이어가던 60년대와 70년대, 그리고 슈퍼8mm 세대가 들이닥치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야마다 요지는 끊임이 같은 패러다임의 희극영화 <남자는 괴로워>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출발이 순조로웠던 것은없 아니다. <남자는 괴로워>는 이미 폭발적인 인기 속에 종영된 텔레비전 드라마를 이어받은 것이었고, 거기에서 각본을 맡았던 야마다 요지는 같은 주인공과 같은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기를 원했다. 쇼치쿠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 시리즈로 적자를 마감했고, 손익계산을 넘어섰다. <남자는 괴로워>의 아쓰미 기요시는 마치 한국의 코미디언 이주일이 그랬듯, 부담 없는(?) 얼굴을 지녔다. 그는 <남자는 괴로워>가 만들어지던 그 긴긴 세월 다른 영화에는 출연하지 않고 오직 이 시리즈에만 등장했다. 이 못생기고, 허술하고, 엉뚱하고, 낭만적이고, 정감 넘치는 사나이의 극중 이름은 ‘쿠루마 토라지로’, 일명 ‘토라상’이다(그래서 이 시리즈의 또 다른 애칭은 ‘토라상’ 시리즈이다). 중학교 때 집을 나간 뒤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행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토라상은 영화가 시작할 즈음 언제나 가족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복 여동생과 매부, 떡집을 하는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인쇄소 사장, 충복 겐코, 큰스님(우리에게는 오즈 야스지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류 치슈가 이 역을 맡고 있다)이 토라상을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맞이한다. 토라상은 언제나 집을 방문하여 한바탕 소란을 일으키고, 어떤 여인 혹은 어떤 사건과 얽혀 여행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다시 한번 집을 방문한 뒤 떠나버린다. <남자는 괴로워>는 매번 이런 구조를 반복하면서 자기 역사를 쌓아갔고, 관객은 언제나 찾아오는 기념일처럼 그 똑같은 이야기를 보기 위해 서슴없이 극장을 찾았다. 한 작품, 한 작품을 갖고 따진다면 <남자는 괴로워>를 영화적으로 훌륭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영화사의 개근상을 탈 만하며, 일본 희극영화의 전통 속에서 어떤 작품과도 비교할 만한 따뜻한 미소를 선사한다. 도쿄 근교의 시바마타에 붙박고 살아가는 토라상의 가족과 일본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토라상, 그 서로 다른 삶은 충돌하고 화합하면서 서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주는 묘한 감동은 영화 속 삶의 시간과 관객의 삶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는 데 있다. 영화가 한편한편 만들어질 때마다 똑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여 조금씩 늙어 있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제의 상영작 망향편과 하이비스카스편은 10년의 시간을 두고 있고, 그 세월만큼 변해버린 배우들의 모습이 있다. 그건 그 영화를 보기 위해 10년을 기다린 관객도 그만큼 같이 늙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배우가 교체되어 있다면 그건 그 배우가 실제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무려 30여년을 이어간 시리즈였기에 토라상이 돌아다니는 일본의 풍경들은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토라상은 매번 같은 표정과 말투와 복장으로 등장하여 빠르게 변해버린 사회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잃고 싶어하지 않는 마지막 향수의 감정을 자극한다. 야마다 요지는 그의 최근작 <황혼의 사무라이>를 통해 사무라이의 ‘칼’이 아니라, 사무라이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죽지 않는 한, 그의 인물 토라상처럼 야마다 요지도 언제나 같은 모습일 것이다. --- |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뒤, 쇼치쿠에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동기생 중에는 오시마 나기사도 있었다. 당신은 왜 감독의 길을 택하게 되었는가. 다른 길이 없었다. 학생 때 성적이 많이 나빴고, 취직도 잘 안 됐다. 별다르게 할 것도 없고 해서 영화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나하고 달리 오시마 나기사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웃음) --- | 당시 일본은 문화적으로 격동적인 시기였다고 알고 있는데, 당신이 그때 동세대 감독들과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신념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화가의 예를 들어보자. 인간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가 있고, 정물을 그리기를 좋아하는 화가도 있다. 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좋았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가?’ 생각해봤다. 그럴 때 나에게는 ‘그리운 삶’이 생각난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든다. 그래서 내 영화에는 살인하는 이야기도 없고, 베드신도 없다. --- | 1969년 <남자는 괴로워>의 1탄이 탄생했다. 당신은 강하게 그 영화의 감독을 맡기를 원했고 주장했다. 이 소재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일단 캐릭터가 좋았고,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코미디가 좋았다. 그런데 쇼치쿠에서는 처음에 반대를 했다. 하지만 영화가 굉장히 흥행하자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는 괴로워> 이외에도 <노란 손수건> <가족>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 바쁜 28년간이었다. 아마도 그동안은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바쁜 감독이었을 거다. --- | 텔레비전 드라마가 먼저 있었다. 내용이 같은가. 그렇다. 완전히 똑같다. 내가 각본을 썼었다. --- |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주연배우 아쓰미 기요시가 독사에 물려 죽는 것으로 끝났다. 종영 뒤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였나.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었다. 편지로, 전화로 왜 토라상을 죽여버렸냐고 항의가 빗발쳤다. 일본에서 텔레비전 드라마 때문에 시청자들이 비난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1]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하스미 시게히코 [2]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3]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야마다 요지 [4] ▶ 빛고을에서 만난 일본 영화인 3人- 이노우에 히로미치 [5]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

영화와 TV 양쪽서 큰 성공 거둔 제리 브룩하이머, 총수익 5억달러에 달해 <진주만> <나쁜 녀석들> <더 록> 등 할리우드 제일의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프로듀서이자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사진)의 강세가 멈출 줄 모른다. <버라이어티>가 뽑은 ‘성공한 프로듀서 8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던 제리 브룩하이머는 2003년 한해에만 4억6100만달러의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런 수치는 같은 시기 MGM과 드림웍스의 자국 내 총수익을 합친 것에 맞먹는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영화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 CBS에서 방영되어 인기 급상승 중인 <흔적없이>, 폭스 방영의 <스킨>을 포함하여 총 6개의 시리즈물이 각각 황금시간대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6월까지 12개월간 벌어들인 방송쪽 수입만 3500만달러에 이른다. <버라이어티>는 제리 브룩하이머의 이같은 성공을 두고 초창기 스튜디오 시스템 제작자들인 데이비드 셀즈닉, 어빙 탈버그, 새뮤얼 골드윈을 비교대상으로 삼아 설명을 덧붙인다. 작품마다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들을 선호한다는 점, 개봉 전 시사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 신인 발굴에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아마겟돈> 제작 당시 크레딧에 올라 있는 다섯명의 작가 이외에도 4명의 작가를 더 동원했으며 톰 크루즈, 에디 머피, 벤 애플렉 등을 발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제리 브룩하이머는 포스트 프로덕션과 마케팅쪽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2003년작 <캥거루 잭>과 1995년작 <위험한 마음>은 거의 1년여의 포스트 프로덕션을 거쳤으며, 이 과정에서 <위험한 마음>의 앤디 가르시아 캐릭터가 삭제되었고, <캥거루 잭>의 아기주머니는 플롯상 중요 부분으로 바뀌었다. 제리 브룩하이머는 현재 촬영 중인 <킹 아서>를 비롯하여, 니콜라스 케이지가 보물을 찾는 고고학자로 등장하는 존 터틀타웁의 영화 ,1966년 텍사스 서부대학 야구팀을 소재로 한 영화 <영광의 길>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강성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정한석

야비…냉소…, 배용준 변했다

배용준(30)은 하얀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 뒤에 단단한 고집을 숨기고 있는 배우다. 그가 텔레비전 연기자 생활 10년 만에 첫 영화로 선택한 작품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모두들 의외라 했다. 배경이 조선시대인지라 상투 틀고 안경을 벗어야 했는 데다 충무로에 다른 배우의 이름이 공공연히 떠돌던 작품이다. 매니지먼트 회사를 포함해 주변에서 선뜻 찬성하는 이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시나리오를 찾아 읽고 영화사에 연락”할 정도면 옹골찬 고집 없이는 힘들었을 터. “원래 제가 친구랑 게임을 할 때도 조건을 불리하게 만들기를 좋아해요. 성취욕이 있잖아요. 승부사 같은 기질이랄까.” <스캔들…>은 배용준의 10년 연기인생에서 하나의 ‘승부수’일지 모른다. 꼭 상투 틀고 수염 붙였서만은 아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정조시대 희대의 바람둥이 조원. 야심만만한 사촌누이 조씨부인(이미숙)과 내기를 걸고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절녀 숙부인(전도연)의 유혹에 나선다. 세 인물 가운데 영화 속에서 가장 격렬한 캐릭터의 변화를 보여주는 이가 조원이다. “너무 부드럽고 착한 말투”라는 말을 몇번씩 들어가면서 그는 느물거림과 야비함, 그러면서 세상사에 냉소적이지만 후반부 비극적 사랑을 하는 조원을 통해 자신에게 숨어있던 팔색의 스펙트럼을 펼쳐보였다. 찍는 과정은 “단 한 장면도 쉽게 찍은 게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상투를 틀고 있으니 피가 안 통해 “생각이 마비될 것 같”았다. “나름대로 준비 많이 했죠. 조선시대 나온 영화부터 생활사 책들까지 다 뒤져보고, 근데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순서대로 찍지도 않고 후시녹음하는 것도 낯설었고….” 배용준은 영화 ‘신인’임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여러 역을 해왔지만 사실 제 이미지는 하나죠. 아마 내 색이 파랑색이라면 이제까진 그 색과 비슷한 색을 덧칠해온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는 아주 다른 원색일 거에요. 앞으론 이렇게 다른 원색을 칠하고 싶어요.” 90년대초 충무로에서 연출부로 시작한 그는 “유학갈 돈을 마련하고 싶어”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전 끼 없어요. 노력이에요. 어렸을 땐 내성적이라 남들 앞에서 노래도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를 사랑하는 팬들에 대한 책임감이 날 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더라.” “이전엔 남들에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보이기도 했죠. 고집세고. 근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없어져요. 어떨 땐 내가 현실과 타협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할 때도 있지만…”이라면서도 그는 이제 “사람들과 깊이 오래가는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했다. “나를 오빠, 아들, 친동생처럼 여기는 팬들”이 바꿔놓은 그의 모습이다. 배용준은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반자동 카메라엔 꽤 손길이 닿은 흔적이 보였다. 카메라에 대한 배용준의 생각은 바로 자신의 삶, 자신의 연기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디지털은 느낌이 싫어요. 뭔가 공들이지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디지털은 그냥 공짜잖아요. 마음에 안 들면 지워도 되고. 상이 한번 맺히면 이건 지울 수 없잖아요. 그래서 신중하게 눌러야죠.” 그 신중한 첫번째 선택, <스캔들…>은 내달 2일 개봉한다.

안방극장! 그런데 5.1채널은 되나요?

극장에서 듣는 박진감 넘치는 생생한 음향을 안방에서도 들을 수 있는 돌비 디지털 5.1 입체음향 서비스(개념도)를 제공하는 영화 채널들이 잇따라 등장해 눈길을 끈다. 시제이 미디어가 다음달 1일 개국할 예정인 신규 영화오락 채널 엑스티엠(XTM)의 개국과 함께 5.1 입체음향 서비스를 실시하는 데 이어 유료 영화 채널인 캐치온에서도 곧 일부 영화들을 같은 서비스로 제공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위성방송 사업자인 스카이라이프는 5월부터 국내 최초로 돌비 디지털 5.1 사운드를 유사 주문형 비디오(Near Video On Demand) 서비스인 ‘스카이초이스’ 13개 채널을 통해 제공하고 있다. 돌비 디지털 5.1이란 정면과 좌우 서라운드 스피커와 1개의 저음용 스피커로 구성된 디지털 사운드 시스템의 총칭으로 실제 극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원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영화채널을 통해 만족할 만한 음질을 맛볼 수 있는 가구가 아직은 많지 않다는 데 한계가 있다. 우선 고품질의 오디오 시스템과 고해상 텔레비전은 필수다. 현재 이런 고품질의 음향시스템을 갖춘 가구가 53만에 이르고 고해상 텔레비전 보유가구도 170만을 넘어섰지만, 이들 가구도 스카이라이프에 가입해야 하며, 각 방송 채널에서 송신하는 돌비 디지털 5.1 입체음향을 수신할 수 있는 디지털 셋톱박스도 갖춰야 한다. 케이블채널에서는 이런 고품질 음향을 수신해 서비스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를 보유한 종합유선방송국(에스오)은 2군데밖에 없어 서비스 제공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스카이라이프는 5월에 출시한 두번째 셋톱박스인 쌍방향 셋톱박스를 통해 돌비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는데 구매 가격은 안테나 등을 포함해 9만9000원선이라고 밝혔다. 기존 셋톱박스를 갖고 있는 가입자의 경우에는 7만7000원을 내면 교체가 가능하다고 한다.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한국영화 회고록 신상옥 14

신필림 탄생, 기업적 영화제작 불붙다 “배우·작가 전부 전속이었지” 1961년과 63년 두 차례 고시와 법령을 통해 이루어진 영화사 통폐합 과정에서 등록 요건에 미치지 못한 군소 프로덕션들은 사라졌고, ‘신상옥프로덕션’은 ‘주식회사 신필림’으로 전환했다. 이처럼 1960년대 기업적인 영화사의 등장은 군사정부의 영화정책과 연관이 깊다. 그러나 <성춘향>의 성공이 ‘잘 만들어진 국산영화’의 시장 장악력을 입증한 한편, 투기성 자본이 성행하던 조건은 영화인들에게도 합리적인 체계와 질서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것이 정부가 강행한 구조조정의 결과이든 아니든, 대형영화사 신필림의 등장은 새로운 영화 제작 패턴을 보여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때 아마 영화사가 100여개 있었나? 영화가 된다, 하니까 모두 다 영화한다고 나섰으니까. ‘독립푸로’의 그 부작용으로 불미스런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영화라는 게 갬블이니까, 영화 맨들지 않고 도망간다든가 이런 것도 있고, 망하면 도망가고 없어지고. 이래선 안 되갔다, 정비해야 되갔다 생각한 게 군사정권이다. 그래서 영화사 정비도 했고. 그러나 근시안적인 정책이라고 봐야지. 앞서도 얘기했지만 영화가 시설로 되는 건 아니니까. 정비하고 나서는 영화사가 16갠가 몇갠가 남았는데, 그것도 모순인 게, 한날 한시에 조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작용이 많았다. 기계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수도 있고, 창고만 빌리면 다 이백평 스타디오가 됐다. 이백평이라는 게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방음이 되든지 안 되든지 촬영 못할 데도 아무 기준없이 덮어놓고 이백평만 되면 됐으니까. 완전히 시행착오지. 신필림 사무실은 그때 서울의 동명빌딩, 동명빌딩이라는 게 지금 뭐 자릴까? 거기 있었고, 스타디오(원효로 스튜디오)는 동양제과 옛날 공장 자리. 철도까지 들어와 있는 커다란 창고였는데, 철도 양옆으로 동양제과하고 우리가 같이 있었다. 시설은 카메라가 한 여남은개. 왜 그런고 하니 동시녹음 카메라가 아니라 비싸지 않았으니까. 거기서 동시녹음은 힘들지, 기차 소리 때문에. 안양촬영소에서밖에 동시녹음 못했다. 또 줌렌즈가 한두개 있었는데, ‘나크’라고 주로 일본에서 맨든 걸 사다 썼다. 아마 <로맨스 그레이>부터가 줌렌즈 본격 사용일거야. 그전 한국영화는 줌렌즈가 없었지 아마. <성춘향> 때 시네마스코프 하느라고 ‘울트라 스코프’라고 독일제 렌즈를 사다 썼고, 낮에 밤신 찍는 기술, 그건 <연산군>이 처음이다. 그때 기술적인 문제로 천연색을 어떻게 찍느냐 하는 문제가 많이 논의됐었다. 그러니까 낮에 밤신 찍는 기술이라든가. 대체로 낮에 밤장면 찍는 줄을 몰랐거든. 그때는 전체 라이트 비출 수가 없으니까 대략 일광을 이용해서 밤신처럼 찍었다. 그때 우리 주로 쓰던 게 코닥필름이니까 코닥필름의 적성에 맞는 특수한 기술들, 그런 걸 많이 이용했다. 이런 게 기술적으로 특이하다면 특이한 건데, 역시 회사가 있으니까 됐지, 개인이 하기는 참 힘들었을 것이다. 신필림이 기업이 돼가지고 영화를 양산했다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피라미트처럼 됐다고 봐야지. 예를 들어 영화 하나 나오기 위해서 찍기는 둘을 찍어야 되고, 둘 찍기 위해서 배우가 넷 있어야 되는 식으로 영화는 하나 나오는데 아래는 길게 쫙 퍼진다. 배우(스타급 배우) 하나에 시나리오라이터 하나씩 붙어야 되는 형편이니까. 도금봉도 그때 전속이고, 배우들 전부 전속이었는데, 그 사람들도 그 사람들 욕망이 있으니까 거기 맞춰서 찍어야 할 거 아냐? 배우뿐 아니고 시나리오라이터도 전부 전속이었다. 임희재, 김강윤, 곽일로, 이런 사람들. 임희재는 <사랑방>(<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쓰고, <성춘향>도 쓰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김강윤이는 <상록수> 쓴 사람. 그 외에 이상현이라는 사람, 임춘희라는 친구, 또 <덕이>(텔레비전 드라마) 쓴 이희우, 주로 그런 사람들이 활동했다. 감독은 본인들이 작품을 가져오든가 아니면 우리가 지원하든가, 일종의 하청이지. 이만희 위시해서 이형표, 김수용, 뭐 어지간한 감독은 다 했다. 지금 감독협회 있는 임원식, 테레비의 대부처럼 있는 김수동이, 모두 그때 감독들이었다.대담 신상옥·이기림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자 marie320@hanmail.net

영화사 신문 제21호(1952~1953)

영화사신문 제21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김재희 1922 ~ 1924 시네마스코프 시대 도래 2.55 대 1 와이드 스크린 <성의> 개봉, 스펙터클 앞세워 TV공세 대응 1952년 들어 가정에 텔레비전 보유대수가 크게 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미국 영화계가 ‘하드웨어’ 부문에 혁명에 가까운 기술 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1952년 화면의 입체감을 강조한 ‘시네라마’(Cinerama)와 화면에서 사자가 관객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3차원 영화 <브와나 데블>이 등장하더니, 1953년에는 정상 화면보다 가로로 훨씬 긴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 화면을 이용한 영화가 등장했다. 전문가들은 “시네마스코프로 시작된 ‘와이드 스크린’이 TV화면을 훨씬 뛰어넘는 웅장함을 선사하고 있어 향후 영화제작의 대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하고 있다. 영화제작 역사의 한 ‘혁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폭스사가 채용, 첫 번째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헨리 코스터(Henry Koster) 감독의 <성의>. 1952년 9월 뉴욕에서 선보인 <이것이 시네라마다>(This is Cinerama)는 3대의 특수 카메라를 동시에 가동해 세 방향에서 화면을 영사함으로써 관객을 완전히 삼키게 되는, 롤러코스터에 탄 듯한 스릴을 제공하는 기행영화였다. 극장 근처의 약국들은 영화를 보다가 멀미하는 관객에게 멀미약을 팔아 한몫 잡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한편 최근 개봉한 이십세기 폭스사의 <성의(聖衣)>(The Robe)는 스크린의 가로:세로비율이 2.55 대 1로, 영화의 탄생 이후 표준으로 간주돼온 1.33 대 1에 비해 가로 방향으로 훨씬 긴 화면이다. 폭스는 텔레비전 보유대수가 가파르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영화산업의 사활을 걸고 파격적 화면비율을 채택한 것이다. <성의> 역시 시네마스코프라는 새로운 스펙터클과 깊은 신앙을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 영화 홍보담당자들은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이미지가 고대 그리스 연극의 타원형 무대와 같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관객은 마치 영화장면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십세기 폭스의 성공에 이어 마릴린 먼로 주연의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와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 역시 연이어 와이드 스크린으로 제작돼 이제 시네마스코프는 시장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성(性), 외설이라구? 예술이야! 할리우드 청교도적 제작강령 조롱, 성욕 그린 <푸른 달> 상영 밀려드는 TV 공세에 대항하기 위해 할리우드는 안방극장에서 다루기 힘든 좀더 논쟁적인 주제인 성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제작자들은 좀더 과감한 주제의 제작윤리강령(Production Code) 비승인 영화들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제작강령은 더욱 약화됐다. 그 포문을 연 것이 독립제작자인 오토 프레밍거다. 영화산업 자체 검열기구인 미국영화협회(MPAA: Motion Picture Association of America)는 오토 프레밍거의 <푸른 달>(1953)의 승인을 거부했지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이 영화를 개봉했다. 프레밍거는 계속해서 제작강령을 조롱하며 그의 작품을 MPAA의 승인없이 배급했고, 그럼으로써 그동안 자유로운 창작에 방해가 됐던 제작강령은 실효성을 잃어갔으며 오히려 제작강령을 거부한 영화는 역(逆)광고효과를 얻기도 했다. 프레밍거의 과감한 코미디 <푸른 달>은 문제적 처녀 매기 맥나마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윌리엄 홀덴의 성적 욕망을 그린 영화로, 이 영화엔 예전에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터부시됐던 ‘처녀’라든가 ‘유혹하다’라는 단어들이 등장한다. 이 영화 개봉을 계기로 할리우드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청교도적 가치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뉴요커들 말라깽이 유럽공주에 ‘홀딱’ 네덜란드 신인 오드리 헵번 <로마의 휴일>로 ‘만인의 연인’ 윌리엄 와일러의 <로마의 휴일>은 막을 열자마자 뉴욕 관객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유럽의 한 젊은 공주가 로마에서 보내는 낭만적인 하루에 대한 보고서인 이 영화는 뉴요커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첫 시사를 마쳤다. 성공적인 시사로 흥행에 장밋빛 기대를 품게 한 사람은 무엇보다 이 영화로 첫 스크린 데뷔에 나선 네덜란드산 신인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었다. 사람들은 글래머러스한 여배우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헵번의 어린아이와 같은 깡마른 체구, 동경하는 듯 빛나는 미소, 그리고 유난히 크고 인상적인 눈매에서 더할 수 없이 가벼운 천상의 우아함을 보았던 것이다. 네덜란드 남작부인과 영국계 아일랜드인 은행가의 딸로 태어난 24살의 헵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의 네덜란드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녀의 독특한 깡마른 체구는 종종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던 그녀의 열악한 성장기를 증명하는 듯한데, 흡사 어린아이와 같이 가느다란 그녀의 몸매는 오히려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의 전통 속에서 돋보이는 그녀만의 차별적인 매력으로 작용했다. 헵번은 원래 발레리나가 꿈이었지만 자신이 클래식 발레를 하기엔 너무 키가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쟁이 끝날 즈음 런던 뮤지컬의 합창단에 들어갔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작가 콜레트에게 발탁되어 <지지>의 브로드웨이 공연 주역을 따내게 되었고, <로마의 휴일> 제작진들은 <지지>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그녀를 주저없이 공주 역으로 캐스팅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휴일>은 공식 방문차 로마에 들른 유럽의 공주가 신분이 주는 제약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무단 이탈을 감행하는 하루 동안의 자유로운 외출과 로맨스를 그린 영화다. 오드리 헵번은 첫 스크린 데뷔작인 이 영화로 만인의 연인이 되었다. 중국영화, 아 옛날이여 중화인민공화국 들어 제작편수 급감, 그나마 대부분 선전용 1930∼40년대 유명 국제영화제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던 중국영화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 따르면, 건국 이후 매년 큰 폭으로 감소해온 중국의 영화 제작편수는 건국 3년째인 올해(1952) 모두 8편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그나마도 올해 제작된 8편의 영화들은 최근 2∼3년 새 제작된 <중국의 딸들> <백의의 천사> <강철전사> 등 ‘선전영화’들과 엇비슷하다는 지적이다. 평론가들은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맞바꿔도 괜찮을 정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건국 이전 1930∼40년대의 좌익 영화인들은 고유한 문화와 낯선 영화미학으로 빚은 시각적이며 중국적인 예술을 창조해냈다. 그 결과 당시 영화들은 중국 정치상황의 사실적 기록이자 소시민인 대중의 대변자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1934년 좌익 성향의 영화인들이 상하이에서 제작한 <어부의 노래>(漁光曲, 감독 차이추성 蔡楚生)는 이듬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당시 평론가들은 “검열과 정치적 탄압을 피할 목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영화 사상 최초로 사용된 변증법적 몽타주 기법은 형식적으로도 고도의 경지를 일궈냈다”고 평가했다. 국공내전 같은 혼란의 시기조차 <봄날의 강물은 동쪽으로 흐른다>(1947) 등 뛰어난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국 공산당의 영화제작에 대한 통제 때문에 영화계의 숨통이 죄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할리우드 해외로케 붐 잠재울까 영화배우조합 “자국시장 부진 원인” 성명, 상반된 주장도 있어 8천명이 넘는 할리우드의 프로배우들을 대변하는 미국 영화배우조합(the Screen Actors Guild)은 할리우드영화의 해외 제작편수의 증가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리포트를 발표했다. 1953년에 발표된 이 리포트에 따르면, 당해 영화 제작편수가 사상 유례없는 최저 수치를 기록했다고 유감을 표했다. 더구나 이런 현상은 즉시 개선될 전망이 희박해 보인다고 내다봤다. 이 리포트는 현 미국 영화시장의 부진은 무엇보다 값비싼 영화 신기술의 할리우드 선점(先占)과 해외 제작편수의 증가 때문으로 보고 이를 강하게 비난했는데, 할리우드 영화감독들도 “미국영화의 국외 제작”이 국내 영화시장을 잠식하는 것에 저항해서 싸울 것과 “미국 내에서의 영화제작을 장려할 것”을 서약했다. 그러나 미국영화의 해외 제작 증가가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반드시 국익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영화의 해외 제작은 무엇보다 와이드 스크린이라는 기술적 변화 때문이었는데, 와이드 스크린은 시원스런 스펙터클을 담기 위해 스튜디오 세트 촬영보다 이국적 지방색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외 제작은 국내 제작보다 예산이 적게 든다는 이점이 있었다. 또한 해외에서 촬영함으로써 미국 제작자들은 자기네 영화를 세계의 곳곳에서 환영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나라 배우들을 더욱 쉽게 끌어모으기도 했다. 이렇듯 영화와 스타들의 국경없는 자유로운 교류, 국가간의 합작과 해외 로케이션 영화의 증가는 관객에게 좀더 다양한 각국 문화 체험과 함께 할리우드영화만이 유일한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 미국과 등지나? <라임라이트> 이후 재입국 거부 당해, 공산주의 동조 혐의 1947년 <베르두씨> 이후 5년 만인 1952년 <라임라이트>를 연출한 63살의 거장 찰리 채플린이 미국을 영영 떠날 것으로 보인다. 채플린의 한 측근은 “영화 <라임라이트> 시사와 홍보를 위해 고국인 영국에 머물고 있는 채플린이 유럽의 한 국가로 이주해 정착할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채플린이 이주를 고려하고 있는 국가는 스위스가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매카시즘이 기승을 떨치는 와중, 채플린은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와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같은 ‘알려진 공산주의자’와의 교분으로 인해 공산주의 동조자라는 의혹을 받아왔다. 설상가상으로 올해에는 뮤직홀 코미디에 대한 정치성이 배제된 채플린의 자서전적 영화 <라임라이트>가 재향군인회가 주도한 전국적 보이콧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시민이 아니었던 채플린은 미국에 재입국할 허가를 우선 확보한 뒤 영화 홍보를 위한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지만, 출국 직후인 9월 미국 법무장관은 채플린이 미국 재입국 허가를 받으려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재향군인회 역시 채플린이 미국에 돌아와서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 <라임라이트>에 대한 보이콧을 계속 하겠다고 결의했다. 채플린은 의회반미활동위원회(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앞에서 강제 증언했던 할리우드 동료들이 겪은 시련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유럽 망명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1930년대 <시티 라이트>(1931)와 <모던 타임즈>(1936) 등을 통해 현대 문명의 기계만능주의와 인간소외를 풍자했던 채플린은 40년대 들어 영화 속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강화해갔다. 특히 5년 전 <베르두씨>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의 범죄성을 파헤치기도 해, 미국의 보수세력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정치적 박해로 인해 오랜 영화활동 중단 이후 만든 <라임라이트>는 정치색과는 무관한 영화로, 전성기가 지난 코미디언과 발레리나의 사랑을 통하여 삶에 대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이전 채플린 영화와 마찬가지로 채플린이 감독·제작·각본·주연을 도맡았다. 단 신 들 미조구치 겐지 <우게츠 이야기>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그 나라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 깊이 천착한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얻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1953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한 미조구치 겐지의 신작 <우게츠 이야기>는 탐미적 영상과 정제된 세련됨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격정적이면서 명상적인 이 영화는 일본 전통 장르인 역사적 프레스코화와 애가(哀歌), 환상 이야기와 가부키를 포괄하고 있다. <우게츠 이야기>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중세의 한 마을, 한 가난한 도공이 신비스런 여자(유령)에게 홀려 자신의 헌신적인 아내 곁을 떠났다가 후회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내 역시 유령으로 변해버렸다는 초자연적인 이야기다. 미조구치는 아키나리 베다의 18세기 괴담과 프랑스 작가 모파상에게서 이야기를 착안했다고 회상했다. 데보라 카, 우아한 장미의 섹시 유혹 품위있고 우아한 이미지로 영국의 장미로 불리던 데보라 카가 일대 변신을 했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 며칠 전의 하와이를 배경으로, 한 군인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제임스 존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프레드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그녀는 우아함 속에 숨겨진 섹슈얼리티를 과감하게 보여주었다. 데보라 카는 1947년부터 미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멜로드라마와 모험영화 등에 출연해 주로 장식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쳤었다. 그러나 진네만의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그녀는 부정(不貞)한 부인 카렌 홈즈를 연기하면서 이전의 제약을 벗어버리고, 상대역 버트 랭커스터와 열정적인 해변 러브신을 연출했다.

40년을 이어온 <스타트랙>의 매력 [3]

<스타트랙> 핵심 체크 엔터프라이즈호 샌프란시스코에서 건조된 첫 번째 엔터프라이즈, 정식명칭 U.S.S. 엔터프라이즈 NCC-1701호는 미국의 개척정신을 이어받은 우주선이었다. 최소한 엔터프라이즈를 지휘했던 미국 출신 세 번째 선장 제임스 T. 커크는 그렇게 자부했을 것이다. 400명 넘는 승무원을 싣고 우주공간을 도약하는 ‘워프’ 시설과 순간이동 장치를 갖추었던 우주선. 그러나 호전적인 행성 클링곤과의 전투를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커크 선장의 뒤를 이어 <스타트랙> 시리즈를 이어받은 장 뤽 피카드 선장은 성능이 개선된 U.S.S. 엔터프라이즈 NCC-1701-D호를 지휘했다. 승무원과 승객 1012명을 실을 수 있는 엔터프라이즈-D, U.S.S.는 워프 속도가 빨라졌을 뿐만 아니라 중추부분이 위험에 처했을 경우 선체를 분리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었다. 이 분리 기능은 클링곤과의 전투에서 유용하게 쓰였던 방어수단. <스타트랙> 시리즈는 이외에도 엔터프라이즈-E, U.S.S.와 엔터프라이즈 NX-01 등을 선보였고, 이들 대부분은 선체의 기본 형태가 원형이었다. <스타트랙> 제1세대 제임스 T. 커크 선장이 이끌었던 1960년대 세대. 은하연합 사상 최연소 선장이었던 커크 선장을 비롯해 전형적인 외계인의 외모를 한 일등항해사 스포크와 동양인 엔지니어 줄루 등이 인기를 끌었다. 지구 출신인 커크 선장은 따뜻하고 로맨틱한 심성과 은하연합을 향한 헌신적인 충성이 돋보인 인물이었다. 스물다섯살짜리 외아들을 잃고, 사랑하는 여자를 후회 속에 떠나보낸 아픔을 겪으면서도, 은하연합과 엔터프라이즈호와 함께 끝까지 운명을 같이한 모범적인 선장. 과거와 미래가 겹치면서 한번 더 모습을 드러내, 다음 세대에 속하는 피카드 선장을 도와준 적이 있다. 커크를 충실하게 보좌한 스포크는 길쭉한 눈썹과 뾰족한 귀를 가진, <스타트랙> 시리즈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지구인 어머니와 불칸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인간의 감정과 불칸 행성 특유의 엄격한 태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운명. 외교와 과학 양쪽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예술에도 폭넓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인종을 포용하겠다는 <스타트랙>의 신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캐릭터는 줄루 대위다. 고향은 샌프란시스코지만, 동양 출신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는 캐릭터. 펜싱과 동양무술, 오래된 총기 수집이 취미다. 줄루는 트렉키들이 제작사 앞에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이면서 <스타트랙: 보이저> 시리즈에 그를 출연시켜 달라고 요구했을 정도로 인기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외모만 동양인일 뿐, 전혀 동양인 같지 않다는 점에서, 겉만 동양인이라는 뜻의 속어 ‘줄루’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스코티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기적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했던 수석 엔지니어 몽고메리 스코트와 커크 선장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의사 닥터 맥코이 등이 엔터프라이즈호의 모험에 동승했다. <스타트랙> 넥스트 제너레이션 젊은 세대에게 친숙한, 피카드 선장이 지휘하는 일행. 첫 번째 시리즈보다 한 세기 뒤인 24세기를 무대로 활동했으며, 20년 차이를 두고 제작된 만큼, 발달된 특수효과를 선보였다. 여성 승무원들의 비중도 훨씬 늘어났다. <엑스맨>의 패트릭 스튜어트가 연기한 피카드 선장은 아내도 아이도 없으며, 위기 앞에서 냉정을 유지하고, 가끔은 어린 시절 익혔던 피아노도 연주하는 선장. 외교부문에서 경력을 쌓았기 때문에 클링곤이나 로물루스와의 접촉에서 일선을 담당했다. 부함장 윌리엄 T. 라이커는 두번이나 함장으로 승진할 기회를 거절하면서 ‘넘버 원’ 피카드 곁에 ‘넘버 투’로 머무른 심복. 따뜻하고 밝은 심성을 가지고 있지만, 두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도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스타트랙> 열 번째 극영화 <네메시스>는 라이커와 카운슬러 디아나 트로이의 결혼식 장면으로 시작된다. 지구와 베타조이드의 피가 반씩 섞인 디아나는 텔레파시 능력이 있고 현명하며 동정심이 많다. 언어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편. 라이커와 디아나는 제각기 다른 상대와 풍부한 로맨스를 엮어가는 성향이 있다. 안드로이드 장교 데이타는 이름 그대로 백과사전에 필적하는 지식을 축적한 두뇌를 가진 첨단기계다. 그러나 스스로 발전하는 두뇌 덕분에, 인간과 기계 사이의 이분법을 무너뜨리면서 끊임없이 존재에 관한 의문을 던진다. 피카드 선장의 오랜 친구의 미망인인 닥터 베벌리 크러셔가 이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엔터프라이즈호 담당의사다. 불칸과 로물루스 <스타트랙> 시리즈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행성 중 일부이며, 그 관계에 대해선 많은 팬들이 의문을 가지고 있다. 붉은색의 메마른 행성 불칸은 은하연합의 일원. 그곳에 사는 종족은 이성을 앞세우고 논리적이며 엄격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스포크가 불칸의 피를 이어받은 인물이다. 반면 쌍둥이 행성 레무스와 함께 그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한 로물루스는 호전적인 전사 종족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신기한 것은 전혀 다른 불칸과 로물루스가 같은 기원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 수천년 전, 불칸이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일부 주민이 고향을 떠나 정착한 행성이 로물루스인 것이다. 그러나 시리즈가 지속되면서 로물루스가 은하연합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오히려 불칸이 고립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칸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극영화 시리즈 중 한편인 <스타트랙: 칸의 역습>의 악당이며, <스타트랙> 공식 사이트가 선정한 가장 매력적인 악당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세기 지구에서 태어난 칸은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도 했던 초인적인 인물이었다. 추방당한 뒤 2세기가 넘도록 우주를 떠돌던 칸은 커크 선장과는 오랜 앙숙. 이미 한번 커크에게 패한 상처가 있는 칸은 복수와 ‘제네시스’ 계획 탈취를 위해 다시 한번 엔터프라이즈호에 도전한다. 인도 혈통을 지녔다. Q 인간의 이해 범위를 뛰어넘는 외계의 존재. 에너지와 시간을 통제할 수 있고, 개별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체로 공존한다.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과 통찰력을 가진 Q는 데네브 행성을 찾은 피카드 선장 일행을 동물에 가까운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험에 들었던 엔터프라이즈호를 놓아줄 무렵에 이르러서는 인간이란 독특하고 신기한 생명체라고 마음을 바꿔먹기도. 하나로 엉겨 있지만 그 안에서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성(性)이 없으면서도 가족의 개념은 있고, 그 처음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존재다. 때로는 그들 중 대표격인 하나만을 Q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김현정 parady@hani.co.kr ▶ 40년을 이어온 <스타트랙>의 매력 [1] ▶ 40년을 이어온 <스타트랙>의 매력 [2] ▶ 40년을 이어온 <스타트랙>의 매력 [3]

[새 영화] <카우보이 비밥>

서기 2071년‥화성에 폭발사고가 터졌다 위상차 공간 게이트 덕분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혹성을 오가는 서기 2071년의 미래. 화성에서 트럭 한대가 폭발하며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경찰은 3억 우롱이란 현상금을 내건다. 스파이크가 이 현상금을 못본 척 지나칠 리 없다. 스파이크 스피겔. 98년 <도쿄 TV>와 <와우!와우!>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으로 세상에 등장한 현상금 사냥꾼, 일명 카우보이다. 스파이크는 비밥호의 식구들- 제트, 페이, 에도 그리고 천재강아지 아인과 함께 페이가 우연히 사건현장에서 촬영한 흐릿한 화면을 단서 삼아 범인을 찾아나선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어두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점에서 영화의 악당 빈센트는 어찌 보면 스파이크의 또다른 분신이다. 빈센트는 마이크로 로봇을 이용한 인체실험의 희생물이었고 자신의 연인도 잊은 채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돌아왔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지. 마치 꿈 속에서 사는 듯한 사람”이라는 초반부의 독백은 빈센트를, 동시에 스파이크를 말하는 듯 들린다. 일본에서 방영된 1998년 TV 시리즈 극장판, 현상금 사냥꾼들 이야기 텔레비전 시리즈는 1940년대 즉흥적인 재즈음악 ‘비밥’의 음율처럼 자유롭게 캐릭터들을 내세우고 빼내며 때론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때론 가슴 저리도록 아프고 무겁게 에피소드들을 흘려보냈다. 이에 비해 극장판 <카우보이 비밥- 천국의 문>은 명백히 스파이크를 단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텔레비전 시리즈를 보지 않았던 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구도로 만들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시리즈가 원래 풍기던 자유로우면서도 허무한 분위기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색채는 더 강해졌다. 마지막 사랑하던 이를 기억해내는 빈센트의 추락을 지켜보는 옛 연인과 스파이크, 그들 위로 장자의 나비가 가루를 흩뿌릴 때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 기억과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까지 이른다. 역시 간노 요코가 음악을 맡았으며, 모노톤의 쓸쓸한 오프닝 장면은 <인랑>의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이 만들었다. 2일 씨어터 2.0, 중앙시네마 2곳에서 개봉한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사진 그루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