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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프랑스의 히치콕’ 클로드 샤브롤 회고전

13~26일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 대표작 15편 상영, 누벨바그 감독중 가장 장르적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 가운데 가장 장르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클로드 샤브롤(73)의 대표작 15편을 상영하는 ‘클로드 샤브롤 회고전’이 동숭아트센터와 시네마테크부산 공동 주최로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극장에서 열린다. 부르주아 사회·가족 안의 욕망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헤집고 파고들어 ‘프랑스의 히치콕’이라고도 불렸던 샤브롤의 영화는, 누벨 바그 감독들 가운데 그 형식이 가장 쉽고 친숙한 편이다. 샤브롤의 영화들이 인간을 관찰하는 시각은 간단치 않지만, 그럼에도 대중들이 가깝게 다가가서 재밌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는 관심을 끈다. 그 내용도, 사소한 일상에까지 계급이라는 문제를 끌어들여 다루기 때문에 영화광이 아닌 이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샤브롤은 고다르, 트뤼포 등 누벨바그 주도자들과 함께 프랑스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활동하다가, 멤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영화를 찍었고(58년작 〈미남 세르주〉) 영화도 찬사를 받았지만 1960년대를 거치며 주목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엔 그가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찍어오면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보다 형식실험을 덜 했던 점도 한몫 거들었다. 전형적인 삼각관계에 스릴러를 접목시킨 68년작 〈암사슴〉부터 다시 작가적인 목소리를 담기 시작하면서 전성기를 맞다가 70년대 중반 잇단 흥행실패로 궁지에 몰려 텔레비전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침없이 지금까지 45년간 50편을 찍어온 샤브롤은, 90년대 들어서면서 ‘샤브롤식 스릴러’로 불리는 그만의 영화세계를 인정받으며 거장의 입지를 굳혔다. 그 정점에서 샤브롤은 부르주아 가정에 들어온 문맹의 하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살인극 〈의식〉(95년)을 내놓는다. 갈등은 분명히 계급적이지만, 인물들의 동인과 그 결과는 계급적인 관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이 영화는 〈카이에 뒤 시네마〉로부터 ‘오랜만에 나온 가장 위대한 프랑스 영화’라는 격찬을 받았다. 상영작은 〈미남 세르주〉 〈암사슴〉 〈의식〉을 비롯해 〈사촌들〉(59년), 〈부정한 여인〉(69), 〈야수는 죽어야 한다〉(69), 〈도살자〉(69), 〈파멸〉(70), 〈붉은 결혼식〉(73), 〈닭초절임〉(85), 〈여자이야기〉(88), 〈마담 보봐리〉(91) 등이다. 서울 상영에 이어 내년 1월3일부터 18일까지 부산시 시네마테크부산에서도 상영한다. 예매 및 문의는 하이퍼텍나다 극장 (02)766-3390(교환 293,294), www.dsartcenter.co.kr, 시네마테크 부산 (051)742-5377, www.piff.org/cinema 임범 기자

영화사신문 제25호(1960∼1961)

영화사신문 제25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 · 발행 씨네21 · 편집인 김재희 1960 ~ 1961 <싸이코> 영화미학의 새 장 샤워실 살인장면, `감각의 시대' 문 열어 충격적인 샤워실 살인장면을 선보인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1960)가 할리우드 영화미학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을 얻고 있다. 평론가들은 과도할 정도로 쇼킹하고 센세이셔널한 샤워실 살인장면에 주목하며, “<싸이코>는 20세기 말의 주류 영화미학이 될 만한 것의 도래를 상징하는 영화”라고 입을 모았다. 이제 기존의 할리우드영화를 특징지웠던 “정서의 영화”(cinema of sentiment)로부터 독립해 성장하기 시작한 “감각의 영화”(cinema of sensation)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은 히치콕의 <싸이코>가 관객 내부에 본능적으로 잠재해 있는 “영화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확립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프랑스의 뉴웨이브 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싸이코>는 영화관객의 새로운 세대를 겨냥한, 본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미학의 영화”라고 극찬했다. 그는 영화의 역사를 두동강낼 만큼 획기적인 영화로 <싸이코>를 지목하고, 바로 그 순간으로 여주인공 마리온 크레인(재닛 리)이 칼에 난자, 살해되는 모텔 샤워장면을 꼽았다. 이 장면은 내러티브에 우선순위를 두는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규칙을 깨는 것으로, 무엇보다 센세이션(감각)을 위해 고안된 장면이라는 것이다. 영화계가 주목한 <싸이코>의 또 다른 특기할 만한 점은 비일상적인 드라마적 장치이다. 영화 중반 이전에 여주인공을 심술궂게 살해해버리는 전복적인 플롯은 샤워실 장면이 창조해낸 강력하고 새로운 시각적 미학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이러한 <싸이코>의 줄거리 구성은 고전적 할리우드영화의 전통적 가치를 전복시킬 만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 할리우드의 베테랑 감독인 히치콕은 자신이 만든 첫 공포영화인 <싸이코>의 흥행성적에 몹시 안달해한다고 전해진다.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시네마베리테 등 反상업화 운동 봇물 영화의 주류를 바꿔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6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세계 곳곳에서 상업영화에 반발하는 영화인들의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 ‘시네마베리테운동’ 등의 형태로 할리우드를 대표로 한 기존 영화계에 ‘도발’을 시도하고 있다. 60년 9월 요나스 메카스, 셜리 클라크를 비롯한 뉴욕의 독립영화 감독·제작자들이 ‘뉴아메리칸시네마그룹’을 결성하고 기존의 영화를 “허위가 가득하고 호화로운 영화들”이라고 공격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는 더이상 장밋빛 영화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핏빛 영화를 원한다”라며 “거칠고 못 만들었어도,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토로했다. 앤디 워홀 등 전위적인 예술가들도 이 그룹에 가담했다. 프랑스의 뉴웨이브, 영국의 프리시네마운동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훨씬 대담한 이들은 주제와 테크닉 면에서 상업영화와 차별화되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리투아니아 출신인 메카스는 16mm 실험영화를 다수 제작하면서, 1956년엔 <필름 컬처>(Film Culture)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어 61년 프랑스에서는 장 루슈가 사회학자 에드거 모랭과 함께 영화 <어느 여름의 연대기>를 내놓으며 ‘시네마베리테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들은 극적 구성을 피하는 대신, 렌즈의 기록성을 최대한 살려 현실 속에서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려는 시도를 했다. 또 인터뷰 형식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였다. <어느 여름의 연대기>는 영화 도입부에서 이 영화가 “시네마베리테(cinema verite)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라고 명백히 하고 있다. 영화계의 이같은 사회참여적이고 운동적인 성향은 멀리 일본에서도 ‘새로운 물결’이란 이름으로 함께 나타났다. 오시마 나기사는 60년, ‘미-일 안보조약’(Ampo)에 대한 좌파 학생들의 투쟁을 가차없이 비판한 <일본에서의 밤과 안개>를 만들어 개봉했지만, 즉각 상영 중단됐다. 또 이마무라 쇼헤이는 61년 <돼지와 군함>을 통해 날카로운 정치·사회 비판을 보였다. 주제:할리우드 영토확장 러시 TV명화 제작·기내 상영 등 새로운 수익원 창출 나서 TV 등 새로운 매체에 당하고만 있던 할리우드의 역공이 시작됐다. 60년대 들어 뉴미디어들을 영화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할리우드는 이제 ‘영화=극장에서’란 도식을 무너뜨리며, 안방으로 항공기로 ‘상영관’을 넓히고 있다. 61년 9월 에 <토요일 밤을 명화와 함께>(Saturday Night at the Movies)란 프로그램이 첫선을 보였다. 주요 시간대에 영화시리즈 프로그램이 편성된 첫 케이스로, TV를 통해 할리우드영화를 감상하는 새로운 유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란 분석이다. 첫선을 보인 <토요일 밤을…>을 장식하게 된 영화는 와이드스크린 코미디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이다. 앞서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텔레비전 쇼를 제작해오고 있다. 대규모 스튜디오의 영화제작이 감소한 탓이다. 이들 스튜디오들은 또 극장 상영과 텔레비전 방송에 둘 다 쓰일 수 있는 독립영화 제작에 필요한 제작시설을 대여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황금시간대 TV 진출에 앞서 할리우드영화는, 항공기를 새로운 영화상영 매체로 끌어들였다. 61년 7월 TWA 에어라인은 퍼스트 클라스 승객을 대상으로 영화상영을 시작했다. 비행 중(in-flight) 상영이 정규화되기는 TWA가 첫 시도였다. 미국의 영화제작사들은 이 밖에도 음반, 출판 등 다른 엔터테인먼트 분야로 영화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노력에 이미 착수했다. 진짜 사나이 사라지다 클라크 게이블 심장마비, 유작은 카우보이 역할 “완전한 남성성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배우는 이 세상에 딱 한명뿐이다. 바로 클라크 게이블이다.” 클라크 게이블의 마지막 영화였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The Misfits, 1960)의 제작자였던 프랭크 테일러는 그를 남성성의 상징으로 치켜세웠다. 이 영화의 각본을 썼던 극작가 아서 밀러도 그가 만났던 배우들에 대해 언급하며 클라크 게이블에게 “유일한 진짜 사나이”란 호칭을 선사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영화로 뭇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클라크 게이블이 1960년 11월16일 세상을 떴다. 향년 60살. 그는 죽기 직전까지 배우의 길을 걸었다.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가 죽던 해 찍은 영화. 존 휴스턴 감독의 연출로 마릴린 먼로와 함께 출연했던 이 영화에서 그는 나이를 잊고 스턴트 연기를 직접 했다. 나이 든 카우보이 역할이었는데, 노익장을 과시했지만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는 촬영을 마치고 나흘 뒤 심장마비로 쓰러져 열흘 만에 숨을 거뒀다. 5개월 뒤 그의 늦둥이 아들 존 클라크 게이블이 태어났다. 39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사나이 연기’의 전형으로 통한다. 남북전쟁으로 인한 피폐한 환경을 뚝심으로 이겨나가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지의 위력을 보여줬다. 앞서 35년 <어느날 밤에 생긴 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부터 그는 이미 할리우드의 왕자였다. 훤칠한 체격에 막힘없는 성격의 그를 보며 여성관객은 주저하지 않고 ‘할리우드 제1의 성적 매력을 가진 남자배우’란 호칭을 주었다. 많은 이들에게 칭송받는 그의 남성성은 영화계 입문하기 이전 벌목공, 유전의 인부, 농부, 그리고 영업사원 등으로 활동했던 그의 선 굵은 이력을 보면 수긍이 간다. 지방 극단의 단원으로 연기를 시작, 할리우드에서 갱(gang) 연기를 통해 영화계의 제왕으로 떠올랐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외에 <바운티호의 반란>(1935), <모감보>(1953),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1960)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블랙리스트 무용지물, 대부분 가명으로 활동 1960년대 들어, 1950년대의 악명 높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많은 감독들이 강제로 해외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배우들은 은퇴를 하거나 연극으로 방향을 돌린 반면,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익명이나 가명으로 일을 계속했다. 그래서 “할리우드 10대 작가” 중 한명인 달튼 트롬보는 두개의 신작영화의 작가로 크레딧에 올랐는데, 하나는 유니버설이 제작한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스팔타커스>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가 제작한 오토 프레밍거의 <영광의 탈출>이다. 재미있는 것은 <더 브레이브 원>(The Brave One)으로 1956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로버트 리치는 트롬보의 필명에 다름 아니며, <콰이강의 다리>로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불이 수상한 것으로 알려진 1957년 아카데미 각본상은 사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국에 망명 중인 칼 포맨과 마이클 윌슨이 공동 원작자라는 사실이다. 화제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 헨드헬드·점프컷 신기술 등장 장 뤽 고다르의 첫 장편영화 <네 멋대로 해라>(Breathless, 1960)가 개봉과 동시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할리우드 B급영화의 산실인 모노그램픽처스에 헌정하는 이 영화는 젊은 자동차 도둑(장 폴 벨몽도)이 경찰을 살해하고 미국인 여자친구(장 세베르)와 도주를 한다는 스토리. 플롯은 관습적이지만, 시나리오는 정반대이다. 미국 갱스터영화의 직접성과 경제주의를 영화 속에 다시 구현하고자, 고다르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촬영기사 라울 쿠타르도 종종 기용하면서 핸드헬드 카메라와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했다. 또 전통적인 구축숏(establishing shots)을 생략하는 과감한 점프컷(jump cuts)도 사용했다. 고다르는 배우에게 큐사인과 동시에 펼쳐지는 즉흥연기를 요구했고, 영화 찍는 내내 연기동선을 익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무정부주의자 벨몽도와 매혹적인 세베르가 보여주는 유례없이 신선한 연기는 영화제목(breathless)처럼 관객을 숨막히게 했다고. 르네 클레망, 뉴웨이브 합류 르네 클레망은 신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에서 젊은 날의 고뇌가 팽만한 시대정신을 포착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뉴웨이브(New Wave) 시나리오 작가인 폴 제고프가 각색을, 뉴웨이브 스타일에 공을 세운 뛰어난 촬영기사 앙리 드케가 촬영을 맡았다. 1940년대를 풍미했던 할리우드 B급영화의 음울한 정취를 떠오르게 하는, 태양빛에 잘 그을린 필름누아르인 <태양은 가득히>. 이 영화에서 24살난 알랭 들롱은 엄청난 부와 사랑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결국은 파멸하는 주인공 톰 리플리 역을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문제적 청년 톰 리플리는 친구 필립(모리스 로네)을 속여 돈을 갈취하고, 그를 죽인 뒤 그의 여자친구 마리 라포레를 자기 여자로 만든 다음, 죽은 친구의 행세를 하는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이다. 하이스미스의 소설 원제는 <자줏빛 정오>(Purple Noon). “명작을 몰라보다니” <피핑 톰> 평단 혹평 영국 합작 공포영화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마이클 파웰의 신작 <피핑 톰>(1960)이 평단의 혹평을 받고 있다. 정신병에 걸려 여자들을 살해하는 젊은 영화 촬영기사 역으로 칼 봄이, 그의 타깃이 되는 발레리나 역에 모이라 시어러가 각각 열연했다. 16mm 카메라로 타깃이 되는 여인들을 훔쳐보며 카메라의 삼각대 다리로 희생자들을 찌르는 엽기적 행각을 보여주는 <피핑 톰>은 많은 이들을 곤혹스럽게 할 만큼 추악하면서도 대담하고 놀라운 영화다. 파웰 자신이 봄의 아버지 역을 맡아, 고의로 자기 아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 그의 반응을 촬영하는 심리학자로 출연한다. 더 나아가 영화 속 아이는 파웰의 아들 콜롬비아가 직접 연기했다. 한 분노한 평론가는 “한마디로 <피핑 톰>은 수세식 변기로 씻어내려버려야 마땅한 영화”라고 평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블랙유머, 그리고 파웰의 주된 관심사인 인생과 예술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치밀한 탐구는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흔치 않은 미덕으로 그를 논쟁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영화사신문 제26호(1961∼1963)

영화사신문 제26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62 ∼ 1963 <만주인 포로> “케네디, 미안하오” 케네디 암살 사건에 책임느껴 영화상영 중단 1963년 말, 존 F. 케네디의 죽음이 <만주인 포로>의 ‘실종’을 불러왔다. <만주인 포로>가 11월23일 케네디 암살 사건 직후 극장가에서 사라졌다. 케네디가 사망하자 배급사가 일종의 ‘책임’을 느끼고 영화 상영을 중단한 것이다. 개봉한 지 1년이 지난 영화가 새삼 문제가 된 것은 <만주인 포로>가 대통령의 암살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존 프랑켄하이머 감독의 <만주인 포로>는 6·25 전쟁에 참전하고 귀향한 미군들이 겪는 고통을 그린 영화. 주인공인 마르코와 쇼는 참전 당시 북한군의 포로로 잡혀 공산주의 사상을 세뇌받았다. 그때 겪은 고문으로 악몽에 사로잡힌 마르코는 공산주의자들이 쇼에게 동료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도록 세뇌시켰다고 믿게 된다. 케네디 사망 뒤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여기, 곧 영화에 대통령의 암살이 언듭되고 있는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은 그 내용의 민감함 때문에 영화제작 전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사 대표 아서 크림은 거듭해서 시나리오상의 이 부분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영화의 주연배우이자 제작자인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까운 사이였던 케네디를 직접 찾아가, 원래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케네디 사망 이전에도 <만주인 포로>는 1962년 시사회 직후 이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이 영화가 상대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곧 공산당이 발행하는 <민중의 세상>은 <만주인 포로>가 “미-소간의 긴장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가장 악랄한 시도”라며 이 영화에 “독약”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반면, 가톨릭 비평가인 윌리엄 무어링은 좌익 프로파간다를 숨긴 영화라고 쏘아붙였다. 또한 남부 캘리포니아의 재향군인회는 “<만주인 포로>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영화산업에 스며들었다는 증거”라며 “HUAC는 할리우드를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념의 대립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한 극장에서 <만주인 포로>가 개봉하던 날 극명하게 드러났다. 곧 이날, 극장 앞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반공산주의자들이 나란히 서서 피켓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됐던 것이다. “관습·구속으로부터 자유” 독일 오버하우젠영화제 “새로운 영화 창조” 선포 1962년 2월28일 독일 오버하우젠영화제에 모인 26명의 젊은 영화인들이 낡은 영화의 죽음을 알리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상업적인 독일 영화산업의 붕괴로 영화제작의 경제적 기초가 옮겨가고 있다”라며 “그 결과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들은 “우리는 기존 산업에 만연된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적 배려에서 나온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바탕으로 새로운 독일영화를 만들 수 있는 내용과 형식과 경제적 구조에 대하여 구체적 논리를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날 선언에 참가한 영화인들은 주로 단편영화 감독들. 아직 장편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은 그러나, 단편영화로 지난 몇년간 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고 비평가들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이러한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었다. 이들은 “이러한 성공은 독일영화의 장래가 새 영화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라고 자신했다. 젊은 영화인들은 선언문 발표 이전 여러 차례 한자리에 모여 독일영화의 현재와 미래 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러한 연대감을 바탕으로 이들은 장편영화에서도 새로운 독일영화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선언문은 “낡은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 것을 신봉한다”로 끝난다. 미국 ‘멀티플렉스’ 탄생 미국 극장가에 ‘멀티플렉스’가 등장했다. 1963년 스탠리 H. 더우드는 미조리주 캔사스시티에 있는 쇼핑센터 안에 두개의 작은 상영관을 가진 극장을 오픈했다. 이로써 관객은 쇼핑과 영화관람을 동시에 할 수 있게 됐다. 복합관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사실, 쇼핑센터 극장은 1960년대 초부터 미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영화잡지인 <박스오피스>는 1961년 쇼핑센터 극장을 “영화계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라고 평했다. 쇼핑센터 극장은 몇 가지 점에서 기존 극장사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곧 도심 안에 있는 극장들은 너무 낡아 철거해야 할 형편이었고, 드라이브 인 극장은 교외의 땅값 상승으로 새로 극장을 여는 데 돈이 많이 들었다. 반면 쇼핑센터 극장은 극장건물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관객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한편, 스탠리 더우드는 얼마 전 문을 연 멀티플렉스가 일단 성공했다고 보고, 앞으로 AMC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설립해 다른 지역으로 멀티플렉스를 확장할 예정이다. 니콜라스 레이 ‘불행의 반전’ <북경에서의 55일> 흥행참패로 할리우드 등돌려 “그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 영화관에 가지마라, 더이상 영화를 보지마라. 그런 사람은 좋은 영화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감독’에 대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상찬이다. 그런데 요즘 이 감독, 실의에 빠져 마약과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다시는 할리우드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다시는 영화를 만들지 못하리라는 절망감 탓이다. 니콜라스 레이가 바로 ‘이 감독’이다. 니콜라스 레이는 ‘뛰어난 감독’으로 통했다. 특히 유럽의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에 열광했다. 그럴 만도 했다. 데뷔작인 <그들은 밤에 산다> 이후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며 잇따라 성공작을 내놓았으니까. B급 필름누아르인 <그들은…> <외로운 곳에서>, 변주된 서부영화인 <쟈니 기타>,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알린 <이유없는 반항>, 그리고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 페레둔 오뵈다로부터 레이의 최고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1958년작 <파티 걸>까지, 그의 영화 대부분이 뛰어난 미학적 성취를 보였고 그 덕에 언제나 비평적인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60년대 들어 대규모 시대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의 영화인생은 ‘불행의 반전’을 맞게 된다. <왕중왕> <북경에서의 55일>의 잇단 흥행실패가 문제였는데, 그중 결정타가 된 건 1963년작 <북경에서의 55일>이었다. 이 영화의 실패 이후 그는 사실상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다. 그가 연출하기로 되어있던 영화들은 다른 감독들에게 넘어갔다. <북경에서의 55일>은 무려 1700만달러가 들어간 대작 프로젝트. <아라비아의 로렌스>보다 200만달러가 더 들어갔다. 레이는 이 영화를 찍기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 교외에 1900년대의 베이징을 통째로 재현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영화를 촬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수만명의 중국인 엑스트라들을 그곳으로 불러모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해 레이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장 뤽 고다르 인터뷰글쓰기도 영화를 만드는 한가지 방법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놀라웠다. 비평가였던 장 뤽 고다르는 이 한편의 영화로 그때까지 데뷔한 수십명의 신인감독들을 제치고 단숨에 누벨바그의 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해마다 새로운 실험물들을 내놓고 있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1962년 11월 고다르를 만났다. 비평가, 감독이기에 앞서 영화광인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살다’(live the cinema)라는 표현을 여러 번 입에 올렸다. 비평가로서의 경험이 영화를 만드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미래의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는 영화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였다. 글쓰기와 연출, 그 사이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 중에 유일하게 100% 비평가는 앙드레 바쟁뿐이었다. 비평가 시절 나는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나는 에세이스트이다. 예전에는 글을 썼던 거고 지금은 영화를 만든다. 혹여 영화가 사라진다면 나는 텔레비전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이 사라진다면 종이와 연필로 되돌아갈 것이다. 모든 형태의 표현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이다. 처음 영화를 만들었을 때, 영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나. 우리의 데뷔작들은 모두 시네필의 영화다. 우리는 영화를 만들 때 이미 영화에서 보았던 것을 참조한다. 그건 순수하게 영화적인 태도였다. 촬영을 하면서 프레밍거, 쿠커 영화의 장면을 기억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인용했다. 그러면 안 될 이유가 있는가.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인용한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인용할 권리가 있다. 누벨바그의 꿈은 할리우드에서 1천만달러짜리 <스팔타커스>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난 저예산영화가 불편하지 않지만, 자크 드미 같은 감독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누벨바그가 거대영화에 대해 저예산을 옹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나쁜 영화에 대해 좋은 영화를 옹호하는 것이다. 분명 저예산으로 만들어서 더 좋은 영화도 있지만, 더 많은 예산이 들어가야 더 훌륭한 영화도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 <비브르 사비>를 1억프랑에 만들라고 제안했으면 어땠을 것 같나. 거절했을 거다. 그게 영화 만드는 데 무슨 소용인가. 미국식 제작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이점이 있다. 하지만 제작비가 커지면 그 영화는 프로듀서의 영화가 돼버린다. 오직 프랑스에서만이 프로듀서들이 작가라는 개념을 인정했다. 최고의 이탈리아 프로듀서들도 감독을 고용인 정도로 여긴다. 그래도 미국과 이탈리아의 영화산업에 차이는 있다. 이탈리아 산업은 무가치한 반면 미국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정말, 전세계에서 최고였다. 미국인들은 단순함 속에 깊이를 불어넣을 줄 안다. 그들은 리얼하고 자연스럽다. 프랑스인들도 프랑스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이전에 프랑스를 보려고 애썼던 사람은 자크 베케르뿐이었다. 다른 감독들은 리얼리티를 찍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영화 따로, 인생 따로였다. 그들은 영화를 살지 않았다. 단 신 들 오즈 야스지로 60년생 마감 1963년 12월12일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자신의 60번째 생일날 저녁, 세상을 떠났다. 지난 4월 중순에 병원을 찾아 암 선고를 받은 그는 그로부터 일년을 넘기지 못했다. 투병 중에도 그는 동료들에게 9월에는 다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1927년 시대극 <참회의 칼>로 데뷔한 그는 <어느 가을날 오후>까지 모두 3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마를린 먼로 의문의 죽음 1962년 8월5일 마를린 먼로가 전화기를 손에 꼭 쥔 채 침실에서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수면제 과도 복용으로 추정된다. 유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5월2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에서 열렸던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파티가 먼로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자리였다. 국교모독죄 인정 - 파졸리니 4개월 집행유예 1963년 5월11일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에게 국교모독죄가 인정돼 4개월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파졸리니는 옴니버스영화 에서 국교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소됐다. (Ro는 로셀리니, Go는 고다르, Pa는 파졸리니, G는 그레고레티를 뜻한다)의 한 에피소드인 <백색 치즈>에서 파졸리니는 종교의 메시지와 이를 전하는 종교인들간의 모순을 그려내 교계의 반발을 샀다. 예수에 관한 영화를 찍는 촬영장이 <백색 치즈>의 배경. 촬영 도중 주인공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알고보니 그가 잔치에서 백색 치즈를 너무 많이 먹은 것이 사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파졸리니는 가톨릭을 저속화하는 종교인들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007시리즈 ‘스타트’ 1962년 제임스 본드 시리즈 첫 번째 영화 <007 살인번호>가 개봉했다. 1961년 영국의 제작자인 알버트 쿠비 브로콜리와 해리 샬츠만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와 계약을 맺어 앞으로 7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영화마다 액션, 이국적인 로케이션, 시각효과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었다. 이안 플레밍의 소설에 등장하는 영국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닥터 노>는 테렌스 영이 감독을, 숀 코너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남성 마초의 진화,<나는 달린다>

<나는 달린다>MBC 수·목 밤 9시55분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반도에 꽃미남 열풍이 불던 때가 있었다. 2001년 무렵이었다. 뽀얀 피부, 곱상한 생김새, 고분고분한 성격. 여자친구 말을 호환 마마보다 무서워할 것 같은 이미지의 꽃미남이 대중매체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꽃미남 열풍이 각종 잡지의 표지를 장식던 시절이 있었다. 꽃미남은 여성 상위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마초들의 시대가 거한 듯했다. 그러나 꽃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텔레비전에는 남자들의 땀냄새가 물씬하다. MBC <나는 달린다>의 무철(김강우)의 직업은 용접공이다. 그러나 무철은 단순무식한 공돌이가 아니다. 일단 그는 ‘외로워도 슬퍼도’ 달린다. 용접봉을 들고 불꽃을 튀기며 일하는 모습에서도 땀냄새가 물씬하다. 게다가 그의 방은 손때 묻은 책들로 빼곡하다. 지식인 남성의 좀스러움과 노동계급 남성의 우악스러움에 지친 먹물 여성들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조건이다. 노동계급의 근육질에 중산층의 지성을 갖췄다니 웬만해서는 거부하기 힘들다. <나는 달린다>를 보면 무철의 매력에 빠져 나도 달리고 싶어진다. 무철은 또 책임지는 가부장이자 묵묵한 남자친구이며 속깊은 아들, 손자다. 고아인 무철은 동생에게 유사 가부장이다. 무철이 청계천 헌 책방을 처음으로 찾게 된 것도 동생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전과자 동생이 끊임없이 사고를 쳐도 언제나 형은 동생을 믿고 보듬는다. 어떤 경우에도 화내지 않는 ‘책임지는’ 가부장 이미지다. 사진기자인 여자친구 희야(채정안)에게는 그저 말없이 지켜봐주는 묵묵한 남자친구다. 오는 사람 막지도, 가는 사람 잡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동네 구멍가게 할머니에게는 다정다감한 손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다 망해가는 공장 사장님과는 의리를 버리지 않는, 끝까지 믿고 따르는 유사 부자관계를 맺는다. 이 드라마는 우리 시대 연애 판타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80년대의 속물적인 판타지 중 하나는 남자 대학생과 여공의 연애담이었다. 물론 욕망의 주체는 남성이었다. <나는 달린다>는 남녀의 신분을 뒤집는다. 대학을 갓 졸업한 여기자와 용접공의 연애담이 이야기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남성의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의 것에 가깝다. 평범한 듯 비범한 김강우의 외모는 무철의 캐릭터에 썩 잘 어울린다. 짙은 눈썹과 파릇한 구레나룻에서는 강인함이, 유난히 붉은 입술과 깊은 눈빛에서는 유약함이 드러난다. 적당히 저음의 목소리는 화룡점정이다. 그래서 드라마의 시청률은 바닥을 치지만, 연기자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김강우는 가장 데이트 하고 싶은 연예인 1위로 꼽히기도 하고, 그의 팬카페 회원 수는 1만명을 훌쩍 넘겼다. 이 드라마의 흥행 실패에도 불구하고 용접공을 주인공으로 한 또 다른 드라마까지 등장한다니 당분간 드라마에서 ‘땀냄새’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2002년 여름, 대∼한민국과 함께 김남일 열풍이 반도 남단을 강타했다. 근육질의 남성이 꽃미남을 꺾은 것도 이즈음이다. 축구선수 김남일은 물론 근육질이다. 김남일은 또 경기 도중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면서도 “경기 끝나고 나 빼고 나이트 가면 안 돼”를 외치는 귀여운 마초의 이미지를 가졌다. 자기팀 동료에게 부상을 입힌 선수에게 과격한 태클로 복수를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 귀여운 마초에게 한국 여성들은 “남일아 불 꺼라”라는 화끈한 농담으로 응답했다. 이 무렵 ‘근육’으로 승부하는 가수들도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의 꽃미남들이 너도나도 근육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신화가 근육을 키우고 나와 인기를 끈 것도 이즈음이다. 심지어 ‘평범함’으로 승부하는 국민가수 god조차 근육질로 무장하고 나왔다. 플라이투더 스카이, 비 등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적당한 근육은 가수에게도 기본이 됐다. 근육질의 꽃미남의 등장에는 좀더 솔직해진 여성의 욕망이 투사돼 있다. 데뷔 초기에 몸매로 승부하는 배우들이 잇따라 나오기 시작했다. 권상우가 그 대표선수다. 권상우의 벗은 웃통이 없었다면, 권상우의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 권상우뿐 아니라 이제 웬만한 배우들에게 단단한 몸매는 연기의 한 조건이 됐다. 땀냄새는 브라운관 안팎에서 풍긴다. 취향의 마초이제이션은 ‘추리닝 패션’의 유행으로 드러났다. 추리닝 패션이 뜨면서 아디다스가 떴고, 푸마가 인기를 끌었다. 아디다스와 푸마의 이미지는 나이키에 비해 훨씬 더 독한 땀냄새를 풍긴다. 거리를 뒤덮은 검은색 푸마 티셔츠와 빨간색 런닝화는 21세 초반 한국사회의 중요한 코드가 됐다. 이렇게 후끈한 땀냄새 속에 한국사회의 마초이제이션은 조금씩조금씩 진행되고 있다.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2003 대만영화 국제 심포지엄 - 차이밍량이여, 울음을 그쳐라

1. 허우샤오시엔의 리듬을 느끼다 몇년 전 처음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 대만국립대학의 캠퍼스를 혼자 걷게 되었다. 밤이었다. 그러나 낮의 뜨거운 지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잠깐 바람이 불었고 하늘을 쳐다보자 엄청난 키의 종려나무들이 보였다. 옆으로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나는 그들보다 느리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어떤 기시감, 데자뷰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건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리듬이었다. <호남호녀>가 아마도 가장 가까울 것이다. 나는 꿈결 같은 그러나 슬픈 그 리듬감을 몸에 새기고 한국에 돌아왔던 것 같다. 지난 몇년을 돌아보면 내가 은밀히 가장 많이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대만영화였다.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만이 아니다.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장초지 감독의 <흑암지광>을 보고는 지나치게 흥분해 남아 있는 다른 영화들을 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사실 비평이나 이론을 하게 되면 머리가 분석적으로 그리고 가학적으로 회전하게 된다. 황홀경 상태에서 영화를 보는 지고지순한 쾌락을 뒤로 하고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또 그래야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끔 ‘사무치게’ 좋아하는 차이밍량의 영화에 대해서는 <애정만세>에 대한 짧은 평을 제외하곤 긴 논문을 쓴 적이 없다. 하지만 아뿔싸!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 왔으니 바로 이번 학술회의가 그러했다. 대만영화에 대한 국제 심포지엄을 하는데 참석하겠냐는 대만 영화학자 로버트 첸의 연락을 받고 한편으로는 예의 황홀경을 지켜야하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다른 쪽에선 대만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라는 강렬한 바람이 생겨났다. 이럴 때는 욕망이 이기는 법! 더구나 차이밍량이 참석할 것이고, 허우샤오시엔이 경영하는 서점 겸 시네마테크에서 만찬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두말않고 가겠노라고 답장을 했다. 2. 폐허의 미학: 조리개와 스크린으로서의 대만 11월28일부터 11월30일까지 대만국립대학에서 열린 학술회의는 그야말로 당신이 대만영화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두세 가지 것들을 넘어 거의 전부를 알려주려는 기획의도를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대만의 루페이, 린웬치, 펭핀치아 등의 영화학자 등과 더들리 앤드루, 지나 마르체티, 크리스 베리, 데이비드 보드웰 같은 외국 학자들이 참석해 대만의 뉴웨이브와 그 이전의 역사, 하위 장르, 대만 영화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장초지와 대만의 흥행작 <더블비전> 그리고 리안의 <헐크>에 이르는 영화들을 분석하고 토론했다. 첫날 기조 연설은 더들리 앤드루 교수로부터 시작했다. 한국에도 번역된 <영화이론의 주요 개념들>(1984)의 저자인 그는 1981년 폴 앤드루와 공저한 <미조구치 겐지>라는 개론서로 일찌감치 아시아영화에 대한 관심을 보인 적이 있다. 이번 발표문은 ‘조리개로서의 대만, 스크린으로서의 대만’이라는 제목이다. 그는 홍콩의 “실종의 미학”에 대비, 대만을 ‘폐허의 미학’이라 부르면서 허우샤오시엔의 역사를 향한 조리개가 불안을 반영하는 스크린으로 나간다면 에드워드 양의 와이드스크린은 그 표면을 관통해 인터내셔널 근대성을 일별하게 한다고 진단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연연풍진>의 터널장면을 대만과 그 영화에 대한 진입로로 그리고 조리개로 볼 수 있지만, 막상 그 기차는 이미지를 기다리는 스크린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조리개가 스크린이 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은 하나의 매개체로서 스크린을 가볍게 두드린 다음, 착시적 현실, 그 고통스러운 역사를 다시 경청하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플라톤의 동굴과는 정반대되는 영화를 생성시킨다. 더들리 앤드루의 기조 연설에 이어 차이밍량,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 대한 분석들이 이어졌다. 대만 차오퉁대학 림 키엔 켓 교수는 ‘누아르로서의 국가’라는 발표문에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살인사건>(A Brighter Summer Day)을 누아르 장르로 읽으면서, 이 잃어버린 시간의 누아르가 냉전시대, 대만 우파의 독재정권 시기에 설정되어 있음을 환기시킨다. 소년 범죄자들이 자신의 조직원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독재정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필름누아르와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마지막엔 국가가 개입해 살인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대만 누아르는 단순히 외로운 거리들, 쓸쓸한 탐정, 팜므파탈의 장르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를 다루는 장르가 된다. 3. 첫째 날 저녁: 차이밍량의 울음 차이밍량의 영화를 다룬 패널(내가 발표한, ‘영화의 (아시아) 집: 시간, 외상 그리고 초/국가’ 그리고 왕잉오의 ‘욕망의 (탈) 지도화’, 그리고 수젠이의 ‘세계화의 도시에서의 유령주체’로 구성)에는 차이밍량이 직접 참석해 발표를 경청하고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하류>를 만든 뒤 대만 내의 비판을 견디다 못해 고향인 말레이시아로 가 있던 당시 잡지 <키노> 지면을 위해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그 어려운 때도 차이밍량은 예의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얼굴과 맨발로 자신의 다음 프로젝트를 이야기했었다. 어떤 이는 차이밍량을 만나면 그 작은 키의 사람으로부터, 태산을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생생한 활기로 빛나는 다정다감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그는 학술회의장 밖에 이강생의 새 영화 <불견>(The Missing)과 새로 만든 <부산>의 입장권을 준비해놓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다. 이어서 대만영화 관객에 대한 그의 불평은 10여분 정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학생회관에서 차이밍량과의 대화의 시간이 있었는데 빨간색 옷을 입은 이강생이 동반했다. 차이밍량은 <안녕! 용문객잔>이 비평적으로는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배급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거기에다 이강생의 <불견>, 또 자신의 신작 <부산> 등의 제작으로 두 사람 모두 집을 은행에 담보설정해놓은 상태라고 했다. 대만 관객이 완전히 할리우드에 침식되어 자신의 영화를 외면하고 있다면서 중국이나 한국에 가서 영화를 찍을까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제영화제의 정치도 비판했는데 어떻게 공리와 같은 배우가 심사위원을 맡을 수 있는가를 개탄하면서, 공리가 말하길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 수상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앞으로도 불쌍한 공리는 차이밍량 영화에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 <하류>의 강에 떠오르는 시체 역할이면 모를까). 그래서 국제영화제를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 매우 피곤하며, 생활이 곤란하다고, 급기야는 눈물을 흘렸다. 이강생도 짧게 몇 마디를 했는데 자신의 첫 번째 영화 <불견>이 부산영화제에서 상을 받았고 그것이 상당한 위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잠깐 <불견>과 <안녕! 용문객잔>의 장면들을 보았다. 차이밍량은 이제 극장표를 팔 시간이라면서 만원 정도의 가격이라고 했다. 그리고 영화감독으로서는 정말 할 수 없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보지 못하더라도 표를 사달라는 것이다. 물론 나는 표를 샀지만 차이밍량이 느끼는 위기감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는 현재 중요한 잡지나 신문에 세계에서 중요한 20명 혹은 40명의 감독 중 한 사람에 꼽히고 있고, 그에게 헌정된 웹사이트들도 자발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저토록 긴급한 호소를 하고 있고, 개별적으로 극장표까지 팔고 있으니 그 안과 밖의 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또 그런 차이밍량의 모습이 대만의 평론가들이나 다른 독립 영화작가들에게 그리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 평론가가 차이밍량에게 이제 제발 그만 하라고 말했다고 해서 내가 그럴 것이 아니라 제작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힐난하자, 다른 감독들보다 차이밍량의 상황은 훨씬 좋다고 설명했다. 4. 둘째 날: 여성 복수극과 갱스터영화 이튿날 세명의 여성학자로 이루어진 패널에서는 대만 뉴웨이브가 등장하기 이전의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의 영화를 다루었는데, 펭 핀치아는 1970년대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영화(타란티노가 이 장르의 여성영웅 팜 그리어를 기용 <재키 브라운>을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 존스> 등과 대만의 여성복수극 영화 사이의 비교연구를 시도하려 했으나 바로 그 복수극 영화들이 대만 필름아카이브에 한편도 보관돼 있지 않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양 유안 링은 ‘대만의 지하세계를 다룬 영화에 대한 분석: <상해의 사회 파일에 관해> <분노> <사랑하면 죽여라>’라는 발표문에서 한때 ‘범죄영화’로 불렸던 영화들이 대만 영화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 이 영화들이 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 대만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와 세계 지정학의 변화와 관계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즉 1975년에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고 장제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줄고 오일 파동이 있었으며 독재에 대항하는 시위가 일어나면서 사회적 불안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여성복수극 영화에 이어 만들어진 범죄영화는 당시의 이러한 공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같은 패널의 랴오 잉 치의 논문 ‘계엄령 이후 시대의 정체성과 새로운 대만 갱스터영화’는 위의 관심에 이어 허우샤오시엔과 장조치의 영화들이 그 이전 대만의 갱스터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즉 1983년 대만의 뉴웨이브가 등장하기 이전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가 대만 영화시장을 장악했다. 그러면서 117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고 섹스와 폭력, 갱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 <남국재견>에도 갱들이 등장한다. 장초지의 <흑암지광>도 대만 원주민들과 본토인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위의 발표문들은 이제까지 대만의 뉴웨이브를 작가적, 예술영화의 관점에서 균질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그 이전의 대중문화와 하위 장르 영화들과 만나게 하는 생산적인 연구 태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5. 셋째 날: 허우샤오시엔의 서점에 놀러가다! 마지막 날, 데이비드 보드웰의 허우샤오시엔의 텔레포토 미학에 대한 기조 강연에 이어 장초지의 영화를 대만의 뉴웨이브와 다른 ‘또 하나의 영화’로 설정하는 루 페이의 시도, ‘장초지 영화의 홀린 시간’이라는 크리스 베리의 발표가 이어졌다. 지나 마르체티는 리안의 <헐크>가 미국 내 이라크 사막에서 벌어지는 공포를 건드리고 있다고 보고, 비평적, 흥행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옹호되어야 할 영화라고 주장했다. 이어 로버트 첸의 <더블비전>의 스페셜 이펙트 효과와 영화의 디지털화에 대한 주목, 그리고 해적복제를 대만영화의 새로운 대안적 배급 경로로 보자는 카피레프트, 왕슈젠의 용감무쌍한 발표를 끝으로 3일간의 학술회의는 끝이 났다. 전반적으로 대만의 영화연구자들은 한해에 장편영화가 7편밖에 제작되지 않는 상황에 깊은 절망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한국의 영화정책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독일 뉴저만 시네마의 운명처럼 대만의 뉴웨이브가 한줌의 학자들과 미래를 위한 영감을 남겨놓고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장초지처럼 국제영화제에서 새롭게 주목받는 작가들과 <더블비전>과 같은 흥행작으로 명맥을 잇다가 새로운 도약을 할 것인가는 여전히 미지수다. 드디어, 학술회의가 끝난 저녁 허우샤오시엔이 기획했다는 성품문고로 향했다. 옛 미국대사관 자리에 들어선 이 새로운 타이베이의 명물은 그야말로 영화광들의 천국이었다. 특히 오주의 <만추>가 상영되는 와중에 홍콩, 대만, 일본의 DVD들을 마음껏 고를 수 있었고 영화책들도 상당했다. 우리는 서로 부딪치면서 열심히 희귀 DVD를 찾아냈다. 이층에는 카페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 대만국립영화학교 학생들이 만든 영화를 함께 감상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작품으로 판단하건대 대만 학자들의 우려는 기우로 보였다. 다만 할리우드에 경도된 관객을 대만의 포스트 뉴웨이브의 영화로 어떻게 다시 유혹해낼 것인가, 는 여전히 문제로 보인다. 여하간 차이밍량 감독이 울음을 그치고 이런 새로운 젊은 감독들과 더불어 대만영화에 또 한번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랄 뿐이다.

워킹 타이틀 대표작가 리처드 커티스 [1]

<러브 액츄얼리>로 감독 데뷔한 워킹 타이틀 대표작가 리처드 커티스 세상에는 두 사람의 리처드 커티스가 있다. 한명은 <블랙애더> <미스터 빈> <디블리의 교구 목사>를 쓴 시트콤 전문작가이고 다른 한명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의 각본을 쓴 로맨틱코미디 작가이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어색하고 이상하다. 한 작가가 텔레비전과 영화 모두를 넘나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명의 작가가 쓴 각본들이 장르와 매체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면 그건 신기하고 불편하다. 무자비한 블랙유머의 대명사 시트콤 작가 리처드 커티스는 냉정하고 무자비하며 영국적인 블랙유머에 강하다. 그의 대표적인 걸작 <블랙애더>를 보자. 그와 로완 앳킨슨, 벤 엘튼은 블랙애더라는 성을 가진 일련의 주인공들을 난처한 곤경 속에 밀어넣으며 (가상의) 리처드 4세 시절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영국 역사를 멋대로 두들겨부수고 모욕하고 겁탈했다. 그들은 이 우상 파괴적인 걸작 시리즈를 통해 인간들의 우매함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어떻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그 어리석음의 총합이 원래의 어마어마한 양을 유지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주인공 전원의 전사로 끝나는 장엄한 <블랙애더4>의 결말을 쓸 때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냉혈한들이었다. 아무리 냉정한 작가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창조물들에게는 약간의 관대함이라도 보이는 법인데, 이들에겐 그런 관대함도 없었다. 교활한 궁중 집사였던 <블랙애더3>의 주인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블랙애더들은 작가들로부터 어떤 자선도 구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블랙애더>의 콤비인 앳킨슨, 엘튼과 뭉쳤던 <미스터 빈>에서도 커티스는 여전히 냉정했다. 물론 영국 역사에 대한 지적인 야유였던 <블랙애더>와는 달리 <미스터 빈>은 거의 대사가 없는 슬랩스틱이었고 로완 앳킨슨이라는 걸출한 코미디 스타의 개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본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상적인 채플린과는 달리 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면도날처럼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어린아이와도 같이 순진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로 세상을 사는 미스터 빈은 영국 중산 계층의 예절바르고 안전한 세계를 뒤흔드는 무정부주의적인 폭풍과도 같았다. 여기엔 로맨스도 미화도 없었으며, 그건 주인공 미스터 빈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주인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말랑하고 달콤한 로맨스의 길로 그런 그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사실은 <톨 가이>가 먼저지만 지금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리고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 그냥 보통 영화인가? 너무나도 달짝지근하고 안전해서 최근 앙케트 때엔 가장 유치한(cheesy) 영화 리스트에까지 올랐던 영화이다. 갑자기 그가 사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는 그런 남자였던 걸까?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과 같은 해에 나온 그의 마지막 시트콤인 <디블리의 교구 목사>에서부터 변화의 흔적을 찾아도 될까? 던 프렌치가 연기한 뚱뚱하고 리버럴한 여자 교구 목사가 보수적인 마을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는 이 시트콤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상당히 따뜻했다. 여전히 이야기와 주제는 우상파괴적이었지만 커티스는 그가 만든 캐릭터들은 존중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디블리의 교구 목사>의 이런 성격은 시골 마을의 괴짜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반적인 영국 시트콤의 성격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지만 이 역시 커티스의 최근 개성이 굳어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여전히 그의 영화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감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은 원래부터 커티스의 내부에 내재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디블리의 교구 목사>는 그가 거의 처음으로 전권을 휘두른 작품이었다. 로완 앳킨슨이라는 인물의 개성과 공동작가 존 엘튼의 도움 속에 어느 정도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블랙애더>나 <미스터 빈> 시리즈와는 달리 <디블리의 교구 목사>는 커티스 자신의 개성이 좀더 자유롭게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을 통해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그의 좀더 온화하고 솔직한 면이 터져나왔다고 추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이 두편의 작품이 나왔던 94년에 그는 벌써 30대 후반이었다. 슬슬 젊은 날의 냉소를 접고 부드러워질 때가 된 것이다.

하면 된다는 고집만 버리자, <부두 빈스>

장르: 어드벤처 배급사: 마이크로소프트 플랫폼: Xbox 언어: 영어 음성/영어자막 “내 이름은 빈스. 깨어보니, 집안이 엉망이더군. 무슨 일이지? 그때 샤메인 마님의 텔레파시가 느껴졌어. 코스모에게 납치를 당하셨대. 세계 평화가 달렸다는 말씀에 용기백배, 놈들의 소굴로 출발! 첫 번째 보스 몬스터 ‘죽음의 돼지 저금통’을 해치우는 건 식은 죽 먹기였는데 방금 마주친 ‘휘발유 펌프’는 쉽지 않네. 녀석이 던진 쇳덩이에 맞아 죽고 살아나기를 여러 차례. 싸움으로 맞설 상대가 아니란 결론을 내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푯말 하나. ‘화기 접근 금지’, 그래, 이거야!” <부두 빈스>는 흥겨운 재즈 선율 속에 작은 인형의 모험을 따라가는 어드벤처 게임이다. 이 세계에서는 ‘부두’란 단어가 연상시키는 음습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보다도 귀여운 몬스터와 웃음을 자아내는 빈스의 엽기발랄한 자해 공격이 있을 뿐이다(빈스는 ‘부두 인형’이다!). <부두 빈스>의 중요한 관문은 대부분 매운 주먹이 아닌 반짝이는 재치로 지나야 한다. 그렇다고 혹시나 이 게임 때문에 자신의 지능지수를 의심하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힌트는 늘 가까운 곳에 있을 테니. ‘하면 된다’는 고집만 버리자. 생각을 유연히 하고 고개를 드는 순간,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눈에 쏙 들어올 것이다. 무난한 난이도, 게이머를 지치게 하지 않는 길이의 <부두 빈스>는 어드벤처 장르에 입문하려는 이에게 딱 어울리는 게임이라 하겠다. 그런데, 대화에서 이야기 진행의 단서를 찾아내는 어드벤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부두 빈스>가 영어 버전 그대로 출시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특정 게임이 5년 넘게 판매 차트 1위를 지키는 기형적 시장에서, 비인기 장르인 어드벤처에 한글화까지 더하면 수지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 배급사의 판단이었겠지만. 심형래씨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팔리지 않으니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까, 신경을 쓰지 않으니 팔리지 않는 것일까? 노승환/ 게임마니아 bakerboy@hanafos.com

<출발!비디오…> 500회 이끈 홍은철 아나운서

지난 7일 문화방송 텔레비전 <출발! 비디오여행> 500회 특집방송에 출연한 영화배우 안성기는 프로그램 진행자인 홍은철 아나운서를 보고 “남의 자리 빼앗은 것같아 미안해”라고 말했다. 얼마전 문화방송 주최 ‘제2회 대한민국 영화상’의 사회를 맡아본 안성기는 “당연히 내자리”라고 생각했다 영화제 사회자 자리를 놓친 그의 서운한 마음을 읽은 것이다. 부천영화제도 5회나 진행했고, 대종상의 사회도 맡아봤는데 정작 내집 행사에서는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배제돼 절망감을 느꼈다”는 그는 이번 일로 85년 입사해 18년이나 다닌 회사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얼핏 직장인으로서는 ‘튀는 발언’처럼 들리지만 그의 말뜻을 뜯어보면 영화와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같은 게 고스란히 묻어난다. 1993년 10월29일 <비디오산책> 이름으로 첫회가 나간 이후 지난 7일 500회를 맞은 <출발! 비디오여행>의 진행자로 한주도 거르지 않고 꼬박 10년간 자리를 지켜온 그를 일러 박찬욱 영화감독은 “영화인의 친구”라고 칭한다. 주성우 책임 피디는 “아나운서보다 영화인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영화사 주최 시사회는 놓치지 않고 가려고 한다. 한달에 새 영화는 10~15편 보는 것같다. 디브이디와 비디오를 합해 한달에 20~30편 정도 챙겨본다. 어머니와 형님·누나가 영화광이어서 4~5살 무렵부터 영화 속에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형성된 영화에 대한 감성이 내 몸에 녹아있는 것같다. 학창때 친구들이 모두 나를 영화와 관련해 기억하고, 직접 본 영화보다는 나한테 이야기 들은 영화가 많다고 한다. -엠시가 개봉작을 다 챙겨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대본을 쓰는 작가가, 영화를 보는 관점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원고의 최종 점검자가 될 수밖에 없다. 진행자는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다. 작가와 생각이 다를 경우 “이 멘트는 적당한 것같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해 제작진과 협의해 고치기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선에서 가능하다. 영화를 보지 않으면 (내가 소개하는 영화에 대해) 판단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이 보려 한다. -한 프로그램을 10년쯤 진행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법도 한데…. =남들이 요구하기 전에 내 스스로 변화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제작사(서울텔레콤-세종미디어)가 간판을 몇번 갈아달고 스스로 프로그램 내용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든 느낌을 가진 적은 있어도 매너리즘은 없었다. 내 자리는 누가 대체할 수 없다는 고집 같은 게 작용한 것같다. 자신에게 싫증을 잘 느끼는 성격이 아무래도 변신에 자연스럽게 도움이 된 것같다. 영화광 가족덕 코흘릴 적부터 영화와 친구, “대한민국영화상 사회 놓쳤을땐 정말 서운” -<출발! 비디오여행>이 한국영화에 끼친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나. =93년 출범때만 해도 제작진의 전문성이 떨어졌으나 3년뒤부턴가 영화과 출신 피디가 들어오고 영화잡지 기자들이 작가로 참여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마침 그때 영상세대가 본격적으로 움트면서 한국영화 붐이 시작됐다. <출발! 비디오여행>이 한국영화 붐에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출발! 비디오영화>를 통해 팬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만드는 사람들도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변혁의 시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출발! 비디오 여행>을 포함해 영화소개 프로그램은, 최근 같은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다 방송위로부터 간접광고라는 지적과 함께 징계를 받지 않았나.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정보전달과 홍보의 구분이 사실상 쉽지 않다. 또 지난 영화를 소개하면 당장 시청률이 크게 떨어지는 게 현실이다. 품위를 지키고 싶어도 경쟁에 내몰리는 현실이 때론 안타깝다. (<출발! 비디오여행> 제작진은 방송위 지적 이후 한 영화를 1회 이상 소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레옹 패션을 선보이는 등 패션감각이 남다르다. 패션도 전략인가. =굳이 튀려는 생각은 아니지만 내 몸에 걸치는 것에 싫고 좋은 게 뚜렷하다 보니 아무거나 선택을 하지 못한다. 또 단점이 많은 체형이라 보완하는 측면에서 패션감각을 발휘하는 편이다. 90년인가 91년인가 어떤 프로그램의 영화코너를 진행하면서 아나운서로서는 처음 넥타이를 안매고 스웨터만 입고 진행하다 (아나운서실) 실장님한테 불려가 혼난 적이 있다. -녹화할 때 카메라맨에게 “늙어 보이니까 바스트 샷을 잡지 말아달라”고 하고 기자들한테 나이를 밝히지 않는 것은 인기관리 때문인가 =영화 관객의 95%는 20대인데 선입관 때문에 나한테 거리를 느끼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나이 때문에 나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에는 황인뢰 감독의 <한뼘드라마>에 출연했는데…. =황인뢰 감독이 녹화장에 찾아와 내심 바라던 드라마 출연을 제의해와 선뜻 받아들였다. 박찬욱 감독은 언젠가 나한테 뱀파이어역을 해보자고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뱀파이어역이었다. 남과 다른 소수계층, 아웃사이더를 상징하는 역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영화사신문 제27호(1964∼1965)

영화사신문 제27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 · 발행 씨네21 · 편집인 김재희 1964 ~ 1965 '마카로니 웨스턴' 나가신다 개척정신은 없다, 단지 냉혹한 총잡이의 세계만 있을 뿐 세르지오 레오네 <황야의 무법자>/b> 세르지오 레오네,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엔니오 모리코네. 세 사람으로 충분했다. 60년대 들어 시작된 서부영화의 탈신화화는 이 세 사람의 협업으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장르를 탄생시켰다. 64년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65년 <속 황야의 무법자>(For a Few Dollars More)는 ‘마카로니 웨스턴’(macaroni western)이란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원조격인 미국 서부극을 압도할 정도의 인기를 얻었다. 동시에 기존의 미국 서부영화가 왜곡했던 미국 역사에 대한 비판적 텍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촬영한 광활한 풍광, 심도를 왜곡시키는 광각렌즈의 사용 등 레오네의 화려한 시각적 양식은 서부영화 장르의 관습을 완전한 의식(儀式)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다는 평을 얻고 있다. <황야의 무법자>는 한 사나이가 강력한 두 패거리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이익을 챙기고, 끝내 그들을 제거한다는 내용. 플롯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61년작 <요짐보>(Yojimbo)에서 따왔다. 찌푸린 인상에 담배를 씹어 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별다른 명분도 없이 그저 냉혹하고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새로운 총잡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잔혹하고 강렬한 서부극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낸 레오네 감독은 사실 밥 로버트슨이란 미국식 가명으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고, 다른 이탈리아 스탭 역시- 심지어 엔니오 모리코네는 댄 사비오라는 이름으로- 가명을 사용했다. 10만달러라는 저예산으로 야외촬영은 스페인에서, 실내신은 로마의 시네시타에서 찍었다. ‘무법자’ 시리즈, 다시 말해 ‘마카로니 웨스턴’의 출현을 얘기할 때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엔니오 모리코네는 애초 클래식의 대가를 꿈꾸었지만, 생활고에 시달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음악을 맡기 시작했는데, <황야의 무법자>로 뜨기 전에도 몇개의 가명을 쓰며 <일 페데달로> 등 영화작업에 참여해왔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웅장한 현악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영웅화하거나 갑작스러운 휘파람 소리로 그것을 조롱하기도 했다. 레오네는 모리코네를 자신의 ‘각본가’라고 부를 정도였는데, 그것은 감정을 표현해주는 그의 음악이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레오네 감독은 66년 개봉을 목표로 ‘무법자’ 시리즈의 완결판격인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The Ugly)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컬러는 ‘마음 상태로서의 풍경’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붉은 사막>으로 현대적 미감 창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자신의 첫 번째 천연색 영화 <붉은 사막>(The Red Desert, 1964)에서 상징적이고 표현주의적 색채를 사용, 현대영화의 새로운 미감(美感)을 창조했다. 이 영화는 신경증에 시달리는, 부유한 엔지니어의 아내 질리아나(모니카 비티)가 산업사회의 불모지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의 개인적인 혼돈, 그리고 자연과 산업사회가 복잡하게 충돌하는 과정을 안토니오니는 상징적 색채와 추상적 형식미를 통해 모던하게 드러냈다. 공장에서 뿜어져나오는 파도치는 거대한 노란색 연기, 항구의 회색 안개를 뚫고 계속해서 오가는 선박들, 그리고 공장 쓰레기에 불쾌한 빛을 던지는 산업염료들, 이 모든 것이 마을의 자연적 풍광을 침입해 들어가는 것들로 제시된다. 또한 깊은 붉은색과 녹색은 남편의 친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정신상태를 드러낸다. 반면 밝은 색조는 그녀가 공상의 나래를 펴 판타지로 진입할 때 쓰였다. 여주인공의 정신질환은 현대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소외와 고독에 대한 징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안토니오니가 산업 구조물에서 발견한 단아한 선들과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순도의 색채, 매혹적인 질감 등은 그를 가장 현대적인 감독 중 한 사람으로 자리잡게 했고, 1964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주었다. 영화계도 비틀스 열풍 일상 다룬 <하드 데이즈 나잇> 개봉, 리처드 레스터 자연스런 카메라와 신선한 영상으로 큰 반향 미국의 리처드 레스터 감독은 별다른 플롯없이 희대의 스타 비틀스의 일상을 그냥 쫓아다녔다. 그리고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같기도 한 독특한 영화 한편을 만들어냈다. 주연이야 당연히 비틀스의 멤버인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64년작 <하드 데이즈 나잇>(A Hard Day’s Night)이다. 영화는 비틀스 멤버들이 리버풀에서 ‘비틀마니아’(Beatlemania)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TV쇼 출연차 런던행 기차에 오르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런던에 도착한 비틀스 멤버들은 리허설 도중 무대를 빠져 나와 TV 연출진을 당황하게 한다.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캔 바이 미 러브>(Can’t Buy Me Love)를 배경음악으로 공터를 달리는 비틀스 멤버들은 영화팬들을 열광시켰다. 비틀스 멤버들의 무정부적인 성향을 반영이라도 하려고 했을까. 레스터 감독은 비틀스 멤버들을 그냥 내버려둔 채 영화를 찍었다. 때로는 헬기를 동원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파격적으로 의외인 장면에 비틀스의 음악을 배치하고, 과감한 점프 컷(jump cuts)과 플래시백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카메라 기법을 자유롭게 동원했다. 이 작품은 막 스타덤에 오른 비틀스의 하루를 따라가보자는 감독 리처드 레스터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레스터는 유명세를 얻었다. 영화 내엔 타이틀곡인 <하드 데이즈 나잇>을 비롯해 히트곡 13편이 들어 있다. 이 영화는 비틀스가 TV쇼인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 미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확보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개봉되었다. 중국 문화혁명 바람 마오쩌둥 “사회주의적 혁신” 성토 중국의 마오쩌둥 주석이 ‘문화’ 개념의 재정의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중국 영화계에도 한파가 몰아닥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 영화계의 쇄신 조짐은 마오의 아내인 장칭(江靑) 휘하에 있는 연극계에선 이미 기정 사실화된 것이다. 모든 고전적인 레퍼토리는 진보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마오 주석은 64년 2월 <인민일보>를 통해 “작가들, 극작가들, 영화감독들이 당의 노선을 따르고 있지 않다”며 강한 불만을 표명했다. 마오는 이어 “그들은 수정주의라는 미끄러운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라며 “온 나라가 재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지난해(1963) 12월에도 마오는 “많은 영역에서 사회주의적 혁신은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고, 과거의 것들이 아직도 군림하고 있다”고 성토한 바 있다. 매년 480여편의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 중국 영화계에 이데올로기 측면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올 것이란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줄리 앤드루스 ‘즐거운 비명’ <메리 포핀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사운드 오브 뮤직> 흥행 신기록 줄리 앤드루스는 연극무대에서 자신의 출세작인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1964)의 영화화 과정을 보며 크게 실망했다.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픽처스는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의 스타인 앤드루스를 버렸다. 대신 대중적 인기에서 앤드루스를 능가하는 오드리 헵번을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의 주연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앤드루스는 헵번을 포함, 쟁쟁한 여배우들을 물리치고 1965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것도 영화로는 데뷔작인 <메리 포핀스>(1964)의 주인공 자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출연작인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은 20년 넘게 깨지지 않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경신하며 영화사에 남을 명화로 기록됐다.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이 연출한 <메리 포핀스>에서 ‘신인’ 앤드루스는 탁월한 노래와 마술사 연기로 상상과 현실의 세계를 이어놓았다. <메리 포핀스>는 특히 영화사 최초로 실사(實寫)와 애니메이션의 합성을 시도하며 영화 기술사적으로도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제작사인 월트 디즈니는 이용 가능한 영화 기술을 총동원해 특수효과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박스오피스 신기록을 세운 <사운드 오브 뮤직>은 앤드루스의 전공 장르인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할리우드에서의 영화화에 앞서 50년대 말 이후 1400여회의 장기 공연 기록을 세웠다. 또 뮤지컬에 앞서 56년 <트라프 가족>이란 이름으로 이미 독일에서 한 차례 영화화되기도 한 폰 트라프 일가의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감독 로버트 와이즈는 이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뮤지컬영화의 대가로 인정받은 인물. <도레미 송> <에델바이스> 등 걸작 삽입곡은 뮤지컬에서 이름을 떨친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와 작사가 오스카 해머스타인의 합작이다. 뒤늦게 영화에 데뷔, 60년대 중반 영화계를 석권한 줄리 앤드루스는 영국 태생으로 12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5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역시 뮤지컬 배우였던 줄리 앤드루스의 부모들은 네 옥타브를 내지르는 그녀의 재능을 발견하고 일찌감치 줄리에게 노래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단 신 들 시나리오작가 유니버설과 판권 소급 계약 65년 12월 미국 시나리오작가협회(The Screen Writers Guild)는 1948∼60년에 만들어진 영화에 대해 효력이 소급되는 새로운 판권 계약을 유니버설픽처스와 맺었다. 이 계약으로 시나리오작가들은 그들이 쓴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당시 영화들이 텔레비전에 방송될 경우 유니버설픽처스가 얻는 수익의 1.5%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장 뤽 고다르 SF스릴러 도전 장 뤽 고다르는 신작 <알파빌>(Alphaville, 1965)에서 테크놀로지가 가져온 ‘소외’문제에 대한 우화를 만들기 위해 SF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를 시도했다. 시간적 배경은 미래의 어떤 시점. 비밀 요원인 레미 코숑(대중적인 스릴러 배우인 에디 콘스탄틴이 맡음)은 우주 밖 외계의 나라로부터 알파빌이라는 도시로 우주여행을 하는 중이다. 알파빌이라는 도시에서 그가 행해야 할 임무는 폰 브라운 박사를 파괴시키는 것. 폰 브라운 박사는 알파빌 시민들을 무감각하게 하고 생기없이 멍청하게 만들는 ‘알파 60’이라는 컴퓨터의 발명자이자 조정자이다. 코숑은 폰 브라운 박사와 알파 60을 파괴한 뒤 브라운 박사의 딸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알파빌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원래 <타잔 vs. IBM, 알파빌>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고다르가 가장 공을 들인 작품 중 하나. 내러티브와 등장인물의 대사에서 SF임을 느끼게 해주는데, 촬영기사 라울 쿠타르는 현대의 파리 시내를 그대로 찍어냄으로써 비인간화된 미래도시를 화면에 창조해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카트린 드뇌브 사이코 변신 인간 내부에 있는 사악한 본능과 악성(惡性)에 대한 탐구를 세밀하게 다루는 감독 로만 폴란스키는 1965년작 <혐오>(Repulsion)에서 우아한 카트린 드뇌브를 사이코로 등장시켰다.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차가운 금발 미녀(카트린 드뇌브)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성적인 공포로 인해 자신의 남자친구인 존 프레이저를 살해하기에 이르고, 또 호색한인 집주인 패트릭 와이마크를 면도칼로 난자해 죽인다. 관객은 포장도로에 난 균열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그녀의 강박증에서부터 그녀 안에 자꾸만 떠오르는 무시무시한 망상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눈을 통해 광기의 끝을 경험하게 된다. 이 영화의 숨막힐 듯 부패한 감각은 드뇌브의 핸드백에 쑤셔박혀 있는 태아(胎兒) 같은 피부를 한 토끼 이미지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영화, <아타나주아>

디지털 시대의 영화가 영도로의 귀환을 꿈꾸며 질주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어느 순간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영화 <아타나주아>는 픽션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신화를 재현하려 드는 대신 카메라 자체를 바로 그 신화적 시간으로 가져가 촬영할 것, 흡사 <마태복음>을 찍을 때의 파졸리니를 연상케 하는 이 무모한 기획이 결국 ‘기적’을 만든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눈덮인 설원을 질주하는 아타나주아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순수로의 회귀. 어처구니없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렇게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디지털영화 <아타나주아>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디지털 시대의 영화가 영도(零度)로의 귀환을 꿈꾸며 질주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어느 순간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영화다. 도대체 이제 와서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아타나주아>는 스펙터클한 디지털 이미지들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사막과도 같은 영토에 단순소박하기 그지없는 신화적 세계를 구축하고 운명, 사랑, 음모, 그리고 복수라고 하는 닳고 닳은 테마들을 끌어들인다. 그러니 우리는 100년이 넘는 영화사가 쌓아올린 모든 기억들을 뒤로 하고, 초기영화의 관객처럼 그저 저 이미지들이 주는 매력에 흠뻑 몸을 내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오래전, 한 에스키모 공동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우리는 악령의 힘을 빌려 족장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가 부족 내에 끌어들인 악의 힘은 대를 이어 전해지고 이는 종국에 부족의 균열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사우리의 라이벌이었던 툴리막은 사우리가 족장이 된 뒤 부족 내에서 천대받으며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툴리막의 두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부족 사람들의 기대와 부러움, 그리고 질투를 한몸에 받는 인물들이 된다. 바로 아마크주아(강한 자)와 아타나주아(빠른 자) 형제. 아타나주아는 족장의 아들이자 그들 형제를 시기하는 인물인 오키와의 결투에서 승리해 오키의 정혼녀 아투아를 차지하게 되고, 심지어 오키의 누이인 푸야마저도 아타나주아의 두 번째 아내가 된다. 그리고 오래전 부족에 흘러들어왔던 악의 힘은 서서히 다시 지상으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아타나주아>는 디지털로 촬영된 에스키모 버전의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세르게이 파라자노프, 1964) 혹은 <도마적>(티엔주앙주앙, 1986)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신인감독 자카리아스 쿠눅은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를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찍어냈다. 영화에 담긴 광활한 설원의 풍경이 아무런 특수효과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 장관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디지털카메라 고유의 질감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옛날 옛적’의 인물들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믿게끔 만드는 대신 모든 풍경과 인물을 지나칠 만큼 ‘동시대적’이고 ‘현재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니까 <아타나주아>는 로버트 플래어티의 <북극의 나누크>(1922)와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것이다. 플래어티의 영화가 사실상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픽션이라면 자카리아스 쿠눅의 <아타나주아>는 픽션처럼 보이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신화를 재현하려 드는 대신 카메라 자체를 바로 그 신화적 시간으로 가져가 촬영할 것, 흡사 <마태복음>(1964)을 찍을 때의 파졸리니를 연상케 하는 이 무모한 기획이 결국 ‘기적’을 만든다. <아타나주아>가 각종 영화제에 초청되고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받는 영화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에스키모에 의해 직접 제작된 최초의 에스키모어(語) 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가 외부자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엑조티즘과 인류학적 시선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감독은 흔히 서구 제국주의가 타자를 재현하는 기술로 간주되곤 하던 것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함으로써, 이 작품이 내부자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재현적 민속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아타나주아>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결코 인색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에스키모 고유의 생활방식과 관습, 그리고 규율과 의식(儀式)에 관한 풍성한 묘사는 누구에게나 흥미롭게 여겨질 법한 것들이다. 이 영화에서 매우 두드러진 몇 가지 것들, 즉 철저하게 기교를 배제한 촬영방식, 사실적인 것과 어색함 사이를 오가는 배우들- 대부분이 아마추어 연기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의 연기,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플롯 등은 쉽사리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타나주아>의 흡인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불현듯 우리는 그 아무런 장식도 없는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소박한 주술들마저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놀라게 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듯, 2001년 칸영화제는 감독 자카리아스 쿠눅에게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안겨주었다. :: 감독 자카리아스 쿠눅 감독이 누구라고? “수천년 동안 살아남았던 우리 에스키모들만의 문화는 지난 50년 동안 완전히 변형되어버렸다.” 디지털로 만든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여러 평자들로부터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얻어낸 <아타나주아>의 감독 자카리아스 쿠눅의 말이다. 그의 부모는 에스키모 원주민들이었으며 에스키모 공동체에서 태어난(1958) 그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몸에 익히며 자랄 수 있었다. 그는 9살에 캐나다 정부가 설립,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 거기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 교실에서는 원주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토요일마다 학교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입장료를 벌기 위해 작은 조각품을 만들어 내다 팔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조각품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포타팩(porta-pack) 비디오카메라와 26인치 텔레비전, 그리고 VCR을 구입했다. 이후 그는 지역방송에서 일하면서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스키모족 연장자들과의 인터뷰를 카메라에 담았다. 결국 그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삼아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되었고, 이는 1991년에 에스키모 출신으로 구성된 최초의 독립영화사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는 동료들과 함께 <누나부트: 우리의 땅>이라는 제목의 텔레비전용 시리즈물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1940년대 에스키모들의 삶에 관한 반 시간짜리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대를 가로질러 대대로 이어져내려온 이야기”이자 “(에스키모인들이) 자라나면서 들었던 베드타임 스토리”를 영화화한 <아타나주아>는 자카리아스 쿠눅이 어렵사리 재정지원을 따내 완성한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이 작품은 칸영화제에서 수상했을 뿐 아니라 에든버러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 등 숱한 영화제에 초청되어 좋은 평가를 얻어냈다.