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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프랑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

“나의 영화들이 겉으로 진중한 주제를 다룬다해도 영화찍는 즐거움이 그 안에 녹아들어가 관객에게 드러나기를 바란다. 꼭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구경거리가 아니더라도 인생이 힘들 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영화가 돼야한다는 걸 염두에 둔다.” `누벨바그의 어머니'로 불리는 프랑스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73)가 제3회 서울여성영화제가 마련한 `아녜스 바르다 특별전' 행사를 계기로 방한해 16일 서울 동숭동 하이퍼텍나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1962년작)에서 영화의 시간을 실제 시간과 똑같이 찍고 편집하는 등 바르다는 여러가지 형식실험으로 영화의 폭을 넓혀왔지만 국내에는 텔레비전에서 와 <행복>(1964) 등 2편이 방영됐을 뿐이다. 한국에 처음 왔다는 바르다는 “내 영화를 본 관객이 한국에 얼마나 될지 의문”이라며 “이번에 내 영화가 상영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이번 영화제에 상영되는 그의 최근작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2000)는 파리의 시장 상인들이 문을 닫고 청소부가 청소하기 전까지 시장바닥에 떨어진 곡식이나 과일들을 줍는 사람들을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이제는 정치, 철학, 사회문제 등 한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큰 주제보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가가 어떤 느낌을 나누고 연대감과 동지애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등 초기작들에 대해 “나이 들면서 갖게된 가벼움에 대한 관심이 그 영화들에는 담겨있지 않다”고 말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자 자살하고 마는 부인을 그린 <행복>에 대해서는 “행복, 사랑에 대해 당시의 틀에 박힌 사고를 깨야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직업적으로 영화를 찍기보다 뚜렷한 영감이나 강력한 동기가 있을 때만 영화를 만들며 그런 게 없다면 안찍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바르다는 “내가 새로 만드는 영화에 대해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지 말고 꼭 `최근 작품'이라고 불러달라”며 웃었다. 임범 기자isman@hani.co.kr

제4회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작 발표 [1]

<봄산에>의 이지행·<승부>의 허종호·<가리봉 슈퍼맨>의 임성운 당선 단편영화여, 날개를 달고 비상하라. 한국코닥주식회사와 <씨네21>이 공동 주관하는 ‘이스트만 단편영화제작지원제도’가 올해 네 번째 선정작을 발표했다. 선정작은 이지행 감독의 <봄산에>, 임성운 감독의 <가리봉 슈퍼맨>, 허종호 감독의 <승부>. 올해의 응모작은 모두 81편으로 지난해 92편보다 약간 줄었지만 그 열기만큼은 예년 못지않았다. 이들 출품작 가운데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6편. 당선작 3편 외에 <흉내낸 열정>(박은영), <애로영화>(김시경), <비둘기>(강만진), <아날로그>(김태균)가 최후의 순간까지 각축을 벌였다. 올해 심사위원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 정태성 부산영화제 PPP 담당 이사, 허문영 <씨네21> 팀장이 맡았다. 당선작 3편에는 코닥에서 35mm 네거티브필름 1만자(시가 650만원 상당)를 지급하며, 무비캠, 신영필름이 카메라를 무료 대여해주고, 할리우드 영화제작기술, 서울현상소, 세방현상소가 현상과 인화를 무료로 지원해준다. 또 고임표 편집실, 박곡지 편집실에서 편집을, 와이드비전, 형보제작소, 무비라인이 텔레시네 작업을, 영화진흥위원회가 사운드 작업을 50% 할인해주는 등 혜택도 준다. 이번에 당선된 작품은 완성된 뒤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출품돼 관객들을 찾아간다. 심사평 엽기보다 감동, 준비된 연출자를 찾는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좋으면 절반은 이미 결판난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하면 시나리오 다음이 아직 절반 남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시나리오만을 보고 좋은 영화의 운명을 점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 위험한 일을 기꺼이 떠맡은 까닭은 한 가지 이유뿐이다. 미래의 영화를 미리 보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유혹 때문이었다. 올해 응모한 작품은 모두 81편이었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 ‘엽기’가 압도적이었고, 그 다양함은 공포영화에서 SF영화를 거쳐 퀴어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무한정 펼쳐졌다. 그러나 재담이 넘쳐나는 반면 진지한 성찰은 사라져가고 있었으며, 포복절도의 기겁할 만한 아이디어들은 사방에 복병처럼 숨어 있었지만, 감동은 촌스러운 철지난 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결론이 나지 않아 2차 면접을 한 영화는 윤종호의 <승부>, 강만진의 <비둘기>, 박은영의 <흉내낸 열정>, 이지행의 <봄산에>, 김시경의 <愛老映畵>, 임성훈의 <가리봉 슈퍼맨>, 김태균의 <아날로그> 등 모두 7편이다. 이 영화들은 각자 다른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들의 공통적인 장점은 읽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점점 더 보는 것에 사로잡혀가는 영화들이 배워야 할 만한 점이라는 데 동의했다. 시나리오들 중 인터뷰를 통하여 선택한 기준은 연출자가 얼마만큼 준비되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영화는 무한정 기다리는 시나리오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우 어렵긴 했지만 세편의 수상작은 만장일치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내심 바라는 것은 떨어진 영화들이 걸작으로 태어나 우리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게 신나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영화 <친구> 투자·배급 김동주씨

영화 <친구>에 몰리는 사회적 관심이 대단하다. 개봉한지 3주가 채 안된 20일까지 서울 130만명, 전국 350만명이 들었다는 신기록도 신기록이거니와, 곳곳에서 이 영화의 흥행원인이 뭔지 분석을 내놓기 바쁘다. 김대중 대통령도 영화를 보고 한마디 했고, 부산시는 5월초에 범일동 등 영화에 나오는 부산시내 5개 거리를 `친구의 거리'로 지정할 예정이다. 부산출신인 곽경택 감독은 고향 친구들로부터 “부산에서 출마하면 틀림없이 당선된다”는 말을 듣고, 몇몇 국회의원들은 이 영화의 홍보 담당자들에게 다음 총선에서 홍보를 맡아달라고 주문한다. 또 조만간 텔레비전에서 유오성, 장동건씨가 함께 달리다가 헤어지면서 “친구야, 연락하자”고 말하는 내용의 휴대폰 광고가 대대적으로 방영된다. 불황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요즘 <친구>에 투자하고 배급한 코리아픽처스의 김동주 대표(36)는 가장 행복한 사람중의 하나다. <친구>는 지금까지의 흥행만 가지고도 투자원금을 제하고 100억~110억원의 순이익이 예상된다. 마케팅비용 포함해 투자된 33억원 가운데 25억원이 코리아픽처스가 운용하는 자금인 만큼, 이익을 제작사와 6대4로 나누고 그 6할을 투자자끼리 투자비율로 나누면 이 회사에 돌아오는 몫은 최소한 50억원이 넘는다. 게다가 지금의 추세라면 서울 200만명, 전국 500만명을 넘는 건 기정사실이라고 하니 돈방석은 떼논 셈이다. 흥행의 비결은 일단 영화 자체에 있겠지만, 마케팅 전략을 무시할 수 없다. “이전에 일신창투에 있을 때 곽 감독이 만든 <닥터K>의 투자 및 마케팅을 담당했다. 그때 흥행이 매우 안 좋았다. <친구>의 투자를 결정할 때 곽 감독에게 `손해만 보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영화를 70% 정도 찍었을 때 러쉬필름을 봤더니 생각이 달라졌다. 터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8억원으로 잡았던 홍보·마케팅 비용을 두배로 늘렸다.” 이에 따라 시사회를 일찍 잡고, 신문 방송사를 상대로 배우와 감독이 마라톤 인터뷰를 벌이고, 대대적인 옥외 광고를 냈다. 결국 <친구>는 개봉 전부터 여론몰이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쉬리>와 <공동경비역 JSA>, 모든 흥행 기록에 도전한다”는 건방진 카피가 관객의 또다른 흥행신화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겼다. 개봉 첫주의 흥행이 성공하자 `과연 그럴까'하는 의아심이 `정말 손님이 몰리네'하는 놀라움으로 이어지면서 더 많은 관객이 극장으로 달려갔다. 이 카피도 김 대표가 직접 썼다. “주변에서 너무 `오버'하는 게 아니냐고 주저했지만 그렇게 밀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런 감각은 어디서 나올까. “12년 영화계에 있다보니 생긴 모양이다. 나는 영화공부 한 적이 없다. 광고회사에 있을 때 `좋은 광고는 아름답던 촌스럽던 상품이 많이 팔리는 광고'라는 생각을 영화에 그대로 적용한다. 많이 보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친구>는 지금이 불황이어서 옛날을 생각할 것이고, 마침 지금의 경제주체인 386세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행이 될 것 같았다.” 김 대표는 이번 흥행에 고마운 사람으로 뜻밖에 미국의 리들리 스콧 감독을 꼽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한니발>의 수정을 요구했을 때, 한국에서 모자이크 처리해도 될 것을 그가 직접 손질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 영화 개봉이 미뤄져 <친구>과 관객을 독식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경희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광고회사에 들어갔다가 20세기폭스사, 익영영화사, 일신창투를 거쳐 지난 98년 창립한 코리아 픽처스의 대표로 스카우트됐다. 그동안 <스피드> <나홀로 집에> <접속> <퇴마록> 등 흥행작의 마케팅에 관여했고, <친구>는 코리아 픽처스에 온 뒤 <아나키스트>에 이은 두번째 투자작이다.

‘참웃음’을 주련다

영화를 시작하던 당시, 내가 손대지 않은 장르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미스터리, 액션, 멜로, 호러, 코미디 등의 다양한 장르와 국경을 넘나드는 소재의 선택은, 감독으로서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스승 홍성기의 흥행감독에 대한 압박감을 익히 봐온 터라 인기를 염두에 둔 장르 고집은 내게 없었다. 이렇듯 장르와 장르 사이를 마음껏 종횡무진하던 나를 신상옥 감독 등은 부러워하기도 했다. 첫 영화 <백련부인>(1958)에서 고고학자와 발레리나의 사랑이라는 글로벌한 소재를 택했다. 딴에는 멋을 많이 낸 듯도 하다. 누벨바그가 등장하기 전부터 카메라 워킹에 대한 진지하고도 새로운 시도를 영화 속에 반영하고자 한 나는 이 영화 <백련부인>에 그러한 실험정신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흔들리는 화면, 쓰러지는 인물과 함께 추락하는 카메라는 이전의 견고하게 고정된 화면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대단히 새롭고 또한 혁명적인 것이었다.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화면이 훌륭한 화면이던 당시, 나는 카메라와 함께 기존의 고정관념도 팽개쳤다. 그러나 살에 와닿지 않는 스토리는 일명 고무신 관객(당시의 여성관객을 낮춰 이르던 말)들의 외면을 산다. 첫 영화의 흥행 부진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신중한 소재 선택의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다음 작품 <초립동>은 따라서 지역적인 색깔을 강하게 띤다. 전라도 남원의 기생들과 소리(唱)를 소재로 택했는데, 토목기사 시절 자주 드나들던 기방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국악인 한동성의 소리와 배우 황정순의 열연 탓인지 어느 정도 관객이 들었다. 그때 전영길이라는 제작자가 나를 찾았다. 그는 방송 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던 <아빠 안녕>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해왔다. 사실 나도 탐나는 작품이었으나 제작자가 터무니없이 원작료를 깎으려 드는 통에 계약이 쉽지 않았다. 내가 중재에 나서 처음에 50만원이던 가격을 감독의 이름을 걸고 20만원까지 낮춰놨다. 그런데 제작자가 5만원을 더 깎자고 나오자 나도, 원작자도 아예 물러나 앉아버렸다. 아까운 마음에 주동진이라는 감독에게 소개를 시켰더니 그는 70만원을 주고 흔쾌히 샀더란다. 결국 이 영화는 대박이 터졌고, 기회를 놓친 제작자는 쓴 입만만 다셨다. 나중에 그가 다시 나를 찾았을 땐, 상황이 더 나빴다. 그의 손에 들린 돈은 달랑 4만원. 어디서 구했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전영길은 텔레비전을 판 돈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신춘문예 당선 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김문엽을 종로 백성여관으로 불러 시나리오를 쓰게 했다. 어떤 내용을 원하냐고 묻는 그의 말에 무심결에 “응, 청춘사업을 다룬 얘기면 좋겠는데” 했더니, 갑자기 그의 눈이 밝게 떠진다. “오야지(자신의 윗사람을 부르는 일본말), ‘청춘사업’ 그거 괜찮은데요. 아예 제목으로 쓰지요.” 자연스레 다음 작품의 이름은 <청춘사업>으로 정해진다.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궁금할 것이다. 지금은 연애라는 말 대신 청춘사업이라고 해도 척 알아듣지만, 그 당시엔 굉장히 생소하고 새로운 표현이었다. 영화가 상영된 뒤 ‘청춘사업’이라는 말은 대유행을 한다. 이 작품은 서울관객 12만명 동원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제작자들의 방문도 잦아졌다. 유호가 각본을 맡은 <주책바가지>는 코미디영화였는데, 대사가 아주 맛깔났다. 메가폰을 잡고서 단 한줄도 대사 수정없이 바로 슛이 들어간 작품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난한 뒷골목 삶을 다루면서도 은근슬쩍 웃음으로써 사회를 비판하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나는 본격적인 코미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여섯편의 작품을 끝내자 내겐 어느 정도 코미디의 본위에 대한 질문이 풀렸다. 코미디란 모름지기 ‘참웃음’을 전제로 하는데, 참웃음이란 정서적인 호소력 즉 페이소스가 강한 작품에서만 얻어진다는 것. 페이소스를 강하게 가지려면, 그 소재와 내용이 서민의 삶을 바탕으로 그들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무엇보다 ‘꿈’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배웠다. 그것은 나에게 움튼 최초의 작가정신이기도 했다. 구술 심우섭 | 영화감독·1927년생·<즐거운 청춘> <남자식모> <남자와 기생> 등 다수 연출 정리 심지현 | 객원기자 simssisi@dreamx.net

김성수 감독 인터뷰

중국에서 찍을 때 보니까 다들 고생이 심한 거 같더라. 12월 말에 촬영을 마쳤는데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어떤 생각이 들던가. 이번에는 오히려 담담했다. 4번째 작품을 찍으면서 영화 촬영 마칠 때마다 나름대로 감격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랬는데 <무사>는 마지막 촬영을 하고나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영화를 완성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촬영하는 순서만 끝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렵고 위험한 촬영도 많았기 때문에 촬영 들어가서는 그저 무사히 끝나기만 바랐는데 어쨌든 무사히 끝내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다. 엄청난 분량을 찍어 와서 편집하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30만자 필름을 텔레시네 떠서 아비드 편집기에 입력하는 데만 한달 가까이 걸렸다. 5주 동안 편집을 했는데 감독 입장에선 찍은 장면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 찍으면서 영화가 길어질 거란 예상을 해서 편집 때 잘 정리해보자 생각했는데 편집하면서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도 버리기 싫었다. 배우와 인물에 대해 너무 많은 애착이 생겼는데 2시간30분 편집본에서 그걸 충분히 묘사할 수 없는 게 마음에 걸린다. 촬영할 때랑 후반작업하는 지금이랑 비교하면 어떤가. 촬영할 때…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하루 2시간도 못 자고 하루도 안 쉬고 몇달씩 일한다는 게 미친 짓이었지만… 멋지고 즐거운 미친 짓이었다. 단편영화 찍을 때부터 <태양은 없다>까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중국에서 사방 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보니까, 그걸 그림에 담는다고 생각하니까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을 담는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흥분시키고 각성시켰다. 아침마다 현장에 갈 때 조금 떨어져서 수백명이 촬영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힘내자는 생각이 들었고 행복했다. 촬영 끝나고 함께 작업한 사람들한테 다음엔 좀 쉽게 찍을 수 있는 영화를 하겠다고 하니까 “더 쎄게 나가야지, 무슨 소리냐”고 하더라. 정말 도시의 뒷골목을 담은 청춘영화 두편을 끝내고 <무사>를 찍었는데 이번 영화가 어떤 전환점이 되는 건가. 사실은 <무사> 다음 영화가 어떤 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무사> 전에 영화 3편을 찍으면서 어느 정도 재주를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배울 게 너무 많다. 호주에서 사운드 작업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여기서 스퀴즈 작업도 한다고 하던데. 1차적인 이유는 스퀴즈 작업 때문이다. <무사>는 수퍼35mm로 찍어서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보여지는 영화인데 그러자면 화면을 압축하는 ‘스퀴즈’라 불리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스퀴즈를 하는 곳이 미국, 일본, 호주밖에 없는데 호주가 스퀴즈와 사운드 작업을 함께하기에 적합했다. 국내 사운드 기술도 지금은 대단히 좋아졌지만 다국적 프로덕션을 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중국에서 중국 스탭, 배우와 함께 찍고 일본 음악가에게 음악을 맡기고 오케스트라 연주는 바르샤바에서 하고 사운드는 호주에서 하고. 국적은 다르지만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는 프로덕션인데 배우는 게 참 많다. 음악은 일본 작곡가 사기스 시로에게 맡겼는데. 원래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을 좋아한다. 동양적인 것도 서양적인 것도 아닌 묘한 음악들이 많다. 그런 느낌을 원해서 주위에 물어보니까 사기스 시로를 추천했다. 사기스는 시나리오를 전하자마자 흔쾌히 응했고 중국 촬영현장에도 3번이나 왔다. 촬영하는 동안에도 부분적으로 편집한 클립을 계속 보여줬다. 사기스의 음악에 대해 나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는 동서양 음악을 두루 섭렵한 천재다. 단순히 음악을 만드는 재능만 있는 게 아니라 극을 해석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 <무사> 후반작업 현장 ▶ 김성수 감독 인터뷰 ▶ 사기스 시로 영화음악 프로듀서 인터뷰

`얼지마 죽지마 우리처럼 부활할거야`

이전에 영화를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한 두편 실패하면 수명이 끝나는 게 영화 감독이다. 그래서 성공한 감독들이라도 `영광'은 잠시고 항상 `언제까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충무로엔 죽다 살아난 감독이 잇따라 나온다. 박찬욱, 곽경택 감독은 전에 만든 두편의 영화가 실패해 잊혀지기 직전에 <공동경비구역 JSA>와 <친구>로 대박을 터뜨리는 기적을 만들었다. 데뷔작 <카라>가 은퇴작이 될 뻔했던 송해성 감독도 <파이란>으로 찬사를 받으며 복권에 성공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1992년 데뷔한 박찬욱(38) 감독은 <공동경비구역 JSA> 전까지 8년동안 가방에 시나리오를 대여섯편씩 넣고 제작자를 찾아 다녔다. 첫번째 시나리오가 싫다고 하면, `이건 어떠냐'며 두번째 세번째 것을 꺼냈다. 외판원처럼 이것저것 꺼내며 제작자를 만난 게 50여차례, 그리고 영화화가 결정돼 자신의 명함을 새로 찍은 게 10여차례에 이른다. 그러나 그중 실제 영화가 된 건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97년) 두 편 뿐이다. 캐스팅이 안 돼 엎어지고, 비슷한 컨셉의 영화가 나와버려서 무산되고, 회사가 망하고…. “충무로가 다 짜고서 나를 골탕먹이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약올리듯 계속 희망은 갖게 하고 그러나 되지는 않고.” <달은…>이나 <삼인조>를 보면 제작자들이 그를 꺼린 이유를 알 만하다. 장르를 교묘하게 비틀면서 B급 영화적 취향을 드러내는 그의 영화에 매력을 느꼈더라도, 흥행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영화평론과 방송 영화프로 진행으로 생계비를 벌면서 `외판원' 생활을 포기하지 않은 박 감독은 그야말로 헝그리 정신엔 투철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99년말 명필름을 찾아갔을 때, 박 감독은 이전처럼 5편의 시나리오를 차례로 내밀었다. 역시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명필름 쪽은 대신 소설 의 영화화를 제안했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를 세 번 만들려고 했었던 박 감독은 흔쾌히 승락했다. “메시지가 있는 영화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형식실험을 자제하고 관습적 어법을 충실히 따랐다. 그게 터졌다. 서울관객 250만명이라는 사상최대의 흥행기록을 세운 <공동경비…>의 박 감독이 후배들에게 하는 말. “제작자의 각본을 내가 거절한 경우도 많았다. 유혹이 없었겠는가. 하기 싫은 것, 자신 없는 것은 하지 말고 자기가 재밌어 하는 걸 만들어야 한다. 자기가 재밌으면 관객도 재밌다.” ‘친구’ 곽경택 <친구>의 곽경택(38) 감독은 `대박'의 쾌감을 맛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을 지옥 문 앞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장남으로서 의사인 아버지의 직업을 당연히 따르리라 여겨졌던 곽 감독은, 의대본과 1학년 때 “10년 이상 이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막막함”이 싫어 “단순무식하게 세계에서 가장 요란한 뉴욕 맨해튼을 택해”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다. 우연한 인연으로 뉴욕대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처음 만든 영화가 <억수탕>(97년)이었다. 평단은 호의적이었으나 흥행은 참패였다. “개봉 뒤 두달 동안 영화쪽 관계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도 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뉴욕 독립영화의 정서를 가지고 우리 관객이 아닌 뉴욕의 입맛을 겨냥한 영화를 만든 게 실패였던 것 같다.” 초조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고 이번에는 상업영화로 승부하기로 했다. 이후 서너달이 지나 내놓은 <닥터K>의 시나리오는 좋은 평가를 받았고, 연출력까지 의심받은 건 아니어서 캐스팅 이외에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여만에 내놓은 두번째 작품은 비평과 흥행 양쪽 모두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나를 믿었던 이들마저 돌아섰고, 다음 제작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낙인이 찍혔다.” 한달 정도 쉬고 곧바로 <친구> 시나리오를 쓰고는 제작사를 돌아다니니까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앞뒤 못가리는구나'하는 반응”만 돌아왔다. 이 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버지의 금전적 지원 덕분이었다고 한다. 투자사의 부도 등 3차례의 위기를 넘기고서 간신히 <친구>를 만들었다. “상업적 고민은 전혀 안했다. 그건 프로듀서의 몫이다. 매일, 오늘 찍는 게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다. 오늘 잘못하면 이 영화는 망한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기본'이 가장 중요하더라는 게 곽 감독의 결론이었다. ‘파이란’호평 송해성 송해성(37) 감독의 두번째 영화 <파이란>이 나온 뒤 `아까운 감독 하나가 묻힐 뻔했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멜로와 판타지가 두서없이 뒤섞여 무엇 하나 사주기가 힘들었던 데뷔작 <카라>(99년) 때와는 정반대다. “<카라>는 시작부터 내 영화 같지가 않았다. 제작사 쪽에서 망하게 생겼다며 주변 인맥을 총동원해 애원하는 통에 떠밀리다시피 메가폰을 잡았고, 배우들은 촬영하다 말고 텔레비전 드라마 찍으러 갔다. 투자자는 시나리오를 못 고치게 했고 겨울장면을 여름에 찍느라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배우 얼굴을 클로스업해야 했다.” 한양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충무로에 뛰어든 지 8년만에 데뷔하는 영화가 그렇게 시작됐으니 송 감독 자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내 삶, 내 미래가 암담해 보였다. 감독을 마감하더라도 내가 만들려는 영화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보여주고 마감해야 할텐데.” <카라> 개봉을 전후해 아사다 지로의 소설 <러브 레터>에서 40대 남자의 바닥인생을 접했을 때 송 감독은 눈이 번쩍 띄였다. 원래 마틴 스콜세지의 <비열한 거리>처럼 바닥인생을 다루고 싶었던 데다, 그때는 <카라>에 대한 절망감으로 자신이 이미 바닥인생의 심리를 몸소 겪고 있었다. 그가 이 소설을 각색하면서 이강재라는, 사실감 넘치는 삼류 양아치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던 건 동병상련의 결과이기도 했다. “망한 감독이 느끼는 비애는, 사람들이 믿어주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민식이형(최민식)도 시나리오 좋다고 해놓고 석 달동안 출연계약서에 도장을 안 찍었다. `날 못 믿어서 그러냐'고 다그치니까 비로소 `하자'고 했다.” 28일 개봉하는 <파이란>은 비평에는 성공했지만, 흥행은 아직 모른다. “흥행에 부담이 있지만 조금은 빚을 갚은 느낌이다. 내가 하고 싶은 영화가 이런 거라는 걸 알릴 기회는 생겼으니까.” 임범, 이성욱 기자

옛 명성이여 다시 한번

MGM, TV채널을 새로운 수입원으로 하는 등의 재기 위한 사업계획 발표 지난 10년간 침체의 늪에서 허덕였던 영화사 MGM이 올해 들어 재기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MGM은 지난 5월2일 열린 주주회의에서 TV채널을 새로운 수입원으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규모와 개성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제작한다는 등의 야심찬 사업계획을 밝혀서 눈길을 끌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레인보 미디어 산하 케이블채널을 새로운 수입원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을 공개한 일이다. 이는 8억2500만달러짜리 거대 계약으로, MGM은 브라보, 인디펜던트 필름 채널, 아메리칸 무비 클래식, 위민스 엔터테인먼트 등 레인보 미디어 산하 케이블채널의 지분 20%를 갖게 된다. 최근 십수년 동안 회사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등의 내부적인 혼란으로 야기된 만성적자에 시달리면서, 자체 보유한 4천편의 영화와 1만편 TV쇼의 방송판권 라이선스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해온 MGM으로서는,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 것이다. 레인보와의 계약으로 인해 MGM은 기존의 수입창구를 열어놓은 채로, TV채널의 시청료와 광고비용이라는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원을 보태게 된다. 이에 대해 MGM의 최고경영자 알렉스 예메니잔은 “이번 4개 채널과의 계약은 MGM의 DNA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기존 콘텐츠의 라이선스에 의지하던 시절은 끝났다”고 자신하면서, “우리는 수입원을 다양화하고 증대시킬 것이라는 비전이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MGM은 최근 몇몇 해외 TV채널을 통한 배급과 자체운영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중이다. <로이터연합>은 MGM의 이러한 사업구조 다각화 시도를 가리켜 “다양한 영상사업을 아우르는 통합 미디어 회사로 거듭나려는 야심”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MGM은 최근 수년간 부진했던 영화제작과 배급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시리즈를 제외하곤 이렇다할 히트작이 없었다가 올 봄 <한니발>과 <하트브레이커스> 등을 연속히트시킨 것이 그 신호탄. 마틴 로렌스와 대니 드 비토 주연의 코미디 <최악의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SF액션스릴러 <롤러 볼> 등이 여름 대목에 내놓을 작품들이다. 이 밖에도 오우삼 연출의 <윈드 토커스>,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리걸리 블론드>, 남북전쟁을 다룬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콜드 마운틴스>,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의 새로운 시리즈, <핑크 팬더의 탄생> 등이 개봉 대기작으로 줄지어 서 있다. 배우파업이 시작되는 7월1일까지 제작 완성될 작품만 18편이라 2002년까지의 라인업은 “파업 여부와 무관하게” 안정적인 편이다. 엄선된 저예산 인디 프로젝트를 자회사인 UA를 통해 내놓을 계획도 있다. MGM은 10년 가까이 거듭된 재정난과 흥행참패로 한때 문을 닫을 위기에도 처했었다. 80년대 중반 당시 사주였던 커크 커코리안이 언론재벌 테드 터너, 로리마 텔레픽처스, 이탈리아 복합기업체와 프랑스 은행 등에 돌려가며 회사를 팔았다가 되사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불안해지고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 것. 그러던 MGM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새 경영진의 등장과 긴축재정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메이저 스튜디오로서는 최저에 가까운 비용(수익의 10.6%)을 간접비와 배급비로 할당하는 등 알뜰한 살림을 꾸려왔다. 또한 미라맥스와 <셰익스피어 인 러브>를 공동 제작한 뒤, 8편의 영화를 추가 공동 제작하기로 합의하는 등 미라맥스의 저예산영화 제작 노하우와 마케팅 노하우를 배우려 노력해왔다. 오는 2003년에는 폭스사가 있는 센추리시티로 회사를 옮길 계획. 이 여세를 몰아 MGM이 옛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은영 기자

영화를 찍는 방학만 계속되었다면

“안 시뤼는 1966년에 서른살의 나이로 죽었다. 도미니크는 서른살에 죽었다. 편집 보조를 하던 피에르 루이도 서른살에 죽었다. 78년 3월28일 미셸이 사라졌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나는 81년 그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로맹 구필(Romain Goupil·50) 감독은 ‘밀리탕트’였다. 그는 1968년 5월 시위현장의 한가운데 있었다. 전투적인 사회주의 조직인 고등학생전국연맹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선동가이기 전 영화 찍기를 사랑한 영화제작광이었다. 각종 시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참여했지만 틈틈이 자신의 친구이자 혁명적 동지인 미셸을 클로즈업한 영화를 찍기도 했다. 휴가를 가도 카메라는 있었고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현장에도 카메라는 동행했다. 그가 카메라를 든 건 64년, 그의 나이 14살 때였다. 같은 동네 친구였던 코요테, 밥티스트와 놀다가 생각해낸 게 영화였다. 모자라는 건 돈뿐이었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방학만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하고자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테>를 파는 일뿐이었다. 15살 때 독재자 프랑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찍기 위해 스페인에 가기도 했다. 스페인 촬영을 끝냈더니 필름이 몇자 남았다. 그는 화장지를 사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장면을 찍었고 그것을 배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화장지를 던지고 받는 사람들의 컷과 연결했다. 그 짤막한 영화는 예상치 않은 결과를 얻었다. 전국 규모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텔레비전에서 그것을 방영하게 된 것이다. 관례상 그를 추천해줄 ‘대부’격인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고다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턱대고 편지를 썼다. ‘당신이 해줘야만 나의 필름이 방송됩니다.’ 고다르에게 편지가 왔다. 며칠 몇시냐. 그날 방송사에는 고다르가 와 있었다. 우연하게도 방송사에는 스페인 대사 또한 자리하고 있었다. 편집된 필름 자체는 전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어린 감독은 정치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고다르는 맞장구를 쳤고 소개 자리는 스페인 성토의 자리가 되었다. 결국 이 대화내용은 방송을 타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우화지만 “어머니는 무척 실망했다”. 고다르와의 인연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만든 다큐멘터리 <독일 영년>(Allemagne Annee 90 Neuf Zero)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나는 사랑도 하지 못하고 웃지도 못했다.” 그는 전국조직의 의장을 지냈던 미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동안 찍었던 필름을 꺼냈다. 미셸이 그리고 자기 자신이 들어 있는 기록필름을 찾았다. 그리고 미셸을, 68년 5월을 회상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미셸이 자신의 심정을 적은 일기에는 한 소녀를 사랑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마음이 나와 있다. 짝사랑한 소녀는 미셸을 회상한다. “나는 그를 짝사랑했지만 그는 그런 것에 관심없는 듯했고, 그리고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서른살의 죽음>(Mourir a(`를 위에 찍어주세요) Trente Ans)은 애도의 정으로 만든 영화다.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배급은 어떻게 할까라는 고려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 영화 만들기를 막지 못했을 것만 같은 절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맨 처음 미셸의 어머니와 형님에게 보여주었다. ‘당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82년 칸에 출품된 영화는 황금촬영상(Prix de la camera d’or)을 받았다. 20년이 지난 2001년 <서른살의 죽음>은 전주영화제 포스트68섹션에 초대되었다. 상영 초반 필름이 찢어졌고 상영이 취소되었다. 밤 12시에 마련된 무료영화 상영회에는 찢어진 필름 대신 비디오를 틀어야 했다. “감독은 절대로 메시지를 전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그 메시지를 받아들여서 행동을 취하도록 하는 영화는 끔찍하다.” <인터내셔널가>가 내내 울려퍼지는 집회의 절정에서도 영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풍긴다. 그는 이후 (Lettre pour L…, 1994), 칸에 출품하기도 한 <죽음에 죽음>(A Mort la Mort, 1999)와 TV를 위한 다큐멘터리 등을 만들었다. 그는 <서른살의 죽음>이 상영된 뒤 관객과의 대화 도중에 화장실이 급하다면서 뛰쳐나갔다. 그가 8∼9월에 촬영을 시작하는 영화는 <서른살의 죽음>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다. 이제 50대가 된 밥티스트와 코요테가 나오고 장난끼와 사회에 대한 시각을 다시금 어울리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아마 어느 감독이 전주영화제에 왔다가 소변이 보고 싶어 극장을 뛰쳐나가는 장면이 나올 것이다.” 글 구둘래| 객원기자 사진 이혜정 기자

다시 웃고싶다!

며칠 전 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영화를 빌려다 보았습니다. 전설적인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말고 레슬리 닐슨의 최신작인 말입니다. 영화는 어땠냐고요? 슬픈 영화였습니다. 보면서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이더군요. 반은 영화가 지루해서 하품하다 고인 것이었지만 나머지 반은 정말 슬퍼서였습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재미있던 장르가 이처럼 퇴물이 되다니 슬프더군요. 는 20년 전 <에어플레인>으로 포문을 열었던 스푸프(spoof) 코미디의 처참한 잔해입니다. <롱풀리 어큐즈드>나 <스파이 하드>가 바닥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80년 <에어플레인>이 개봉되었을 때에는 아무도 이런 결말을 예측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긴 이런 영화가 장르화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때를 기억하냐고요? 아뇨, 기억 못합니다. 국내 개봉된 것 같지도 않고요. 하지만 우연히 KBS2TV에서 <에어플레인> 시리즈를 연속적으로 방영했을 때 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억납니다. 그걸 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너무 웃어서 뇌가 콧구멍으로 쏟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뒤로 영화 보면서 그처럼 웃어댔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한번 더 있었습니다. 역시 ZAZ 사단의 작품이었던 <일급 비밀>을 보면서 거의 그랬었지요. 요새 어린 관객은 <에어플레인>을 처음 보아도 제가 그 시리즈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요란하게 웃어대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에어플레인>의 농담이 닳은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에어플레인>은 여전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적어도 <롱풀리 어큐즈드> <스파이 하드> <치킨 파크> <햄들의 침묵> 따위보다는 훨씬 웃기는 영화지요. 그리고 그뒤에 ZAZ 사단 사람들이 만든 <못말리는 비행사>나 <못말리는 람보> <총알탄 사나이 3>보다도 웃기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더이상 사람들은 <에어플레인>을 보면서 뇌가 쏟아질 정도로 웃지는 않습니다. 그동안 ZAZ 사단의 영화들은 서서히 장르화돼갔고 사람들은 그 유머에 익숙해졌습니다. 슬픈 것은 최근 관객이 이런 유머를 ZAZ 패거리들이 한창 물올랐던 때 만들었던 영화들로부터 직접 전해받지 않고 서너번 건너오다 김이 빠진 삼류를 통해 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오리지널 영화를 보기도 전에 그 유머에 질려버리고 말았지요. 잘 나오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붙잡고 정신없이 웃어대며 <에어플레인> 시리즈를 보던 전 얼마나 운이 좋았던지요. 그러고보면 ZAZ 사단의 농담들은 참 수명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유머가 수준낮은 것이었다는 건 아닙니다. 원래 자극적인 것들은 쉽게 닳으니까요. 하지만 ZAZ 사단의 농담들이 그냥 사라진 것들은 아닙니다. 그들의 영화를 통해 관객은 그 자극에 면역이 되었습니다. 그게 꼭 발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관객을 바꾼 건 분명했어요. 80년대 관객에게 <에어플레인>이 주었던 정신없는 충격을 2000년대 관객에게 제공할 영화가 나오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모르지만 꽤 오래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