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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박재동의 <목 긴 사나이>

시사만화가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명성을 쌓아온 박재동 화백의 작품집 <목 긴 사나이>(글논그림밭 펴냄)가 5년 만에 재출간되었다. 다양하고 왕성한 활동 속에서도 꾸준히 작품집을 내온 박 화백은 1999년 <정치야 맛좀볼텨> 이후 2년 만에 출판가에 얼굴을 내밀게 된 것이다. ‘한겨레 그림판 베스트 33’, ‘샐러리맨 네 멋대로 해라’ 등은 만화가로서, 또 예술가로서 박재동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코너들. 또한 MBC에 방영되었던 시사애니메이션의 콘티와 단편 <샤위나>는 이번에 처음으로 책에 소개되는 내용이다.<천마의 혈족> 발간 <바람과 나무의 시>로 70년대 소녀만화를 이끌었던 다케미야 게이코 작품이 처음으로 국내에서 번역되어 나온다. 기마민족 타구르족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방대한 대하역사 판타지를 펼쳐내는 <천마의 혈족>. 정통의 왕위계승자를 상징하는 ‘천마’를 중심으로 권력과 사랑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장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일본의 월간 <아수카>에 연재되고 있는 이 작품은 단행본 20권을 넘어 다케미야 게이코의 작품으로는 최장편의 기록을 세워가고 있다. 부제인 CRYSTAL LORD OPERA에서도 서사 음악극적인 이미지를 풍기는데, 만화 이미지 앨범과 애니메이션 사운드트랙으로 잘 알려진 이토 마스미와 우에노 요코가 참여한 드라마 앨범이 95∼96년에 제작되었다.

살아있는 감정, 문화의 힘

현란한 영상물로 변신한 ‘해리 포터’ 열풍이 지금 전세계를 항해 휘몰아치고 있다. 소설에서 출발하여 영화와 게임, 캐릭터상품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원 소스 멀티 유징’의 전철을 착실하게 밟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에서 쉽게 쓰이는 비유인 ‘자동차 몇 만대 수출량’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대박상품임에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가장 알기 쉬운 이 투자대비 수익률만으로 콘텐츠를 보는 것은 학생이 수학문제를 풀 때 참고서에 나와 있는 답만 베끼겠다는 생각과 똑같다. 올해 가장 주목받았던 애니메이션인 <슈렉> 역시 성공한 콘텐츠상품답게 제작사인 ‘드림웍스’의 상업적 부와 함께 자사의 기술을 전세계에 홍보하는 등 여러 부수적인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해리 포터’가 <슈렉>과 다른 점은 이 작품은 ‘영국’이라는 한 나라의 이미지를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한 나라가 가지는 문화의 어느 특정한 요소 하나만으로 판단될 수는 없겠지만 문화마다 타문화사람이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요소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이 좀더 강하게 인지될 때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다.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영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흡혈귀=드라큘라’라는 연상작용처럼 앞으로 10여년 이상은 ‘마법사’라는 단어와 ‘해리 포터’가 거의 동등한 위치까지 점유하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던 <월레스 앤 그로밋>과 <치킨 런>의 탄생지로 플라스티신(plasticine: 세공용점토)을 주재료로 만들어지는 클레이메이션 제작기술은 세계최고로 인정받고 있으며 제작사인 아드만 또한 영국문화 발전력의 한 힘이 되는 곳이다. 이들의 작품들을 빛내주는 것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빚어내는 캐릭터들에 대한 감정 이해와 제작에 대한 진지한 노력에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것만 충실히 떠받쳐주는 작품이라면 뛰어난 CG기술이나 화려하게 치장된 캐릭터로 무장된 작품보다 더 큰 파워를 지닐 수가 있는 것이다. <치킨 런>처럼 지나치게 화려해진 부분도 있지만 <아담>이나 <꼬마 렉스>와 같은 작품에서처럼 아드만의 캐릭터는 전반적으로 밋밋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1998년 10분짜리 에피소드 13편의 시리즈가 를 통해 방송되었고, 얼마 전 새로운 시리즈가 완성되어 현재 에서 방송되고 있는 <꼬마 렉스>에서 4명의 주역캐릭터들은 겉모습은 초등학교 공작시간에 뛰쳐나온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부르주아적이고 어리석지만 팀의 리더인 ‘렉스’와 숨은 실세인 ‘웬디’, 감정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폭력아 ‘봅’, 잼, 화요일, 우주학 그리고 후버 청소기를 좋아하는 ‘빈스’의 모습은 그 엽기적인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지닌 연기력 덕분에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캐릭터의 감정이 살아 있고 그 속에 만든 이들이 살고 있는 문화가 재미있게 녹아 있다는 점이다. 문화콘텐츠가 발휘하는 가장 큰 이득은 금전적 효과가 아닌 그 태생지에 주는 문화적 풍요로움과 자생력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문화상품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단순한 수치적 이득만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100배, 1000배의 이득을 벌어들인 ‘대박’ 뒤에는 100편, 1000편의 실패작(금전적 측면에서)이 있게 마련이다. 제발 더이상 자동차나 반도체 수를 애니메이션 작품의 판단기준의 잣대로 삼지 말았음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광활한 우주나 드넓은 중원도 좋지만 아직도 한국 역사나 문화 속에서 가공할 수 있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배우거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시간이 없다면 만화나 소설, 동화책을 읽어보아도 그 속에 수많은 가능성이 있음을 알 게 될 것이다. 김세준/ 만화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

<쓰리>의 김혜수·김지운 [1]

당찬 여배우 김혜수, 수줍은 감독 김지운을 인터뷰하다 “감독님, <토미> 보러 갈 거죠?” “<토미>? 괜찮죠.” 높고 경쾌한 음색의 김혜수와 나지막한 목소리의 김지운 감독. 늦잠을 떨치고 왔다는 두 사람은 늘 보는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말문을 연다. 지난 11월 촬영을 마친 단편 미스터리영화 <메모리즈>가 만들어준 인연이다. <메모리즈>는 <조용한 가족>에서 <반칙왕>으로, 다시 인터넷 단편영화 <커밍아웃>으로, 재기 넘치는 코미디 변주곡을 거쳐온 김지운 감독의 새 단편영화. 3년 만에 <신라의 달밤>에서 웃음기어린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스크린에 돌아온 김혜수의 신작이기도 하다. 웃음에 적을 두고 관객과 만나온 이들은, 뜻밖에 코미디를 털어버린 미스터리스릴러에 의기투합했다. ‘아시아의 공포’를 공통 주제로 삼아 홍콩의 진가신, 타이의 논지 니미부트르와 함께 3국 옴니버스로 제작하는 의 한국편 <메모리즈>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자신의 정체를 알기 위해 헤매는 여인과 그를 찾아나선 남자의 불안한 걸음을 쫓아가는 미스터리스릴러. 음습한 폐곽과 안락한 삶의 온기가 등을 맞댄 도시의 미궁에서, 기억과 일상의 품에 똬리튼 공포를 끄집어내는 영화다. 이제 편집을 남겨둔 단편 작업의 기억으로, 그 밖에도 시시콜콜 나눌 말이 많아진 두 사람을 만났다. 김혜수(이하 수) | 감독님이 원래 말이 없으셔서, 우리 얘기는 많이 안 해 본 것 같아요. <조용한 가족> 하실 때부터 봤는데. 명필름의 보경이 언니가 시나리오를 보여줬어요. 특이하다고 한번 보라고. 근데 너무 재밌어서 나 이거 해볼까, 그랬거든요. 할 역할은 하나뿐인데, 뵙기 전부터 그런 발상을 가진 감독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너무 궁금했어요. 그때도 감독님은 말이 별로 없었는데. 김지운(이하 운) | 그 역이 아직 결정이 안 됐을 때였죠. 난 영화에서 스타가 왜 필요한가, 어떤 도움이 되는가도 구분이 잘 안 되던 상황이었고. 질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그냥 혜수씨가 한다고 했을 때 이게 웬 복이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만나서도 할말이 없었죠. 복입니다요, 밖에. (웃음) 스케줄 때문에 복이 들어오다 말았지만. 이번 작업 때는 어땠어요? 이번에도 말 많이 안 했던 것 같은데…. 수 | 이번에도 그랬죠. 그렇다고 답답하진 않았어요. 말을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서적으로 좀 가깝다고 해야 되나? 연기자와 연출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여러 형태가 있지만, 꼭 대화로 소통하는 게 아니어도 어떤 코드가 잘 맞으면… 난 편했어요. 감독님은 정서적인 통찰력이 있는 쪽인 것 같아요. 캐릭터와 영화의 컨셉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걸 어느 정도 인지한 다음부터는 연기자의 정서나 감성을 연출자가 어떤 식으로 활용하느냐가 중요하잖아요. 감독님은 배우가 가진 용량 안에서 최대한 활용할 줄 알고, 그러면서 다른 이면을 드러내게 하는 것 같아요. 연기자로서는 그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운 |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 메이킹 필름을 봤는데, 거기서 배우에 대해 내가 생각하던 것을 단적으로 얘기한 부분이 있었어요. 내 시나리오에, 내가 선택한 배우가 연기를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랬거든요. 피아노 소리가 필요하면 피아노를, 바이올린 소리가 필요할 땐 바이올린을 갖다놓으면 되는 거죠. 안 되는 걸 쥐어짜거나 막 쥐어짜서 나오는 필요 이상의 열연을 싫어하고, 그냥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는 쿨한 연기를 좋아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혜수씨를 호러영화에 캐스팅한 걸 좀 의외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는데, 혜수씨를 보면서 놀랐어요. 다른 매체를 통해서 김혜수라는 배우의 밝고 명랑함, 당당함, 자신감을 봐왔는데, 상당히 어두운 면도 있었고, 섬세하고 예민한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 배우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스펙트럼, 어떤 풍요로움을 여태껏 많이 보여주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수 | 저도 평소 소신 중 하나가 고정관념을 좀 떨치고 살자는 건데, 사실 알게 모르게 별의별 선입견이 다 있잖아요. 누구나 다양한 면이 있고, 배우라면 그 폭이 넓어야 바람직할 텐데, 우리나라의 좁은 시장에서 일하고 방송을 많이 하다 보니까, 물론 개인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한 이미지가 부각이 많이 되고 고정관념이 돼버려요. 보여주는 것 이외의 것을 찾는다는 건 그 사람한테 그런 관심이나 의도가 없으면 어려운 거잖아요. 나 스스로도 대중적으로 만들어진 내 이미지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거기서 좀더 자유로워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구요. 감독님이 만약 저에게서 다른 점을 보셨다면, 조금 더 넓게 보려는 다른 각도에서의 이해가 있는 거겠죠. 운 | 처음 봤을 때 가장 컸던 게 창백함이었어요. 우리가 아는 혜수씨는 건강미인이었는데, 그땐 상당히 창백해 보였고, 그게 나한테는 이상한 데미지로 남았어요. 그래서 이번 <메모리스>에 그때 느낌을 옮겨 온 거죠. 지금도 만나면 항상 파워풀하고, 다변이고, 그런데 슬쩍슬쩍 던져주는 정반대되는 느낌들이 있거든요. 수 | 그런 거 있잖아요. 왜 김혜수씨는 섹시함을 강조해요? 건강미를 강조해요? 솔직히 저 섹시한 배우로 출발한 거 아니거든요. 섹시하다는 것도 시상식 때 입은 드레스 때문 아니에요? 그 드레스를 입어서 강조가 됐지만, 의도를 따지자면 그럴 의도는 없었어요. 그런 이미지가 매체를 통해서 더 강렬해지고, 만들어지는 거죠. 운 | 오늘 신문에선가 더스틴 호프먼이 그랬더라구요. 배우는 스타가 되면서 동시에 죽는다, 저널리즘에 의해서 그 사람은 이미 죽는 것이고, 그뒤로는 계속 방부제 처리되어 썩지 않게 돼 있다고. 스타의 운명이고 굴레고 그런 것 같아요. 근데 혜수씨를 보면서 좀 이상한 건, 드라마를 잘 안 보지만 TV 출연작에서는 명작들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시청률도 높고, 방송평도 좋았고, 사람들도 좋아했고. 그에 비해서 영화쪽에서는 TV의 명성만큼 도드라진 작품이 없었단 생각이 들어요. 그건 왜 그런 것 같아요? 생각해본 적 있어요? 수 | 그런 생각 많이 하죠. 카메라라는 매체를 끼고 연기할 때 연기자의 입장은 같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최근에 와서 많이 들어요. <신라의 달밤> 하면서 느낀 게, 남자들이 주축인 드라마니까 촬영할 때 매번 현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행이 빨라서 영화 자체에 적응될까 싶으니까 영화가 끝났어요. 주위 사람들도 TV 연기보다 영화에서 연기가 좀더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럽대요. 그동안 영화에 적응할 만한 여유를 못 갖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영화에서 연기 변신을 하는 것보다 영화에 적응하는 과정이 필요하구나, 싶어요. 스타랑 작업이 처음이라구요? 송강호씨, 최민식씨는? 운 | 난 사실 영화 하면서 스타랑 작업한 게 처음이거든요? 수 | 같이 작업한 스타들이 기분 나쁘겠다. (웃음) 운 | 아니 송강호씨나 최민식씨는 혜수씨가 생각하는 스타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별 뚜렷한 활동이 없는데도 관객이 뽑는 베스트에는 항상 혜수씨가 들어가 있어요. 입술이 가장 섹시한 배우에도 들어가 있고, 하여튼 여러 가지 항목에 항상 거론이 되거든요. 몇년에 걸쳐서. 수 | 그것도 일종의 거품이야. 매체가 늘 그 이름을 다루기 때문에…. 운 | 그동안 스타들과 작업을 못한 건 작품의 컨셉이나 캐릭터랑 안 맞는 것도 있겠지만, 지금 나랑 작업하는 것 외에 다른 시간이 바쁜 사람들이라 집중력이 떨어지고 진행이 원활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스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 본위로 돌아가지 않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고, 그런 것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게 신경쓰이고. 그런데 혜수씨랑 작업하면서 그런 부분을 다르게 보게 된 것 같아요. 수 | 전 일단, 단편영화 작업을 좋아해요. 감독님이 <메모리스> 한다 그랬을 때, 처음에는 장편 준비하면서 여유를 갖고 본인이 하고 싶은 단편을 하시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게 어떤 프로젝트인지 몰랐고. 운 | 내가 이런 단편을 하는 건 일종의 욕심인데, 내 행위 자체가 어떤 발언이 됐으면 하는 생각도 사실 있어요. 단지 여유롭게 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작품 해서 빨리 목돈도 챙기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만, 이런 작품을 하는 건 그냥, 문화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다양한 배우나 선수들이 만들 수 있는 문화가 상당히 제한돼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스타가 이런 단편영화에 나온다는 것, 그런 문화도 없었고. 수 | 난 감독님이 단편영화를 한다는 게 되게 신선했어요. 일단 이름을 얻은 장편영화 감독은 단편을 할 여유가 현실적으로 없기도 하지만, 잘 안 하게 되잖아요. 관객을 상대로 장편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편으로 뭔가 자기 것을 계속 해나간다는 게…. 단편이라서 사실 더 관심이 갔었어요. 운 | 외국에서는 종종 그런 작업들을 많이 하잖아요. 짐 자무시가 <커피와 담배>라는 재밌는 단편을 톰 웨이츠랑 같이 만들고. 그런 게 좋게 보이고, 작업 자체도 재밌을 것 같고,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감독들이나 배우들이 왜 그렇게 안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단편이라고 하면 장편으로 가기 위한 과도기처럼 생각하는데, 분명히 단편의 미학이 있고 호흡이 있잖아요. 장편으로 데뷔한 감독이 다시 거꾸로 단편을 해 보면,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가볍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작업들을 하는 것. 그러면서 나도 새로운 장르를 부담없이 시도해보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런 게 맞아떨어졌죠. 하나하나 작품마다 악다구니 쓰면서 하는 건 별로 재미 없어요. 내가 영화를 하는 건 즐겁고 재밌어서인데, 부담이 되고 그러면 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계속 장편을 하면서도, 가능하다면 이런 작업들을 병행하려고 하는 거죠. 꼭 큰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개인 푼돈을 털어서라도, 디지털로도 작업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혜수씨도, 정보석씨도 이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해준 은인 같은 사람들이에요. 사실 돌아오는 것도 많지가 않은데, 그런 문화를, 즐거움을 알고 참여해주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어떤 배우한테, 어떤 스타한테 이런 일을 같이 해보자고 얘기할 수 있었겠어요. 수 | 그동안 이런 루트가 없었잖아요. 전 대학 때 단편영화 작업을 했었거든요. 그때 추억이 너무 좋아서 꿈이 뭐였냐 하면, 용돈을 모아서 단편영화 작업할 수 있는 사무실 가지고, 영사기도 하나 갖다놓고, 16mm나 8mm용 카메라 사서 마음맞는 친구들이랑 스탭 구성해서 계속 단편 작업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돈도 모았어요. 한 이백몇십만원? 운 | 외국 배우들, 톰 크루즈나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들도 저예산영화에 싼값에 출연하잖아요. 결국 한 나라의 영화문화적인 다양함, 또는 풍요로움이 그 사람을 통해서 더 확대되는 건데 왜 그런 시도들을 안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혜수씨처럼 실리적인 부분을 접고 흔쾌히 이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수 | 전 김지운 감독님이랑 해보고 싶다는 것도 컸어요. <조용한 가족> 때도 사실 그 캐릭터가 매력있다기보다 이런 작업에 내가 참여하고 싶다, 그런 거였죠. 어떤 신선한, 익숙하지 않은 화면 속에 내가 들어갔다는, 포함이 됐다는 것만으로 흥분되는 거고. 익숙하지 않은 유머였잖아요. 말초적인 걸로 웃기는 게 아니라 코미디 안에 복잡한 게 많고. <조용한 가족>도, <반칙왕>도, 그동안 볼 수 없던 신선하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 있었어요. 스타를 간판으로 내세워서 뭔가 보장된 영화도 아니었고요. 우리가 접해온 영화라는 건 소수 아트영화 아니면 아주 단순한 상업적 코드의 대중영화인데, 익숙하지 않은, 주류가 아닌 소재들을 상업적으로 음… 승화시켰다고 하면 말이 너무 아름다운가? (웃음) 실리라고 생각진 않았지만, 사실 실리도 있어요. 누구도 저를 선뜻 호러 미스터리물 캐스팅에 1차안으로 생각하기 쉽진 않을 거예요. 그런 나의 다른 면을 대중매체를 통해서 부각시킬 수 있는 건데, 그것도 뭐 실리하고 상관없는 건 아니죠. 계획된 실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운 | 근데, 많은 여배우가 자기의 모습이 무섭게 나오나, 흉하게 나오나, 그런 걸 먼저 생각하거든요. 수 | 난 그 생각은 진짜 안 했어요. 그게 재밌더라구요, 내 평생에 연기하면서 그럴 찬스가 몇번이나 오겠어. 그렇지 않겠어요? 김혜수 아닌 것 같다 그런다면서요. 운 | (웃음) 김지운 영화 같지도 않다는 얘기도 해요. 서로 그런 거죠. 나도 코미디만 하는 감독에서 좀 탈피하고 싶었던 거고, 혜수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런 것들이 동반추락이냐, 동반상승이냐는(웃음) 결과를 보면…. 근데 왜 그런거 있잖아요, 전형적인 것보다는 잠재돼 있는 공포, 잠재된 슬픈 정서가 뭘까. 예를 들어서 외딴 길을 가는데, 길 가운데에 검은 박스가 놓여져 있다. 난 귀신이 앞에 서 있는 것보다 이게 더 무서운 거지, 주위에 아무도 없고 그 박스만 놓여져 있을 때. 사실 사물로 보면 무서울 게 전혀 없는 거거든요? 전혀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아주 일상적인 상황인데 그것이 나한테 주는 공포. 그런 걸 담아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전형적인 것 말고, 일상적인 상황이 던져주는 공포 수 | 아쉬웠던 건, 예상보다는 촬영기간이 길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짧았어요. 개봉 안 하면 어때, 계속 찍고 싶더라구. (웃음) 운 |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지. 단편 주제에. (웃음) 어쨌든 장편을 하던 사람이라 단편 호흡을 잘 모르겠더라고. 그리고 내가 아쉬웠던 건, 송강호나 신하균 같은 친구는 자기 촬영이 아닌데도 항상 지켜봐 주는 게 있었어요. 난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 있는 상황이었고.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닌데, 예를 들면 그럴 때가 있어요. 이런 장면은 혜수씨가 와서 좀 봐줬으면 하는 부분들. 근데 그런 게 좀 아쉽더라고. 수 | 얘기해주시지…. 운 | 지금부터 그렇게 하면 되죠. 혜수씨는 작업에 참여할 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데. 정말 내가 현장에서 같이 작업할 때는 아 저런 큰 배우가, 스타가 보잘것없는 단편에…. 수 | (웃음) 자꾸 그러니까 씹는 것 같애. 넌 진짜 이름만 크고, 덩어리만 크구나…. (웃음) 운 | (웃음) 아니죠. 이런 단편에, 어떤 결과물이 얻어지고 이런 것에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고, 즐겁고, 이런 순수한 기분들이 막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참 좋았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그거였다는 거죠. 영화는 경제성, 또는 합리성, 이런 성질과 다른 일인 것 같아. 정말 변증법적으로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어서, 사람들이 어떤 열의를 가지고 참여한다는 게 말단 스탭부터, 제작부, 조명 막내부터 위까지 다 힘을 주는 것 같아요. 그게 에너지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고. 예를 들면 내가 모니터 체크할 때, 슛할 때는 각자 포지션에 가 있던 스탭들이 와서 뭉쳐서 같이 확인해주는 거, 이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안 보이는 시스템이고, 안 보이는 팀워크란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이 얘기는 이 자리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하려고 했어요. 수 | 그건 저도 이번에 느낀 게, 저 안 찍는 날에 가서 보석이 오빠가 하는 걸 보고 싶었거든요. 주로 혼자 하는 신이 많아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찍나, 어떤 차이가 있나. 사실 저한테 익숙하진 않은 건데, 분명히 뭔가 있을 거예요. 아까 얘기했듯이 영화에 좀 익숙해지는 거, 꼭 당장 가시적인 걸 얻겠다는 것보다도 내가 이 영화에 이만큼 들어와 있다는 걸 자기 스스로 좀 느끼는 거. 운 | 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외국의 배우 중에 누구를 생각할 수 있을까. 외모가 주는 화려함에 비주류적인 취향도 갖고 있는 배우. 생각해보면 우마 서먼이 좀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거든요. 크리스티나 리치도 그렇고, 혜수씨가 그런 배우가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길 바라요. 마치 러시아인형처럼, 끄집어내면 뭐가 또 있고, 그 안에 또 있고, 그렇게 보여줄 게 많을 테니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1]

그는 자신의 일을 꽃을 피우는 일에 비유했다. 꽃을 땅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뿌리가 놓인 땅에서, 꽃은 땅의 풍요와 가난을 먹고 살다, 그 땅으로 돌아간다. 임권택은 땅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환청처럼 땅의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그의 몸을 돌아 영화라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는 평생 이 땅을 떠돌며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한 불행한 떠돌이 예술가의 혼을 담은 <취화선>에 이르렀다. 그건 어쩌면 40년 영화인생에서 처음 감독 자신이 주인공인 노래인지도 모른다. 촬영현장 장기취재 허락을 청했을 때, 임 감독은 조용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를 기꺼이 경외하는 외부인은 <취화선>의 제작진과 한달여를 함께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꽃잎이 눈을 떠 영화의 하늘이 열리는 순간의 경이를 경험했다. 임권택 감독, 그리고 그의 영화가족과의 긴 동행의 기록을 여기에 담는다. 이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설레고 자랑스럽고 벅찬 기록이다. 편집자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일부를 제외하곤 모두 <취화선> 스틸작가 김재영씨의 작품입니다. 김 작가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서문 2001년 3월 그 어느날. 당신에게 부탁하니, 서문이 긴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더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영화를 다시 돌아보면서. 날씨 매우 흐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음. 그러니까 이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중략)… 다시 말하지만 그러니까 영화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구라도 영화를 보고 나면 쉽게 입을 열게 만든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제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 난 다음에도 다시 한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게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이건, 허우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카메론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심지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영화를 보고 나오면 화를 낸다. 그러나 우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에게 그 장면이 그런데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라는 단 한마디 질문은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침묵시킨다. 우리는 영화를 그저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의지해서 칸트와 사드를, 라캉과 지젝을, 들뢰즈-가타리와 바타유를,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를, 니체와 레비나스를, 또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리비도를 끌어들이건, 잉여가치를 발견하건, 부유하는 기표를 따라가건, 소문자 타자의 구멍을 채우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그런데 더 우스운 것이 있다. 그 누군가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관한 영화평을 쓰면서 이 영화는 감각에 의지해서 직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엄숙하게 끝을 맺은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낄낄대고 웃었다. 그건 그 영화에 대해서 나도 알지 못하니 그만 괴롭혀달라는 비장한 자백(!)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쓰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에 의지해서 철학을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철학에 의지해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그저 생각해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인 노동을 바탕으로 테크놀로지를 통해 기어이 자기가 가 닿으려는 상상의 형상에 항상 도착하지 못하는 실패에 관한 집단적인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든 영화는 결국 근대가 발명한 기계장치를 놓고 인간이 속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우리의 자아가 다룰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벌이는 바보 같은 경기이며, 결국 그 안에서 불가능을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벌어지고 만 근대라는 사건과 벌이는 협상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안으로의 여행은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정말 영화를 주의깊게 보는 사람이라면 영화작가들이 만들어내는 기적과 같은 순간을 보면서 이 천지창조의 위대한 비밀이 과장없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궁금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이 말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을 보면서 정말 궁금했다.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비밀을 안은 아내와 비밀을 이미 알고 있는 남편과 그들 사이에서 시침미떼고 접선해야 하는 스파이 사이의 파티장에서의 만남을 담은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상태를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연출하는 숏을 수없이 다시 보아도 그건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빔 벤더스는 오즈의 영화를 아무리 다시 보아도 50mm 표준렌즈가 그 작은 가옥 구조 안에서 만들어내는 소우주의 엄격한 질서를 감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6mm 카메라 한대와 나그라 녹음기 한대를 들고 도쿄에 찾아와 오즈의 살아남은 스탭들을 차례로 만나서 질문하기 시작했다(<동경화>). 세르주 다네는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난>에서 불어오는 그 바람이 어떻게 깃발을 펄럭이게 만드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을 찾아간다. 파스칼 보니체는 자크 리베트 영화에 관해서 연구를 하다 결국 포기하고 그 비밀을 훔쳐내기 위해 그의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서 현장에 머물렀다. 그는 이제 더이상 영화평을 쓰지 않는다. 감독이 되었기 때문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허우샤오시엔의 방 안과 세상 사이를 가르는 창문틀 너머 빛을 만들어내는 조명의 자리를 들여다보기 위해 타이베이를 방문한다(). 아무리 영화에 관한 평을 써봐야 알 수 없는 기적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 거기에는 항상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그가 장르영화를 만들건 작가영화를 만들건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만다라>에서 삼라만상이 숨죽이는 순간, 나는 거의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장군의 아들>에서 다른 장소에서 촬영한 것이 분명한 숏들이 한 신 안에서 마치 제 자리를 찾듯이 착착 달라붙는 순간 거기서 거의 불가능한 조립을 본다. <티켓>에서 마담이 다방 아가씨들에게 술주정을 벌이는 장면이 만들어내는 감동은 그 3분40초의 롱테이크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을 자르는 순간이다. 마찬가지로 <서편제>에서 5분10초에 이르는 기나긴 롱테이크는 시간적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의 풍경에서 나온다. 그 풍경 안에서 넉살좋게 주름처럼 구부러진 길이 만들어내는 삶의 고단함 위에서 ‘가짜’ 가족인 아버지와 누나와 동생이 아리랑을 부르며 걸어오는 순간 우리는 거기서 햇빛 찬란한 날씨가 만들어내는 행복한 비극성과 마주한다. 분명히 아름답지 않게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무심한 롱숏들은 그 자체로는 매우 평범한데도 불구하고 그 맥락 안에 있는 위치의 좌표를 통해서 미학적 형상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태백산맥>에서 산을 타고 달려 내려오는 빨치산들의 속도의 편집을 떠올려보라. 또는 <창>의 폐소공포증에 가까운 세트 안에서 자크 타티를 연상시키는 화면틀-들(tableaux-vivant) 안으로의 무한한 수평 이동들. <축제>에서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놓은 결여된 롱테이크의 비가시적인 구도. 거기에는 절대조감이라고 불릴 만한 관점으로 영화의 구성요소들의 순열-조합을 다시 이루어내는 상대적인 순간이 있다. 그 방법 이외에는 다른 그 어떤 것도 생각해낼 수 없는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조감은 그의 영화 안에서 모순된 말이 아니다. 아니면 <춘향뎐>에서 방자가 춘향을 찾아가고, 또는 변 사또의 부름을 전하러 달려가고, 아니면 떠나가는 몽룡을 춘향이 붙들고 늘어지면서 소리와 이미지가 어우러지는 단 일분 안의 점핑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창조의 순간이다. 그건 본다고 베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그건 브레송의 손을, 베리만의 얼굴을, 오즈의 텅 빈 주전자를, 고다르의 카메라를 향해 돌아보는 몸짓을, 호금전의 하늘로 비상하는 무사의 경공술의 순간을, 그들을 뒤쫓는 세대들이 아무리 그대로 베끼려고 해도 그 장면들이 복제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만드는 그 순간에 거기에 가서 그 위대한 비밀을 훔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어떻게!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2]

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2001년 6월19일에서 그로부터 일주일. (온 나라를 황폐하게 만든 가뭄이 이어지던) 날씨 내내 맑음. 이날 집에서 왕가위의 <화양연화>를 보면서 장면을 그려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씨네21>의 허문영 기자가 무언가 망설이면서 말을 꺼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에 가서 일종의 현장일기를 써볼 생각은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하루이틀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함께 먹고 자면서 “임 감독 영화의 현장에서 그 창작자로서의 고뇌와 솜씨를 담아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 가기 위한 온갖 핑곗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건 고마운 제안이었다. 드디어 명분이 생겼다! 그로부터 닷새 뒤에 허문영 기자와 함께 <취화선>을 제작하는 태흥영화사를 찾아갔다. 그동안 임권택 감독의 새 영화는 화가 장승업을 다룬다고만 알려져 있었으며, 제목이 결정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그리고 이미 지난 봄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층에는 이미 촬영계획표와 연기자들의 얼굴이 배역별로 도표처럼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 방에서는 영화에 사용될 장승업의 그림을 옮겨 그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장승업의 그림들의 사본이 펼쳐져 있었다. <취화선>을 위해서 장승업 그림에 대한 고증으로 일랑 이종상 선생(서울대 박물관장)을 위로 하여 그 제자들이 즐비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그림 그리는 장승업의 대역으로는 김선두 선생(중앙대 한국화과 교수)이 카메라 앞에서 붓을 잡을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참 멋진 작업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중간에 중매가 있었습니다. (웃음) 이종상 관장님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참 묘한 게 기사를 읽으면서 속으로 내가 이런 배역을 해보면 참 재미있겠다,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진짜 제의가 들어오니까 무척 당황스럽더라고요.”(김선두 선생과의 인터뷰) 임권택 감독은 언제나처럼 조용하고 겸손한 태도로 나와 허문영 기자를 맞았다(사실 난 감독님의 겸손함이 항상 부담스럽다. 올해로 처음 인사드린 지 이미 16년째이고 게다가 내 결혼식 주례이기도 하셨는데, 감독님은 아직도 내게 존댓말을 쓰신다). 이야기를 드리자 감독님은 “그렇다면 세트장에 들어간 다음에 오면 좋을 거요. 이 영화는 그 오픈 세트장에서 승부가 날 거 같은데. 그리고 아무래도 나도 처음에는 감을 잡아야 하니까 시행착오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웃음)”라고 대답하셨다. 이건 예상치 않은 선물이다! 벽에는 조선말 종로거리를 재현한 오픈 세트장의 구조와 배치가 70mm 사이즈로 마치 대동여지도처럼 붙어 있었다. 각도마다 구체적으로 가옥의 구조를 따로 발췌해서 그려놓았고, 가옥의 각도에서 보는 사방의 풍경이 다시 원근법에 맞추어 그려져 있었다. 세트는 영화적인 장소의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영화에서 오픈 세트는 사라져가는 전통이다. 점점 한국영화의 전통이 일상성과 리얼리즘에 매달리면서 영화들은 그 장소에 가서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면서 영화들은 장소의 의미가 만드는 환경에 사로잡혀서 관계에 집중하는 동안 점점 공간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은 장소에 가면 영화를 찍는 것이며, 세트에서는 영화를 만든다고 말했다. 파브리스 르볼 달론은 장소에서는 빛에 맞추어 카메라를 세워야 하고, 세트에서는 조명을 설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빛은 장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세트에서 조명은 사유한다고 거기에 덧붙인다. 감독님은 조감독을 불러서 시나리오를 건네주셨다. 거기에 이 시나리오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밑그림 같은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그 시나리오를 들고 온 사람은 조감독 정경진씨였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 문하생들을 알고 지내는 편인데(우선 감독으로 데뷔한 사람들의 이름만 열거하자면 곽지균, 최성식, 황규덕, 김영빈, 김의석, 김홍준, 임상수, 김대승) 여자조감독은 처음이다. 현장에서는 조감독에게 잘 보여야 한다! 취화선(醉畵仙), “술 마시며 그림 그리는 신선” 1883년 어느 초여름, 날씨 맑음. 그러니까 <취화선>은 장승업이 41살 되던 해 더운 여름날 오후에 시작한다. 또는 갑신정변이 벌어지기 일년 전에 이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장승업은 종로 거리를 걷던 중 떡을 훔쳐 달아나는 한 거지 아이를 본다. 장승업은 이 거지아이를 보면서 회상에 잠긴다. 어린 시절 다리 밑 거지패였던 장승업은 매를 맞던 중 우연히 길거리를 지나가는 개화파였던 김병문에게 도움을 받고 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초야에 묻혀 살던 은암 선생에게 그림 기초를 배우지만 은암 선생이 오래 살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자 다시 장승업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다시 만난 김병문은 그림에 재주를 보인 장승업을 어여삐 여겨 그를 당시 유명한 그림 소장가의 한 사람이자 역관이었던 이응헌에게 맡긴다. 장승업은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만 우연히 규수 소운을 보고 한눈에 빠진다. 그러나 소운은 시집을 가고 상심한 장승업은 그의 집을 떠나 주막에서 매일 술을 마시며 춘화를 베끼거나 중국 대가들의 그림을 방작하면서 돈을 벌며 세월을 보낸다. 그 주막에 이응헌이 찾아와 장승업을 당시 대가의 한 사람인 유숙 선생의 문하생으로 추천한다. 거기서 장승업은 일취월장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준다. 그림에 대한 장승업의 욕심은 한이 없고, 그의 그림에 대한 화우들의 질투는 그의 그림을 깊이없는 재주로 그린 그림이라고 폄하한다. 장승업은 그들을 떠나 곳곳을 방랑하며 그림을 그린다. 때로 저잣거리 기생 진홍을 만나 살붙이고 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우연히 만난 기생 매향이 그를 사로잡지만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방랑 끝에 돌아온 장승업은 우연히 유숙 선생을 비롯한 화가들을 초대한 사또의 잔치에 초대받는다. 그러나 사또의 청에 스승보다 먼저 붓을 든 장승업은 결국 다시 그곳을 떠나야 한다. 이제 다시 방랑길에 올랐지만 궁중에까지 퍼진 그의 소문은 임금님이 그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내리는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 붙들려 살아본 적 없는 장승업은 사흘 만에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간다. 세상은 급히 바뀌고 있었고, 그의 곁을 동학혁명이 스치고 지나가고 한편에서는 일본 군대와 청나라 군대가 이 땅을 밟고, 양인들이 거리에서 서양 옷을 입고 활보한다. 장승업은 이 세상의 변화를 보아야만 했다. 그는 1897년 55살의 나이로 홀연히 사라진다(시나리오는 그렇게 끝난다. 장승업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에도 그는 실종으로 되어 있다. 죽었다는 추측도 있고, 실종도 있다. 일본 기자의 말을 빌리면 “장승업은 그가 생전 그리지 않은 금강산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그림 그리는 신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醉畵仙.). 장면은 모두 170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면 곁에는 장승업의 나이와 계절이 표기되어 있었다. 장승업에는 최민식씨가 결정되었으며, 때로는 그를 이끌고 때로는 그와 그림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는 김병문 역에는(이 인물은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허구적 인물이다) 안성기 선배, 평생을 서로 번번이 스쳐지나가면서 장승업에게 그림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기생 매향에 유호정, 그리고 유일하게 살붙이고 산 기생 진홍에 김여진(<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신하는 처녀, <박하사탕>에서 결혼했다가 바람 피운 뒤 따로 사는 아내), 소운 역에는 손예진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을 안 건 시나리오를 받아본 다음의 일이다.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3]

장승업, 고흐와 동시대 화가 2001년 7월16일 날씨 맑음 이 영화의 공식적인 크랭크인은 내가 이 시나리오를 읽은 지 보름 뒤인 7월16일 월요일이었다. 날씨 맑음. 이 자리는 기자들을 부른 첫 번째 현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한국화에 관한 세미나를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한국화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터넷 서점에서 22권의 한국화 책을 사들고,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영화와 회화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유홍준 선생이 쓴 두권의 <화인열전>에는 장승업이 빠져 있었으며(그런데 안견과 신윤복도 빠져 있었다. 장승업을 고의로 폄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화에 관한 책들에서 김홍도와 김정희에 비하면 장승업은 매우 적게 다루어져 있었다(다루어져 있어도 부정적인 시각에서 쓰여진 것들이 많았다). 영화에서 화가를 다룬 작품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고흐를 다룬 빈센트 미넬리의 <생의 갈망>,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례프>,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에서 반 고흐를 만나는 에피소드, 자크 리베트의 <벨 느와제즈>(우리나라 제목으로 <누드 모델>로 알려진), 미조구치 겐지의 <우타마로를 둘러싼 다섯명의 여자>, 모리스 피알라의 <반 고흐>와 같은 작품들이 있을 뿐이다(아마도 내가 빼놓은 중요한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자료들을 읽다가 발견한 이상한 한 가지 공통점. 유난히 반 고흐에 관한 영화들이 많으며, 장승업은 반 고흐와 동시대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또는 반 고흐와 장승업은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발명되는 시대에 살아 있었던 사람들이며, 그들은 우리의 근대에로 들어오는 시대의 문턱에서 활동했던 화가들이다. 임권택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장승업, 당신은 누구십니까? 임권택 감독 촬영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기다니… 2001년 8월16일 맑았다 비 서울에서는 날씨가 맑았으나 전라남도 강진으로 내려가는 길에 비를 뿌리기 시작하다. 영랑생가에서 촬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인사드리기 위해서 찾아 내려갔다. 아직 장승업은 어른이 되기 이전이며(따라서 장승업이 나오기는 하지만, 최민식씨는 오지 않았다) 영화에서 김병문 선생이 거지였던 장승업을 은암 선생에게 추천해서 그곳에 내려가 그림의 기초를 배우는 대목이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다음이며, 영랑생가에는 촬영차와 조명기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모든 것은 늘 보아온 것이지만, 다만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임권택 감독 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긴 것이다. 물론 지금 한국영화 현장에서 비디오 모니터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아흔일곱편의 영화를 비디오 모니터 없이 작업한 임권택 감독의 현장에 비디오 모니터가 생긴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내가 알기로 한국영화에서 처음 비디오 모니터를 사용한 영화는 박광수 감독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일 것이다. 왕가위는 <화양연화>에서 처음 비디오 모니터를 활용했다. 왕가위는 “비디오 모니터는 현장을 바꿔놓는다”라고만 짧게 대답했다. 임권택 감독은 <춘향뎐>에서 비디오 모니터를 처음 사용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현장에 하루이틀 구경가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내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영화기자들이 고작 한나절 영화현장을 들러본 다음 그 영화에 대해서 논하려 들 때이다. 사람은 자기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인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첫 견학길은 다음날 아침 발길을 돌렸다. 15여 차례의 NG, 대체 이유가 뭘까? 2001년 9월10일 충청북도 청송문화재단지를 찾아가다. 날씨 맑음. 두 번째 현장 방문으로 이날은 장승업이 기생 매향의 기방을 찾는 장면을 먼저 찍었다. 최민식씨를 그날 처음 보았다(사석에서는 스크린 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만나보았지만 현장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뒤늦게 유호정씨가 도착했다. 기생방에 장승업이 기생 매향을 찾는 장면을 단 한번에 오케이 놓은 다음 옆의 대나무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날 밤에는 장승업과 기생 매향이 다시 만나는 한벽루 주변의 장면이다. 장면 #102. (달빛 교교한 오솔길을 거니는 승업과 매향) 매향 “화명이 어찌나 자자하던지 오시는 걸 미리 알았습니다.” 승업 “애저녁에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네. 소식을 물어 찾았네만 아는 이가 없더니….” 매향 “서울서는 목숨을 보존키 힘들어 이곳저곳 흘러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장면 #102-A (구름 속에 비어져 나오는 둥근달) 승업 “정인(情人)은 있는가?” 매향 (못 들은 척 웃는다) “바로 한양으로 가시나요?” 승업 “저렇게 그림을 조르니 한 달포 예서 머물 걸세.”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현장에서 어둠은 깊숙이 내리게 마련이다. 겨우 9시 반경인데도 이미 어둠은 칠흑처럼 떨어져 내렸다. 별달리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고, 조명은 대나무 숲 뒤로 세워졌다. 두 사람이 대나무 숲이 펼쳐진 담벽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대화를 나눈다. 몇번 리허설을 해보고 슛에 들어갔다. 카메라는 두 사람을 따라 수평으로 레일을 깔았고, 그 위에 크레인을 올려놓았다. 비디오 모니터를 세워놓기는 했지만, 연기자들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임권택 감독은 거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니터를 열심히 보는 것은 매번 연기가 끝날 때마다 자신의 동선과 표정을 일일이 체크하는 최민식씨와 유호정씨였다(그 뒤로 나는 유심히 보았는데 최민식씨는 아무리 짧은 장면도 반드시 모니터 화면으로 자기가 나오는 장면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건 예외가 없었다. 이상하다 싶으면 “감독님,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자기 연기의 플랜에 확신을 갖고 있는 배우였다). 감독님은 두 사람의 동선을 따라 같은 속도로 걸으면서 대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표정을 세세히 보았다. 임권택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내리기 전에 이미 그 장면이 마음에 들면 함박웃음이 꽃피는 얼굴이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게 웃음이 피지 않았다. 계속해서 엔지를 불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내 옆에 서 있었지만 그 장면이 왜 엔지인지를 알 수 없었다. 두 연기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걸어오는 속도와 대사의 속도가 붙지 않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래서 대사를 어떤 타이밍에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리저리 바꿔보았다. 그러더니 감독님은 정일성 촬영감독을 불렀다.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의 동선을 바꿔보자고 말했다. 열네번의 엔지 다음에 레일은 위치를 바꾸고, 크레인의 각도도 바꾸었다. 두 사람은 연기 동선을 새로 배치받았다. 이미 앞의 동선에 익숙해서인지 두 연기자는 반복해서 엔지를 냈다. 그건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이상하게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잠시 휴식을 하는 동안 임권택 감독이 비디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스크립터에게 앞의 장면을 모두 다시 틀어보자고 말했다. 아무 말 없이 보던 감독님은 다 끝나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모이가 좀 이상해, 하여튼 모이가 안 맞어.” 감독님의 혼잣말이지만 그 순간 옆에 서 계시던 정일성 촬영감독과 김동호 조명기사, 조감독, 그리고 모두가 얼굴이 굳었다. 시간은 열두시를 넘고 있었다. 이제 한국영화 현장에서 임권택 감독의 그 장면이 될 때까지(!)라는 그 전설적인 순간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모든 스탭들에게는 지옥의 순간이지만, 나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상치 않게 빨리 마주친 셈이다. 모기들이 조명들을 찾아 날아들었고, 늦여름인데도 찬 공기는 옷매무새를 파고들었다. 임권택 감독은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였다. 카메라는 처음 설계가 바뀌면서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처음에는 수평의 움직임이었던 것을 이번에는 사선으로 바꾸어 카메라를 이동하고, 장승업과 매향은 돌담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던 대사를 서서도 해보고, 그 반대로 매향이 멈춰서고 장승업이 그녀를 원형으로 돌면서 대사를 나누기도 하였다. 한번 정해지면 그 장면에서 최선을 다해보지만, 번번이 임권택 감독은 고개를 저었다. 여름은 새벽이 이르게 찾아오는 편이다. 결국 새벽 세시 반. 임권택 감독은 최민식씨와 유호정, 그리고 정일성 촬영감독과 김동호 조명기사를 한자리에 모아 그냥 한마디 하셨다. “여기는 그 대사가 묻어나는 장소가 아니요. 돌담길도 이상하고, 아무 맛이 안 살어. 암만 해도 여기서는 그게 안 나오는데, 여름이 끝나기 전에 다른 장소를 찾아봅시다.” 촬영은 결국 여섯 시간 반 동안 진행되었지만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그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가 있는 법이다. “그렇지요. 차라리 날씨가 안 맞으면 그냥 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장소가 안 맞으면 그건 도리가 없는 것이지. 암만 해봐야 가짜 같거든. 그런데 그 장소가 그런지 아닌지는 그걸 해봐야만 안다는 것이요. 그러니 미치는 거지. 암만 해봐도, 배우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다음에 카메라를 온갖 데다가 들이대도 결국에는 아닌 데는 아닌 것이요.”(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이 장면은 조감독에게 나중에 들어보니 남원에 가서 한번에 오케이가 났다고 한다. 그 대사가 묻어나는 장소란 어떤 의미일까? 앙드레 바쟁은 장 르누아르에 대해서 쓰면서 이 말을 인용한다. “맞지 않는 장소에서 찍는 것보다는 못 만든 세트장에서 만드는 편이 낫다.” 조선춘화도 화집에서 빌려온 정사체위 2001년 9월11일 이튿날은 장승업과 매향의 야외에서의 정사장면이 있는 장면이다. 날씨 맑음. 장소는 청송문화재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담배밭에서 촬영되었다. 장면 #103 (강변, 앉은 자세로 정사를 나누고 있는 승업과 매향) 매향 “선생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세상살이 시름이 다 사라지니 이상하지요?” 승업 “그려서 위로주고, 그리면서 위로받는 게 환쟁이들일세. 자네와 나처럼 내 그림 통해 맘 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어디 그리 흔한가?”(서로 찾아드는 매향과 승업의 손) 시간경과 (꿈결같은 정사 뒤, 충일감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승업 “이러지 말고 함께 사는 게 어떻겠나?” 매향 (웃으며) “화류계 떠도는 것도 모자라, 도망까지 다니는 신세입니다.” 승업 “…여기는 괜찮은가?” 매향 “아전 놈 하나가 눈치를 챘는지… 지분거리는 통에, 이곳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치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하는 키 높은 담배밭인데,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장승업과 매향이 앉았다. 두 사람의 정사는 매향이 뒤로 앉아서 장승업을 올라타고 정사를 벌이는 후배위의 체위로 잡혔다. 감독님이 이 장면을 참조했다고 보여주신 책은 조선춘화도 화집이었다. 이 책에는 당시 그려진 수많은 춘화도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 책을 넘기면서 본 것은 유교가 지배하고 엄숙한 양반들과 선비들의 근엄한 얼굴 아래 숨죽이며 지내던 옛 조선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인간적인 체취였다.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정사장면들을 이 책에서 발췌하여 체위를 결정하였다. 이 책은 자주 이 영화현장에서 인용되곤 했다. 임권택 감독은 간단한 지시만 한 다음 그 자리에서 조감독을 불렀다. 그리고 이 장면을 열네개의 숏으로 쪼갰다. 이건 아주 의외였다. 당연히 롱테이크로 갈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갑자기 장면을 쪼개어서 들어가는 순간, 내가 <춘향뎐>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개의 숏을 더블 액션으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대사를 따라 마스터숏으로 시작해서 매향의 눈물 흘리는 얼굴의 클로즈업까지 파고들었다. 그 카메라의 동선은 장승업의 마음이 매향의 마음 안으로 파고들 듯한 순서를 따라갔다. 그러나 번번이 엔지를 내는 것은 연기자들이 아니라 바람이었다. 담배밭을 흔들어 주어야 하는데, 바람은 내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위에 찬란한 햇살이 떨어져야 하는데도 구름은 내내 심술을 부렸다. 기다리면서 담배를 피워물던 감독님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김동호 조명기사에게 “매향에게 빛을 떨어뜨려 주세요” 하더니 바로 일어나서 슛을 불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열네개로 그 장면을 쪼개 들어갔다. 거의 망설이지 않는 정확함. 행여나 감정이 다칠세라 중간에 쉬지 않고 정사를 따라가면서 이러저리 나누는 것을 정일성 촬영감독은 거의 그 머리 안에 들어가서 그 속의 그림을 복기해내듯이 순서대로 따라갔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오랜 작업이 가져온 장인들의 경지일 것이다. 그것은 옆에서 지켜보기에도 소름 끼칠 만큼 숙련된 솜씨였다. 영화는 숏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영화는 장면을 어떻게 나누냐의 문제이다. 그것이 장 피엘 우다르가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을 보면서 상대-숏 없이도 대화를 펼쳐낸 저 기적의 순간과 마주한 순간의 탄식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내부의 인물없이 외부의 인물이 없지만, 외부의 인물없이 내부의 인물도 없는 숏나누기의 봉합(suture)을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영화에 부여한 철학적 의미라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그 순간 영화 안으로 들어가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끼어든 시선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영화의 숏들은 자리를 벗어나고(out-of-joint), 신은 성립되지 않는다(미안하지만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은 숏이 안 맞는다. 심지어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걸 무시하고 찍는다. 그것이 내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다). 햄릿의 아버지가 유령이 되어 그의 아들에게 들려준 첫 대사. “시간이 멋대로 가고 있다.”(Time is out-of-joint) 이 말은 영화에서 시간이 어떻게 제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경구로도 읽혀야 한다. 제자리에 있지 않은 인물은 영화에서 유령이 된다. 내가 그 장면을 옮겨놓은 메모를 읽으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취화선> 팀은 장승업의 유랑길을 따라서 조선시대 말 충청도를 거쳐 호남땅 풍경 안으로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4]

주병도 미술감독 인터뷰 2001년 10월7일 저녁. 날씨 맑음. 이미 <취화선> 팀은 추석이 끝나자마자 이틀 뒤에 양수리 야외세트장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약간의 일이 생겨서 이틀 뒤에나 떠날 수 있었다. 마음속으로 상상은 하고 있었지만, 도착하는 순간 펼쳐진 야외세트장은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이 세트장을 지은 사람은 MBC미술팀의 주병도 미술감독이라고 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세트를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 칭찬을 잘 안 하는 박광수 감독으로부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세트장"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명불허전. 어쩌면 이건 이제까지 그의 세트 중에서 최고 걸작인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모든 분야가 다 결정되고 난 다음에 미술만 남은 상태였지요. 한국영화는 한 사람과 일하면 그 사람과 계속 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그런데 <춘향뎐>을 작업했던 사람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내가 이제까지 한 영화는 <영원한 제국>을 시작으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리고 드라마 <체인지> <초록 물고기> <이재수의 난>이 있습니다. 아, 그리고 물론 <뽀뽀뽀> 같은 프로그램도 합니다. (웃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기억에 많이 남죠. 미술 공부할 때 민중미술도 그리고 그랬으니까. 당시 피복공장들 자료들 들고 그 안에서 아이들 키 높이로 낮게 만들어진 문지방과 집단화장실,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때만 해도 박광수 감독이나 유영길 촬영감독이 하고자 하는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냥 캔버스에 그림 그리듯이 소도구들도 햇빛을 받아 살아가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나리오가 덜 나온 상태였습니다. 조선 말기의 종로 거리가 중요하다는 말만 듣고 세트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나한테 이것은 화가의 드라마라기보다는 조선 말기 사극인 셈인데, 집 구도를 잡기 전에 먼저 집채를 파악해야 했고, 그래서 여행 다니면서 한국에 남은 조선시대 양식의 좋은 집에 대한 자료를 보고, 사진 남은 걸 보고, 건물이 남은 건 답사를 가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물론 그대로 재현하면 좋죠. 그러나 여기에는 경제성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죠. 토목공사를 할 때부터 일종의 원형경기장처럼 만들자고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래야 프레임 안에 한번에 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중첩도 되고, 소나무도 걸쳐서 찍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이 뒤의 배경은 나중에 모두 컴퓨터그래픽으로 지우고 궁궐을 그려넣을 예정이기 때문에 방향배치를 염두에 넣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냥 짓는 것이 아니라 영화 세트장이기 때문에 반드시 촬영에 용이하게 일조량과 햇빛의 방향을 신경써야만 했습니다. 입방체를 만들어야 하는데 역시 돈이 문제지요(참고로 이 세트 제작비는 22억원이 들어갔다. <취화선>의 촬영이 끝나면 양수리 오픈세트장에 기증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한국영화는 19세기 말 종로 거리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사실 집채 수가 제일 고민이었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감독님의 감이 정확했습니다. 집채 수가 늘어난 겁니다. 무엇보다도 카메라로 들여다보면 거리의 깊이가 나와야 하니까요. 도면에서 시나리오가 나오면서 수정을 한 대목도 있습니까. "네, 이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집채가 늘어난 부분도 있습니다. 기생 진홍의 집은 원래 찍기로 한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봤더니 터만 남고 사라진 겁니다. 시장 복판에서 찍을 생각이었는데, 그 시장이 사라진 겁니다." 그러면 원형을 염두에 두고 복원한 것입니까. "원형이 어디 있습니까? 시장 자체가 사라졌는데. 그냥 돌담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했죠. 그리고 감독님이 무얼 그리워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지었습니다. (웃음) 이런 게 참 어렵습니다. 장승업의 천재성, 그러나 모호한 신분성 같은 것, 그리고 그 주변의 여자들의 각기 다른 성격들, 이런 것들을 영화미술의 비주얼로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실 영화미술이란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시나리오가 요구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화면이 열리면 바로 내용에 빨려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보는 사람이 이게 참 공들여 만든 것이구나, 라고 눈치채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가 미술이면 그건 실패한 겁니다. 그냥 바로 빨려 들어가야 합니다. 영화미술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여기 서서 그냥 보고 있으면 화창한 날에도 괜히 슬퍼지는 느낌이 중요했습니다. 왜, 짠 하는 느낌 있잖습니까(주병도 미술감독은 짠, 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는 정말로 그 짠, 하는 느낌을 만들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정말 장인이었다)? 나라는 기울어가고 있는데, 왠지 쓸쓸한 기분을 여기 담으려고 했습니다. 사실 집 자체는 이미 거기서 계급이 결정난 겁니다. 기와집을 지으면 거기 양반이 사는 거고, 초가집을 지으면 민초들이 사는 겁니다. 그러나 그 기와집에 연탄재를 뿌려서 그 집이 기울어가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심으려고 했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이 거기 서 있는 사람들에게 스며들면 되는 겁니다. 어느날 아침 일찍 감독님이 언제나처럼 혼자서 세트장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곁에 가니 갑자기 나한테 감독님 이야기가 왠지 눈물이 난다, 라는 말을 뜬금없이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하고 물으니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를 거야, 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때 속으로 성공했다, 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이 말려들어갔구나, 하는 느낌, 감독님이 거기서 짠, 한 느낌을 받으신 거죠.” (웃음)(주병도 미술감독과의 인터뷰) 현장에 도착해서 먼저 김성룡 제작실장에게 인사를 드렸다(아마 여러분도 이 사람을 알 것이다.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과 한판 승부하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유도사범인 마루오카 경부라면 기억이 날 것이다. 그는 이 영화 이후 제작 일을 하면서 현장에 머물렀는데, 종종 촬영 중간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끼는 것은 이 사람이 영화현장이라는 장소를 정말 사랑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한국영화의 힘은 현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내일 촬영이 38회째이며(사실 이 말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개봉예정인 이미연 감독의 <버스, 정류장>은 28회에 촬영했고, 김태균 감독의 <화산고>는 178회에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전체 분량 중 30% 정도를 마쳤다고 한다. 현장에는 진홍 역의 김여진씨가 내일 도착한다고 한다. 다시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읽다가 잠들었다. 임 감독의 눈만이 발견하는 동선의 오차 2001년 10월8일 날씨 낡음. 임권택 감독의 현장은 촬영 시작 시간 여부에 관계없이 아침 6시에 기상한다. 만일 출연자들이 많아지는 날이면 이 시간은 더 빨라진다. 연출부들은 대부분 5시면 이미 현장에 미리 도착해서 하루 일정을 점검하고, 엑스트라들의 분장을 일일이 확인한다. 오늘 장면은 장승업이 방랑하던 중 드물게도 살붙이고 살던 기생 진홍의 집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찍는 날이다. 장면 #78 진홍의 셋집(마당) (승업, 마당으로 내려서며) 승업 “개똥아 일어나. 혹부리 영감네 해장국 먹으러 가자. (대답이 없자 개똥이 방문을 열며) 이 새끼가 아직도 자빠져 자나. 야 임마. 일어나! 어라, 이게 뭐야?” (승업, 방 안으로 들어가 개똥이를 깨운다) 승업 “야 임마 일어나 봐! 누가 왔다 갔냐?” 개똥이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잤는데….” (승업, 부엌에서 일하는 진홍에게 다가가며) 승업 “이거봐, 누가 다녀갔어? (진홍 대답 없자) 누가 다녀갔어? 평산이가 다녀갔는가?” 진홍 “평산?” 승업 “그 환쟁이 놈 말이야.” 진홍 “평산이가 뭐 어쨌다고? 평산이가 뭐 어쨌다고!” 승업 (혼잣말로) “내가 한번도 안 그린 지두화를 그렸나보네.” 진홍 “그래 나 평산이랑도 붙어먹고, 기산이랑도 살았다. 기생년이 이놈 저놈 붙어산 게 그리 흉이냐? 내가 니놈하고 속궁합만 맞아서 산 줄 알아? 애들 모냥 천진스럽고 착해빠진 심성에 정 붙이고 산 거지. 그래 내가 미친년이여. 셋집까지 얻어 살림 차린 내가 미친년이다. 이 개자식, 그림 판 돈으로 판판이 마시고 돌아다녔지. 여태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야? 그 잘난 붕어 그림 달랑 하나 그려놓고는 사방 빈 벽 구석에 장롱 한짝 채워줘 봤어, 끼니 걱정돼 쌀바가지 들고 와 봤어? (시간경과) 진홍 (봇짐 싸들고 나가는 승업에게) “누가 나간다고 하면 겁낼 줄 알어, 내가? 어디 한두번 기어 나갔나? 니가? 그래, 가라 가, 겁 안 나 내가.” 임권택 감독은 진심으로 김여진씨의 연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대사를 시작하면 종종 눈감고 들어보기도 한다. 우선 임권택 감독은 장승업의 자리에 앉아서 김여진에게 대사를 시켰다. 김여진은 몰입이 빠른 배우였다. 시키자마자 잠시 눈을 감고 대사를 외운 다음 눈을 뜨더니 이미 그 순간 기생 진홍이 되어 있었다. 흥을 못 참은 그녀는 심지어 바로 임권택 감독의 멱살을 쥐어 채더니 분에 겨워 소리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감독님 얼굴에서 예의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그 다음에는 최민식씨를 세워 놓더니 진홍의 자리에 앉아서 반복해서 장승업의 연기를 시켜보았다. 두번 서로 상대의 자리에 서서 양쪽의 대사와 연기를 점검하더니 정일성 촬영감독을 돌아보면서 짧게 한마디 했다. “좋은데요.” 두 사람 사이에서 이 이상의 만족을 표현하는 다른 말은 없다. 구도는 대부분 아주 중요한 대목이 아니면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맡기는 편이었다. 대신 임권택 감독은 연기 동선을 꼼꼼하게 지적해주었다. 만일 거기서 벗어나면 어김없이 엔지를 불렀다(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약간의 오차만 벌어져도 그것을 발견하는 눈썰미였다. 얼핏 보기에비슷해 보이는데도 그것을 영락없이 찾아냈다). “동선의 결정이라, 글쎄 그건 경험에서 나오는 거라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데, 하하, 하지만 이게 중요한 거지. 감정선이 동선을 따라가고 있느냐 아니냐는 거지요. 그걸 놓치면 이 사람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잖아요? 그냥 이야기만 따라가느라 급급한 거지요.”(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그러니까 임권택 감독 영화의 화면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는 셈이다. 그 하나는 드라마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 사이의 관계에서 숏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임권택 감독의 숏은 부분적인 신이자 동시에 프레임의 역할을 한다. 역설적으로 그의 영화의 숏은 시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구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롱테이크로 찍히건, 아니면 신을 여러 개의 숏으로 나누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걸 잘라내는 순간 인물의 감정이 이야기와 연결지어져 있는 그 고정점의 위치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는 한 숏 안에서 더블액션과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히 건너뛰는) 점프컷을 섞어서 사용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감정선이다. 그의 프레임 안에서 두명 이상의 인물이 있을 때 누구의 선을 따라가느냐가 중요하다. “그건 임 감독이 결정하지요. 그럴 때 나는 꼭 임 감독에게 카메라 앵글을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가끔 내가 비어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임 감독은 그게 차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 감독은 프레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편집이 다 되어 있는 상태에서 숏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정일성 촬영감독 인터뷰) 임권택 감독은 이미 편집이 다 되어 있는 영화를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것뿐이다. 그의 영화는 실제로 연역적이다. 김여진씨의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되었다. 이 배우는 보기 드물게 롱테이크에 강한 연기자이다. 나는 안성기 선배를 다른 자리에서 인터뷰했을 때 그가 “카메라가 일분 이상 돌아가고 있으면 힘들어진다”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김여진은 반대로 대답했다. “나는 롱테이크가 편해요. 컷을 따는 것보다도 카메라는 의식 안 하면 되니까. 뭐 동선만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자유로운 거 같아요. 그냥 내 몸이나 손 발끝을 내버려두면 되니까요. 사실 카메라가 따고 들어오면 더 힘들어져요. 따고 들어오면 다시 긴장하고 그 연기를 잠깐 하고는 그걸 연결시키기 위해서 아까의 감정을 기억해야 하잖아요. 오늘 장면은 정말 힘들었어요. 감기까지 걸려서 다리가 다 후들거리더라고요. (웃음) 제일 힘든 건 클로즈업이죠. 사실 장면을 찾아가는 게 제일 힘들어요. 그 사이즈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하니까요. 나는 제일 좋은 건 풀사이즈의 연기예요. 해보는 거죠.”(김여진씨와의 인터뷰) 그녀는 롱테이크를 버틸 줄 안다. 그녀가 임상수 감독(그는 임권택 감독 연출부 문하생 출신이다)의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첫 데뷔했을 때 몇몇 장면에서 보여준 롱테이크 센스는 대단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나는 설경구의 연기보다 김여진쪽이 훨씬 진짜처럼 보였다. 바람맞다 매맞는 장면에서 그 좁은 방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그녀의 연기동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날 밤에는 장승업이 양반집에서 곽 선비에게 자기 그림에 깊이는 없고 그저 재주만이 보인다는 빈정거림을 듣고 나서 진홍의 집에 술 취한 채 돌아와 화를 내면서 잠드는 장면의 야간촬영이 있었다. 장면 # 75 진홍의 셋집(방 안) 승업 “문자향? 사서화 삼절? 좋아하시네, 니기미. 야! 제발이 꼭 붙어야 그림이냐? 그림은 그림대로 보기 좋으면 끝나는 거야. 그림이 안 되는 새끼들이 거기다 시를 쓰고 공맹을 팔아서 세인들의 눈을 속여 먹을랴구 그래. 여봐, 술이나 더 가져와!” 이 장면은 진홍의 집에서 방 안 한쪽 벽을 뜯어내고 카메라를 고정시켜서 한 장면으로 끝낼 참이었다. 제일 먼저 임권택 감독이 한 일은 어느 위치에서 이 장면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관점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회화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건축적인 의미가 더 큰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영화에서 여러 사람이 움직일 때조차 장 르누아르보다는 프리츠 랑의 흔적을 보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그 안에서 소도구를 배치했다. 번번이 소도구를 놓다가 연출부가 야단맞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이 현장에서 드문 풍경이 아니다. 그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마다 감독님은 “야, 이놈아, 넌 그렇게 놓으면 수저는 어느 손으로 들래”라고 꾸중하기도 하셨다. 임권택 감독은 소도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의 화면이 만들어내는 삶의 감각의 대부분은 여기서 배어나오는 것이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소도구조차 몇번이고 다시 놓는다. 그러고나면 연기 동선을 먼저 그은 다음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카메라의 거리를 잡았다. 그 위에 조명의 기준점을 결정한다. 드라마의 고민은 그렇게 잡힌 다음에야 시작된다(실내를 찍을 때에는 대부분 이 순서를 따르고 있었다. 예외적인 몇몇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이 순서대로 작업했다). 장면상으로는 장승업이 주도권을 쥐고 소리소리 지르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은 대번에 엔지를 불렀다. 그러더니 김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진홍이는 근데 지금 모하고 있나? 여기서 장승업이가 난리를 치고 있어도 이 신의 주인공은 진홍인 거여.” 감독님은 장승업이 내내 소리지르는 동안 진홍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몇 가지 동선을 더한 다음 지켜보았다. 슛, 사인이 들어가자 최민식씨의 술 주정이 시작되었고, 그걸 카메라로 찍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입에서 오케이! 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임권택 감독은 “아니, 아니, 잠깐” 하시더니 최민식씨에게 한마디했다. “진짜 안 같아보여.” 아무리 구도가 좋고 모든 타이밍이 맞아도 그게 가짜 같으면 임권택 영화 안에서는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이 나는 무섭다. 그건 연기를 그럴듯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렇게 훈련된 배우가 그럴듯하게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그건 최민식씨에게 왜 아직 장승업 안에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채근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왜 너는 바깥에서 서성거리냐는 나무람이다. 최민식씨 자신도 무언가 맞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하게 계속 엔지가 났다. 그걸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불현듯 이 사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민식씨는 매번 테이크가 갈 때마다 자꾸만 변해가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때로는 미세한 차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기도 하면서, 이 손으로 잡았던 것을 저 손으로 잡기도 하면서, 이미 주어진 연출의 틀 안에서 자꾸만 다른 것을 해보고 있었다. 나는 임권택 감독과 최민식씨가 그 좁은 방 안에서 만들어가는 장면이 익어갈수록 현기증이 날 만큼 부러웠다. 그건 분명히 대가가 훌륭한 연기자를 끌어안고 만들어가는 장면을 지켜보는 순간이었다.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6]

임권택 감독 인터뷰2-2001년 10월13일 안개. 새벽 안개가 쏟아지는 날 아침 일찍. <취화선>에는 이 영화의 과정을 일일이 캠코더에 담아서 영화와 함께 완성될 <메이킹 오브 ‘醉畵仙’>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내 생각에 메이킹영화의 최고걸작은 크리스 마르케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난>의 작업과정 일체를 담은 이다). 이 작업은 조선종 PD가 담고 있었다. 그는 매우 섬세한 사람인데 내가 하는 인터뷰도 메이킹 작업에 포함시켜 볼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하였다. 아마 여기서 진행된 감독님과의 인터뷰의 일부는 다시 메이킹 필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진행되었습니까. =40% 정도 나간 거 아닐까 싶은데. 느낌은 늘 그런 것처럼 시작할 때는 좀 막막하고 무엇을 하려니 막연한 것이 있어요. 그러나 지금쯤 윤곽이 드러나고, 이제는 모두들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인 것 같아요. -<춘향뎐>이 영화에서 소리를 보이게 만들려는 시도였다면, 이번 <취화선>은 멈춰 있는 그림을 움직이게 만들려는 점에서 두편 모두 불가능의 프로젝트라는 느낌입니다. 마치 대가의 실험영화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험영화라고까지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림이란 정(靜)이 아니겠습니까? 그림을 보여준다는 목적 아래 영화가 찍혀서는 백번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靜의 그림을 찍되 왜 그 그림이 보여져야 하는가, 라는 당위성을 강하게 부각시킴으로써 靜의 그림을 살아나게 해볼 수 없는가에 모든 신경을 모으고 있습니다. -장승업의 그림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이 있습니까. =노경에 들어와서 그림이 담담해지고,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어찌 보면 편안한 것 같기도 하고, 간단한 몇필로 풍경이 갖는 그림 안에 많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들이 초기 그림들보다 더 이끌리는군요. -영화는 무엇보다도 아주 구체적으로 1895년 유럽에서 발명된 기계장치잖습니까? 그리고 그 기계장치는 서구의 회화적 전통 안에서 3 대 4의 비율로 황금분할비례에 맞게 만들어진 활동사진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의 한국화 전통 안에 들여오는 것은 소리를 끌어들이는 것과는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영화는 가로잖습니까? 동양화 화폭을 담기에는 화면이 아주 불편하지요. 어차피 작품의 전모를 한컷 안에 담을 수 없는 조건 안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세부를 일일이 컷으로 나누어서 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작품이 갖고 있는 맛을 담아야 합니다. 그걸 서양화처럼 가로로 그려서는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부분부분을 나누자니 여기에도 한계가 있는 겁니다. 동양화야말로 멀리서 이렇게 보면 그 느낌이 그렇게도 좋다가 그 어떤 부분을 딱 들어가서 보면 덧칠이 없는 한획이 지나가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부분이 조악해 보이기도 하고,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그런 그림들을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지엽적인 것을 어떻게 대담하게 전체 그림의 조화 속에서 찾아가는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중간에 놓여 있는 거지요. (웃음) -시나리오는 전체적으로 드라마를 피하고 에피소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부분적으로 고칠 수 있게 느슨하다는 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이 영화의 하나의 미학인 것 같기도 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장승업이라는 화가가 살다간 일화가 몇개 없다는 게 문제요. 여자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천재였고, 이런 몇 가지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인물로 거듭나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생긴 거지요. 그런데 거기다가 무언가 드라마틱한 생을 넣으면, 어차피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것도 허구인데, 그렇게 되면 이건 꾸며진 이야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래서 나는 화가로 살면 도리없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이야기에서 장승업을 찾았어요. 굵은 드라마가 있으면, 거기에 편승해서 감독도 편하지요. (웃음) 그러나 반대로 잔잔한 일상을 찍는다면 무슨 힘으로 이 영화를 끌고 갈 것인가 생각하니 큰일난 거요. (웃음) 그런 일상을 힘있게 다루어볼 수는 없는가, 나 자신도 조금은 장승업처럼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해 거듭 몸부림치는 인간으로서 그런 것이 된다면 조금은 변신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상에 힘있게 관객이 빨려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내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힘있는 영화로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해보는 것입니다. (웃음) -장승업에 대해서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근대 한국의 입구에서 마지막 조선화의 대가였다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조선 말기 최초의 근대화를 그린 화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 드리겠습니다. 장승업은 조선 말기의 근대인이었습니까, 아니면 근대 한국의 마지막 조선인이었습니까. =나는 우선 현대까지도 영향을 끼친 화가가 장승업 선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제자들에 의해서, 아직도 그의 그림은 명맥을 지켜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승업은 한 작가로서 어떤 사명을 갖고, 무엇이 한 예술가로서 그 사람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이 사람은 조선시대에 나타난 프로라는 겁니다. 한 환쟁이로서 세상을 개혁하려든지, 아니면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치려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영화를 찍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천년 전에도 엄청난 수준으로 이루어낸 중국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넘어 보고자 한 데에 최고의 관심을 둔 화가입니다. 그는 한 환쟁이로서, 한명의 프로작가로서, 중국화 같아보이는 그림 안에서도, 그 안의 기량을 보고 있으면, 많은 것을 뛰어넘고 그 안에 있으면서도 달라진 화가입니다. 어쩌면 그걸 보고 겨우 그거야,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화를 보고 있으면 그 엄청난 테크닉도 그렇고, 그것을 흉내내서 같은 수준으로 간다는 것조차 힘에 겨운 엄청난 산입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했고, 사실상 그것을 이루어낸 사람. 나는 한국인이라는 토양,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감독님이 그려온 세계는 화가들로 따진다면 풍속화요, 또한 풍경화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풍속화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또한 감독님 영화에서 유난히 인물이 살아 있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승업은 반대로 초상화를 그리지 않은 화가입니다. 장승업의 작품은 특히 화조영모화나 기명절지화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화조나 기명절지가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될까요. =특별하다기보다 그런 것들이 장승업 주변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쪽이 자기가 능숙하게 잘해낼 수 있는 것들이 되겠지요. 산수화 부분은 따로 특별하게 관심을 갖고 있어요. 아마도 이 영화에는 장승업이 그쪽을 향해서 거듭나기 위해 애쓰는 대목이 있게 될 겁니다. -감독님의 영화 풍경은 <만다라> 이후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획을 그은 것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풍경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을 해낸 셈인데, 말하자면 영화로 근대화 이후 한국의 부서져가는 풍경 속에서 진경산수라 불릴 만한 광경을 잡아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이 오히려 감독님 영화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실 장승업은 중국 산수화의 방작을 통해 오히려 선계의 풍경이라고 할 만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지 않습니까. <취화선>에는 풍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시작이 열리는 겁니까. =여기서 나의 관심은 우리의 실경을 청년 시절과 중년과 노경 때 그 풍경이 어디로 옮겨가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실경 속에서 장승업은 어떻게 자기화시켜서 그려내는 화가인가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진경산수도 하나의 관념입니다. 이런 산을 보았는데, 이런 느낌이 옮겨와서 그런 실경이 이렇게 변해서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경이 옮겨와서 자기 안에서 작가로서 관념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우리 작품을 위해 장승업 그림을 방작하는 김선두 선생이 그려내는 그림들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장승업의 산수화가 단지 중국화의 모작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의 실경이 갖는 좋은 점을 극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승업은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의 청탁도 거절하고, 내키는 대로 살다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항상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낸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감독님이 장승업의 자료를 읽으면서 가장 납득하기 힘든 대목은 어느 부분이었습니까. =장승업이 궁궐에 불려갔던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대령화원 같은 족자도 남겨져 있고 그런 것을 보면. 하지만 내가 제일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은 장승업이 갑자기 천재가 되어서 술 마시고 만취가 되어야 그림을 그렸다는 대목이오. 그건 기량이 아무리 체화해 있어도 있기 어려운 일이지요. (웃음) 아마 그 부분에서 서로 전해져오는 이야기와 우리가 서로 접점을 찾아야 할 거요. -장승업의 그림은 그의 선대 화가들이 흑백수묵으로 그린 것과 달리 청색안료점법의 화필도 구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청색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될까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김선두 선생이랑 그 부분은 이야기중이에요. 아마 장승업에 대한 생각도 더 담아가야 할 것이고. 사실 처음에 김선두 선생도 장승업 그림에 별로 호감을 지니지 못했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러나 그이도 장승업 그림을 모사해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나는 지금 영화가 더 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오. -(나는 이쯤에 이르자 정말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던 질문을 던졌다. 처음에는 분명치 않았지만, 현장에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꾸만 내 의문에 이상한 확신 같은 것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질문이 무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이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그러니까 장승업을 우회한 감독님의 자서전은 아닙니까. =(잠시 생각하다가) 자서전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웃음) 이번에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군요. 장승업 선생이 부모를 떠나서 여러 군데를 전전하며, 화가라는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와서 작품을 해나가는 나 같은 인생과 조금씩 맞물리는 부분도 있겠지요. 아마 그런 부분 때문에 영화로 해보자는 용기를 갖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내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조감독은 번번이 찾아왔다가 물끄러미 지켜보기를 몇 차례 하더니 참 눈치도 없다고 눈총을 주면서 감독님 곁에 서서 오늘 촬영분에 관해 질문을 했다. 사실 너무 오랫동안 감독님을 잡고 있었던 셈이다. 벌써 세트장 위로 햇살이 눈부시게 비치기 시작했다. 감독님은 짧게 “이따가 시간 나면 다시 합시다”라고 말하고는 예의 뒷짐을 지고 조감독의 설명을 들으면서 스탭들 안으로 걸어들어가셨다. 나는 그 뒷모습에서 이제까지 들려주었던 장승업의 이야기가 감독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하는 그 치열한 정신, 그 안에서 자기의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면서 프로의 감독으로서 그 수많은 세월을 살아남은 이 사람의 삶은 이상하게 나의 심금을 울린다. 언젠가 감독님이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영화광으로 살아온 기억이 없는 사람이오. 영화를 한다는 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오. 그 안에서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면, 그건 내가 내 삶을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뜻인 게요.” 14개 숏으로 나눈 까닭 2001년 10월14일. 날씨 맑음. 이날은 김여진씨의 마지막 촬영이 있는 날이다. 장면은 이제 평산과 바람피우다 들통난 기생 진홍의 집을 떠나기 전에 진홍의 청으로 열폭 매화병풍을 그리는 대목이다. 장면 # 94 A 진홍의 셋집 술에 취한 승업이 술병을 들고 마루에 올라온다 승업 “야, 이년아 나와, 이년아(진홍에게 술잔을 주며) 야, 마셔, 누구였어?” 진홍 “평산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사람 기다릴 것 없이 옛날로 돌아가제. 니미럴, 팽팽한 젊은 년이 언제까지 독수공방하라고… 지놈은 돌아다니면서 별별 년들하고 놀아나면서….” 승업 (따귀 때리며) “그래 이년아, 하필이면 평산이냐…. 끝났어 이년아.” 진홍 “그래 고양이도 낯짝이 있다고 내가 너 살라고 애걸복걸할 줄 알았어?” (나가는 승업을 붙잡으며) “이대론 못 가.” 승업 “다 끝난 마당에 뭐 어쩌라고.” 진홍 “그림 한장 그리고 가.” 승업 “그래 못 그려줄 것도 없지.” 진홍 “뭐 그려주려고?” 승업 “니년한텐 화조면 감지덕지지.” 진홍 “화조? 웃기네. 기왕에 갈라서는 마당에 나도 돈 되는 그림 하나 가져야겠어.” 승업 “돈 되는 그림이 뭔데?” 진홍 “열두폭 매화병풍.” (시간경과) 승업, 마당에서 매화병풍을 그린다. 동네사람들 구경한다. 진홍, 그림 그리는 승업에게 꽃도 따서 던져보고, 빌어도 본다. 그러나 승업 그림에 열중한다. 그림을 다 그린 승업, 짐을 들고 떠난다. 혼자 남은 진홍, 눈물을 닦는다. 시나리오는 평이하지만 이 장면은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우선 드러난 어려움은 장승업을 두 사람이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민식-장승업과 김선두-장승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 사람처럼 매화병풍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최민식씨가 단순히 흉내만 내는 수준은 아니다. 실제로 붓을 잡고 이러저리 붓놀림을 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림에 전혀 문외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선두 선생도 최민식씨가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붓을 잡는 놀림새는 아주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장면인 거요. 이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무리 기생이라지만 바람피운 여자한테 그림을 그려주고 갈 수 있느냐는 거요. 그런데 그게 장승업인 거요. 게다가 영화에서 기생 진홍의 집을 떠나면서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길을 떠나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죠.”(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여기서 장승업이 그려주는 그림은 <홍백매십곡병>(<紅白梅十曲屛> 종이/담채(淡彩), 90.0cmx433.5cm)이다(만일 이 그림의 원화 도판을 보고 싶으신 분은 호암미술관에서 발간한 <사군자>(2001)의 8∼9쪽에 걸쳐 있는 그림을 찾아보면 된다. 이 페이지에는 장승업의 스승인 유숙 선생이 그린 사군자도 함께 실려 있다). 이 그림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잡은 정일성 촬영감독이 장승업 그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나는 이 그림을 이번 장승업 회고전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압도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열폭 매화병풍을 보면서 마치 그림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놀라웠다. 그런데 그 옆에는 장승업을 가르쳤던 유숙 선생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그림도 매화병풍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그렇게 여성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숙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 그림 안에 다 담겨져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시대를 같이 살아가면서 한 사람은 낙천적이었습니다. 시대가 암울하건 말건 아름다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또 한 사람, 장승업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 힘을, 그 원초적인 힘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거기에는 뿌리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그것을 찾아 힘을 갖고 찍을 생각입니다.”(정일성 촬영감독과의 인터뷰) 우선 진홍과 장승업의 대화장면을 찍고 난 다음 마당에 화선지가 펼쳐졌다. 매화병풍을 그리는 대목이다. 김선두 선생도 최민식씨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옆에서 대기하였다. “사실 그림이란 내내 펼쳐놓고 보아야 하는데 영화는 불과 몇초 만에 보여주어야 하잖아요. 그림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 불만이 있죠. 어떤 그림은 일년 내내 보아야 아는 그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게 영화의 힘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걸 내내 보여주는 대신 앞뒤를 맞춰 그 그림을 딱 보는 순간 이해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 부분에서는 임 감독님을 믿는 편입니다.”(김선두 선생과의 인터뷰) 이 장면을 임권택 감독은 우선 열다섯 숏으로 나누었다. 그리고는 전체를 연출부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시 복기하였다. 그런데 햇빛이 자꾸만 들쭉날쭉하였다(사실 양수리는 최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세트장이다. 산 속이어서 해는 늦게 떠서 일찍 저물고, 상수도 보호구역이라서 필름 현상을 할 수가 없고, 게다가 비행기 항로가 통과하는 지역이어서 수시로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에 동시녹음을 하던 이충환 녹음기사는 “이거 누가 땅 팔아먹었는지 그때 도장찍은 인간들 몽땅 영화인 이름으로 청문횟감이야!”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때 영화진흥공사 사장 도대체 누구야?). 또다른 문제는 화선지의 흰색이 조명에 심하게 반사되어서 버터플라이 조명으로 교체되었다. 이 장면은 술상을 놓는 진홍으로 시작한다. 어느 위치에서 그림을 쫓아가야 할지를 그려보면서 화선지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그 너비가 4m50cm이다) 다시 줄자로 거리를 재어본 다음 김선두 선생을 불렀다. 그리고는 붓 뒤끝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부탁했다. 김선두 선생은 처음부터 마지막 대목까지 그려나가는 순서를 화선지 위에서 반복하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그걸 카메라 뷰파인더로 일일이 따라가면서 확인하였다. 숏 2는 진홍이 마루에 앉자 장승업이 붓에 물감을 묻히는 투숏이다. 숏 3은 마스터숏을 찍었다. 이 신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상상선을 긋기 위해서는 그림과의 상대숏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병풍으로 배접하지 않은 화선지가 상대숏이 될 때 캔버스와는 달리 화선지는 땅바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진홍과의 상대숏은 각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선지의 반대방향으로 넘어갈 때 상상선의 상대숏과의 연결을 만드는 더블액션을 무엇으로 기준을 잡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숏 4의 최민식-장승업에서 숏 5의 김선두-장승업으로 넘어가는 순간 카메라의 위치를 뒤집었는데(나중에 이 영화에서 최민식씨가 연기하는 장승업과 김선두 선생이 그림 그리는 장승업을 찾는 숨은 그림 찾기도 재미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매화 그림은 위아래가 없는 일종의 추상화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뒤집혀도 그림이 뒤집히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기초. 상상선을 그을 때 자기가 나눈 대상의 성격을 따르라. 이 장면에서 임권택 감독은 숏의 논리가 실제의 논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그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김선두 선생에게 일단 그림이 시작되자 개의치 말고 계속 그림을 그리도록 하였다. 그림을 그리는 김선두 선생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림 대신 김선두 선생을 지켜보던 임권택 감독은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이미 자리를 찾은 카메라는 소란없이 그림에 몰두한 김선두-장승업을 찍었다. 그리고 숏 7에서 마당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의 등을 걸어서 찍은 다음(충무로에서 ‘나메’라고 불리는 오버숄더숏) 더블액션으로 진홍의 거동을 잡았다. 진홍이 장승업의 품을 파고들지만 장승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 장면의 앞 장면이 점프컷으로 연결된 것에 이어서 연결되는 장면은 더블액션을 걸어서 연결하였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시간의 생략과 중첩이 한 신 안에서 숏을 서로 다른 논리로 연결하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는 신 내에서 숏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숏 중에 신의 기능을 하는 숏들과 브리지 역할을 하는 숏이 동시에 이어져서 관계를 만들어낸다. 거의 엔지를 내지 않는 김여진씨가 이 장면에서 계속 엔지를 냈다. 잠시 영화의 호흡이 지체되는 것 같았다. 다소 연기가 흐트러지자 정일성 촬영감독이 용기를 북돋워주듯이 한마디 던졌다. “영화는 원래 앞부가 힘든 거야.”(앞부는 클로즈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보면 정말 클로즈업이 힘들다. 엔지도 클로즈업에서 많이 난다. 이 숏은 참 재미있다. 아주 간단하게 보이지만 아주 미세한 디테일로서 연기의 위치가 안 맞으니까 시선과 동작이 동시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걸 맞추는 건 김여진에게도 쉬워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김여진은 일분 이상 난리를 치고 마당에서 요란을 떠는 롱테이크는 단숨에 오케이를 냈다). 숏 9는 다시 아이들의 어깨를 걸어서 집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이 반복에는 시간경과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숏 10은 이제까지 없던 위치에 카메라를 세웠다. 진홍이 마당에서 그림 그리는 장승업에게 국화를 던지고 손으로 빌지만 장승업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좀더 여기서 분명해진 것은 카메라의 위치는 인물을 따라가면서 집 전체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나 집 주변을 돌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물을 놓쳐버릴 위험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계속 두 인물에 대해서 마스터숏을 기능하는 위치에서 투숏을 찍어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이 신은 그 대신 장승업과 진홍의 시점숏을 찍지 않았다(의외로 이 영화에는 시점숏이 많지 않다. 그 점은 <춘향뎐>과 반대이다). 어깨를 걸어서라도 화면 안에 POV-인물을 프레임 안에 포함시켜 넣었다. 이것은 이 영화의 하나의 미학처럼 보였다. 회화를 다루는 영화로서 이 안에서 두개의 시선 이외에 또다른 인칭 시점이 그 안에 개입하는 것을 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에드워드 브레니건은 시점숏이 항상 상대숏과 고정점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전체를 모두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추리이다. 그림 자체를 포함하는 인서트숏을 제외하고 마지막 장면은 열두 번째로 찍은 숏 14로 떠나간 장승업이 남겨놓은 매화병풍 그림 앞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진홍을 찍었다. 이 장면이 사실 가장 이상했다. 왜냐하면 불현듯 이 장면에서는 장승업이 머물던 방 안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서 화면 사이즈를 방문화프레임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전체 신에서 갑자기 원칙을 벗어나버린 듯한 카메라의 위치였다. 내가 마지막 숏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러시 시사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 가지 사족. 이 장면에서 눈길을 끈 것은 임권택 감독은 단 한 숏도 비디오 모니터로 구도를 확인하지 않고 오직 연기의 동선과 표정만을 따라가면서 연출했다. 진홍 역 김여진 인터뷰 2001년 10월14일 오후 같은 날 오후. 나는 김여진씨에게 관심이 많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갖고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촬영을 마친 그녀를 붙들고 인터뷰를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취화선>에서 당신은 주연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솔직히 말하면 시나리오를 보고 선택한 건 아니었어요. 장승업을 잘 알지도 못하고.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 뵙고, 그 인물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어요. 그 인물을 들으니 눈물이 나더라구요. 진홍에게 제일 끌린 대목은 그녀가 기생이라는 거였어요. 살림도 무지 잘한다는 말에 끌렸어요. 돈 많은 사람 밑에서 사는 기생이 아니라, 자기가 소매걷어붙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먹여살린다는 거. 그게 취미인 여자. (웃음) 전에도 그랬고, 그 다음에도 그렇게 한 세상 산 여자. 사실 진홍이가 화조 싫고 매화병풍 그려내라 하는 건 속된 마음도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더 있기를 바라는 거죠. 진홍이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삶이 응축되어 있는 거 같아요. -최민식씨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김여진씨는 연기를 패스하면 그걸 어떤 각도에서 던져도 받아줄 수 있는 연기자라고 하더군요. =너무 고마운 말이죠(정말 이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최민식씨는 내가 이 영화를 결정한 절반의 이유이죠. <파이란>을 다섯번이나 보았어요. 그러면서 그런 느낌을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분밖에 없다, 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 연기자이지만 그 영화 연기를 많이 연구했어요. 특히 그냥 주고받는 연기가 아니라 엇박도 잘 맞으니까, 호흡이 잘 맞아요. -진홍의 액션을 크게 잡아서 연기한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진홍은 집착도 강하고, 소유욕도 강하고, 울기도 잘하고, 우는 것도 엉엉 울고, 흥분하니까 손도 막 나가고, 그런 여자니까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카메라 앞에서 의상 리허설할 때였어요. 매향이가 매화 같은 아름다운 식물 같은 여자라면, 진홍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 뱀 같기도 하고, 너구리 같기도 한 동물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아주 사납고 처량하고, 가련하고,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해석을 하면서 임권택 감독님과 다른 부분이 있었나요. =사실 연기 해석을 크게 정하지는 않았어요. 느낌만 잡아놓았지요. 나머지는 감독님 말씀대로 갔어요. 원래 나는 연기를 할 때 내 해석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에요. 무엇보다도 감독님이 짜준 콘티가 재미있었어요. 감독님의 인물 연기해석은 납득할 수 있는 편이었어요. -오늘의 촬영은 영화에서도 분기점입니다. 그야말로 온 종일을 여기에 바쳤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는 진홍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진홍이가 장승업과 살면서 백년해로하고, 애도 낳고, 그런 꿈을 꾸었겠죠. 여자로서. 하지만 알고 있었을 거예요. 내 치마 폭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걸. 최악으로 헤어진 거죠. 진홍이는 헤어지고 난 다음에 매화병풍도 간직 안 하고 바로 팔아버린대요. 그러고나면 장승업은 돌아올 데가 없는 거죠. 하지만 그래야 정상에 올라가지 않을까요? 베이스 캠프가 없어야 계속 올라가는 거죠. 장승업이 떠나간 다음에 아마 평범한 남자랑 살았겠죠. 두세명 정도 더?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 남자는 장승업 그 사람뿐이다, 하고 살았을 거예요. -영화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글쎄요, 영화는 이제 덜 하고 싶어요. 사실 그동안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나 다 사양했어요. 아마 주말 드라마를 할 거 같아요. 영화는 나한테 애인 같은 거예요. 한편 한편이 오래 가요. 일년에 한편만 하고 싶어요. 양다리 걸치는 것도 싫고. 그것만 몰입하고 싶으니까, 더 신중해지죠. 그 대신 방송은 친구 같아요. 다다익선이죠. 이 사람 만나고, 저 사람 만나고, 호기심나는 대로, 훈련도 되고, 영화와는 다른 거 같아요. 내 생각에 김여진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는 감독은 운이 좋은 편이다. 영화를 애인처럼 신중하게 빠져들고 싶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연기자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풀리는 비밀 2001년 10월15일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음. 러시 필름을 보기 위해 양수리 시사실에 모였다. 그동안 촬영한 필름을 현상하여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 자리는 영화를 연출한 감독과 촬영감독에게는 사활이 걸려 있는 매우 심각한 자리이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대다수 스탭들에게는 즐거운 막간의 휴식과 같은 것이었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장을 하고 시침 뚝 떼고 나와서 연기를 하고(임권택 감독은 특별히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주변 스탭 중 누군가를 지목하여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세운다. 맨 처음에는 좀 의아하게 여겨졌는데, 오히려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 어색하게 화면 앞에서 묻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충분하게 영화에 들어와 있는 스탭들이야말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훌륭한 엑스트라들인 셈이다), 그걸 어떻게 찍었는지 세세히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영화보다는 오히려 그 장면에 묻어나는 현장의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몇 차례 시사가 있긴 했지만, 나는 이 러시 프린트를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말 흥분된 순간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지구에서 최초의 <취화선> 관객인 것이다. 러시 프린트는 소리는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순서 편집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불이 꺼지고 시사가 시작되자 스탭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문제의 장면 94의 숏 14와 마주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 장면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면의 비밀은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편집에 온전하게 담겨져 있었다. 장승업은 매화병풍 열폭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은 열한 번째 병풍을 진홍을 위해서 그려놓은 것이다. 장승업의 방 안으로 들어가, 이제 거기 없는 정인의 시선으로, 그 방 안에서 방문 틀-프레임을 이용하여 만들어낸 그 화면 사이즈는 영화의 프레임을 거절하고 온존하게 세로가 긴 한국 병풍화의 사이즈가 되어서 그 안에 눈물 흘리는 진홍의 그림이 되어주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롱테이크를 버리고, 대부분의 장면이 씬을 여러 개의 숏으로 쪼개나가면서도 결코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 가지 않고 때로는 물러서고 때로는 비켜서면서 가옥을 걸고, 돌담길을 따라가고, 주막의 기둥을 따라 펼쳐지는 것은 이 영화의 미학이었던 셈이다. 영화 프레임 안에 그림의 프레임이 걸리고, 영화 이동숏 안에 병풍의 그림이 펼쳐지면서, 기둥과 벽이 와이프처럼 화면을 수평으로 지워나갔다.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이 (형식적으로만 설명하자면) 롱테이크의 시대를 마무리하는 영화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많이 했지 않나요? (웃음) 이번은 일상을 힘있게 표현하기 위해 클로즈업이 필요한 영화입니다. 그 대신 빠진 뒤 다시 롱테이크가 됩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지요. 롱숏(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긴-길이의-숏(long length shot))가 되는 겁니다. 장승업을 어떻게 하면 이야기 안에서 아주 절묘하게 밀착되게 보이게 할까라는 고민을 담는 길이의 숏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롱테이크 대신 숏을 통해 화면을 다루면서 숏이 가는 힘을 한껏 끌어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숏 안에 신이 있는 거지요.”(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이것은 온전하게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얻어낸 한국화의 깊은 맛과의 접신의 경지가 그윽한 향기였다. 나는 그날 너무 즐거워서 밤잠을 설쳤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마법 같은 흥행돌풍

사전예매만 22만여장, 첫 주말 3일간 전국 70만명 기대, <두사부일체>도 선전 호그와트 학교에서 시작된 마법의 바람이 마침내 한국 극장가에도 불어닥쳤다. 12월14일 서울 75개를 비롯, 전국 185개의 스크린을 통해 개봉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첫날부터 대대적인 관객몰이에 나서고 있다. 13일까지 이미 사전예매 22만여장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한 이 영화는 대부분의 극장에서 거의 매회 매진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13개관 중 6개관에 이 영화를 내건 서울 메가박스의 경우, 오후 3시쯤 모든 스크린이 매진됐고, 3개관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서울극장에서도 비슷한 시간 전관, 전회가 매진됐다. 특히 14일이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가 몰고온 흥행 태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수입 및 배급사인 워너는 주말 3일 동안 서울에서만 25만∼30만명, 전국 7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날 함께 문을 연 <두사부일체>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지난주 유료시사회에서 20개의 스크린을 통해 17만4천명을 동원한 기세가 이어지는 것인지, 극장에는 관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제작사 제니스엔터테인먼트는 현재 서울 40여개, 전국 160개를 확보하고 있는 스크린 수도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어, 이번 주말에만 서울 20만, 전국 60만 관객이 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주 앞선 8일 개봉한 <화산고>는 13일까지 전국 8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지만, 14일에는 개봉작 두편이 불어대는 거센 바람에 다소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때문에 제작사 싸이더스는 주요 극장 앞에서 이동영상상영차량을 통해 이 영화의 주요 장면과 스타들의 감상평을 담은 동영상을 상영하고, 인기그룹 god를 동원한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칠 계획이다. 주말 동안 30만명 정도는 달성할 것으로 제작사는 보고 있다. 두편의 한국영화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위세에 눌리기는 했지만, 부수적인 수확도 있었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를 보러 나왔다가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이 이들 영화로 발길을 돌린 덕분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객석이 고르게 채워지고 있다. 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